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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30 21:40:01 조회 : 426         
[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23 - 죄사함 이름 : 구득영(IP:203.223.97.162)
[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23 - 죄사함

07,11,20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죽음을 경험한 자 !!

오늘은 교재 67페이지부터 하겠는데, 거기에 '4강, 죽음의 힘' 이라고 되어있는데 말이죠. 죽음이라는 것은 이미 한 번 죽고 난 뒤에, 즉 죽음이 무엇인지 알고 난 다음에, 죽음을 경험한 사람만이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은 그럴 자격이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능력자가 없다는 것인데, 한 번 죽은 사람은 그게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죽음에 대해서 제대로 이야기를 하려면 실제로 죽어야하고, 그리고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해서 그냥 살아나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서 죽음에 대해서 알려줄 수 있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과연 그런 분이 누구일까요? 과거에 죽은 적이 있었고, 다시 산 적이 있었고, 그리고 자기가 삶과 죽음을 다같이 경험한 것을 살아있다고 여기는 자들에게, 사실은 살아있는 것이 아닌데, 아무튼 그런 자들에게 통보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는 능력자가 말이죠.

그분이 바로 예수님인데, 예수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자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좀 안다고 해서 전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받은 자만이 전도자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나오는데, 19절과 20절을 보겠습니다.

(마 10:19)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마 10: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전도자, 목격자 !!

그러니 전도자는 자신의 자질이나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속에 자기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들어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분이 알아서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는 그냥 나팔역할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전도자는 기능적인, 즉 도구의 역할만 할뿐이라는 것이죠.

그것을 성경에서는 '목격자' 라고 하는데, 그러니 자기가 사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는 해도, 그 사건에 대해서 자기가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의 인생은 무엇인고 하니,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책임지지 말자"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계속해서 해왔는데, 왜냐하면 성도라고 하는 것은, 이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의 능력이 자기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자기 인생을 자기가 주관할 수 있는 입장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 인생이라고 해서 자기 인생이 아니라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자동자의 경우에는 운전사가 없으면 움직일 수가 없는데, 물론 요즘은 운전사가 없어도 가능한데, 그것을 자율운전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하지만 일반 자동자의 경우에는, 운전사가 있어야 시동이 걸리고 운전이 된다는 말이죠. 자동차를 보고 닦달을 내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동차는 운전사가 필요하고, 그 운전사에 의해서 자동차가 움직이는데, 즉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전도자는 사건을 만들 자격은 없고, 다만 주어진 사건을, 그 일을 전파할 뿐이라는 겁니다. 그게 전도자라는 말이죠.

성경에 보면 소경이 종종 등장하는데, 주위 사람들은 그런 소경을 보고 "얼마나 죄를 많이 지었으면 소경이 되었을까?" 라고 했을 때, 여기서 소경이 된 사람은 운전사가 없는 자동차라고 비유할 수가 있는데 말이죠.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이 오셔서 그 소경을 다루게 되면, 그 소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소경이 되었다", 혹은 "집안이 가난하다" 라는 것에 대해서, 그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돌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두고 '자유' 라고 하는데, 그것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도 마찬가지라는 말이죠. 자기 탓을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진정한 힘은 죽음에서 !!

오늘은 교재 67페이지부터 하는데, 여기에 보면 제목이 '죽음의 힘' 이라고 되어있는데, 그런데 죽음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이미 죽어버렸는데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죽음의 힘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바로, "진정한 힘은 죽음에서 나온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그리고 다시 통보를 해줄 때, 그 통보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순서가 다음과 같은데 말이죠. 이 세상에서 사시던 어떤 분이 세상에 떠밀려서 그만 죽었다는 겁니다. 죽음의 세계를 이렇게 점선으로 하면, 여기가 죽음의 세계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그 순서가 "1번, 죽었다. 2번, 살았다. 3변, 다시 온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세계에서 다시 올 때는, 옛날처럼 이 세상의 일부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전체에 대해서, 그것도 일괄적으로, 한꺼번에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지식자가 된다는 말이죠. 그것을 유일하게 아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통보를 해줄 때는, "이 세상에서는 산 사람이 없었다" 라는 것을 통보해준다는 겁니다. 즉 이 세상에는 산 사람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다녀가지 않았다고 하면, 이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어떻게 생각을 하겠습니까? "우리는 모두가 다 살았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마을 공동묘지와 같은 곳에 가야 죽은 자들이 있지, 그렇게 죽기 전까지는 자기들은 살아있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들은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자격이 되지를 못하는데, 죽음이 무엇인지를, 그 죽음에 대해서 알아야 어떻게 이야기를 하든지 말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죽음을 모르면서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그런데 왜 그렇지 못합니까? 그것은 다가오는 죽음이 무서워서, 즉 죽음에 쫓기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어린아이들은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아있기에 말이죠. 20대가 죽음을 말하는 것도 너무 조숙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이가 70이 넘어서 죽음을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은 현실로서 다가온다는 말이죠.

덩어리, 곧 '개인사' !!

이렇게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무엇인가에 쫓긴다는 것이고, 그것은 덩치, 즉 덩어리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 덩어리를 저는 '개인사' 라고 보고 싶은데 말이죠. 자기 나름대로 인생을 살아온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다칠까 싶어서, 그런 가치, 즉 자존심에 상처가 날까 싶어서, 그렇게 알 수 없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죽을 때 죽더라도,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인생사에 대해서는 지적질을 하지 말라" 라는 것인데,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 인생에 대해서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모르는데, 그런데 그것을 탓한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가 인생을 잘못 살았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사람들이 화를 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의 개인 인생사를 괜찮게 유지하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화를 낸다는 겁니다. 한 순간이 흠집이 난다고 해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욕된 인생이 되고 지저분한 인생이 될까 싶어서 겁을 낸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사람들이 그렇게 겁을 내고 두려워하고 화를 내는 것에 대해서 정작 성경말씀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여기서 골로새서 1장을 보겠는데, 14절에 보면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 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구속, 곧 '죄 사함' !!

사람은 고민을 해도 그 이유를 모르는데, 걱정을 해도 왜 걱정을 해야하는지를 모른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며느리가 아프다고 하면, 걱정이 되는데, 그러면 며느리가 아픈데 왜 걱정이 됩니까?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당연하다고 여기는데, 본능적인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무책임한 답변이고, 사람이 걱정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데, 그런데 문제는 정작 그 이유를 모른다는 말이죠. 정답을 모르기 때문에 그 원인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정답을 미리 알면 어떻습니까? 그 원인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지금 저 혼자만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까? 정답을 미리 알게 되면, 왜 그런 답이 나와야하는지를 알 수가 있다는 겁니다. 답이 없으면 문제를 내도 헛수고인데, 그런데 답을 먼저 알고 나서 역순으로 해서 문제를 내게 되면, 그 문제에 대해서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답이 있기 때문에 말이죠.

