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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6 00:43:02 조회 : 343         
설사하는 자아 191025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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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0.138) 19-10-30 21:27 
광주강의20191025a 마가복음14장 27-31절(설사하는 자아)-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4장 27절부터 봅니다.

 

27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여기에 ‘기록된바’라는 말이 나오죠. ‘기록된바’가 갖고 있는 말의 함축된 뜻이 무슨 뜻이냐 하면은 하나님과 인간이 만들어지기 전에, 원초죠.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에 있었던 그 사실,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의논된 사실이 ‘기록된바’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이미 예견된 것이 ‘기록된바’에요. 여기에서는 인간이 배제가 되어 있죠. 인간은 배제되는 거예요. 그럴 때 악마는 어떤 존재냐 하면은 하나님께 거부당한 존재가 악마입니다. 이거는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나와요. 하늘의 전쟁이 있었는데, 하여튼 하나님께서 용, 옛 뱀을 거부했다, 쫓아냈다는 대목이 나오잖아요.

 

그러면 악마가 쫓겨서 어디로 피신했는가 하면은 땅으로 피신한 거예요. 땅으로 피신했으니까, 그 땅에는 누가 있느냐 하면은 인간이 있었던 거죠. 인간이 있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기록된바’가 인간의 관여가 없이, 인간이 배제된 상태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이 의논한 그 사실이 ‘기록된바’라면, 그 ‘기록된바’대로 이게 땅에서 일이 벌어지게 된다면 인간은 계속해서 ‘기록된바’에 대해서 수동적이 되고 또다시 배제되어야 마땅한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악마는 인간을 볼모로 잡았습니다. “나를 치려면 하나님이 만든, 신이 만든 인간도 같이 쳐야 될 걸” 이래 나온 거죠. 인질로 잡은 거죠. 인질로 잡았는데, 그러면 보이지 않는 악마, 우리 인간에서 보이지 않는 악마의 그 모습이라는 것은 결국 볼모로 잡혀있는 인간의 변동사항, 인간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서 악마가 어떤 식으로 신에게 대우받고 있는가를, 그렇게 다루어지고 있는가를 바로 알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악마가 하나님 앞에 거부당한 존재라면 인간은 악마의 볼모기 때문에 당연히 인간도 하나님 앞에 거부당하는 것이 마땅하죠. 그래서 목자가 치니 양들이 흩어지는 거예요. 그거 뭐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양들이 흩어짐으로 말미암아 이거는 인간의 개인적인, 사적인 어떤 이런 잘못하고 전혀 관계가 없는 거예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상관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이 벌어지려면 처음에 영적세계에서,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싸움을 벌였던 어떤 대상, 악마와 전쟁을 벌였던 어떤 분이 등장을 해야 되겠죠.

 

그 분이 오늘 본문에서는 뭐로 등장하느냐 하면은 목자로 등장하는 거예요. 목자로. 악마가 목자를 치니까 어떻게 된다? 양들이 흩어지는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목자만 남기고 다 흩어져버리는 겁니다. 그 말은 어떤 인간도 악마를 자기 실력으로 이길 수 있는 능력은 없다가 되는 겁니다. 인간의 힘으로 악마를 못 이기면, 그러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뭡니까? 악마를 이길 생각하지 말고 악마한테 자기 운명을 맡기면 되는 거죠. 참 쉽죠.

 

그럴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악마의 목구멍 속에 캡슐, 약이 되어서 들어가라 이 말이죠.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듯이, 그냥 바다 속을 피하지 말고, 요나를 뺀 나머지 선원들, 그 사람들이 되지 말고, 요나는 혼자 남아서 바다 속에, 죽음이라는,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 속에 그냥 뛰어 들어가는 거예요. 그게 선지자의 할 일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재미나는 것은, 양들이 흩어졌잖아요. 근데 양들이 흩어지면서 흩어진다는 것을 인간은 인식을 할 수가 없어요. 목자를 쳤기 때문에 양들이 흩어진다는 사실을 모르고 인간은 악마의 볼모, 악마의 정신에 있기 때문에 뭐하기에 바쁘냐 하면은 자기정립하기에 바쁩니다. 자기정립하기에 바빠요. 자기정립 할 때 나쁘게 정립하겠습니까? 정당성이 있게 정립하겠습니까? 자기정당성으로 똘똘 뭉친 자기정립하기에 인간은 평생의 세월을 다 보내고 있습니다. 악마는 인간에게는 없으니까. 예수님은 이미 돌아가신 분이고. 죽은 이순신 장군 불러서 뭐할 건데요? 지금 중요한 것은 관심사가 자기정립이에요. 자기정립.

 

근데 인간이 자기정립을 한다는 것은, 원래 이런 마음을 누가 심어준 것입니까? 악마가 심어준 거예요. 로마서 5장에 보면 죄가 덮쳐서 그런 거예요. 악마의 심정이 덮쳐서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러면 악마가 하나님 앞에 거부당했죠. 그러면 자기정립 하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 거부당하겠어요? 받아들여지겠습니까? 거부당해야죠. 그러면 인간은 결코 양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인간은 양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왜냐하면 양이 되려면 무엇을 경유해야 되느냐 하면은, 목자의 양이라는 사실을 경유를 해야 되는데, 자기정립하기 바쁜데, 자기만 우뚝 서기 바쁜데 여기에 뭐 목자고 양이고 간에 필요치가 않거든요.

 

인간은 본인이 목표에요. 본인이. 본인 자체가 목표에요. 그리고 성경말씀이라든지, 예수라든지, 전부 다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은 자기에게 자기정립이 이미 목표로 정해져있기 때문에, 내가 정당한, 괜찮은 인간으로 만드는 수단으로서 예수, 삼위일체, 이런 것들이 동원되는 겁니다. 목표는 이미 자기정립이에요. 그냥 정립이 아니고 정당한 나, 훌륭한 나, 가치 있는 나. 성경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너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내놓아보라고 하는 거죠. 아, 그거 보통 어려운 숙제가 아니에요. 나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내놓아봐라!

 

또는 어떤 과장이 대리나 신입사원한테 이야기하죠. “니가 이번 프로젝트에 계획안을 한번 마련해봐라.” 이렇게 하는 것처럼, 주님께서 성경을 주면서 너보다 더 가치 있는 계획안을 마련해보라고 우리에게 던지면 우리는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할 말을. 정답은 뭐냐 하면은 이사야 6장에 나와 있죠. 그 말에 대한 정확한 답변은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런 숙제를 줄줄 상상도 못했죠.

 

내 자아정립, 그것도 그냥 정립이 아니고 어떤 정립이라고 했습니까? 정당성이 있는 자아정립, 이게 우리 삶의 목적이고 목표기 때문에, 만약에 나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우리가 하는 근성, 본성에서는 뽑아낼 수가 없는 거예요. 건져낼 수가 없는 거예요. 자아정립이란 말이 어려우면은, 쉽게 말하면 “나 어때요?” 이거죠. “나 어때요?”라고 묻는 거예요. 자꾸 주위 사람들을 붙들고 “나 어때요?”라고 되묻는 겁니다. 그 질문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질문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수단이어야 하는데, 목표를 향한 수단이어야 하는데, 그만 갑자기 수단으로서 이게 스톱이 된 거예요. 여기서 멈춰버렸어요. 성경공부하면서 자기 쪽에서 멈춰가지고 이게 진척이 안 되네. 내가 구원받았으면 됐지 뭐 더 이상 내가 챙길 필요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구원론이라는 것은, 인간이 악마의 볼모로 있다는 것을 아주 제대로 정리해주는 것이 뭐냐 하면은 구원론이죠. 내가 이래서 악마의 앞잡이가 맞구나, 라고 하는 것을 제대로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군대에서 제식훈련을 하는데, 앞에 있는 교관이 “앞으로 가!”라고 이렇게 했는데, 안 가요. 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 마가복음 14장 28절에서 그 “앞으로 가!”라고 하는 것을 명령합니다.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갈릴리. 갈릴리는 인간인 이상 갈 수가 없는 곳이에요. 뭐 버스타고 간다고 가는 갈릴리가 아니에요. 중간에 뭐가 있어요. 뭐냐, 죽은 다음에 다시 살아남이 없으면 갈릴리에 갈 수가 없어요. 갈릴리에 간다는 말은 예수님과 합류하라는 뜻이거든요. 그냥 동네 갈릴리에 간다는 뜻이 아니고. 예수님이 있는 곳에 니가 과연 합류가 가능하겠느냐? 그걸 묻는 겁니다.

 

그 질문을 아까 했는데 다시 해볼까요? 너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내놓아보라는 거예요. 이 인간에게 한 질문은 곧 누구한테 하는 질문이냐 하면은 예수님 본인의 사명이, 본인이 본인의 사명에 대한 질문과 동일해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너희들이 더 나아갈 것을 내가 와서 내가 보여줄게. 그리고 너희들은 나 있는 곳에 너희들도 있게 하리라” 이렇게 한 겁니다. 인간에게는 그것이 목자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만 조건이 있어요. 뭐냐 하면은 이게 자아정립이 될 때는, 자아는 쉽게 우리말로 하면 나죠. 나 정립으로 스톱이 될 때는 여기에 뭐가 없느냐 하면은 양이라는 개념은 수입될 수 없어요. 왜냐 하면은 양이라는 것은 누구의 예속, 누구의 종속을 의미하는 단어기 때문에 그래요. 그냥 양은 혼자 있는 법이 없잖아요. 반드시 뭐를 전제로 합니까? 반드시 목자 있음을 전제로 하고 그 양을 목자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목자를 증거 하는 양이에요. 양들 저희끼리 왕따 당하고 그런 것 없어요.

 

목자입니다. 목자. 목자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양이 있는 겁니다. 양이 만약에 인간이 돼버리면 뭐가 부재 하냐면 목자의 부재에요. 목자가 없어요. 내가 양이 안 되면 목자가 없다니까요. 그런데 목자의 존재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인간에서 뭐로 바뀝니까? 양으로 바꾸어주는 거예요. 그리고 양이 어떻게 처신하느냐는 ‘기록된바’대로 처신해요. 뭐냐 하면 흩어져야 돼요. 자, 양이 흩어질 때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흩어지죠. 흩어진다는 말은 목자를 잃었다는 뜻입니다. 목자를 잃었다는 뜻이에요.

