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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1 00:14:12 조회 : 441         
[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21 - 경건의 함정 이름 : 구득영(IP:203.223.97.162)
[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21 - 경건의 함정

07,10,23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천국이 역겨운 인간들 !!

오늘은 서 목사님처럼 앉아서 한 번 해보겠는데, 또박또박 차분하게 말이죠. 교재 61페이지를 보면, 여기에 천국이 나오죠. 천국은 하나님을 섬기는 곳인데, 그런데 이게 인간에게는 상당히 역겨운 짓이라는 겁니다. 이미 아담에 의해서 인간은 자기가 우선인데, 그런데 누가 누구를 섬긴다는 겁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남을 섬긴다는 것이 결코 자연스럽지가 않은데, '역겹다' 라는 것이 결코 지나친 표현이 아니라는 말이죠. 마음에 드는 사람과 친하게 지낼 수는 있는데, 그런데 모든 것을 다 바치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 인간에게는 못할 짓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천국은 누구를 섬기는 곳인데, 자기를 섬기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평생동안 자기만 섬기는 짓을 해왔기 때문에, 그런데 죽었다고 해서 당장 그것을 걷어치우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미 체질화가 되어버린 습성이 어디로 가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도 섬겨야 하겠고 자기도 섬겨야 하겠고, 그래서 인간들은 어떻게 하는고 하니, 하나님 쪽에서 법이나 지시사항이 오게 되면, 그것을 지켜줄 용의는 있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조건이 하나 있는데, 다만 자기는 건드리지 말아달라는 것이죠.

나는 건드리지 마세요 !!

그래서 인간들은 "천국은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다" 라고 정의를 내리고, 그것을 유포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에는 무엇이 전제가 되었는고 하니, "하나님을 섬겨줄 테니 나는 건드리지 마세요" 라는 겁니다. 섬기라고 하면 섬겨줄 테니, 자기는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이죠.

이 세상에서 자기보다 높은 자리에 있고 힘이 있는 자가 있는데, "그 사람을 섬겨라" 라고 하면, 그러면 얼마든지 섬길 용의는 있는데, 하지만 그렇게 섬겨주는 조건으로 자기는 건드리지 말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이죠. 이게 바로 유대인들이 했던 짓인데, 바리새인들이 말이죠.

그러면 천국은 수정이 되어야 하는데, 천국은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 아니고, "주님을 섬기는 곳이다" 라는 겁니다. 그 주는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주가 되게 하셨는데, 그 주는 바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주 예수를 섬기는 곳이 바로 천국이라는 말이죠. 그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데, '어린양의 보좌' 라는 겁니다.

(계 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런데 이 세상의 교회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이것이 같다고 한다는 말이죠. 만약에 십자가가 없다고 하면 같은 것이 맞는데,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자들이 누구를 죽였습니까? 예수님을 죽였는데, 그래서 일어난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무시한다고 하면 다음과 같은 공식이 성립하게 되는데,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다가 하나님의 아들까지 섬기게 되면, 그게 온전한 천국이다" 라고 말이죠. 그것을 오늘날 교회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다는 겁니다. 굉장히 합당해 보이는데 말이죠.

그런데 그 조건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건드리지 말라는 것인데, 그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법을 지켜주고 또 지켜주게 되면, 그러면 하나님을 섬기는 동시에 거기에 비례해서 누가 멋있어지는 겁니까? 자기 자신이 점점 더 훌륭해진다는 느낌이 들게 된다는 말이죠.

실적은, 분발과 자기 자랑 !!

어제 낮 시간에 이것을 '실적' 이라고 했는데, 이 실적은 두 가지 경향이 있는데, 하나는 "내가 더욱 분발해야지" 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나는 잘났다" 라는 것을 유발시킨다는 겁니다. 실적이 미치지 못하면 더 열심히 하려고 할 것이고, 실적을 달성하게 되면 자기가 잘해서 그렇다고 하면서 자랑질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즉 분발과 자랑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실적은 특정한 프로젝트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따지고 보면 우리 인생자체가 실적위주라는 겁니다. 그게 노인정에 가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데, 큰 놈은 판사고 둘째는 의사고, 셋째는 목사, 그런 식으로 말이죠. 그게 실적이 된다는 말이죠. 목사는 아닌가요?

물론 그런 소리를 들은 상대방도 약이 올라서 가만히 있지 않는데, 반격이 만만치가 않다는 겁니다. 큰 딸은 병원장 아들에게 시집을 보내고, 둘째 딸은 회장아들에게 시집을 보내고, 그리고 셋째 딸은 개척교회를 하는 목사에게 시집을 내고, 그런 식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이 전부 다 자기 실적이 되는데, 그러면서도 그만 입을 다무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겸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이라는 말이죠(ㅋㅋ). 그러니 실적이고 하는 것은 "나를 건들지 말라" 라는 것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식 자랑을 하면,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자식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지" 라고 하는데, 물론 맞는 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나는 개척교회를 두 개나 세웠고, 성지순례를 세 번이나 갔다왔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실적 !!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역시 실적에 해당되는데, 그러니 실적 중에서 제일 고상한 실적을 누가 했습니까?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들이 그만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죽이고 말았다는 겁니다.

우리 장로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큰 아들을 월남에 파병을 보내고 한 번도 집에서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디서 잠을 잤겠습니까? 교회에서 잤는데, 무사히 돌아오게 해달라고 하면서 기도하면서 지냈다는 말이죠. 그 위험한 전쟁터에, 그것도 맏이를 보내고 어떻게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육을 더욱 육되게 !!

그것이 자식에 대한 부모의 본능인데, 그런데 성경은 그것을 '육(肉)'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어느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실적위주인데, 그래서 자기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자기에게 채찍질을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남들보다 조금 낫다 싶으면 남들에게 자랑질을 해대고 말이죠. 그것이 육인데, 그러니 예수님이 오신 것은 육을 육되게 하시는 위해서라는 말이죠.

여기 인간들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 없는고 하니, 단절이 없는데, 즉 끊어짐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 끊어짐이 없이 열심히 섬기면 천국까지 갈 수 있다는 말이죠. 이 끊어짐의 반대말은 이어짐인데, 그러니 열심히 섬기면 그 순서대로 천국에 가는데, 바리새인들이 먼저 가고 그 다음에는 사두개인들이 가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아무튼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는 것인데,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가 없어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래서 섬긴 분량만큼 올라가는데, 받은 상급대로 말이죠. 많이 섬겼으면 천국의 높은 곳에 올라가고, 그렇지 못하면 낮은 곳에 간다는 겁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12제자들도 이야기하고 있는데, 즉 "예수님, 천국에 가면 누가 더 높습니까?" 라고 말이죠. 그렇게 높다는 인식을 가지고 천국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역시 실적위주라는 겁니다.

(마 18: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껍데기를 벗겨라 !!

