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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6 22:18:47 조회 : 205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39 - 어둠 속의 빛 이름 : 구득영(IP:203.223.97.179)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39 - 어둠 속의 빛

18,07,1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93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우리가 전도서를 그냥 보게 되면 전도서는 이 세상의 허무함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즉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하는데, 그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한다는 말이죠.

(전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여기에서 '모든 것' 이라는 것은, 일체의 예외가 없는데, 즉 제외됨이 없다는 겁니다.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도 그렇고 말이죠. 우리는 이 세상을 보면서 관찰을 하는데, 그 관찰이 과학의 기초라는 겁니다. 갈릴레오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가 보게 되면, 우리 주위에 있는 해와 달과 별을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관찰을 통해서 본다는 말이죠.

그냥 보는 것과 관찰을 하는 것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관찰을 할 때는 세상의 변화 속에서, 그것을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그렇게 환원시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을 관찰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관찰을 하게 되면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제외를 시킨다는 말이죠.

우리가 자기 집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가로수의 나뭇잎이 몇 개인지, 그런 것은 헤아리지 않는데, 왜냐하면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니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하지만 신호등의 불이 빨간색인지 파란색인지, 그런 것은 중요하다는 말이죠.

그렇게 제외시키는 결정권이 누구에게 있는고 하니까, 바로 '나'에게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나에게 이익이 된다. 손해가 된다, 불필요하다" 라고 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손해가 되면 피해버리고,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일단 남겨두고, 그리고 이익이 되는 것은 관찰을 하는데, 혹은 집중을 한다는 말이죠. 그게 어떤 관찰이고 집중인고 하니, 의식을 가지고 한다는 겁니다.

훗설의 '현상학' !!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나오는 이런 철학사조가 있는데, 그것을 '현상학'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게 무엇인고 하니까, "과학이라는 것은 진리가 아니고, 내가 얻고자 하고 보고자 하는 범위 내에서 필요한 것만 축출할 뿐이다. 그러니 진리가 아닌 필요에 의해서 축출한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전체를 다 장악한 진리라고 우기지 말라" 라고 하는데, 그것이 곧 훗설의 현상학이라는 말이죠.

이것으로 철학이 엄청난 충격 속에 빠지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 이전까지 철학은 진리를 추구했는데, 다윈의 진화론이 나오고 하면, 그런 것을 다 끌어 모아서 "인간이 어디에 의지를 하면서 살 것인가?" 라고 하면서, 자기 몸과 마음을 다 떨어서 맡겨도 괜찮은, 그런 안정감을 주는 최종적인 진리를 얻기 위해서, 그래서 진리를 추구하고 탐구하고 노력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현상학이 나옴으로서 어떻게 됩니까? 사람이 사람마다 진리가 다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너는 너에게 필요한 것을 관찰하고, 나는 나에게 필요한 것을 관찰하니, 서로가 서로에게 진리라고 우기면 안 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요즘 세상에서는 이것이 너무나 당연한데, "내가 하고 싶어서 연애를 하는데, 형이 왜 간섭을 하나?" 라는 겁니다. 즉 "니는 니 인생을 가고 나는 내 인생을 간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국가개념이 그만 날아가 버리는데, "국가가 나에게 이익을 주면 충성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지 않겠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나는 군대에 가지 않겠다 !!

1960년도에 베트남 전쟁이 터졌을 때 미국에서 히피족이 나왔는데, 그때 가수들이 전쟁에 반대하는 노래를 많이 불렀다는 겁니다. 그들의 주장이 무엇인고 하니, "나는 나고 국가는 국가인데, 왜 국가가 벌려놓은 일에 나의 귀한 목숨을 요구하는가? 남의 나라에 가서 왜 죽어야 하는가?" 라고 나왔는데, 그런 국가의 논리에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나는 총을 들고 사람을 죽일 수 없다. 국가가 무엇이관데 총을 들고 사람을 죽이라고 하는가?" 라는 것이 여호와 증인인데, 그래서 그들은 군에 가는 대신에 교도소에 가는데, 거기서 교도관들을 도와준다는 말이죠. 사실상 국가로 보면 손해도 아닌데, 그들 때문에 교도행정이 훨씬 더 잘 돌아간다는 겁니다. 그리고 군복무를 하는 기간 이상을 거기서 보낸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청년들이 모르는 것이 있는데, 물론 자기들은 순교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나오는데, 하지만 그게 현상학을 공부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겁니다. 자기들이 하는 행동이 철학 범주의 일부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말이죠. 자기의 이익을 위한, 편리를 위한 것이 진리이고, 그것 이외는 다 제외를 시키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군에 가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왜 군에 갑니까? 군대가 좋아서 가는 것이 아니고, 국가 권력의 실제성을 인정하기에 그렇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여호와의 증인들의 경우에는, 자기들은 피 흘려 전쟁을 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은 수혈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보면 피를 흘리면 안 된다고 했으니, 그래서 전쟁을 위한 군대에는 가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들은 자기 권세만 권세인 줄 알고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무엇인고 하니, 스스로 군대에 가라고 하면 아무도 가지 않는데, 그런데 입영 통지서가 나오고, 그것을 거부하면 고발을 당하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만 있다는 것이 실제가 아니고, 국가가 힘을 발휘하는 것도 역시 실제가 된다는 말이죠. 실제가 된다는 것이 권력이 된다는 것인데, 그러면 자기가 군대에 다녀왔다는 것이 사회에서 취직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해병대를 나왔어? 그러면 무엇이든지 다 하겠네. 그러면 우리 회사에 나오너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해서 취직을 하게 되면 돈이 생기고, 또 돈이 생기면 자기가 나름대로 생활할 수 있는 힘이 되는데, 그런 것까지도 내다본다는 것이죠.

