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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5 02:30:10 조회 : 318         
[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24 - 들러리 이름 : 구득영(IP:203.223.97.162)
[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24 - 들러리

07,12,04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죽음의 장(場) !!

오늘은 교재 68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어떤 힘이 작용하는 영역 속에 놓여있는데, 물론 자기가 느끼기에는 혼자 있는 것 같지만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어떤 영역 속에, 그것을 장(場), 혹은 필드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러니 어떤 세력이 있다는 것이죠. 그것을 성경에서는 '죽음의 세력' 이라고 하는데, 즉 '죽음의 장' 이라는 것이죠. 그 영역에 휩싸여서 인간은 죽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을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데, 인간들은 그런 죽음의 장은 생각하지 않고, 인간들과 인간들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만들어진 힘만을 가지고, 그것을 그들은 '사회', 혹은 '사회의 힘'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국가의 힘, 군대의 힘, 학교의 힘, 은행의 힘, 회사의 힘, 가족의 힘, 그런 것들이 여기에 포함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떤 가족이든 어떤 지장이든 어떤 모임이든 간에, 그것보다 포괄적으로 먼저 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죽음의 장' 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젊었을 때의 활기차고 건강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죽음의 장으로부터 침투를 당하게 된다는 말이죠. 즉 공격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늙어가고 있는데, 결국은 죽는다는 말이죠.

흙으로 돌아가라 !!

그렇다면 이 죽음의 장을 성경에서는 어떻게 표현을 하는고 하니, "흙으로 돌아가라" 라고 하는 명령에 준해서 이 죽음의 세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에 와서 성경말씀을 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남에게 어떤 힘을 발휘했는지, 그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어떤 영역에서 태어났는가?" 라는 것을 더불어서 이해를 해주어야, 비로소 성경말씀을 제대로 깨달은 것이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죽음의 필드에서 어떻게 되셨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오셔도 마찬가지인데, 예수님의 마지막도 역시나 죽음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은 숨이 멈추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은 저주를 받은 죽음이란 말이죠.

그것이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나오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서 저주를 받았다" 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의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닌 저주를 받은 죽음이란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지 않고 우리의 상식적인 수준에서 생각하면 어떻게 됩니까?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우리가 돌아가신 할머니나 할아버지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됩니까? 늙어서 죽는다고 여기는데, 그렇지요? 그런데 똑같은 이 세상에 왔다가 죽으신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저주를 받아서 죽었는데, 죄 값으로 말이죠. 그러면 과연 어느 것이 맞느냐는 것이죠.

우리 인간이 하나님에게 저주를 받아서 죄 값으로 죽는 것이 맞는지, 그것이 아니라면 늙어서, 혹은 쇠퇴해서 생물학적으로 죽는 것이 맞는지, 과연 어느 쪽이냐는 겁니다. 학교에서는 두 번째를 가르치는데, 즉 사람은 늙어서 죽는다는 것이죠. 그것이 과학을 하는 사람들의 입장이기도 하고 말이죠.

우리 인간은 동물이나 식물처럼 에너지가 다해서, 이 세상은 에너지인데 말이죠. 그렇게 에너지가 흩어지면서, 에너지의 혼란도가 증가해서 죽는다는 겁니다. 엔트로피가 말이죠. 즉 에너지가 해체되는 것은 죽음이라고 하고, 응집되는 것을 생명이라고 하는데, 과학계에서는 그렇게 설명한다는 말이죠.

'자연스러움'을 분석하는 과학 !!

과학의 입장에서는 "세포가 모인 것이 생명이고, 세포가 흩어진 것은 죽음이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들에게 "왜 흩어집니까?" 라고 물으면, 그들의 대답은 "그것은 우리도 몰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그들은 '모른다' 라고 하지를 않고, '자연스럽다' 라고 하는데, 그 '자연스러움'을 분석하는 것이 과학의 임무라는 말이죠.

하지만 아무리 분석해도 어떻습니까? 그 자연스러움 속에 더욱 더 작은 자연스러움이 있고, 그것을 분석하면 또 더 작은 자연스러움이 나온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 자연스러움을 극단까지 분석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어떻게 됩니까? 그것을 전자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또 더욱 더 작은 자연스러움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죽음의 장, 그리고 이기주의 !!

그러니 해답이 없는데, 그것은 바로 이 죽음의 장을 곁들여서 설명을 하지 않으니, 여기에서 인간은 어떤 사고방식으로 계속해서 살아가는고 하니, 그게 바로 '이기주의적 사고방식' 이라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러니 죽음의 장에서 우리 인간이 견디는 방법은 '이기주의' 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이기주의는 어디서 나옵니까? 먼저 이 사회라는 것이 어떻게 해서 모여지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죽음의 힘이 모아줄 때, 그러면 사회가 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사회에서 추방이 되면 죽음의 힘을 강렬히 느끼기 때문에 말이죠. 그렇게 해서 사회 안에 들어있는 것을 '살아남은 자'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와 반대로 추방된 것은 '도태된 자' 라고, 즉 구조조정을 당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자식이 5명 있는데, 막내가 제일 말썽을 피운다고 하면 아버지가 뭐라고 합니까? 다른 자식들은 공부도 잘 하고 말을 잘 듣는데, 그런데 이 막내는 하루가 멀다하고 사고를 치는데, 그래서 아버지가 경찰서에 아예 출근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결국 아버지가 "니 이름을 호적에서 파내겠다" 라고 하는데, 그것은 가족이라는 공동체에서 '나가라' 라는 것인데, 즉 버림을 받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렇게 버림을 받은 자의 입장에서 볼 때, 살아남은 자는 무엇인고 하니, 사회의 힘에 그냥 머물러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들끼리의 단체적인 이기주의를 새로 형성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이 산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죽음에 쫓겨서 인간과 인간들끼리 협력을 하고, 또한 소통을 한다는 겁니다.

행복과 불행 !!

그렇게 협력과 소통이 되면, 그것을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이것은 생물학적이 아니라 사회학적으로 '살았다' 라고, 혹은 '살아남았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살아남았다' 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이런 살아남은 자의 느낌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행복' 이라는 것인데, 그리고 여기에 가담을 하지 못한 것을 두고 '불행'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 불행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육체적 불행과 사회적 불행이 있다는 겁니다. 오늘은 할 것이 많아서 진도를 좀 빼겠는데 말이죠. 육체적 불행이라는 것은 우리가 다 알다시피 몸이 아픈 것인데, 그것이 육체적 불행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사회적 불행은 무엇인고 하니, 방금 설명을 했는데, 자기가 있던 자리에서 추방이 되는 것이란 말이죠.

사회에 대한 분노 !!

그렇다고 하면, 사람은 이기주의적 정신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집단적 이기주의에 의해서 쫓겨난 사람은 여기서 그 특징이 나타나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바로 '분노' 라는 겁니다. 직장에 같이 있을 때는 친구와 같은데, 그런데 구조조정을 당해서 쫓겨나게 되면 불행을 느끼는데, 즉 마음의 고통을 느낀다는 말이죠.

