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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0 00:05:34 조회 : 594         
나와의 결별 190719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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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0.138) 19-07-22 17:55 
광주강의20190719a 마가복음14장 10-21절(나와의 결별)-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4장 10절입니다.

 

10절,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1절,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가룟 유다 이 이야기는 14장 20절에 보면 “이르시되 열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절,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래 되어 있죠. 예수님께서는 계획적이었다는 겁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서 반드시 예수님을 팔아넘겨야 될 요소를 열두 제자 속에 그걸 포함을 시킨 겁니다. 그럼 열두 제자를 누가 뽑았는가? 예수님께서 뽑았죠. 그러면 열두 제자가 본인이 하고 싶어서, 신청해서 열두 제자가 된 게 아니죠. 예수님이 제자들을 뽑았잖아요. 뽑을 때에 가룟 유다도 뽑았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거는 뭘 뜻하느냐 하면은 예수님 자신이 열두 명을 이렇게 뽑았을 때에, 여기에 자신을 팔 사람도 뽑은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 자신에 의해서 예수님 본인이 본인을 넘어뜨리는 요소를 의도적으로 만들어서 자기 일에 거기다가 집어넣은 겁니다. 스스로 넘어지게 하는 요소, 그게 뭐냐 하면은 가룟 유다죠. 예수님 스스로 넘어지게 하는 요소,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니까, 이 예수님이 하는 이것이 예수님이 하는 개인이니까, 예수님은 무슨 개인이냐 하면은 표준적 개인이에요. 표준적 개인이 뭐냐 하면은 내가 나를 넘어뜨릴 요소를 내 안에 합류하고 있는 개인. 이게 표준적 개인입니다.

 

그러면 이 표준적 개인, 단일자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과 견주게 되는 겁니다. 대비해보는 거예요. 너 나처럼 될 수 있어? 너 나처럼 될 수 있어? 다 견주해보는 겁니다. 그럼 견주어볼 때에, 그럼 누구하고 가장 결정적으로 견주시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넘어지게 한 가장 근접한 인물이 예수님, 표준적 개인과 가장 차이가나는 개인이 되겠습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바로 가룟 유다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생각하는 표준적 개인과 가장 충돌되고 가장 반대가 될 수 있는 모델이 가룟 유다죠.

 

그래서 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이 하는 자기의 존재를 확립하기 위한 요소로 포함되어 있다면 결국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의 요소 중에서 둘로 갈라지죠. 가룟 유다에 의해서 팔려버린 예수님.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첫째는 가룟 유다에게 팔려버린 그런 예수님. 그런 인간. 개인상. 그 다음에 또 하나는 뭐겠습니까? 예수님을 밀쳐버리고 배타시하는 그런 개인상. 인물상. 이 대표자가 누굽니까? 가룟 유다죠. 가룟 유다. 이 세상이 결국 이 두 종류의 개인으로 구별 된다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을 다 모아놓고 어떤 인간과 어떤 인간이 구분이 되는가, 바로 1번 쪽의 인간상과 2번 쪽의 인간상이 구별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성도가 죽으면 어디에 간다고 했습니까? 천국에 가죠. 천국은 누구의 나라냐 하면은 가룟 유다에게 팔려버린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은 내 안에 나를 넘어뜨릴 요소가 있음을 인증하는 사람의 나라. 그 나라가 바로 천국 가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 밀치는 사람들은 어디에 가겠습니까?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한, 지옥에 가죠. 지옥에 가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강의는 이 가룟 유다가, 2번이죠. 예수님을 이렇게 팔아넘겨야 될 그 심정, 그들의 삶의 정황, 실존, 이런 것에 대해서 우리가 충분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가룟 유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또 어떤 마음가짐인지를 충분히 알아야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이것이 과연 진짜로 예수를 믿는 것인지, 아니면 가짜로 예수를 믿는 것인지 판정이 날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심점을 제가 이렇게 한번 생각해봤어요. 이렇게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힘든지 니들이 알기는 알아?” 절대적인 자아상이 거침없이 폭로되는 순간입니다. “내가 얼마나 힘든지 니들이 뭘 알아?” 자식이 부모한테 하는 이야기일 수가 있어요. 애 셋이 부모한테. 멀리 떨어진 부모한테 하는 이야기일 수가 있고. 남편이 아내한테 하는 이야기일 수가 있고. 교인이 목사한테 하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너희들이 내가 얼마나 힘든지 니들이 알기는 알아?”라고 하는 순간, 여기서 너와 나가 완전히 결별, 끊어지게 하는 요소죠.

 

그런데 아까 1번은 뭡니까? 예수님이 자기를 넘어뜨리는 요소에 자기가 포함이 되어 있죠. 그러면 “내가 얼마나 힘든지 니들이 알기는 알아?” 이게 가룟 유다의 심정인데요. 심정인데, 사는 게 괴롭다 이 말 아닙니까? 괴로우니까 자살했죠. 그런데 예수님은 뭘 보여주느냐 하면은 내가 나와 결별하셨다. 내가 나와 결별을 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에요. 우리가 2번에 속하는데, 우리는 항상 힘들고 어려울 때는, ‘에구 자식들이 전화 한 통화 없고. 결혼은 해놓고.’ 이런 식으로 불평들을 할 수가 있죠. ‘자기만 알고 내 심정은 안 알아주고.’

 

흔히 부부들 가운데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내가 얼마나 힘든지 에휴 몰라, 몰라.’ 이렇게 하잖아요. 그 말은 뭐냐 하면은 가룟 유다의 고백과 한통속이다. 그래보면 돼요. 가룟 유다. 왜냐 하면은 나와 나를 결별을 할 줄 몰라요. 나와 헤어지지를 않는 겁니다. 빠이빠이를 안 하는 겁니다. 그럼 헤어지지 않는다면 내가 나를 꼭 껴안고 안 놓치지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 기울이는 겁니다. 나다움에 대해서. 나의 나다움에 대해서 그걸 사수하고 지키기 위해서, 조금도 흠집 내지 않기 위해서 모든 힘든 노력을 다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이 세상은 나 중심이 되고 남들, 나 바깥에 있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너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얼마 전에 대구강의 할 때 도표 하나 그렸죠. 예수님 중심에서는 YOU라는 것이 없다고. 예수님 중심은 너희들이지, 집단을 말하지, 개인적으로 너라는 것은 해당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볼 때에 너가 아니고 너희들이 돼요. 그리고 주님께서 성도를 볼 때에 너가 아니라 우리, 예수님 포함해서 우리가 되는 겁니다. 이미 천국이 시작이 된 거예요. 예수님 더불어서 우리가 될 때에는 이미 천국은 벌써 현장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반대가 되어가지고 나 중심이 되니까, 나 빼놓고 모두가 뭐냐 하면은 너 또는 너희들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나와 너는, 어려운 말인데, 비대칭적이다. 비대칭적이다 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비대칭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안 같다. 여분의 것이 따로이, 너 없는 것 나 있어, 라고 우기고 싶은 겁니다. 나만의 특별한 가치를 이렇게 따로 챙겨놓기 위해서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똑같이 학교 다녀도 너와 나는 다르다는 것으로, 애써 그쪽으로 가고 싶은 거예요.

 

비대칭적이라는 말은 똑같지 않다는 뜻이에요. 비대칭적이다. 같으면 대칭적이겠죠. 똑같지 않다. 자 그러면 이 말의 취지를 알기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백설 공주 주변에 난장이들이 몇 명이 있었어요? 일곱 명이죠. 일곱 난장이잖아요. 백설 공주 입장에서는 일곱 난장이가 다 다르겠어요? 그 인간이 그 인간이겠어요? 그 인간이 그 인간이죠. 왜냐하면 백설 공주 외에 일곱 난장이는 백설 공주를 봉사하는 쪽이기 때문에 그들과 그들 사이의 관계에 끼어들 이유가 없어요.

 

이게 바로 예수님의 철칙입니다. “형이 내 유산을 가져갔습니다.”라고 누가복음 12장에 나오죠. “형이 내 유산을 가져갔습니다. 해결해주세요.”라고 할 때에, “너와 너희들 사이에 내가 끼어들 의사는 없다. 형이 유산을 가져가든 말든 사람의 소유는 넉넉함에 있지 않다.” 이런 말씀을 하셨잖아요. 그 말은 뭐냐 하면은 인간은 벌써 나 중심이 되다보면 나하고 남하고 비대칭적으로 나는 독보적인 존재로 그렇게 이해를 하는데, 이 관계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그걸 인정할 의사는 전혀 없는 거예요. 오직 예수님 외에 너희들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있어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이니까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5절에 보면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하고 제자들이 눈을 떠서 보니까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죠.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은 이유가 뭐냐 하면은 예수님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팔아먹은 겁니다. 예수님이 그렇고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리 봐도 저리 봐도 하나님의 아들 구석이 하나도 안 보이는 거예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은 평범한 보통 인간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얼마든지 팔아먹을 수 있는 겁니다. 얼마든지.

 

그래서 성경에서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 팔고, 뭐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우리가 가룟 유다를 이해해야 될 이유가 뭐냐 하면은 가룟 유다는 하등의 우리와 이상한 점이 없다는 거예요. 똑같은 오늘날 인간들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영광된 모습으로 올 때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독특하게 우리보다 우월한 존재로 보지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다 컷시키고 달랑 누구만 남았어요? 예수 외에는 아무도 안 보이죠. 안 보이는데 하나님께서 무리하게 뭘 요구합니까? 제자들에게 너희는 예수의 말만 들으라고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인간들은 뭘 강요받느냐 하면은 보통 여느 인간과 동일한데, 보통 인간에 불과한 예수님에 대해서, 그 분이 뭐라고 내 모든 의사와 뜻을 졸지에 다 찢어버리고 밟아버리고 예수님 그 분의 말만 들어야 될 어떤 이유와 근거와 건더기가 나한테는 생겨나질 않는다는 겁니다. 이거는 다른 말로 해서 내가 목숨을 바칠 대상으로서 예수로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에게. 왜? 너무 평범해도 너무 평범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뭘 하시느냐 하면은 예수님을 이 땅에서 극히 평범하게 만들어버려요. 변화산 말고. 산에서 내려와서. 예수님을 평범하게 만들고 그리고 예수님 주변에 아무도 없게 만듭니다. 예수님 홀로 있다고 하니까. 해놓고 하는 말이 뭐냐, 니가 목숨을 다 걸뿐이다. 됐나? 한번 해볼래? 이래 나오는 거예요. 한번 해볼래? 이래 나오는 거예요. 지금 사람들의 고민이 뭐냐 하면은 자기의 목숨을 걸 투자처가 없는 거예요.

