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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23 23:27:13 조회 : 347         
추상성 고린도전서 7:30 210723 이름 : 이근호(IP:119.18.78.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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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림(IP:124.♡.211.180) 21-07-25 05:26 
광주강의20210723a 고린도전서 7장 30절(추상성)-이 근호 목사

211페이지, 위에서 7번째 줄 할 차례입니다. 지난번에 위에서 6번째 줄에 “인간이 짐승의 지배 밖으로 따로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자, 이런 말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지금 문장이 다 어렵거든요, 함축한다고. 풀이하면 너무 양이 많아지니까 함축해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짐승을 모르면 시작도 하지 않았다.’ 짐승을 모르면 신앙 시작도 안 했다는 거죠. 왜냐하면 인간이 극단적으로 사유(思惟), ‘사유’라는 말이 어려우니까 생각 또는 연구 또는 탐색 또는 탐구하게 되면 자신의 대립물과 일치됩니다.

선과 악에 있어서 인간은 자기를 선한 존재로 간주하고 선(善)쪽으로 도망치잖아요. 도망치고 보다 더 선, 궁극적인 선, 선, 선, 선하고 착한 진리, 옳게, 바르게 산다, 정의롭다, 하고 달려가면 거기에서 짐승을 만나요. 악(惡)과 일치돼요. 악마하고 일치된다고요, 인간이 탐구하고 탐색하면, 연구하게 되면.

그것은 인간이 홀로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극단적으로 생각하고 연구하고 탐색하고 탐구할 때, 대표적인 사람이 가룟 유다죠, 자기 자신의 힘으로 구원하려고 할 때 자기를 선하게 구원하겠다는 이것을 통해 바로 내가 곧 구원의 대상이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을 나중에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구원되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한번 써볼게요. ‘나는 구원되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이것을 자각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짐승을 모르면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 열심히 구원에 대해서 한국 교회에서 가르쳐 준 것 또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다 했는데, 이것을 달리 이야기하면 모든 율법을 다 지켜 준수했는데, 사울에 대한 이야기죠, 모든 율법을 나한테 적용시켰는데, 이것은 바리새인 이야기죠, 그 바리새인들의 모든 노력은 그들이 바로 자기가 악마의 자식 또는 악마를 섬기는 존재라는 것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의 실패가 아니냐? 이렇게 되면 구원은 물 건너간 것이 되지 않느냐?’ 고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악마 속에서의 구원’이에요. 구원 또는 구출 다른 말로 하면 건짐. 이제 이해되시죠? 구원을 할 때 ‘나 얼추 멀쩡합니다’ 이런 식으로 구원 안 시켜요. 악마의 속에 들어가 줄 때 악마의 위세, 악마의 힘, 그 힘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파묻혀버리니까.

자기가 안 되는데 자기가 할 수 없음을 알 때 그 때 주님께서 악마의 세계 속에 있는 자기 백성을 찾아와서 건져내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은 순전히 누구의 솜씨가 되죠? 주님의 솜씨가 되죠.

이것을 저는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이게 바로 ‘깊이 있는 감사’에요. 오늘 제목을 <깊이>라고 하고 싶긴 한데, 깊이 있는 감사. 조금 뭐 하나님이 생색내서 기적 줬다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깊이 있는 감사. 내가 생각한 그 이상의 깊이, 거기서 감사가 우러나와야 돼요.

이 감사는 나의 선에서 처리할 수 없는 감사.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조절되지 않는 감사. 설명되지 않는 감사. 조절할 필요가 없는 감사. 내 선에서 처리가 안 되는 감사. 이런 말이 어렵기 때문에 강의 초반이지만 제가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이 문제가 오늘 전반적인 짐승의 정체를 밝히는 데에 필요해서 제가 문제를 냅니다.

밤에 주무실 때 방에 들어가 주무시잖아요. TV는 밖에 있고 방에 들어가서 침대에서 주무시는데 새벽에 갑자기 바깥 거실이 약간 환해지면서 TV가 저절로 켜지면서 TV소리가 날 때, ①방문을 열고 나가 본다, 보기는 둘 중 하나에요, ②문을 꼭 잠근다, 여기에 하나 더 보탠다면 아내보고 네가 나가보라 한다, 지는 안 나가고 네가 좀 나가볼래? 이렇게 할 때 자, ①번 ‘방문을 열고 나가 본다’ 일까요, ②번 ‘문을 꼭 잠근다’ 일까요?

현관문으로 들어왔다는 인기척은 없고 이곳은 고층이기 때문에 도둑이 여기까지 오진 못하고 그냥 저절로 불이 켜지면서 TV소리까지 나오면 이것은 100% 귀신입니다. 귀신이 있는 거예요. 100% 귀신인데 귀신이 바깥에서 혼자 TV 켜놓고 히히덕거리면서 놀고 있을 때 귀신을 맞으러 방문을 열고 나가야 됩니까, 아니면 방문을 꼭 잠가야 됩니까?

자, ③번 할게요. ③주님의 지시를 따른다, 이거 몇 번입니까? 보통 사람은 ③번 이야기하죠. 제가 왜 정답 ③번을 언급하느냐 하면 이 ③번을 선택할 때 주님의 지시를 따라도 ①번 아니면 ②번, ②번 아니면 ①번 둘 중 하나에요. 그러면 ③번 취지가 의미 없어져요. 주님의 지시를 따른다 할 때 제가 ③번 이 항목을 집어넣은 이유는 ‘네가 귀신이다’.

지금 제가 211페이지, 짐승 이야기, 악마 이야기를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귀신 따로 있고 내가 나는 인간이라고 우길 때 그럼 그것은 짐승을 이기지 못해요. 짐승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짐승을 이기는 방법은 내가 나를 문제 삼지 않아야 돼요.

정말 이거 중요한 건데 한번 적어볼게요. ‘악마를 이기는 방식은 나를 문제 삼지 않아야 된다’ ①번 보세요. 방문을 열고 나간다는 것은, 귀신하고 어떻게 싸우지? 십자가 들고 싸울까, 빗자루 들고 싸울까? 귀신 저거랑 누가 센 지 한번 해봐? 이렇게 되거든요. 승부욕이 갑자기 발동해서 나도 오랜만에 귀신 한번 만나보자. 귀신을 카메라로 찍어서 찍은 거 유튜브에 올릴까? 이렇게 되고.

②번은 아이고, 귀신 적당히 놀다가겠지. 우리는 여기 꼭 숨어서 문을 굳게 잠그고 벌벌 떨고 있는 거죠. 요한복음 20장 나오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하고 난 뒤에 제자들끼리 모여가지고 문을 굳게 잠그고 있잖아요. 주님은 문 열지도 않고 쓱 들어와 가지고 잘 있었냐? 뭐 이렇게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평안할지어다. 성령 주시고 하잖아요.

나를 문제 삼지 않아야 된다는 이 말은, ①번이나 ②번이나 ‘살고 보자’가 있어요, 살고 보자. 나는 무조건 살고 보자는 거예요. 내가 살고 봐야 될 그것이 ‘나’라고 하는 순간 우리는 나를 문제 삼지 않아야 되는데 또다시 나를 문제 삼아버린 거예요. 귀신 천지라도 나는 살아야 되겠다. 내가 내 것을 지켜야 되겠다. 이러면 생전 가도 귀신을 못 이깁니다.

③번을 보게 되면, 주님의 지시를 따르면 지금 이 거실에 있는 귀신이나 나나 둘 다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의미는 주님이 계시다는 그것만 의미가 있어요. 주님의 계심이 악마의 세계든 천국이든 지옥이든 전부다 통치하고 있고 통제하고 있음을 안다면 주님의 통제 앞에서 따로이 나는 살아야 되겠습니다, 라는 그것조차도 탐심이고 욕심이 되는 거예요.

주님의 지시를 따라서 나갈 수도 있고 아이, 귀찮아 죽겠다 그냥 자자, 이럴 수도 있는데. 주님의 지시에 의해서 주께서 우리 집 거실에 귀신을 보낸 거예요. 귀신을 보내서 춤을 추고 난리를 치게 한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에 대해서 이건 ‘우리’ 집인데, 하고 다시 우리 집이 되어버리면 이건 또 내 문제로 문제 삼는 거잖아요.

