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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3 23:22:13 조회 : 292         
십자가 위치 마가복음 15:35 201023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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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0.138) 20-10-29 23:37 
광주강의20201023a 마가복음15장 33-39절(십자가 위치)-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5장 33절입니다.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온 땅이 어둡다고 되어 있죠. 제육시라고 하는 것은 열두시고요. 제구시라고 하는 것은 오후 세시고. 온 땅이 어둡게 될 정도 같으면 그 뒤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우리가 모른다 치고. 그걸 괄호를 딱 해놓고.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온 땅이 어두워졌는가? 이 자연세계가 반응을 나타날 정도의 사건은 어떤 사건이겠는가? 그 뒤에 괄호에다가 임의로 한번 집어넣어보자 이 말이죠. 어지간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접촉사고 같은 것이 온 땅이 어두워지겠는가? 안 어두워지죠. 어떤 개인이 들어가면 온 땅이 어두워질 수 없죠.

어두움과 어두움을 주관하는, 어두움까지도 장악하고 있는, 어두움조차 창조하신 분, 이사야 45장에 빛과 어두움을 창조하셨다고 나오죠. 어두움마저 관장하시는 분. 그분에게 변고가 생겨버리면, 변고가 생겼다. 그러니까 이게 해가 안 어두워져야 하는데, 밝음이어야 될 그 시기가, 오후 12시부터 3시까지 한참 밝아야 될 그 시기가 어두움으로 전환이 되었다고 한다면, 이 세상의 우주의 변화는 뒤에 오시는 분에게 종속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걸 우리 인간에게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죽어도 상관없다, 에요.

앞에 ‘죽어도’를 빼버리면 그냥 상관이 없는 거예요. 상관이 없다는 이 말을 통속적으로, 우리 십자가마을에서 유명한 말이 있다면 그냥 뭐가 되느냐 하면은 막살자. 막사는 것이 되겠죠. 상관이 없어요. 아이고, 누가 차사고 나서 다치면 어떻게 되느냐, 가만히 보니까 다친 정도가 아니라 죽어도 상관이 없는 거예요. 죽어도 상관이 없어요. 왜냐 하면은 종속되어 있으니까요. 이분에게 일어난 변화에 따라서 자연세계가 먼저 반응을 보여주는 겁니다. 밝음에서 어두움.

근데 왜 이게 어두운가 하면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라지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 없는 세계는 곧 어두움이다. 이 말을 달리 이야기하면 예수님이 있다는 말은 아직 빛이 이 땅에 존속하고 있다. 이렇게 이해하셔도 되는 겁니다. 오늘 강의의 주제를 먼저 말씀드리면 위치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위치가 사라진다. 이 위치라고 하는 것은 강아지도 있고 집도 있고 하면 전부 다 위치가 되겠죠. 강아지고 사람이고 집이고 각각 고유의 위치에 있잖아요. 고유의 위치. 고유의 위치 이것이 날아가 버립니다.

고유의 위치를 위치라고 간주하지 않고, 아까 말씀대로 위치다운 위치에 모든 것이 종속되었다. 매여 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네 식구가 있는데 애가 하나 가출해서 안 보인다. 그러면 네 식구가 있어야 될 위치에서 하나가 비어있는 거예요. 집에 왔는데 세 식구만 있으면 하나가 없잖아요. 그러면 여기는 위치만 남게 되죠. 위치만 남게 된다고요. 네 명이 다 와야 한 식구가 이게 온전하게 완결이 되는데, 하나가 없을 때 여기에 이 위치는 있는데 애가 사라진 거죠.

그런데 만약에 애가 없고 위치만 있다고 보지 말고, 애초부터 위치 자체가 없다고 한다면, 이 사람들은 분명히 이게 네 식구가 아니었고 세 식구가 옳다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세 식구가 옳다고. 그러면 이 중에서 하나가 또 가출해서 없어지면 세 식구가 아니고 두 식구가 옳다고 이렇게 될 거예요. 그 다음에 또 하나가 없어지고 한명만 있다고 한다면, 두 식구가 아니고 한 식구가 옳았는가를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오늘 십자가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이해하고 34절을 봅시다.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되어 있죠.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라지는 거예요. 예수님이 사라지게 되면, 이 세계에 사람들이 이렇게 있는데, 예수님이 오셨다가 사라지게 되면, 예수님이 올 때는 위치가 있다가 사라지게 되면 그 분의 위치만 없어진다고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러나 주님이 오시고 다녀가게 되면 이 전체 위치가 모호해지면서 전부 다 없어지는 거예요. 이 전체가. 이게 뭐냐 어두움이 돼요. 어두움. 그러니까 이거는 어디 있다고 해서 하나님은 그걸 있음으로 간주해주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여기 있다고 해서, 우리가 여기 살아있다고 해서 살아있다고 간주해주지를 않아요. 모든 의미가 쏟아지는 그 중심 위치가 있을 때 우리는 위치를 잡을 수가 있는 겁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그거예요. 십자가의 의미는 단독적으로 우리 자신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나는 무엇이다, 이다, 아니다를 규정할 수 없게 만들어버려요. 우리 자신을. 이 십자가라고 하는 게.

십자가가 빠져버리면 빠진 채로 살면 그만이다, 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과 오시기 이후에 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어 있어요. 여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여기 마가복음 15장 29절에 보게 되면 지나가는 자들은 모욕하죠. 30절에 보게 되면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죠. 31절에 대제사장들도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다고 이렇게 되어 있죠. 32절에 이스라엘 그리스도 왕이여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하라고 하죠. 이게 전부 다 뭐냐 하면은 말이 되는 거예요. 말. 말들이 많아요. 말하는 거라 이 말이죠.

그런데 이 말들이 지금 십자가를 통해서 연관시켜 버리면 말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은 행동으로 바뀌었고 이 행동에 의해서 십자가사건이 터져버린 겁니다. 말이 행동으로, 행동이 드디어 실제적인 사건이 된 거예요. 그러면 이 십자가에 예수님을 버리게 하는 그 일을 통해서 거꾸로 이야기하면 그들의 행동들이 있었고, 그 행동이 있기 전에 뭐가 있었다? 그들의 말들이 거기에 많은 거예요. 말들이 많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인간들이 이래 있다면 인간들끼리 주고받는 게 뭡니까? 이 말이죠. 말들을 주고받아요. 예수님을 버릴 카드로, 예수님은 죽어 마땅한 걸로 했다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은 그들의 집단적 오해가 되겠죠. 하나님 보시기에 메시야를 메시야로 못 봤으니까 오해한 거죠. 이 오해가 뭐가 되느냐 하면은 법이 되는 겁니다. 법적으로 구성이 돼요. 오해가. 법적으로 구성이 되면, 이 법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은 이거는 진리, 진실을 뜻합니다. 사람들이 말하고 행동할 때, “너 말 좀 조심해. 행동을 조심해.” 그거는 무엇을 의식하느냐 하면은 지금 내가 말하고 행동할 때 진리에 부합이 될까, 안 될까를 늘 측정하고 계산해서 행동하고 옮긴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말할 때, 함부로 이야기 못할 때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가 진실 되게 해야 되고 진리에 부합되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은 사회적인 통념이라든지, 법, 상식, 전통, 여기를 늘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말과 행동들이, 진리체제가 지금 십자가사건을 유발시켰잖아요. 그렇죠. 그럼 여기의 진리와 진실이 뭐냐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위치를 사라지게 만드는 거죠. 예수님이 없이 살아도 상관없다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없이 살아도. 인간의 평소의 말과 행동과 우리가 주고받는 이 모든 것이 전부 다 예수님이 없이 살아도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없이 살아도 된다는 것은 뭐냐 하면은 집단적인 말로, 소통하는 말을 통해서 자신들은 충분히 위로받을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보통 좌파나 우파나 패를 나누어서 이렇게 싸우고 하는데, 좌파우파 싸움을 하는데, 좌파우파가 이렇게 싸울 때에 왜 좌파우파로 나누어지느냐 하면은 그 집단에 의해서 본인이 위로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위로받을 수 있기 때문에. 야, 우리 편 몇 명이야, 저쪽 편 몇 명이야, 패를 갈라서 위로받는 거예요. 위로받는다는 것은 뭐냐 하면은 나라는 위치는 위로받아야 된다는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이 나라는 위치.

이 나라는 위치가 이렇게 되게 되면 여기서 나는 나만의 고유성을 확보한 게 돼요. 이거는 예수님이 없어도 나는 나로 인하여 충분히 위로받고 살 자신이 있다.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지옥은 뭡니까? 지옥은 예수님의 긍휼이 없는 것이 지옥이죠. 그러면 죽어서 지옥 가느냐, 천국 가느냐 하는 것은 굉장히 쉬워요. 그냥 이 땅에 예수님의 위치가 빠져버린 이 세상에서 그냥 사는 대로 살면 그게 어디로 가는 겁니까? 지옥이죠.

지옥은 하나도 부담이 되지 않아요. 지금 사는 행세 있잖아요. 사는 행세. 사는 행동과 말과 서로 집단적으로 위로받고 인간이 생각하는 그 법대로, 양심에 따라서 그냥 편하게 사시면 “지옥으로 모시겠습니다.”가 되는 겁니다. 지옥으로 가는 거예요. 그냥 가만히 있어도 지옥 가는 거예요. 컨베이어 시스템처럼 가만히 있어도 세월가면 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어떤 사람은 천국가기 위해서 아주 용을 쓰죠. 용을 쓰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천국 가는 것이 왜 실패냐 하면은 신앙기력이 결국은 제 풀에 제 힘이 빠져요.