 

요새 주식이 내려가는데 목돈으로 투자할 마땅한 주식회사가 없어요. 삼성재벌, 삼성그룹 했는데 그것도 뭐 일본 때문에 좀 시끄럽죠. 나에게 가장 귀한 것은 내 목숨인데, 이 목숨을 내가 쥐고 있으려면 내가 감당이 안 되니까, 내가 불안 불안하니까, 차라리 내 목숨을 누구한테 바치고 나는 그 앞에서 없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고 싶은데 그럴듯한 대상자가 없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 목숨을 바치고 자기는 편하고 싶은 생각은 인간의 그 유아기적인 의식이 아직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린애들은 자기가 홀로 살겠다는 의식이 없고 대신에 엄마아빠가 다 해주고 자기는 그냥 엄마아빠 덕으로 그냥 놀기만 하면서 살았던 그때 그 시절이 그렇게 편해 보이고 그리워요.

 

그래서 나이가 많으면 다시 어린애로 돌아간다고 했잖아요. 어르신네 어떻습니까? 남들은 고생을 하든 말든 자기 몸 하나 편하면 최고죠. 그렇잖아요? 생각이 일단 자기 몸이 여유가 있고 편할 때는 남 생각해주는 것처럼 돼요. 근데 자기 몸이 힘들고 어려울 때는 남까지 생각할 그런 여력이 없어요. 인간은. 피곤해서 수련회 못 오겠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은 내 몸에 대해서 내가 표준화된 자아죠. 그게 나와 나를 결별할 의사가 없다. 평생 내 몸을 꼭 쥐고 가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항상 예수님의 제자이면서도 뭐냐 하면은 저 제자라는 것이 나한테 어떤 실제적인 이득을 줄까를 늘 견제한 거예요. 이 가룟 유다의 마음상태를 좀 더 알기 위해서 제가 세 명의 사상가를 거론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홉스이야기인데, 홉스라는 사람이 있어요. 인간은 날 때부터 이기주의다. 이기주의. 이기주의인데, 왜냐하면 인간의 몸은 몸이 아니고 이거는 기계다. 기계는 두 가지 기능을 하는데, 하나는 뭐냐 무조건 살고자 하는 거. 두 번째 사는 것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고 일단 숨 쉰다 싶으면 움직이고 싶은 거. 이게 바로 기계고 인간이라고 본 거예요. 인간의 본성은 뭐냐 살겠다는 의지와 일단 살만하면 움직거리겠다는 그 본능이 가장 기초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홉스가.

 

그러면 이런 움직임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면 결국 이거는 뭐냐 하면은 모든 사람들이 다 강호의 검투사처럼 전부다 나만 살고자 하고 그리고 움직이는 기계와 기계들의 그런 장터가 되겠죠. 만남이 되겠죠. 그러면 여기서 필히 뭐가 일어납니까? 전쟁이 일어나요. 전쟁. 전쟁이 있는데, 나 빼놓고 다 적이에요. 그래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에요. 모든 인간은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해서, 아군도 없어요. 내가 아군이에요. 나 빼놓고 나머지기는 다 적이에요.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사실을, 뭐 넉넉하고 남들이 나를 사랑해주고 위로해줄 때는 이걸 잘 못 느껴요. 그런데 자기가 몸이 아프다든지 갑자기 생활비가 똑 떨어졌다든지 모든 친구들이 나를 떠났을 때, 그때 나한테 걸치고 있는 그러한 위장술들이, 은폐하고 있는 위장술들이 전부다 떨어져나가고 나면 남는 것은 달랑 그냥 움직이는 기계, 짐승에 불과한 거죠. 그래서 홉스는 말하기를 전쟁에서는 뭐가 없냐면 옳고 그름은 없다. 살아남는 게 옳은 것이기 때문에 옳고 그름, 윤리도덕은 전쟁터에서는, 맹렬한 전쟁터에서는 찾을 이유도 없고 찾을 필요도 없다. 이래 되어 있어요.

 

그렇게 되면, 만일 전쟁을 하게 되면 우리가 힘들잖아요. 힘들고 나보다 더 위세가 있고 돈 많고 더 힘세면 내가 눌리기 때문에, 그러면 나한테 손해가 되겠죠. 그러면 국가가 해야 될 일은 뭐냐, 국가가 이 전쟁에 개입해가지고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있는데 홉스는 이걸 자연법이라, 자연에 법이 없는데 하여튼 자연법이라고 해요. 자연에는 법이 없어요. 법이 없는데 자연법이라고 해가지고 국가가 첫째는 뭐냐 하면 사이좋게 지내는데, 구체적인 방법이 두 번째로 뭐냐 양보하기, 이걸 국가가 개입해 주선하잖아요. 양보하기. 세 번째는 뭐냐 하면은 보다 넓은 범위의 관행은 용납하기.

 

이 세 번째가 좀 설명이 필요한데, 왜 그러냐 하면은 사람이 옳다 그렇다, 옳다 그렇다 할 때는 항상 좁은 의미, 코앞에, 눈앞에 보이는 그것에 자기는 손해를 안 보려고 하잖아요. 근데 넓게 보면 변수가 많아지잖아요. 그러면 내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변수 같으면, 내가 그 일을 만드는데 개입하지도 않고, 개입한 적도 없고, 그냥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더라. 하나하나 따지려고 하니까 내 지식과 경험상 그것을 다 따질 수가 없어요. 이게 왜 이래 됐는지를. 그걸 관행이라고 하는데, 관행은 그냥 용납해주자 이 말이죠.

 

예를 들면 아버지가 오셔서 같이 식사할 때는, 자식들이 같이 밥 먹을 때는 먼저 숟가락을 들지 말고 아버지가 드시면 하자. 그러면 젊은 사람들은 “그거 왜 해요? 왜 해야 되는데요?” 그렇게 따지잖아요. 그걸 따지지 말자. 그게 관행상 내려온 것이다. 사람이 모든 것을 다 따진다고 알 수 있는 지식이라든지 지혜에 한계가 있어요. 하나하나. 이 선풍기 망이 없으면 더 시원할 건데, 왜 망이 있을까? 모르죠. 우리는 잘 모르는 거예요. 만든 사람은 이 망이 있어야 애들 손가락을 보호하고 하면, 사람들은 우린 어른들만 있으니까 이거 떼어버릴까? 이래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항상 인간은 자기 코앞에 있는 자기 편리만 생각하지, 두루 두루가 어느 정도가 다 두루 두루인지를 잘 모르잖아요. 그냥 용납하는 거예요.

 

이걸 누가 하느냐, 약속의 법을 만들어서 국가가 이걸 시행해야 된다. 그러면 우리는 국가의 말을 듣고 사이좋게 양보하고 용납하고 살면 된다. 이게 국가의 할 일이다. 이게 홉스의 이야기에요. 홉스의 주장은 뭐냐 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짐승이고 이기주의고 그냥 인간이라고 할 수 없고 기계고. 어떤 기계냐, 무조건적으로 나만 살겠다고 버티고 가만히 살아나면 또 움직여가지고 이렇게 치고 박고하는, 그러한 공격적인 본능을 이게 바로 인간이라고 홉스라는 사람이 주장한 겁니다. 여기에 뭐 의의가 있습니까? 국가라고 하는 것은 이걸 조정하는 대상이죠.

 

첫 번째 사상가는 홉스죠. 자, 홉스하고 가룟 유다하고 한번 비교해보세요. 유사점이 많죠. 뭘 고집합니까? 기본이 뭐냐 하면 내가 나와 결별할 의사가 전혀 없죠. 예수님을 팔아넘겼잖아요. 무슨 말이냐 하면은 예수님 저를 팔아먹으세요, 라고 안 했다 이 말이죠.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사도들은 오히려 예수님에 의해서 자기들이 팔아넘겨지는 것을 그냥 수용했어요. “주의 뜻이라면 제가 죽음에 넘겨도 괜찮습니다.” 이게 사도들의 특징이었어요. 왜냐하면 성령이 오게 되면 나와 나 사이를 빠이빠이 했으니까. 결별했으니까.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바울이 소원이 있었죠. 사도바울은 소원이 딱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뭡니까? 내 육체를 뭐로 봤느냐 하면은 내 육체를 옷으로 봤어요. 옷으로. 옷으로 봐가지고 옷을 홀딱 벗고 싶다는 거예요. 벗고 하늘나라에 영광된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 소원이었죠. 그러면 옷을 벗는다는 것을 두자로 말하면 뭘 의미합니까? 죽음이죠. 옷을 벗기 전에 매일 옷을 벗는 매일의 삶을 살았어요. 내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짊어짐은 나는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산다. 이게 뭐냐 하면 육신 자체를, 이 신체 자체를 뭐로 봤습니까? 내 몸이 아니고 주의 신체로 본 거예요.

 

주의 신체라는 말은 주께서 관리대상, 주님이 처분하는, 주님의 손에 잡혀서 주님의 처분하는 대상으로 자기의 육신을 본 거예요. 강도의 위협과 도적의 위협과 어떤 것이라도 주께서 내신 거기다가 육체를 집어넣었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이 옷을 입는다는 것은, 사실은 옷이 아니고 옷 위에 입은 옷이에요. 옷 위에 입은 옷. 옷 위에 옷을 입은 사람이 누구냐 하면은 범죄하고 난 뒤의 아담과 하와거든요. 그러면 옷을 입음으로 뭘 줄이느냐 하면은 자기의 수치심을 줄였는데, 사도바울은 뭐냐 하면 이 육신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 이게 수치스러운 몸이니까, 이 수치스러운 몸을 내가 관리하지 않고 나와 결별하게 해주세요! 라고 한 거예요. 내가 결별하게 해달라고. “빨리 죽게 해주옵소서. 주여! 이 몸 힘들어서 못 살겠습니다.” 이런 뜻이에요. 이 몸 때문에.