 

마태복음 9장 14절에서 예수님께서 그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계시거든요. 결혼식에서 주인공은 결코 신부가 아니고 신랑이다. “신랑과 함께 있다면”이라고 해요. “신부와 함께 있다면”이라고 하지 않아요. 하객들이 신부 있다고 결혼식을 좋아하면 안돼요. 누가 있어야 돼요? 신랑이 있어야 돼요. 신랑이 함께 있다면 결혼식은 금식하거나 회개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너희들이 정말 금식할 날이 오는데 그때는 누구를 잃을 때? 신부를 잃을 때? 아니에요. 신랑을 잃을 때에요. 그 말은 뭐냐, 신부란 신랑을 증거 하는 이유로 존재해요. 다른 존재는 필요가 없습니다. 내 신랑이 따로 있다는 것을 위해서 신부가 되는 거예요. 만약에 신랑이 없다면 그 사람은 돌싱 되죠. 혼자 사는 사람이죠. 신랑이 없을 때는 자기 혼자 자기정립으로 거기서 스톱하는 거죠. 자기 자신이 어떻게 사는가가 목표가 되니까.

 

자, 기록된바 양이 흩어진다고 되어있으니까, 제가 강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벌써 잊어버렸으니까.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뭐라고 했습니까? 악마가 왜 하나님 앞에 거부당하느냐? 그거죠. 인간의 개인적인 구원이 아닙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없어요. 개념이 양으로 바뀌든지 해야 돼요. 양인 자와 양이 아닌 자. 그걸 염소라고 이야기하는데, 양과 염소 그 둘로 되지, “인간입니다.”라고 하는 그런 단어는 성경에는 없어요. 성경에서 그런 단어를 사용할 이유도 없고요.

 

성경자체가 창세전에 있었던 사실을 언급하기 때문에, 우리 개인적으로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라는 이 구원론은 결국 무슨 소리냐 하면 우리는 악마의 귀신 씌었습니다, 라고 하는 소리하고 똑같은 겁니다. 목표가 뭐냐 하면 자아정립이고, 자아정립이 완성되는 것을 사람들은 뭐로 봅니까? 구원으로 보잖아요. 자아정립에, 자기정당성에 합당한 것은 나는 지옥 가서는 안 되고 어디에 가야 된다? 천국에 가야 된다는 거예요. 자, 자아 잘났다는 것을 증명한답시고, 나 같은 인간을 천국에 넣어줘야지, 누가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라고, 인간들이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무엇이 누락이 되느냐 하면은 인간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악마와 함께 있는데, 악마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데 그 악마가 하나님 앞에 이미 거부당한 존재거든요. 그러면 인간이 성경을 통해서 알 것은 뭐냐 하면은 왜 악마는 하나님 앞에 거부당했는가, 그거 알면 되잖아요. 참 쉽죠. 문제 끝났죠. 뭐. 왜 악마는 거부당할까? 악마니까 거부당한다고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 마시고, 악마는 도대체 뭐가 문제기에 하나님께 거부당하는가? 그걸 알아야 왜 나는 악마로부터 이기지를 못하고 악마한테 묶여서 살아가는가? 같은 노선에서 발생될 수 있는 그런 질문이 되는 겁니다.

 

악마가 거부당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선악과 때문에. 선악과 핵심을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인간이 경험하지 않은 것을 거기에 담았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죽음입니다. 이미 인간이 죽기도 전에 니가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되어 있죠. 이 세상에서 도둑질했다고 죽이지는 않죠. 도둑질이 나쁜 짓은 맞는데 죽이지는 않잖아요. 그렇죠. “니 명줄을 잘라야 되겠다.” 이러지는 않는다 이 말이죠. 도대체 선악을 아는 게 뭐 그리 큰 죄라고, 따먹은 게 뭐 죄라고 극단적인 처벌이 주어져요? 선악을 알면 죽는다고 주어져요. 극단적인 처벌이거든요.

 

이 극단적인 처벌이 누구를 겨냥하느냐, 인간을 겨냥하면서도 결국은 이미 악마가 인간을 포로잡기 위해서, 악마가 인간을 노린다는 사실을 누가 아세요? 하나님이 아시는 겁니다. 그래서 뱀이 설치도록, 뱀 속에 악마가 들어가도록 하나님께서 그냥 방치해두잖아요. 아주 주님의 계획이 착착 잘 진행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계획대로. 뱀으로 분장한 악마가 인간을 유혹하도록 그냥 놔둬버리죠.

 

무엇이 중요하냐 하면은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그 말 자체가 목표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말씀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 자체가 목표에요. 말씀 자체가,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것이 목표기 때문에 인간은 거기에 합당하게, 그 말씀의 운명에 의해서 우리는 놀아날 수밖에 없어요. 악마에게 만약에 날개가 있다면 악마는 인간에게 날개를 씌워준 겁니다. 인간이 제2의 악마, 제3의 악마가 된 거죠. 악마한테 주어져야 할 그 모든 징벌이 그대로 인간에게 다 주어집니다.

 

그 근거는 요한계시록 20장에 다 나와요. 두 번째 사망에 들어갔는데, 원래 거기는 악마가 들어가야 될 유황불에 누가 들어갔느냐 하면은 악마를 따른 자들이 거기에 다 같이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그 악마를 따른 자들이 누구냐 하면은 흔히 말하는 인간들이에요. 인간들입니다. 인간은 이유도 모르는 체, 정말 거짓말 안 하고 한평생 살고 착하고 바르게 살면서 어디에 갑니까? 지옥을 가는 거예요. 얼마나 이게 재미나는 일이에요. 본인이 지옥 가는 이유에 대해서 지금까지 지옥 가면서도 몰라요. 참 재미난 일입니다. 아무리 요모조모로 봐도 지옥 갈 이유가 없어요. 도둑질 한 것은 기억이 나지만, 도둑질 한다고 지옥 가는 거 아니잖아요.

 

도둑질이 아니고, 간음이나 살인이 아니고, 그 죄 말고,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 때문에 내가 지금 지옥을 가고 있는 거예요. 가보면 알 거예요. 아, 아무 이유도 없이 지옥에 오게 되었구나! 아무 이유도 없이. 마치 이삭의 첫째아들 에서처럼.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지옥 가는 거예요. 결국 하나님의 등살에, 하나님이 하시는 그 게임에 놀아난 거예요. 우리 인간들이. 인간을 좀 존중해드릴까요? 그러면 놀아나신 거예요. 놀아난 거나 놀아나신 거나.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니까 거기에 논리를 하나 집어넣겠습니다. 인과론(因果論)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인(因)이라는 것은 원인이죠. 과(果)는 결과입니다. 원인과 결과에 대한 논리, 인과론입니다. 인과론에 대해서 이 세상은 두 가지, 또는 세 가지로 하는데, 그냥 두 가지로 나누겠습니다. 첫째는 뭐냐 하면은 사적인 인과론입니다. 사적인 인과론(성)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개인적으로 방 청소를 했더니만 깨끗하다. 사적인 인과론이에요. 근데 방 청소하면 핵문제가 해결이 됩니까? 아니죠. 어디까지나 뭡니까? 사적이고 개인적이죠.

 

내가 방청소를 했는데 왜 북한은 안 망하고 김정은이는 큰소리치고 일본은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느냐? 내가 방 청소했는데. 그게 왜 안 되죠? 그래서 옛날 학자들은 뭐냐 하면은, 개인적으로 방 청소하니까 깨끗하잖아요. 그 인과론을 진리라고 본 거예요. 근데 진리가 좀 더 영향력을 입혀야 하겠는데,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방 청소 했는데 날씨가 좋아지고 하는 그런 게 없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인간들은 뭘 하느냐 하면은 사적인, 개인적인 것을 모아서, 모아 모아서 공적으로 만들어요. 공적인 인과론을, 보다 빈틈이 줄어드는 한, 실수를 줄이는 한 진리치에 근접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한 게 있었던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의견을 모으는 거예요. 의견을 모은다. 자기 전문분야 고집하지 말고 서로 의견을 모으자. 이걸 통섭이라고 합니다. 통섭. 통섭이라는 말이 좀 어렵죠. 그럼 쉽게 말하면 소통.

 

하나의 공동체에 개인의 의견을 가지고 주장할 게 아니라 서로의 의견을 하게 되면, 각 개인마다 a, b, c, d.. 각 개인마다 뭡니까? 자기가 했던 경험이 있죠. 경험치가 있죠. 그게 각각 인과론이죠. 인과론을 다 들고 오라 이 말이죠. 그래가지고 그 인과론으로 이번 일을 하는데 가장 기대치에 부합되는, 확률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머리를 맞대고 끄집어내어보자. 이게 공적인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공적인 것을 넓게 말하면 국가에요. 국가가 의견수렴해서 한다 이 말이죠. 공적인 것이 작게는 직장이고 교회고 기업이고 다 그렇죠. 조직체고 군대고. 그렇다 이 말이죠.

 

“장군! 여진족이 쳐들어옵니다. 어떻게 할까요?” “당장 들어가라!” “아니 되옵니다. 장군님! 지금 날씨가 추워서 병사들이 다 지쳤습니다.” 이거 뭐예요? 이거 의견수렴이잖아요. 병사들이 지쳤을 경우에는 전투의 효과가 없다는 것은 부하장군이 이미 자기의 인과론에 의해서 진리체계에 가깝다고 했는데, 근데 방금 온 초짜가 그것도 모르고 공을 세우려고 나간다고 한다면, 억지로 말리는 거죠. 말린다 이 말이죠. 다윗이 우리아 장군보고 성 가까이로 나가라고 할 때 누가 말립니까? 요압이 말리죠. “가면 죽는데..” “야, 죽으라고 보내는 거야. 나도 알아.” 자기가 갖고 있는 자기의 인과론을 끄집어내겠죠.

