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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3 23:26:11 조회 : 227         
[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22 - 자아와 주체 이름 : 구득영(IP:203.223.97.162)
[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22 - 자아와 주체

07,11,08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자아가 탈락하면서, 주체는 구원을 받는다 !!

오늘은 교재 64페이지부터 하겠는데, 거기에 보면 전도서 1장 13절과 14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말이죠. 거기 13절을 보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라고 한다는 겁니다.

(전 1:1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전 1:14)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주체란, 누구에 의해서 바쳐지는 '나' !!

어제 주일 낮 시간에 설교를 하면서, "자아가 탈락하면서 주체는 구원을 받는다" 라고 했는데, 여기 자아라는 것은 한글로 하면 '나' 라는 것이고, 영어로는 'I' 라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물론 주체도 역시 '나' 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그냥 '나'가 아니고, 누구에 의해서 바쳐지는 '나' 라는 겁니다. 주체에 대해서 이것보다 더 간단명료하게 설명을 할 수가 없는데 말이죠.

자아는 독자적인 것이지만, 그러나 주체는 전혀 그게 아니라, 누구에 의해서 새로 생겨나는, 그러니 이 주체는 '나' 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 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누구라는 것이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인데, 물론 우리는 껍데기이고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왔다는 것인데, 즉 우리는 껍데기이고 보자기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그런 보자기 속에 예수님이 담겨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나' 라는 것이 구원을 받는데, 그러니 이것은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보다, "구원이 솟아오른다" 라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라는 말이죠.

솟아오르는 구원 !!

무슨 말인고 하니, 이렇게 편평한 평지가 있는데 뭔가 갑자기 솟아오른다고 하면, 그것은 밑에서 뭔가 바쳐주는 게 있기 때문에 위로 올라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어떤 분이 들어있다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실존(實存), 즉 예수님의 존재하심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지금도 부활하셔서 살아있음을 증거하는, 그 내용이 여기에 포함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것을 일일이 설교시간에 다 이야기를 하고 설명을 하면, 설교가 너무 복잡해지고 장황해지는 수가 있는데, 물론 그럴 시간도 없고 말이죠. 그래서 어제는 그냥 넘어갔는데, 그런 것은 이런 강의시간에 하면 좋다는 것이죠.

다시 설명을 드리면, 자아가 구원에서 탈락을 하면서 주체가 구원을 받는데, 즉 "주체적 구원이 솟아오른다" 라는 겁니다. 이것을 다르게 이야기를 하면, "내가 기대하는 구원은 애초부터 없었다" 라는 것인데, 또 달리 말하면, "아하, 내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은 처음부터 없었구나. 그런데 예수님에 의해서 집어넣진 구원이 나에게 발생되었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자아는, 육에서 육으로 !!

여기서는 '나'를 둘로 나누었는데,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이 '나' 라는 것이 하나뿐인데, 즉 자아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 자아는 태어나면서부터 생기는데, 그래서 시편 51편에 보면 다윗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라고 하는데, 여기서 '내가' 라고 하는 것이 바로 자아라는 말이죠.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그러니 성경적으로 보면 육에서 육으로 가는 것이 자아인데, 그러니 주체는 원래 없었는데, 바로 이런 없음에서 새로 생긴 게 주체라는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 8절에 보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여기 마지막에 보면, "영생을 거두리다" 라고 하는데, 이렇게 "영생을 거둔다. 혹은 얻는다" 라고 하는 것은, "나로부터 출발해서 나로 가겠다" 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모르는 그 어떤 분으로부터 출발을 해서, 나를 그분의 생성물로, 혹은 가지로, 열매로 볼 것인가?" 라는, 바로 그 문제라는 겁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인데, 그게 요한복음 15장의 말씀이라는 말이죠.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여러분, 이제는 호강을 좀 해야지요 !!

그런데 지금 교회에서는 어떻게 합니까?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세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 소리를 누가 듣습니까? 자아가 듣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반응이 어떠한고 하니, "그렇지. 이 땅에서는 고생을 했으니, 죽어서는 좋은 것에 가야지. 호강을 해야지" 라고 하는데, 그래서 교회에 간다는 말이죠.

그러면 교회에서는 어떻게 나옵니까? 이 자아를 구원시켜주려고 애를 쓴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있는 것이 자아뿐이기 때문에, 그래서 구원에 이르려고 하면 자아에 계속해서 무엇이 투입되어야 하는고 하니, 인간의 행함이, 즉 자아의 행함이 계속해서 투입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목사를 섬겨야하고, 십일조를 해야하고, 봉사를 해야하고,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라는 식으로 나오는데, 그래서 그렇게 시키는 대로 하면, 그 다음에 목사는 뭐라고 합니까? "참으로 믿음이 좋습니다. 이제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자아는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노림수가 있는데, 즉 "행함이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는가?"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이것이 상당히 중요한데,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는가?" 라는 겁니다. 이 '나' 라는 것이 곧 자아인데, 즉 십자가를 알고 복음을 알면 그것이 자기에게 무슨 혜택이 있느냐는 말이죠. 그게 자아라는 겁니다.

이것을 포괄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이 자아가 존재가 되는데, 그리고 이 존재는 '있음' 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존재는 어떻게 나오는고 하니, "내가 행하니까, 그 행함으로 결과로서 나에게 무슨 이익이 줄어질까?"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여기 칠판을 잠시 보면, 이렇게 밑에 있는 이 주체는 모른다고 하고, 일단 위에 있는 자아만 생각을 해보면, 이 자아는 육에서 육으로 가는데, 원리가 그렇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세상 사람들이 보는 교회, 천주교, 기독교, 물론 다른 종교도 그러한데, 이 모든 것이 위에 있는 이 논리로서 뺑뺑이를 돌고 있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행함을 뽑아내어서, 자아에다가 덕지덕지 칠을 한다는 말이죠.

존재냐? 소유냐?

그렇게 될 때, 이 존재에 대해서 많은 철학자들이 분석을 했는데, 아주 잘 해놓았다는 겁니다. 그들이 어떻게 분석을 했는고 하니, 존재는 그냥 있음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소유의 형태로 존재를 테두리를 쳐서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존재가 이렇게 있으면 그 바깥은 소유라는 것인데, 그런 형태로 존재가 있음으로서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강의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지 싶은데, 그래도 제가 친절하게 설명을 해드리면 다음과 같다는 말이죠. 존재는 그냥 있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데, 그냥 그렇게 있음으로 끝나는 것을 '즉자(卽子)존재' 라고 하는데, 돌멩이나 나무, 오늘 피운 난로, 그런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는 겁니다. 이런 것은 분명히 있는데,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있는 것과 인간이 있는 것은 같지가 않은데, "나는 그냥 있다" 라고 하면, 그것은 돌멩이와도 같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게 아니라 "나는 이런 이런 것을 가지고 있다" 라고 하는데, 즉 "나는 집이 있고, 자식이 두 명이 있고, 17개의 통장이 있고, 친구들도 있다" 라고, 그렇게 자기와 관련된, 자기의 소유를 들이댄다는 겁니다. 그런 것과 아울러서 "나는 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나는 청와대에 아는 사람이 있다 !!

그래서 다른 사람이 자기를 건드리면 발끈하는데, 즉 "나는 아는 사람이 있다" 라고, "나는 청와대에 아는 사람이 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청와대에 아는 사람이 자기의 소유형태로, 즉 자기의 존재를 둘러싸고 있다는 말이죠.

