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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5 23:36:44 조회 : 423         
[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19 - 스티커 이름 : 구득영(IP:203.223.97.162)
[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19 - 스티커

07,09,18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58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지지난 번에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남은 것이 있었는데, 그게 '카이로스' 인데 말이죠. 크로노스와 아이온은 설명을 했는데, 이것은 마지막에 조금만 언급하고 마쳤다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때' 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먼저 교재 58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이렇게 사건과 크로노스 시간대에 만나는 지점을 카이로스라고 하는데, 이게 바로 성경에 나오는 '때' 라고 번역이 되는 겁니다.

(막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가라사대 '때가 찼고' !!

여기에 보면 "가라사대 때가 찼고" 라고 하는데, 즉 때가 찼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이 세상과 인간을 오고가면서, 그것이 시간과 공간으로 표현을 하게 되어있는데, 그렇다면 현재 이 세상은 어떠하다는 겁니까? 그게 바로 "때가 찼다" 라는 말이죠.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라고 하면, "이 세상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이 세상의 전부를 차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예수님은 '육(肉)' 이라고 하시는데, 그게 숨겨진 비밀이라는 겁니다. 물론 사도바울도 그런 말을 했는데, 그게 창세 전의 숨겨진 비밀이라는 말이죠.

(고전 2: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숨겨진 '비밀' !!

여기서 비밀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현재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에서는 그게 비밀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비밀이다' 라고 했을 때, 이런 것이 어려운데 말이죠. 즉 "비밀이라고 말을 하지 않았으면 비밀인데, 그런데 비밀이라고 했으니 그 비밀이 드디어 노출이 되었는가?" 라고 하는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서로 모르는 사이인데 어떤 사람이 와서 "나는 니가 모르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언질을 주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계속해서 비밀로 유지하겠다는 뜻도 있고, 반면에 비밀을 안다고 자랑하는 것은 그 비밀을 가르쳐주겠다고 하는 뜻도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율법도 마찬가지인데, 율법에서 "니가 지키면 복을 받고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하는 것은, 율법이라는 덩어리는 하나인데, 그 효과나 결과에 대해서는 그게 축복으로 나올 수도 있고 저주로도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것인데, 자기가 율법에 대해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복이 될 수도 있고 저주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그런 이야기를 듣는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어떻습니까? 아예 율법이 자기에게 나타나지를 않았으면 마음이 굉장히 편안했을 텐데, 그런데 괜히 나타나서 심적으로 혼란을 준다는 겁니다. 복도 귀찮은데, 그냥 살던 대로 살면 되는데 말이죠.

빨래하는 아낙네들 !!

연세가 많은 분들이 있어서 하는 이야기인데, 우리가 어릴 때 TV가 있었습니까? 아니면 컴퓨터가 있었습니까? 아낙네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빨랫감을 들고 냇가에 가서 온 종일 빨래를 하는데, 아이들은 그 옆에서 뛰놀고 말이죠. 그때 그들이 무슨 걱정거리가 있었습니까? 요즘처럼 오래 살아서 암이나 당뇨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는데, 그때는 그런 게 없었다는 겁니다. 늙으면 죽으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때는 어떤 의미에서는 행복했는데, 그런데 만약에 병자호란이나 임진왜란이 일어나면 어떻게 됩니까? 평화롭던 그 마을이 갑자기 난리도 아니라는 겁니다. 평화를 사랑하고 흰옷을 좋아했고, 또한 '두레' 라는 것이 조직되어서 서로 어려울 때는 상부상조를 하는데, 그리고 늙으면 그냥 죽으면 되고 말이죠.

그런데 그때 조선 땅에 무엇이 없었는고 하니, 힘이 없었다는 겁니다. 국력이 없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평화로운 마을에, 아낙네가 빨래를 하는 마을, 아이들도 있지만 강아지도 같이 뛰놀고 말이죠. 그러다가 강아지는 개가 되면 잡아먹고 말이죠(ㅋㅋ).

그런 평화로운 마을에 무엇이 비밀이었는고 하니, 조선이 근대로 넘어오면서 서구의 발달된 문화가 조선에는 무엇이 되겠습니까? 서구의 교육이 들어오고 의학이 들어오면서, 암이나 당뇨와 같은, 그런 새로운 개념의 용어가 들어오면서 그만 복잡해지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때 소위 선각자들이라는 자들이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힘이 없으면 언제든지 다른 나라에게 잡아먹힌다. 그러니 공부를 해야한다" 라고 하는 겁니다. 베이컨의 주장대로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것인데, 그게 바로 계몽운동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여기에 도움을 준 자들이 선교사들이라는 말이죠.

목사님, 세종대왕은 천국에 갑니까? 지옥에 갑니까?

그때 대표적인 물건이 설탕과 밀가루였는데, 그리고 초코렛과 같은 것을 먹어보면 너무 맛있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같이 들어온 것이 성경이었는데, 우리나라에 복음이 언제 들어왔습니까? 그게 19세기말인데, 그러면 그 이전의 세종대왕과 같은 분들은 어떻게 됩니까? 물론 요즘은 이런 질문이 거의 없지만 20년 전만 해도 많았는데, "목사님, 세종대왕은 천국에 갑니까? 지옥에 갑니까?" 라고 말이죠.

물론 저도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그게 계속해서 되어온 질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들이나 부흥사들이 뭐라고 합니까? "그때는 양심대로 해서 갔습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것은 없는데, 양심대로 살아서 천국에 가는 법은 없다는 말이죠. 율법을 하나만 어겨도 모든 것을 다 어기는 것이 되고 마는데 말이죠.

이 양심이란 것이 무엇인고 하니, 양으로 따져서 착한 일을 많이 했으면 천국에 가고 나쁜 일을 많이 했으면 지옥에 간다는 것인데, 그러니 그 양심은 엉터리이고 그게 이방인들이라는 겁니다.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는데, 모세처럼 하나님과 독대를 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방인들은 율법이 아니라 마귀가 심어준 양심을 가지고 덤비는데, 그 양심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에서 따먹지 말라고 했던 선과 악에 관한 지혜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선과 악으로는 행함밖에 나오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생명책과 행함책 !!

요한계시록 20장에 의하면 심판을 받을 때 책이 두 권 있는데, 하나는 어린양의 '생명책' 이란 겁니다. 그런데 그 어린양이 바로 예수님이니,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책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이죠. 여기서 그리스도는 메시야인데, 이 메시야는 이스라엘의 메시야라는 말이죠.

(계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그렇다면 나머지 한 권의 책은 무엇인고 하니,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들인데, 그런데 이 이방인들은 그 특징이 언약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언약이 없는 책을 두고 '행함의 책' 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 행함의 주인공이 누구인고 하니,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자기가 열심히 해서 구원을 받겠다고 나서게 되면 전부가 어디로 가는고 하니,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이런 요한계시록의 심판방법은 이미 시편에 나와있는데, 시편에서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까, "언약을 모르는 이방인에게 주의 저주가 임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언약이 무엇입니까? 율법인데, 이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겨냥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방인에게 저주가 임한다는 겁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설교를 할 때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이방민족들에게 대해서 그동안은 봐주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마지막 때에 구원받을 유일한 증거를 주셨으니, 그게 바로 오실 메시야가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행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행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여기에서 "구원받을 유일한 증거를 주셨다" 라는 것은 무슨 말인고 하니, "그것을 빼고는 모두 지옥에 간다" 라는 겁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라면 모두가 지옥에 간다고 하는 것은, 인간들이 양심에 입각해서 행함으로 살아가지만, 그런 것은 행함의 책에 기록이 될 것이고, 그 행위의 당사자는 자기 자신인데, 그러나 자기로부터 출발을 했다는 말이죠.

