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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6 23:11:54 조회 : 262         
부활의 능력 마가복음 16:16 210326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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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림(IP:124.♡.211.180) 21-03-28 06:31 
광주강의20210326a 마가복음16장 16절(부활의 능력)-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6장 15절-16절 말씀입니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이 대목에 대해서 이 점을 놓치지 말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잔인함’. 하나님을 자꾸 선하게 좋게 보니까 그저 허허 웃고 그냥 넘어갈 줄 알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 이 말은 처음부터 다 정죄를 받아야 되는데 특별 기회, 혜택을 주는 조건이 하나 새로 추가된 거죠.

원래 정죄를 받아야 돼요. 원래 하나님은 잔인한 하나님이에요, 원래. 원래 하나님이 잔인해야 하나님이 그 가운데서 이런 정죄를 받지 않는 그런 기회를 제공하시는 이것이 어마어마한 사랑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은혜가 되는 거죠.

그래서 은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알려면 먼저 잔인한 하나님을 바탕으로 해야 돼요. 잔인한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감히 하나님과 상대해서 얻어낼 것이 전혀 없고 이미  하나님은 잔인하시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하고 상대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돼요. 상대할 위치가 아닌 인간을 위하여 상대할 수 있도록 여지를 제공했다는 그것이 바로 사랑이고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없다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잔인하다는 것이 있고 그 하나님이 세상을 지배한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줄여 말하면 세상은 심판의 대상입니다. 같은 말입니다. ‘정죄를 받을 것이다’=‘잔인함’=‘우리가 사는 세상은 심판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라 했으니까 복음 전하는 사람의 세상 보기, 세상에 대한 견해는 하나님의 잔인한 심판의 대상으로 보는 안목을 갖춘 자가 주님의 사랑을 아는 자이고 주님의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심판의 대상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나올 것은 심판받을 그러한 일들뿐이죠, 어떤 짓을 하더라도. “네가 어떤 일을 했어? 그러면 그거 가져와봐. 내가 그거 심판해줄게.”라는 것이 하나님의 준비된 잔인함이에요. 이 땅의 어떤 일을 하던지 간에.

일본이 한국 축구 3대0으로 이겼거든요, 어제. 그거 일본에 대해서 하나님이 아주 잔인하게 처리하십니다. 잔인하게 처리하시죠. 안철수 서울시장 예선전에서 또 떨어졌잖아요. 그거 아주 잔인한 정죄 받을 짓을 한 거예요. 마치 온천에 물이 끓듯이 아무리 이 세상은 끓고 있어도 그 자체 하나하나가 주님 앞에 잔인한 심판을 받을 짓거리만 뽀글뽀글 내어놓는 거예요.

방금 이런 이야기, 이 이야기가 ‘세상은 변화한다. 그래서 세상은 정죄 받는다’는 겁니다. 세상은 변화한다고 할 때 과학, 생물학에서는 ‘변화’라는 단어를 좋게 바꿔서 진화한다고 하는데 진화한다고 주장했던 다윈이나 그런 책에 보면 ‘진화’라는 단어가 아니에요. 자연은 변화한다는 거예요. 변하는데 ‘진화’라는 말은 어떤 뉘앙스가 있느냐 하면 더 좋게 변화한다는, 좋다는 뉘앙스를 억지로 집어넣고 진화한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

옛날보다 지금이 우수해졌다, 모든 사고방식이. 살아남은 자는 우수해서 살아남았다. 그것이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 적응에 유리한 조건으로 우리는 살아남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 말 자체가 빈 껍데기 내용이에요. 동어반복, 같은 말을 한 거예요. 우리는 왜 진화되었는가. 살아남을만해서 진화되었다. 우리는 왜 살아남을만한가. 진화되었기 때문에.

그게 말도 안 되거든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지금 이 세상에서 학문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심지어 초등학교 때부터 이걸 가르치고 있어요. 세상은 변화한다. 변화하는 것을 좋게 보는 거예요. 좋게 본다.

그러면 제가 제일 처음에 얘기했던 것,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잔인함의 대상이다. 본질상 진노의 대상이다. 그리고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다.’ 그 이야기가 맞다면 좋게 보겠다는 자체가 하나님한테 정죄함을 당하는 빌미를 또다시 이 세상이 제시한 거예요. 좋게 본다는 그 자체가 주님의 화를 더 돋운 거죠. ‘역시 저주받을만하다’ 라고 그렇게 스스로 세상이 증명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로마서 8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8장 21절에,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렇게 되어있죠, 모든 피조물들이. 그러니 피조물들의 입장에서는 현재 자기 형편이 정상이라는 말입니까, 비정상이라는 말입니까? 정상이 아니고 비정상이라는 말이에요.

지금 마가복음 16장 15절부터 하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6절에 보게 되면,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에서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그 대목을 지금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정죄를 받는다는 것을 미리 들은 사람들은 답변해보세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할 때 하나님은 ▭였다. 이 네모에 뭐가 들어가죠? ‘잔인함’. 하나님은 잔인한 하나님이에요. 왜냐하면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이미 규정을 했기 때문에.

정죄를 받는다는 것은 이미 이 세상은 심판의 대상이고 심판의 대상에게 있어서 정죄를 마땅히 받아야 된다는 것에 군소리하지 마라. 너는 마땅히 정죄 받아야 된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는다는 말은, 믿는 사람에게는 특혜가 주어진 거죠. 믿는 사람에게는 정죄를 면제해준다는 점에서 하나님은 아주 잔인한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잔인한 하나님에서 사랑의 하나님으로 인지하게 됐다는 것은 특혜 입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특혜’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선물, 은사를 받은 것을 이야기하는데 이 특혜라는 말을 함으로써 선물, 은혜라고 함으로써 인간 대 인간에서 서로 좋게 지낼 하등의 근거는 없습니다. 우리들끼리 좋아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같이 좋아하는 법은 없거든요. 그래서 특혜 받은 사람은 자기 특혜를 그냥 즐길 뿐이에요. 그냥 즐기는 거예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즐길 뿐이지 이걸 설득해서 남과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재주나 그런 능력을 주께서는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앞에 나와요. 마가복음 16장 16절에,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세례 나오죠. 세례라 할 때 제일 좋은 표현은 덮쳐지는 겁니다. 세례라는 것은 덮쳐지는 거예요. 어떤 주어진 환경에 들어갔을 때 이 환경에 저촉을 받는 게 세례라는 겁니다. 이 환경에 저촉을 받는 게 세례에요. 이질적 환경이죠. 현재 내가 있는 환경에 있다가 어떤 환경이 덮쳐 와서, 있던 환경에 소속되어 있다가 이질적 환경에 소속되었을 때 덮쳐지는 거예요.

덮쳐진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임의로 조정불가. 내가 임의로 그 환경을 바꿀 수가 없이 돼요. 바꿀 수가 없는 겁니다, 전혀. 지가 싫으면 (환경에서) 나가면 되지만 환경은 내가 싫다고 해서 맞춤 양복처럼 내게 맞는 환경으로 바꿀 수가 없어요. 싫으면 본인이 나가면 되지만 이 환경은 확정된 겁니다.

이게 세례에요. 이 세례를 마가복음에서는 무슨 세례라고 하느냐 하면 ‘부활의 능력의 세례’에요, 마가복음에서는. 이것이 누가복음에서는 성령의 세례에요. 그리고 사도행전에서도 성령의 세례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세례에요. 사도행전에 너무나 유명한 말씀,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 하셨느니라” 1장 5절에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성령의 세례를 받으리라는 것은 제자들 아이디어에서 나온 게 아니에요. 너무나도 일방적이에요. 모든 하는 일이 우리에게 미리 낌새를 주든지 뭔가 예상이 되어야 되는데 그런 것이 전혀 없이 성령의 세례가 온다고 할 때 주께서 언질은 했지만 그것이 어떤 실체인가를 제자들이 사전에 알까요, 모를까요? 사전에 그들은 전혀 알지 못한 겁니다. 사전에 전혀 알지 못한 것을 말로 주었다 해서 그것이 실감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성경을 이해하거나 해석할 때는 항상 사전에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소급해서 ‘아, 그랬었구나.’ 과거시제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이것을 이미 우리가 이 새로운 환경 속에 들어있으니까 비로소 주님이 하신 말씀,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신 것을 여기서 실감하고 있는 거예요.