어제 어떤 아줌마가 아파트 5층에서 뛰어내렸는데, 왜 그랬을까요? 분명히 존재하는데, 왜 자살을 합니까? 그것은 자기 존재를 뒷받침해 줄만한 자기 소유가 없다는 겁니다. 자식도 없고, 남편도 없고, 친구도 없다는 겁니다. 설령 있다고 해도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렇게 사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스스로 있음에서 없음으로 탈바꿈을 한다는 겁니다. 그 아줌마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존심인데, 그런데 그 자존심을 바쳐줄 만한 정도가 되지 않으니 견디지를 못하고 죽어버린다는 말이죠.

마누라가 죽고 난 다음에 같이 따라서 죽은 남편들이 생각보다도 많은데, 여자들은 그렇지가 않은데 남자들은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누라가 죽고 나니 사는 것이 사는 것이 너무 불편한데, 고등어를 굽어줄 사람도 없고, 청소를 해줄 사람도 없다는 겁니다. 새 장가를 가려고 하니 돈이 없어서 그것도 안 되고 말이죠.

감당할 수 없는 허무 !!

물론 옛날에 소유를 했던 흔적은 있는데, 그런데 그 소유를 채워줄 수 있는 것이 이제 없다는 겁니다. 그 소유 형태를 이렇게 그림으로 그려보면, 옛날에 잘나갔던 틀이 있다는 말이죠. 자기가 누구를 알고, 자식은 얼마나 효도를 잘하고 하는 말이죠. 그런데 마누라가 죽고 난 뒤에 것들이 다 빠지고 나니까, 그 남은 껍데기에 허무가 쌓인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허무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으니 어떻게 합니까? 자기도 그만 죽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아인데, 즉 존재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존재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비축하고, 뭔가 그런 여유의 것을 모은다는 말이죠.

그런 상태에서 "너는 누구냐?" 라고 하면,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고 하면서, 자기의 직업을 이야기하고, 자기 재산을 이야기하고, 한 달 수입을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또한 지나갔던 과거를 이야기하고 말이죠. 그래서 "너는 누구냐?" 라고 하면, "나는 누구다" 라고 하는 대신에, "나는 이런 것들을 소유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죠.

소유가 존재를 대신해 !!

예를 들어서,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하는데, "나는 문재인입니다" 라고 하면, 그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데, 우리나라에 문재인이 한 두 명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나는 대통령입니다" 라고 하면, "아이쿠, 그렇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는 것은, "당신은 무엇을 하십니까?" 라는 의미인데, 그것은 바로 "소유가 존재를 대신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자아가 천국에 가겠다고 하는 것은, 존재가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자기가 끌어 모았던 자기 자존심과 명예와 위신, 그런 것을 가지고 그대로 천국에 가겠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행함을 추구하게 되는데, 그 행함이 바로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라고, 즉 자기 소유를 증가시키는 것인데, 그런 식으로 우리 인간은 살아간다는 겁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들어보니 고개가 저절로 끄덕이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인생이란 바로 이런 것인데, 즉 "나를 무시하지를 마라. 나를 건드리지 마라. 나는 이 정도가 되는 사람이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곧 육에서 나서 육으로 가는 모습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성경말씀은 뭐라고 하는가?

그러면 성경은 과연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할까요? 처음에 살펴본 전도서 1장 13절에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라고 하는데 말이죠. 여기에 보면 먼저 '행함'이 나오고,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떠한고 하니, 그게 '괴롭다' 라는 겁니다.

(전 1:1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전 1:14)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불교는 여기까지인데, 왜냐하면 불교에는 자아밖에 없으니까 말이죠. 그런데 그만 괴로움이 찾아오게 되면, 우리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 괴로움을 없애려고 시도를 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자기의 육을 자극시키는데, 무엇을 가지고 말이죠? 쾌락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이죠.

첫째는, '감각적 쾌락' !!

그렇게 쾌락으로 자극시키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물리적인 것인데,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만져지는 것, 이런 것으로 자극을 한다는 말이죠. 이것을 감각적 쾌락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예를 들어서, "맛집을 찾아가자" 라고 하면, 그것은 혀의 감각인데, 그리고 "놀이동산에 가자" 라고 하면, 몸의 촉감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그냥 그 자리에 계속해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증가가 되는데, 그래서 처음에는 50미터짜리 청룡열차를 탔다고 하면, 다음에는 적어도 100미터짜리는 타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더욱 길고 더욱 더 빠른 것을 찾아서 타야 한다는 말이죠.

야호, 드디어 정상이다 !!

그 대표적인 것이 등산가들인데, 동네에 있는 겨우 50미터짜리 산에 올라가서 폼을 잡고 "야호!"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ㅋㅋ). 적어도 1192미터(팔공산?)는 올라가야 하는데, 그것도 케이블카를 타고 가면 안 되고, 그렇게 하면 반칙이고, 직접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는 말이죠.

왜 그렇게 합니까? 괴로우니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디론가 떠나는데, 단풍놀이를 가고 해외여행을 간다는 말이죠.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쾌락을 더 누리기 위해서 말이죠. 20대에는 가까운 곳에 가지만, 나중에는 회사에 사표를 내고 에베레스트에 도전하는데, 그래서 '14좌 등반' 이란 기록을 세우는데, 8,000미터 이상을 '좌' 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게 자기 인생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왜 산에 갑니까?

"왜 산에 갑니까?" 라고 하면, "거기에 산이 있으니 갑니다" 라고 하는데, 전혀 거짓말이라는 것이죠. 산에 왜 가는고 하니, 자기의 감각적 쾌락을 더욱 업그레이드를 하기 위해서 간다는 말이죠. 그것을 '자기 성취욕' 이라고 하는데, 그런 성취감을 통해서 자기 존재감을 느낀다는 겁니다.

인간은 소유로 둘러 쌓여있기 때문에, 그런 소유의 극대화를 통해서 자기 존재감을 느낀다는 말이죠. 우리 장로님은 해외여행을 갈 곳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자아가 가지고 있는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심심해서 괴롭다 !!

이러한 감각적 쾌락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심심해서 괴롭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뭔가 계속해서 자극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야한 동영상, 즉 야동이 유행하는데, 그것 때문에 우리나라의 컴퓨터 산업이 살아났다고 하는 말도 있지만 말이죠(ㅋㅋ). 그런데 그런 것에 점점 빠지게 되면 나중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승부욕으로 쾌락을 누리는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도박이라는 겁니다. 술도 그렇고 말이죠. 도박과 술의 공통적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중독이 된다는 것인데, 그 중독의 끝은 자살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빠지게 되면 점점 돌멩이로 변하게 되는데, 그것을 '즉자존재' 라고 했지요? 쉽게 말해서, 있으나마나한 것, 그러니 존재만 달랑 남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돌멩이처럼 굳어지는데, 사실은 이런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다 그렇다는 말이죠. 모든 인간이 돌멩이로 환원이 되고 있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정치적 쾌락에 빠져서 돌멩이가 되는데, 아무리 나오지 말라고 말려도 안 된다는 말이죠. 주위에서 아무리 떨어진다고 해도, 자꾸만 꾸역꾸역 고개를 내민다는 겁니다.

이 자아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데, 바둑을 두는 사람, 낚시를 하는 사람,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 특히 유럽의 젊은이들은 축구에 열광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하고 싶어도 우리나라가 요즘 축구를 너무 못하니 조금은 곤란하고 말이죠.