그 답이 무엇인고 하니, 여기 14절의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라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정답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왜 걱정을 합니까? 그것은 죄가 있기 때문에 걱정을 한다는 말이죠. 왜 우리가 죽음에 쫓기는고 하니, 죄가 있기 때문에 쫓긴다는 겁니다.

왜 죽으면 안 되는가?

이런 정답이 나오기까지 우리는 왜 걱정을 하는지, 왜 두려워하는지, 왜 죽음에 쫓기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는 말이죠. 강도가 와서 "너의 목숨을 내놓을래? 돈을 내놓을래?" 라고 했을 때, "내 목숨을 가져가고 돈은 그냥 두어라" 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바보는 없다는 겁니다. 목숨을 빼앗기면 가지고 있던 돈도 같이 날아가 버린다는 말이죠.

그래서 당연히 "있는 돈은 다 가지고 가고 목숨만 살려다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왜 그렇게 목숨에 대해서 집착을 하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목숨을 잃어버리면 죽기 때문인데, 그러면 왜 죽으면 안 되느냐는 것이죠. 사실은 우리가 평소에 그런 질문을 해야하는데, "왜 죽으면 안 되는가?" 라고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 대한 해답이 없을까 싶어서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지진이 일어나면 벽돌이 우르르 떨어지는데, 그러면 거기에 맞으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는데, 그러면 왜 뱍돌에 맞으면 안 되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죽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물론 바로 위에 있는 것이 떨어져서 맞으면 혹불 정도로 끝나지만, 저기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것에 맞으면 죽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즉 "너는 마귀에게 꼼짝도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라는 것에 대해서 확인을 받기 위한, 그런 게임을 벌리고 있는 중이라는 겁니다. 마귀에게 붙잡혔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그런 게임을 우리는 평생 벌리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신뢰게임 !!

한 가지 예를 들면, 호주의 30대 젊은 외교관에 미국에 와서 친구와 함께 시내를 구경하다가 "우리 트르스트 게임을 하자" 라고 했는데, 신뢰게임을 말이죠. 이것은 진실게임과는 다른데, 무슨 게임인고 하니, 높은 곳에 올라가서 넘어지려고 하는데, 그때 손을 내밀어서 잡아주면 친구이고 그렇게 않으면 친구가 아니라고 하는, 그런 게임이라는 겁니다.

물론 평지에서 그렇게 하면 다치지도 않고, 손을 잡아주면 "우리는 친구다" 라고 해서 한 잔을 하게 되는 핑계거리가 되는데, 그런데 그것은 자꾸 하다가보면 식상하게 되는데, 잡아주지 않아도 별 이상이 없으니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강도를 점점 더 높이게 되는데, 어떤 경우에는 여자 친구를 걸고 하기고 하고 말이죠. 그러니 얼마나 신뢰가 없으면 이런 게임을 하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호주 외교관의 경우에는, 7층 베란다에 올라가서 게임을 하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만 친구가 자기 손을 잡아주기도 전에 떨어져서 죽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게 미리 연습을 하기도 좀 곤란하고, 아무튼 그렇게 해서 죽고 말았다는 겁니다. 참으로 위험천만한데 말이죠.

그런데 이게 남의 일이 아닌데, 마귀가 이런 신뢰게임을 우리에게 어떻게 하는고 하니, "니가 예수를 믿을 때, 종교생활을 할 때 신뢰게임을 해서, 니가 확인이 되는 범위 내에서만 믿어라"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믿음생활이 아니라, 신을 상대로 해서 게임을 하게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만약에 자기가 감기에 걸렸다고 하면, 그러면 기도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 이번에 제가 감기에 걸렸는데, 평소라면 제가 약을 먹겠지만 이번에는 일주일동안 약도 먹지를 않고 기도를 하겠습니다. 그래서 낫게 되면 하나님은 역시 살아계신 것이고, 물론 그렇지 않아도 살아계신 것은 맞지만, 그래도 저와는 마음이 좀 맞지 않는 것으로 여기겠습니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이런 것이 일종의 신뢰게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감기는 일주일이 지나면 약을 먹든 먹지 않든, 기도를 하든 하지 않든 다 낫는다고 하는데 말이죠(ㅋㅋ). 아무튼 그러한 게임을 마귀로부터 배워서, 마귀가 믿는 식으로 자기도 예수님을 믿겠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신뢰게임을 하는 않는 인간들이 없어 !!

그러면 그 초점이 어디에 가있는고 하니, 자기에게 잘해주면 믿어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게임의 주체가 되어서, 그 게임에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간에 다 불러모은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게임이 어디 한 번으로 끝이 납니까? 호주 외교관이 7층 베란다에 왜 올라갔습니까? 처음부터 거기에 올라간 것이 아닌데, 그런 게임을 어디 한 두 번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것과 똑같은데, "하나님, 제가 십일조를 일년동안 해보고, 그렇게 해서 제 낸 돈보다 최소한 3배의 수입을 더 주시면, 그러면 하나님이 십일조를 받는다고 여기겠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하면 저는 더 이상 십일조를 내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는 말이죠.

그런데 이게 어떤 특정한 인간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다 이런 게임을 벌리고 있다는 말이죠. 모든 인간들이 다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누구나 다 "나는 죽으면 안 된다" 라는 것이 깔려있는데, 그 호주 외교관의 경우에도, 자기가 죽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신뢰를 받아가면서 살아보려고 그런 게임을 벌렸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은 물으시는데, "왜 죽으면 안 되는데?" 라고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할 말이 없는데, 내놓을 답변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답변이 없는데, 단지 무엇인고 하니까, "나는 다치면 안 돼. 나는 죽으면 안 돼" 라고 하는, 즉 자기는 인생을 힘들게, 불행하게 살면 안 된다는 겁니다.

피조물의 존재이유는?

단지 그것뿐인데, 그런데 성경말씀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피조물의 존재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인데, 그 하나님의 영광이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고, 그게 옛 언약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신약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그게 독생자의 영광이고, 그게 곧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제는 유대인들처럼,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영광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인데, 그런데 그 말씀은 어디서 나온 말씀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미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살면서 죽음을 경험한, 그게 예수님의 말씀으로서,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이전부터 일찌감치 우리에게 제시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내가 꼭 살아야해. 행복해야해" 라는 게 아니라, "죽어도 괜찮아. 불행해져도 괜찮아. 무시를 당해도 괜찮아. 모독을 받아도 괜찮아" 라는 식으로 주어진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면서 아버지를 믿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인고 하니, "아파도 괜찮아. 버림을 받아도 괜찮아. 굶어도 괜찮아. 죽어도 괜찮아"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기꺼이 굶었고 고난을 받았다는 겁니다.