아이 뭐 놀다 가겠지, 주께서 귀신 보냈는데 나중에 알아서 다락문이나 꼭 닫고 나가면 좋겠다. 쥐 들어오면 안 되니까. 그렇게 초연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살고자 하고 ‘버틸 때까지 한번 버텨보겠다’가 되어 버리면 점점 더 귀신의 존재가 무서워지는 거예요, 귀신의 존재가. 오늘은 귀신 이야기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 짐승, 악마에 대해서 또는 귀신의 오야봉, 대장에 대해서 이 교재가 언급을 했는데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온다는 이야기가 그 뒤에 나와 있습니다. 아까 악마를 이기려면 나를 문제 삼지 않아야 된다 했죠. 주님의 지시에 따라야 되죠. 주님의 지시를 안 따르면 귀신이나 나나 똑같은 처지에 있어요. 주님과 연락이 안 되는 것은 똑같은 입장이에요.

그러면 주님이 짐승을 알듯이 우리 성도도 알아야 되고, 우리가 일하는 것이 나의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 되려면 아까 나를 문제 삼지 말아야 된다 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할게요. 개체성은 안 돼요. 개체성은 안 되고 총체성 속에 놓여 있겠죠.

개체성과 총체성의 차이점은 개체성은 선풍기입니다. 총체성은 에어컨이에요. 선풍기는 켜놓고 한 방향으로만 돌려버리면 자기는 시원한데 다른 사람은 하나도 안 시원해요, 선풍기 바람이 자기한테만 오기 때문에. 그런데 에어컨을 보세요. 다 시원하잖아요, 다 시원해요.

총체성 속에서 개체성 또는 개별성은 찍-하고 그어버립니다, 개별성. 자기를 문제 삼지 않는 거예요. 총체성의 혜택, 에어컨의 혜택 안에 우리가 놓여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바로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주님의 지시에 따르는 총체적 현실 속에 우리가 놓여 있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개별적인 것은 안 됩니다. 개별적인 것은 스스로 자기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개별자가 되어버리면 개체성이 되어버리면...... 예를 들어 선풍기가 되어버리면 선풍기는 하나인데 집에 애가 5명이다, 이럴 때 제일 맏이가 선풍기를 차지해버리면 동생들이 가만히 있습니까? 선풍기 머리를 돌리겠죠. 머리를 돌리든지 맏이를 밀어내고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해서 바람을 쐬든지 하죠.

개체성은 경쟁성이에요. 경쟁성은 항상 승리감을 얻고자 노력합니다. 인간은 승리감을 취득하는 재미로 인생을 살아가요. 항상 지기 싫어해요. 항상 이기고 싶어, 모든 것들을. 모든 것을 이기고 싶어요. 승리하고 싶은 이유가 본인 개체에서 시작한 겁니다.

아까 짐승을 모르면 아직 신앙생활 시작도 안 한 거라 했죠. 이게 참 어려운데 개체성을 숫자로 하면 1이 돼요. 1이 된다고요. 그런데 전에도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이 1은, 영어로 one이죠, 1은 누구한테만 해당되느냐 하면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거예요. 놀이동산에서 빙빙 회전하는 놀이기구에서 중간에 1은 구심점이죠, 구심점은 이미 주님이 차지했어요.

골로새서 1장 15절-16절 얘기를 지금 제가 드리는 거예요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어떤 경우라도 악마라 할지라도 세상의 권세자들이나 보이는 것들과 심지어 보이지 않는 천사들, 어젯밤에 거실에 다녀간 귀신마저 전부다 누굴 위해서 만들어졌습니까?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이미 구심점은 확정 났어요.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이 개체성을 자꾸 강조하고 개체성에서 인간들이 승부를 자기 자신이 이겼다는 것으로 자꾸 끌어 모읍니다. 이해되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밀어붙일 거예요. 어려우니까 자꾸 글씨를 쓰게 됩니다.

‘나는 지난날에 본 것으로 구성 된다’. 지금의 ‘나’라고 하는 것은 살아오면서 지난날에 자기가 봤던 것 있잖아요, 그 봤던 것이 지금의 ‘나’가 돼요. 이것을 좀 더 살피게 되면 ‘나는 나를 안 본다. 나는 남을 본다’. 눈이 앞으로 달려 있으니까. 항상 남들을 보면서 그 남들의 집합체가 ‘나’가 되어버려요, 남들의 집합체가.

혹시 여러분이 동네에서 길을 가다가 우연히 동창생하고 비슷한 사람 만난 적 있죠? 그 때 만난 적이 있다는 말은 그 비슷한 사람 만나는 순간 자기 안에 구성되어 있는, 누적되어 있는 자아의 한 부분이 자극을 받은 거예요. 저 사람 내가 본 적 있다, 이거.

그러니까 인간의 자기 생각은 타인을 통해서 그때그때마다 ‘나’라는 것이 분발돼요. 분발되고 자극을 받아서 생기를 얻고 그런 겁니다. 한 번도 인간은 자기를 본 적이 없어요. 자기의 신체는 거울로 봤지만 한 번도 인간은 자아를 볼 줄 몰라요. 이 자아는 내가 봤던 남들의 요소들로 채워져 있어요, 이게.

‘당신은 누구십니까?’ 물으면 누구는 이렇게 하고 누구는 이렇게 하고 누구는 이렇게 하더라, 그런 이야기뿐이에요. 그러니까 아까 말씀드렸듯이 인간의 자아는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할 때 ‘이겼다’하는 이 자아 자체가 귀신이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무조건 어렵게 갑니다.

왜냐하면 승리가 되려면 타인이 나에게 패배해야 되잖아요, 맞죠? 그럼 승리가 되는 것이 나라면 나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습니까? 타인들의 집합체가 나잖아요. 그러니까 일방적으로 괜찮아 보이는 타인들을 나로 끌어 모아서 일방적으로 허접스럽고 되지도 않는 타인들과 비교하면서 괜찮은 타인을 봤던 그 경험의 집합체가, 아주 천하고 보잘 것 없는 것에 대한 승리감이 바로 ‘나’가 되는 거예요.

꼭 그렇게 어렵게 해야만 하십니까?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인간은 지금 귀신한테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는 이럴 수밖에 없어요. 귀신에게 놀아나고 귀신에게서 못 벗어납니다. 귀신은 인간에게 너는 무조건 이겨야 되고 무조건 살아남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럼 무조건 이기고 무조건 살아남을 때 그 살아남는 기준이 누구냐. 내 눈에 보이는 타인들, 남들이잖아요. 남들은 멀쩡하잖아요.

이것 한번 따져 봅시다. ‘아프면 바보 된다.’ 맞죠? 아프면 바보 돼요. 그런데 아프면 바보 된다고 누가 알고 있습니까?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저 사람은 멀쩡한데 왜 나만 저 활동을 못하냔 말이죠. 저 사람은 멀쩡한데. 그럴 때 바보라는 그 기준, 아프다는 기준은 누구하고 비교해서 생긴 겁니까? 남과 비교해서 생긴 거죠.

여고 동창생을 한 50년 만에 만났다. 그런데 50년 만에 만났으니까 한 70대라고 보면 70대인데 세상에 뭐 영화배우도 아니고 나이가 50대 같아. 패배감 느낍니까, 안 느낍니까? 도대체 내 인생 어떻게 살아온 거야? 같은 고등학교 졸업생인데...... 여고 졸업반 있잖아요, 누가 불렀는지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하여튼 여고 졸업반을 만났는데 젊어도 너무 젊었어. 그리고 얼굴도 확 피었어. 자식이 잘 됐는 모양이라. 말하는 것도 미국 세 번 갔다 왔다 하고 미국에 살고 있는 자기 딸 자랑할 때 어떤 패배감을 느끼는 거예요.

그런데 왜 패배감을 느끼느냐 하면 내가 그 여고 동창생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에요, 과거에. 과거에 본 적이 있거든요. 내가 과거에 봤다는 그것이 나도 모르게 내 안에 누적이 되어 있었던 겁니다. 내 자아를 형성한 거예요.

그러니 자아라는 것은 파편들이에요. 파편들이 그냥 대충 모아진 겁니다. 쌑 뻥튀기 있죠. 쌀을 엿 없이 그냥 뻥하고 튀겨버리면 그냥 주워 먹잖아요. 그게 하나하나 다 떨어져 있죠. 그런데 그걸 주머니에 담으면 하나하나 떨어진 것들이 다 내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그 안에 어디에도 자아가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봤던 타자, 남들의 경험들을 하나로 자아라는 유기체로 이어주는 것은 악마, 귀신의 힘들이에요. 귀신의 힘입니다. 그래서 귀신은 자아를 계속 고집하는 거예요. 고집해서 인생 한 평생 인간을 아주 힘들게 살아가게 해요. 네가 아는 네 동창생보다 네가 더 젊어야 되지 않느냐. 네가 아는 대학교 동창생보다 네가 더 잘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런 승리감도 없이, 그런 이겼다는 감각도 없이 인생 왜 사냐? 나 같으면 죽겠다.