이 세상은, 자아와 자아의 관계망 !!

아무튼 그야말로 좌충우돌인데, 그러니 이 세상은 완전히 지옥이라는 겁니다. 그러한 자아와 자아의 군상들이 서로 뭐라고 합니까? "나를 무시하지 말라" 라고 하는데, 힘이 센 놈은 비집고 들어가고, 힘이 없는 놈은 밀려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만 인생의 낙오자가 된다는 겁니다.

그 실상은 바로 자아와 자아의 관계망이라는 겁니다. 어떤 분은 여기 지묘동에 와서 조용하게 살고 싶다고 하는데, 우리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강의를 듣고, 그리고 청소하는 것으로 만족해한다는 겁니다. 물론 그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인데 말이죠(ㅋㅋ).

두 번째로, '정숙의 쾌락' !!

그러면 두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 첫 번째는 '감각적 쾌락' 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정숙의 쾌락' 이라는 것인데, 그게 바로 에피쿠로스 학파라는 겁니다. 이들은 감각적 쾌락을 이미 다 경험해본 사람들인데, 그렇게 해보니 허무하더라는 말이죠. 그래서 균형감을 강조하는데, 그 균형감이 쾌락을 극대화시킨다는 겁니다. 즉 "너무 과하지도 말고, 너무 약하지도 말자" 라는 것인데, 균형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들의 생활은 항상 어떻겠습니까? 아슬아슬한데, 아침에 일어나면 그때 그 시간에 챙겨먹어야 한다는 겁니다. 밥을 먹는 시간, 보약을 먹는 시간, 운동을 하는 시간, 그게 모두 다 정해져있다는 말이죠. 그때 맞추어서 하지 않으면 불안하다는 것이죠. 그러니 항상 조심해야하고, 남에게 해꼬질도 하지 말고 도움도 받지 말자는 겁니다.

이들이 사도행전에 보면 나오는데, 사도바울과 논쟁을 하는 장면이 있다는 것이죠. 이런 자들을 불교에서도 볼 수 있는데, 물론 대다수의 장사꾼들은 여기에 해당사항이 없고, 그야말로 공부만 하는 학승들이 있는데, 당연히 극소수인데 말이죠. 그들은 모든 관계를 다 끊어버리고, 그야말로 도만 닦는데 전념을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사도행전 17장 8절을 보겠습니다.

(행 17:18)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가?

여기에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라고 나오는데, 이게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를 의미한다는 겁니다. 이들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이 어떻게 하면 계속해서 쾌락을 유지할 수 있는지, 거기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한 사람들이라는 말이죠. 즉 "우리 인간이 어떻게 감정을 조절해서, 최적의 행복을 유지할 수 있는가?"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들 학파의 공통적 관심사는 인간의 행복인데, 그리고 이것은 그때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고, 오늘날의 모든 인문학 강좌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결국 행복을 찾아갈 수밖에는 없는데, 불교도 역시 그렇고 말이죠.

인간은, '자존적 존재' !!

육에서 육으로 가는 것이 자아인데, 그런데 이 자아는 그냥 자아가 아니고 철저하게 절대적 자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홀로 절대적인데, 그것을 '자존적 존재'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자아라는 겁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자기만 행복하면 된다는 말이죠. 처음에는 이웃이 있고 친구도 있고 자식도 있는데, 나중에는 모든 것이 다 싫고, 결국 자기만 홀로 남는다는 겁니다.

황혼의 크루즈 여행 !!

그래서 나이 80이 넘어서 마누라도 죽고 친구들도 다 죽고 나면, 그때는 뒤늦게 시를 쓰고 피아노를 배우고 하는데, 그래서 80이 넘어서도 8가지 악기를 배워서 다룬다는 겁니다. 외국에서는 나이가 들면 부부끼리 크루즈 여행을 많이 한다고 하는데, 서로 격려를 하기 위해서 말이죠. "여보, 60년 동안 참 고생을 많이 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이제부터는 서로 각자를 돌보자. 이제 내가 나를 챙기지 않으면 누가 챙겨주겠는가?" 라는 겁니다. 그래서 천만원이나 하는 호화여행을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해서 갔다오면 무엇만 남겠습니까? 무엇이 남는 게 아니고, 돈만 날리고 만다는 말이죠(ㅋㅋ).

물론 해외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런 여행을 하는 것은 아닌데, 처음에는 가까운 동남아, 그리고 일본이나 중국을 가는데, 그런데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갑니까? 호주와 뉴질랜드를 가고, 그 다음에는 미국, 그리고 유럽으로 간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다음에는 달로 가고, 그리고는 우주로 나아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모든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좌충우돌을 하는 자아로 인해서, 즉 자기가 괴로워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으니, 그래서 마구 들이댄다는 겁니다. 마치 풍선이 바람이 빠지면서 이리저리 마구 날아가듯이 말이죠.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되면서 점점 더 돌멩이가 되고 마는데, 점점 더 딱딱한 존재가 되어간다는 것이죠.

독사의 자식들아 !!

다시 말해서, 인간은 그동안 자기가 했던 모든 행위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이 그만 딱딱한 돌멩이가 되고 마는데, 그게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성경말씀에 압축이 되어서 모두 다 나와있는데, 여기서 마태복음 3장 7절에서 9절을 보겠습니다.

(마 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마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마 3: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세례요한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했고, 반면에 예수님은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이 조금 더 심하게 욕을 하셨는데 말이죠(ㅋㅋ). 그러니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 라고 해놓고, 그런데 그들을 보고는 그만 저주를 퍼부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일관성이 없는데,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으면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오히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오니까, 그들을 보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야말로 저주를 퍼붓는다는 겁니다. "화 있을진저" 라는 말씀도 역시 그렇고 말이죠.

(마 23: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
(마 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로 원수를 사랑한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처럼 그 원수에게 욕을 해야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발상의 전환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제3의 중립적 위치가 아닌데, 즉 관찰자의 입장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 그러니 구원이 솟아올라와 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자아는 항상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하면 나에게 무슨 이익이 오는가?" 라는 것인데, 그러니 일종의 거래라는 겁니다. 언제나 그렇다는 말이죠. 즉 "내가 당신에게 이것을 해주면,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해주겠는가?"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죠.

칠순잔치로는 턱도 없지만, 받아줄게 !!

그래서 자식들이 부모에게 칠순잔치를 해주면, 부모는 고맙게 여기기보다는 당연하게 여기는데, 왜냐하면 자아니까 말이죠. 즉 "내가 너희들을 키운다고 고생한 것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러면 너희들이 마음이 상할까 싶어서 기쁘게 받아줄게"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우리 어머니가 매일 하는 소리가 무엇인고 하니까, "너희들이나 쓰지, 말라고(왜) 가지고 오노?" 라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만약에 빈손으로 가면 화를 낸다는 말이죠(ㅋㅋ). 물론 그게 자식들을 생각하는 소리가 맞기는 맞는데, 그래도 거기에는 "내가 너희들을 키운다고 고생한 것에 비하면 아직도 멀었다" 라는 것이 깔려있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데, 즉 "내가 당신에게 이것을 해주면,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해주겠는가?" 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자아라는 말이죠. 이것을 달리 이야기하면, "왜 당신은 나에게 그것을 요구합니까?" 라는 것도 역시 자아가 되는데, 즉 "주님, 하필이면 왜 나입니까?" 라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그 과정을 놓치지 말자 !!

