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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7 22:58:41 조회 : 245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36 - 유빙(遊氷) 이름 : 구득영(IP:203.223.97.179)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36 - 유빙(遊氷)

08,06,04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89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 '그 입을 다물라' 라는 것은 '너는 허무한 존재다' 라는 뜻입니다. 좀 더 어렵게 설명하면, 3차원 정보를 2차원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바뀝니다.

성경에서 "나는 허무하다" 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그게 3차원에서 2차원으로 넘어오게 되면 그 의미가 보다 더 분명히 드러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3차원이 조각이라고 하면 2차원은 회화, 즉 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혹은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런 것은 전부가 평면이라는 겁니다.

이런 그림이나 사진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깊이가 없다는 것인데, 마치 피부 위의 상처처럼 말이죠. 그런데 그 상처를 옆에서 보면 피부가 먼저 있고 그 위에 상처가 얹어져 있는데, 3차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세상을 그런 3차원이 아닌 2차원적으로 보는데, 즉 인생의 깊이가 없다는 말이죠. 그것을 두고 "촐랑댄다. 까분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이라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 90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전도서에 나와 있는 모든 시간의 나열은 스냅사진과도 같습니다. 찰칵, 찰칵, 계속해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을 전부 사진으로 찍어서 '그것은 헛되고 장래 일을 알지 못한다' 라고 단언을 합니다.

삶에는 건너뛰기가 없다 !!

스냅사진은 동영상이 아닌데, 사진과 사진 사이가 끊어져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사이에는 뭔가가 빠져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그러한 스냅사진이 아닌데, 즉 "삶에는 건너뛰기가 없다" 라는 겁니다. 살아가는 것이 힘이 든다고 해서 한 박자를 쉬면서 나갈 수는 없는데, 계속해서 이어져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사람들은 결과만 얻으려고 하는데, 그러면 무엇이 누락되고 맙니까? 그런 결과를 얻기 위해서 노력한 모든 것은 다 생략되어 버리고, 그 결과만 보고 "나도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성공한 인생을 보게 되면 그렇게 넘보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세상이 공평하다고 할까요? 당연하다고 할까요? 이상하다고 할까요? 아무튼 어떤 사람이 성공을 하게 되면, 그것은 그냥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밑에 감추어진 피라미드 구조가 있다는 겁니다. 그 피라미드 구조의 제일 정상에 사람이 서있으면, 그 정상의 사람만 보이지 그 밑에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죠.

제가 아침마다 매일 운동을 하는 산책길에 보면 다음과 같은 플랜카드가 걸려있었는데, "아무 개의 아들 누구누구가 삼성 라이온즈의 1군에 들어가다" 라고 말이죠. 프로야구 선수도 1군이 있고 2군이 있는데, 우리가 TV로 보는 선수들은 다 1군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TV에 나오는 선수들은 프로야구 선수들 중에서도 야구를 제일로 잘하는 자들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사람들은 그 마지막 정점에 있는 성공한 것만 보게 되는데, 그런 성공을 위해서 그의 부모가 얼마나 돈을 많이 쏟아 부었는지, 그런 것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방탄소년단 !!

요즘 한국 가요계는 그야말로 '방탄소년단'으로 인해서 난리인데, 광고를 찍게 되면 그 출연료가 무려 15억이라는 말이죠. 방탄소년단이 7명인데, 그런데 그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수많은 그룹들이 탈락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들의 그런 탈락이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은 공평하기도 하고 기이하기도 하다는 겁니다.

누군가가 성공했다고 하면, 그런 성공을 기대하는 다른 사람들이 다들 잘려주어야 하는데, 그래야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성공사례의 뒷면에는, 자기의 실패가 재료가 되어서, 그게 밑천에 되어서 다른 사람을 올려준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이 세상이 공평하다고 할까요? 불공평하다고 할까요? 굉장히 난해하다는 말이죠.

아무튼 사람들이 그 과정을 누락시킨다는 것인데, 이 방탄소년단의 경우에도, 그렇게 성공하기 위해서 자기들도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실패를 경험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즉 "너희들도 안 돼. 이제는 그만 포기해" 라는 소리를 수 없이 들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뜨기 시작했는데, 그러면 자기들이 뜨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그야말로 가을철에 낙엽이 떨어지듯이 떨어져 주어야 하는데, 그것을 감안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자기들이 훌륭해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뒤를 돌아보니 이상하게도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이 자기들 앞에서 그런 난관들이 갈라져 주더라는 겁니다.

하지만 갈라지는 그들도 역시 자기와 똑같이 노력을 하고 돈을 들인 자들인데, 그런데 그만 그들이 도태되어 버리고, 자기는 그 난관을 뚫고 나간 것이 된다는 겁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그렇다는 말인데, 그 과정에서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죠. "누가 이기나?" 라고 하면서 악착같이 싸웠는데, 그런데 결과를 두고 보면 남들은 자기를 위해서 길을 비켜준 셈이 된다는 겁니다.

애굽 군대도 잊지 말아야 !!

그래서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왔다는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애굽 군대가 그 홍해에 빠졌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죠. 항상 같이 생각해주어야 하는데, 애굽 군대를 물에 빠트리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말이 안 되는, 즉 바다에 길이 생기는 일도 주님이 아울러 유발시켰다는 것도 함께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잘난 척을 하면 안 되는데, "긍휼함으로 구원을 입었다" 라고 하는 것은,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긍휼함을 입지 못해서 천국에 가는 것에 실패했다" 라는, 그것을 우리는 우리 주변에 깔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천국에 가는 것을 주님에게는 고맙게 여기고 자랑해야만 하지만, 그것을 자기 신앙이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홍해를 건너온 자들의 후손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는 겁니다. 그들이 커서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가 되었고, 바로 그 이스라엘이 가장 가까운 근접점에서 메시야를 죽였는데, 그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죽이는 역할을 했다는 말이죠.

(막 10: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그러니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찾으신다" 라는 원칙은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계속해서 적용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이 만큼 산 것은 내가 열심히 노력한 덕분이다" 라고 한다면, 그렇게 해서 잘린다는 겁니다. 그런 자들을 위한 자리는 천국에 없다는 것이죠.

