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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7 23:16:43 조회 : 197         
공분을 넘어서 마가복음 15:21 200717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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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0.138) 20-07-19 20:49 
광주강의20200717a 마가복음15장 21-23절(공분을 넘어서)-이 근호 목사

자, 시작합시다. 마가복음 15장 21절,

21절,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22절,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3절,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그래 되어 있죠. 십자가가 예수님 홀로 단독적으로 지시는 십자가이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십자가에 협조한다든지 도와주게 되면, 예수님이 하신 공로 속에 인간의 공로가 들어오기 때문에, 이거는 레위기에 나오는 제물의 원칙에 위반이 돼요. 제물은 흠 없는 제물 그 자체로서 드려야지, 제물 말고 다른 것을 추가해서 곁들여서 제물을 드리면 안 됩니다. 제물은 지정한 제물 그것만 그대로, 소를 바치라고 했으면 소를 바쳐야지, 뭐 덤으로 거기에다가 염소를 바치고 그러면 안 돼요. 딱 하나만 돼요. 구약 레위기 율법에 보면. 이 제사라는 것은 철저하게 외부적인 요소를 차단합니다. 들어오는 것을 전부 다 차단해요. 차단해서 하나님이 지정하신 제사를 이렇게 통과하게 했어요. 다른 게 섞이지 않도록.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약속은 순수하게 하늘의 것이 되어야 한다. 땅의 것이 되면 안 돼요. 왜냐, 땅의 것이 되면, 이미 인간들은 에덴동산에 살지 못하고 추방되고 쫓겨났잖아요. 쫓겨났기 때문에 쫓겨난 것을 만약에 받아줘 버리면, 이것은 추방한 하나님의 추방조치를 스스로 하나님이 위반한 것이 되기 때문에, 추방은 철저하게 추방으로 강조되기 위해서 안 받아주는 것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나는 너희 것을 더러워서 안 받는다, 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돼요. 인간의 것은 더럽다고 되어 있죠. 더럽다가 되려면 반드시 여기에 뭐가 되어야 하느냐 하면은 거룩한 것이 앞에 같이 등장해야 돼요.

이런 말이 있죠. 짝패라는 것. 짝패. 이 짝패를 공식적으로 이렇게 연구하고 발표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은 소쉬르라는 사람이에요. 소쉬르라는 사람은 20세 초반에 최초로 언어학을 연구한 사람이에요. 언어학을 연구해서 무엇이 다 무너지느냐 하면은 성경에 나오는 히브리어, 헬라어가 원어라는 사실이 다 무너집니다. 원어는 없어요. 성경에 원어라는 것이 없습니다. 언어학에 있어서, 소쉬르의 언어학의 특징은 언어와 사물은 일치한다, 라고 하는 이러한 그동안의 주장이 깨어집니다. 언어와 사물은 일치한다. 이게 지우개라면 이 지우개라는 물건과 일치한다는 것이 전통적인 언어학이거든요. 그것이 깨어져버려요.

왜 이것을 깨어야 하느냐 하면은 언어와 사물은 어디서 왔느냐, 전통적으로 기독교 신학에서는 신으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거예요. 모든 사물은. 해와 달 별. 그럼 언어는 어디서 주어졌는가, 언어는 성경에 보면 바벨탑 언어 나오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언어를 줬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 언어와 사물이 일치되어야 될 그동안의 이유가 사물을 주신 하나님과 언어를 주신 하나님이 같은 원천에서 나왔다는 것을, 이것이 하나의 전통적인 신학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지상에 있는 것은 하늘의 반영이라고, 이렇게 그동안 쭉 가르쳤던 거예요. 지상에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니까 신앙생활 똑바로 하자! 제대로 하자! 그걸 이야기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소쉬르가 이렇게 보니까 사물이 계속 뭐가 되느냐 하면은 분화가 되는 거예요. 분화가. 분화라는 말을 알죠. 계속 갈라지고 새끼를 까고 새끼를 까는, 계속 이렇게 퍼지는 겁니다. 그런데 언어라는 것도 거기에 덩달아서 같이 보조 맞춰서 분화가 되다보니까, 이 대형이라는 것이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는 거예요. 점점 모호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언어를 연구해보니까 모든 언어는 어디서 나왔는가, 차이에서 나왔다는 것을 그 사람이 규정하게 된 거예요. 차이.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고 또는 사물을 볼 때, 사물을 규정하고 언어를 사용할 때 인간은 구분 짓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이것이 뭐냐 하면 식별,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식별이다. 식별하기 위해서 언어를 사용했다. 식별하기 위해서.

누가 식별하느냐, 내가 식별하고 싶은 거예요. 내가. 내가 식별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 예는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쌍둥이를 낳았을 때 하나는 야곱이고 하나는 에서죠. 야곱의 의미가 뭐냐, 에서의 의미가 뭐냐, 이것은 성경에서 에서는 붉다, 야곱은 사기꾼이다, 잡았다, 뭐 이래 이야기하는데, 그게 아니고 이게 쌍둥이기 때문에 에서가 아닌 것은 야곱이고 야곱이 아닌 것은 에서로 보면 되는 거예요. 거기에 어떤 명칭을 붙이던 간에. 에서라고 하는 그 말은 그냥 붉은 것이 아니에요. 그냥 붉다고 하면 이게 의미가 없다고요. 그럼 동생은 덜 붉음, 불그스레함, 이래 된다니까요. 그냥 붉다, 그 말 하나만 해버리면, 이 붉다는 것과 대응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해요. 그럼 야곱의 이름이 사기꾼이라고 하면 안 되고 푸르다 이래 나와 줘야 돼요.

그런데 야곱 이름은 붉은 것하고 아무 관계가 없어요. 색깔로 따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에서는 털이 많고 갖옷 같아서 붉다. 갖옷 같다. 그런 뜻이잖아요. 이 야곱은 딴 노선으로 사기꾼이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야곱과 에서는 짝패다 이 말이죠. 서로가 노선이 다르다는 것을 묘사한 거예요. 노선이 달라요. 붉다, 푸르다 하면 같은 색깔의 노선이잖아요. 그러지 말고 에서는 색깔로 봤지만 야곱은 속성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야곱은 나중에 남을 속여야 먹고 사는 속성. 그럼 에서는 뭐냐, 그냥 그런 속성도 별 의미가 없고, 보니까 붉구나! 피부가 붉어.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의미가 있는 것과 의미가 없는 것에 대한, 딱 붙여놓고 짝패를 이루게 하는 겁니다.

식별이죠. 물론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식별이지만. 인간들도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식별하기 위해서 있기 때문에, 언어라고 하는 것은 원래 그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래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문에 들어갔는데 치마 입은 그림이 있다. 한쪽은 신사복을 입었다. 이 표시가 뭡니까? 이건 여자화장실이고 이건 남자화장실이잖아요. 이건 식별하기 위함이죠. 여자화장실그림을 보고서는 이건 뭐 여자들만 사는 동네인가? 뭐 이럴 수도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짝을 불러 일으켜요. 짝을. 짝을 불러일으키는데, 그걸로 설명이 가능한 이유가 계속 분화가 되니까 인간 속에서 식별이라는 것이 작용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차이성을 낳는 거예요. 끊임없이 차이성을 낳아요.

이거는 소설 문학뿐만이 아니고 모든 실존주의적 과학, 생물학, 물리학, 모든 용어가 다 그래요. 양자물리학에서 쿼크라는 그 용어도 마찬가지고. 입자들 이름을 지을 때 보세요. 스트레인지(strange), 업up다운down, 칼라, 전부 다 이게 식별이에요. 분화하면서 분화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는 이것과 이것은 이런 점에서 다른, 다른 이름을 붙임으로서 달리 보는 겁니다.

자,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왔어요. 제가 언어이야기를 했습니다. 여기 21절을 쭉 봤듯이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이 계신데, 21절에서 뭘 뽑아내느냐 하면은 여기에서 십자가를 뽑아내요. 예수님이란 분은 인물이죠. 인물이라는 것은 인물이고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이건 물체입니다. 사물입니다. 사물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반복할 수 없어요. 예수님은 한분이기 때문에 반복이 안 되죠. 그런데 뭐는 반복이 되느냐 하면은 이 십자가는 반복용이에요. 반복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게 사물이기 때문에. 이게 사물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예수님이 옛날에 억울하게 돌아가셨다. 그러면 그건 그분, 인물에 관한 문제죠. 그런데 그분이 뭘 남겼다. 뭘 남겼는가? 십자가라는 사물을 남겼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남기려면 사건이 있어야 되고, 그 사건은 예수님은 십자가와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이어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과 십자가가 떨어지지 않는 사건. 예를 들면 천주교 같은 경우에는 십자가 위주가 아니라 예수님 인물 위주에요. 천주교에 예수님이 이래 있으면 여기에 누가 있느냐 하면은 마리아가 이래 있죠.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이 마리아하고 예수님과 사이에는 이게 무슨 관계냐 하면은 모성애가 있어요. 엄마가 자식에게 하는 모성애가 있죠.