하지만 마음의 고통을 느낀다고 해서 무조건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아닌데, 그러면 언제 분노가 일어나는고 하니까, 마음의 고통을 느끼는데, 그런데 살아남은 자가 자기의 고통을 이해해주지 못할 때, 그때 여기서 분노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이것을 바꿔서 말하면, 추방된 자의 불행이 곧 살아남은 자의 축제가 된다는 말이죠.

인간은 분노의 힘으로 살아간다 !!

그럴 때 추방된 자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니 죽고 내 죽자" 라고 하는데, 그래서 자기가 다니던 회사에 불을 지르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이기주의이고, 그런 이기주의의 밑바닥에 흐르는 것이 바로 분노인데, 그러니 "인간은 분노의 힘으로 살아간다" 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이것이 참 중요한데, 우리 인간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분노의 힘이라는 말이죠. 자기의 아픔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자기의 불행을 알아주지 않는, 그러면서 자기들끼리는 키득키득거리는, 그런 살아남은 자들의 '유들함(?)' 이라고나 할까요? 그렇게 자기에게는 불행을 유발시키면서 살아남은 자들의 느긋함, 그런 태도에 대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카프카의 '변신' !!

불행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는데, 육체적 불행과 사회적 불행이 있다는 말이죠. 육체적 불행에 대해서는 카프카의 '변신' 이라는 소설에 보면, 그게 무슨 내용인고 하니, 그렇게 돈을 잘 벌어주던 가장이, 물론 소설에서는 아들이지만 여기에서는 가장으로 해보겠는데, 아무튼 그가 그만 하루아침에 벌레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러자 그 다음부터는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가족들이 모여서 의논을 하는데, 무엇을 의논합니까? 벌레가 된 아버지를 잘 돌보아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빨리 치워버릴지를 의논한다는 말이죠. 물론 처음에는 안타까워서 걱정을 해주고 하지만 말이죠.

카프카가 그런 소설을 썼을 때가 자본주의가 아주 맹위를 떨쳤을 때인데, 이 자본주의에 의해서 세계 1차대전과 2차대전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누가 돈을 더 먹느냐는 것이죠. 그럴 때 소시민이 부르주아들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사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말이죠. 그게 1916년도 작품인데, 그때나 지금 2017년도나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돈이 회전이 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사회를 벗어나게 되면, 돈은 떨어지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 식구들은 어떻게 됩니까? 큰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라고 하면, 작은 사회는 자기 가족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가정의 행복을 보장해주어야 하는데, 그 보장하는 방법이 이기주의라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돈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협력과 소통의 집단에서 그만 추방이 되고 나니까, 직장에서 추방이 되는 동시에 그 가장은 혈육으로 된 가족에서도 추방이 될 입장에 놓이고 만다는 겁니다. 물론 처음에는 돌봐주는데, 그런데 그 아버지 때문에 딸의 인생이 망가지게 되니, 딸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버지가 저렇게 되어있으니, 누가 그런 딸을 데리고 가겠느냐는 겁니다.

아까 이기주의라고 했지요? 그래서 "아버지는 아버지의 행복을 추구하세요. 그런데 왜 나의 행복에 흠집을 내십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지금 가정을 완전히 우울하게 만드는 장본인이 아버지인데, 물론 가족들은 아버지가 과거에 열심히 돈을 벌어다준 것은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아무튼 지금 문제는 아버지가 아프다는 것이고, 그런데 아버지가 아프면, 그렇게 아픈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친구들을 만나고 하면서 행복해야할 시간에 아픈 아버지를 돌봐야 하니까, 그러면 그만 자기 행복을 빼앗기게 되고, 그러면 자기는 불행하다는 말이죠.

죽음의 힘 !!

그렇다면 행복은 무엇이고, 불행은 무엇입니까? 오늘 강의제목이 '죽음의 힘' 인데, 달리 말하면 "행복이란 무엇인가?" 라는 겁니다. 행복해지고 싶어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또한 행복해야 하는데, 그런데 그 행복을 누가 결정하고 판단하느냐는 말이죠. 불교에선 행복과 불행을 마음에 달렸다고 하는데, 즉 "욕심을 부리면, 마음을 높이면 불행해지고, 마음을 낮추면 행복해진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도 그것과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할지 모르겠는데, 하지만 성경은 그 모든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관한 것이기 때문에, 전혀 그러한 의미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불교의 그런 인식에 동감을 하면서 성경말씀을 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불교와 죽음, 그리고 정주(定住) !!

강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제가 처음에 사람의 모습을 그렸는데, 그런데 그가 어떻게 혼자 있다고 했습니까? 아니면 어떤 영역 속에 있다고 했습니까? 영역 안에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죽음의 힘이 압박을 가하게 되면, 인간은 자기 숨통이 튀면 행복이고, 불안 불안하게 위기감을 느끼게 되면 불행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죽음의 힘이 아예 없다고 하면, 행복인지 불행인지, 그것조차도 나올 리가 없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불교에서는 자기가 자기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래서 '마음 낮추기'를 한다는 겁니다. 왜 바람에 날리는 알루미늄캔을 발로 눌려서 찌그러트리면 되면 괜찮은데, 그렇지요? 그렇게 고정시키는 것을 '정주(定住)' 라고 하는데, 즉 한 자리에 눌러앉는다는 말이죠.

불교는 어디에 정주하는고 하니, 인간이 죽으면 기(氣)가 되어서 다시 흩어진다는 것인데, 그게 동양철학이기도 하고 말이죠. 서양의 과학으로 말하면 에너지로 환원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불교는 무엇인고 하니, 죽음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말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살아있으면서도 죽음에 쫓기는 중생들을 위해서, 죽음의 공포를 이기기 위해서, 아직까지 죽지 않았을 때 미리 그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것은 어리석다는 말이죠. 그리고 죽었다면, 이미 죽었으니 죽음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즉 이래도 걱정할 필요가 없고, 저래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에 대한 불교의 마음가짐이란 말이죠.

어떻게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사실 이것은 에피쿠로스 학파에게서 나왔던 이론이라는 말이죠.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오면서 욕심이 유발되고, 그러면 현재 상황과 욕심 사이에 격차가 생기면서, 거기에 마음이 시달리게 되면, 그것을 불행이라고 보았다는 겁니다.

목사님, 참 은혜롭습니다 !!

그런데 제가 이게 불교라는 것을 앞에 집어넣지 않았다고 하면, 아마 "목사님, 참 은혜롭습니다" 라고 했을지 모르겠는데, 왜 그런고 하니까, 그게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것을 불교가 대신해서 이야기해주는데, 그러니 아무리 교회에서 성경말씀을 전해주어도 인간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상식선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도 전혀 아닌데도 은혜롭다고 나온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자기 몸이 아프다고 하면, 즉 관절염에 결렸다는 겁니다. 그러면 고통스러운데, 그래서 그것을 "나의 육체가 고통스럽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게 첫 번째이고, 그리고 두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 "이 고통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라는 것인데, 이것 중에서 어느 것이 맞습니까?