실감할 때 그것이 정죄 받을 이 세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늘 새롭죠. 이 부활의 능력이. 부활의 능력으로 세례를 받는다 할 때 사도행전에서는 이것을 성령의 세례라 했죠. 그러니까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성령의 세례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뒤에 성령의 세례를 준다 하잖아요. 그것을 마가복음에서는 부활의 능력의 연속성으로 성령의 세례를 이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세례의 내막이 뭐냐 하면 바로 십자가로 가는 게 아니고 중간 과정에 부활의 능력을 경유해서 십자가를 증거하게 되어 있어요. 십자가를 믿으라는 말은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된 사람이 회고적으로 회고하듯이 소급해서 ‘아, 십자가가 나를 구원했구나’ 하는 것을 부활의 능력을 받아야 아는 거예요.

만약에 십자가를 믿어서 구원받는다고 한다면, 부활의 능력이 없이, 세례 없이 그냥 해버리면 나라는 인간이 십자가를 마치 사전에 아는 것처럼 행세하기 때문에 이것은 엉터리죠. 이건 엉터리입니다. 부활하신 분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의 고유체험이란 말이죠. 예수님 본인만의 체험을 우리는 몰랐잖아요. 몰랐는데 마치 십자가를 아는 것처럼 그렇게 행세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죠.

부활의 능력이 임한 사람이 뒤돌아서 다시 십자가를 생각해볼 때 아,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미 구원되었었구나‘를 아는 겁니다. 이런 사람 중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냐 하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고백했던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했는데 그것은 이미 13년 전에 예수님 혼자 달렸고 밑에 강도 둘이 있었지 거기에 사도바울은 십자가 근처도 안 갔습니다. 가본 기억이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에 내가 같이 달렸다고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인간들이 이해하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통용되는데 사도바울이 말하는 그 모든 언어는 인간의 시간과 공간을 밀어붙입니다. 떼버립니다. 인간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형성된 이런 언어개념을 치워버려요. ‘천년이 하루같이’하는 그런 내용도 마찬가지고. 인간의 시간, 공간과 결부 짓지 않습니다.

부활의 능력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고유체험이었고 예수님의 고유체험은 ‘나는 이미 이 세상에서 죽었노라’ 이 체험이에요. 이 체험이 부활의 능력이고 이것이 그대로 사도바울에게 오니까 ‘나는 이미 이 땅에서 죽었고’가 돼요. 골로새서 3장 3절-4절, 너희는 죽었고 너희의 생명은 하늘에 보관되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늘나라에 간직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 인간들보고 믿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안 믿어지지, 그치?” 라고 지금 약 올리는 이야기에요. “안 믿어지지? 그래? 안 믿어지지, 안 믿어져? 믿지 마.” 그렇게 되는 거예요.

네가 안 믿는 것은 네가 언어적 기술이 부족하거나 공부를 못해서가 아니라 너는 세례 속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못 믿게 되어있고 그 세례라는 것은 부활의 능력이 덮치지 않았기 때문에 네가 못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굳이 믿으려고 애쓰지 마. 왜? 애쓰면 애쓸수록 네가 착각을 일으켜. 마치 신앙인 것처럼. 착오를 일으킨다고요. 그러면 안 되죠.

중들이 머리 깎잖아요. 진짜 내가 중 만나면 물어보고 싶어. 머리 왜 깎는지. 내가 지금껏 아무리 공부해도 그걸 모르겠어요. 중들이 머리를 깎는데 마음은 못 깎잖아요. 이 말은 뭐냐. 마음이 안 깎였으니까 폼 내는 거예요. 그럴싸하게 모든 걸 비웠다는 티를 내는 거예요, 머리 깎는 것이. 진짜 마음이 깎였더라면 굳이 머리 깎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죠? 뭔가 내 마음을 깎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 된다 싶어서 머리 깎는 거예요, 머리 깎는다 이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도 그걸 알고......그 당시에도 그런 사람 많았던 모양이죠. 열심은 있으나 그것은 경건의 모양뿐이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한 거예요. 그럴싸하게 보이려고 한 이유가 뭐냐. 인간은 무엇을 추구하느냐 하면 ‘변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변화를 추구한다는 말은 이미 자신이 미흡함을 자백하는 것밖에 안돼요. 이 세상에서 변화를 아까 진화라 했죠. 상당히 좋게 변화한다. 좋다는 뉘앙스를 자꾸 여기다가 집어넣는 거예요.

다시 한 번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보면 믿지 않는 자는 정죄함을 당한다 해서 이미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 심판의 대상이기 때문에 아무리 네가 어떻게 노력해도 그조차도 심판받을 이유밖에 안 된다는 것. 그럼 뭐냐.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이것은 부활의 연속성입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너에게 덮쳐야 되는데 부활의 능력의 주인공, 그 능력의 제시자 또는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그 체험은 어디까지나 예수님 본인에 의해서 주시고자 하는 자에게 그냥 주시는 거예요, 그 부활의 능력을. 부활의 그 새로운 환경에다가 집어넣는 겁니다.

진화가 아니죠. 변화도 아니에요. 그래서 ‘변화’의 반대말은 ‘안정성’이거든요, 안정성. 한결같음. 이미 완료된 완료성 또는 마감. 다 끝난 거예요. 변화의 반대말은 안정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사회는 자꾸 변화에 대해서 긍정을 하니까 주님께서는 그 사실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계속 일러줬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노아의 물 심판은 그야말로 싹쓸이했습니다. 다 죽였어요. 노아도 자기 집에서 구원되었습니까? 이 싹쓸이에 노아도 포함이 되는 거죠. 노아의 자리에도 물이 들어오죠. 노아가 살던 그 country road, 고향집에도 노아의 살던 집에도 부엌에도 물이 들어오죠.

그럼 노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붕 뜬 거죠. 노아가 붕 뜬 겁니다. 노아 여덟 식구를 일종의 캡슐 같은 데다가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거 희한한 일이거든요. 이 캡슐이 방주잖아요. 방주는 노아언약인데요. 방주를 여기서 정리하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분류하신다. 두 번째는 심판하신다. 분류를 해서 심판을 하는 거예요. 그럼 세 번째는 뭡니까? 세 번째는 보통 구원이라 하잖아요. 그냥 구원이라고 해버리면 안되고요. ‘심판 속에서 구원’이라고 해줘야 돼요, 심판 속에서.

왜냐하면 지금 노아가 구원받은 게 주 관점이 아니고 노아언약의 관점이기 때문에 언약은 이 세 가지 기능을 해요. 분류를 하고 심판을 하고 심판 속에서 구원하고. 그 기능이 노아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고 그 화살표가 방주, 언약에 딱 꽂히는 거예요. 이 원리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는 방주가 성전이 돼요. 다윗에 와서는 성전이 되고 이것이 신약에 오게 되면 바로 내 살과 내 피로 너희와 새 언약을 세우리니. 그것이 십자가, 부활을 포함한 십자가. 십자가의 체험이 능력으로 이어진 것이 부활이거든요.

자, 그러면 이 이야기를 여러분 잘 이해하시겠죠? 그럼 노아는 심판의 대상입니까, 아닙니까? 노아가 심판의 대상 맞죠? 노아도 심판 당한다 이 말입니다. 심판 중에서 구원받았기 때문에.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노아도 심판을 받는 거예요. 노아도 심판을 받는 겁니다. 방주가 답답하다고 해서 방주 밖으로 나오면 죽어요. 하나님의 관심사는 이 언약에 있기 때문에 방주, 언약 안에서 살았지 밖에 나온 노아는 이미 죽은 노아에요. 노아는 이미 죽었어요, 심판 받을 때. 다 같이 함께 죽었다 이 말이죠.

구약에 있는 율법 주시고 성전 주고 신약의 십자가를 이룰 때 십자가가 뭐냐. ‘죽은 자는 율법의 책임에서 벗어난다’ 이게 십자가거든요. 죽은 자는 율법의 모든 책임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대표적인 율법이 십계명이죠, 뭐든 십계명부터 시작하니까.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게 십계명이잖아요. 십계명의 모든 책임에서 벗어났죠.

왜 벗어났느냐 하면 율법은 저주를 하기 위해서 주어졌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여기 살아있는 내가 율법이 주어짐으로써 나를 죽은 자로 만들어서 율법의 책무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겁니다. 참...... 하나님의 그 배려하심이, 그 사랑이 참 지극하죠.

목 졸라 죽이는 이것이 사랑인 거예요. 권총으로 쏴 죽이는 게 사랑이라고요. “죽어, 죽어!” 아... 이걸 사랑으로 이해해야 돼요. 죽으라고. ‘내 손에 안 죽으면 너 진짜 죽어!’ 이런 뜻이에요. 내 손에 안 죽으면 진짜 죽는 거예요. 주님이 우리를 율법을 통해서 죽게 함으로써 우리를 살게 해주시는 겁니다, 죽게 함으로써.

