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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1 01:42:40 조회 : 237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38 - 피와 양심 이름 : 구득영(IP:203.223.97.179)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38 - 피와 양심

18,07,02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92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언약은 제사가 있어야 하고, 그 제사는 피가 있는 제물이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에, 구약부터 이미 짐승이 피를 흘렸다는 것은, 피를 흘려야 그것이 결합이 된다는 겁니다.

(히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왜 '피' 인가?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구원을 하는데 왜 피가 동원이 되는가?" 라는 것인데, 즉 우리 인간의 올바른 정신, 선한 양심, 침착한 태도, 이성적인 행동, 순수한 신앙심, 그런 것을 왜 하나님께서는 받아주지 않느냐는 겁니다. 즉 "왜 피인가?" 라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인간이 싸워야하는 대상이 무엇인고 하니, 여기 히브리서 9장 22절에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아는 상식적인 정결과 깨끗함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순수한 양심을 의미하는데, '양심대로 바르게살기', 그런 것이란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인정하지를 않고, 오직 피로서 깨끗함을 얻는다고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데, 우리는 선한 양심인데, 그런데 하나님은 피라는 말이죠.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깨끗함을 양심의 순수함이라고 이미 결론을 내렸는데, 모든 역사가 이쪽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하나님은 피만 받으시는데, 그러면 우리가 우리의 순수하다고 하는 양심을 계속해서 가지고 있으면 됩니까? 안 됩니까? 넘겨야 하는데, 우리의 변호사에게, 대변인에게 말이죠. "내 양심은 깨끗합니다" 라고 하지말고, "이 양심도 소용이 없지요?" 라고 하면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면 안 되고 오직 예수님에게 넘겨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소위 우리가 착하다고 하는 그 양심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서 자기 피를 바친다는 말이죠. 자기 살과 자기 피를 바침으로서, 그 피로 인해서 우리에게 영생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참으로 희한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전혀 우리 상식에 맞지 않는데, 우리 인간의 보편적인 것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죠.

보편적인 것과 일반적인 것을 같은 의미로 본다면, 물론 조금 차이가 있는데 말이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것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겁니다.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것을 '기쁜 소식'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기쁜 소식 안에는, 개무시가 !!

우리 인간이 예상을 했다고 하면 기쁜 소식이 아닌데, 왜냐하면 자기가 예상한 만큼 자기가 기여할 수 있으니 말이죠. 그러니 기쁜 소식이라는 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기여하는 것이 무산된다고 하는 것, 그것이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라 기쁘게 다가왔다고 하는 것인데, 그러니 자기 쪽에서 알고 있는 것을 주님께서 배격했다고 하는 사실이 신나게 다가와야 한다는 겁니다. 전혀 아쉬움이 없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완전히 개무시하시네" 라고 하면서 입이 툭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이 다 있었구나? 나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네" 라고 하는 새로움이 주는 즐거움, 그것이 기쁜 소식 안에 담겨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기쁜 소식이라는 것은, 자기가 나대고 설친다고 해서 기쁜 것이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 피가 자기 죄를 씻음으로서 해결된다고 하는 이야기가, 그것이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옴으로서 기쁜 소식이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이런 기쁜 소식을 접수하고 수용하는 순간, 사실 우리의 삶은 날아갈 듯이 가벼워지게 되는데, 새털처럼 말이죠. "인생이 별거야? 이제 끝났네" 라는 식으로 말이죠.

만약에 하나님 쪽에서 주신 이 기쁜 소식, 즉 우리를 보고 "나는 너희들이 행한 것은 받지 않고, 나는 예수님이 행한 것만 받는다. 그것으로 인해서 깨끗하게 되고 영생을 얻는다" 라고 하는, 그 소식을 우리가 모르게 된다고 하면, 우리는 내부적으로 간경화에 걸린다는 겁니다.

간경화라는 것은 간이 경화가 되는 것인데, 즉 콘크리트화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죠. 점점 더 자아를 중심으로 단단하게 뭉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기쁜 소식을 모르는 사람은, 즉 자기로부터 떠나지 못한 사람은, 점점 더 자기가 살아온 모든 가치가 있는 것을 지켜내기 위해서, 그것이 곧 자기 잘남이라는 말이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적과 아군을 계속해서 구분하게 되는데, 즉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쪽과 되지 않는 쪽을 자기가 판단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일단 자기에게 유리한 것을 가진다고 할지라도, 만약에 그것을 누가 침범한다고 하면 어떻게 막아내야 할지, 그 방어책을 또 끄집어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게 간경화라는 겁니다.

나를 건드리지 말라 !!

그래서 "나는 잘났다" 라는 쪽으로 평생을 계속해서 가게 되는데, 그러면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까, "나를 건드리지 말라" 라는 것인데, 우리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는 달랑 이것만 남는다는 겁니다. 자기는 평생을 최선을 다해서 살았기 때문에, 그 누구라도 자기를 건드릴 자격은 없다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악마가 인간을 앞장세워서 등장한 모습인데, 그러니 바로 그러한 악마의 심성을 우리 인간이 그대로 인수인계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나는 잘났다. 나를 건드리지 말라"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교회 안에도 있는데, 소위 '교인' 이라는 자들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30년, 40년을 교회에 다녀도 남는 것은 이것인데, "나는 복음도 알고 십자가도 안다. 그러니 나는 잘났다. 나를 건드리지 말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나는 적어도 목사니까, 그래서 너보다는 성경을 많이 아니까, 나를 건드리지 말라" 라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와 세상이 차이점이 있습니까? 없는데, 종교놀이를 했다는 말이죠. 일종의 친목단체라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피인데, 그런데 교회에 평생을 다녀도 남는 것은 예수님의 피가 아니라, 피가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잘났다. 그러니 나를 건드리지 말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물론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간경화이지만 교회에 다녀도 역시 간경화라는 겁니다. 그야말로 인간이 돌맹이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다는 말이죠. 그 어떤 것으로 쑤셔도 안 된다는 겁니다. 혹시 간경화로 인해서 고생하는 분이 있으면 양해를 구하는데, 예를 들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이 아닌 예수님의 피만 받는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받지 않고 예수님의 피만 받는가?" 라는, 그것을 알아보고자 한다는 겁니다. 먼저 에베소서 6장 10절을 보겠습니다.

(엡 6:1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막대자석이 있다고 하면, 여기는 N극이고 여기는 S극이란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쇳가루를 뿌리게 되면, 자석의 힘으로 인해서 쇳가루가 N극과 S극을 중심으로 해서, 이렇게 둥글게 자장이 형성된다는 겁니다. 자장이란, 자석의 힘이 미치는 공간인데 말이죠.