둘 다 틀렸는데, 그런데 여기서 두 번째가 맞다고 하는 것이 놀랍게도 불교적이란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불교는 모든 것이 자기 마음먹기 나름인데, 그런데 기존 교회에서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라고 하는데, 목사가 자기 믿음이 좋다고 자랑질을 할 때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죠.

번개탄만 있으면 OK !!

왜 둘 다 틀렸는고 하니, 아까 불교는 '정주' 라고 했는데, 이 정주는 어디 한 자리에 머무는 것인데, "이게 내 자리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면 불교는 어디에 머무는고 하니, 모든 것이 기로 흩어지기 때문에, 그게 바로 '무(無)의 지평' 이라는 겁니다. 없음의 지평, 즉 없음의 판판함인데, 거기에 정주를 한다는 겁니다. "그래, 이래 아파도 죽으면 다 흩어진다" 라고 말이죠.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그래서 불교에서의 해결책은 간단한데, 불경도 필요가 없고 성경도 필요가 없는데, 번개탄만 있으면 된다는 겁니다. 아프면 죽으면 되는데, 왜냐하면 어차피 인간은 죽으니 사나 마지막은 없음으로 돌아가니 말이죠. 번개탄 피우기, 내지는 아파트 추락이면 된다는 겁니다.

내가 고통스러운가? 육체가 고통스러운가?

그런데 한 번 생각해봅시다. 자기가 고통스러운 겁니까? 육체가 고통스러운 겁니까? 육체가 고통스러운데, 그런데 우리는 그 앞에 '나' 라는 것을 붙여서 "나의 육체가 고통스럽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냥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라고 하면 안 되고, 반드시 '나'를 경유해서, 즉 "하나님께서 '나'를 호출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육체를 허락하셨다"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조금 어렵지요? 우리는 평소에 아프지 않을 때는 '나' 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데, 그런데 아플 때는 "내가 아프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언급하면서도 결국은 '나' 중심, 즉 이기주의라는 말이죠. 모든 것이 자기 육체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죽음은, 율법을 가지고 육체를 공격해 !!

이렇게 자기 육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이게 바로 죽음의 힘이 겨냥하는 표적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모든 것은 육체를 향해서 공격하는 식으로 죽음이 오게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죽음이 올 때 어떻게 오는고 하니,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율법을 가지고 육체를 공격하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그래서 율법을 벗어나게 되면 사망의 쏘는 것이 없어지게 되는데, 즉 '나' 라는 것이 없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동안 그렇게 율법에 시달리던 '나'가 없어진다는 말이죠. 즉 "이 조직에서 구조조정을 당했다고 하는 '나', '나 죽고 너희 죽고 다 죽자' 라고 했던 그 '나'가 없어지고, 또한 '너희'도 없어진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불행과 행복도 없어지게 되는데, 왜냐하면 불행과 행복은 비교하는 것에서 나오기 때문에 말이죠. "나는 아픈데 왜 너희들은 멀쩡한가?" 라는 것인데, 그래서 멀쩡한 사람이 아픈 사람을 위로한답시고 "집사님, 참으세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라고 하면 약이 더 오른다는 겁니다(ㅋㅋ). 그런 식으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께서 왜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아프게 하고 또한 늙게 하시는고 하니, 육체로 인해서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이 나오고 말았는데, 그게 바로 '나' 라는 겁니다. 성경에는 '나' 라는 것은 없는데, '우리'가 있지 '나' 라는 것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성령 안에서의 교제 !!

그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나왔고,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나왔다는 말이죠. 그 순서가 고린도전서 10장에 나오는데(?), 즉 예수님의 위에는 아버지가 있고, 그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서 우리가 되고, 그 우리는 현재 예수님의 자기 백성과 함께 우리가 되는데, 그것이 바로 어제 이야기한 '성령 안에서의 교제' 라는 말이죠. 하나님 안에 예수님, 예수님 안에 하나님, 예수님 안에 우리, 우리 안에 하나님, 그게 '우리'가 된다는 겁니다.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러나 '나' 라는 것은 없는데, 우리 앞에 나타나는 '나' 라는 것은 누구에게만 해당이 되는고 하니까, 아버지 앞에서 '나' 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나'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에게 종속된, 이것을 영어로 'belong to' 라고 하는데, 즉 누구에게 속했다는 겁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인데, 그러니 예수님에게 속한 '우리',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예수 안 !!

이것을 성경에서는 '예수 안' 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이 '예수 안'의 특징은 확정된 과거가 되는데, 즉 '창세 전' 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에베소서 1장 4절에 나오는데, 그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이미 구원함을 얻었노라" 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자기 피를 주고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소유하려고 하면 안 되는데, 그렇게 되면 '나' 라는 것이 따로 설정되어 버린다는 말이죠.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지금부터 빨리 진도를 나가면서 풀이를 하는 식으로 하겠는데, 미처 이해가 다 되지 않더라도 반복을 해드릴 테니까 조금만 참으시기 바랍니다. 불교는 번개탄인데, 아프면 죽으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복음은 그것이 아니고 죽음보다 더한 고통인데, 혹은 무(無), 즉 없음보다 더 작음이라는 말이죠.

없음보다 더 작음 !!

그런데 이게 이해가 됩니까? 없음보다 더 작음이라는 겁니다. 없다는 것은 아예 없다는 것이고, 그런데 작다는 것은 무엇이 있어야 작다는 것이 성립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없음보다 더 작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있음부터 출발을 하는데, 그래서 자기 몸이 아프면, "에라이, 모르겠다. 죽자"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없음의 막 뒤에는 계속해서 당기는 것이 있는데, 고통을 끌어당기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무가 된다고 해도, 없어진다고 해도 무엇이 남는고 하니까, 고통은 계속해서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환장할 노릇인데, 번개탄이 백 개가 있어도 소용이 없는데, 아무리 자살을 해도 말이죠.

불교는 인간의 아이디어인데, 그래서 육체 때문에 번뇌가 오고 고통이 있다고 하면, "그냥 내가 다리에게 뛰어내려서 죽으면 그만이지"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들은 없음 뒤를 모른다는 겁니다. 철학자들도 그것을 모르는데, 철학자들은 창조를 무에서의 유로 보는데, 그리고 여기에 동조한 사람들이 신학자들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이나 믿음이 없기는 마찬가지인데, 물론 과학들도 그렇고 말이죠. 인간은 기껏해야 없음을 바닥으로 여기고, 그 다음에는 있음을 가지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있음끼리 하게 되면 이기주의가 나오는데, 즉 육이 나온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육에서 '나' 라는 것이 나오는데, 즉 허구적인 '나'가 나온다는 것이죠.