네가 언제까지 율법의 요구를 지킬 수 있을 상 싶으냐? 율법이 너를 못 찾아낼 것 같지? 율법은 사채업자입니다. 돈 한 푼, 이자 다 받아내요. 네가 나를 피할 수 있을 상 싶어? 네가 살아있는 한 너를 따라붙일거야.

히브리서 10장 9절에 이런 말씀 나와 있어요.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첫 것을 폐해버리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으로써 십자가라는 방주에 들어온 사람한테는 율법이 없는 거예요. 죽은 자한테는 율법의 책무가 해당이 안 되기 때문에. 죽은 자보고 이것 지키고 저것 지키고 살인하지 말고 뭐하고 거짓말하지 말고, 그런 것은 죽은 자한테는 해당이 안돼요, 죽은 자한테는.

지금 이 말이 듣는 사람에 따라 굉장히 기분 좋게 들릴 수 있어요. 순수한 사람은 기분 좋지만 돌아서서 생각해보면 지금 기분은 냈는데 이게 역사적으로 실제로 근거가 있느냐, 객관적인 근거가 있느냐가 중요하죠. 교회에서 이 말로 사람 꼬시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그건 보이스피싱도 꼬실 수 있습니다, 이런 것 가지고. 그런데 실제로 그러냐, 실제로.

현재 북한에 살고 있는 김정은이 실제로 있죠. 통일 전망대 넘어서 북에 올라가려고 하면 안 됩니다. 남북이 갈라진 게 실제잖아요. 이처럼 이 이야기가 실제 이야기이냐 이 말입니다. 교회에서 꾸민, 교회 안에서만 통용되는, 자기들끼리의 환상적인 소설이냐, 신화냐 아니면 교회 안이고 밖이고 간에 남북이고 간에 실제로 그러냐 하는 객관적인 증거가 있어야 되죠.

그게 바로 뭐냐 하면 ‘십자가와 부활하심’ 이거에요. 사도들이 사도행전에서 외쳤던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십자가가 눈 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를 꾀더냐. 사도바울이 제시한 객관적인 것은 누가 죽었다는 거예요. 누가 죽었고 그 죽은 분이 사흘 만에 살아났다. 이것은 ‘내 지갑에 돈 2만원 있다’가 너무나 실제적이지만 2만원 있다 해도 3만원 있을 수 있거든요. 2만원 있다고 여겼던 내 기억보다 더 확실한 사건은 뭐냐 하면 누가 죽었다가 있을 수 없게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사실. 이것을 사도바울이 증거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종교, 모든 인간의 신앙심 이것은 전부다 무용지물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나의 신앙심을 믿으면 안돼요. 나의 소망, 사랑 믿으면 안돼요. 나의 종교? 기독교입니까, 뭡니까? 무교. 없어. 이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보다 더 사실은 뭐냐.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겁니다. 얼마 전에 우리 어머니 돌아가셨다. 장례 치른 지 벌써 일주일 되었다. 어머니 돌아가신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어머니 돌아가신 것보다 더 확실한 사건이 예수님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부활을 빼놓죠. 부활을 빼놓는 것은 부활의 능력을 안 받아서 그래요. 부활의 능력을 안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과거 인물로 치부되는 겁니다, 모든 교과서에. 예수는 이 땅에서 훌륭한 분이었는데 죽었고 기독교 자기들끼리는 살아났다는 그런 망발을 하더라. 이미 죽었는데 살아났다고 해서 기독교가 생겨났다. 그것은 그들 주장일 뿐이고 이것은 과학적으로 객관적인 사실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죠.

제가 만약에 초등학교 선생님이고 중학교 선생님이라면 이런 역사를 가르칠 때 “예수님은 죽었다. 너희들 믿나, 안 믿나?”, 애들은 뭐 “믿습니다!” 하겠죠. 그 다음에 “그 예수님이 살아났다고 성경이라는 책에는 나와 있다. 그 다음 진도 나가자. 진도 나가자.” 교육청에서 나와서 뭐 할 말이 있어야지. 성경에 있다는데 그리고 그냥 진도 나가자고 다른 소리했으니까. 스마트폰으로 찍어봐. 이것밖에 안했거든요. 개돼지한테 복음 이야기할 필요 없다 이 말이죠.

그 다음에 한번 봅시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라고 되어있죠.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근거로 하게 되면 이 문제가 의외로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이 심판의 대상이고 하나님의 잔인함을 표출하게 되는 대상이 된다는 거예요. 이 세상이 심판의 대상이고 하나님의 잔인함을 표출하게 되는 대상으로써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이 십자가라는 것은 ‘죽음의 기원’. 모든 죽음의 기원은 십자가에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게 십자가에요.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나오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친히 아버지로부터 아들인 예수님께서 저주받은 거예요. 그러면 어떤 인간이든 죽어도 그것은 죽음의 기원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은 뭐냐. 원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것. 인간이 정죄함을 받고 주님의 잔인함의 대상이 되는 이유가 다 있는 거예요. 그것은 원래 자리로 가야 그 이유가 펼쳐집니다, 원래 자리.

그렇다면 여기 17절에 보세요. 귀신 나오죠. 그 다음에 뱀 나오죠. 독 나오죠. 또 ‘해(害)’라는 단어가 나오죠. 이 단어가 인간들에게는 지금 심판받고 정죄의 대상이 된다면 당연한 겁니까, 의외의 것입니까? 어떤 겁니까? 당연한 거예요. 뱀에게 물려야 되고 독을 마셔 죽어도 마땅하고 뱀에 물려 죽어도 마찬가지고 해를 입어 죽어도 마땅함. 죽어 마땅함으로 세상을 평정해버리는 겁니다. 그게 복음이에요. 그게 십자가입니다, 죽어 마땅함으로.

제가 벌써 몇십 번 이야기했는데 다시 할게요. 이 세상은 심판의 대상이죠. 이 세상은 하나님의 정죄의 대상 맞죠? 잔인한 하나님 앞에 처벌받는 것도 당연하죠? 이것은 고개 끄덕이면서...... 지금 길에 가다가 뱀에 물려 죽어도 너무나 당연한 거고 몸이 아파 죽는 것도 우리의 입장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독을 먹고 죽어도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낫게 해달라는 권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럴 권한이 없어요. 죽는 것이 당연한 거예요.

그러면 이 당연함, 당연한 조치를 거역하고 반대하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 정죄 받을만한 사고방식, 그런 짓, 그런 정신상태가 되는 겁니다. 너무나 당연한데. 그래서 인간들은 병에서 낫고 독이 해독이 되고 뱀을 피하게 되면 그들에게 결국 남는 게 뭡니까? ‘나는 좀더 더 살고 싶어라’ 가 되겠죠. ‘나는 좀더 살고 싶어라’가 원래의 원천인 죽음의 기원과는 거리가 있습니까, 아니면 가까운 거예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는 거죠.

“좀 맞자. 이리 오너라.”하면 “전 안돼요. 애가 둘인데 아직 중학생이라서 안돼요. 지금 죽으면 애들이 얼마나 고생한다고요.” 하고 도망가는 거예요. 저승사자가 이리 와. 이리 와. 하는데, 안돼요. 저승사자 저리 가. 시커먼 옷 벗겨버릴라. 저리 가. 전설의 고향 같은 데 보면 그런 거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그 내용이 인간의 심성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의 심성. 저승사자가 오는데 자꾸 지금 올 때가 안됐다는 거예요. 내가 80되었지만 아직은 멀었다고 이야기해라. 뭐 그런 노래 있잖아요, 백세인생. 날 부르러 오거든 아직 할 일 많다고 아뢰라. 그런 건방떠는 자세. 자기 자신을 아주 좋게 생각하는 거예요. 잔인한 하나님이고 뭐 정죄고 다 귀찮은 겁니다. 나는 그냥 살고 싶을 뿐이에요.

그렇다면 부활의 능력을 받은 사람 입장에서 나타나는 그 ‘표적’이라고 되어있거든요. 17절에 이런 표적을 통해서 왜 이 세상은 물로써 또는 불로써 싹쓸이할만한 세상인가를 그들은 세상 사람들 보기에 특이한 현상을 통해서 두 세계가 현재 겹쳐져 있다는 사실을, 부활의 능력은 장난이 아니고 말이 아니라 실제로 지금 진행되는 일이라는 것을 특이한 사건을 통해 보여줄 필요가 있죠. 그게 바로 불가능성이에요. 인간의 힘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인간의 힘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거예요.