쇳가루를 뿌리기 이전까지는 그냥 막대자석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그런데 쇳가루를 뿌리게 되면 보이지 않던 자석의 힘을 쇳가루가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드러내준다는 것이죠. 쇳가루가 없으면 이론상으로는 그런 힘이 있는 줄 알았지만, 실제로 눈으로는 볼 수가 없었는데, 그런데 쇳가루를 뿌리게 되면 그런 힘이 작용하고 있음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도 마찬가지인데, 인간은 거울을 보면 자기 혼자인데, 그런데 인생을 살게 되면, 자기를 위한, 자기에 의한, 자기로 말미암은, 그런 권력장이 형성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석과도 똑같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10절에 보면 '그 힘의 능력으로' 라고 한다는 말이죠.

ㄱ+ㅐ+ㅅ+ㅐ+ㄲ+l+ㅇ+ㅑ !!

인간이라는 것이, 자기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직접적으로 자기 피부를 물리적으로 치지 않더라도, 누가 자기에게 욕을 한다고 하면, 그러면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그렇지가 않은데, 욕을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일종의 음파인데, 예를 들어서, "개새끼야!" 라고 욕을 했다고 하면, 그것을 물리적으로 따지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ㄱ+ㅐ+ㅅ+ㅐ+ㄲ+l+ㅇ+ㅑ"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저 사람이 나에게 음파를 남기네" 라고 하면 화를 낼 일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소리를 듣게 되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 방금 뭐라고 했어? 당신, 몇 살이야?" 라고 하면서 화를 낸다는 말이죠.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상대방에 자기에게 욕을 하기 이전에 이미 방어선을 깔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의 장로인데, 국회의원에게 뇌물이 준 것이 그만 발각이 나서 관악산의 등산로에서 목을 매고 자살을 했다는 겁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는데, 그런데 누가 그 사람을 보고 자살을 하라고 하면서 관악산으로 데리고 갔습니까? 그게 아닌데, 그 사람이 자살을 하는 그날 아침에도 거울을 보았다고 하면, 역시 자기 옆에 아무도 없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귀에는 무슨 소리가 들리는고 하니까, "니가 교회의 장로라고 하면서 뇌물을 주고, 그게 말이 되나?" 라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메모를 해놓은 뇌물을 준 국회의원 명단들이 공개가 되고 했는데, 하지만 그런 것을 무시하면 되지 않느냐는 말이죠. 그런데 왜 무시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은 자기가 만든 권세 안에 매여 산다는 겁니다. 즉 자기가 만든 허황된 망상 속에서 자기 스스로 재창조를 하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진짜 자기가 아닌, 허황된 된 것 속에서,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이것이 나다" 라고 조작된 것 속에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하지만 평소에 자기가 그렇게 무시했던 자라도 옷을 벗고 목욕탕에 들어가면 똑같은 인간인데, 그래서 죽을 때 장관으로 죽으니 주민센타의 말단 공무원으로 죽으나 똑같다는 겁니다. 물론 요즘은 9급 공무원이라도 그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데, 아무튼 그만큼 인간은 외부세력에 의해서 속임을 당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평생을 살아도 인간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마치 자석 안에 어떤 세력이 있는 것처럼, 인간은 정신적인 세력망을 형성해서, "그게 나다" 라고 우기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들의 생물학적인 숫자만 채운다고 해서 세상이 아니고, 자기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각자에게 형성된 아우라, 그런 권세를 갑옷처럼 두르고, "니가 세냐? 내가 세냐?" 라고 하면서 시합을 하고 있는데, 마치 일본의 스모처럼 배치기 시합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뛰뚱거리면서 나와서 붙는 재미로 살아가는데, 특히 남자들이 그것을 허세라고 하는데, 남자들은 그러한 허세를 빼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즉 "누가 누가 더 센가?" 라는 것인데, 그래서 남자를 두고 '목적론적 존재' 라고 하고, 여자는 그러한 남자를 붙는다고 해서 '관계론적 존재'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남자는 어떤 목적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고, 여자는 그런 남자가 없이 살아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죄사함의 힘 !!

그러니 이 세상은 '힘의 장'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그게 에베소서 6장 10절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에 주님의 힘, 즉 하나님의 힘이 발휘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계심은 예수님의 발휘되는 것인데, 그러면 예수님의 힘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곧 죄사함의 힘인데, 그런 죄사함의 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게 없다고 우기지 말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 죄사함의 힘이 기존의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파고 들어오게 되면, 그러면 그 인간은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죄인이라는 것을 말이죠.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잘났다" 라는 것인데, 즉 "나는 최선을 대해서 살았으니, 제발 나를 좀 건드리지 말라"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사람이 왜 화를 냅니까? 자기 것을 건드리니 화를 낸다는 말이죠. 직접 자기 몸을 건들지 않고, 자기 차만 살짝 건드려도 화를 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차니까 말이죠. 즉 자기의 연장선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를 직접 건드리지 않고 자기 자식이나 손자를 건드려도 역시 화를 낸다는 것이죠. "내 자식을 왜 건드려?" 라고 하면서 말이죠.

이번 월드컵에서 프랑스와 아르헨티나가 시합을 하는데, 그런데 끝나고 난 뒤에 관중들끼리 한바탕 싸웠다는 겁니다. 왜 싸웁니까? 자기들이 시합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것은 바로 "내 나라를 왜 건드려?" 라는 것인데, 나라가 있으면 거기에 연계되는 세력들이 계속해서 확장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도, 일본과 축구를 하게 되면 하나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이 산다는 것은 오직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인데, 그래서 거기서 만들어진 성경이 무엇인고 하니, "나를 건드리지 말라" 라는 것인데, 이것이 그만 절대진리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이것은 이성이 아니고 그야말로 본능이고 충동인데, 그래서 마구 튀어나온다는 말이죠. 따지고 말고 할 것도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 !!

사람들이 다들 이렇게 살아가니까 우리는 이게 죄라는 것을 몰랐는데, 그런데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예수님이 이러한 인간들 속에서 그만 살해를 당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3일만에 다시 부활을 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인간 세계가 수상하다는 것이 드디어 노출되고 말았는데, 즉 인간 세계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이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인데, 그 원인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시고, 그 다음에 주님이 마련하신 것은 죄를 지은 자에 대한 죄사함인데, 그런 장치를 예수님의 몸으로 친히 마련하셨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대신 죽으심' 인데, 즉 예수님께서 대신해서 심판을 받고 피 흘려서 죽으셨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 영생에 이르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을 알려고 하면, 먼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이제 에베소서 6장 11절과 12절을 보겠습니다.

(엡 6: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마귀의 궤계 !!

