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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5 22:15:33 조회 : 329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26 - 주의 기능 이름 : 구득영(IP:203.223.97.179)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26 - 주의 기능

18,01,0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죽음의 힘 !!

오늘은 교재 71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죽음의 힘'에 대해서 계속해서 하고 있는데, 이것을 분명하게 해주어야, "사망에서 생명으로 간다" 라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가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사람은 이 죽음에 대해서 그야말로 전혀 맥을 추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람은 조그만 행동을 해도, "이게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 그렇지 않은가?" 라고 하는데, 그게 다른 기준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가? 되지 않은가?" 라는 겁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인간은 죽음에 의해서 휘둘리게 되는데, 그러니 인간은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둘러 쌓여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 죽음을 힘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세력으로 보는데, 물론 힘이나 세력이나 비슷한 말일 수도 있지만, 힘은 에너지로 있는 것이고, 세력이란 것은 뒤에서 누군가가 계속해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떤 인물, 즉 존재자가 있다는 말이죠. 그것을 로마서 5장에서는 죄에서 사망의 힘이 나온다고 하는데, 그 죄를 인격화시킨 것이 곧 사탄이라는 겁니다.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래서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뱀 이야기와 여자 이야기가, 이게 현실과 너무 멀어져서 그래서 이것을 현실의 바닥으로 도배를 한다고 할까요? 아무튼 그렇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창세기 3장에 여자와 뱀이 나오는데, 둘 다 인격체인데, 그래서 서로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죠.

뱀이 여자를 보고 말을 하는데, 뱀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참으로 낯설지요? 그러니까 뱀 속에는 누가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저수지에서 물이 흐르면 역사가 되는데, 이 역사는 눈에 보이는 인간들끼리 설치는 것인데, 그래서 이런 것을 그만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숨어있는 인격체의 활동의 여파로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하는, 그 관계성이 그만 희미해지고 만다는 것이죠.

그것을 저는 '그물망' 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설명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게 '필드', 즉 '장(場)' 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어떤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게 텅텅 비어있는 영역이 아니라 촘촘하게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힘이 말이죠.

그래서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이 힘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쪽에서 이 힘을 이야기할 때는 모든 것을 에너지로 설명을 해버리는데, 그 에너지가 뭉쳐진 것을 물질이라고 하고 말이죠. 즉 "E=mc²" 인데, 이게 바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라는 겁니다.

힘과 에너지 !!

풀이하면 "에너지라는 것은 질량의 광속에 제곱을 한 것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아인슈타인이 밝혀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에너지의 바닥, 혹은 에너지의 출렁거림인데, 그러니 사람의 몸이 아프면 의사들은 무엇만 해주면 됩니까? 인체 속에 있는 에너지를 균형이 있게 맞추어주면 되는데, 그게 바로 건강한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죽는다는 것은 에너지가 빠져나간 것이고, 반면에 그 에너지가 모아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E=mc²", 즉 물질이 흩어지면 에너지가 되는데, 그러니 에너지가 다시 응축이 되면 물질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빠져나간 에너지를 다시 모으면 건강해진다는 말이죠.

동양의학도 역시나 그러한데, 흩어진 기를 마디마디마다 다시 모으면, 그것을 '단(丹)' 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건강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음식을 먹으면 기가 모아진다" 라고 하는데, 낭비가 없어진다는 말이죠. 그렇게 기를 모으려고 하면 인체의 기능이 원활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그러니 결국에는 운동을 해야한다는 겁니다. 즉 "살을 빼라" 라는 것이죠.

그렇게 모든 것을 에너지로 설명을 하는데, 그런데 점점 더 세월이 갈수록 이 에너지가 줄어든다는 겁니다. 그래서 물리학에서 고민이 무엇인고 하니, 에너지를 모아야 사는 것인데, 젊었을 때면 노력만 하면 모아졌는데, 그런데 점점 더 나이가 들어가니 인체가 가지고 있는 장치, 그것을 세포라고 하는데, 이 세포에서 그만 에너지를 모으는 기능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라는 겁니다.

고장난 벽시계 !!

그것을 사람들은 세월탓이라고 하는데, 왜 나훈아가 불렀던 유명한 노래가 있지요? '고장난 벽시계' 라고, 그게 무슨 말인고 하니, 벽시계는 고장이 나서 멈춰있는데 세월은 고장도 나지 않고 흘러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전부가 다들 시간탓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여기서 더 나가면, 에너지가 뭉쳐진 것이 인체인데, 이 인체는 부모의 생식에 의해서 만들어지는데 말이죠. 이 인체가 응축이 되어있는데, 그런데 시간이 흘러가면 그 기능이 약화된다는 겁니다. 즉 에너지가 흩어지는데, 그것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아담은 흙으로 분해가 된다는 말이죠.

종말에는 시간도 스톱 !!

그렇게 인간은 흙인데, 그런데 흙으로 분해가 될 때 우리 인간은 무엇을 탓합니까? 세월을 탓하는데, 그런데 성경은 그게 세월을 탓할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것을 '죄의 힘'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탓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러니 시간이 문제가 아니고, 종말이 되면 시간이 멈추어지게 되는데, 그러니 그야말로 고장난 벽시계라는 겁니다. 종말에는 시간이 없는데, 흘러가지 않는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죄가 의로 바뀌어지기 때문에, 그래서 세월이 흘러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그게 교재 71페이지에 나오는데, 살펴보겠습니다.

** 요한계시록을 봐도 '주 안에서 자는 자는 행복하다' 라고 합니다. 그냥 '주 안'입니다. 여기서 '주'는 언약을 완성을 분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계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다 !!

마태복음 5장에 보면 팔복이 나오는데, 심령이 가나한 자, 온유한 자 등등,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을 합치면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다" 라고, 그렇게 최종정리가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살고자 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그런 경우에는 결코 복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흙이 되어야하는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어제 낮 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내가 무엇을 해야합니까?" 라고 묻지 말고, "내가 지금 어느 자리에 있습니까?" 라고 하는, 그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고 하는 것은, 그 배후에 무엇이 있는고 하니, 자기가 죽지 않고 살려고 하는 욕망이 작렬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살려고 하는 입장에서 아무리 성경을 보고 교회에 다녀도, 그것은 계속해서 죄를 키우겠다고 하는 것과 똑같다는 겁니다. 산다는 것은 죽음 안에서 사는 것인데, 그러니 그렇게 살면 살아갈수록 점점 더 원망거리만 늘어난다는 말이죠. 그게 지옥을 유발시키는 것인데, 자기가 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자기의 모든 형편을 지옥을 만든다는 겁니다.

이번에 광주에서 아파트에 불이 나서 삼남매가 그만 불에 타죽고 말았는데, 엄마가 3일 전에 이혼을 했고, 그 날에는 술을 마치고 담뱃불을 끈다는 것이 그만 잘못 처리해서 불이 났다고 하는데 말이죠. 그러면 이혼을 했으면 했지 술은 왜 마시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저녁에 술집에 가보면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닌데, 우리가 평소에 얼마든지 접할 수 있는 일들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도 운동을 하다가보니, 산에 가서는 빌고 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아니 산에 가서 왜 비느냐는 겁니다. 도대체 비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있는 자리가 무엇인지, 그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빕니까? 그게 아니고 자리는 모르고 그냥 자기가 살려고 빕니까? 그러니 산에서 비는 것이나 빨간 벽돌건물에서 비는 것이나 전혀 차이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무엇이 중요한고 하니, 그것은 자기가 있는 자리인데, 그것은 성경말씀을 보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주 안에서 죽은 자는 복되다" 라는 것인데, 그러한 자만이 복이 있다는 겁니다. 주 안에 있으면 사나 죽으나 천국인데, 반면 주 바깥으로 나가면 그 어디든 그게 지옥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그냥 '주 안' 이라는 겁니다.

'주(主)' 란 무엇인가?

그래서 오늘 강의할 제목은 무엇인고 하니, "주란 무엇인가?" 라는 것인데, 도대체 그 안의 평수가 얼마나 되기에 모두 다 수용할 수 있느냐는 말이죠. 그것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다시 설명을 하겠는데, 우리 인간은 살아가면서 변화를 일으키는데, 힘에 의해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힘이라는 것은, 세상으로 보면 그게 물리적인 에너지이지만, 성경에서는 그 힘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다툼에서 나온다고 한다는 말이죠.