 

자, 왜 끄집어낼까요? 아까 처음에 배웠습니다. 왜 끄집어냅니까? 자아는 자기에게 정당성이 있을 때 자아정립이 확실하기 때문에. 정말 나는 살만한 가치가 있음을 증명해줄 수 있기 때문에. 내 자아의 정당성을 현실이 보장해줘. 이럴 때 나는 진리에 지금 준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지금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끼는 거예요. 이 모든 인과론에 있어서 결국은 이 인과론이 어디에 가느냐 하면은, 아까 정당성이라고 했죠.

 

정당성이라고 하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가치론이에요. 가치론. 가치론은 뭐예요? 옳다, 그르다가 아닙니까? 선이다, 그 다음에 악이다. 이미 전부 다 모든 인간은 악마는 인정 안 해도, 인정 할 필요가 없어요. 본인이 악마인데 누굴 인정해? 악마고 신이고 필요 없어요. 악마가 있든 신이 있든 예수가 있든 목적은 이미 정해진 거예요. 뭡니까? 나는 정당하다.

 

아하수에로 왕이, 이번 겨울수련회 주제가 에스더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영화 보면 나와요. 영화 300에 보면 나와요. “나는 관대하다.” 너무 관대하다가 전쟁에 다 패하죠. 관대하다가 뭐예요? 악이 아니고 나는 선하다. 나는 선한 존재가 된다면, 내 기존의 과거인과론이라면 선한 존재에게는 하나님께서 내 소원대로 이루어줘서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라는 인과론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근데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왔기 때문에, 참모들이 있을 게 아닙니까? 참모들이 박사들이에요. 박사들. 박사들이 알거든요. 왕이 유한한 존재 아닙니까? 유한한 존재. 유한양행하고 관계없어요. 유한한 존재기 때문에 다수의 의견이 무한한 신의 의견에 더 어프로치approach, 근접할 수 있다고 생각해가지고 부하직원을 많이 두는 겁니다. 근데 왕이 꿈을 꿨는데, 박사들한테 꿈을 뽑아내라고 하는데 뽑아낼 수가 없는 거예요. 참 느부갓네살이 무리한 요구를 한 거죠. 남의 꿈을 해석하라고 하니까 힘들죠. 근데 그거보다 더 무리한 요구가 있어요.

 

하나님이 요구한 겁니다. 자아정립, 그냥 자아정립이 아니고 정당한 자아정립을 목표로 결정한 나에게 주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십자가를 뽑아내라! 이거는 미친 짓입니다. 나보고 십자가 뽑아내래. 다음시간까지 뽑아내래. 내 속에서 십자가를 뽑아내라는 거예요. 새 언약을 보여 보라는 거예요. 나는 정당한 자아정립 이걸 목표로 하고 있는데. 이걸 목표로 하고 지금 달려가고 있는, 이걸 사는 보람으로 여기고 있는 나에게 니가 죽어 마땅함을 뽑아내라는데, 이걸 어디서 뽑아냅니까? 안 되죠.

 

이미 주님은 알아요. 인간이 인과론인데, 자기정당성의 인과론에 매여 산다는 것을 알아요. 이런 사적인 인과론 말고, 사적으로 모아놓은 공적인 인과론 말고, 다른 인과론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첫 번째는 사적인 인과론(성), 근데 이거는 사적이나 공적인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가 뭐냐 하면은 구조적 인과론(성)입니다. 구조적 인과론, 이거는 뭐냐 하면은 부분 속에 전체가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우리의 삶속에 십자가 죽음이 전부 다 들어있는 겁니다.

 

자, 부분이라고 하는 것은 원인이고, 결과가 전체잖아요. 근데 전체가 우리 부분 속에 미리 다 들어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이게 성령이 임해야 되는 거죠. 성령이 임하게 되면 우리 안에서 대투쟁이 벌어지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말씀을 고집합니다.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질 속성이 이미 너 안에 있다. 목자를 치니 내 목숨 살라고 도망치는 요소가 있다. 그게 양의 요소다. 그것과 나의 정당을 유지하려면 신이든 누가 오든 나는 살만한 가치가 있음을, 온갖 자료들을 다 동원해가지고, 평생을 다 동원해가지고 내가 이정도야, 라는 것을 구축해놓은 증거물이 있겠죠. 자료집을 모아놓은 역사, 아카이브archive‘기록 보관소’,같은 그런 게 있는 거예요. 그게 나의 스토리에요. 나의 스토리.

 

내 과거의 모든 기억은 내가 이정도로 열심히 살았고 훌륭하게 살았다는 거예요. 어떤 드라마에 보면 그런 게 있어요.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드라마인데, 자식을 괴롭히니까 용식이 엄마(고두심)가 하는 말이, “내가 저 자식 키우기 위해서 나는 나의 체면과 자존심과 명예를 다 버렸다.”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뭡니까? 정말 버린 거예요? 정말 그 엄마는 자기 자존심과 체면이고 명예고 뭐고, 식당하면서 온갖 수모와 욕을 다 얻어먹으면서도 뭐 하나 키워내기 위해서? 아들 하나, 외아들 하나, 유복자 하나 키우기 위해서 나는 모든 것을 헌신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들은 뭐가 돼요? 정당한 나의 자아정립에 증거물이 되겠죠.

 

만약에 아들을 욕하고 아들에게 해코지하면 그거는 뭡니까? 자기 자존심을 버렸으니까. 자기 자존감을 버린 거예요. 자존감이 뭐냐 하면은 자아에요. 자존감이 없어버리면 누가 죽는다? 나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한 것이 뭡니까?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요구했잖아요.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전부에요. 전부. 전부, ALL이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입니까? 아버지한테 버림받은 거죠. 아버지한테 예수님은 전부에요. 왜? 주가 되신 분이니까. 하나님은 전부를 다 바쳤거든요. 전부를 다 버렸어요. 하나님께서.

 

악마에게는 버림이 없어요. 무조건 끌어 모으는 거예요. 악마는 자기정당성이니까. 다시 말해서 악마는 왜 주님께 대드는가 하면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져버리면 악마는 지옥가야 되는 거예요. 자기정당성이 없어지죠. 악마가 그렇다는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찾을 수 있지만, 그렇게 복잡하게 찾을 필요가 없어요. 인간을 보면 누구를 알아요? 인간의 품성이 악마의 품성이에요. 왜? 악마 버리면서 인간도 같이 버리니까. 유황불에 들어가는 것이 악마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들도 다 들어가요. 거기에. 오히려 지옥에 안 가는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들이에요. 뭔가 이상한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 양이 된 사람이에요. 양일 거예요. 분명히. 주님의 목자가 일방적으로 선택한 사람이에요.

 

잠깐 요한복음 10장 한번 볼까요? 26절에,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 하는도다” 내 양이 아니에요. 이거 누가 정합니까? 너는 내 양이다, 너는 내 양이 아니다, 이걸 누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겁니까? 목자 지 맘대로죠. 목자 지 맘대로예요. 목자 맘대로예요. “저 양될래요!”라고 손들면 “손 내려라!” 그냥 목자가 정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양을 구분하기 위해서 목자가 온 게 아니고 목자가 목자 되기 위해서 양이 필요한데, 목자가 목자 되기 위해서 양하고 의논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목자가 양하고 의논을 해버리면요, 목자 값이 안 돼요. 그리고 그 목자는 죽으신 분이에요. 목자가 죽는데 양이 안 죽겠다고 하는 그것은 문제가 있죠. “같은 나라 안 갈 거야? 니 내 나라 안 올 거야?” 이래 되거든요. 주님께서 제자들을 양으로 만드는 이유는 그들의 뭘 없앤다? 그들의 자존감, 자존심 다 없애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은 자아의 죽음이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 제목을 이렇게 정했습니다. ‘설사하는 자아’ 누었다하면 확 빠지는 거예요. 확 빠져버려요. 무기력하고 의욕이 아무것도 없어요. 들어갔다 하면 빠져버리니까. 그래서 제가 지난 수요일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들어도, 내 자아라는 것은 아무 쓸데없거든요.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 의견을 자꾸 주님한테 내기 때문에 이게 방해물이 돼요. 그래서 뭐냐 하면은 자꾸 발판을 동원시킨다고 해요.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게 너무 싫은 거예요.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게 너무 싫어요.

 

그래서 발판을 딱 갖다놓으면 이게 내려오다가 스톱이 되잖아요. ‘뭔가 실체가 있는 것 같아.’ 우리는 그럴 때 갑자기 안심이 돼요. ‘그렇지. 내가 뭐 죄인이라고 고백을 하면 주께서 가치 있게 볼 거야.’ 또 다시 자기의 정당함. 예수 믿는 것은 정당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다시 나의 정당한 자아정립을, 그 개 같은 버릇은 버리지 못하고, 설사하면 되는데 설사를 안 해요. 쫙쫙 빠지면 되거든요.

 

구조적 인과론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전체가 원인이 되어가지고 부분을 뭐로 보느냐 하면은 하나의 효과로 보는 거예요. 효과. 효과 또는 요 근래 자주 쓰는 말, 표현형. 아까 이야기했지만 나쁜 짓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에요. 나쁜 짓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그쪽이에요. 지옥이에요. 처음부터 인간은.

 

그래서 로마서 6장 23절에 그런 말씀이 있잖아요. 사람이 죽는데 왜 죽느냐, 죽는 이유가 나와 있어요. 죗값으로 죽는 거예요. “죄의 삯은 사망이라” 죄의 값은 사망이에요. 이 말은 반대로 죄를 지어서 사망이라는 것은 우리의 사적인 인과론에 의해서 잘못으로 오해한 거고. 구조적 인과론이라면 죽는 것을 봐서 우리는 뭘 해도 죄구나, 라는 것을 효과로서 아는 거예요.

 

죄가 있다는 효과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실패하라고 있는 거예요. 실패하라고. 김밥을 말았는데 밥은 맛있는 것 같은데, 뭘 해도 내가 생각한 그 김밥하고는 다른, 또 실패했어요. 실패, 실패가 계속 누적이 됨으로써 오늘 지금 오후에 죽어도 괜찮아요. 왜? 우리는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 죽여도 우리가 왜 죽이십니까? 라는 말을 하면 안 돼요.