자, 우리 한 번 털어 볼까?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라고 하는데, 우리는 거기에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그게 지진과 여진이 되겠는데 말이죠. 그게 비단 포항과 경주만의 일이겠습니까? 그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우리에게 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런 취지로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는데, 자기를 추종한 자들에게 말이죠. 그러면 그들이 예수님을 떠났을까요? 계속해서 따랐을까요? 모두가 다 떠나고 말았는데, 그러니 예수님은 단 한 명도 전도를 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게 제대로 된 전도인데, 자기 힘으로 오려고 하는 자들을 다 밀어내는 것이 말이죠.

다시 말해서, "너희가 무엇을 알고 오는가?" 라는 것인데, 즉 "너희들이 나를 믿는다고? 웃기고 있네. 까불지 말고 집에 가서 기다려. 내가 찾아가기 이전까지는 나에게 오지마"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그것이 주님이 하시는 전도라는 말이죠.

그러니 구원을 받는 사람은 자기가 알아서 찾아온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 가셔서, 즉 이미 이 땅에서 죽으신 분이, 이 세상에 어떻다고 하는 그 내막을 전부 알아서, 그러한 주님의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다시 찾아간 자들만이 환난과 곤고와 핍박을 견딘다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무엇과도 같은고 하니, 아이와 같이 길을 가는데, 그만 아이가 먹던 핫도그를 땅에 떨어뜨렸다는 겁니다. 물론 장로님 집의 아이라면 버리라고 하겠지만, 그게 목사 집의 아이라고 하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는 말이죠. 다시 주워서 먹으라고 하는데, 혹시 묻은 것이 있으면 툭툭 털어 버리고 말이죠. 표현이 조금 심했나요? (ㅋㅋ)

그것이 바로 환난과 곤고와 핍박과 지진 !!

그렇게 주님께서는 자기가 찾아간 자들에게는, 이 세상에 묻어있는 것을 툭툭 털어 버리는데, 그것이 바로 환난과 곤고와 핍박과 지진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털려서 다 날아가 버리면 그것은 처음부터 가짜였고, 그렇게 털려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교회김장도 좀 했지만,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라고 나오면, 그런 자가 바로 주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털릴 때는 좀 어지러운데, 인생이란 것이 멀미도 나야한다는 말이죠. 인생이 고속도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눈길, 빗길, 산길, 웅덩이, 급정거, 급발진 등등, 온갖 것들이 다 들이닥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잠시만 조용해지면 자기 행복을 추구하기 마련인데, 무엇이 있고 없고, 그런 것을 떠나서 말이죠.

너무나 고요한 새순교회 !!

제가 한 달에 한 번씩 울산의 새순교회에 강의를 하려고 가는데, 그런데 가보면 너무나도 고요한데, 아무런 일이 없다는 겁니다. "저렇게 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 라고 걱정이 될 정도로 너무나 평화롭다는 것이죠. 문제성이 있는 분들이 다들 알아서 나가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말이죠(ㅋㅋ).

그런데 그렇게 고요해지면 자기 개인사를 쥐려고 하는데, 괜찮은 인생사로 여기고서 말이죠. 그러면 인생 자체가 그만 우상이 되고 마는데, 즉 "내가 이렇게 반듯하게 사니,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을 리가 없어" 라고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개인사를 자기 것으로 여기는 순간, 우리는 무엇이 말려드는고 하니, 사탄의 유혹의 표적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아들 안에서 죄 사함을 !!

지금부터 어려운 것을 하겠는데, 골로새서 1장 14절에서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죄 사함을 누구 안에서 얻는다는 겁니까? 아들 안에서 얻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아들은 이 세상을 한 번 살아보았고, 이 세상에 떠밀려서 죽어보았고, 그리고 다시 오신 분이 바로 아들이라는 겁니다. 성령 안에서 말이죠.

(골 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분이 이 세상에서 내린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하나밖에 없는데, 모든 것이 죄의 덩어리, 즉 지옥이란 겁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에게 가장 큰 복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게 바로 '죄 사함' 이라는 말이죠.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 이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느냐는 겁니다.

"로또에 당첨이 되겠습니까? 죄 사함을 받겠습니까?" 라고 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죄 사함이 낫는데, 왜냐하면 제 아무리 수십 수백 억을 가지고 있어도, 우리의 미래는 이미 끝났는데, 저주라는 말이죠. 그러니 죄 사함보다도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죄 사함을 받은 순간부터 이 세상에 더 머물지 않고 사라진다고 해도, 이미 해답을 건졌기 때문에, 그러면 건질 것은 다 건졌다는 말이죠.

오뎅탕을 끓여보셨나요?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냄비가 있는데, 여기에 오뎅탕을 끓였다는 겁니다. 다시마도 넣고, 무도 좀 큼직하게 썰어서 넣고 해서 말이죠.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요리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저 양반은 좀 해봤구나" 라는 느낌을 받지 싶은데 말이죠(ㅋㅋ).

꼬치에 오뎅을 끼워 넣어서, 그렇게 끓여서 맛있게 식구들이 모두들 먹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먹다가 보면 서로 부딪치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꼬치에서 빠져 나와서 국물에 빠지는 오뎅이 있기 마련인데, 그러면 국물에 숨어버린 그 오뎅을 누가 먼저 먹을지, 그 문제가 남는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까, 사탄은 진짜로 맛있는 그 숨겨진 오뎅을, 즉 죄 사함에 대해서, 그것을 들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그야말로 자기가 할 수 있는 극단적인 노력을 다 한다는 겁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죄 사함만큼은 꼭꼭 숨기려고 한다는 말이죠.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마태복음 8장에 보면, 귀신이 들린 청년이 예수님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나는 이제 예수님을 믿지 않을 겁니다" 라는 것과 같은 의미인데 말이죠.

(마 8: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
(마 8:29)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교회는, 개인사의 증거품 !!

그런데 그 고백이 그 청년만의 고백이겠습니까? 아니면 대한민국의 모든 청년들의 고백이겠습니까? 청년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고백인데, 지금의 한국교회를 보라는 겁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과연 관심이 있습니까? 없다는 말이죠. 목사부터 예수님이 아니라 교회에 관심이 있는데, 왜 그런고 하니까, 교회가 목사의 개인사인데, 개인사의 증거품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의 교인이 몇 명이 된다고 하면, 그것은 그 교회의 당회장 목사의 자랑거리가 된다는 겁니다. 당회장의 자기 역량이라는 말이죠. 즉 "우리교회의 교인이 5,000명이다" 라고 하면, 그게 목사 개인사의 영광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그 교회의 장로도 역시나 마찬가지인데, 자기가 지금까지 2억 정도를 투자를 했는데, 그렇게 해서 부흥이 되었다고 하면, 그 교회를 도저히 떠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개척을 할 때부터 새벽제단을 잘 섬겼기 때문인데, 그것도 대를 이어서 말이죠. 그러니 다른 교회에 가면, 그런 자기 개인사의 영광을 찾을 길이 없다는 겁니다.