구원은, 떠밀린 그분으로부터 시작해야 !!

그런데 예수님이 누구에게 살해를 당했습니까? 그 사회가 곧 유대사회인데, 예수님이 그들에게 저주를 받음으로 말미암아서, 구원의 출발점이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유대인들과 예수님이 서로 좋은 게 좋다고 하면서 잘 지내서, 그래서 유대사회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유대사회가 예수님을 떠밀어서 죽여버렸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떠밀려서 나와버렸는데, 그렇다면 구원의 출발점이 어디가 되어야 합니까? 떠밀린 그분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행위라고 하면, 모든 것은 구원받지 못하는 행위가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떠밀었으니 말이죠. 서로 사이좋게 악수를 한 것이 아니라, "에이, 쓸데없어!" 라고 하면서 그만 예수님을 떠밀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 외에 구원받을 길이 없다" 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떠밀었는데, 그런데 혹시 구원이 있다고 하면, 혹시 천국에 간다고 하면, 그것은 떠밀린 그분으로부터 출발을 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모든 것은 지옥에 가는데, 그게 바로 예수님의 '생명책' 이라는 겁니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이런 소리는 듣기 싫고 그냥 우물가나 냇가에서 빨래나 하겠다고 하면 할 수 없겠지만(ㅋㅋ), 그런데 여기서 바로 '때' 라는 것이 나온다는 겁니다. 성령을 우리가 수용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신약에서는 항상 '때' 라는 말이죠. 즉 때가 되고, 때가 차서 일이 진행된다는 겁니다.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주님의 개입, 그리고 '때' !!

그렇다면 이 '때'는 평화로운 우리 인간들이 정한 겁니까? 아니면 주님의 일방적 개입입니까? 주님의 개입인데, 무심하게 흘러가는 이 역사 속에 "때가 되었다" 라고 외치는, 그 외침이 바로 주님의 개입이라는 겁니다. 동방박사들이 왜 별을 따라왔겠느냐는 말이죠.

제가 어릴 때 집에서 밀가루를 가지고 풀을 쑤곤 했는데, 그런데 거기에 보면 막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러면 저는 막대기를 가지고 그 막을 찔러보곤 했는데, 그러면 그 막이 갈라지면 거기에 줄무늬가 생긴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때' 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주님께서 이 고요한 역사 속에 오시게 되면, 이 전체에 졸지에 중심이 발생되면서, 이 역사는 인간이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숨겨져 있던 비밀이 때가 되매 역사를 통해서 마음껏 자기를 폭로하고 그 내용을 노출시키는데, 바로 그러한 때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왜 만들어졌는지, 도대체 누구 때문에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이스라엘에게만 왜 율법이 주어져야 하는지, 그런 모든 의미가 다 감추어져 있었는데, 그런데 때가 되매 모두 드러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개입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비밀을 이야기해줄까?" 라고 하는 것은, 계속해서 그것이 비밀로 남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그 비밀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둘 중의 하나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온전한 비밀과 사도바울 !!

예수님께서는 12제들과 함께 계셨는데,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의 비밀을 안다고 여겼는데, 과연 그러하냐는 말이죠.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씨뿌리는 비유가 나오는데, 그것을 듣고 나서 제자들을 비롯한 사람들이 어렵다고 하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고 뭐라고 하십니까?

"이것이 사람들에게는 비밀이지만, 너희에게는 알려주겠다" 라고 하셨는데, 하지만 예수님이 아무리 해석을 해주어도 소용이 전혀 없었다는 겁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그만 비밀이 되고 말았는데, 결국 12제들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다 떠나고 말았다는 것이죠.

(마 13: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마 13: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비밀이 어디서 온전히 드러나는고 하니, 에베소서나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등에 나온다는 말이죠. "드디어 태초의 비밀이 다 풀렸다" 라고 하면서, 주님께서는 사도바울을 통해서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그게 로마서에 보면 '하나님의 의' 라고 되어있고, 다른 곳에서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 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곧 '복음' 이라는 겁니다. 그게 핍박과 동반해서 나타난다는 말이죠.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고전 2: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엡 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어린양과 성전 !!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는 그 비밀이 어린양으로 인해서 드러나게 되는데, 여기에서 '어린양' 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남들처럼 그렇게 멀쩡하게 살지를 못하고, 희생제물로서 살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린양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이 어린양에는 이미 죽음의 요소가 내포되어있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죽음을 당해야하는 운명을 지닌 채로 살아가야 한다는,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어린양인데, 즉 '희생을 당하신 분' 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그 희생을 감추어진 성전을 그만 배경으로 깔아버리니 어떻게 됩니까? 지상에서 희생을 당했던 그분을, 요한계시록에서 성전을 배경으로 깔게 되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성전을 만족시키는 희생제물로서 당해야했기 때문에, 그래서 당했다" 라고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물론 구약에서 건물로 지은 성전이 있었는데,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짝퉁이고 모형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진짜 성전은 건물의 있고 없음이 것이 아니라, 바쳐진 제물이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 아닌지에 따라서 결정이 되는데, 그래서 그 제물이 제대로 된 제물이라고 하면 그 현장에서 성전도 동반해서 같이 출몰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전인가? 성전이 아닌가?" 라는 것은 인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어린양에 의해서, 즉 거기서 어린양의 제대로 된 희생제물이 나오면 성전이란 겁니다. 그래서 항상 그 출발점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감추어진 비밀이 드러나고 풀린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나'로부터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배탈이 나고 만다는 것이죠.

믿음의 출발점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구원을 받기가 굉장히 쉽네. 믿으면 되잖아"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 믿음은 '나'로부터 출발한 믿음인데, 그러니 친구사이의 우정, 부부사이의 애정, 가족사이의 신뢰, 그런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믿음이 아닌데, 반드시 그 출발지점이 예수님이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다음과 같이 보면 되는데, "나의 믿음이 그동안 주님의 믿음을 가리고 있었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면 됩니까? 매우 간단한데, 자기의 믿음을 놓으면 된다는 말이죠.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 '나'를 놓으면 된다는 겁니다. 믿지 않아도 택배가 오고 비도 왔는데, 그게 누구의 은혜입니까? 주님의 은혜라는 것이죠.

주님이 매일같이 믿음을 믿음을 주시는데, 성령을 통해서 말이죠. 그 믿음이면 다 되었는데, 왜 자기 믿음을 또 가져야 하느냐는 겁니다. 자기 믿음을 가지면 반드시 불상사가 일어나는데, 왜냐하면 자기 믿음은 자기 감정, 자기 행함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기가 어떤 노력을 하게 되면 반드시 보상을 기대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반드시 그러한데, 즉 "제가 믿으니 복을 주세요"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자기 믿음은 반드시 자기가 기대하는 것을 마치 요청할 권리나 자격이 있는 것처럼 여기는데, 그래서 "믿으면 성령을 주신다고 했잖아요? 제가 믿으니 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믿어서 성령을 받고 천국에 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죠. 그것을 두고 "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 안 되고, 그것은 출발점이 달라서 그렇다는 겁니다.

