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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25 23:19:57 조회 : 381         
부활의 힘 마가복음 16:8 201225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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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림(IP:124.♡.211.180) 20-12-28 05:42 
광주강의20201225a 마가복음16장 8절(부활의 힘)-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6장 1절-6절 말씀입니다.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눈을 들어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그 다음에 가서 제자들에게 이야기하니까 제자들이 무서워하고 아무 말도 못한 그런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가 부활의 이야기인데 이 부활의 이야기가 둘로 나뉠 수 있어요. 하나는 내가 듣고자하고 믿고자하는 부활, 다른 하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부활 이렇게 둘로 나뉘는데 성경에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부활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부활이냐 하면 내가 믿을 수 있는, 내가 믿고자하는, 내가 희망하는 그러한 부활에 대해서 언급을 하죠.

내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부활은 곧 나는 그동안 헛살았다 또는 공연히 살았다. 살아도 아무런 의미 없다. 간단히 말해서 그냥 ‘나는 그동안 헛살았구나. 앞으로 사는 것도 의미 없구나.’ 라는 식으로 나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바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부활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믿고자하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부활이 아니고 내가 믿고자하는 부활이고 이것은 ‘나 이제는 땡잡았다’ 뭐 이런 식의 부활. 아이고, 예수님 부활 알기를 잘했다. 예수님 부활 몰랐으면 나는 희망이 없었겠네. 이제부터 예수님 부활 믿고 살아야지. 이게 전부다 거짓부활입니다. 잘못된 부활이에요.

왜냐하면 여기 실제로 그 부활을 목격한 이 여성들은, 그들은 심히 놀랐고요. 그리고 부활소식을 전했던 그 제자들도 놀랐고 8절에 보면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무서워했고 놀랐다 이 말이죠. 그리고 11절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이 살아났다는 소식과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그들이 “믿지 아니하니라” 되어 있죠. 믿지 아니하죠. 그러면 인간은 평소에 누굴 믿느냐 하면 나의 진실됨을 믿는 거죠, 나의 진실됨.

인간을 또 둘로 나누겠습니다. 첫 번째, 부활이 진실이냐. 이것에 대해서 주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게 진실이냐에 관심이 없고요. 두 번째, 부활을 믿는 나는 진실되냐. 여기에 관심 있어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셔도 그 부활을 믿는 내가 창피스럽지 않기를 원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부활 순간에 여자들은 우리를 대신해서 놀랐고 무섭고 떨었죠. 무섭고 놀랐고 떨었다는 말은 지금까지 시간에 따라서 공간에 따라 인생을 쭉 살아오면서 이 시점에 막달라 마리아가 이 시점까지 살았다 합시다. 나이가 40, 50쯤 된다 합시다. 살았는데 이 시점에서 누굴 만났느냐 하면 예수님이 부활했던 그 시점을 만난 거예요. 만난 순간 내가 알던 ‘나+부활’ 이고 싶은 거예요. 왜냐하면 부활이 진실되고 내가 그동안 살아온 것도 진실되고 싶은데 부활을 만나고 여기서 무서워 떨었다는 말은 이 부활로 인하여 내가 온 노선과 이 부활의 노선이 핀트가,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살아온 것은 전부다 헛살아온 거예요, 헛살아온 것. 그것도 아무 의미 없이. 살아도 그만 안 살아도 그만.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내 존재 자체에 의미를 준 게 후회스러워져. 내 존재에 의미를 준거. 나는 뭐 애를 둘이나 키우고 나는 아파트에 살고 이런 식으로 살아온 이 자체가 원망스러울 정도에요. 그동안 뭐하고 살았어요? 그동안 도대체 내가 왜 살았지? 앞으로도.

그러니까 부활이 있는 순간에 이제는 부활 믿고 부활 장착해서 부활까지 알아있는 똑똑한 사람으로 살아야지 하는, 부활이 진실이 아니고 나의 진실을 붙잡고 있는 이 사람은 거짓부활의 지식을 장착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여자들은 예수님 부활의 그 현장을 보는 순간 그들이 살아왔던 것은 공연한 것이고 무상하기 짝이 없는 거죠.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내릴 결론은요. 부활은 우리를 다시 원위치로, “네 원래 있던 지점으로 돌아가.” 라고 되돌려 보내는 기능을 하는 겁니다, 부활은. 네가 살아서 예수님 만날 생각하지 말고. 네가 있던 자리는 죽을 자리라는 사실. “네가 죽었던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갓! 안 살아도 되고 안 태어나도 되는 존재로 돌아가.” 이겁니다, 부활이.

우리가 좀 일찍 시작했기 때문에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제가 다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부활은 두 종류가 있다 했죠. 첫째 한 종류는 뭐냐 하면 내가 기대하는 부활의 소식. 그거 하나 있고 또 하나는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살아온 것을 공연한 헛짓으로 만드는 부활. 우리가 예상 못한 부활이죠.

인간은 항상 부활이라는 이런 희망적인 소식에 대해서 기대하겠어요, 기대하지 않습니까? 기대하죠. 기대한 나를 헛짓으로 만드는 부활이 진정한 부활입니다. 내가 부활해서 이제 주님과 영원히 천국가야지. 그것이 헛짓, 헛생각이라는 것을 언급하는 부활이 진짜 부활이에요.

그럼 왜 주님께서는 이렇게 그 여자들이 깜짝 놀랄 만큼 예상도 못한 부활을 주셨느냐. 이걸 구약의 언약과 관련해서 이렇게 쓰겠습니다. ‘진실된 거짓말’ 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진실된 거짓말에 대해서는 제가 조금 전에 이야기했습니다. 첫째, 무엇이 진실이냐. 여기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자기를 위장하는데 사실은 뭐냐 하면 무엇이 진실된 나인가. 관심은 여기에 관심이 있는 거예요. 진실을 알아야 될 이유가 나는 필히 진실되어야 되고 나는 공연히 살아서는 안 되는 괜찮은 존재이어야 하기 때문에. 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야곱이었습니다. 야곱이 거짓말하는 이유가 뭐냐. 거짓말하는 이유는 야곱 본인이 야곱이고 싶어 하는 거예요. 어떤 야곱? 내가 나다운 야곱. 야곱이 야곱다운 나. 야곱에 합당한 나. 그 야곱에 합당한 나는 아버지로부터 하나님의 복을 따내는 그러한 복 받은 내가, 장자가 되는 내가 나에게 합당한 나다움에 제대로 딱 먹혀들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나의 나다움을 위해서 거짓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내가 진실됨을 증거하는 하나의 과정이고 경로이기 때문에 그거는 뭐 전혀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그 야곱이 야곱다운 그것이 본인 자체가 거짓이라는 것을 본인이 알 길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밤에 얍복 강가에서, 창세기 32장에서 밤에 천사가 왔을 때 비로소 야곱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가 존재하는 그 자체가 거짓된 존재인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거짓된 존재. 비교대상이 되니까. 지금 천사하고 야곱하고 씨름했잖아요. 싸웠잖아요. 부딪침이죠. 부딪침.

여러분 아침에 일어나서 뉴스에 기온 보게 되면 온도가 -5도다. 그러면 아침에 산책 갈 때, 운동갈 때 -5도에 맞는 옷을 입겠죠. 그런데 막상 나가보니까 바람이 불어요. 그럼 분명히 -5도인데 체감온도가 -10도까지 내려가겠죠. 그럼 왜 -5도인데 -10도처럼 느껴지는가. 나하고 바람하고 부딪침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나하고 바람하고 부딪쳤어요. -5도가 -10도 되는 게 부딪침 때문에.

그런데 인간은 부딪침을 고려 못하는 겁니다. 자기는 어떤 진공상태에서 내가 여기 있으면 내가 할 수 있는 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누가 와서 부딪친다는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오게 되면 내가 잘해주면 되고 내가 좋게 잘해주면 된다는 거죠. 부딪침을 생각 못하는 거예요.

이 집에 손님 오니까 집사님께서 식혜를 딱 준다 이 말이죠. 이거 부딪침입니까? 식혜를 주시는 거예요, 여기 식혜 있잖아요, 보석 같은 식혜. 식혜 해가지고 잡수세요. 이거하고 손님 오니까 식혜를 들고 그 사람 면상을 내리쳐버리는 거하고. 아나, 식혜 먹고 꺼져라. 이거하고 다르겠죠?

야곱과 하나님의 관계가 야곱은 야곱이 대접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는 관계라고 생각한 거예요. 자기는 하나님께 공손하게 대접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본인의 그러한 행동이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거짓됐다는 것을 야곱이 상상도 못한 거죠.

그런데 결과적으로 야곱은 식혜 들고 천사의 면상을 때려 치는 그런 결과를 낳은 겁니다. “어디 감히 진실된 나를 공격해! 네가 내가 누군 줄 알아? 하나님의 복을 받은 야곱이야! 너 야곱 이름 들어봤어? 나 야곱이야, 야곱!” 이렇게 나온 거예요. 천사입장은 이래요. “야곱이냐?” 야곱이라는 것은 거짓됨의 전형으로서의 야곱이라는 거예요, 그 야곱이. “네가 거짓을 모르지? 네가 거짓이야, 네가!” 네가 거짓이라는 거예요.