맨날 비실비실 그렇게 가난하게 살아서 되겠어? 그럼 가난하다는 말은 부자에 비해 패배한 거죠. 그 가난하다는 것은 어떻게 알까요? 자기가 어릴 때부터 나이가 칠십 안 되어도 육십 안 되어도 세상에 열 살만 되어도, 요새는 더 내려갔어요, 일곱 살만 되도 못 사는 애하고 잘 사는 애를 자기들 세계에서 너무 깔끔하게 골라내요, 깔끔하게 골라냅니다. 맛있는 호텔 음식하고 그냥 집에서 하는 음식하고의 차이점을 깔끔하게 골라내요.

이거 누가 가르쳐준 거예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일곱 살 먹은 애가 7년 동안 보고 들은 게 있는 거예요. 보고 들은 것을 계속 집합하고 있습니다. 귀신이 그걸 자아로 조립시켜놨어요. 조립도 아니죠. 그냥 긁어모으면 돼요. 인간은 자아라는 게 없기 때문에. 자아가 없는데 자기가 봤던 그 과거의 본 것을 집대성해서 그걸 자아라고 한 뭉치로 쌀 튀겨놓은 것처럼 육체라는 푸대에 담아서 살아가는 겁니다.

제 말이 거짓말 같아요? 성경 한번 찾아봅시다. 고린도전서 7장 29절-31절까지 한번 누가 읽어보세요.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이 세상의 증상, 이 세상의 그러한 자국들, 그런 것은 다 소실되는 거예요. 마치 바람같이 없어지는 겁니다. 여기 29절, 30절 보면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는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는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고 했는데 ~처럼, as if, 사도 바울의 삶은 마치 ~아닌 것처럼. 아닌 것처럼 살아라. 아닌 것처럼 살려면 이 마귀의 나라, 짐승의 나라, 세상에서는 ‘아닌 게 아니야. 실제로 넌 그런 거야.’라고 ‘실제이다’에 대해서 대립의 요소가 있는 거예요.   

너 부자잖아. 너는 매매하고 있잖아. 너는 아내가 있잖아. 너는 울고 있잖아. 너는 웃고 있잖아. 너는 눈에 안 보여? 너는 지금 웃고 있어. 너는 울고 있어. 너는 아내가 있어. 너는 남편이 있어. 네 집은 부자야. 그게 다 있는데 사도 바울은 이것을 뭘로 바꾼다고요? 그게 ‘없는 것처럼’ 이에요, 없는 것처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지난 과거는 미래에 따라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악마가 자아를 만들어놨잖아요. 성령이 오게 되면 그 자아를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미래의 완성된 그 일에 의해서 그 자아, 타인들을 봤던 그 경험들을 주의 복음 위주로 다 바꾸어버리는 거예요. 그 바꾸어버리는 모습이 바로 ‘~아닌 것처럼’.

그럼 응용문제로 한번 바꾸어봅시다. 우는 자는 울지 않는 것처럼 됐죠? 미래란 시간이 종결된 그러니까 십자가죠, 마지막 최후의 심판 또는 천국에 도달했을 때라고 생각해봅시다. 미래에 의해서 우는 자는 울지 않는 것처럼 되죠. 울지 않는 것이니까 이것은 ‘웃다’도 될 수 있고 그냥 ‘안 운다’도 될 수 있는데 웃었을 때 웃었잖아요, 그럼 그 다음 뭘로 바뀝니까? ‘웃지 않는 것처럼’으로 바뀌는 거예요. 그럼 ‘웃지 않는 것처럼’은 ‘우는 것처럼’으로 또 바뀌는 거예요.

이것은 짐승으로 굳어진 자아를 완전히 쪽쪽 다 찢어버리는 거예요, 전부다. 거기에 전부다 빈틈을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공백, 빈 자리. 자아에다가 빈 구멍을 만들어버린 거예요. 총 맞은 것처럼. 팡팡 총 맞은 것처럼. 하나의 단일체가, 개체가 되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개체 이야기, 아까 했던 것 다시 복습해봅시다. 개체가 되면 왜 문제입니까? 승부에 돌입돼요. 개체를 보면 승부에 돌입되고 개체의 특징이 과거적이에요. 과거의 나, 내가 아는 과거 때, 지금 내가 이런 식으로 살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정말 내가 뭐하고 사는지 모르겠다. 과거의 입장에 준해서 현재를 바라보는 그것을 무엇으로 바꾸느냐 하면, 미래의 관점으로 봐서 자아가 내 손에 달려있는 게 아니고! 주님의 지시에 따라서 그때그때 ‘달라요’, 그때그때 전부다 재조정되고 재편되는 겁니다. 재편 또는 재편성. 모든 것은 그때그때 재편성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과거에 내가 알던 것을 기초로 해서 미래를 내가 개척해 나가야지, 가 아니라 성령을 받은 성도는 네가 알지 못하는 미래를 위해서 주님께서 너로 네가 손 댈 수 없는 그 자아를, 주님이 마귀로부터 이겨낸 그 위세로서 복음을 위해 전부다 그때그때 구체화되지 못하게, 자아를 ‘이게 나다’하지 못하도록 조정에 나서시는 거예요. 그래서 울 때도 있으면 웃을 때도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면 사랑할 때도 있고 잘 지워질 때가 있으면 지워지지 않을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고 사랑할 때가 있으면 여기서 그 다음 문제, 주체는 누구입니까? 개체의 반대말은 주체입니다. 주체, 지배권 또는 주도권. 나의 육신에 대한 주도권은 누구냐 이 말입니다. 개체는 이름이 있어요. 주체는 이름이 없고 신분이 있고 역할이 있죠.

그럼 이름은 누가 차지하느냐. 우리 주님이 주의 이름으로 이 개체를 사용합니다. 그러면 이 이름은 이름, 이렇게 쭉 그어져요. 우리의 이름은 쭉 그어져 없애버려요. 이름은 어디서 왔는가. 타인과 구별되어서 나만의 개성 있는 인생을 계획하기 위해 이름을 짓는 겁니다. 그래서 이름은 지문처럼 같은 이름이 있으면 좀 곤란하죠. 같은 이름이 있으면 기분 좀 나쁘고 그래요.

옛날 미국 팝송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제목이 란 노래가 있어요. ‘친애하는 존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노래가 있어요. 1965년도 노래입니다. 이 노래에서 여자가 먼저 부르고 있는데 남자가 같이 노래를 또 불러요. 이 노래가 참 재미있는 게 편지 내용이 뭐냐 하면, 멜로디도 나오면서 뒤에 나래이션도 나오는데, 여자가 남자에게 이제는 당신과 헤어져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참았는데 이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당신과 끝장내려고 이제 편지를 보냅니다. 라는 식으로 ‘Dear John Letter' 이 노래가 있어요. 나중에 쉬는 시간에 한번 들어보세요.

여자가 남자한테 편지로 통보하면서 나는 이제 새로운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어요. 당신과 동일한 이름을 가진 새로운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 노래가 끝나고 남자 노래가 나오는 게 아니고 여자 노래가 나오고 있는데 중간부터 또 남자가 여자한테 편지를 보내요. 아마 월남전에 갔던 남자인 모양이죠. 편지가 한 통 왔는데 전쟁도 잘 끝나고 거의 마무리되어서 당신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여자가 자기를 끝장냈다는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나 당신과 끝장내고 싶어, 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요.

보내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당신은 모를 거야. 나의 새로운 여자는 당신의 여동생이야, 뭐 이렇게. 여자는, 당신과 헤어지고 당신과 이름이 똑같은 남자와 새롭게 인생 시작할거야. 남자는, 당신하고 헤어지고 당신 여동생하고 결혼할거야. 이런 내용이에요. 노래도 2분 35초인가 그래요. 옛날 월남전에 John이란 이름의 남자들이 많이 갔답니다. 그걸 빗대어서 이야기하는데......                          

이름이라는 것은 개체성이에요. 개성입니다. 자, 그러면 아까 얘기 다시 하면 유일한 존재는 누구밖에 없다? 주의 이름이거든요. 주의 이름이 왜 중요하느냐 하면 이 세상에서 악마의 세력을 뚫고 구원받은 자는 주님밖에 없어요.