그러면 천주교에서는 이 마리아를 부각시키는 이유가 뭘 반복할 수 있느냐 하면은 엄마가 아기를 키울 때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라는 것으로 반복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버려요. 반복할 수 있는 여지. 같은 노선으로 분화가 가능한 거예요. 마리아의 사랑 또는 성경에서 마리아에게 일어났던 어떤 경우들. 그러면 천주교에서 신부들이 설교를 할 때 교인들에게 납득이 되고 설득이 되려면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마리아를 사랑했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마리아를 사랑했다는 것으로 성경에 보면 그걸 언급해요. 뭐냐 하면은 자기가 십자가를 지시면서 자기 어머니를 사도요한에게 부탁했다는 것. “봐, 예수님은 끝까지 효자잖아.” 끝까지 효자라고 이렇게 부추기는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가려면 예수님의 옛날이야기로 그치면 안 되고 지금 예수님의 자격이 있어야 되거든요. 지금 예수님과 지금 살고 있는 내가 같이 이렇게 연결고리를 이루어줘야 지금 낚여서 천국 갈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지금 예수님이 살아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어머니의 사랑 또는 어머니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 그 고리를 우리가 형성하면 되겠죠. 형성하면. 인간 사랑을 자꾸 확장하는 겁니다. 인간 대 인간의 그 고상한 사랑을, 이제는 그 사랑을 하늘까지 확장시키면 이 사랑의 본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랑의 본질과 다를 바 없다. 동일하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되느냐, 라고 할 때는 엄마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또는 자식이 엄마를 사랑하듯이 사랑하시면 여러분들은 그 사랑이 곧, 그런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그런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그 자리에다가, 엄마와 아들의 자리에다가 뭘 교체하느냐 하면은 하나님 또는 예수님, 하나님과 우리하고 교체해서 박아 넣으면 그 관계는 계속 살아있으니까 그 관계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순수한 믿음이라고 그렇게 인정됩니다, 라고 했을 때 듣는 교인들에게는 아무런 부담감 같은 것이 없겠죠. 아무런 부담감이 없죠.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낙태를 못하게 합니다. 엄마가 자식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낙태가 되겠어요? 안 되죠.

그래서 그 천주교의 논리를 쭉 이어나가면 이래 돼요. 낙태하는 여자는 지옥 간다. 또 지옥 간다고 하면 섭섭하게 생각할까봐 일단 하나의 출렁하는 기회를 주죠. 연옥 간다. 연옥 간다는 것은 패자부활전, 한번 기회를 더 주는 겁니다. 살아있을 때 밥 먹고 산다고 너무 주님한테 소홀했는데, 죽고 난 뒤에는 밥 먹고 살 일이 없잖아요. 그럼 어디에 매진하면 됩니까? 이제는 본격적으로 주님을 인정할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 이제는 아무 거칠 것이 없는 가운데서, 죽었으니까 밥 먹고 살 일이 없잖아요. 그때는 이제 본격적으로 참고서 펴놓고 입시준비 하는 거죠. 천국에 갈 시험에 대비해서 매진하고. 그래도 아주 완악한 놈은 할 수 없이, “너는 한번 기회를 줬건만, 그래도 니가 아직까지 예수님을 거부하다니! 너는 지옥에 보낸다?” 보내면 되는데, “보낸다? 보낸다? 진짜 보낸다? 정말 너는 안 되겠구나!” 뭐 이런 식으로.

이게 천주교입니다. 그래서 천주교는 일종의 불교라고 보시면 돼요. 천주교의 이론은 어디에 어긋나는가 하면은 고린도전서 2장 4절에 어긋나죠. 내가 전한 내용은 사람의 지혜나 사람의 말과 능력으로 절대로 알 수 없고 오직 누가 나타나야 하느냐, 성령이 나타나지 않으면, 추가적인 하나님의 마음이 너희에게 도달되지 않는 한 너희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이 말을 줄여버리면 모른다. 모른다가 돼요. 너희들이 평생 살면서 자식 키우고 아무리 순수하게 사랑을 나누었지만 그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는 것을 전한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죠. 왜냐하면 성령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추방하고 난 뒤에 온 영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들이 예수님에게 빠이빠이 하고 난 뒤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들에게 공분을 일으키는 사건이에요. 그 당시 인간에게,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분노를 일으킬만한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그 십자가 사건의 그 저의, 그 취지를 성령께서는 이걸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죠. 이거는 요한복음 16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내 말을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하는 일만 그대로 너희에게 되갚아준다. 이 성령께서 예수님의, 인간들이 공분을 일으킨다는 말은,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분노를 느낀다는 말은 그 뒤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도 십자가를 대하면 분노를 일으킨다, 안 일으킨다? 반드시 분노를 일으키게 되어 있어요. “내가 무슨 죄인이냐?” 이런 식으로. “내가 나쁜 짓 한 적도 없는데 나보고 죄인이라고 하고, 뭐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면서 지옥은 왜 만들어놨느냐?” 이런 식으로. “선악과는 본인이 심어놓고 그걸 따먹었다고 그 책임을 왜 우리 인간에게 덤터기 씌우나?” 이런 식으로.

모든 면에 있어서 십자가에서는 공분을 일으킬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교회에서 십자가를 전해야 되겠어요? 아니면 마리아의 사랑을 전해야 되겠어요? 어느 쪽을 해야 되겠어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을 전해야 교인들이 공분을 안 일으키고 현재 자기가  하는 행위만 살짝 하늘까지 확장되었다고 믿기만 한다면 구원되는 그 간편한 방법을 천주교에선 사용하는 거예요. 그래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십자가를 전하는 겁니다. 십자가 전했어요. 제가 볼 때는 루터가 십자가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어쨌든 루터는 십자가 지신 하나님이라고 했어요. 나중에 이것이 유럽의 계몽주의 이후에 낭만주의에 이 십자가마저 뭐가 되느냐 하면은 장미로 덮인 치장한 십자가가 돼버려요. 괴테가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잖아요. 십자가를 이쁘게 포장하는 거예요. 자기 정성을 담아서.

지금도 유럽은, 프랑스 쪽이 천주교고요. 루터교 이쪽으로 제일 인구가 많은 곳이 핀란드에요.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덴마크에 인구가 좀 많고요. 그 다음에 독일은 반반이고. 천주교 반 개신교 반. 제가 독일에 가서 개신교, 루터교에 예배 참석했어요. 차마 말을 못하겠어요. 이게 노는 곳인지. 엉망진창이에요. 엉망진창. 왜? 나라에서 월급 나오는 공무원이니까. 국민들 세금 받아서 목사들 월급 주니까. 목사들 뭐 편하죠. 제가 독일말만 되면 한 소리 하고 싶지만 내 나와바리가 아니라 남의 동네에 가서 말도 못하고.

십자가는 모든 인간에게 공분을 자아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십자가 전했는데 상대방이 어떤 공분을 일으키거든 제대로 잘 전했다 이래 보시면 되는 거예요. 인간의 힘으로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면 아까 십자가가 사물이 되었다는 말을 했는데요. 그럼 예수님과 십자가 사이에서 이 관계, 공분을 일으키는, 유발된 사건은 없어지지 않고 같이 살아있어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인물 중심이 아니고요. 예수님이 얼마나 잘 생겼는가, 그런 중심이 아니고 십자가 중심, 십자가를 반복함으로서 예수님 자신을 전달한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지금 여기까지 생각하면 돼요.

그럼 십자가를 증거 한다는 이게 무슨 말이냐, 이걸 본격적으로 합니다. 제가 두 가지의 그림을, 어떤 사람은 그림을 못 그린다고 하는데, 그 못 그리는 그림을 또 그려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두 가지의 그림의 차이점을, 1번과 2번 그림의 차이점을 한번 보세요. 1번 그림은 이렇습니다. 알타리무우 아닙니다. 미사일입니다. 미사일이 땅에 꽂혔는데 땅에는 아파트도 있고 집도 있고 예배당도 있고 고층건물도 있고 절도 있고 뭐 여러 가지 사람들은 자기 할 일 다 하는데, 어느 거리에 십자가가 팍 꽂혔습니다. 북한미사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그림. 두 번째 그림은 미사일이 그냥 꽂힌 것이 아니고 여기서 꽝! 하고 폭발해버렸습니다. 이 땅에서.

자, 두 가지의 그림의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1번은 이 미사일이 십자가라라면, 십자가가 우리한테 꽂혀있는 경우, 이럴 때는 사람들이 관람하러 올 수도 있고 또는 해석하려고 하고,  멀리서 관측도 되고, 구경하려고도 오고, 안 그러면 자기일이 바쁘면 못 본 척하고 자기 볼 일 보러 가고, 자기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죠. 근데 2번 십자가는 폭발해버리면 여기에 교회고 예배당이고 건물이고 집이고 사람이고 뭐가 있든 간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자, 제가 묻습니다. 십자가가 현재 1번 상태입니까? 2번 상태입니까? 이게 질문입니다. 1번 상태입니까? 2번 상태입니까? 둘 중에 하나인데. 어느 게 현재입니까? 정답은 2번이에요. 2번입니다.

십자가가 진리잖아요. 진리가 이미 폭발해버렸어요. 이미 진리가 폭발했어요. 폭발했기 때문에 사람들 눈에는, 이게 꽝! 하고 폭발했으니까, 십자가가 있어요? 없어요? 십자가가 없습니다. 오늘 강의의 취지입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없습니다. 이런 건 있어요. 십자가 모형에다가, 여자들 십자가 목걸이에다가, 차에 달려있는 십자가 그건 있는데, 이게 십자가가 이미 폭발을 해버린 거예요. 폭발해버렸기 때문에, 만약에 어떤 사람이 성령과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어떻게 아느냐 하면은 이미 죽고 난 뒤에, 죽은 자의 눈에만 띄는, 이미 십자가 진리는 완료다. 이미 게임오버에요. 끝난 거예요. 이 땅에서. 이미 끝난 거예요.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아느냐 하면은 1차 죽음, 1차 죽은 자에게 십자가가 보이는 겁니다. 십자가가 느껴지는 거예요. 1차적인 죽음에. 자기가 죽었다는 이 말을 설명하려면 몇 시간이 걸리는데, 여기서 제가 간단하게 설명해드릴게요. 간단하게 한 10분 동안 설명해드릴게요. 인간이 죽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여러분들 어릴 때 어떤 것이 서러운가 하면은 물론 엄마가 없는 것도 서럽지만 약간 크면 어떤 것이 서러운가 하면 같이 놀아줄 사람이 없을 때 가장 서러워요. 같이 놀아줄 사람이 없을 때. 식구인데 아빠도 돈 벌러 나가고 엄마도 돈 벌러 나가고 아무도 없을 때, 할머니가 와서 맨날 초콜릿 먹이고 아이스크림 먹여서 살만 찌고.