(약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베드로의 훼방질 !!

베드로가 얼마나 교만이 아닌 교만을 부렸는지 모르는데, "내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물론 요즘 기독교나 천주교라면 이런 베드로가 본 받아야할 모델케이스가 되는데, "베드로, 당신은 최초의 교황이 될 만하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그게 바로 가장 가까운 곳에 십자가를 훼방질하는 자들의 모습인데, 유대인들도 그렇지만 베드로로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원인은 생각해보자는 것인데,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느냐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은 깊이가 없기 때문인데, 즉 2차원이라는 겁니다. 마치 표면에 있는 딱지처럼 드러나는 것인데, 그것을 '이미지' 라고 할 수 있는데, 더 정확하게 말하면 '표상' 이라고 할 수 있고 말이죠.

그 사람의 내막도 모르면서 "이미지는 괜찮네" 라고 하는데, 특히 선을 볼 때 그렇다는 겁니다. 그것을 첫인상이라고 하는데, 그 첫인상, 즉 이미지가 좋으면 다른 것은 웬만하면 그냥 넘어간다는 말이죠. 그런데 요즘은 억지로 조건으로 이미지를 조작해내니, 그게 사기가 된다는 겁니다.

유빙(遊氷) !!

오늘날의 세상은 이미지와 이미지의 홍수인데, 왜 요즘 젊은 사람들을 보고 "실속이 없다" 라는 말을 하는데, 그렇지요? 북극에 가면 온난화 현상으로 인해서 얼음이 녹아서 그만 떠다닌다고 하는데, 과거에는 얼음으로 덮여있었는데 말이죠. 그러면 북극의 곰들이 그 움직이는 얼음을, 그것을 '유빙(遊氷)' 이라고 하는데, 그 얼음과 얼음 사이를 뛰어서 건너서 먹이가 있는 곳으로 옮겨간다는 말이죠.

오늘 강의제목을 유빙, 즉 움직이라는 얼음조각이라고 했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여기서 젊은 사람들이라고 하면, 요즘은 어린이 집에 가도 어른신네들이 있다는 겁니다. 왜 거기는 2살부터 5살까지니까, 그러면 5살은 완전히 고참인데, 이들이 SNS를 하고 인터넷을 한다는 말이죠.

인터넷은 그야말로 정보의 바다인데, 즉 정보들이 유빙처럼 떠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인터넷을 하면서 옮겨 타는 것을 훈련하게 되는데, 그래서 요즘은 유투브를 하나만 잘 만들어도 그게 수입이 되고 생계수단이 되는데, 많이 보면 볼수록 광고가 붙어서 돈을 받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한 달에 천만원 이상을 버는 자들도 제법 있다고 하는데, 그것을 어른들은 몰라도 젊은 아이들은 다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20대가 벌써 성공한 60대가 은퇴를 하고 나서 누르는, 그런 삶을 산다는 겁니다. 외체차를 몰고, 또한 여행을 다니고 하면서 말이죠.

인터넷과 추태 !!

물론 그것은 20대가 이미지화를 해서 흉내를 내는 것인데, 재벌3세들이 그렇게 하니 말이죠. 그것을 두고 겉멋이 들었다고도 하는데, 실속도 없으면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거기에 아가씨들이 또 민감하게 반응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정보세계가 추태를 만들어낸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방탄소년단의 티켓이 9분만에 다 팔렸다고 하는데, 무려 28만장이나 된다고 하는데 말이죠. 그 티넷을 누가 샀는고 하니, 주로 미국의 아이들인데, 그 중에서는 이슬람도 있다는 겁니다. 이제는 서양이든 동양이든 간에 전 세계가 다 근대화가 되었는데,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말이죠. 이렇게 근대화가 되었다는 것은 주체가 되었다는 것인데, 즉 이제는 전통이나 역사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살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부모의 말도 듣지를 않는데, "우리는 집안은 모태신앙이다. 우리 집안은 10대 째 이슬람이다" 라고 하는 것은 이제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이제 자기 인생은 자기가 즐기겠다는 것인데, 다만 돈이 없어서 문제라는 겁니다. 하지만 있는 범위 안에서는 잘 사는 사람들이 즐기는 그런 삶을, 거기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미얀마에 있는 젊은 아가씨들이 한국의 화장품을 발라보고는 다른 화장품을 쓰지 않는다는 겁니다. 미얀마는 가난한 불교 국가인데, 그래도 비싼 한국의 화장품을 발라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서울의 명동까지 와서 화장품을 구입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한국 아가씨들의 흉내를 낸다는 말이죠.

그것은 인도나 몽골도 마찬가지인데, 결코 잘 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제일 멀리 떨어져있는 남미도 마찬가지인데, 이제는 인터넷으로 다 연결이 되어서, 그야말로 초국가적이라는 말이죠. 노력도 하지 않고 꿈만 부풀어서, 그래서 저는 그것을 '추태' 라고 이야기하고 싶다는 겁니다.

그래서 깊이가 없고 2차원적인데, 저는 이것을 스냅사진이라고 보고 싶다는 겁니다. 분명히 있기는 있는데, 그런데 전혀 깊이가 없다는 말이죠. 사진은 종이인데, 이 종이에 무슨 깊이가 있느냐는 겁니다. 물론 위에서 보면 멋있는데, 하지만 옆에서 보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요즘 한국의 아이들을 보고 "저렇게 해서 어떻게 하노? 참 기가 찬다" 라고 하겠지만, 하지만 중동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중동은 모두가 이슬람인데, 그것을 천주교나 기독교도 깨지를 못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방탄소년단이 그만 깨고 말았다는 겁니다. 남자는 없고 전부가 여자아이들인데, 삶에는 건너뛰기가 없다는 말이죠.

알제리, 모로코, 그들이 어떻게 살아갑니까? 그리고 수단과 같은 나라는 더 심한데, 그야말로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방탄소년단을 찾는다는 말이죠. 전 세계적인 현상인데, 이것을 신드롬이라고 하는데, 일종의 정신병적인 현상이라는 겁니다.