누구의 사랑이고, 누구의 믿음인가?

오늘 다들 바쁜가요? 보이지 않는 분들이 좀 있어서 말이죠. 아무튼 그렇게 자기 믿음이 주님의 믿음을 가로막았다고 하면, 그러면 자기 사랑이 무엇을 가로막았을까요? 당연히 주님의 사랑을 가로막는다는 말이죠. 자기의 소망이 주님의 소망을 가로막고 말이죠.

보통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 상당한 반발이 나오는데, 자기 믿음과 주님의 믿음, 자기 사랑과 주님의 사랑, 자기 소망과 주님의 소망, 그것을 구분하는 방법을 이야기해달라는 겁니다. 그게 어떻게 구분이 되어야 맞고 틀리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있지 않느냐는 말이죠.

사실은 구분하는 것이 결코 어렵지가 않은데,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믿음은 주님의 소망은 어디로 가는고 하니, 그게 예수님의 공생애로 가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즉 십자가의 길로 간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주님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했으니 말이죠.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어디로 갑니까? 그것은 절대로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리는데, 오히려 자기를 그만 정당화시킨다는 겁니다. 즉 "내가 있어야 하나님도 하나님이지, 내가 없는데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스티커를 붙이자 !!

그것이 어제 오후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예수님이 소중한가? 내가 소중한가?" 라는 것인데, 교회에 오래 다녔으니 머리로는 다 된다는 겁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 라고 하면서 찬송을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이고, 자기 몸은 절대로 거기에 딸려가지 않는다는 말이죠. 자기 자신을 왜 그렇게 모르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그동안 성경공부를 열심히 한 것은, 오늘 강의제목이 '스티커' 인데 말이죠. 그렇게 스티커를 붙인 것인데, 나중에 물 청소를 하면 다 떨어지고 만다는 겁니다. 좋은 것이 있으면 다 붙여놓았는데, 그런데 안에는 자기 자신이 주님보다 더욱 좋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가 있고 난 뒤에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성령님이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없다고 하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이죠. 그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왜 나옵니까? 자기 잘되려고 오는 것이지, 자기를 폐기처분하기 위해서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를 자랑하려고 하면 당연히 자기 존재가 우선이 되는데, 그러면 ''나' 라는 존재는 어디서 구성이 됩니까? 자기가 아는 시간과 공간으로 구성이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주인공인 인생 드라마인데, 그게 손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의 미래가 멋지게 장식되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의 힘이 필요했고, 그래서 교회에 나온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지금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라고 하는 겁니다.

(욥 8: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하지만 그것은 사탄의 주장인데, 욥이 한 이야기도 아니고 욥의 친구인 빌닷의 한 이야기라는 겁니다. 성경말씀을 함부로 인용하면 안 되는데, 특히 욥기는 말이죠. 어떤 집에 가보면 이것을 액자로 만들어서 거실에 걸어놓기도 하는데, 정말로 곤란하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나'로부터 출발한 이 세상적 관점인데,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그런데 교회에서는 교인들을 위로한다고 하면서 그런 소리를 하는데, 그러면 교인들은 아멘으로 화답을 한다는 겁니다. 이것도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짝패인지도 모르겠는데(ㅋㅋ), 그렇게 서로 죽이 맞다는 말이죠.

오늘날은 다수의 힘이 곧 진리 !!

그러면 오늘날 권위는 어디서 오는고 하니, 정치적 권위는 유권자에게서 오고, 경제의 권위는 고객에게서 온다는 겁니다. 회사에서 아무리 노력해서 신상을 개발해도 고객이 시장에서 찾아주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즉 권위는 날아가 버린다는 말이죠.

그리고 정치인들이 아무리 올바른 소리를 하더라도, 즉 "노인네들에게 지하철을 무조건 공짜로 태워주면 안 됩니다. 횟수를 제한하든지 적당한 요금을 받아야 합니다" 라고 해도, 그러면 무엇을 하느냐는 겁니다. 표가 나오지 않으면, 그것으로 '꽝' 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진리가 무엇인고 하니, 힘이 곧 진리인데, 그 힘은 오늘날 유권자들이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유권자들이 행사하는 표에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진리는 없는데, 그렇게 다수가 힘을 행사하는 것이 곧 진리가 된 것이 바로 오늘날의 이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인데, 자기를 위해서 교회에 왔는데, 그러니 목사가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기도를 하셨습니까? 응답을 받습니다. 헌금을 하셨습니까? 복을 받습니다" 라고 하는, 그것 외에 달리 길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를 유지할 수 없다는 말이죠.

진리가 밥을 먹여주는 것이 아닌데, 진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나' 라는 것인데, 그렇지가 않습니까? 사람이 자기 자식을 왜 좋아합니까? 자기 자식이기 때문에 좋은 것이지, 남의 자식이라서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아무리 사고를 쳐도 자기 자식의 편을 들도록 되어있는데, 상대방을 아무리 때려도 자기 자식의 잘못이 아니라고 우긴다는 말이죠. 요즘 TV에 그런 것들이 종종 나오는데, 그것을 보면서 우리가 과연 욕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렇지 않느냐는 말이죠.

나는 누구인가?

그래서 제가 여기에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예수님까지 이 땅에 보내주셨는데, 그런데 우리는 왜 그것을 모르는고 하니, 문제는 바로 '나'에게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나' 라는 것은 과연 무엇으로 구성이 되었는지, 그것을 한 번 살펴보자는 말이죠. 도대체 무엇으로 구성이 되었기에 그렇게 문제가 많으냐는 겁니다.

'나' 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으로 되어있는데, 그것을 어려운 말로 '시간성'과 '공간성' 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먼저 시간성은 무엇인고 하니, 이 '나' 라는 것은 항상 자기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쓴다는 겁니다. 매일같이 말이죠.

왜 여러분도 어릴 때 학교에서 내주는 숙제로 해서 많이 해보지 않았습니까? 그게 바로 '일기 쓰기' 라는 겁니다. 그렇게 일기를 쓰게 되면 인간은 점점 더 이기주의자가 되는데, 즉 "오늘은 비가 왔다. 오늘은 아버지에게 한 대 맞았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걷어내면서 만들어진 조각품 !!

여기서 시간성과 공간성의 문제점을 미리 말씀을 드리면, 자기에게 필요한 소재만 집약시키고, 자기에게 소용이 없다고 여겨지는 나머지는 모두 내다버린다는 겁니다. 아마 미켈란젤로이지 싶은데, 그는 어떻게 조각을 하는고 하니까, 걷어내면서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걷어내면 그 안에서 주문한 사람이 원하는 조각형상이 나온다는 말이죠. 처음에는 그냥 네모난 대리석인데, 그런데 조각용 칼을 가지고 걷어낸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무엇인고 하니, 예술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사랑하는 것, 자기가 믿는 것, 자기가 소망하는 것, 그것을 누구의 힘으로 한다는 겁니까? 아까 행함의 책을 이야기했는데, 그 행함이 자기로부터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지옥의 유황불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예술이 바로 그렇다는 말이죠. 자기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그것을 현실화를 시키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자기 의지가, 즉 자기 행함이 여기에 투입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가 원하는, 자기에게 알맞은 형상이 나온다는 겁니다.

