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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25 13:23:43 조회 : 109         
[22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9 - 언약의 내부(수정) 이름 : 구득영(IP:183.102.224.162)
[22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9 - 언약의 내부

22,06,20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이스라엘 내부로 번진 전쟁 !!

오늘은 교재 58페이지부터 하겠는데, 여기에 '이스라엘 내부로 번진 전쟁' 이라고 되어있다는 겁니다. 대한민국의 국군이라면 북한의 인민군과 전쟁을 하게 되어있는데, 그런데 대한민국의 내부와 전쟁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 나라에 심각한 문제가 있고, 믿을 게 못된다는 것이 드러난다는 말이죠.

대한한국의 국민들을 보호해주어야 할 것이 국군인데, 그런데 그 국군이 오히려 국민들을 대상으로 해서 전쟁을 벌인다고 하면, 그러면 더 이상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나라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대한민국 속에 진짜 대한민국이 따로 있다고 볼 수가 있다는 것이죠.

그것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인데, 주변의 이방나라와 전쟁을 해야하는 것이 곧 이스라엘인데, 그런데 전쟁의 방향을 이방나라가 아니고 이스라엘 내부로 돌렸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것은 이스라엘이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니고, 이방나라가 되고 말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 인간배제 !!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이 왜 방향을 틀었는고 하니, 그것은 언약의 내용이 있어서 인간을 배제시키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죠. 인간, 또는 인간문제인데, 그것을 제쳐버리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인간의 위한 언약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말이죠.

쉽게 말하면, 교회는 교회문제나 사람문제를 해결하는 곳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가짜교회는 그런 것만 해결해주지만, 진짜 교회는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고민이나 인생상담, 이런 것을 교회에서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살아가면서 힘든 일이 많이 있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지?"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여기서 교재 58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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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해서 홍해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오직 여호와의 말씀에 의해서 구원되었듯이, 이 전쟁의 취지는 다시 이스라엘 내부로 이어져 '의 없음'으로부터 '의 남김'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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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무슨 말인고 하니, 구원문제가 날아가 버리고, 그게 의의 문제로 전환이 된다는 겁니다. 구원이란 것이, "나, 우리가정, 우리국가, 우리교회" 라고 하는 문제에서, 이제는 "의가 있는가? 없는가?" 라고 하는 문제로 전환이 된다는 말이죠.

* 의(義)가 있는가? 없는가?

그런데 만약에 계속해서 구원문제로 남아있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 구원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인데, 그래서 "나는 구원을 받았는데, 너는 구원을 받았나?"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의(義)' 중심이 아니고, 그만 이스라엘 중심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니 "남쪽의 신자들은 구원을 받았는데, 북쪽은 어떻게 하지?" 라고 한다면, 이런 것이 그야말로 쓸데없는 짓이라는 말이죠. 남한에 사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나' 라고 하는 덩어리 자체가 '의' 문제에 들어가게 되면, 이것이 배제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의가 있는가? 없는가?" 라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의가 있으면 구원이 되고 없으면 구원이 되지 않는데, 그런데 의 문제가 아니고 구원문제에 머무르게 되면, "내가 여기에 있으니 나를 구원해주세요"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모든 관심사기 자기 구원에 집중하게 되는데, 즉 "신이시여, 나를 어떻게 구원하실 겁니까?"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의' 문제로 넘어가게 되는데,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나옵니까?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하신다고 하니, 그들이 어떤 오해를 하는고 하니, 이방민족들이 있는데, 그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구원이 됩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 하나님이 자기들 편에 서서 적들을 물리친다고 여기게 된다는 말이죠.

*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등장하는가?

그런데 그만 하나님이 적의 방향을, 이방민족이 아니라 이스라엘 쪽으로 돌리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이 "우리는 어떻게 구원이 됩니까?" 라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사에서 떨어져 나가있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아니고, 자신의 의에 관심이 있다는 말이죠.

이 의가 바로 언약의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는데, 그러면 자기가 사는 게 아니라 언약이 사는 것이고, 자기가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그것보다 더욱 더 근원적인 문제로 접근하게 되는데, 즉 "죄밖에 없는 이 세상에 의가 어떻게 등장하는가?" 라는 하는, 거기에 관심을 두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의에 관심이 있다고 하면, 우리도 자기 자신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데, 그렇지요?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등장하는가?"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 의는 완전한 의인데, 이것이 바로 언약의 알맹이라는 겁니다.

* 오직 '하나님 이름'의 희생 덕분에 !!

그러면 이 의는 어디서 생깁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 이름의 희생인데, 이름이라고 하니 또 골치가 아프지 싶은데, 땅에 오신 하나님을 '하나님 이름'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이 땅에 나타난 것이 이름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을 '주(主)'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주님의 희생만이 의를 만든다는 것이죠.

이것을 정리하게 되면, "언약대로 누군가가 오셨고, 그 하나님의 희생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의가 남겨지게 되면, 비로소 언약은 완성이 된다" 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는 "나는 어떻게 됩니까?" 라는 것이 완전히 배제가 된다는 말이죠.

* 인간의 감정, 그것이 문제 !!

이게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그러면 감정적으로도 과연 그러하냐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이 원칙에 그만 자기를 엮어버리는데, 그게 로마서 9장 3절이란 말이죠. 이 구절을 할 때마다 저는 미국 뉴저지의 펠로우쉽 교회에서 첫 번째 했던 강의가 떠오르는데, 9장 3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롬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 나의 구원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나의 구원이다 !!

여기에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자신의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곳에 관심을 두는 것인데, 그런데 그게 자기 구원이라는 말이죠. 즉 "나의 구원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나의 구원이다" 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슬쩍 이용해서 천국에 가려고 하는 인간들의 꼼수는 다 걸려서 넘어지고 만다는 것이죠. 하나님께 온갖 모든 충성을 다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구원을 챙기기 위한 것인데, 그러니 이것은 자기에게 충성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여, 제가 어떤 희생을 하면 됩니까?" 라고 하면서, 자기가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다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언약을 위함이 아니고, 주님의 희생을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를 위함이 아니고, 오직 자기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언약에서 배제가 되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보여주신다는 겁니다.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심보를 가지고 있었는데, 구약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잘렸는지, 그것을 보여준다는 말이죠.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그렇게 방해한다는 겁니다.

*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를 생각하라 !!