11절에 마귀의 궤계가 나오는데, 그러면 그 마귀의 전략이 무엇일까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이 하신 일을 모르게 하는 것인데, 그래서 우리의 싸움은 누구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까? 눈에 보이는 사람과 상대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에는 서로가 차이점이 없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남한과 북한이 서로 적국인데, 그런데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이 제3의 지역에서 한 달을 살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만 정이 들어서 서로 친구가 된다는 겁니다.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사람이 제 아무리 사상적으로 적이라고 해도, 같이 한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면, 그래서 서로의 속마음을 내놓고 소통하면서 교제를 하게 되면, "아하, 인간은 거기서 거기구나. 똑같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신자와 불신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두 사람이 그만 밀림에서 낙오가 되었는데, 그래서 둘이 죽도록 같이 고생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너는 예수를 믿지 않으니 지옥에 가고, 나는 천국에 가겠다" 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뭐라고 합니까? "니가 천국에 가도록 내가 예수님께 기도해줄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만 원수가 아니라 친구 이상의 사이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러니 인간은 싸울 대상이 없는데, 왜냐하면 둘 다 똑같은 세상에서 똑같은 생각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각자가 자기만을 위해서 말이죠. 그런 점에서는 하등의 차이점이 없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보고 멱살을 잡고 "나에게 한 번 당해봐라" 라고 하면서 흔들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라고 하셨는데, 그런 정당성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죠.

판사의 경우에도 재판을 함에 있으서 결코 자기 의로움으로 하는 것이 아닌데, 그래서 법을 만들어서 법에 입각해서 하게 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법치국가라는 것인데, 자기의 개인적인 감정으로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판사, 검사, 변호사는 모두가 법을 다루는 기능인인데, 결코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그런 자들을 좋은 사람이라고 인식을 해서, 그들에게 대해서 엄청 실망을 한다는 말이죠. 그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잘못인데, 기능인은 그 기능만 잘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들에게 다른 기대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죠. 물론 그런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실망을 하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말이죠.

그래서 성경은 사람을 붙들고 싸울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 그런데도 싸운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말씀은 다 잊어버리고 "저 사람 때문에 내가 힘들었다. 교회에 나오지 못하겠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왜 그렇게 붙들고 싸웁니까? 그것은 바로 평소에 '나' 라고 붙드는 그 자리의 자력장 때문인데, 그 권세가 어디서 왔는고 하니,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라는 것을 고려해서 행동하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양심, 그리고 자아(EGO)와 주체(SELF) !!

그러니 '양심' 이라는 것이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남들이, 즉 부모, 친구, 교사, 직장 상사, 그렇게 자기가 관련되어있는 자들이 자기에게 기대하는 바, 그런 것들에게 반응을 나타내어서 "나는 여러분이 기대하는 만큼 괜찮은 사람입니다" 라고 자기를 무장했던, 그 모든 것들이 자기 양심의 내용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남을 의식하는데, 타인을 의식한다는 말이죠.

이것이 이미 자아의 내용으로 구축이 되었는데, 그런데 이것을 '자아' 라고 하지 않고 '주체' 라고 한다는 겁니다. 영어로 '셀프(SELF)' 라고 하는데, 자아는 '에고(EGO)' 라고 하고 말이죠. 그러니 영어로는 그 표현이 다른데, 물론 우리나라의 말로도 다르기는 한데, 자아와 주체가 다르다는 겁니다.

주체와 자아는 둘 다 없는 것인데, 없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인데, 막대자석의 자기장처럼 말이죠. 그 힘은 쇳가루를 뿌려야만 보이는 것이지, 그냘 막대자석만 있으면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의 주체와 자아는 눈이 보이지 않고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무엇만 있습니까? 인간의 육체, 즉 몸만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목욕탕에 옷을 벗고 들어가면 다 똑같은데,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 모른다는 겁니다. 물론 문신을 한 경우에는 대충 짐작을 할 수 있는데, 양아치나 조폭일 가능성이 많다는 말이죠. 그런데 목욕탕 바깥에 나가서 옷을 입게 되면 표시가 나는데, 한 쪽은 제복을 입고 다른 쪽은 잠바를 입게 되면 말이죠.

원래 있는 것은 몸밖에 없는데, 그러니 우리는 자아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주체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우리는 몸으로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태어나서 그 몸을 자기 몸이라고 하지 못하는데, 적어도 16개월에서 24개월 동안은 말이죠. 그때는 엄마가 시장을 가면 그 아이는 울음을 터트리는데, 왜냐하면 자기 몸이 자기를 떠나기 때문에 말이죠.

자의식의 발생 !!

그런데 그 기간이 지나게 되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것을 두고 '자의식의 발생'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자의식은 엄마로 인해서 생긴 것이기에, 그래서 엄마의 사고방식, 엄마의 훈계, 그것이 그 아이의 자아를 형성시키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아가 형성되면서 동시에 주체도 형성이 되는데, 그러니 이 '자아' 라고 하는 것은 '나' 라고 할 수 있고, 반면에 '주체' 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엄마가 자기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알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주체가 생겨나게 된다는 말이죠.

이렇게 보면 자아와 주체가 같다고 볼 수도 있는데, 물론 어릴 때는 같다는 겁니다. 그런데 크면서 어떻게 되는고 하니, 예를 들어서, 엄마가 외출을 하면서 "오늘 집을 잘 봐라. 친구들은 놀러오게 하지 마라. 특히 여자친구는 안 된다" 라고 했다면(ㅋㅋ), 그런데 엄마가 나가자마자 전화를 해서 친구를 부른다고 하면, 그때 비로소 주체가 등장하게 된다는 겁니다. 즉 '내 인생 따로' 라는 것이 형성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면 갈라지게 되는데, "엄마는 엄마고, 나는 나다" 라고 말이죠. 엄마의 주체와 자기 주체가 다르다는 겁니다. 하지만 어릴 때는 그게 아닌데,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자라게 되면 따로 라는 것이죠.

하지만 인간이 죽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주체도 자기를 살리지 못하고 자아도 살리지를 못하는데, 그런데 몸은 시들시들해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 설교시간에 이런 인간의 몸을 두고 '쇠퇴의 아이콘' 이라고 했는데, 가만히 있어도 시간이 뜯어간다는 말이죠.

장로님은 이제 뜯기는 시기가 되어서 이런 이야기가 실감이 나지 싶은데(ㅋㅋ), 가만히 있어도 시간이 자기를 그렇게 엉망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겁니다. 이게 전도서 마지막에 나오는데, 척추가 중력을 이기지 못한다는 겁니다. 전에는 서있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허리가 아프다는 말이죠. 머리도 희게 만들고, 이도 빠지게 하고, 피부도 그만 쭈글쭈글하게 만들어버린다는 말이죠.

그리고 귀도 들리지 않는데, 그래서 노인네들이 버스를 타고 전화를 하면 얼마나 시끄러운지 모른다는 겁니다. 귀가 들리지 않으니 자동적으로 목소리가 커지는데, 그렇지 않아도 경상도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하는데, 거기에 귀까지 들리지 않으니 얼마나 소란스러운지 모른다는 겁니다. 10살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70이 넘으니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아무리 자아와 주체가 "그렇게 하면 안 돼. 버스를 타면 조용히 해야해" 라고 해도, 몸이 그렇게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겁니다. 몸은 자아의 것이 아닌데, 오히려 몸이 자아를 지배하지 자아가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죠. 몸이 아프면 짜증이 나는데, 자아가 아무리 짜증을 내지 말라고 해도, 그렇게 안 된다는 겁니다.