오늘날 부모들이 자녀교육을 바로 이렇게 하는데, "누구하고 놀지 마라. 누구하고 놀지 마라" 라고 말이죠. 그렇지요? 그것은 방금 말한 것처럼 걷어내는 것인데, 즉 "너는 내가 원하는, 나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대상이어야 한다. 따라서 그 아이와 놀지 말고, 공부를 잘하는 아이와 놀아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못난 인간 잘난 인간 할 것 없이 모든 인간에게 그 전체를 전부 다 주셨는데, 그런데 그것을 누가 걷어낸다는 겁니까? 자기 쪽에서 톱과 칼을 들고 마구 잘라내고 또한 걷어내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목적이 있어서 그러한데, 그것이 흔히 말하는 '목적이 이끄는 삶' 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ㅋㅋ).

나를 위한 소설 !!

그렇게 해서 자기가 기대하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이 땅에 구체화를 시키는데, 그것을 두고 저는 '나를 위한 소설' 이라고 하고 싶다는 말이죠. 이것은 너무나도 단단해서, 아무리 성경공부를 해도 들어갈 틈이 없다는 겁니다. 오직 자기를 위한, 자기를 빛낼 수 있는 스토리를 전개하는데, 그러니 우리 자신에게 참 문제가 많다는 말이죠.

제가 무엇을 근거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고 하니, 그것이 십자가 사건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이 왔을 때, 유대인들은 아무리 보아도 그분은 메시야가 아니라는 말이죠. 물론 예수님은 자기가 영이라고 하지만, 엄연히 예수님은 자기 아버지도 있고 어머니도 있다는 겁니다. 아이 때부터 해서 자라는 것을 다 알고 있는데, 아버지는 목수 일을 하면서 나사렛 동네에서 살았다는 말이죠.

그러니 아무리 따져보아도 예수님이 메시야일 수가 없는데, 이미 그들의 관심사가 고정이 되어있고 확정적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게 돌맹이보다 더 단단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차라리 이 돌들이 소리를 친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체면, 위신, 명예 !!

그러니 우리는 평생을 자기가 주인공이 된 소설책을 쓰고 있는데, 그게 추억이고 기억이라는 겁니다. 그러한 자기 드라마에 흠집을 내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을 세 가지로 표현하면, 체면, 위신, 명예,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제가 어느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내가 죽는 것이 무섭습니까? 아니면 내가 살아있으면서 자기 체면과 위신과 명예가 손상되는 것이 무섭습니까?" 라고 말이죠.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은데, 자살이라는 것은 자기가 지킬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보고 싶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정말로 금실이 좋은 부부라고 하면, 한 쪽이 먼저 죽으면 따라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부부사이에 늙어가면서 싸워도, 같이 살아있으면 그게 서로가 서로의 자살을 방지하는 것인데, 그런데 한 쪽이 그만 죽어버리면 화풀이를 할 대상이 없어진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계속해서 벽을 보고 마구 던질 수 없고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그대 있음에 내가 있다" 라는 것인데, 자기는 자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쪽에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쳤기 때문에, 그쪽이 있어 주어야만 자기 있음이 확인되는데, 즉 자기 존재가 증명된다는 겁니다. 부모에게 자식이 왜 소중합니까? 자식이 죽으면 부모가 같이 죽으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의 모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그 자식놈에게 다 쏟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데이트 폭력이 왜 일어납니까? 가만히 있는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빠, 커피를 사주세요. 밥을 사주세요. 옷을 사주세요" 라고 해서 모두 다 사주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남자가 모든 비용을 다 대었는데, 그런데 1년 뒤에 뭐라고 합니까? "이제 그만 헤어져요" 라고 하는데, 그러니 난리가 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왜 기름준비를 해야하는가?

마태복음 25장에 아주 어려운 대목이 나오는데, 기름을 준비하는 다섯 처녀 이야기인데 말이죠. 어떤 부분이 어려운고 하니, 신랑이 신부와 약속시간을 잡아서 예식장에서 결혼을 하면 되는데, 기름을 준비하라는 이야기를 왜 했느냐는 겁니다. 그게 미스터리라는 말이죠.

(마 25: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마 25:2)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마 25: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마 25: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이것을 목사들이 뭐라고 합니까? "여기에서 기름은 성령인데 …" 라고 하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데, 여기서 성령이 왜 나옵니까?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말이죠. 여기에 성령이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성령은 모든 것이 십자가로 다 마무리가 되고 난 다음에 나오는 것이지, 아무렇게나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겁니다.

너는 예수님의 작품이야 !!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왜 기름준비를 해야하는가?" 라는 것인데, 좋으면 그냥 결혼을 하면 되는데 말이죠. 그것은 처녀가 신랑의 작품이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작품이 되는 사람은 무엇을 아는고 하니, 자기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믿음, 자기 소망이 아니라 주님의 소망, 자기 사랑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인데, 왜냐하면 주님이 주신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이 구원을 하신다는 것은, "우리 서로 좋게 지내자" 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준 것을 찾겠다" 라는 말이죠. 그러니 주님께서는 자기가 집어넣어 놓고 자기가 찾으러 오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것을 자기의 행함으로 출발하기 때문에, 물론 우리가 행하는 것은 맞지만, 그 행함조차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는 증거물로서 행함이 일어날 때, 그것은 행함이라도 예수님의 생명책에 기록이 되는 행함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집어넣은 행함이 있는데, 그것을 야고보서에서는 '은사' 라고 한다는 겁니다. "나는 행했다. 믿음이 있다" 라고 해서, 그게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해서 구원을 받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야고보서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제 그분을 기다리면 된다 !!

예수님께서 그것을 집어넣을 때, 그러면 여기서 충돌이 생기는데, 그 충돌의 완성이 무엇인고 하니, 충돌을 하면서 자기 부인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 자기 부인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나는 부족합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문제가 있다" 라는 것인데, 이것을 세 글자로 줄이면 '문제인(?)' 인데 말이죠(ㅋㅋ).

산 속에 들어가서 도를 닦는다고 해서 자기 부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살아가면서 모든 문제는 자기에게 있다고 하는 것, 그게 바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에게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 그 자체를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 무엇만 기다리면 되는고 하니, 남들이 보기에는 문제가 없을지 몰라도 자기 스스로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것은, 그것은 이미 자기 안에 비밀이 장착되어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제는 그 비밀을 주신 분을 기다리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오실 신랑을 기다리는 것, 그것이 문제가 있는 자기가 잘났다고 하는 자기의 체면, 위신, 명예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라는 말이죠.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

그런데 자기가 그만 자기를 사랑해버리면 언제나 긍정적이 되는데, 그래서 "그 여자를 왜 때렸어요?" 라고 하면, "내가 놀러갈 때나 무엇을 할 때 모든 비용을 다 지불했습니다. 그런데도 헤어지자고 나니 그만 화가 나서 때렸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 행동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의 행동을 미안하다고 해도, 그것을 깊숙이 들어가 보면 어떻습니까? 그 사람의 양심에게 물어보라는 겁니다. 과연 자기가 잘못했는지를 말이죠. 인간은 절대로 자기 행동에 대해서 잘못했다고 하지 않는데, 그런 근거를 아예 없애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그 여자를 왜 때렸습니까? 당신이 무슨 권리로 때렸습니까?" 라고 하면, 뭐라고 합니까? "내가 때리고 싶어서 때렸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어디까지나 자기 의지인데, 그러니 왜 자기서 알아서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느냐는 말이죠.