2차대전 때 어떤 신참 조종사가 출격을 하려고 하는데, 상관이 "두렵지 않나?" 라고 하니까, "예, 두렵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자 "그때는 어떻게 하지?" 라고 하니, "저는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상관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게 굉장히 중요한데 말이죠.

상관이 하는 말이 "어머니를 생각하지 말고 아버지를 생각하라"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적진을 향해서 출격하려고 하면 매우 두려운데, 그래서 신참 조종사는 자기 어머니를 생각을 하면서 그 두려움을 이기려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어머니라는 존재는 감정적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그런 감정에 휩싸이면 그게 더 위험한데, 반면에 아버지라는 존재는 냉혹하고 냉철한데, 만약 아버지가 그 현장에 있었다고 하면 뭐라고 했겠습니까? "너는 조국만을 생각해라. 가족을 생각하지 말고, 냉철한 이성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오직 그것만 생각하라" 라고 나올 것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 냉철한 사도바울 !!

지금의 이런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지?" 라고, 그렇게 개인적인 이익과 노림수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가?" 라고, 즉 하나님의 언약 안에 과연 무엇이 담겨있는지, 그것을 아주 냉철하고도 냉혹하게 생각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게 로마서 9장 3절인데, 사도바울은 아주 냉철하다는 겁니다. "내가 끊어져서 저주를 받는다고 해도, 주님이 원하신다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해한다" 라고 하는데, 그게 주님의 일이라고 하면 자기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죠. 이런 태도, 이것이 사도바울 안에서 작용하는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죠.

* 인간은, 하나님의 의를 운반하는 운반체 !!

이것을 정리하면, 이전에는 하나님을 믿는데 있어 다른 목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곧 자기 구원인데, 즉 "내가 죽어서 천국에 가겠다" 라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기 구원이 있던 자기의 그 핵심요소에, 그것이 '하나님의 의'로 바꿔진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언약의 완성이고,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자기 노림수를 빼고, 거기에 주님의 희생을 집어넣게 되면, 인간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담는 껍데기, 혹은 하나의 그릇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됨으로서 우리는 이 세상에 나타난 완벽한 하나님의 의를 운반하는 운반체가 된다는 겁니다. 오늘 여기에 부산에서 오신 분이 계시는데, 주님의 희생을 운반하면서 이렇게 대구까지 왔다는 말이죠.

* 본색이 드러나는 이스라엘 !!

지금도 어렵지만 조금 더 어려운 것을 해보면, 여기서 무엇이 어려운고 하니,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그 본색이 다 드러난다는 겁니다. 이 본색이라는 것은 몰래 감추어놓은 것인데, 그런 자기 본색과 본성이 다 폭로가 된다는 것이죠.

그것이 교재 61페이지에 나오는데, 여기에 보면 성경구절이 두 군데 나오는데, 그게 여호수아서 11장 20절, 그리고 사사기 21장 25절이라는 겁니다.

(수 11:20)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 두 개를 서로 연결시켜보면, 이것이 왜 어려운 이야기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먼저 여호수아서 11장 20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뜻은 다들 알지 싶은데,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이방민족들이 쳐들어오는 것은, 그들의 의사가 아니라는 말이죠.

*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

그러면 누가 그렇게 하게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여기 20절에서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라고 하는데,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자기들 편인데, 그렇지요?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기의 편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죠. 바로 이런 발상이 어렵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한 것을 다 불도저로 밀어버려야 한다는 말이죠. 우리는 하나님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쓰는데, 그런데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을 했겠느냐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정성을 다해도 그 정성을 하나님은 받아주지 않는데, 하지만 우리는 받아준다고 억지를 부리고 싶다는 것이죠.

"상대방은 나에게 오만상이 다 떨어졌지만, 나는 상대방을 포기하지 못한다" 라고 하면, 그러면 여기서 누가 고생입니까? 자기만 고생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사랑이라는 말이죠. 상대방은 자기에게 정이 없는데, 그런데 자기가 상대방을 포기하지 못해서 상대방이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게 하려고 그야말로 난리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인간인데, 그러면 이것을 인간 쪽에서 고칠 수 있습니까?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가 미련이 남아있다는 겁니다. 상대방을 너무나 일방적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포기를 못하는데,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사랑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만 힘든다는 말이죠.

* 주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방법 !!

그럴 때 하나님이 진짜로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까, 이스라엘은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는데, 그래서 이스라엘 쪽에서 하나님을 포기하도록 하나님이 조치를 취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이방민족들을 부추기는 것이란 말이죠.

이게 어렵다는 것인데, 그런데 따지고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진심입니까? 전혀 아닌데, 이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는데, 그 멋있는 곳에 나도 죽어서 합류하고 싶어라" 라고 하는 마음가짐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인데, 그러한 자기의 본심은 감추고, 겉으로 "하나님께 충성을 다했습니다" 라고 하는 폼을 잡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야말로 웃기지도 않은 것인데, 인간들이 일방적으로 시나리오를 다 짜고 있다는 말이죠. 진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그런 '나'를 사랑한 적이 없는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도 역시 이스라엘을 사랑한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 하나님의 '이스라엘 조지기' !!

이것은 바로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대상으로서의 이스라엘인데, 그것을 주님께서는 그만 없애버린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진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데, 그런데 기존의 이스라엘은 자기가 이스라엘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물론 우리도 그러하고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대로 "나는 내 백성을 사랑한다" 라는 것을 지키려고 하면, 착각하는 이스라엘을 없애버려야 그래야 진짜 이스라엘이, 즉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이 드러나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이스라엘이라고 우기는 기존의 이스라엘이 사라져 주어야 하는데, 이것을 '나' 위주가 아닌 이스라엘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스라엘이 돌아올 수만 있다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끊어질지라도 괜찮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사도바울은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는데, 가짜를 부수면 그 뒤에 진짜가 나온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떨어져 나가주어야 진짜 하나님이 보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떨어져 나가지 않는 하나님은 왜 가짜이고 이스라엘은 왜 가짜입니까? 그것은 자기 이익과 결부되어서 그렇다는 말이죠. 인간은 그 관심사가 자기에게 있는데, 그런데 주님은 관심사는 하나님의 의에 있다는 겁니다. 그 의가 있어야 하는데, 그래야 악마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이 의는 90퍼센트 의가 아닌데, 100퍼센트 완벽한 의라는 겁니다. 그래서 두 번 다시 정죄함이 없다는 겁니다. 그 정도는 되어야 하나님의 의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늘에서 물 심판이 나고 불 심판이 나도, 이 의가 있는 이상 전혀 구원에는 이상이 없다는 겁니다.