인간이 뱀에게 속아넘어가서 그때부터 주어지는 힘은 무슨 힘인고 하니, 죽음의 힘인데, 그러니 사람이 태어나서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로마서 5장에 의하면 죄의 힘이 있다고 했고, 그 죄의 힘이 인격에서 나오는데, 그게 바로 사탄, 즉 악마라는 겁니다. 그렇게 사탄의 힘이 눌리도록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자에게는 그것이 왜 해당되지 않는고 하니, 이 세상은 남자에게 소속이 되어있는데, 여기서 여자는 남자에게 소속이 되지 않는 여자를 의미한다는 말이죠. 보통 여자는 남자에게 소속이 되어서 같이 늙어 가는데, 그런데 남자에게 소속이 되지 않는 여자, 그래서 이 여자의 이름이 다른데, 그래서 그 이름이 '생명' 이라는 겁니다.

남자는 흙, 여자는 생명 !!

그래서 남자는 흙, 여자는 생명,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심수봉은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고 했지만, 성경은 그게 아니고, 남자는 흙, 여자는 생명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남자에게 소속이 되지 않는 생명이기에, 그래서 남자가 죽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탈출이 가능한 것이 여자라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을 낳았던 마리아인데, 그래서 마리아는 남자에게 종속되기 이전에 무엇을 낳았는고 하니, 아기를 낳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날 성도는 예수님의 여자인데, 즉 예수님의 신부라는 겁니다. 그래서 혼인잔치를 할 때 기존의 남편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영원한 결혼식을 올린다는 말이죠.

그러니 기존의 남편과는 임시방편이고 예수님과 영원한 결혼예식을 올리게 되는데, 이게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한 여자가 남편이 죽고 난 다음에 영이 되신 새로운 남편에게 시집을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시집을 갔다는 것은, 기존의 남편과의 관계는 이미 죽음의 관계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롬 7: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면 이혼을 해야합니까? 그럴 필요도 없는데, 왜냐하면 이미 죽은 자이니 이혼을 하고 말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가 둘 다 예수님 안에서 죽었다고 하면, 그러면 둘 다 신부가 되는데, 즉 같은 신부의 입장에 놓인다는 것이죠.

그림자 사랑 !!

어제 오전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그림자라고 말이죠. 그런 그림자끼리는 서로 연락을 취하고 사랑을 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성도의 교제라는 말이죠. 그러니 둘 다 실체를 주장하면 안 되는데, 자기가 잘났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 자기 의가 있으면 교제가 그만 깨지고 만다는 것이죠.

그래서 "니는 하루에 기도를 몇 시간을 하노? 한 번 이야기해봐라. 나는 하루에 2시간을 한다" 라는 식으로 나오면, 그런 것은 전혀 교제가 안 된다는 겁니다. 물론 "니는 얼마나 못났노? 나는 이렇게 이렇게 못났다" 라고 하면, 그것은 교제가 되고 말이죠.

그러니 성도의 교제라고 하는 것은, 필히 성령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렇다면 '성령 안' 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영을 받았던 예수님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그것을 이 세상에서 성도끼리 재현하고 반복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있으면서 제자들을 야단을 치고 도와주기도 했지만, 그들을 저주하거나 심판하지는 않았다는 말이죠. 끝까지 사랑하시는데, 그것은 결국 제자들이 자기와 같이 될 것이라고 예수님이 예상을 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제자들을 보고 "나는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왔다" 라고 하셨고, 그리고 제자들을 자기 친구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들을 사랑한 것처럼, 너희들도 내가 떠나고 나면 서로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마지막 계명이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성도의 연락(宴樂) !!

그런데 그렇게 서로 사랑하려고 하면, 주님이 하나님이면서도 죄인을 어떻게 섬기는지, 그것을 성령께서 그대로 실행을 시켰고, 그 실행이 제자들 사이에서 그대로 적용이 되면, 그것이 바로 성도와 성도 사이의 서로 연락(宴樂)하는 관계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서 거기서 시간이 없어지게 되는데, 그러니 세월탓을 할 수 없다는 말이죠.

특히 중요한 것은, "내일 잘 할게요. 수능을 치면 열심히 교회에 다닐게요" 라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성령 안에서는 시간이 없는데, 묵시의 세계이기에 말이죠. 주님께서는 그때그때 은혜를 주시는 것이지, 두 달치를 미리 주시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늘 동행을 하시면서 늘 돌보아주시기 때문에, 우리도 주님의 그런 시간에 맞추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늘 주시는 은혜에 늘 감사해야지, 미뤄놓았다가 연말에 감사하고, 그런 것은 없다는 겁니다. 고난을 받는 것도 주님과 함께 늘 고난을 받아야지, 고난주간을 정해서 금식을 하고 수제비를 먹고,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고난주일 따로 있고, 부활주일 따로 있고, 감사주일 따로 있고,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늘 주님은 부활해서 계시는데,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부활혜택을 입고 있다는 말이죠.

푹 자라 !!

그러니 시간은 없는데, 즉 주 안에 있는 자는 시간이 멈춰있기 때문에, 그래서 흔히 말하는 '죽었다' 라는 개념보다도,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서 "주 안에서 잔다" 라고 하는데, 그게 적절하다는 말이죠. 즉 "주 안에서 자는 자는 복되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는 아무런 걱정도 하지말고 자면 되는데, 주 안에서 말이죠. 마지막 때가 되면 주님이 깨워주시는데, 그러니 우리는 푹 자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리' 라는 것이 중요한데, 우리는 이미 주 안에서 죽은 자이기 때문에, 자기가 어떻게 행동을 할지, 그런 것에 신경을 쓰면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뭔가 계획을 잡아서 하게 되면 성과를 기대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시험거리가 된다는 말이죠.

자기가 목표를 잡아놓고 거기에 도달하지를 못하면, "나는 믿음이 없는가?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이러면 벌을 받지 않을까?" 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 자꾸만 마귀가 이야기한 것에 곁눈질을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다가 내 인생을 그만 망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사실 우리는 지금 당장 망해도 할 말이 없는 자들인데, 산다는 것은 더불어 사는 것인데, 그러니까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이 기적처럼 여겨져야 한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스톱을 시키면 끝인데, 우리에게는 살아야할 권리와 같은 없다는 말이죠. 물론 성령이 오셔서 이것을 알려주어야 아는 것인데, 그러니 자기가 지금 당장 죽어도 괜찮다는 것, 그게 바로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이란 말이죠.

그럴 때가 과연 언제 올까요? 봄이 되면 올까요? 그것은 딱 한 경우밖에 없는데,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는 그 순간인데, 즉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입을 다무는 그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작동해서 자기는 저주를 받는 것이 너무나 합당하다는 것을 실감나게 온 몸으로서 인정하는 그 순간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동안 자기는 너무 복되게 살았다는 것을, 주님이 주시는 행복 속에서 너무 과하게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개뿔도 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야말로 너무 건방을 떨면서 살아왔다는 말이죠. "이것을 주세요. 저것을 주세요" 라고 하면서, 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렇게 살아왔다는 겁니다.

주(主) 예수 !!

이제 본격적으로 '주'에 대해서 해보겠는데, 그 주는 바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주라는 것은, 그 안에 모든 말씀의 완성이 들어있는데, 그게 곧 언약의 완성인데 말이죠. 예수님이 주인데, 그래서 예수님을 뭐라고 부릅니까? '주(主) 예수'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6장 31절에 보면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하는데, 그 주 안에는 언약이 들어있고, 그 언약을 완성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란 말이죠. 결코 석가모니나 공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행 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예수님은, 존재가 아닌 기능 !!

그러면 그렇게 언약을 완성하신 예수님이 주가 된다는 것은, 그렇다면 예수님은 존재입니까? 존재가 아니고 기능인데, 예수님에게서 기능이 나온다는 겁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존재가 되면 옆에 있어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데, 그런데 예수님에게서 뿜어 나오는 기능이 있다는 말이죠.