같이 놀아줄 사람이 없을 때 애들은 서러워요. 애들은 누가 제일 좋은 사람인가 하면 자기하고 놀아준 사람이 제일 좋아요. 아빠엄마라서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애들한테는 계모냐 친엄마냐가 아무 의미가 없어요. 놀아줄 사람이 있으면 최고입니다. 같이 놀아줄 사람. 아빠엄마 둘이 이혼하든 관계없어요. 사춘기 때 나하고 놀아줄 사람만 있으면 뭐 이혼을 하던 세 번을 하든 관계없어요. 같이 있든 없든 관계없어요, 같이 놀아줄 사람만 원합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인간에게 단독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단독자, 단독이라는 것은 이게 상대성을 갖고 있어요. 상대성. 상대성 또는 대상성이라고 하는데. 단독을 단독으로 하면 혼자 있다고 해서 단독이 아니에요. 저 사람과 차이남을 통해서 나는 홀로이다, 아니다, 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아까 제가 분명히 같이 놀아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죠. 애가 기어나가든지 걸어서나가든지 세상에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많아요. 많지만 많은 것 때문에 외로운 거예요. 왜냐하면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나에게 아는 척하지 않고 나에게 관심두지 않고 나하고 놀아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비로소 자기는 뭘 느끼느냐 하면은, 뭘 느낍니까? 단독자를 느끼는 거예요. 사람이 아예 없으면 그걸 못 느끼는데 많은 사람들 가운데 놀아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기는 외로움을 느끼는 거예요. 그러면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자기하고 놀아준다? 놀아주게 되면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은 나와 너라는 이 관계성이 성립이 돼요. 많은 사람이 있어서 너가 아니에요.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나하고 놀아줄 때 비로소 그 사람은 나에게 너가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은 너도 아니에요. 그냥 있으나 없으나 관계없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니가 있으매 비로소 내가 된다. 나를 구성할 수가 있습니다. 나라는 것을 구성할 수가 있어요. 내가 누군지를 알려면 나하고 놀아주는 사람이 있어줘야 그 사람이 나한테 뭐라고 하는지를, 그걸 주워 모아서 그것으로 나를 구축하는 거예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상대성 또는 대상화라고 하는 겁니다. 대상화. 그래서 인간의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닫아두지 않아요. 만약에 자기를 닫아둔 사람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자폐증환자라고 해요. 자폐증. 자폐증환자. 점점 이야기가 어려워지면 안 되는데. 이건 상식이니까. 자폐증이란 자신의 말과 대상을 일치시킵니다. 이게 자폐증입니다. 

그런데 정상인은 나와 너 사이에, 그림으로 그리면(○○), 근데 자폐증은 나와 너 사이가 하나가 되는 것, 그림으로 하면(◎), 이게 자폐증이거든요. 정상인이라고 하는 것은 나와 너 사이에, 내가 생각하는 너 사이에 걸쳐있는 것(⚭), 남이 나에게 뭐라고 해도 그게 나의 전부가 아니고 인정을 하면서도 여분의 것이 좀 남아있어 줘야 해요. 그래야 니가 내가 아니고 내가 니가 아닌 게 돼요. 그 여분의 것이 남아있을 때 비로소 너가 온전히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너를 너라고 부르는 거예요. 나와 다르기 때문에 너라고 부르는 겁니다.

만약에 부부가 하나가 돼버리면 못 살죠. 만약에 남편이 직장 가는데 아내가 같이 화장하고 직장 직원도 아닌데 같이 따라나서면 못 삽니다. 니가 왜 여기서 나와? 니가 왜 회사에서 나와? 나는 당신 없이는 못 살아요. 이러면 정말 찐다. 귀신도 아니고. 니는 집에 있어. 나, 집에 있으니까 외로워서 못 살겠어. 이래 돼버리면 문제가 크죠. 니는 니 인생 살아. 니 인생. 우리 낮에는 각자 자기 인생 살고 저녁에만 잠시 모이자. 이래 돼야 숨이 트이는 겁니다. 여기 왔는데 니 어디 갔냐고 전화하면 이거 뭐 스토커도 아니고 왜 이래요? 어린애도 아니고. 다 같은 성인이.

부부라고 하는 것은 각자의 인생을 인정하는데서 살 수가 있어요. 한쪽이 한쪽을 잠식해버리면 그거는 뭐, 그게 부부입니까? 진짜 온종일 같이 있는 부부도 있어요. 왜냐하면 꽈배기 장사를 한다든지, 치킨 장사를 한다든지, 하루 온종일 같이 붙어있으면 정말 이거는 질리죠. 정말 이거는 질립니다. 특히 약사들, 남편은 약사고 아내가 도와줄 때는 스물 네 시간 붙어있어요. 그래가지고 마스크 때문에 싸울 때는 아내가 싸우고 남편은 몰래 도망치고. 뒤에 숨어있고. 마스크 왜 안 파냐고 할 때는.

인간의 목적은 나를 아는 건데, 그냥 아는 것이 아니고 내가 절대자라는 것을 타인에게 증명하고 싶어서 인간은 사는 거예요. 나라는 것이 절대적이다. 그걸 나만 하면 안 되고 누가 옆에서 호응을 해 도! 그런 호응을 요청하는 자들을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너라고 의미를 부여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라는 사물과 의미가 일치하지 않아요. 자,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봅시다. 의미란 반드시 대상화되는 것을 통해서 의미가 발생되는 겁니다. 대상화. 아까 같이 의미하고 사물하고 일치하지 않아요. 일치되지 않고 의미란 대상화되는데, 이 의미를 붙일 때 누가 붙이는가, 본인이죠. 본인이~ 이렇게 하죠. 전두환이가. 내가 이 의미를 붙이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의미를 확장하기 위해서 대상화, 남이라는 것, 너라는 것을 이렇게 초청하죠. 초청하고 잘해주고 밥 사주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없이 나만 있으면 내가 규정되지 않아요.

그런데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십자가가 뭐냐, 십자가는 이미 예수님과 십자가가 연결되면서, 우리 생각에는 연결되면 십자가를 없애버리고 예수를 믿으라고 이렇게 하면 되는데, 왜 사도바울에게 복음이 예수님 믿으라가 복음입니까? 뭐가 복음입니까? 십자가죠. 이것은 예수님 자신의 의미가 연결되어 있는 십자가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오고 오는 이 시대에 십자가를 남기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어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그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지금까지 강의 설명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저분은 예수님이다. 나를 구원해준다고 할 때, 그 의미 규정을 누가 내립니까? 구원받고 싶은 내가 내리잖아요. 이거는 사기죠. 이거는 사기입니다. 이거는 엉터리에요. 예수님을 믿는데 마치 이웃집 아저씨 믿는 것하고 똑같이 믿는 거예요.

그리고 “저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어떻게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면, “내가 엄마인데 내 자식 사랑하듯이 사랑합니다.” 이러면 아까 말한 천주교처럼 돼버리죠. ‘내가 자식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확장시켜버리면 하나님도 내 순수한 사랑을 받아주겠지.’ 이러면 그 의미는 누가 내린 거예요? 평소에 우리가 만만한 사람 불러다가 내가 나를 규정하고 싶은 것을 우회해서 하거든요. 저 사람을 통해서.

영덕에 보면 대게가 있거든요. 대게. “나 영덕대게 좋아해.” 그러면 옆에 같이 있는 친구가 하는 말이 “나는 영덕대게 먹는 인간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이러면 친구관계 끝나버려요. 그러면 안 되잖아요. 계속 친구로 남아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도 쪼금 좋아해.” 영덕대게라는 전체에서 이만큼 좋아하는데, 아직까지 친구를 유지하기 위해서 걸쳐놓는 거예요(⚭). “나는 쪼금 좋아해.” 그럼 이 둘 사이는 어떻게 됩니까? 친구가 되죠. 어떤 친구? 보약 같은 친구가 되는 거예요. 근데 이 친구가 나중에 젊은 남녀 같으면 부부가 되거든요. 부부가 되고 난 뒤에 싸울 수도 있잖아요. 싸울 수가 있다는 것이 좀 어폐가 있다만. 부부가 싸울 수 있다고요. 이거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 사람들이 처음에 연애할 때 한 6개월이고 1년이고 이야기했죠. 둘이 사귀었잖아요. 자, 사귐이 뭐냐 하면은요, 이제 배웠으니까 적용해보세요. 사귐이란 나의 의미를, 나의 나 됨, 나의 절대적이 되기 위해서 당신은 나한테 얼마나 기여하고 보탤 것인가를 카페에 앉아서 서로서로 정치적인 협상을 하는 거예요. “나는 당신 같은 남자의 이 점이 참 좋아. 당신은 너무 미남이야. 당신은 너무 잘생겼어. 나는 그 점이 좋아.” 그래서 남자가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당신에게 한눈에 반했어. 너무 이뻐.” 이러다가 둘이 결혼했다고 칩시다.