그러면 '헛되다' 라고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처음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공부하는 이 전도서는 무엇인고 하니까, "모든 것이 헛되다" 라고 했는데,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헛되다고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그런데 자기 자신은 결코 헛되지가 않다는 겁니다. 그러면 헛되지 않는 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헛되다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려고 하면, 거기에 정당한 근거와 논리가 있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헛되고 헛되다. 그러니 믿어라" 라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지시에 불과한데, 자기 몸으로 체험이 되지 않는데 어떻게 믿는다고 할 수 있느냐는 말이죠. 하나님의 말씀이니 어쩔 수 없는 동의하면서 때우는 식인데, 그것은 가짜라는 겁니다. 그것을 일본말로 '후루꾸' 라고 하는데, 이게 너무 전문용어라서 잘 모르는 표정들인데 말이죠(ㅋㅋ).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이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고개를 끄덕거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고 하니, 그 말씀이 우리를 보고 헛되다고 할 때는, 그것을 "예, 제가 헛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라고 하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동의를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뒤통수를 치는 것이란 말이죠.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인간은 없는데, 왜냐하면 이미 자기 자신을 믿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현상학인데, 즉 자기 자신을 믿기 때문에 옆에 어떤 어르신이 이야기를 하면,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서 "예, 예, 맞습니다. 인생을 많이 사셨기에 맞는 말씀입니다" 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동의하는 것이 아닌데, 결코 인간은 자기 몸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말이죠. 자기의 것으로 다시 환원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이 아무리 헛되다고 해도, 결코 자기 자신은 헛되지 않다는 말이죠. 헛되지 않다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것인데, 즉 뭔가 의미를 챙길 수 있다고 본다는 말이죠. 살아가는 이유를 쟁취할 수 있고, 행복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헛되다고 하면 행복해질 수가 없는데, 그런데 자기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보니 헛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는 말이죠. 헛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일 수는 있지만, 자기 생각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성경에서 헛되다고 하는 것은, 인간들이 그것을 믿을 것이라는 기대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헛되다는 것을 인간들이 믿지 않음으로서, 하나님은 진짜 헛되다는 것을 표시를 내려고 하신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헛되다' 라고 하면 사람들이 전부 다 외면을 해버리는데, 즉 "우리는 헛되지 않습니다" 라고 반발을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기대하신 것인데, 그래서 '구약'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우리는 전도서가 구약에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구약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아무도 그 말씀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는데, 동의하실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말이죠.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에게 반발하는 존재인데,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헛되다고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모든 것이 헛되다" 라고 하면, 우리 인간은 "헛되지 않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헛되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헛되다고 이야기한 것에 대해서 반발을 하니 헛되다는 것이죠.

허무에서 천국까지 이어지는 통로 !!

그렇다면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이니, 그 믿지 않는 모습이 어떠한지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재 93페이지에 보면, "이 허무에서 천국까지 이어지는 통로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만들어내시는가?" 라고 되어있는데, 하나님께서 전도서 1장에서 '헛되다' 라고 하시고 나서, 전도서가 끝나는 게 아니라 12장까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12장까지 하나님께서 긴 내용들을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헛되다는 것에 대해서 인간들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헛된 이유를 제시하는데, 그 중에서 하나가 전도서 8장 7절인데,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전 8:7)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장래의 일을 가르칠 사람이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다들 모른다는 겁니다. 사흘 앞의 일만 알아도 주식투자를 해서 부자가 될 수 있는데, 골치 아프게 주식까지 할 필요도 없고 로또를 구입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 인간은 왜 장래의 일을 모릅니까?

그렇게 모르도록 방해를 놓은 것이 있는데, 그게 과거라는 겁니다. 인간은 믿는 것이 있는데, 과거를 믿는다는 말이죠. 즉 자기의 과거경험을 믿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언제나 끊어짐이 없이 차근차근 연속이 된다는 말이죠.

그것을 이야기한 철학자가 있는데, '베르그송' 이라는 겁니다. 프랑스 철학자인데, 그의 주장의 핵심은 무엇인고 하니, '지속' 이라는 말이죠. 독일 철학자 훗설이 이야기한 현상학은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의 진리는 자기가 의도를 가지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인데, 그런데 그게 너무 일방적이란 겁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는 말이죠. 공통점이 없는데, 그래서 "너는 너의 길을 가고 나는 나의 길을 가면 된다" 라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베르그송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렇게 자기 팔을 자기가 흔들게 되면 굳이 사회를 구성할 이유도 없고 국가도 성립될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심지어 동호회도 만들어지지가 않는다는 겁니다. 뭔가 의견이 합쳐져서 만들어진다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자기 팔을 자기가 흔들게 되면, 무슨 조직이 만들어지고 집단이 형성되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뭔가 빠진 것이 있다는 겁니다.

물론 인간이 개인적으로 자기 주장을 하는 것은 맞는데, 그러면서도 공통점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인간이 지속에 포함되어있다는 말이죠. 이 '지속' 이란 것은 끊어짐이 없이 계속 이어져 가는 것인데, 그것을 '시간적 지속' 이라고 하는데,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끊어지지 않는다" 라는 겁니다.

우리가 철학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틀린 것이 없는데,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당연한 이야기를 가지고 왜 그렇게 많은 주장을 하고 책을 쓰는고 하니, 사람은 하나를 보게 되면 다른 하나를 놓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자유를 주장할 때는 현상학이 멋져 보이는데, 하지만 그렇게 되면 부부도 부부가 아니고 가정도 가정이 아니고 모임도 모임이 아니라는 겁니다. "너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다르다" 라고 하면, 모였다가도 끝내고 헤어져야 한다는 말이죠. 전부가 남남이라는 겁니다.

30분 뒤에 짜장면이 옵니다 !!

그런데 거기에 점을 하나 빼서 '님'이 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ㅋㅋ), 물론 '님'에다가 점을 붙이면 또 다시 '남'이 되는데 말이죠. 분명히 뭔가 이끌리는 것이 있지 않느냐는 것인데, 그 이끌리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미래를 같이 본다는 겁니다. 서로 다르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우리가 모임을 마치고 나서 "날씨도 덥고 하니 여기서 그냥 짜장면을 배달시켜서 먹읍시다" 라고 하면, 그러면 헤어지지 않는데, 왜냐하면 30분 뒤에 짜장면이 오니 말이죠. 그렇게 동일한 것을 바라보고 있을 때는 헤어지지 않는데, 지속적인 미래가 현재 우리의 개별자를 한 덩어리로 묶어준다는 겁니다.

그러면 회사가 운영이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옛날에 우리가 잘 먹고 잘 살았다" 라고 하면, 그게 회사입니까? 회사는 항상 그래프를 제시해주어야 하는데, 1분기가 10퍼센트 성장이라고 하면 2분기는 15퍼센트라고 말이죠. 자전거는 달려야 하듯이 그래프는 올라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즘은 국가를 그냥 국가라고 하지 않고, '국가경영'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국가도 하나의 회사라는 말이죠. 그러니 제대로 된 국가라고 하면, 있는 돈을 그냥 다 써버리면 안 되고, 앞으로 나가가야 한다는 겁니다. 한 번 절약을 하고 다음에는 펑펑 쓰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허리띠를 쪼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냥 퍼주게 되면 그리스나 스페인 꼴이 나는데, 정치인들이 표를 얻기 위해서 공무원을 많이 뽑고 복지정책을 무리하게 펼치다가 말이죠. 65세 이상은 공짜로 지하철을 타게 해주고, 또한 아이를 낳으면 일인당 천만원씩 지원해주고 말이죠. 그렇게 하면 나라꼴이 엉망이 되고 마는데, 그것을 성장동력을 잃었다고 한다는 겁니다. 남의 나라 이야기를 쉽게 언급한 것 같아서 좀 그렇지만 말이죠.