그동안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면서, 교회에서 무엇을 배워왔는고 하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이런 본심과 결부가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악마의 교회인데, 우리가 마귀에서 태어난 것을 흡족케 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악마가 교회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종교란 무엇입니까? 우리의 악마성을 노출시키는 것, 그게 바로 종교라는 말이죠. 그러니 껍데기를 벗겨야 한다는 겁니다. 부산에 가면 오래된 배의 녹슨 부분을 벗겨내는 아르바이트가 있다고 하는데, 참으로 고달픈 작업이지 싶은데 말이죠. 그렇게 벗겨놓으면 새로 페인트칠을 해서 깔끔한 배로 다시 만든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교회라는 것이, 자기들이 잘났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경건과 거룩을 더하는데, 바로 그런 껍데기는 벗겨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녹을 벗기면 거기서 악마적인 모습이 나오는데, 그런 악마적 모습이 보이는 게 교회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었는데,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것이 빠졌으니, 일단 하나님을 먼저 믿고, 거기에 숟가락을 하나 더 놓는 식으로 예수님을 믿으면 된다는 겁니다.

주님의 교회, 악마의 교회 !!

그래서 성경에서 십자가를 믿으라고 하니, 그것을 하나의 법으로 생각해서, 율법을 믿는 거기에 십자가를 하나 더 추가해서 믿으면, 그러면 하나님도 믿고 예수님도 믿고 또 성령도 믿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오늘밤에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악마가 심어준 자신감인데, 악마가 교회를 세운 목적이 거기에 있다는 말이죠.

왜 그렇게 되는고 하니, 주님이 세운 교회는 악마가 세운 교회가 먼저 있어야 하는데, 주님의 교회는 악마가 세운 교회를 뚫고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래야 십자가 사건이 계속해서 되풀이된다는 말이죠. 십자가 사건은 무지에 의해서, 혹은 오해에 의해서, 그런 악마의 작용에 의해서 주님이 배척을 당하는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먼저 무지하고 오해할 수밖에 없는 군상들이 있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성령과 복음, 그리고 발작 !!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서 아무리 없다고 해도 은근히 기대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말이 먹혀들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막상 복음을 전해보면 상대방이 완전히 발작을 일으키는데,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는 말이죠.

평소에는 그야말로 점잖고 괜찮은 인간인데,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순간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를 흘렸으면, 그러면 나는 죄인이란 말인가? 헌금도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하는데, 그래도 여전히 죄인이라는 말인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결국 이것은 녹을 벗기는 것과도 같은데, 복음을 전하면 평소에 그렇게 점잖던 사람이 완전히 돌변을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복음의 능력인데, 전하는 사람이 어떻게 잘 전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말이죠. 우리는 성령으로 복음을 전하면 상대방이 믿을 것이라고 여기는데, 하지만 그것은 전혀 착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마지막에 보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아무리 성령으로 전해도,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고 한다는 말이죠. 스데반 집사님은 성령에 충만해서 전했는데,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야말로 제대로 얻어맞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으로 전했다고 해서, 그것을 실적과 결부시키면 안 된다는 말이죠.

(행 28: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행 28: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부산의 어느 교회는 '두 날개' 라고 해서, 성령의 날개로 날게 되면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하는데,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실적과 결부시키면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실적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자기 자랑인데, 그리고 그런 자랑거리가 없으면 분발을 촉구하기 위해서 있다는 말이죠.

물론 마귀교회이니 그렇게 하는데, 하지만 이 세상에 마귀의 교회가 아닌 교회가 어디에 있을까요? 다시 반복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쓴 녹을 벗기는 것과도 같은데, 소위 점잖고 괜찮다는 것을 모두 다 벗겨버린다는 말이죠.

간음과 여자와 바리새인 !!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을 하다가 그만 현장에서 붙잡힌 아줌마가 예수님에게 끌려왔는데, 그러면 그렇게 아줌마를 질질 끌고 온 바리새인들은 어떻습니까? 자기들은 그야말로 구원받을 절호의 찬스를 잡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여자를 보고 죄인이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들의 평소 관심사가 무엇인고 하니, 실적위주인데, 즉 "나는 얼마나 잘났는가?" 라는 겁니다. 그런데 보니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자가 있다는 말이죠. 율법에 위배된 것인데, 자기들은 그 정도라는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찬스를 놓치지 않는데, 즉 "나를 봐라. 이렇게 경건하잖아" 라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잘남을 증명하기 위해서 못난 것을 끌고 오는데,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다가 계속해서 섬김을 추가하게 되면, 단절됨이 없이 계속해서 연결이 되어서 천국에 골인을 할 수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그런 연속성을 그야말로 작살을 내버리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잘난 인간들을 중간에서 그만 끊어버리신다는 말이죠. 그것을 오늘날 성령의 입장에서 해석을 하게 되면, 그 여인이 간음을 한 것도 주님이 의도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요 8: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요 8: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요 8: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요 8: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 8: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십자가를 지려고 오셨는데, 물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자들은 더욱 더 착하게 살려고, 그런 착함을 찾지만,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들은, 자기가 더욱 더 죄인이라는 것을, 그런 자기의 죄인 됨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바리새인과 세리 !!

그게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데, 여기에 보면 두 사람이 나온다는 말이죠. 먼저 하나님을 섬기는 바리새인이 등장하는데, 이 바리새인은 금식과, 그리고 구제까지 한다는 겁니다. 구제를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게 아닌데, 물론 십일조는 기본이고 말이죠. 그런데 세리는 어떠합니까?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하는데,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자기 가슴만 친다는 겁니다.

(눅 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눅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 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눅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그러면 주님은 어떠합니까? 누구를 지옥에 보냅니까? 바리새인을 지옥에 보내버린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을 섬기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인데,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섬기면 단 한 사람도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겁니다. 물론 그때는 몰랐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 밝혀진 사항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천국은 어떻게 갑니까? 주님을 섬겨야 하는데, 어떤 주님인고 하니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믿는다는 말이죠. 즉 하나님도 섬기고, 예수님도 섬기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동안 율법을 지키다가, 이제는 십자가도 믿고, 복음도 믿고, 예수님도 믿고, 그렇게 추가해서 다 믿어주겠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이 자기 실적으로 떨어지는데, 즉 잘난 것에 잘난 것을 더해서, 더욱 더 잘난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겁니다.

천국은 수시모집 !!

그런데 세리를 보면 어떻습니까? 누가 먼저 천국에 합격을 해야하는데, 합격을 못하니까 말이 많다는 겁니다. 세리가 천국에 합격을 했습니까? 못했습니까? 세리는 합격을 했는데, 예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소리를 들었다는 겁니다. 그것을 수시모집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의 수시모집은 필기시험은 없고 실기만 본다는 말이죠(ㅋㅋ).

그래서 실기시험을 치는데, 그런데 정작 고개도 들지 못한다는 겁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말이죠. 간음한 아줌마도 마찬가지인데, 현장에서 들켰으니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바로 합격자라는 말이죠. 주님은 의인을 부르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눅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까지는 바리새인들을 합격자로 보았는데, 그래서 그 합격자가 뭐라고 합니까?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에는 주님의 시험 문제지가 깔려있는데, "다음 중 옳은 것은?"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면 사람들이 그것을 풀면서 자기 본성을 드러내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과연 어디를 공격할까요?