 

정리하게 되면 사적인 인과론으로서는, 내가 뭘 행하면 어떤 결과가 들어온다는 것이 사적인 인과론이라면, 구조적 인과론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부분과 전체의 관계성. 이게 바로 구조적 인과론입니다. 이 구조적 인과론을 가지고 성경전체를 해석하게 되면 해석 안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구조적 인과론에서 자아는 어디에 갔습니까? 이거 뭐 설사해버렸으니까. 빠져버렸어요. 자아빠지면 자존감 빠지죠. 자아 빠져버리면 정당한 자아정립이 실패죠. 실패로 끝나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무슨 작업을 하느냐 하면은 인간을 또는 제자들을 뭐로 바꾸는 작업을 합니까? 양으로 바뀌어야 이게 ‘기록된바’라는 그 텍스트에 들어설 수가 있어요. ‘기록된바’라는 텍스트에 들어서려면 인간으로 들어서면 안 되고, 양으로 들어서야 되고, 양에게 어떤 효과가 있어야 하느냐 하면은 잃어버린 양, 흩어진 양으로서 들어가야 돼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다 제 갈 길로 갔거늘 우리 무리의 죄를 예수님께서 다 담당하셨다. 이사야 53장에 나오죠. 그게 기록된 거예요.

 

이걸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악마가 인간을 왜 찾아왔는가 하는 이유가 드러나요. 뭐냐 하면은 ‘설마! 하나님께서 자기가 만든 인간까지 내치겠느냐?’라고 생각하고 인간을 인질로 한 거예요. “당신이 만든 인간, 나 죽는 것은 안 아깝지만, 당신이 만든 인간이 같이 죽으면 당신은 대책이 없지? 봐! 내가 이겼잖아!” 그래 나오는 거예요. 도둑놈이 집에 들어왔는데, 집에 들어와 가지고 들키니까 화장실에 갔는데 욕조에 애가 있더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강도가 욕조를 붙잡고 나를 붙잡는다면 이 애는 다친다고 할 때에 집주인은 아주 거침없이 욕조하고 애하고 다 갖다 버리는 거예요. “됐냐? 뭐 또? 또? 협박할 거 또 내놔봐! 감히 하나님을 협박해. 아무리 신이지만 이런 것은 못할 거라고 그런 식으로 대드는 거야? 다 갖다 버려라! 다!” 근데 다 갖다 버렸는데 누가 안에 들어 있습니까? 누가 있어요? 주인 되신 주님도 아버지로부터 갖다 버림을 당한 거예요. 우리 하나님의 주특기가 갖다 버리는 거예요. 아이고, 인간이고 마귀고 다 갖다 버리는 거예요. 다 갖다 버려요.

 

아, 이 얼마나 속 시원한 이야기입니까? 이번에 영국에 벨기에에서 배타고 꼼수부리다가 여자 8명 남자 31명 39명이 냉동 컨테이너에서 중국 사람들이 다 죽었죠. 그 운전사가 뭐 잘못했습니까? 그냥 컨테이너 운반만 하면 되는 줄 알았죠. 그 안에 사람이 들어있는 줄 몰랐잖아요. 그렇죠. 우리가 개인적으로 이 구조적 인과론을 모르고 사적인 인과론으로 오늘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저 오늘도 나쁜 짓 안 했어요. 제 마음이 너무 착하죠. 제가 보기에도 너무 착해요.” 우쭈쭈 너무 착하다고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자기는 전혀 잘못한 게 없어요. 잘못 안 한 정도가 아니고 온갖 오지랖은 다 부려서 누구처럼 다 간섭하고 다 관여하죠. 얼마나 착해요. 순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욥기 1장에 나오죠.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게. 다 갖다 버리겠다는데. 사적으로 나는 지금껏 남한테 나쁜 소리 안하고 항상 남한테 해코지 안했다. 그게 뭐예요? 그게 자기에게 자존감이 되고, 그래서 나는 누구는 다 멸망하더라도 나는 살아남고 죽어서도 천국갈 수 있는 그런 정당성이 있다 하잖아요.

 

이걸 녹여버리는 겁니다. 이 자아를 녹여버리는 거예요. 주님께서. 주님께서 이 땅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녹여버릴 때 그러면 나는 죽고, 나는 누가 죽입니까? 말씀이 죽이죠. 말씀이 죽일 때 거기서 죽은 나에게서 살아나는 것은, 말씀이 죽이니까 그 말씀이 살아나는 거예요. 그 말씀 안에 뭐냐, 양이라는 새로운 형상이 거기서 나오는 거예요. 나는 죽고 양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평소에 나는 무엇을 억압했고 핍박했습니까? 내가 나의 양됨을 핍박한 거죠. 내가 양됨을. 그 양은 누구하고 연결되어 있어요? 목자하고 연결되어 있죠.

 

그러니까 그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님 붙들고 공격한 게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공격했죠. 예수 믿는 사람들을 공격했는데 사도행전 9장에서, 다메섹에 내려가는 도상에서 예수님께서 그걸 뭐라고 해석합니까? 사울아 니가 나를 핍박한다고 했죠. 예수님을 핍박한 게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는데 그게 예수님을 핍박한 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이 착하다는 뜻이에요? 그들은 바르게 살았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그 예수 믿는다는 사람은 그들이 노력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아니고 주께서 친히 지금 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주님 작업에 지금 사울이 끼어든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님의 작업을 방해하는 그 사울까지, 지옥 가는 사울을 뭐로 빼돌렸습니까? 주께서 찾아와서 구원하잖아요. 왜 그래야 되느냐? 그래야 사울이 자기 힘으로 자아 쪽에서 말씀 세계로 온 적이 없음을, 사울을 통해서 분명하게 증거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주께서 하게 하신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은 갈릴리에 내가 먼저 간다는 겁니다. 갈릴리. 본문 마가복음 14장 28절,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이 두 말의 차이를 한번 찾아보세요. 여러분들이 이제 구조적 인과론을 알았으니까, 이제는 알 거예요. 문제 낼 테니까 알아맞혀 보세요. 저주를 내가 받는다. 이 말이 맞는가, 아니면 나를 통해서 저주가 나타난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두 번째죠. 나를 통해서 저주가 나타나죠. 왜? 나는 날마다 뭘 정립하기 때문에? 자아를 수집하기 때문에. 자아를 녹이려면 청산가리 가지고는 안 되고 주의 주신 모든 사항이 내 자아를 녹여서 설사 나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주께서 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항을 뽑아내는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자기 숙제에요. 오늘도 니 하루를 통해서 십자가를 뽑아내는 거예요. 십자가. 오늘 본문대로 하면 십자가는 이렇게 하면 되죠. 목자가 침을 당하는 것. 깨짐을 당하는 것. 그게 십자가 사건이죠. 목자가 얻어맞음으로서 양들은, 제자들이 아니고 양들은 흩어지도록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 아버지하고 합의가 되어 있었던 겁니다. 합의가.

 

어차피 인간들이야 하나님의 영적세계에서 효과에 불과하니까. 하나의 표현형에 불과하니까 인간이 거기에 끼어들 필요는 없어요.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을 또 이야기할게요. 지옥 가는 사람은 자기 죄도 모르고 가요. 내가 지옥 갈 이유도 모르고 그냥 간다니까요. 아주 신났어요. 신나게 지옥 간다니까요. 전부 다 어디에 빠졌는가 하면은 사적인 인과론에 빠진 거예요. 광화문에 삼백만 모이니까 조국 사퇴했잖아요. 자, 삼백만 모였다, 태극기부대, 결과는 뭐였습니까? 조국사퇴. 이거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얼마나 신나는 일이에요? 사적인 인과론에 완전히 매여 살아요.

 

이게 될 때, 갑자기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자기 존재감이 확 올라가는 거예요. ‘그렇지. 나는 가치 있을 줄 알았어. 내가 죽으면 안 된다니까. 내가 아직도 살아야 될 이유가 있다니까. 내가. 내가 살아서 이거 큰일 했잖아. 내가 살아서.’ 갑자기 평소의 내 목표가 뭐냐, 내가 정당한 자아정립이 목표인데 그걸 누가 들어주더라? 돌아가는 모든 추이와 사태가 나의 지금 목적을 박수쳐주고 호응해주니까 이게 바로 사람 사는 재미가 아닙니까? 갑자기 목소리가 엄청 커지는데.

 

아, 사람 사는 재미가 뭐예요? 자식 카이스트며 서울대 들어갔다. 이게 사람 사는 재미가 아니에요? 엄마로서 아빠로서, 뭐 해당사항이 되는 줄 모르겠습니다만 뿌듯하잖아요. “자식, 장하기는...,” 사실은 누가 장해요? 자식에게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본 내가 장해요. “내가 너 될 줄 알았어. 나 너를 믿었어.” 갑자기 믿음이 등장하는 거예요. 나 너를 믿었다고. 그게 사적인 인과성이에요. 사적인 인과성. 그게.

 

악마는요, 왜 대들었습니까? 사적인 자아가 있거든요. 악마가. 예수님의 종이 되기 싫어했기 때문에 대든 거예요. 그 악마의 이야기는 이사야에 보면 쫙 깔려있습니다. 내 위에 다른 누가 없다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죠. 나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내놔봐라. 휴식 끝나고 10분 후에...,
 이미아(IP:122.♡.170.138) 19-10-30 21:28 
광주강의20191025b 마가복음14장 27-31절(설사하는 자아)-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시간 끝에 구조적 인과성이라고 아주 간략하게 이야기를 했는데, 구조적 인과성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효과라는 거예요. 효과. 그래서 효과라는 말은 이미 결과가, 모든 것이 다 확정된 상태에서 움직이는 겁니다. 그래서 구조적 인과성의 첫 번째는 효과고 두 번째는 이게 반복이에요. 반복성을 갖고 있어요. 사적인 것 같으면 원인과 결과, 이렇게 되게 되면 그 다음에 새로운 결과가 나오려면 그 다음에 또 새로운 원인을 집어넣어야 돼요. 또 사적이니까, 또 개인적인 행함을 집어넣어야 되잖아요.