니체의 '적극적 허무주의' !!

이것이 바로 니체의 철학인데, 인간은 스스로 포기하는 법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니체는 "신은 죽었다" 라고 하는데, 자기가 바로 신인데 신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죠. 즉 "니가 믿는 신을 회수해서 너에게 집어넣어라. 그러면 니가 신이 되는데, 왜 자꾸만 종교에 주눅이 들어서 사는가?" 라고 하는 의미인데,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이런 니체의 철학이 오늘날 이 사회에 다 퍼져있는데, 특히 대기업에서 신입사원을 훈련시킬 때보면, 그때 훈련을 시키는 그 모든 이론이 니체의 철학에서 나왔다는 말이죠. 그것을 어렵게 말해서 '적극적 허무주의' 라고 하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세상은 허무한데,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다. 그러니 니가 알아야 해라. 니가 잘하면 승진이 되고 못하면 쫓겨난다" 라는 겁니다.

스님, 그 마음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러니 이것은 "이 세상에 너밖에 없다" 라고 하는, 즉 '천상천하유아독존' 이라는 것인데, 불교철학과도 같다는 말이죠. 그래서 니체에게서 윤회설이 나온다는 겁니다. "종교라는 껍데기를 다 벗기게 되면, 그 안에 니가 들어있다. 그러니 소중한 것은 바로 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불교는 여기서 더 나아가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너의 마음이 결정한다. 그러니 '너' 라는 것을 떼어버리고 그 마음을 믿어라"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라는 겁니다. 즉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는데, 그러니 마음만 안정이 되면 지옥과 같은 이 세상도 천국이다" 라는 겁니다. 이게 곧 불교라는 것이죠.

그러면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묻는데 "스님, 그 마음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게 '나'에게서 나온 것입니까?" 라고 말이죠. 그러면 친절하게 스님은 "여러분, '나' 라는 것은 없는데, 자아는 없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무아(無我)사상' 이라는 것인데, 공(空) 사상에서 무아 사상으로 변한다는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그러면 나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라고 하면, "그 마음이 결과적으로 된 것이 자아라는 것인데, 따라서 그동안 마음의 자유를 골치 아픈 '나' 때문에 누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머리를 밀고 산에 가서 '나는 없어져라. 없어져라. 나무아미타불' 이라고 하면, 순수한 본래의 마음을 가지게 되는데, 그러면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는 대자 대비하신 부처님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요즘은 감리교나 통합 측에서도 이런 것을 배우는데, 현대인들이 경쟁 때문에 스트레스를 너무나도 많이 받으니 말이죠. "우리교회에 오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장사를 해먹는다는 겁니다. 기장 측은 촛불집회를 하는데 정신이 없고 말이죠.

고객을 사랑하는 천주교 신학 !!

천주교도 그렇게 장사를 하는데, 그러니 천주교는 기독교가 아닌 불교라는 겁니다. 이 천주교의 사상은 어떠한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참 착하게 만들었는데, 아담이 그만 실수를 했다. 하지만 우리 속에는 처음에 주신 하나님의 착함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양성화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야 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하면 "개신교는 그것도 모르고 전적타락이라고 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기도를 하면 얼마든지 숨어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휘할 수가 있는데, 따라서 교회에만 구원이 있다고 하면 안 되고, 온 천지에 다 구원이 있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천주교의 신학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다 용납을 한다는 말이죠,

장사를 제대로 하려고 하면 구색을 다 갖추어야 하는데, 고객이 "그 물건이 있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것은 없습니다"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고 좋아하는지, 그것을 파악해서 가져다 놓아야 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권위와 힘은 고객에게서 나오기에 말이죠.

그러니 교회든 성당이든 간에 모두가 고객을 잡아야 하는데, 고객이 곧 왕이라는 겁니다. 세상이 바로 이런 세상이니 아무리 예수님이 비밀로 와도, 이것이 사람들에게 이게 먹혀 들어갑니까? 전혀 들어갈 틈이 없다는 말이죠. 도무지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왜 다섯 명이 아닌, 열 명인가?

그러니 이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에 있어서, 다섯 명을 구원하려고 하면 처음부터 다섯 명하고만 관계를 지으면 되는데, 그런데 왜 열 명이냐는 겁니다. 그것은 곧 그 떨어져나간 다섯 처녀가 어떤 처녀인지를 보라는 말이죠. 그래야 구원을 받은 다섯 처녀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파악이 된다는 겁니다.

떨어져나간, 즉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경우에, 그들은 누구를 위한 신랑인고 하니, 자기를 위한 신랑이라는 말이죠. 즉 자기가 천국에 가기 위한 신랑이라는 겁니다. 그러한 판단을 자기가 했고, 그러니 신랑을 맞을 준비도 역시 자기가 알아서 판단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신랑이 오면 이렇게 하면 될 것이다" 라고 허면서, 그것을 자기가 판단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기름을 준비해야한다" 라는 메시지에 대해서, "신랑이면 내 신랑인데, 그러니 새로운 조건을 제시하지는 않을 거야" 라고 여겼는데, 왜냐하면 자기만 잘 되면 되니 말이죠.

한 번 떠난 사람은 내 마음에는 없어요 ♬

이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경우에는, 여기에 딱 맞는 유명한 노래가 있는데, '문 밖에 있는 그대' 라고 말이죠. 그 가사를 보면 "한 번 떠난 사람은 내 마음에는 없어요" 라고 하는데 말이죠. 젊은 사람들 같으면 여기서 빵 터질 텐데, 다들 나이가 많아서 이게 무슨 노래인지도 모르지 싶다는 겁니다(ㅋㅋ). '박강성' 이라는 가수가 불렀는데 말이죠.

(녹취 구 - 목사님, 저는 처음에 '창 밖의 여자' 인 줄 알았는데, 처음 듣는 노래입니다. ㅋㅋ)

그게 무슨 내용인고 하니, 자기와 사귀던 여자가 돈을 보고 다른 남자에게 가버렸는데,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옛날의 남자가 좋다고 하면서 그 여자가 또 다시 찾아왔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는 말이 "떠난 사람은 내 마음에 없다" 라고 하는데, 쉽게 말해서 "저리 가라!" 라는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 열 처녀의 비유와 '문 밖에 있는 그대' 라는 노랫말이 정말로 잘 어울리는데, "내가 준 사랑이 너에게 없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로 "너는 처음부터 너 자신을 위해서 나 예수를 사랑했다" 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너에게 준 사랑은, 내가 그 어떤 조건을 내걸어도, 니가 너를 위한 소설은 쓰지를 않는다. 왜냐하면 너는 나 예수를 위한 소설을 쓰기 위한 소재이지, 너 자신의 체면과 위신과 명예를 위해서, 즉 너를 위한 소설을 쓰면 안 된다" 라는 겁니다.