민간항공으로 100km 우주선에 2억인가 주고 티켓 얻어서 얼마 전에 올라갔잖아요. 다른 사람은 코로나 걸리고 있는데 지 혼자 우주선타고 100km 올라갔다가 10분 만에 2억 다 썼어요. 올라가서 너무 좋다고 무중력 상태를 즐기다가 내려왔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인간의 자아,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인간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는 것이 왜 필요하냐 하면 이것이 악마의 세력이고 인간은 악마의 세계에 완전히 파묻혀 있고 거기서 유일하게 탈출해서 진리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분은 주님밖에 없다는 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고만고만한 인간들은 전부다 자아에 미쳐가지고 오늘도 승부욕에 미쳐서 살아가는 거예요. 자기 이름의 명예를 걸고요.

John이라는 이름도 이름이지만 이런 이름도 마찬가지에요. 대한민국. 대한민국의 이름. 이름이라는 것은 모든 개체가 이것을 하나씩 붙잡아요. 대한민국의 이름을 걸고 하는 거예요. 대한민국에 속한 사람은 승부감을 다 갖는 겁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축구 예선전에서 뉴질랜드한테 1:0으로 졌죠? 난 결과만 봐요, 결과만. 뭐 대한민국 기뻐서 난리 났습니까? 축구 때려치우고 빨리 한국 들어 온나, 하겠죠, 성난 사람은.

이강인 뭐 하냐, 한 골 안 넣고, 이런 식으로 하겠죠. 그 많은 선수 가운데 이강인이 또 부각된다고요. 왜냐하면 이강인을 본 적이 있거든요. 걔가 못했다는 기억이 없고 참 축구 잘한다는 기억이 있단 말이죠. 그 기억을 살린다는 것은 내가 계속 나답게 되기 위해서 ‘이강인은 잘 한다’가 내 속에 섞여있어야 어제의 나가 계속 지금도 유지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강인 선수가 한 골도 못 넣고 팀이 져버리면 그 다음부터 나는 수정에 들어가야 되죠. 이강인 빼고 손흥민 들어가, 이런 식으로. 이것은 바깥의 수정이 아니고 누구의 수정입니까? 바깥의 현실이 나의 승부욕을 충족할만한 현실로 바꾸어지기를 요청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백날 바꿔봐야 이것은 구원입니까, 아니면 맨 그 자리에서 뜀뛰기하는 거예요? 그 자리에서 맴돌고 있죠. 이게 바로 보통 사람들이 오늘날 살아가는 삶, 일상이잖아요. 코로나 언제 끝나노? 코로나 끝나면 천국입니까? 코로나 10단계 돼라. 아니 코로나 끝나면 천국이에요? 왜 코로나 끝나기를 원하느냐. 코로나 있기 전에 마스크 안 썼던 그 기억이 내 자아를 장식하기 때문에, 자아 속에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빨리 만회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마스크 안 쓸 때 본인을 좋아했습니까, 그저 그랬습니까? 물어봅시다. 그저 그랬죠? 그런데 마스크 안 쓴다는 이것이 굉장히 좋다는 걸 언제 압니까? 바로 코로나 터지고 나니까 그때가 참 행복했었다고 느껴지잖아요, 그때가. 행복했었다고 느껴지죠. 그러니까 이게 좌절이잖아요. 

좌절인데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7장에서 말한 원리를 딱 적용시켜봅시다. 그러면 좌절하는 성도에게 뭐라고 합니까? 좌절하지 말라. 이미 좌절할 수밖에 없는 자아라는 것은 전제를 깔고 하는 거예요. 좌절할 수밖에 없고 조금만 좋으면 웃을 수밖에 없고 조금만 싫으면 울 수밖에 없는 것을 넣어놓고 as if, 마치 ~이 아닌 것처럼. 마치 ~이 아닌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돼요. 그래서 성도는 유령이죠. 실존하는데 실존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하는데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상당히 터무니없이 느껴지죠.

처음 강의할 때 제가 생각해도 난해했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처음 강의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세요. 짐승을 모르면 제대로 시작도 안 했다. 그 다음에 예시가 뭡니까? 방 침대에서 자고 있는데 바깥에 귀신이 와서 TV 틀고. 누가 틀었겠어요? 아무도 없는데, 문 안 열렸어요. TV틀어놓고 히히히 웃고 누가 했어요? 분명히 귀신소리다 이 말이죠. 그럴 때 밖에 나와서 귀신아, 물러가라! 할 거냐, 아니면 침대에 잘 거냐, 아니면 귀신이 있는 그조차도 주님의 지시다.

주님의 총체성 안에 우리가 놓여있는 거예요, 주님의 총체성. 주님의 지시가 그만큼 중요한 겁니다. 너무 중요하니까 한번 써볼게요, 주님의 지시. ‘주님의 지시 앞에서 나는 마치 없는 것처럼’. 이걸 아까 했죠. ‘나를 문제 삼지 말라’.

너 왜 그것밖에 못 살아? 너 진짜 그렇게 엉뚱하게 살 거야? 너 그렇게 죄 지을 거야? 너 똑바로 안 살아? 이렇게 자기를 문제 삼지 마세요. 문제 삼아버리면 과거에 의해서 과거에 생각했던 이상모델, 과거에 내가 갖고 있던 내 힘으로 그 이상모델과 나를 일치시키려고 흉내 내려고 애쓰는 거예요.

그런데 ‘나’라는 것은 없고 전부다 타인의 것이죠. 타인의 것을 가지고 내가 그것을 모방하려고 애쓸 때 결국 그 타인의 영역 바깥에 머물고 말지, 거기서 탈출할 수 없잖아요. 기껏 해봐야 남들처럼 살아가는데 그 누구처럼 살겠다는 그 누구하고 같이 그 인생 한번 살아보죠. 인생이라는 게 참 별 거 없다는 걸 대번 알 겁니다.

그래서 열왕기상 17장 14절에 보면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 이야기 나오죠. 여러분 잘 아시죠? 너무 가난해서 먹을 것 없어서 마지막 기름과 마지막 밀가루로 떡 해먹고 아이하고 같이 자살하려고 할 때 누가 나타납니까? 엘리야가 나타나죠. 참, 타이밍 한번 보소. 멋지지 않습니까, 타이밍이? 그 전날 이틀 치 남아있을 때 안 오고 마지막 타이밍이에요, 마지막.

그래서 계시의 투입은 그 순간에 네 인생 끝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의 투입은. 하나님의 은혜는 있는 것에다가 더 주는 것이 아니고 미래에 의해서 새로 시작하자. 지금까지는 네가 과거의 관점인데 미래의 관점에 의해서 새로 시작하자. 네가 왜 있느냐가 아니라 주님이 왜 계시느냐, 주님의 의미를 위해서 네가 쓰여지는 거예요. 주님의 존재 때문에 주님 존재에 필요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 마치 있는 것 같이, 소멸되지만 있어야 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 타이밍 맞춰서 오시는 거예요. 맞춰서 왔습니다.

열왕기상 17장에 있는 의미, 결론은 이렇습니다. ‘모든 그릇을 다 치워라’. 모든 은혜 받는 그릇을 다 치워 버려야 돼요. 열왕기상 17장 14절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6절,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되어있죠.

동네 그릇이란 그릇은 다 내놓으니까 주께서 밀가루 다 채워주시고 그 다음에 기름 가득 채워줬죠. 누가 그렇게 하신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거죠. 그럼 밀가루와 그 기름을 받는 대상은 누구입니까? 사르밧 과부가 아니에요.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를 만난 순간 이미 죽은 자에요. 이미 죽은 자입니다. 그 모아뒀던 그릇의 소유권은 누구한테 넘어갔느냐 하면 하나님, 엘리야 쪽으로 다 넘어간 거예요.