일요일 아침에 여기 아파트를 보면, 자기 교회를 찾아간다고 차들이 다 빠져나가는데, 대부분이 나이가 많은데, 그러니 그 교회의 장로들이라는 겁니다. 여기 조용한 곳으로 와서 말년을 보내는데, 일요일이 되면 자기 교회를 다 찾아서 간다는 것이죠. 아무리 아까운 곳에 교회가 있어도 말이죠. 이것이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인데, 모두가 다 자기 개인사의 영광이라는 겁니다.

예수에게 올인하지 마세요 !!

이것이 바로 오뎅탕의 국물인데, 악마가 뭐라고 합니까? 예수에게 올인을 하는, 그런 미련한 인생은 살지 말라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 인생이 있는데, 왜 남에게 자기 인생을 다 바치느냐는 말이죠. 그런 이야기를 악마가 계속해서 우리에게 속삭인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인들은 모두들 요령꾼인데, "어떻게 제대로 뽑아먹을까?" 라고 하는 말이죠. 자기가 살아온 자기의 인생사, 거기에 관심이 있지 다른 것에는 없다는 겁니다. 즉 자기 영광뿐이라는 것이죠. 그러면서 죽는다고 하면 벌벌 떨기나 하고 말이죠. 그렇게 살아서는 전혀 해답을 알 수 없는데, 그런데 해답은 이미 제시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죄사함' 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결론은 간단한데, 우리가 이렇게 자기의 개인사에 관심이 있다고 하는 것, 그게 바로 죄가 된다는 겁니다. 오뎅이 없으면 오뎅국물은 없는데, 그 국물 속에 죄 사함이 잠겨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우리 인생사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니가 무시하고 니가 돌보지 않았던, 진짜로 맛있는 이 오뎅 덩어리, 즉 죄 사함을 주목하라" 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니가 알아서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죄 사함에 눈을 돌려라" 라는 것이죠. 자기가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개혁주의에서 하는 짓이고, 그것이 아니라 죄 사함에 주목해야 하는데, 그러면 그 죄 사함은 이미 완료가 되었습니까? 되지 않았습니까? 이미 완료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집에서는 오뎅을 건져먹으면 되지, 오뎅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말이죠. 이미 만들어진 국물에 담겨져 있던 그 죄 사함을 건져내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동안 죄 사함이 담겨있던, 가두고 있었던 오뎅국물은, 그것이 우리의 개인사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개인사 전체가 죄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의 개인사가, 가정사가 죄의 역사가 된다는 겁니다. 논리가 간단한데, 살아온 모든 것이 죄가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안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죄 사함을 받은 자들만이 그게 눈에 들어온다는 겁니다. 자기가 살아온 모든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이 말이죠. 이것은 우리가 의식으로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몸이 그렇게 망가진다는 겁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되풀이하기 위해서 !!

그러면 우리가 죄 사함의 오뎅을 건졌다고 한다면, 우리가 더 이상 살아갈 필요가 무엇이 있느냐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죠. 어제 오후에도 그런 설교를 했는데, 빌립보서 3장에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라고 나와있는데,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빌 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우리가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살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데,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개인적 인생이 의미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공생애를 되풀이하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주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자신의 공생애를 반복하신다는 말이죠.

결국 '기능'의 문제 !!

이제부터 조금 복잡한 것을 하겠는데, 조금만 더 긴장을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죄 사함이 이렇게 잠겨있고, 그렇다면 우리는 죄인으로서 개인적인 인생사나 가정사를 지키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게 결국 '기능'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이죠.

죄 사함이라는 것이 캄차카 반도에 있습니까? 태국에 있습니까? 그렇게 되면 존재의 문제가 되지만, 죄 사함은 그게 아닌데, 이게 일본이든 러시아든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그 어디서도 나올 수 있는데, 그러한 죄 사함의 기능이 나오는 장소를 두고 아까 골로새서 1장 14절에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그게 바로 '아들 안' 이라는 겁니다.

(골 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러니 이 아들 안이 되면, 그게 아프리카든 미국이든 상관이 없이 죄 사함이 되는데, 이게 바로 오뎅탕이고, 죄 사함은 그 안에 잠겨있는 오뎅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이 세상의 모든 인식이, 사고방식이 듣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아들 안에 들어가면 우리가 무엇을 느낍니까? 예수님의 키와 몸무게, 그런 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 아들 안이 죄 많은 이 세상에서는 성령을 통해서 나타나는데, 그래서 '기능' 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아들 안, 이게 곧 '예수 안' 인데, 여기서 '안' 이라는 것이 장소를 나타내는 전치사라고 할지라도, 그게 우리에게는 기능적으로 움직인다는 말이죠.

스마트 폰, 이게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예를 들어서, 스마트 폰이 지금 박물관에 있을 이유가 있습니까? 스마트 폰은 구경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화도 하고 카톡도 하고, 그렇게 사용하라고 있는데, 즉 기능적이라는 겁니다. 물론 백년이 지나면 박물관에 있을 수도 있지만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그냥 박물관에 있으면, "이게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스마트 폰을 사용하게 되면, 화면이 계속해서 바뀌면서 그야말로 엄청난 마술을 보여주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젊었을 때만해도 전화통화를 할 때 그냥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서 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는데, 그것이 꿈의 통화로 여겨졌다는 겁니다. 그게 불과 몇 십년 전의 일이라는 말이죠.

말은 부드러운데 얼굴은 인상을 쓰면서 통화를 하는지, 아니면 잠옷차림으로 하는지, 그런 것이 궁금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화상통화를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서 하면 그만큼 더 진심에 가까워진다는 말이죠. 물론 그것이 더 좋다고만 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렇게 기능이 발휘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과 사귄다고 했을 때, 자기 개인사를 빛나게 해달라고 하지 말고, 자기 존재를 어떻게 하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존재가 분해가 되어서 주님을 증거하는 기능으로서 발휘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 기능으로서 계속해서 발휘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존재인가? 기능인가?

그런데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기능으로 하게 되면, 그 기능은 무슨 존재를 과시하는 기능인고 하니, "나 잘났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기능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즉 "나는 예수를 잘 믿는다" 라고, 믿음이 좋은 '나' 라고 하는, 그렇게 자기 존재를 과시하게 된다는 말이죠.

당연히 소망도 자기가 하늘나라를 소망한다는 것이고, 헌금을 해도 자기가 하는 것이고, 물론 봉사를 해도 자기가 한다는 것이죠. 그렇게 모든 기능이, 자기 존재를 보여주는 기능으로 계속해서 작용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성령을 받지 않은 자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여기서 마태복음 10장 19절과 20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마 10:19)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마 10: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

여기 20절에 보면,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라고 하는데, 성령을 받으면 사람이 갑자기 어떻게 바뀌고 합니까? 그게 아닌데, 평소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라고 하는데, 이런 것이 조금 어려운데 말이죠.