옮겨 타고, 옮겨 타고 !!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데, 스냅사진인데 무슨 미래가 있느냐는 말이죠. 중간 중간이 다 끊어져 있다는 겁니다. 요즘 30대나 40대도 역시 그러한데, 말을 해보면 깊이가 전혀 없다는 말이죠. 인생의 철학도 없고 진지함도 없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즉흥적인데, 직장생활도 옮겨다니기에 바쁘다는 말이죠. 마치 유빙을 옮겨 타는 것 같다는 겁니다.

군산의 GM공장이 문을 받으면서 수 천명의 노동자들이 그만 실직자가 되고 말았는데, 그러면 거기에 대한 대책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노동환경이 바뀌면 말이죠. 그래서 거기서 나온 사람을 불러다가 "당신은 무슨 일을 했습니까?" 라고 물어보는데, 그러면 "예, 저는 조립하는 일을 했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러면 대책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을 어떻게 다른 곳에 가서 써먹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너무나 단순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다른 기술을 배우든지 해야하는데, 만약에 운전을 잘한다고 하면 택시를 몰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식당을 하든지 해야한다는 것이죠.

그러니 짧은 지식을 가지고 공장을 옮겨다녀야 하는데, 마치 북극곰이 유빙을 타듯이 말이죠. 그러니 깊이가 없는데, 자기만의 노하우가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옮겨다니게 되면 인간의 정신세계도 그만 깨지고 마는데, 주님과의 관계가 말이죠. 불안불안한데, 전혀 안정감이 없다는 겁니다.

대충 하나의 직장만을 붙들고 있다가 데모를 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얻어 챙기면 다행이고, 그러다가 다시 다른 직장으로 옮기고 말이죠. 그러니 자기의 실력을 키울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옮겨 탈 생각만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게 눈치를 보는 쪽으로 계속해서 간다는 말이죠.

이러한 움직이는 얼음조각, 즉 유빙에 돈이 붙어있는데, 그것을 바라보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정신세계가 분열이 되어있으면서도 어디에 좌우됩니까? 그만 돈 몇 푼에 이리 저리로 팔려간다는 말이죠. 그러니 영혼을 돈에 팔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이 세상을 꾸준히 악마가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을 오히려 성경보다도 더 많은 증거를 방탄소년단을 좋아하는 젊은 아이들이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각종 TV드라마도 그렇고 말이죠.

일차적인 평면, 시야협착 !!

그것을 주일 낮 시간에 '일차적인 평면' 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평면이니까 세상을 살다가 일요일이 되면 교회에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은 이동하는 것에 불과한데, 뿌리가 없기는 마차가지라는 것이죠. 지금 다니는 교회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교회로 옮기고 말이죠.

이게 바로 스냅사진인데, 이렇게 정보가 홍수처럼 퍼지기 이전까지는, 물론 이게 나쁜 의미로 여겨지겠지만, 영적인 의미를 빼놓고 이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말이죠. 이것을 '시야협착' 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협착이라는 것은 좁아졌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평생에 제주도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칠갑산에 사는 할머니가 있다고 하면, 물론 비행기도 한 번 타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시야가 협착이 되어있는데, 요즘 말로 하면 정보에 어둡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할머니가 과연 불행했을까요?

물론 행복하다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 할머지는 정보가 알 필요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깊은 산으로 인해서 자기에게 넘어오는 정보가 차단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17살에 아버지로부터 "이제 시집을 가면 그 집의 귀신이 되어라" 라는 소리를 듣고, 그래서 그 집에서 죽도록 일만 하면서 살았다는 겁니다. 때로는 그곳이 너무 깊은 산골이라서 도망을 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겠지만 말이죠.

이것이 바로 정보차단인데, 즉 시야협착이라는 말이죠.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제주도도 가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굳이 자기 행복에 필요하지 않는데, 그런데 요즘 젊은 아이들은 어떻습니까? 끊임없이 배낭여행을 떠나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여자들은 주로 결혼을 하기 전에 많이 간다고 하는데, 가끔은 결혼을 하고 나서도 가는 바람에 가정파탄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겁니다.

꿈속의 '샹그릴라' !!

그렇게 끊임없이 더 좋은 것을 추구하는데, 요즘 싱가포르의 '샹그릴라' 호텔이 유명한데 말이죠. 그게 '미지의 세계' 라는 의미인데, 신화의 세계에 나오는 깊은 산골의 천국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을 왜 호텔이름으로 지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인간이 그런 이상향을 얼마나 소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인데, 현실세계에서는 없는데도 있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고집을 부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요즘의 젊은 아이들과 칠갑산의 할머니, 과연 누가 더 행복할까요? 물론 둘 다 지옥에 가는 것은 똑같은데, 아무튼 그렇게 시야가 좁아진다는 말이죠. 그러면 오늘날은 그것을 "바보 같이 살았다" 라고 하는데, 그런 할머니가 자식을 낳아서 시집을 보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딸이 하는 말이 "엄마, 남편이 바람을 피웠어요. 이제는 헤어질랍니다" 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등짝을 두드리면서 "야야, 참아라. 참으면 언젠가 조강지처에게 돌아온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물론 그것은 70대가 그렇게 하고, 요즘 60대는 "그래, 그러면 이혼을 해라. 다시 시집을 가면 된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70대가 넘은 분들에게는, 남자가 바람을 피우는 것은 그야말로 일상이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요즘 젊은이들은 왜 이혼을 하려고 합니까? 자기를 배신했다는 것인데, 하지만 70대가 넘은 할머니들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시야협착에 의해서 나름대로의 행복을 가꾸어 왔는데, 그게 자기 인생의 뿌리가 되고 깊이가 된다는 말이죠. 이미지가 아닌 깊이를 갖춘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바람을 피워서 이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 말 한디만 잘못해도 이혼을 한다는 말이죠. 그래도 50대는 여자가 차려주는 저녁이 시원찮고 하면 밥그릇을 집어던지고 하는데, 아닌가요? 30대는 그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무리 성의가 없어도 저녁을 차려주는 것만 해도 고맙다는 말이죠(ㅋㅋ).