귀신 이야기가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귀신을 쫓아내며”라고 나와 있는데 사도행전 19장 11절부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되어 있죠.

아까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 부활의 능력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 주인공이 돼요. 예수님만이 살아있어요. 그러면 예수님은 살아있고 이미 우리는 율법에 죽은 자가 됐죠. 율법이 저주를 해야 될 건데 이미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저주받지 않는 거예요.

유월절 날 장자가 살아난 히브리인들은 왜 살아남았느냐 하면 자기 장자의 죽음 대신 ‘벌써 우리 장자는 죽었어요’ 라는 표시를 양의 피를 가지고 문 밖에다가 처발랐다 이 말이죠. 그러니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에 의해서 한번 처벌한 자는 다시 처벌할 수가 없잖아요. 죽음의 천사가 와서 보니 이 집은 이미 죽었어. 그 양이 집에서 기르던 양이란 말이죠. 그 기르던 양이 나 대신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처벌이 불가한 거예요.

아까 이야기 다시 합시다. 노아 자기 고향집에 물이 들어왔어요, 안 들어왔어요? 물이 들어왔죠. 그럼 노아는 이미 자기 고향에서 죽은 자에요. 고향이 없어요. 뿌리가 뽑혔어요, 이제는. 돌아갈 고향이 없어요. 그럼 노아는 어디에 삽니까? 그 심판 동안에. 붕 떴죠. 물 위에 붕 떠서 있는 거예요. 잠수함도 아닌 것이 배도 아닌 것이 그냥 방주 안에 붕 떠서 있는 거예요. 노아가 그런 삶을 어릴 때부터 원했습니까? 아니죠. 이게 누구 아이디어에요? 주님의 아이디어라는 말도 되고, 노아의 아이디어는 아니죠.

그러면 병 고치고 귀신 쫓아내고 이것이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내 아이디어에요? 죽은 자가 무슨 아이디어가 필요해요? 죽었는데. 죽은 자는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란 말이죠. 주님이 죽은 자를 통해서 병든 자를 낫게 하고 귀신을 쫓아낸 거예요. 독이 해독되게 한 겁니다.

뱀에 물렸는데 안 죽었어요. 그게 사도행전 마지막에 나오죠. 사도바울이 뱀에 물렸잖아요. 그런데 툭 치니까 독사인데 뱀이 물어도 독이 안 퍼졌단 말이죠. 왜 뱀이 사도바울을 물었는데 사도바울이 안 죽습니까? 사도바울이 이미 죽은 자이니까. 이미 사도바울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었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의 구분 자체가 사도바울에게는 해당이 안돼요. 사도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바울에게 뱀이 와서 물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귀신이에요,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예수님이 물게 하셨고 예수님이 독이 퍼지지 않게 하신 겁니다. 이걸 전문적 용어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하는 거예요. 본인이 알아서 본인이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의 주인공은 시작부터 끝까지 주님이 홀로 일하기 때문에. 홀로 일하는 거예요, 홀로. 비타500먹는 것도 주께서 혼자 하게 하신 거예요, 지금. 목 마르다. 아, 방금 독을 마셨습니다.

주님께서 도대체 죽은 자를 가지고 사용하시는 그 목적이 뭐냐. 그래서 얻고자 하는 게 뭐냐. 그것은 죽음의 기원으로 돌아가자. 모든 게 죽음의 기원으로. 다시 말해서 ‘너희는 전부다 죽은 자 맞다’ 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를 가지고 사용하시는 거예요. 돈을 벌어도 재벌 되고 뭘 해도 다 늙어죽잖아요. 보톡스하고 뭘 해도.

그러면 왜 죽은 자로 하여금 하필 귀신 쫓아내고......참, 귀신 이야기 좀 더 해야 되네요, 사도행전 19장 13절,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제 귀신이 이야기합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흉내 낼 걸 흉내 내라, 응?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악귀가 누구도 안단 말입니까? 악귀가 예수님 아는 것은 기본이고 사도바울을 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과 사도바울이 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예수님만 알고 사도바울보고 ‘너는 누구냐’ 하지 않아요. 같이 움직이는 사람은 귀신들이 안다고요. 알면서 쫓겨나가는 거예요, 알면서. 사도바울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사도바울과 함께 계신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이 대단해서 쫓겨나가는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이 뭐였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은 ‘안 죽는다’가 아니라 죽었는데 사흘 만에 살아났잖아요. 그러니까 성도의 능력은 곱게 죽는 거예요. 오래 사는 게 성도의 능력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밥을 먹되 세상 사람들은 살기 위해 밥 먹는데 우리는 어떻게 밥 먹는다? 죽기 위해서 뷔페 가서 맛있는 것 골라 먹어야 돼요, 죽기 위해서. 애를 피아노 레슨할 때 서울 음대 들어가라고 피아노 레슨하지 말고 애를 서울대학교 들어가는 죽는 자로, 그것도 수석으로 죽기 위해서 해야 되는 거예요. 죽기 전에 또 트로피가지고 얻어맞아서 중간에 죽지 말고. 죽기 전에 얻어맞아 죽은 배로나라는 사람 있어요, <펜트하우스> 드라마 보면 나옵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돈을 벌지 마라’가 아니라 돈을 악착같이 벌어야 되죠. 펀드를 하든지 주식을 하든지 LH직원을 꼬셔가지고 과천에다가 땅을 사든지 해야 될 이유가, 목적이 뭡니까? 그 모든 성도의 목적은? 죽기 위해서. 그냥 죽지 않고 부자 되어서 죽기 위해서. 부자와 죽음을 연관시킬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이게 성도란 말이죠.

그것은 이 땅이 육적인 존재가 아니고 이 땅에 악귀가 있다는 말이죠. 귀신을 쫓아낸다고 했으니까 성도는 어느 세계에 이미 진입했습니까? 영적 세계에 진입한 거예요. 영적 세계에서는 어떤 짓도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만이 못할 것이 없는 거예요. 내게 능력 주신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 목적이 결국은 내가 죽은 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증명해주는 사태와 사건이 나를 기다리기 때문에. 얼마나 감사합니까.

세상은 안 죽으려고 하다가 스트레스 받는데 성도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뭐 골라먹는 재미가 있죠. 암에 걸려 죽을까 안 그러면 셀카 찍다가 절벽에 떨어져서 죽을까. 골라먹는 재미가 있어요. 코로나 걸려서 죽을까, 마스크 쓰고 답답해서 죽을까. 어떤 일을 하더라도. 골프 치다 죽을까, 뭐 요트타고 돌아다니다가 죽을까. 어떤 것을 해도 마지막은 뭡니까?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이하림(IP:124.♡.211.180) 21-03-28 06:33 
광주강의20210326b 마가복음16장 16절(부활의 능력)-이 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의 끝에 성도는 이미 본의 아니게 영적 세계에 들어왔어요. 영적 세계라 할 때 제일 큰 특징은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거니까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대로 처리하고 뭐 보이지 않는 것은 같이 겸해서 다 알고 살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는데 이 보이는 것이 영적 세계를 핍박해요. 핍박을 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죠. 십자가 사건에서 그 당시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놀리는 것, 그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죠. 그런데 베드로, 이 사람은 뭡니까? 도망간 제자들은 뭡니까? 또 가룟유다는 뭐에요? 베드로가 왜 예수님을 배신했습니까,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배신한 이유가 뭡니까? 역시 보이는 것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무시할 수가 없었던 거죠.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핍박받고 고난당했던 그 당함을 주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기도하시면서 ‘너희들보고 지금 나 있는 곳에 당장 오게 하지는 않겠다.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너희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은 맞는데 내가 너희들을 남겨두겠다. 남겨두어서 예수님이 어떤 식으로 개무시 당하고 어떤 식으로 모욕을 받았는지 네가 실제로 그것을 체험한 가운데 비로소 너희들은 나와 하나 됨이 계속해서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거예요. 남겨두고 체험케 하는 거예요, 이 땅에서.

그러면 그 제자들이, 뭐 사도바울도 열두제자도 다 순교 당했다 하잖아요. 결국은 그 제자들을 힘들게 한 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힘들게 한 그 세력이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이 보이는 것에서 나오죠.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님 만나기 전에 자신은 예수님을 핍박한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핍박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존재하지도 않는데 무슨 핍박을 해요.