이 완벽한 의는 인간의 행함으로는 얻을 수 없는데, 율법을 다 지켜야 하는데, 그런 인간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서도 이 의를 탐내는데, 그래서 이런 인간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제거하고 하나님의 의가 만들어낸 새로운 이스라엘이 등장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이것을 위하여 이방나라와 전쟁을 벌이시는데 있어서, 그 전쟁의 방향을 이스라엘 쪽으로 바꾸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보고 "너희가 나의 적이다" 라고 하시면서, 이스라엘 조지기에 나서신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적이 이방나라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되었다는 겁니다.

*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

계속해서 여호수아서 11장 20절을 보겠는데,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라고 하고, 그 다음에,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라고 하고, 그리고 이게 중요한데, 그 다음에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라고 한다는 겁니다.

(수 11:20)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그렇다면 진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의가 들어오는 방식이 무엇일까요? "1번, 행함이다. 2번, 선물이다" 라고 하면, 여기서 몇 번입니까? 2번인데, 선물이라는 말이죠. 인간의 행함은 안 되고, 은혜를 주시는데, 그게 곧 선물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데,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장착이 된다는 말이죠.

여기에서 '장착' 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는 없었는데 외부에서 와서 자리를 잡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장착이 되면, 이방민족의 경우에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의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진멸의 대상이라는 말이죠.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무조건 진멸의 대상이라는 겁니다.

* 불가능성 !!

그래서 진짜 이스라엘, 즉 진짜 성도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거기서 항상 하나님의 의가 나오게 된다는 말이죠. 이렇게 하나님의 의가 나오는 것, 이것을 '불가능성' 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의가 인간을 배제하고 하나님의 희생으로만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러니 이것은 불가능성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행하지 않은 불가능성이 나온다고 하면, 그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백퍼센트 성도라는 말이죠. 이것은 전혀 저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고, 그게 로마서 1장에 보면 나오는데, 17절과 18절을 서로 대조해서 보면 알 수 있다는 겁니다. 17절과 18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것을 어제 낮 시간에 시간이 없어서 간단히 언급만 하고 지나갔는데, 여기 17절에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무엇이 나타납니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말이죠. 또한 16절에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라고 한다는 것이죠.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 하나님 앞에서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

이것도 어제 낮 시간에 이야기했는데, 인간이 분노하는 이유는 수치 때문이라는 겁니다. 자기 인생이 남들이 보기에 엉망으로 비칠까봐 싶어서, 그래서 그것을 방어한다고 분노가 일어난다는 것이죠. 그러면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하면, 그러면 인간은 자유를 얻는다는 겁니다.

인간이 자살하는 이유는 부끄러움 때문인데, 그래서 한강의 마포대교에 간다는 말이죠. "이런 낯짝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 라고 해서 죽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도라고 하면 이 세상의 부끄러움은 넘어서야 하는데,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재간이 없는데, 그래서 하나님 쪽에서 선물로 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담겨있다는 말이죠.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구약전체를 다 꿰뚫고 하는 것인데, 구약전체를 살펴보면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저주를 받아서 이스라엘은 멸망을 했다는 것이죠.

* 놀라운 기쁨의 소식, 곧 '복음' !!

그런데 세상이 끝장나는 이 마지막 때에 놀라운 기쁨의 소식이 들려왔는데, 그것을 두 글자로 '복음'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다는 겁니까? 물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지키고 하면서 내세우고 싶은 것도 있지만, 그런 것들은 모조리 실패로 끝났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유일한 방식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곧 율법의 완성인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께서 공짜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방식이란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의를 받게 되면, 그런 사람은 이 땅에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자기 얼굴을 들고 다녀도 괜찮다는 말이죠. 그 어디를 가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게 로마서 8장에 나오는데, 35절에서 39절입니다.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경우에라도 우리가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경우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에 말이죠.

* 이 의는, 백퍼센트 주님의 희생 !!

아무리 가난하고 몸이 아프고, 그런 것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는데, 오히려 그런 것을 내놓을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곧 하나님의 의인데, 그 의는 자기가 말씀을 지켜서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것은 주님의 희생인데, 거기에 인간의 희생은 전혀 들어있지가 않다는 겁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이 주시는 불가능성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그것이 하나님의 의고 복음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라고 했는데, 이런 사도의 기쁨과 환희와 즐거움을 우리가 같이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 이미 확정된 '진노의 날' !!

이게 17절인데, 그러면 왜 이것을 18절과 같이 언급해주어야 빛이 나는고 하니, 18절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나오는데, 하나님의 진노의 날, 즉 저주의 날은 이미 확정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것이 로마서 2장에 나오는데, 오늘은 거기까지는 하지 못하지 싶은데 말이죠.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하나님께서 저주를 하시는 것은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완벽한 의가 없는 자에게는, 그 사람의 인품이 아무리 뛰어나고 학식이 많고 제 아무리 착하게 살았다고 해도, 모조리 다 저주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완벽한 의가 아니기 때문에 말이죠.

* 인간은 완벽한 의를 알 수가 없어 !!

그렇다고 하면 지키는 것은 나중의 문제이고, 무엇이 완벽한 의인지 우리 인간이 알 수가 있습니까?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알 수 없는데, 우리는 조금만 착하면 그것이 착한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는데, 그 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우리에게 그 의를 일방적으로 선물로 주셨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복음인데, 그 복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저주가 임하도록 저주의 날을 확정하셨다는 겁니다. 광복절이나 개천절만 있는 것이 아니고, 가정의 날만 있는 것이 아니고, 저주의 날도 있다는 말이죠. 찾지 않으려고 했는데 또 찾아야 하겠는데, 그게 로마서 2장 5절에 나옵니다.

(롬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여기에 '진노의 날' 이라고 나오는데, 특정한 시간대를 정해놓았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데, 하나님의 의가 없는 자들은 모조리 진노의 대상이라는 말이죠. 그것은 사도바울이 아는데, 그래서 답답해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빚진 자' 라고 하는데, 그래서 정신도 없이 전하기에 바빴다는 말이죠.