자식훈계는 불가능 !!

행복이라는 것은 외부에서 정보로 투입되는 것인데, 그러니 인간전체가 바보인데, 자기 인생을 남에게 맡긴다는 겁니다. 기성세대가 이런 자식을 어떻게 훈계를 하겠습니까? 말이 통하지 않는데, 젊은 세대들은 전혀 깊이가 없다는 말이죠. 참을 줄도 모르고, 무엇을 참아야 하는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견딜 수 있는 면역성이 전혀 형성되지 않았다는 말이죠.

물론 젊은 아이들이 알기는 많이 아는데, 하지만 그렇게 많이 안다는 것이 인생을 지저분하게 만들고 마는데, 즉 '추태' 라는 겁니다. 그래서 스냅사진인데, 찰깍찰깍하면서 사진을 찍는데, 하지만 그게 끊어져 있다는 말이죠. 그런 끊어진 인생에 대해서 우리 인간은 참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지금부터 조금 어려운데, 그것을 이렇게 사각형으로 표현할 수가 있는데 말이죠. 이것을 두고 '인식론' 이라고 하는데, 즉 "내가 무엇무엇에 대해서 안다" 라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보는 대로 아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기대하는 대로 안다는 말이죠.

인식론 - '내가 원하는 것만' !!

오늘 아침에도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는데, 50년이 된 건물이 폭싹 내려앉고 말이죠. 그런 많은 사건들이 끊어져서 제공이 되는데, 그런데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관심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US오픈에서 김효주가 우승을 할 수 있을지, 그런 것에 있다는 겁니다. (녹취 '구' - 연장전에서 아쉽게도 준우승을 함.)

왜 그렇게 됩니까? 자기는 골프를 알기 때문에, 그 골프와의 관련성, 이것을 인식론에서 '노선' 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골라서 안다는 겁니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이 세상이 흘러가는 것을 보니, 그러면 그만 일방적 해석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교회에 복을 받기 위해서 나오는 자들은 설교를 들을 때, 목사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나의 과거가 원상회복이 되고, 복을 받을 수 있는지, 그것만 이야기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고객이 원하니 목사도 "이렇게 하면 복을 받습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너무 목사 편을 들었습니까? (ㅋㅋ)

풀과 환상 !!

그렇게 인간은 자기가 기대하는 대로, 그런데 인간은 스냅사진, 즉 끊어져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연결시키려고 접착제를 바르는데, 풀을 말이죠. 바로 그 풀을 '환상'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바로 그 환상을 마귀가 제공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일어나는 사건을 그때그때 따로 뽑아내는데,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이죠. 그렇게 해서 풀칠을 하면 한 권의 책이 된다는 겁니다.

인간을 연속성, 혹은 영속성이라고 하는데, 이 연속성을 자아, 즉 '나' 라고 이야기하고, 이런 자아의 형성과정을 '주체화'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것도 어려우니 그냥 주체라고 하면, 그렇게 되면 "자아=나=주체"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연속성을 뜯어보게 되면 그것은 너무나도 일방적이라는 말이죠.

점(點)과 선(線) !!

방금 어려운 개념들을 나열했는데, 이와 어려운 것 더 어렵게 하면, 점에 스피드를 가하면 선이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오늘이 6월 4일인데, 그렇다면 그 오늘의 '나'는 주체라는 겁니다. 그 '나'는 거울을 보면 보이는데, 그러면 "나는 무엇이다" 라고 하면, 그게 다 고정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나는 의사이고 싶다 !!

많이 어렵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나는 무엇이다" 라고, 즉 "나는 가정주부이다" 라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인데,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면 안 되고 "나는 무엇이고 싶다" 라고 해야한다는 겁니다. 자기의 직업이 의사라고 하면, 그러면 "나는 의사다" 라고 하면 안 되고, "나는 의사이고 싶다" 라고 해야한다는 말이죠. 즉 "오늘도 의사이고, 내일도 의사이고 싶고, 10년 뒤에도 의사이고 싶다" 라는 겁니다.

물론 훌륭한 의사, 즉 돈을 잘 버는 의사가 되고 싶다는 말이죠. 그것을 점이라고 하고, 그것을 늘이게 되면 선이 되는데, 그것을 자기 인생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라고 하는 욕망이 자기 인생을 구성해왔다는 말이죠.

나는 유소연이다 !!

그런데 이런 연속성이 마귀의 전략이라고 했는데, 일방적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일방적으로 보고, 괜찮은 자기 인생으로 미화를 시키려고 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나는 유소연이다" 라고 하면, 그 유소연이 되고 싶은 것은 훌륭한 여자골프선수인데, 물론 지금도 세계에서 골프를 제일 잘 치수는 여자선수이지만 말이죠.

그렇게 훌륭한 골프선수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그만 자기 아버지가 세금포탈로 걸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딸이 그 세금을 얼른 다 내어주게 되면, 여전히 "나는 훌륭한 여자골프선수다" 라고 하게 되는데, 거기에 "유소연은 효녀다" 라는 것까지 더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계속해서 자기 연속성을 유지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인생이라는 것이 전부 다 조작인데, 그래서 어제 오후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달을 보면서 "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너는 왜 거기에 떠있는가?" 라고 한다는 말이죠. 물론 그것이 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자기도 잘 알지만, 하지만 그렇게 말도 되지 않는 것이 자기 안에서 자기를 조종하기 때문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말도 안 되는 그 욕망에 사로잡혀서 말이죠.

그러니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나는 나이어야 한다" 라고 하는 것, 즉 "나는 연속적이어야 한다" 라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그렇게 살면 되지 않는가?" 라고 하는데, 하지만 성경말씀인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고린도후서 4장 10절과 11절을 보겠습니다.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주님의 일방적인 침투 !!

여기 10절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라고 하는데, 이것은 결코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령께서 일방적으로 그렇게 하시는데, 그리고 11절의 말씀도 역시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 말씀과 방탄소년단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의사와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연속성을 추구하지만, 그러나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이야기는 연속성입니까? 불연속성입니까? 불연속성인데, 즉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한다는 겁니다. 그것도 완성된 언약인 새 언약이 말이죠.