이러한 자아와 주체는 허풍인데, 하지만 살아가는 것은 몸 위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개인적으로는 자아, 남들에게는 주체라는 말이죠. 그러니 자아와 주체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혼자 있을 때는 자아이고, 다른 사람을 의식하면 그것은 주체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혼자 있으면 개망나니이지만, 남들과 같이 있을 때는 그야말로 점잖을 떤다는 말이죠. "여기서 이런 짓을 하면 안 됩니다" 라고 한다면 주체이고, "여기는 내 집이니 내 마음대로 내가 옷을 벗겠다" 라고 하면, 그것은 자아라는 말이죠.

자아는 남고, 주체는 날아가고 !!

그런데 노망이 들었다고 하면, 요즘은 그것을 치매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러면 자아가 우세한데, 자아가 몸과 가까우니 말이죠. 처음에 태어났을 때는 몸이 있었고 자아가 있었는데, 주체가 있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죽을 때도 점점 더 몸과 가까워지는데, 주체는 날아가고 자아만 있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아버지가 노망이 들어서 딸이 와서 보살피는데, 그래서 아버지가 바지를 마구 벗으려고 하자 딸이 "아버지, 여기서 그러시면 안 됩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내 몸이니 내 마음대로 하겠다" 라고 하면, 그게 바로 노망이 든 것이란 말이죠.

주체가 이제 희미해지고 말았는데, "나 혼자 있으면 몰라도, 여기서 내가 이렇게 하면 안 되지" 라고 하는 주체가 그만 날아가 버렸다는 겁니다. 우리도 이제는 그 순간이 슬슬 다가오는데(ㅋㅋ), 그러니 아직 주체가 살아있을 때 죽는 것이 제일 좋다는 것이죠. 그것도 고통도 없이 자는 잠결에, 새벽 2시 46분에 말이죠.

그래서 아침에 자식들이 아버지를 몇 번 불러보다가 대답이 없으면 치우면 되는데, 그게 제일 깔끔하다는 겁니다. 유산도 이미 다 챙겨 받았으니, 별다른 미련이 없다는 말이죠. 설령 미련이 좀 남는다고 해도 불과 3개월을 넘기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성경말씀이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피를 제공하시는데, 이것이 구약에서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 그게 조금 전에 우리가 살펴본 것인데 말이죠. 거기에 히브리서 9장 22절의 말씀이 나온다는 겁니다.

(히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피를 뿌려라 !!

여기에 '율법을 좇아' 라고 하는데, 이것을 '하나님의 법을 쫓아' 라는 의미인데, 그 다음에 "모든 물건은 정결케 되나니" 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이 받으시는 모든 물건은, 하나님께서 그냥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피를 뿌려야 거룩함을 얻는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제사를 드리는 기구에 피를 뿌려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면 그 물건의 자리에 우리 인간을 대체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인간도 그 기구처럼 하나님이 받을 만한 것이 되려고 하면, 역시 피뿌림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때 제사를 드릴 때 양을 잡았는데, 그러면 양을 피를 뿌리면 되는 겁니까? 그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닌데, 시장에 가서 양을 사서 잡아서 바르면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은 안 된다고 하시는데, 염소도 안 되고, 소도 안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하면 그 기구들은 양의 피를 뿌려서 받는데, 왜 인간은 그게 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인간은 왜 받지 않느냐는 말이죠.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여기 에베소서 6장에 나오듯이, 인간의 마귀의 권세로서 포위되어있다는 겁니다.

여기에 인간의 세력이 있는데, 이것을 악마의 세력이 덮치게 되면, 마치 레슬링 선수가 상대방 선수를 덮치면 심판이 "하나, 둘, 셋" 이라고 하면서 카운트를 하는데, 그렇게 하면 경기가 끝난다는 겁니다. 바로 그렇게 악마가 덮친다는 말이죠. 그러면 악마가 덮친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악마가 우리의 조상인 아담과 함께 있음으로 인해서 아담이 악마의 심성을 그대로 인수를 받게 되는데, 그 악마의 심성이 무엇인고 하니, "나는 신이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나는 신이다" 라고 하는 것은 그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모든 판단과 결정은 나의 자율, 혹은 나의 자유에 의해서 하겠다" 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나는 신이다" 라고 하는 뜻인데, 그러면 그렇게 판단만 하면 끝나는 겁니까?

우리가 방금 주체와 자아를 살펴보았는데, 자기가 판단하는 것은 자아에 속한 것인데, 그런데 주체가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 인간은 자기가 판단하는 것으로는 만족해하지를 않고, 그 다음에 자기가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은 누구에게 인정을 받아야만 합니까? 타인에게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주체라는 겁니다.

살인충동 !!

그러면 "나는 잘났다" 라고 자아가 인정을 했는데, 그런데 남들에게 그런 판정을 받지 못한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런 남들을 사랑할까요? 미워할까요? 미워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살인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살인사건이라는 겁니다. 꼭 죽여야 살인이 아니고 미움 자체가 살인의 동기가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대부분이 예뻐서 죽이는 것이 아니라 미워서 죽이게 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누군가와 싸우게 되면 그 다음에 나오는 감정이 무엇인고 하니, "저 인간, 어디 가서 죽어버려라"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더 이상 그 사람을 보기 싫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그만 예수님을 죽여버렸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 이상 예수는 보기 싫다" 라는 것인데, 하늘에 태양이 두 개일 수 있습니까? 태양은 하나라는 말이죠. 신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자기가 신입니까? 예수님이 신입니까? 예수를 믿는 자기가 신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예수님을 신으로 인정해주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어차피 자기가 신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을 믿어도 자기가 신인데, 하나님을 믿어줄 정도로 자기는 넓고 믿음이 좋다는 겁니다. 그런 고운 양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보다도 자기가 더욱 더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마귀의 심성인데, 그것이 야고보서 2장에 나온다는 겁니다. 마귀는 누구를 압니까? 귀신도 하나님이 한 명인 줄 안다는 말이죠. 하나님은 안다고 해서 마귀가 아닌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약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그러니 종교라는 것은 위선인데, 모두가 다 자기의 이익위주라는 겁니다. 그것을 공리주의라고 하는데, 자기에게 이익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교회에 다닌다는 겁니다. 그러니 손해를 보기 위해서 교회에 다니고, 또한 밤을 세워서 기도를 하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죠.

갓바위에 가서 "이번에 주식투자를 했는데, 그 회사가 망하게 하옵소서" 라고 하면서 비는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그 800고지를 힘들게 올라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살기 위해서 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가 왜 살아야 합니까? 그것은 자기의 자아 때문인데, 남들은 죽든 말든 자기만 잘 되면 되는데, 자기 집안만 말이죠. 그래서 올라간다는 겁니다.

이런 성격을 누구에게 인수인계를 받았다는 겁니까? 그게 바로 마귀인데, 육체가 있는 이상 이것은 사라지지 않는데,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평생을 교회에 다녀도, 이것은 계속해서 살아있다는 겁니다. 차라리 노골적으로 불교처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라고 하는 것이 더 솔직하다는 것이죠.