여러분 턱걸이 할 때 철봉에 매달리잖아요. 중력을 거슬려서 매달려보죠. 처음에 5분 동안 매달려있죠. 선생님하고 애들 다 집에 가버리면 자기는 그대로 매달려있을까요? 놔버리죠. 천국가려고 그렇게 용을 쓰고 애를 쓰고 나름대로 노력을 다하는데 결국은 제풀에 지가 진이 빠져가지고, ‘에이 모르겠다.’ 자기가 천국 가는 사다리라고 할까요? 그 방식을 본인의 손으로 놔버린다고요. 놔버리면 어디로 떨어집니까? 원래 했던 행세, 원래 했던 행동, 원래 했던 말, 다시 말해서 원래 했던 자기 위치, 그 위치에 합세합니다. ‘그래, 내가 내 하던 대로 하는 게 제일 편해.’ 그러면 천국 가려고 한 건 그냥 시도해본 거죠.

시도해봤는데, 아, 이거 힘이 오래 못 가네요. 오래 못가요. 교회 한번 해보겠다고 복음으로 외치고 뭐 해도 나중에는 그 교회가 기진맥진해서, 에고 때려치우자! 각자 힘드니까 니 맘대로 사세요. 다 때려치워버려요. 주님이 하시는 말이, 천국이 만만하냐? 이 지옥 가는 본성에서 천국에 갈 수 있는 힘이 나올래야 나올 수가 없어요. 본성 자체가 가만히 있어도 어디에 간다고 했어요? 가만히 있어도. 가만히 있어도 지옥 가는데, 가만히 있어도 본인의 힘을 거스를 수가 없어요.

예를 들면 요한복음 11장 21절 같은 경우가 하나의 예가 되는데,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죽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 일부러 늦게 갔거든요. 늦게 가니까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지금 예수님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자기 집의 오빠가 위치만 남기고 오빠가 죽었잖아요. 위치 있잖아요. 그럼 자기 집은 세 식구였는데 두 식구가 남았다 이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을 일찍 오라고 하는 것은 이 세 식구가 되는 위치를 다 보장해줘야 우리는 한 식구가 되는데, 원래 세 명이 한 식구니까 세 명을 유지해줘야 우리 가족의 위치가 온전하게 됩니다, 라고 생각해서 예수님에게 미리 전갈을 보냈는데 예수님께서 일부러 늦게 왔잖아요.

늦게 오니까 하는 이야기가 일찍 왔다면 우리 오빠가 죽지 않았다 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힘이냐 하면은 지옥의 강력한 힘이에요. 예수님은 눈치 챘겠지만, 예수님은 지금 오셔가지고 없음으로서 위치 자체가 사라져버렸죠. 아까 제가 위치이야기 한다 했죠. 위치 자체가 사라졌어요. 예수님의 위치 자체가 사라져 버리면 그 자체가 뭐냐 하면은 지옥이에요. 예수님이 안 계시겠다는데, 지옥이죠. 예수님이 계시는 곳이 어디입니까? 이거 쉽잖아요. 지옥의 반대말은 천국이죠.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디에 있든지 관심은 없고, 왜 내가 있는 곳에 예수님이 합세를 안 하느냐, 이것 때문에 지금 마르다는 짜증을 내고 있다 이 말이죠.

사람들은 자기가 있는 곳이 어두운 줄을 몰라요. “뭐가 어두워? 오후 3시인데 뭐가 어두워?” 이러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다가 빠진 그 시점에 온 세상이 깜깜해졌죠. 그러면 이거 뭡니까? 이 세상은 내 위치를 위해서 이 세상에서 해와 달과 별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누구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겁니까? 예수님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말해주잖아요. 그러면 내 중심은 아니죠. 내 위치중심은 아니죠. 지금 이 세상은 예수님의 위치를 놓쳐버린 거예요. 사라져버린 거예요. 

십자가에서 제가 왜 위치 문제를 중요하게 거론하느냐 하면은, 마가복음 15장을 다시 보게 되면 여기에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36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 가시니까,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융에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고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주나 보자 하더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주나 보자. 예수님께서 사라지기 전에 누가 오느냐 하면은 엘리야가 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당시 사람들이 엘리야를 언급할 때, 엘리야의 어떤 것을 봤느냐 하면은 우리가 있는 세계에 엘리야가 여기에 들어와서 우리의 이 위치가 천국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완료시켜야 된다, 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서 빠져나가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십자가를 통해서 빠져나간다고요. 예수님의 위치가 있었는데 없습니다. 없어요. 그러면 사람들은 이분이 정말 예수님이 끝까지 메시아인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이 있기 때문에 그 말을 믿고 싶어서 예수님께서 빠져나가기 직전에 엘리야가 와가지고 예수님을 도와주게 되면 예수님은 빠져나간 분이 아니고, 우리 위치에 같이 계시는 분이 되게 되면 그분은 진정 메시야가 맞다, 라고 생각하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뜻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여기에 어떤 곳도 예수님이 있을만한 곳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면서 자기 발을 빼는 거예요. 이 땅에서. 이 위치를 빼버리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사라짐이거든요. 예수님이 사라진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사라진다는 이 말은 구약에 나오는 엘리야의 기능도 이 땅에 와서 사라지는 기능을 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안 찾아봐도 아시는데, 열왕기하 2장 11절에 보면 엘리야가 이 땅에 와서 그 시체가 있었어요? 없었어요? 시체가 없죠.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엘리야의 몸은 이 더러운 땅과 같이, 더러운 인간들의 시체와 같이 할 그런 몸이 아니다. 빼돌리는 겁니다. “두 사람이 행하여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 하더라” 두 사람은 놔두고 엘리야만 하늘로 승천을 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빠져나가는 것을 엘리야가 이 사실을 미리 보여준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구름타고 빠져나가지 않고, 불수레 타고 빠져나가지 않고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해서 빠져나가죠. 죽임을 당해서. 엘리야의 차이점은 그겁니다. 물론 엘리야도 이 땅에 살면서 고생을 했지만, 마지막 때는 불수레 타고 멋지게 올라가지 않습니까? 멋지게. 함부로 손댈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다 보여주고 빠져나간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빠져나갈 때는 그냥 엘리야처럼 본인만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고, 이 땅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빠져나가시는 거예요. 이 땅의 실상을.  그래서 다시 한 번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한 마디로 하면 ‘위치가 사라진다.’ 위치가 사라지니까 이 땅에는 위치가 없는 겁니다. 위치가 없다, 이걸 달리 이야기해서 보이는 것과 보여 지는 것 사이에 교착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보는 것과 주님에 의해서 보이는 것 사이가 이게 서로 맞지를 않아요. 교착상태. 머물러 있는 상태에요.

교착상태라는 말이 어려우면 이걸 고치겠습니다. 주님께서 사다리를 차버린 거예요. 사다리를. 사다리를 차는 것을 매개의 소실이라고 해요. 매개의 소실도 어려운데 그럼 쉽게 하겠어요. 서로 생전에 전화 한 번 걸지 않고 같은 도시에 살면서도 생전 만나지도 않은 두 형제간이 그래도 만날 때가 있어요. 왜냐 하면은 살아계신 어머니 생신 때 만날 수가 있어요. “형님, 내일 모레면 어머니 생신인데, 연세 많은 어머니 모시고 어디서 할까요?” 그럼 형이 있다가 “그래, 전에 먹었던 뷔페집 있잖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형님, 저녁 7시까지 만납시다.” “그래, 만나자.”라고 할 때에, 생전 연락도 안하고 얼굴도 꼴 보기 싫어하다가 어머니 생신 때 만났을 때, 그 어머니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매개라고 합니다. 이해하기 쉽죠잉~

어머니를 통해서 그 형제간이 연결된 겁니다. 그걸 매개라고 해요. 매개. 그런데 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제 만날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이게 매개가 없는 거예요. 매개가   사라진 겁니다.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예수님 자신을 밀치게 만들어서 이 세상과 하늘나라에 대해서 매개가, 어떤 사다리도 존재하지 않게 만들어버렸어요. 어떤 연결점이 없게 만들었어요. 연결점이. 그래서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아무리 이 땅에서 천국가려고 용을 써도 나중에는 자기가 신앙생활 한 그것이 진이 다 빠져요. 노력은 노력대로 헌금십일조 할 것 다 했는데, 아이고, 내가 생각해도 지겹다. 많이 해봤다. 나 이제 그만할래. 자기가 손을 놔버려요. 손을 놓게 되면 어디로 다시 돌아가느냐 하는 거예요.

이게 천국 가는 쪽으로 떨어집니까? 아니면 지옥 가는 쪽으로 떨어집니까? 어느 쪽이에요? 본성이 그냥 지옥 가는 쪽으로 가요. 그냥. “내비 도! 내비 도! 내가 편한 데로 믿을 테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 인간들은 아무리 권하고 해도, 오늘 제목이 내비 도! 내비 둬! 내비 도! 이거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은 죽은 이주일이 이야기했는데. “내비 도! 나 이렇게 살래!” 내버려두라는 이 말이 아닙니까? 나의 위치가 있고 나의 고유성이 있는데, 여기서 잡아당기는 중력을 나는 못 이기겠어. 그냥 내버려 둬. 니는 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래.