그 새 언약이 우리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우리의 자아 속에 일방적으로 침투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과의 만남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특이한 현상인지 모른다는 말이죠. 하지만 교회에 와서 예수를 믿겠다고 하는 것은 연속성인데, 즉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 라고 하면서 그 점을 잡아당겨서 선으로 만든다는 겁니다. "나는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한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그것은 사기이고 조작이란 말이죠.

자기가 왜 자기 인생을 그렇게 합니까? 그렇게 해봐야 결국은 자기 연속성인데, 즉 접착제로 붙이는 풀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주님의 잘남이 아니라 자기 잘남을 위해서, 즉 자기를 돋보이기 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니 사도바울이 얼마나 특이한지 모르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 정도는 나도 하겠다" 라고 하면서 흉내를 내려고 하는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신자가 되는 겁니까?

여러분, 홍해가 갈라지는 것이 기적입니까? 아니면 밤에 달이 뜨는 것이 기적입니까? 둘 다 기적인데, 왜냐하면 둘 다 자기의 허락도 없이 일어난 일이니 말이죠. 그리고 자기가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 "내가 내 인생을 이렇게 열심히 가꾸었기 여기까지 왔다" 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그 발걸음을 주님께서 인도해서 왔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는 겁니다. 마치 달이 자기 허락도 없이 떠 있는 것처럼 말이죠. 바로 그런 기적의 종합선물세트로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하는데, 거기에 대한 감사와 고마움이 없다고 하면, 그것은 살아도 전혀 의미가 없는 인생이라는 겁니다.

순박한 시골 할머니, 하지만 진심은 없어 !!

제가 예능프로를 매우 싫어하는데, 그런데 얼른 지나가는데 보인다는 말이죠(ㅋㅋ). '백년손님' 이라는 프로를 보면 이만기가 장모와 같이 나오는데, 오토바이 운전면허를 따는 문제를 가지고 마을투표에 들어갔다는 겁니다. 이만기가 할머니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자기를 찍어달라고 공손하게 인사도 했는데,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왔다는 겁니다. 막상 개표를 해보니 할머니들이 이만기를 찍지 않았다는 말이죠.

왜 그런고 하니, 이만기는 손님이라서 왔다가 가면 그만인데, 그런데 장모는 그 마을에서 30년을 살았다는 겁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할머니들이 그렇게 교육수준이 높지 않은데, 그런 분들을 순박하다고 하는데 말이죠. 하지만 인간에게 순박함은 없는데, 자기 살기에 바쁘다는 겁니다.

제가 얼른 TV를 보면서 그것을 느꼈다는 겁니다. 그렇게 순박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 할머니들의 그 나름대로의 생존비법이고 기술이라는 겁니다. 시골장에 가면 나물을 파는 순박한 할머니들이 있는데, 그런데 무턱대고 사다가는 십중팔구가 중국산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에게 진심이라는 것은 없는데, 그리고 그것을 자신은 모른다는 겁니다.

점(點)은 어디서 나왔는가?

제가 어디서 이야기를 시작했는고 하니, 점에서 시작해서 거기에 스피드를 붙이면, 즉 빨리 성공하고 싶다는 겁니다. 물론 천천히 성공해도 마찬가지인데, 늘 기대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점을 늘여서, 그게 선인데, 그렇게 해서 "나는 이런 인간이다" 라는 것을 자기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것을 증명하고 싶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제 성경말씀으로 돌아가서, "그 점은 어디서 나왔는가?" 라는 것인데, 이 세상의 모든 철학은 점에서 시작하는데, 왜냐하면 다들 하나의 개체이고 주체이고 자아이니 말이죠. 철학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사람들이 이미 "나는 나다" 라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철학자들이 "이왕 그러한 나인데, 그러니 훌륭한 나가 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수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데, 그러니 행복한 '나', 훌륭한 '나', 성공한 '나', 그것이 악마가 제공해주던 누가 제공해주던 상관이 없는데, 무조건 행복하고 훌륭하고 성공한, 그런 '나'가 되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굳이 철학이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죽음의 힘과 생명의 힘 !!

그러면 성경은 무엇인고 하니, "이 점은 어디서 나왔는가?" 라는 것인데, 즉 "나는 나다" 라는 것이 어디서 나왔느냐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힘'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물론 그 힘은 보이지 않는 힘인데 말이죠. 그러니 "내가 나가 되기 위해서 어떤 힘의 뭉치가 형성이 될 때, 그것이 곧 나가 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힘은 한 가지의 힘이 아니라, 그러한 힘이 있다고 하면 그 힘에 죽으라고 대들고 반발하는 힘이 있는데, 그 힘을 성경에서는 '죽음의 힘' 이라고 하고, 원래 있던 힘을 '생명의 힘'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힘이 나오는 곳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분인데, 그게 요한복음 1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라고 하는데, 그리고 3절에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라고 한다는 겁니다. 만물, 즉 모든 것이 말이죠. 여기에는 악마도 포함되는데, 악마는 원래 천사였으니 말이죠. 그리고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라고 한다는 겁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힘의 원천자의 증인으로 !!

그러니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면서, 오리진, 즉 원천을 이것과 연결을 시켜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어야 점으로 시작하는 '나'의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힘의 원천자의 증인으로 살게 된다는 말이죠. "달은 왜 있는가? 원천자인 예수님을 위해서 있다" 라는 것이 성경에 있는 내용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 19편에서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라고 한다는 말이죠.

(시 19: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시 19:3)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시 19:4)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해와 달과 별은 4일째 만들었는데, 그것을 누가 만들었는고 하니, 그것이 요한복음 1장에 나온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만들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창세기 1장과 요한복음 1장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 깊이를 더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말씀을 믿는 신자라고 하면 깊이가 있는 고백을 하고 깊이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즉 뿌리와 관련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출발점을 점으로 하게 되면, 그것은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죠.