왜 부처를 죽입니까? 자기기 부처가 되는데 방해가 되면 죽이는 것이 맞다는 말이죠. 이것이 우리의 본능이 맞는데, 그러니 결국 종교는 인간본심의 연장이고 투영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포이에르바하가 잘 지적했는데, 종교는 인간 자아를 외부에 투영한 것이라고 보았다는 말이죠.

그럴 때마다 저는 무엇이 생각나는고 하니, 영화 '베트맨' 인데, 옥상에 올라가서 무엇을 남기죠? 밤하늘에 베트맨의 모습이 투영되는데, 이같이 인간은 자기 영상을 에드벌룬처럼 띄운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남들에게 보이면서 살아가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자아가 아니고 주체이기 때문에 말이죠.

다시 말해서, "세상 사람들이 나는 이렇게 옳은 판단을 하면서 살아간다. 이것을 제발 좀 알아주세요. 이것이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보람이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같이 어울려서 공동체를 이루면서 말이죠. 그렇게 해서 남들이 자기를 내치지 않고 받아들이게 되면 비로소 안심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달리 인생이 아니고 바로 이것이 인생인데, 같이 웅성거리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헤겔, '인간은 인정받기 위해서 살아간다' !!

그래서 헤겔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인간은 인정받기 위해서 살아간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네 글자인 '인정 투쟁'으로 요약을 했는데, 즉 자기가 인정을 받기 위해서 애를 쓰는 여정,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고 일생이라는 말이죠.

어릴 때는 엄마에게 인정을 받고, 학교에서는 선생님에게 인정을 받고, 사회에서는 직장상사와 동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말이죠. 그런데 그 '인정' 다음에는 '투쟁' 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남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미국에 가면 교포들이 살고 있는데, 그들이 한국에 있을 때나, 그리고 미국에 있을 때나, 공통점이 무엇인고 하니, 투쟁한다는 것인데, 치열하게 한다는 말이죠. 즉 '주체 인정' 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남들에게 인정을 받았다고 여기게 되면 살아가는 것이 그때부터는 느긋해지는데, 즉 삶에 여유가 있다는 말이죠.

이제는 시간만 끌면서 보내면 되는데, "나는 과거에 이런 이런 사람이었어" 라고 하면서, 그것을 자랑질하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서 동창회라는 곳에 가보면 어떻습니까? 대부분이 이러한 인간들이 나와서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다는 말이죠.

아까 태양은 두 개가 아니라고 했는데, 달리 말하면 자기가 태양이고 자기가 신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 속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내려보내셨고, 그리고 이 땅에서는 인간들이 각자 자기가 신이라고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이러한 공동체는 자기를 자기답게 인정해주기 위해서 있는데, 그래서 자기가 거기에 등록하고 또한 소속이 되었다는 겁니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거기에 소속이 되었을 수도 있고 말이죠. 그런 가운데 각자의 자기 아우라, 혹은 자기장, 그러한 세력을 가지고 서로가 서로를 침범하지 않도록 암묵적으로 조약을 맺는다는 겁니다.

이것을 '사회 계약설' 이라고 하는데, 현대에서는 이게 헌법인데, 그래서 헌법에 의해서 자기 안전을 보장받으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헌법도 법인데, 법에는 해석이 따라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해석은 고정적입니까? 유동적입니까? 유동적인데, 그래서 권력이 있는 쪽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그것을 정치라고 한다는 말이죠.

교육 공무원이나 경찰 공무원, 그런 조직의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은 기능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의사들의 경우에도 밑에 있는 사람들은 기능인이지만, 대한의사회의 간부들은 기능인이 아니고 정치를 하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정치를 합니까? 다른 조직체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데, 그러니 '대한의사회' 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통큰 주체가 된다는 말이죠.

정치인, 안중근 !!

안중근 의사가 무엇 때문에 사격술을 연마해서 하얼빈까지 갔습니까? 물론 대한의사회 소속은 아닌데 말이죠(ㅋㅋ). 그것은 정치인데, 법적으로 이미 일본에 강점을 당했으니 법적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조선민족이 다시 다른 나라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지금 한반도에서 조선이 일본에게 점령을 당했는데, 그런데 이 세계에 조선과 일본만 있습니까? 그렇지가 않은데, 중국도 있고 미국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에 가야하는데, 거기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야 한다는 말이죠. 그는 기능인이 아니고 정치인인데, 그 정치인을 조선의 이름으로 살해를 하게 되면, 그러면 그게 이슈가 되어서 다른 나라에서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조선이 그 자체가 통큰 주체가 되어서 다른 주체로부터 인정을 받을 때, 그러면 조선은 계속해서 이 세계의 공동체로서 유지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주체가 하나의 망상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하나의 실질적인 힘으로 작용한다는 겁니다. 조선이 힘이 없으니 이렇게 해서라도 힘을 키우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야말로 정치적인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안중근 의사가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자기 양심적으로는 깨끗할지 몰라도 천국에 가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안중근 의사는 어디까지나 세상적인 관점에서 생각한 것인데, 즉 이 세계의 공동체로서 조선을 생각했다는 말이죠. 같은 인간들에게 인정을 받으면 된다는 것인데, 세상은 그것으로 끝난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우리가 어릴 때 학교에 다니면서 다들 이런 질문을 받는데, "너는 커서 무엇이 될래?" 라고 말이죠. 그때 어떤 친구가 "저는 용달차를 모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라고 했는데, 그때 막 용달차가 나왔을 때라는 말이죠. 그리고 어떤 친구는 짜장면을 실컷 먹고 싶어서 "저는 중국집을 하고 싶습니다" 라고 하기도 하고 말이죠.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지구가 둥근데, 그러면 아이들이 여기 앞에다가 세운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이 둥근판을 거꾸로 돌리게 되면, 지평선을 넘어서 새로운 요소가 자꾸만 등장한다는 말이죠. 어릴 때는 용달차 운전사, 중국집 사장이 되고 싶다고 하다가, 15살이 되면 엑소나 방탄소년단이 되고 싶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 연예인이 장래희망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친구를 따라 큰 교회에 가니 찬양밴드부가 있는데, 거기서 들리는 베이스 기타 소리가 너무 좋다는 말이죠. 그러면 장래희망이 그만 베이스 기타를 치는 기타리스트가 되어버리는데, 대학을 가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자기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이 세상의 지평선을 살살 돌리게 되면, 자기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자극적인 욕망의 내용들이 계속해서 나온다는 말이죠.

그것은 어른이 되어도 마찬가지인데, 어떤 서울대학을 나온 치과의사는 20년 동안의 의사생활을 때려치우고 김밥장사를 한다고 하는데, 자기에게는 임플란트를 하는 기술보다는 김밥을 만드는 기술이 더 좋더라는 겁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퇴직금을 받아서 온 식구들을 자동차에 데리고 다니면서 전 세계를 구경시켜준다고 하는데, 물론 제정신이 아닌데 말이죠(ㅋㅋ).