그러니 미래가 현재를 일으켜 세우는데, 즉 미래가 현재의 고된 하루하루를 참고 인내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겁니다. 지금 현재가 힘이 드는 것을 알지만, 하지만 내일의 찬란한 행복을 위해서 지금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는 말이죠.

이윤택이 부른 '마이 웨이' 라는 노래가 있는데,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는 겁니다. 자기 길을 가야한다는 것인데, 쓰러질 수가 없다는 말이죠. 김종환의 '존재의 의미' 라는 노래에도 그런 내용이 나오는데, "지금은 힘이 들어도 당신과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다시 일어서야 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미래인데, 미래에는 잘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미래의 희망을 품기 때문에 지금의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인데, 그것을 과학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즉 인간이 미래를 바라보고 지금의 고통을 인내하고 극복하면서 스스로 자기 자신의 모든 역량을, 그 미래를 위해서 재조정에 들어가는 것, 그것을 생물학에서는 '진화의 힘'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진화를 한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미래가 인간을 변신시키기에 말이죠. 다른 인간으로 만들기 때문에 말이죠. 그런데 진화론이 아니고 창조론이라고 하면, 엔트로피의 법칙에 의해서 점점 더 혼란으로 가게 된다는 겁니다.

엔트로피의 법칙이라는 것은, 갈수록 이 세상은 무질서해지고, 인간에게 필요하고 괜찮은 것은 점점 더 줄어든다고 하는 물리학의 법칙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같은 과학이면서도 진화론과 물리학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조직에 유리한 쪽으로 채택을 하면 된다는 말이죠.

손가락 사이로 빠지는 모래처럼 !!

교인수가 지금은 50명인데, 한 달 뒤에는 40명이고, 두 달 뒤에는 30명이고, 석 달 뒤에는 20명이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교회의 문을 닫으라는 조짐이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도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오늘날 교회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래서 목사는 이삿짐을 꾸린다는 말이죠.

하지만 예수님은 정반대였는데, 예를 들어서, 우리가 백사장에서 모레를 손으로 쥐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손가락 사이로 그만 다 빠지게 되는데, 그게 예수님의 방식이라는 겁니다. 즉 빠질 놈은 빠지라는 말이죠. 교회가 되어서 사람을 끌어 모을 생각일랑 하지말고, 제대로 말씀을 증거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몇 명이 모이든 간에, 그런 사람을 믿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몇 명이 모이든 간에, 그 모인 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가 없는데, 그렇게 그들이 왜 왔는지 모른다고 하면, 그러면 그 사람들을 장악해서 붙잡으려고 알랑방귀를 뀌지 말라는 겁니다. 즉 "새로운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행복이 있습니다. 천국을 보장해드립니다" 라고 하는 짓거리를 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하게 되면, 그러면 손가락 사이의 모래처럼 빠질 사람은 다 빠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낙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오히려 기적으로 여기고 감사해야 하는데, "역시 주님은 살아계십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이론은 맞지만 실제로 그런 교회가 있습니까?" 라고 할지 몰라도, 돌아다니면서 저는 그런 교회를 놀랍게도 종종 본다는 겁니다. 새로운 사람이 오게 되면 오히려 약간을 화를 내는 듯한 분위기가 조성이 되는데, 짝퉁처럼 보이는데 오기는 왜 왔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말씀 외에는 달리 아무 것도 신경을 쓰지 않아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우리편이 많다" 라고 한다면, 그런 것은 전혀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사람이 배신을 한다고 여기면 안 되는데, 오히려 배신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는 말이죠.

처음부터 실망하자 !!

그것은 부모자식 간이나 부부사이도 마찬가지인데, 이왕 결혼을 했다고 하면, 일찍 실망을 하는 것이 부부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죠.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황혼이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실망을 하자는 겁니다. 처음부터 "저 사람은 나를 이용했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죠.

어차피 서로 이용한 것이니 누가 손해를 보고 하는 것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 마음을 먹으면 50년은 거뜬하게 같이 살아갈 수가 있는데, 아무리 원수지간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헤어지면 어차피 서로가 손해라는 겁니다. 또 다시 만나는 것은 원수라는 말이죠.

아무튼 인간은 과거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미래의 힘이 없으면 쓰러진다는 말이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미래의 힘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전도서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미래에 대해서 인간은 모른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미래를 생각한다는 겁니다. 참 희한한데 말이죠.

과거에서 미래가 있어야 하는데, 그 미래를 소망, 희망, 기대, 목표 등으로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회사이든 가정이든, 물론 교회도 그러하고 말이죠. 그런데 과거에서 미래를 상상하고 떠올릴 때, 과연 그 근거는 어디서 제공이 되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미래가 보다 더 확실해지려고 하면, 과거에 대한 분석을 거듭해주어야 하는데, 치밀히 말이죠. 그렇다면 과거를 분석하면 무엇이 나옵니까?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일관성이 있게 흐르는 어떤 원칙과 같은 것이, 그 어떤 상황과도 관련이 없이 꾸준하게 이어져오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겁니다.

역사에 '법칙'이 있는가?

과학 쪽에서는 이것을 '공식' 이라고 하고, 그리고 인문학에서는 '역사의 법칙'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옛것을 알아서 미래에 참고하기 위함인데, 그래서 역사의 법칙을 찾고 끄집어내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과연 그 역사에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여기에 인간들이 속아넘어간다는 말이죠. 역사의 법칙을 끄집어낸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역사의 법칙을 끄집어낸 것이 아니고, '매뉴얼'을 끄집어내었다는 겁니다. 즉 사무적이고 행정적인 일을 하는 요령을 말이죠.

예를 들어서, 중고자동차를 수출하는 무역회사라고 하면 거기에 관련된 법을 모두 다 알아야 하는데, 그러면 신입사원이라고 하면 처음에는 어쩔 줄을 모른다는 겁니다. 법을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니 말이죠. 그런데 노련한 과장의 경우에는 오더를 보면 딱 보면 안다는 겁니다. 무슨 서류가 필요하고, 어떻게 준비를 해야하는지를 말이죠.

그래서 "김 대리, 서류가 하나 빠졌다. 그리고 이럴 경우에는 이런 영어단어를 써야해"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비행사들이 대화를 하는 것을 보면 영어를 참 잘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그들이 사용하는 전문용어가 따로 있어서, 그것만 알면 된다는 말이죠. 그게 매뉴얼이라는 겁니다.