사도바울의 경우에, 그는 사도가 되기 이전에는 주체가 아닌 자아였는데, 즉 절대적 자존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죠. 절대적 자기 존재라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서 하나님을 만나겠다" 라는 것이죠. 그러니 사울이 사도바울이 되는 그 과정을, 오늘날 구원받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는데, 그것을 놓쳐버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아하,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달라지게 되면, 이런 이런 결과들이 필연적으로 일어나야만 되는구나" 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자아에서 주체로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겁니다. 그 주체는 밑에서 바쳐주어서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지는데, 그와 동시에 우리는 그만 껍데기가 되고 또한 허무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전도서 1장 13절과 14절의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전 1:1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전 1:14)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여기 13절에 '궁구하며' 라는 것은 '연구하며' 라는 의미로 보면 되는데, 그리고 그 다음에 보면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라고 하는데 말이죠. 어제 낮 시간에 제가 뭐라고 설교를 했는고 하니, 여러분이 이해가 되었는지 궁금한데 말이죠.

용서가 먼저인가? 죄지음이 먼저인가?

우리의 상식은 무엇인고 하니, 용서라는 것은 죄를 지은 다음에 받는 것인데, 그렇지요? 먼저 용서를 받을 것이 있어야, 즉 죄를 먼저 지어서 그 다음에 용서를 받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게 아니라, 주님이 주신 용서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래서 사전에 죄를 지어야 한다는 말이죠. 우리의 생각과는 그 순서가 바뀌어있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죄를 짓고 나서 용서를 해주게 되면, 그것은 "좀 봐주소" 라고 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즉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항복합니다. 그러니 좀 봐주소"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무엇입니까? "그러니 이 자아의 소유를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저는 자살합니다" 라는 뜻이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신이시여, 제가 죄를 지은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자비로운 신께서 용서를 베풀어서, 나의 존재만큼은, 소유만큼은 제발 건드리지 마소서. 다치지 않게 해주소서"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용서는 당연히 가짜라는 말이죠.

평소에 새벽기도에 나오지 않던 사람이 어느 말 갑자기 나와서 울고 불고 할 때는 다 그만한 사연이 있는데, "주여, 제가 잘못했습니다. 회개합니다" 라고 할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제발 제 것만은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어찌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

임재범이 부른 '고해' 라는 유명한 노래가 있는데, 그 가사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용서해 주세요. 벌하신다면 저 받을게요. 허나 그녀만은, 제게 그녀 하나만 허락해주소서" 라고 말이죠. 하지만 그게 용서를 구하는 올바로 태도입니까? 여기에는 무엇을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까? 그게 바로 '자아' 라는 겁니다.

자꾸만 '자아' 라고 하면 어렵게 느껴지니까, 그냥 쉽게 '나' 라고 합시다. "하나님이여, 사람들이 이렇게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나입니까? 왜 나를 건드리십니까?"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아라는 겁니다. 자아가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전도서의 주제, '허무' !!

우리가 지금 이 시간에 전도서를 공부하고 있는데, 이 전도서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허무' 라는 것인데, 즉 하나님께서 무로 돌리신다는 겁니다. 그것도 그냥 무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괴롭게 하시면서 무로 돌린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전도서라는 말이죠.

그러니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돈이 많아도, 심지어 솔로몬은 여자가 몇 명입니까? 천 명의 아내를 거느렸는데, 하지만 그렇게 해도, 그리고 모든 것을 다 해보아도, 평정심이고 뭐고 간에 무엇을 해도, 그 결론은 무엇이라는 겁니까? 그게 바로 허무라는 겁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인간 자체가 태어날 때부터 자아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러니 육에서 나와서 그냥 육으로 간다는 겁니다. 육에서 태어나서 영으로 가는 법은 전혀 없다는 말이죠. 육은 육으로 가는데, 육에서 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육은 도중에 죽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죽는 과정을 외면하고 기피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 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솔로몬의 경우에, 그가 정말로 모르는 것이 없었는데, 그야말로 만물박사라는 겁니다. 그리고 왕이었는데,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의 왕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남방에서 여왕이 와서 구경까지 다 했는데, 그가 가지고 있던 금과 은과 보석이 얼마나 화려했는지, 그 여왕이 보고 감탄을 연발했다는 겁니다.

그러한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모든 것을 다 누리면서 살았던 자가 바로 솔로몬인데,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다가졌던 솔로몬이 잠언서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 모든 것이 다 허무하고, 즉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아에게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요즘은 찐빵과 만두가 차이가 나지만, 옛날에는 똑같은 크기에 똑같이 다 동그랗게 생겼다는 말이죠. 물론 자주 먹는 사람들은 보면 알겠지만, 그냥 보면 잘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습니까? 쪼개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는 말이죠.

자아를 쪼개면, '나' 있고, '악마' 있고 !!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이 괴롭다는 것, 그리고 죽어야 한다는 것, 그 이유를 우리 인간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아를 쪼개보면, 이것을 균열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 자아를 쪼갠 단면도가 로마서 7장에 나오는데, 그렇게 쪼개보니까 하나가 아니라 두 개가 들어있었다는 겁니다. 즉 '나' 있고, '악마' 있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롬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 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그러니 주님은 우리에게 감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주님의 원수가 아닌데, 주님의 원수는 악마라는 겁니다. 인간은 그럴 입장도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 속에 들어있는, 상주하고 있는 그 악마가 어떻게 하는고 하니, 자아로 하여금 계속해서 자기 가치를 놓치지 않도록 격려하고 부추기는데, 그렇게 우리를 통제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무덤가에 살던 사람인데, 그가 귀신이 들렸는데, 그것도 한 두 놈이 아니라 군대마귀가 들어가 있었다는 말이죠. 그 사람이 자기도 모르는 헛소리를 계속해서 하는데, "나는 예수님을 싫어한다" 라고 하는 식으로, 그런 이야기를 해댄다는 겁니다.

원통, 분통, 절통 !!

물론 일반인들은 평소에 그런 소리를 하지 않는데, 하지만 한 번 건드려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누구를 원망합니까? 하나님은 원망하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절대적 존재이기 때문에 말이죠. 대번에 "신이면 신이지, 왜 내 인생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원통하고 분통하고 절통해서 못살겠다" 라고, 그게 원통, 분통, 절통, 통의 3종세트인데 말이죠(ㅋㅋ). 그때는 그 맛있던 밥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기서 과학이 문제가 되는데, 과학적으로는 자아가 보이지 않는데, 우리의 몸은 그냥 세포 덩어리이라는 겁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원통, 분통, 절통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죠. 검사를 해도 이상이 없고, 그런데 밥맛도 없고, 몸이 아프지 않은 구석이 없다는 겁니다. 그 인간만 생각하면 죽이고 싶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누를 길이 없다는 말이죠. CT를 찍으면 그게 나옵니까?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그것만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왜 상사병이라고 있는데, 성경에도 보면 다윗의 아들인 암논과 그가 짝사랑한 다말이라는 여인이 나오는데 말이죠.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겁니다. 그러면 CT를 찍으면 그 상사병이 나옵니까? 그것을 발견해서, "여기에 있네. 이것만 제거하면 되겠다" 라고 해서 수술을 하면 되느냐는 겁니다.