야곱이 이걸 알았어요. 아, 하나님이 나에게 주려고 하는 복은 이 거짓됨을 드러내고 거짓됨에 대한 합당한 조치, 그건 죽여 버리는 거예요, 나를 죽이려고 오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복을 받고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죠. 이스라엘로 바뀌어도 하나님이 나를 죽였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어요. 내가 죽는 그 현장이, 하나님과 내가 부딪치는 현장이, 싸우는 그 현장이 바로 진실이 나타나는 유일한 현장이 되는 거예요. 진실이 나타나는 유일한 현장.

인간이 생각하는 부활, 그 부활을 생각하는 나 사이에 내가 생각하는 부활은 부활이 아님을 깨닫게 하는 그 현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여자들이나 제자들로 하여금 어디로 보내느냐. 죽은 네가 처음 있을 자리는 살아있어서 부활을 만나야 될 나의 자리가 아니고 너는 죽어있어야 될 자리라고 돌려보내는 거예요. 돌려보내는 그 자리가 무슨 자리냐 하면 바로 십자가 자리에요.  

그러니 부활은 우리를 어떻게 해야 진짜 부활이다? 우리로 하여금 부활 봤다고 좋아들하는 그 자리가 아니라 부활이 우리를 다시 십자가 죽음자리로 가슴 딱 밀어가지고 “저리 가”하고 밀어내는, “죽는 자리가 네 자리야” 라고 돌려보내는 그 자리가 부활의 능력입니다.

그럼 돌려보내는 자리가 십자가 자리죠. 사람들은 십자가 다음에 부활로 여기잖아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부활을 바로 보지 못하게 만들고 어디로 돌려보냅니까? 예수님이 겪었던 경로, 십자가 진 자에게만 부활이 주어진다는 이 경로, 공식을 고정화시키기 위해서 제자들을 십자가에 죽게 만들죠. 누가 떠밉니까? 부활하신 주님이 십자가로 돌려보내는 겁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 자가 부활을 바라보게 되면 이것은 거짓된 부활이죠.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 진실되다? 이게 아니에요. 어떤 부활도 우리가 살아있는 한 그것은 진실된 부활이 아니고 왜곡되고 거짓된 거예요. 그 거짓된 게 아까 이야기했죠. ‘부활은 실제냐’가 아니라 ‘부활을 믿는 나는 참으로 믿을만하냐’ 이거 따지는 거예요.

자, 지금까지는 아주 쉽게 이야기했는데 지금부터 이제 어렵게 이야기하겠습니다. ‘A를 선택할 것인가 B를 선택할 것인가’가 아니라 ‘선택을 할 것인가 선택을 말 것인가’를 인간은 따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고집은, 선택 이전에 나라는 존재가 필히 ‘반드시 나란 존재는 여기 있어야 마땅해’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 천국갈래, 지옥갈래?” 물으면 천국갈라고 할 인간은 없고요. “그 선택을 저한테 강요하지 마세요.” 라는 것이 인간의 인간다움의 진실이고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예수그리스도와 비교할 때 그것이 거짓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늘 진실만, 늘 참되고 옳고 진실만 찾는 거짓말쟁이에요. 이게 인간입니다. 진실만 찾으니까 본인이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까, 인정 못합니까? 인정 못하죠. 인정을 못하니까 주님을 자꾸 상대하려고 하는 거예요. ‘저 예수님을 계속 내가 믿을까 아니면 믿지 말까? 저 예수를 믿는 선택을 할까 아니면 예수님을 버리는 카드로 생각하고 내가 버리는 선택을 할까?’ 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더 나아가면 ‘예수님을 믿을까 말까하는 그 선택을 내가 구태여 할 필요가 있겠어?’ 까지 나가는 거예요. 제가 어렵다 했죠. 이게 굉장히 어려운 문제에요.

그러니까 이래 됐든 저래 됐든 간에 이미 무엇이 진실로 확보되어 있습니까? 내가 여기 있음은 진실로 확보되어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상입니다. 내가 나에게 항상 우상이 되어 있어요. 자기가 이미 진실이기 때문에 그 다음에 무엇을 선택하거나 할 때는 믿을 거 아닙니까. 그 믿는 내용을 누구 쪽에서 일방적으로 변경하느냐 하면 내가 믿을만한 것으로 내가 변경시켜요, 내가. 내가 변경시킨다고요.

어떤 목사님이 무슨 설교하게 되면 교인이 와서 “목사님, 설교 어려운데 내가 알아듣도록 설교해주세요.” 이게 뭔 뜻입니까? 내가 알아듣도록 설교해달라는 것은 믿을 수 있는 내용은 내가 알아서 선택할 수 있도록 기회를 달라 그 말이에요.

다시 말해서 당신 말 믿고 믿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어떤 내용을 믿을 때는 ‘나는 항상 따질 것 없이 항상 이유 없이 무조건적으로 원천적으로 나는 진실되다’를, 내가 나를 증명하고 싶은 거예요. 증명하려면 내가 믿고 싶은 내용이 있을 경우만 긁어모아야 그 긁어모은 그 내용은 이미 진실한 걸로 내가 판정 내렸기 때문에 진실된 것만 끌어 모았으니까 자동적으로 누가 진실된 겁니까? 내가 진실된 겁니다. 내가 진실스러운 거예요. 모든 인간은 다 그렇게 살아요.

지금 이 여인 3인방이 예수님의 무덤에 왜 갔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신체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향품이나 바르러 갔잖아요, 여기 3절에. 무덤 속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시신 닦아주고 잘 있는가 확인하고 싶은데 문제는 여성들이 돌을 어떻게 굴리느냐 그것 때문에 고민하면서 갔죠.

그런데 돌은 이미 열려버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누가 있었습니까? 흰 옷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아있었죠. 천사가 와 있는 겁니다. 물론 이 천사가 야곱에게 찾아온 천사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있지만 어쨌든 하나님 편에 속한 피조물이 앉아서 여성들과 함께 대화하십니다. 그는 살아났고 여기 계시지 않는 거예요. 여기 계시지 않는다.

이거는 쉬워요. 예수님은 계시지 않는데 어디 계시지 않아요? 여기 계시지 않죠. 그럼 여자 3명이 예수님 만나려면 어디에 계시지 않아야 돼요? 여기 계시지 않아야 돼요. 여기 계시지 않는 방법은 뭐냐 하면 그들이 십자가에 죽는 방법 외에는 없어요. 그들이 십자가 죽을 때 그들은 여기 계시지 않는 자신들이 되고 여기 계시지 않으면 주님과 함께 있겠죠.

그럼 여기 계시지 않으려면 여기 계시지 않는 이유가 타당성이 있어야 돼요. 왜 나는 여기 있으면 안 되는가. 타당성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게 뭐냐 하면 여자들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거짓말쟁이이기 때문에. 죽어 마땅하기 때문에.

인생 살아도 거짓말로부터 시작해서 거짓말로 인생 끝나는 거짓말쟁이이고 얼마나 거짓말쟁이인지 태어난 것부터 해서 거짓말을 줄줄 내뱉으면서도 거기다 무슨 거짓말을 합집합으로 또 만들어냈습니까? 나는 진실돼. 나는 살아 마땅해. 나는 반드시 진실을 찾을 거야. 옳은 선택이 나를 구원할거야. 나는 이제 천국 선택할거야. 나는 지옥 안 갈 거야. 이런 식으로 계속 자신이 거짓됐다는 사실을 모르고 진실과 연결되리라고 하는 그 착오를 계속 해온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여성들로 하여금 다시 십자가로 돌려보내게 되면 그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죄의 개념이 진실된 죄의 개념과 거짓 개념들이 십자가에서 드디어 시작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사도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사도바울이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고 외치고자 하는 것은 뭐였습니까? 십자가였죠.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였죠. 구원의 능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부활에 있는 게 아니고 십자가에 있죠. 오죽했으면 그걸 미련하다고 했겠습니까. 오죽했으면 그걸 어리석다고 했겠습니까.

인간들이 거짓말쟁이이니까 거짓말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할 게 없으니까 자기 존재를 위장하고 맨날 위조하니까 주님께서 그들을 십자가로 돌려보내는 방법은 그들로 하여금 화나게 만드는 거죠. 분노하게 만드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당신이 메시아라면 우리가 알아듣는, 우리가 따져서 납득이 될 수 있는 그것을 알려다오. 늘 예수님한테 요구하는 것은 그거였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그것을 간파하시고 너는 내가 누구냐, 진리가 무엇이냐에는 관심이 없고 예수 믿는 내가 진실되다는 그것에만 관심 있지. 그게 바로 우상이었어. 그게 우상이야. 따라서 너희들로 하여금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것, 그것만 내가 너에게 언급한다. 하고 계속 이야기하신 거예요.

