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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8 10:26:25 조회 : 158         
[22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5 - 기이한 삶 이름 : 구득영(IP:183.102.224.162)
[22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5 - 기이한 삶

22,04,18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존재의 함성 !!

오늘은 교재 33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여기에 '존재의 함성' 이라고 되어있는데, 함성이란 부르짖는 것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인간은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데, 아이들을 보면 그야말로 왔다갔다하는데, 활력이 넘친다는 말이죠. 아이들이 가만히 있으면, 그것은 거의 백퍼센트 몸이 아프든지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게 해결이 되면 또 다시 움직이는데, 그렇게 아이들도 움직이고 또한 어른들도 움직인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인간은 왜 움직일까요? 움직이는 목적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도대체 무엇을 얻기 위해서 움직이느냐는 말이죠. 그렇게 다들 움직이는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여기서 골로새서 1장의 말씀을 보겠는데, 13절에서 17절입니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 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

여기 13절에 보면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라고 하데, 성도에게 말씀이 오면, 말씀 자체가 눈에 보이지 않던 새로운 현실을 보게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라면 이 세상자체가 흑암의 권세임을 동감하게 된다는 말이죠. 이 세상이 그냥 깜깜한 정도가 아니고, 거기에 권세가 작용한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흑암이 흑암으로 유지되게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세력, 그런 인물이 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인간들이 말하는 이 세상은 무엇인고 하니까, 선거를 하고 대통령이 바뀌고 하는 것들이 다 흑암의 권세라는 겁니다. 그냥 '어둡다' 라고 한다면 헤쳐나가면 되는데, 그런데 '어둡다' 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어둡게 되도록 힘을 가하고 압박하는 세력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러분은 평소에 이 세상을 보면서 이것을 느끼십니까? 이 힘의 세력을 느끼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되어야 골로새서 1장에서 이야기하는 현실과 우리의 현실이 맞아떨어진다는 말이죠. 만약에 일치가 되지 않으면 우리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인데, 즉 성경에서 말씀하는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꿈꾸고 있다는 것이 들통나게 된다는 말이죠.

봄이 되면 꽃도 피고 아름다운데, 하지만 그것은 흑암의 세력 안에서 아름답다는 겁니다. 날씨가 아무리 좋아도 역시 흑암의 권세 안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은 이 세상을 어떻게 보신다는 겁니까? '어둡다' 라는 것인데, 또한 계속해서 어둡게 되도록 뒤에서 부추기는 어떤 세력자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것처럼 악마가 살아있어서, 이 세상이 흑암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죠.

* 인디안 밥 !!

그러니까 '권세' 라는 것은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것인데, 그러면 이것은 흑암의 권세자, 즉 악마인데, 모든 인간은 악마의 밥이라는 겁니다. 과거에 우리가 먹던 과자 중에서 '인디안 밥' 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게 기념으로 미국의 인디언 박물관에 실제로 소장되어있다고 하는데 말이죠(ㅋㅋ).

그러니 인간은 악마를 키워내는 사료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는데, 즉 악마를 살찌우게 하는 먹잇감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은 거기서 빠져나오지를 못한다는 말이죠. 교회에 나오고 절에 다니고 해도 안 된다는 겁니다. 물론 다니지 않아도 안 되지만 말이죠.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그런 직분이 전혀 소용이 없는데, 그런 것으로는 도저히 흑암의 권에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면서 계속해서 착각을 하고 있는데, 자기는 빠져나올 수 있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누가 뭐라고 해도 마귀의 밥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흑암의 권세에서 누가 건져냅니까? 주님이 건져내어 주시는데, 그렇게 건져내어 주시니까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보이고 알게 된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그 안에 들어있으면, 자기가 마귀 밥인지 인디언 밥인지, 그것이 전혀 보이지가 않는다는 겁니다.

이런 건져냄이 없으면 "이 세상은 살만하구나. 다만 돈이 없어서 문제다" 라고 나오는데, 모든 사고가 그런 식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죠. 물론 인간들끼리 말이죠. 교회에서 교인들이 대화하는 주제가 무엇인가요? 흑암의 권세입니까? 그게 아니면 자기가 잘먹고 잘사는 겁니까? 도대체 어느 쪽이냐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마귀의 밥이라는 것이죠.

그렇다고 하면 건져낸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마귀의 밥을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흑암의 권세에서 누가 출세하고 성공하고 하는 것에 대해서 말이죠. 왜냐하면 그것이 다 마귀의 밥이기 때문인데, 그러니 그런 마귀의 밥을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요즘은 개 사료도 사람이 먹는 것보다 더 비싸다고 하는데, 간식에 도시락에 없는 것이 없다는 말이죠. 개 도시락은 12,000원이고 주인이 먹는 것은 6,000원이라는 겁니다(ㅋㅋ).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먹여도 개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데,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그것으로 주님의 백성이 되는 법은 없다는 말이죠. 교회에서 직분을 받고 해도, 그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장로가 되는데 5,000만원을 교회에 바쳤다고 하는데, 그러면 그게 아까워서라도 그 교회를 도저히 떠날 수가 없다는 말이죠. 복음을 알아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데, 자기가 낸 5,000만원 때문에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목사들은 이미 그것을 간파하고 있는데, 그래서 돈을 바치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돈도 들어오고 사람도 붙잡고, 그야말로 양수겸장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의 졸개가 되고 마는데, 왜냐하면 아무리 목사가 하는 짓거리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자기가 투자한 돈이 아까워서라도 그냥 참는다는 것이죠.

악마는 이것을 이미 다 간파하고 있는데, 인간이 인간 대 인간으로 관계하는 것이 아니고, 돈과 돈의 관계로 움직인다는 것을 말이죠. 이게 흑암의 권세인데,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겁니다. 물론 노래는 "돈보다 친구가 좋아" 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것과는 반대라는 말이죠.

친구도 돈이 있을 때 친구인데, 돈을 빌려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을 때까지만 친구라는 겁니다. 막상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그때부턴 친구가 아니고 원수가 되고 마는데, 물론 집안식구라도 마찬가지이고 말이죠. 그래서 집안식구끼리도 돈 거래를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 주님과 동일한 안목을 !!