이러한 '점'을 두고 '자아', 혹은 '주체', 혹은 '나' 라고 했는데, 물론 엄밀하게 보면 그 의미가 조금씩은 다르지만 일단 같다고 보고 말이죠. 그런데 "나를 건드리지 말라" 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그것은 결코 성도의 모습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은 "나는 이렇게 살았는데, 너는 어떻게 살았는가?" 라고 하는데, 그래서 젊은 아이들을 그 '나'가 원망스럽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으면 흉내라도 내려고 하는데, 인터넷에 떠도는 삶을 살면서 말이죠. 이미지를 바꾸려고 하는데, 즉 가난한 '나'를 감추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 !!

이창동 감독의 '버닝' 이라는 영화를 보면, 이번에 칸에서 비평가 상을 받았는데 말이죠. 거기에 무슨 장면이 나오는고 하니, 초반부에 보면 남녀 동창생이 만나서 여자 자취방에 가는데, 그런데 그 방에 고양이를 키운 흔적은 있는데, 사료도 있고 말이죠. 하지만 정작 고양이는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만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 버리고 마는데, 그러면 관객들은 그만 혼란스러워진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영화가 처음부터 막히게 되는데, 그러면 나머지는 그만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화자체가 지루해지고 만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루하다는 평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말이죠.

이것을 오늘 강의를 관련을 시켜보면, 젊은 아이들은 자기 꼬리를 감춘다는 말이죠. 잘난 놈들은 자기 자랑을 한다고 감추지를 않는데, 하지만 못난 놈들은 이미지를 가지고 자기 출신을 감춘다는 겁니다. 고양이를 키우고 사료를 준다고 하는 것은 기존의 떠도는 정보에서 나왔던 것들인데 말이죠.

왜 고양이를 키웁니까? 개나 고양이에게 있어서 자기가 주인인데, 즉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한다는 겁니다. 사람은 뭔가 시키면서 지배하게 될 때, 이게 바로 마귀의 속성인데 말이죠. 즉 자기가 최고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비록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렇게 자기가 시키는 대로 움직여주는 것이 있을 때, 사람들은 거기서 사는 보람을 느낀다는 겁니다. 즉 삶의 숨통이 트인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고양이가 흔적만 남아있고 정작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요즘 젊은이들의 본질이라는 것인데, 그것이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말이죠. 이창동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서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알고 있는 것은 허깨비다" 라는 것인데, 모두가 다 허깨비라는 겁니다. 그들이 나중에 마약도 하게 되는데, 왜 마약을 합니까? 계속해서 이미지를 갈아타기를 했기 때문에, 조금만 해보면 다 지루하고 식상해지니 말이죠. 그러면서도 자기를 호응해주기를 원하는데, 자기는 혼자 있고 싶으면서도 연락이 오기를 기다린다는 겁니다.

모두가 자폐증 환자 !!

이것은 정말 모순인데, 혼자 있으면 편한데 그런데 외로움을 느낀다는 말이죠. 그런데 아무 때나 연락을 하면 안 되고, 자기가 외로움을 느끼는 그 타이밍에 맞추어서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고립된 자폐증 환자인데, 혼자 있고 싶으면서도 연락이 오기를 바라고, 그러면서도 주도권은 자기가 쥐려고 한다는 말이죠. 또한 자기가 다스리면서도 다스림을 받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왜 요즘 아가씨들이 결혼을 미룹니까? 남자를 자기 손에서 다루고 싶어서 그러한데, 결혼한 친구들을 보니 못살겠다고 하면서 난리를 치니 말이죠. 그러면 남자들은 손에 물을 묻히지 않겠다고 해놓고는, 여자 이름으로 대출을 받아서 부도를 내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니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데,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런 불평을 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자기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자기 자신도 남들에게 믿을 만한 짓을 한 적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전부가 다 자폐증 환자라는 겁니다.

부모들은 자식들을 결혼시키면 손을 턴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이 안 된다는 겁니다. 손자를 낳으면 부모에게 짐으로 맡기는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안심이 안 되는데,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겁니다. 얼마든지 "엄마, 못살겠다" 라고 나올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눈을 감을 때까지는 눈을 감으면 안 되는데, 새벽에 전화벨이 울리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세상이 그러하다는 것을 읽어야하고 파악을 해야하는고 하니, 그것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자는 겁니다. 자기가 점에서 시작하고 있는지, 아니면 힘에서 시작하고 있는지를 말이죠. 우리는 힘에서 시작을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살펴보면 어느 새 남을 닮아서 "나는 나다" 라고 하는 점에서 시작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것은 인식론인데, 즉 자기가 알고 싶어하는 것을 골라서, 그것을 일방적으로 본드를 가지고 붙인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이것이 내 인생이다. 근사하지?" 라고 하는데, 괜찮은 것만 골라서 만들어놓고는 말이죠. 왜 앨범에 보면 괜찮은 사진만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것이란 겁니다.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자기 인생을 조작하는데, 남들에게 잘난 '나'를 증거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니 누가 누구를 욕할 수가 없는데, 우리 인생도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성도에게 일방적으로 찾아오시는데, 우리의 잘난 그 스냅사진을 무효화를 시키고 주님의 십자가 사건, 그게 곧 새 언약인데 말이죠.

조각난 내 인생, 그러나 !!