그 중에 한 가지 그런 식으로 주께서 답변하는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은 예수님 부활 만나면 살아온 것이 다 공연히 산 것이고 이제는 안 살아도 된다는 그런 느긋함이 있어줘야 돼요. 이게 진짜 부활의 영, 주님의 영을 바람맞은... 아까 성령의 찬바람 맞으면 체감온도 내려가죠. 이 바람이 성령의 바람 아닙니까. 우리 자신을 확 아는 거예요.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11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이 대목이요. 다시 한 번 읽어보면 12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고” 이것은 얼추 이해가 되죠. 밥을 먹는데 반 있는데 짬뽕 보통 시켰는데 주방장이 와서 면을 더 곱빼기로 주게 되면 있는 자는 더 받겠고. 아 이 경우가 이 경우구나. 되는데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되어 있죠.

자, 빼앗긴다는 말은 상당히 좋은 사이가 아니고 껄끄러운 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없는데 뭐 빼앗길 것도 없지 않습니까? 우리의 생각은. 없는데. 예수님의 말투가 이래요. 예수님께서 말씀을 던지게 되면 그 말씀은 “너는 너 자체가 전부다 구라야. 거짓말이야. 너는 김구라야 김구라. 너는 이구라고. 너는 완전 거짓말이야.” 라고 지적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십자가로 돌려보내는 거예요, 십자가로.           

우리는 아담에서 태어났죠. 아담에서 태어났잖아요. 주님은 아담에서 태어나게 하지 않고 십자가로부터 새로 태어나게 하는 거예요. 아담에서 태어나는 게 아니고 십자가에서 새로 태어나게 하는 겁니다. 아담에서 태어나게 되면 우리가 육신을 가지게 되지만 십자가에서 태어나면 이건 태어남부터 죄인입니다. 십자가로 가는 건 죄인으로 태어난 거예요. 죄인임을 인지할 수 있는 거예요. 죄인임을 의식할 수 있는 거예요. 내가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십자가로 돌려보내는 거예요. 아담으로 돌려보내는 게 아니고.

그러면 일본말을 써서 죄송하지만 ‘요이 땅’ 하는 말이 있죠, 요이 땅. 옛날 운동회할 때 선에 딱 서서 ‘요이 땅’ 하는 거 있잖아요. 하나님은 성도들에게는 어디서 요이 땅 하느냐. 출발하느냐. 스타트하느냐. 십자가로부터 요이 땅하는 거예요.

이미 십자가에 있는 자에게는 더욱더 너희들을 죄인됨으로 만들겠고. 인간은 거짓되지만 이 언약, 하나님의 계시, 언약은 진실되기 때문에 진실된 것을 더 받겠고 아예 십자가가 없는 자는 이 아담이라는 것조차도 회수를 해버리는 겁니다. 회수할 때 “주세요” 이게 아니고 강제로 빼앗아버리는 겁니다. 빼앗겨도 할 말 없어요. 있으나 없으나 다 헛짓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보게 되면 제자들로 하여금 다시 십자가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어디서 힘이 나옵니까? 부활의 힘. 이게 부활의 힘이에요. 일반 십자가 성령이 없는 사람에게 부활의 힘은 무엇입니까? 죽었던 나를 다시 살려내는 힘이죠. 이게 얼마나 괴물적입니까. 드라큐라를 죽여 놨는데 드라큐라가 다시 살아나 보세요.

내가 거짓말쟁이죠. 그럼 나는 괴물이죠. 괴물 살려놓으면 이게 기가 차요. 이건 좀비 되죠. 기가 차죠. 다시 이 괴물을 없애야 되는데 괴물을 부활시키면 안 되잖아요. 그렇죠? 괴물은 없애야 되잖아요. 다시 십자가로 돌려보내야죠, 제자들을 다시 십자가로. 제자들은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예수님 남고 나머지는 다 도망쳤잖아요. 도망쳐도 내가 봐 줄게. 구원할게. 이게 아니라 도망친 자를 도로 어디로 돌려보냅니까? 전부다 십자가로 돌려보내는 겁니다.

우리 국민학교 때 선생님께서 분명히 체육시간에 체육복 입고 공을 차든 뭘 하든 운동장에서 놀라고 하고 선생님은 볼 일 있어서 집에 잠깐 갔다 왔는데 아이들이 전부다 체육복 안 입고 집에서 입고 온 옷 그대로 입고 있으니까 애들을 다시 불러내서 어디로 다시 집어넣습니까? 교실에 가서 전부다 체육복 갈아입게 하죠. 체육은 체육복입고 하는 거야. 하죠. 체육복 없는 아이는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아버립니다. 집에 가.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가 거짓되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 인생을 진실되게 살았기 때문에 여기다가 진실된 예수까지 보태어버리면 나는 진실된 채로 천국 간다고 그렇게 종교적 희망을 품고 있는 자들에게 다시 너의 원천으로 가란 말이에요.

내가 십자가 진 것은 바로 ‘너의 원천이 이렇다’ 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그들이 떠나가도 도망쳐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가셔서 사흘 동안 대기했잖아요. 그때 누가 살려줬습니까? 아버지의 영, 성령이 와가지고 죽은 예수님을 사흘 만에 부활시켰잖아요. 똑같은 체험을 하라 이 말이에요. 똑같은 과정을 밟아야 된다는 겁니다.

죽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이거 뭐 다 아는 이야기지만 예수님은 죽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가 아니라 죽은 자만이 나를 죽일 수가 있는 거예요. 먼저 죽은 자만이 나를 죽일 수 있는 거예요. 우리는 자기를 못 죽여요. 이게 사단났어. 이게 문제에요. 자살은 할 수 있지만 자살하는 순간에도 지는 ‘난 못났어’ 하지 않잖아요. 잘나서 죽잖아요, 잘나서. 이게 문제입니다.

내가 참으로 거짓됐다는 것을 평생을 아무리 공부하고 철학을 공부해도 공부한 이것 자체가 거짓되다는 자체를 알아낼 재간이 없네. 재주가 없어요. 그렇게 나훈아는 진짜 소크라테스한테 물어가면서 테스 형, 세상이 왜이래. 소크라테스가 말한 핵심 이야기가 뭡니까? 너 자신을 알라했죠. 너 자신을 알라하는 본인도 몰라요.

나를 거짓됐다고 비교하셔서 오셔서 찬바람 부딪치듯이 부딪쳐야 되는데 야곱처럼 부딪쳐야, 야곱 이름 자체가 사기꾼, 거짓됨이잖아요, 거짓됨을 알려야 되는데 소크라테스는 그게 없어요. 테스 형 찾아봐야 없어요. 테스 누나 찾아봐도 소용없고. 내가 누군지를 알려줄 사람이 아무도 없네. 성령의 바람이 불어야 되는데.

그렇게 율법의 흠이 없다는 사울이라는 사람도 다메섹에 내려가면서 예수님을 만났죠. 사울이라는 사람과 예수님이 만났을 때 여기에 껄끄러움이 있잖아요.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은 오직 하나님중심주의거든요. 누구를 핍박해요? 아무도 핍박 안했어요. 오직 하나님 일념으로 살아온 거예요. 왜? 하나님만이 나의 진실됨을 증명해 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좋아서가 아니라 나의 진실됨을 증명해준다는 희망 때문에 하나님이 좋은 거예요. 내가 좋은 거예요, 내가. 자기가 우상이기 때문에. 내가 이 정도로 좋은 만큼 좋아해줄 사람이 없네.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기대면서 자기 잘났다 하다가 이게 부딪침, 충돌, 그리스도와 충돌이 있죠. 핍박이죠.

한번 물어봅시다. 그럼 그 순간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까, 십자가 지신 주님을 만났습니까? 사도바울로 하여금 어디로 돌려보냈어요? 십자가 자리로 돌려보냈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산다. 나를 죽이는 주님이 진짜 부활하신 주님이다 이 말이에요. 나를 죽이신 주님이. 나를 죽이는 일을 하시는 분이 진짜 살아계신 주님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은 어떻습니까? 이제는 살아도 의미 없고 더 살 이유도 없죠. 그것을 가지고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의 자유’라는 겁니다. 우리 자신의 부담에서, 짐에서부터 우리가 해방되는 겁니다. 내가 의로워야 되고 나는 구원받아야 되고 나는 진실되어야 된다는 그 악마가, 괴물이 뒤집어씌운 그 무거운 짐에서 우리는 이제 가벼워지는 거예요. 껍데기만 남았어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아요.