다만 사울은 누구를 핍박했느냐 하면 그 예수 믿는 자를 핍박했는데 그 때 예수님이 등장해서 하시는 말씀이 그들을 핍박하는 것은 곧 나를 핍박하는 중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연결되어 있다. 연결망. 연결망이 형성된 거예요. 저는 이것을 성도는 예수님의 몸의 모세혈관이라고 이야기했죠. 몸 끝을 건드리면 예수님을 건드린 거예요. 어떤 사람이 내 차를 찬다면 그것은 나를 차는 것과 똑같죠.

이 말은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이 죽은 자이면서도 계속해서 이 땅에서 살아있는 모습으로 살아야 될 이유가, 존재의 의미가 발생되는 겁니다. 나를 위해서 살아있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가만히 있어도 세상이 와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그러한 세력권 속에 놓여있는 거예요. 굳이 전도할 필요 없이 그들이 알아서 전도라는 것을 유발시켜줘요, 가만히 있어도. 너는 우리 과가 아니라고 그들이 이야기해준다고요.

왜 이런 말을 하느냐. 그것 때문에 17절에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그게 표적이에요.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에 살면서 세상 사람과의 차이남을, 특이함을 보여주는 표적이죠, 표적. 영어로 하면 sign이 되는데 뭔가 하늘의 두 나라가 겹쳐졌다. 이것을 중첩이라 하죠. 중첩되어 있는 거예요. 보이는 나라와 보이지 않는 나라가 같이 겹쳐져 있음을 무슨 수로 알겠어요? sign이 있어야 그것을 아는 겁니다. sign에 al을 붙이면 signal(신호)이 돼요. 어떤 시그널로 우리를 사용하는 거예요.

세례요한의 말이 나는 ▭라 했어요. 나는 뭐다? 나는 그냥 소리에요.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누구의 소리에 불과하지 나는 ‘나’가 아니다. 바리새인들이 “너 선지자야? 제사장이야?” 할 때 “나는 ‘나’가 아니다. 나는 누구의 파생된 소리에 불과하다. 나 자체가 소리다, 소리.” 광야에 외치는 소리가 되는 거예요. 그 역할을 우리 성도들이 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나온 표적이 뭐냐, 17-18절 보게 되면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새로운 언어를 말한다 이 말이죠. 귀신 추방, 못 알아듣는 새 언어, 그 다음에 뱀 집는 것, 병든 사람에게 손 얹는 것. 병, 뱀 그리고 귀신, 그들이 모르는 언어의 사용 이 자체가 전부다 sign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거거든요. 이 세상에 무슨 귀신이 있습니까? 귀신은 눈에 안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없는 것들을 주면 이 세상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이 그동안 핍박했다는 증거가 sign, 표적이 되는 겁니다.

두 번째 시간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하게 되면 성도가 왜 사느냐? 표적 되라고. 예수님의 발가락이 되고 예수님의 손가락이 되라고. 예수님의 소리가 되고 예수님의 피부조직이 되고. 표적이 되기 때문에 있는 거예요.

흔히들 목사보고 묻죠. “목사님, 이제 성령 받고 세례 받고 복음 알았으니까 저 어떻게 살까요?” 라고 묻잖아요. 여러분한테도 물을 거예요. 물을 때 여러분 이렇게 답변하면 돼요. “무엇을 해도 괜찮아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면 돼요.” 그러니까 ‘무엇을 할까요?’라고 네가 이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하지 말고 ‘무엇을 할까요?’가 아니라 무엇을 해도 너는 이 세상이 가만두지 않고 계속 공격을 할 거니까 네 자체가 표적이 되면 된다.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예수님의 witness, 증인이 된다. 증인이 되면 그걸로 되는 거죠.                       

그러면 이 세상에 대해서 우리를 무엇 때문에 공격하는지를 알아야 되겠죠, 두 번째 시간에. ‘성도인데 이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까?’ 라고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이 세상이 눈에 보이는 거라고 했잖아요. 보이는 것이니까 제일 먼저 묻는 것이 뭐냐. 영어로 하면 ‘What(무엇)?’이에요. What? 이게 뭐냐. 이 세상의 모든 시작은 보이는 것,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뭐냐는 물음부터 시작해요. 이게 뭐냐. 탐구하는 거죠. 분석하는 거죠. 이게 뭐냐.

그 다음에 보이는 것을 이용하려고 하는 거예요, 자기를 위해서. ‘How(어떻게)?’ 이 세상에서는 보이는 것이 어떻게 이렇게 되는데? 이게 철학의 시작이고 이게 과학의 핵심입니다. 보이는 것이 어떻게? 물이 떨어진다. 어떻게? 어떻게 떨어지느냐. 구리 터빈을 돌리니까 전기가 발생한다. 전기를 가지고 어떻게 이용할 거 없을까? 물과 결합하게 되면 여기서 수력발전이 나오죠. 이게 전부다 과학이란 말이죠. 어떻게 이용할까.

그런데 여기서 멈추질 않아요. 이게 문제라. 여기서 멈춰야 되는데 멈추지 않고 여기서 ‘Why(의미)?’ 의미를 찾으려 해요. 왜 의미를 찾느냐 하면 여기에 ‘살고 싶은 나’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살고 싶은 나라는 말은 하나님이 나를 이미 심판대상으로 본다는 것을 모르고 내가 여기 있다는 거예요.

인간들이 보이는 거잖아요. 보이는 것 중에 보이는 것, 마지막에 누가 보입니까? 내가 보이겠죠. 중요한 것은 보이는 것이 나한테 의미가 있으려면 모든 것이 없어져도 마지막 의미 있는 것은 내가 있어줘야 돼요. 내가 있는 것이 의미 있는 거예요.

어떤 유명한 유대인 정신과 의사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3년 동안 있었던 내용을 글로 쭉 썼어요. 인간은 극한적인 상황에서도 마지막 남는 게 있더라. 그게 뭐냐 하면 어떤 경우라도 인간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나의 일은 내가 선택한다. 내가 결정한다. 이것은 내일 죽어도 오늘은 이걸 견지하는 거예요. 유지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자아성. 나의 절대성. 나의 나됨이에요. 결국 이런 쪽으로 모든 의미가 다 쏠리거든요. 이게 하나님 보시기에 정죄 받을 짓이고 잔인한 심판의 대상이 이겁니다. 창세기 3장에 ‘네가 신처럼 되리라’ 하는 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거든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교회가 보이더라. 저기 교회가 보인다. 교회가 뭐하는 곳인가. 교회 다니면 천국,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서 나중에 죽어서 좋은 나라, 하늘나라, 천국 간대.  저게 뭐냐(What)? 교회. 어떻게(How)? 목사님 말씀대로 성경공부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십일조 내고 교회 봉사하게 되면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그 다음 마지막에 어디 갑니까? 천국 간다. 누가? 내가.(Why, 의미) 하나도 달라진 게 없어요, 하나도.

마지막에 남는 게 뭐가 됩니까? 내가 살아있다는 거예요. 결국 이 사람은 살고자 교회 간 거예요. 여기서도 살고 죽어서도 좋은 데 가서 또 살고. 그러한 권리가 있습니까? 없죠. 없는데 누구 마음대로 이러고 싶어요? 왜 이렇게 하느냐. 모든 의미가 나에게 쏠리게 하는 이것이 바로 이미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신 이런 사람들을 핍박하는 용도이고 그것이 signal, 바로 주님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당했던 그 수모를 그들이 그대로 받는 거예요.

너는 인간 아닌가, 뭐. 너도 인간 같으면 살고 싶어 할 것이 당연하지, 너라고 뭐 별 게 있냐. 별난 존재냐. 라는 식으로 핍박을 받는 거예요. 그 핍박을 누가 받았습니까? 이 땅에서 누가 핍박받았어요? 예수님이 받았죠. 성령 받은 예수님이 그런 핍박을 받았다고요. 그러니까 사도행전에 성령을 받게 되면 예수님이 당했던 그 수모를, 그 모함을 성령의 이끌림에 의해서 똑같이 받는 거예요.

지난 수요일에 예수님의 성령 이야기할 때, 성령의 이끌림에 의해 광야에서 성령이 주선해서 예수님이 어떤 인물을 만났어요? 동네 아저씨나 이장 만났어요, 누구 만났어요? 마귀 만났어요. 그런데 마귀는 이 세상에 없어요. 이 세상에 없는데 예수님한테는 눈에 보인다 이 말이죠. 누가 주선해서 그래요? 성령이 주선하니까 이 세상은 이미 마귀가 쥐고 있다는 것을, 귀신이 쥐고 있다는 것을 알잖아요. 그러면 똑같은 예수님의 체험으로 성령 받은 우리도 이 세상을 볼 때 마귀가 장악하고 있는 세상, 마귀가 작용하는 세상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럼 마귀는 어떤 식으로 일하는가. 그게 바로 이거 아닙니까. 보이는 것을 ‘What? How?’ 그 다음에 여기서 멈추지 않고 ‘Why?’ 왜? Why me? 왜 하필이면 저에게. 왜 나는 이렇게 명예퇴직 당하는가, 이런 식으로. 왜 나만 손해냐, 이런 식으로. 왜 다른 사람은 돌아다녀도 코로나 안 걸리는데 하필이면 나만 걸려가지고 14일 격리하고, 이런 식으로 궁시렁궁시렁 하죠.