저의 친척 중에서 서문로 교회의 장로님이 계시는데, 합동 측에서는 대구에서 제일로 유명한 분인데 말이죠. 제가 말을 아무리 함부로 해도 그 양반에 대해서는 좀 주저하게 되는데, 그래도 할 말은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분이 연세가 80이 넘어서 책을 한 권 냈는데, '나의 신앙일기' 라고, 일종의 자기 신앙고백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것이 누구의 소설입니까? 자기 소설인데, 악마가 은근히 심어준 자기 체면과 위신과 명예가, 그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우회해서 그만 충족이 된다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전혀 아니고 말이죠. 그렇게 되면 불교인데, 즉 십자가의 길을 갔던 '나'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여러분, 부활의 새 시대가 왔습니다 !!

그러면 예수님은 중도에서 그만 떨어져 나가고, 그만 자기가 주인이 된다는 말이죠. 방금 제가 친척의 자서전적 책을 하나의 예로 들었지만, 일반적으로 교회에서는 그것을 뭐라고 합니까? "이제 십자가는 지나가고 이제 부활의 시대가 왔으니, 부활의 새 생명을 믿읍시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를 맺읍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왜 그렇게 나옵니까? 왜 십자가에 얽매이지 말자고 하느냐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인간에게는 시간과 공간이 있는데, '나' 라는 것을 형성하기 위해서 이 시간이 무엇인고 하니, 이것이 카이로스가 아니고, 일종의 자기를 위한 스토리이기 때문에,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가 뒤로 흘러간다는 겁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 문제점이 누구에게 있는고 하니, 바로 '나'에게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예수님의 십자가도 믿고, 또한 부활까지도 믿기 때문에 자기에는 문제점이 없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러니 드디어 본색을 드러낸다는 말이죠.

끝까지 십자가만 크게 보여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십자가는 많아 봤고, 그런데 계속해서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소극적인 인간이 되니 안 되고, 보다 더 긍정적인 인간이 되려고 하면, 부활의 새 열매로 나가야 한다" 라고 하면서, 그쪽으로 공략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다는 것 자체가 결국은 누가 살아있다는 겁니까? 자시 자신이 살아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뭐라고 합니까? "목사님의 그런 이야기를 십자가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해당이 될지 몰라도, 죄인이었는데 십자가의 피로 용서를 받았으면, 이제 본격적으로 의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런데 그런 의인의 삶을 부정적으로 보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은 주님의 약속에 위반이 되지 않습니까?" 라고 반박을 한다는 겁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

개혁주의 신학이나 청교도 신학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데, 도대체 성경말씀을 보기는 보느냐는 말이죠. 정말로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은 사도바울인데, 그의 고백은 무엇인고 하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생명이 계속해서 자기에게서 나오려고 하면 자기는 죽어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몸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드러나려고 하면,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어야 한다는 말이죠.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자근자근 밟히는 삶 !!

쉽게 말해서, 예수님은 우리를 짓밟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런 밟힐 거리가 있어야 하는데, 남들이 보기에 말이죠.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영이니 보이지를 않는데, 그러니 보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밟히는 '나' 라는 것만 보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를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는데, 물론 저쪽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리지만 말이죠.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나도 한 때는 나의 체면과 위신과 명예가 하나님보다도 더욱 더 소중했었어. 그런데 고맙게도 주님은 그것을 자근자근 밟아주셨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왜 자살을 하는가?

만약에 어떤 사람이 강에 뛰어내려서 자살을 했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의 체면과 위신과 명예를 품고 물 속에 뛰어든 것이란 말이죠. 자기의 목숨을 버릴지언정, 자기 체면과 위신과 명예는, 그러한 자기를 위한 소설의 소재는 결코 포기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분이 바로 노무현 전대통령인데, 얼마나 자기 자존심이 강한지 모른다는 말이죠. 자기의 체면과 위신과 명예 때문에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졌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그분이 자살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아직 있다고 하는데 말이죠. 제가 결코 멀리 떨어진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대구바닥에서 별로 유명하지 않으니 그렇게 자살할 기회도 없는데 말이죠. 만약에 우리 중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어서 청와대에서 5년 동안 있다가 퇴직을 했는데, 그런데 뇌물이니 어쩌니 하면서 그런 일들이 생긴다고 하면 자살할 가능성이 많다는 겁니다. 조그마한 중소기업을 하다가 망해도 자살하는데, 그런 사람들 가운데는 장로들도 꽤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강원도 할머니가 어디 자살을 하던가요? 밭에서 감자를 캐다가, "올해는 감자농사가 되지 않아서 그만 죽어야 하겠다" 라고 하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우물가에서 아낙네들은 빨래를 하고, 그리고 아이들은 그 옆에서 아무런 걱정도 없이 뛰놀면 된다는 말이죠.

요즘처럼 암이나 성인병 때문에 고민할 이유가 없는데, 물론 건강검진도 없다는 겁니다. 건강검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데, 특히 중년 남자들의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통지서가 날아왔는데도 검사를 받지 않고 미루고 있으면, 마누라가 옆에서 밥을 먹을 때마다 바가지를 긁는다는 겁니다(ㅋㅋ).

인간은 태어나서 살다가 죽으면 그만인데, 태초의 비밀이 뭐든지 간에 말이죠. 그러니 그야말로 짐승인데,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빨래하고, 그리고 저녁이 되고 어두워지면 자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보릿고개가 오면 넘어가면 되고, 그러다가 나무뿌리도 제대로 먹지 못하다가 넘어가지 못하면 죽으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살다보니 평균수명이 45세인데, 그러니 60세를 산다면 그것은 기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환갑잔치를 하는데, "어이쿠, 60이나 살았어요. 참 복을 많이 받았어요" 라고 하는 것인데, 열이면 일곱은 그 이전에 다 죽으니 말이죠. 그러니 자기 팔자대로 살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불교가 융성해지고 조상숭배가 집집마다 행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죠.

야야, 내가 죽거든 제사는 좀 지내라 !!

그래서 추석이 있고, 모두들 제사를 지낸다는 겁니다. 절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도 자기가 죽을 때가 되면 은근히 이것만은 부탁을 하는데, 자기가 죽어서 귀신이 되면 좀 신경을 써달라는 겁니다. 물론 장남에게 말이죠. 부모가 유독 장남에 대해서 미련을 가지는 것은, 그게 첫째 아들이 되어서 기억에 많이 남아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사실은 이 제사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아무튼 그렇게 제사까지 신경을 쓴다는 것은, 죽어서도 자식을 통해서 자기 소설을 계속해서 쓰겠다는 것인데, 그러니 자기의 체면과 위신과 명예가 얼마나 지독하냐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체면귀신 일곱에, 위신귀신 일곱에, 명예귀신 일곱에, 그것만 해도 귀신이 21명이라는 겁니다.