집안에서는 아무리 반대를 해도, 자기는 그 여자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이죠. 남자는 총각인데, 그런데 여자는 이혼녀에 자식까지 있으니, 누가 그 결혼에 대해서 찬성을 하겠느냐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상사병은 아니지만, 아무튼 아침 드라마에 보면 그런 것이 있다는 말이죠(ㅋㅋ).

우리는 그렇게 자아가 좌충우돌하는 지옥과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 것을 드라마가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막장 드라마라고 하면서 외면할 게 아니라, 물론 너무 즐기면 곤란하고, 분석해낼 필요는 있다는 말이죠. 요즘은 출생의 비밀이 대세인데, 아이를 바꿔치기를 해서, 한 아이는 부잣집에 넣고, 다른 아이는 빵집에 취직을 시키고 말이죠. 이것은 주말 드라마인가요?

그런 것을 통해서 '나', 즉 자아라는 것이 무슨 짓을 하는지를 보자는 겁니다. 인간은 소유를 가지고 제2의 자아를 만들어서 구원을 받으려고 시도하는데, 그게 이 세상에 없는 곳이 없다는 말이죠. 그것을 확인하고, 그래서 "이 세상은 지옥이 맞구나. 허무하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불심판을 하겠다고 했을 때, 그것이 처음에는 너무 심한 줄로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불심판을 받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겁니다. 악마가 우리 속에서 그런 짓을 했기 때문에,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조치라는 말이죠. 과거에 노아홍수로 물심판을 했듯이, 이제는 불로서 깨끗하게 태워버릴 수밖에 없는, 그러한 주님의 마음을 우리가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제는 '주체'에 대해서 !!

이제는 '주체'에 대해서 하겠는데, 그런데 이 주체도 역시 '나' 라는 말이죠. 그래서 어려운데, 자아와 주체를 이렇게 나누어서 이야기를 했지만, 이 자아도 '나' 라는 것이고, 주체도 역시 '나' 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소유를 집대성하게 되면 자아가 되지만, 그런데 그게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말씀 덩어리의 껍데기로서 '나'를 둘러씌우게 되면, 그것은 주체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서 말씀이 있게 되는데, 그 말씀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운동력이 있어서, 말씀이 날마다 자아를, 즉 사탄을 노출시키는데, 그렇게 지적질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것을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신다" 라고 하는데, 그게 성령의 하시는 일이라는 말이죠.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그러므로 주체가 우리의 자아를 힘들게 하는 것은, 그것은 바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강의 초반에 "자아가 탈락하면서 주체는 구원을 받는다" 라고 했는데, 이제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었지 싶은데, 그러한 일을 예수님이 하신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자아로 오셔서 주체로 구원을 !!

그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자아로 오셔서 주체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자아는 어디에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에 자아를 드러내셨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는 겁니다.

(막 14:36)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여기서 예수님의 뜻과 아버지의 뜻이 일치가 되었습니까? 일치가 되지 않았는데, 그 순간에는 서로 대척점에 놓이게 되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죄 가운데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오늘날 우리를 의식해서 그렇다는 말이죠. 즉 자기의 택한 백성을 어떤 과정을 통해서 구원을 하시는지, 그것을 예수님이 먼저 보여주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가신 그 통로, 우리도 역시 거기로 빠져나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것을 압축해서 이렇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왜 찬송가에도 보면 그런 가사가 있지요?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 라고 말이죠.

기존의 있는 일인데, 그 의미만 달라져 !!

그렇다면 주님의 뜻이 새로운 겁니까? 아니면 기존의 있는 것으로 하시는데, 그 뜻만 바뀐 겁니까? 과연 어느 것일까요? 추가적으로 새로운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그것이 아니라면, 기존의 있는 일인데, 그 의미만 달라지느냐는 겁니다. 의미만 달라지는데,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갑자기 로또에 당첨되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냥 일상적인 생활은 그대로 하는데 그런데 그 의미가, 이제는 원통, 분통, 절통에서, 이제는 범사에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달라진다는 겁니다. 전혀 사태는 호전된 것이 아니고 동일한데, 그런데 이제는 통의 삼종세트가 아니라, 그야말로 감사가 넘친다는 말이죠.

당신이 바람을 피웠어요? 고마워요 !!

그러면 이것이 쉬운 것입니까? 아니면 놀라운 것입니까? 이것은 실습을 해보면 되는데, 특히 여자의 경우에는 남편이 바람을 피운 현장을 덮쳐서, 그러면 원통, 분통, 절통이 마구 나오는데, "니가 감히 바람을 피워?"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그때 성령이 임하게 되면, 고맙고 감사하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이론상 그렇다는 말이죠(ㅋㅋ).

원통, 분통, 절통의 경우에는, 밥도 전혀 넘어가지를 않고, 병원에 가도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그런데 그러면서 점점 더 돌멩이가 되어간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자아인데, 그런데 그런 자아의 탈락함이 없으면 무엇도 없다고 했습니까? 구원도 역시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남편이 바람을 피운 이유가 무엇이라는 겁니까? 자기를 구원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인데,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놀라운 변화가 생긴다는 말이죠. 물론 이것도 역시나 이론인데(ㅋㅋ), 그러니 사태가 호전된 것이 아니고 여전히 그대로인데, 그런데 이제는 3통이 아니라 감사가 넘친다는 겁니다.

여러분, 성경에 세리가 나오고, 창기가 나오고, 강도가 나오고, 10년이나 혈류병에 걸린 여인이 나오고, 수로보니게 여인이 나오지요? 그런 자들이 나와서, 주로 여자들인데 말이죠. 그런 여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했는데, 그때 우리는 그것을 너무나 시시하게 보았다는 겁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그런 일을 전혀 일어날 수 없는데, 그러니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이죠. 다른 것은 몰라도, 천국에 가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데, 그게 어떻게 흉내를 낸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으로 가는 길은 철저하게 막혀있다는 말이죠.

46억을 날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

앞에서는 여자들이 기절할 일을 이야기했다면, 이제는 남자 이야기를 좀 하면 다음과 같다는 겁니다. 평소에 술을 좀 같이 마시면서 친해진 사람들과 같이 동업을 했는데, 그래서 회사를 하나 차렸다는 말이죠. 자본금이 5억인데, 물건을 무려 46억이나 뿌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만 사기를 당해서 물건값은 고사하고, 물건조차도 하나도 회수를 하지 못했다고 하면, 그러면 무려 41억이나 손해를 보면서 회사가 완전히 부도가 나고 말았다는 겁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증을 잘못해준 정도가 아닌데, 어떻게 회복할 길이 전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남은 것은 이제 자살밖에 없는데, 몇 억이면 몰라도, 물론 그것도 힘들지만, 그 정도의 액수라고 한다면 일반인들의 경우에는 어떻게 전혀 복구할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그것도 평소에 사기를 치면서 살았던 사람이라고 하면, "나도 사기를 똑같이 치면 되지" 라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말이죠.

그런데 그 사람은 전혀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고, 착실히 교회에 잘 다니던 집사님이라는 겁니다.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착실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 라고 하는, 그런 일반적인 원칙을 믿고 있으면서 열심히 살아가던, 그런 사람이라는 겁니다.