결혼을 한 매개체가 뭐예요? 너는 이쁨이 유지가 되어야 되고. 그게 요건이었으니까. 저쪽은 잘생김이 유지가 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결혼하고 난 뒤에 3개월도 안 돼서 이쁨, 잘생김도, 착함도, 아무리 좋은 향수도 3개월만 쓰면 악취가 되는 것처럼. 한 3개월 지나고 난 뒤에 별로 예쁘지 않아요. 별로 이쁘지도 않고, 놀라운 사실은 그 옆 동에 더 이쁘고 젊은 사람이 턱하고 와버렸을 경우에는...., 아까 뭐라고 했어요? 모든 의미는 뭐였다? 차이. 모든 개념은 차이에서 티 나는데, 그냥 확 티가 나버리는 거예요.

그럴 때는 남편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고 본인을 나무라야 돼요. ‘이 등신아, 등신아, 내 눈이 그거밖에 안 됐냐. 수준이 그거밖에 안 됐나. 아이고, 이 등신아.’ 결혼해놓고. 결혼했을 때는 분명히 공통점이 있어서 결혼해놓고, 싸울 때는 이 공통점이 전부 다 허위였다는 것. 망상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겁니다. 이럴 때는 애 하나 낳아야 해요. 애 하나 낳으면 둘 다 관심사가, “어찌 이렇게 예쁜 애가!” 서로 닮았다고 싸우겠지만. 그러니까 관심을 딴 데 돌려버리는 거예요. 관심을.

영화에 이런 영화가 있어요. 좀비가 나오는데 좀비는 밤중에 소리에만 민감하다. 근데 좀비가 나한테 달려든다. 그럴 때는 이 좀비를 피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여기서 소리를 내는 거예요. 특히 소리를 낼 때, 나이트클럽 광고 번쩍번쩍할 때 소리가 나잖아요. 나이트클럽 광고판 소리로 주인공한테 달려든 이 좀비를 빼돌리는 그 영화, ‘반도’ 그 영화에 그 대목이 나와요. 빼 돌려서 간다고요. 그러니까 이거는 하나의 도피죠. 도피고. 모든 상처를 계속해서 지연시킵니다. ‘다음에 한번 보자. 딸 애 결혼시키고 니 한번 보자. 더는 안 산다.’ 이런 거 있잖아요. 지연시키는 거예요. 이게.

그런데 예수님에 대해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다고 할 때, 액센트가 어디에 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졌다, 예수님에게 액센트가 가버리면 그 정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희생했고 우리를 사랑했다. 이 말은 뭐냐, 내 쪽에서 예수님에게 걸쳐버리면 예수님이라는 대상, 타인이 나에게 이 정도 사랑했으면 양심이라도 어떤 예의라도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내 쪽에서 뭡니까? 주님이 뭘 했는가를 보는 거예요. 자기의 몸을 던져서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우리도 주님을 어떻게 사랑한다? 자기 몸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죠. 이거 지옥 가죠. 이거 지옥 가는 겁니다. 왜? 주님만 사랑했으면 이게 구원이 성사가 안 되고, 무슨 요소가 들어가야 돼요? 내가 주님을 사랑한 요소가 첨부가 되어야 하나님께서 결재, 수락이 된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믿고 하는 것이, 이게 자기 부인이 될까요, 안 될까요? 절대로 안 되죠. 내 사랑이 첨부가 되어야 되죠. 첨부파일 있죠. 첨부가 돼줘야 내가 구원받는데. 주님이 이만큼 사랑했으니까, 그러니까 이거는 믿음이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한테 뭐하느냐, 감정에 호소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감정에 호소하는 거예요. 부흥사들 많이 하는 것 있잖아요. “주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살과 피를 내줬는데, 여러분은 꼴랑 십일조를 강조한다고 그렇게 기를 씁니까? 돈이 그렇게 좋든가요?” 뭐 이런 식으로. “자기들 새끼한테는 학원비도 그렇게 아끼지 않으면서 땅 끝까지 복음 전한다고 예배당 짓는데 왜 돈을 안 냅니까?” 돈 내봐 뭐 코로나가 덤터기 씌워 들고 가겠죠. 그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감정에 호소하는 거예요. “여러분! 양심이 있어요? 없어요?” 뭐 이런 식으로. 그럼 돈 안 내면 졸지에 뭐가 돼요? 양심도 없는 존재가 돼버렸죠. 졸지에 그만 양심도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어요.

이게 그래서 액센트가, 사도바울은 누굴 지우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지워버립니다. 지워버리고 십자가를 딱 해버리죠. 그러면 이 십자가는 뭐냐 하면은 인간 입장에서는 억지로 뒤집어씌운 십자가가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 한번 봅시다. 21절에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그냥 지나갔어요. 지나갔는데, “저희가 그를”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부사. “억지로” 불러다가 “억지로”. 꼭 바이러스 같아.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지가 와서 달라붙는 바이러스. 코로나19처럼 그냥 달라붙었어요. 이게. 십자가가 그냥 달라붙었어요. 누구한테? 시몬한테. 이 관계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연구하고 십자가 논문 쓰고 십자가 설명 듣고 그래서 믿어지는 게 아니에요.

만약에 그렇게 자꾸 십자가를 찾아다니면 이것은 뭐냐 하면은 자기의 감성을 스스로 끄집어내는 거예요. 자기의 장점 있잖아요. 나는 공짜로 먹지 않는다는 것. 나는 염치가 있어가지고 뭐든지 공짜로 받지 않는다는 것. 나는 양심이 있다는 것. 이걸 계속 자기가 개발해내야 해요. 착한 요소를 끄집어내어서 그 착한 요소와 하나님이 원하는 십자가와 연결 지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제목을 이걸로 할까요? 공분. 모든 사람으로부터 공통적으로 전부 다 예수님에 대해서 분노를 냈다는 이 사실이 빠져버리잖아요. 이거 빠져버린 십자가는 알맹이 없는 껍데기 십자가에요. 가짜 십자가에요. 그러면 이 시몬이라는 사람은 기뻐했다? 투덜댔다? 몇 번이에요? 투덜대야죠. “참, 재수도 없지. 재수도 없지.”

이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사도바울 편지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죽음이라고 합니다. 나의 죽음. 나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투덜댐이거든요. 투덜댐. 나의 모든 의미시스템. 의미체계가 무용지물이 되는 거예요. 내가 지금까지 나다움을 유지하기 위해서 갖추었던 모든 의미들. 저 훌륭한 분이 바로 나의 어머니고 저렇게 훌륭한 분이 나의 아버지다. 이렇게 공부 잘하는 젊은이는 내 동생이다. 전부 다 의미를 둔다는 말은 그것이 나에게 나의 나 됨을 위한 너의 너가 되는 거죠. 그냥 살아있다고 너가 되는 게 아니에요. 나한테 의미가 될 때, 내가 너라고 이야기할 때 비로소 너를 통해서 내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너에게서 나한테 좋은 점, 나한테 유리한 점만 골라내겠죠. 그렇게 규정할 때 거기에 누구도 우리는 같이 시도한다? 예수님, 마리아, 천사, 하나님, 전부 다 내게 필요한 너가 되는 거예요. 내 구원에 필요한 너. 나를 구원해서 절대적인 존재, 천국 가는 사람 만들기 위한 너. 이거는 내가 의도적으로 찾아다니는 거죠.

그래서 그렇게 찾아다니는 자기 모습을 보고 자기가 얼마나 기특하겠어요? ‘아이고, 참 내가 오랜만에 옳은 일 한다.’ 이런 식으로. 자기를 위로하겠죠. 이거는 나의 죽음이 아닙니다. 그거는 내가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있어요. 물론 성도도 살아있어요. 뭐가 살아 있느냐, 내 안에 내가 죽었다는 증거가 생생하게 살아있죠. 이게 바로 십자가니까. “주께서 저를 구원했잖아요.” 이래 되는 거예요.

아까 그림을 다시 봅시다. 처음에 그림, 미사일이 안 터지고 그냥 박혀 있으면 우리는 이게 좋은 물건인줄 알고 그걸 연구하고 분석하고 믿고자하고 만지고 울기도 하고. 미사일 붙들고 “주여, 이렇게 나를 위해 죽었다니! 나는 해준 것도 없이 죄송합니다.” 하고 울기도 하는데. 실제로는 이 십자가가 박힌 게 아니고 뭐였다? 꽝! 제목을 이걸 할까? 그냥 터져버렸어요. 터져버리니까 미사일이 있어요, 없어요? 이 땅에 십자가는 없습니다. 다만 십자가가 들어온 그 성도들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70.138) 20-07-19 20:50 
광주강의20200717b 마가복음15장 21-23절(공분을 넘어서)-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셔가지고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세상에서는 예수님이 없으니까 인간 대 인물, 인간들이 있는데 예수님이 한 때 여기에 점선으로 계셨죠. 여기 계셨는데 돌아가셨으니까 예수님이 안 계십니다. 안 계시니까 결국은 인간들 속에는 예수님이 없죠. 예수님이 없습니다. 없음이 돼요. 없음이 되는데, 그럼 예수님은 이 땅에는 없지만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죠. 이걸 저는 온탕이라고 표현할게요. 온탕. 온탕하면 온천 온탕 있죠. 하도 온천에 가면 서로 온탕이라고 해서 어느 게 진짜 온탕인지 모르겠지만. 부곡온천에 보면 온탕. 이 온탕에서 복음이 흘러넘치는 거예요. 복음이 흘러넘치면 여기서 공분이 일어나는, 아까 이야기한 공분을 일으켰던 그 관계가 이 땅에 주어지는 겁니다. 성령을 통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거죠.