“너 자신을 알라”던 소크라테스가 만약에 여기 앉아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내 자신을 아는데요.”, “뭡니까?”, “나는 거짓되다.” 이렇게 하죠.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하면 “언약의 완성상태에서 알았습니다.” 언약의 완성상태가 뭡니까? 약속의 완성상태가 뭐죠? ‘다 이루었다’가? 십자가에서 다 이룬 거죠.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용할 수 있는 의미는 다 드러날 대로 다 드러난 거예요. 이게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은 참 진실을 추구하는 거짓말쟁이. 그렇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좀 더 진도 나가 봅시다. 우리 자신이 십자가에서 요이 땅 출발합니다. 성령의 바람 또는 부활의 바람에 의해서 십자가로 밀려서 십자가에서 사도바울처럼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면 여기서부터 이제는 뭐가 나오느냐 하면 x축-시간, y축-공간이 나오죠. 하여튼 이 데카르트의 좌표만 나오면 사람들은 골치아파해요. 그렇게 여러분들 괴롭히지 않겠습니다. 아주 쉬운 것 하겠어요. x축과 y축일 때 시간, 공간으로 인간은 이 세상을 생각합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으로써 자신을 규정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의 기억, 여러분들 일기장을 살펴보세요. 무슨 내용 나옵니까? 오늘은 몇 일이다. 시간 나오고 공간 나오죠. 시간과 공간을 구성해서 여기서 기분이 나와요. 감정 또는 어떤 사람은 정동(情動)이라고 어려운 말로 하는데 그냥 쉽게 말해서 기분. 오늘은 비가 왔다. 오늘 꿀꿀하다. 이런 거. 갑자기 옛 생각이 나네. 이렇게 되죠, 전부다. 옛 생각이 난다. 고등학교 때 생각하면 풍경 나오겠죠. 공간이죠. 거기서 뛰노는 선생님, 친구들 모습 보이겠죠. 뭡니까? 시간이죠. 그때 그 시간. 그래서 인간은 시간과 공간 사이에서 규정할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항상 시간과 공간으로 이렇게 축약하는 이유가 있어요. 인간은 사물+기분(감정)이기 때문에. 인간은 사물에다가 기분이 엎쳐진 게 인간입니다. 사물은 인간의 육체, 신체를 얘기하고 인간의 신체에다가 기분이 얹혀졌거든요. 이 신체를 살리기 위해서 인간에게 돈이 필요한 거예요. 악마가 이 점을 노린 겁니다. 결국 돈이 있어야 인간은 살고 돈이 있으면 인간은 기분이 업(up)된다는 거예요. 이게 가장 기본이에요, 기본.

예를 들면 식구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할 때, 남편이나 식구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냥 복음 전하지 말고 분명히 사전에 꼭 해야 될 게 있습니다. 뭐냐 하면 우리 집하고 땅하고 지분을 누구 걸로 할 건지 분명히 해야 돼요. 아파트 명의를 누구 걸로 하고 당신 죽고 난 뒤에 지분을 어떻게, 보험금을 누가 타느냐 분명히 한 뒤에 복음을 전하세요. 괜히 그냥 복음 전해버리면 복음 듣는 대신 지분을, 돈을 그쪽에서 가져갈 수가 있다니까요. 가장 기본적인 것이 흔들리면 안돼요.

아무리 착하고 복음적으로 이야기해도 반드시 뭐는 확보되어야 돼요? 네 돈과 내 돈은 분명히 확보되고 난 뒤에 복음을 전하세요. 야, 진짜 기쁜 소식 전한다, 정말. 크리스마스 날에. 인간은 거짓되다는 말은 본인이 본인을 어떻게 주장할 수가 없어요. 본인은 기분일 뿐이고 진실은 본인도 어찌할 수 없는 사물성이에요, 괴물성. 돈이 있어야 산다는 그 괴물성은 인간이 죽을 때까지 본인이 복음으로 덮어도 안 덮여져요. 이게 없어지지 않는다고요, 죽을 때까지.

목사가 복음 실컷 전했는데 나와 보니까 빚이 5억이다. 이게 무슨 기쁜 소식이 되겠어요? 챙길 건 챙겨놓고 그 다음에 복음이죠. 이게 사물성이잖아요, 사물성. 좌표거든요. (x,y)=0에요. 이게 불교입니다. 인간은 죽고 나면 그만이라는 게, 0되는 게 불교에요. 그런데 복음은 뭐냐 하면 (x,y)=죄가 돼요. 시간, 공간하면 죄가 된다고요. 뭐 좌표라 해서 대단한 거 나오는가 했더니 이거 아무것도 아니네.

불교에서 x,y좌표 인간의 존재는 그냥 0가 된다. 무(無)가 된다. 그냥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x를 공간의식으로 보고 y를 시간의식으로 보는 거예요. 의식 나옵니다, 의식. 현대철학에서는 공간의식, 시간의식 그 밑을 더 파보는 겁니다. 파보니까 여기 무의식이 나오는 거예요. 무의식은 그냥 혼돈이에요, 혼돈.

온도를 높여 펄펄 끓이면 죽 되죠. 쌀알이 죽 되어 버리죠. 어느 것이 쌀이었고 어느 것이 물이었다는 구분이 안 되죠. 혼돈 상태로 들어가 버리는 거예요. 시간도 녹아지고 공간도 녹아지고 인간도 녹아져서 혼돈상태니까 인간=짐승이 되는 겁니다. 인간=짐승이 되어야 짐승에서 진화되면 인간이 된다. 이게 바로 진화론 아닙니까.

이걸 최초로 언급한 사람이 있어요. BC5세기경에 아낙시만드로스, 터키 동부에 있던 철학자에요. 제일 큰 도시의 철학자가 아낙시만드로스, 한번 써볼게요, 이름도 어려워, 이 사람이 BC5세기경에 헬라의 철학자에요. 이 철학자가 3가지를 주장했는데 하나는 지구는 공중에 붕 떠있다. 그리고 인간은 짐승에서부터 인간으로 진화되었다. 진화론을 주장하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환경의 모든 변화는 태양의 물기, 수증기에서 비롯된다. 과학이 발달되기 전에 이러한 아이디어를 끄집어낸 겁니다.

이 사람이 왜 이렇게 주장했는지 여러분들이 궁금하실텐데 그걸 말씀드리면 그 당시에 헤카타이오스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헤카타이오스라는 사람이 역사책을 찾는데 헤라클레스라는 옛날 유명한 반인반신 영웅이 있어요, 신화에. 케이프 테나로(Cape Tenaro), 그러니까 테나로곶이라는 장소에서 헤라클레스가 하데스, 죽은 자들이 가는 음부에 내려갔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오거든요. 옛날에는 역사가 없었고 그 당시 전부다 전설이 실재했거든요. 그런데 헤카타이오스라는 이 역사학자가 실제로 테나로곶이라는 항구를 가봐서 뭘 조사했느냐 하면 지하통로로 내려가는 어떤 굴이나 길이 있는지 조사를 해봤어요. 없었어요. 그래서 그거 딱 하나해서 모든 전설은 구라라고 선언한 겁니다.

그 당시에는 신들의 세계에요. 신으로 모든 현상을 설명하던 시대에요. 설명하는 시대인데 아낙시만드로스나 헤카타이오스 같은 사람들은 모든 신화와 전설을, 종교적인 방식을 전부다 엎어버립니다. 인간으로 관찰하고 측정하고 인간으로 설명하는 그것만이 참으로 진실되다. 이렇게 했거든요.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뭐라고 합니까? 그렇게 진실되다고 하는 너는 진실되냐를 묻죠. 네 자신을 알라. 그러니까 분명히 눈으로 다 확인했는데 뭐는 확인 못했어요? 내가 진실되냐를 누군가 대조해서 확인시켜줄 사람이 없네. 확인시켜줄 사람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10분 쉬어야죠. 10분 쉽시다.
 이하림(IP:124.♡.211.180) 20-12-28 05:43 
광주강의20201225b 마가복음16장 8절(부활의 힘)-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제자들이 특혜를 입었는데 특히 여성들도 마찬가지이고. 예수님의 부활의 그 장소, 이제 여러분들이 제가 왜 x,y를 거론했는지 아시겠죠, 그 장소 그리고 안식 후, 지나매, 그 시간, x,y, 인간이 갖고 있던 시간과 공간의 좌표가 예수님 만나는 순간 (x,y)=0가 되는 거예요. 0는 더 깊이 들어가면 죄가 되는 겁니다.