내가 소중해 !!

이것을 개인주의라고 하는데, 이 사회에 자기가 무엇을 해서 공헌할 것인지, 그런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무엇이 행복한지,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자기만의 작고도 확실한 행복, 그것을 줄여서 '작확행(?)' 이라고, 아니 요즘말로 '소확행(?)'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수박도 한 통이 아니라 4분의 1로 잘라서 파는데, 1인용이라는 말이죠.

이제는 국가고 나발이고 없는데,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냥 같이 살다가 마음이 맞지 않으면 갈라서면 된다는 것인데, 결혼할 때부터 헤어질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 부모로서 자식을 결혼시키려고 하면 당연히 걱정이 되는데, 언제 헤어질지 모르니 말이죠.

우리는 이미 악마로부터 인수인계를 받는 것이 있어서, 그것이 바로 "내가 신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신으로서 자기 자신이 따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을 무엇으로 이해를 하는고 하니, 신이 신답게 될 때, 그것이 곧 구원이고 행복이고 천국이고, 또한 인생의 마감이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인간이 신이 된다는 것이 약속의 내용에 포함되어있는가?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는데, 인간이 신처럼 된다는 것이 약속의 내용에 들어있습니까? 전혀 없다는 말이죠. 자기가 신처럼 되려는 것이 창세기 3장에 나오는데, 그렇다면 창세기 2장까지 하나님이 주신 약속에 그게 포함이 됩니까? 안 되는데, 그런데 약속이 아닌 것을 하나님에게 요청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렸으니 그것은 눈에 보이는데, 그 피 안에는 예수님이 담겨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능력이 그 피를 통해서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경우에, 원래 악마에 속해있었는데, 그런데 예수님의 피가 능력으로 찾아오게 되면 왜 구원이 되는고 하니, 인간 세계에서 악마의 권세에서 벗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딱 한 분, 오직 예수님만이 아버지의 성령의 능력으로 이 땅에 오셨다가 죽었는데, 즉 악마가 사람들을 부추겨서 예수님을 죽였다는 겁니다. 그리고 악마는 이제 손을 떼었는데, "무슨 죽는 하나님이 다 있어? 엉터리 하나님이야"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은 죽었는데, 그런데 3일만에 다시 살아남으로서 그 죽인 것이 그만 무효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잘못 죽인 것인데, 죽이지 말아야 될 분을 죽이고 말았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다시 살았으니 말이죠. 즉 사람이 죽였고, 하나님이 다시 살려내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과 하나님의 사이는 애초부터 틀어졌다는 것이 확실해졌는데, 인간이 만든 모든 신은 마귀가 만든 가짜였다는 말이죠. 진짜 하나님의 일은 무엇인고 하니,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통해서 하나님을 나타내시지, 다른 것은 다 엉터리라는 겁니다.

신학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어 !!

인간에게 있어서 거룩하고 완전하고 순수한 신앙, 그런 것은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자기가 절대적인 신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위해서 자기가 조작해낸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절대적인 개념들을 동원했다는 겁니다. 지난 주보에 보면 이게 나오는데, 선, 무한, 거룩, 영적, 온전함, 완전함 등, 그런 개념들은 중세철학에서 인간들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개념들이라는 말이죠.

이런 것을 합쳐서 신학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신학, 즉 교리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는데, 그것은 하나의 이론이고 지식이라는 겁니다. 신학은 공부를 하면 자기 주체가 착해지니 문제인데, 하지만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예수님을 죽인 바리새인들은 그냥 놀았던 자들입니까? 공부를 했던 자들입니까? 공부를 한 자들인데, 그들은 신학공부를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신학공부를 하면 할수록, 그게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신학공부를 하기를 했지만, 그 신학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전적으로 죄인이었다는 것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기 잘남을 변호하기 위한 신학일 뿐이었다는 말이죠.

성경공부도 마찬가지인데, 하면 할수록 자기가 잘나 보인다는 겁니다. 뭔가를 제법 아는 것처럼 여겨지고 말이죠. 그것은 성경공부의 부작용인데, 후유증이라는 겁니다. 성경공부를 하면서 그 어떤 것을 생각해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성경공부 자체도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예배도 그렇고 말이죠. 그리고 아무리 십일조를 하고 헌금을 하고 봉사를 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즐겁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겁니다. "아하, 그렇구나" 라고 하면서 인정을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겁니다.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 저는 건강합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병원에 올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자기가 아픈 것을 과대하게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여기도 아프고 저기도 아프고, 오래 서있지도 못합니다" 라고 하면서, 의사 앞에서는 좀 엄살을 떨어도 괜찮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병원이란 곳은 아픈 사람을 고쳐주는 곳인데, 자기가 멀쩡하다는 것을 자랑하는 곳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우리는 끝까지 환자이어야 하는데, 즉 죄인이어야 한다는 말이죠.

(막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돌로 치되, 죄 없는 자가 치라 !!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어떤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는데, 그래서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들이 돌로 치면 되는데, 일부러 예수님을 약올리기 위해서 그 여자를 예수님에게 끌고 온다는 말이죠.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돌로 치라고 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처리할 겁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돌로 치되, 죄 없는 자가 치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이게 무슨 뜻입니까? 누구를 정죄하려고 하면, 그 기준에 자기도 자신이 있으면 그렇게 해보라는 겁니다. 즉 자기도 돌에 맞을 각오가 되어있으면 쳐보라는 말이죠. 그러니 아무도 돌로 칠 사람이 없는데, 왜 그렇습니까?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인데, 죄에서 태어났다는 겁니다. 마귀의 심성을 인수받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심판할 수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짱돌을 들고 있던 자들은 다 가버리고 이제 두 사람만 남았는데, 예수님과 간음한 여인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최종판결을 하시는데, "나는 나의 권한으로 너의 죄를 사하노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이게 복음인데, 오직 예수님만이 죄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죄가 없기 때문에 그대로 인수가 되는데, 그래서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죠.

(요 8: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요 8: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요 8: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요 8: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 8: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요 8: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 8: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의 죄 없음의 능력이 그 여인에게 인수가 되어서, 그렇게 해서 그 여인을 죄 없음의 증거물로 만들 수 있게 되는데, 그런 능력이 예수님에게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마귀는 이제 패배를 당했는데, 물론 예수님에게 말이죠.

사람은 그 누구라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하지만 예수님의 능력이 그 사람에게 침투하게 되면, 그 사람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즉 자기밖에 모르는 일반적인 인간으로, 그렇게 자아와 주체만으로 살아가면서도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의 그 능력으로 인해서 '죄사함' 이라는 승리를 얻게 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복음, 즉 기쁜 소식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에베소서 6장에 보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라고 하는데, 영적인 존재와의 싸움이라는 겁니다. 그 영적인 존재, 즉 악마는 우리를 어떻게 합니까? 대단한 존재라고 하면서 부추기는데, 그런 사상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심어준다는 말이죠. 천상천하유아독존, 즉 "이 세상에선 니가 최고다" 라고 하면서 격려해준다는 겁니다.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성경에서는 이렇게 되어있는데, 하지만 성경말씀을 덮고 자기가 산 위에 혼자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러면 우리 속에서 다음과 같은 악마의 음성이 들린다는 말이죠. 즉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라는 것인데, 인간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당연히 남들로부터 위로를 받아야하는 존재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바로 여러분 !