아무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었는데, 이것은 주님의 안목이고, 우리도 이와 동일한 안목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주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빠져나오게 해주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흑암의 권세에서 빠져나오게 해주었다면, 해줄 것은 이미 다 해주었다는 것이죠. 그렇지요?

그렇게 해서 빛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가 주님에게 더 요구할 것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들이 하는 기도는 근본적으로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주님의 뜻은 모르고 마귀의 밥이 되어서, 존재의 함성, 즉 내부적인 울부짖음이 바깥으로 튀어나는 것이 곧 기도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나 그것은 탐심이라는 겁니다.

교회가 금요일 저녁만 되면 사람들도 붐비는데, 왜냐하면 같이 모여서 통성기도를 하면 기도효력이 있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물론 끝나면 바람이 빠진 풍선이 되고 마는데,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기분풀이를 한 것인데, 마치 나이트클럽에서 몸을 흔들고 나온 것과 같다는 말이죠. 그러니 다 허무하고 소용이 없는 것인데, 그냥 자기 기분에 도취되어서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겁니다.

* 주님의 건져내심 !!

그런데 주님께서는 흑암의 권세에서 인간을 건져내시는데, 물론 우리 인간은 자기가 흑암의 세계에 있다는 것도 모르고, 또한 여기서 빠져나온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렇게 빠져나오려고 하면 악마보다 힘이 세야만 가능한데, 그런 인간은 없다는 겁니다.

여기 골로새서 1장 13절에 보면,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라고 하는데,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그가'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주님이 건져내었다는 것인데, 그렇게 주님이 개입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한다고 하면,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당연히 없다는 것이죠.

서울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숙제를 많이 내주는데, 왜 그런 짓을 하느냐는 겁니다. 숙제를 내준다는 것은 당연히 숙제를 해오라는 의미인데, 그런데 인간에게 그런 숙제를 해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목사가 악마의 종이란 것을 모르고, 그런 노림수에 놀아나고 있다는 겁니다.

* 기이한 말씀 !!

주님의 모든 말씀은 기이한 것인데, 그러니 인간의 입장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말이죠. 주님이 우리를 선택했으면 우리는 더 이상 할 것이 없는데, 우리가 요구해봐야 그것은 탐심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개입했다는 것은 인간은 악마의 권세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것인데, 이것을 달리 말하면, '기이하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기이한 것을 이 세상에서는 '어리석다' 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흑암의 권세의 특징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야한다" 라는 식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인간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야한다고, 그렇게 악마가 부추긴다는 말이죠.

* 그냥 설치고, 또 조절해서 설치고 !!

강의초반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아이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설치는 것은,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왜 아이들이 그렇게 까부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아이들의 설치는 것이 약간 잠잠해진 것이 어른이 설치는 것이란 말이죠. 아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설치고, 어른들은 조절을 해가면서 설친다는 겁니다.

아이가 설치는 것은 충동적인데, 어떻게 자제할 수가 없어서 발산하는 것이란 말이죠. 그런데 어른은 이성이 있어서 주위의 눈치를 보고 약간 자제는 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 바닥에는 아이 때부터 지니고 온 감정의 폭발이 도사리고 있는데, 그러니 그게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보통 "내가 성격이 좋아서 참지, 건드리면 터진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터질 가능성이 항상 있다는 말이죠.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인간은 목적이 없다" 라는 것인데, 맹목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마치 목적이 있는 것처럼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어떤 고위직에 있는 검사가 술에 취해서 택시를 탔는데, 그만 택시기사와 실랑이가 붙어서 때렸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무리 검사라도 당연히 체포가 되어야 하는데, 물론 우리나라의 검사 99퍼센트에게는 체포라는 것은 없지만 말이죠. 그러면 그 검사가 왜 때렸을까요? 그것은 자기가 기분이 나빠서 때렸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자기의 기분을 어떻게 조금 억누를 수는 있지만, 하지만 그것은 마치 스프링을 눌리는 것과 같아서, 언제든지 반발해서 튀어 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 검사가 나이가 50이라고 하면, 그러면 나중에 나이가 90이 되면 그런 감정과 충동이 없을까요? 전혀 그렇지가 않은데, 여전히 남아있다는 겁니다.

* 인간은 '과도하게' 연기한다 !!

그러니 인간은 어릴 때부터 한번도 달리진 적이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달라진 것이 없으면 남아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오늘 강의의 핵심 중의 하나인데, "인간은 연기한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혹은 연출이라고 해도 되겠는데 말이죠.

인간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가 혼자 있을 때말고 남들과 같이 있으면 자꾸만 자기 행동을 조작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본 것을 시나리오로 해서 과도하게 연기를 한다는 말이죠. 교회에 가면 신앙인 연기, 동창회에 가면 동창인 연기를 하는데, 그것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과도하게 한다는 겁니다.

* 감추고 싶어 !!

왜 그렇게 합니까? 무엇인가를 감추고 싶다는 것인데, 하지만 이렇게 되면 인간은 둘로 쪼개진다는 말이죠. 하나의 '나'는 무엇인고 하니, 악마가 파견한 '나' 인데, 즉 "신앙인 행세를 하는 저놈을 끄집어 댕겨서, 계속해서 흑암의 권세에 머물게 해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 흑암의 권세에 있는 인간은 무엇인고 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내 인생을 꾸려나가자" 라는 것이죠. 그런데 주님의 일은 기이한데, 즉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흑암의 권세 아래에 놓여있는 악마의 밥인 인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두고 진리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즉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조건 옳아야 한다고, 그렇게 우기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런 우김이 과도한 연기로 나타나는데, 겸손한 연기, 온유한 연기, 믿음의 연기, 그렇게 자기가 조작한 것밖에 없다는 말이죠. 마치 백화점에서 마네킹에 철따라 옷을 입히듯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자기의 다른 자아를 입혀서, 자기가 아닌 자기를 계속해서 연출해서 만들어낸다는 겁니다. 물론 과도하게 말이죠. 그러니 꼭 드라마에 출연해야 연기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아이들을 보면, 자기가 혼자 있을 때와 남들과 같이 있을 때가 다른데, 그렇게 연출을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알아서 자기를 꾸민다는 말이죠. 자기를 주목해달라는 것인데, 그리고 "나는 이 분위기에 딱 맞는 사람입니다" 라는 식으로, 그때그때마다 자기 변신을 시도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동창회에서 동창생들을 만나게 되면, 술을 마시면서 허세와 허풍을 떨게 되는데, 자기가 상남자인 척을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옆에서는 거기에 분위기를 맞추어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취하게 되면 아무런 곳에서나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눈다는 말이죠. 마치 자유로운 영혼인 것처럼, 그런 흉내를 낸다는 겁니다.