그러니까 우리가 뭘 알아야 됩니까? 보이는 것을 어떻게 이용하고 그것을 나의 의미로 하는 이 모든 것이 바로 예수님을 공격한 마귀가 인간을 다루는 법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되죠. 마귀는 인간을 죽이려는 마음이 전혀 없어요. 마귀는 계속해서 인간을 부추깁니다.

제대로 살아야지. 네 인생이 아깝지 않느냐. 여기서 죽을 수 없잖아.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난다는 성경말씀 몰라?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계속 격려와 긍정적 마인드 있잖아요, 적극적 사고방식. 하면 된다. 착하게 살자. 조폭들, 차카게 살자. 복 준다, 계속해서. 네가 종교 바꾸면 네 집안 부흥된다. 일어난다. 과거에 잃어버린 것 다 만회하고 보상해줄게.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인간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복음과 반대방향으로 가도록 그렇게 유도하는 거예요.       

그래서 두 번째 시간에 인간들이 어떻게 이런 식으로 과학을 발달시켰는지 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인간은 시간을 장악하려고 한다.’ 이것이 뭐냐 하면 ‘순서, 서열을 통해서 점점점 희망을 내다본다.’ 이런 식으로 인간은 살아가는 겁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게 되면 장차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좋은 일, 희망.

지금은 내가 이 모양 이 꼴로 살지만 언젠간 좋게 될 것이다. 그동안은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 탈 생각하지 말고 한 계단, 한 계단 높여가자. 그러면 시간은 계단 처음부터 높이 올라갈 때까지 흘러가지겠죠. 이것을 아까 변화가 아니고 뭐라고 했습니까? 이것을 뭐로 바꿔요? 갈수록 개선된다, 진화한다.

이것이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개혁주의 신학에서 말하는 성화론이에요. 대표적인 책은 <천로역정>. 조금씩 조금씩 너를 개선해나가는 거예요. 대표적인 유명한 사람은 워치만 니, 잔느 기용. 워치만 니의 제자, 위트니스 리. 그리고 구원파도 여기에 해당돼요. 전부다 귀신들린 거예요. 귀신들린 겁니다. 귀신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어요.

그러면 여기서 일반적인 과학은 뭐냐. 과학이라 하지 말고 과학이라는 이름의 종교라고 보면 돼요. 과학은 종교입니다. 주님이 말하는 음란이라 하는 것은 이 과학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과학을. 음란이란 말은 나 자신에게 모든 의미를 전부다 끌어 모으는 게 음란한 거예요.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그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는 거예요. 모든 의미가 나한테 쏠리는 게.

이 시대를 무슨 시대라 합니까? 과학시대죠. 그러면 이 과학시대에 제가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인간의 모든 노력과 과학적인 시도가 드디어 뇌과학으로 다 쏠립니다. 노벨상 받은 에델만이 지은 <신경과학과 마음의 세계>가 십자가마을 ‘신학과 철학’ 게시판 제55번에 있어요. 그 글을 보게 되면 이 사람이 어떤 주장을 하는지가 나와 있어요.

다이어그램을 한번 그려볼게요. ‘S' : 인간의 sometic, 촉각이에요, soma (몸, 신체)라 하는 게 있죠. 'V' : visual, 시각. 'A' : auditory, 청각. 이 청각, 시각, 촉각 감각이 인간 두뇌의 시상이라는 곳에 들어와요. 시상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게 되면 이 시상에서는 일단 이 감각, 일종의 외부세력이 안에 들어왔으니까 안의 세력에서는 이것을 무조건 반기지 않고 여기서 제어를 해요. 스톱. 거기서 멈춰라. 딱 스톱을 시킨다고요.

스톱을 해놓고 인간의 대뇌, 대뇌 중에서도 앞부분에 피질이라는 것이 있어요. 피질이라는 것은 인간, 영장류만 발달할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을 발달이라 하지 않고 진화라 하잖아요. 뭐든지 무조건 시간을 장악하려 하니까 자꾸 시간을 장악해서 발달했을 경우에는 시상에 들어오는 시각이 지금 기억에 있는 나라는 유기체에 유리하냐 불리하냐를 조정해가지고 ‘통과하라’는 허락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일단 시상에 들어왔던 것은 제어되어 있다가 BF(basal forebrain, 기저전뇌)라는 두뇌의 지점과 RF(reticular formation, 그물형성체)라는 지점에서 통과하라고 신호를 보냅니다. 두뇌 안에 보면 시상이 있어요, 밑에는 시상하부가 있는데. 시상에서 통과하면 올라갑니다. 올라가게 되면 후보감 S, V, A가 1차 감각으로 촉각(S₁), 시각(V₁), 청각(A₁)이 돼요. 그 지역은 대뇌의 두정엽 부분에 들어오는데 두뇌의 지도까지 그릴 필요는 없고요. 여기서 1차 감각으로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이 옆의 연합부분에서 이 세 가지가 연합돼요. 들어와서 연합이 된다고요. 그런데 허락이 떨어져야 돼요. 허락이 안 떨어지면 안 됩니다. 허락 떨어지는 방법은 시상이 억제되어 있으니까 억제하려는 이 시상을 억제해서 억제의 억제는 통과가 되어버리니까 연합부분에 들어와요. 들어오면서 기존에 있던 기억과 이 새롭게 들어온 감각 사이에서 비교해서 어느 것이 유기체에 유리하냐, 불리하냐를 따져서 받아들일 것인가, 안 받아들일 것인가를 기존의 기억이 결정하는 거예요.

중간에 어려운 것, 전문적인 것은 다 생략하고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기존의 기억이 결정한다. 이 기존의 기억이 대뇌 피질 가운데 전대뇌피질이라 해요, PFC(prefrontal cortex)라고 표현하는데 전대뇌피질에서 이걸 결정한다고요. 전대뇌피질에서 결정하는 이 기존의 기억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self', 자아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자아에요.

그럼 이 자체를 보면서 여러분들이 뭘 느낍니까? 이 구조에서 인간이 자기 자아, self를 자기가 부정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부정 못하죠. 그게 결정적인 거예요. 이게 결정적인 겁니다. 좀더 나한테 유리한 것, 유리한 것, 유리한 것뿐이에요. 그런데 인간의 몸이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태어났어요. 이것은 못 고칩니다. 고칠 수가 없어요. 그냥 죽어야 돼요, 이것은. 율법의 저주로 죽어야 돼요.

죽어야 되는데 죽는다 해서 숨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활용되어야 돼요. 이것이 활용되어야 된다고요. 새로운 감각이 두뇌에 들어왔을 때, 기존의 기억이 새로운 감각과 기존의 기억을 비교해서 더 유리한 쪽으로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하는데 여기에 해로운 감각은 거부당하잖아요. 내 기존 기억이 일종의 텃세를 하는 거예요, 텃세를. 텃세를 하면 해롭다고 여기는 것은 들어올 수가 없죠.

그렇다면 이 자아의 적은 누가 정합니까? 본인의 기존 기억이 정하겠죠. 그런데 이 기존의 self가 내가 나 되기 전에 무엇에 둘러싸였어요. 어디에 둘러싸였느냐 하면 가정 환경에, 사회 환경에 둘러싸였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의 세례를 받은 거예요. 이미 악마의 세례를 받은 거예요. 결코 인간은 혼자가 아닙니다. 이 세상 중에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서 죄의 세계에서 이미 세례를 받은 상태에요. 악마의 용병이고 악마의 앞잡이가 된 거예요. 배후에 있는 악마의 용병이에요.

그런데 이 자아의 적은 내 생존에 훼방되는 것, 손해가 되는 것은 전부다 적이 되겠죠. 그러면 예수님이 하는 모든 말씀은 본질상 인간에게 적이 되겠습니까, 우호적이 되겠습니까? 적이죠. 적입니다. 적이니까 self를 중요시하는 이 세계에서 가짜 예수를 만들어버려요. 가짜 복음, 가짜 성령, 가짜 예수를 만들어버려요. 고린도후서 11장에.