뭐가 없죠? 매개가 없죠. 어떤 연결점이 전혀 없죠. 자기 위치 껴안고 그냥 사는 거예요. 이 위치에 뭐가 없다고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의도적으로 빠져나간 그런 위치잖아요. 예수님이 없는 위치를 두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지옥인 거예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아주 편하고 행복하고 평온하게 지옥생활을 누리고 있는 겁니다. 지금. 이렇게 기분 좋은 말은 그냥 제가 못 넘어가겠어요. “아휴, 복음 믿고...,” “여보, 니나 잘 믿어. 내비 둬. 나는 그냥 이래 살다 죽을래. 가정은 애 공부 잘하고 돈 잘 벌고 행복하면 되지. 뭐. 또 뭐가 어쨌다고.” 이러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에 엘리야를 거론한 그 당시의 사람들. 엘리야가 와야 된다고 보는 사람들. 왜 끝까지 엘리야가 와야 된다고 주장하느냐 하면은 자기의 이 위치가 예수님이 함께 끄집어 당길 수 있는 위치가 될 때, 내 위치가 헛된 인생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줄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주님이 사라지면 예수님의 위치가 없잖아요. 그렇죠. 예수님의 위치가 없죠. 예수님의 위치가 없으면 뭐가 없느냐 하면은 내가 없는 거예요. 내 자신이 있어도 이건 이미 죽은 자인 겁니다. 지옥 자체가 그런 거니까. 이미 예수님이 없으면 죽은 자인 거예요. 그런데 자기는 멀쩡하게 여기 있으니까, 자기는 있는 나를 행복하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바로 인간이 말을 하고 그 말에서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행동이 나왔고, 그 행동이 어떤 법적인, 진실의 법에 의해서 예수님을 처형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뭐냐 하면은, 주님이 계시지 않는 그곳, 그곳은 매개,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어떤 사다리가 없는 상황이에요. 그 없는 상황에서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이미 죽은 자로서 있는 겁니다. 굳이 지옥을 안 가 봐도, 죽어서 지옥이 있는지를 확인 안 해봐도, 이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가 떠나버린 이 세계 자체가 지옥입니다. 간단하죠. 여기 34절을 봅시다.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했죠.

자, 그 버려지는 장소가 어디죠? 이 세상이잖아요. 인간들이 사는 이 세상에서 버려졌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죽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세상 자체가 예수님만 버림받은 것이 아니고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세계에요. 지금 버림받은 세계에서, 여기서 뭐 더 살고 안 살고 별 의미가 없죠. 여기서 뭐 성공 했니, 실패 했니, 그 자체도 성립이 안 되니까요. 더 쉽게 간단하게 합시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의 교착상태라는 말은, 갈등을 일으킨다는 말은, 보이는 것이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보이는 것이 사라져버리면 뭐만 있느냐 하면은 내가 보는 것만 남아있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보이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보이는 것이 훌쩍 떠나버렸다. 이것이 사라진 거예요. 사라져버리니까 뭐냐, 인간들끼리, 우리들끼리 보는 것만 달랑 남았다 이 말이죠. 그렇죠. 이 보는 것만 남아있으니까, 예수님 입장에서는 이게 어떻게 됩니까? 이것은 바로 저주받은 세계에요. 다시 말해서 이게 저주받은 세계입니다. 예수님의 저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사는 세계 자체가 뭘 해도 그냥 저주받은 세계에요. 여기서 백살을 살든 열 살을 살다 죽었든 관계없어요. 전부 다 저주받은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혼자 안 죽었다. 자기만 혼자 맹숭맹숭하게 달랑 돌아가신 게 아니고, 이 세상 전체의 실상을 보여주면서 돌아가신 겁니다. 그러면 그 다음 문제에요. 천국은 어디에 있느냐? 지옥밖에 없으니까. 위치가 되살아난다. 돌아온다. 이러면 천국이 되겠죠. 어떤 위치? 내가 보는 위치가 아니고 나를 보시는 위치. 나를 대상으로 만드는 위치. 내가 보는 주체가 아니고 그분이 나를 보고 있는 주체가, 그 위치가 여기 어떤 장소가 있으면 되겠죠. 그 장소에 가면 내가 보는 위치가 아니고 그분이 나를 보기 위해 만든 위치가 있으면 되죠. 그 위치가 지금 여러분이 있는 위치잖아요. 간단하죠.

그동안 우리는 뭡니까? 내가 나를 봤고, 내가 나를 측정했고, 계산했고, 측량한 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영이 오게 되면, 이건 지금까지 한 거예요. 내가 나를 보는 것은 나는 죽은 자요, 저주받은 자요, 주님이 없는 지옥을 내가 나를 보는 겁니다. 내가 나를 보는 거예요. 부모가 되어 큰아들이 놀고 있으니까, “아이고, 내가 공부시키느라 애썼더니만 노나? 지옥에나 가거라! 밥도 아깝다.”라고 할 때는, 부모가 보는 자식이다 이 말이죠. 근데 그 자식이 하는 말이 “어머니, 아버지는 나를 그리 보지만 주님은 그리 보지 않습니다.” 이러면 그 가정에 새로운 위치가 생긴 거예요.

우리가 보는 것으로 인하여 버림받았던 분이 찾아온 거예요. 버림받았던 분이. 이걸 더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사냥꾼이 총을 쏘려면 그 동물은 정지가 되어야 해요. 정지가 되어야 총을 쏠 수가 있거든요. 움직이면 못 쏘잖아요. 그런데 이번에는 상처받은 동물이 “누가 나를 쐈어?”하고 사냥꾼을 찾아다니는 그러한 상황이라면 어떻습니까? 이건 찾아오심이죠. 찾아올 때 곱게 찾아오지 않고, “니가 나한테 총을 쐈지? 니가 본다는 것으로 인하여 내가 상처받고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내가 너한테 일러주러 왔다. 너의 잘못된 안목을 가지고 나를 본 것으로 인하여 내가 이 땅에서 밉상 받아서 추방되었던 사실을 너에게 일러주러 왔다.”

그래서 이 전체 주제를 세자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토하기. 욱~! 인간이 밀어준 그 모든 의미를, 주께서는 혼자 그 버림받은 의미를 타고 성령을 보내시는 건데, 성령을 보내시는 것이 뭐냐 상처받은 것을 토해내는 거예요. 주님께서 욱~! 하고 토해내는 거예요. 주님이 술을 잡쉈는지 모르겠지만. 라면부터 시작해서 먹었던 것들. 이거 내가 이 세상에서 당했던 건데, 너희들에게 받은 것이 이건데, 이걸 니 앞에 토해놓을게. 토해놓는다는 거예요. 그걸 두자로 뭐냐 하면은 능력이고, 능력은 인간의 모든 가치와 의미를 덮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천국가기 위해서 내가 개선한다든지, 개조한다든지, 내가 딴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오므라이스 알죠? 볶음밥 위에 노란 계란후라이로 덮어버리면 이게 어떻게 되든 관계없이 위에 노란 것으로 보이잖아요. 이 노란 이것이 뭐냐 하면은 이게 능력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묻기를, “목사님, 내가 어떻게 내 마음을 고치면 내가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아니면 이렇게 막사는데도 천국갈 수 있습니까?”라고 하는 것은, 지금 어딜 쳐다보고 있는 겁니까? “내가 나를 보는 그것에 대해서 그것이 나의 전부입니다.”하는 소리하고 똑같은 소리예요. 내가 나를 보는 것밖에 몰라요. 내가 남을 보는 것밖에 몰라요. 하여튼 내가 사냥꾼이고 내 앞에 얼쩡거리는 것 전부 다 사냥감이 되는 겁니다. 자식이든 친구든 뭐든 간에. 아내든 남편이든 간에 성깔나면 쏘아버릴 테니까.

아까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르다 마리아 앞에 예수님은 사냥감이 되겠죠. 자기는 사냥꾼이고. “우리 오빠가 죽었는데 왜 이제 오십니까?” 이게 뭐예요? “내가 보는 것에 대해서 왜 주님은 호응해주지 않습니까?”라는 그런 뜻이다 이 말이죠. 그러나 주님이, 주님 쪽에서 그 마리아 가정을 보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왜? 내가 보는 것만 바쁘기 때문에. 내가 보는 것이 전부기 때문에. 내가 주님을 어떻게 다루어야 되고 주님을 어떻게 믿어야 된다. 여기에다가 모든 역량을 쏟다보니까, 철봉에 매달려서 용을 쓰듯이, 주님 이케요? 저케요? 이렇게 하면 천당 갈 수 있어요? 천국갈 수 있어요? 뭐 복음을 알아볼까요? 뭘 해볼까요? 성경공부 참석해볼까요?

모든 노력을 해봤자, 그것도 오래 간 사람은 한 오년, 십년, 나중에는 복음 안다고 나 같은 게 천국 가나? 포기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그걸 도를 넘어서 복음 좀 아니까 안 들어도 괜찮겠지. 이런 사람도 있고. 전부 다 내가 나를 측정하고 내가 나를 검토하는 방식으로만 가니까, 이거는 뭐 누구 위치가 빠진 상태였던 겁니까? 예수님이 빠져나간 상태 있잖아요. “엘리야가 와야 됩니다. 주님, 이렇게 안 됩니다. 누구 도와줘야 해요.” 그런 의식을 인간들은 이 세상에서 법이라는 이름으로, 진리라는 이름으로 계속 가고 있었던 겁니다. 그게 십자가사건이에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교착상태, “왜 내가 보고 판단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습니까?”라고 할 때, “니는 니가 보는 것만 보냐? 내가 너를 보고 있다는 것은 생각 못해?” 이 상태가 밀고 땡기고 진도가 안 나가요. 충돌돼요. 늘 현장에서. 마찰을 일으키는 거예요. 나 자신에 대해서 너무 절망해도 문제고 너무 우쭐대도 문제고. 내가 나를 생각한다는 그 자체가 문제에요. 그 자체가. 주시는 은혜로 살아가는데, 우리는 내가 나로 인하여 살고 싶어요. “내가 뭐가 못나서 은혜로 삽니까?” 뭐 이런 식으로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주님이 주신 능력보다도 내가 그동안 나를 지탱했다고 여기는 그 능력을 더 선호하는 겁니다.