* 야호, 피박에 쓰리고 !!

그리고 명절이 되면 다들 모여서 화투를 치게 되는데, 물론 여러분은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지 싶은데 말인데, 그렇지요? (ㅋㅋ) 정치나 종교 이야기를 하면 결국 싸움만 나고 하니, 그런 것은 다 때려치우고 방석을 깔고 고스톱을 치게 되는데, 보통 점당 백원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가 교회에 다니는 것을 아니까, 처음에는 자기는 돈에 욕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려고 적당히 하는데,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또 부수어 버린다는 겁니다. 조커에 쌍피에 광이 들어오게 해서 말이죠(ㅋㅋ). 그러면 그때부터 돈을 따는 것에 재미가 붙어서 음성이 높아지고 난리가 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연기를 하던 것이 다 들키고 만다는 것이죠.

그러니 결국은 자기가 자기에게 사기를 치는 것인데, 단 하루도 사기를 치지 않고 넘어가는 날이 없다는 겁니다. 그것도 상황을 봐가면서 하는데, 즉 자기를 조작을 한다는 말이죠. 자기가 아닌 것은 들키지 않게 숨겨놓는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10살짜리 손자에게 들키는데, 손자가 갑자기 "할아버지가 뭐 했대이" 라고 하는데, 그러면 할아버지는 지갑을 꺼내서 손자의 입을 막는다는 말이죠(ㅋㅋ).

그렇다면 인간이 왜 이런 짓을 하는고 하니, 그것은 철저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무엇에 말입니까? 자기 완벽, 자기 의로움, 거기에 허점이 보이지 않도록 철저함을 가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 인간은 매일같이 연기를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죠.

* 다른 사람 !!

하지만 성경은 철저함이 아닌 '기이함' 인데, 우수하고 완벽한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없는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시는데, 즉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기를 원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분위기를 맞추어줄 필요가 없는데, 철저함이 아니라 '다름' 이라는 겁니다. 성도는 다른 존재이어야 하는데, 매일같이 성화가 되고 하는 우수한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왜 기이해야 됩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기이한 일을 하셨는데, 즉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셨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하셨다는 것이죠. 이것은 우리가 믿고 싶어도 믿을 능력조차도 전혀 없는데, 그런데 그것을 주님께서 그것을 하셨다는 겁니다.

* 성도의 자유 !!

그러니 인간의 믿음으로, 즉 자기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의 믿음이 우리에게 선물로 꽂혀서 구원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 세상의 기분에 맞추어줄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것을 '자유' 라고 한다는 겁니다.

고스톱을 치면서 같이 놀 수도 있겠지만, 그런데 그렇게 같이 어울리는 것이 재미가 없다는 말이죠. 동서가 꼬드겨서 같이 고스톱을 치려고 했는데, 그래서 "권사라도 별 수 없네" 라고 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거부하니 사기를 치려든 것이 들통이 나고 마는데, 그래서 화를 낸다는 말이죠. "다른 사람들은 교회에 다녀도 잘만 고스톱을 치던데, 형님만 유별나나?"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순간이 온 것인데, "그것은 교회가 아니고 절이다"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는 겁니다. "우리 친구는 큰 교회에 다녀도 고스톱도 치고 점도 다 보더라" 라고 하면, "그것은 큰 절이다. 절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몰라? 자기가 복을 받으려고 다니는 곳이잖아" 라고 하면 되는데, 그렇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챈스가 주어진다는 말이죠.

* 십자가와 강냉이를 먹는 것의 관계는?

어제 오후설교시간에 문제를 낸 적이 있는데, 답변을 해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질문내용이 무엇인고 하니까, "십자가와 강냉이를 먹는 것의 관계는 무엇인가?" 라는 것인데 말이죠. 어제 누가 강냉이를 제법 튀겨 왔는데, 그래서 먹었다는 겁니다. 엉뚱한 질문 같은데, 질문 자체가 기이하다는 말이죠.

답변은 간단한데, 튀긴 강냉이를 먹은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살기 위해서 먹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너는 이미 죽었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강냉이를 먹는 것조차도 죄가 된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알려주는 관계라는 말이죠.

* 인간은, 기도를 멈출 수가 없어 !!

어제 멀리 일본에서 오신 분이 있어서 예배를 마치고 나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분이 "기도를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고 해서, "기도하는 것도 죄입니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그러면 기도를 하지 않아야 하겠네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그동안 그분은 기도를 하던 무엇을 하던 간에 자기 자신의 가능성, 즉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구원에 이르려고 했다는, 그런 티가 확 난다는 겁니다. 불가능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모르고, 즉 주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모른다는 말이죠.

그게 아니고, 자기가 할 도리를 다 하게 되면 주님이 예쁘게 봐주어서, 그런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보내고, 그런 노력을 하는 사람은 천국에 보내준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 노력으로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는 마음가짐이, 그게 기도라는 질문을 통해서 제대로 드러나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데, 죄가 되기 때문에 말이죠. 기도는 어린아이의 까불거림이고 어른의 발작인데, 인간은 자기가 존재하는 이상 멈출 수가 없다는 겁니다. 답답해서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입을 테이프로 발라도 기도를 멈출 수가 없다는 말이죠. 매 순간 인간은 형식과 관계없이 계속해서 기도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 죄인이라면, 짓는 것은 죄뿐 !!

그래서 "우리 손자가 1등을 했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데, 한 순간도 인간의 존재성과 그 계획은 멈춘 적이 없다는 말이죠. 남의 자식들은 모두 제치고 자기 자식이 1등을 하기를 원하는데, 그것을 멈추는 법이 없다는 겁니다. 그게 죄라고 하면 자기는 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죄인이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죠.