 

이거는, 구조적인 인과성은 이미 결과가 결정 났기 때문에, 이미 끝났기 때문에, 결정 난 것이기 때문에 현재 시간 속에서 일어난 것은 뭐냐 하면은 그냥 되풀이죠. 되풀이. 반복이에요. 신약성경에서 언약은 드디어 마감이 되었습니다. 그게 무슨 언약이냐 하면은 새 언약이라고 하죠. 새 언약이 마감되었다는 증거가 히브리서에서는 뭐냐 하면은 옛 언약을 폐기했다고 해요. 폐기했다. 히브리서에서. 10장에서. 옛 언약을 폐기했다. 지키고 싶어도 폐기되었다 이 말이에요. 골로새서 2장 14절에도 나와 있죠. 의문, 문자로 쓴 것은 전부 다 폐기되었다.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이 성경은 우리가 문자로 지키는 것이 아니고, 문자가 뭐로 되어 있어요? 효과가 되어 날아다닌다고요. 이 문자가. 뭐가 원어냐? 원어는 지금 활성화된 게 원어에요. 헬라어, 히브리어가 원어가 아니고. 예수님의 활동 자체가 원어에요. 그러니까 킹 제임스 번역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이단인줄 아시겠죠. 바른 성경하는 것이 얼마나 이단인줄 여러분들이 아셔야 돼요.

 

끊임없이 자아의 가치성을 놓지를 못하고 있는 거예요. 성령을 안 받았으니까. 자아가 설사를 안 하고 있으니까. 계속해서 자아에게 어떻게 바른 성경원어연구해가지고 구원이라는 결과를 내겠다고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는데, 이 짓은 누가 한 짓이라고 했습니까? 악마의 대행자에요. 악마는 이렇게 살다가 지옥 갔다는 것을 그들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들은 또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선악과로 나가요. “우리가 뭐가 잘못되었는데?” 잘못 한 것이 없이 지옥 간다니까요. 그 말을 이해 못하는 거예요. 아담의 후손들이 선악과 따먹었습니까? 아니죠. 구조적인 인과성에서 선악과 따먹었다는 효과를 그대로 새끼 놓을 때마다 계속 반복하는 거예요. 생일 축하 합니다~ 반복. 또 자식 놓으면 생일 축하한다고 또 반복. 계속 반복하는 거예요. 반복.

 

그래서 반복적인 심판과 파괴, 이것이 구조적인 인과성으로 말미암아 계속 일어나고 있어요. 그래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여, 우리를 지옥으로 인도해주소서!” 말씀에 의하면, 제 말이 아니고 말씀에 의하면 선악을 아는 것은 죽음이에요. 지옥이에요. 이 말을 이렇게 풀이하면 “말씀이여, 우리를 지옥으로 이끄소서!” 왜? 그게 말씀다우니까. 당연한 조치니까.

 

율법이 더한 것에 저주가 임한다는 이 말은 저주가 효과로 나타난다는 거예요. 본래부터 저주받았는데, 왜 저주받았는지 몰랐는데, 말씀을 보면 왜 계속해서 저주가,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로마서 7장 같으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게 사도바울이 말씀도 안 보고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요? 성령이 없어서 그런 이야기했습니까? 성령이 임하기 때문에 “나는 무능력한 자다.” 다른 말로 하면 무기력하다. 무기력. 자아가 빠져버리면 무기력하잖아요. 그러면 자아가 빠진 자리에, 무기력한 자리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은 역시 말씀이 들어오는 거예요.

 

말씀의 효과가 들어가면 뭐가 또 나오느냐 하면은 분명히 무기력한 절차를 반복적으로 되풀이하지만, 되풀이 하는 거예요. 되풀이. 한번 은혜 받았다고 계속 가는 것이 아니고 되풀이 한다니까요. 되풀이. 무기력함과 동시에 뭐냐 하면은 감사와 고마움과 기쁨이 나오죠. 감사와 고마움은 같은 것으로 보고, 감사와 기쁨이 나와요. 에베소서 5장에 보게 되면 5장의 내용이 쭉 이 내용이에요.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해서 감사하라. 찬미하라. 기뻐하라. 이런 이야기거든요. 감사하고 기뻐하라. 감사하고 기뻐하려면 그동안 감사와 기쁨을 가렸던 것이 밝혀져야 되겠죠.

 

도대체 악마적인 그런 마인드가 감사와 기쁨을 가린 거예요. 무기력 안 하려고 애쓴 겁니다. 무기력 안 하려고. 내가 생동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쁨이 어느 정도 사라지면 그 기쁨을 메우기 위해서 계속해서 다른 기쁨을 막 찾아요. 자아를 기쁘게 하는, 자아를 기쁘게 한다는 것은 나 잘났다, 나는 훌륭하다, 나는 우수하다, 라는 것을 계속 증명해줄, 그래서 감사와 기쁨꺼리를 계속 찾는 거예요. 계속 끊임없이. 어느 집회에 가면 너는 참 훌륭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해줄 것인가, 그 집회를, 그걸 계속 찾는 거예요. 그야말로 말씀의 배가본드에요. 방랑자에요.

 

계속 자기가 천국에 갈 사람인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계속해서 방랑하고 돌아다니는 겁니다. 설사 끼가 있으면 약 먹고, 설사 끼가 있으면 또 약 먹고, 그냥 설사하면 되는데. 무기력하면 되잖아요. 무기력하게. ‘에구, 이래 살면 뭐 하겠노. 죽자.’ 이러면 되는 것을 가지고. 그럴 때, 바로 누가 나로 하여금 인생을 무기력하게, 이 말은 무가치거든요. 무가치. 무가치인데 엉망진창이죠. 제가 주일 낮 설교 했죠. 엉망진창이 되지 아니하면 뭐가 안 보인다고 했습니까? 천국이 안 보인다고 했죠. 천국이 안 보이는 거예요.

 

나한테 아직도 내 가치에 기대할 것이 있으면 사람은 아쉬운 게 없는 법이에요. 그러면 이 땅에 계속해서 미련을 두고 있는 겁니다. 나를 우수한 나로 만든 이 땅에서 내가 그동안 우수함을 증명해줄 요소가 굉장히 많이 있거든요. 자식이 증명합니다. “우리 어머니는 훌륭해. 우리 아빠는 정말 몸은 이렇지만 누가 봐도 우리 아빠 같은 아빠가 없어.” 그렇게 증명해줄 때, 아빠가 “이 사탄아 물러가라!” 그런 이야기를 하겠어요? “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그렇게 하겠어요? ‘잘 키웠구나. 내가 키운 보람이 있다.’ 이래 되잖아요. 보람이 있으면 안돼요. 보람이 있어버리면 이 땅이 떠나기 싫어요. 집사님, 옷도 잘 만들고 가구도 잘 만들고 이러면 안 돼.

 

이 세상은 말씀대로 우리를 지옥으로 인도해줍니다. 그 계획은 우리의 소원과 관계가 없이 주께서 벌써 정해놓은 거예요. 다만 이 세상과 더불어 지옥 간다는 사실만 알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그렇게 생각하면 기쁘고 감사한데 무기력이 왜 들어가야 하느냐, 그건 제 말이 아니고요. 29절에 나오는 말씀대로입니다.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그 다음에 나온 단어가 뭡니까?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나는’, 자아가 나오잖아요.

 

다 버릴지라도 나는 솔직하게 지금 주님 버릴 마음은 진짜로 없습니다. 진심입니다. 주님 제 마음 아시잖아요? 진짜로 그런 마음이 없다는 것을. 베드로가 그걸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참으로 이 순간 예수님을 버릴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다는 것을 나도 알고 주님도 아시는데, 왜 주님께서는 사적인 인과론적으로 봐서 문제가 없는데 왜 버린다고 하십니까? 왜 양이 흩어진다고 하십니까? 납득이 안 됩니다. 이래 나온 거죠. 베드로가.

 

주님이 뭐라고 합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런 이야기를 해요. “참,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너는 너를 몰라. 이 멍충아! 니가 바보라서 모르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내가 누군지를 모르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너는 너를 모른다. 나는 나를 몰라요. 근데 나는 뭐로 되어 있느냐 하면은 선악과로 되어 있어요. 선악과로 되어 있으면, 선악과는 어디에 포함이 되어 있느냐 하면은 선악을 아는 순간 심판과 죽음과 저주에 포위가 되어 있는 거예요. 이 저주가 코팅이 되어 있다고요.

 

그러니까 이 저주 바깥에서 보는 이 안목을 내가 모르고 있으니, 내가 나에 대해서 뭘 알아요? 그냥 아무것도 몰라요. 모른다고요. 모르면서 우울하고 모르면서 눈물 흘리고 모르면서 버티고 있고 모르면서 걱정하고 있고. 성경 마태마가누가요한... 구약부터 전부 다 다시 한 번 그런 관점으로 보세요. 천사가 와서 주로 하는 일이 뭐냐 하면은 나무라는 겁니다. 일어나라! 힘내라! 니가 사적인 인과론에 갇혀 있다. 내가 이렇게 되면 이렇게 될 것이다, 라는 거기에 인간은 갇혀있어요. 갇혀 있어버리니까, 바깥에서 주께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언약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인간은.

 

모르는데 왜 자살하죠? 참, 지가 지에 대해서 뭘 알아요? 왜 자살합니까? 뭐 알아요? 나는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잔인하게 죽여서 사형 받게 되어서 나에게 기대했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원망하겠는가. 목사님, 마지막 소원이 있습니다. 무슨 소원인가? 제가 오늘 밤에 죽는데 내가 죽거들랑 내 모든 시신의 뼈를 제 고향에 묻어주세요. 고향이 어디인데? 죄인이 길에서 나를 영접하고... 이게 그린그린그래스오브홈Green Green Grass Of Home이라는 노래에요. 아빠 엄마가 나를 반겼던 그곳. 쓸데없이, 쓸데없이 그러면 지옥가요. 그린그린그래스오브홈은 없어요. 지옥 갑니다.