그 기능이 우리에게 닿게 되면, 그 주님의 기능에 의해서 우리는 주님의 확정 안에 놓이게 되는데, 즉 주님의 확정된 몸으로 재형성이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육의 몸인데, 그런데 주님의 기능이 오게 되면 영의 몸이 된다는 말이죠.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육이 성령에 의해서 영이 되었기 때문에, 그 방식으로 그대로 우리에게 전이시키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언약의 기능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어떻게 육이 영이 되는지, 언약은 그런 기능으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이죠. 알다시피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인데, 그렇지요? 그런데 어떻게 육이 영이 됩니까? 결코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육으로 오셨지만 모든 언약을 다 이루어서 언약의 완성체가 되신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혼자 이루시고, 그 이루심이 기능으로 작용하게 되면, 우리가 비록 육이지만 예수님 안에서는 영의 사람, 즉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주의 이름 !!

이것이 바로 기능인데, 그런데 이 기능은 구약 때 주의 이름으로 했던 그 기능의 연속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불러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물론 자기가 부르면 안 되는데, 그러면 언어가 되니 말이죠.

그래서 성령께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는데, 그러니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주의 기능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감히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말이죠. 이렇게 된 사람은 그 모든 능력이 예수님에게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을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의의 능력' 이라고 했는데, 즉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죄를 이긴다는 겁니다.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는 죄 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데, 살고자 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나는 죽으면 안 돼" 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말이죠.

왜 살려고 합니까? 죽음이 무섭기 때문에 그러한데, 주 안에서 죽기 싫다는 겁니다. 단독적으로 살고 싶다는 것인데, 자기 혼자서 살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그렇게 자기 혼자서 살고 싶어하는 것을 죄로 규정한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라도 이러한 죽음의 두려움에서 전혀 벗어날 수가 없는데,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게 되면, 즉 주의 기능이 닿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그 죄에다가 그만 한 꺼풀을 더 덮어버리게 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서문시장에 가면 이불을 파는 곳이 있데, 이불이 아주 화려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보면 그 이불 안에는 별로 예쁘지 않는 솜이 들어있는데, 그런데 거기에다가 멋있는 목단무늬의 이불커버를 입히게 되면 아주 호사스러운 이불이 된다는 겁니다. 목단무늬는 좀 촌스러운가요? 아무튼 그렇게 덮어버린다는 말이죠.

덮어줌 !!

다시 말해서, 죄가 있는데, 그런데 그 죄를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고, 왜냐하면 죄가 계속해서 있어주어야 의가 생산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죄는 죄대로 그대로 있고, 거기에 무엇을 덮는고 하니까, 그만 하나님의 의로 덮어버린다는 말이죠.

그래서 구약에서 구원은 무엇인고 하니, '덮어줌' 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히브리어로는 '카파르' 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렇게 덮어주려고 하면 죄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죄를 생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율법을 주셨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명령과 권면도 거기에 포함이 되는데, 그것이 오게 되면 우리가 미처 몰랐던 죄가 계속해서 드러난다는 말이죠.

지난 시간에도 했지만, 그게 디모데후서 3장에도 나오는데, 사람들은 마지막 때가 되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기를,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인데, 아니 그러면 죄가 아닌 것이 무엇이 있느냐는 말이죠. 우리 인간이 하는 모든 짓이 다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딤후 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딤후 3: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너는 죄인이야 !!

그러니 말씀을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라 죄인을 보고 죄인임을 알라고 준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 성경말씀은 일종의 엑스레이인데, 말씀을 비추게 되면 우리의 모든 것이 다 드러난다는 겁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에게서 나왔는데, 우리는 죄인이고 이 말씀을 가지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기 기능을 발휘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 자기가 죄인임을 노출하게 되고, 즉 말씀이 우리 속에 작용해서 우리가 모두 완전히 벌거벗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나는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게 아니라 "예수님은 주가 된다" 라는 쪽으로 말씀이 해석된다는 말이죠. 예수님의 주되심을 드러낸다는 겁니다.

그런데 신천지의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말씀을 지켜서 자기들이 평소에 살고 싶어하는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한다는 것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신천지만 그런 것이 아닌데, 그 신천지가 바로 기존의 한국교회에 나왔다는 겁니다. 지방교회도 역시 그렇고 말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중요한 것은 자리인데, 자리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는지,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고 하니까, 자기가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것도 죄가 되는 자리인데, 왜냐하면 그게 바로 자기가 살고 싶어하는 몸부림이니 말이죠.

그것을 제가 빨리 이야기를 했는데, 지금 구 목사님은 넘어져서 병원에 입원을 해서 녹취도 제대로 못하지 싶은데, 그래서 조금은 속도를 천천히 하려고 하는데 말이죠. (녹취 구 - 이제는 퇴원도 했고, 녹취를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고관절 정도는 괜찮습니다. ㅋㅋ)

'기능'에 대해서 !!

제가 '기능' 이라고 했는데, 이것을 좀 천천히 자세하게 해보자는 겁니다. 이 기능이 무엇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목욕탕에 가면, 여자 목욕탕의 경우에, 물론 저는 가본 적이 없고 제 아내의 말을 빌리자면, 거기서 때를 밀어주는 분들은 적어도 한 달이 500이상은 벌지 싶은데, 그런데 남자 목욕탕에서는 때를 미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겁니다.

거기에 보면 등을 미는 기계가 있는데, 그것을 이용하면 된다는 겁니다. 나머지 부위는 자기 손으로 밀면 되고 말이죠. 물론 나이가 많은 노인네들은 그 기계에 온 몸을 다 맡기기도 하는데, 아무튼 때를 미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가니 한 사람이 때를 미는데, 그런데 가만히 보니 옷을 입은 사람은 때를 밀어주는 그 사람밖에 없다는 겁니다.

세신사와 그 팬티 !!

요즘은 그러한 분을 '세신사(洗身士)' 라고 하는데, 기존의 전문용어로는 '나라시' 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다 벗고 있는데 왜 그 사람만 팬티를 입고 있을까요? 그것을 바로 일종의 표시인데, 즉 "나는 목욕을 하는 사람이 아니고, 때를 밀어주는 사람입니다" 라고 하는, 그 기능을 이야기해준다는 겁니다. 물론 그 사람도 자기가 목욕을 할 때는 옷을 벗겠지만 말이죠.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그 때밀이 아저씨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은 지금 부끄러워서 옷을 입는 것도 아니고, 폼을 잡으려고 입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 그것은 바로 자기가 돈을 벌기 위한 기능을 발휘하게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죄 많은 세상에서 모든 인간은 다 벌거벗은 것인데, 말씀 앞에서 말이죠. 그런데 어떤 사람은 농부고, 또한 교사고 의사라는 겁니다. 그렇게 각자의 기능을 발휘할 때는, 이것은 무엇인고 하니, 죄인이 아닌 것이 아니라 자기가 돈을 벌기 위해서 그런 기능을 했을 뿐이라는 말이죠. 그게 국회의원이 되었던 장관이 되었던 다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런데 마귀는 어떻게 나오는고 하니, 죄인이라고 하는 우리의 자리를 그만 떼버리고, "너는 의사니까 착하다. 행복하다. 잘되었다. 성공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때밀이 아저씨를 보고 "팬티가 참 멋있네요" 라고 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모독이라면 모독이라는 말이죠.

의사, 목사라는 기능을 통해서 죄가 !!

무슨 말인고 하니, 의사를 보고 "당신은 참 훌륭하십니다" 라고 하면 그것은 모독인데, 왜냐하면 의사라는 것은 자기가 죄인임을 가리기 위한 기능이기에 말이죠. 물론 목사도 그러한데, 자기가 죄인이면서도 목사라는 기능이 자기 죄를 가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이것을 달리 말하면, 목사라는 기능을 통해서 죄가 흘러들어 오는데, 그러니 교사를 통해서 죄가 들어오고 판사를 통해서 죄가 들어온다는 겁니다. 노벨상을 받으면 그 나라는 난리가 나는데, 하지만 노벨상의 경우에도, 그러한 상 자체가 무엇인고 하니까, 하늘나라에서 보면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선언이라는 것이죠.