말은 죄인이라고 해놓고, 죄는 짓지 않겠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사기도 이런 사기는 없는데, 죄인이면 할 일이 죄를 짓는 것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우리가 마귀의 밥으로 출발했는데, 그래서 할 줄 아는 것은 마귀의 짓뿐이라는 겁니다. 그게 아닌 척을 하니, 그래서 연기가 시작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연기를 많이 해본 사람은 연기를 잘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어설퍼서 대번에 들통이 난다는 겁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연기를 능숙하게 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면 쉽게 노출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하지만 사기꾼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양쪽이 다 똑같다는 겁니다.

* 호랑이와 곶감 !!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는데, 옛날에 어느 마을에 할머니와 손자가 둘이서 살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이가 자주 운다는 말이죠. 그래서 할머니는 자기가 배운 것이 있어서 "자꾸만 울면 호랑이가 와서 잡아간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필 그때 산에서 호랑이가 내려와서 그 소리를 들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호랑이는 기분이 좋았는데, 자기보다 더 무서운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도 아이는 계속해서 우는데, 그러자 할머니가 "곶감을 줄 게" 라고 하니, 아이가 울음을 그친다는 것이죠. 그러자 호랑이는 깨닫게 되는데, "나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구나. 그게 바로 곶감이구나" 라고 말이죠. 그래서 호랑이는 곶감이 나올까 싶어서 산으로 다시 도망을 갔다는 겁니다.

다를 아시는 옛날 이야기이지 싶은데, 그렇지요? 이것을 그대로 해보면, 목사가 "집사님, 자꾸만 칭얼거리면 하나님이 벌을 주십니다" 라고 하니, 그래도 집사님은 끄덕도 하지 않고 "주여, 주시옵소서"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자 "계속해서 그렇게 하시면 하나님이 돈을 주십니다" 라고 하니, 그만 멈추었다는 겁니다(ㅋㅋ). 하나님보다도 돈이 더 세다는 말이죠.

* 계속해서 철저함을 더하는 인간 !!

이래도 우리가 연기를 하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이 조작이라는 겁니다. 존재에 대한 조작이란 말이죠. 왜 그렇게 합니까? 철저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저는 이런 인간입니다" 라고 하면서 살아가면 되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알고 자기 본성은 그게 아니니, 그래서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철저함에 철저함을 더한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성령을 받지 않은 자는, 즉 흑암에서 건져냄을 받지 않은 자의 경우에는, 자기가 가짜니까 오버해서 진짜인 척을 한다는 겁니다. "어디 복음이 없나?" 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찾아다니는 것도, 자기가 가짜라는 티를 내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이 기이한 것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요한복음 5장 28절입니다.

(요 5: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여러분이 이 말씀을 가지고 전도를 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예수님을 믿으면 잘 됩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기이함, 이런 기이함이 포함된 내용을 전해보았느냐는 겁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받아드릴 수가 없는 낯선 이야기를 전해보았느냐는 겁니다. 어떻게 하든지 꼬드겨서 교회에 데리고 나오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 기이함을 전해야 !!

그게 모든 인간은 무덤 속에 있어도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고 하는 것인데, 어디 숨을 곳이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도망을 칠 수 있는 자리가, 그게 이 세상에는 없다는 말이죠. 평생을 도망을 치면서 살다가 죽으면, 결국은 예수님 앞에 끌려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 보면,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고후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기이함으로 구원을 받았는가? 그게 아니라면, 네가 할 수 있는 능력을 총동원해서, 그것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서 구원을 따내려고 했는가?" 라는 겁니다. 즉 주님의 기이함이 그 사람을 장악하고 있는지, 그것을 가지고 주님은 심판을 하신다는 말이죠.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라고 하는데, 이것이 너무 너무 기이하다는 겁니다. 그렇게 기이하기 때문에, 기이함이 덮친 사람은 구원을 받는 것이 너무나도 쉽고, 이게 덮치지 않은 사람은 욕이 튀어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내가 철야기도까지 한 것은 어떻게 되나? 그게 말이 되나?" 라고 하면서 말이죠.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자기의 그런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지는데, 그러니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90이 넘은 시아버지도 직접 내 손으로 다 수발을 했는데, 그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인가?" 라고 나오는데, 하지만 의미가 없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자기가 할 수 있는 역량이니 말이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악마의 밥인데, 왜냐하면 흑암의 권세 아래에 갇혀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갇혀있으면서 괴성을 지르고 발작을 했는데, 악마에게 붙잡혀있으면서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데, 그게 바로 악마의 권세, 흑암의 권세, 어둠의 권세라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 인간에게 악마가 지시한 것이 있는데, "너는 정상적으로 살고, 지혜롭게 살아라. 제발 기이한 것은 찾지 말아라. 네가 할 수 있는, 그런 너의 역량으로, 너의 보람으로 살아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구원받은 사람의 경우에도, 그렇게 옛 자아가 자꾸만 자기 발목을 잡아당긴다는 말이죠. "너는 왜 그렇게 어리석어. 정상적으로 살아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어리석다' 라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자들이 하는 말인데, 기이한 요소에 대해서 어리석다고 평가를 해버린다는 말이죠. 남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난 것은 자기 능력이 아니고 주님의 능력이고 십자가의 능력이라는 것, 거기에 대해서 자기가 자기를 조롱한다는 겁니다.

* 자기가 자기를 설득하는 인간 !!

다시 말해서, "이런 인간아, 그런 것을 다 믿나? 정신을 차려라. 남들을 봐라. 그들은 다 정상이잖아. 그런데 너는 왜 비정상적으로 가나? 그래서 너희 집안은 화목이 되지 않잖아. 믿지 않는 남편과는 대화도 되지 않잖아. 자꾸 그렇게 해서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넣을래? 그러면 자식들도 너를 존경하지 않아. 좋은 관계를 맺어야지"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남들이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자기가 자기를 설득한다는 말이죠. 그럴 때 우리는 뭐라고 반응을 하면 될까요? "하나님, 저를 왜 이렇게 이상한 인간으로 만들어놓았습니까?" 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자가 진짜 성도라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납득할 수 없는데, 그런데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즉 흑암의 권세에 그대로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자기를 다 납득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의 능력과 실력으로 오늘날의 자기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자기 행동 하나 하나가 모두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할 수 있는 능력을 벗어나기 때문에, 외부에서 온 능력이 자기를 관여한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느끼기 때문에, 그런 전율로 인해서 "내 몸은 더 이상 내가 다룰 몸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자기가 알게 된다는 겁니다. 지금 여기에 파리 한 마리가 돌아다니는데, 그것도 우리 능력을 벗어나 있는 상태라는 말이죠(ㅋㅋ).