그러니 '말하는 이'는 분명히 우리가 아닌데, 아니라고 했으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누가 동의를 합니까? 같이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동의를 하는데, 그러면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말하는 이가 따로 없다는 겁니다. 무슨 말을 해도 자기가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아서 이야기를 하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사도가 "내가 말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서 말씀하시는 분이 따로 있다" 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은 "놀고 있네" 라고 나올 것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분명히 자기가 말해놓고 자기가 말한 것이 아니라고 하니, 그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죠.

저게 미쳤나?

여기에서 응용문제에 들어가겠는데, 어떤 목사가 개척을 해서 20년 정도가 되었는데, 그래서 이제는 어느 정도로 교인들도 있고 해서 어느 정도 밥도 먹고 살고 노후대책도 된다는 겁니다. 그러자 개인사가 튀어나오는데, 즉 "내가 이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기도를 많이 했고, 열심히 바른 복음을 전했습니다" 라고 말이죠.

그러면 교인들은 무엇을 해야합니까? "저렇게 말하는 저 기능은 어느 존재에서 나왔지?" 라고, 그것을 파악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교인들도 역시나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뭐라고 합니까? "그래, 우리 목사님이 수고를 많이 했지. 은퇴를 하고 나면 100만원 정도는 통장에 따박따박 넣어드려야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지금 제가 누구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는데(ㅋㅋ), 아무튼 이렇게 복음을 전하다가 자기의 개인사를 챙기는 것으로 전환될 때, 아무리 성령을 받았다고 해도, 그것은 무엇입니까? 목사가 존재에서 나오는 기능을 발휘하게 되니, 서로 맞장구를 치면서 좋아하는데, 그것은 서로 속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교회에 진짜 성령을 받은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이 목사에게 무엇이라고 이야기를 해야하느냐는 것인데, 이게 바로 응용문제라는 겁니다. 여러분도 성령을 받았다면 한 번 답변을 해보세요. 그것은 매우 간단한데, "저게 미쳤나?"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ㅋㅋ).

예수님의 존재에서 나온 '기능' !!

기능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존재에서 나와야 하는데, 그게 성령을 받은 설교자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10년, 20년을 지나다가보니, 밑천이 모두 떨어져서 그런지 몰라도, 예수님의 존재에서 나오는 기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내가 복음을 전한다고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러니 나에게 무엇을 해주시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자기 존재에 초점을 맞추더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목사 개인사에서 나왔는데, 그러면 교인들이 가만히 있으면 됩니까? 안 된다는 말이죠. 지금 제가 말을 만들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것인데, 그게 요한일서 2장 17절에 나온다는 겁니다. 성령이 친히 가르친다는 말이죠.

(요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이럴 것 같으면 헤어져 !!

그렇다면 그 교회에 성령을 받은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고 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많이 하는 이야기인데, "이럴 것 같으면 헤어져!" 라고 한다는 겁니다(ㅋㅋ). 교인이 약 40명 정도가 되는데, 그 중에서 딱 한 명이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목사가 더 이상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자기 존재를 알아달라고 하는 식으로 나온다고 하면, 그래서 성령을 받은 교인이 "설교를 그만 해주세요"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가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투표로 합시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매우 중요한데, 왜 교인들이 그런 목사에 대해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퇴직금을 준비하고 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자기들이 성령이 주시는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교회에서 자기 자신의 개인사를 연장시켜왔다는 겁니다. 들키지 않고 말이죠.

그러니 "나는 복음을 전하는 교회에 20년을 다녔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개인사로 굳히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목사가 그런 이야기를 해도 수긍을 한다는 것은, 자기도 역시 목사처럼 개인사를 축적해왔다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세습이 마구 튀어나오고 하는데 말이죠.

목사 자신부터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수 천명이나 되는 교인들도 역시나 성령을 받지 않았고 말이죠. 그러니 목사나 교인들이나 모두가 마귀의 자식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그만 무당집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인간의 역사는 이렇게 허약하다는 겁니다.

사건이, 과거에 새로운 의미를 !!

그런데 어떤 한 순간에 성령이 오시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지난 역사는 왕차 다 뒤집어지고 만다는 것이죠. 왜 그런 말이 있는데, 만약 남편이 아내를 보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하면, 그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우리는 사랑도 없이 살아왔습니다" 라고, 그렇게 지금 주어진 사랑을 가지고 과거에 의미를 새로 부여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의 새로운 사건이 기존의 모든 존재를, 그 사건을 위해서 필요했던 존재로서, 즉 사건을 위한 새로운 역사로서 의미가 그렇게 새롭게 정립된다는 말이죠. 여기서 조금 더 깊이 나가볼까요?
어떤 부부가 40년을 살았는데, 그런데 그만 "이제 이혼하자"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이것은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어떤 할머니가 너무 지긋해서 한다는 말이 "저 놈의 영감탱이가 너무 미운데, 그래도 혼졸은 못하겠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저는 "혼졸이 뭐지?" 라고 하는데, 알고 보니 졸혼을 혼졸로 거꾸로 말했다는 겁니다(ㅋㅋ). 왜 요즘 드라마에 보면 그런 내용이 나오잖아요? 혹시 여기도 졸혼을 모르는 분이 있어요? 혼인을 졸업하는, 그러면 졸혼이 맞는 것 같은데 말이죠.

아무튼 어떤 부부가 40년만에 "이제 우리 이혼을 하자" 라고 나온다고 하면, 그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무엇이라는 겁니까? 40년 동안 이혼을 하기 위해서 살아왔다는 겁니다.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이 주어지면 의미가 그렇게 바뀌는데,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말이죠. 앞에 있던 것들은 다 사건을 위해서 준비되었던 것이란 말이죠.

그렇게 결정적 사건이, 그 앞에 있던 모든 개인사의 의미를 다시금 부여하게 되는데, 그러니 만약에 죄 사함을 얻게 된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은, 그러한 죄는 주님의 죄 사함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죄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동안 죄를 지으면서 살아왔다는 말이죠.

그러니 도저히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동안 자기가 했던 그 모든 호작질들, 그야말로 개판인 인생사, 굴곡으로 둘러쌓힌 많은 인생사, 그 모든 것들이 자기 잘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인생사인 줄로 알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전혀 아니더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으니 어떻게 됩니까? "아하,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기 위해서, 이런 저런 굴곡적인 인생을 이끌고 오셨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자기 안에 다른 존재가 있고, 즉 "내가 말하는 것이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말씀하신다" 라는 것인데, 이게 바로 새로운 기능이라는 겁니다.

이전에는 자기 잘남을 보여주는 기능이 나왔다고 하면, 우리가 일종의 스마트 폰이라고 하면 말이죠. "그러니 내가 잘났잖아. 나를 개무시하지마" 라고 하는, 그런 자기 방어 때문에 우리가 모든 행동을 했다고 하면, 그런데 이제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죄 사함이 주어진다면, "그래, 나는 죄인이 맞아. 하지만 나는 당당하고 감사해"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 나는 개판이야. 하지만 당당해 !!