 

그들은, 사도바울이나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에요. 가룟 유다도 이유도 원인도 모르지만 자기 육신을 견지하고 자기가 유지하는 것이 힘들어요.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니들이 내 아픔을 알아? 이렇게 했죠. 내가 얼마나 힘든지 니들이 알아? 이 말 아닙니까? 이것은 가룟 유다가 이런 마음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 이유가 오늘날 자기와 결별하지 않은 모든 인간들의 공통점입니다. 주부가 옆집 아줌마를 오랜만에 문 열면서 만나가지고 “아이고, 장에 가십니까?” “아, 예.” “잘 다녀오세요.” 이 말하는 바탕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니가 내 아픔을 알아? 니가 우리 집안의 사연을 알아? 내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를 알아?’ 이게 전부다 양쪽 다 칼날처럼 내부에 깔려있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인간이 신체를 지니고 있다는 자체가 고역이라니까요. 고역. 고역인데, 사도바울은 이걸 확장시켰죠. 그 확장시킨 것이 뭐냐, 이걸 가지고 형벌, 이 땅의 삶의 형벌. 이 땅은 이미 감옥생활이에요. 이 세상 자체가 교도소입니다. 우리는 못 빠져나와요. 이 몸이 있는 한 못 빠져나와요. 이 교도소에서 율법을 줘서 죄목을 만들었죠. 없는 죄도 율법을 주게 되면 죄가 나타나요. 니가 이 세상에서 힘들게 살아야 될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하다. 합당하다. 그래서 우리의 고백은 이거면 돼요. “합당하니이다. 합당합니다.”

 

지난 수요일에 제가 했잖아요. “주님, 저 죄인이 맞죠?” 그러면 된다 이 말이죠. 형벌은, 벌이니까 어디서 옵니까? 죄에서 오죠. 벌은 죄에서 오는 거예요. 죄가 없는데 형벌이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아니 죄가 없는데 무슨 죽음이 와요? 우리가 죽는다는 의미가 뭡니까? 로마서 6장에 보면. 죗값으로 죽는 거예요. 그러면 죗값은 편하게 살다가 죽을 때에 아이고 아프다, 이게 아니라 살아온 모든 내력이 고역이라는 말이에요. 힘든 거예요. 아파요. 그리고 남한테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는 자기 아픈데 정신이 팔려가지고 내 아픔을 몰라줘요. 애들 열심히 가르치고 밤늦게 들어와서 퍼질 때에 남편은 그 아픔을 알까요? 니는 살림하는 남편의 마음을 알까요? 둘 다 몰라요. 둘 다. 니가 내 아픔을 알아? 몰라! 둘 다 자기와 빠이빠이를 할 생각이 없어. 전부다 자기와 결별할 생각이 없어요.

 

가룟 유다를 욕하지 마세요. 가룟 유다를 왜 거론했겠습니까?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자기 새끼로 가룟 유다를 배태하신 거예요. 범죄한 인간의 모델로서. 자기 품 안에서 가룟 유다를 딱 열두 제자 속에 심어놓은 거예요. 집어넣은 겁니다. 카드 쌓기 놀이에서 카드 하나 빼면 다 무너지죠. 베드로 뺐다고 무너집니까? 야고보 뺐다고 무너집니까? 열두 카드의 구조가. 아니죠. 뭐 하나 빼면 다 무너집니까? 가룟 유다 빼니까 다 무너졌죠. 모두다 가룟 유다와 동일한 의식과 사고방식으로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님과 달리. 예수님만 표준이고 나머지기는 예수님과 비대칭적이에요.

 

비대칭적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중복된 것 말고 여분의 것이 있다고 우기는 것이 비대칭적이에요. “내가 니하고 생각은 같지만 니가 모르는 내 생각이 따로 있거든.” 이게 비대칭적이에요. “니 나에 대해서 함부로 안다고 하지 마! 어디까지나 나는 나만의 개성이 있어.” 이게 비대칭적이에요.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지만 예수님과 비대칭적인 존재로, 모델로서 세워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예수님과 함께 귀신을 쫓는 권능을 행했지만 결국은 예수님과 결별하는, 그러한 촉발하는 계기를 제공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가룟 유다는 모든 인간의 대표자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대표자.

 

자, 그러면 이러한 홉스에 대해서, 홉스의 주장을 아시겠죠? 인간은 전쟁 중이다. 그러니까 나라의 말을 들어라. 안 그러면 너는 괴물이니까. 괴물은 괴물이니까 국가의 말대로 서로 양보하고 잘 지내자. 여기에 대해서 너무 극단적이다. 좀 좋게 보자고 나온 사람이 누구냐 하면은 그 다음에 사람이 존 로크라는 사람이에요. 존 로크라는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 사람은 더 괴물이에요. 뭐라 하면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모든 것을 주셨는데, 주셨지만 사람마다 달라야 하는 이유는 각자의 노동의지, 노동하겠다는 의지에서 재산이 생기는데, 이 재산은 사유재산이다. 하나님께서, 신께서 뭘 줬을 때, 은혜를 주실 때에 노동에 개입된 사람의 이 재산은 하나님이 주신 재산이니까 이거는 본인만의 독보적인 재산이 돼요. 이게 사유재산이 되는 거죠.

 

이 사유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국가가 있다. 이래 되어 있어요. 아까 홉스는 뭐냐 하면은 개인 대 개인의 짐승적인 본심을 살기 힘들기 때문에 잘 조정하기 위해서 국가가 있다고 했죠. 로크는 뭡니까? 개인이라고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하지 말자.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자. 돈이잖아. 재산이잖아. 재산 지키기 위해서 국가가 있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럼 돈이라는 것은 어디에 속하냐 하면은 경제에 속하죠. 존 로크부터 경제가 무엇보다 우월하냐 하면은 정치보다 우월한 거예요. 정치라고 하는 것은 뭐다? 경제를 잘 굴리게 하기 위해서 국가와 정치가 일한다. 이게 존 로크의 사상, 사고방식입니다.

 

자, 이렇게 되게 되면 존 로크는 자기에게 뭐가 신성한 겁니까? 자기의 돈이, 재산이 신성한 거예요. 신성하니까, 그러면 나는 누구에게 복속되고 누구의 종이냐 하면은 나는 신성하지 않지만 신성한 그 우상 같은 것을 나는 섬기기 위해서 나는 존재하죠.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나는 마구 희생되고 구박받아도 상관없다. 왜? 왜냐하면 돈은 나를 대행해주고 나의 구현체이기 때문에. 존 로크 이쪽에 의하면 돈 때문에 내가 있는 거예요. 나 때문에 돈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귀해? 돈이 귀해? 돈이 더 귀해요. 내게 있는 돈이 더 귀해요. 내가 안 귀해요. 왜냐하면 사람은 뭔가 목숨 걸게 없으면 사람은 힘들어서 못 살거든요.

 

사람이 사는 보람은 내가 애써서 돈을 이만큼 모아놓았기 때문에 그 돈을 볼 때마다, ‘아! 잘 살았다. 나는 참 보람찬 인생을 살아구나!’ 이걸 느끼는 겁니다. 부자만 그런 게 아니에요. 모든 사람이 뭔가 허겁지겁, 미지의 X가 있는데 그 미지의 X가 뭐냐 하면은, 미지의 X에서 뭐가 나올 때 갑자기 여기에 마음의 쉼을 얻느냐 하면은, 노력했는데 돈이 생길 때, 갑자기 목돈이 생길 때 마음의 쉼을 얻는 거예요. 그래 저거야! 관절이 좀 아프십니까? 뭐 배탈이 나셨습니까? 갑자기 돈을 주게 되면 관절이 아파도 괜찮아요. 보람을 얻었어요. 이거 아파서 돈을 얻었으니까. 사람이 섬기는 것이 있거든요. 섬기는 게. 섬겼으면 나는 그 앞에서 작아져도 괜찮아요. 돈이 그 역할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것과 내 노동력이 결합해서 나의 가치가 결합해서 만들어낸 게 재산이에요.

 

그래서 “댁의 자녀가 몇 명입니까?” 라는 그 질문이 다가 아니에요. 우리는 뭣도 모르고 그 질문이 다인 줄 알고, “세 명입니다.” “걔들 요새 뭐 합니까?” 이게 질문의 끝이에요. “돈 얼마나 법니까?”라는 게. “지금 하나 취직하고 둘 놉니다만...” 반대로 생각하면 명확해져요. 명절날 사람이 언제 기가 죽고 언제 좌절하고 살맛을 잃는가? 돈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거예요. 건강도 아닙니다. 돈을 잃을 때 전부를 잃는 거예요. 돈이 있으면 큰소리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들이 공통점을 갖고 있는 인간들의 사회가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자본주의사회에요. 이걸 두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게 유일한 현실입니다. 이게 유일한 현실이기 때문에 이 현실 속에서, 이게 신의 세계거든요. 이게 천국이거든요. 이 속에서 내 위치가 어느 정도가 되느냐, 거리가 조정이 되는 거예요. 나는 거기에 가까이 있으면 나는 성공한 사람이고 이 자본에서 멀어지면 내 인생은 더 분발해야 될 인생이고. 아직 먼 인생이고. 남 앞에 내세울 수 없는 인생이고. 그런 겁니다.

 

자, 그러면 한번 더해봅시다. 홉스+존 로크, 여기에 한 사람이 더 있는데, 루소라는 사람입니다. 루소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한번 더해봅시다. 사상가 루소. 시대적 순서는 홉스+존 로크+루소입니다. 이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은 나를 위해서 국가가 있는 것이 아니고, 국가를 위해서 내가 있다. 이렇게 돼요. 왜냐하면 이 사람도 재산이 중요한 것을 알지만, 재산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누가 보호를 해줘야 한다는 거예요. 국가가 중요하다는 것은 왜 그러냐 하면은 국가가 없이는 내가 없으니까, 나보다 더 국가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국가가 법으로 내 재산을 보호해줄 때, 비로소 나는 이 국가의 국민으로서 살 이유가 생긴다는 겁니다. 국가가 있을 때.