 

사람이 예상한다는 것은 과거에 자기가 좋았던 기억의 창고가운데서 쓸 만한 것, 괜찮은 것, 나를 위로할 만한 것들을 골라서 내가 일방적으로 환상을 조작해내는 겁니다. 그 재주도 악마한테 배운 거예요. 악마한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니 속에서 십자가를 뽑아내라는 숙제를 줄 때 못 뽑아내요. 할 수 없습니다. 그럼 그걸 좀 완화해서, 자기를 낮추는 방법을 니가 한번 마련해봐라. 니가 어떻게 하면 니 마음을 낮추는 방법을 해봐라. 이렇게 하면 인간은 그래, 이건 겸손이야. 회개고 반성하라는 뜻이구나.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또 이런 짓 한다 이 말이죠.

 

근데 아무리 인간이 낮추고 낮춰도 마지막 저항선이라는 게 있습니다. 저항선. 백번을 양보해도 양보하지 못할 그 무엇이 있어요. 근데 그 무엇이 뭔지를 몰라요. 뭔지 그걸 몰라요. 내가 무엇을 끝까지 포기를 못하는지 그걸 몰라요.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정신분석학자는 그런 게 있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빈 곳(a). 세상이 빈 곳 중심으로 돌아가요. 인간세계는. 빈 곳 중심으로.

 

애들이 모래장난 할 때 모래를 파는데, 어느 정도 파다가 그만두지 않아요. 해질 때까지 파고나면 더 파고 싶어요. 그 속에 뭔가 내가 모르는 미지의 것이 또 나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싶어서 또 파고 들어가는 거예요. 도박하는 사람이 본전만 따고 그만두지 않습니다. 따고 더 딸 것 같아서 계속 또 합니다. 사업하는 사람이, 기업하는 사람이 망해도 계속 돈 대출받고 일가친척 돈 다 빌려서 또 투자하는 이유가 분명히 뭐가 있을 것 같아.

 

욕망의 목적이라고 하거든요. 목적. 나에게 계속 욕망으로 유인하는 그 빈자리가 인간 속에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모든 인간은 정신병자라는 겁니다. 왜? 결핍을 느끼니까.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서 갈급함같이. 시편 42편에서. 근데 시편에 보면 진짜 샘물을 마시잖아요. 근데 인간은 샘물이 없어요.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 자체가 움직이는 샘물이 되었으니까 걱정할 게 없지만. 인간세계에서는 끊임없이 뭔가 해도 그게 내가 모르는 새로움이 아니고 모르는 목마름에 대한 새로운 경험이 또 제공돼요.

 

그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자가 몇 명 있었습니까? 다섯 명이 있었는데 헤어지고 지금 여섯 번째 사귀고 있다 이 말이죠. 예수님께서 그 과거사를 끄집어내는 이유가 뭐예요? 바로 니가 우물에 물 길러오는 그 몸뚱아리나 니가 남자 찾는 몸뚱아리나 동일한 몸뚱아리라는 거예요. 그게. 몸뚱아리에서 뭐가 나온다? 자아가 나오거든요. 결핍된 자아가 나오는 거예요. 계속 자아가.

 

그 자아가 결핍을 느끼니까, 사람들은 여기에서 무한한 변명과 핑계를 자꾸 대면서 이 결핍을 덮어서 이걸 이상화해요. 이상화. 이상적인. “이건 정말 내가 목적하는 바였어.”라고 억지로 그것을 덮어버린다고 할까. 이걸 그냥 누르는 거예요. 다독거려주는 거예요. 그걸 매일같이. 안 그러면 미치겠으니까. 마치 무덤 안에는 뼈가 있지만 바깥은 예쁘게 단장한 회칠한 무덤같이.

 

끊임없이 인간은 자기를, 죽은 나를 안 죽었다고 이렇게 위장하는 그 세월을 매일같이 반복하고 있는 거예요. 매일같이.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설사해놓고 또 생글생글 웃고 나오고. 주께서 인정하지 않는 자아를 하기 위해서 주위에 괜찮은 나를 또 긁어모아가지고 나 이정도야, 라고 파편화된 자아. 파편화된, 쪼글쪼글 금이 간 나. 흉측하죠. 어떤 분이 그런 예화를 했는데, 그런 예는 참 와 닿았대요. 뭐냐 하면은 어느 설교에서 헐크이야기 했잖아요. 헐크가 힘을 써버리니까 난닝구가 다 찢어졌잖아요. 원래 나는 러닝셔츠가 나한테 딱 맞게 되어 있는데 힘을 써버리니까 이게 다 찢어져버린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엑스라지XL 또 사야 돼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계속 덮는데 급급해요. 덮는데. 이 핑계, 저 핑계 어떤 핑계 다 핑계 대는 거예요. 연쇄살인범 이춘재가 죽인 살인사건인데, 자기는 죽이지도 않았는데 죽였다고 해서 20년째 살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런 사람이 있어요. 그럼 그 사람은 사람 안 죽였으니까 죄인이 아니에요? 계속 자아가 살아나는 거예요.

 

처음에 예수 믿을 때 얼마나 눈물, 콧물 흘리면서 감사하고 고맙고 기뻐했습니까? 이거 얼마 못가요. 얼마 못갑니다. 또 다시 내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으로 다시 다른 기쁨과 다른 감사거리를 찾아나서는 거예요. 기쁨과 감사가 또 다시 자아로 굳혀졌거든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복음 믿었지, 말씀 알았지, 이제는 니가 알아서 하라는 것은 없어요. 말씀이 계속해서 폭격을 해줘야 해요. 말씀이. 말씀의 구조적 인과성의 효과가 그 사람한테 끝까지 함께 해야 돼요.

 

그래서 성경 신약도 있지만 구약부터 한번 보세요. 동행한다는 말이 많이 나오죠. 동행. 신약은 동행정도가 아닙니다. 아예 예수 안에서 살아요. 예수님 안에 있다는 말은 예수님이 가만 두겠다? 안 두겠다? 가만두지를 않습니다. 주님이 자신의 일에 방해되는 것을 주께서 가만둘 리가 있습니까? 끊임없이 감사와 고마움과 기쁨이 나올 수 있도록 인간이 하는 그 모든 의미와 가치를 자아의 설사와 함께 다 같이 쏟아내게 합니다. 내가 없어지면 뭐도 없어져요? 나의 의미와 가치도 없어지겠죠? 그럼 뭐도 없어집니까? 걱정과 근심하는 것도 다 부질없는 짓이에요.

 

걱정근심이 왜 생깁니까? 내가 구상하는 미래상을 지금 현재 자아상에서 이걸 기대하기 때문에 걱정근심이 생기는 거예요. 아이고, 안되면 어떻게 되느냐, 실패하면 어떻게 되느냐, 자꾸 그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여기에 28절,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라고 할 때에 베드로가 빼먹은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살아난 후”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죽어야 된다는 것을, 죽고 양떼는 흩어져야 한다는 것이 반드시 필수적인 절차라는 사실을 지금 베드로가 전혀 안 받아들이고 있는 겁니다.

 

베드로가 왜 안 받아들일까? 묻지 마세요. 우리가 안 받아들여요. 성경 공부하는 거 전부 다 이론이에요. 이론. 이거 이론으로 수긍하니까, “제발 저를 버리지 마옵소서.” 이래 나온다 이 말이죠. 왜 우리가 버림받으면 안 되는 거예요? 버림받는다는 말을 오해하지 마세요. 버린다는 말은 우리가 인생 실패했다는 말이 아니고, 다시 뭐를 구성한다는 말이에요? 자아구성에 나선다는 말이에요. 이게 버림받은 거예요. 내가 잘난 맛에 사는데, 내가 잘난 맛에 여기서 갑자기 자의성과 자율성이 또 다시 발휘가 돼요. 자기 의지 자율성.

 

자율성과 자의성이 제대로 결합된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내가 유지시켜야 된다는 의식. 하나님이 예정해서 나를 구원했기 때문에 이 예정이 취소되지 않도록 내가 뭔가를 해야 된다는 의식. 이때 자율성과 자의성이 여기에 가담이 되고 붙어가지고 같이 돌아가는 겁니다. 누가 구원받아요? 내가. 사적인 인과성입니다. 자기 개인문제뿐이잖아요. 사적인 인과성이잖아요. 전체 구조적인 것이 아니죠. 그 사람을 쪼개면 누가 들어있어요? 나만 들어있는 거예요. 전체가 부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니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살아야 되겠다는 자기의 욕구만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살아야 되겠다, 구원받아야 되겠다, 그 다음에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바로 언어들이 나옵니다. 언어가 있음으로서, 언어가 자아가 있고 그 다음에 공부를 해서 언어를 배우는 것이 아니고, 기존에 날아다니는 기성세대의 언어가 여기에 맞추어서 나의 자아정체성이 구성이 되는 겁니다. 남들이 나를 이렇게 요구할 때, 타인의 욕망이 나를 요구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쪽에 요구한 대로 나는 움직였다고 일방적으로 생각해요. 아까 그랬었죠. 나는 누구를 모른다. 나는 나를 몰라요. 모른다는 말은 가만히 있는 말이 아니고 나를 이상화시켜요. 이상화. “나는 지금 형님이 말한 그 내가 맞지요?”라고 자꾸 억지를 쓰면서 맞다고 우기고 싶은 그런 게 있는 거예요. 우리 안에. 그러니까 우리는 모르는 거예요.

 

아까 예를 들어볼게요. 김밥 맛있다. 귀에 들려왔거든요. 맛있다고 했으니까 얼마나 맛있는지 맛을 봤다 이 말이죠. 그래서 뭐냐, 내가 맛있다고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러면 그 두 사람의 말을 듣고 김밥이 웃습니다. “니들이 나를 몰라. 니들이 왜 일방적이야. 모든 게 왜 일방적이야.” 뭐, 맛있는 것을 맛있다고 하지. 유명한 대사가 있잖아요. 대장금에서. “저는 제 입에서 고기를 씹을 때 홍시 맛이 났는데, 어찌 홍시라 생각했느냐 하시면, 그냥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한 거뿐인데...”