그게 바로 성령이 찾아온 자들의 공통적인 모습인데, 이 땅에 사시다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이 찾아오셨기에 말이죠. 그런 사람들의 특징이 바로 "그래, 나는 개판이야. 하지만 당당해" 라고 나오는데, 왜냐하면 이미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신 세계는 어떤 세계입니까? 죄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로또복권에 당첨되는 것보다도 더욱 낮은 확률인데, 인간으로 태어나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나라라는 말이죠.

누가 그 중간에서 죄 사함을 해주지 않으면 도저히 갈 수 없는 나라인데, 그런데 그 나라에 우리가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국, 즉 극락은 무엇인고 하니, 나쁜 것보다도 착한 것이 조금이라도 더 많다고 하면, 그러면 갈 수 있는 나라인데, 그런 나라가 곧 천국이라고 교회마다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가는 곳이 전혀 다른데, 한 쪽은 일체 죄가 없는 곳으로, 그야말로 흠도 티도 없다는 겁니다. 반면에 인간들이 가려고 하는 천국은 마귀가 어설프게 만든 천국인데,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았다고 하면 갈 수 있고, 그런 인간들을 반겨주는 천국이라는 겁니다.

구라 영화, '신과 함께' !!

'신과 함께' 라는 영화가 곧 개봉한다고 하는데, 지옥의 7단계를 그래픽으로 처리해서 다 보여준다고 하는데 말이죠. 신과 함께 지옥으로 간다고 하는, 그게 무엇인고 하니, 죽지도 않았으면서 죽음 이후를 이야기하는, 그러니 완전히 구라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구라를 왜 봐야하는고 하니, 그게 한국교회에 얼마나 먹혔는지, 그리고 자기 자신의 개인사에 얼마나 먹혀들고 있는지를 한 번 확인해보자는 말이죠.

우리는 그런 지옥에 벌벌 떨었고, 그 반대가 되는 천국에 얼마나 환호성을 질렀느냐는 겁니다. 거기는 원칙이 하나밖에 없는데, 최선을 다해서 바르게 살면 가는 나라라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한 것을 따먹었기 때문에 나오는 악마적 기능이란 말이죠. 그렇게 악마가 준비해놓은 천국에 간다고 좋아들 하는데, 하지만 지옥이란 겁니다.

나는 믿는다 !!

지금까지는 무척 쉬웠다고 치고, 이제부터는 어렵게 나가겠는데 말이죠. 어제 오후시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나는 믿는다" 라고 했을 때, 그 '믿는다' 라는 기능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나' 라는 존재를 의식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는 믿는다" 라는 것이 죄가 되는데, 왜냐하면 '나' 라는 것을 자꾸만 들이미니까 말이죠. "믿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내가 믿습니다" 라고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어려운 것이 무엇인고 하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라고 했는데, 즉 우리 속에서 성령이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 존재를 그냥 놔두고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내가 믿고, 내가 말하고, 내가 전도하고, 내가 헌금한다" 라는, 우리는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창기가 아닌 자가 누구인가?

아나니야와 삽비라의 경우에는 헌금을 하고 죽었는데, 왜냐하면 자기 돈이라고 여기고 자기가 내다가 죽었다는 말이죠. 즉 "내 것에서 주님의 것으로 이동한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주님은 무엇을 받는 것이 됩니까? 그것은 죄를 받는 것이고 되고 마는데, 하지만 주님은 죄인에게서 나오는 것은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시편에 보면, 창기의 돈은 성전에 넣지 말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게 안 된다는 말이죠. 이 세상에 살면서 창기가 아닌 자가 누가 있습니까? 모두가 다 창기가 아닙니까? 우리는 모두가 다 몸을 팔고 있는데, 그 대가로서 돈을 얻고 말이죠.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도, 그것을 돈을 받고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서 짓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돈을 얻겠다는 것 자체가 죄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천국과 무관하니 말이죠. 천국은 돈의 세계가 아니라는 겁니다.

간단한 논리인데, 천국은 죄 사함이 없는 세계이고, 그리고 그것이 아들의 나라라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은 아무리 기능을 발휘해도 아들의 기능이 나오지 않고, 죄가 없는 행동이 나오지 않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어떤 일을 해서 구원을 받습니까?" 라는 것이 애초부터 성립이 되지 않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돈의 영광이 곧 교회의 영광 !!

그런데 교회라는 이름의 무당집에서는 이렇게 해야 장사가 되는데, 교회가 원하는 것은 돈밖에 없는데, 그러니 돈의 영광이 곧 교회의 영광이라는 겁니다. 물론 그게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포장이 되어있는데 말이죠. 그러면 가난한데,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전혀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오늘날 교회가 교인들에게 윽박지르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가난해서 십일조를 제대로 못한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라는 겁니다. 그러니 기존교회와 사탄의 이야기는 전혀 다르지 않는데, 즉 "돈과 인기와 이 세상의 부귀영화,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김 장로, 교회과세를 막으세요 !!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악마와 마주쳤을 때, 사탄이 예수님에게 요구한 것을 오늘날 목사가 교인들에게 요구하고 있다는 겁니다. 교회에 올 때는 그냥 오지 말고 돈을 가지고 오라는 것인데, 그리고 유명인사가 되어서 온다면 당장에 장로를 시켜주겠다는 말이죠. 그래서 장로들 가운데 의사나 판사, 그리고 정치인들이 많다는 겁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교회의 장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죠.

목사가 새벽마다 기도하는 것이 그것인데, 그러면 그 기도에 누가 응답을 해줍니까? 당연히 마귀인데, 왜냐하면 자기편이니 말이죠. 그러니 교회의 목사나 오는 교인들이나 똑같다는 겁니다. 그리고 목사는 자기 개인사를 교회의 역사로 편집해놓는다는 말이죠. 심지어 그것을 책으로 내기까지 하는데, 우리 친척 가운데도 그런 인간이 있는데, 그야말로 가관이라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능을 발휘하게 하시는데, 그런데 무엇이 가로막혀 있습니까? '나' 라는 존재가 가로막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기능을 발휘하게 되면, 그 기능이 순수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는 반드시 "나는 아니오" 라는 것이 동반해서 나오게 된다는 말이죠. "이것은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는, 그런 자기 부정과 더불어서 예수님의 기능이 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죠? 이것을 확인하려면 역시 퀴즈가 제일 좋은데 말이죠. 다음과 같은 경우를 한 번 설정을 해보겠습니다. "목사도 성도고 교인들도 성도다" 라는 것인데, 물론 있을 수가 없지만 그렇다고 치자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인데 말이죠.

심방은 '깜놀' !!

이제 그 목사가 교인들에게 심방을 가는데, 여기서 조건은 모두가 같은 성도라는 겁니다. 그런데 너무 아침에 일찍 가서 그런지 몰라도, 설거지도 되어있지 않고 이부자리도 미처 정돈이 되어있지 않다는 겁니다. 목사가 "집사님, 심방을 왔습니다" 라고 하니, "아직 집안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으니, 30분 뒤에 와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제대로 심방이 되었을까요? 되지 않았을까요?