물론 성경에서는 바리새인이라고 하지만, 오늘날에는 교인들이라고 보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십일조도 하고, 또 봉사도 하고, 그리고 구제도 하는데,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기가 지은 죄가 많아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부끄러워서 감히 교회에 나오지도 못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구원을 받은 사람일까요?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자기가 되고 싶은 모델이 어느 쪽인지 알 수 있는데, 물론 모두가 잘난 쪽을 하고 택하고 싶은데, 못난 쪽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든 사람들이 거부하는 그 못난 쪽을, 그쪽에 표시를 하는 자들을 주님께서는 천국에 보내신다는 말이죠.

천국과 혼인잔치 !!

천국을 다른 말로 '혼인잔치' 라고 하는데, 그 혼인잔치에 참석한 사람은 특징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백수라는 것인데, 그냥 집에서 놀던 사람들이고, 또한 그냥 길거리에서 놀던 사람들이란 말이죠. 그러니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누가 알아듣겠습니까? 오죽 했으면 성령이 아니면 알아듣지 못한다고 했겠느냐는 겁니다.

(마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예배당이 크다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실적이 좋다는 말이죠. 그러면 실적이 그냥 좋아집니까? 거기에 그만큼 신경을 써야 좋아진다는 겁니다. 큰 아들은 장로고, 둘째는 목사고, 셋째는 장립집사고, 그러면 그만큼 그 집의 실적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큰 아들은 절에 가고, 둘째는 신천지에 다니고, 셋째는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부모에게, 자식은 밤잠을 이루지 못할 대상 !!

그러면 가장으로서 주님 앞에 내세울 실적이 있겠습니까? 없는데, 특히 자식문제는 분발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닌데, 어떻게 그게 분발한다고 되느냐는 말이죠. 자식이 말을 듣습니까? 어릴 때도 듣지 않고, 커서는 더 듣지 않는다는 겁니다. 부모에게는 자식이 밤잠을 이루지 못할 대상이 되는데, 그야말로 한 몸이라는 것이죠. 이런 말이 실감이 나는 분들이 좀 있지 싶은데 말이죠.

아니 어떻게 자식을 전쟁터에 보내고 부모가 편히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그것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한 몸과도 자식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그러면 얼마나 좌절감을 느끼겠습니까? 그러니 좌절감이라는 것은 바로 실적이 없다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결코 까불 수 없는 세리 !!

그런데 이 세리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그런데 주님께서는 구원을 시켜주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어디 가서 까불고 하겠습니까? 오히려 주님에게 뭐라고 하겠습니까? "주님, 지금 사람을 제대로 보고 계시는 겁니까? 제가 얼마나 못난 놈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구원을 시켜주십니까? 말도 안 됩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세리가 말씀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본다면, 그 어느 것 하나라도 말씀을 지킨 것이 과연 있을까요? 자기가 거기에 해당되는 사항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전혀 없는데,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께서 공짜로 구원을 시켜주셨으니, 그 은혜에 보답을 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나서봐야 어떻게 됩니까? 산상설교를 비롯해서 그 어떤 말씀이라도 자기가 지킬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음을, 그것을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또렷하게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리는 더욱 더 죄를 찾게 되고, 반면에 지옥에 가는 자들은 더욱 더 자기가 지킬 것을 찾는다는 말이죠.

세리를 구원하는 게 목적이 아니고 !!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사람은 "그러면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제 죄만 지으면 되겠네요" 라고 하는데, 왜 그런 사람들이 종종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가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 즉 세리를 구원하는 것이 주님의 목적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그렇게 악한 죄인을 구원하시기까지 예수님 쪽에서 얼마나 큰 희생을 하셨느냐는 겁니다. 어떤 대가를 치렀냐는 말이죠. 바로 그런 희생을 크게 드러내고 풍선처럼 부풀리기 위해서,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세리와 같은 자들을 더욱 더 죄인이 되도록 인도하셨다는 것이죠. 세리를 구원시키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러니 세리의 경우에, 처음에는 자기가 했던 나쁜 짓에 의해서 죄인인 줄로 알았는데,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어떻게 됩니까? 미처 자기가 몰랐던 죄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데, 바로 그러한 점에 대해서 더욱 더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별로 어렵지 않았는데,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방금 이야기한 것들이 개인용 구원이 아닙니까?" 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세리와 바리새인을 대비시켰는데, 그래서 세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세리는 참 좋겠다. 구원을 받았으니 말이야. 그러면 나도 세리처럼 주님을 찾아가면 안 될까?" 라고 하는 개인적인 여망이 생길 수도 있는데 말이죠.

'내가 구원을 받았다', '구원 속에 내가 들어갔다' !!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할 것이 무엇인고 하니, 물론 세리가 구원을 받았는데, 그러면 "내가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것이 과연 구원의 끝이겠느냐는 겁니다. 물론 같은 말이지만 바꾸어서 표현을 해보면, "구원 속에 내가 들어갔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처음의 "내가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것은 강조점이 '내가' 라고 하는 개인에게 있는데, 그러면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구원 속에 내가 들어갔다" 라고 하게 되면, 그것은 강조점이 '내가' 라는 것이 아니라,'구원'에 있다는 겁니다. 오히려 '내가' 라는 것은 부끄럽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구원 속에 들어가 보니, 자기처럼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많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하면 무엇이 문제가 되는고 하니, 사실은 매우 수상한 구원이고, 진짜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러면 그게 자기 실적이 되고, 자기 자랑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면 남들 앞에서 자기 자랑을 하기에 바쁘다는 말이죠.

"나는 너와 달라. 나는 구원을 받았어. 그런데 너는 못 받았지? 얼레리, 꼴레리!" 라고 되는데, 그러니 그렇게 되면 곤란하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속에 어떻게 나 같은 놈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바깥에 있는 사람, 곧 이방인 !!

어제 오후시간에 이방인에 대해서 설교를 했는데, 이방인의 뜻이 무엇인고 하니, 바깥에 있는 사람을 두고 이방인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예를 들어서, 여기 지묘동에 미국 사람이 살고 있다면 우리는 외국인이 살고 있다고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방인이란 겁니다. 즉 자기 동네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게 이방인은 바깥에 있는 자라는 의미인데, 그것을 구원과 관련을 시키면,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내가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하면 잘못인데, 그것은 자기 실적위주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은 좀 곤란하지 싶은데 말이죠. 성경에서 이방인이라는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인데, 그러면 구원을 받으려고 하면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 안에 말이죠.

그러면 '안' 이라는 것은, 자기 혼자 있어서 안이 됩니까? 여러 명이 있어서 안이 됩니까? 여러 명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니 자기만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랑질을 하면 안 되고, 구원해주신 분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겁니다. "나,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하면서 까불지 말고, 어떤 분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말이죠.

어느 선비 목사님 이야기 !!