그 언약이 우리에게 침투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주체 중심의 그 '나' 라는 것은 모두 다 찢어지고 만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날마다 죽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나' 라는 것은 연속성입니까? 불연속성입니까? 불연속성인데,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조각난 것인데, 즉 '조각난 내 인생' 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언약이 절단을 시키고 또한 접속을 해서 연속성이 되게 만든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나' 라는 것은 이미 절단이 되었지만, 새롭게 조립되고 연결될 때는, 그것은 그냥 '나'가 아니고, '주님의 몸'으로서 연결되어있다는 겁니다. 즉 "나는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결이 되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돼지표 본드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연결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러니 자기가 어제 밥을 먹은 것, 그리고 오늘 아침에 밥을 먹은 것, 그 모든 것은 예수님의 피와 그 희생에 의해서 된 것인데, 바로 그것을 두고 자비라고 하고, 긍휼이라고 하고, 사랑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바로 그 주님의 사랑에 의해서 어제 밥을 먹은 '나'와 오늘 밥을 먹은 '나'가 연결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너는 죄인이야 !!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다 기억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우리의 인식이 자기가 기대하는 것만을 알기 때문에, 그러니 우리의 기억에 남는 것은 이 세상이 돌아가는 전체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의 증인이 되지 주님의 증인이 되지 않는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집어넣는데, 그리고는 그것을 또 끊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인생이 찢어지게 되면, 우리는 주님에게 반항을 하는데, "왜 내 뜻대로 되지 않게 하십니까?" 라고 말이죠. 그러면 주님께서는 "너는 죄인이야" 라고, 즉 "너는 상한 심령이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그냥 내버려두시지 왜 찾아오십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면 주님은 "너의 죄를 모아서 의를 만들기 위해서 왔지"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가 죄를 모으면 죄가 되지 의가 되지 않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죄를 모아서 연결시키는 고리가 있는데, 즉 본드가 있는데, 그게 바로 예수님의 피라는 말이죠.

하나님의 의(義) !!

그 피는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관계성을 의미하는데, 그 관계성이 곧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한 주님의 다 이루심, 그것은 모든 율법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을 두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 '하나님의 의'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의 삶을 건너뛰기를 하면 안 되는데, 즉 예수 안에서의 삶은 건너뛰기가 없다는 말이죠. 성도는 자기 사건이 아니라 주님의 사건이 자기 안에서 방출되기 시작하는데, 그러니 바깥에서는 천하의 죄인 중의 괴수가 되고, 하지만 주님 안에서는 어떻게 됩니까? 주님께서 "너는 의인이야" 라고 하시면서 흐뭇하게 뒤에서 바라보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저는 강도입니다. 저는 간음한 여자입니다" 라고 하면, 그러면 주님께서 "그래서 너는 내 사람이야. 그래서 너는 천국의 백성이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이 세상에서 보면 우리는 분명히 죄인이지만, 그러나 주님은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라고 하셨는데, 거기에 아주 적확하고도 적절한 증인으로서 우리를 아직도 죽이지 않고, 본드로 붙여서 연속성으로 이 세상에 계속해서 들이민다는 겁니다.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여기서 교재 90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3차원의 물체가 아니라 2차원의 이미지에 해당이 되는데, 우상은 2차원이지만 언약은 3차원입니다. 깊이가 있고 중첩이 있는데, 마치 누비이불처럼 성령께서 오셔서 바늘로 누벼버리면 야곱이 아니라 야곱언약이 되는 것처럼, 우리는 내 이름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해서 언약 속에 편입생으로 들어온 겁니다.

여기에 보면 누비이불이 나오는데, 누비이불이 무엇인지 아시죠? 이불의 솜 사이를 누빈다는 겁니다. 그렇게 성령께서는 불연속적인 사건들을 하나로 연결을 시킨다는 말이죠. 왜 뷔페식당에 가면 여러 가지 음식들이 있는데, 한 가지만 먹으려면 뷔페에 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여러 가지를 먹어도 그게 뱃속에 들어오면 하나의 식량이 된다는 말이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

그렇게 성령께서는 여러 가지 사건을 우리 속에 집어넣는데, 그러면 우리는 2차원의 이미지가 아니라 깊이가 생기게 되는데, 성령과 함께 있는 사람은 말이죠. 그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이번 여름수련회에서 할 내용인데, 다른 모임이라면 제가 절대로 미리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 대구모임이니 말씀을 해드리겠는데 말이죠(ㅋㅋ). 여기에 나오는 '성령이 임하시면' 라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말인데, 이것을 쉽게 표현하면 '만남'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도를 닦는 것은 만남이 아닌데, 그리고 만나기를 예상하는 것도 역시 만남이 아니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가 예상한 것인데, 그렇게 되면 그렇게 해서 자기가 만나는 것이 귀신이고 주님이고 간에 자기가 상상해서 만들어낸 것일 수 있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와 만날 때는 앞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등을 쳐서 만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너를 좀 보자고 하신다" 라고 하시면서, 주님께서 우리의 등을 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때부터 우리의 인생은 모두 깨지고 주님의 인생으로 바뀌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에 나오고 말고 하는 것은 주님과의 만남에 있어서 전혀 상관이 없는데, 물론 나이트클럽을 가던 술집을 가던, 그것도 역시 주님과의 만남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해도, 그게 주님과의 만남을 용이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란 말이죠.

왜냐하면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우리와의 일체 다른 모든 것과의 만남이 끊어진 채로 성령이 오시게 되는데, 그것이 예수님과 성령 사이에서 미리 약속된 것이란 말이죠. 즉 인간의 모든 관계가 다 끊어졌다는 겁니다. 자기 딴에는 나름대로 잘한 것, 선한 것, 경건한 것이 있는데, 그런 것을 주님께서 다 끊어버렸다는 말이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

그런 것이 일체 침투하지를 못하는 상태에서,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만남이 성공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을 제공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 자격자가 되면서 예수님에게 영원토록 입혀지는 명칭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이 어린양이 예수님의 본질을 대표하는 표상이 된다는 겁니다. 끊어진 상태에서 말이죠.

여기서 요한복음 1장을 보겠는데, 29절에서 33절입니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요 1: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 1:32)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요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여기 29절에 보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나오는데, 그리고 33절에 보면, 이게 중요한데 말이죠. 여기에 세례요한이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라고 하는데,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 다음에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라고 하는데, 그러니 성령이 와서 누구에게 머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즉 "예수님은 참 좋겠다. 성령으로 받았으니 말이야" 라고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 믿으면 안 되고 그 다음을 믿어야 하는데 말이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

그 다음에 보면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서, 그 역할이 마감되는 순간,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니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활동이 '마감' 이라는 위치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즉 이미 성공해서 그 보따리에 담겨있는 것을 땅을 향해서 쏟아내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쏟아냄으로서 성도가 아다리가 되었는데, 즉 걸려들었다는 말이죠.

너무 중요해서, 다시 !!