살아남은 자의 정당성 !!

그러니 인간에게 역사의 법칙은 없는데, 그래서 역사의 법칙이 아니라, 역사에서 살아남은 자의 정당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자기 정당성' 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고 난 뒤에 이명박의 4대강 사업을 건드렸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정당성을 그 앞의 대통령에서 뽑아낸다는 겁니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 4대강 사업을 벌였는데, 사실은 대운하였지만 말이죠. 즉 "독일의 라인강처럼 우리도 우리나라의 강에 배를 띄우면 경제적으로 엄청난 이익을 준다. 그리고 배를 타고 온 국토를 즐겁게 관광할 수 있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그림도 아주 멋있게 그려서 홍보를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이 그것을 다 엎어버렸는데, 자기 정당성 때문에 말이죠. 그러면 문재인 다음에 누가 대통령이 될지 우리가 압니까?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과거에서 살아남을 정당성을 여기에서 돌출을 시킨다는 겁니다. 미래는 비어있는데, 그래서 그 미래를 향해서 지금 자기의 잘남을, 즉 자기 치적을 여기에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지금 이 일은 4년 만에 되지 않으니 저를 다시 뽑아주시면 완성을 시키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5년 단임제이니 그럴 수가 없고, 국회의원이라고 하면 되겠는데 말이죠. 문재인 대통령이라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아무튼 살아남은 자의 정당성인데, 그러니 승자인데, 패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역사는 누구의 것인고 하니, 승자의 것이란 말이죠.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의도 승자의 것이 된다는 겁니다. 정의라는 것이, 힘의 가진 자의 것이란 말이죠. 이것을 더 줄이면 "정의는 힘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바꾸어서 말하면 "힘은 곧 정의다" 라는 겁니다.

너희는 장래를 몰라 !!

이러한 인간들의 사정에 대해서 전도서는 뭐라고 합니까? 7장에서 "사람은 장래 일을 모른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과거는 아는데 장래는 모른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하지만 성경은 그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장래의 일을 모르면 무엇도 모른다는 겁니까?

지금 논리가 어떠한고 하니, 과거가 있다고 하면, 이것을 실선이 아닌 점선으로 그려보겠는데, 과거가 있다는 것은 과거를 안다고 하는 동시에 미래가 얼추 예상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망하는 것을 미래라고 하는 사람은 없는데, 즉 "나는 지금도 괜찮지만 앞으로는 더 괜찮을 것이다" 라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미래가 성립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인간은 이미 과거와 미래가 연결되어있는데, 그런데 주님은 어디를 칩니까? "미래를 모른다" 라고 하는 것은, 미래가 다 연결되어있으니, 그것은 바로 "너는 현재도 모르고 과거도 모르고 미래도 모른다. 모두 모른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즉 "니가 현재 너 미래를 구성하는 꼬라지를 보니, 너는 과거도 모르고 현재도 모르네" 라는 겁니다. 이렇게 모른다고 하는 것, 즉 '알 수 없음' 이란 말이죠.

시간의 공간화 !!

방금 제가 "시간이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간다" 라고 직선으로 설명했는데, 그런데 주님의 뜻에 의하면 시간은 공간이, 이것을 '시간의 공간화' 라고 하는데 말이죠. 무슨 의미인고 하니, 시간은 움직이지 않는, 이미 합류된 것인데, 즉 시간이 제 아무리 흘러봐야 네모난 공간만 계속해서 길어질 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시간은 이미 공간 속에 갇혀있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이 공간이 하늘로 뜨게 되면 묵시가 되는데, 즉 하나님의 계획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그 어떤 일을 해도 하나님의 계획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죠. 성경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무엇을 모르는고 하니, 자기의 미래를 자기가 결정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헛되지 않기에 말이죠. 헛되지 않다는 것은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가 가치가 있다고 하면, 자기가 원하는 인생도 자기로 인하여 바뀌어질 때, 이 세상은 아직도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말이죠.

나비효과 !!

그러면 제가 권사님에게 질문을 해보겠는데, 권사님이 뒤뜰에서 망치로 개집을 고친다고 하면, 그러면 알래스카가 갑자기 여름이 됩니까?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갇혀있는 것이 아닌데, 그런데 세상이 네모로 갇혀있다고 하면, 자기가 아무리 사소한 일을 해도, 그 영향력이 바깥으로 파급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개집을 고쳤는데, 그러면서 온도가 올라가면서 그게 온난화에 영향을 미치면서, 아주 우발적으로 말이죠. 그러면서 그 춥던 알래스카가 갑자기 여름으로 변했다고 한다면, 온도가 무려 35도까지 올라갔다고 하면, 그럴 리가 있느냐는 말이죠.

하지만 과학에서는 있다고 하는데, 그것을 '나비효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중국의 상하이에서 나비가 날개 짓만 해도 그게 태평양을 건너가면서 미국 캘리포니아의 LA에서는 태풍이 분다는 말이죠. 물론 그것을 그동안 우리는 전혀 몰랐는데, 그런데 양자 슈퍼컴퓨터가 발명이 되면서,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알아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실제로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서 이 사회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주식시장이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는 말이죠. 주식시장의 펀드 매니저들은 다 인공지능을 가지고 대결을 펼치는데, 미래를 더욱 잘 알기 위해서 말이죠. 그래서 제일 잘 미래를 예측하는 펀드 매니저와 그 회사에 해지펀드가 왕창 다 몰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바보인지 모르는데, 왜냐하면 미래라는 것은 없는데, 같은 한증막에 갇혀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정답은 무엇인고 하니, "나의 이익이 타인의 손해를 유발시킨다" 라는 겁니다. 남들은 죽든 말든 자기만 이익을 보면 된다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사회주의' 라는 것이 얼마나 헛된 망상인지 모르는데, 우리 인간에게는 성립될 수 없는 사상이라는 겁니다. 사회주의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말이죠. 자기가 산다는 것이 남들에게 짐이 되는데,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서 "나도 살고, 너도 살고" 라는 것은 성립불가라는 겁니다.

특히 편의점의 경우에, 우리나라에 편의점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데, 각 편의점의 사장님들의 소망이 무엇인고 하니, 옆에 있는 편의점이 문을 닫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식당도 마찬가지고 말이죠. 다른 가게가 망해주어야 자기 가게가 산다는 겁니다. 그러니 '착함' 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데, 그렇게 보이는 사람은 아직 자기의 본성을 드러내는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말이죠.