조금만 움직였다고 하면 "그러면 내 체면은 어떻게 되지? 그리고 내 위신은? 내 명예가 손상되면 안 되는데?" 라고 하는데, 그렇게 귀신이 달라붙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어디를 가든 자기가 가는 곳에는 자기 귀신이 들러붙는다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보다 자기가 더 소중하다는 말이죠.

이제 남은 시간에 '카이로스'에 대해서 해보겠는데,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서 무슨 해결책이 있느냐고 하신다면, 물론 있다는 겁니다. 이 카이로스가 아이온이라는 자기 소설, 즉 드라마의 줄거리에 침투를 하는데, 때가 되매 침투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때' 라는 것은, 여기 이 안에 예수님께서 자신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주사를 놓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아플까요? 아프지 않을까요? 물론 아픈데, 그 아픔을 저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은데, '예상 못할' 이라고 말이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를 대라고 하면, 그것이 항상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예상하지 못한 일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성령이 임하면 어떻게 되는가? '따끔' !!

이게 오늘강의에서 마지막으로 어려운 대목인데, 우리는 다들 자기 나름대로의 자기 소설이 있는데, 자기만의 드라마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면 어떻게 됩니까? 주사를 맞게 되는데, 그러면 우리는 '따끔' 하면서 아프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기대한 것이고, 진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이 파란 이야기만 그만 빨갛게 변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면 전부가 예수 그리스도의 드라마 속에서의 자기 드라마가 되는데, 그렇게 자기 인생이 주님의 인생의 일부가 되어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 인생자체가 그만 카이로스가 되고 마는데, 자기가 80년을 살았다는 것이 한 순간의 때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오늘은 80년을 사신 분이 참석하지 않았는데 말이죠(ㅋㅋ).

파란 색일 때는 자기가 인생의 주인공인데, 그런데 빨갛게 되면, 즉 성령을 받게 되면 주님이 주인공이고 자기는 주님을 증거하는, 그 비밀을 드러내는 엑스트라라인데, 즉 단역배우라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전도서이고 말이죠.

이번 토요일에 결혼식 주례를 하는데, 김을수 집사님의 첫째 따님이 결혼을 하는데 말이죠. 주례사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여기서 전도서 3장을 보겠는데, 제가 두 가지를 이야기하겠는데, 그 차이점을 한 번 살펴보시라는 겁니다.

먼저 첫 번째를 읽어보겠습니다.

(전 3: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전 3: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그 다음은 두 번째입니다.

(전 3: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전 3: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이게 같습니까? 다릅니까? 같은 본문을 읽었으니 당연히 같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가 자기 소설의 중인공이라고 여기고 이 본문을 보면 어떻게 됩니까? 입가에 미소를 띄우면서 "내가 마지막에 드디어 천국에 가는구나" 라고 하면서 멋진 피날레를 예상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주인공이고 자기는 엑스트라라고 하면, 그러면 자기는 목적에 해당이 됩니까? 때에 해당이 됩니까? 그게 '때' 라는 겁니다. 1958년도에 때가 되매 태어났고, 죽을 때가 되어서 죽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전도서 3장에서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라고 하는, 그것이 자기에게 하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나는 시루떡이고,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적당한 때를 붙여주셨다" 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되었는데, 즉 반대로 해석을 했다는 말이죠. 기독교 2,000년 역사를 통해서 이렇게 성경을 반대로 해석해왔다는 겁니다. 고객만족을 위해서 교회에서 그렇게 정반대의 해석을 해왔다는 말이죠.

그래서 교회에서 "고객 여러분, 천국에 가고 싶지요? 천국에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돈을 내세요" 라고 하는데, 여기서 힌트를 얻어서 자기 소설에 그것을 첨가하면 어디 천국에 갑니까? 다시 강조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문제가 자기에게 있다는 겁니다.

바로 니가 문제야 !!

만약에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없다고 하면,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손목을 잡고 "야야, 같이 가자" 라고 하시면서 끌고 가시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 해결책이 무엇인고 하니, "주님께서 나에게 맞아죽어야 한다" 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믿음과 나의 소망과 나의 사랑으로 인해서, 나의 명예와 나의 위신과 나의 체면으로 인해서 주님의 몸에 상처가 나야한다" 라는 겁니다. 즉 "주님이여, 내가 주인공입니다. 주님이여, 내 자식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지금 내 자식이 어떻습니까? 이렇게 하시면 저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아니, 내가 누구지?

그런데 때가 되매, "이런 망나니를 다 봤나?" 라고 하면서 주먹이 일방적으로 날아올 때, 우리에게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나는 뭐지? 내가 도대체 누구지?" 라고 하게 되는데, 즉 근원적으로 다시 한 번 자기를 돌아보게 된다는 말이죠.

남들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듣기가 싫고, "당신은 정말로 목사님답습니다" 라고 해도 이제는 식상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자기가 자기를 너무나 많이 칭찬을 했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그런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데, 그런데 뭔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그게 아니지?" 라고 하면서 성경말씀을 다시 보게 된다는 말이죠.

우리는 아담의 자손으로서 범죄한 인간이고, 요한계시록에 생명책과 행위책이 나오는데 그것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고, 자기는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면서 교회에 다니고, 그러면서 예수님을 믿기는 믿는데, 하지만 자꾸만 일들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고, 그래서 기도를 하면서 항의를 하고, 그러니 그만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끝까지 십자가 안 !!

그러니 다시 정리를 해야하는데, 여기서 '엉망진창' 이란 것은, 카이로스 안에 자기 자신을, 즉 자기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카이로스라는 캡슐 안에 집어넣어야 한다는 말이죠. 자꾸만 펼치려고 하지를 말고, 카이로스라는 십자가 안에 집어넣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한국교회처럼 "이제 십자가는 잊고 부활을 생각하라" 라고 한 적이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그 반대로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는데, 그러니 끝까지 십자가 안이라는 말이죠. 이 세상에 대해서 자기는 죽은 자라는 겁니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피, 피, 피 !!

이것을 히브리서에서는 '피' 라고 하는데, 피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자기가 주인공이 된 소설에서 이 피라는 것은, 자기가 잘 되기 위해서 주님이 용서해주셨다고 하는, 그렇게 자기가 예상한 하나님의 넘치는 무한한 사랑밖에 되지 않는데 말이죠. 하지만 그런 십자가를 믿어서 천국에 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자기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이 들추어져야 십자가인데, 아니 천국에 가기 위한 십자가를 누가 싫어합니까? 누구 한 사람이 대신 희생해서 자기가 천국에 간다고 하면, 얼마든지 감사해하고 고마워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찬양한다면, 그것은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모독하는 것이란 말이죠.

이제 조금만 하고 마치겠는데, 교재 60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고 말씀을 직접 대하니, 인간 대부분의 모순이 외부로 노출되는 현상입니다. 자식을 양육하되 주 안에서 하고, 남편을 봉양하기를 주 안에서 하고, 아내를 사랑하기를 주 안에서 하라고 하는 이 모든 말씀은, 결국 주 안에서 우리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 즉 허무한 존재임을 알리기 위해서 구성된 상황임을 파악하는 것이 주 안에서의 태도입니다.

