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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3 23:58:41 조회 : 191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41 - 질문 속의 답 이름 : 구득영(IP:203.223.97.179)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41 - 질문 속의 답

18,08,20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96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 이번 전도서의 주제가 '허무에서 심판으로'입니다. 곧 '끝 되기' 라는 말입니다.

허무에서 심판으로, 즉 '끝 되기' 라는 것이 어디에 나오는고 하니, 그것이 다름이 아닌 '전도서' 라는 성경에 나온다는 겁니다. 물론 성경말씀을 듣지 않고 보지 않으면 그만인데, 그러면 허무도 날아가고 또 심판도 같이 날아간다는 말이죠. 그러니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즉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성경을 볼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도움이 된다고 여기고 성경을 보는데, 그런데 만약에 그 성경내용이 허무에서 심판으로 나아간다면, 그러면 "나는 듣지 않을 거야" 라고 하면 그만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은 바로 그것을 노리고 우리 인간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꿈으로 다가온 하나님의 계시 !!

여기 교재를 보면, 창세기 28장을 언급하면서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런데 이 꿈이라는 단어자체는 '허망함', '아무 것도 아님', 더 나아가서 '신경을 쓸 필요조차도 없음', 그게 바로 꿈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꿈을 창세기 28장에서는 하나님께서 계시로 주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계시는 꿈과 같다는 것인데, 그렇게 꿈이기 때문에 허망하고, 아무 것도 아니고, 신경을 쓸 필요조차도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굳이 귀를 기울여 들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하나님의 계시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말씀을 들을 필요도 없고 읽을 이유도 없다는 말이죠. 성경이 그런 식으로 다가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가 꿈으로 왔다는 것은, 물론 그게 우리 인간에게는 허망하게 느껴지는데, 하지만 그게 허망하게 느껴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 인간 쪽에서 외부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계시를 강력하게 밀어부쳐서 쫓아내겠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허망한 꿈으로 왔으니 말이죠. 그렇게 됨으로서 하나님의 계시를 거부하는 우리 인간의 본성이 노출된다는 겁니다.

앗, 뜨거워 !!

그러니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듣기 싫거든 듣지 말라. 보기 싫거든 보지 말라. 또 믿기 싫거든 믿지 말라" 라는 것인데, 완전히 배짱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호기심이 있어서 무엇인가를 더 알고 싶어하는데, 그래서 성경을 보는 순간 성경은 마지막에 무엇이 있다고 합니까? 심판이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놀라서 그만 놓고 만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라고 해서, 그래서 성경을 보면 뭔가 좋은 것이 있는 줄로 알고 보았는데, 복을 받을 줄 알고 말이죠. 그런데 성경의 마지막 결론을 보니, "인간은 어떻게 살아도 허무하고, 결국은 심판을 받아서 지옥에 간다" 라고 하니, 그래서 마치 뜨거운 냄비를 만진 것처럼 "앗, 뜨거워!" 라고 하면서 놓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미처 자기도 몰라던 자기 자신의 본성이 들통나는 순간이라는 말이죠. 우리 인간에게는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 챙기고, 그렇지 않은 것은 얼른 놓아버리는 성질이 있다는 것을, 바로 그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된다는 겁니다.

구약성경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이 나오는데, 성경을 보면 나타나는데, 물론 보지 않으면 전혀 모르는 인물이고 말이죠. 그런데 그 아브라함이 복을 받았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들도 복을 받으려고 그 성경을 본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 복이 무엇인지 보니까, 아브라함이 늙어서 자식이 없는데, 그만 자식이 생겼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하, 이런 수도 있구나. 하나님은 역시 전지전능하시고 좋은 분이야. 없는 것에서도 만들어주시는 구나" 라고 하게 되는데, 그렇게 도저히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나이에 자식이 생기는 것을 복이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런데 창세기 22장을 보면, 그 자식을 불에 태워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한다는 말이죠. 없는 자식이 생겼으니 좋았는데, 그래서 복이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보니, 하나님께 그 자식을 죽여서 자기에게 바치라고 하는데, 그러면 과연 그것까지도 복으로 여길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것까지도 복으로 수용할 수 있느냐는 말이죠.

(창 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창 22: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무슨 말인고 하니, 없는 것에서 받아 챙기는 것은 복일 줄로 아는데, 그런데 있는 것을, 그것도 100세에 얻은 그야말로 귀하고 귀한 자식을, 그것도 자기 손으로 죽여서 불에 태워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 그것까지도 복의 내용으로 집어넣을 용의가 있느냐는 겁니다.