물론 불교에서도 그 '나'가 허구임을, 즉 없다는 것까지 밝혀내었는데, 그런데 그 육체가 아프니 그만 '나' 라는 겁니다. 편할 때는 '나'가 생각나지 않는데 말이죠. 또한 그 '나'가 이기주의가 되는데, 그래서 "나를 알아주면 행복이고,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불행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비록 몸이 아파도 가족이 돌봐주면 그 순간에는 약간의 행복을 느끼는데, 그러니 아픈 것은 아픈데, 그것조차 알아주지 않으면 더 깊은 불행을 느낀다는 겁니다. 혼자 살면 편한데, 그런데 몸이 아플 때 누가 옆에서 자기를 챙겨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물도 좀 갖다주고 이부자리도 돌봐줄 사람이 없을 때, 그때 인간은 무엇을 느끼는고 하니, 외로움이 아픔으로 변하고, 그 아픔이 불행으로 변하는데, 그 불행은 그만 분노가 된다는 겁니다. "끼리끼리 잘 논다. 그냥 확 박고 싶어"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이제 혼자 되어서 공원에 갔는데, 거기에서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합니까? "잘 잡아봐라" 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만 뒤에 가서 밀어서 자빠트리고 싶다는 겁니다. 왜 자기 신세를 알아주지 않느냐는 것인데, 그러면 반대로, 자기를 왜 알아주어야 합니까?

그동안 '나' 라는 것이 육에서 나왔는데, 그런데 그러한 육끼리 만나다가보니 타인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데, 그런 '나'가 될 때, 그때 인간은 행복을 느낀다는 겁니다. 자기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알아줄 때 행복을 느낀다는 말이죠. 그게 사회라는 겁니다.

왜 교도소 생활이 힘드는가?

여러분, 교도소 생활이 왜 힘듭니까? 밥이 나오지 않습니까? 잠을 재워주지 않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를 구성하고 있었던 가족과 친구들과 헤어진다는 것인데, 그리고 두 번째는, 자기와 마음이 맞지 않는 타인들, 즉 서로 소통이 되지 않는 인간들과 같이 있다는 것이 매우 괴롭다는 겁니다.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 형이 너무 가볍다고 하면서 반대하는 자들이 있다는 말이죠. 자기는 사람을 죽여서 그 죽은 사람의 가족들을 비롯한 그 주위의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어놓고, 정작 자기는 편하게 그만 죽어버리고, 그게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인정해주지 않는 타인들 속에 가두어놓고, 그런 고통 속에서 평생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무기징역제도라는 말이죠.

외부에서 보면 사형제도가 굉장히 잔인하고, 그래서 그런 사형제도를 없애는 것이 휴머니즘으로 보이는데, 그런데 이렇게 떠져보니 어느 것이 더 잔인합니까? 살려놓고 고통을 주는 무기징역제도가 더 잔인한데, 따지고 보니 우리의 선입관과는 많이 다르다는 겁니다.

그리고 사형수는 할 일을 주지 않는데, 그러면 더 고통스럽다는 말이죠. 목공일을 하면서 웃고 하는 것이 없는데, 그냥 멍하게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회에서 보면 할 일도 없고 편안해 보이지만, 하지만 정작 자신은 미친다는 말이죠. 그래서 여러 명이 같이 있는 것보다 독방이 더 힘이 드는데, 혼자 있으면 훨씬 더 괴롭다는 것이죠.

다시 정리하면 !!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데, 인간은 분노의 힘으로 살아가는데, 그리고 그 분노가 나오는 것은 '나', 즉 자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나'는 어디서 나왔는고 하니, 그것은 '큰 나', 즉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보호를 받겠다고 하는 '나'와의 관계, 즉 육체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외부에서 무엇이 옵니까? 죽음의 힘이 오는데, 그러면 기껏 대처한다는 것이 남들과 협력하고 결집해서, 즉 우리 가족만 똘똘 뭉쳐서 이민을 가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자기를 불행하게 하는 대한민국을 떠나 미국이나 캐나다나 호주로 이민을 가면, 그러면 행복해집니까? 특히 강남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는데 말이죠. 지방에서는 수도권으로, 수도권은 서울로, 서울은 강남으로, 그리고 강남은 외국으로, 왜 그렇게 합니까?

대한민국을 '헬조선' 이라고 하는데, 즉 지옥과 같은 조선 땅에서 벗어나면 천국이 있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런데 혼자 갑니까? 가족과 같이 갑니까? 가족과 같이 가는데, 왜냐하면 '나' 라는 것은 가족이 있음으로서 협력체로 구성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행복을 느낀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미국에 가서 무엇을 합니까? 세탁소나 마트를 운영하는데, 그런데 그들이 대한민국에 있을 때는 그런 것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죠. 그런데 왜 미국에서 그 힘든 세탁소를 해도 행복합니까? 그것을 불교적으로 말하면 마음을 낮추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마음을 낮추었습니까? 자기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없다는 말이죠.

이민을 가더라도 !!

한국에서는 연고대나 서울대를 나오면 이런 것을 하면 안 되는데, 물론 요즘은 좀 다르기는 하지만, 그런데 미국에 가면 그러한 제약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사는 LA와 같은 곳에는 가지 말고, 텍사스주의 사막근처와 같은 곳으로 가면, 아는 사람들이 전혀 찾아오지 않는 외진 곳으로 말이죠.

그런 곳에 가면 그 어떤 일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데, 그렇게 되니 행복을 느끼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행복과 불행은 어디에 달려있는고 하니,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알아주느냐에 따라서 결정이 되더라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죽음의 힘에 쫓겨다니는 인간의 막다른 벽이고 길인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미국의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살다가 몸이 늙고 해서 그만 아프다고 하면, 그러면 또 다시 행복을 찾아서 한국에 와야한다는 겁니다. 일가친척이 있는 곳으로 말이죠.

이게 죽음의 힘인데, 죽음의 힘에는 기름 띠가 떠돈다는 겁니다. 즉 한 장소에 머무르지를 못한다는 말이죠. 떠있는 기름을 흔들면 뭉쳤다가 흩어지고 하듯이 말이죠. 그러니 인생은 무엇인고 하니, 결국 죽음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계속해서 행복을 찾아서 돌아다니다가 죽으면, 물론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데, 그렇게 없어진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무(無)보다 더 작음, 저주의 생산성 !!

그런데 성경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고 하니, 무(無)보다 더 작음을, 즉 죽어서 없어지면 그만이 아니고 그 안에 무보다 더 작음이 있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움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바닥에는 저주가 있는데, 그 저주가 자아를 생산한다는 말이죠.

이것을 '저주의 생산성' 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누군가가 있어서 저주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저주로 하여금 저주를 받을 사람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악마에게 제공했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한 학생이 다른 학생을 보고 돈을 천원 달라고 해서 빼앗는데, 그리고 나서 그 다음에는 오천원, 그 다음에는 만원, 그리고는 신용카드까지 빼앗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인간을 왜 계속해서 괴롭히는 겁니까? 그 인간이 있어주어야 빼먹을 것이 있다는 말이죠.