(롬 1: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롬 1: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예수님의 희생이 담긴 그 의가 아니면, 교회든 뭐든 간에 전부 다 작살이 난다는 겁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자기 속에서 불가능성이, 즉 자기에게 기초하지 않은, 자기가 행할 수 없는 것이 나오느냐는 것인데, 그런 불가능성이 나오면 하나님의 의이고, 그게 아니라면 그것은 자기 잘남이라는 겁니다.

* 우리가 선량한 사람입니까?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나 던지겠는데, 여러분이 답변을 한번 해보세요. 지금 제가 하고 싶은 질문은 "우리가 선량한 사람입니까?" 라는 것인데, 친절하게 보기도 제시해 드리겠는데, "1번은 예스, 그리고 2번은 노" 라는 겁니다(ㅋㅋ). 물론 우리가 정답이 2번인 것은 아는데,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은 많이 들어서 안다는 말이죠.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은 가짜이고, 우리의 마음은 항상 자기를 선량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내가 뭐가 나쁜데?" 라고 하면서 말이죠. 아직도 경찰서에도 한번 가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리고 평생을 자식 키우는데 다 바쳤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를 선량한 사람이라고 간주하는데, 모든 행동이나 태도가 다 그러하다는 말이죠.

그러니 지금 신천지가 아니고 바로 우리 자신이 문제라는 겁니다. 144,000명이라고 하는 만화와 같은 내용이 문제가 아니고, 자기 자신이 선량한 사람으로 행세하고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문제가 된다는 말이죠. 이런 것은 가능한 것인데, 자기 행동을 조심하면 된다는 겁니다. 평소에 불가능성이 나와야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건드리면 가능성이 나온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오랜만에 대구강의에 가는데, 그러면 과자라도 좀 사서 가야 되겠다" 라고 한다면, 그런 것은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저기 뒤에 과자가 놓여있는데, 그렇다면 왜 과자를 사왔을까요? 그것은 자기가 선량해서 그러한데, 지금 괜히 비싼 돈을 들여서 과자를 사와서 완전히 얻어터지고 있는데 말이죠. (ㅋㅋ)

자기는 어느 정도로 기본적인 예의가 있다는 것인데, 하지만 그러한 기본예의가 자기를 지키고 방어하는 용도로 계속해서 활용이 되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 방어에 말이죠. 그렇다면 복음은 언제 나오느냐는 겁니다. 그런 것이 복음이 나올 기운을 다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죠.

* 어떤 이스라엘이 진짜 이스라엘인가?

다시 교재 61페이지로 돌아가서,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는데, 그렇다면 어떤 이스라엘이 진짜 이스라엘입니까? 그것은 오직 은혜만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이 진짜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여호수아서 11장 20절에 근거해서 말이죠.

(수 11:20)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오직 은혜만으로, 즉 불가능성으로 인해서 감사하는 것이 진짜 이스라엘인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저쪽에는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 은혜는 이스라엘만 입었다는 말이죠. 그리고 마지막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라고 하는데, 이제 또 어려운 것이 나온다는 겁니다.

* 과연 어느 쪽이 진멸의 대상인가?

그러니 진멸의 대상은 은혜가 없는 쪽인데, 지금 여호수아서 11장에서는 그 대상이 이방민족이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이방민족이 놀랍게도 이스라엘로 바뀐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여호수아 시절에는 신이 났는데, 적들이 마구 마구 넘어지고, 젖과 꿀이 흐르는 그 좋은 땅이 자기들의 소유로 등기가 되니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참 좋은 분이다. 그렇게 우리에게 잘해주시는데, 설마 우리를 치겠는가?" 라고 여겼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편이라는 것인데, 그러나 정작 하나님은 그런 적이 없었다는 말이죠. 그들이 일방적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하나님 편이라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언약자체가 하나님의 자기 희생으로 남겨진, 하나님의 의가 있는 것이 언약의 목적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곧 로마서 1장 17절에 나오는, 즉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으로서 모든 일은 다 마감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의가 나타나면, 그것을 선물로 받은 자들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런 자들만 완벽한 의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담보로 해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 이외에는 천국에 간다는 것은 전혀 있을 수가 없는데, 그래서 은혜를 입지 않은 자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말이죠.

*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라고 했는데, 또한 로마서 9장 3절에서는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라고 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무엇을 압니까? 주님이 자기를 언약을 위해서 활용하고 있다는 것,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다는 말이죠.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니 모든 것이 다 은혜인데, 그래서 사도바울을 쪼개보면 그 안에는 은혜만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육신 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말이죠. 죄는 절대로 의를 만들어낼 수가 없는데, 그것을 사도바울이 너무나 잘 안다는 겁니다. 자기가 죄인 중의 괴수이기에 말이죠.

* 성도는, 의의 운반체 !!

그래서 사도바울은 무엇만 자랑합니까?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는데, 즉 하나님의 의만 자랑한다는 겁니다. 다른 문제는 그야말로 시시한 것들인데, 그것을 '하나님의 의의 운반체' 라고 한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매를 맞기도 하고, 굶기도 하고, 풍랑을 만나기도 하고, 강도에게 당하기도 했는데, 그의 인생에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가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주님이 일부러 조성한 환경이기 때문에, 그런 환경으로 인해서 자기가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주저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힘들고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환경, 그런 것이 오면 올수록 더욱 더 하나님의 의는 빛난다는 것이죠. 결코 부끄럽거나 수치스럽지 않다는 겁니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여러분도 모두들 그렇게 살고 있지 싶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살지요?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인해서 우리가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이 생기고 있는데, 기름값이나 음식값이 마구 오르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라도 어떻습니까? 결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방향이 여호수아 때는 이방민족을 치다가, 그 이후에는 어디를 친다는 겁니까? 이스라엘을 친다는 말이죠. 그게 교재 61페이지에 나오는데, 이 책의 좋은 점은 성경구절을 이렇게 친절하게 네모 안에 넣어놓았다는 겁니다. 그게 사사기 21절 25절인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여기에 보면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나라가 완전히 그야말로 개판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정말로 이스라엘에 왕이 없습니까? 없는 것이 아닌데, 있다는 겁니다. 다만 그 왕이 자기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인데, 물론 인간은 자기 눈에 보이면 없다고 여기지만 말이죠.

* '예수님만 부활하셨다' 라는 의미는?