 

인간은 언어를 가지고 실재를 표현할 능력이 없습니다. 왜? 그 언어가지고 자기는 표현이 안 돼요. 표현이 안 되기 때문에 이걸로 그만 대충 때웁시다. 그만 넘어갑시다, 라는 식이에요. 나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칩시다. 아이고, 그만 구원받을 걸로 그냥 됐다 합시다. 자꾸 자기 확정과 자기 정당성을 유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사라지면 되는데 안 사라져. 안 사라져. 엑스트라로 왔으면 총 맞고 그냥 죽으면 되는데, 총 맞았는데 영화 분량 늘린다고, 풀 샷으로 잡아주세요. 뭘 풀 샷으로 잡아? 엑스트라가 뭐가 중요하다고?

 

사적인 인과성에서는 하나님이 나를 풀 샷으로 잡아야 돼요. 전체 다 잡아야 해요. 내가 주인공인양. 우리 기억에는 내가 주인공이에요. 예수님이 주인공이 아니고. 내 출생이 뭐고, 일곱 살 때 뭐 했고, 어느 중학교 출신이고, 어느 고등학교에 공부 어떻게 했고. 그런 것들을 모아서 이 자아의 의미는 되지만 그 의미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나의 결핍만 주장하고 자아낼 뿐이죠.

 

베드로가 왜 등장해야 하느냐? 인간은 양보하되, 다 양보하되 마지막 어디까지 양보하느냐, 31절을 봅시다.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31절, “베드로가 힘 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아멘. 베드로가 뭘 이야기했습니까? 힘 있게, 공개적으로, 보란 듯이, 왜? 자신만만하니까. 자기가 자신을 안 속이니까.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진심과 진리가 다르다는 거예요. 인간은 진심일 수 있어요. 사적인 인과성에 의해서. 그러나 그거는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가 아니에요. 인간은 기껏 한계가 진심밖에 못 내놔요. 그러나 그거는 진리가 아닙니다.

 

베드로가 왜 등장해야 하느냐 하면은 인간이 내놓을 것을 베드로가 대표적으로 보여준 거예요.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제 목숨 걸겠습니다. 주께서 나는 목숨 안 받는다. 받지도 않는 목숨을 왜 주느냐 이 말이죠. 더러워서 안 받는다. 그거 니 왜 내놓느냐? 지금 그 상태에서요, 이런 이야기기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인간의 자아가 참 말썽꾸러기에요. 인간의 자아가 돼버리면 기억의 집합체거든요. 그럼 기억이라는 자체가 뭐냐, 시간+공간요소가 들어있습니다.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내가 어릴 때 먹었던 작은 마들렌 과자를 지금 파티에서 먹었는데, 그 과자 맛을 시작으로 해서 어릴 때의 기억이 환하게 다 살아나요. 인간의 기억 속에. 자아라고 하는 것은 기억의 덩치에요. 기억의 덩어리라고요. 기억 속에 시간과 공간이, 그때 그 시간이 있잖아요. 꿈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은 인간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꿈에 등장하는 모든 공간과 시간은 과거에 있었던 일이에요. 과거에.

 

과거에 있었던 일이 꿈속에서는 그걸 과거라고 여기지 않고 지금 현재라고 여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꿈속이죠. 제가 대구 근처에 있는 50사단, 훈련소 50사단에서 훈련을 했거든요. 했을 때에, 각개전투해가지고 총 들고 가상의 괴뢰군을 해놓고 찌르고 내려오는 그런 것 있어요. 그러면 각개 전투하는 곳이 관리가 안 되어 있으니까 풀들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럼 교관이 10분 휴식하면 철모도 놓고 총 놓고 풀밭에 앉아서 쉰다고요. 이걸 제가 늘 생각하지 않아요. 꿈속에 나타나요.

 

꿈속에 보면 총 놓고 낡은 전투복 입고 앉아가지고 ‘군대생활 며칠 남았나? 내가 왜 이 짓을 해야 되지?’ 이렇게 생각한 그 장면이 그대로 떠올랐던 거예요. 그대로. 내가 지금 군에 와서, 군에 온지 얼마 안 됐어요. 훈련소니까. 내가 두 달 전만 해도, 한 달 전만 해도 다방에 와서 팝송 듣고 있었던 인간인데 그 팝송이 자꾸 생각이 나는 거예요. 뭐 라스트 댄스라든지, 나와 함께 춤을, 탑 오브 더 월드, 그런 것들이 생각이 나면서 그때 그대로 딱 회상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남자들은 군에 갔다 오면요, 군에 갔다 왔습니까? 군에 갔다가 오면 이게 반복이 돼요. 구조적인 인과성에서 계속 반복이 돼요. 왜? 자아가 반복이 되니까.

 

자아라고 하는 것은 괴로울 때, 사람이 괴로울 때 왜 생각이 나느냐 하면은 괴롭고 힘들 때마 다 인간의 자아라고 하는 것은, 자아가 언제 느껴지느냐 하면은 자아는 저항을 강하게 느낄 때 크게 느껴지는 거예요. 저항을 느낄 때. 자기가 배부를 때, 잘 먹고 있을 때는 자아를 못 느껴요. 밥만 보이죠. 축구할 때는 그냥 공만 보이죠. 근데 누가 호명할 때, “어이, 빨리 나와!”라고 할 때, 갑자기 여기서 자아가 등장하는 거예요.

 

내가 지금 재미나게 하는데 누가 내 일을 방해하느냐는 저항을 느낄 때 자아도 같이 느끼는 겁니다. 우리 아내는 순하디 순해 빠져가지고 남편이 떽! 하기만 하면은, 어머 무서워요! 눈물 짜고. 그런데도 착하다고 남편이 자기 아내를 자랑질하는데, 백번 양보해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을 건드려버리면, 갑자기 순한 양이었던 아내가 범으로 변해버리죠. 앙~하고 물어버립니다. 프라이팬 들고 니 죽고 나 죽자~ 막 때리죠. 내가 내 목숨을 버릴지언정 니를 용서하지 않는다. 갑자기 부부가 자아가 돼버린 거예요.

 

두 명의 자식이 있으면 부부까지 해서 네 명의 자아가, 짐승이 우글거리는 라이언 킹의 세계가 돼버린다고요. 이게. 좀 지나서 잠잠해지게 되면 고상한 자아가 돼서 캄다운calm down 릴렉스relax 해가지고, 흥분을 가라앉혀가지고 또 참고 있지만. 그게 또 언제 자아가 튀어 나오게 될지. 자아는, 건드리면 자아가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씀을 어디로 인도한다? 우리로 하여금 지옥으로 또는 마귀로 인도해주죠. 왜? 그게 나의 자아를 유일하게 건드릴 수 있게 해주는, 욥기에 의하면 악마기 때문에. 그 점잖은 욥, 착한 욥, 정직한 욥, 누가 건드릴 때 확하고 자아가 등장합니까? 하나님께서 마귀를 보내서 건드려주잖아요. 마귀가 꼭 필요한 거예요. 왜냐하면 자아 없이 구원받는 법이 없고 자아는 살아있어야 구원이 돼요. 왜? 자아가, 결국은 양이 되려면 자아가 필수적이니까. 우리는 내 자아의 힘으로 예수 믿는다든지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는 그런 처지가 못 된다는 것을. 죽을 때까지 이 자아가 생생하게 살아있어야 됩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제가 여러분을 걱정을 안 합니다. 그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걱정을 안 해요. 걱정을. 인간의 자아를 건드리면 저항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 본문을 27절부터 31절까지 다시 보게 되면 우리가 궁금한 게 있어요. 뭐가 궁금하냐 하면은, 주님께서 세상에 이런 장난꾸러기도 없어요.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진다는 것을 뻔히 아시고, 주께서 다시 만날 것을 뻔히 아신다면 왜 제자들을 이렇게 괴롭힙니까? 정신적으로. 그것은 정신이 다른 말로 하면 영혼이 육체의 감옥이기 때문에 그래요. 영혼이. 영혼이 육체의 감옥이에요. 보통 철학에서는, 플라톤 철학에서는 뭐냐 하면은 육체가 정신의 감옥이다. 착하고 싶어도 육체의 연약함 때문에 못한다고 이러잖아요.

 

근데 그게 아니고 이미 악마의 정신이기 때문에 육체를 가두어서 착하고 싶어도 착하지를 못해요. 이 육체가 우리가 하고 싶어 하는 대로 움직이는 육체가 아니다 이 말이죠. 육체에서 나온 자아 자체가 악마에 지워져(얹어)있고, 그 악마는 하나님의 구조적 인과성에 의해서 계획된 대로, 기록된 대로 악마는 움직여야하니까. 다 악마도 쓸모짝이 있어요. 주님에게는 다 계획이 있어요. 우리는 계획해봐야 소용이 없어요. 기껏 해봐야 이 자아에 새로운 기쁨을 찾겠다고 나아갈 뿐이지만, 주님은 다 계획이 있어요.

 

주님께서 베드로를 약을 올려요. 뻔히 아시잖아요. 알면 헤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내가 너희들 그냥 두면 도망가는데. 걱정하지 마. 내가 너희들 지켜줄게.” 이러면 얼마나 수월합니까? 구원받는데. 그렇죠. 그래서 이 예수님의 이 조치, 양들이 흩어지고 배신하도록, 베드로 입에서 죽을지언정 배신하지 않겠다는 그 입으로, 입 하나로 두 가지의 말을 하도록 그렇게 유도하는 그런 것이 될 때에, 그것이 주님의 구원의 절차에 반드시 포함이 되는 겁니다. 그 절차에.

 

30절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닭은 두 번 울었는데 부인하기는 세 번이나 해요. 세 번 부인하리라는 것을 아시면서, 왜 아시면서, 그러면 이런 일이 안 일어나도록 하면 안 되겠습니까? 아니, 그런 일이 일어나야 사람이 양으로 되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가 단독적으로, 단독으로 살다가 말씀 속에 사는 거예요. 단독적으로 살면 인간이에요.