이런 것을 공부한 많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 전도서에 나오는 것처럼 인간은 점점 더 허무해진다고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만 산다는 것이 양심과 충돌이 되는데, 같은 동료 같은 이웃인데 같이 살아야지, 어떻게 자기 혼자만 살 수 있느냐는 말이죠.

그게 양심의 소리인데, 즉 "남들은 죽던 말던 나만 배부르면 된다고 하는 것은, 내가 결코 용납할 수 없다" 라는 것이 기본 바탕에 깔려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회는 그렇게 양심을 북돋아주는 식으로 돌아가지를 않으니까, 전도서 1장의 말씀처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라는 것이 점점 더 뚜렷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모르고 복음을 모르지만, 이 세상이 헛되다고 노래한 가수가 있는데, 1969년에 그래미상을 받았는데, '그렌 캠벨(Glen Campbell)' 이라고 말이죠. 그가 '타임(Time)' 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친절하게도 그 가사를 제가 적어왔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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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me ] sung by Glen Campbell

Some people run some people crawl
Some people don't even move at all
Some roads lead for ward some roads lead back
Some roads are bathed in white and some wrapped in black

어떤 사람들은 달리고 어떤 사람들은 기어가네
어떤 사람들은 전혀 움직이지도 않네
어떤 길은 앞으로만 가야하고 어떤 길은 돌아가야 하고
어떤 길은 흰색으로 포장되어 있고 검정색으로 포장되어 있기도 하죠

Some people never get and some never give
Some people never die some never live
Some folks treat me mean some treat me kind
Most of them go their way and don't pay me any mind

어떤 사람은 결코 얻지 못하고 결코 주지 않는 사람도 있다네
어떤 사람은 죽지 못해 하는가 하면 살지 못해하는 사람도 있네
어떤 사람은 나를 싫어하고 어떤 사람은 나를 좋아하네
그들은 대부분 자신의 길을 갈 뿐 쉽게 자신의 마음을 주지는 않지요

Time, oh, good good time where did you go
Time, oh, good good time where did you go

세월이여, 그 좋고 좋은 시절이여 모두 어디로 가버렸는가
세월이여, 그 좋고 좋은 시절이여 모두 어디로 가버렸는가

Sometimes I'm satisfied sometimes I'm not
Sometimes my face is cold and sometimes it's not
At sunset I laugh sunrise I cry
At midnight I'm in between and I'm wondering why

어떤 때는 기분 좋을 때가 있듯이 어떤 때는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
어떤 땐 얼굴이 찰 때 가 있듯이 뜨거울 때도 있다네
태양이 질 때 나는 웃었고 태양이 뜰 때는 울었네
깊은 밤에는 울지도 웃지도 않고 왜 그러는지 궁금해한다네

Time, oh, good good time where did you go
Time, oh, good good time where did you go

세월이여, 그 좋고 좋은 시절이여 모두 어디로 가버렸는가
세월이여, 그 좋고 좋은 시절이여 모두 어디로 가버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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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Some'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데, 이 세상이 왜 일관성이 없느냐는 겁니다. 또한 여기 중간에 "그들은 대부분 자신의 길을 갈 뿐 쉽게 자신의 마음을 주지는 않지요" 라고 하는데, 캠벨은 각자가 자신의 길을 가는 게 이상하게 보였는데,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게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이죠.

그 다음에 후렴구절을 보면 "세월이여, 그 좋고 좋은 시절이여 모두 어디로 가버렸는가"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어릴 때는 따로 따로가 아니고 모두가 한 식구인데, 자기보다도 나이가 많은 사람은 모두가 다 자기의 삼촌이고 아주머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자기가 성인이 되는 순간 어떻게 되는고 하니, 그들은 모두가 자기의 경쟁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리고 마지막에 보면 "태양이 질 때 나는 웃었고 태양이 뜰 때는 울었네. 깊은 밤에는 울지도 웃지도 않고 왜 그러는지 궁금해한다네" 라고 하는데, 이것이 이 노래의 결론이라는 겁니다. 저도 옛날에는 이 노래를 참 많이 듣고 따라서 부르고 했는데 말이죠.

주여, 저는 어떻게 살면 됩니까?

그런데 그렌 캠벨이 부른 이 노래의 가사를 보면 마치 전도서를 보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즉 "웃을 때도 있고 울 때도 있고, 괴로울 때도 있고 기쁠 때도 있고"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여기에서 주님의 결론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그 모든 것은 다 '허무' 라는 사각형 속에 들어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여기에 대해서 "세상이 그럴 것 같으면 내 방식대로 살면 되겠네" 라고 나오는데, 하지만 그게 얼마나 순진한 이야기인지 모르는데, 전혀 세상물정을 몰라서 그렇다는 말이죠. 이발사는 남의 머리를 깎아주는 일을 하고, 그리고 어부는 고기를 잡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부가 하루 세끼를 물고기만 먹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누군가가 쌀도 재배해주고 배추도 키워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물론 로빈슨 크루소우는 무인도에 가서 자기가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했는데, 자기 혼자이니 말이죠. 그런데 어느 날 흑인 소년을 한 명 구했는데, 그 아이는 이름도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로빈슨 크루소우가 금요일에 왔다고 해서 '프라이데이' 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 되는데, 여기서부터 이미 갈등이 시작된다는 겁니다. 즉 사회가 형성된다는 것이죠. 달랑 두 명인데 말이죠. 이 노래 가사에 의하면, 어떤 때는 그 사람이 필요하고, 어떤 때는 귀찮다는 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느냐는 것이죠. 이것을 오늘 강의제목으로 하고 싶은데, 좀 길어서 문제지만 말이죠.

그러니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라고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만, 교만, 건방짐, 진리를 알았다고 하는 독립의지, 이런 것들을 모두 다 꺾어버리고, 알 수 없는 그 누군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쏟아놓으라고 전도서가 있다는 겁니다. "주여, 저는 어떻게 살면 됩니까?" 라고 말이죠.

전도서는, 인간의 한계를 !!

그러니 전도서의 모든 내용은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데, 물론 우리는 좋은 사람들만 만나기를 원했지만, 하지만 집안을 말아먹는 며느리가 온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왜 이 세상은 내가 원하는 세상이 아니고, 원치 않는 것들이 있는가?" 라는 겁니다.

그러면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처음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채택을 하지만,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면 그만 밀쳐낸다는 겁니다. 또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고 하면 일단 유보를 시키는데, 나중에 자기가 필요할 때 끄집어내겠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은 그렇게 할 수밖에는 없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정상이라고 본다는 겁니다. 평범하고 모가 나지 않는 것으로, 다들 그렇게 살아가려고 마음을 먹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전도서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주여, 저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는 것이란 말이죠.