* 기적과 표적 !!

방금 제가 인간에 대해서 설명을 했는데, 그래서 주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능력이 왜 의미가 없는지, 그것은 왜 하나님을 기쁘게 하시지 못하는지, 그렇게 인간의 능력으로 하는 일을 막는 것을 동원하는 방식을 '표적'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기적과 표적은 엄밀하게 말하면 서로 다른데, 기적은 '놀랍다' 라는 반응이 나오지만, 표적은 사람을 화나게 만든다는 것이죠. 인간들은 기적이라고 여기지만, 주님은 그것을 표적으로 바꾸신다는 겁니다. 그 중의 하나가 '오병이어' 라는 것인데,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성인남자만 해도 5,000명을 먹이셨다는 것이죠.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치면 8,000명 정도는 되지 싶은데 말이죠.

(요 6: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요 6: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요 6: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 쯤 되더라

이 오병이어 사건으로 인해서 처음에는 사람들이 '놀라워라" 라고 했는데, 즉 기적으로 여기고 환호성을 내질렀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떡이 어디에서 나왔지" 라고 물으시는데, 그러자 사람들은 "떡에서 떡이 나왔고, 고기에서 고기가 나왔습니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하지만 주님은 이 기적으로 표적으로 바꾸어 버리시는데, 즉 "그것은 내 몸에서 나왔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의 반응이 그만 싸늘해지고 마는데, 왜 그러한 반응이 나옵니까? "당신은 왜 기이한 소리를 하십니까? 납득이 되는 이야기를 해주어야 믿어도 믿겠습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들은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능력을 믿습니다" 라고 하면서 따라온 자들인데, 즉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익을 제공해주시는 분이다. 저 분을 놓치면 우리는 손해다" 라는 입장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떼를 지어서 따라왔다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그런 기이한 이야기를 하실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다" 라고 하셨는데, 즉 "생명이 없는 것들이 기껏 구하는 것이 생명이 없는 육만 구하고, 배부른 것만 찾는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이게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데, 누가 26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요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 표적과 배부름 !!

여기 표적이 나오는데, 그 맞은 편에 배부름이 있다는 겁니다. 요즘 말로 하면 돈이 많다는 것인데, 그것으로 인해서 표적을 보지 못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흑암의 권세에 갇혀있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요즘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가 배부르기 위함인데, 즉 자기 행복을 위해서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으로 인해서 무슨 오류가 발생하게 됩니까? 주님의 표적을 보지 못한다는 겁니다. 자기 유익과 자기 복을 챙기는데 정신이 다 팔려서 말이죠. 주님이 계신 곳에 자기는 없다는 겁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는 주님 바깥에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주님이 기이함을 내놓으라고 하니, 자기는 기이함을 내놓을 게 없다는 겁니다. 기이함을 받았다는 연기는 하지만, 정작 기이함은 없다는 말이죠.

이 기이함이 어느 정도 좋은고 하니까,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흑암의 권세에서 이미 건져냄을 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어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주님이 주신 것이라면 무엇이든 받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이것을 주세요. 저것을 주세요" 라고 할 게 없다는 말이죠. 주신 것 자체가 감사인데, 그러니 이제 더 이상의 자기 소망은 탐심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기이함인데, 물론 남들이 보면 미쳤다고 하는데, 그런데 자기가 봐도 자기가 미쳤다는 말이죠. 남들을 보고 욕할 이유가 없는데, 자기가 봐도 정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미치는 즐거움이 있어야 하는데, 그럴 때 모든 제도와 전통과 역사, 그리고 남들의 평가와 시선으로부터 해방이 되는데, 그게 바로 '자유' 라는 말이죠.

가정이라는 조직, 교회라는 조직, 국가라는 조직,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도 이 기쁨에서 벗어나게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심지어 죽음조차도 기다려진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어떤 것으로도 협박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기이함이 너무나도 기이하기 때문에 말이죠.

목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전혀 없는데, 돈 5,000만원을 내었어도 전혀 아까운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목사에게 속아서 돈을 낸 것이 아니고, 자기가 자기에게 속았다는 말이죠. 장로라는 직분, 그것이 그만 자기에게 선악과가 되었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장로라는 직분이 유혹이 대상이 되었다는 것인데, 즉 "나는 장로, 마누라는 권사",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심지어 목사의 경우에도 그러하다는 겁니다. 기이함이 아니고 자기가 납득이 되는 것을 내놓게 되는데, 그러니 이게 연출이 된다는 말이죠.

* 어리석은 자들의 행렬 !!

그렇다면 "이거 나 혼자 미친 것이 아니냐?" 라는 생각이 들 수 있는데, 성경을 보면 위로가 된다는 겁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어리석은 자들의 행렬이 나오는데, 그것을 성경은 신앙인들의 행렬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신앙인들은 기이한 것에 감격해서, 거기서 기쁨과 희열을 느끼는데, 즉 자유를 누린다는 겁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게는 그야말로 미쳤고 또한 어리석은 것인데, 왜냐하면 누가 더 똑똑하다는 겁니까? 자기가 할 수 있는 능력과 재질을 최대한 발휘해서 자기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지혜롭다는 것인데, 그러면 누가 그것을 가르쳐주었습니까?

그게 바로 흑암의 권세이고, 그런 권세 아래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그런 주장을 한다는 말이죠. 물론 우리는 여기 모여서 이런 이야기를 하지만, 이 세상에 나가보라는 겁니다. 전부가 이런 이야기인데, 즉 "내가 이렇게 해서 이렇게 얻었다" 라고 하는, 그런 것들만 쏟아진다는 말이죠.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기이한 자들이 나오는데, 제일 먼저 누가 나옵니까? 4절에 아벨이 나오는데, 그런데 그 아벨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벨은 어리석기가 짝이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노아는 방주를 만들었는데,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그것은 아무런 짝에도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 보고 싶어요 !!