프로이드는 여기에 대해서, 그것은 어릴 때부터 엄마로부터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 흔적으로 인해서 늙어 죽을 때까지도 위로 받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사실은 어릴 때 엄마에게서 위로를 받았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인간은 처음부터 악마의 권세 아래 놓여있기 때문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욕망이라고 할까요?

심지어 지옥에 가도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을 노래로 만들어서 부른 사람이 있는데, 윤복희라는 말이죠. 그게 '여러분!' 이라는 노래인데, 서로 서로 위로를 해주자는 겁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근원을 건드리는 단어가 바로 이것인데, "우리는 위로를 받아 마땅한 존재다" 라는 겁니다.

교회를 다니고 무엇을 해도 마지막 느낌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 마치 위로를 실어 나르는 수레와도 같다는 느낌이 든다는 겁니다. 우리가 위로를 언제 받으려고 합니까? 그것은 자기가 외로울 때라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이라는 것은, 물론 부모님이 외롭다고 해서 찾아가면 위로를 받는데, 그런데 오래 있으면 또 귀찮다는 겁니다.

그러니 위로를 해주더라도 자기가 필요할 때만 와서 해주기를 원한다는 말이죠. 그럴 때가 아니라면 오지 말라는 것인데, 시도 때도 없이 와서 자기를 자꾸만 건드리면 싫다는 겁니다. 밤에도 불쑥 찾아오고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외롭고 아쉬울 때만 오라는 것인데, 모든 인간이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는 말이죠.

인간은 변하지 않아 !!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정리해보면, 인간은 변합니까? 변하지 않습니까? 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무리 교회에 다니고 해도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마귀는 자꾸만 뭐라고 합니까? "교회에 다녀서 인간이 되었다. 술도 끊고 담배도 끊고 사람이 되었다" 라고 하는데, 그런 악마의 속삭임에 속아넘어가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은 변하지 않는데, 그리고 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죠. 왜 변하지 말아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피의 가치가 계속해서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끝까지 우리는 자기밖에 모르는 죄인으로 살아야 하는데, 그래야 그런 죄인을 용서해주신 예수님의 피의 능력을 찬양하고 감사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 피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의 능력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죽었습니까? 몇몇 사람들의 작당에 의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악마의 세력권으로부터 살해를 당하신 것인데, 그런데 그 죽음에서 빠져나와서 성령으로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그야말로 유일무이한 분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이라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과제이지 우리의 과제가 결코 아닌데, 즉 구원은 주님의 공로이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는 말이죠. 주님께서 다 알아서 우리를 구원해주셨고, 다만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감사할 뿐이라는 겁니다. 구원은 우리가 받고 싶다고 해서 받을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여기서 고린도후서 5장 14절을 보겠습니다.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한다고 하는데, 우리를 덮친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 마지막에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라고 하는데, 인간 대 인간의 다툼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살아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미 죽은 자라는 겁니다. 그것을 항상 우리가 잊어버리고 살아간다는 말이죠. 살아있기에 더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든다는 겁니다.

살아있기에 계속해서 살아야지 !!

그래서 "당신은 왜 살려고 합니까?" 라고 하면, "살아있기에 계속해서 살아야지" 라고 한다는 말이죠.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미 죽은 자인데요?" 라고 하면, "설마? 농담이겠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40년 뒤에 보면 죽어서 시체가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죽음이라는 것은, 자기를 죽이는 사태를 맞닥드리지 않아서 죽지 않은 것이 아닌데, 말이 좀 어렵죠? 자기가 죽지 않은 것이 그런 위험한 상태를 맞이하지 않아서 죽지 않은 것이 아니고, 죽음은 운명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사태가 자기를 죽이는 사태인데, 그것을 우리가 계속해서 맞이하고 있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계속해서 죽음 쪽으로 끌려가고 있으니 말이죠.

양탄자 위에 앉아있는 아이 !!

어제 설교시간에 '양탄자 위에 앉아있는 아이' 이야기를 했는데, 엄마가 아이에게 오라고 해도 오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마치 돌부처처럼 앉아서 "나는 나다" 라고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만 시간을 잡아당기는데, 그러면 제 아무리 보톡스를 맞고 난리를 쳐도 세월을 누가 이기느냐는 겁니다. 나훈아가 침을 튀기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청춘을 돌려달라고 말이죠.

꿈속에서는 언제나 30대인데, 하지만 아침에 꿈에서 깨어나면 몸은 망가져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잘난 척을 하고 있는데, 그래서 "(60대 - 오지 마라. 아직은 멀었다), (70대 - 나는 불러도 안 간다), (80대 - 아직 할 일이 많다), (90대 - 내가 알아서 갈게)" 라고, 그렇게 계속해서 핑계를 대면서 자기는 살아있다고 우긴다는 말이죠.

악마에게 갇혀있기 때문에 살아있다고 우기는데, 하지만 바깥에서 바라보면 이미 죽은 자라는 겁니다. 결국은 죽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죽음을 우리가 피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 착해도 죽고, 악해도 죽고, 어차피 죽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한국이 위험하다고 미국에 이민을 가서 살아도 죽고, 물론 한국에 있어도 죽고, 그리고 월드컵 우승을 해도 죽고 하지 못해도 죽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누가 뭐라고 해도 인간은 죽은 자인데, 죽은 자가 과연 죽은 자를 심판할 수 있을까요? 죽은 자의 혈과 육이 싸운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겁니다. 둘 다 죽은 자인데, 즉 좀비끼리 싸워봐야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이죠. 그 싸움에서 이긴다고 해서 산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모세가 나이 40에 이스라엘의 해방자로 자처해서, 안중근 의사인데 말이죠. 그렇게 해서 불쌍한 자기 히브리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애굽 사람을 죽였는데, 그때는 자기가 독립투사인 줄 알았다는 겁니다. 하지만 독립투사는 고사하고 도망자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나이 80이 되어서, 그야말로 할아버지가 다 되어서 하나님께서 다시 보낼 때는, 그때 모세는 자기 이름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의 이름으로, 즉 하나님의 약속을 짊어지고 간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약속의 사람이 된다는 말이죠.

시간은 육체를 뜯어먹어 !!