만약에 여자들이 60대에 만났다. 그러면 60년 산 것이 뭐가 돼요? x=0, y=0가 되는 거예요. 원점. 공간의식과 시간의식이 0가 된다는 말은 네가 태어나서 아무리 살아도 살아온 그만큼 십자가의 범주, 0되게 하는 힘을 너 따라서 같이 확장시키겠다는 겁니다. 다메섹에서 내려가든지 안 그러면 미국에 살든지 관계없이 그건 0, 0이라 하는 것은 헛살았다. 죄라 하는 것은 너는 죄만 지었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시선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응시. 누가 쳐다본다. 누가 쳐다봐요. 이게 바로 혜택입니다. 누가 나를, 테스 형이 아니고 부활하신 주님이 나를 쳐다보고 지켜보는 그 시선이 나온다면 거기서 50을 살든 60을 살든 졸지에 나는 뭐가 됩니까? 0가 되고 이것은 곧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쳐다볼 때 우리는 십자가지려고 예루살렘 요새 텔아비브공항 내려서 예루살렘 이동할 필요도 없어요. 내가 사는 그곳이 0지점이 되죠. 나는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는 지점이니까.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편리하죠. 편리하지만 그 시선을 보는 순간 우리는 죄인이 된다는 겁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죄인이 된다는 말은, 주님 앞에 첫째 시간에 배운 것처럼 ‘나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옳지 않아요. 나는 죄인이라고 하는 그것을 내가 의식하는 순간 나는 죄인이 아닌 진실된 의인이 되기 때문에 이런 논리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응시할 때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돌이 돼요. 돌 하루방. 굳어버립니다. 누가 딱 보게 되면. 딱 보게 되면 굳어버려요.

만약에 이태가 딴 짓하는데 “공부해!”하는 순간 딱 굳어버리죠. 돌이 되는 거예요. 제가 강남강의에서 했잖아요. "Stop!"하는 순간, 그 개는 맛있는 거 먹으려고 하다가 스톱이 되죠. 그러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쳐다보는 순간 우리는 내 꼼수, 내가 뭘 이렇게 하겠다는 그 자체가 stop이 돼요. 의식의 stop이 되는 겁니다.

stop이 되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뭐든지 할 수 있어요. 경직되어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돌이니까 돌 하루방이니까 강도가 세거든요. 남한테 욕 얻어먹는 것도 할 수 있고 마트 가서 캐셔 일도 할 수 있고 식당에서 설거지를 해도 되고. 이제는 뭐 어떤 부끄러움도 없는 거예요. 양양에 가서 콩나물 공장에서 일할 수도 있고. 양양 콩나물 공장 이야기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옛날 잘 나갔던 개그우먼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사고난 뒤 은퇴하고 나서 거기서 일한다는 겁니다.

뭘 해도 뭐든지 할 수 있는 거예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뭐든지 할 수 있는 순간이 어떤 순간이냐 하면 타인이 나를 응시하는 것보다도 주님이 나를 응시하는 순간, 나의 의식은 일체 인정받지 못합니다. 내가 나를 평가하고 측정하고 나에 대한 가치를 정리정돈하려는 모든 시도는 Stop! 그런 짓 하지 마. 주님에 의해서 이제는 하게 하셔요.

그러니까 참새도 주께서 키우시고 내일 아궁이에 들어가는 들풀도 오늘 키우잖아요. 내일 아궁이에 들어가는 들풀도 오늘 주께서 친히 기르시지요. 참... 그러니까 구약의 욥이 그걸 몰랐던 거예요. 자기가 돌이 되면 되는데 자기가 있는 거처가 황무지가 되면 되는데. 자기는 살아온 x,y그래프에 의하면 내가 2살 때 어디 갔었고 3살 때 원주에서 살았고 7살 때 대구 왔고 시간이 흘러 어느 학교 나왔고... 이 자체가 전부다 의미 없는 황무지가 되는 겁니다. 주께서 찾아온 순간, stop이 되는 순간.

이건 나의 의식이고 나의 의식은 공간의식과 시간의식이에요. 공간의식과 시간의식을 합쳐버리면 인간이 되는 게 아니고 사물이 되고 사물에게 필요한 것은 돈밖에 없죠. 인간다움이라는 것은 돈이 있어야 인간다움이에요. 돈이 없는데 무슨 인간다움이에요. 돈 없이 난 인간이라 하면 이걸 누가 알아줍니까? 아버지도 돈이 있어야 아버지지 돈이 없는데 무슨 아버지가 되고 돈 없는데 무슨 어머니가 돼요. 그래서 은퇴한 50대 후반, 60대 부부가 제일 먼저 신경 쓰는 것이 자식이 하나든 둘이든 있으면 자식을 발로 차서 내보내는 거예요. 자식을 떼내야 사물로서 내가 살 수 있는 여력으로 노후대책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같이 붙어있으면 그것도 세 명이나 붙어있으면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고 미래가 암담하죠. 그런데 이렇게 미래가 암담한데 이런 사람이 있어요. “목사님, 그래도 믿음으로 살면 주께서 먹을 것, 입을 것 채워주시겠죠.” 하면 그 말은 ‘어떤 경우라도 나는 진실되다’ 라는, 지금 자신을 우상시하는 발언입니다. 아주 위험한 발언이에요. 왜 살아야 되는데요.

인간은 돌이 되죠. 돌이 되고 이건 진실되죠. 돌이라 하는 것은 흙. 삶과 죽음의 경계선으로 오는 겁니다. 이 경계선이 십자가죠. 십자가에 우리는 돌로써 참여하는 겁니다. 이걸 누가 한다고요? 시선이 하죠. 우리를 응시하는 시선이 합니다. 이제부터 좀 어려워지는데.

내가 예수님 몰랐을 때는 최종적인 마지막 사람이 나에요. 숫자 1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응시가 되어버리면 여기 하나 더 있죠. 1과 1이 있으면 1+1=2가 되죠. 응시가 있으면 2의 세계가 구성되는 거예요. 나 여기 있고 나를 쳐다보는 누가 있고. 모든 거치는 것 다 떼어 내버리면 2가 되죠. 2가 될 때 여기서 관계가 성립되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그래서 아담을 만들 때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았다. 아담이 홀로 사는 것이 좋지 않았다고 보는 겁니다. 나 혼자 있는 것은 나의 나다움이 될 수 없어요. 나를 응시하고 뭔가 말을 던지고 지켜보는 그 분이 있을 때 나는 나다운 것이 비로소 천지창조하고 처음 아담을 만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에요.

부부가 좋은 점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상대방 앞에서 옷을 벗을 수 있다는 거예요. 뭐 옷을 못 벗어서 환장했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원래로 돌아가도 자연스러울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나를 부끄럽게 보지 않는 어떤 자가 있을 때 나는 원래로 마음 푹 놓고 돌아갈 수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2인의 관계거든요. 창조주께서 피조물인 우리를 보고 있다는 말은 네가 어떤 짓을 해도 괜찮다는 이야기입니다, 네가 어떤 짓을 해도. 어떤 짓을 해도 훌륭하다는 뜻이 아니고 상관없다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그동안의 관계는 뭐냐 하면 절대적인 1이 된 내가 하나님을 하나의 상대자로 내가 만들어냈겠죠. 그럼 나는 우상이고 나는 나 자체가 우상이면서도 감추면서 신을 믿는다고 이렇게 인간이 내놓는 건 거짓말밖에 없기 때문에 거짓말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진정한 2자관계가 아니고 자기를 선악과 따먹고 절대화시키는 그 방법이란 말이죠.

그런데 주님이 오셔서 나를 응시하니까 나는 뭐가 돼요? (x,y)의 좌표값은 뭐가 됩니까? 0, 돌 또는 나는 죄가 되는 거예요. 죄가 되기 때문에 그 분이 요구한 것이 이거였단 말이죠. 내 앞에서는 죄인이고 내 앞에서는 넌 흙이라는 것을 우리는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드러낼 수 있다는 이 자유. 아, 이거 참 기분 좋지 않습니까.

둘이 있어야 나의 나됨이 되는 거예요. 주님이 있어야. 이것을 가지고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랑이라 하는 것은 김종환이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거짓의 옷을 벗었다’ 하잖아요. 더 이상 나는 나를 거짓되게 속이는 그 피곤함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거예요. 더 이상 남한테 인체하고 거룩한 체하고 고상한 체하고 돈도 없으면서 있는 체하고 그 자체가 참 얼마나 그동안 힘들었습니까. 연말을 맞이해서 그동안 사기 친다고 거짓되게 인간도 아닌 게 인간답게 살라고 얼마나 참 힘들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 우리를 십자가 출발점으로 늘 돌려보내시는 그 주님 앞에서 그런 힘든 일을 할 필요가 없죠. 거짓의 옷을 마음껏 벗어도 괜찮은 겁니다. 윤리도덕의 옷을 벗어도 괜찮고 더 이상 내가 나를 지키지 않게 하신다. 더 이상 내가 나를 지키지 않는다는 말은 뭐냐. 내가 나를 지키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내가 될까요?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나’가 돼요.

따라서 더 이상 내가 나를 지키지 않는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내가 되겠다는 나는 사라지고 주님이 원하는 나는 따로 있습니다. 그 따로 있는 나는 어떻게 생산되고 만들어지는가. 이것이 상당히 어려워요. 그렇지만 여러분들 실력을 믿기 때문에 하겠습니다. anchor. 닻이라 하죠. anchor뒤에다가 man붙이면 anchorman되죠. 릴레이할 때 최종주자를 anchorman이라고 하거든요. anchor, 닻. 판이 이렇게 있는데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전부다 여기다가 닻으로 내리는 거예요.