제가 알고 있는 부산이 계시는 어떤 목사님은, 저와 총신 동기인데 말이죠. 공부도 참 잘했는데, 그분의 설교를 들어보면, 오직 하나님 중심, 예수님 중심, 말씀 중심인데, 그리고 모든 설교의 초점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기존교회에서 쫓겨났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셨기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했다는 말이죠. 인상도 완전히 선비인상이고 성격도 그러한데, 그러니 자기가 알고 있는 진리에 대해서 양보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교회에서 쫓겨났는고 하니, 그냥 보기에는 그럴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 말이죠. 왜냐하면 기존교회는 어디까지나 교회 중심이라는 겁니다.

이제 쫓겨난 이유를 알겠지요? 여기에 교회가 있고, 사람들은 바깥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교회를 채워야 하는데, 그래야 교회가 운영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매우 열렬히 환영합니다. 어서 오세요!" 라고 하면서 꼬드기든지, 그게 아니면 협박을 해서라도 교회로 데리고 와야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뭐라고 설교를 했는고 하니, "여러분, 교회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이고, 말씀 중심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건한 삶을 보여줄 때,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쫓겨날 만하다는 말이죠.

도대체 목사의 월급을 누가 줍니까? 교인들이 주는데,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기쁘게 할 생각은 않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했으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제 쫓겨난 이유에 대해서 납득이 되지요? 다른 부목사들은 눈치라도 보는데, 이 양반은 그런 것이 없다는 겁니다.

진리에 대해서 양보가 없는데,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철저하다는 것이죠. 물론 이것은 그 양반 속에 들어가 보지 않아서 큰 소리를 치지는 못하겠지만,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죠.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는데, 그러니 악하고 나쁜 일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살전 5:2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그리고 빌립보서 4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8절과 9절입니다.

(빌 4:8)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빌 4: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그 목사님은 여기에 대해서 전혀 양보하지 못하겠다는 것인데,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이죠. 참 대단한 양반인데, 이게 성경에 나오는데, 사도바울은 이야기는 곧 주님의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에 순종하자고 나오는데, 그래서 그 교회에서 쫓겨나서 아직도 개척을 하고 있는데, 다른 곳에서 오라고 할 리도 만무하고 말이죠.

너만 목사냐? 나도 목사다 !!

저는 이 목사님만 생각하면 참 안타까운데, 왜 안타까운고 하니, 그 목사님이 그렇게 순종하려고 하는 그 하나님이 이단이라는 겁니다. 이런 것이 일종의 반전입니까? 제가 초반에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라고 했는데, 그 목사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너만 목사냐? 나도 목사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물론 점잖은 분이라서 노골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그런 뉘앙스를 풍긴다는 겁니다.

제가 공부를 잘했던 그 동기 목사님을 거론한 것은, 모든 목사가 다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니 결국은 자존심인데, 진리고 하나님이고, 그런 것은 다 핑계이고 스티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을 떼어내면 "너만 목사냐? 나도 목사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이런 분은 철학을 공부하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철학을 공부해보면, 이것을 두고 '존재증명'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매우 간단한 이야기인데, 신학교에서는 철학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니까 그런 것을 두고 성경적이라고 오해를 한다는 말이죠.

'존재증명'은, 곧 악마의 본성 !!

그러면 이 존재증명이 어디서 나오는고 하니, 이것이 바로 악마의 본성이라는 겁니다. 즉 "나는 여기 존재한다" 라는 것인데,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덧입히고 덧입힐 테니 자기를 건드리지 말아달라는 것이죠. "당신의 말이 복음인 것을 인정하겠는데, 그것은 나도 안다" 라는 겁니다.

아까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세리의 경우에, 그게 개인구원이 아니라고 하면, 자기가 예수님 안에 있다고 하면, "내가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것을, 즉 "나는 목사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이런 죄인을 구원했는가?" 라는 것을 이야기하게 된다는 겁니다. 반드시 말이죠.

그런데 그 목사님은 어떻습니까? 이 빌립보서의 말씀을 비롯해서 모든 성경말씀이 다른 사람을 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나' 자신을 친다는 것을, 즉 "뭐라고 니가 말씀을 지켜? 그렇게 지키려고 하는 너 때문에 내가 죽었어. 이 인간아!" 라고 하시는데, 그 능력이 어디에서 나온다는 겁니까?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그만 그 십자가를 믿고 말았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이전에는 율법을 믿다가, 이제는 십자가가 중요해서 믿어야 한다고 하니까, 그 십자가를 믿어버렸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 자신에게다가 계속해서 덧입히고 있는데, 십자가도 믿고, 복음도, 믿고, 그리고 한국교회가 썩었다는 것도 이야기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한국교회가 썩었다고 해서 교단을 키운 것이 류광수의 다락방이고 신천지라는 겁니다. 박옥수의 구원파나 지방교회도 역시 그렇고 말이죠. 사람들이 거기에 왜 끌려갔습니까? 한국교회에 대해서 비판을 너무나 잘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비판을 잘하니 진리인 줄 알고 있다는 말이죠. 그들의 이런 교묘함을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도 저는 이런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듣는지 모르는데, "당신 교회만 교회냐?" 라고 말이죠. 제가 언제 "우리교회만 교회다" 라는 이야기를 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이야기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누구를 칩니까? 남을 치기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치는데, 그런데 "니만 목사가? 나도 목사다" 라고 하는, 즉 "니만 성도가? 나도 성도다" 라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존재, 즉 "나, 여기 있음" 이라는 것인데, 그러니 예수님이 우선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선이 아니고, 누가 우선입니까? 자기가 우선인데, 그래서 "나는 죽으면 안 된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녹을 벗기면, 거기에는 악마가 미소를 짓고 있다는 말이죠.

마귀가 누구와 싸웁니까? 하나님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싸우는데, 그렇지만 하나님의 원수라는 말이죠. 욥기에 보면 사탄이 하나님 앞에 있는데, 스가랴서에도 보면 회의를 하는데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겁니다. 사탄이 시비를 거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왜 예수님 중심으로 하는가?" 라는 것인데,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올인을 했다는 말이죠. 그것을 사탄이 거부한다는 겁니다.

왜 예수님 중심인가?

사탄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나도 선악과를 아는데, 우리 하나님 중심으로 갑시다" 라고 하고, 반면에 하나님은 "아니야, 예수님 중심으로 가겠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모든 싸움의 핵심은 무엇인고 하니까, "왜 예수님 중심인가?" 라는 것인데, 그것 때문에 온 우주가 그만 싸움터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거기에 '나' 라는 것이 끼들 여지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내가 죽어도 좋다는 말인가?" 라고 나오는데, 도대체 그 '나' 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평소에 생각하는 것이 "나는 죽으면 안 된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모든 것들이 '나' 라고 하는 것에 대한 '존재증명' 이라는 겁니다.

그 목사님은 모든 것을 아는데, 믿는 것은 아니고 말이죠. 성령을 받아야 믿는 것이지, 제가 보기에는 성령을 받지 못했는데, 그래서 좋은 것은 다 한다는 겁니다. 그 얼마나 선비처럼 반듯하게 살았으면, 아직도 큰 교회에서 쫓겨나서 개척교회를 하면서 그 의지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는 말이죠. "예수님 중심으로 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라는 것은 설교시간마다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입니까? 자기 자신을 치는 예수님인가요? 전혀 아닌데, 그분은 자기 죄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말이죠.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즉 "예수님 중심으로 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라는 것을 전하는데, 그런데 "내가 바로 예수님 앞에서 죄인이다" 라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은 자기가 바르게 살았기 때문에, 즉 "내가 죄를 지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죄인인가?" 라는 겁니다.