 

그래서 존 로크는 정치보다 뭐가 세다? 경제가 더 세지만, 여기 루소에서는 정치가 경제보다 더 세요. 경제가 잘 돌아가 줘야 나를 보호하는 국가정치가 제대로 형성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 주의입니다. 이 존 로크를 가지고 소극적 자유라고 하고 루소는 뭐 적극적 자유까지는 아니지만, 그냥 적극적 자유. 공동체가 있어야 내가 산다는 적극적 자유. 같은 자유지만 둘 다 이런 차이가 있어요. 존 로크는 “국가가 내 재산만 보호해주고 더 이상 침해는 하지 마세요.”라는 뜻이고, 루소는 국가가 잘되면 나의 소득은 올라간다는 쪽이고. 차이점은 드러났죠. 홉스는 돈보다도 인간 자체가 그냥 사이좋게 지내는 거예요.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서는 내 자신이 형편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국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

 

이 세 가지를 다 더하게 되면 이게 바로 가룟 유다가 돼요. 왜냐하면 관심이 뭐냐 어떻게 되든 간에 나는 나를 포기 못하겠다. 나는 기어이 나를 가지고 가겠다는 뜻이에요. 내가 나를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키겠느냐 이런 식입니다. 이것은 내가 나와 결별을 안 한 상태에요. “주님, 저가 저를 넘어뜨려주옵소서.”라는 그런 기도를 할 수가 없어요. “저를 세워주옵소서.”라는 것이죠. 유 레이즈 미 업 쏘 아이 캔 스탠던 마운틴스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산에 우뚝 서 있을 수 있고.. 행진이라는 노래나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다는 그런 노래를 전부다 한번 보세요. 인간을 업up시키게 만드는데, 나의 좌절된 것에 용기와 품위를 높이는데 힘으로 자기에게 힘을 쏟아 부으라는 노래가 아닙니까? 좌절했을 때. 할 수 있는 거야! 뭐 이런 거요. 주여, 내 손 잡아주세요. 이런 거. 실로암 그런 가스펠 송이나.

 

성경에서는 자기를 미워하라고 했는데, 요한복음 12장에서. 전부다 나를 미워할 마음이 손톱만큼도 없어요. 주변에서 예수 뭐하노? 나 안 키워주고. 엎어진 나를 일으켜 세워야지. 전부다 그쪽이에요. 그것은 내 목숨을 내가 계속 간직하고 싸고돌라고 하는 거예요. 이러면 내 목숨을 버릴 곳이 없어서 늘 방황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예수님에게 제 목숨을 바치라고 하고 싶어도 우리가 예수님을 볼 때에 예수님이 나한테 뭘 해주게 되면 나는 목숨을 바치겠다. 이런 식이에요. 그러니까 가룟 유다 같은 경우의 심정은 이렇습니다. 주님이 나에게 찾아오지 않는 한 나는 주님과 더 이상 상종하지 않겠다고 내 쪽에서 결정내린 마음자세. 나를 이쁘게 봐가지고, 나를 쪼개는 분이 아니고, 나를 이쁘게 봐서 나를 구원해줄 의사가 없다면 내 쪽에서도 나는 당신을 차버리겠습니다. 그런 마음이에요.

 

그리고 난 뒤에 나중에 가룟 유다가 뭐합니까? 자살하죠. 자살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후회한다는 뜻이에요. 자기 결정에 대해서 후회한다는 뜻이거든요. 후회한다는 것은 후회를 통해서 우리가 결정적으로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 있어요. 나는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후회는 하지만 내 것을 포기할 마음은 전혀 없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할 때에 여러분들은 무엇과 비교해야 하느냐 하면은, 그러면 성령이 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으로 와야 해요.

 

자, 이것이 인간이라면, 그러면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어떤 변화를 주느냐 하는 겁니다.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오늘 본문은 성령이 오시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14장 10절을 봅시다.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1절,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라고 되어있죠. 거기에 대해서 뭐 누가 말릴 사람도 없고요. 말릴 생각도 없죠. 그러면 성령이 왔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이 가룟 유다뿐만 아니고 열두 제자도 마찬가지고. 그들의 위치, 내가 누군지를 지금 예수님 앞에서 전혀 모르는 겁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신경을 쓰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게 되면 자기가 자기에게 신경을 쓰는 그 관점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어린애가 있는데, 집에 골목이 있다면, 집도 있고 이래 골목이 있다면 이 세 살, 네 살 먹은 애들의 세상 끝은 어디입니까? 이 골목 끝이 세상 끝이에요. 저 밖에 나가면 귀신이 있을지 몰라요. 어릴 때 기억은 항상 이 골목 안에서 노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어릴 때, 한 일곱 살 먹었을 때에 어디 뒷산이나 앞산에 가서 봅니다. 보게 되면 지평선에 있는 집들이 보이겠죠. 그러면 이 지평선 너머는 뭡니까? 이건 미지의 세계에요. 자기가 아는 세계는 이 세계 전부에요. 그렇죠.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이 알고 있는 범주를 모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지 않을 때에 인간은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걸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어떤 문장을 하나 복사를 해가지고 왔으니까 그 문장을 하나 제가 각색해드리겠어요. 그 문장은 뭐냐, 국민교육헌장입니다. 1965년에 나온 국민교육헌장인데, 국민교육헌장에 이래 되어 있어요.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기억나시죠?

 

이걸 예수님의 입장에서 정확하게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사기꾼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우리 자신이 사기꾼이에요.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범주가 좁기 때문에. 골목 끝과 안 밖에는 모르기 때문에. 일곱 살 되어가지고 산에 올라가서 본 그 지평선이 전부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서 나를 정립합니다. 그게 사기꾼이에요.

 

끝까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키려고 하고 우리 자신의 정당성을 포기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기꾼은 뭐하느냐 하면은 그 뒤에는 각색할 필요가 없어요.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이게 사기에요.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이게 사기라는 거예요.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게 사기에요. 이게 가룟 유다에요.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우리의 사기꾼이 나아갈 길을 밝혀 사기꾼의 지표로 삼는다. 이게 오늘날 교육입니다.

 

사기가 사기를 치는 거예요. 계속해서. 죽음의 세계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평가하고 우리 자신을 정립하려고 하고 내가 누구냐의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애쓰는 겁니다. 그 바깥의 세계에 가면 겁을 내요. 두려워해요. 그 안에서 자기는 나름 훌륭한 사람이라고 자부합니다. 그러니까 그 바깥의 세계의 주님 보시기에 이게 사기꾼이죠. 오늘 제목을 사기꾼으로 할까?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70.138) 19-07-22 17:56 
광주강의20190719b 마가복음14장 10-21절(나와의 결별)-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을 합시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실 때에 여기 한 사람은 오늘 열둘 중에 가룟 유다가 넘겨주려고 했고, 그 다음에 마가복은 14장 20절에 열둘 중 하나는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라고 하는 이런 이야기를 제자들은 무슨 이야기인줄 못 알아들었어요. 무슨 말인지를. 하나님께서 너희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만 들으라고 해도 문제는요, 예수님이 말을 해도 알아먹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공식 하나가 있어요. 성령이 없이는 못 알아듣는 이야기만 사도들이 해야 됩니다. 성령이 없이는 못 알아듣는 이야기만 사도들이 해야 돼요. 앞으로. 그것 때문에 성령이 임한 겁니다. 그러면 성령이 사도에게 임할 때 사도는 성령이 없이는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했다면, 사도의 여기에다가 성도를 이렇게 대입해도 마찬가지에요. 성령을 성도에게 주신 이유가 성도가 하는 말을 다른 사람들이 도무지 못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성도에게 성령을 주신 겁니다.

 

그러면 왜 그러냐 하면은 이걸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성도 자체가 비교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은 마가복음 14장 21절에 이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제게 좋을 뻔했다고 했죠.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가룟 유다를 하나님께서 주신 이유는 인간의 원천, 처음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거예요. 처음으로. 처음으로 돌아가게 했을 때에, 인간 쪽에서 출발해서 천국으로 갈 수 없습니다. 아담의 범죄, 그 자리가 우리의 자리거든요. 원천의 자리거든요. 우리는 아담의 자손이니까. 죄지은 자리에서는 어떤 시도를 해도 그게 죄가 돼요. 어떤 시도를 해도.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죗값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형벌이 나오죠. 형벌이 나오고 이 형벌은 뭐냐 하면은 “너희들이 내 괴로움을 알아?” 남들이 내 마음을 안 알아준다는 그 자체가 괴로움인 거예요. 그리고 내 육신 자체가 괴로움으로 거기서 자생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거고요. 성도는 뭐냐 하면은 그 이유를 알죠. 이거는 우리가 마땅한 것이라고. 괴로움은 우리에게 마땅한 것이라고. 그런데 성도가 아닌 사람들은 이걸 반항하는 겁니다. 그게 성도와 성도 아닌 사람의 사이에 벽이 쳐져있는 거예요. 벽이.

 

벽은 뭐냐 하면은 니가 아무리 천국에 가고 싶고 구원받고 싶어도 주님께서 허락이 되지 아니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천국 가겠습니다.” 주님은 “오지마라!” 자, 가겠다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가겠다고 하는 사람을 말리는 주님도 힘들어요. 가룟 유다의 처신은 이렇습니다. 가질 수 없으면 내 쪽에서 원하지 않기로 결단내는 겁니다. 결국은 가룟 유다의 그게 니 본성이라는 거예요. 주님이 나를 건지지 아니하면 내 쪽에서 안 가지. 나도 한 가오, 또는 한 고집, 이런 게 있다는 겁니다. 천국이 찾아오지 아니하면 내 쪽에서 안 가는 것으로 정리하겠다. 혹시나 구원해주면 고맙다고 하고. 이런 식이에요.

 

그런데 이거는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자기와 자기가 결별을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결별이 안 된 상태에요. “에구 뭐 구원해주면 못 이기는 척하고 가주지.” 그러면 그 가주는 인간덩어리는 결별되지 않은 그 덩어리 채로 가는 거예요. 그 사람은 사기꾼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지 않으면, 방금 공식이 뭐였습니까? 예수님의 말은 성령의 말이기 때문에 성령으로 한 말은 우리가 알아듣는다? 못 알아듣는다? 못 알아듣지 알아듣지를 못하거든요. 근데 천국에 보내줄게, 라는 말을 알아들었다는 말은, 성령이 없이도 알아들었다는 말은 이거는 완전히 사기에요.