우리에게 이러한 인식이 있어야 하는데, 자기 자식이 잘 되었다고 자랑질을 할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런 것은 자기 수치를 가리기 위한 팬티라고 보면 되는데, 즉 "이 세상은 팬티다" 라는 겁니다. 자기 딴에는 열심히 하는데, 그게 나라를 살리는 일이고, 가정을 살리는 일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서문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아줌마들이 뭐라고 합니까? 이런 장사를 해서 아이들을 다 학교를 보내고 결혼을 시켰다고 자랑질을 하는데, 하지만 그게 자기 죄를 가르는 팬티라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살렸습니까? 죽을 인간을 하나님께서 살려주셨다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들은 그 영광을 자기 노고와 희생의 덕으로 돌릴 정도로 자기 기쁨밖에 모르는데, 그러니 하나님의 기쁨에 대해서는 완전히 소외를 시키고 만다는 겁니다.

그것이 죄라고 하면, 그러면 의를 아는 사람은 뭔가 달라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목욕탕의 팬티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세상을 설명하는 것이 틀리지가 않다는 겁니다. 로마서 5장에 의하면, 모든 세상은 죄 아래에 있다고 하는데, 그 기준으로 보면 이게 옳다는 말이죠.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런데 TV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전혀 없는데, 방송기자를 보고 "당신이 이렇게 하는 것이 죄입니다" 라고 하면, 그 기자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자기는 그것이 나름대로의 사명이고, 그리고 자기 가족을 먹여 살리는 수단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제 아무리 자기 새끼들을 먹여 살려봐야 육인데, 그러니 살려고 하는 것 자체가 바로 "나는 죄 안에 가두어져 있습니다. 나는 저주를 무서워합니다. 나는 벌벌 떨면서 살아갑니다" 라고 하는 몸부림인데, 그러니 그것 자체가 자기가 원래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이 아니라, 흙에 불과하다는 티를 다 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남과 견주면 안 되는데, 비교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워낙에 뛰어난 신분을 받았기 때문에 비교불가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나는 죽은 자이나 산 자이고, 없는 자이지만 있는 자이다" 라고 하는데, 전혀 비교할 대상이 없다는 말이죠.

예수님과 존재 !!

방금 제가 "예수님은 존재가 아니라 기능적으로 움직인다" 라고 했는데, 여기서 "존재가 아니다" 라는 것을 조금 더 설명을 해보면 다음과 같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계시는데, 그 예수님을 존재로 여겼던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12제자들이라는 것이죠. 물론 예수님 주위에는 그들 외에 70제자들도 있었지만 말이죠.

이 12제자들이 주님을 가장 가까이 따라다녔는데,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생각을 했는고 하니, "남들은 예수님과 따로 있지만 우리는 항상 예수님과 같이 밥을 먹고 잠도 자고 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라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죠.

이것은 마치 교회에서 성도들의 단결을 촉구하는 모임을 가지는 것과 같은 생각인데, 크리스마스가 되면 온 교인들이 다 까운을 입고 성가대가 되는 교회가 있는데, 서울의 연세중앙교회라고, 거기에 또 정신이 나간 목사가 있는데 말이죠. 그러면 그렇게 같이 참석해서 찬양을 했다고 하면 어떤 감정을 느끼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다" 라는 의식이 강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가 되면 동그라미를 칠 수 있고, 그 "우리는 하나다" 라는 공격하는 자들은 전부가 적이 되고, 그렇게 적대세력을 유발시키면 시킬수록 거기에 대한 응집력은 더욱 더 높아지고 확고해진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는 교회들은 바로 그것을 노린다는 겁니다. 적을 만들게 됨으로서 이쪽의 단결을 촉구하게 된다는 말이죠.

지금 전교조에서 하는 주장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그런 논리인데, 그동안 박정희를 비롯한 독재정권이 개판으로 했으니, 거기에 대해서 반대로 하면 진리가 된다는 겁니다. 즉 "그들이 공산주의를 그렇게 핍박했으니, 우리는 포용해야한다" 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하나다" 라는 것을 만들기 위해서 적을 만드는데, 즉 "우리 교회를 보고 이단이라고 했으니 우리는 하나가 되자" 라는 식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게 바로 이단인데, 그러니 따지고 보면 모든 조직이 다 그러하다는 말이죠.

13명이 아니라, 한 명 !!

예수님의 12제들도 이런 식인데, 예수님 한 명과 제자들 12명, 그러면 13명이 되는데, 숫자를 그렇게 계산을 한다는 겁니다. 한 명, 한 명, 한 명, 그런 식으로 말이죠. 그런데 성령을 받고 나면 13이 아니라 1이 되는데, 왜냐하면 하나의 기능이 나오기 때문에 말이죠. 그게 존재라고 하면 숫자를 다 붙일 수 있는데, 그런데 한 덩이라고 하면 숫자 1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와 하나가 되고, 아버지와 하나가 된다" 라고 하셨는데, 둘인데 하나가 된다는 말이죠. 물론 아버지가 있고 예수님이 있지만, 아버지의 아들의 관계에 있어서 그게 기능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겁니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가 된다는 말이죠. 거기에 성도까지 더해져서 하나가 되는데, 이게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컨닝하고 싶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땅방울이 핏방울이 되게 기도를 하셨는데,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 말이죠. 그게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잘 나오는데, 누가 17장 22절을 한 번 읽어보세요.

(요 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여기에 보면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다" 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존재가 아니라 기능적으로 그렇다는 겁니다. 존재는 제자들의 실패한 인식인데, 존재로 나가게 되면 죽어야 구원이 되는 것으로 여긴다는 말이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미 '하나' !!

그런데 기능이 되게 되면, 죽지 않아도 그리스도에 의해서 다루어지고 움직이게 되면, 그렇다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겁니다. 셰익스피어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라고 했는데,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는데,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있고, 자기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미 하나라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삼층천을 보고도 자기 자랑을 하지 않았고, 또한 자기 몸에 사탄의 가시가 있어도 주저 없이 복음을 전했는데, 즉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나이다" 라고 하게 된 것이, 그게 바로 기능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기능적으로 '하나' !!

기능적으로 하나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목욕탕에서 때를 미는 사람이 옷을 벗어야하는 목욕탕 안에서 왜 팬티를 입는고 하니, 그것은 때를 미는 자기 기능에 도움이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나는 당신과 다른 기능으로 목욕탕에 있습니다" 라는 것을 표시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도가 교사라고 하면, 다른 교사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하면, 자기는 죄인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교사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고 교사를 사표내면 안 되는데, 버티면 연금도 제법 나오는데 왜 사표를 내느냐는 말이죠.

그러므로 교사를 하던 의사를 하던 사업을 하던, 그 무엇을 하던 간에 성도에게 있어서는 모두가 다 죄를 드러내기 위함인데, 사업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그 사업을 통해서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지, 즉 자기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은 더욱 더 심화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이 사업을 하면 할수록 더욱 더 강렬해지는데, 즉 "나는 이번에 부도를 맞으면 다 망한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너무나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한, 그게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죠.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어떻게 해도, 남편이 따박 따박 돈을 주는 이상은 참으로 이혼을 하기가 힘이 든다는 겁니다. 어제 오후시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자기 부모나 자기를 힘들게 할 때는 이혼을 하지 않는데, 그런데 자식을 건드리게 되면 단방에 이혼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남편이 아무리 바람을 피워도 자기 자식을 예뻐한다고 하면, 그러면 이혼을 하기가 매우 곤란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경우에는 이혼을 하지 않는 것도 역시 죄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혼을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가 살기 위해서 남편을 이용하는 것이니 말이죠.

그만큼 죄라는 것은 존재가 아니고 기능인데, 우리는 죄라는 그 기능, 즉 "나는 죽으면 안 돼" 라고 하는 자기밖에 모르는, 그렇게 자기 영광과 자기 체면과 위신밖에 모르는, 우리는 그렇게 줄곧 살아왔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성깔을 어떻게 고칩니까? 설령 뜯어고친다고 해도, 그 대안이 전혀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살지 않으면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는 겁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있습니까? 그게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게 죄라고 해도 우리는 포기를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살기 위해서 말이죠. 어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 자기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는 겁니다.

고기와 말라비틀어진 가죽뿐 !!