남자에게는 이런 것이 있는데, "먹을 것이 없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욕을 듣는 것은 도저히 참지를 못하겠다" 라고 하는, 그런 게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김보성이 말하는 '의리' 라는 것인데(ㅋㅋ), 그래서 "굶어죽어도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남자답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회사가 부도가 나게 되면, 남을 도와주는 것은 고사하고 그만 피해를 입혔다는 겁니다. 자기 가정이 박살나는 것은 당연하고, 자기를 믿어준 주위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그동안 자기의 존재가 소유하고 있었던 자기 명예가 도대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자는 사랑이지만, 남자는 명예라는 겁니다. 그러니 남자는 그런 자기 명예가 사라지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그 사람에게 성령이 임했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역시나 고마움과 감사함이 넘치게 된다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 누구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역시 감사와 고마움이 !!

그런데 여러분, 이게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자기는 완전히 천하에 나쁜 놈이 되고 마는데, 그야말로 걸레와 같은 인생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감사히 여기고 고맙게 여긴다고 하면, 물론 그것이 우리 인간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지만 하나님은 해내신다는 말이죠.

그것을 믿는 것이 믿음인데, 즉 자아는 탈락시키고, 여기에 있던 자기 명예, 자기 자존심은 다 버리게 하시는데, 그렇게 해서 주체의 구원이 솟아오르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을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자고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죠.

자아는 존재고, 주체는 사건이다 !!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런 불가능한 세계에 자아로 입수를 하셔서,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시면서 빠져나가셨다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을 시키는데,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 인간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즉 "예정된 인간이니 건져주세요"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 일이 생기는 사람이 바로 성도인데, 그래서 성도는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보여주는데, 그래서 "자아는 존재고, 주체는 사건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오늘의 강의제목은 '존재와 사건' 인데, 그러면 이제는 사건에 대해서 좀 설명해드리겠는데 말이죠.

파국 뒤에 사건이 온다 !!

사건에는 다음과 같은 공식이 있는데, 즉 "파국 뒤에 사건이 온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파국이 사건보다 앞선다는 말이죠. 이것을 어제 낮 시간에 '여진' 이라고 했는데, 영화배우 김여진이 아니고(ㅋㅋ), 여진이라는 것은 "이전에 지진이 있었단다" 라는 것을 계속해서 나타내준다는 겁니다.

혹은 '여파' 라고 할 수도 있는데, 즉 큰 진동이 있고 난 다음에 잔잔한 진동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말이죠. 그러면 파국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의 멸망인데, 즉 세상의 옳고 그름이 최종적으로 이미 판정이 났다는 겁니다. 앞으로 판정을 할 것이 아니라, 이미 났다는 말이죠.

어제 설교시간에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을 이야기했는데, 혹시나 어렵지 않던가요? 중요한 것은 둘째인데, 둘째 부활은 천국이고, 둘째 사망은 지옥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마지막은 죽는다는 것은, 그게 죽음이 끝이라는 말이 아니고, 그것은 둘째 사망으로 인한 여진이고 여파라는 겁니다.

그러니 숨겨진 파국이 먼저 있고, 물론 우리가 보기에는 미래가 나중이지만,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파국이 먼저 있고, 이게 묵시세계인데, 묵시는 미래를 초월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파국이 먼저 있고, 그 뒤에 사건이 오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파국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다 결정되었다는 것인데, 그렇게 천국과 지옥에 결정이 되고 난 다음에, 그 여진으로서 사건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사건에 의해서 발생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아가 아니고 주체라는 말이죠. 그러니 천국에 갈 것인지 지옥에 갈 것인지, 그것이 이미 결정이 난 여파가 사건으로서 우리에게 작용하게 되는데, 그게 자아에서 주체로 변화시키는 힘이라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의 여진이, 성령의 오심 !!

그것을 요한복음 16장에서 보여주는데, 십자가 사건은 파국적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세상은 끝났는데, 이미 종말이라는 겁니다. 그 십자가 사건의 여진이 무엇인고 하니, 성령의 오심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성령이 오셔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시는데, 왜냐하면 그런 근거가 생겼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이죠.

(요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요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서, 모든 세상은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 파국적으로 이미 결정되었다는 겁니다. 이미 의미가 다 끝났다는 말이죠. 그러니 존재의 의미라는 것은,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아에 관한 것이지 주체는 존재의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주체는 사건의 의미라는 말이죠.

오늘 중요한 것을 참 많이 했는데, 자아가 아닌 주체라는 겁니다. 자아의 의미는 허무로서 그 의미가 이미 끝났다는 말이죠.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허무하기는 역시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전도서에도 그런 말씀이 나오지만, 즉 "착하게 살아도 허무하고, 악하게 살아도 허무하고, 사기를 치면서 살아도 허무하고, 바람을 피우고 살아도 허무하다" 라는 겁니다. 물론 사기를 치지 않고, 바람을 피우지 않아도 허무하고 말이죠.

음란한 여자가 곧 신사임당이다 !!

지난 대전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음란한 여자가 바로 신사임당이다" 라고 말이죠. 그런데 음란한 여자와 신사임당이 과연 이퀄(=)이 됩니까? 우리는 동의하기가 쉽지 않은데, 우리나라의 최고금액인 5만원짜리 지폐에도 나오는 여자인데 말이죠.

우리가 알기로는 참으로 정숙한 여인으로서, 남편은 그렇게 농땡이를 치고 바람을 피워도 그 남편을 용서하고 섬긴 것으로 아는데 말이죠. 물론 질투도 좀 했겠지만 아무튼 괜찮은 여성이라고 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음란한 여자인데, 왜냐하면 아담의 육에 속했기에 말이죠. 육에서 나온 것은 어디까지나 육이라는 겁니다.

우리도 그런 안목으로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자꾸만 자아의 안목으로 보면 곤란하다는 말이죠. 그런 선악기준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 선악기준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선과 악을 자체적으로 상쇄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인데, 하지만 그런 것 자체가 악이라는 말이죠. 어제 낮에 했는데, 어떻게 기억이 나십니까?

그렇게 파국 뒤에 사건이 오게 되면, 그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자아를 죽이고, 그 현장에서 주체를 솟구쳐 올라오게 한다는 겁니다. 즉 "나는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산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몸을 증거하는 죄악 된 몸이라는 말이죠.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님께서 죽어야 될 몸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역시 죽어야 될 몸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다는 겁니다. 물론 예수님은 일부러 그 몸을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에게서 받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어머니로부터 몸을 물려받았다는 겁니다.

사건은, 존재의 허무를 알려줘 !!

여기서 예수님은 두 가지, 즉 자아를 경유해서 주체로 나갔는데, 그러면 우리도 역시 자아를 경유해서 주체로 가면서, "이것이 자아고, 이것이 주체다" 라고, 그렇게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을 성령을 통해서 부여를 받는다는 겁니다. 자아는 존재이고, 주체는 날마다 주시는 사건인데, 그 사건은 존재에 대해서 허무하다고 통보해주는, 그게 사건이라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목사님, 오늘 교회에 오는데 차를 그만 놓쳤습니다" 라고 하면,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그 다음에 차가 오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 되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의 건물주인이 "월세를 좀 올려주세요. 80만원이든 것을 200백만원을 받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나가라는 말이죠. 실제로 식당의 경우에는 잘 된다고 소문이 나면, 주인이 그런 식으로 한다고 하는데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당장에 "주여, 우리교회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원통, 분통, 절통입니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어찌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이 교회만 유지하게 해주신다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그런 태도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그동안 들키지 않았던 교회를 향한 적나라한 자아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날마다 계속되는 여진 !!