 

그러면 성령이 와서 알아들을 수 있지 않습니까? 라고 할 때에는,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나하고 분리가 일어나죠. 어떤 분리? 공짜로 넣어주면 가겠습니다, 라고 하는 나와 그것으로 인하여 내가 자빠져야 한다는 그 나와 둘이 분리가 일어나는 겁니다. 이 분리는 표준적 개인이기 때문에. 주님에게 일어났던 그 현상이 성도에게도 그대로 일어나는 거예요. 내가 나를 팔아먹어야 이게 구원이 되는 겁니다. 나를 사랑하는 나와 나를 미워하는 나, 둘 중에서 그동안은 누가 우세합니까? 내가 나를 너무 사랑하죠.

 

근데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나를 놔주죠. 미워하죠. 그래, 망해버려라! 목숨 하나밖에 없는 그 귀한 목숨 그 따위 예수한테 갖다 줘라! 그래. 예수하고 맞바꿔라! 그래. 꼴좋다 돈도 못 벌고. 이런 식으로. 내가 나를 천대하죠. 나를 내쫓아버린다고요. 내 영역 속에서. 예수 믿는 자아를 내쫓아버리죠. 그러한 현상이 바로 성령 받은 사도에게 일어나는 겁니다. 수요일에도 이야기했지만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를 감당할 자격이나 그러한 권리가 나한테는 없기 때문에. 내가 나를 간수하고 나를 관리할 권한이 나한테 없기 때문에.

 

자, 여기서 좀 더 어려운 것을 해봅시다. 여기까지는 여러분들이 이해한다고 치고 어려운 것을 해봅시다. 어떤 분이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어떤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성도와 성도 사이에는 어떻게 교제하면 됩니까? 라는 질문이에요. 성도와 성도 사이에. 이게 무척 어려운 질문인데요. 질문하는 사람은 몰랐어요. 이게 뭐냐 하면 성도라는 존재에 대해서 어떻게 사귀고 어떤 식으로 대화하고 어떻게 친하게 지내면 됩니까? 그 방식이 뭡니까? 이래 물었어요. 근데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어요.

 

성도라는 사건이 성도라는 사건을 어떤 식으로 마주칠 수 있습니까? 또는 만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으로 옮겨야 돼요. 성도는 존재가 아니고 뭐냐 하면은 사건입니다. 성도가 사건이 되려면 존재로서의 나를 사건이 찾아온 나로 이걸 결별을 해야 돼요. 오늘 제목은 그냥 굳힙시다. 결별로. 사기꾼으로 하려다가 참았습니다. 나로부터의 결별. 존재로서의 나와 사건으로서의 나와 결별을 해야 돼요. 존재의 위력은 굉장히 강력합니다. 중력이 나한테 있어요. 사과만 떨어지는 게 아니에요. 어떤 의미도 전부다 나한테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일종의 뉴턴이에요. 나 중심으로 모든 것을 잡아당겨요.

 

최종 가치와 의미는 나한테 와서 종결된다고 지난 주 낮 설교에서 그런 설교를 했죠. 인간은 모든 것이 나한테 종결되는 거예요. 꽃의 이름을 부를 때 그 이름은 나에게 와야 돼요. 딴 데로 가면 안 돼요. 나에게 와서 뭐가 된다? 나에게 와서 의미가 되는 거예요. 그래야 내 이름을 불러 줄 때 이름을 불러준 대가를 내가 챙겨야 되니까. 모든 것은 없어져도 나는 없어지면 안 되죠. 그러나 그거는 근원이 아니에요. 내가 근원이 아니다. 근원은 뭐냐 하면은 이거는 죽음입니다. 니가 선악과 따먹은 날에는 니가 정녕 뭐한다? 죽으리라. 죽음이죠. 그러면 이 죽음과 나를 바꾸라는 거예요. 우리 하나님께서. 바꿔라.

 

바꾼 사람이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 누가 나오죠? 가인 말고 누가 나옵니까? 아벨이잖아요. 아벨은 무엇과 무엇을 바꿨느냐 하면은 아벨은 존재와 죽음과 맞바꾼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그 죽음은 본인이 자살할 것이 아니고 형에 의한 도발적인 사건이라는 말이에요. 근데 형이 그러한 사건을 일으킬 때에 그런 사건을 유도한 분이 누굽니까? 하나님이죠. 하나님이 제사를 안 받아서 사건을 일으켰잖아요.

 

이 공식을 그대로 가룟 유다한테 적용시켜보자 이 말입니다. 이 공식을.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는데 왜 태어납니까? 자, 이 질문에 대해서 어느 인간도 답변을 못해요. 가룟 유다를 누가 만들었어요? 주님이 만들었죠. 주님이 만들어놓고 거기에 대해서 왜 그걸 가룟 유다를 탓합니까? 자기가 만들어놓고. 하나님 본인이 만들어놓고 탓을 누구를 탓해요? “아이고, 자식아 안 태어나면 좋을 뻔했다.” 왜 탓을 저쪽을 미룹니까? 이거는 존재로 생각해서는 전혀 이것을 풀어낼 수가 없어요.

 

이거는 뭐냐 하면은 가룟 유다의 존재를 하나의 사건에다가 집어넣는 겁니다. 무슨 사건이냐 하면은 죽음에서는 항상, 죽음과 존재가 만나면 여기에 모순이 발생되는 겁니다. 모순이 발생되기 때문에 존재가 되는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십자가를 믿을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왜? 십자가는 사건이기 때문에. 죽음 사건이에요. 인간이 자살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그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어림도 없어요. 그 근처도 안 갔어요.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떠난다고 하니까, 제가 목숨 바쳐서 가겠다고 하죠. 목숨 바쳐서 가겠다고 해도 그 죽음 사건에 어림도 없어요. 그러지 마. 그래도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나를 자살하는 것은 모순이 아닙니다. 자, 자살이야기가 나왔으니까 가룟 유다는 죽을 때에 어떻게 죽었습니까? 자살했죠. 이게 자살이 아니고 어떤 자살이냐 하면은 죽을 때까지 뭘 유지했느냐 하면은 동질성을 유지했어요. 목매는 내 모습과 목매어서 죽는 내 모습과 일치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나를 죽일 때 그 나와 그 나가 동일하다고 본 거예요. 그 안에는 어떠한 다른 점이 없어요. 모순이 없다니까요. 차이점이 없어요.

 

제가 차이라고 하는 것보다 모순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어요. 차이점이 없다는 말은 그 인간이나 죽은 인간이나 죽으려고 애쓰는 인간이나 동일하다. 이래 되면 납득이 되잖아요. 성령이 없어도 그거는 납득이 되잖아요. 그런데 뭐냐 하면은 그 죽어야 될 인간을 죽이면서 그 책임은 가룟 유다 니가 져야 된다고 한다면 이건 뭡니까? 모순 돼버리죠. 모순된다고요. 모순이 안 되려면 출발이 어디에서 되어야 하느냐 하면은 십자가 사건, 죽음이라는 사건을 위해서 존재가 거기서 확 쏟아졌다고 보면 돼요.

 

가만히 있는 벌통을 작대기가지고 확 치고 도망을 가보세요. 한참 낮잠을 자고 있는 벌들이 확 쏟아지죠. 죽음이라는 그 보따리, 컴컴한 그 보따리, 그 보따리를 탁 치게 되면 거기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확 쏟아지는 거예요.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확 쏟아져요. 그러면 우리가 가야 될 본래의 자리가 어딥니까? 바로 그 벌통이죠. 갑자기 벌통으로 할까? 벌통으로 이게 다시 귀환되어야 하는 거예요. 그냥 자살하면 천국에 못 가요. 어느 죽음이어야 하느냐 하면은 내 존재가 나왔던 그 사건으로 귀환해야 돼요. 다시 돌아와야 한다고요.

 

그러면 성령은 뭐냐 하면은 나를 죽이는 사건이죠. 성령은 나를 죽이는 사건이라는 것보다 더 정확한 말은 뭐냐 하면은 이미 니가 죽었다고 통보해주는 사건이죠. 성령은. 이미 죽었다고. 니가 갈 수 없는 특이한 죽음에, 내게 성령이 오는 순간 니는 그 안에서 죽어있다는 겁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는 그것을 합쳐서 뭐라고 합니까? 그걸 합쳐서 십자가라고 하잖아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어디에 죽었다고 했습니까? 어디에 죽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했죠. 이것도 모순되잖아요.

 

자,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이게 왜 모순이냐 하면은 간단해요. 십자가에 가려면 어떤 예루살렘의 근처에 어떤 위치를 점해야 되죠. 어떤 자리가 확보가 되어야 하죠. 어디 흙이 있어야, 어떤 번지수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갈보리 언덕에 올려놔야 되지 않습니까? 십자가가 이게 사건이 아니고 존재라면 우리는 여기에 있는 십자가는 안 돼요. 여기에 가야 돼요. 여기에 가봤자 완전히 장사꾼들의 시장터인데요. 뭐. 동영상 올려놨는데 보셨습니까? 복잡하잖아요. 예배당 지어놓고 있잖아요. 특정장소에요. 특정장소. 십자가가 존재가 돼버리면 이 장소가 지역적으로 점유하게 되고 그러면 다른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 게 돼요. 이 장소는 존재가 된다고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걸 존재로 보지 않고 뭐로 봤습니까? 사건으로 봤죠. 사건으로 본다는 것은 제가 한번 적어볼게요. 사건은 공간이 다른 말로 존재니까. 공간이 다 덮을 수가 없는 여분, 이게 사건이에요.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불꽃놀이 이야기했는데, 어떤 배치된 공간에서 구멍이 뚫렸다고 봅시다. 구멍이 뚫려 유성이 내려오듯이 내려온다면, 대기권에 구멍이 뚫리고 유성이 내려온다면 현대 과학에서는 그 부분만큼 그게 뚫어진 게 되잖아요. 그러나 인간의 존재에서 보면 어떤 현실이라는 공간은 사건이 일어나도 곧장 그 다음날 그 다음 순간에 보면 이게 다 메워져있어요. 눈에 보이는 현실만이 현실이에요. 그리고 그 사건은 두 번 다시 이 공간에서 두 번 다시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 모순입니다.