배가 있는데 배가 정박하기 위해서는 가까운 해변 가에 닻을 내리든지 안 그러면 뭐를 묶든지 해야 되겠지요. 무거운 걸 내리잖아요. 그러면 배 모습이 물에 떠있는데 내릴 때는 anchor, 닻이 내려진 모습이죠. 그러면 부둣가 밑에 있는 바다의 모습을 보게 되면 배가 열채 있다면 닻이 내려와 꽂히겠죠. 닻1, 닻2, 닻3... 전부다 동일한 닻이 되는 겁니다. 이걸 '앵커의 판' 또는 '앵커의 평면’이라고 제가 칭하겠어요. 이런 말이 있는 게 아니고 제가 지어냈으니까, 뭐 지어낼 때 주의해야 됩니다. 닻4, 닻5, 닻 6....

사람이 이 세상에 산다 하면 편하게 살면 되지 왜 앵커라는 말을 지어내서 닻을 내린다는 말을 하느냐면 이 세상에서는 사람 따로 사건 따로 개구리 따로 기차 따로 자연 따로 바람 따로 인간은 전부다 분류를 해놨기 때문에 사람, 사건, 마음, 사랑 이런 걸 전부다 결합할 수 있는 요소가 없어요, 분류를 할 때.

인간은 분류를 할 때 그냥 분류하는 게 아니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지 잘났다 하는 쪽으로 나를 어떻게 밥 먹여줄 수 있느냐는 쪽으로 분류를 하게 되어 있어요. 옛날에 중국의 임금 중심으로써 생물학을 할 때는 오늘날처럼 뭐 종속...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네 발로 기는 것, 두 발로 다니는 것...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임금님이 좋아하는 것과 임금님이 못 먹는 것, 이런 식으로 분류했다고요. 분류할 때 의도가 다 담겨있어요.

아수라백작 있죠. 감기 조심하세요~라고 하는 판콜 선전할 때 소녀가 썼던 비옷 비슷한 거 뒤집어쓰고 나오는 아수라백작. 마징가제트에 나오는 나쁜 놈이에요. 반은 여자고 반은 남자고. 그 아수라백작이 닻을 내려버리면 그 마징가제트도 역시 동일한 닻이에요. 아수라백작은 악하고 마징가제트는 선하다는 선과 악의 차이를 이 세상에서는 남기거든요. 남기지 말고 그걸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차별 없이 한번 만들어보자.

차별 없이 만들면 아수라백작도 하나의 사건이고 또는 사물이죠. 이걸 전부다 마지막 릴레이주자처럼 마지막 최종의 닻의 모습으로 전부다 꽂아버리자는 말이에요. 그럼 이게 좌표가 되겠죠. 닻을 내린 좌표의 평면을 하나 떠버리는 거예요. 제 아이디어입니다.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런 복잡한 이야기를 해야 돼요.

다시 말씀드려서 내가 뭔가 분류하려고 한다면 내가 귤을 안 먹는다면, 먹지 않는 분류에다가 한꺼번에 다 넣어요. 그러면 과일 농장하는 사람은 기분 되게 나쁘다고요. 과일 공장하는 사람은 귤은 일단 귤이고 수박은 나중인데 나는 귤을 안 좋아한다면 귤 제키고 뭘 하는 거예요. 나는 개고기를 못 먹거든요. 그러면 개고기는 못 먹는 것, 한꺼번에 쓰레기통에 다 분류해 버리고, 순대 같은 거 곱창 이런 거 못 먹거든요. 그런데 대구곱창 대구에 명품 곱창전골 먹어봤습니까? 이렇게 나오는 사람들은 그 곱창을 왜 못 먹지? 또 화를 낸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분류하는 자체를 주관적으로 보지 말고 객관적으로 보는 방법은 그런 사소한 것 하나까지 전부다 닻을 내려가지고 이 세상 말고 그 밑에다가 판대기를 만들어가지고 전부다 점으로 좌표로 표시하자 이 말입니다. 그럼 이 세상은 아담의 세계가 돼요. 아담의 세계, 현재 세계.

그럼 아담의 세계에 왜 닻을 내려야 되는가. 이 아담의 세계에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 마귀도 마귀로 오지 않습니다. 마귀도 우리와 똑같은 하나의 닻이 돼요. 이거 이야기하려고 이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놀랍게도 예수님마저도 우리에게 오게 되면 그냥 평범한 목수의 아들이에요. 그 당시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했잖아요.

그러니까 자꾸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을 우대하는데, 예수님을 우대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원래 성경 그 당시 시절로 돌아가 보자 이 말이에요. 돌아가 볼 때 유대인들이 아이큐가 낮은 것도 아니고 성격이 고약한 것도 아니고 그냥 예수님을 볼 때 어떻게 보겠어요? 그동안 자기들이 있었던 이념, 우리가 생각하는 메시아는 저런 모습은 아니야, 했던 그런 입장에서 봤을 때 예수님은 그냥 보통 사람이에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마귀를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그들에게 귀신 쫓아내고 마귀 쫓아내는 것은 병든 사람에게 해당되죠. 그러나 본인이 마귀의 자식이라는 것을 유대인들이 알았어요, 몰랐어요? 몰랐죠.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의 사고방식을 이렇게 앵커판, 앵커의 평면으로 이야기하는 이유는 바로 12제자와 이 모든 사람도 어디에 속했느냐. 피라미드 형식으로 해서 (예수님께서 누구를 마귀의 자식, 악마의 자식이라 했느냐 보면) 그 당시 지도자급이 이 유대사회에 나름대로의 앵커판을 만들어서 하나의 교육 이념으로 전부다 세뇌를 한 거예요. 메시아냐 아니냐 하는 것은 우리가 전문가니까 우리가 판정할게. 너희들은 우리 시키는 대로 해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 판정하다보니까 제일 밑바닥에 세리와 창기가 있었던 거예요. 이게 그들의 분류방법이었어요.

그러나 주님 오셔서 모든 인간을 x와 y의 좌표로 하고 그 모든 좌표값은 0가 되는 거예요. 죄인이 되는 거예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죄인 되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 입장에서 사도바울이 늘 이야기했지만 이 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모든 사물들과 사건들과 짐승들과 대자연 모든 것은 이 앵커, 닻만 모여 있는 앵커의 평면에 의하면 이것은 바로 악마가 지배하는 저주의 세계, 저주판이 되는 거예요.

라디오 뒤에 떼보면 반도체판 나오죠. 라디오나 TV 뒤에 떼보면 판에 도돌도돌 났잖아요. 그걸 하나의 닻, 하나의 앵커라 보잔 말이죠. 보게 된다면 그 판이 고만고만해서 그게 이건지 비전문가들은 모르잖아요.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그걸 몰라도 그 판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 보시기에는 영적 요소, 악마에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예수님은 핍박해도 악마는 핍박 못한 거예요.

예수님과 악마는 대표입자거든요. 유일한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악마가 대표입자에요. 대표입자가 언제 1대1로 만났습니까? 마태복음 4장에서 광야에 시험할 때에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고 대표, 악마와 예수님이 만났습니다. 그 때 악마가 본인 입으로 이야기했어요. 세상의 모든 영광과 권세는 누구 손에 있다? 내 손에 있다고 자기 입으로 그렇게 이야기했다고요, 자기 입으로. 그 이야기할 때 사람이 근처에 몰래 녹음기 들고 조선일보 기자나 누가 들었습니까? 아무도 없었어요. 그렇잖아요. 아무도 없었죠. 목격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죠.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악마 중심의 앵커판을 만들 수 있다, 없다? 만들지를 못해요. 뭐든지 내 중심으로 분류를 하기 때문에. 코로나 걸린 사람과 안 걸린 사람, 걸릴 가능성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그렇게 분류를 하는 거죠. 백신 맞은 사람과 안 맞은 사람. 이렇게. 공산주의냐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 이런 식으로. 인간들은 틈만 나면 분류해요. 첫째시간에 말한 것처럼 나의 진실됨을 위하여 나의 정당함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해서는 예수님 십자가 지신 이유를 모르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세상을 봐서는 모르는 겁니다. 부활을 언급하고 십자가를 언급할 때는 먼저 예수님이 이 세상을 어떤 식으로 봤는지를 봐야 돼요. 그럼 이 세상은 누구 손에 있다? 악하고 어두운 권세 손아귀에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권세자를 보고 싶다? 인간 눈에는 보이지를 않죠. 인간 눈에는 보이지를 않는 겁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악마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이게 바로 부활의 결정적 의미이죠. 이 세상의 특징은 악마의 세계입니다. 악마의 세계에서 예수님이 죽었다. 남들 보기에는 예수님이 죽은 것은 하나의 평범한 목수 출신이 죽은 거예요. 평범한 목수 출신이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도 왜 그리 까불었어? 조용히 좀 있고 그만 나대지. 괜히 나대서 죽었잖아. 하고 끝나버려요. 그리고 예수님을 찾아왔던 3명의 여인도 예수님의 그 활약상이 너무 안타깝고 안쓰러운 거예요.