하지만 주님은 무엇인고 하니, "내가 택한 백성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알아서 한다" 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그것을 교회에서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런 일이 생기면 "어찌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라고 한다면,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무슨 이런 놈이 다 있노? 너희들이 나댄다고 해서 지옥에 갈 놈이 천당에 가나? 그런 것은 없어"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주님은 완벽하게 자기의 일을 해내시는데, 그러니 월세를 200만원으로 올려달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그 주인영감이 마음대로 올린 것이 아니고,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우리의 자아를 부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 되는데, 저는 집에 방송국을 차려놓고, 여러분은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서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동차 기름 값도 절약되고 사간도 절약되고 얼마나 좋은지 모르는데, 그래도 헌금은 계좌로 좀 넣어주면 좋고 말이죠(ㅋㅋ).

물론 그렇게 하면 그게 또 어느 새 자아가 되고 마는데,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서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말이죠. 그렇게 해서 자아가 단단해지면, 주님께서는 또 다시 우리가 예상치 못한 사건을 일으키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진이라는 것은 한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일어난다는 겁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그 여파가 미친다는 말이죠.

주체는(교회는) 날마다 생성된다 !!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하면, 이 '주체' 라는 것은 '나' 라고 보면 되는데, 즉 "나는 날마다 생성된다" 라는 겁니다. 그 '나'의 자리에 교회를 넣어서, "교회는 날마다 생성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여기에 의문점이 없지요? 생성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생성은 무엇은 아니라는 겁니까? "나는 여기 있다" 라고 하는, 그 존재는 아니라는 말이죠. 존재라는 말을 쓰려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나를 존재케 하시는 분이 있다" 라는 것인데, 즉 "매일같이 나를 살려주시는 분이 있다"' 라는 겁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

성경에 내일 염려는 언제 하라고 했지요? "내일 염려는 내일 하라" 라고 했는데, 그것은 진짜로 내일 하라는 말이 아니고, "오늘로 끝내라" 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내일이 없는데, 물론 주님이 내일 살려주시면 내일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오늘 이 순간뿐이란 말이죠.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 라는 찬송가가 있는데, 바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맛있는 것을 사먹고 즐기면 되는데, 그것이 전도서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신세계 백화점 상품권이 있으면 아끼지 말고 오늘 사용하고, 그리고 골프모임이 있으면 가서 마음껏 즐기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오늘이 파국이라는 겁니다.

사건은 내일이 없는데, 지금 이 순간에 주어진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고맙게 여기는 것, 그것이 바로 사건에 담긴 내용이라는 말이죠. 물론 이것은 아무에게도 주어지는 혜택이 아닌데, 오직 성령을 받은 자에게만 해당이 된다는 겁니다.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이제 어려운 것을 하겠는데, 지금까지는 기초로서 다졌다고 여기고 말이죠. 시간의 거의 다 되었지만 한 번 해봅시다. 교재 65페이지인데, 거기에 전도서 2장 16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말이죠.

(전 2:16)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지혜자와 우매자, 모두에게 !!

여기에 지혜자와 우매자가 나오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어떻습니까? 똑똑한 지혜자는 천국으로 가고, 어리석고 아무 것도 모르는 우매자는 지옥으로 갈 것 같은데, 그렇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란 겁니다. 자아는 천국에도 가지 않고 지옥에도 가지 않는데, 자아는 그 자체로서 허망하다는 말이죠.

그래서 천국에 가는 것도 주체이고, 지옥에 가는 것도 주체라는 겁니다. 거기에는 주님의 판정이 가미되어야 하는데, 즉 모든 것이 언약대로 된다는 말이죠. 즉 "에서는 영원 전부터 미워하고, 야곱은 영원 전부터 사랑하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마귀는 허망한 이미지를 가지고 그동안 우리를 농락했는데, "괴로우면 뛰어내려서 자살해라" 라는 식으로, 그것을 매일같이 촉구했다는 말이죠. 혹은 "니가 최고야" 라고 하면서 날마다 우리 자신을 업그레이드를 시켰는데, 돋보이게 만들고, 자랑하게 만들고, 자긍하게 만들고, 그렇게 해서 제2의 사탄의 모습이 되도록 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마귀는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바비 인형과도 같은, 그러한 허망한 것을 가지고, 그런 자아를 가지고 계속해서 우리를 흔들어대는데, 마치 그게 실체이고 전부인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전도서에서는 그런 인생에 대해서 허무하다고 한다는 겁니다.

이 말씀은, 공유적 인간, 그 모두에게 !!

그러면 여기서 무엇이 어려운고 하니, 진짜로 어려운데 말이죠. 성경은 이 말씀을 어느 특정한 사람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적 인간, 즉 일반 사람들에게 다 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본 전도서 1장 13절이나 2장 16절이 어떤 특정인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일반, 즉 모든 인간들을 두고 이야기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말씀은 모든 인간들에게 다 적용이 되는데, 즉 공유적이라는 겁니다. 각 개개인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다 적용되는 것을 '공유' 라고 하는데, 영화배우 공유가 아니고 말이죠(ㅋㅋ). 그런 공유적인 것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시간' 이라는 것인데, 시간은 잘났다고 해서 빨리가고 못났다고 해서 늦게 가고, 그런 것이 없다는 겁니다. 시간은 남녀노소를 구별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시간과 거울 !!

그리고 거울에 비친 모습도 그러한데, 거울은 그냥 다시 비쳐줄 뿐이지, 특별대우를 해주는 법이 없다는 겁니다. 거울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거울은 자아에게 대해서 아주 냉혹한데, 그게 백설공주에 보면 나오는데 말이죠. 왕비라고 해서 봐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냥 그 모습을 다시 비추어줄 뿐이지,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이죠.

그것은 시간도 마찬가지인데, 물론 고장난 벽시계는 멈추어져있지만, 세월은 고장도 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나훈아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리고 현철은 청춘을 들려달라고 그렇게 평생을 외쳤다는 말이죠(ㅋㅋ). 누구에게 말인가요? 재벌그룹의 회장님에게 그렇게 했습니까?

이게 바로 공유인데, 이 공유 앞에서는 무엇을 날려보내는고 하니, 자아를 그만 날려보낸다는 겁니다. 그리고 주체라는 것도, 예수님의 주체가 들어와서 그렇지, 이것도 공유 앞에서는 역시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왜 하필이면 나입니까?" 라는 말을 하면 안 되는데, "당신이 미워서 당신에게만 이렇게 못살게 구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공유적 존재로서, 모든 인간이 모두가 다 전도서 1장과 2장의 그 말씀을 다 맞고 있다는 것인데, 마치 소나기를 맞듯이 말이죠. 모든 인간이 다 그렇다는 것이죠. 그러니 남들과 비교해서 자기가 우월하다든지, 혹은 열등하다든지,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것은 착각이라는 겁니다. 즉 "나만 고생하다" 라는 것, 그런 것은 없다는 말이죠.

그게 교재 65페이지에 나오는데, 한 번 보겠습니다.

** 성냥팔이 소녀가 눈이 내리는 밤, 굶어가면서 외로이 "성냥을 사세요" 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이 크리스마스 이브라서 집집마다 식구가 둘러앉아서 케이크를 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면서, "나도 부모가 있었으면 저렇게 행복할 텐데" 라고 합니다.

아, '성냥팔이 소녀' !!

여기에 성냥팔이 소녀가 나오는데, 고아인데 말이죠. 우리가 다들 어릴 때 이 동화를 보면서 울었는데, 저만 울었습니까? 저는 이 동화를 읽으면서, 추울 때는 어디에 좀 있다가 날씨가 풀리면 성냥을 팔든지 하면 되는데, 왜 그렇게 고집을 피우면서 팔았는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는 말이죠.