마가복음 15장을 다시 보시고 29절을 보겠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그 다음에 뭡니까? “모욕하여” 모욕하죠. 이제 모욕하는 이유를 알겠죠. 자기가 예수를 보고 있으니까 그래요. 보고 있으니까. 그 다음에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는 자여” 30절,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라는 이 이야기도 결국은 뭐냐 본인이 예수를 보고 있다는 이게, 주님이 빠진 상태에서 그게 지옥의 성향이고 생리라는 사실을 전혀 가늠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게 바로 지옥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거예요.

다시 분명하게 말합니다. 지옥은 누가 빠졌다? 예수님이 빠진 곳이에요. 왜? 어두움이니까. 빛이 있어야 될 곳이 어두움이 되었으니까. 지옥이 있으면서 지옥에 통하는 사고방식에 완전히 빠졌다는 사실을 본인이, 인간들이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옥에 살아있으니까 어떤 삶이 제일 편해요? 지옥 가는 삶이 제일 편한 거예요. “여러분, 편하게 사세요. 지옥가십니다.” “안됩니다. 목사님! 천국 보내주세요.” 천국 보내주려고 뭘 해봤자, 그거는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상태에서,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결연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아무리 천국가려고 애써도 나중에는 지옥의 힘이 천국의 힘보다 더 세죠.

결국은 하다하다가, “나도 어지간히 천국가려고 해봤는데 내가 나를 포기했습니다. 복음 아는 너희들끼리나 잘 가세요. 나는 그냥 내비 도! 내비 둬! 나 이래 살다 죽을래.” 죽을래 하지 말고, 죽을래 라는 말은 잘못된 말이에요. 나 이래 살다 죽을래, 하지 말고. 이미 죽었으니까. “나 이래 살다 지옥갈래.” 이것도 말이 이상하다. 이미 지옥이거든요. 갈 데가 없어요. 주님의 위치가 빠져버린 곳은 뭘 해도 그건 지옥이에요. 주님이 안 계신 곳은 지옥입니다. 혼자 살려고 하는데 이것보다 확실한 지옥이 어디에 있어요.

자, 그렇다면 이제는 천국이야기 해봅시다.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자기 위치에 다시 오는 것이라고 했죠. 그러면 이 지옥에 있으면서 천국으로 오신 분을 전에는 실수했지만 반기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지옥에서 뭘 만드느냐 하면 이미 천국을 만들어냈어요.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천국은 뭐냐 하면은, 재미있는 게 모든 이가 가고 싶은 곳이에요. 모든 이가 기대하는 곳이에요. 나쁜 사람이든 좋은 사람이든 간에 죽어서 어디 갈래? 라고 물으면 천국이라고 하죠. 이미 천국이 완전히 덮여있어요. 얼마나 지옥 같으면 전부 다 천국에 가고 싶어 해요? 자기 주제도 모르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천국에 보내기 위해서 위치로 와도, 무엇과 교착상태, 마찰을 일으킵니까? 이 가짜 천국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진짜 천국이 핍박을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의 똑같은 현상이 복음을 전하는 성도를 중심으로 해서 똑같이 벌어지는 겁니다. 이것이 뭐냐 십자가의 확산, 십자가의 반복 또는 되풀이. 십자가 사건의 되풀이. 똑같은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진짜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사람에게 당했던 것을 욱~하고 이걸 토해내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당했다는 것을 토해낼 때, 그분의 위치에 다시 오신 거예요. 물론 성령이죠. 성령이 오신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우리가 언제 주님을 학대했습니까?”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우리가 얼마나 점잖은데, 예수님 오시면 잘해드리죠. 그렇게 심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했지, 저는 아니에요.” 이렇고 있다 이 말이죠. 이게 성도한테 찾아오게 되면, 성도는 육의 본성이 뭐냐, 천국가고 싶은 거예요. 누가? 본인이. 천국가고 싶은데, 천국 가겠다는 그 자체가 자기 위치를 죽은 자로 보지 않고 뭐로 보느냐 하면은 염연히 살아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것도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의미가 가치가 같이 살아있거든요. 나라는 것이 고귀하게 중요하게 살아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의 입장에서는 뭐냐, 우리한테는 일체 고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 없어요. 오죽했으면 떠나려고 하셨겠습니까? 주님이 떠날만한 것들만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에요. 따라서 성령이 와가지고, 주님이 너 때문에 떠날 만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그렇게 되면 여기서 위치가 만들어져요. 위치가. 십자가 사건이 재현되는 위치가 만들어진다 이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은 그게 바로 구약의 엘리야입니다. 엘리야. 이것을 심판이라고 하는 거예요. 심판. 성도의 존재 자체가 그 시대에, 그 지역에, 그 마을에 심판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 심판이 이루어지는 그 위치가 성도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떠나신 주님이 성령을 통해서 함께 있는 위치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은 어디에 있습니까? 천국은 수시로 있죠. 수시모집이에요. 수시로 있어요. 그리고 늘 있어요. 뭐로 나타납니까? 예수님 당시에는 허름한 모습으로 나타나듯이, 지금은 허름한 모습의, 대단치도 않는 모습의 성도가 등장함으로서 그게 하나의 주님과 함께 있는 위치가 되는 겁니다. 이 위치에서 성도가 고백하는 것은 뭐겠어요? 우리가 보이는 것으로 인하여 주님은 살해당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떠나보냈다. 따라서 나는 죽어도 상관없다. 주님이 없다는 것, 나는 홀로 산다는 이건 무의미하다는 것. 살아도 이게 살아있는 게 아니고 죽은 존재다. 죽은 존재에 죽은 존재임을 알리기 위해서 주님께서 오신 거예요. 그래서 성도가 내뱉는 고백은 뭐냐,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어. 사고 나도 상관없어. 왜? 나는 이미 죽었으니까. 나는 이미 죽었으니까.

이게 내가 나를 보는 게 아니고 함께 계신 주님 앞에 반대로 내가 보여 지는 거예요. 내가 주님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주님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에 의해서 보여 지는 그 모습이 내 입을 통해서, 말을 통해서 나오고, 그 말은 뭐로 이어진다고 했어요? 행동. 말은  행동이 되고 그 행동은 주님이 주신 천국의 원리원칙과 법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이 되는 겁니다. 그리 보시니까, 아까 말들이 많았던 사람들, 32절에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예수님을 욕할 때, 그 욕한 심정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충분히 이해하죠. ‘아, 그럴 만했구나!’ 왜? 지옥은 지옥다워야 되니까. 그런 욕을 한다는 것은 충분히 지옥이 지옥다운 면모를 보이고 있으니까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고 이해가 되는 거예요. 하나도 어렵지 않은 거예요. “왜 그 거룩하신 메시야를 죽였느냐?”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죠. 모든 인간은 당연한 거니까. 예수님께서 저주받을 때 이 세상도 함께 저주받았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70.138) 20-10-30 12:42 
광주강의20201023b 마가복음15장 33-39절(십자가 위치)-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천국은 어떻게 위치하느냐, 그것은 주님이 주신 시간과 주님이 주신 공간이 적용이 됩니다. 주님의 시간과 주님의 공간이 적용이 되는데, 이거는 뭐냐 하면은 그때의 십자가가 지금의 십자가로 전환이 돼요. 그때의 십자가가 지금의 십자가로 전환이 됩니다. 그러면 전환될 때, 그때의 십자가, 지금의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여기 위치를 대표하는 게 뭐냐 하면은 십자가로 대표했죠. 그럼 위치에서 무엇은 빠져야 하느냐 하면은 나라는 것, 나의 위치는 주님한테 양보해야 됩니다. 넘겨줘야 해요. 내가 여기에 있다가 아니라 십자가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 돼야 돼요. 그게 천국의 위치예요.

내가 여기에 있어버리면, 나라는 고유의 것이 그대로 유지가 돼요. 내가 옛날에 어느 학교 나오고 뭐 어떻게 하고... 계속 살아나요. 이게 바로 천국을 훼방하는 겁니다. 내가 이만큼 애썼고 이만큼 기도했고... 계속 내가 있으면 안 되거든요. 이미 우리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사다리가, 매개가 사라졌죠. 우리의 사다리가 없는 거예요. 갈 수 없다 이 말이죠. 내가 열심히 가고자 해도 그거는 팔로 철봉에 매달리는 거랑 똑같은 거라서 언젠가는 손을 놔버려요. 인간은. 나의 위치가 나보다 더 셉니다. 내가 있던 위치.