악마는 저주를 계속해서 생산해 !!

이 저주는 악마의 힘, 즉 사탄인데,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무엇을 제공하시는고 하니, 저주를 같이 공유해할 인간들을 계속해서 모집할 수 있도록 허락을 하셨다는 겁니다. 사탄에게 나름대로 자기 동우회를 만들도록 말이죠. 그게 뱀의 후손인데, 뱀은 뱀의 후손들을 계속해서 양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그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겁니다.

이것이 저주이고 저주의 힘인데, 반면에 축복은 무엇인고 하니, "너는 이렇게 살았으니 복을 주겠다" 라는 것이 아니라, 복을 줄 이유를 계속해서 만들어내면서 복을 주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천국에 가는 사람은 한 번 영생의 축복을 받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축복과 축복을 더하는, 그런 빌미거리를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만들어서 주신다는 겁니다.

인간은 들러리 !!

그러니 우리 인간은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틈 사이에 그만 끼어버린, 그냥 '들러리' 라는 말이죠. 오늘 강의제목을 이 들러리로 하고 싶은 생각이 갑자기 드는데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양쪽의 서로 반대되는 힘 사이에 그만 끼어서 어떻게 됩니까?

어제 오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말이죠. 상품이 될 것과 상품이 되지 말아야할 것을 분류를 하는데 있어서, 이쪽은 이쪽 편이 가지고 가도록 허락을 하시고, 또 저쪽은 저쪽 편이 가지고 가도록 허락을 하신다는 겁니다. 즉 알곡은 모아서 창고에 들이고, 그리고 가라지는 모아서 불에 태우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려면 먼저 분류작업이 계속해서 일어나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무(無)라는 지평, 이게 인간이성의 한계인데 말이죠.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없어지면 그만이다. 죽으면 그만이다" 라는 게 한계라는 겁니다. 그런데 저주가 힘을 가지고 있어서 없음, 즉 죽음을 뚫고 나와서 인간들을 자기 패거리로 모집한다는 것을, 그것을 살아있는 인간들은 눈치를 채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인간들은 있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없어지면 그게 끝인 줄로 알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길을 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면,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라고 여기는데, 하지만 그게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사탄의 힘은 끝까지 저주를 생산하는 식으로 계속해서 작용을 하는데, 하지만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서는 전혀 금시초문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사탄의 죽음과 둘째 사망 !!

어제 낮 시간에 사탄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사탄의 죽음은 둘째 사망이라는 겁니다. 둘째 사망의 특징은 죽지 않는다는 것인데, 대상이 계속해서 살아있다는 말이죠. 살다가 죽으면, 즉 목숨이 끊어지면 끝이 아니고, 계속 살려내면서 거기에 저주가 합치되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저주가 저주답게 드러날 수 있도록, 저주를 받을 대상도 같이 증식이 되도록, 저주가 번식이 되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저주가 영원토록 확대가 되는데, 그러면 그 맞은 편에는 축복도 같이 어떻게 됩니까? 계속해서 번식이 되고 증강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갈수록 그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진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은, 온 우주는 끝이 있는 것이 아닌데,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끝은 없다는 겁니다. 성경은 인간이 양과 염소,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 오른쪽과 왼쪽, 그렇게 완전히 구분이 되면, 그것을 끝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완전히 분류가 되는데, 그게 끝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정말로 그렇다고 하려면 성경적인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말이죠.

여기서 사도행전 19장 15절을 보겠는데,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행 19:15)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여기에 악귀가 나오는데, 즉 마귀인데, 그 마귀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라고 하는데, 이것이 악귀의 이야기입니까? 사람의 이야기입니까? 사람이 아니라, 사람 속에 들어있는 악귀의 말이라는 겁니다.

이 악귀는 없음보다 더 작은 동네에 있는데, 즉 죽음보다 더 고통 속에 있다는 것이죠. 저주로 인해서 말이죠. 그런데 그 저주가 없음을 뚫고 인간 속에 들어왔는데, 그런데 과학적으로 보면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겁니다. 사람이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은 자기 육체, 즉 세포 덩어리가 아파서 아프다고 본다는 말이죠.

왜 분노가 일어나는가?

그러면 아픈 것은 좋은데, 거기서 왜 분노가 일어나느냐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이 육체로 그냥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자아가 나온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아가 나오면, 그 자아는 둘 중에서 하나인데, 마귀의 편인지, 성령의 편인지, 그 둘 중에서 하나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선택할 권한이 있는 것처럼, 즉 "나는 마귀에게 속하지 않고 성령에게 속할래. 나는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갈래" 라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것은 자아가 골라잡을 문제가 아니라, 막을 뚫고 들어온 어떤 힘에 의해서 우리 인간은 사로잡혔다는 겁니다. 악마에게 사로잡히든, 성령에게 사로잡히든, 둘 중에서 하나인데, 중간지대는 없다는 말이죠.

여기서 요한복음 13장을 보겠는데, 27절과 28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요 13: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요 13:28)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없음에서 출발하는 인간, 그러나 !!

이 구절을 읽으니 이제 뭔가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인간은 어디서 나왔는고 하니, 없음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욥의 경우도 그러하고 말이죠. 그러니 인간이 기껏 생각한다는 것이, 그 출발점이 '없음' 이라는 말이죠. 이게 과학이고 합리적인 생각인데, 인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즉 "나는 없는 것에서 나왔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없음보다 더 낮은 것이 있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제가 죽음의 힘을 이야기했는데, 즉 인간들은 죽으면 그만이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인데, 그 밑바닥에는 사탄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죽음을 넘어서서 들어가신 분이 예수님인데, 그러니 사탄도 있고 예수님도 있다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서는 예수님을 여자의 후손이라고 하고, 사탄을 뱀의 후손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그 약속에 준해서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의 자손이 계속 번식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편이 계속해서 번식한다는 말도 되지만, 지옥에 갈 자식들도 역시 번식과 증식을 한다는 말이죠. 이제는 제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가 굴비처럼 연결이 되었지 싶은데, 아닌가요? 사람들은 자기가 없음에서 나왔다고 보니까, 그 밑바닥에는 사탄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말이죠.

그냥 자기는 없음에서 태어났는데, 그러니 이제는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불행하다", 혹은 "나는 행복하다" 라고 하는데, 왜 그런고 하니, 주위에 자기를 위로해주고 챙겨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어디가 아픕니까? 고통스러워서 어떻게 하지?" 라고 하면서, 그렇게 자기편이 많을 때, 그러면 행복하다는 것이죠. 그 반대가 되면 불행하고 말이죠.

그렇게 행복과 불행을 생각한다는 것은 어디에서 나왔는고 하니, '나' 라는 것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그 '나'는 육에서 나왔고 말이죠. 그렇다면 '나'가 육에서 나왔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육이, 즉 몸이 아프니까 비로소 '나' 라는 것을 느낀다는 겁니다. 처음에 강의했을 때 조각난 것들이 이제는 조금은 이어지지 싶은데 말이죠.