 

왜? 모순이냐 하면은 분명이 이 세상에서 일어난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이게 반복이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그것을 똑같이 만들어낼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냥 펑펑 폭죽이 터지듯이 터질 뿐이에요. 군데군데. 예상할 수 없듯이. 펑펑 터지는 겁니다. 터지면 우리는 대번에 그 터진 장소에다가 뭘 만드느냐 하면은 성지를 만드는 거예요. 성지. 이것은 누구 스데반 집사님이 돌아가신 곳이고, 성지를 만들어버려요. 이거는 주기철 목사가 어떻고 저렇고, 성지를 만들잖아요. 아무 의미가 없거든요.

 

십자가 사건은 이 현실에서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왜 붙잡을 수가 없습니까? 이 현실은 바로 내 존재의 확장되고 인식하는 그러한 공간이기 때문에, 내가 알고 있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어린아이의 현실은 뭡니까? 골목 끝이에요. 골목 끝 말고 더는 안 돼요. 거기는 귀신이 나와요. 항상 어린아이는 골목 안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그게 전부에요. 인간에게서는 뭐냐 하면은 이 우주, 과학 이게 전부에요.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설명하는 거예요. 그 안에서 설명한다는 것은 누구를 설명하느냐, 내 존재, 나라는 것을 바깥에 있는 이 현상가지고 나한테 응축시켜서 나는 이 정도야,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가 알고 있고 내가 경험한 범주 내에서 항상 나를 재조립하고 살아요. 그래야 그게 모순이 없어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남들이 나를 이렇게 보더라. 또는 나는 걸어서 배낭여행하면서 이런 경험을 했다. 캐나다에 로키산맥에 15일 동안 집시맨처럼 아줌마 여섯 명이 렌트카 빌려서 돌아다니는 그런 프로도 있거든요. 다음에 그 아줌마들이 용기를 내서 40일 동안 미국을 돌아다닌대요. 밥 잘해 먹고 있어요. 캠핑카 빌려가지고. 되지도 않는 영어를 막 해가지고 돌아다니는 겁니다. 자 그렇게 해서 경험을 넓혔다 칩시다. 넓혀봐야 그 모든 의미는 어디에 다 집합합니까? 나한테 집합하기 때문에 그 경험 많은 나를 아까워서라도 못 버리는 거예요. 아까워서도. 얼마나 공들였습니까? 이런 나를 구축하는데. 얼마나 거기에 애를 많이 썼는데요.

 

근데 내가 이렇다고 모순 없이 장담할 수 있는 모든 재료와 근거는 어디서 왔다? 내가 눈으로 목격했거든요. 캐나다 가고 미국 가고. 목격했다 이 말이죠. 내가 경험한 게 있잖아요.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니들이 나의 힘든 것을 알기는 알아? 내 괴로움을, 힘든 것을 알기는 알아? 자, 그게 뭡니까? 그게 나이가 만약에 70이 된 사람 같으면 70밑에는 형님! 이렇게 할 거란 말이죠. 근데 90넘은 송해 같으면 뒤통수치면서 인생을 이게 90까지 살아보고, 이게 70밖에 못 산 게 뭘 인생을 안다고, 니가 얼마나 힘드냐고 하느냐 이렇게 하죠. 만약에 여러분들이 열한 살 먹은 애가 60대 노인정에 와가지고 “할아버지들, 내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요?” 하면 “니 요구르트나 먹고 집에 가라. 아직 니는 몰라.”

 

사람 살면서 범주가 점점 넓어집니다. 근데 범주가 넓어진다는 것은 자기 포기가 된다? 안 된다? 오히려 자기 포기가 되지 않고 자기가 더 강화돼요. 복음을 안다고 하면 할수록 지옥 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복음에 대해서 깊이 알면 알수록 점점 지옥 가는 거예요. 왜냐 하면은 지식으로, 새로운 체험으로 자기 다지기에, 자기 기초다지기에 여념이 없어요. 새로운 것이 오면 전부다 나 구원하는 용도로 다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면 존재는 모순이 안 되는 거예요. 왜냐, 내가 이만큼 애써서 복음까지 알았으니까 내 존재는 아주 마땅히 천당에 갔을 것이라고.

 

천국은 그런 식으로, 가룟 유다 식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우리 자체에 대해서, 이 존재 자체가 갖고 있는 모순점을 우리가 자각해야 돼요. 그 모순점 자아가 14장 20절을 다시 보게 되면 이렇습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데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인간을 무시해도 완전히 개무시 하는 겁니다. 이것보다 더 인간에 대해서 모독적인 발언이 없습니다. 인자는 말씀대로, 기록된 데로 가거니와, 야야! 니 참 안 됐다. 니 내 들러리 한다고. 이런 식이거든요.

 

그러니까 인간의 존재라고 하는 것은 애초부터 인간을 위해서 인간 존재가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해졌죠. 그러면 왜 모순이 생겼느냐 하면은, 내가 하나님에 하는 일에 기여했잖아요. 주님 십자가 나 아니면 안 돌아가셨잖아요. 만약에 더 보탠다면 여기서 발생되는 것이 뭐냐 하면은 끝까지 자기 존재를 붙들고 있다는 데서 오는, 그 어떤 극복할 수 없는 모순점이에요. 존재에서 사건으로, 과연 존재에서 출발해서 존재의 힘으로 사건까지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거는 땡입니다. 못 들어갑니다.

 

자, 이걸 못 들어간다고 하니까 존재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나를 천국 보내지 않는다면, 내가 천국에 갈 수 없다면 뭐 내 쪽에서 원하지 않으면 되겠지. 지금 이 이론, 이 합리적인 이론에 의하면 천국은 누가 찾아와서 가잖아요. 제 말이 맞지요. 찾아와야, 성령이 와줘야 가죠. 그럼 내 쪽에서 하는 처신은, 괜찮은 처신은 내가 할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은 뭡니까? 내 존재를 가장 잘 지키는 마지막 방법은 뭡니까? 안 찾아오면 내 쪽에서 안 가는 것으로 정리하는 거예요. 왜? 그래야 내가 정당해지니까.

 

거기에 대해서 주님이 말씀대로 평해요. 말씀대로. 평가하기를, “바로 그 따위 식으로 이야기했지?” “네.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니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 말이 맞잖아.”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한 인간이 어떤 식으로 고백하느냐, “안 찾아오면 나는 내 고집에 세서 안 가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왜? 나도 한 고집하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정리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 걸로. 따라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는 그런 현상을 유도해야 되죠. 그런 현상을.

 

현실 속에 존재가 뭐만 추구하느냐 하면은 사건이 아닙니다. 결국은 사건이라고 말은 해도 그 사건 안에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자기 존재가 들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존재를 못 벗어나요. 존재가 벗어나려면 존재는 어디에 끌려가느냐 하면은 자기의 본래의 자리가 어디죠? 본래의 자리는 선악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미 죽은 거예요. 이미 죽었다가 되어야 하는데, 죽었다가 아니라 자꾸 존재로 이어보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그렇다면 복음 전하는 사람들은, 이 지옥 갈 사람들은 존재에서 존재로 간다는 이 사실을 그냥 증거 할 뿐이에요. 왜냐하면 존재에서 사건으로 가는 방법은 없기 때문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니가 아무리 애를 쓰고 공들여도 못 온다는 것을 이야기해줘야 해요.

 

사도행전 마지막에 그런 이야기가 나왔잖아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함을 이루는 거예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나무라기 위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거봐! 내 말을 안 듣지. 안가! 못 오지. 그러니까 그거는 뭐냐 하면 말씀대로 하자 없이 이루어진 증거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이야기는 존재보고 뭐 자각하라, 뭐 정신 차리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이 존재보고 뭐라고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그냥 주님이 시키는 대로 그 말 자체가 뭐가 되느냐 하면은 사건이 되는 겁니다. 사건이 존재를 다녀간 거예요. 다녀갔을 때에, 어? 그 말이 맞네! 라고 하는 순간 그 사람은 구원된 순간이에요. 구원되는 순간 본인은 뭘 느끼느냐 하면은 ‘모순으로서의 구원’이 되는 겁니다. “아! 이게 모순이 되어야 구원이 되는구나! 똑똑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정보를 수집해서 내가 알아먹는 것을 총집결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이게 모순적이어야 구원되는구나!”라는 것을 깨달아요.

 

그러면 성령이 하실 때는 어떻게 하겠어요? 모순을 유발하기 위해서 주께서 말씀을 주신 것으로 이해하겠죠. 성령 받은 사람은. 내 안에 모순을 유발하기 위해서. 예를 들면 어떤 모순이냐 하면은 선악과, 탐하게 맛있는 그런 나무를 심어놓고 그 다음에 뭡니까? 따먹지 마라. 그럴 때 인간의 존재는 뭡니까? 그렇게 위험한 나무는 아예 심지를 말았어야지, 라고 하죠. 그런 질문이 나오는 것이 당연한 거예요. 왜? 그게 모순이 아니니까. 그럼 모순은 뭐예요? 따먹지 말라고 해놓고 결국은 따먹게 만들었죠. 그게 모순이잖아요. 근데 이게 누굴 위한 것이다? 그게 인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는 절차에서 발생되는 사건으로서 나온 사건이 이게 모순이 되는 겁니다.

 

그 모순을 나에게 적용시키면 뭡니까? “주여, 나 같은 인간은 구원되면 안 돼요. 주님!” 이거는 인간에게서 자생적으로 나온 본성과 대치가 되는 고백이 튀어나와버린 거예요. 인간존재의 본성은 뭐다? 남은 죽어도 나 혼자만 천당에 가겠다. 이게 본성이잖아요. 본성인데, 그 본성과 모순되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뭐냐 하면은 저 같은 인간은 왜 구원했어요? 그걸 다른 표현으로 이야기하게 되면 “주님, 저는 죽었어요. 저는 죄인으로 죽어있습니다.” 이 말은 내 목숨은 여기에 있지 않고 내 목숨은 어디에 갔다? 이쪽에서 빠져나와서 저쪽으로 가있는 거예요.