왜 자꾸 아까부터 위치라는 말을 하냐 하면은 내가 있고 위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위치가 내 허락도 없이 위치가 나를 선택해버린 거예요. 이 지옥이라는 위치가 나를 선택해버린 거예요. 아담이 나를 일방적으로 선택해버린 거예요. 이 천국은 반대로 주님이 일방적으로 나를 선택해버린 거예요. 근데 악마는 우리를 선택해놓고, 악마 자기는 쏙 빼버리고, “니가 니를 보면 될 게 아니냐. 니한테 선악을 볼 수 있는 지식이 있으니까, 니한테 판단력이 있으니까, 니가 너를 판단하면 되지 않겠느냐.”

자꾸 악마는 우리가 최종판단자인 것처럼 그렇게 조작을 해가지고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고 내 인생을 내가 꾸려나가도록 뒤에서 자꾸 부추기는 거예요. 선과 악을 니가 결정해라. 니가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얻었으니까, 그거 뭐 써먹어야 될 게 아니냐. 이거는 선이고 이거는 악이고 판단해서 오른쪽을 선택해서, 바르게 선택해서 그걸 모아서 천국에 갈 때 어떻게 좀 천국에 넣어주세요, 라고 들이밀어라. 자꾸 악마가 선악구조 안에서 우리를 묶이도록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선악구조 안에서 나온 것이, 아까 이야기한 대로 여러 번 하는데, 말이 어렵기 때문에. 말 그 다음에 뭡니까? 행동. 이 말과 행동에서 뭐가 만들어졌다? 이게 법칙이 되죠. 법이 된다고요. 이 법에서 나오는 의미가 뭡니까? 진실이고 진리. 예수님은 누구에 의해서 죽었다? 인간들이 하는 이 진리와 진실의 법에 의해서 예수님은 살해당한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다시 왔다는 말은, 이제는 사냥 대상이 되었던 그 짐승이, 총 맞은 짐승이 “누가 나에게 총을 쏘았어?”하고 다시 찾아오는 거예요.

니가 나를 봤기 때문에 주님이 죽었잖아요. 이제는 죽은 분이 다시 살아나셔서 죽게 된 그 모든 환경을 그대로 가지고 우리에게 되돌려주는 겁니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 누가 이런 짓을 했어? 하고, 우리에게 퍼질러놓을 때, 그 위치가 주님이 방문한 위치거든요. 방문한 거예요. 여러분, 방문교사 알죠? 주님이 친히 찾아온 거예요. 그러면 거기는 내가 있는 겁니까? 누가 있는 겁니까? 주님이 계시고 구체적으로 십자가가 있는 거예요.

그 십자가 위치한 게 뭐냐, 뭐가 위치한다? 주님이 위치에 있으면 그거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거는 뭐가 돼요? 천국인 겁니다. 천국은 어디에 있다가 아니라 니 안에 있다는 겁니다. 내가 있는 곳, 예수님이 계신 곳이 천국이에요. 지옥 속에 천국이 찾아온 거예요. 지옥 속에. 주님이 찾아올 때 그렇게 찾아왔잖아요. 천국은~~ 하고 설명할 때 전부 다 뭐냐, 이 지옥 속에다가 주님이 일어나서 벌어진 사태를 가지고 천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이와 같으니라, 포도원비유로 아침 열시에 오고... 할 때, 천국은 열 달란트 받은 거라고 할 때, 천국은 열 처녀 비유로 기름을 준비하고 할 때, 이 모든 이야기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을 보고자하는 그 안목이 새로운 시간과 공간으로서 적용되는 거예요. 이게 천국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천국이란 내가 나를 본다든지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보시는 것의 안목으로 살아가는 것이 이미 시작된 천국생활입니다. 참, 말로는 정말 쉽다. 말로는 정말 쉬워요. 이왕 나왔으니까 더 쉽게 해봅시다. 나의 선택이 아니고 주님의 선택. 나의 선택이라는 말을 집어넣은 것은 나조차도 누굴 위하여 선택당해서 세상을 그따위 식으로 본 거예요. 내가 마음이 나빠서 본 게 아니고 우리도 뭔가 악한 질서에 의해서 선택 당했기 때문에 그거밖에 못 보는 거예요. 내가 나 위주로 밖에 볼 수 없도록 안목을, 악마가 그렇게 짜서 나한테 선택을 하게 한 거예요. 악마의 증인으로서.

근데 우리는 이제는 뭐에 증인입니까? 주님의 증인이 되려면 주님한테 선택 당해야죠. 선택 당해서, 이래되면 이 위치는 내가 자리 잡은 위치가 아니고 누가 지정해준 위치냐 하면은, 주님에 의해서 천국 되도록 지정된 위치에 우리가 놓여있으면, 나는 무엇이다, 라는 게 의미가 없고 지금 주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재현하는데 우리를 사용하고 계시다. 그렇게 되겠죠. 그러면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방금 한 이 전체를 이 문장으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위치는 성도에 의해서 표시된다.

지금은 십자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성도가 있는 그곳이 바로 십자가가 있는 곳이에요. 인간들의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죠. 한때 있었던 십자가, 그때 그 자리에만 있었던 십자가, 갈보리 언덕에만 있던 십자가가 이제는 우발적으로 계속 일어나는 십자가, 군데군데 일어나는 십자가예요. 그래서 제가 지난 낮 설교였습니까? 돌들로도 부르짖는다고 했죠. 전에 설교했잖아요. 뻐꾹! 뻐꾸기가 울 때. 이 산에 가면 뻐꾹 저 산에 가면 뻐뻐꾹, 화답을 하는 거예요. 복음을 전했더니만, 앞에 있는 식구들은 무슨 소리인가 하는데, 저쪽에서 뻐꾹! 하고 있다 이 말이죠. 전부 다 하나가 되어 있었던 거예요. 이미. 각각 동일한 십자가의 본질들이 거기에 위치해있었던 거예요. 구석구석에.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국가와 민족에 상관이 없이.

주의 성령이 찾아간 그곳에서는 전부 다 십자가의 위치가 반짝반짝하게 표시등이 들어오는 거예요. 표시등이. 하늘에서 천사가 보기에는 숫자가 되게 많은 거예요. 굉장히 많은 숫자가 있는 거예요. 우리 입장에서 보면 외롭죠. 왜? 사방을 둘러봐도 나같이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없어보여서 굉장히 외롭고 쓸쓸함을 느끼지만, 위에서 보게 되면 없다고 생각했는데 굉장히 많아요. 물론 서울의 남산에서 보는 서울의 밤풍경에 십자가가 많은 것하고는 관련이 없습니다. 요새는 십자가 조명을 밤새 켜놓으면 잠 안 온다고 민원이 들어와서 잘 안 하거든요.

그 다음에 봅시다. 이 십자가가 위치해있으면 여기서 뭐가 들어오느냐 하면은 똑같은 현상이 들어와요. 여기서 보복이 들어와요. 보복이 들어오고 핍박이 또 쏟아집니다. 이 점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왜 성도에게 핍박과 미움과 보복이 들어오느냐, 그것은 인간들이 기대하는 성인상, 이미지, 내가 성숙한 성인이 되었을 때 나는 이런 인간이고 싶다, 하는 이미지가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 시큰둥하게 안 듣는 이유가, 거부하는 이유가 따로 마련된 나의 나됨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의 성숙한 여자 또는 성숙한 남자로서, 나이가 서른 되었을 때 나는 이정도의 인품을 갖추고 있겠다는 게 따로 마련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인간들 말고 성도가 보여주는 성인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때그때마다 그림을 새로 그려야 합니다. 우리가. 어제 내가 생각했던 자아상은 오늘 되면 폐기하고 오늘치 다시 그려야 돼요. 내일 되면 또 그려야 돼요. 내가 누군지를 모르겠어. 또 내가 누군지를 알 필요도 없어요. 왜? 선택은 주님이 하시니까. 주님께서 나는 이렇다고 이미지를 해봐도 그건 오늘까지의 선택이고, 내일이 되면 또 어떤 사태가 일어나서 이 그림이 바뀔지 몰라요. 고정된 뭐가 없느냐 하면은 ‘고정된 나’가 없어요. 고정된 나. 고정된 나가 없는 겁니다.

여기서 세상 사람들은 어떠냐 하면은 세상 사람들도 고정된 자아가 없습니다. 없는데, 문제는 악마가 고집스럽게 니가 되고 싶은 이상형 있잖아요. 아까 그 이상형. 그 이상적인 이상형과 현재 자아를 미치도록 결합시키려고 애를 쓰게 만들어버려요. 악마가. 인간은 늘 본인이 누군지를 모르게 되어 있는데, 악마가 자꾸 격려를 해주고 힘을 실어주는 거예요. “니 이런 인간 되려고 애썼잖아? 이제 와서 왜 그걸 포기하려고 하느냐? 노력해라!” 세상 사람들은 뭐냐 하면은 정신병 환자들입니다. 환자들. 본인의 이상형을 본인이라고 자꾸 우기도록 위에서 악마가 우쌰우쌰 힘을 자꾸 실어준다는 거예요.

자아가 되고 싶은 그 주체상하고 이게 떨어져야 하는데, 이게 안 되면 억지를 부리면서, 고집을 부리면서 내가 이렇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정신병환자인데, 여자는 뭐냐 하면은 이걸 가지고 공주병이라고 하고 남자는 왕자병이라고 하는 겁니다. 어릴 때 보았던 백설 공주나 동화책이야기를 보면서 아직도 그 환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성도는 그날 주님의 선택에 의해서 그날치, 그날치의 모델로 그냥 등장하면 돼요. 왜냐 하면 어차피 나를 어떻게 다루고 나를 어떻게 재조립한다는 것은, 이거는 내 소관이 아니고 주님의 소관이거든요.