그러니까 사르밧 과부는 자기 밀가루 다 됐죠, 기름 없었죠. 기름 없다, 밀가루 없다는 판정을 누가 내렸습니까? 그 사르밧 과부의 본인의 자아성에서 나온 거죠. 우리 집에는 기름 없다. 밀가루 없다. 사르밧 과부는 개체성에 머물러 있는 거예요. 그런데 총체성에서 보니까 주님은 얼마든지 일할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사르밧 과부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그러고 난 뒤에 17절에 아들이 죽게 되죠. 그럼 죽일 거면 진작 밀가루 없애서 죽이고 기름 떨어져 굶어죽이지, 살려놓고 그 다음에 아들을 죽여 버리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네가 주체가 아니고 주체가 주님 쪽으로 네 주체가 바뀌는 그것,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그게 바로 주께서 원하시는 구출이에요. 10분 쉬어야 되겠죠.
 이하림(IP:124.♡.211.180) 21-07-25 05:26 
광주강의20210723b 고린도전서 7장 30절(추상성)-이 근호 목사

자, 첫 번째 시간 마지막에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 이야기했습니다. 가뭄이라는 요소를 집어넣으니까 온 천지에 먹을 것이 없어서 그 영향력이 사르밧 과부 집까지 와가지고 밀가루도 없고 참기름도 다 떨어졌죠. 이것은 이 현실세계에서 어느 개체가, 개인이 홀로 살 수 없다는 거예요, 이 세상 자체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개인적으로 자존심도 세고 자기의 자긍심도 세서 나는 나 혼자 산다고 하지만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는 총괄적으로 봐요, 총체적으로. 하나님뿐 아니라 마귀도 그렇게 봐요. 어느 누구도 내가 하나로 묶어놓은 이 세상에서 홀로 자기만 살겠다는 것은 애초부터 그것을 하나님께서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상대방이 밀면 떠밀리게 되어 있고, 딸내미 와서 좋다고 서로 이야기하는데 거기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파가 되고. 뭔가 이렇게 전부다 하나 안에 들어있어요. 그걸 발견하는 거예요. 그 하나 안에서 나라는 것이 내가 개체성을 가지고 주도권을 갖는다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첫째 시간 마지막에 이렇게 했죠. 개체와 주체는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요. 개체는 착각이죠. 나는 홀로 있다는 착각이죠. 그런데 주체와 개체가 같다고 생각하거든요. 같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오인(誤認)입니다. 또는 오(誤)인식, 인식을 잘못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이 ‘나’라는 주체를 주님으로 바꾸어주시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아닌 것처럼. 자기 자신을 고정화시킬 수 없다는 말은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 아니고 고정화되신 그분께 소속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고정화되신 그분께 소속이 되어 있다.  

자, 그 다음 211페이지 한번 봅시다. 위에서 7번째 줄에. 아, 이거 진도 나가기 힘들겠죠? “구약 성경 다니엘에서의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란 국가 자체가” 국가 자체에요. 국가가 뭐냐. 또 어려운데 어려운 게 자꾸 나와도 할 수 없어요. 국가란 언표 내용과 언표 행위로 나눌 수가 있는데 언표(言表)라는 말 자체도 어려워요. 언표는 쉽게 말해서 그냥 말. 국가는 말의 내용 속에 들어온 것과 그 말하는 행위자 속에 국가가 달리 되는 겁니다.

국가의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국가는 행정, 입법, 사법 이런 행정기관에 의해서 다수의 인민들을 공동체로 만드는 것을 국가라 하거든요, 국가. 가정에서, 그 다음에 소규모 지역에서, 나중에 더 크게 되면 국가.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 맞죠? 가정이 하나의 혈족관계이고 그래서 역사는 씨족에서 국가로 된다는 거예요.

국가 속에는 많은 혈족들이 들어있다. 혈족관계에서 약간 소규모로 확대된 것의 대표를 추장이라 하고 이 추장은 국가에 의해서 역사 속에서 보면 무차별 학살당합니다. 지금도 아프리카에서 일어나고 있죠, 남미에서. 남미에서 정복당할 때 국가가 그것도 자기 국가가 아니고 외부 국가가, 스페인 국가가 페루고 뭐고 잉카 마야 문명을 작살내놨잖아요. 그들은 같은 이웃, 옆에 있는 종족끼리 평화롭게 살고 싶어요. 그러나 이미 씨족과 혈족 중심으로 평화롭게 사는 것을 한 단계 넘어선 어떤 다른 집단의 출현이 기존의 소박한 혈족관계를 싹 다 밀어버리는 거예요.

이것이 미국이라 합시다. 미국 인디언들이 미국 땅 군데군데 살아요. 인디언들이 이 미국 전체 영토를 자기 영토라 하지 않습니다. 자기 씨족, 종족이 있는 이 범위 안에서만 자기 것이에요. 그래서 땅 개념이 어려운 거예요. 땅 개념은 없어요. 땅 개념은 씨족개념이 이동해서 임시적으로 거기에 거주하면 그게 땅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땅은 전부다 이름을 갖고 있는데 그 씨족의 이름으로 땅이 이름 지어지는 겁니다.

인디언들은 이 구역에 있다가 나중에 사냥감 따라서 버팔로, 들소 따라서 록키 산맥으로 올라가면 이전에 살던 땅은 없어지고 옮긴 땅만 있는 거예요. 지금 머무는 땅도 마찬가지에요. 기후 따라서 이동하면 또 기존의 땅은 없어지고 환경 따라 옮기면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오늘날 초등학생들한테는 무슨 저런 개념이 다 있냐는 거예요. 국가의 철조망이 없고 영토가 없는 국가가 어디 있냐는 거예요. 옛날에는 철조망이고 영토라는 개념이 없었어요. 인디언들의 개념은 총체적입니다, 총체적. ‘하늘과 땅의 신을 믿습니다’, 이겁니다. 하늘과 땅의 신. 그러니 이것은 신이 분배한 그 땅으로 인해 지금 우리가 잠시 혜택을 입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죽으면 다시 신에게 돌려드립니다. 이것이 인디언들의 의식이에요.

인디언들은 알래스카 쪽으로 넘어왔기 때문에 샤머니즘이에요. 샤머니즘은 성경에 바알 신에서 나온 거예요. 바알 신, 땅의 신. 바알 신이 땅을 통해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는 거예요. 이런 사람들에게 국가의 개념은 없습니다. 국가 개념이 없는 시대가 오랫동안 있었다는 사실을 지금 현대인들은 잘 이해 못하고 있어요.

또 현대인들은 뭘 이해 못하느냐 하면 우리보다 뛰어난 왕이 있었다는 것도 이해 못해요. 지금 뭐 일본에 왕 있고 영국에 왕 있고 태국에 왕 있지만 그것은 전부다 허수아비거든요. 그냥 명목상 하나, 대표 없으니까 네가 해라, 그렇게 된 것이지, 진짜 왕, 진짜 우리는 왕에게 속했다는 이런 개념은 없단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 신약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님은 기름 부으신 주님이죠. 기름 부었다는 말은 예수님이 영원한 왕이 되고 우리는 그의 백성입니다, 이사야에 나왔던 것처럼 예수님이 왕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현대인에게는 왕 개념이 빠져있어요. 왜냐하면 왕국에서 현대 자본주의로 바뀐 지 너무 오래됐기 때문에 성경에 나와 있는 주님, 주(主)는 왕이라는 뜻이에요, 기름 부으신 왕 되십니다, 하면 왕이 뭔데? 어떤 게 왕인데? 참, 이 점도 이해하기가 참 힘들어요.

이것부터 이야기할게요. 국가가 와서 이 추장들을 싹쓸이 다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없애버렸어요. 이것을 다니엘서에서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모든 땅의 권세자가 된다’라고 합니다. 짐승의 특징은 결국은 통합체제에요. 모든 걸 하나로 묶어버리는 겁니다. 이 통합체제, 짐승이 될 때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다양함이고 다양함은 눈에 보인다. 그런데 통합자는 눈에 안 보인다. 그렇죠? 대통령이 누군 줄 알고 대법원장이 누군지는 아는데 국가는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그래서 짐승은, 악마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데 인간의 주체성 또는 자아성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생성됩니다. 생성된다는 이 말을 여기다 집어넣을게요.

국가는 뭐냐. 국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국가의 면적이 있고 국화는 뭐고 국기가 따로 있고 올림픽 나갈 때 대표선수 따로 있고,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언표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언표 행위, 더 정확히 말해서 언표 행위자는 뭐냐. ‘그것이 바로 나의 조국입니다’. ‘조국’이라 하면 너무 정치적이니까 ‘그것이 나의 나라입니다’.

자, 눈에 보이는 것을 다 설명해놓고 이것을 하나로 통합해버리는 거예요. 독도는 우리 땅. 우리가 뭔데? 우리가 어디 있어, 우리가? 우리라는 인간들 만나서 싸우기밖에 안하는데 우리가 어디 있어요? 언표 내용, 그러니까 말의 내용, 문장의 내용은 줄줄이 국가가 이렇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국민 본인은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짐승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말로는 바로 그 나라가 우리의 조국, 우리의 나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보이지도 않는데.

한 가지 예를 들께요. 말 표현 자체도 어렵죠? 말의 내용과 말의 행위자. ‘나는 어떤 이사 온 여자를 안다. 그런데 그 여자는 회사 사장인데 너무 못됐다.’ 할 때 ‘나는 어떤 여자가 이사 온 걸 안다’ 언표 내용이죠. 그리고 그 여자가 회사 사장인 직업까지 알았죠. 언표 내용상 여자에 대해서 추가적인, 클래스가 다른 차원의 이야기는 안 나왔죠? 어떤 이사 온 여자를 아는데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여자가 왔다. 추가적인 게 없죠.