그저 밥솥에 밥이 있고, 쌀통에 쌀이 있으면 아무런 걱정이 없는데, 그러니 쌀이 우상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 쌀이 떨어지는 순간이 오면 그야말로 난동을 부린다는 겁니다. 물론 과거에 젊었을 때는 결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데, 그때는 품위를 유지하고 고고함과 천심을 지키면서 살았는데, 그런데 그 위선의 껍데기가 점점 얇아지면서 실체가 드러나게 되니,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냥 고기에 가죽을 입힌 것과 불과한데, 그것도 점점 더 흙이 되어가는, 그렇게 말라가는 고기라는 말이죠. 아무리 과거에 탱탱했다고 해도, 지금 자기의 모습이 그렇게 말라비틀어진 육포와 같은 존재라고 하면, 그런 지난 잘남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겁니다. 그때는 나훈아의 고장난 벽시계를 부르게 되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냥, 죽어라. 이제는 그냥 죽어도 괜찮아. 아무리 말라비틀어져도 괜찮아" 라고 하시는데, 왜 그렇습니까? 주 안에 있는 것이 생명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을 통해서 생명을 더욱 더 보여주게 되는데, 자기가 멀쩡하게 살아있으면 생명을 더 보여주지만,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더욱 더 풍부하게 바깥으로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는 말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주님은 존재가 아닌 기능인데, 그렇게 존재가 아니기에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지순례라는 것이 말이 안 되는데, 그리고 교회에도 오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닌데,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 주님의 기능이 나타나게 되면, 그게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란 말이죠. 물론 마지막 때에는 모이기를 힘써야 하는데 말이죠.

그러니 주님의 기능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과 함께 있던 제자들이 나중에 사도가 되고 난 다음에, 그 사도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살펴보게 되면, 그리고 스데반 집사님이 어떻게 살았는지 살펴보게 되면, 그들이 과연 어떻게 살았습니까?

스데반 집사님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까, 주의 기능이 팍팍 나온다는 것인데, 돌에 맞아도 주의 기능이 나온다는 겁니다. 자기가 남들이 보기에 경건한 일을 해도, 그게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주님께서 하셨다고 하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 그게 바로 새 생명 속에서 살아가는, 즉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주께서 하셨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에 !!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종종 보여주시는데, 그 중에 하나가 누구인고 하니,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이라는 겁니다. 이 사마아아는 북쪽 이스라엘의 수도였는데, 그 북쪽이 BC 722년에 앗수르에게 망하고 난 뒤에, 앗수르가 아예 그 사마리아의 혈족을 교체를 시켜버렸다는 겁니다. 그들을 이란 남쪽으로 옮기고, 그쪽에 살던 자들을 여기 사마리아로 데리고 왔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 사마리아 땅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는데, 산에 있어야 하는 사자가 마을에 와서는 그만 사람들을 물어 죽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 이유를 알아보니, 이 땅에서는 이 땅을 지배하는 신의 율법을 지켜야 하는데, 그것을 지키지 않아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이란 남부에 포로로 잡혀왔던 제사장을 다시 거기에 보내서, 그때부터 그들이 여호와를 섬기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겨우 명맥을 이어온 자들이 사마리아인들이고, 그 후손이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은 사실 유대인이 아닌데, 혼혈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이방인들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이방인데, 즉 존재는 이방인인데 그런데 그 기능은 마르지 않은 샘이 된다는 겁니다. 참으로 희한한데, 존재는 이방인인데 그 기능은 마르지 않은 성령의 샘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해서 이 사마리아 여인이 팔자를 고쳤습니까? 어떤 좋은 수가 있습니까? 없는데, 그 존재는 그냥 그렇게 살아갈 뿐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때밀이의 팬티와도 같은 것인데, 죄를 가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기능인데, 그 기능은 계속해서 "나는 메시야를 만났다" 라는 것이 나온다는 겁니다. "나는 구원이 되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 라는 기능이 말이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형편이 나아지고 몸이 건강해지는 것이 아닌데, 이 세상의 육은 그냥 없어질 요소로서 남겨질 뿐이라는 겁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한 마디로 하면, "자기 형편에 너무 신경을 쓰지 말자" 라는 것인데, 그러니 자기 형편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우리보다 더 어렵게 살면서도 그런 기능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우리보다 훨씬 더 더러운 팬티를 입고 살아가는 자들이 많이 있다는 겁니다.

시에라리온 !!

아프리카에 '시에라리온' 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에 에볼라 바이러스로 인해서 무려 4,000명이나 죽고 고아만 12,000명이 발생했다고 하는데, 인구도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하는데 말이죠. 그 나라의 고아들은 그야말로 비참하게 사는데, 고아원이 제대로 있어서 아이들을 돌보아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알아서 비참하게 살아간다는 겁니다. 아이들은 하루종일 일을 해도 겨우 몇 백원을 받는 정도라는 말이죠.

우리가 그런 것을 방송으로 보면, "어떻게 저렇게 살지?"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들이나 우리나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서로 관계를 맺어야하는 주님 안에서의 형제가 된다는 겁니다. 그들은 그것을 통해서 죄를 드러나게 하고, 또 우리는 우리대로 이렇게 죄를 드러내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각자의 기능이 다를 뿐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북한과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굳이 남쪽으로 와야 신앙생활을 잘하고 하는, 그런 것은 없다는 말이죠. 북한은 북한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기능적으로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물론 북한에 성도가 있는지 없는지, 그것은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하지만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말이죠. 그러면 아바이 수령이 어떻든 간에 그렇게 살아간다는 겁니다.

심각하게 살지 말자 !!

그러니 모든 사람은 각자에게 주어진 대로, 그 필요에 의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전혀 남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에 대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 심각하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성도의 모습이 아니라는 겁니다. 심각하게 산다는 것 자체가 마귀의 시험에 들린 자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설령 자기가 잘못해서 교통사고가 나서 사람이 죽고 해도, 그것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거기에 대해서 자기에게 책임을 너무 무겁게 지우지 말라는 것이죠. 우리에게는 그런 자격조차도 없다는 겁니다.

거기에 적당한 단어가 '배째라' 라는 것인데, 조금이라도 양식이 있으면 그런 표현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나이가 들고 몸이 불편하면, 자동적으로 '배째라' 라는 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젊었을 때는 이 '배째라' 라는 것이 하루에 3초 동안 그렇게 했다고 하면, 이제 나이가 80이 넘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게 하루에 23시간 59분 57초라는 겁니다(ㅋㅋ). 이것은 그야말로 자연의 이치인데,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제 교재 72페이지를 보겠는데, 자기 자리가 중요하고 주님의 기능이 중요하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이 주님의 기능에 대해서 조금 더 넓게 생각해보겠습니다.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책임지려고 하지 마세요" 라고 했는데, 그러면 그게 대외적으로 남들에게 어떻게 되느냐는 겁니다.

양초, 화장품, 치약 !!

제가 3가지 물건을 언급하겠는데, 그것이 양초, 화장품, 치약인데, 여기에는 공통점이 있다는 말이죠. 그게 무엇입니까? 이게 처음에는 굉장히 많은 것처럼 보이는데, 그런데 화장품의 경우에는 처음에는 많아 보이지만 자꾸 쓰다가보면 금방 줄어든다는 겁니다. 남자들은 여자와는 달리 화장품을 많이 바르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치약도 그러한데, 쓰다가보면 어느 새 홀쭉해져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우리 인간의 모습인데, 그리고 초의 경우에도 그 길다란 초가 금방 짧아지고 만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은 소모품인데,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말이죠. 어떻게 말인가요? 보이는 것은 잠깐이라는 것인데, 즉 "인생은 안개다" 라는 겁니다. 그것은 야고보서의 말씀이고, 그리고 시편의 경우에는 인생은 손바닥만하다고 하는데, 그런데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한다는 말이죠.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

그게 우리 인생의 기능인데, 그리고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아내와 사는 것도 잠깐이라고 하는데, 또한 아무리 돈을 금고에 쌓아놓고 산다고 해도 역시 잠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결혼을 해서 사는 것, 또한 돈이 많이 있는 것,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가정문제나 돈 문제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런 것은 후딱 지나간다는 겁니다.

(고전 7: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제가 여기서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만, 그런데 집에 가서 케이블 TV를 틀어보면 나오는 것이 전부 무엇입니까? 가는 세월을 붙잡으려고 난리인데, 하지만 가는 세월을 어떻게 붙잡을 수 있습니까? 요리프로, 건강프로, 그리고 홈쇼핑, 그런 것들이 다 무엇입니까?