 

그러면 주일 낮 설교에서 나는 일(1)이 아니고 제로(0), 미자, 미자, 중성미자에요. 질량이 없죠. 나는 질량이 없고 모든 질량은 다 어디에 갔습니까? 주님께 갔죠. 그러면 주님은 뭐냐 하면은 우리는 사기꾼인데 주님은 도둑놈이에요. 도둑이죠. 우리는 사기꾼이고 주님은 도둑이에요. 이게 마태복음 12장에 나옵니다. 도둑이 담 타고 넘어와서 주인을 묶어놓고, 악마를 묶어놓고 우리를 그냥 강탈해가는 거예요. 우리는 강탈당한 사람이에요. 강탈당한 사람. 강탈당한 사람이기 때문에 강탈당하고 난 뒤에 내 존재로서 내 구원받는데 기여한 것은 일체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일체 없어요. 장로님 이해되십니까? 장로님을 딱 집어서 이야기하는 의도를 모르겠다마는.

 

자, 현실이야기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현실. 현실은 여러 사람이 살고 있죠. 우선 현실세계의 인간과 인간의 한계를 봅시다. 인간의 한계. 성령에서의 인간의 한계, 그것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쉬운 것부터 합시다. 현실에서 인간의 한계는 뭐냐 하면은 내가 아는 것을 남한테 이야기해주게 되면 여기서 연락, 케이블선이 마련되게 되죠. 그러면 그 사람이 어려울 때 내가 도와준다. 그럼 여기서 초코파이, 정이죠. 정. 인정사정. 정을 주게 되면 지가 양심이 있는 한 입 닦지는 않을 거라 이 말이죠. 그러면 이사 왔다. 떡을 줬다. 정을 줬죠. 정주고 난 뒤에 저쪽에서 과일이 들어와서 뭐 참외 두 개 주겠죠. 그러면 무슨 사이가 됩니까? 우리는 아는 사이. 아는 사이가 되죠. 아는 사이가 더 들어가면 위험하지만 돈 빌려주는 사이가 되죠.

 

그럼 이쪽 A라는 사람이 복음을 알았다. 그럼 이쪽은 복음을 모른다. 그럼 복음 아는 사람이 이쪽에서 뭘 주겠습니까? 복음을 전하겠죠. 왜? 아는 사이니까. 복음을 전해가지고 그 사람이 안 받아들이거나 시큰둥하거나 딴소리하게 되면 여기는 뭡니까? 섭섭해 하죠. 섭섭해 하기 때문에, 이거는 내가 저 사람이 구원 못 받은 것은 내 기도발이 부족해서니까 기도 열심히 한다고요. 흔히 중보기도. “주여, 철딱서니 없는 애들 둘, 어떻게 어떻게 해서 자식 둘 천당하게 해주옵소서.” 간절히 기도하죠.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간절히 기도하죠. 간절히.

 

자, 간절히 기도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지금 무척 후회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이게 가룟 유다하고 똑같아요. 간절히 기도한다는 것은 지금 이 형편이 내 맘에 안 든다는 거예요. 이 말을 여러분들이 잘 이해했는지 제가 물어보겠어요. 이 현실이 답니까? 이 현실이 현실의 전부입니까? 아니죠. 이게 한계죠. 누구의 한계입니까? 세상을 이렇게 보는 나의 한계죠. 나의 존재 의미를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고 살아갈 이유가 있고, 살아갈 그런 근거가 있음을 우기기 위해서 조작된 현실이에요. 우리는 사기꾼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했잖아요.

 

우리는 내가 사기꾼인 거예요. 이 현실, 내가 정주고 정 받고 하는 데에서 사는 보람을 느끼는 거요. 내가 남한테 정주지 않으면 저 사람이, 내가 주변에 아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학교 동창생부터 해가지고 어릴 때 소꿉친구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니 미쳤다. 니 싸가지 없다고 할 게 아니냐 이 말이죠. 그게 싫은 거예요. 왜? 내 존재는 모순되면 안 되니까. 그래서 인간 대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은, 성도와 성도가 어떻게 살아갑니까? 라고 말하기 전에 나라는 존재는 저 존재와 어떻게 이어졌습니까? 라는 것을 먼저 전제로 깔아야 돼요. 이걸 자꾸 무시하면 안 돼요.

 

전화를 했는데 전화를 안 받아요. 바쁘겠지. 하루 종일 전화해도 전화 안 받습니다. 전화 씹은 거죠. 나는 저한테 그렇게 신경을 많이 썼는데 지는 바쁘다고 전화를 씹어버린 거예요. 씹은 이유는 뭡니까? 답답하면 또 전화하겠지. 이것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답답한 놈이 전화하겠지. 나 안 답답한데. 그래가지고 또 전화해가지고 왜 전화 안 받습니까? 또 닦달 낸다고요. 왜 그렇습니까? 뭘 느꼈기 때문에 그래요? 결핍. 무슨 결핍? 내가 구축한 이 현실에 충족하지 않으니까 결핍이 생기겠죠. 결핍이 생기면 이건 뭐가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은 감사가 날아가 버려요. 감사가.

 

감사가 날아가 버리면 뭐 지대로입니까? 짜증 지대로인 거예요. 특히 날씨가 오늘처럼 우중충할 때는 짜증 지대로 나는 겁니다. 사람이 짜증이 나는 이유는 결핍을 느끼기 때문이고, 이 결핍은 뭐냐 내가 생각한 현실이 내 뜻대로 잘 굴러가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그 짜증입니다. 자, 여기에 대한 해답은, 이게 전부다 어디서 나오는 순환구조냐 하면은 존재에서 나온 순환구조에요. 이 존재에서 나온 순환구조에서 결론은 뭐다? 감사대신 뭐가 나왔다? 짜증 지대로 나왔죠.

 

그러면 성령이 임하면 성령은 니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라 이 말이죠. 사건이, 지금도 주께서 부지런히 일하고 있는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데, 이 사건을 뭐로 갖고 있습니까? 나는 내가 생각하는 현실이 현실답고 제대로 굴러갔을 때 진짜 사는 맛이 난다는, 그 나 중심의, 나 위주의 제한된 현실을 진짜 현실이라고 자꾸 우기는 그 못된 버릇 때문에, 그것이 주님의 사건이, 주님의 은혜의 상이 가리어진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성령이 임하면 뭐냐 하면 이거죠. 죽고 싶다죠. 앞에 한자 넣으면 캭! 죽고 싶다. 주여, 캭 죽고 싶어요. 이게 바로 뭐냐 하면은 사도바울의 평소의 고백입니다. 여기서 감사가 나오죠. 맞아. 복역 또는 감옥소생활을 내가 마치 고향인양 여기고 여기서 버티려고 했던 내가 잘못이다. 떠나면 그만인걸. 무슨 낙을 보겠다고. 아니 낙을 봐도 주님 좋아라고 하는 낙입니까? 내 존재를 빛내기 위한 낙이에요? 내 존재를 자꾸 안 죽이기 위해서, 살리기 위해서 붙들고 있는 그런 낙이거든요.

 

그래서 인간은 수시로 죽고 싶다가 돼버립니다. 수시로 죽고 싶다가 돼요. 이거는 뭐, 죽고 싶나? 그거하고는 좀, 너그 아버지 뭐하시노? 하고는 전혀 관계없어요. 이게 죽고 싶나? 그거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고, 본인이 알아서 자기와 결별이 주는 시원함. 결별이 주는. 모든 문제는 타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전화를 안 받게 하신 것도 주의 뜻입니다. 전화를 안 받게 하는 것이 주의 사건이거든요. 자, 전화 안 받게 함으로서 나로 하여금 내가 지금 어떤 입장에 있다는 것을 깨우치는 겁니다. 우리는 뭐 없는 삶을 원한다? 모순 없이 살고 싶어요. 납득이 되게 살고 싶어요.

 

근데 두 번째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주의 하시는 모든 말씀은 내 존재로서 납득이 돼요? 안 돼요? 납득이 안 돼요. 납득 안 됩니다. 납득 안 되지만 결과는 구원받아요. 구원에 있어서 내가 납득이 되는 식의 구원은 없어요. 우리는 항상 존재위주이기 우리는 뭔가 내가 따져서 믿고자 해요. 골라 믿고자 해요. 골라! 골라! 이거는 믿을만하고 이거는 안 믿을만하고. 우리는 자꾸 고르는 그런 심보가 있어요. 왜냐하면 내가 따로 구축한 현실이 있기 때문에. 그 현실 전체와 모순되어 혼란이 일어나면 안 되잖아요. 내 하는 일과 주님이 주신 일과 앞뒤가 딱딱 맞아야 비로소 나는 구원받았다, 살았다, 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싶은 겁니다.

 

근데 제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이 세상이 내 증명하는 공간입니까? 이 세상이 내 존재 증명하는 세계에요? 아니죠. 주님 증명하는 세계죠. 그걸 가룟 유다한테 들이댄 거예요. 14장 20절에. 그걸 다시 읽어봅시다. 이걸 몇 번 읽는지 모르겠어요. “이르시되 열둘 중에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자, 가룟 유다가 예수님하고 같이 먹을 손을 넣었습니다. 누가 넣게 했습니까? 주님이 넣게 했죠. 왜 넣게 했습니까? 주님의 자기 존재 증명이에요.

 

그러면 가룟 유다는 뭡니까? 사건이어야 되죠. 지는 존재라고 우기지만 사건이어야 되죠. 그러면 존재는 누구만 있어야 돼요. 예수님만 존재해야 돼요. 예수님만 있음이 되고 우리는 그 있음을 위한, 있음을 위해서 우리는 벌 떼처럼, 벌통을 치면 확 쏟아지는 것처럼, 주님의 있음에서 쏟아진 하나님의 성도들입니다. 사건들이에요. 주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잠시 존재처럼 보이는 사건들이에요. 이 존재는 전에 대구강의에서 뱀 이야기 했죠. 뱀을 하나 그렸잖아요. 뱀이다~ 뱀이다~ 뱀 하나 그려놨죠. 뱀 하나 그려놨는데, 이 뱀의 특징은 뭐냐 동질성과 동일성이 이어져가는 거예요. 세월이 가도 인류는 하나다. 이런 것.

 

주님께서 사건이 되어가지고 이 뱀을 자를 때, 이게 뭐로 자르느냐 하면 언약으로 자르죠. 언약으로. 마지막이 중요합니다. 언약으로 자르는데 언약이 뭐냐 하면은 전면적이다. 또는 같은 다른 말로 단일적이다. 자,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렇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수준이 되니까 이렇게 어려운 말을 하는 거예요. 수준이 되니까. 인간은 자기 존재가 되어 있으면 자기가 선택을 해요. 나를 빛낼만한 부분과 나에게 쓸데없는 부분은 내가 전부다 도려내고 안 받아들여요. 내가 받아들일 것만 받아들입니다.