그런데 그 여자는 성질이 못됐다. 갑자기 여기 뭐가 들어갔습니까? 이 말을 하고 있는 나의 견해가 들어가 버렸죠, 나의 견해가. 그러니까 이 세상의 어떤 상대를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은 키가 얼마고 얼마이고 이야기하다가 그렇게 그 사람을 표현하고 설명하는 도중에 누가 들어가 버렸어요? 그것을 설명하는 자신의 견해와 그 사람을 보는 나의 태도가 섞여 들어가 버린 거예요.

이게 바로 잉여, 여분의 것 또는 초월성이에요. 초월성보다는 추상적인 것.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자기의 견해가 거기에 들어가 버린 거예요. 그러면 그 순간 이야기하는 사람은 상대가 자기의 권한 속에 권역 속에 있는 것처럼 들어가 버립니다.

아까 첫째 시간에 타인을 본다 했죠. 타인을 보고 인간이 기존에 갖고 있는 그전에 알던 타인들, 남 있잖아요, 남이 있고 그 새로 이사 온 여자를 볼 때 성질이 더럽다, 라고 평을 내린다는 말은 타인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자기의 자아성이 자극받고 노출되는 계기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타인이 어떤 여자가 이사 온 것이 아니고 여기에 예수님이 등장하게 되면 예수님에 대해서 나름대로 견해를 이야기하는데 자칭 유대인의 왕이다, 성전을 짓고 한다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단 말이죠. 예수님이 그런 이야기했다, 저런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결론은 뭐냐 하면 죽여 버리자, 아닙니까? 그래서 죽여 버리자.

그런데 예수님이 노렸던 것은 바로 그거에요. 나에 대해서 마구 마구 보고 내가 어떻다 하는 것을 너희들이 다 설명해. 그래서 너희들이 나를 통해서 나를 평가하면서 내놓은 결과로 인해 너희들의 소속이 예수님에 의해서 드디어 까발려지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아까 추상성이라고 했죠, 추상성. 보이지 않는 국가라 하는 추상성이죠, 영적 개념이 되는 거예요. 고로 악마는 안 보이면서도 있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정신 속에 거기에 전부다 내재되어 있는 겁니다.

그걸 강남강의에서는 공백, 공백에 대한 추구, 빈 자리에 대한 추구가 일어나는 겁니다. 자기에게 욕망이 있는데 욕망을 마저 채울 수가 없어요. 채우지 못하니까 결핍을 느끼니까 그 결핍을 메꾸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죠. 제가 강남강의 할 때 음식을 거부하는 거식증, 먹는 폭식증, 불안한 것 또는 갑자기 말실수를 하는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안에 추상성, 내가 다룰 수 없는 초월적인 추상성이 작동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에게.

그래서 어떤 인간이라도 저 사람의 삶이 부럽습니다, 해서 똑같이 한번 살아보세요. 살아보게 되면 나하고 안 맞아요. 나하고 맞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살아 온 과거가 다르고 다른 요소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강남 강의 때 한 것을 잠시 해보면 집합론 하면서 A, B, C, D, E, F 하나의 순서로 되어 있다 할 때 A→B→C→D→E→F 이렇게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고 F→E→D→C→B→A 이렇게 연결될 수도 있죠. 이것을 사슬 또는 한자로 쇄(鎖), 연쇄라 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자아는 남, 타인을 눈으로 보고, 보고 있는 것을 자기 기존에 있는 과거 기억에 준해서 자기 안에서 정리정돈해서 이것을 현재 자아로 굳혀버려요. 여기에 새로운 요소가 들어가면 새롭게 굳어지겠죠.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있다 합시다. 이제부터 중요해요. 어떤 사람이 있는데 과거가 만든 기억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를 성경이나 목사를 통해 들었다 이 말이죠. 들었을 때 현재 들었잖아요, 그 들은 것들이 그 사람에게 들어가게 되겠죠. 그럴 때 예수님에 대한 견해를 그냥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고 과거에 자기가 자아를 구축했던 그 방식에 근거해서 잡아당깁니다. 그러면 과거의 방식이 뭐냐 하면 ‘빈 자리 채워서 온전해지는 것’ 이에요.

사람이 화를 낸다는 것은 지금 그 순간 자기가 의롭다는 티를 내고 있는 거예요. 난 너보다 의롭다는 티를 내는 거예요. 의롭다는 말은 나 지금 온전하다는 거예요. 알 거 다 안다는 겁니다. 온전한데 설교를 통해서,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되었죠. 이것이 뭐냐 하면 바로 신입이. 신입이 들어온 거예요. 새로운 정보가 들어온 거예요.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으니까 이 새로운 정보가 어디에 필요하냐하면 내가 온전해지는 것에 대해서 새로운 빈 자리가 마련되고 그 빈 자리는 예수님의 성경 지식과 복음적 지식으로 채우게 되면 나는 전에도 온전했지만 갈수록 점점 더 나는 철저해지고 온전해진다는 거예요.

이것이 아까 첫째 강의에서 한 것처럼 인간은 자기가 추구하는 대로 하게 되면 결국 대립자와 동일시되죠. 내가 바로 악마다. 이게 바로 악마죠, 예수 믿는다고 여기는 악마. 자아를 위해서 신이 존재해야 한다고 여기는, 나의 구원을 위해서 신이 존재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리고 바로 이것이 악마니까 악마에 속하겠죠.

모든 인간은 악마에 속해야 비로소 구원이라는 깊은 감사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악마에 속해야. 악마에 속하는 것을 말리지 마세요. 물론 악마에 속한다고 다 구원되는 것은 아니고요. 구원되고 안 되는 일방적 선택권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분한테 일임해야 돼요. 아이고, 우리 처남이 자꾸 이상하게 된다. 처남이든 누구든 간에 인간은 원래 그쪽으로 가야돼요, 원래. 이게 본모습이에요.

처음부터 인간은 추상성 안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고 추상성 안에 포로가 되어 있어요. 그 추상성이 악마인 줄을 사람들은 상상도 못하죠. 왜? 자기는 항상 옳고 완전하고 악을 버리고 선을 향하여 추구한다고 봤기 때문에.

제가 설교시간에 <랑종>, 태국귀신 팔자 이야기 했죠? <랑종>이라는 영화, 그 마지막 장면을 이야기했잖아요. 자식은 눈에 보이지만 지금 신이 함께 있다는 것은 지금 오십년 째 무당 생활을 해도 그런 이론이 있고 그런 가설이 있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그래서 저건 괜찮다 싶어서 나한테 가져왔는데 우선순위에 있어서 그런 귀신 무서운 것보다 내 자식 다치면 안 되는 거예요. 인간의 육의 본성을 누가 떼어냅니까? 하나님보다 내 자식이 더 중요한데 그걸 누가 말립니까?

충분하게 귀신다워야 돼요. 제대로 귀신 노릇해야 돼요, 충분하게.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를 이야기하되 그것을 슬프게 이야기하지 말고 기쁘게 이야기해야 돼요. 왜? as if니까. 마치 지옥 가는 것처럼 사세요. 나는 지옥에 사는 것처럼 사세요, as if. 그렇게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하나밖에 없는 자아는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지요.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모든 것이 파생되어졌다. 이것을 늘 실감해야 됩니다.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파생되어진 거예요. 주님이라는 이 장(長)으로부터 특별 보좌관, 가룟 유다, 그리고 사탄, 악귀가 예수님의 모든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이들의 활동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욥기에 나오죠. 욥에게 고통을 준 자가 누구죠? 하나님이십니까, 아니면 누구입니까? 마귀죠. 악마가 욥에게 고통을 줘요. 그런데 욥은 자기는 악마와 별개의 개체성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한테 고통을 준다고 계속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한테 고통을 주니까 이게 자기한테 모순이 일어나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가 생각하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난 의롭고 그럼 사랑을 받아야 되는데 계속 자기가 고통을 받고 있으니까. 하나님은 정의로워야 되거든요. 욥에 의견은 하나님은 정의로워야 돼요. 선은 선이고 악은 악으로 분명히 구분 짓는 하나님이란 말이죠. 그런데 자기 안에서 악과 선이 혼재되어 있으니까 이걸 분류할 수 있는 기준이 없어서 욥은 난처한 거예요.