그러면 이 두 가지 이야기, 성도인 자와 성도 아닌 자를 결합해버리면 이상형을 고집하는 그들에 의해서 성도는 늘 핍박을 받고 정신적 학대, 육체적 학대를 당하게 되어 있어요. 미움을 받게 되어 있어요. 미움을 받고 있으면서, 세상 사람들은 확정된 자기에 대한 미련, 환상을 못 버립니다. 적어도 괜찮아 보이는 그 자아상 있잖아요. 자아상을 늘 그리워하게 되어 있어요. 실제로 TV프로에서 그런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데, ‘참 오래 살고 볼일이다.’라는 프로에 보면 나이 전부 다 오십이 넘어서 모델이 되겠다고, 무려 2089대1로, 한명 뽑는데 2089명이 달려들었어요. 나이 오십 넘어서 모델이 되겠다고. 살 빼고 똥배 다 들어가고 스타일 좋은 사람들이 다 온다고요.

특히 이거뿐만 아니고 트롯 가수, 개나 소나, 진짜 임영웅이가 한 백억 버니까, 자기도 덩달아 나이 오십 넘어서 늦게, 사업 망하고 난 뒤에 트롯 가수나 해볼까, 청춘의 꿈을 그때는 돈 번다고 못했는데 이제는 꿈을 이루어보겠다고, 꿈은 이루어진다고 해가지고 얼마나 많은, 수천 명이 트롯 가수에 지원하고 있는지 몰라요. 자기 본업이 있으면서도 트롯 가수 한다고 작곡가한테 노래 배우고. 이게 뭡니까? 내가 그리워하는 나의 이상형과 내가 합치되지 않으면 이게 살아도 산 게 아니다. 힘들어서 못 살겠다는 거예요. 자기 이상형에 꽂혀버린 거예요.

여러분들이 여러분 강의에서 들었겠지만, 이것을 네자로 뭐냐 하면은 자기연민입니다. 자기연민. 주 예수 나의 산 소망이라는 가스펠송 혹시 들어본 적이 있어요? 끝에 보면 할렐루야! 하고 노래 부른 사람이 있죠. 누구한테 이야기할 때 안경 낀 그분이 서경수 목사님 사모님 닮았다고 이야기했는데. 메인보컬 다시 한 번 봐보세요. 그 가사에 보면 사망이 무너졌다고 해요. 사망이 무너졌다. 이 가사 내용은 사실은 옳지 않아요. 자아가 무너져서 할렐루야 되어야 해요. 자아가 무너진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북한 인민군한테 체포가 되었습니다. 20명이 체포가 되었는데, 인민군들이 후퇴하면서 패배가 확실하니까 다 학살을 하고 가는 거예요. 우선 열 명을 가지고 교실 같은데 모아놓고 일단 열 명을 총을 쏴서 다 죽이는 거예요. 총소리가 들리고, 남아있는 열 명은 그 총소리를 다 듣는 거예요. 그 열 명이 죽었다는 사실을 다 아는 거예요. 그때 남아있을 때, 본인이 남아있다면 어떤 심정이겠습니까? 그냥 죽었겠구나. 이거죠. 죽어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다음 열 명을 쏘려고 하는데, 그때 유엔군이 쳐들어와서 열 명이 살아남게 됐다고 했을 때에, 그 사람들이 살아남은 거예요? 죽은 거예요? 이미 죽은 거예요. 이미 죽었다고요. 그 심정이 뭐냐, 십자가 위치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떠났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이미 죽은 거예요. 인민군 총에 맞든 누구 총에 맞든 어떻게 하든, 차에 치어죽든 이미 우리는 죽은 거예요. 이미 죽었기 때문에 내 주장, 내 희망 이런 게 있으면 안 돼요. 나는 모델이 되겠다. 뭐가 되겠다. 이런 기대가 있으면 안 돼요. 이미 죽은 거예요.

죽었는데 주님께서 찾아왔을 때, 무엇이 가장 시험거리가 되겠습니까? 자기연민, 자기애, 이게 가장 시험거리가 되는 거예요. 이미 죽었는데, 죽은 자가 무슨 자기에게 애정을 보이고 집착을 보일 수 있습니까? 이미 죽어버렸는데. 사망이 무너져버리면 죽을 뻔한 경우에요. 사망이 무너졌으면. 죽으려고 했는데, 야! 사망이 무너졌구나! 할렐루야! 이건 죽을 뻔 한 것이고. 성경에서 말한 것은 뭐냐 하면은 사망이 무너진 게 아니고, 영어로 브로큰 broken이라고 되어 있거든요. 죽음이 무너진 게 아니고 자아가 무너진 거예요. 자아가.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가 더 살게 된 이유도 없게 된데서 오는 그 무거운 짐이 날아가 버린 거예요.

주께서 보시는 대로, 하시고자 하시는 대로 우리를 사용하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나의 그림을 그릴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나의 이상형을 그릴 필요가 없어요. 그렇다고 기초화장도 하지 말라는 그런 뜻은 아니고. 남을 위해 좀 찍어 바르고. 자기 이상형에 근접해서 충실하게 일치시키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이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나를 선택한 게 돼요. 안돼요. 주님의 선택이 있는 한, 내가 나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아까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이 찾아왔을 때, 이제 마리아 마르다가 주님한테 큰 실례를 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이제 아시겠죠.

주님이 일찍 오셨으면 오빠가 죽지 아니하였겠다고 하는 그게 자기의 본모습인 것은 맞는데, 이게 왜 신앙이 아닌지. 오빠가 같이 세 식구가 사는 것이 그 가정의 이상적인 모델이 되고 말았던 거예요. 진짜 인민군이 쳐들어와봐야 돼. 인민군이 총으로 오빠 한번 죽여 봐야, 아, 우리가 오빠가 살아있어서 행복했다는 그 자체도, 그거는 우리가 요구할 사항이 아니구나, 라는 사실. 그냥 이미 죽어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미 죽어있는 것을 주께서는 어떻게 사용하시는가, 이제 그걸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기 출애굽기 33장 22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여기 반석이 나오죠. 반석. 반석에서 이스라엘이 나옵니다. 반석위에서 이스라엘 중심이 나온다고 보면 됩니다. 이게 누구냐 하면은 모세거든요. 모세가 경험한 것, 모세가 경험한 것은 반석 위에 있을 때에, 영광이 지나갈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로 덮어주니까, 비로소 모세는 살아서 온 거예요.

거기서 듣는 말씀은 19절에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그럼 은혜와 긍휼이 뭐냐, 반석 위에 앉아라. 내가 너를 덮어줌으로서, 그냥 니가 죽어야 되는데 내가 너를 다루기 위해서, 은혜와 긍휼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세를 살려서 땅 끝까지 내보낸 거예요. 그 반석. 그런데 이스라엘이, 지난 수요일에 했지만, 그 반석을 잊어버렸죠. 그 반석의 의미, 긍휼과 은혜를 잊어버렸죠.

거기에 대해서 이사야 33장 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보라 그들의 용사가 밖에서 부르짖으며 평화의 사신들이 슬퍼 곡하며” 8절, “대로가 황폐하여 행인이 끊치며 대적이 조약을 파하고 성읍들을 멸시하며 사람을 생각지 아니하며” 9절, “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이걸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하면은, 이게 바로 보복이에요. 보복. 이사야 59장 18절에도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대적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 보복이라는 말씀이 나오죠. 하나님께서는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에요.

자, 하나님께서 보복하신다고 한다면, 그 보복하신다는 단어는 복수죠. 복수의 이미지는 공격입니다. 공격. 공격성향을 띠죠. 누가 누구를 공격한다? 하나님이 인간들을 공격하는 거죠. 그리고 오늘 마가복음 15장 38절을 봅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둘이 되었죠. 성소휘장이 찢어졌잖아요. 성소휘장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성막이 이래 있는데, 있으면 입구가 이래 있고, 여기가 동쪽이고, 50미터, 25미터쯤 되는 성소가 있다 이 말이죠. 내부에 들어가게 되면 여기 휘장이 있고, 휘장 안에 지성소고. 성소 동쪽에 제단이 있고. 이 지성소를 가리는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 이 말이죠.