나는 죄를 지은 일이 없다 !!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나는 죄를 지은 일이 없다" 라는 것인데, 자기는 열심히 살았다는 겁니다. 한 치의 틀어짐도 없이 반듯하게 말이죠. 그러니 그게 바리새인이라는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을 지금 우리가 실제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행운인데 말이죠.

여러분도 그때는 몰랐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떻습니까? 바리새인들의 집단을 통과했다는 겁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바리새인들이 되지 못해서 환장한 집단, 그래서 "더, 더, 더" 라고, 마치 음주측정을 하듯이 말이죠. 그 연속성에서 천국으로 간다는 것인데, 지금 이 세상의 내막이 바로 그렇다는 겁니다.

뉴스시간에 보여주는 세상은 정치나 경제 문제가 주로 나오는데, 북한의 핵이나 중국의 사드 문제가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마귀는 왜 그런 문제를 가지고 뉴스를 장식하겠습니까? 무엇을 감추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까? "인간들을 건드리지 말라" 라는 것인데, 그러니 마귀가 얼마나 인간들 편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니 신이 있다고 하면 인간들을 건드리지 말라는 것인데,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십자가에 준해서 인간들을 그만 심판해 버리신다는 말이죠. 그리고 바로 그 심판을 감추기 위해서 중국(?)에서는 기독교를 핍박하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두 장의 그림으로 그려보면 !!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겠는데, 아까 개인구원은 아니라고 했는데, 안과 바깥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 그림의 차이점을 보라는 겁니다. 이렇게 교회가 있고 사람들이 여기에 있는데, 예배당을 지어놓았다는 말이죠. 그러면 사람들을 향해서 "어서옵쇼!" 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유인을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채우면 더 크게 예배당을 짓고 말이죠.

그런데 두 번째 그림은 무엇인고 하니, 그 밑에 보면 여기에 이렇게 분화구가 있고 그 안에는 마그마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마그마는 아직까지 암석이 아닌데, 그런데 그게 이쪽으로 튀고, 또한 저쪽으로 튄다고 하면, 이쪽은 천국이고 저쪽은 지옥이라는 말이죠.

그림을 설명하기 이전에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세리를 세리가 되게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세리는 자기가 왜 죄인인지, 그게 일어난 그 모든 것은 주님의 작품이라는 말이죠. 그렇다고 해서 세리가 죄를 더 찾아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고, 이미 구원 안에 들어가게 되면,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주님의 은혜임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아무튼 이렇게 마그마가 있는데, 세리는 천국에 갔으니 이쪽에 배치를 하고, 반면에 바리새인은 지옥에 갔으니 저쪽에 배치를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것은 당신의 개인적인 주장이 아닌가?" 라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말이죠.

예수님과 두 강도가 '한 조' !!

어제 낮 시간에 무슨 설교를 했는고 하니까, 십자가를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이 이렇게 있고 양쪽에는 강도가 있었다고 했는데 말이죠. 그러면서 그것을 두고 '한 조'를 이루었다고 했다는 겁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홀로 이루었다고 여겼는데, 물론 홀로 이루신 것이 맞는데, 그런데 양쪽에 무엇을 끼고 있습니까? 십자가를 진 동기생끼리, 그렇게 두 명의 강도와 한 조를 이루었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한 조' 라는 것은 같이 뭉쳐서 다니는데, 그렇게 조를 이루어서 십자가 사건을 반복시키게 되면, 십자가가 있는 곳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아무런 이유도 없이 천국에 가는 사람과, 아무런 이유도 없이 지옥에 가는 사람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 결정을 누가 하는고 하니, 중간에 계신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하셨다는 것, 그게 십자가 사건의 의미 안에 한 조로서 포함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을 받은 사람의 경우에는, 자기가 세리처럼 나쁜 짓을 해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한 조가 되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래서 자기는 이유도 없이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죠. 그런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무한사랑' 이라고 했는데, 그러면서 제가 설교시간에 팔을 벌렸는데 말이죠. 그래서 한 쪽은 무한사랑이고, 반면에 다른 한 쪽은 '무한저주' 라는 겁니다. 그러니 무한저주를 받는 사람은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다는 말이죠. 우리 생각에는 나쁜 짓을 해야만 저주를 받는다고 여기는데, 그런데 태어나서 하는 짓거리가 저주를 받기 위해서 한다고,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사랑은 시선이다 !!

그래서 "사랑은 시선이다" 라고 했는데, 누구의 시선입니까? 주님의 시선이라는 말이죠. 그냥 주님께서 지켜보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주님의 사랑의 시선이 악한 자들에게도 비추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들도 천국에 가는데, 즉 돌맹이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말이죠.

이런 식으로 사도가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 당시의 교인들에게 공교한 말로 자기들을 홀리는 사기꾼으로 취급을 당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제 낮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그들이 사도바울을 보고 사기꾼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사기를 친 사도바울이 왜 천국에 가는지, 그 이유를 우리가 몰라서는 안 된다는 말이죠.

(고후 12:16)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공교한 자가 되어 궤계로 너희를 취하였다 하니

상식적으로 아는 것은 마귀가 알려준 천국인데, 법을 지키면 천국에 간다고 하는 것, 그리고 오늘날 한국교회처럼 상급을 많이 쌓으면 천국에 간다고 하는 것, 그렇게 단절이 없는 천국을 사람들은 생각했단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십자가의 능력이 임해서 보니까, 철저하게 악마의 생각과 단절이 된 상태에서, 보낼 자는 보내버리고 건질 자는 건진다는 겁니다.

왜 거지 나사로의 말은 아닌가?

특히 어제 누가복음 16장을 설교하면서 질문을 하나 던졌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보내서, 사람들이 그 나사로의 말을 듣고 왜 천국에 오지를 못하는가? 그들이 지옥에 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겁니다. 설교시간에는 답변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어제 또 우리 윤 집사님이 답변을 하셨는데 말이죠(ㅋㅋ).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건지는 중심이 거지 나사로가 아니고 예수님이기 때문인데, 그것이 어디에 나오는고 하니, 모세와 선지자의 글에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비록 죽었다가 살아난 자의 말을 믿는다고 해도, 모세와 선지자의 글을 믿지 아니하면 아무도 천국에 올 수 없다는 겁니다.

누가 보내었는가?

그러니 자기가 천국에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보내었는가?" 라는 것인데, 그것은 모세와 선지자의 글에서, 즉 말씀에서 스스로 뿜어내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죠. 자기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 말씀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빌립보서 4장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말씀을 누가 지킬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지키지도 못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왜 주십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만 드러내기 위해서인데, 이것이 바로 사도가 전한 복음이고 예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그 고린도 교회가 결코 절이 아닌데, 이슬람이나 힌두교도 아니라는 말이죠. 분명히 교회라는 겁니다.