아프니까 '나'가 되는데, 그러니 아프지 않은 사람을 보면, 거기서 무엇이 유발된다는 겁니까? 거기서 왜 분노가 생기느냐는 것이죠. 즉 "나는 너보다도 더 착하게 살았는데, 그런데 나는 아프고 왜 너는 건강해?"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위로를 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참으로 안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라고 해도 안 된다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약을 올리는 것인데, "당신이 아무리 그래도, 지구는 돈다" 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것이 곧 불교적인 위로방법인데, 즉 "당신이 그렇게 되어도, 전체적으로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과연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이 되지 않는데, 그것은 어떻게 보면 야비하기도 한데 말이죠. "그래도 지구는 돕니다" 라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 그러면 어디로 가야하는고 하니, "나의 행복과 불행은 어디서 나왔고, 나의 분노는 어디서 나왔는가?" 라고 하는,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과 사탄 중에서 어느 쪽에 속했는지, 이런 방향에서 해결을 해야한다는 말이죠.

그런 것이 아니면 아픈 사람의 경우에는 어떻게 됩니까? 그 어떤 위로를 해주어도 시간이 지나가면 다 없어져버리고, 그러면 결국 아픈 자기만 남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남들은 아프지 않다는 말이죠. 우리가 다같이 아플 때는 그래도 괜찮은데, 그런데 자기 혼자 아플 때는 소외감을 느낀다는 겁니다. 불행이 극에 달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동우회' 라는 것인데, 즉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끼리의 모임이라는 겁니다. 요즘은 별의 별 동우회가 다 있는데, 강아지를 키우다가 잃어버린 사람들의 모임도 있고, 아무튼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끼리 모여서 서로를 알아주게 되면, 그 고통이 반감된다고 하는데 말이죠(ㅋㅋ).

하나님의 자기 만족 !!

하지만 같은 육끼리 모여서 무엇을 해도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를 않는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조금 전에 인간은 들러리라고 했는데, 그러면 사탄 쪽에서도 증식을 시키고, 예수님 쪽에서도 증식을 시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서로 싸우리라" 라는 것인데, 이것은 여러분이 다 알다시피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말이죠. 이 약속의 말씀만 구현하게 되면, 이것이 하나님의 자기 만족인데,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흡족해하신다는 겁니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그러면 여기서 결론부터 먼저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만족스러움에 동감을 하시게 되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 편에 서있는 사람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에게 동감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 말고, 예수님과 견줄만한 독자적인 다른 존재를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나' 라는 것인데, 그 '나'가 예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다는 말이죠. "주님은 참 좋겠다. 그런데 내 꼬라지는?"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이번에 회사가 수출도 많이 하고 참 좋아졌는데, 그런데 정작 자기는 잘렸다고 하면, 그러면 도대체 그게 뭐냐는 말이죠. 즉 "나는 어떻게 되는가?" 라는 것인데, 회사보다도 그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러한 사람이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 뭐라고 하겠습니까? "남들은 저렇게 잘 되는데, 이렇게 기도를 열심히 하는 나는 무엇입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불행과 행복은 비교에서 나오고, 그런 비교는 평소에 남들에게 인정을 받아서 형성된 자아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이제 해결책을 !!

그러면 이제 해결책을 해보겠는데, 해결책이 있다는 말이죠. 요한복음 13장의 가룟 유다, 그리고 사도행전 19장의 악귀, 그리고 인간이 있다는 겁니다. 찬찬히 해보겠는데, 인간은 육으로 되어있고, 그리고 그 육에서 자아가 나왔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무(無)에다가 무엇을 집어넣었는고 하니, 사탄을 집어넣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탄이 시키는 대로 육이 움직이고, 그것을 통해서 자아, 즉 '나'가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인간이 왜 이기주의인고 하니, 왜 '나' 중심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 안에서 사탄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은 인간은 없다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왜 그렇지 않은 인간은 없다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대표자인 아담이 사탄에게 그만 잡아먹혔기 때문인데, 그래서 로마서 5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무엇이 왕 노릇을 합니까? "죄가 왕 노릇을 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여기서 교재 68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때로는 웃기도 하고 때로는 승리에 도취되기도 하지만, 그 어떤 순간에도 죽음에 포위되지 않은 순간은 없었습니다. 너무 행복해서 눈물을 보일 때에도, 이미 죽음은 코앞에 있었습니다. 얇은 막을 사이에 두고 우리의 웃는 소리를 죽음 편에서 다 듣고 있었습니다. 막 뒤에서 전세 버스가 들락거리면서 계속해서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죽음 저편으로 실어 나르고 있었습니다. 한 둘이 빠지면 느끼지를 못하지만 공간이 점점 늘어나면, 현실이란 내가 장만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누가 나를 위로하는 것도 죽음 앞에서는 소용이 없는데, 어떤 후원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더 살겠다고 하소연을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죽이려한다" 라고 말입니다.

너는 사탄과 한 패다 !!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앞장세워서 우리를 원래의 자리로 돌이키시는데, 그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너는 사탄과 한 패다" 라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그러면 어떻게 벗어납니까?"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인데, 왜 그렇습니까? 그것보다도 우선 "나는 누구인가?" 라고, 즉 '나'에 대해서부터 먼저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자기는 아무리 하나님을 거론하지만, '나' 라고 하는 자아는 지금 누구와 한 통속이 되어있는고 하니, 사탄과 그만 한 통속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알게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모든 복음은 '자기 자리 찾기'로부터 시작이 되어야하는데, 우리의 자리는 주님의 자리가 아니라 사탄의 자리라는 겁니다.

예수의 증인 !!

우리는 그 자리에서 우리의 힘으로 빠져 나올 수 없는데, 왜냐하면 죽음이 우리를 압박했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죠. 그것을 두고서 "죄가 왕 노릇을 한다" 라고 하는데, 왕이라는 것은 자기보다도 힘이 세다는 겁니다. 자기 마음대로 벗어나고 하면, 그것은 왕의 아닌데, 그러니 왕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안 되는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이미 빼내셨는고 하니,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예수의 증인' 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빼낼 때, 그것이 마귀로부터 벗어난 것이 아닌데, 마귀에게 발목을 물린 채로 같이 나오게 되는데, 그러면서 그 면면을 다 보여주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라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닌데, 아픈데도 감사하게 된다는 말이죠.

뱀에게 물린 상처가 있어야 !!

'막(膜)' 이야기를 다시 해보면, 이것이 막이라고 하면, 여기에는 뱀의 후손이 있는데, 현재 있는 뱀의 마지막 후손은 악마가 되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후손이 선조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여자의 후손도 마찬가지인데, 지금 여자는 하와인데, 그 하와가 낳은 후손이 하와를 구원하는 메시야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후손이 선조가 되는데, 하와의 자손이 하와에게 생명을 준다는 말이죠.