여기서 전도서의 마지막인 12장을 보겠는데, 1절에서 3절입니다.

(전 12:1)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전 12:2)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전 12:3)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조금 전에 배운 것을 복습해보겠는데, 전도서는 진화론입니까? 아니면 창조론입니까? 창조론은 처음에는 좋았고 점점 더 쇠퇴하는 것인데, 이 전도서는 창조론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여기 1절에 보면, 아무 낙이 없다고 할 때가 점점 다가온다는 말이죠. 즉 허무가 다가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한 대책이 무엇인고 하니, 2절에 보면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라고 하는데, 그리고 3절부터는 무슨 내용인고 하니, 중력에 의해서 우리 몸이 망가진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죠.

어제 오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인간은 해골이란 마네킹에 고운 옷을 입힌 것이다" 라고 말이죠. 젊은 사람들이 들으면 조금은 섭섭하지 모르겠는데, 하지만 그게 전도서 12장에 나오는 내용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점점 더 해골이 되어간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전도서 12장 11절부터 마지막 절인 14절을 보겠습니다.

(전 12:11)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같고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의 주신 바니라
(전 12:12)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전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결국은, 심판 !!

업적과 실적에 대해서 현혹되지 말라는 것인데, 즉 "나는 인생을 살면서 이만한 실적을 올렸고, 남들에게 공헌했다" 라고 한다고 해서, 우리의 몸이 뭉개지지 않는 것이 아니고 해골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13절에 결론이 나오는데,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사람의 본분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14절에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라고 하는데, 결국은 심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한다고 해서, 거기에서 봐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전도서에게 이야기하는 인간은 심판의 흔적이고, 심판의 대상이라는 겁니다. 즉 "인간은 심판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이게 인간인데, 그러니 이렇게 인간은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을 이야기함으로서, 여기에 계속해서 누가 관여합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을 보고 허무하다고 외치시고 규정하신 하나님의 작업이, 그것이 우리 인간 속에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마가복음 4장 26절과 27절을 보겠습니다.

(막 4:26)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막 4:27)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

여기 27절에 보면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모르고 살면 된다는 겁니다. 모르고 산다고 해서 일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은 실패가 없다는 것이죠. 오히려 안다고 설치는 것이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인데, 물론 그렇게 해도 실패하는 것은 아니고 말이죠.

이것이 무슨 말씀인고 하니, 하나님의 나라는, 그 나라는 심판의 나라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과 지옥은 짝이 되어서 같이 등장하니 말이죠.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라고 하는데, 천국은, 혹은 지옥은 사람이 대비한다고 해서 어떻게 되는 나라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천국에 갈 사람이 지옥에 가고, 지옥에 갈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아무리 농사를 대비해서 짓는다고 해도, 물론 낮에는 옥수수를 두 눈을 부릅뜨고 어떻게 키울 수가 있는데, 즉 관찰을 할 수 있는데, 물론 그것도 자기가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밤에는 자야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는 누가 키운다는 겁니까? 주님께서 일을 진행을 시킨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옥수수가 자라는데, 이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설친다고 해서 자기에게 유리해지는 것도 아니고, 또한 나태해진다고 해서 불리한 것도 아니라는 말이죠.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님의 뜻인데, 자기가 천국에 가고 싶다고 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지옥에 가기 싫다고 해서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어차피 인간은 헛되니 말이죠. 헛된 것이 제 아무리 설쳐봐야 헛된 것인데, 물론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참으로 허무한데, 그래서 "인간의 가치가, 인간의 존엄성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는 겁니다.

마가복음 4장을 다시 보면, 사람이 씨를 뿌려놓고 잠을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씨가 싹을 터서 자라나고 있더라는 말이죠.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모르는 방식으로, 인간이 가야하는 나라를 결정하신다는 말이죠.

전도서 8장 7절에서 분명하게 미래를 모른다고 하시는데, 왜 인간이 건방지게 미래를 알려고 하느냐는 겁니다. 미래는 우리 인간의 소관이 있는데, 인간의 도움이 없이도 꾸준하게 미래는 하나님께서 만드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미래가 시간성이 아닌 공간성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어려운 말을 해서 좀 죄송한데, "미래는 시간성이 아닌 공간성이다" 라고 하는 의미는 무엇인고 하니, 미래라는 것이 과거를 잊어버리고 현재를 지나서 덜렁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나타나게 되면 그 미래 안에 과거와 현재가 새로운 의미로 다시 편성된 채로 있다는 겁니다. 즉 미래라는 공간 안에 과거와 현재도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 인간은 과거에 대해서, 현재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었는데, 미래에 도달하지를 않았기에 왜곡되게, 즉 미래도 모르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세상은 이렇다. 나는 이렇다" 라고 하면서 해석을 한 잘못이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모든 것이 종착점에 오게 되면, 즉 미래에 오게 되면, "아하, 과거와 현재라는 것이 이런 미래를 위해서 필요했던 적절한 사건이었구나" 라고 하면서,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도둑놈이 남의 집에 가서 물건을 훔치다가 그만 들켜서 사람을 죽이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도둑에서 살인강도로 바뀌는데, 그래서 체포가 되어서 십자가에 달렸다는 말이죠. 그때까지는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자기의 과거인데, 그런데 과거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미래의 일이 벌어지고 말았는데, 자기 옆에 달린 십자가 동기생이 놀랍게도 예수님이었다는 겁니다.

자기는 과거에 나쁜 짓만 했는데, 그래서 자기 때문에 가정이 박살나고 눈물을 흘린 자들만 기억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당신은 내가 물건을 훔질 때 가만히 누워있으면 되는데, 왜 일어나서 설쳤는가?" 라고 하면서 자기 정당성만 주장한다는 겁니다.

조금 전에 배운 것을 적용시켜보면, 강도는 사형을 당하는 순간까지도 자기를 패자로 보는 게 아니라 승자로 보는데, 그러면 승자는 역사를 구성한다는 겁니다. 역사는 자기 존재의 정당이란 말이죠. 다른 말로 하면, 자기 행함의 정당성인데, 비록 강도라고 해도 말이죠.

자기 나름대로 자기 인생은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는 것인데, 그것을 이야기하지 않는 인간은 없는데, 이것이 인간들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죽음도 장렬하게 맞이하겠다고 하면서 용기를 내었는데, 그런데 자기 옆에 예수님이 달려있다는 것이죠.