주어지게 되면 여기서 예수님이 없을 때,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항상 언어는 짝을 이룬다고 했죠. 없음은 무엇의 짝을 이룹니까? 있음이죠. 있었던 분이 없음이 되는 거예요. 그냥 처음부터 없으면 없음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이걸 소쉬르가 확인한 거예요. 처음에 있었던 것이 없을 때 없음이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으면 없음이라는 말조차도 필요치 않는 겁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것이 한때 있었는데 없다. 이순신 장군이 한때 있었는데 지금 이 상황에 없다. 이래 되잖아요.

사람들은 그러고 싶어요. 왜 그러고 싶은가 하면은 지금 이순신 장군이 있어버리면 지금 2020년도가 아니라 1592년도이어야 해요. 안 되거든요. 이순신 장군은 1592년도라고 우기고 우리는 2020년이라고 우기고 서로 싸울 판이라 이 말이죠. 서로 속해 있는 노선이 다르니까. 1592년은 임진왜란 때가 아닙니까? 이순신 장군은 양보 안 하죠. 고집 센 분이 양보 합니까? 까불면 긴 칼 옆에 차고 이렇게 덤빌 건데? 지금이 1592년이라고 우길 거라 이 말이죠. 1592년이라고. 근데 우리는 2020년이라고 우기고. 그러니까 이순신 장군은 없음이라고 할 때는 한때 있었다 이 말이죠. 한때 있었고, 한때 예수님이 있었던 시절에 있었고 하지만 지금은 그 시대가 아니야. 지금은 우리들이 있는 우리 있음의 시대야. 그렇게 되겠죠. 

그렇다면 이 하늘나라 온탕에서 이들에게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릴 것인가 하는 그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그 문제가 남아있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경 구약에서 나오는 두 가지의 경우를 제가 한번 찾아볼게요. 하나는 뭐냐 하면은 십계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 20장이거든요. 내가 왜 1492년이라고 했을까? 아, 그거는 콜럼버스이야기네. 출애굽기 20장 보게 되면 십계명 중에 이런 계명이 있어요. 17절에,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이래 되어 있죠. 이렇게 계명에 있습니다.

탐내지 말라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주셨다 이 말이죠.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복음이 이미 완성했는데 완성된 복음이 지상에 없는데 어떻게 있게 하느냐,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 방법을 옛날에 모세에게 십계명을 내리는 방식대로 하는 거예요. 십계명에 보면 마지막 계명에 탐내지 말라는 내용이 주어져요. 그럼 그 탐내지 말라는 계명이 주어지게 되면, 모세를 통해서 주어지게 되면, 인간에게 모세를 통해서 탐내지 말라, 라고 주어지게 되면 인간 속에 이 탐내지 말라는 말에 대해서 인간 속에서 마중을 나가는 것이 있어요. 마중.

이 말씀이 오기 전까지는 탐심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탐내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는 순간 여기서 마중을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은, 그럼 뭘 탐내지 말라고 했지? 내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그럼 그때부터는 인간 속에서 뭐냐 하면은 이웃에 대한 탐심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발생하기 시작해요. 그러니까 이거는 없는데, 없는데 율법이, 계명이 주어지니까 없는 데서 보조를 맞춰가지고, 율법의 보조를 맞춰가지고 없는 것이 새로 발생되는 거예요.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탐내지 말라고 하는 순간, 너희들은 그 내부에 있는 어떤 요소가 자극받는다. 그걸 어떤 요소라고 제가 말했지만 로마서 7장에서는 그걸 가지고 악이라고 해요.

우리 속에 있는 악이 십계명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내부의 악이 바깥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 있음이라는 것은, 사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허수아비에요. 허수아비에요. 여러분 볼펜을 길에서 주웠다. 이뻐요. 그런데 써보니까 안 나와요. 왜냐하면 안에 볼펜심이 없기 때문에 그렇죠. 그러면 볼펜을 나오게 하려면 아무리 외형이 아름다운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심만 있으면 나오게 되어 있어요. 볼펜 껍데기 다 버리고 가느다란 심만 쥐고 벌벌 떨면서 써도 나오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그렇죠. 인간들을 완전히 하나님께서 우습게 보는 겁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있다, 없다? 전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목하는 것은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아무리 큰소리 쳐도 “비켜!” 우리 안에 하나님에 대해서 공격성향을 가진 괴물이 살고 있는 거예요. 우리 안에.

근데 하나님이 그 말씀을 주기 전에, 인간들끼리 있을 때는 서로 잘난 체 한 거예요. 서로 자기 관리 잘하고 있다고 서로 으스대다가 하나님께서 탐내지 말라고 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손가락을 서로를 향하여 “니 탐냈잖아?” “니가 냈잖아?” 난 쪼끔 냈다, 너는 많이 냈다, 서로가 손가락질하면서 내부적으로 탐심에 관한 그러한 내용이 자기 본성에 각인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인간이 자극받는 거예요. 외부로부터 자극받는 겁니다. 그게 바로 율법이고 언약적기능이죠. 그러면 이거는 뭘 이야기하느냐, 이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탐심에 대해서 인간들은, 자기 탐심에 대해서 이 말씀대로 탐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인간들은 뭘 하느냐 하면은 우회로를 개설해요.

우회로라는 것은 물이 자꾸 차면 삽 들고 와서 파가지고 물이 다른 쪽으로 빠지도록, 골목에 안 차도록 한쪽을 개설하는 거죠. 그걸 길 트임이라고 하는 그런 단어를 쓰는 사람도 있어요. 이리저리 물을 한 곳으로 길 트임 하죠. 인간이 그때부터는 이 탐내지 말라는 그것에 대해서 내부를 자기가 조절하는 거예요. “탐심을 내되 아주 심하게 내지 않았어요.”라고, 자기 스스로 자기 우회로를 마련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너희들은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고 했는데 이걸 어떻게 우회로로 하느냐 하면은, 이렇게 우회합니다. “펀드에 투자하는 것은 괜찮죠?” 펀드에 투자하는 것은 괜찮죠? 라는 식으로 우회를 해버려요.

자본의 생산이라고 하는 것은 노동자가 노동한 그 임금에다가 추가적인 것을 자기 것으로 일방적으로 노동자에게 줄 것을 가져가는 것. 이것을 마르크스는 착취라고 하는데. 이걸 가져가서 자본이, 이자만 받아야 될 자본가가 이자+알파가 들어가요. 왜 알파가 들어가느냐, 알파가 들어가야 자본에 뭐가 일어나느냐 하면은 재생산이 일어나요. 자본은. 자본은 그날 먹고 그날 먹는 것이 자본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투자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추가적으로 돈을 더 보태고, 보태고, 보태야 되는 겁니다. 그렇잖아요. 모든 게.

예들 들어서 교회 개척 교회하는데 교인이 자기 가족 빼놓고 두 사람이 왔다. 그럼 교회의 기도 제목이 “그저 두 사람만 계속 마지막 끝 날까지 가게 해주세요.” 이런 기도를 하는 교회가 아니죠. 두 사람만 오기에 이 예배당이 너무 크니까. 50평짜리 예배당은 두 사람만 들어오기에는 너무 넓어요. 자기 집에서 모이면 몰라도. 그래서 이거는 뭐냐 하면은 계속 재생산하는 그 가운데서 인간의 뭐가 정당화되느냐 하면은 자신의 탐심이 자꾸 정당화되는 거예요. 탐심이. 그래서 자기 탐심을 우회시켜놓고 여기에 뭘 하느냐 하면은 그럴싸한 이름을 붙입니다. 오늘 여러분 참 귀한 것을 배우는 거예요. 귀한 것. 이름 붙이기. 이름 붙이기를 명명이라고 하는데, 이름 붙이기는 요소를 끌어당겨 놓고 그 요소 전체에 대해서 이름을 붙입니다. 그 요소 전체에 대해서.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이래 있다면, 이름 붙이기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여기 남자들만 따로!” 이렇게 하면 ‘남자들만’이라는 요소를 따로 붙여서 남자들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거예요. 여기는 “여자들만 따로!”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두 개의 요소, 두 개의 집합이 생겼죠. 근데 여기서 “서울사람은 따로!” 이래 돼버리면, 이름이라는 것은 이런 요소를 그대로 끄집어내서 또 이름을 붙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름 붙인다는 것은 지금 요소에다가 더 윗선에서 붙이는 것이 이름이에요. 윗선. 남자, 여자, 경상도, 전라도 말고, ‘한국사람’이라고 전체에 이름 붙이기. 그러면 이 이름은 뭐냐 하면 한국 사람으로 이름 붙이기가 되는 거예요. 남자 이름을 취소시키고. 한국 사람이라고 붙이는 것에는 남자여자 다 들어가 있죠.

그런데 ‘동양인’이라고 하면 한국 사람보다 더 범위가 넓죠. 그 모든 이름의 끝은 뭐냐, ‘주님’이에요. 주님이름이 돼버려요. 하나님이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이게 뭐냐 하면 존재의 사슬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은 우리 작은 것보다 약간 더 넓은 것. 그 넓은 것보다 약간 더 넓은 것. 그 넓은 것 할 때마다 이름을 계속 짓는 거예요. 교회, 교회 이름을 지으면 교회부흥, 교회부흥 다음에 선교활동 잘하는 교회. 이렇게 이름을 붙여나가는 거예요. 근데 이름을 붙일 때마다 결국 뭐냐 하면은, 그들이 어디까지 도달하느냐 하면은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이름이 되는 거예요. “자, 이름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 여기, 여기 모여 보세요!”라고 하면 전부 다 기어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마태복음 7장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뭐냐 하면은 내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치 아니했습니까? 라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 도무지... 무슨 소리고? 나는 도무지 너희를 모른다. 너희한테는 내 이름을 줄 수 없다. 내 이름에 속한 내 요소가 아니야. 내 이름에 집합적인 요소가 될 수 없어요. 천국의 이름은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천국의 이름은 천국의 주인이신 주님의 이름이 자기 요소를 새삼스럽게 만들어내야 해요. 주의 이름이.