 

야구는 안 좋아하는데 축구 좋아하는 사람은 손흥민이 이야기하는 것을 골라버려요. 일본의 수출규제고 나발이고 손흥민이가 다음에 어디에서 뛰느냐, 손흥민이가 다음에 어디냐, 이강인이가 다음에 어느 팀으로 가느냐, 그게 관심이에요. 수출규제 백날해도 검색어 1위는 송혜교 송중기 이혼입니다. 수출규제 백날해도 소용이 없어요. 인간은 내 현실에 필요한 것만, 내게 즐거운 것만 부분적으로 뽑아오거든요.

 

근데 노아홍수 보세요. 노아홍수 특징이 뭐냐 하면은 그때 사람들이 먹고 마셨죠. 사고팔고죠. 그러면 사람들의 관심사가 뭡니까?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였습니다. 근데 어떻게 됐습니까? 먹고 마시고 사고팔게 되면 잘 사는 사람이 있고 못 사는 사람이 있죠. 기생충에서 위에서 사는 사람과, 기생충 있고 숙주 따로 있죠. 밑에 있는 사람. 따로 있잖아요. 영화 보셨어요? 잘 만들었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은 자기들끼리 비교하는 거예요. 자기존재와 존재를 비교하는 거예요. 그게 전혀 그들은 모순이 없어요.

 

홉스와 존 로크와 루소, 왜 그렇게 어려운 사상들을 내놓습니까? 모순되는 세상을 모순을 없애는 것으로 내놓은 사람들을 사상가, 철학가라고 해요. 어떤 이론을, 어떤 원리와 질서를 뽑아내는 사람들이에요. 과학자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백날 과학으로 뽑아내고, 반도체 만들고, 우주선 만들면 뭐합니까? 뭐 한방에? 홍수 한방에 다 잠겨버리는데요. 그래서 전면적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사건은 전면적이에요. 우리는 개인적으로 이만큼 살기 위해서 이만큼 애썼다. 니가 힘든 것을 알아? 니가 어려움을 알아? 이렇게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것을 덮는 것이 얼마나, 니 그런 노력을 얼마나 개무시 하는지 알아? 하고서 덮어버리는 거예요.

 

주의 말씀이 우리의 존재보다 더 센 겁니다. 왜냐, 우리가 아는 현실의 한계는 좁으니까. 우리는 평생 백 살, 이백 살 살아도 다 모르니까. 그럼 성도가 뭡니까? 성도라는 것은 그 언약적으로 심판이 왔을 때 우리는 어떤 위치에 있다? 의인이 아니고, 그 최종적인 범주에 모든 현실이 덮쳐왔을 때 우리는 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에요. 그 죄인을 주께서 미리 함께 그 심판과 더불어서, 그 심판 속에다가 주님의 피를 넣어서 우리를 건졌다는 것을 미리 알게 된 사람들이에요. 이게 모순이죠.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를 따지고 하는 그 자체를 완전히 개무시 했으니까.

 

이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바로 14장 14절,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자, 유월절이라고 했어요. 유월절은 전면적입니다. 유월절은 전면적이에요. 유월절 대비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본인들 존재를 살리기 위해서 끄집어낸 어떤 대책은 없습니다. 존재로서 유월절 사건을 감당할 수 없어요. 그러면 유월절에 대해서 히브리인들이 대처할 것은 모세를 통해서 준 어떤 표식이었습니다. 그거는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다? 아니다? 아니죠.

 

하나님은 인간의 존재에서 나온 아이디어는 완전히 저주해버립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것만 받아요. 그래야 말씀이 완성이 되니까. 그럼 하나님의 뜻이 뭐냐 죽음이죠. 자기 안의 죽음. 그러니까 결별이죠. 하나님이 하나님과 결별. 예수님 자기와의 결별. 그게 뭐냐 죽음이죠. 자기 십자가 죽음이죠. 그 죽음이 구약 때는 뭐였습니까? 출애굽 때는 뭐였습니까? 유월절 때는 뭐였습니까? 유월절의 어린양이죠.

 

자, 유월절은 시간입니다. 그러면 시간의 주인공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나누는 떡과 포도주가 주인공이 되겠죠. 이 사실을 아무도 못 알아듣습니다. 왜냐 하면은 주님이 하신 일, 성령이 하는 일은 모순을 없애는 인간의 존재입장에서는 전면적이기 때문에. 인간은 제한적이고 주의 일은 전면적이기 때문에 알아먹어요? 못 알아먹어요? 못 알아먹죠. 어린애가 어떻게 수학공식을 알겠습니까? 모릅니다. 어린애의 사고방식으로는 이 모든 우주를 다 담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죽음이었습니다. 그게 본래의 자리에요. 그냥 자살하면 안 돼요. 진짜 십자가에서 나온, 십자가에서 떼살이처럼 와락 쏟아진 그러한 사건인데 사람들은 범죄하고 난 뒤에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라고 해요. 나의 존재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이 존재는 나중에 안개처럼 없어질 거예요. 잠깐 있다가, 이 존재가 축소가 되면 사건이 되잖아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입니다.

 

그러면 없어져야 될 현실이 제대로 된 현실이겠어요? 아니면 십자가로 구성된 현실이 완전한 현실이겠습니까? 십자가로 구성된 현실이죠. 이것이 나중에 사도의 복음으로 전달됩니다. 복음으로 전달되면 악마에 사로잡혀 이 존재밖에 모르는 인간들이 이 말을, 이 복음을 알아듣는 사람은 인간 중에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 능력으로 알아듣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모순을 싫어하니까.

 

자, 18절을 봅시다.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가룟 유다를 자리 배석에서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멀리 떨어져서 앉혔더라면 가까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자부심을 느꼈겠습니까? 가룟 유다가 멀리 떨어져있다는 말은 제일 먼저 내칠 존재라고 이래 생각하겠는데,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어디에 붙입니까? 자기에게 제일 측근으로 붙여버리죠. 바로 옆이에요. 바로 옆에.

 

쟁반에다 떡을 담는데, 한 사람당 주기 위해서 떡을 담은 것이 아니고 여러 명이 먹으라고 쟁반에 떡을 담았을 때에, 그 그릇에 손이 함께 갈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제자. 그게 누구냐 하면 가룟 유다죠. 그러면 예수님이 누구한테 맡깁니까? 가룟 유다한테 맡겨버린 거예요. 니가 나를 처분하라고. 그게 말씀대로 간다고. 가룟 유다가 무슨 말인지 몰라요. 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이 좋은 날 보기를 기다렸거든요.

 

근데 가룟 유다가 놓친 게 있어요. 뭐냐 하면은 내가 예수님을 팔아먹어야 된다는 그 사명을 자기는 생각도 못한 겁니다. 그럼 그 사명은 누가 집어넣어 준 거예요? 하나님에 의해서, 주님에 의해서 악마가 들어감으로써 그 일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가룟 유다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뭡니까? 니는 존재가 아니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하나의 사건이다. 팔아먹어야 되면 팔아먹어야 돼요. 그럼 저 사람은? 저 사람은 구원받아야 되면 구원받아야 돼요. 이게 사건이에요.

 

그럼 존재 입장에서 보면 이거는 뭐냐 하면은 이거는 극한 분노를 유발할 일입니다. 왜 저 사람은 천국에 보내고 왜 나는 지옥에 보냅니까? 그러면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한 고백이다. 이러시는 거예요. 그러니 일체 내 존재로부터 출발할 수 있는 것은 시작부터가 주 앞에 거부당한 거예요. 왜? 죽은 놈의 말을 주께서 안 듣습니다. 우리의 말을 안 들어요. 우리가 그 위치에 있어요. 우리는 혜택을 입은 사람이지, 내 말을 곧이듣고 주께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었다는 말이죠. 우리의 자리는 날마다 죽는 자리에요. 뱀이거든요.

 

뱀을 잘라보자 이 말입니다. 뱀을 어디든 잘라보면 그 틈 사이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언약에 의한 뭐가 나오겠어요? 죽음이 나오겠지요. 노아 같은 경우에 죽을 뻔했잖아요. 다윗도 죽을 뻔했죠. 밧세바와 그리고 우리아를 죽였잖아요. 그거는 사형감이에요. 죽을 뻔했죠. 모세도 죽을 뻔했죠. 두 번이나 치고. 그것도 안 가겠다는 애굽에 가라고. 그 죽을 뻔할 때에 뭘 느껴요? 내가 죽을 뻔한 게 사실은 죽었다가 살아난 거예요. 사도바울도 그냥 갔으면 지옥 갑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찾아왔죠. 죽을 뻔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존재가 아니고 사건을 받쳐주는, 사건이 일어나서 나는 살면서 이게 사건의 이유를 보여주는, 남 보기에는 존재로서 보여주는 거예요.

 

이게 내가 아는 현실에서는 내가 존재로 보이지만, 주님세계에서 보면 뭐냐 하면은 주님 안에, 주의 십자가 사건을 담는 담지-체, 어려운 말로 그걸 담지-체라고 하는데, 담아두는 그릇으로 이미 우리는 사건화 된 삶을 세상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말씀대로 움직일 뿐이에요. 성령 받은 사람은. 그래서 남들이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면서 무슨 모습을 보느냐, 우리가 옛날 내 모습을 보는 거예요. 충분히 이해하죠.

 

“그럴 수 있다. 나도 그랬었으니까. 내 한 몸 지키기 위해서 예수를 이용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맞아. 니도 사기꾼이었고 나도 사기꾼이었는데, 사기꾼이라는 것을 미리 안 덕분에 우리는 구원받은 것이다.” 내 안에는 무슨 사건이 터져야 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 원래 내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십자가의 자리,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사건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그 경우는, 바로 이 사건을 그대로 담은 성령이 와서 우리에게 매일같이 반복시켜주는 겁니다. 이 옷을 좀 벗겨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성경보기 전까지는 참 신자답게 바르게 산 그런 보람도 있었지만 성경을 펼쳐보니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내가 원해서 가는 나라가 천국이 아니라 주님이 데리러 와주신다는 이것을 이제부터는 감사로 여기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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