분명히 교회가 맞는데, 고린도 교회라는 말이죠. 그런데 어떻습니까? 예수를 전했는데도 다른 예수고, 복음을 전했는데도 다른 복음이라는 겁니다. 물론 성령을 전해도 다른 성령이고, 사도라고 세워놓아도 역시 다른 사도라는 말이죠.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 다른 사도,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곳에 진짜 사도를 보내니까 어떻게 됩니까? 그만 전쟁터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그 어떤 사람도 자기의 능력으로는 사도의 말을 믿을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사도의 편지는 인간의 글이 아니라 성령이 임해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말이죠.

박자에 맞추어서 리듬을 !!

그러나 같은 성령을 받지 않으면, 아무리 이해를 하고 싶어도 사도의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을 어제 본문에 보면 '성령의 보조' 라고 하는데, 즉 같은 일을 하는데 있어서 보조를 맞춘다는 겁니다. 즉 박자를 맞춘다는 말이죠.

(고후 12:18)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

박자라고 하니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옛날에 제가 봉화에서 고등학교 교사생활을 할 때, 그때 바로 옆에 초등학교가 있었는데, 교장 선생님이 누구인지 몰라도 아이들을 공부를 시킬 생각은 않고 거의 매일같이 매스게임을 연습시킨다는 겁니다. 그러니 제가 있는 고등학교는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가 않는데, 물론 그 고등학교도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말이죠.

그렇게 수업을 진행하다가 보니, 가르치는 교사나 듣는 학생들이나 어디에 박자를 맞추는고 하니까, 그 매스게임의 리듬을 자기도 모르게 타고 있더라는 겁니다(ㅋㅋ). 특히 가을 운동회가 다가오면 집중적으로 연습을 하는데, 그러면 그야말로 온 학교가 하루종일 메스게임의 리듬을 타게 된다는 말이죠.

온 우주는 성령의 리듬으로 움직여 !!

제가 왜 이런 30년 전의 케케묵은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까, 온 우주는 성령의 리듬으로 움직인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리듬은 어디서 나오는고 하니, 이것을 어느 강의에서인가 했는데, 그게 가락인지, 안양인지, 울산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말이죠.

무슨 내용인고 하니, 숲 속에 연못이 있는데, 어떤 아가씨가 옥색 원피스를 입고 물 속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먼저 발을 담그니까 파장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런데 들어가 보니 큰 파장이 이미 있다는 말이죠. 이미 어떤 거인이 물 속에서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을 성령이라고 하면,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성령께서 우리의 일상에, 우리의 가정에 어떤 일을 일으키시는지, 그것을 체험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곧 박자를 맞추는 것인데, 즉 리듬을 탄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없는 것에서 있게 하고, 죽은 것에서 매일같이 살리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하면 됩니까? "나는 이미 죽은 자인데, 성령께서 인도하셔서, 그 성령 덕분에 이렇게 사는구나" 라고, 혹은 "예수님 덕분에 오늘도 용서함을 받아서 사는구나" 라고 하면서, 그것을 매일같이 체험한다는 겁니다. 오늘이 23일이죠? 그러면 23일에도 체험을 한다는 말이죠.

창문에 매달려 정신없이 천국을 !!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예를 들어보면, 이렇게 창문이 있는데, 천국을 바라볼 수 있는 창문이란 겁니다. 어떤 사람이 그 창문에 매달려서 천국이 바라보고 있는데, 그리고 발 밑에는 벽돌이 놓여있다는 말이죠. 그 벽돌을 밟고 올라가서 너무 좋아하면서 정신없이 천국을 바라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사람을 그렇게 해준 중요한 요소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벽돌인데, 왜냐하면 그것을 밟고 올라가서 천국을 보았으니 말이죠. 그런데 어떤 사람은 천국이 있다는 소문을 듣기는 들었는데, 정작 거기에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사람은 결국 벽돌이 없는데, 즉 받침돌이 없다는 말이죠.

하지만 벽돌을 딛고 창문에 매달려서 천국을 보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천국을 보는 것이 너무나도 좋아서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 받침돌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십자가인데, 즉 복음이라는 겁니다. 다른 복음이 아닌 바른 복음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다른 사람의 경우에는,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는 알지만,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그래서 천국도 중요하지 않고 복음도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간이 남아돌면 심심풀이로 교회에 가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무슨 일만 생기면 교회에 가는 것을 빼먹고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중요하니 말이죠.

이렇게 복음으로 보면 다 보이는데, 그 사람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가 다 보인다는 겁니다. 사도는 무엇을 보는 재미로 살았습니까? 천국을 보는 재미로 살았는데, 삼층천에 올라가는 재미로 말이죠. 그런 사도바울이 소원이 있었는데, 창문에 매달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 창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자기의 소원이었다는 겁니다.

사랑은, 누리는 것 !!

그렇게 하려면 육을 벗어야 하는데, 십자가는 이 땅에서 고난인데, 그것이 육 때문에 고난이 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육을 벗어버리면 고난도 없어진다는 겁니다. 천국에서는 주님의 사랑을 누리기만 하면 되는데, 그러니 사랑은 감히 누린다는 말이죠. 무엇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가락강의에서 했지 싶은데, 그게 새 계명인데, 즉 사랑은 즐기고 누리는 것이란 말이죠.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만화영화에 '하늘에서 음식이 떨어진다' 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미국의 만화영화인데 말이죠. 만약에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집에서 굳이 음식을 만들 필요가 있습니까? 없는데, 그것이 바로 천국이라는 말이죠. 즉 신랑이 신부에게 모든 것을 다 해준다는 겁니다.

여자가 그것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습니까? 아닌가요? 남자가 자기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해줄 것이라고 기대를 하면서 말이죠. 물론 이 세상에서는 믿는 도끼에 발등을 계속해서 찍히지만(ㅋㅋ), 그렇게 찍힐 때 찍히더라도 없으면 아쉽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인데, 즉 자기를 믿지 않는 것인데, 자기를 포기한다는 것이죠. "그대 앞에만 서는 왜 나는 작아지는가?" 라는 노래도 있는데, 아마 김수희가 불렀지 싶은데 말이죠. 주님 앞에서 우리가 그렇게 작아져야 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자기가 커졌다고 하면, 그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자기가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자기 외에는 없다는 것인데, 즉 자기가 제일 소중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법을 주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 법이 좋아서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마저도 지키고 순종해서, 조금 본 빌립보서 4장의 말씀처럼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라고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할수록 여기에 무엇이 비축되는고 하니, 자기가 주님에게 퍼부은 충성과 순종과 사랑이 자꾸만 비축이 된다는 겁니다.

성령은 습격하신다 !!

그래서 어제 낮 시간에 "성령은 습격하신다" 라고 했는데, 그렇게 성령께서 갑자기 공격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비축해놓은 모든 것이 다 박살이 나고 마는데, 그런 우리 자신의 자기 의는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왜냐하면 구원은 무한등불인데, 즉 무한한 따뜻한 시선이라는 겁니다. 그냥 보기만 해도 구원이라는 말이죠.