그 예수님이 강도에게 무엇을 주었는고 하니, 이미 확정된 미래가 예수님인데 말이죠. 그 예수님께서 강도에게 믿음을 주셨다는 겁니다. 그러자 믿음을 받은 강도가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 저 같은 놈이라고 생각해주실 수 있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늘밤에 나와 함께 천국에 있을 것이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가 천국에 간다고 하는 미래가 확정된 상태에서 과거를 보게 되면, "내가 과거에 강도짓을 한 것은 지금 천국에 가기 위해서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새로운 사건이다" 라는 의미가 새롭게 붙여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28절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장로님이 요즘 배탈이 났는데, 그것도 구원을 받기 위해서 일어나야 하는 사건이라는 겁니다(ㅋㅋ). 오늘 날씨가 무척 더운 것도, 이것도 천국을 위해서 이런 날씨가 있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천국을 위해서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있는 사건이라는 말이죠.

좀 더 쉽게 말씀을 드리겠는데, 밤의 특징은 어둠인데, 빛이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이 자기 몸을 움직일 때, 자전거, 오토바이, 혹은 자동차를 타고 어두운 길을 간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당연히 라이트를 켜야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제가 묻고 싶은 것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그렇게 자전거, 오토바이, 혹은 자동차를 타고 간다고 해서, 태양이 "지금 밤이면 안 되지. 내가 나가서 밝혀줘야지" 라고 해서 밤이 낮이 되느냐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밤은 변하지 않는데, 그런데 그 깊은 밤의 한 구석에 작은 선이 빛을 발산하면서 움직인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먹칠한 세상 !!

그게 바로 성도의 삶인데,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보고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하는데, 이 세상의 라이트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는 폭만큼만 빛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마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이 세상에 왜 악인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면 사기꾼들이 왜 이렇게 설칩니까? 억울한 사람이 왜 이렇게 많습니까? 하나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이 세상에 먹칠을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캄캄한데, 허무한데, 그래서 도와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처음부터 심판의 대상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전도서를 누구에게 주는고 하니, 이스라엘, 즉 다윗의 후손들에게 준다는 말이죠. 다윗을 왕으로 모시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니까, 그들이 전도서의 말씀을 깨닫고 라이트를 켠다는 겁니다. 그러면 캄캄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 즉 언약을 아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하지만 아주 작은 불빛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 작은 불빛이 필요한 곳마다 가서 비추게 되는데, 마치 반딧불과도 같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런 반딧불로 인해서 이 세상이 환해질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말라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받아들일 이 세상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그리고 우리도 또한 그러했던 자들이라는 겁니다.

우리도 각자가 자기 팔만 흔들면서 살았는데, 우리도 현상학적 사람들이라는 말이죠. 우리도 평생을 통해서 자기 필요한 것만 챙기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물론 노숙자를 만나면 도와줄 경우도 가끔은 있는데, 그것은 자기 배가 부를 때의 이야기이고, 정작 자기가 어려우면 남을 돌아볼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는 말이죠.

여기서 전도서 8장 8절을 보겠습니다.

(전 8:8) 생기를 주장하여 생기로 머무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자도 없고 전쟁할 때에 모면할 자도 없으며 악이 행악자를 건져낼 수도 없느니라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이 세상은 허무가 계속해서 지속이 된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허무해야 한다는 말이죠. 따라서 이 세상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 인해서 좋은 세상이 된다고 하는, 그런 것은 아예 마음조차도 먹지 말라는 겁니다. "니나 잘하세요" 라는 것인데, 우리는 그럴 능력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고, 자기 하나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해서 허겁지겁이라는 말이죠.

이미 굳어져버린 이 세상 !!

전도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 전체를 다 알고 있으니 사진을 찍어보는데, 묵시는 하나로 동일시를 하는 것이니 말이죠. 이것을 교재 93페이지에 보면 '응고' 라고 하는데, 즉 딱딱해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이미 어둠으로 인해서 석고처럼 굳어져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제가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고 하니, 석고에 어떤 벌레가 묻혀있다고 하면, 그러면 그 벌레도 묻혀서 죽었다는 겁니다. 죽은 체로 석고 안에 갇혀있다는 말이죠. '쥐라기 공원' 이라는 영화를 보면, 제일 첫 장면이 무엇인고 하니, 호박 보석 안에 공룡의 피를 빨아먹은 모기가 갇혀서 죽은 체로 굳어져서 화석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기억이 납니까?

그러면 그 모기가 자기가 알아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까? 없는데, 그래서 허무하다는 겁니다. 성경을 백독을 해도 안 된다는 말이죠. 우리는 빛이 될 수 없는데, 오히려 어둠과 한 통속이고, 또한 살기 위해서 어두울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아직 센 어둠이 오지 않아서 그렇게 느낄 뿐이란 말이죠. 강력한 어둠이 오면 마지막 남아있던 양심도 다 가져다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김영철을 아십니까?

북한에 통일전선부장인 김영철이 있는데, 천안함 피격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태의 배후인물로 지목이 되는데 말이죠. 그리고 연평해전도 그가 일으켰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고속정 참수리호가 북한 경비정에 의해서 침몰되었다는 겁니다. 윤영하 소령을 비롯해서 6명의 전사자가 생겨났다는 말이죠.

하지만 만약에 그가 남한에 태어났다고 하면 배가 침몰되는 것을 보고 격분을 하겠습니까? 박수를 치겠습니까? 당연히 격분을 하는데, 그런데 그가 태어난 곳이 남한이 아니라 북한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북한에서 자랐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람을 죽이고 배를 부수는 것이 취미가 아닌데 말이죠.

그러면 왜 그런 짓을 하느냐는 것이죠. 제가 방금 갇혀있는 벌레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은 바로 북한이라는 어둠의 세력에서 출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강의 처음에 '관찰' 이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렇게 출세를 위해서 관찰을 하게 되면, 자기 출세에 도움이 되지 않는 나머지는 다 제거의 대상이라는 말이죠.

아침 드라마가 다 그런 내용인데, 자기에게 필요한 것에 방해를 한다면 친구라도 제거의 대상이라는 겁니다. 자기 출세에 지장에 된다면 말이죠. 하지만 그의 가족들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 남편을, 혹은 자기 아버지를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본다는 겁니다. 나쁜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러니 김영철의 경우에도, 그의 가족들은 그를 남한의 배를 침몰시켜서 6명이나 죽인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능력이 있는 남편으로, 아버지로 본다는 겁니다. 자기 가정을 지킬 줄 아는 남자, 여자들이 그런 남자를 자기 타입이라고 하면서 좋아한다는 말이죠. 평양시내의 고급아파트에서 살 수 있도록 해주는 남자, 그런 남자에게는 "당신을 사랑해" 라는 수식어가 붙기 마련이라는 겁니다.