우리가 이 땅에서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구원받을 때는, 물론 태어날 때는 자기 이름으로 태어나지만, 그게 바로 혼자 있을 때는 '자아' 이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는 '주체' 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허망한 것인데, 실제로는 인간의 몸, 즉 육체만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시간을 무엇을 공격하는고 하니, 이 육체를 마구 뜯어먹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육체가 힘이 빠지는데, 그러니 아무리 착하고 싶어도 착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몸이 아픈데, 이가 아프다는 겁니다. 남들에게 방긋이 웃으면서 예의를 차려야 하는데, 그런데 이가 아프니 인상을 쓰게 된다는 말이죠. 만약에 상견례를 하는데 이런 일이 생긴다고 하면 상대방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사돈, 이번 결혼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없던 것으로 할까요?"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죄인 꼬라지에, 완벽한 의인 !!

그러니 아무리 남들에게 자아와 주체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그것을 잘 안다고 할지라도 몸이 아프게 되면, 도저히 달리 어떻게 할 방도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이름으로 살다가 구원을 받을 때는 누구의 이름인고 하니, 자기 이름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즉 하나님의 약속의 완성품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꼬라지는 죄인 꼬라지인데, 그런데 그 조직에 포함이 될 때는 하나님의 의인으로 구원이 된다는 말이죠. 평생 죄를 지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너는 완벽한 의인이다" 라고 하시면서 받아주신다는 겁니다. 참으로 희한하지 않습니까?

살인강도 2건, 사기 3건, 성폭행 4건, 그야말로 누가 봐도 죄인인데, 그런데 그 살인강도가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달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강도야, 너는 오늘밤에 나와 같이 천국에 간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게 누구의 권한입니까? 예수님의 권한인데, 그게 바로 예수님의 아우라라는 겁니다.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힘이 죄를 이긴 것인데, 그러면 그때 강도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살인강도 2건, 사기 3건, 성폭행 4건, 이것은 제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게 하신 겁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성도에게는 하나님께서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사람으로 인해서 이 세상에서 피해를 본 자들이 한 두 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일체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말이죠.

피해자는 있지만, 책임질 자는 없어 !!

그런데 만약에 책임을 묻게 되면 그 사람은 죄에 대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데, 그런데 책임이 없다고 하면 처벌도 역시 없다는 겁니다. 분명히 피해자는 있는데 책임을 질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죠. 말을 하고 나니 우리나라의 정치판 분위기와 비슷한데, 책임질 인간들이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월드컵 16강에 들지도 못했는데, 역시 책임질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이죠(ㅋㅋ).

그 책임을 주님께서 면책을 해주시는데, 죄사함과 동시에 "니가 책임을 질 것은 이만큼도 남아있지 않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내가 책임을 지겠다" 라고 하시는데, 이것을 두고서 보혜사, 즉 변호사라는 겁니다. 우리가 수임을 요청한 적이 없는데, 그런데 일방적으로 주님이 친히 우리의 변호사가 되셔서, 마지막 심판 때에 "이 사람은 죄가 없습니다" 라고 변호를 해주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께서 다 가지고 가셨는데, 그 증거가 곧 십자가라는 말이죠. 십자가에서 자기의 피를 흘리심으로 하나님에게 우리가 받을 벌을 예수님께서 대신해서 모두 받으셨는데, 그래서 우리는 이제 받을 벌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받을 벌이 없는데 무슨 책을 지고 말고 하느냐는 것이죠. 지옥에 갈 이유가 없는데, 그러니 천국에 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벌은 이미 주님께서 다 낚아채 버렸다는 말이죠.

성도는, 뻔뻔스러워야 !!

그런데 이렇게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하니 상당히 비윤리적으로 들리지 않습니까? 이것을 '뻔뻔하다' 라고 하는데, 마치 영화 '밀양'에 나오는 유괴범처럼 말이죠. 성도는 뻔뻔스러워야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이용할 필요는 없지만 말이죠. 아무튼 성도의 일거수일투족은 주님의 프로젝트 안에서 이루어진 일들이라는 겁니다. 주님의 계획 속에서 그런 일을 했어야 했기에, 그래서 당연히 그런 일이 조성되고 일어났다는 말이죠.

그러니 기쁜 소식이란 무엇인고 하니, "나는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태어나기 이전부터 구원받기로 작정이 되었다" 라고 하는, 그런 내용까지도 우리에게 수용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오직 하나님의 영을 받아야 가능하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피를 중심으로 보면 납득이 되는데, 즉 "내가 이렇게 착해서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 앞에서 아무도 착한 사람이 없는데, 그런데 그 피가 능력이 있어서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우리는 악마의 권세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데, 그런데 우리에게 침투해서, 마치 보쌈을 하듯이 해서 데리고 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데리고 가면 인간이 바뀌는데, 이전에는 자기 이름으로 움직였지만,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로서, 그렇게 주님께서 우리를 이끌어내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때부터 우리의 싸움은 같은 인간들끼리의 싸움이 아니라는 겁니다. 누구와의 싸움입니까?

그게 이미 승리한 입장에서는 그동안 자기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 있는데, 물론 책임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게 바로 양심이란 말이죠. 그 양심마저 변호사에게 넘겨주어야 하는데, 그것을 넘겨주지 않으면 우리는 마귀에게 또 당한다는 겁니다.

순수한 양심은 없어 !!

인간에게는 순수한 양심이라는 것이 없는데,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에 결코 순수하지 않다는 말이죠. 인간은 정치적으로 남들에게 변명하고 싶어하는데, 그것이 우리의 본능이기에 변명으로 일관한다는 겁니다. "비록 나쁜 짓을 했지만 환경이 그래서 그렇게 되었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성도는 그런 변명할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죄를 지은 것은 맞지만 책임을 질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 책임은 주님이 몽땅 다 가지고 가셨기에 말이죠. 그러니 당연히 뻔뻔스러운데, 하지만 그 뻔뻔스러움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즉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피의 사람이라는 말이죠.

모세는 이런 인간으로서 애굽에 다시 돌아가서 자기 백성을 건져내었는데, 이것은 자기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인데, 그래서 모세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이 약속대로 시행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남은 인생도 모세와 같은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물론 우리는 돌아서면 또 자기밖에 모르지만, 그리고 남들 앞에서 폼을 잡고 갑질을 하고 으시대는 것이 우리의 주특기라는 겁니다. 그것 이외에 우리는 할 줄 아는 것이 전혀 없는데, 즉 "건드리지마. 나는 이런 인간이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령을 받은 자라고 하면 "아하, 그것이 바로 죄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반면에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은 "나를 보고 너무 탓하지 말라" 라고 하면서 자기 변명으로 일관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는 예수님을 증거하고, 다른 하나는 자기 절대성을 증거하는데, 그 차이점이 곧 예수님의 피로 인해서 생겨났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슨 일을 하셨는지, 그것이 중요한 줄로 압니다. 그러한 주님의 일하심이 우리의 자아와 주체에 침투해서, 우리의 몸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주님이 친히 다루고 있다는 몸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8,7,11 오전 1시에 마침.

이 몸이 부서지고 가정이 부서지고,
그 모든 것이 다 부서진다고 해도,
오직 주님의 피만 기억하게 하소서 !!
 첨부파일 : 18대구강의('전도서'속의그리스도)38-피와양심.hwp (60.3K), Dow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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