그런데 우리가 찾아가면 주의 이름이라고 하지만 이거는 뭐냐, 우리가 생각하는 주의 이름은 내가 여기 멀쩡하게 있고 나를 긍정하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걸 가지고 탐욕이라고 하는 거예요. 탐욕. 나의 확장이 되죠. 나의 요소를 나의 임의대로 천국의 요소로, 천국의 백성으로 들어가고 싶은 겁니다. 이걸 누가 했습니까? 바로 십자가 에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던 바리새인들이 이 일을 했던 거예요. 이름으로. 여호와 이름으로 그들은 유대나라를 만들었잖아요.

그러면 바리새인, 서기관들, 유대인들, 그들이 통분을 느껴서, 화가 너무 많이 나서 예수님을 살해했다면, 예수님을 실제로 살해했고요. 죽였다면, 그러면 십자가는 뭡니까? 십자가라는 말은 어느 누구도 자기의 이름을 건재 시키면서 하나님과 합세하려는 모든 사람은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거죠. 십자가의 원수. 십자가 자체가 단절이고, 절단이고, 서로 통분히 여겼고, 공분을 샀던 그 사건이기 때문에.

따라서 복음이 이 땅에 십자가의 형상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는 율법으로 뭘 양산시킵니까? 탐욕을 양산시킵니다. 탐욕을. 탐욕을 양산시키면 인간들은 요령부리기에 나섭니다. 꼼수, 요령부리기, 조작, 모방, 하나님 앞에 착한 모방, 이런 것을 해가지고 계속해서 아까 물꼬 트는 거. 계속 물꼬를 트는 거예요. 나쁜 것은 전부 다 빼내고 착한 것만 따로 챙기는 거예요. 사실 이거는 내일 모레 주일 낮 설교 배설물에서 할 때 할 건데, 특별히 하는 겁니다. 이 말을 하면 또 예배에 빠지니까 이 말을 안 하려고 하는데. 내가 빼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율법에서 죄라고, 하지 말라고 지적한 것은 전부 다 빼는 거예요. 그걸 배설물로 빼는 겁니다.

근데 사도바울은 반대에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준비한 것은 다 배설물로 빼버립니다. 달라도 얼마나 달라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했던 모든 것. 선교, 전도, 기도, 헌금, 찬양, 성경공부, 예배, 이 모든 것을 다 빼요. 배설물로 다 빼버리죠. 왜냐하면 의미라고 하는 것은 누가 결정합니까? 이게 의미다, 의미 아니다, 라는 것을 누가 결정해요? 이거는 내가 의미 결정하죠. 왜? 의미시스템 안에 내가 있음으로서 나는 죽었다가 아니라 나는 계속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내가 살아있어 버리면 예수님은 어떻게 돼요? 예수님의 살아있음은, 내가 살아있는 것과 예수님의 살아있음이 같이, 둘이 동시에 살아있을 수가 없어요. 왜? 내가 주님에 대해서 화를 내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화를 낸다고 안 하죠. 다만 내가 화를 내고 싶은 사람이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한번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사람이 사기를 당해서 부도가 나가지고, 부도가 나서 사업이 망했는데, 아버지가 사기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이 너무 분해서 약을 먹고 자살했어요. 그런 집안도 있어요. 있을 때에, 그분이 교인이라면 제가 가서 심방을 합니다. 두 가지를 가지고 제가 심방을 한다고 봅시다.

첫째는 뭐냐 하면은 창세기 22장, 둘째는 디모데전서 6장. 첫째, 아브라함도 자기 아들을 죽였습니다. 아브라함도 자기 아들 죽였어요. 그러니까 아들 죽었다고 그리 신경 쓰지 마세요. 두 번째는 뭐냐,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고 만약에 먹는 것 떨어지거든 그냥 죽으세요. 이 이야기를 했을 때에 그 사람이 감사히 받겠습니까? 아니면 공분하겠습니까? 공분하죠.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를 제가 한 셈이 되니까. 가장 듣기 싫은 거죠. 바로 이게 뭐냐 하면은, 왜 이렇게 분을 내느냐, 이걸 성경에서는 니가 빼돌린 그 욕심 자체를 율법으로 들통 냈기 때문에, 지적했기 때문에. 율법으로.

주님께서는 이겁니다. 인간의 탐심의 끝은 뭐냐, 돈을 탐하는 것이다? 아니에요. 그러면 명예를 탐하는 것이다? 아닙니다. 탐심의 끝은 바로 예수님을 죽이는 힘이죠. 예수님을 죽이는 힘.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 거죠. 예수님이 죽기까지 인간의 탐심은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전략은 이거에요. 예수님과 그 다음에 뭐가 분리된다고 했습니까? 예수님과 십자가가 분리되는 것이 아니고 연결되면서 나타나는 것은, 십자가가 나타나는 이유가 예수님이 먼저 죄를 자기에게 연결시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죄를 예수님이 자기에게 씌우고, 두 번째는 자기에게 있는 이 죄 때문에 자기가 죽고 없어지고, 세 번째는 죽고 없어진 그것을 십자가로서 드러내는 이 세 가지.

우리의 죄를 가져오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죄 때문에 죽으시고 그 다음에 자기가 죽었던 사건을 우리에게 십자가세력으로, 십자가 힘으로 그냥 덤터기 씌우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뭐냐 하면은 하나의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구원에 우리가 놀아나는 거죠. 하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뭐가 주인공이 돼요? 십자가가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십자가의 의미시스템은 본래 인물이 하늘에 가 계시니까.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 지상에 의미시스템을 십자가의 반복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냈습니다.

구약에 또 그런 의미가 있는데요. 그거는 여러분들이 한번 찾아봅시다. 사사기입니다. 사사기 7장 6절에 보게 되면 여기 이만 이천 명이 오거든요. 이만 이천 명이 와서 이만 천 칠백 명이 돌아가고 몇 명만 남았는가 하면, 7절에 보면 삼백 명 남았죠.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지금 예수님과 십자가의 관계를 응용하면 모든 성경의 해석이 다 됩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할게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 땅에 드러내는 것은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일방적으로 자기 죄로 가져오는 그것을 십자가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서 가져올 때 이거는 탐심이 되는 겁니다. 탐심이 되고 그 죄는 바로 분노가 되고. 분노로 인하여 모든 인간은 이미 죄인으로 드러났고, 그 죄 있는 상태에서 예수님이 자기 십자가를 이렇게 주는 겁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우리는 분노하기 때문에 우리가 알아서 십자가를 받을 수가 없어요. 그 이유는 우리라는 것은 아까 배운 것처럼 우리 나름대로의 무슨 시스템? 의미시스템을 장착하고 이걸 유지하고 있습니다. 내가 긍정되는 시스템. 내 나쁜 것은 전부 다 빼고 내 잘난 것만 남기는 의미시스템 있잖아요. 의미시스템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이 자체가 죄라는 것을 알려주는 주님의 의미시스템이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죽음이라는 것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내 의미시스템 안에서 내가 없어지는 게 죽음이죠. 내 의미시스템이 완전히 박살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꽝! 미사일 십자가가 터져버린 거예요. 예수님은 안 보이는데 나의 모든 의미시스템은 욕심에 의해서 십자가에서 꽝하고 터져버린 겁니다.

그게 사사기에서, 사사기 7장에 보면 사사가 등장하는데, 사사 이름이 뭡니까? 기드온이죠. 나는 기드온이라는 사사가 등장할 때마다 자꾸 쪽복음, 작은 성경책이 생각나요. 옛날 호텔에 가면 전부 다 기드온 출판사에서 자금내서 만든 성경책 있잖아요. 파란색 표지로 한 성경. 글자가 너무 작아서 잘 안 보여. 기드온 출판사에서 나온 성경책 있잖아요. 그런데 기드온은 뭐냐 하면 이거에요. 본인이 마치 시몬처럼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그냥 찍었어요. 해라! 하라! 기드온에게 오니까 기드온은 처음에 의심했죠. 뭐냐 하면 이게 하나님의 일인지, 아니면 내가 지금 착각을 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일인지, 내가 지금 판단이 흐려서인지. 그걸 분간하기 위해서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새벽에 솜을 해가지고 솜에만 이슬이 맺히고 솜 바깥에 있는 땅에는 아주 바짝 마르게 해달라고 그렇게 하니까 하나님께서는 진짜 솜에만 이슬이 맺히게 하고 바깥은 바짝 말랐거든요.