음식은 어떤 것들을 먹어야 맛이 있고 건강해지고, 그리고 옷은 어떻게 입어야 젊어 보이고, 우리가 그런 것에 완전히 포위된 입장이라는 겁니다. 뉴스도 그렇고 드라마도 그렇고, 물론 오락프로도 역시 그렇고, 그야말로 완전히 숨이 막힐 지경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포위를 하게 한 것도 역시 하나님의 뜻인데,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비언약적인 것들을, 예수님의 흔적을 지우는 악마적인 것들 속에 우리가 둘러 쌓여있는고 하니, 그 속에서 우리가 바늘침이 되어서 제대로 찌를 수 있는 기능을 발휘해보라는 겁니다.

어두워질수록 믿음이 약해지는 것이 아닌데, 오히려 어두워질수록 믿음은 그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등불을 등경 위에 두는데, 그것은 어둠을 오히려 보더 더 심화시키라는 말이죠. 즉 "왜 예수님 빼놓고 이 세상은 지옥일 수밖에 없는가?" 라는 것을, 그것은 매우 신바람이 나는 마음으로 이 세상에 대해서 지적질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마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드라마를 보면서 !!

그 기능을 바로 구약에서는 선지자가 감당을 했는데, 천상회의에 참석한 선지자가 그 기능을 담당한다는 말이죠.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 하려면 사람을 만나야 하지를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물론 사람을 만나서 할 수도 있지만, 먼저 TV를 틀어놓고서 드라마 작가와 싸우는 것부터 하면 된다는 겁니다.

작가가 드라마를 통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펼치게 되는데, 그러면 드라마를 보면서 "잠언서에 보면 저것은 말이 안 된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그것은 엉터리야. 요한계시록에서는 주 안에서 자는 자는 행복하다고 했는데, 그것은 전혀 마귀적이야" 라고, 그렇게 평소에 연습을 많이 해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누구를 만나게 해주시면 평소에 연습을 해주었던 것을 실습을 하면 되는데, 그런데 그런 과정이 없으면 지나고 뭐라고 합니까? "아하, 내가 그 말을 하지 못했어"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시도 때도 없이 복음을 전하라고 했는데, 그런데 자기는 시도 때도 없이 주눅이 들어서 꿀 먹은 벙어리 역할만 했다는 말이죠.

그래서 "다음에 만나면 잘해야지" 라고 하는데,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주님 소관이지, 자기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가 억지로 전화를 해서 만나려고 해도, 상대방이 눈치를 채고 거절하기 십상이라는 것이죠. 물론 택한 자라고 하면 주님이 또 다른 사람을 사용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겠지만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의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이 주는 것조차도 주님의 기능에 포함이 되어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버스를 타면, 사람들이 하는 말이 과연 복음적인지를 들어보라는 말이죠. 시끄럽다고 하지말고, 그들이 무슨 불신앙적인 이야기를 하는지 잘 들어보라는 겁니다.

여기서 교재 72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KBS 뉴스시간에 "오늘도 헛된 날이었습니다. 여러분, 헛되게 살다가 안녕히 주무십시오. 하지만 안녕히 주무시는 것도 헛된 일입니다" 라고 합니까? 그런 멘트로 끝을 맺을 수는 없을 겁니다.

여러분, 희망찬 2018년이 밝았습니다 !!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희망을 주는데, "여러분, 2018년이 밝았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올해가 개띠라고 하는데, 그래서 개처럼 살라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말이죠. 이렇게 새해가 되면 기자가 거리에 가서 사람들을 인터뷰하는데, 모두들 추워서 외투를 입고 모자를 쓰고 있는데 말이죠.

그러면 기자가 마이크를 대고 "새해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상대방은 기다렸다는 듯이 "올해도 우리 가족이 건강하게 잘 지내기를 소원합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사전에 다 약속이 된 멘트인데, 아무튼 그렇게 인간들은 희망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말씀은 무엇인고 하니, 여기서 전도서 1장 12절에서 14절을 보겠습니다.

(전 1:12)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전 1:1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전 1:14)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괴롭고 수고할 수밖에 없는 인생 !!

여기 13절에 보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라고 하는데, 솔로몬이 자기가 공부를 좀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솔로몬이 뭐라고 합니까? 자기가 그렇게 공부를 해보니,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괴로운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수고를 하게 하신 것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우리의 인생은 고생을 좀 하라고 주신 인생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러한 고생이 있을 수밖에 없는 임시땜방의 세월을 지내고 있다는 겁니다. 고생을 하라고 잠시 허락한 세월, 그게 우리의 인생이라는 말이죠. "너희가 인생을 알아?" 라고 하는 멘트도 있지만, 인생이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고생이라는 겁니다.

일란성 쌍둥이 !!

여기서 좀 어려운 것을 해보겠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고생을 하라고 하시는데, 왜 우리에게 고생을 하라고 하시는 겁니까? 어제 오후시간에 일란성 쌍둥이 이야기를 했는데, 아만다와 케이티라고, 그게 '인간극장'에 나왔는데 말이죠. 둘 다 나이가 33살인데, 쌍둥이이니 당연히 나이가 같다는 겁니다. 그렇게 나이가 들어서 만났는데, 둘 다 놀았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자기말고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 또 살아있으니 말이죠.

그러면서 제가 설교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예수님과 우리가 일란성 쌍둥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 근거가 로마서 5장(고전 15장?)에 나오는데, 기존의 아담이 아닌 또 다른 아담이 있다는 말이죠. 우리가 알고 있는 아담은 첫 번째 아담이고, 그런데 두 번째 아담이 있다는 겁니다. 두 번째 아담을 마지막 아담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고전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 15: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고전 15: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그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 땅에 보내셨다" 라는 겁니다. 이 땅에 인간들이 분명히 있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없다고 하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져야 참된 인간인데, 그런데 그런 아들과 같은 인간은 없으니, 그것은 분명히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죽이는데, 즉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마치 양초처럼, 화장품처럼, 치약처럼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일란성 쌍둥이라고 하면,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을 그대로 우리에게 일어나게 하시는데, 쌍둥이니 같은 기능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능이 하나가 아니고 두 개가 있는데, 그게 바로 축복과 저주인데, 그렇게 두 개라는 말이죠.

그래서 천국이 따로 있고 지옥이 따로 있는데, 둘 다 예수님께서 만들었다는 겁니다. 예수님과 같이 사는 동네를 천국이라고 하고, 따로 떨어져서 사는 동네를 지옥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예수님이 개입되지 않으면 전혀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영화 '신과 함께' !!

제가 십자가 마을에 '신과 함께' 라는 영화 평을 올려놓았는데, 벌써 800만명을 돌파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동양적인 종교관에 의해서, 사람이 나중에 염라대왕에게 가서 7번 재판을 받을 때, 무엇을 가지고 재판을 받는지, 그것을 집약해서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남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 특히 부모공경이 제일 중요한데 말이죠.

그렇게 이 땅에서 남들을 위해서 살아가게 되면, 나중에 그 업보에 의해서 좋은 곳에 가는데, 반면에 이 땅에서 남들을 괴롭히고 해꼬질을 하게 되면 그 정도에 따라서 형량이 주어지게 되는데, 그러니 그 복역의 시간이 정해져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동양적 사고방식에서는 무엇을 버리지 못하는고 하니, 시간을 버리지 못한다는 말이죠. 조금 악하게 산 사람은 지옥에서 3년을 살고, 더 악한 사람은 5년을 산다는 겁니다. 그런데 착한 일이 절반을 넘어선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극락에 가는데, 그 정도에 따라서 약간은 편한 극락, 조금 더 편한 극락,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결국 시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양적으로 계산하는데, 즉 시간의 양과 인간의 선의 양을 비교해서 균형을 맞추는 것이 합리적인 처벌법이고, 그게 합리적 보상이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사고방식이고 하니, 마귀가 첫 번째 아담에게 뒤집어씌운 선악적인 사고방식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두 번째 아담은 선악의식과 관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전혀 관계가 없는데, 선과 악이 아니라 생명나무로 심판을 하신다는 겁니다. 즉 생명나무가 있으면 천국이고, 없으면 지옥이라는 말이죠. 그것을 생명책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는데, 그 생명책에 명단이 기록된 사람은 행함책과 비교가 되어서 천국에 가고, 반면에 행함책에 기록된 자들은 무조건 유황불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이 일관성이 있다는 말이죠.