어떤 전자회사에서 식기 세척기가 고장 나서 엉터리 부품을 집어넣었단 말이죠. 그런데 엉터리 부품을 집어넣은 것을 밝혀낸 개발자, 예를 들어 최반석이라고 합시다, 반석, 그 사람이 그걸 밝혀내었는데 회사에서는 그 사람을 징계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최반석이라는 사람은 불량품을 밝혀낸 본인이 오히려 죄인취급 받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 아닙니까? 남을 구원하실 죄 없는 분이 주님 앞에 버림받게 되는 거예요. 이 말은 악마의 세계에서 통하는 정의롭고 훌륭하고 선하신 하나님관을 완전히 예수님을 통해서 전부다 혼란케 해버리고 없애버리고 찢어버리는 거예요. 흩트려버리는 거예요. 착하고 훌륭하고 자비로운 그 하나님이 거짓된, 있지도 않은 하나님인 거예요.

그 모순은 왜 발생되는가. 본인이 바로 짐승의 세계, 악마의 세계에 속해서 그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본인이 받아들이질 못하는 거예요. 착한 것만 해왔거든요. 지금 이 부자청년이 어릴 때부터 십계명 지켰어요. 자기가 아무리 봐도 하자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과 합세했습니까, 떠났습니까? 예수님을 떠났죠, 모든 걸 팔라 하니까.

자기가 부자 된 것은 주님의 축복의 결과인데 축복의 결과를 저주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는 어떤 해석기제가, 해석 매커니즘이 자체 안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너무 모순된 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러면 예수 당신이 전하는 신학은 못 받아들이겠다고 떠나버리죠. 떠난 그것이 바로 착함의 극단은 곧 그것이 악이 되는 겁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착한 사람만 지옥 가는 거예요. 스스로 착하다는 사람은 조폭들 중에도 굉장히 많아요. 자기가 착하다는 것을 나는 끝까지 밀어붙이겠다는 그런 사람들이 지옥 갑니다.

내 것은 못 버리겠다는 거예요. 내 것이 바로 자아성이에요. 그럼 내 것 버리면 구원받습니까?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내 것 버릴 수 있는 위인은 없어요, 이 세상에. 내 것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 것이 있더라도 마치 내 것 아닌 것처럼 그렇게 성령께서 역사하죠. 그러니까 내 것이 반드시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반드시 있어줘야 성령의 지적을 받을 수 있는 여지가 생기잖아요. 지가 알아서 내 것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이래서는 구원 못 받아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짐승의 나라에 속해져야 비로소 구원은 거기서부터 이뤄진다는 거예요. 철저하게 짐승의 나라. 짐승의 나라가 뭐라고요? 개체성. 내가 곧 주체다, 주인공이다. 주체라는 말이 어려우면 내가 그냥 주인공이에요. 세상 모든 것은 나를 위해 존재해야 돼요. 지난 낮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죠. 왜 세상은 내 편이어야 하는가? 이거 정답 누가 이야기할 수 있어요? 왜 세상은 내 편이어야 하는가? 나는 왜 사랑받아야 하는가? 나는 왜 미움 받아서는 안 되는가? 그걸 모르죠. 모르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야기하잖아요, 네 자신을 미워하라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네가 이런 저런 것을 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콕콕 집어서 쑤시고 들어와요, 콕콕 집어서. 이것은 네 잘못이 아니고 너의 정체성이 악마라는 너의 총체성 안에 있어서 너는 거기에 푹 잠겨 있는 거예요, 못 빠져 나와요. 그걸 총괄적으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세상은 짐승의 나라에요, 짐승.

모두들 자신을 속이고 있기 때문에 안 속으려고 하니까 지옥 가는 거예요, 안 속으려고 하니까. 십자가는 그리고 모든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안 속으려고 애쓰고 있음을 발각시키는 일입니다. 저거 지켜야지, 저거 지켜야 돼. 십일조 해야 돼. 저거 해야 돼. 온전한 데다가 더 온전하게 되면 구원에 가깝다고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총체성이에요. 네가 아무리해도 못 빠져나오는 그런 지경 속에 네가 지금 놓여있다. 내가 달려갈게, 내가. 내가 갈게. 네가 나오지 마. 거기서 헤엄치지 마. 그냥 내가 갈게. 달려라, 달려라~ 내가 너한테 찾아갈게.

올리브가 뭐라고 합니까? 뽀빠이 살려줘요~하죠. 살려 달라는 올리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뽀빠이보고 살려 달라 할 때 혼자 있습니까, 아니면 부루투스하고 같이 있습니까? 부루투스하고 같이 있죠. 올리브라고 하는 야리야리하게 진짜 뼈대만 남은 지가 빰빠라 빰밤빠 하면서 지가 시금치 먹습니까? 지가 시금치 먹으면 안돼요. 시금치는 누구 전공이에요? 뽀빠이만 먹어야 돼요. 시금치를 뽀빠이가 먹어야 되지, 우리 남편이 시금치 먹으면 힘나니까 나도 시금치 먹어야지. 시금치 먹지 마. 시금치 먹지 마세요.

우리가 계약 상대자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한번 보세요. 우리가 계약 상대자가 아니라고 제가 수백 번 이야기해도...... 10장 29절, 성경에 분명히 나오거든요.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이미 심판의 기준은 지금 정해졌어요. 언약이 아니고 언약의 피에요, 피. 피라는 말은 어느 인간도 나를 이해했다, 이해하지 못했다? 어느 인간도 예수님을 이해 못했기 때문에 발생된 것이 피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에요. 예수님의 피 흘림이에요. 그러면 그 피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는 것은 기존에 개인적으로 나의 의미뿐 아니고 내가 속해있는 현실관 있잖아요, 이 전체가 있어도, 세상의 모든 형질은 곧 없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총체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세상 전체와 그리고 예수님의 피와 그냥 맞바꾸는 거예요. 맞바꾸는 겁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했죠. 악마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온 천하를 주겠다고 했잖아요. 그 온 천하에 예수님의 피가 없어요. 그래서 악마는 알아요, 이 사실을. 어째든 간에 내가 잘 되려고 애써야지, 가만히 있어도 망하고 설쳐도 망하는, 망하는 세계가 있다는 그런 의식이 생기지 않도록 악마는 여러 가지 혜택들을 많이 주고 옵션들을 많이 주고 1+1을 선물 주고 그러는 거예요. 우리보고 희망을 가지게 하고 더 격려하려고 그렇게 부추기죠.

211페이지 봅시다. “국가 자체가 형성된 채 육지로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태고 적’의 힘들이 밀려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국가라는 것은 땅이라는 공간에서만 비로소 의미를 갖추는 거죠. 그 국가가 땅의 의미가 되려면 땅의 힘보다 더 센 힘이 있어야 돼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원래 바다는 땅을 침범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에 나와요. 침범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허용을 해요. 바다가 땅보다 더 세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땅에 있는 이것이 바다에서 온 짐승에 의해 덮쳐지게 되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의 국가로 통합이 되어버려요. 그게 짐승의 나라입니다. 어느 나라, 어느 나라 할 게 없어요. 코로나 보세요. 219개의 나라가 무슨 의미 있습니까? 소용없어요. UN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코로나를 못 이기잖아요. 중국에서 일어난 그 코로나가 전 세계에 다 퍼졌습니다.

본인들이 뭔가 남보다 더 특별히 죄 지어서 아프리카 난민들이 굶어 죽어요, 코로나 때문에? 물자가 운송되는 절차를 따져보니까 코로나 때문에 아프리카 사람들 수억 명이 굶어 죽게 된 거예요. 그들이 단체로 나쁜 짓했습니까, 단체로? 아니죠. 가만히 있는데 밀려 왔잖아요. 이래서 이 세상은 너, 나 없어요. 전부다 똑같은 처지에 있습니다. 약간의 여유분이 있다는 것, 아직까지 재물이 있다는 것과 지금 재물이 완전히 다 바닥났다는 그 차이뿐이지, 이 땅에서 인간들이 짐승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없다는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의 힘이기 때문에. 인간보다 더 센 힘이기 때문에. 그것을 ‘태고 적’ 힘이라고 해요, 태고의 힘. 그 태고의 힘을 처리하시는 것은 그 힘을 허락하신 우리 주님이 오셔야 이게 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211페이지 중간에 “그 태고 적 어두운 힘이 땅을 적시면서 활동을 해 줄 때, 비로소 땅의 사람들은 낯익은 질서로서 마주 대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국가라는 추상적 개념 속에서” 이제 알겠죠, 국가는 추상적 개념입니다. “추상적 개념 속에서 개인들은 자기 정체성을 정리하게 된다.” 자기의 정체성을. 그러니까 국가가 나를 지켜준다는 거예요. 결국 국가를 알지만 최종적인 것은 내가 살기 위해서는 국가의 말을 들어야 된다는 거예요.