근데 여기서 기드온이 생각을 해봤던 거예요. 아마 솜이니까 습기를 확 빨아들일 그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 미안합니다. 제가 다시 한 번 하겠습니다. 솜에만 바짝 마르고 땅은 축축하게 해달라고. 그러면 믿겠습니다. 이래 했거든요. 자, 여기서 믿음이란 나의 상식을 뒤집는 것, 이게 믿음이에요. 나의 상식을 뒤집는 것. 지금까지 살아왔던 나의 의미시스템을 내가 뒤엎어버리는 겁니다. 이거는 뭐냐 하면은 내가 나에게 전도하는 것. 이게 바로 믿음입니다. 날마다 내가 나에게 전도하는 거예요. 믿음 없다고 내가 나를 추궁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추궁하나 안 하나 우리는 계속해서 뭐가 일어납니까? 끊임없이 의심이 나거든요. 10년 믿어도 의심. 10년 전에 성경 봐놓고도 내내 매일같이, 매일같이 뭐냐, ‘성령 받은 게 아니고 내가 지금 오기로 믿는 게 아니냐?’ 그걸 매일매일, 매일 그렇고 오후 세시 타임, 네시 타임, 매일 끊어도, 끊을 때마다 계속 생각나는 것이 뭐냐 하면은 ‘내가 이게 믿는 게 아니야. 믿는 게 아니고 믿는다고 내가 착각하고 내가 스스로 설득하고 있는 거야.’ 이런 식으로 계속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뭐냐, 갖고 싶은 거예요. 내가 내 의미시스템에 납득이 되는 그 믿음을 내가 소지하고 싶은 겁니다. 움켜쥐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기드온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부탁하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있고, 내가 있으면 짝패니까, 내가 있으면 누가 없어요? 너는 없다. 여기서 나온 게 그 유명한 영구 없다가 나와요. 영구 없다~ 너는 없는 거예요. 그럼 반대로 내가 있으면 누가 없는 거예요? 주님이 없는 거예요. 내가 있으면 주님이 없잖아요. 주님이 없기 때문에, 주님을 내가 내 의미시스템을 가동해서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전에 주님께서 은혜 주셨잖아요. 전에 주님께서 내가 배고프다고 하니까 어디서 갑자기 강원도 쌀 포대를 보내주셨잖아요. 이런 거. 자꾸 내가 납득이 되고 설득이 되는, 역시 나는 믿음이 있다고 자꾸 만들어내는. 그건 뭐냐 하면은 내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 갑자기 와버리면 우리는 내가 없어지는 것에 대해서 공분을 느끼면서, 내가없으면 어떻게 되지? 그럼 내가 없으면 내가 없는 거잖아요. 진짜 말 쉽게 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진짜 쉽게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없으면 내가 없는 거예요. 내가 없으면 내가 걱정하거나 고민할 것도 염려할 것도 없는 겁니다. 내가 없다는 것은 센 분에게 지금 얻어터지고 있는 순간입니다. 나보다 더 센 분에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몬이 진 십자가가 시몬의 십자가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십자가에요? 누가 졌던 겁니까? 요새 같으면 강원도에서 올라와가지고 지가 십자가 딱 짊어져가지고, 예수님 흉내 내려고, 예수님이 십자가 지는 것이 양심상 너무 안 됐어. 나도 예수님 따라할래. 예수님이 지금 쓰러지면 나도 쓰러질래. 예수님이 고생하는 것을 폼 잡아서 자기도 같이 고난 받는 거예요. 예수님이 사십일 금식했다고 하면 자기는 겸손하게 39일 금식하는 거, 이런 것 있잖아요. 자꾸 모방하는 거예요. 왜? 내가 여기 있으니까.

그런데 내게 없는 것을 주께서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내게 없는 것을. 내게 없는 것. 자, 사모님한테 묻습니다. 본인에게 없는 것이 뭡니까? 결혼하기 전에 없는 것? 아들 단이죠. 남편이죠. 그러면 사모님 두 살 때 없던 것? 그럼 욥처럼 태어나기 전에 없던 것? 이 세상 모든 것은, 내가 없다는 것은 나의 죽음을 앞당겨서 내가 경험하는 거예요. 이게 아까 이야기한 의미시스템에서 무너지게 되어서, 꽝하고 폭발하게 되어서 내가 없어질 때, 비로소 처음부터 있었던 주님이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주님이 내게 주신 게 뭐냐, 남편이고 아들이고 다 그렇죠. 주님의 십자가. 모든 소유권은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한테 있습니까? 주님한테 있으니까 범사에 감사하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던, 부도나고 아들 죽었다고 공분을 느꼈다고 할 때, 제가 아브라함도 아들 바쳤잖아요?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고 할 때, 이게 농담이 아닙니다. 아들 죽고 부도남으로서 비로소 내가 탐심으로 가득 찼다는 것을 그제야 이게 다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뭐냐, 없는 거예요. 없는 건데 성도한테만 십자가가 있고 그 다음에 누구는 빠지고? 누구는 없고? ‘나’가 없는 거예요. 십자가가 날마다 십자가가 있게 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나를 없는 자로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300명 이야기해봅시다. 자, 기드온과 300명이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럼 처음에 몇 명이 왔느냐 하면은 22,000명이 왔죠. 처음에 올 때. 이 22,000명이 뭐냐, 기드온의 군대죠. 기드온의 군대를 모집하니까 22,000명이 왔어요. 주님께서는 여기서 21,700명을 가라고 했습니다. 나머지기 300명만 남았죠. 그럼 300명의 의미가 뭐냐, 기드온 군대는 아예 없다가 돼요. 아예 없는, 군대가 없는 거예요. 근데 300명 남았잖아? 라고 고집부리지 마세요.

이 300명 정도는 22000명에 비하면 이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거예요. 없는 거라 이 말이죠. 실제로 표현할 때 그런 표현도 있어요. 내가 전에 어떤 모임에 갔는데 너무 조용해. 어느 정도로 조용한가 하면 바늘을 떨어뜨렸는데 바늘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하다. 이 말은 바늘을 왜 떨어뜨려보는 겁니까? 바늘을 떨어뜨려볼 만큼, 실제로는 시끄러운데 왜 바늘을 떨어뜨린 거예요? 그만큼 조용하고 적막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바늘 떨어진 소리를 언급하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300명을 둔 이유가 뭐냐, 아예 22,000명 군대가 없는 거예요. 한명도 없는 거예요. 그리고 누구도 없다? 기드온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 보기에는 누가 보입니까? 기드온이 있고 300명이 있고. 횃불이 있고 단지가 있고. 있지요. 그들이 보기에는 있어 보이는 이것이 당사자에게는 뭐냐 하면 무려 미디안 군사 135,000명에 비해서 기드온까지 합쳐서 301명은 이게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없는 거죠. 따라서 주님이 일하실 때는, 있을 때는 이 땅에 십자가라는 형식으로 없이 일하신다는 겁니다. 십자가 없이. 그래서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은 있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을 믿는 사람이 십자가 믿는 사람이에요.

여기서 제가 약간 걱정이 돼서 한 번 더 묻는 건데, 아까 천주교이야기 나왔죠. 예수님 있고 마리아 있고 마리아가 예수님을 안고 있다. 마리아는 모성애를 발휘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있게 되게 되면 어느 쪽을 선호하겠어요? “내가 평소에 이웃사랑 하듯이 마리아와 예수님 사랑을 본받아서 나도 이웃사랑하고 하나님도 사랑하면 되잖아. 이게 율법이잖아.”라고 생각하죠.

근데 본인이 있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탐심인데요? 예수님은 십자가라 말이죠. 그럼 사람들은 말하죠. 예수 믿는 사람들은 보여도 십자가는 안 보이잖아? 없잖아? 없는 게 정답이에요. 너희들은 있는 것을 믿지만 나는 없는 것을 믿는다. 없음이 나 있음보다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사람. 없음이. 없음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사람. 나 있음에 대해서 일생을 그렇게 하고 있는 겁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생각하는 것은 뭐냐, 날 찾아봐라! 이 말입니다. 날 한번 찾아봐라! 못 찾죠. 찾을 수가 없죠.

한번 정리하겠습니다. 인간이 생각한다는 것은 자기가 닫혀있지 않고 열려있다는 뜻이죠. 열려있다는 것은 나처럼 여기 있는 사람을 찾지요. 그게 뭐라고 했어요? 너라고 했죠. 너. 자기를 대상화하는 거예요. 대상화하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내가 누구냐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 사람을 너라고 부르는 거예요? 나 자신을 구축하기 위해서, 나 자신을 정립하기 위해서 타인을 찾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이 만약에 나를 배신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온갖 저주를 다 퍼붓게 되는 겁니다. 보세요. 얼마나 이거는 이기주의입니까? 날 버리고 니가 다른 여자를 찾아가. 진달래꽃 시에 나오는 것처럼. 가시는 길에 내가 붉은 것을 뿌리오리다. 가다가 발목 다쳐서 10년도 못살고 죽어버려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전에 서로 알던 사이고 서로 흥정했던 사이라는 것을 그걸로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알던 사이. 생전 처음 본 사람 같으면 그런 저주를 안 품었죠. 악담을 안 퍼부었죠. 기대를 했다 이 말입니다. 기대를 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식이 애 먹이면 뭐라고 합니까? 나가라! 나는 너 같은 자식을 둘 수 없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니는 어디가도 내 자식이라는 뜻이에요. 그게. 여러분 약을 먹을 때 ‘어! 약 먹을 시간 넘어갔네.’ 이거는 무슨 뜻이에요? 이거는 여전히 내가 약 먹을 마음이 있다는 뜻이에요. ‘내가 약 먹을 타이밍을 놓쳤네.’ 이 말은 뭐냐, 이미 시간이 지나갔음을 후회한다는 것은 나는 계속 약 먹을 용의가 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주님께서 끊임없이 성경을 가지고 니는 죄인이다. 십자가 졌다는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계속 새록새록 생각이 난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보약 같은 친구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보약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니는 이정도로 니밖에 몰라, 라고 자꾸 우리가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건드렸다는 뜻이에요. 주님 앞에 우리가 뭐냐 너가 되는 거예요. 너. 주님, 나를 위한 너에요. 나를 위한 주님이 아니에요. 주님을 위한 너가 되게 하는 거예요. 내가 너에게 십자가를 뒤집어씌우고, 내가 너라는 기드온에게 찾아온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나가 없는데, 없는 체로 내가 여기 있음을 미디안 군사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드온 너를 해가지고 기드온에게 있는 것을 다 파먹는 거예요. 