(엡 5: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엡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사람들은 "자식을 양육하되 주 안에서 하고, 남편을 봉양하기를 주 안에서 하고, 아내를 사랑하기를 주 안에서 하라" 라고 해도,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데, 그게 십자가에서 나온 말씀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고, 괜찮은 자기의 미래상을 너무 예상해서 좋다는 것과 손을 잡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콘크리트와 뚫린 구멍 !!

어제 낮 시간에 설교를 하면서 저도 은혜를 받았는데, 설교자가 은혜를 받지 않고 어떻게 설교를 하겠습니까? 그렇지요? 그게 무엇인고 하니, 바로 '콘크리트' 라는 겁니다. 이 콘크리트는 타설을 하고, 그리고 양성을 해야한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모든 것은 비밀인데, 무슨 말인고 하니까, 신약에 나타난 비밀, 즉 복음이라는 말이죠. 그게 십자가의 피인데, 주님께서는 피를 중심으로 이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는 겁니다.

제가 어릴 때 대구의 비산동에 살았는데, 그때 공사를 많이 했다는 말이죠. 그래서 학교에 갔다와서는, 저는 학원에 다니지 않았기에 그것을 많이 구경한 기억이 난다는 겁니다. 그때는 레미콘 차량도 없었는데, 그래서 인부들이 전부 다 등짐을 지고 가서 레미콘을 쏟아 붓는다는 말이죠. 그리고는 그 근처에 새끼줄을 쳐놓는데,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만 개가 뚫고 들어가서는 자기 발자국을 남겨놓았다는 겁니다.

그것을 제가 왜 지금 이야기하는고 하니, 주님의 세계인데 그런데 인간들이 그만 자기 세계로 만들어놓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 뚫린 구멍이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 회사이고 자기 가게이고, 그리고 자기 가정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자기가 하는 것에, 즉 자기 행함에 몰두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니 십자가의 피가 먹혀들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전체를 볼 줄 모르는데, 그래서 성경에서 "헛되고 헛되다" 라고 하면 "무슨 개소리인가?" 라고 한다는 말이죠. 자기는 결혼해서 자식을 모두 다 잘 키우고 지금도 아내와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데, 그러니 도대체 무엇이 헛되냐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완전히 깨끗하게 해서 원상복구를 하시는데, 즉 청소를 하신다는 겁니다. 소제를, 제거를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이 자기가 주인공이라고 우기기 때문인데, 그래서 '나'를 제거하시는데, 즉 죽여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가 죽으면 자식도 소용이 없고 모든 재산도 의미가 없는데, 자기가 죽는 마당에 말이죠. 그러니 남는 것은 무엇밖에 없다는 겁니까? 사도바울이 말한 것처럼, 오직 십자가 안의 그리스도의 생명과 믿음과 소망과 사랑밖에 없다는 말이죠.

영원히 남는 것을 사모해야 !!

그러니 영원히 남는 것을 사모해야 하는데, 그것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은사' 라고 하는데, 즉 영원한 선물이라는 겁니다. 그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인데, 그 은사를 영원히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항상 있는 것을 주님께서는 성도에게 미리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고전 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렇게 미리 집어넣어 주게 되면, 우리는 자기 소설을 쓰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주님의 소설에 있어서 하나의 소재로서, 때가 되매 우리 자신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성령으로 왔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키게 되는데, 그러니 자살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죠. 노무현 대통령이나 김성수 목사처럼 말이죠.

이게 결코 우리가 웃을 일이 전혀 아닌데, 자살은 자기가 보고 싶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발견하기 못했기에 그만 택하게 된다는 겁니다. 평소에는 자기가 투자한 것이 있었는데, 자기 아내나 자기 자식이 있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들이 그만 자기보다도 일찍 죽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만 이 땅에서는 자기 것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그래서 그것을 지켜주기 위해서 그만 죽음을 택하고 만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서 자살을 할 때는 뭐라고 합니까? "니가 있는 곳에 내가 가서 지켜줄게" 라고,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있는 이상,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끝까지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데, 우리 속에 영원한 것이 있기에, 그게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이 넣어주신 것이기에, 그래서 끝까지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쓰레기더미와 빛나는 천사 !!

그런데 여기서 무슨 문제가 생길 수 있는고 하니까, 이러한 이야기에 대해서, 이런 것이 자기에게는 하나의 지식이나 이론으로 들린다고 하면, "뭐 그럴 수도 있겠다" 라고 하는 식으로 말이죠. 그러면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하면 되느냐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집에 쓰레기가 너무 많아서 치워야 하는데, 엄청 골치가 아프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때 갑자기 천사 두 명이 집에 와서 영광의 광채를 드러내고 있다면 어떻게 됩니까? 지금 자기 집에 쓰레기가 많다는 것이 과연 무슨 문젯거리가 되느냐는 겁니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데, 그러니 우리네 인생이 이러한 복음의 광채를 모르게 되면 사소한 것까지 다 골칫거리라는 것이죠. 성경공부를 마치고 어디로 점심을 먹으러 갈지, 그런 것도 말이죠. 그리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돌아서면 일이라는 겁니다. 자식들을 결혼을 모두 시켜도 왜 그렇게 해야할 일이 많으냐는 말이죠.

그것은 걸쳐놓은 것이 많기 때문인데, 취미생활 동우회도 있고 계모임도 있고, 그리고 거기에다 감투까지 쓰고 있으니 정신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복음의 광채가 비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런 것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별로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계모임을 하든 골프를 치든, 박사모에 집회에 가든, 얼마든지 하라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이 목숨을 걸 일은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복음의 광채가 오게 되면, 그런 일을 하기는 하지만, 거기에 자기 체면과 위신과 명예를 쏟아 부어서, "이것이 아니면 나는 죽는다" 라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자식이 애를 먹이고 손자를 애를 먹이는 것, 물론 골치가 아픈 일이지만, 하지만 복음의 광채가 임하게 되면, 물론 그것을 해결을 해야하겠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너무 마음을 졸이지는 말라는 것이죠.

그까짓 것, 괜찮아유 !!

270억 짜리 조그마한 사업을 하다가 그만 부도가 났다고 하면, 하지만 그것 때문에 괴로워서 자살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것 때문에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아니기에 말이죠.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기 위해서 주님이 주셨다가, 주님이 거두어 가셨구나" 라고 여기면 된다는 겁니다. 실제로 그러하고 말이죠.

미장원에서 머리를 했는데 마음에 들지를 않는다든지, 옷을 샀는데 그만 이월상품이라든지, 그렇다고 해서 너무 짜증을 내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고 식당을 하는데 옆에 같은 업종이 생겨서 매출이 그만 반 토막이 나도 너무 상심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들은 모두 다 쓰레기더미인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쓰레기를 니가 이길 수 있는가?" 라고 하기 위해서 복음의 광채를 주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쓰는 자기 소설이 아니라, 다 때가 되매 주님께서 허락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스티커를 떼려고 하지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면 된다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은 주님에게 붙어있는 스티커이니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과 성령을 받은 자들이 보는 것이 달라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기뻐했고, 사도바울은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는데, 그러한 고백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러한 고백을 같이 내뱉을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9,25 오후 11시에 마침.
스티커도 좋지만, 껌딱지가 딱입니다. 명불허전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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