물론 성냥도 제대로 팔지 못하고, 결국은 마지막 성냥을 태우면서 그만 추위에 얼어서 죽고 만다는 겁니다. 이제 성냥개비가 3개가 남았는데, 하나를 하나를 피울 때마다 각각의 이야기가 나오고, 마지막 성냥을 피우고는 엄마가 있는 하늘나라로 간다는, 그런데 내용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이 동화의 경우에, 동화도 결국 이 세상에 속한 것인데, 즉 마귀의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동화가 무엇을 이야기하는고 하니, "자아를 도와서 저런 불행한 소녀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크리스마스의 정신이 아닌가?" 라는 겁니다. 물론 제가 저자에게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말이죠. 그러니 케이크를 자를 때, 그냥 식구들끼리 자르지 말고 창문을 열어서 밖을 좀 쳐보다라는 겁니다.

아마 이 동화가 17세기나 18세기에 나왔지 싶은데, 그때는 국가의 복지정책이 시작되기 이전이라서, 그런 아이들을 국가에서 미처 돌보지를 못했다는 겁니다. 지금은 소년소녀 가장들을 국가에서 모두 돌봐주기 때문에 성냥팔이 소녀는 없는데, 물론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서 도망친 아이들은 할 수 없고 말이죠.

노숙자들의 경우에도, 국가에서 시키는 대로 하면 길이 있는데, 시설에서 가서 일을 배워서 자립할 수 있는데, 그런데 술과 담배를 끊기 싫어서 그런 곳에는 가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리고 간섭을 받기 싫어서, 그래서 서울역에서 산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는 베풀어주어도 그놈의 자아가, 그 자아의 고집이 뭐라고 합니까? "나는 왕년에 거지가 아니었다. 노숙자가 아니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모든 인간은 공유적으로, 즉 성냥팔이 소녀와 같은 경우는 없어야 하고, 그래서 따뜻한 크리스마스를 보내야 한다는 것인데,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이 결국 무엇인고 하니, 이것이 실제적으로는 '폐쇄적' 이란 말이죠. 내부적으로는 공유적으로 행복한데, 그런데 이것을 따져보면, 폐쇄적으로, 즉 철망 안에서 자기들끼리의 행복이라는 것인데, 이게 현실이라는 겁니다.

1960년대의 스웨덴 !!

예를 들어서, 1960년대의 스웨덴의 경우에, 이 시기를 정치학에서 자주 이야기하는데 말이죠.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때가 스웨덴이 가장 좋았던 시절이라는 겁니다. 복지가 가장 잘 되었던 말이죠. 그러니 1960년대의 스웨덴이 민주주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지금의 스웨덴은 취직자리가 없어서 젊은이들이 외국으로 나가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다른 나라에 가서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볼 필요가 있는데, 특히 젊은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말이죠. 그러면 결론은 무엇인고 하니, 공유된 행복은 없다는 것인데, 그런 공산주의 사회는 없다는 겁니다.

성도는, 일시적 주체적 대표자 !!

하나님께서 이런 공유적 말씀을 모든 사람들에게 다 주셨을 때, 그러면 모든 사람들을 다 내칩니까? 그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사건이 주어지는데, 그러면 그 사건이 무엇을 만듭니까? 사건이 주체를 만들어서, 그 주체가 대표적 주체가 된다는 겁니다. 즉 새로운 존재,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성도는 그냥 사는 게 아니라 대표로서 사는데, 물론 일시적이지만 말이죠. 왜냐하면 일시적이 아니고 계속해서 대표가 되면 자아가 굳어져서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공유적 존재의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대표해서 보여주는 기능을 감당하는 것이 바로 성도의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말이죠.

똑똑, 계십니까?

다시 성냥팔이 소녀로 돌아가서, 이 성냥팔이 소녀가 만약에 자아가 아니고 주체라고 한다면, 그러면 이 성냥팔이 소녀는 그 시점에서 어떻게 되는고 하니, 그때 그 장소에서 메시야를 보여주는 가현체가 되고 마는데, 즉 십자가 사건의 가현체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만약에 성냥팔이 소녀라고 하면, 그렇게 창문너머로 웃으면서 온 식구들이 모여서 케이크를 자르는 모습이 있다고 하면, 문을 두드려서 "나를 좀 도와주세요. 나에게도 케이크를 좀 나눠주세요" 라고 하는 게 아니라, 어떤 드라마를 보니 "나를 자식으로 주세요" 라고 하면서 부잣집 가정에 뛰어들던데 말이죠(ㅋㅋ).

그러면 뭐라고 하면 되는고 하니, "여러분이 이렇게 크리스마스 이브에 모여서 웃는 것, 그것은 전도서 1장의 말씀에 의하면 잘못된 겁니다. 인생은 허무합니다. 그런 허무를 알고 케이크를 자르는 것과, 그게 아니라 '우리끼리, 우리가정만 공유적 행복을 누리자' 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자아가 되고 맙니다" 라고 하면서, 고발하는 기능을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냥팔이 소녀는 그만 대표자가 되는데, "아이쿠, 내 팔자야!"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그러한데, 그런데 오늘 이 순간 여기서 자기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맡겼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그 순간이지, 시간을 끌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가 무슨 주의 종이라도 된 줄로 착각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도는 그 순간 그 시점에서 항상 대표자가 된다는 겁니다.

'보글보글' 인생 !!

저는 이것을 형용사로 '보글보글' 이라고 표현하고 싶은데 말이죠. 왜 팥죽을 끓일 때, 팥죽이 다 되면 어떻게 됩니까? 보글보글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우리는 괜찮은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보글보글' 이라는 겁니다. 육에서 영으로, 영에서 육으로, 혹은 자아에서 영으로, 영에서 자아로, 그렇게 보글보글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할 때마다 그 순간에 예수님을 보여주는 대표자 역할을 하다가, 자기는 사라지고 다른 사람이 그 역할을 겁니다. 우리는 그런 보글보글하는 과정 속에서 십자가 사건을, 즉 모든 것이 다 파국으로 완료가 되었다는 것을 증거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러한 '보글보글'이 아니라, "한 번 대표자는 영원한 대표자다" 라고 하게 되면,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아를 믿는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주체는 사건이라서 보글보글이지만, 존재는 계속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존재는 덩어리이니 말이죠.

존재는 계속해서 존재이기를 원하지만, 사건은 그 사건이 주어질 때는 은혜를 받고 감사하게 되지만, 그러나 돌아서면 다시 "내가 잘났다" 라고 하면서 까분다는 겁니다. 그것이 사건의 의미라는 말이죠. 주체는 그 주도권이 주님에게 있고, 반면에 존재의 주도권은 그야말로 엉터리인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를 영에서 육으로 인도하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다시 영으로 육으로 돌아가는데, 까불까불 거리면서 말이죠. 하지만 그러한 과정들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주님의 주되심이 드러나게 하신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허무한 세상이니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주님께서 이 어두운 세상에서 놀랍게도 우리를 일시적인 대표자로서 사용하시는 줄로 압니다. 그러니 우리의 자아가 주인공이 되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인이 되는 주체가 주인공이 되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있음이 존재가 아니라 사건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11,13 오후 4시에 마침.
주님의 종인가? 계룡산 도사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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