여기서 조금 더 어려운 것을 해보면,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켰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만 부활하셨습니까? 다른 사람도 부활이 된 경우가 있습니까? 전혀 없는데, 여러분은 이 점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딱 집어서 예수님만 부활시켰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다른 말로 교회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은 지상에 있는 이스라엘이나 교회를 상대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부활을 시키지 않았으니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생각하는 진짜 이스라엘과 교회라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의 연장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 교회란, 부활하신 예수님 몸의 연장 !!

그렇게 오직 예수님의 몸의 연장으로만 가능한데, 왜냐하면 유일하게 부활하신 몸은 예수님의 몸밖에 없다는 것이죠. 다시 반복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예수님만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의 몸, 그 몸의 연장으로서의 교회만이 천국에 갈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만 부활하셨다" 라고 하는 것은, 그러면 그때 '나' 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했습니까? 사도바울의 경우에, 그때는 사울이었는데, 그 사울이 무엇을 했고, 베드로는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는 것이죠. 그들은 잘렸는데,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부활하셨으니 말이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부활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몸은 연장은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오직 부활하신 예수님 한 분의 몸인데, 그 몸이 늘어져서 영역을 만들 때, 그 영역을 새로운 이스라엘, 새로운 교회로 해서 하나님께서 받아주신다는 겁니다. 그 이외의 모든 이스라엘과 교회는 하나님께서 받아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 면에서 하나님은 참으로 냉혹하고도 정확하다는 것이죠.

그런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비롯해서 사울이 무엇을 믿는고 하니, 하나님을 믿고 부활을 믿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자기들의 착각인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었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일은 인간들의 일에 협조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따로 일하신다는 겁니다.

* 주님은 따로 일하신다 !!

이게 오늘 강의제목으로 적절하지 싶은데,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일하시는 것이 아니고, 따로 일하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은 따로 일을 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하신 능력, 그게 바로 성령의 능력인데, 이게 히브리서에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성령의 능력이기 때문에, 이것은 예수님의 소관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소원이 있더라도, 주님이 자신의 능력을 일방적으로 주시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만 부활하셨기에 말이죠. 하나님은 예수님과 의논하시지 우리와는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중보기도는 없는데, 오직 예수님의 기도만이 중보기도가 된다는 말이죠.

* 다수가 하나처럼 !!

오직 예수님 몸의 확장으로서의 교회, 이것은 에베소서 1장에 나오는데, 그리고 고린도전서 12장에도 나온다는 겁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이 확장되면, 머리가 그리스도가 되고, 그 관련성이 몸의 발끝까지 다 연결되면서 한 몸이 되고, 그것을 에베소서 4장에서는 교회라고 한다는 말이죠. 성령으로 연락해서 서로 통한다는 겁니다.

(고전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 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그렇게 통하니 교회는 하나의 인격체가 되는데, 그래서 다수가 하나처럼 움직인다는 것이죠. 3분의 2, 그런 것은 없는데, 언어가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해도, 교회 안에서는 하나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 마음은 바로 불가능성의 마음인데, 주님은 따로 일하신다는 말이죠.

* 우당탕탕 !!

그렇게 주님이 따로 일하신다면,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지금 우리가 일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의 일을 그림으로 그려보게 되면, '언약이 실현되는 과정의 현실', 그게 바로 우리의 일이라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말씀이 어떻게 구약부터 신약까지 전개되었는지, 현재 우리의 몸이라는 육신의 껍질에 다 집어넣어서, 거기서 '우당탕탕' 벌어지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까, 성도는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말씀이 친히 작동하게 된다는 말이죠.

여기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이스라엘의 패망, 반역, 불신앙과 같은 것들이 가득 들었는데, 그런 것들이 오늘날의 우리 안에서도 당연히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 당시 과거 이스라엘이 죄를 짓고 율법을 어기고 반역하고 하고 했던 것, 그런 것들이 우리 육신을 통해서도 계속해서 되풀이가 된다는 말이죠.

* 예수님의 이력서 !!

그러면 주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게 누구의 경력인고 하니, 바로 예수님의 경력이고 이력이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택한 자에게 예수님 자신의 이력을 되풀이하고 반복하게 함으로서, 자기 사람으로 확인시키는 일, 바로 그것을 지금의 우리 일로서 작동을 시킨다는 말이죠.

그 이력서의 길이가 무려 2미터가 넘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그게 누구인지 궁금하지요? 다들 아는 사람이지 싶은데, 바로 '조수미' 라는 겁니다. 전 세계 74개국의 오페라 극장에서 프리마돈나로 활약을 했다고 하는데, 그녀가 각종 대회에서 받은 상들을 이력서로 줄줄이 써내려 가면, 2미터가 족히 넘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조수미의 이 2미터보다도 더 긴 사람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도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경우에는 매일의 삶이 주님의 일이기 때문인데, 즉 매일의 삶이 성경을 반복하는 삶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우당탕탕'을 반복하는 삶을 매일 매일 살고 있다는 것이죠.

* 오늘은 가롯유다 역할을 한번 해볼래?

그래서 주님은 "오늘은 레위기로 조져볼까? 오늘은 민수기로 조져볼까?" 라고 하시는데, "오늘은 하박국서로 해봐? 외양간만 있고 소가 없게 만들어봐? 포도원은 있는데 열매는 없도록 만들어봐?"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오늘은 가롯유다 역할을 한번 해볼래? 오늘은 베드로의 역할이 좋겠다. 닭이 3번 울면 나를 모른다고 해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성경전체가 압축이 되어서,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 라고 하는 개인의 구원, 그런 사적인 구원은 애초부터 없었는데, 그렇게 구원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예수님의 활동으로, 즉 예수님의 일하심으로 구원을 했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 구원하심의 증인이 되는 방법은 과연 무엇이겠느냐는 말이죠.

* 이런 인간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

그것은 바로 "이런 인간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고 하는, 그래서 인간의 행함을 매일같이 반복시킴으로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하신다는 겁니다. "네가 오늘은 바리새인 노릇을 한번 해볼래? 선량하게 사는 것을 네가 좋아하잖아? 그렇지?" 라고, 그렇게 나오신다는 말이죠.