 

근데 양이 돼버리면 목자와 결부가 되어 있다고요. 전체와 부분이 제대로 연결이 되게 되었다고요. 부분이 그냥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전체와 함께 있는 부분이어야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머리가 주님이고 우리는 몸이 되어야 해요. 우리는 지체가 되어야 되는 겁니다. 이거는 개인구원이 있다? 없다? 개인구원이 있을 수가 없죠. 개인자아구원은 없어요. 그건 사적인 인과성에 얽매일 때나 하는 것이지 개인구원은 없습니다. 아예 구원도 없어요.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구원 자체가 없어요. 구원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구원은 누구 구원이냐 하면은 예수님 자신의 구원이에요. 자기가 주되시는 그 절차를 가지고 구원이라고 해요. 주님의 자기 구원이라니까요. 우리는 거기에 말려들었고. “주여,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베드로야! 니 일이 아니야. 내 일이야. 내 일. 자꾸 내 일로 여기지 마! 끼어들지 마! 내 일에. 나가 있어! 니는 죄 된 악마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줘. 그게 니가 할 수 있는 니 할 도리다.” 그렇게 보내버리죠.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이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되어 있거든요.

 

자, 부인한다는 말, 부인할 때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를 부인합니까? 예수님을 부인하죠. 예수님을 부인하려면 그냥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왜 인간이 예수님을 부인하는가 하면은 내가 다칠까 싶어서입니다. 내가 그동안 구축한 이상적인 내 모습, 결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꾸역꾸역 1층, 2층, 3층, 계속해서 나 하자 없다고 내세웠던, 공들였던 나의 공든 탑. 이것을 깨기 싫어서 예수님을 부인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는 어떤 분이냐, 예수님의 공격은 뭡니까? 예수님이 인간을 말할 때 이거는 공격이거든요. 말씀은 우리를 되풀이해서 심판과 저주로 인도해요. 왜냐 하면은 선악과 아는 자는 필히 죽어야 되니까. 그 원칙은 변함이 없으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공격함으로써 우리는 이런 정신자세, 나만 챙기는 정신자세로 살아간다는 것이 새삼 우리에게서 노출되겠죠. 이게 바로 복음이니까.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를 가지는 것이 아니에요.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앞에서 내가 노출되는 거예요. 아, 버림받아야 된다는 것을 날마다 보여주면서 살아가고 있구나! 그걸 아는 거예요.

 

그리고 제가 설교 시간에 민수기 18장 했잖아요. 주일 낮에. 그 아론의 지팡이하고 나머지기 열 두 지팡이하고 비교하는 장면이 나와요. 주께서 그냥 놓으라고 했는데 어떤 일이 있을지 예상을 못했어요. 예상을 못했는데 살구꽃이 필 줄을 누가 알았겠어요. 살구꽃이 필 줄은 예상도 못했죠. 이게 뭐냐 미래는 없는 거예요. 인간이 생각하는 현재는 나의 미래지, 없는 미래가 아닌데, 주께서는 나의 미래를 비켜서 없는 미래를 제공해버립니다. 존재하지 않는 미래.

 

이거는 여기서 감사와 기쁨과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새로움이죠. 새로움. 충격적인 새로움이에요. 그와 덩달아서 ‘아, 내가 이렇게 아무 쓸모 짝도 없구나! 내가 아무런 가치가 없구나!’ 이 사실을 새삼 발견하는 기쁨, 그 즐거움, 감사. 이 영역으로 가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바로 베드로부터 해서 다 양을 흩어지게 해놓고, 그리고 난 뒤에 갈릴리에서 기다립니다.

 

자, 이거는 여러분들이 이해가 되시죠? 이해가 되어야 그 다음 진도 나갑니다. 되시죠. 그렇다면 이태리 여행하는 동영상을 보게 되면 보통 피자집에 가잖아요. 그러면 거기에 모자 쓴 셰프가 피자를 구울 때 피자 반죽을 해서 구워내겠죠. 화덕피자, 벽돌 오븐에 굽잖아요. 끄집어 낼 때 뭐로 끄집어내죠? 납작한 삽 같은 것을 밑에 발판으로 집어넣고, 집어넣으니까 그 발판에 다 익은 피자가 실려서 바깥으로 끄집어내지잖아요. 피자 밑에 들어간 발판이 바로 미래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실려 온 피자는 우리의 현재죠.

 

그래서 우리는 늘 +현재, +현재, +현재에요. 미래는 없어요. 미래는 우리 현재의 발판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 발판이 바로 십자가의 죽으심이라고 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일찍 죽임 당하신 하나님의 어린양”(계5:6)이라고 하거든요. 양이니까 제물 아닙니까? 제물은 무슨 내용이 함유되어 있습니까? 포함되어있습니까? 죽음이죠. 거룩한 죽음이 포함된, 일찍 죽으신 분의 성전 중심으로 천국이 만들어지거든요.

 

그러면 천국은 죽어서 가는 데가 아니고, 천국에서 뭐가 왔습니까? 피자 끄집어내는 발판에 우리를 미리 깔아놓는 거예요. 그리고 잡아당기는 겁니다. 그러면 잡아당길 때 여기 발판은 십자가의 죽음이 깔리겠죠. 나 때문에 죽으신 거예요. 나 때문에. 바로 성도들 때문에 죽으신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죽을 이유가 있어야 되겠죠. 모락모락 김이 나는 피자. 여러 가지 토핑에 치즈 쭉쭉 늘어나는, 이게 있어야 되겠죠. 그럼 이것은 내 작품입니까? 주님 작품입니까? 주님의 기억의 작품이죠. 주님의 기억.

 

주님의 기억은 뭐냐 하면은 주님의 언약,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했잖아요. 십자가의 기억을 여기서 뽑아내는 거예요. 십자가의 기억을. 십자가의 기억에서 우리는 뭐가 되죠? 죄를 더 지을 필요가 없이 그냥 살아도, 그냥 살아도 그 자체가 뭐다? 죄가 살아있는 거예요. 죄를 짓고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죄가 살아있고 저주가 살아있는 그 현재성을 보이면 되는 겁니다. 그것을 어떻게 파악하느냐, 모든 말씀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다 들어있어서 말씀이 다가올 때 우리에게 십자가가 다가오는 겁니다.

 

그럼 피자 발판에 실려 나갈 때, 실려 나가는 속도가 시속 100킬로미터라고 봅시다. 우리는 어질어질하겠죠. 기분이 좋죠. 속도감, 스피드 감으로 감사가 나오는 겁니다. 주께서 쫙 뽑아내시는 겁니다. 이 어두운 세상 지옥에서 밑에 발판 싹 넣어서 싹 빼내시는 겁니다. 십자가 피로서. 그때 우리가 할 이야기는 이거밖에 없어요. “저주가 사라졌다. 가자!” 저주가 사라졌어요. 저주가. 모든 저주는 십자가로 다 흡수가 돼서 저주가 사라져버렸어요. 미래에서 오는 받침대가 딱 들어와서 우리를 태워서 미래가 출발하는 그 지점으로 데려가죠. 그거는 없는 미래에요. 없는 미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갔는데 약속의 땅은 없어요. 왜? 약속의 땅의 주인공이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이 땅에 있다가 구름타고 하늘로 새버렸으니까. 빠져버렸으니까. 그리고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우리는 이 땅에서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주님이 일괄적으로 위에 가져간 거예요. 식당에 가면, 아주 좋은 음식점에 가면 발렛파킹하잖아요. 할 때에 직원들이 뭘 다 가져갑니까? 키key 다 가져가죠. 우리의 키를 일괄적으로 다 가져가요. 이게 구조적 인과성에서 이미 전체고 결과죠. 이 결과를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부분이 그 표현형으로, 그것의 모양새로 이 땅에 있는 겁니다. 그게 사도들이고 제자들인 겁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저주가 사라졌다는 이 의미를 계속해서 반복하고 싶은 거예요. 니는 갔지만 주님이 불러냈다는 것을 계속해서 죽을 때까지 반복하고 싶은 거예요.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반복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육신의 죄, 우리 자아성의 문제점을 하기 위해서 세상 적으로 성공한 것, 세상 적으로 살만하다, 세상 적으로 나 죽기 싫다, 자식을 놔두고 내가 어떻게 죽을 수가 있느냐, 내 자아의 정당성을 보장해줄 것을 자꾸 만나게 해줘요. 마귀도 같이 거기에 득세해가지고 같이 만나서, 그래도 아직은 죽으면 안 됩니다, 그래도 이 땅에서는 내가 좀 더 살아야 되겠습니다, 라는 그런 의식을 계속해서 반복시키죠. 그래야 십자가의 의의가 살아납니다. 얼마나 니가 철딱서니가 없고 니가 얼마나 나를 모르면 아직도 복음에 머리로만 알고 실제로는 안 그렇다는 것을 계속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양이지만 이 세상에서 살 때는 뭐가 됩니까? 인간이 되고, 인간론에서 뭐가 나와요? 구원론이 나오는 거예요. 주여, 제가 이렇게 살면 구원받습니까? 이 인간론을 뭐로 작살을 내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서, 복음으로서 인간론을 작살내는 겁니다. 작살 낼 때는 주여, 잘못됐습니다, 내가 죄가 많다고 해놓고 돌아서면 또 헤헤거리고. 자아가 또 있고. 이거는 우리 탓이 아니고 주님 작업의 일환이니까요. 무슨 작업이냐, 그렇게 해서 남들에게 주변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겁니다. 주변 사람에게.

 

결국 복음 전한다는 것은 이 베드로나 이 제자들의 꼴이 지금 내 꼴인 것을 인정할 때, 그 사람은 지금 말씀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이 활성화되기 때문에 그런 고백이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몰랐던 미래, 천국이 벌써 시작이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베드로가 되게 하고 죄인 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 죽어야 될 자아가 또 살아서 설칠 때마다 십자가가 나타나서 다시 한 번 기쁨과 고마움과 즐거움이 회복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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