교회에 나가지 않는 집안식구가 뭐라고 놀립니까? "교회에 나간다고 하늘에서 쌀이 떨어지나? 무엇이 떨어지노? 그런데 왜 교회에 미쳐있노?" 라고 하는데, 그야말로 진지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조언을 한다는 말이죠. 물론 교회에 미치면 안 되는데, 그것은 그런 소리를 들어도 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미쳤다는 것은 자기 의로움에 미친 것인데, 그것에 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죄인됨에 미쳐야 한다는 말이죠. 이렇게 미친 사람들을 정말로 만나보고 싶은데, 저는 돌아가신 어머니보다도 그런 사람들이 더욱 더 보고 싶다는 겁니다.

여기서 교재 39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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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이 악에게 약하다. 이겨낼 수 없다. 아벨은 현 인간 세계를 통치하는 악에 의해서 살해를 당한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 붙잡힌 바가 된 인간에 대해서 이 세상의 악이 어떤 식으로 처단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따라서 아벨을 잃은 것은 이 인간 세계가 자체적으로 희망이 없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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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벨의 등장 !!

가인은 평소에 동생을 죽일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데, 그렇지요? 충동적으로 그 순간 그만 동생인 아벨을 죽이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게 가인에게만 지시하는 악마가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 지시하는 악마에 의해서 아벨이 죽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에 의해 붙잡힌 바가 된 인간이라고 하는데, 그게 아벨인데, 그것은 "이 아벨에 대해서 이 세상의 악이 어떤 식으로 처단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이 어리석은 인간아, 하나님을 왜 그런 식으로 믿느냐?" 라고 하면서 처단을 한다는 겁니다.

그 뒤에 더 중요한 것이 나오는데, "따라서 아벨을 잃은 것은 이 인간 세계가 자체적으로 희망이 없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 일이다" 라고 되어있다는 말이죠.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예수님을 살해한 것은, 이 땅에는 하나님이 없고, 악마가 그 자리에서 이 세상을 통치한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인데, 그러니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십자가만 전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말이죠. "당신이 교회에 나온 것도 죄입니다" 라고 증거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교회에 나오는 것은 자기 두 발로 운전해서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납득이 되는데, 거기에는 자기가 운전한다는 자기 능력이 포함되어있다는 말이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인데, 기이한 것이 아니고, 자기 능력에 포함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식들을 보고 교회에 나오라고 하면, "제가 가고 싶을 때 갑니다. 저도 하나님을 믿는데, 지금은 너무 바빠서, 때가 되면 다 갑니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자기가 할 수 있다고 나온다는 것이죠.

교회에 다니는 것을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데, 물론 교회에는 나올 수가 있지만 예수님을 믿을 수는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는 말이죠.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물어보면, 그게 지혜로운 것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고 말이죠.

이 세상에서는 자기를 똑똑한 사람으로 간주해준다는 것인데, 그것은 이 세상이 자기를 인정해준다는 것이고, 또한 자기를 같은 편에 넣어준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것을 흑암의 권세 아래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기이한 것이 무엇이죠?" 라고 하면, "그런 게 왜 필요합니까? 노력하면 됩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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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벨은 자식을 두지 않고 죽었다. 하나님에 의해서 받아진 자가 이 땅에서 대가 단절된 채 홀연히 사라졌다. 이로서 인간의 혈육은 하나님의 구원을 계속 간직하고 후손에게 이어줄 능력이 자체적으로 상실되었음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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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자식이 없어 !!

여기에 보면 "아벨은 자식을 두지 않고 죽었다" 라고 하는데, 아벨은 자식이 없이 죽었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러면 예수님에게 자식이 있습니까? 이런 질문은 처음 듣지 싶은데, 그렇지요? 예수님은 자식이 없는데, 왜냐하면 육의 인간은 받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육에게 죽은 인간은 받지만, 육의 인간은 받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달리 말하면, 어리석은 자는 받지만, 이 세상의 지혜에 속했다고 하는, 소위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은 전혀 받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오로지 기이한 자들만 받는다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받아진 자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됩니까? 여기 교재에 보면 "대가 단절된 채 홀연히 사라졌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사라졌으니 우리가 찾아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 인간이 아무리 힘을 다해서 예수님을 찾아도, 인간은 예수님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 저는 지옥을 보고 왔습니다 !!

어떤 분이 어제 우리교회 질문코너에 간증에 대해서 질문을 했는데, "지옥을 보고 온 간증이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고 말이죠. 그래서 제가 답변을 하면서 성경구절을 제시했는데, 그게 요한복음 20장 29절인데, 즉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란 겁니다.

(요 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거기서 제가 언급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간증을 듣고 싶어하는 것이 탐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기이한 것은 기이한 것으로 보존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자기가 이해하고 납득이 되는 것으로 전환을 시키는 것, 그게 바로 마귀의 지시를 받는 모습이라는 것이죠. 마귀는 계속해서 흑암의 권세아래에 두려고 "믿을 만한 것을 믿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다시 히브리서 11장을 보겠는데, 4절에서 16절입니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히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히 11: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히 11: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히 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히 11: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히 11: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히 11:15)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히 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 이 땅에 부동산이 없는 자들 !!

여기에 나오는 아벨을 하나님을 잘 믿다가 그만 형에게 맞아 죽었는데, 누가 봐도 재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 다음에 나오는 사람이 에녹, 노아, 그리고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이라는 겁니다. 에녹, 노아, 아브라함을 함께 묶게 되면,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고 하니, 이들은 이 땅에 부동산이 없는 자들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이 세상에 땅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16절에 보면,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라고 하는데, 그게 하늘에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늘이 고향이고 본적지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이 기이한 소리인데, 이 세상에서는 미친 소리이고 말이죠. 그러니 이들은 이 세상에서 위암에 걸려서 죽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속시원하게 본다는 겁니다. 위암 4기가 되어서 그렇게 나오니, 옆에서 간병하던 사람이 미친 사람으로 여긴다는 말이죠.