수능시험을 앞두고 교회에 기도를 하는데, 물론 겉으로 말로는 실력대로 치게 해달라고 하지만, 속마음은 전혀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아는 것만 나오게 하소서" 라고 한다는 겁니다(ㅋㅋ). 그런데 그렇게 기도를 했는데 점수가 평소보다도 더 나오지 않았다면 천만다행인데, "아하, 꿈이구나. 하나님이고 뭐고 아무 것도 아니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까, 수능점수가 예상한 것보다 더 잘 나오게 되면, 그러면 이제 심각해진다는 겁니다. 드디어 악마의 올무에 제대로 낚였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원하지도 않고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그게 우리 인간이고, 그게 정상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은 혼자 사는 것이 체질화가 되었는데, '천상천하유아독존' 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게 인간은 자기 혼자 사는 것이 체질이라는 겁니다. 이 체질을 구분해서 한의학에서는 '사상체질' 이라고 하는데,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 그렇게 나누는데 말이죠.

태양인의 특징은, 추진력이 있는 사람인데,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 잘 융화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반면에 태음인은 형액형으로는 A형인데, 소심하기가 짝이 없다는 말이죠. 일을 하기는 하지만, 소극적이고 내성적이고 우유부단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소양인은 어떤 타입인고 하니, 마음이 너그럽고 고민이 없다는 말이죠. 반면에 소음인은 약삭빠르고 자기 할 것만 잘 챙기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질문을 던지시는 하나님 !!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체질을 4가지가 아니고 하나밖에 없는데, 자기가 손해를 보는 것은 피하고 숨어버리는 체질, 그것뿐이라는 말이죠. 그게 바로 창세기 3장에 나오는데, 하나님이 오셨는데 인간이 그만 도망을 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아담을 찾아가시는데, 그리고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질문을 던지신다는 말이죠.

(창 3: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창 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다시 정리하면, 인간의 체질은 자기 혼자 사는 것이고, 자기 배가 부르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겁니다. 밤에 잠을 잘 자고, 그렇게 행복하면 그만 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다른 사람을 왜 찾습니까? 그것을 바로 자기가 뭔가 아쉬운 것이 있을 때, 힘이 들 때 찾는다는 겁니다.

남자가 나이가 들어서 마누라도 죽고 없고 자기 혼자라면 어디로 갑니까? 다방에 가서 립스틱 짙게 바른 마담과 같이 앉아서 쌍화차를 시켜놓고 농담을 주고받는데, 왜냐하면 외롭다는 말이죠. 그 외로운 것이 남의 사정이 아니고 자기 사정인데, 그렇게 외로우니 친구를 찾고 말동무를 찾는다는 겁니다. 자기가 편하면 그냥 혼자 사는데, 그런데 뭔가 아쉬울 것이 있을 때는 남을 찾는데, 이익을 보려고 말이죠. 그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는 이런 인간을 정상으로 보는데, 그래서 '정상인' 이라고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성경은 이 정상인에게 무엇을 집어넣는고 하니,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인데 말이죠.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질문을 던진다는 겁니다.

목사님, 신앙생활은 어떻게 합니까?

누군가가 "목사님, 신앙생활은 어떻게 합니까?" 라고 묻는다면, 신앙생활을 하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는데, 하나님 쪽에서 질문을 해주는 겁니다. 그런 질문이 없다고 하면, 인간은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냥 자기 혼자 산다는 것이죠.

이렇게 질문이 들어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시가 들어온다는 것인데, 그러니 자기 혼자서 연구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분석이고, 신앙이란 누군가가와 서로가 주고 받고 하는 것이란 말이죠. 혼자 있으면 숫자로 '1'이고, 둘이 있으면 '2'인데, 즉 '1'이면 체질이고, '2'면 신앙이라는 겁니다.

경동시장의 약속다방을 아십니까?

그런데 누군가와 같이 있더라도 '1'일 수가 있는데, 그것은 자기가 필요한 것을 질문하는 경우라는 말이죠. 그래서 다방에 앉아서 김 마담과 농담을 주고 받아도, 그것은 '2'가 아니고 '1' 이라는 겁니다. 서울의 청량리에 가면 약재를 파는 유명한 시장이 있는데, 경동시장이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 건물의 지하에 가면 옛날 다방들이 그대로 있다는 겁니다.