(계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계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계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계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예수님, 축복과 저주 !!

다시 정리하면, 예수님의 속성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게 축복과 저주라는 겁니다. 축복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봐주시는 것인데, 즉 주님이 사랑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에 간다는 말이죠. 그것은 우리가 죄를 짓고 말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주님 쪽에서 봐주고 말고 하는 것에 결정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착한가?" 라는 것이 아니라, "내 바깥에 계시는 분이 나를 어떻게 생각해주시는가?" 라고 하는, 거기에 따라서 천국과 지옥에 결정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내가 얼마나 교회에 열심히 다녔는가?" 라는 것은 전혀 소용이 없고, "예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 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너는 죽어라 !!

그래서 제가 어제 낮 예배시간에 "신약에서는 법을 지키는 당사자를 없애버린다" 라고 했는데, 신약에 오게 되면, 즉 마지막 때가 되면 법을 지키려고 하는 당사자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자기 자신인데, 자기가 해놓고 자기가 기억을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아예 죽여버리는데, 그런 것은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너의 운명과 너의 장래는 너의 손에 달린 것이 전혀 아니다" 라는 것인데, 즉 "내 하기 나름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기에 따라서 모든 것이 끝난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봐주시면 천국이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이라는 겁니다.

거기서 나오는 명칭이 바로 '남은 자' 라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 인간은 어쩔 수가 없는데, 자기가 아무리 남고 싶다고 해도, 그렇게 해서 남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오직 주님의 뜻에 의해서 남게 되고, 그렇게 남은 자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이 아니라, 외부에서 남겨주셔야 한다는 것이죠.

기쁜 소식 !!

그러니 이게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 모르는데, 자기 인생을 자기가 알아서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말이죠. 물론 그게 슬픈 소식인 사람도 있겠지만, 성도에게는 그것이 기쁜 소식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 운명을 자기가 개척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결코 슬픈 소식이 아닌데, 그야말로 감사하고 덩실덩실 춤을 추어도 괜찮은 소식이라는 말이죠. 팬티를 입고 춤을 추어도 괜찮다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남탕의 때밀이는 얼마를 버는지 참 궁금한데, 저는 아무리 봐도 때를 미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는데 말이죠. 겨우 하루에 3명 정도이지 싶은데, 그래서 한 사람에 2만원이라고 하면 6만원인데, 그러면 한 달에 200만원 정도는 되지 싶은데 말이죠. 아무래도 주말에는 손님이 조금 더 있지 싶다는 겁니다.

아무튼 그렇게 버나 이렇게 버나, 때를 민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고, 물론 때를 밀지 않는다고 해서 지옥에 가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좋은 차를 타든 그렇지 않든 간에, 백화점에 가서 비싼 옷을 사던 서문시장에 가서 저렴한 옷을 사던, 그런 것으로 인해서 우리의 장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하지만 그런 것에 푹 빠진 인간들은 다 지옥에 간다고 보면 된다는 겁니다.

인생은 연극 !!

우리는 바늘을 가지고 그런 세계에 대해서 찌를 준비만 하면 되는데, 이 세상 자체가 하나의 드라마이고 연극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잠깐 있다가 모두들 무대에서 내려와야 하는데, 그러면 그 다음에는 우리 후손들이 올라가서 연극을 하다가 또 내려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또 그 후손들이 그렇게 하고 말이죠.

그리고 그 연극에는 모두 스토리가 있는데, 그런 스토리를 우리는 많이 듣고 있는데, 그런데 그것이 고만고만하다는 겁니다. 닮아있는데, 재탕이고 반복을 한다는 말이죠. 자기가 들었던 이야기에 자기가 보태서 또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런 식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너무나 많이 들어서,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그렇게 세뇌에 세뇌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성령이 오셔서 어떻게 하십니까? 바늘로 콕콕 찌르는데, "이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니가 니 방식대로 사는 것이다. 주님이 살게 하시는 삶은 그게 아니다" 라고 말이죠.

그러니 바로 그렇게 비늘로 콕콕 찌르는 것이 주님이 살게 하시는 삶이고 인생이라는 겁니다. 물론 이 세상은 심각한데, 하지만 우리는 심각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전혀 심각하지 않으니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심각한 인생을 살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자아와 주체 !!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러한 작업을 주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 어제도 이야기를 했지만 너무나 어려워서 그냥 지나겠는데 말이죠. 파스를 가지고 다리에 있는 털을 제거하는 제모작업인데, 즉 "나로부터 나를 떼어내는 작업", 그러면 그 '나'는 누가 만들었는고 하니, 주님께서 만들었다는 겁니다. 이것을 '주체' 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러면 기존의 '나'는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자아' 라는 것인데, 그 자아는 외부에서 들었던 풍월로 만들었다는 말이죠. 즉 "남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지? 내가 원하는 것은 남들이 가지고 있고, 그러니 그런 남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가지고 오면서 내가 형성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자아라는 것인데, 그러니 "나는 어떻게 살까?" 라고 하면, 그것은 바로 남들이 사는 것을 그대로 수입해서 모방해서 사는 것, 그게 바로 '나', 즉 자아라는 겁니다. 남들이 살아가는 것을 그대로 모방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1월 1일에 사람들이 해가 뜨는 것을 보러 가는데, 왜 그렇게 차가 밀리고 하는데도 해를 보러 갑니까? 그것은 남들이 다 가니 자기도 간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때 뜨는 해나 오늘 뜨는 해나 다를 것이 있습니까? 전혀 없다는 겁니다.

자연과 인간의 욕망, 그리고 문화 !!

그러니 자연에 인간의 욕망을 집어넣으면, 그게 무엇이 되는고 하니, 그것이 바로 그 시대의 문화가 된다는 겁니다. 자연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해에게 무슨 달력이 있습니까? 그런 것이 없는데, 그런데 인간의 욕망, 즉 남들처럼 살고 싶다고 하는 욕망을 투여하게 되면, 그게 '우리끼리'의 문화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에게 인간의 욕망을 삽입시키게 되면 그게 기독교라는 종교가 되고 마는데, 즉 "이렇게 해야하고, 저렇게 해야한다" 라고 하는 법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예수님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로 구원을 받는 셈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이것은 이단인데, 물론 이런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저를 보고 이단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러니 "나에 대해서 나를 떼어내야 한다" 라는 겁니다. 이 세상이 만든 자아가 주체를 그만 가리고 있는데, 자기가 알아서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이 되어있는데, 그런데 그 예수님을 누가 가리고 있습니까?

나는 망하지 않겠어 !!

거기에 대해서 '나' 라는 것이, 즉 "나는 이렇게 착해야하고, 나는 말씀을 지켜야한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자기가 만든 욕망이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아가 주체를 그만 숨이 막히도록 꽉 꽉 눌리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온갖 걱정근심을 다 끌고 오는데, 즉 마귀의 시험이라는 시험은 모두 다 끌어 모으고 모은다는 것이죠. 남들에게 창피를 당하지 않는 인생을 살겠다고 하면서, 망하지 않는 인생을 살겠다고 하면서, 그렇게 자꾸만 자아가 주체를 억압하고 핍박을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이 주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핍박을 한다는 것이죠. "주님께서 나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라고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렸는데, 우리가 그런 피를 흘린 적이 있습니까?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으면서, 모든 것을 다 주신 분에게 원망을 한다는 겁니다. "내 인생이 이게 뭐야?" 라고 하면서 말이죠.

끝까지 사랑 !!

그렇게 자꾸만 주님을 비난하고 욕을 할 때, 그러면 주님을 얼마나 괴롭겠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사랑으로 어떻게 나옵니까? "니가 그렇게 생겨먹은 것을 어떻게 하겠노? 첫째 아담은 그런 짓을 하는 것이 주특기이다" 라고 하시면서 끝까지 용납해주신다는 말이죠.