그러면 지성소는 일 년에 대제사장이라도 7월 10일 날에만 들어갈 수 있어요. 양력으로 9월 14일쯤 되는데. 7월 10일 날에만 들어갈 때에 방울을 달고 들어가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방울이 움직이거든 살아있다고 느끼면 된다. 그 정도로 무서운 곳이에요. 지성소는 뭐다? 무서운 곳이에요. 무서운 곳. 이 무서운 곳을 뭐로 차단했습니까? 휘장으로 차단했죠. 휘장이 찢어졌다는 말은 인간이 하나님 나라에, 천국에 들어갈 수도 있다는 말도 되지만, 반대로 뭐가 됩니까?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은 들어갈 자가 되고,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여기 지성소에서 무서움이, 안에 있는 무서움이 바깥으로 쏟아지는 그런 통로가 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은 보복이다 이 말이죠. 보복. 휘장 찢어져서 천당 가는 것만 자꾸 생각하지 마시고. 이사야에 나오는 그 말씀. 그리고 이사야에만 나오겠어요. 예레미야나 모든 선지서들, 그리고 요엘서는 제가 안 찾아보겠지만, 거기에는 온통 자체가 이 세상에 대한 처절한 복수로 완전히 뒤덮어버려요. 저주로서.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고. 특히 요한계시록에 보면 얼마나 심하게 밟았던지, 포도주 틀에 밟히면서 터져야 벌건 포도즙이 나오듯이. 내가 너희들을 하나의 개체로 그냥 멀쩡하게 남겨두지 않고 발로 밟아서 다 터져버리게 한 거예요. 다 터져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을 때릴 때 뺨 한 대 때린 정도가 아니고, 지근지근 밟아놓고, 불도저가 한 열댓 번 왔다 갔다 해서 그 몸체가 다 터져야 족할 정도로, 다 터트리는 겁니다. 여러분,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에스겔 5장 13절은 더 잔인합니다.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이와 같이 내 노가 다한즉 그들에게 향한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시원하리라 내 분이 그들에게 다한즉 나 여호와가 열심으로 말한 줄을 그들이 알리라” 사이다에요. 사이다. 탄산음료. 시원하게 탁 터지는 거예요. 주님께서 맹렬한 심판을 다 해놓고 그 감상문을 쓰시는데, “아이고, 이제 좀 속이 내려간다. 시원하다.”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풀리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에스겔 5장 14절을 보시면서, “하나님이여, 이 더러운 세상 뭐합니까? 지켜보십니까?” 이러지 마세요. 지금 하나님 바쁘세요. 지금. 주님이 마실 사이다를 주님께서 양보한 적이 없습니다. 시원하게 마시기 위해서, 그걸 제대로 저주하고 밟아버리기 위해서, 분이 풀릴 때까지 저주한 데 또 저주하고, 저주하고, 심판하고, 그 저주가 맹렬하게 지금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맨날 우리만 쳐다보면 조용한 것 같죠. 주님 위에서 보면 모든 게 저주예요.

예를 들면 어떤 여성이 있는데, 그 여성이 교회 잘 다니고 봉사하는데, 그 여성이 선을 봤는데, 그 여성이 예뻤는지 어떤 검사하고 잘 맞게 되어서 결혼했는데, 그 검사 집안이 불교집안이 돼가지고 검사하고 결혼한 뒤에는, “제가 교회 안 다니겠습니다.”라고 자진해서 교회 안 다녀서 땡 잡았을 때, 똑똑한 애 둘 낳아서 미국으로 유학 보낼 때, 이게 뭐냐 하면은 위치가 뭐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위치가 없잖아요. 이게 보복이 아닙니까? 굉장히 행복하게, 지옥은 어떻게 간다고요? 그냥 행복하게 가는 거예요. 이 땅에서 그냥 사는 대로 살면 지옥 가는 거예요. 사는 대로 살게 되면.

그래서 지옥 가는 사람들 보고 애가 닳아서 어떻게 해서든지 천국 가라고 하면, 그 사람은 또 안면이 있어가지고 시키는 대로 교회도 나와 주고 뭐 봉사도 하는 척하고 성경공부 하는 척하죠. 하지만 나중에는 자기가 자진해서 나와 버립니다. 힘이 들어서. 억지로 해보지만 그게 오래 못가요. 오래 못갑니다. “아이고, 그만 내가 하던 대로 할게.” 이래가지고. 형부가 사업하다가 갑자기 때려치우고 개척교회 한다. 형부가 하면 처제가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있는데, 언니 안면 받쳐준다고 또 나와 주죠.

그것도 또 처제가 돈 되는 직업. 간호사, 약사, 교사. 오게 되면 형부가 얼마나 또 좋습니까? 왜? 십일조가 나오거든요. 형부가 처제한테 잘 보여서 붙들라고 하는데, 처제도 언니 안면 봐서, 또 엄마가 “야야, 언니 개척교회 한다고 힘든데 너라도 보태줘야지.” 또 이래가지고, “그 대신 애들은 내가 봐줄게.” 이래가지고 품앗이하잖아요. 친정엄마 품앗이 해가지고, 어쨌든 간에 교회 안정될 때까지 니가 도와주라고 하지만. 그 처제가 언제까지 다닐 건데요? 나중에는 아이고, 더는 못하겠다고 하면서 옛날 교회에 가게 되죠.

그러니까 뭐냐 하면은 억지로 뭘 한다는 게 그야말로 억지예요. 억지가 되면 뭐가 없다? 감사도 없고 고마움도 없는 거예요. 나는 교회 목사라는, 아까 공부한 거 다 잊어버렸습니까? 교회 목사라는 이상형에 본인을 일치시키려고 애를 쓰는 거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이거는 내 인생을 내가 선택한 거예요. 자기연민이에요. 자기 선택이라고. 나는 이렇게 대외적으로 사업 망했어도 목회 성공했다는 이 이상형을 남한테 보이고 싶은 겁니다. 주님의 보복이고 십자가고 하나도 생각이 안 나요. 내가 되고 싶은 나에 대해서 나는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

보통 새벽에 할 때는 예배라고 하지 않고 새벽제단이라고 합니다. 새벽제단을 땀을 흘려가면서, 콧물 질질 흘려가면서, “주여, 이 교회가 있어줘야 하늘나라가 확장됩니다.” 기적을 베풀어주시고 하면서 온갖 것을 다 했겠죠. 이거 왜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내가 되고 싶은, 내 이상형에 일치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거 누구 위치입니까? 십자가위치입니까? 자기위치입니까? 이건 자기위치죠. 자기위치는 뭐다? 두자로 하면 뭐라고 했습니까? 지옥이죠. 자기만 있는 게 지옥이에요. 자기만 있는 게.

어떤 교육자는 자기애하고 선교한다고 돌아다니면서 공부 못시키니까 둘을 노래를 시켜요. 아들놈은 작곡시키고 딸놈은 노래시켜가지고, 어떤 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으면, 이게 나중에 누구처럼 된다? 악동뮤지션처럼 된다. 악동뮤지션 알죠? 몽골선교사 아들딸. 그거 하려고 선교사들이 해외에 놀러 다니는 거예요. 너무 잘돼가지고. 십일조만 해도 이거는 수천만 원이 나오니까. 그걸 동료 목사들이 얼마나 부러워하겠어요. 공부 못해도 주의 은사를 받아가지고 됐구나. 그래서 뭐만 계산하느냐 하면 십일조만 계산해요.

여러분, 이 세상의 이상형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은, 평균치 여기서 나왔습니다. 평균치에서. 이 세상의 모든 개념은 평균치에서 나와요. 평균. 평균치가 뭐냐 하면은 기준이 되는 겁니다. 통계표 분포에 보면 분포도가 제일 많고 높은 데. 이걸 사람들이 진리라고 여겨요. 진리. 그러니까 이 평균치로 누굴 죽였느냐,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찾아오게 되면 세상에 드러나게 되는 것은, 너희들은 평균치에 준해서 살아갔다는 그 지옥성이 십자가위치에서만 그게 보이는 거예요.

내가 주님을 보는 것하고 주님이 볼 때하고는, 우리는 내가 볼 때 “이쯤하면 평균치 정도는 되잖아요. 주님이여, 저의 성의를 받아주세요. 내가 그다지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는, 평균치는 되잖아요. 보통 사람이 아닙니까?”라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러한 기준을 인정을 안 한다니까요. 주께서 인정하는 것은 이 자체가 나를 버렸다는 사실. 나에게 총을 쏘았다는 거예요. 나는 총을 맞은 게 사실이고. 니가 어떠한 변명을 해도 나에게 총 맞은 상처가 있는 한, 너는, 너의 위치는 내가 없는 위치라는 게 분명하다는 거예요. 그걸 누가 이야기했어요? 이미 천국 속에 있는 성도만이 그런 고백을 내놓을 수 있는 겁니다. 성도만이.

그런데 성도도 인간인지라 날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자기가 되고 싶은 것이 있죠. 있지만, 주님께서는 주위에 불신자들의 조종을 받게 하면서 오늘은 오늘치의 자아가 형성되고, 내일은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또 다시 두드려 맞춰가지고 자아상이 생기고, 또 모레 되면 무슨 위치에 있고. 항상 이렇게 하되, 늘 자아상은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는 그 용도에 의해서 늘 인간이 달라지는 거예요.

다시 오늘 마가복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제 제일 어려운 부분에 왔어요. 제일 어려운 부분이 뭐냐 하면은 여깁니다. 성소가 찢어졌죠. 이제 세상은 죽었어요. 39절에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이 본문이 너무 어려워서 어떤 유명한 신학자는 이걸 가지고 박사학위 논문을 쓴 사람도 있어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유일한 인간이다. 유일한 인간이에요. 유일한 인간이라는 말은 다른 인간과 비교대상이 안 된다.

근데 유대사회에서는요, 인간치고 인간보다 더 나은 인간들이 있어요. 상급에 있는 인간이 있어요. 위대한 인간. 그러나 인간은 유대신학에서는 쇠퇴함입니다. 후패함이에요. 인간=쇠퇴함, 후패함. 유대신학에서는. 구약에서 인간 자체가 어떤 인간이든 인간이면 이거는 그냥 죽어야 될 허무한 존재가 인간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이거는 인간이란 말입니까? 하나님이라는 말입니까? 이거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근데 문제는 백부장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보고 하나님이라고 하면 별 문제가 없는데, 지금 누굴 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십자가에 형편없이, 푸줏간의 하나의 고기처럼 축 늘어져가지고 죽어가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저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점에 대해서 다른 옆에 사람이 있다면 설명이 필요한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은 후패하고 초라하게 되고, 결국 인간의 말로는 인간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이게 구약성경에 나오니까. 인간으로 태어난 모든 것은 다 뭐가 된다? 흙이 된다는 거죠. 후패하고 쇠약하고. 인간이 신이 되는 경우가 있다, 없다? 없다. 인간이 신이 되는 경우는 유대신학에서 있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염연히 하나님이 따로 계시기 때문에 굳이 하나님이 될 이유가 없어요. 굳이.