과연 어느 쪽입니까? 심방이 된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지금 조건이 둘 다 성도라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성도라고 하면, 설거지를 하는 기능, 이부자리를 개는 기능이 어디서 나온다는 겁니까? 성도는 예수님에 의해서 정복된 자라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가 알아서 설거지를 하고 이부자리를 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설거지를 하지 않은 것도, 아부자리를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한 것도 역시 예수님에 의해서 된 것인데, 참 편리하죠? 일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예수님께 맡기면 되니, 얼마든지 농땡이를 쳐도 된다는 겁니다(ㅋㅋ).

교인도 성도이고 목사도 성도인데, 그렇다면 목사가 보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 집사님의 집을 주님이 어떤 식으로 정복을 하고 있었는지, 성도가 사는 마당을 예수님이 사시는 마당으로, 그게 어떤 식으로 접수가 되었는지, 그것이 궁금하고 확인하고 싶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설거지를 하고 이불을 개는 것을 따질 문제가 아니고, 그 자체가 그냥 눈에 확 들어온다는 겁니다(ㅋㅋ). 설거지 거리가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쌓여있어도, 그것으로 인해서 집사님이 얼마나 주님께 감사하고 있는지, 그것이 보고 싶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집사님이 성도가 아니라고 하면, 즉 있는 자기 존재의 기능을 한다고 하면, 그러면 목사가 심방을 오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목사님, 제가 아침부터 너무 바빠서 말이죠. 평소에는 전혀 이렇지가 않은데, 아이쿠 부끄러버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그렇다면 부끄러워하는 기능이 어디서 나왔느냐는 말이죠. 그것은 자기 개인사가 그 가정에 담겨있는 것인데, 그러니 목사가 심방을 와서, 자기 잘남을, 그런 자기를 과시하려고 하다가, 그것이 들통난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그게 제대로 된 심방이라고 할 수도 있지 싶은데 말이죠.

주님께서는 그 집사가 얼마나 훌륭한지, 전혀 그것을 보는 것이 아니란 말이죠. 천국은 훌륭한 사람은 갈 수 없는데, 죄인만이 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심방은 무엇인고 하니, 그야말로 '깜놀'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머, 깜짝이야!" 라고 하면서 서로 서로 놀라게 된다는 말이죠.

찜찜한 목사님들 !!

제가 복음을 모르는 목사님을 만나면 마음이 얼마나 찜찜한지 모르는데,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지도 않으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처럼 하는 모습이 보인다는 겁니다. 그게 얼마나 꼴보기 싫은지 모르는데, 십자가 마을의 목사님은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말아주시면 좋겠는데 말이죠(ㅋㅋ).

그런 목사들이 굉장히 많은데, 정작 자기는 복음도 전하지 않으면서 십자가 마을 사이트에 와서 강의를 듣고 있는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들은 "니만 목사가? 나도 목사다" 라는 것으로 버티고 있는데 말이죠. 하지만 진짜로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그런 견줌과 대결이 전혀 의미가 없고,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성령을 받지 않은 목사는 자기 존재가 중요하고, 자기의 개인적인 신앙사, 그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개인사가 중요하다가보니, 다른 사람들의 자기에 대한 평가가 그렇게 신경이 쓰인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런 자들에게, 이미 사탄에게 정복이 된 자들에게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느냐는 겁니다. 계속해서 사탄의 기능만 나오는데 말이죠.

그런 목사님들에게 연락이 오면, 저는 수련회에 참석을 하라고 하는데, 혼자서 강의를 듣는 것보다도 직접 와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들어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서로가 서로에 대한 심방이 되는데, 목사도 집사에 의해서 심방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죠. 즉 "당신이 성령을 받았는지 한 번 보자" 라는 겁니다.

목사님, 여기까지만 !!

그런데 성령을 받지 않게 되면, 거리에 나가서 전도를 할 생각은 하지 않고 토굴을 파서 그 속으로 들어가기 바쁜데, 마치 두더지처럼 말이죠. 들키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데, 그래서 "목사님, 여기까지는 오셨지만 그 다음은 안 됩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관리하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복음을 아는 형제라고 해놓고, '쑤욱' 들어가니 가로막는데, 왜 가로막습니까? 여기는 자기 관할이라는 것인데, 그러니 다른 사람은 안 된다는 말이죠. 관할이 무엇입니까? 존재가 성림이 되어서, 그 존재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을 관할이라고 하는데, 전문용어로는 '나와바리' 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래서 저는 우리교회에서 심방을 가지 않는데, '쑤욱' 들어가면 서로가 미안하다는 겁니다. 맨 얼굴에 잠옷차림으로 있는데, 들어가면 곤란하지 않느냐는 말이죠. 떠한 그런 장면을 보았더라도 입을 다물고 있으면 되는데, 설교시간에 예화로 들게 되면 그만 전세계로 중계가 된다는 겁니다(ㅋㅋ). 물론 저는 우리집에 '쑤욱' 들어오라고 하는데도, 그런데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데, 그냥 정문에 사과상자를 하나 놓고 도망치기에 바쁘다는 겁니다.

물론 이론상으로는 우리가 잘 알지만, 실제로 생활에서 마주치게 되면, 이게 성도인지 아닌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까, 오늘강의 제목은 '개인사' 인데, 전부가 다 자기 개인사를 지키는 세퍼트와도 같다는 말이죠. "내 인생은 내가 지킨다. 남들에게 공개할 수 없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멍멍 짓어대면서 말이죠.

그렇게 기어이 자기 비밀스러움을 사수하려고 하는데, 그러니 제 아무리 성령을 받았다고 하고, 백날 성경공부를 해도, 마치 박물관에 놓여있는 스마트 폰처럼 기능이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들 양반행세를 하고 있는데, '쑤욱' 들어감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고용한 인생사에, 그만 상처가 !!

그러면 성령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상처를 내는데, 그러면 공개를 하고 싶지 않아도 공개를 하게 된다는 겁니다. "목사님, 갑자기 우리 아들이 아픕니다. 기도해주세요" 라고 할 때, 그렇게 되면 본의 아니게 자기 개인사를, 그야말로 깔끔하고 남들에게 자랑거리가 되는 개인사에 그만 흠집이 생기고 말았다는 겁니다.

이게 마치 구약의 사사기와도 같은데, 사시기에 보면, 적들이 쳐들어오면 처음에는 자기들의 노력으로 다 막아내는데, 그런데 하다가 하다가 안 되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는다는 겁니다. '바락' 이라는 이스라엘의 총사령관이 야빈 왕이 쳐들어오니까 뭐라고 합니까? 아줌마인 드보라를 붙들고, "저는 못합니다. 제발 좀 살려주세요" 라고 했다는 말이죠.

주님께서 고용한 성도의 인생사에 흠집을 내게 되면, 물론 처음에는 모두들 쉬쉬하는데,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에 그것이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 힘으로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않으면, 결국은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는 말이죠.