저도 몇 번 가보았는데, 물론 김 마담을 만나러 간 것은 아니고(ㅋㅋ), 제가 아는 치과의사가 있어서 강의를 마치고 나면 거기서 만나곤 했다는 겁니다. 60년대의 모습 그대로인데, 할아버지들이 줄줄이 앉아있다는 말이죠. 심지어 아직도 다방에서 그대로 담배도 피운다는 겁니다. 저도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그야말로 60년대이니 말이죠. 그리고 다방 종업원의 나이가 최소한 50인데, 그 밑으로는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거기에서는 질문을 다들 자기가 던지는데, 왜냐하면 불편하고 아쉬운 쪽은 자기이니 말이죠. 그래서 상대방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상대방에서 질문을 하고, 그 대가로 커피 값을 지불한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한 순간의 외로움을 덜고자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신앙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닌데, 하나님이 질문을 하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는 무엇인고 하니, 한 글자로 '꿈' 이라는 겁니다. 허망하다는 겁니다. 있다고 여겼는데 돌아서면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내가 별 짓을 다하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계시는 들어도 그만이고 듣지 않아도 그만이고 무시해도 그만이라는 말이죠. 물론 그러면서도 자기의 본색이 드러난다는 것이 색다른 점인데 말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시가 주어지게 되면, 즉 하나님의 질문이 던져지게 되면, 그것을 자기가 가만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반말이 나온다는 겁니다. 반항심이 말이죠.

창세기 1장은 도저히 못 믿겠어 !!

대구의 서현교회에 50년을 다닌 동서 형님이 있는데, 그 교회의 집사님인데 말이죠. 그런데 저만 보는 묻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창세기 1장이 과학적으로 어긋났다고 한다는 겁니다. 7일만이 천지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또한 그분이 과학 선생님이었다는 말이죠.

성경에서 바르게 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이겠는데, 그런데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7일만이 천지를 창조했다" 라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지금은 나이가 70이 지났는데도, 그게 아직까지도 현재 진행형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무엇인고 하니, 아직도 질문을 자기가 하고 있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그 과학 선생님에게 "내가 7일만에 천지를 창조했다" 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지구의 나이는 45억년이다" 라고, 그렇게 자기가 질문을 던진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7일만에 창조되었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이죠.

강력한 반발 !!

이것은 오늘 강의에 의하면 강력한 반발인데, 그분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지구가 45억년이 되었다고 해도, 그동안 살아오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겁니다. 자기에게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어떻게 서현교회에 오래 다니다가보니, 그래도 서현교회가 교회이니까 꿈 같은 소리를 하는데, 즉 하나님의 계시를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물론 복음은 아닌데, 일단 그렇게 치자는 말이죠.

그러니 그 양반은 설교시간에 계속해서 밀어내는 일만 하고 있는데, 즉 반발만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에 가지 않으면 되는데, 그런데도 간다는 말이죠. 얼마나 전에 암에 걸려서 자기가 죄인이라고 고백을 했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면서도 계속해서 창세기 1장 말씀은 믿지 않는다는 말이죠.

신앙생활을 해야하는데, 그런데 자기가 꼼지락거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성경이 되었다가, 불경도 되었다가, 전부가 꿈 같은 이야기라는 말이죠. 그래서 그런 것이 없어도 평생 살아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는 겁니다. 자기 혼자서 살아온 것이 있다는 말이죠. 바로 이것이 실제고 또한 실재(實在)가 된다는 겁니다. 즉 있는 그대로라는 겁니다.

그런데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잠을 자면서 꿈을 꾸었는데,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천사들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진화론에서 무슨 천사가 있습니까? 진화론의 입장에서는, 진화가 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창 28: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창 28: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창 28: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은 다 세포로 되어있고, 그것은 세월에 따라서 변화하게 되어있는데, 그 변화를 두고 '진화'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사실은 진화보다는 '변화' 라는 단어가 더 적절하다는 말이죠. 다윈의 진화론이 아니고 다윈의 변화론이라는 겁니다. 아무튼 이 세상에서 달라지지 않는 것은 전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세상이 헛되다고 하는 성경말씀은 일단 받아들이는데,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변화가 되고 결국은 모든 것이 다 죽어서 없어지니 말이죠. 그런데 무엇은 받아들이지 못하는고 하니까, 마지막에 심판이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생뚱맞다는 겁니다.