주님은 우리와 상대하지 않는데, 그냥 우리를 바라보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같은 죄인들끼리 옹기종기 모여있는데, 그 사랑의 비춤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이죠. 주님의 시선을, 그 구원의 빛을 받기 위해서 무엇을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일어나서 설치고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주님이 은혜임을 깨닫게 되는데, 그렇게 주신 그 모든 것은 복음을 위해서 주어졌다는 겁니다. 이방인들은 무엇을 가지게 되면, 그것은 자기의 소유라고 여기는데, 그래서 어제 오후시간에 꽃집과 술집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죠.

사람들은 술집에 가면 개가 되고 꽃집에 가면 천사가 된다고 여기는데, 하지만 둘 다 소유성이라는 겁니다. 뭔가 자기가 건전한 것을 가지면 그것으로 인해서 자기도 건전하다고 여기는데,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은 자기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 주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욥에게 주어진 고난은 욥을 위해서 준 것이 아니고 주님을 위해서 주어진 것인데, 그런데 욥은 그것 때문에 자기가 불행해졌다고 불평을 하니, 그게 주님이 보시기에 가관이라는 겁니다. 욥은 "주여, 저에게 왜 이러십니까?" 라고 하는데, 그게 욥기의 주제인데 말이죠.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왜? 그게 어때서?"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한 글자로 줄이면 "뭐?" 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욥기의 전체내용이라는 겁니다.

다시 아까 그린 그림으로 돌아가면, 이렇게 마그마가 나오면 한 쪽은 무조건 천국이고 다른 한 쪽은 무조건 지옥인데, 주님의 속성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나와서, 마치 마그마처럼 이 땅에서 굳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천국과 지옥이 나누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무지무지하게 간단한데, 우리의 의견은 전혀 묻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제가 "주님은 우리와 상대하지 않습니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파블로프 실험 !!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성경에서는 왜 인간을 육(肉)이라고 하는가?" 라는 것인데, 그 육이 무엇인지, 이제 그것을 설명해드리려고 하는데 말이죠. '파블로프 실험' 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파블로프' 라는 심리학자가 옛날에 실험한 것이 있는데, 그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죠.

여러분도 다 아시는 내용인데, 개에게 먹이를 줄 때마다 먼저 종을 친다는 겁니다. 물론 개는 그 이유를 모르는데, 자기가 먹이만 먹을 뿐인데, 그것을 계속해서 반복했다는 겁니다. 여기서 "먹이를 줄 때 먹는다" 라는 것은 무조건 반사인데, "먹이를 줄 때 침을 흘린다" 라는 것도 그렇고 말이죠. 그렇게 자동적으로 나온다고 해서 '무조건 반사'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정작 하고 싶었던 것은 이 실험이 아니라 '조건 반사' 인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 다음부터는 개에게 먹이는 주지 않고 종만 쳤는데, 그런데 개가 침을 흘리더라는 겁니다. 그 차이점을 한 번 보라는 말이죠. 이전에는 먹이를 줄 때 종을 치고 주었는데, 그러자 개가 먹이를 먹더라는 겁니다. 당연한데, 이때는 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먹이가 중요한데, 그러니 종은 보조역할에 지나지 않았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제는 그 보조역할만 했던 종만 치니 게가 침을 흘리더라는 겁니다. 그러니 개에게는 무엇이 각인이 되어버린 것입니까? "종을 치면 먹을 것을 주겠지" 라는 것이, 그것을 '피드백' 이라고 하는데, 원인과 결과가 바뀌어서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가 왜 이런 실험을 했는고 하니, 그 박사는 동물과 사람을 똑같다고 여겼는데, 정말 과학에 제대로 이야기를 하는데 말이죠. 그러니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말고 동물로 봐야 인간을 제대로 알 수 있다는 것인데, 요즘도 과학은 다 그런 인식에서 시작을 한다는 겁니다.

악마는 인간을 어떻게 길들였는가?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악마가 우리 인간에게 어떻게 길을 더럽게 들였는가?" 라는 겁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낙원을 만들 때, 우리 인간에게 무엇을 제한한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눈치를 보면서 "하나님, 여기에는 사과나무를 심어주시고, 여기는 배추를 좀 심어주세요" 라고 했느냐는 겁니다.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낙원이나 천국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이 조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조성하셨다는 겁니다. 천국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맞지요? 그러니 모든 것이 주님의 아이디어인데, 그러면 모든 원리와 원칙이 누구에게서 나와야 합니까? 주님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악마는 그만 이것을 뒤바꾸어 놓았는데, "인간아, 바보가? 니가 살 곳이면 니가 알아서 인테리어를 하든지 해야지, 하나님이 너를 무시하도록, 그것을 왜 허락해?" 라고 한다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 이게 잘못인 줄을 알지만, 그런데 오늘 성경공부를 마치고 바깥에 점심을 먹으러 가면 어떻습니까? 자기가 사는 조건을 누가 만듭니까? 자기가 만든다는 겁니다.

주님이 조성해주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물론 이렇게 성경공부를 할 때는 그것이 맞다고 해놓고, 우리가 막상 살아갈 때는 그 조건을 자기가 만든다는 말이죠. 무조건 감사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만 무조건 감사가 아닌 조건부 감사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악마의 계속된 길들임으로 인해서, 그게 각인이 되고 말았고 그래서 우리의 체질이 되었는데, 그것이 곧 '육' 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고 교회에 부지런히 다녀도, 그것이 결국 실적으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우리는 육이 말이죠.

하지만 에덴동산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실적을 요구한 적이 없는데, 우리의 행함을 요구한 적이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예수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혼자서 다 행하시고, 우리에게는 무상으로 제공하셨다는 겁니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말이죠. 그러니 구원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주님의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주신 행함 덕분이라는 겁니다.

물론 이런 소리를 하면 교회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목사님,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지도 않고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고 하면, 그러면 교회유지는 어떻게 합니까? 전기세는 누가 냅니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교회는 저 혼자라도 할 수 있는데, 인터넷 생중계가 가능하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또 어떤 면이 있는고 하니, 인넷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매우 효율적이고 편리한 것은 맞는데,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개인구원으로 흐를 수가 있다는 겁니다. 녹을 벗겨야 하는데, 그것을 거부한다는 말이죠. "나는 오늘 복음을 전하는 생중계로 예배를 드렸다. 또 실적을 올렸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물론 그런 말을 하는 그 이면에는 "제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왜 이렇게 힘든 일이 많이 생깁니까?" 라는 것이 깔려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결국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라는 것인데, 하여튼 인간은 악마로부터 길들임을 당해서 그런 조건부 인간이 되어서 조건부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다는 겁니다. 무조건 인생이 아니고 말이죠.

그래서 "천국에 가줄 테니 저에게 무엇을 해주겠습니까?" 라고 나오는데, "교회에 가줄 테니 무엇을 해주겠습니까? 점심은 공짜로 줍니까?" 라고 말이죠. 그게 인간인데, 평생을 살아가면서 자기가 중요한데, 십자가 디딤돌도 중요하지 않고 천국도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복음을 믿었는데 설마 지옥에 보내겠나? 천국에 넣어주겠지" 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자기를 인테리어를 하는데, 자기를 그렇게 꾸민다는 겁니다. 그래야 실적이 나오는데, 그래서 남들에게 자랑질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이죠. "나는 한 평생을 이렇게 반듯하게 살았다. 국가와 교회에 봉사하고 살았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니가 바로 마귀다 !!