그것을 만드는 이유가 자아를 긍정하기 위해서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아를 안 다치게 하기 위해서 내 심성이 안 다치기 위해서.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외부로부터 ‘위로받기 위해서’. 나 좀 예뻐해 줘. 나 외로워서 미치겠어. 나 예뻐해 줘. 사랑해 줘. 위로받으려고 해요, 위로받으려고.

왜 그러느냐 하면 어릴 때부터 이미 이렇게 길을 들였어. 아이고, 내 새끼야, 내 새끼. 어릴 때부터 우리는 이미 부모로부터 일방적으로 돌봄과 사랑을 받았어요. 그리고 뭐 아빠, 엄마가 좀 고함지르면 나 엄마, 아빠 때문에 트라우마 생겼어. 트라우마는 또 어디서 배웠는지. 내 영혼의, 마음의 상처가 생겼어, 이런 식으로. 형은 빵 큰 거 주고 나는 작은 거 주고. 왜 누나는 세뱃돈 만원주고 나는 오천원밖에 안줘, 이런 거.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나한테 이익이냐, 손해냐.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노래 있죠. 이미 그것은 마귀로부터 그런 훈련을 받았어요. 마귀는 마귀인 것을 하나님 쪽에서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거예요. 너도 신이라고. 그 마음을 그대로 인간이 수용한 거예요. 죄가 새끼 친 거예요. 죄가 죄를 낳은 거예요. 죄의 자식이니까. 진노의 자식이니까.

이런 이야기를 예수님 오지 않으면 몰랐죠. 그러니까 대표적인 것, 불교 같은 거 생각해보세요. 불교, 천주교 특징이 뭡니까? 두 자로 하면 인권. 인권주의, 인간의 권리주의. 기독교도 못지 않죠.    

자,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과학은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 이 정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이 두뇌 세포의 기능입니다. 세포 내에는 약 만 개의 단백질이 있다. 그러면 여기서 과학이 끝내겠어요? 아닙니다. 과학은 아까 원칙이 보이는 것을 탐구하는 거죠. 눈에 보이는 거니까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WHAT?! 이게 뭐지? 이게 뭐지? 더 세세히, 더 자세히. What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How. 어떻게 작용하지? 어떻게 기능하지? 조사하는 거예요. 그 조사한 것이 생물학을 벗어나요. 생물학에서 더 벗어나게 되면 물리학이 되는 겁니다.

물리학이 되면 원자, 원소, 이온, 금속 여러 가지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 그들이 물리학에서 밝혀낸 인간의 물질, 실체, 실체의 실체는 우주가 전자와 양성자로 되어있다. 양성자라 하는 것은 수소(H)에서 전자가 떨어져 나가서 H⁺가 되는 것. 전자는 마이너스(-)거든요. 중성인 수소(H)에서 마이너스(-)가 떨어져나갔으니까 H⁺가 되고 전자는 e⁻가 되고.

그러니까 이 우주는 수소로 시작해서 92개의 자연 속에 있는 모든 원소와 인간이 만든 원소까지 다 합쳐서 총 118개의 원소는 모든 것이 수소의 양성자로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전자는 가만히 있지 않고 왜 떨어져 나가는가. 태양에너지, 빛이 오게 되면 떨어져 나간다고요.

그러면 인간은 무엇이냐? 전자교환시스템. 끝. 이게 인간이에요. 현재 과학에 의하면 인간은 전자교환시스템입니다. 어떻게 전자교환시스템이 되느냐 하면, H(수소), C(탄소), P(인), Si(규소) 이 모든 것들은 원자거든요. 원자 또는 원소라 합니다. 그런데 H가 전자 1개를 잃어버리면 H⁺가 되고 C는 (전자 4개를 잃어버려서) C⁺⁴가 됩니다. P도 P⁺⁴, Si도 Si⁺⁴. 이렇게 전자를 잃어버린다고요. 그러면 돌아다니는 전자가 있겠죠.

전자가 돌아다닐 때 무슨 변화가 일어나요. 전자가 중성이 되어버리면 +,-없이 안정화되거든요. 그런데 이 세상은 안정됨이 없이 흔들리니까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전자가 교환되는 transmission (전달)체제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가장 정교한 시스템이 인간이에요. 가장 정교한 시스템이 인간인 거예요, 인간.

그러면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수소(H)밖에 없는 여기에 산소(O)가 등장해요. 그럼 H₂+O=물(H₂O)되죠. 또 탄소(C)하고 산소(O)가 결합하면 C+O₂=이산화탄소(CO₂). 물이 대양이고 이산화탄소가 대기이고 그 다음에 산소(O)하고 규소(Si)가 결합되면 이산화규소(SiO₂)가 되고 이게 대륙, 땅이에요. 그리고 철(Fe)과 산소(O)가 결합되면 지구의 core, 중심이 돼요. 그러니까 세상 모든 것은 산소와 수소의 결합으로 되어 있다. 왜? 과학은 실체의 실체니까.

그러면 인간의 몸은 무엇으로 되어 있나. C+H₂O= 인간의 몸이 되는 거예요. 탄소와 물이 결합하면 C₆H₁₂O₆, 이것이 인간에게 영양분을 제공하는 포도당이 되는 거예요. 포도당이 여러 가지 당류가 되어서 인간의 몸을 이루거든요. 그러니 인간의 몸조차도 전부다 분해하게 되면 산소하고 탄소, 원소로 다 이렇게 분해가 되는 겁니다.

개나리가 노랗죠? 개나리가 왜 노랗습니까? 두뇌가 착각을 일으켜서 노란 거예요. 인간의 두뇌에는 +,- 전자기밖에 없는데 어느 파동의 권역에 왔을 때 노랗다고 착각을 하는 겁니다. 인간의 시세포에는 간상세포, 원추세포가 있어서 막대세포(간상세포)는 밝음과 어둠밖에 모르고 원뿔세포(원추세포)는 빨강, 녹색, 파랑밖에 몰라요. 노랑이 없어요. 없는데 인간의 두뇌가 착각을 일으켜서 노랑색을 만들어내요. 노랑색이라는 게 이 세상에 없다고요.

이 세상은 빛의 파동밖에 없지 노랑색이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개나리를 봐도 인간이 볼 때는 노랑색이지만 원숭이가 볼 때는 다른 색이에요. 개가 보면 색깔도 없어요. 그리고 어떤 동물은 인간보다 더 넓게, 가시광선 바깥에 있는 것도 박쥐같은 것은 보인다고요.

그러니까 인간이 보는 것은 환상밖에 없다. 모든 것은 착각이고 환상입니다. 그런데 그 환상과 착각을 보는 그것을 인간은 self라 해요. 자아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과학은 거의 종교에요. 내가 보기에 과학은 거의 종교입니다.

SiO₄가 -4가거든요, (SiO₄)⁻⁴의 전자 4개가 양성자 H⁺에 전자를 주어 다시 H를 얻게 되면 여기서 나오는 H₄SiO₄,이것을 규산이라 하고 (CO₃)⁻²가 다시 H를 만나게 되면 H₂CO₃,탄산수가 되고 (PO₄)⁻³가 H를 만나게 되면 H₃PO₄,인산이 되고 (SO₄)⁻²가 H를 만나게 되면 H₂SO₄,황산이 되죠. 이게 독이에요.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

인간이 과학을 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살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무엇이 해가 되는지 안 되는지 지가 구분해서 어째든 간에 이 자연에 대해서 적응해서 살아남으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그런데 자연은 잔인해요. 자연은 잔인하고 대자연은 참 잔인합니다.

코로나 보세요. 코로나에 무슨 선이 있고 악이 있고 예수 믿는 자, 안 믿는 자 구분이 있습니까? 마스크 쓰는 자와 안 쓰는 자의 차이뿐이지, 아무 것도 없거든요. 자연은 인간의 인품이라든지 그런 걸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마치 주님을 닮았어요. 네가 이 땅에서 장로 되었나 집사 되었나 그런 거 묻지도 않아요. 그냥 죽입니다.

유월절 날 천사가 왔을 때 천사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걸 저는 일본 지붕타고 돌아다니는 사무라이 닮았다고 표현하는데 닥치는 대로 다 죽여 버려요. 왜? 하나님은 잔인하니까.

노아 홍수 때 누구를 살렸습니까? 다 죽여 버린 거죠. 노아를 살린 게 아니에요. 노아 방주를 살렸죠. 그 안에 태웠으니까. 노아를 살릴 것 같으면 아예 노아한테는 물이 안 들어와야죠. 물이 딱 노아의 발까지만 와야죠. 노아도 죽여 버리고 다 죽여 버려요.