그렇게 마지막에는 심판이 있다고 하면, 그러면 그 다음에는 상대방이 뭐라고 나오겠습니까? 너무나 뻔한데, "당신이 언제 가봤나? 당신이 죽어봤어?" 라고 하는데, 그렇지요? 그러면 거기에 대한 답변을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할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일단 교회에 나왔다는 것은 그것을 이겨내고 왔다는 것인데, 즉 "나도 이전에는 그런 의문점이 있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풀렸다" 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그래서 아직도 교회에서 여전히 버티고 있다는 말이죠. 아닌가요?

그렇게 버티고 있으면 나름 해답이 있다는 것인데, 그래서 상대방이 "당신이 챙긴 그 해답을 나에게 말해보세요" 라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냥, 믿어라. 나도 그냥 믿었어!" 라고 하면 됩니까? 인간은 그냥 믿을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반발을 한다는 겁니다. "꿈 같은 소리를 하지 말라" 라고 하는 것 자체가 반발이라는 것이죠.

다시 정리를 하면, 첫 번째로 인간의 '체질'이 나왔는데, 그 체질은 자기 혼자서 사는 것이란 말이죠.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혼자 챙기면서, 그런 재미로 혼자 산다는 겁니다. 두 번째로는 '반발'인데, 혼자 사는데 거기서 반발이 나오더라는 겁니다.

지금 진화론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의심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게 생물학자들과 진화론자들의 고민이기도 한데 말이죠.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또 나쁜 것은 버리면 되는데, 그런데 반발하는 것까지도 진화한다는 것, 그것은 그들의 논리에 들어있지 않다는 말이죠.

그래서 요즘 생물학에서는 인간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다른 요소가 있다고 한다는 겁니다. DNA로는 다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이죠. 즉 인간에게서 뭔가 반발하는 요소가 튀어나오더라는 겁니다. 혼자 살 때는 숫자가 1인데, 그런데 반발을 할 때는 2, 3, 4가 된다는 말이죠.

대구의 인구가 25O만이라고 하는데, 20만 정도가 줄었다는 겁니다. 인구가 250만이면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니, 서로 협동하고 단결하면서, 사이좋게 지내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반발은 없어지는데, 그런데 반발이 있다고 하면 아무리 협동을 해도 안 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아무리 배려를 해주고 받아주어도, 혼자 살려는 본성으로 인해서, 참다가 참다가 "그만, 나가라!" 라고 하면서 밀어내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꿈, 즉 하나님의 계시라는 말이죠.

그것은 야곱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야곱도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말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꿈으로 등장한다는 말이죠. 야곱은 지금 자고 있는데, 꿈을 그렇게 자고 있는 자에게 강제로 덮치는 겁니다. 일종의 강간이라는 말이죠. 갑자기 덮친다는 겁니다.

이것이 곧 창세기 3장의 경우에 하나님의 질문인데, 즉 "아담아, 어디에 있느냐?" 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질문 속에서 사닥다리를 타고 천사들이 오르락 내르락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제부터 야곱은 반발할 틈도 없이 무엇을 받아들이는고 하니, 자기가 알고 있는 현실이 아닌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즉 강제추행을 당한 셈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새로운 현실이 야곱을 덮쳐버렸다는 말이죠.

신앙생활은, 하나님으로부터의 강제추행 !!

신앙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하는데,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강제추행이라는 겁니다. 폭력적인 하나님에 의해서 강압적으로 자기 인생이 얻어맞은 것이란 말이죠. 그렇지 않고 자기가 성경말씀을 연구하게 되면, 그러면 불교신자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궁금한 것을 성경에서 찾아서 참고로 하는데, 그게 자기 이익인데 말이죠.

그렇게 자기 이익을 위해서 성경말씀을 본다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도는 닦는 것이고, 그렇게 도를 닦게 되면 덮치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도를 닦으면 닦을수록 자기가 점점 더 우수해지는데, 그러면 자기가 발전하게 되고, 그게 바로 진화라는 말이죠. 즉 옛날보다 더 많이 알아서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옛날에는 '욱' 하는 성질이 있었는데, 성경말씀을 보고 난 뒤에는 그런 것도 없어지고, 점잖다는 말을 듣게 될 때, 그러면 자기는 그것을 두고 인간성이 많이 좋아졌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도를 닦는 것인데, 전혀 신앙이 아니라는 말이죠. 아무리 술과 담배를 끊어도, 그런 것은 신앙이 아니라는 겁니다.