기드온이 언제 전쟁하고 싶어 했고 기드온이 언제 사람 모아서 대장질하고 싶어 했습니까? 기드온이 애쓰고 선전해서 무려 22,000명을 모았잖아요. 22,000명을 모았다 이 말이죠. 자기 딴에는 많이 모은 거예요. 수련회 한다고 여러 가지 코로나 가운데서도 한 30명오면 많이 온 거거든요. 근데 그쪽에서 미안하다 하고 취소하면 어떻게 하느냐, 어떻게 하기는요, 안 하면 되죠. 양식이 떨어졌다. 무슨 뜻입니까? 안 살면 돼요. 왜? 계신 분이 그만 살라는 뜻으로 알고 안 살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주님이여, 이럴 수 있습니까? 저를 살려 주옵소서, 라고 하는 것은 뭐냐, 이게 바로 숨어있던 뭐였다? 탐심의 우회로에 내가 의미를 두었다 이 말입니다.

22,000명 이거 했는데, 이거는 기드온의 든든한 후원자들이에요. 기드온의 분신들이죠. 다 날아가 버렸어요. 그러면 뭐도 날아가요? 기드온도 날아가요. 없는 거예요. 누가 싸웁니까? 주님이 홀로 싸우는 겁니다. 자, 여기서 우리 에베소서 6장을 한번 봅시다. 이거는 누가 한번 읽어봐야 해요. 에베소서 6장 10절에서 좀 긴데요. 긴 것을 읽으려니 제가 다 걱정이 돼요. 첫 번째 것이 나중에 끝에 가서 다 잊어버릴까봐. 그래서 10절에서 13절까지는 제가 읽고 13절부터는 다른 분이 한번 읽어보세요.

10절,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절,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절,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절,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절, 평안의 복음이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됐습니다. 거기까지만. 이 말씀은 뭐냐 하면은 내가 지금 싸우고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이거 싸우고 있어? 미사일이 이미 터졌어요. 미사일이 터졌으니까 미사일은 없어요. 십자가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없는데 꽝은 있어요. 꽝! 꽝의 여운이 계속 세상 끝 날까지 갑니다. 꽝했다는 것을 누가 아느냐, 마귀는 알고 있어요. 사람은 몰라요. 악마는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의 싸움은 개코도 모르는 인간을 붙잡고 싸우지 말고 누구하고 싸워라? 보이지 않는 악한 영들, 어둠의 세상주관자들. 그러니까 악마 따로 인간 따로가 아니라 악마가 인간을, 이 세상을 주관하고 있으니까 이 세상의 모든 사고방식은 악마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에요.

그러면 성도라는 것은 자기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성도가 된 게 아니고 싸우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 싸움이 뭐냐 하면은 진리는 이미 온 천지에 다 퍼져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 퍼져있기 때문에 따로 내가 준비할 것은 전혀 없어요. 전혀 없습니다. 한 살 좀 된 애보고 엄마가 막 화를 내면서, 한 살 좀 더 되겠다. “오줌 함부로 싸지 말고 화장실에 가라고 했잖아. 니 오줌 어디에 쌌어?” 이러면 애들이 아무 소리 안하고 뭐합니까? 손가락 가지고 가리키죠. 우리가 할 일이 이거에요. 다 이루었잖아. 이 싸움. 악마는 우리에게 똑바로 살아야지, 믿음대로 살아야지, 바르게 살아야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면 되겠어, 이게 악마가 하는 이야기에요. 악마가. 말씀을 보면 폼으로 보나? 말씀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라고 했잖아. 이렇게 닦달내면 우리는 뭐라고 해야 합니까? 손가락으로 가리키죠. 주께서 다 이루었다. 그 싸움을 가지고 니가 방패로 삼아라. 무기로 삼아라. 이 싸움을 하라는 거예요.

만약에 성령이 오지 않고 십자가가 없는 사람은 성경대로 이래 하라고 하면 주섬주섬 뭐합니까? 내 싸움하기 위해서 내가 갖출 것을 갖춘다고 이렇게 해버리면, 그거는 뭡니까? 갑자기 기드온이 300명에서 숫자 모자라서 돌아간 22,000명을 도로 부르는 거예요. “애들아! 부대복귀. 다시 와! 우리 힘이 있어야 싸우지. 힘이 없어서 못 싸워. 다시 와서 싸우자!” 이 짓하고 있는 거예요. 전도는 남한테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미 죽었던 나보고 하는 거예요. 확인하는 거예요. “너 이미 죽었잖아. 너의 의미시스템 이거 무너졌잖아.” 십자가 꽝 할 때 이 의미시스템이 없는 거예요. 그럼 이게 없어지면 뭐가 나타납니까? 주님의 의미시스템이 우리를 이미 꽉 장악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뭡니까?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는 것이고, 평안의 복음이 신을 예비한 것이고, 믿음의 방패, 모든 것이 뭐냐, 내가 한 것은 하나도 없고 주께서 이 땅에서 다 하신 것 속에 우리가 거기에 지배받고 있습니다. 다루어지고 있는 거예요. 오늘 제목을 뭐로 할까 고민 중인데. 후보감은 의미시스템, 이걸로 할 가능성이 많아요. 꽝, 이거는 장난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서 안 되고. 하면서 생각해봅시다.

오늘 본문을 한번 봅시다. 22절,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다시 말해서 아무도 스스로 갈라고 할 마음도 없고 그리고 여기에서 자기 미래를, 미리 여기서 자기 자신의 본실을 찾으려는 사람도 아무도 없는 곳이 십자가죠. 그렇다면 이 해골의 곳, 그곳이 시몬한테는 그냥 덤터기로 씌워지는 거죠. 시몬이 구원받았다는 뜻이 아니에요. 주님께서 일을 하실 때에 주님 자신의 의미시스템, 의미체계를 활용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길가는 시몬에게 십자가를 짊어지도록 주께서 다 배치를 하신 거예요. 오늘날 우리에게 배치하듯이.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로 사라져도 누구는 남아있어요? 십자가 진 사람은 남아있겠죠. 똑같은 구조를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성령께서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고 예수님의 영이 난데없이 된 통으로 십자가 영을 받은 사람을 출현시켜서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시면서 얼마나 사람들에게 수모를 당했는지 몸속으로 경험케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겁니다. 성도가 이렇게 예수님과의 관계, 예수님과 십자가의 관계 속에 있는 이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탐심, 탐욕, 죄라는 것이 도대체 내 육신과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점점 더 이걸 깊숙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주께서 아직도 살게 하신 거예요. 이 탐욕이라는 것, 탐심, 변명, 꼼수, 죄, 나는 무조건 살고 싶다는 것, 다른 사람은 다 코로나 걸려도 나는 안 걸리고 싶다는 이런 모든 것.

내가 있고, 내가 있음이 있고 난 뒤에 그 다음에 하나님이고 예수고 있는 것이지, 내 있음이 우선이라는 그것을 남은 경험 못해도 성도이기 때문에 충분하게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 앞에서 뭐가 됩니까? 죄 많은 너가 되는 거예요. 죄 많은 너가 되면서 우리는, 왜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이 공분이라는 것을 뚫고, 우리는 주님의 모든 것이 싫어요. 이 싫음을 뚫고 쳐들어온 이유가 뭐냐, 쳐들어올 만한 정도로 우리는 주님 앞에 이런 분통과 화를 낼만한 존재인 것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주는 것. 그게 바로 주님이 우리를 통해서 전도하는 것이고 그 전도가 대외적으로 전도가 되는 겁니다.

이거는 결코 내 의도로, 내가 의식해서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매일같이 의심해요. 내가 착각한 게 아니냐? 그거는 내가 아직 화를 안 낼 경우에만 착각한 것이겠지만, 정말 내가 자기 인생이 불평스럽고, 내가 이래 사느냐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어떻게 6대0으로 이기고 있다가 어떻게 그게 7대6으로 뒤집힙니까? 야구 좋아하는 사람은 그래요. 어떻게 손흥민이가 두골 넣어서 그 팀이 이겼는데, 손흥민이 토트넘이죠. 토트넘이 이기고 있는데 후반전에 바보같이 수비해서 세골을 집어넣어서 프리미어리그에서 7등이 못되고 8등으로 내려갔느냐? 젊은 애들은 그것 때문에 죽고 싶어요. 젊은 20대는 그것 때문에 죽고 싶어 하죠. 그럼 30대 결혼한 사람은 무엇 때문에 죽고 싶어 합니까? 30대가 없으니까 뭐. 그럼 40대는? 40대가 없으니까. 아, 40대 있네. 40대는 왜 그래요? 인생 살면서 뭣 때문에 분통이 느껴집니까? 애는 왜 그렇게 공부를 안 하는지. 그럼 50대는? 왜 갑자기 갱년기가 찾아오고. 얼굴은 왜 그렇게 붉어지고.

이 모든 게 뭐냐 하면은 충분하게 하나님이 있으면, 예수님이 진짜 있으면 내가 화낼만한 요소를 내가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앎으로서 전도가 되는 거예요. 앎으로서. 아, 진짜 주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전도할 때 인간성이 좋아서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듯이, 지금은 그 대상이 우리 자신이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날마다 주님 앞에 전도 받으면서 또한 우리를 통해서 세상적으로 예수님만 증거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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