우리 안에 주님의 일을 벌이시는 것, 물론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우리 인간에게 하시는 것이지만, 그게 들에 핀 꽃이나 하늘을 나르는 참새의 경우에도, 그것들 속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주님의 에너지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어떻게 하십니까? 친히 먹이시고 입히시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인간에게는 더 추가되는 것이 있는데, 우리 인간은 그것들처럼 먹고 입히고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다음 주의 낮 설교시간에 할 핵심적인 내용인데 말이죠.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런데 이 세상의 뉴스를 보면, 이번에 대통령이 '경제' 라고 하는 구호를 세 번이나 외쳤다는 말이죠. 그것을 성경용어로 옮기면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라고 할 수가 있는데, 하지만 성도는 그게 목적이 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오늘 강의에 의하면, 성도가 추구해야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인데, 그 나라의 의라는 말이죠. 그것을 증거하는 것이 성도의 존재이유라는 겁니다.

* 일상에서 계속 튀어나오는, 사사기 21장 25절 !!

그렇다고 하면 사사기 21장 25절, 즉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라고 하는 말씀을 왜 공부해야 하느냐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이래서 이스라엘이 당했구나" 라고 하는 것, 그것이 지금도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계속 튀어나오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런 것이 튀어나온다고 해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게 아니고,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미 복음으로 완성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보여주면 됩니까? 이렇게 못난 찌질이들, 전혀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을, 주님께서 그 어떤 위대한 불가능성으로 구원을 하셨느냐는 말이죠. 우리는 '우당탕탕' 하면서 그것만 보여주면 된다는 겁니다.

* 예수님과 성령님의 관계 !!

그렇다면 예수님과 성령님의 관계는 무엇일까요? 이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오는데, 성령이 임하심으로 예수님의 하실 일이 완성된다는 겁니다. 즉 "다 이루었다" 라고 십자가에 가도록 성령께서 인도하시고 일하신다는 말이죠. 그리고 예수님이 완성하고 난 다음에는, 그 예수님의 것만을 위해서 성령께서 일하신다는 겁니다.

성령께서 신천지의 이만희와 계약을 맺었습니까? 그렇습니까? 전혀 그게 아닌데,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교회와도 계약을 맺지 않았다는 말이죠. 성령께서 하시는 계약의 상대자는 우리가 결코 아닌데, 오히려 성령께서는 한심스러워서 탄식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것이 로마서 8장에 나오는데, 우리의 기도에 대해서 "그것도 기도라고 하고 있나?" 라고 하시면서 탄식을 하시는데, 그러면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마땅히 구할 바를 알지 못하니까, 그래서 성령께서는 "비켜라, 내가 대신 기도할게" 라고 하신다는 것이죠.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 인간은 왜 저주를 받아야 하는가? 그러면 어떻게 구원을 시키는가?

이렇게 성령께서 기도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하셨던 일을 우리에게 적용을 시킨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하신 일이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인간은 왜 저주를 받아야 하는가?" 라는 것인데, 즉 "왜 죄인인가?" 라는 것이란 말이죠. 그리고 두 번째는 "그러한 인간을 어떻게 구원을 시키는가?" 라는 겁니다.

그런 인간을 하나님께서 구원시키는 방법은, 그것은 바로 하늘에서 복음이 나타나서, 그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완벽한 의가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것은 주님의 자기 희생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죄인인데, 그래서 율법을 가지고 그것을 완전히 들추어낸다는 말이죠.

이 두 가지가 주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에, 오늘날 성도 안에서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이 두 가지가 매일같이 반복해서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내일도 일어납니까?" 라고 하신다면, 이런 질문은 빠트린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내일까지 산다는 보장이 없다는 말이죠. 주님이 연장을 시켜주어야 산다는 겁니다.

* 하루하루를 연장하는 삶 !!

우리가 하루하루 사는 것은, 이미 죽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하루하루를 연장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즉 죽음이후의 삶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덤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연장을 해주어야 내일 살아갈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오늘 염려는 오늘까지만 하고, 내일 염려는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일까지 산다는 보장이 없기에, 미리 당겨서 하지 말라는 것이죠.

젊은 나이라고 해서 오래 산다는 법은 없는데, 물론 나이가 많다고 해서 내일 죽으라는 법도 없다는 겁니다. 계속 주님이 연장을 시켜주시는데, 주의 일을 더 증거하라고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런 뜻이라면 연장을 시켜주시고, 그게 아니면 "이제 고마해라" 라고 하시면서 데리고 가신다는 겁니다.

이미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는데, 그렇게 죽었기 때문에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내가 죽었다" 라는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내 속에 불가능성이 침입했다" 라는 겁니다. 즉 이질적인 외부요소의 침입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성도는 그 어디를 가더라도 불가능성이 툭툭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죽었고, 그 안에 그리스도가 살기 때문에 말이죠. 그런데 복음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 나온다는 겁니다. 오기로 "야무지게 제가 열심히 하겠습니다.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 안이 메말랐기 때문인데, 오직 자기 것으로만 가득하다는 겁니다. 주님이 주신 선물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알아서 생산하려고 한다는 말이죠. 자기가 바로 공장장인데, 그래서 자기가 만든 제품만 있고, 하늘나라의 제품은 들어있지 않다는 것이죠.

* 죽음의 천사가 찾아온 밤 !!

그러면 '그 날'이 무슨 날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죽음의 천사가 찾아온 날인데, 즉 유월절의 밤이라는 겁니다. 모두가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그 날밤에 이스라엘이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저의 질문은 항상 간단한데(ㅋㅋ), 이스라엘은 죽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자기 아들은 살았다는 말이죠. 그래서 "오, 우리 아들만 살아났네" 라고 하면서 신이 났다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죽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데, 바로 그 죽음을 확인시키는 장소가 바로 광야라는 겁니다.

여기서 공식이 등장하는데, "내 방식대로 사는 것 = 죽음",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애굽의 방식대로 살면 죽고, 그런데 여기에 이질적인 것이 등장하면, 그게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고, 그리고 물도 반석에서 나온 물이라는 겁니다. 물론 요즘은 지하 암반수를 마시지만 말이죠(ㅋㅋ).