자기가 아는 모든 인식은 악마로부터 뒤집어씌워졌기 때문에 전체를 볼 수 있는 안목은 없잖아요. 없는데 여기 죽음밖에 없는 곳에서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살아났죠. 살아났다면 예수님 말고 또 살아날 사람이 있다고 여겼습니까, 없다고 여겼습니까? 없다고 여겼죠. 그러면 예수님이 살아난 것은 예수님이 살아난 것이 아니고 이 전체를 한꺼번에 규정할 수 있는 안목으로서 살아난 거예요.

이게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한 게 아니고 ‘죽은 자에서 부활’이에요, 죽은 자에서. 이 전체를 부활의 입장에서 한꺼번에 이걸 하나의 동일한 평면으로 보게 된 거예요. 그걸 설명하면서 내가 앵커판이라는 걸 막 지어낸 거예요, 여기서. 좀 무리가 되더라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수면 위에 있으면 배도 되고 어떤 건 사람이고 수박이고 되지만 물속에 잠겨버리면 또는 물속으로 내려가면 동일한 하나의 앵커, 닻을 내리는 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어디에 닻을 내렸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결국 죽음이 지배하고 죽음이 승리하는 데에 그 닻이 내려진 거예요.

혹시 여러분 <주 예수 나의 산 소망>이라는 노래 아십니까? 제가 대전강의 때 소개했잖아요. 거기 가사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망이 무너졌도다 할렐루야~’ 기타치고 노래 부르는 거 있잖아요. 한번 적어볼게요.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사망이 무너졌도다’ 이런 가사가 나와요. 이 가사가 잘못되었어요. 사망이 무너진 게 아니고 현실이 무너진 거예요. 현실이 무너지고 사망이 본격화되어 살아난 거예요. 너도 사망, 나도 사망. 죄가 살아난 거예요, 모조리. (x,y)의 값은 사망이고 죄고 0에요. 죽은 자들이에요. 죽은 자가 살아난 거예요. 코로나 걸려 죽으나 그 전에 살아있으나 다 죽은 자에요. 이것이 바로 부활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죽었다가 살아난 게 아니고 빠져나올 수 없는 악마에게서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살아난 뒤에 제자들로 하여금 그 빠져나온 구멍 있잖아요, 그 시점, 지점인 십자가 사건으로 되돌려 보내는 이유는 그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 전체가 사람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구성된 그런 공동체 사회가 아니고 악마가 다스리는 사회에요, 악마가 다스리는 사회.

그 시선이, 그 예수님이 성도에게 성령을 주셔서 제자들을 주시하면서 응시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여기서 살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로 사는 것이 아니고 움직이는 십자가로서 살게 만들어요, 이 성도를. 십자가는 우리가 살아 있으면서도 우리를 죽은 자라고 제대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살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 사건에 있는 사람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사망이 무너졌도다 할렐루야~이렇게 되는 게 아니고 무엇이 무너졌다? 모든 현실이 다 무너지고 오직 이 세상은 죽음만 있는 세계. 오직 죽음뿐인 세계. 그 죽음의 힘에서 아무도 빠져나올 수 없음을 이제부터는 기분 좋게 즐겨야죠. 주님으로 하여금 날마다 그렇게 돌아가게 하기 때문에. 주님의 응시가 우리에게 계속 지시하거든요. 제발 돌이 되어라. 네 계획이나 네 목적 자체가 없고 앞으로 10년을 더 살아도 공연히 산 것이 되고 아무 의미 없는 삶이라는 것을 미리 즐겨야 돼요.

아까 뭐가 부담이 없다 했습니까? 이 땅에서 내가 의롭게 된다는 그 짐에서 벗어난다 했죠. 그렇죠? (x,y)=0니까 우리로 하여금 하나의 딱딱한 죄인으로 살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만이 이 땅에 유일한 죄인입니다. 죄이기 때문에, 나올 게 죄밖에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자기한테 기대하지 않는 거예요. 이 죄인 되는 것은 부활의 주님이 우리를 응시했고 성령을 보내서 응시하게 되죠.

그러면 이 죄인이 이 땅에 살면서 계속 생애를 이어가겠죠. 시간의 박동. 시간이 뛰기 시작합니다. 이 시간은 죄를 죄 되게 드러내는 시간이 박동해요. 팔딱팔딱. 시간이 뛰죠. 시간이 박동합니다. 그럼 이것은 (x,y)=0에서 의미가 부여돼요. (x,y)=죄가 되는 거예요. 나는 죄인으로서 남은 생애를 살아가는 이것. 이게 1이 아니고 1과 1의 관계, 2의 관계죠. 이 1+1의 관계, 이것을 성경에서는 사랑이라 합니다.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에 사랑하는 관계기 때문에 그 사랑이 주는 시선으로 인하여 얼마든지 나는 옷을 벗을 수가 있는 겁니다.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고 나를 가렸던 모든 것, 내 잘남을 주님 앞에서는 그 까이것 하고 더러움을 더러움 그대로 노출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x,y)=0인데 만약에 자기가 살아왔던 지역을 대입시키고 자기가 살아왔던 생애 기간, 나이를 집어넣어버리면 어떤 값이 나오겠죠. 57이 됐든 60이 됐든 뭐가 나오겠죠.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 사람은 사는 게 힘든 이유가 어떤 사람이 80이 되었다면 아이고 내 인생 꼬라지하고는. 나는 그동안 뭐했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힘든 거예요. 자기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이것밖에 안되지?’ 라고 비교되겠죠.

그러나 주님의 안목, 응시에서 보게 되면 이게 무슨 짓이에요? 여기서는 뭐가 안 나옵니까? 십자가가 안 나오죠. 십자가가 안 나온다는 말은 부활과 연결점이 된다, 안 된다? 부활될 수도 없는 삶이 이런 삶이에요. 나는 인생 몇 점이냐 몇 점이냐. 이게 부활의 요소, 복음의 요소가 안 나오기 때문에 부활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교회 다니면서 부활되겠다는 거예요.

부활은 반드시 코스가 있어요, 코스. 중간에 새치기해서 부활되는 게 아닙니다. 반드시 십자가로 가야돼요. 십자가로 갈 때는 (x,y)=0가 되어야 돼요. 내가 죄인 되는 거예요. 죄인을 즐기는 거예요. 감사하는 거예요. 고마워하는 겁니다. 그럴 때만 십자가를 통과하신 부활의 영께서 주목하고 지시하고 응시하고 명령하니까 우리는 이 죄인으로써 가뿐하게 살 수가 있는 겁니다.

지난 22일, 한 이틀 전에 경상북도 영양에서 46살 먹은 사람하고 45살 먹은 사람하고 군에선가 시켰는지 모르겠지만 유해조수, 멧돼지 잡으라고 전부다 안 그래도 사냥하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들에게 파출소에서 총 줘서 이 겨울철에 멧돼지 잡으라고 했거든요. 그 사람이 멧돼지 잡으려고 하면서 뭐 부스럭하면 총 쏘는 거예요. 그런데 뭐가 부스럭하니까 총 쏴버렸어요. 같은 동료가 죽었어요, 총 맞고.

멧돼지인지 사람인지 그 사람은 뭘로 감 잡았느냐 하면 눈으로 보고 쏜 게 아니고 부스럭할 때 쏜 거예요. 부스럭할 때 왜 총 쏘았습니까? 자기 사냥의 경험에 의하면 자기 (x,y)좌표의 경험에 의하면 저 부스럭 소리는 결코 사람이 낼 수 있는 부스럭 소리가 아니고 멧돼지만이 낼 수 있는 부스럭 소리라고 이미 자기 과거에서부터 좌표에서 익혀온 거예요. 그걸 보고 총 쏜 거예요. 그런데 멧돼지가 죽은 게 아니고 사람이 죽었어요.

이 사람이 실수한 거죠. 실수했다는 것은 전적으로 거짓말이다, 근원부터 잘못되었다가 아니라 딴 거는 괜찮은데 그 점에 있어서는 약간 오류를 범했다. 실수를 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이 사람을 죽이든 살리든 관계없이 이 사람은 어디를 찾아가지 못했습니까? 나는 원천적으로 거짓말쟁이이며 원천적으로 나는 마귀에 속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는 닻, 하나의 입자, 점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을 그 사람은 생각 못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 영역을 축소할 수 없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인간이 자기 힘으로 십자가로 돌아갈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자기 힘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십자가로. 자기 힘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마가복음 16장에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 마가복음 16장 8절을 다시 봅시다.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그 다음에 뭡니까? 도망쳤죠. 도망쳤습니다. 그 다음에 무서워하죠. 벌써 수상하죠. 무서워한다. 도망친다 또는 걱정한다. 근심한다. 이것은 (x,y)=0가 아니죠. 죄가 아니죠.