그렇게 뱀의 후손이 인간을 망치게 되는데, 그 뱀의 후손이 인간을 물 때, 뱀의 후손이 어디를 문다고 했습니까? 발꿈치를 꽉 깨무는데, 그러니 이것은 치명적인 것은 아니란 겁니다. 그렇게 물려야 하는데, 그렇게 물리면 상처가 생긴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 상처를 가지고 있는 자가 여자의 후손 편에 속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그 상처가 무엇입니까?" 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몸이 아픈 것인데, 즉 관절이 좋지 않다는 말이죠. 그리고 늙는 것, 그렇게 아프다는 겁니다. 그렇게 아플 때 우리는 자기 힘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느껴야 하는데,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인간은, 곤궁한 존재 !!

그렇게 되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고, 즉 곤궁한 존재라는 겁니다. 곤궁이 무엇인고 하니, 뻔히 알면서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상황을 의미한다는 말이죠. 지붕에 유리로 되어있는데, 그래서 모두 다 보이는데, 그런데도 빠져나가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것을 '가위눌린다' 라고 하는데, 아마 다들 그런 경험들이 있지 싶은데 말이죠. 빨리 잠에서 깨어나야만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데, 그런데 그게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인생자체가 이런 꿈과도 같은데, 즉 죽고 싶다는 말이죠.

외로워서 죽고 싶고, 또한 몸이 아파서 죽고 싶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식이고 뭐고 간에 다 귀찮은데, 심지어 자기 자신도 귀찮다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곤궁한 것인데, 이것을 누가 이야기를 했습니까? 성령을 받은 사도바울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사도행전 19장이 왜 중요한고 하니까, 악귀가 뭐라고 합니까?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악귀로 하여금 패가 이미 나누어졌다는 것을 실토케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그것을 마귀를 통해서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다는 말이죠.

(행 19: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행 19:15)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행 19: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

이 세상은 달랑 두 종류밖에 없는데, 양과 염소,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 오른쪽과 왼쪽, 그것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위에서는 모르고, 즉 이 세상에서는 모르고, 여기 막 아래로 내려와서, 이 아래쪽과 연관을 시킬 때 비로소 그게 드러난다는 말이죠.

위로 올라가면 둘 다 마찬가지인데, 다같이 인생을 사는 것이 곤궁하고 힘이 든다는 겁니다. 그래도 젊었을 때는 몰라도 나이가 들면 온 전신이 다 아프다는 말이죠. 아무리 한의원에 다녀도 소용이 없는데, 점점 더 아픔이 번진다는 겁니다. 온 몸으로 말이죠.

저주의 확장 !!

그럴 때 우리의 몸은 처음부터 무슨 몸이냐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왜 아픈 몸을 주셨느냐는 말이죠. 그것을 '저주의 확장'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죽음의 힘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겁니다. 믿을 것을 믿어야하지, 어떻게 그런 자기를 믿느냐는 것이죠. 지금 이렇게 아프지 않은 곳이 없는데 말이죠.

외로워서 아프고, 관절염이 와서 아프고, 위로해줄 사람이 없어서 아프고, 모든 것이 아프다는 겁니다. 그렇게 아프면 여기서 무엇이 나온다고 했습니까? 분노가 나오는데, 오늘강의에서 다른 것은 다 잊더라도 이것만은 기억해야 하는데, "인간은 분노의 힘으로 살아간다" 라는 겁니다.

아프니까 세상을 탓하는데, 그래서 이번에 낚싯배가 침몰해서 사람들이 죽으니까 박근혜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박근혜가 세월호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고 공격을 하더니만, 문재인도 역시 마찬가지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탓하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도 알 수 없는 분노가 나온다는 것인데, 그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지금 나는 외롭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사람이 아프고 외로우면 계속해서 남의 탓을 해대야 하는데, 노래방이 왜 있고 술집이 왜 있느냐는 것이죠. 풀지 않으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데, 그 터져 나오는 분노를 말이죠.

왜 이러한 현상이 생기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사탄이 하나님에게 받은 저주에 대한 분노를, 그것을 우리 몸을 매개체로 삼아서 계속 바깥으로 발산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거기에 출구노릇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게 얼마나 약을 올리는 말씀이냐는 겁니다. 몸이 아파서 미칠 지경인데 어떻게 감사가 되느냐는 말이죠.

이제 남은 문제는?

그러면 이제 남은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마귀도 알고 있는 예수 편과 바울 편에, 거기에서는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겁니다. 여기에는 성령님이 계시는데,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성령을 받았는데 말이죠. 그렇게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바로 "너의 인생에 대해서 여기 위, 즉 세상에서 말하는 없음을 가지고 논하지 말고, 그 없음보다도 더 작고,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여기 아래에서 너의 근원을 찾아라"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찾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보고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왜냐하면 하면 말썽만 일으킨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 육이 그냥 육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 라고 하는, 즉 자아로 행세를 하기 때문에, 그래서 육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만 자아가 절대적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구원을 받았다. 내가 은혜를 받았다" 라고 하면서 나온다는 말이죠. 그게 자아가 하는 짓이라는 겁니다.

주사기로 투입되는 성령 !!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 우리의 육에다가 주사기를 가지고 성령을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라고 하는데, 그렇게 성령이 들어온다는 겁니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조금 전에 본 로마서 7장의 말씀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고, 즉 자기를 곤궁한 사람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여기서 '곤고(困苦)' 라는 것은 곤란하고 괴롭다는 것인데, 크게 시달려 평안함이 없고 몹시 지쳐있는 상태라는 말이죠. 그러니 궁핍해서 힘을 쓸 수도 없는데, 그런 곤고한 존재라고 외치게 된다는 겁니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마라난타 !!

그런 외침은 출애굽기에서 히브리인들이 바로 왕에게 압박을 당할 때, 그들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서 부르짖었는데, 그러니 우리는 들러리라는 겁니다. 성령을 받는 자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나는 해결을 받았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늘 부르짖으면서,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해도 주님의 들러리라는 겁니다.

(계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혼자서 독자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하나도 없는데, 우리는 철저히 들러리라는 말이죠. "이 땅에서 그만 살게 하옵소서. 이 땅이 싫습니다. 행복도 불행도 이제는 귀찮습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것이 사도바울의 소원이었다는 겁니다. "주여, 어서 저를 데려가 주옵소서" 라고 말이죠. 즉 "이제 끝내도 저는 상관치 않겠습니다. 오히려 감사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오늘 밤'의 은혜를 !!

예수님께서 옆에 달린 강도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셨는데, 예수님께서 "한 달 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했습니까? 그게 아니라, '오늘 밤' 이라는 겁니다. 이제 불과 몇 시간에 남지 않았는데, 바로 이 '오늘 밤'이 우리에게 은혜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이 12월 4일인데, 여러분은 12월 4일 밤이 기다려집니까? 그게 아닌데, 며칠 뒤에 딸 결혼식이 있다는 말이죠. 그때까지 주님이 오시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아직도 우리의 힘으로 행복을 보존하려고 하는지 모르는데, 그냥 애를 쓴다는 말이죠.