* 공통적인 요소, 그리고 왕 !!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와 반석에서 나온 물, 이러한 '공통적인 요소'에 많은 사람들이 종속이 되면서, 이 공통적인 요소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는 겁니다. 주의 이름으로 주시는 만나와 반석, 그것은 각자 개인이 찾고 구하는 게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고 바위를 터트려서 나온 것인데, 그것을 "너도 먹고 마시고, 나도 먹고 마시고"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그렇게 똑같은 음식과 음료를 먹고 마시게 되면, 여기서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데, 그래서 이스라엘은 한 인격체로 다루어진다는 겁니다.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물을 마셨기 때문에, "나는 너보다 더 낫다. 혹은 못하다" 라고 하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서로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만나와 물을 주시는 주님을 쳐다보기 때문에, 그래서 그 공통적인 요소에 종속이 된다는 겁니다. 왕이 있을 때에 이 종속이란 것이 성립하는데, 그런데 그때 이스라엘은 어떻다는 겁니까?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그렇게 왕이 없으면 필연적인 결과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만 개인주의로 가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매일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것이란 말이죠. 우리는 개인주의를 만끽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주님이 그렇게 하게 하신다는 말이죠.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렇다면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고 반석을 터트려야 물이 나온다는 것을, 광야에 들어가기 전에는 이스라엘이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전혀 몰랐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질적이고 불가능성이란 말이죠. 이것을 은혜라고 하는데, 예상한 것은 은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님이 주시는 것이 은혜가 아니라, '나' 라고 하는 존재를 아예 죽은 자로 만들어버리는 것, 그게 바로 은혜라는 것이죠. "너는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은혜다. 그러니 지금 죽어도 억울하다고 여기지 말라" 라는 것인데,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신기하게 감사하게 생각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우리 자체를 계속해서 죽은 자로 간주해주시는 것, 즉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바로 그러한 것들을 티내는 일들이 여기 저기에서 툭툭 벌어진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너무나도 이질적이라는 겁니다.

* 정답은 '부동산' !!

어떤 TV프로에서 외국청년이 한국에 와서 아가씨들에게 질문을 하는데, "제가 한국에 와서 제일 먼저 간 산은 과연 어떤 산일까요?" 라고 말이죠. 그러자 아가씨들이 "백두산요, 한라산요, 지리산요" 라고 하면서, 그렇게 자기가 아는 산 이름을 모두 대는데, 하지만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불가능성인데, 그게 바로 부동산이라는 말이죠(ㅋㅋ). 그러자 "지금 무슨 아재개그를 하나요?" 라고 하면서 아가씨들이 화를 내는데,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엉뚱하냐는 겁니다. 뒤에 산이 붙었다고 해서 그 산이 그 산은 아니라는 말이죠. 지금 분위기가 좀 이상한데, 여러분도 화가 납니까? (ㅋㅋ)

* 우리는 선량하기에, 백퍼센트 지옥행 !!

우리 인생을 우리 마음대로 살면 백퍼센트 지옥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선량한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아무리 양보를 해도 자기를 의를 양보할 순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세상이 무너져도 자기가 살아있으면 행복하다는 겁니다. 이것은 타고난 본성인데, 그리고 우리가 사는 재미가 무엇인고 하니까, 남들이 잘못되고 저주를 받는 재미로 산다는 말이죠.

그래서 부산강의에서 "씹어야 맛이지" 라고 했는데, 씹을 대상이 없으면 살아갈 맛도 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남을 씹는다는 것은, 자기가 씹히지 않기 위한 방어본능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구원에 관한 한 불가능한 존재라는 겁니다. 자기밖에 모른다는 말이죠. 그런데 똑같은 인간이 누구인고 하니, 바로 이스라엘이었는데, 고맙게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상대해주셨다는 것이죠.

그러면 이스라엘이 왜 그렇게 혼이 나고 멸망을 당해야 합니까? 그것이 교재 62페이지에 나오는데, 사사기 2장 말씀인데, 20절에서 23절입니다.

(삿 2:20)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은즉
(삿 2:21)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삿 2:22)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삿 2:23) 그 열국을 머물러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며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음이 이를 인함이었더라

*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여기에 적용시켜보면, 처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는데, 그래서 누구에게 진노가 임하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한 자들이 바로 이방민족들인데,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사사기 2장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누구에게 임합니까? 이방민족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진노를 하시는데, 진노의 방향이 틀어졌다는 말이죠. 그러니 적이 이제는 외부가 아니라 이스라엘 내부라는 것인데, 그렇게 이스라엘 내부로 들어가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죠. 여기 20절을 보면,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은즉" 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언약을 어겼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우리를 사랑한 게 아닙니까?" 라고 하면, 하나님은 "너희들이 아냐. 나는 언약을 사랑했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언약 안에는 예수님의 희생이 들어있고, 하나님은 그 예수님의 희생을 사랑하셨다는 겁니다. 그 희생이 확정된 나라가 천국이라는 말이죠. 자기가 들어가는 나라가 천국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가 완벽하게 갖추어진 나라가 천국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미리 알아도 들어갈 수 없는데, 우리는 너무나 어설프다는 말이죠. 우리는 매일같이 자기 것을 지키기에 정신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면 우리 안에 이질적인 것이 들어오는데, 그렇게 해서 갈아치우는데, 자기 중심이 아닌 은혜 중심으로 말이죠. 그렇게 해서 활동이 개시되고, 불가능성이 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는데, 이것이 남의 일이 아니고 바로 우리의 모습인데,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않는다는 겁니다.

*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

그 다음에 21절과 22절을 보면,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라고 하는데, 마지막에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시험한다' 라는 것은 "아무 것도 확정된 것이 없다" 라는 의미인데, 왜냐하면 구약이니 그렇다는 말이죠. 복음은 신약에 나타납니까? 구약에 나타납니까? 신약에 나타나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야만 비로소 복음이라는 겁니다. 착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복음이 아닌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만 꼭 집어서 부활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이것은 차별화를 시키는 것인데, 즉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의 '차별화' 라는 말이죠. "나는 그리스도만 부활시키고 나머지는 시키지 않겠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보여주셨고, 그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겁니다. 그게 언약의 폐쇄성이라는 것이죠.

* 이스라엘은 '유보적' !!

그런데 구약에서는 아무 것도 확정된 것이 없는데, 그러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됩니까? 유보적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시험을 하시는데, 즉 이스라엘은 시험의 대상이라는 말이죠. 마치 실험실의 청개구리와도 같다는 겁니다. 그들이 과연 장차 오실 메시야처럼 말씀을 제대로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바로 그것을 보게 하신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스라엘은 예수님처럼 율법을 지키지 못했는데, 그 원인은 신약성경인 로마서 7장에 나온다는 겁니다. 자기들은 지키고 싶었지만 자기 안에 '죄' 라는 괴물이 주인공이 되어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 죄로 인해서, 율법이 들어오면 지키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어기고 싶어하는 욕망이 먼저 발작해서, 죄 아래에 그만 사로잡히게 된다는 겁니다.