숨기고 싶은 상처, 그러나 !!

그러면 그 상처가 어떻게 됩니까? 주일오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상처가 큰 만큼 주님의 사랑이 더 크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게 죄 사함인데, 오늘 강의제목을 죄 사함으로 해야되겠는데 말이죠. 그런 주님의 사랑의 고마움을, 죄 사함의 고마움을 깨닫게 되는데, "아하, 네가 지키지 말아야할 것을 지켰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죠.

개인사는 자기 명예와 관련이 있는데, 이것을 사탄이 좋아하는 것이란 말이죠. 정작 자기 안에 오뎅이 들어있는데, 그게 담겨서 빠져있는데, 그런데 그것이 싫다는 겁니다.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잘났다" 라는 것이 좋은데, 우리는 평소에 대인관계에 있어서 그 말을 하지 못해서 환장한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식이 승진이라도 하면 입이 근질근질하는데, 그리고 땅값이라도 오르면 "그냥 던져놓았는데 10배 올랐어" 라고 하면서 외쳐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개인사가 잘 될 때는 나발을 불고, 반면에 뭔가 남들에게 부끄러운 일라고 여겨지면 꼬깃꼬깃 감추어서 눌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바뀌어야 하는데, 반대로 가야한다는 말이죠. 자기는 그야말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자식이 아무리 승진을 해도, 땅값이 아무리 많이 올라도, 손자가 전교 1등을 해도, 그게 모두가 죄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여, 이런 시험을 왜 주십니까?" 라고 나와야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았을 때는, 그때는 그 상처를 과감하게 드러내야 한다는 겁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이죠.

그것만 죄를 지은 것이 아닌데, 어떤 사람이 졸혼을 했다고 하면, 지금까지 40년 부부생활을 한 것이 졸혼을 위해서 준비된 것처럼, 자기가 죄인으로 드러났다고 하면, 자기가 한 평생 살아오면서 눌리고 있던 것이 드디어 폭발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만이 죄가 아니라, 자기가 살아온 한 평생이, 즉 "너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었어" 라는 것이 공개되는 순간이라는 말이죠.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

그래서 시편 51편에 보면 다윗이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라고 하는데, 그것이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다윗에게 왔다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이 바세바와 간음을 한 것이 언약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언약의 구조 안에 포함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다윗이 바세바의 남편인 우리야 장군을 죽인 것도,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언약이었다는 겁니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그 언약의 완성이 지금 우리 안에 있는데, 그러면 우리는 무엇입니까? 항상 간음할 수 있는, 살인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데, 왜냐하면 자기 의를, 즉 자기만의 의로움을 포기하기 못하기에 말이죠. 사탄에게 속아서, "이 세상이 어떻게 되던지 간에 나만 잘나면 된다" 라고 외치면서 살아가는데, 평생을 살아가는 힘이 그 외침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 외침으로 인해서, 그 어떤 역경도 헤치고 나온 것이 우리 각 개인의 개인사인데,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지 모르는데, 자기의 잘남을 위해서 말이죠. 그런데 주님의 성령이 찾아오셔서 그만 십자가를 꽂아버리니, 그러면 한 순간에 어떻게 됩니까?

이게 잠수함이라고 하면, 지금 아르헨티나의 잠수함이 그만 실종이 된지 일주일이 되었다고 하는데, 참으로 위험하다는 겁니다. 잠수함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폐쇄되었다는 것인데, 아무도 들어오면 안 된다는 말이죠. 즉 자기 인생은 자기가 관리하겠다는 것인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쑤욱' 들어오고 말았다는 겁니다. 죄라는 상처를 통해서 말이죠.

아프다 !!

그러면 우리는 우사스럽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내가 아프다" 라는 겁니다. 관절이 아픈데, 그러면 자기는 늙었다는 것이고 무능한 노인이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게 얼마나 우사스러운지 모른다는 겁니다. 자기는 잘 나가던 사람인데, 그런데 왜 이렇게 몸이 아프냐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어디 관절만 그렇겠습니까? 이도 그렇고, 눈도 그렇고, 귀도 그렇고, 모든 것이 다 아프다는 겁니다.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제는 아무리 화장을 해도 별로 차이가 없고 말이죠. 이런 모든 것이 다 우사스러운 일이라는 것이죠.

사건은, '얼음 땡' !!

그래서 노인네들은 사진을 찍지 말라고 하는데, 그냥 있을 때는 잘 몰라도, 사진으로 찍어놓으면 순간적으로 귀신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사진을 보고 자기가 놀란다는 말이죠(ㅋㅋ). 그만 스톱이 되어있다는 것인데, 그러니 이제는 동적에서 정적으로 바뀌게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사건은 모든 것을 스톱시키는데, 그 순간은 그만 얼음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러니 지나온 모든 것은 이 사건을 위해서, 즉 "처음부터 우리는 우사스러운 존재였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게 아닌 척을 하면서 평생을 살아왔다는 말이죠. 그러니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나는 죽어 마땅하다" 라는 것을 드러낼 때, 그게 바로 죄 사함의 사건을 위해서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온 것이 된다는 겁니다.

내가 아니오 !!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아니오" 라는 공식이 성립하게 되는데, 바로 그 "내가 아니오" 라는 것 안에 이미 예수님의 죄를 용서해주셨다고 하는 것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즉 이미 구원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들어있는 잠수함이 되는데, 그러면 이제 실종이 되던 말던 괜찮은데, 전혀 위험하지 않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골로새서 14절에 나오는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라는 말씀이라는 겁니다.

(골 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러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이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전 세계를 해외여행을 하면서 돌아다니라는 말이 아니고, 그냥 자기가 살던 한 곳에 평생을 산다고 할지라도, 그게 그곳에 머무는 인생이 아니라는 겁니다. 한 곳에서, 한 집에서 계속해서 평소와 같이 살더라도 말이죠.

이제는 마치 기름칠이 된 인생처럼, 이 세상에 붙지 않고 떠서, 주님이 언제 데리고 간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대해서 아쉬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게 된다는 겁니다. 즉 "주님, 이제는 죄를 짓는 것도 지겹습니다. 그만 데려가 주세요" 라고 말이죠. 그렇게 이 세상에는 미련을 두지 않고 떠서 살아가는, 이것이 바로 성령을 받은,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이 살아가는 나그네 인생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죽지도 않았으면서 아는 척을 했던 우리의 모습들, 하지만 정말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분이 오셔서 찾아오심으로서 우리는 죄인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한 곳에 살던, 그 어디를 가든지 간에 떠돌이 인생으로서, 이미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항상 십자가를 증거하면서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11,30 오후 11시에 마침.
아무리 깊은 상처라도, 감사하게 하옵소서 !!
 첨부파일 : 17대구강의('전도서'속의그리스도)23-죄사함.hwp (59.0K), Dow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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