미군은 철수하라 !!

제가 김영철의 예를 들었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환경이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는 겁니다. 우리의 환경은 아직 그렇게 배를 침몰시킬 정도는 아니라는 말이죠. 하지만 우리가 북한에 끌려갔다고 하면,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 "미군은 철수하라" 라고 외칠 것이고, 또한 "기독교는 미신이고, 민중의 아편이다" 라고 외칠 것이란 말이죠.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고 하니, 이전에 남한에 있던 '나'는 과거의 '나'이고, 지금의 '나'는 북한에 있는 '나'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과거를 알기 때문에, 살아남는 것이 정의이고, 그게 곧 진리라는 말이죠. 그것이 자기의 정당성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선 살고 보자"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없는데, 모두가 다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이 네모난 석고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데, 그런데 아까 제가 빛을 이야기했는데 말이죠. 그것은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어림도 없는 소리라는 겁니다. 우리는 빛은 고사하고 더욱 깊은 어둠으로 가지 못해서 환장을 한다는 말이죠. 출세를 하려고 하면 더 깊은 어둠에 참여해야 하는데, 우리도 이런 자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어둠 속에서 성도가 빛이 되고, 또한 소금이 될 수 있는고 하니,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성도를 보고 "너희는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일제시대에 '윤심덕' 이라는 가수가 있었는데, 그가 이 세상에 대해서,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라고 했다는 겁니다. 세상이 밝다는 겁니까? 어둡다는 겁니까? 어둡다는 것이죠.

정상적, 정상인, 평범하게 !!

그러니 이 풍진 세상, 즉 어두운 세상이 이 인간 현실의 '전부' 라는 겁니다. 이렇게 '전부(ALL)' 라고 하는 것은, 그 바깥에 무엇이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없다는 것인데,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가지고 '정상적', 혹은 '정상인'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여기서 오버를 하거나 일탈을 하게 되면 비정상인이 되는데, 즉 정신병자나 광신도,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방송에 나오면 부모들이 자식들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남들보다 더 뛰어나려고 너무 애쓰지 말고, 그저 평범하게 살아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평범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지금부터 평범하게 산다는 것이 힘드는 이유를 설명해드리겠는데, 서울에서 월수입이 400만원이라고 하면 평범한 것입니까? 가난한 것입니까? 평범하다는 겁니다. 가난한 것이라고요? 아무튼 평범하다고 치고, 그런데 그 집에 아이가 없다고 하면 평범한 것입니까? 평범하지 않다는 겁니다.

제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평범하다는 것을 하나의 특정항목을 집어서 이야기를 한다면, 방금 이야기를 한 월수입이라든지 말이죠. 그러면 평범할 수가 있는데, 그런데 평범을 구성하는 수많은 변수들이 있는데, 그것들이 모두가 다 '평범' 이라고 되어야 비로소 평범하다고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이가 없으면 평범한 가정이 아닌데, 수입은 평범이라도 말이죠.

그런데 또 다른 어떤 가정은 월수입이 400만원이고 아이가 두 명이라고, 그러면 평범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시어른이 둘 다 치매에 걸렸다고 하면, 그러면 역시 평범이 아니라는 말이죠. 시동생이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그만 손가락을 하나 잘렸다고 하면, 그것도 역시 평범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니 이 '평범' 이라는 조건을 다 맞추려고 하면, 100개 정도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번에 월드컵 준우승을 한 크로아티아의 경우에, 인구는 500만밖에 되지 않고, 그리고 유럽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라는 겁니다. 그래서 청년들이 별로 할 일이 없는데, 그래서 축구를 많이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운이 좋아서 외국이라도 나가게 되면 온 가족을 다 먹여 살린다는 겁니다. 브라질이나 남미와 거의 비슷하다는 말이죠.

산업시설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국토가 산악지대가 되어서 농토도 거의 없는데, 그래서 관광으로 겨우 먹고사는데, 하지만 관광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져있지 않다는 겁니다. 경치는 참 좋은데, 호텔과 같은 부대시설이 너무 불편하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들이 염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부자나라가 아닌데, 평범하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자기 집안의 재산이 400억 정도가 되는데, 셋째 딸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그만 자살을 했다고 하면, 그러면 평범하지 않다는 겁니다. 400억이 아니고 4조는 족히 되지 싶은데, 이게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삼성가문의 이야기라는 말이죠. 그러니 4조가 아니라 4억만 있어도 셋째 딸이 살아있었으면 좋은데, 그러면 평범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평범하게 산다는 것이 왜 힘드는가?

그러니 평범하다는 것이 이 정도로 힘이 드는데, 도대체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는 평범조차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기 때문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평범을 논할 자격조차도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첫째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평범하게 사는 것이라도 해보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먼저 자기 자신이 어떠한지, 그것을 알려줄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반발을 무릅쓰고, 진짜로 우리 자신을 알려줄 분이 우리 속에 나타나야 한다는 말이죠.

우리는 아까 정상적이고 정상인이라고 했는데, 그리고 평범하게 살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권리가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오신 분이 있는데, 우리가 아는 이 어둠의 현실이 전부라는 것을 말이죠. 그분은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분이 막상 이 세상이 오시니, 자기가 정상적이고 정상인이고, 평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영접해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런 자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조용하게 정상적으로, 정상인으로 살면 되는데, 그런데 너무 설치니까, 너무 나대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는 말이죠.

물론 이것으로 그냥 끝나버리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데, 그런데 그분이 죽고 나서 삼일만에 부활을 하셨다는 겁니다. 이번 수련회 첫 시간에 이 이야기를 할 예정인데, 즉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이죠. 그것도 그냥 부활을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죽을 만하다고 규정한 사람을 하나님이 그만 살리셨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다시 살아난 이 예수님 때문에, 졸지에 정상적인 정상인들은 그만 비정상인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몰라도 너무나 모른다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전도서의 말씀대로 헛되고 헛된 곳에 갇혀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따라서 빛은 무엇인고 하니, 특별히 훌륭하고 대단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자기는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그야말로 죄인 중의 괴수라는 말이죠.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것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이것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미래를 전혀 따질 이유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분이 알아서 결정할 사항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이 세상의 빛으로서, 소금으로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주신 전도서를 통해서 우리가 어둠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살면 된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몸이 뭉개지고 있는데, 그래서 죽음이 찾아왔을 때, 자기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고 살았던 우리의 못난 자신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진정 그 앞에서 제대로 발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8,8,6 오전 1시에 마침.

40도의 무더위를 통해서 천국과 지옥의 열기를 깨닫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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