(롬 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롬 7: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롬 7: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롬 7: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 이게 인간의 진면목 !!

우리 인간의 진면목을 로마서 7장에서 제대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우리 인간들의 과학과 철학으로는 이런 것을 전혀 알 수가 없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 속에는 괴물이 들어있어서, 이 괴물로 하여금 항상 우리를 죄에 사로잡히게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선을 추구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게 죄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 안에 있는 괴물이 우리의 선을 악으로 바꾸어버리는데, 그런데 여기서 인간은 그 악을 선으로 여기고 행세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인데,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교인들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다. 그것은 선한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무엇인고 하니까, 주님은 "너희가 선을 악으로 바꾸든 말든 내가 보지 않겠다"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부활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죠. 하나님은 그들을 철저하게 시험의 대상으로 봐서, 그 이스라엘 주변에 이방 나라들을 배치하신다는 겁니다.

* 이스라엘은 약소국가 !!

여기 사사기 2장 21절에 보면,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 누가 쫓아내지 않았다는 겁니까? 이스라엘이 아니고 하나님이란 말이죠. 하나님이 일부러 이방 민족을 붙여주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방 민족들이 하나같이 이스라엘보다 잘 산다는 말이죠. 이스라엘은 약소국가인데, 숫자도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당연히 주변에 잘 사는 강대국들을 보게 되는데,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이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하, 다른 신을 믿으면 내 인생이 풀리게 되고, 행복하게 되겠네"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니 그들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앞집에 신천지에 다니는 사람이 살고 있는데, 그런데 그 집의 자식들이 너무 잘 된다는 것이죠. 전교수석을 하고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나도 신천지에 한번 다녀볼까?" 라고 하는 마음이 든다는 겁니다. 물론 여러분은 전혀 아니겠지만 말이죠. (ㅋㅋ)

* 우리의 블루스 !!

돈이 있을 때 친구이지, 돈이 떨어지면 친구도 다 떨어지고 없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블루스' 인데, 이게 TV 드라마인데 다들 아시죠? 거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전부가 다 꽤째째한 존재들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어느 정도인고 하니, 오직 "돈, 돈, 돈" 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돈만 찾으면서 평생을 허비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렇게 찌지리들만 범람을 하고 있는데, 그것을 안양강의에서는 '다수들의 다수' 라고 했다는 겁니다. 어릴 때도 돈을 달라고 하고, 20대와 30대가 되어도 계속해서 돈을 달라고 한다는 말이죠. 입만 열게 되면, 복음이 아니고 돈 이야기가 먼저 나온다는 겁니다.

* 당신은 60대에 왜 놀고 있지?

어느 강의에서 쉬는 시간에 60대가 되신 분과 이야기를 하는데, 이 분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주위의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60대 중반인데 왜 놀고 있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죠. 일을 하면 돈이 생기는데, 청소를 하든 무엇을 하든 간에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은 찌지리들의 블루스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고 언약이고 간에 모든 것이 다 뒷전인데, 그런 것들은 일종의 오락과도 같은 느낌이라는 말이죠. 실제는 돈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이방 나라라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 본성과 합치가 되어있는데, 구분을 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진짜 실제이고 현실이라는 것을 알아챈다고 하면, 그러한 마음이 든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의 본래 마음이 아니고 주님의 선물이라는 겁니다. 물론 그것을 지식으로 얻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인데, "요것 괜찮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해서 "돈도 중요하지만, 이 복음도 괜찮네" 라고 한다면, 왜냐하면 죽어서 천국에는 가야하니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1순위가 돈이고 2순위가 복음이라고 하면, 즉 "이제는 돈도 좀 벌었으니, 복음이나 들어야지" 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짜라는 말이죠.

* 참다가 참다가 !!

그래서 이스라엘이 망했는데, 그들이 "하나님도 좋지만, 일단은 우리가 먼저 잘먹고 잘살아야지" 라고 나왔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주변을 완전히 이방 나라들로 뺑 둘러치셨는데, 그리고 그 나라들이 군사력이 강했다는 말이죠. 물론 잘사니 당연히 그러한데, 군사력이 이스라엘과는 비교가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외교적으로 잘 협상을 해서 그들이 시키는 대로 다 하다가, 그들이 너무나 많은 것들을 요구하고 다 빼먹으니, 그만 화가 나서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사사기인데, 웬만한 것은 미리 조공을 바치면서 다 해결을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너무 심하게 나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는 말이죠.

* 이스라엘을 압박한 배후는?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질문인데, "과연 누가 압박을 가하도록 했을까요?" 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이것은 "너희 이스라엘은 망해봐라" 라고, 즉 "너희가 좋아하는 이방나라에 한번 당해봐라" 라는 겁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돈을 쫓아서 그렇게 미국과 중국이 좋다면, 한번 당해봐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이렇게 되면 그야말로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은 뒷전인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방 민족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치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부르짖게 되는데, 즉 자기들의 가능성이 완전히 바닥이 되었을 때, 그들은 불가능성을 찾게 된다는 것이죠. 그 이전에 알아서 찾았으면 참 좋겠지만, 인간은 그게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언제 찾습니까? 자기의 모든 가능성이 다 바닥을 드러내게 되면, "오직 주님의 의밖에 없군요" 라고 하면서 다시 주님을 찾게 된다는 말이죠. 그럴 때 주님이 집어 넣어주신 불가능성의 고마움을 깨닫게 되는데, 성도는 이게 반복이 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완전한 인간은 없는데, 다만 완전한 것이 우리 안에 있을 뿐이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완전함을 주장하지 않게 하시고, 다만 우리의 죄인됨을 깨닫게 해주셔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 안에서 십자가를, 하나님의 의를 반복시켜주시는 주님의 살아있음과 현실을 연계해서, 이 세상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2,6,25 오후 1시에 마침.

여보, 지금 바빠 죽겠는데 뭐하노?



 첨부파일 : 22대구강의(지옥의하나님)9-언약의내부.hwp (60.9K), Down: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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