그러니 무엇이 중요하다는 겁니까? 세리 이야기, 부산의 어느 동기 목사님의 이야기, 마그마 이야기, 파블로프 실험 이야기, 그런 것을 제가 오늘 다 끄집어내었는데, 그렇게 끄집어내어 보니까 결국 무엇입니까? 성경말씀은 우리를 보고, "니가 바로 마귀다" 라는 것을 들추어낸다는 겁니다.

여기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가 없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면 됩니까? 그것은 매우 간단한데, "옳소이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드디어 오늘의 강의제목이 나왔는데, "너는 개다" 라고 하면, 우리는 "옳소이다!"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또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을 귀하게 여기고, 이제부터는 천국을 창문으로 들여다보기 위해서 십자가를 들고 다녀야지" 라고 나오는데, 하지만 제발 그렇게 나대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은 성령이 알아서 다 인도를 해주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성령께서 그렇게 인도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도 역시 주님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그런 조건을 왜 만들어야 합니까? 주님이 지옥에 보내면 지옥으로 가면 된다는 말이죠. 죄를 지은 인간이 지옥에 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데, 그렇지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왜 입이 툭 튀어나오고 하느냐는 겁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숨쉬는 것도 반납해야 !!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교회에 나오지 않으려면 숨을 쉬는 것도 반납해야 한다" 라고 말이죠. 너무 교회중심인가요? (ㅋㅋ) 우리가 이 땅에서 이런 좋은 가을날씨를 맞이하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는데, 주님께서 주실 때 실컷 즐기면 된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이방인과 유대인을 가리지 않고, 악인과 선인을 가리지 않고 십자가의 그 고통을 은혜로서 베풀어주실 때 마음껏 즐기라는 말이죠. 죽고 나면 다 회수를 하는데, "그동안 죄를 많이 지었지. 이제 꺼져!" 라고 하시면서 말이죠. 지옥에 집어넣어 버린다는 겁니다. 죽은 자라도 무덤에서 불러내는데, 죽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가게에 온 손님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 사람이 듣지 않는다고 너무 화내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 사람도 달리 갈 때가 없는데, 가봐야 결국은 공동묘지라는 말이죠. 하지만 거기도 예외가 아닌데, 주님께서는 가차없이 불러내신다는 말이죠. 주님의 일에는 빈틈이 없는데, 그것을 우리가 믿어야 한다는 겁니다.

얼마나 든든한 남편인지 모르는데, 전혀 하자가 없다는 말이죠. 물론 너무나 완벽해서 문제인데(ㅋㅋ), 그야말로 철저하게 규명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말이죠. 주님은 그 원칙을 단 한 순간도 포기한 적이 없는데, 생생하게 적용을 시킨다는 겁니다.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그러니 사랑이 아니라면 저주라는 말이죠. 교회에 얼마나 다녔는지, 그런 것은 묻지 않는다는 겁니다. "너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가?" 라고 하시는데, 그것이 아니라고 하면 저주라는 말이죠. 달리 말하면, "성령을 받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는 겁니다.

* 질문 - "예수님을 모르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틀린 말은 아닌데, 하지만 오해할 소지가 많다는 겁니다. "니만 아나? 나도 안다" 라고 해버리면, 그러면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렇게 관심사가 '너'와 '나' 라고 하는 것에 있다는 것은, 그것은 관심이 주님에게는 없다고 하는 것인데,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그래서 아까 동기 목사님을 이야기하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그런 자들에게 복음을 이야기하면 "나도 안다" 라고 나오는데, 그러니 그런 것마저도 알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둔다는 말이죠. "주님, 고마워요!"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데, 즉 개인구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집에서 컴퓨터를 틀어놓고서 인터넷으로 통해서 예배를 드리면 되는데, 굳이 힘들게 운전을 해가면서 교회에 나오고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자기가 편한 대로 살아가면 되는데, 하지만 그런 태도는 바로 '나' 라는 개인에게 관심이 있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

이제 마지막으로 이것만 하고 마치겠는데, 전도서가 무엇인고 하니까, "헛되고 헛되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전도서가 성경책에 분명히 들어있다는 말이죠. 만약에 자기가 교회에서 말씀대로 설교를 하다가 쫓겨났다고 하면, 그러면 그런 자기 자신이 얼마나 대단해 보이겠습니까?

(전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하지만 전도서는 뭐라고 합니까? "그런 짓을 하는 너는 헛되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저는 열심히 주님께 순종을 한다고 했는데요?" 라고 하면, "아냐. 그것은 헛된 것이야" 라고 하는데, 그러면 헛되지 않은 것이 무엇일까요? "주님, 이 일마저도 제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게 하신 것이잖아요"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를 비판하는 것이 자기 일이 되어버리면, 그게 실적이 되어서 그 성과를 은근히 기대하게 된다는 말이죠. "내가 이렇게 말씀대로 살았으니, 주님께서 이 개척교회를 잘 되게 해주시겠지" 라고 말이죠. "한국교회는 모두 썩었으니, 그러니 괜찮은 우리교회에 사람들이 몰려오겠지" 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겁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교인들이 들어오던 빠져나가던 간에, 거기에 왜 조건을 거느냐는 겁니다. 우리는 무조건 구원을 받았는데, 그런데 왜 '무조건'에서 '조건'으로 돌변을 하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이 '육' 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아에 집착하게 만드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오늘 "옳소이다!" 라는 제목은 취소인데, 얼마나 변덕이 심하지 모른다는 말이죠(ㅋㅋ).

성도는, 걸어 다니는 전도서 !!

전도서에서 "너희는 헛되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우리보고 믿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믿을 능력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아하, 헛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마음가짐으로 달라지게 되면, 그러면 우리는 걸어 다니는 전도서가 되는데, 즉 걸어 다니는 성경책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되고,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데, 바로 그러한 모습 하나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까, 무엇에든지 참된 모습이고, 무엇에든지 경건한 모습이고, 무엇에든지 옳은 모습이고, 무엇에든지 정결한 모습이고,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한 모습이라는 겁니다.

자기는 분명히 죄인 중에서 괴수인데, 그런데 그게 주님이 보시기에 이 땅에서 성도의 모델인데, 주님께서 그렇게 사용하신다는 말이죠. 우리는 천하에 죄인임에 틀림이 없는데, 그러니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제 말씀을 지킨다는 의미를 알았지 싶은데, 자기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 속에 주님이 당겨서 들어갔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귀가 주입한대로 살지 않기를 원합니다. 무조건적으로, 오직 주님께서 만드신 대로 살아가면서 범사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10,31 오후 7시에 마침.
10월의 마지막 밤도 주님과 함께 !!



 첨부파일 : 17대구강의('전도서'속의그리스도)21-경건의함정.hwp (60.9K), Dow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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