그러니 신앙이란 것은, 마치 "강냉이를 먹은 것과 십자가의 연관성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처럼, 벌써 잊었지 싶은데(ㅋㅋ), 그러니 이 세상은 우리가 떠날 곳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나이가 70이나 80이 되어서 알지 말고, 12살 때 좀 알았으면 좋겠다는 말이죠. 그러면 천재인가요?

"목사님, 그것은 나이가 들어봐야 압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저는 거기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는 겁니다. 나이가 들면 연기가 늘어나서, 아는 것처럼 연기를 한다는 말이죠. 살만큼 살았으니 더 이상 좋아 보이는 것도 없고, 그래서 "모르겠다. 나에게 무엇이 이익일까? 훌쩍 떠나는 것이 이익이겠지" 라고 하는데, 그것은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이지 믿음이 좋은 게 아니라는 겁니다.

* 내 나이가 어때서 ♬

도저히 어쩔 수가 없어서 "주님, 믿습니다. 이제 아무런 미련도 없습니다. 떠나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도대체 믿기는 무엇을 믿느냐는 말이죠. 그러다가 건강이 좀 좋아지면 어떻게 나옵니까? "내 나이가 어때서" 라고 노래를 부른다는 겁니다. 제 눈에는 모든 게 사기를 치는 것으로 보이는데, 나이가 들든 말든 간에 말이죠. 입만 열면 거짓말인데, 그리고 신앙도 없으면서 있는 척을 하고 말이죠.

그리고 20절에 보면,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라고 하는데, 이삭이 어긋맞게 축복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도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당연히 장자가 잘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인지상정이라는 겁니다.

(히 11: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 부모의 과도한 맏이사랑 !!

그러면 부모가 왜 맏이를 좋아합니까? 맏이는 자식의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온 대상이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반면에 둘째는 이미 자식의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왔기 때문에 덜 사랑스럽다는 겁니다. 하지만 맏이는 없음에서 튀어나온 자식이기에, 사랑의 집중력을 거기에 다 쏟아 붓게 된다는 말이죠.

여기에 다들 공감을 하지 싶은데, 그렇지요? 그래서 맏이는 아무리 사고를 치고 사업을 하다가 말아먹고 해도, 부모는 "또 무엇을 해줄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반면에 둘째에 대해서는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식들 간에 싸움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 제공자는 부모라는 겁니다.

부모의 과도한 맏이사랑으로 인해서 자식들의 분란을 일으키게 해놓서는, 자기 가슴을 자기 손으로 치는데, "내가 자식놈들 때문에 살아갈 수가 없어" 라고 하면서 말이죠. 명절이 되면 첫째 며느리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데, 그러면서 "둘째가 알아서 다 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ㅋㅋ). 편애도 그런 편애가 없다는 말이죠. 인간이 얼마나 자기 위주인지 모르는데, 이게 곧 흑암의 권세이고 악마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 고생길을 자처한 모세 !!

그 다음에 23절 이하를 보면 모세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모세는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고생길을 들어서게 되는데, 이게 누가 보더라도 미친 짓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은 이것을 지혜롭다고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세상과 반대가 되어야 마땅하기에 말이죠. 그래야 기이함이 산다는 것이죠.

(히 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히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히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히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 접속면 !!

다시 말해서, "나는 네가 알고 납득하는 것을 믿지 않는다. 나에게는 네가 아무리 해도 뚫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라는 겁니다. 그것을 '접속면'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 서로 다른 상이한 영역에서 접점이 되는 것을 분명하게 표현해주는 것인데, 마치 투명한 유리판과도 같다는 말이죠.

두 개의 나누어진 경계면을 형성하고 있는 접속면, 그것이 곧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 믿음 안에 주님의 표적이 들어가 있다는 말이죠. 오병이어 사건 때 예수님과 민중들은 같이 있으면서도, 각기 다른 세계에 놓여있었다는 겁니다.

한 쪽은 떡을 먹은 배부름이고, 다른 쪽인 예수님은 "그것이 바로 너희들의 죄야" 라고 규정을 하신다는 것이죠. 그러면 민중들은 "이것이 어떻게 죄가 됩니까? 우리도 먹고 살아야하지 않습니까?" 라고 나오는데,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들의 관심사가 납득이 되는 것에만 있는데, 그것이 바로 흑암의 권세이고, 그래서 그게 죄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기이함이 있어야 하는데, 즉 "내 인생이 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가?" 라고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그냥 안 된다고 해버리면 곤란하고, 그러한 것이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아하, 이렇게 나는 나만 챙기는 죄인이구나.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도, 나는 예수님을 죽이는데 찬동할 수밖에 없는 심성을 가진 자로구나. 그것을 나는 내가 죽을 때까지 버릴 수가 없구나"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은 그러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는데, 그러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는 겁니다. 자기 목숨보다도 예수님이 더욱 더 소중한데, 자기가 죽는 것이 겁나고 위험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생각하지 못한다고 하면, 그것이야말로 위험하다는 겁니다.

* 어리석음의 행렬 !!

그래서 모세는 공주의 아들됨을 거절하고, 요즘 말로 하자면 재벌 2세가 되는 것을 거절하고, 그야말로 생고생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말이죠. 이것을 교회에서는 보통 '믿음의 행렬' 이라고 하는데, 저는 이것을 '어리석음의 행렬' 이라고 하고 싶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어리석음의 행렬에 저와 여러분이 감히 끼어있다고 하면, 그게 얼마나 좋으냐는 말이죠. 사람들이 "당신은 정말 어리석구나" 라고 하는 소리를 그야말로 행복하게 들을 수 있는 자가 된다고 하는 것, 그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 소리에 화가 나는 것이 아니고, 기분이 좋어진다는 말이죠.

그래서 속으로 "니가 자유의 맛을 알어?" 라고 하는, 즉 아무리 설명을 해도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 진리를 우리가 품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르겠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분위기가 어제부터 오늘까지 저 혼자서 기쁜 것 같은데 말이죠(ㅋㅋ).