중요해서 다시 말씀을 해드리겠는데, '세상 죄'라고 할 때, 즉 '세상=죄' 라는 겁니다.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지켜서 바르게 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르겠는데, 하지만 그런 행위 하나 하나가 다 어디에 갇혀있는고 하니, 예배, 기도, 찬양, 헌금, 봉사 등등, 이런 것들이 다 이미 죄에 묶어져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세상=죄'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에서는 십자가 외에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아니라면 구원이 안 된다는 말이죠. 아무리 제사를 드려도, 그것으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데, 즉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것을 끊어보면, 이 세상은 죄에 갇혀있는데, 그런데 거기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오는데, 하지만 여기서 사람들이 오해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어떤 오해인고 하니,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다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죠. 칼 바르트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물론 자기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하지만 말이죠.

그것을 '보편 구원설' 이라고 하는데, 불교와도 똑같다는 겁니다. 부처를 믿던 믿지 않던 간에 결국은 돌고 돌아서 모두가 다 부처가 되고 극락에 간다는 것인데, 매우 긍정적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과거에 성철스님은 "사탄이여, 당신을 존중합니다" 라는 법어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물론 여기에는 좀 복잡한 의미가 깔려있지만 말이죠.

아무튼 예수님이 세상 죄를 다 지셨기에 모든 인간들은 다 구원받은 상태라고 보는 것, 하지만 이렇게 되면 무엇을 놓친 겁니까?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계약내용을 몰라서 그런 주장을 한다는 겁니다. 그 계약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성령을 줄 사람에게만 성령이 오신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고 해서, 즉 세상 죄를 지셨다고 해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오직 성령을 받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죠. "인자를 거역하면 용서를 받지만, 성령을 거역하면 용서를 받지 못한다" 라고 하는 것은, 어제 낮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성령이 어디에 오는고 하니, 이미 악령이 있는 그 자리에 오신다는 겁니다.

(마 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성령세례, 즉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데, 그것을 앞당겨 보여주기 위해서 세례요한은 물로서 세례를 주는데, 물론 세례를 주는 것은 구약에 속한 것인데, 즉 미완성이라는 겁니다. 아무튼 세례를 준다는 것은 이미 절단되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하고 있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인간이 그 어떤 행위로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세례를 통해서 보여주신다는 겁니다. 즉 "너는 무슨 짓을 해도 세례가 없으면 안 돼" 라는 겁니다. 물세례는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세례의 표상이니 말이죠. 즉 모형이라는 겁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만남 !!

그러니 복이라는 것은 만남인데, 하지만 우리 인간이 예상한 만남이 아니라, 그 성령의 만남은 어떤 만남인고 하니, "기존의 내가 꾸준하게 나를 구원하려고 했던 것이 모두 다 헛짓이었구나" 라는 것을 한꺼번에 다 알게 되는, 그런 만남이라는 겁니다.

성령이 오기 이전까지는 그것을 몰랐는데, 그래서 목사가 되고 신학박사가 되면 더 가까이 가는 줄로 알았다는 말이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면 구원이 되는 줄로 알았다는 겁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 줄 알았다는 말이죠.

그래서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말씀만 하옵소서" 라고 했는데, 그런데 성령이 막상 오니 어떻게 됩니까? 쓸데없는 짓을 통해서 예수님을 증거하라고 평생 쓸데없는 짓을 계속 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쓸데없는 짓도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데, 그러니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면서도 오히려 감사를 하는데, 죄를 지으면서도 말이죠.

죄를 짓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

이 두 개를 합치게 되면 "죄를 짓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그렇게 되는데, 그러니 이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들어도 이해를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마치 죄를 조장하는 것처럼 들린다는 말이죠. 밧세바를 범한 다윗이나 할 고백이지, 다른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주님의 영인 성령이 오게 되면, 그러면 주님께서는 "세상에 나가라" 라고 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따라오지 못할, 그런 기적의 내용을 발생토록 하신다는 겁니다. 따라서 성령이 하시는 일을 누가 방해를 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육적인 본성이 방해를 하는데, "이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저는 진짜로 망합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너는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진짜로 망해도 괜찮다" 라고 하시는데, 즉 우리의 연속성을 산산이 부수어 버린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연속성이 아니라 언약의 연속성이고 십자가의 연속성이니 말이죠. 예수님이 살아있다고 하는, 그 생명의 연속성이라는 겁니다.

그 생명이 우리를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날마다 죽게 되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살아서 움직인다는 말이죠.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 11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자리를 비우라는 겁니다. 자아의 자리, 주체의 자리를 말이죠.

(고후 4: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렇게 매일 같이 토해내는 살아야 하는데, "예수님이 잘났다" 라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나 때문에 희생을 당하셨다" 라고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냥 "예수님이 잘났다" 라고 하게 되면, 그것은 "나도 잘났고 예수님도 잘났다" 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반드시 그 앞에 "나는 못났고" 라는 것이 들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즉 "나는 죽어 마땅하다" 라고, 그렇게 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는 말이죠. 이것이 곧 성도가 살아가는 삶의 깊이인데, 성령을 받게 되면 이렇게 된다는 겁니다.

사랑하기 이전에 미워하는 것부터 !!

일단 이렇게 해놓고 우리 주위에 있는 이웃이나 동창생들을 한 번 살펴보자는 말이죠. 그동안 그들과 꽤나 이야기가 잘 통했는데, 그런데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기는 하지만, 뭔가 머리를 갸웃거리게 된다는 겁니다.

어떻게 말인가요? "그동안 내 입장에서 그 사람을 용납해주려고 하지 않았는가? 마치 그것이 주님의 사랑인 것처럼 여기지 않았는가?" 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더욱 더 냉정해져야 하는데, 사랑하기 이전에 미워하는 것부터 먼저 배워야 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사랑의 솜씨를 자기 잘남의 재료로 삼지는 않았습니까?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 자기의 우수함과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러니 먼저 자기 자신부터 혹독하게 미워할 수 있는 능력을 성령을 통해서 허락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8,6,7 오후 5시에 마침.
사랑하기 이전에 미움을,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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