만약에 하나님이 있는데 인간이 하나님이 돼버리면 하나님은 몇 분이 됩니까? 두 분이 되기 때문에, 어느 하나님을 믿어야 될지, 그 경중이 어느 쪽에 있는지, 그 비중을 어디에 둘지, 새로운 문제가 발생돼요. 그냥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면 그걸로 모든 하나님의 뜻은 차이가 없다. 하나님의 뜻은 온전하다, 라고 분명히 그들은 믿었던 겁니다.

믿는다는 것은, 이게 아까 이야기한 평균인데요. 대부분의 유대인의 평균의 분포도는 하나님을 믿는 걸로, 여호와를 믿는 걸로, 믿음에 대해서는 하자가 없는 걸로 이미 굳어진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받은데 있어서, 천국 가는데 있어서 아무 지장이 없다. 안심해라.” 이거다 이 말이죠. 그게 지금 굳어졌다 이 말이죠. 하나님을 믿는 데 있어서 모자란다든지 이런 게 있어버리면 그 체제자체가 다 무너져요. 이런 것은 있을 수 없는 거니까.

그런데 여기에 보면 백부장이 하는 말이, 백부장은 이방인이죠. 저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이게 소속이 하나님께 소속이 되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무엇의 반대말이냐 하면은 사람의 아들이 아니다. 사람에게 소속된 분이 아니다.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본 거예요. 근데 지금 부활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지금 부활이 안 됐어요. 하나님께 밉상 받아서 하나의 사형수로, 하나의 죄수로, 그냥 마지막 몰골로 사라지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 논문을 읽어보면서, 유대사회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나중에 하나님께서, 선재하신 하나님, 다니엘에 나오는 그 메시야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아들이라는 말은 하늘에 속한 분입니다. 하늘에 속한 분이라는 뜻이에요.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데 사람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데.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는 사람을, 지금 부활된 것도 아니고, 위대하게 뭐 빛이 난 것도 아닌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이유가 뭐냐, 거기에 대해서 그 사람은 모르겠다는 거예요. 도저히 그런 소리를 했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 논문 쓴 사람의 결론이 뭐냐 하면은 믿음이 좋다는 거예요. 믿음이 좋다고 한 그것이 내가 보기에는 불신앙이에요.

백부장의 믿음이 좋다, 인간에게 믿음이 좋다고 가버리면 그거는 복음의 내용에 포함이 안 되는 이야기예요. 저 사람 믿음이 좋다고 해버리면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누굴 바라봐요? 사람을 바라보게 돼요. 그럼 인간 대 인간의 관계밖에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점을 어떻게 설명해야 되는가, 그것은 바로 여기 34절에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했죠.

아까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버림받았다는 것은 백부장이, 여기 있는 변화들, 온 땅이 어두워지고 할 때, 백부장의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하나님께 버림받을 때, 그 버림받은 것 중에서 백부장 본인도 마땅히 포함이 되어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나 나올 믿음이에요. 이건 마치 십자가 옆에 강도 있잖아요. 강도와 같은 심정이에요. “주님, 같이 버림받읍시다.”라는 고백. “당신의 운명과 팔자가 곧 나의 운명과 팔자입니다.”라고 할 때, 이것은 주님의 선택이죠. 이거는 악마의 선택이 아니고 주님의 선택을 받았을 때는, 백부장 같은 믿음이 지금도 십자가 위치에 있는 성도에게 매일같이 그런 식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당신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다.”

자, 이걸 얼마 전에 설명했는데, 이런 순간 백부장은 어떤 생각을 했느냐 하면은, “내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어떤 일을 당해도 저는 일체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예상도 못한 분을 만났잖아요. 오늘 강의한 것을 정리하면서 다시 한 번 결론을 내려 봅시다. 아까 이야기할 때 여러분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자, 보통 인간이라면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면은 자기의 이상형이 있고, 이상형에 대해서 매일같이 맞추어가는 식으로 하루하루 살아간다고 제가 아까 이야기했죠.

자기 이상형이 없는 인간은 없어요. 왜냐하면 자아는 반드시, 이상형을 주체라고 하는데, 자아와 주체와 일치시키려고 애를 쓰면서 매일매일 살아가요. 모든 행동하는 것이나 모든 그것이. 내가 생각한 나다움에 근접하기 위해서 아주 분투노력을 다한다고요. 그럼 이 사람은 어디에 매여 있는 거예요? 자기가 이상형에 매여 있죠. 그러면 이상형은 어디에서 나온 겁니까? 이상형은 어디를 참조해서 얻은 겁니까? 이상형을 구성할 때. 현재 있는 이 세상에서 얻은 거죠. 오늘 강의를 하나도 안 들었다고 치고요. 오늘 강의 지금 새로 시작한다고 치고. 여러분 어떻게 사십니까? 하면, 나는 세상에 나가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나는 저 사람처럼 되고 싶어요. 나도 어떤 TV를 봤는데 멋진 사람이 있어서 나도 말년이 저렇게 멋졌으면 좋겠어요.

이게 뭡니까? 제가 방금 이야기한 이상형이잖아요. 그러면 좋겠습니다, 멋져 보입니다, 이게 뭐예요? 갑자기 그 사람이 자기노력을 한다고요. 노력을. 어떤 사람이 말년이 돼가지고 부부끼리 사이좋게 빌딩을 하나 사가지고 거기서 세 받아 먹고 평안하게 취미생활이나 해외여행이나 등산 다니고 낚시 다니는 거 보고, 야, 나도 이제 우리 부부는, 그동안 너무 헛짓하는데 돈을 썼는데 이제 돈 모으자. 돈 모아서 뭐 할 건데? 빌딩 사서 4층에 우리 집하고 123층은 세놓고 합시다, 라고 의논을 할 때, 지금 이 부부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봤던 멋들어진 사람을 보고 자기의 이상형으로 하겠죠.

그걸 현재 자아를 뭐로 인식시킨다? 장차 주체로 인식시키죠. 이걸 보통 정신분석학에서는 욕망이라고 하는데, 성경에서 이걸 욕심이라고 하죠. 근데 이게 귀에 들어오지 않아요. 이게 없이는 사는 낙이 없다 이 말이죠. 사람이 왜 삽니까? 집사님 왜 사십니까? 나중에 식당 하시려고 삽니까? 무슨 목표가 있을 게 아닙니까? 그게 이상형이에요. 이상형. 내가 나를 선택하는 거예요. 자기연민이에요. 나 안 죽었다 이 말이죠. 생생하게 살아있다 이 말이죠. 보란 듯이 살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이 백부장이 봤을 때는 자기는 중대장이나 대대장이 되고 싶겠죠. 대위니까, 중령, 대령, 별을 따고 싶죠. 근데 여기에 누가 개입했어요? 여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죠. 죽었을 때에 백부장이 갑자기 뭐라고 합니까? 저분은 바로 메시야다. 저분은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하나님이다. 죽지 말아야 될 분이 죽었다 이 말이거든요. 그럼 이 백부장하고 예수님하고 뭐가 됩니까? 한통속이 되겠죠. 그럼 이 백부장은 본인이 갖고 있던 이상형이 어떻게 돼요? 이상형은 생각 안 하겠죠. 이상형을 생각 안 한다는 것은 지금 내가 바로 주님에 의해서 조립된 거예요. 예수님에 의해서. 십자가에 의해서.

십자가만 감사하고 주님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그 희열과 감사와 기쁨에 매료된 새롭게 조립된 인간이에요. 이건 주님에 의해서 선택된 거예요. 내가 주님을 바라보는 게 아니고. 주님에 의해서 바라본 인생. 나를 위한 인생이 아니고 주님이 누군가를 보여주는 인생으로 설정된 겁니다. 이게 뭐냐, 바로 십자가의 위치죠. 오늘 제목은 십자가의 위치라고 하겠습니다. 이게 십자가의 위치예요. 십자가의 위치가 오늘날 누구라고요? 성도가 살고 있는 그 위치. 거기서 성도 자기는 죽은 자로 인정하고, 내가 보는 이상형, 내 모습, 이상형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조립해나가시겠죠. 뭘 하라는 지시가 있겠죠. 뭐로 기뻐하고 뭐로 감사하는 게 있겠죠.

마치 옛날 악마가 우리한테 헛된 야망에 정신팔려가지고, 내가 저 사람처럼 되려고 분투노력했던 그 모든 헛짓을, 헛짓 한 그건 악마의 선택이고. 지금은 주님의 선택이기 때문에 주께서 천국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활용하시는 그 일에 우리가 지금 성령을 통해서 주의 일을, 주의 십자가 표시의 용도로서 지금 여기에 있는 겁니다. 이러면 이게 십자가의 반복, 십자가의 재현, 십자가의 현재 지금 나타남. 이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보복하고 심판하는 근거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사건을 내가 천국 가기 위해서 그냥 이용하면 되는 사건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친히 주께서 십자가의 위치를, 십자가의 자리를 우리를 통해서 만들어내심을 감사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어떤 일이 있어도 상관없음을, 어떤 일이 있어도 괜찮음을, 감사와 고마움으로 표시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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