계속해서 교재 40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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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벨은 자식을 두지 않고 죽었다. 하나님에 의해서 받아진 자가 이 땅에서 대가 단절된 채 홀연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로서 인간의 혈육은 하나님의 구원을 계속 간직하고 후손에게 이어줄 능력이 자체적으로 상실되었음이 드러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벨의 계열은 무(無)에서 새로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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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아벨의 씨를 겨냥한 새로운 자식이 출현한 것이다. 사람들은 알았는데, 이것은 인간 육의 한계를 극복하고, 더 나아가서 악의 지배마저 극복한 다른 분에 의해서 주어진 결과인 것이다. 그 분이 과연 누구일까?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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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無)에서 새로 생겨난 자식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아벨이 자식이 없이 죽었는데, 즉 대(代)가 끊어졌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육의 자손은 받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창세기 6장 3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라고 하는데, 육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와는 다른, 기이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창 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여기 교재에 보면 "그런데 놀랍게도 아벨의 계열은 무(無)에서 새로 생겨났다" 라고 하는데, 즉 없음에서 새로 생겨났다는 겁니다. 그렇게 없음에서 새로 생긴 것은 무엇입니까? 대(代)가 끊어진 이름에서 새로 등장한 이름이 있는데, 그 이름이 곧 '주의 이름' 이라는 말이죠. 그때 비로소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대가 끊어진 지점이라야 비로소 등장하는 이름, 실제로 이 땅에 오신 어떤 존재, 그게 바로 주의 이름인데, 그 주의 이름이 무슨 일을 하십니까? 창세기 7장을 보면 노아홍수를 일으켰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이 땅을 완전히 작살을 내버린다는 겁니다.

그게 창세기 4장에 나오는데, 25절과 26절을 보겠습니다.

(창 4:25)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 죽은 자의 후손 !!

여기 25절에서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라고 하는데, 이런 것이 참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말이죠. 아담과 하와가 동침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러면 그 아들은 누가 봐도 아담과 하와의 아들이고 자식이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여기 25절에서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라고 하는데, 즉 "죽은 아벨을 대신해서 주어진 다른 씨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러니 그 자식을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 아니라 죽은 자의 후손으로, 그렇게 전환을 시킨다는 겁니다. 그리고 26절에 보면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라고 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등장한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즉 인간을 모두 죽이고 나서 하나님은 등장하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터질 때, 그것은 바로 "모든 인간은 다 죽었다" 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라는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아직도 인간들이 이렇게 살아있지 않습니까?" 라고 말할 수가 있는데, 하지만 어차피 인간은 다 죽는다는 겁니다. 어차피 모두가 다 죽어가고 있다는 말이죠. 생명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있는데, 육의 세계에서는 생명이 없다는 겁니다. 육으로 태어난 것은 죽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이죠.

그렇게 인간은 모두 죽기 위해서 태어났는데, 하지만 택한 백성은 그렇게 죽을 때까지 누구를 알게 하신다는 겁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알게 하신다는 겁니다. 즉 "아하, 나는 잘려야 마땅하구나" 라는 것인데, 육에서 생명은 오직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 한해서, 즉 주의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아는 자들에 한해서 주어진다는 말이죠.

그게 곧 구원인데, 사도행전 2장 21절에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인데,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 너무나 마땅하다는 겁니다. 강냉이를 먹고 살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죽으려고 먹으면 된다는 말이죠.

(행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니 죽고자 하는 일은 무엇인지 괜찮은데, 간증이 왜 문제입니까? 자기가 죽는 것이 아니라, 살려고 그런 간증을 좋아한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손자를 보더라도, "내가 손자를 보다가 죽어야지" 라고 하면, 그것도 역시 주의 일이라는 겁니다. 실제로 몸이 죽어나는데 말이죠(ㅋㅋ).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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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셋의 등장은 하나님의 이름 아래서 인간의 이름이 어떤 식으로 쓰여지느냐가 드러나게 하였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그냥 악마에 내맡겨지게 하여 순순히 죽음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아담의 형상'을 중심으로 등장하는 악마를 발각시켜 처단하는 계기로 삼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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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 사세요 !!

여기에 보면 "이 셋의 등장은 하나님의 이름 아래서 인간의 이름이 어떤 식으로 쓰여지느냐가 드러나게 하였다" 라고 하면서 '쓰여진다' 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렇게 쓰여진다는 것은 "나는 나다" 라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는 나다" 라는 것은 이미 깨어졌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쓰여진다' 라는 것은 "피조물로서 주를 위해서 사용되어진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는 주님과 같이 있는데, 주님께서 알아서 사용을 하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가라고 하면 가면 되고, 오라고 하면 오면 된다는 것이죠. 그게 바로 성도이고,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의 태도라는 겁니다.

(마 8: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마 8: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저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많이 하는데, "구원받은 자는 어떻게 살면 됩니까?" 라고 말이죠. 그러면 저는 "막 사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막국수를 아십니까? 그렇게 막 살면 된다는 것이죠. 막 사는 것에 대해서 걱정을 한다면, 즉 "막 살다가 망하는 수가 있겠다. 그렇게 망하면 안 되지" 라고 한다면, 그것은 혼자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 나는 망할 자신이 없어 !!

이제 이것만 하고 마치겠는데, 우리 인간의 본심이 정말로 한심스러운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 인간은 "나는 망할 자신이 없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자기를 관리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가 망하면 자기만 손해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아무리 "너는 죄인이다. 너는 이미 죽었다" 라고 해도, 그런 성경말씀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본심은 "그러면 안 되지. 나는 망하면 안 돼" 라고 하면서 고개를 가로 젖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가 망할 자신이 없다고 하는 것, 그게 바로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완벽하게 티를 내고 있는 모습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망해도 괜찮은데, 왜냐하면 망해도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다는 겁니다. 이런 말을 하기가 좀 미안하기도 한데, 대번에 "니는 그렇게 살아?" 라고 따질 것만 같다는 말이죠(ㅋㅋ).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망해도 영원한 생명이 있는데, 이게 바로 성도의 기이한 삶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는 기이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방식대로 이 세상을 살아가지 말게 해주시고, 오직 주님이 가게 해주신 그 기이함에 대해서 찬동하고 공감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그런 저희들이 되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2,4,28 오전 10시에 마침.

오늘도 주님께서 부채도사를 만나게 해주시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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