이게 뭐냐. 왜 도망치고 무서워했느냐 이 말입니다. 첫째 시간 이야기를 다시 하면 자기가 살아온 모든 것에 의하면 ‘나는 거짓되지 않게 살아왔다’ 라는 자기 고상한 영역을 따로 확보했기 때문에 자기가 안 다치기 위해서 도망치고 무서워한 거예요. 이 여자들은 일종의 선택을 한 겁니다. 남들 보기에 내가 무서워하고 놀라고 나를 이상하게 볼 것 같은 것은 사전에 내가 다 차단해가지고 그 현상을 내가 기피하겠다는 생각이 들겠죠.

그러면 아까 닻이라 할 때는 보세요. 여기 물 위에 배가 있다면 닻은 물 속에 들어갔잖아요. 그런데 여자는 깊이라는 게 없고, 수직적 삶이 아니고 어떤 삶이냐 하면 그냥 평면적 삶이죠. 평면적 삶인 거예요. 그러면 제가 아까 이야기한 앵커판이 몇 장 되어야 돼요? (위, 아래로) 두 장되는 거예요. 두 개의 평면이 준비되어 있죠. 한 쪽 평면은 내 중심의 판이 있고 다른 한판은 주님께서 모두 악마에 속했다고 일괄적으로 보는, 부활의 안목에서 보는 이런 판이 있겠죠. 모든 사물을 일체 차별 없게 만드는 것.

이렇게 이야기하면 모르고요. 로마서 3장 한번 봅시다.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로마서 3장에 보게 되면 3장 22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다 되어있죠. 이 말은 뭐냐. 인간의 죄는 차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죄 많이 지은 사람하고 적게 지은 사람하고 차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주님 보시기에는 없는 거예요.

어차피 마귀에 속했고 어차피 부활 안 되고 어차피 지옥 가는 거. 차별 없어요. 그렇다면 주께서 주시겠다는 판은 무슨 판입니까? 차별이 있는 판이에요, 차별이 없는 판이에요? 이미 이 세상이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차별이 없잖아요.

아까 어떤 분이 질문한 것처럼 나는 가인에 속했느냐, 아벨에 속했느냐. 나는 어느 쪽에 속했느냐. 인간이 두 종류로 나뉘어지는데 나는 어느 쪽에 속했느냐. 이 말은 결국 나는 어느 쪽에 속했는지 어떻게 아느냐. 같은 이야기죠. 이렇게 질문했어요. 인간은 어차피 가인계통, 아벨계통 두 계통이라면 그럼 나는 어느 계통에 속했는지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하셨잖아요. 하실 때 제가 그랬잖아요.

가인이고 아벨이고 내가 선택할 문제가 아니고 가인과 아벨 둘 다 아담의 자손이죠. 아담은 자체가 죽음이죠. 그럼 가인이고 아벨이고 둘 다 죽어야 되죠. 죽은 자에게 무슨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까? 차이는 아담과 마지막 아담, 예수님과만 차이나요.

그리고 아벨계통이냐 가인계통이냐는 내가 가릴 몫이 아니고 주님이 하실 몫이에요. 주께서 말씀으로 가인계통 아벨계통 일방적으로 정하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빠져야 되죠. 빠질 때 뭘로 빠집니까? (x,y)=0로 빠지면 되죠. 이게 바로 주님이 주신 안목이에요. 그 안목을 가진 사람이 아벨계통입니다.

더 쉽게 말씀드릴까요? 호빵과 호만두가 같이 있다. 어느 게 호빵인지 호만두인지 알아내는 방법 있어요, 없어요? 손 안대고, 안 찔러보고. 없죠. 제가 그런 실수 많이 했다고요. 호만두 사러 가가지고 호빵 사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지금은 포장지에 표시되어있지만 옛날에는 그냥 쪘을 때 주인이 그냥 호만두, 호빵 했어요. 집에 가서 뜯어보니 야채 나오고 뜯어보니 팥앙금 나오고. 인간은 차별이 없어요. 인간은 차별이 없습니다. 고만고만해요. 뭐 공부 잘하고 못하고 뭐 돈 있고 없고 고만고만. 마지막을 보세요. 마지막은 다 죽잖아요.

지금 (x,y) 값이 0가 이상한 게 아니고. 어떤 사람이 한 100살 살았다. 이 사람은 온 세계를 다 여행했다. 그런데 죽는 순간에는 어떻게 됩니까? 100살 살아간 것이 날라가 버려서 0가 되고 이 땅에서 살 수가 없죠. 0가 되잖아요. 어떤 여자는 남편 죽고 난 뒤에 그 관 위에서 춤을 추고 난리도 아니었죠. 너무 좋아서 그랬는지. 콜롬비아에 있는 어떤 여자가 남편 장례식 관 위에서 춤을 막 추는 거예요. 그게 화젯거리가 되었는데. 남편 없다 이 말이거든요. 2가 되어야 되는데 1이 되어서 아마 실성한 거 같아. 주님이 쳐다봐야 되는데 남편만 쳐다보고 살았던 모양이죠. 서로 똑같은 죄인끼리 응시를 한 거예요, 똑같은 죄인끼리.

주님이 쳐다봐야 그게 부활과 연결되어 있지, 사람이 쳐다보는 그것은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죽은 돌 하루방인데 아이고 이쁩니다. 뭘 이뻐? 근접촬영해보세요. 어떤 사람이 이쁘다고 주장하는 사람 있잖아요. 근접촬영해보세요. 근접촬영하면 점들의 집합입니다. 사진 끄집어내서 확대시키면 점들의 집합이에요. 사람 피부가 있으면 이쁜 게 아니고 피부가 이렇게 돋아난 거예요. 그게 어떻게 뭐 잘못 되서 균형 있게 보이면 이쁘고 균형 안맞으면 못생기고 그런 겁니다. 진흙의 높낮이가 달라가지고 이뻐 보일 때가 있어요. 그러나 나이 들면 0이기 때문에 이게 뭉개진다고요. 뭉개지거나 안 그러면 류마티스약을 많이 복용하게 되면 안면근육이 마비된답니다.

이 세상은 차별이 없어요. 호빵이나 호만두나 똑같이 아무런 차별이 없어요. 왜냐하면 부활의 세계는 차별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이쪽은 죄고 죄가 왕 노릇하고 저쪽 천국은 의가 왕 노릇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차별 없다는 것을 누구한테 이야기하겠어요? 주님이 우리 성도한테 그 임무를 맡기는 거예요. 높은 데서 차별 없는 게 아니고 끌어 잡아당기는 겁니다.

시간은 다됐으니까 이제 정리하겠습니다. 뭐가 중한디. 이게 중요해요. 지분. 어차피 이 세상은 죄인들이기 때문에 이게 사물이에요, 전부다 돌멩이라고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아까 말했죠. 자기 영역, 나는 이만큼 살아왔다. (x,y)= 무슨 값이 나옵니다. 나는 70이다, 나는 80이다. 나는 1000이다. 이건희는 몇 조가 된다. 죄인, 사물에 있어서는 그 모든 거짓존재의 특징은 돈에서 나온 겁니다.

이 땅에 진리는 모든 세상, 돈,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했죠. 말씀으로 산다고 했는데. 이 세상은 반대로 뭐로 삽니까? 돈이 되게 하는 말씀으로 산다. 돈이, 인기되게 하는 말씀으로 산다. 세상권력을 쥘 수 있는 그런 말씀이어야 말씀이다. 왜? 나는 거짓되지 않기 때문에. 이게 바로 거짓말, 악마의 거짓말 아닙니까. 오늘 제목을 고쳐야겠다. 제목 아까 너무 어렵더라. 쉽게 <악마의 거짓말>. 이게 악마의 거짓말이거든요.

그러면 우리의 태생을 이야기해야 돼요. 우리의 태생은 뭡니까? 지분. 돈의 지분. 이거 뭐 반전인가요? 세상에 죄인은 어디에 관심이 있다? “어머님 제 지분은 어떻게 됩니까?” 딸도 그런 소리하고 아들도 “아버지, 제 지분은요? 저 촌에 있는 부동산 누구 줄 건데요?” 그것을 잘난척한다고 말을 안 하죠. 결정적 순간에 정종 한 병들고 명절날 오기 전까지는 입을 다물고 있어요. 술 취해야, 노래방 가서 술 취해서 한바탕 싸워야 이제 그게 나오고 그 전에는 참고 있어요. 참고 십자가가 어떠니 복음 어떠니. 이 따위 소리하고 있다고요.

항상 우리 자신은 바로 돈밖에 모르고 세상의 명예와 인기와 자존심밖에 모르는 그것을 어떻게 하라? 즐겨라 이 말입니다. 이상하게 끝나서 나도 찝찝한데. 그걸 즐기세요. 바로 나는 나를 주시하는 분이 있다고. 따라서 나는 나를 이제는 알게 되었다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차별이 없었습니다. 복음 아는 자나 모르는 자나 세상 원리대로 살 수밖에 없음을 충분히 인정하고 이제는 그것을 즐기고 그렇게 알게 된 것을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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