그러면 누가 탄식을 합니까?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를 해주시는데, 즉 "주여, 저 인간을 한 번 보세요. 아직도 자기 힘으로 살아보려고 저렇게 애를 쓰는데, 얼마나 기가 찬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주께서 조치를 취해주세요" 라고, 그렇게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를 하신다는 겁니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는 육이 있고, 그 육에서 자아가 나오고, 자아는 분노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도 똑같은데, 다만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여기서 '외침'이 나온다는 것인데, 지금의 이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말이죠. 나중의 축복된 그 상태가 정상인데, 즉 주님의 운명에 합세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겁니다.

성도에게는, 막을 뚫고 밑으로 내려가는 안목이 !!

그러니 성도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의 한계가 "죽으면 그만이지" 라는 것인데, 그런데 성도는 그게 아니고, 막을 뚫고 밑으로 내려가는 안목이 생긴다는 겁니다. 내려가면 그 안에서 성령께서 우리를 어떻게 하십니까? 이 세상에 정들지 않도록, 또한 사람들에게 기대하지 않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믿는 것은 오직 주 예수의 이름 외에는 더 소중한 이름이 없도록 하시는데, 그리고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라고 하는 성경말씀이 그야말로 실감이 나도록 해주신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주사기로 성령을 집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성령을 집어넣었다' 라는 의미는?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성령을 집어넣었다" 라는 것을 설명하고 마치겠는데 말이죠. 성령을 집어넣었다는 것은, 천국을 집어넣었다는 것이고, 또한 그것은 우리 속에 예수님이 중심으로 들어오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재주가 있는고 하니, 죽음에서 유일하게 탈출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이죠.

예수님만이 부활을 하셨는데, 그 부활의 영이 성령님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죽을 우리의 몸도 그분은 살리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삽니까? 이제는 마귀에게 속하지 아니하고, 육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광된 몸으로 다시 산다는 겁니다.

'예수님'+'들러리'='우리' !!

물론 들어보면 기분이 좋은데, 그런데 그것을 자기가 되려고 하지 말고, 우리는 들러리만 되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의 들러리만이 그런 혜택을 입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들러리를 합쳐서 '우리' 라고 하는데, 그런 교회를 '우리교회' 라고 하고 말이죠(ㅋㅋ).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그렇게 '우리'가 된다는 겁니다. 우리끼리는 성령 안에서 소통이 되는데, 다들 곤궁한 자들이라는 말이죠. 이 세상에서는 누구를 만나면 이용을 하려고 하는데, 하지만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용할 거리가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겁니다. 다들 떠나야하는 입장이기에 등쳐먹을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나' 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해주세요" 라는 것도 없는데, 어차피 떠나야할 입장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게 되면, 그만 이 세상에 발목을 잡히게 된다는 말이죠. 그것은 "천국에 가지 말고 이 세상에 나와 함께 살아요" 라는 식이 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아무리 위로를 해주어도 그게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기를 보고 "앞으로 백세까지 사실 겁니다. 건강하실 겁니다" 라고 한다면, "차라리 욕을 하세요. 무슨 그런 망발이 다 있습니까?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남의 동네인 이 마귀의 동네에서 백살까지 살아서 도대체 무엇을 할 것이냐는 겁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위로냐는 말이죠.

그냥 죽으세요 !!

그러니 "아플 때 그냥 가세요. 곤궁한 몸, 지금이 타이밍입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리고 연세가 많으신 분들에게만 하면 안 되고, 나이와 상관이 없다는 말이죠. 그것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에 있고, 더 큰 행복이 어디에 있느냐는 겁니다. 병 문안을 가서 "그냥 죽으세요!"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우리가 이 더러운 마귀동네에서 왜 더 살려고 합니까? 진짜 위로는 하늘나라에 있는데, 그러니 얼른 하늘나라에 가면 된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떠나는 게 상책인데, 그러니 우리는 가볍게 깃털처럼 살면 말이죠. 몸에 발목이 잡히지 않도록, 그러니 그 몸을 벗어버리는 것이 최고의 선물이란 겁니다. 그게 우리의 무거운 짐을 벗는 것이란 말이죠.

지금 이게 제가 지어낸 것이 전혀 아니고 사도바울이 한 이야기인데, 이것이 고린도후서 5장 8절에 나오는 말씀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의 그 무거운 짐을 모두 다 벗어버리는 것, 도대체 그것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죠.

(고후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지, 아내가 어떻게 생각할지, 자식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그런 무거운 짐, 그런 스트레스를 다 벗어버리라는 겁니다. 시어미를 어떻게 섬길지, 그런 것도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 섬길지, 즉 자기에게 얽매이는 것도 벗어버리자는 겁니다.

주님의 배양체로서 !!

그러니 자기에게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얽매이면 되는데, 축복의 증식체로서, 주님의 배양체로서 말이죠. 주님께서는 복을 주시려고 빌미를 만들어서 영생을 주시고 또 주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맞은 편은 어떻습니까? 저주를 주기 위해서 빌미를 만들어서 또 때리시고 또 빌미를 만들어서 때리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악귀가 들린 사람을 부러워하면 안 되는데, 또한 그런 자들에게 위로를 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만 해도 덤이고 감사할 뿐인데, 죽음의 힘을 이기려고 하지 말고, 그냥 죽으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의 영이 죽은 우리를 살리시는데, 그것도 그냥 살리시는 게 아니라 축복의 대상체로, 축복을 공유할 자들로 살려내신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라고 하신다면, 우리가 상대방을 볼 때, 육에, 즉 자아에 집착하는 자들을 볼 때, 물론 우리도 다 똑같은데,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포기를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육에 속한 인간은 매일같이 자기가 더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자기 육을 위로해달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내가 몸이 아파요. 나를 위로해주세요" 라고 하는데, 그렇게 매일같이 자기 몸을 챙기는 이기적인 행태로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런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얼마나 마귀에게 사로잡혔으면 살아가는 것이 그런 것밖에 모르느냐는 겁니다. 무슨 동우회, 무슨 동창회, 그래서 외롭다고 하면서 찾아가는, 그런 것밖에 없다는 말이죠.

이번에 인천의 영흥도에서 낚시배가 침몰한 것도, 주일에 교회도 나가지 않고 그런 것을 찾아다니니 그만 사고가 났다는 겁니다. 영감을 보고 가지 말라고 그렇게 통곡을 했다는 분도 있는데, 그런 것이 다 죽음 밑에서 작용한 것이란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을 넓게 보기를 소원합니다. 악귀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하는데, 그러니 악귀는 우리까지 안다는 것을 감안하게 해주시고, 물론 우리도 똑같은 인간인데, 그야말로 별 볼이 없는데, 그런데 주님의 은혜로 우리의 이름이 놀랍게도 생명책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게 십자가의 능력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12,15 새벽 2시에 마침.
침몰하는 배에서도 감사케 하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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