인간은 진화되었다고 하는데요. 우주의 역사가 137억년, 지구의 역사 45억년 이렇게 하는데...... 참, 이 과학 하는 사람들이 몰라도 너무 몰라요. 지난 수요설교 때 했듯이 과학이라는 것은 새로움은 없습니다. 과학은 베끼기+베낀 것 또 베끼고 베낀 것 또 베낀다 했죠. 그 대표적인 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DNA.

아버지의 DNA가 아들에게 50% 갑니다. 형제간에 50%가 가요. 부모와 자식 간에는 완벽하게 50%이고 형제간에는 50%에 환경요인이 가해져서 똑같이 나눠져요. 아시겠어요? 형제간에도 안 같아요, 50% 있더라도. 사촌들은 1/8을 가집니다. 12.5%이렇게 돼요. DNA가 살아남기 위해서 계속 자기복제를 하는 거예요. 인간이 주인공이 아니고 안에 있는 DNA, 유전자가 주인공이라는 겁니다. 왜 그렇게 되는가? 양성자, 전자가 서로 주고받는 변화, 에너지가 결합되다 보니까 DNA라는 아주 이상한 괴물이 등장해가지고 이 DNA를 복제하는 것으로 이 대자연은 그렇게 선택했다는 거예요.

모르면 모른다고 해야 되는데 과학자들은 모른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계속 추구를 해요. 물 속에서 H와 OH(수산화기)가 해리된다고요. 해리되고 모이고 해리되고 모이고. 전자를 주고받고 주고받고 돌아다니고 주고받고 돌아다니고. 이 세상의 유일한 변화의 이유가 여기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수소 전달체에 불과하고.

그래서 해밀턴이라는 학자가 1965년도인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종족보존은 없다. 종족보존이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종족보존은 없고, DNA의 이기적 유전자만 있다’ 라고 해밀턴이라는 학자가 이야기했고 십몇 년 후에 이걸 도킨스라는 사람이 정리해서 이야기한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이 나와요.

그래서 인간이 이타적인 존재는 이 세상에 없어요. 이타적으로 보이는 것은 DNA가 이기적으로 하는 방법 중 하나가 이타적으로 보일 뿐이지, 인간 자체는 DNA의 종이기 때문에 절대로 이타주의라는 것이 없어요.

그리고 대자연의 진화의 법칙에 의하면 자식을 사랑하는 그것이, 내 DNA가 있는 쪽을 밀어주는 것이 내가 그러고 싶은 게 아니라 내 속의 DNA가 그러고 싶어서 내 자식한테 모든 것을 물려주는 겁니다. 그래서 자식 가운데서 능력 있는 자식, 노는 자식 말고 능력 있는 자식에게는 더 사랑을 줘서 죽지 않도록 오래 살도록 보호를 해주고 말썽꾸러기 자식은 나가 죽든지 말든지 나는 모르겠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자, 이렇게 아시고 앞부분을 다시 해봅시다. 주님께서 심판의 능력이라 할 때 이 심판의 능력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바로 창조의 능력에서 나왔어요. 창조의 능력에서 나왔기 때문에 심판의 능력이라는 것은 곧 하나님의 창조행위에요. 더러운 것에서 의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마귀 속에서 구원을 끄집어내는 방법이 그 방법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주님의 심판의 능력을 위해 계속해서 죄가 터져 나와야 돼요. 무저갱에서 악마가 계속 일할 수 있도록 자꾸 허용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저는 이걸 가지고 ‘스파’ 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스파 아시죠? 아 뜨시다. 뜨거운 물이 계속 나와야 돼요, 뜨거운 물이.

실제로 바다 가운데에 지각이 있는데 지각에서 주름진 게 나와요. 주름진 이걸 가지고 pillow basalt라고 합니다. 이게 현무암이거든요. 베개 같은 현무암에서 꾸역꾸역 마그마가 스파처럼 나와가지고 대륙을 계속 밀어올리는 거예요. 그래서 대륙은 무거워서 올라가는 게 아니고 가벼워서 올라가는 거예요. 대륙의 비중은 2.5인가 그렇고 지구의 평균은 5.1이기 때문에 대륙은 가벼워서 밀려서 올라가는 거예요. 아까 CO₂가 인간의 물에서 나왔거든요. 그래서 인간은 물을 통해서 전자교환시스템이 된다. 모든 것을 원소로 다 분해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교회에서 말하는 윤리라는 것 있잖아요. 윤리라는 게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이죠.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무엇이 선입니까? 나를 보다 오래 살게 만들면 이유 없이 그건 선이 되는 거예요. 이유 없이 선이 되는 거예요. 만약에 나를 일찍 죽게 만들면 이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악이 되는 거예요. 본질상 그래요. 나의 DNA가 그걸 느끼는 거예요, 내가. 거부 못하고 내가 느끼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어떻게 돼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교회나 교단을 만들어서 전부다 변개(變改)해야 돼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변경시키는 거예요. 성경을 몇독 천독 했던 간에 모든 것을 변경시켜서 이 말씀 지켰더니만 내가 천국 간다, 내가 오래 산다는 쪽으로 다 바꾸어놓는 거예요. 모든 단체가 다 그래요. 교회부터 해서 파생된 모든 교단들이 다 그래요. 신천지고 구천지고 간에 전부다 그렇다니까요, 이건. 어느 단체, 뭐 구원파니 무슨파니 전부다 마찬가지에요.

자기를 부정하는 해석이 안 나온다니까요. ‘나는 죽어도 마땅합니다’ 가 안 나와요, 이게. 나오지를 않는다고요. 교인들이 교회 올 때 마음가짐이 뭐냐 하면 나 과거에 완전히 망친 것 어떻게 보상해줄 건데요? 이런 마음가짐으로 온다고요, 이런 마음가짐으로. 그럼 목사가 처방을 해주죠. 바짝 엎드려 기도하세요. 마음을 낮춘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럼 바짝 새벽기도 나오고 성경 있는데 왜 씁니까, 이걸 가지고 새벽기도 나와서 다 쓰고 주여,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이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시키는 짓이에요. 가슴을 치면서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왜 그런 짓해요? DNA가 그래요, DNA가. 본인도 그걸 못 말려요. 말릴 수가 없어요. 본인이 본인한테 마귀 들렸는데 어떻게 합니까. 마귀가 그 일을 시켰는데 어떻게 되겠어요. 자아, self는 아까 뭐라고 했어요? 기억이죠, 기억. 그래서 자기가 나다움, 나의 절대성에 충돌되게 되면 여기서 나오는 것이 발작증세, 분노, 화. <펜트 하우스> 같으면 싹 쓸어버리는 거예요. 싹 쓸어버리는 거예요. 너 죽고 나 죽자! 분노.

이게 모든 인간에게 다 있어요. 타고난 모든 인간에게 다 있습니다. 이런 인간이 뭐 반성을 하고 회개를 한다고요? 윤리적으로 뭐 도덕적으로 한다고요? 이 짓 왜 합니까? 회개 왜 하는데요? 죽으려고 합니까, 살려고 합니까? 살려고 하죠.

그러나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2장에서 뭐라고 하십니까? 자기 생명을 뭐하라했습니까?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 했죠, 미워하라. 아무도 못하죠. 그러니까 주께서 부활의 능력으로 오신 거예요. 부활의 능력으로 오게 되게 되면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고 오늘 저녁에 맛있는 거 잡수시기 바랍니다. 미운 자식이기 때문에 이거 먹고 빨리 죽으라고 맛있는 걸 먹는 거예요.

한푼 두푼 아끼는 게 아니고. 전도서 말씀대로 어차피 헛되고 헛된 게 인생인데 이왕 갈 거 너무 애써서 아끼지 말고 그냥 먹고 뒈져라. 너무 심각하게 여기지 말고 즐겁게 포도주 마셔가면서, 술 먹으란 뜻은 아니겠지만, 즐겁게 살아라. 이게 그나마 이 인생 살면서 주어진 너의 할당된 복이니라. 분복(分福)이라 했어요.

제발 자기 인생을 농담처럼 여기라 이 말이죠. 심각하지 않아요, 우리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내가 나를 살릴 방법이 없습니다. 이게 기쁜 소식이에요.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율법의 책임 묻지 않죠. 내가 나를 살릴 방법이 없죠. 남은 것은 뭐냐? 즐기는 것밖에 없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도됨이 주님의 증인됨이 이 세상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어떤 경우라도 심각하지 않고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데 심지어 죽을 수도 있음을 오히려 즐길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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