바로 그런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서, 그 사랑의 덕분으로 결국 우리에게 있는 이 '나' 라는 것을 완벽하게 뜯어내고 마시는데, 그래서 우리는 그런 주님의 사랑이 만들어낸, 그러한 사랑의 덩어리로서 천국에 합류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보면,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라고 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믿음과 소망과 다 '나'로부터 관련이 되어있지만, 이 사랑이라는 것은 주님이 원천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사라지고,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늘어뜨려진 혹과 같은 것, 그것이 우리의 주체로서, 우리가 그렇게 해서 천국에 가게 된다는 말이죠.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공짜로 주어진 생명나무 !!

이제 정리를 하겠는데, 선악과는 우리의 자아를 형성하지만, 생명나무는 그냥 주시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생명나무 자체가 우리의 이 선악과 속에 들어와서는, 생명나무가 우리에게 핍박을 받고 미움을 받게 되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형국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도록 하시는데, 왜 우리 자신이 죄인이기에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 이러한 모습으로 살아야 주님의 기능이 나오게 된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낯선 인식을 허락해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없이 혼자 살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그야말로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기능이고, 그렇게 일하시는 주님의 열매일 줄을 알고, 언제나 주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기뻐하고 그것을 널리 전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8,1,5 오후 10시에 마침.
우리 주님도 기능으로서 살았는데, 이 놈의 자아가 문제로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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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평 [신과 함께]
2017-12-12 이근호

(줄거리)

주인공 김자홍은 소방관이다. 직장에서 매우 헌신적인 모범 소방관이다. 화재 현장에서 앞 뒤 안 가리고 위험한 시민들을 건진다. 심지어 자기 동료의 목숨보다 다른 무고한 시민들 건지는 것이 더 옳다고 여긴다. 그러다가 어느 고층 건물 화재 현장에서 어린 소녀를 건지면서 땅에 떨어져 장렬하게 순직하고 만다.

주인공의 가정은 어릴 때부터 매우 불우하다. 홀어머니와 남동생이 있다. 홀어머니는 말을 못하고, 남동생 김수홍은 고시 공부하다가 군에 복무 중이다. 주인공은 비록 소방관이지만 15년 째 집에 안 들어간다. 그런데 과거에 세 식구가 너무 사는 게 힘들어 동반 자살을 도모했는데 베개로 주무시는 어머니의 얼굴을 덮어 죽이는 역할을 한 게 마음에 가책이 되어 15째 손 편지와 생활비만 계속 집에 붙여준다. 편지 속에서는, “저는 결혼해서 잘 삽니다”는 거짓말로 어머니에게 희망을 이어주려고 한다.

동생은 군에서 심약한 신입 사병에 마음 끌리게 되는데 그 사병은 소위 ‘관심 사병’이라서 부대에서 따돌리고 병영 생활에 힘들어한다. 착한 주인공 동생은 그를 늘 곁에서 지켜준다. 어느 비 오는 날, 같이 보초 서다가 그만 그 사병이 쏜 오발탄에 의해 치명상을 입게 된다. 소대장 중위는 주인공 동생이 죽은 줄 알고 병원에 데려가지 않고 산에 가 신병과 공모해서 산채 동생에 파묻고 만다. 그리고서는 소대장은 동생이 탈영했다고 소문낸다.

동생은 죽어서 분노가 삭이지 못하고 원귀가 되어 이생을 떠돈다. 완전히 저승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인공의 사정을 그를 둘러싼 가족들의 일상을 같이 엮어놓고 저승 법정은 이 주인공을 최후 심판을 감행한다.

저승은 총 7 지역으로 나뉘어 실시된다.

살인 지옥→나태 지옥→거짓 지옥→불의(不義) 지옥→배신 지옥→폭력 지옥→천륜 지옥 순서로 재판을 받는다.

살인 지옥은, 직접 살인과 간접 살인을 여부를 묻는다.
나태 지옥은, 일생을 살면서 게으름 여부를 따진다.
거짓 지옥은, 거짓말의 빈도를 따진다.
불의 지옥은 의롭지 못한 짓을 따진다.
배신 지옥은, 비겁하게 배신한 것을 문제삼는다.
폭력 지옥은, 타인에게 신체적 힘을 가한 것을 따진다
천륜 지옥은, 부모에게 효도를 어느 정도로 했는지를 따진다.

재판장은 그때마다 ‘대왕’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있고, 검사도 있다. 변론해주는 차사도 있는데(3명, 남자 둘, 여자 하나) 이들은 귀인(=의인) 49명만 무사히 지옥 법정을 죄 없이 통과시키면 이들도 다시 세상을 환생할 수 있다. 물론 환생할 때는 자신의 원한 일생을 재 선택할 권리를 보상으로 갖는다.

그래서 이승을 수시로 왔다 갔다 하면서 귀인(=의로운 자)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것이다. 이들 차사(=저승사자=변호사 역할자)에게 마침 주인공이 눈에 뜨인 것이다. 화마에서 어린 소녀를 구하는 사건을 그토록 반기면서 저승의 7가지 구역을 무사히 통과하도록 전력을 다하여 지켜준다. 심지어 이 와중에서 자신의 미래까지 희생해가며 선(善)한 자가 벌 받지 않도록 도와준다. 어느새 주인공의 선한 일에 감동받은 것이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주인공에 대한 지나온 생애가 다 드러나는데, 그때마다 주인공이 행한 모든 것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최선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결국 재판장마다 무죄, 무죄를 연발한다.

비록 주인공이 간접 살인으로 보이는 행동과 돈을 위해 일한 것처럼 보이는 행동과 희생당한 동료들의 남은 가족에게 마치 아빠가 살아 있는 것처럼 편지를 보낸 거짓말과 어릴 적, 동생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과 부모를 죽이려 한 일까지 모든 행위들이 선한 동기에 유발된 선한 양심의 발로였음이 알려지면서 저승 재판에 관여했던 재판장 및 검사들까지 감동으로 주인공을 편들게 만든다.

영화 끝머리에서는 오발탄으로 죽어 원한을 머금은 채 이승을 떠나지 못했던 동생(김수홍)마저 49번째 귀인(의로운 자)로 추천된다. 동생은 형을 이해하고, 형이 남긴 말을 마음의 귀감으로 삼는다. “지난 번 일로 새로운 눈물을 낭비하지 말라”

(평)

영화를 줄곧 죽은 것에 대해서 이유 없이 겁을 집어먹고 있는 분위기로 몰아간다. 어떻게 하던 심판뿐인 저승에 가지 않고 이승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유일한 희망인 것처럼 역설한다. 그래서 착하게 살면 언제든지 다시 이생에서 후딱 되돌아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죽어서도 ‘시간’은 여전히 흐른다는 사실이 징벌의 전제 조건으로 가동된다는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즉 지옥이 힘들지만 형벌의 시간이 짧고 길고가 융통성 있기 적용되기에 그 점을 감안해서 인간이 이 생을 살 때 될 수 있는 대로 선하게 사는 것이 지혜롭다는 것이다. 죽고 난 뒤까지 이어지는 장래를 위해서도 막 살아서는 아니 된다 고 교훈을 주고 싶은 것이다.

특히 부모를 위해서 한 일은 형량에 있어 최고의 감안요건이 된다는 것이다. 혈육의 중심부에 부모가 있는 것이다. 믿을 것과 지킬 것은 오직 가족뿐이며 기대할 미래는 가족의 영속성뿐이라는 일반적 통념에 충실한 영화다.

(복음적 평)

영화는, 육 자체에서 뿜어지는 인식 자체가 곧 비-정상적인 피조물 의식이다 는 사실에 어둡다. 육으로 육을 살리려하고 내세까지 해결해보려고 한다. 즉 육 안에서 발견되는 불확실성과 불안과 쫓김과 미흡함을, 육의 연장선에서 발의한 내세의 영역(저승, 지옥, 낙원 의식)과 연계해서 미리 대비하여 내세까지 고통 없는 생활을 영위하려고 한다.

이를 통해서 성경에서 단정짓는 원칙, 곧 어떤 신을 믿든지 ‘자기를 위하여’는 무조건 우상을 신봉하고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다.(출 32:8/출 20:4)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 곧 악마의 일이다. 자신의 심성과 자신의 양심과 자신이 지켜온 바로 그것을 지속적으로 지키기 위해 (자기 의(義)동양 종교이든 서양 종교이든 달려들어 몰입하는 것, 바로 모습이 표면화된 악마의 얼굴이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9-11)

영의 사람은 오직 예수님을 위해서 매사가 일어남을 아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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