실질성과 추상성이 원래는 반대가 되어야 되는데 실제로 보면 반대가 아니고 추상성에 복종을 해버리죠, 복종. 실질성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손톱이다, 이것은 지우개다, 하는 것이 실질성이잖아요. 그런데 사랑이나 믿음, 이것은 추상성이죠. 사람들은 밥으로 살지, 믿음으로 사는 게 아니라 생각하죠. 그러나 밥이라는 이 구체성, 실질성은 결국 추상성에 종속되는 거예요.

돈 좀 있어도 자살하는 이유가 추상성 때문에 그래요, 추상성. 명예, 위신, 체면. 집에 뭐 굶어죽어서 자살하는 게 아니고 체면 때문에, 위신 때문에, 웃음거리 되고 우사스럽다는 것 때문에 나 자신이 용서가 안 돼서 그래요. 그러면 이 자아는 실질성입니까, 추상성입니까? 추상성이에요. 실질성은 근육, 임플란트 한 이, 코, 눈 이것은 실질성이고. 사람이 코 있고 눈 달렸다 해서 ‘난 행복해’ 이럽니까?

우리는 사랑받기를 원해요. 남들이 나를 인정해주기를 원해요. 혼자 코 있고 발 멀쩡해도 사람이 외로우면 못 살아요. 외로움은 그리움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거예요. 그리움 끝에 고독이 온다 하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영물(靈物)이에요, 영물. 인간은 이상해요. 인간은 짐승하고 달라요. 짐승은 사료만 주면 되죠.

인간은 외로우면 못 살아요. 자식들 다 나가라 해놓고 자식들이 그리워서 아이고, 보고 싶다. 전화도 안 하고. Dear John Letter 또 편지 한번 보낼까요? 새벽 4시에 전화 오고. 새벽 4시에 전화 온다는 말은 사고 났어, 사고 났어. 청예 부대 갔더니만 또 사고 났어, 이런 거. 보고 싶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상적인, 오후 2시 반이라든지 저녁 6시 그때 전화하라 이 말이죠. 그러니 모든 현실은 내 편이어야 돼요. 자식이 전화하더라도 새벽4시에 전화하면 안 돼. 내가 놀라. 낮에 정신 차릴 때 전화 와야 돼요. 자기가 조정해요. 내 인생은 내가 조정한다고요.

군대생활 12년 동안 하고 특전단 상사까지 한 사람이, 이거 4년만 하면 연금 나와요. 그런데 연금 포기하고 트롯트 가수했어요. 그 사람이 언양에 사는데 내가 그 중국집 짜장면 먹어본 적이 있어요. 일부러 내가 간 건 아니지만 우리 집사님이 박군인가 있으니까 가자해서 사진보고 사진도 찍고. 왜 이럽니까? 연금 나오는데요. 군대에서 사격대회도 1등 했어요. 왜 이럽니까? 추상성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이 추상성이 뭐냐 하면 놀랍게도 인기(人氣)에요, 인기. 인기라는 것은 타인의 존재를 철저하게 이용하는 거예요, 타인의 존재. 나를 쳐다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자신의 삶의 의미로 충분하게 뽑아내는 겁니다. 이런 사람이 우리나라에 수만 명이 넘는데 다 무명가수에요. 그런데 갑자기 떴어. 이 사람이 강철부대 나왔어요.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흐름이라는 것을 한번 보세요. 하도 TV를 안 보니 내 말도 이해 못하고. 모든 예능프로든 한번 보세요. 보게 되면 전부다 추상성이에요, 추상성. 추상이 실제에요, 실제. 현실이 추상이에요. 그것이 어디서 이루어진다? 국가 안에서. 그 가마솥 안에서 우쌰우쌰 이루어지는 겁니다. 출세해라. 네가 성공해라. 내 자식은 남한테 져서는 안 되니까. 이겨야 되니까.

여기서 짐승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는 주님한테 지기 싫어서 그런 거예요, 지기 싫어서. 그래서 뱀의 후손이 예수님의 발꿈치를 무는 겁니다. 자기 딴에는 죽였으니까 결정타라고 여겼는데 결정타가 아니라 발꿈치만 물었어요. 진짜 결정타는 남아 있습니다. 이제는 위에서 망치로 악마를 치죠. 추상성이 추상성으로 추상성을 쳐버린 거예요.

추상적인 예수님이 추상적인 악마를 쳐버린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구원을 받는 거예요, 그 치는 능력으로. 내가 고대하는 추상성이 주님이라는 추상성에 의해서 내가 박살날 때 비로소 그 사건이 우리의 최종적인 확정된 미래가 되고 그 미래에 대해서 우리가 지나온 나 중심으로 살았던 모든 과거가, 전부다 화투패가 다 뒷면으로 뒤바뀌어지는 거예요.

어느 것 하나 죄 아닌 것이 없었다. 왜? 내가 완전해지고 내가 이것으로 구원받고자 했던 모든 시도 자체가 악마가 나한테 시킨 일이고 악마한테 배운 짓이라는 사실을 앞으로 인생 더 사시면서 까발려져야 돼요. 주께서 살려두실 때까지 살아야 돼요. 화투패 까는 시간이 있어야 돼요. 장로님도 한 백세 살까지. 너무 내가 욕설했습니까? 저주였습니까? 다 까야 돼요.

아, 이것마저 죄였구나. 이게 마귀 짓이었구나. 그것이 깊은 감사. 오늘 제목은 <추상성>입니다. 깊은 감사, 내가 다룰 수 없는 감사. 터져 나오는 울음처럼. 이건 설명 안 되는 울음처럼 깊은 감사에요. 그냥 고마운 거예요. 자기 형편 서러워서 우는 게 아니고 그냥 감사한 거예요. 고마운 거예요.

이 깊은 감사가, 나의 주체에서 내쫓김을 당하고 그 주체의 자리에 주님이 계실 때 이것이 바로 주님의 총체성 안에 놓여있는 관계입니다. 주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이게 바로 진짜 오늘날 이스라엘이죠. 성도죠.

그렇다면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그 성도의 적은 국가입니다. ‘우리가 국가 밖으로 나갔다’가 아니라 이 지옥 같은 국가 안에 있으면서 우리로 하여금 이질적 존재로 주께서 그렇게 다루어주시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이질적 존재였거든요.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는 말이 나와요.

히브리서 11장 38절에,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약의 성도를 통해서 구약이 완성된다는 거예요. 구약은 과거지요. 신약 성도는 미래이고 현재죠. 그 현재, 미래를 봤을 때 구약 성도들이 자기에게 해석되지 않고 납득되지 않는 것들이 신약에 오게 되면 다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겁니다. 아, 내가 나의 주인공이 아니었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거예요.

아까 어려운 것 중에서도 다시 한 번 복습하는 형식으로 정리해봅시다. 언표라는 말 자체가 어렵다, 말의 내용을 인간은 타인을 통해서 계속 내뱉습니다. 인간은 타인을 통해서 말의 내용을 계속 내뱉어요. 그러니까 말할 타인이 있어줘야 돼요. 혼자 집에서 웅얼웅얼 거릴 수는 없습니다. 말로 표현할 때 내 안에 있는 의미가 타인을 통해서 확정되고 증명되는 거죠.

하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여자보고 “팥빙수 먹을까요?”라고 말을 할 때 그 여자는 듣는 이야기가 수작 거는 말로 들리죠. 당신에게는 아내가 있지 않습니까? 아내하고 먹지, 왜 나하고 먹나. 이렇게 되겠죠. 그럴 때 그 순간 이 말을 들을 때 무엇이 자극받았습니까? 나에게는 지킬 ‘나’가 있다는 것이 자극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리 복음이고 아무리 성령 받았다 해도 타인의 존재와 말을 주고받고 할 때 무엇이 부각됩니까? 새삼스럽게 내가 평소에 살아가는 이 ‘나’가 주님의 나라에서 볼 때 없어져야 될 것인데 마치 지켜내야 할 것처럼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지켜내야 할 것이라고. 그래놓고 아까 고린도전서 7장하고 비교해 보세요.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는 말씀이 내 식으로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말씀이라는 것, 그럴 때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깊은 감사가 나오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들이 살아가면서 계속 우리의 뒷면이 노출되게 하옵소서. 아무리 우리가 본능적으로 해도 정당한 본능, 옳은 본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오히려 깊은 감사와 더불어서 주님의 죄 사함과 언약의 피만 고마워하고 증거 하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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