참된 신앙이라는 것은, 자기는 반발을 하고 싶은데 그만 강제로 추행을 당하는 겁니다. 자기는 귀찮아서 밀어내는데, 그 밀어냄을 당하는 쪽에서 자기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분이 계속해서 자기에게 작대기로 쑤셔댄다는 겁니다. 그러면 당하는 쪽은 그야말로 피곤한 인생이 되는데, 인생 자체가 귀찮아 진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니, 왜 이러십니까?"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신앙생활이라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다들 해당사항이 없다는 표정들을 짓고 있인데(ㅋㅋ), 하지만 성경에는 분명히 그렇게 나와있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자기 사람을 그냥 가만히 두지 않는데, 그야말로 조지고 짓밟고 추행하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는 겁니다.

이스라엘도 조용히 살고 싶었지만, 그러나 !!

이스라엘 역사의 90%가 전쟁 이야기인데, 그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혼 줄을 내었는데, 이스라엘도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그들도 우리처럼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조용조용히 살고 싶었다는 겁니다. 그게 혼자 살아가는 인간의 보람이니 말이죠. 사실 우리도 조용한 것은 아니었는데, 아무튼 그렇다는 것이죠.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현재 자기가 살아온 방식대로 그냥 그대로 조용히 살고 싶은데, 그런데 주님께서는 반드시 자기 백성은 건드린다는 겁니다. 우리는 남들에게 멋있는 자기 인생을 자랑하고 싶은데,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그만 완전히 거들을 내고 만다는 것이죠.

어떻게 사업에 실패하는 정도가 아니고, 그야말로 수치스럽기가 짝이 없는 인생을 만들어 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얼굴도 전혀 들지를 못하게 만들어버릴 때, 그러면 우리의 반발심은 그야말로 극도에 달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군중 속의 고독 !!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하십니까? 먼저 '허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허무가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동그란 곳에 자기 혼자 있다는 느낌이 바로 허무라는 겁니다. 물론 주위에서 사람들이 왔다갔다하지만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란 말이죠. 자기 혼자 있다고 하는 느낌은 또렷하게 느껴지고, 반면에 주변에 있는 것들은 희미하게 느껴진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연못에 낚시를 하려고 갔는데 누가 금붕어를 엄청 풀어놓았는지 몰라도, 그야말로 '고기 반, 물 반' 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손을 내밀어서 모여있는 금붕어를 잡으려고 했는데, 그런데 그만 도망을 가고 하나도 잡히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우리 인간이 사는 모습이고 인생인데, 즉 신기루와 같다는 겁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교회에 교인이 2,000명이 된다고 하면, 그러면 그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은 친구가 많을 것이라고 여기는데, 그런데 자기가 가면 그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다 피하고 만다는 겁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많아도, 그야말로 군중 속의 고독이란 말이죠.

서울에 가면 탑골공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 노인네들이 많이 있는데, 하지만 같은 연배의 노인이라고 해서 다가가도, 그 사람들은 자기에게 이익이 없다고 하면 말을 걸어도 받아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짜장면을 사준다고 하면 대번에 말을 튼다는 말이죠. 물론 박카스 아줌마들은 말을 받아주는데, 왜냐하면 그 아줌마들은 말을 받아주면 자기들의 이익이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아무리 외로워도 그 외로움을 자진해서 달래줄 다른 사람은 없는데, 인간은 각자 혼자 산다는 말이죠. 50명, 100명, 그렇게 모여있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하는고 하니, 장차 자기 이익을 위해서 자기가 투자를 해야한다는 말이죠. 밥도 사주고 짜장면도 사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저기 청도에 가서 전원주택을 짓고 살아도, 누가 와서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 아닌데, "이번에 이사를 왔습니다" 라고 하면서 이웃을 불러서 뷔페로 대접을 해야한다는 말이죠. 도시에서는 떡만 돌리면 되는데, 시골에서는 그것으로 곤란하다는 겁니다. 더 많이 베풀고 더 많이 친절해야 하는데, 도시 사람이라고 으스대면 안 되고 오히려 더 낮아져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마음을 쬐끔 열어주는데, 왜냐하면 시골일수록 터주대감의 역사가 더 깊다는 겁니다. 도시는 서로가 다들 뜨내기들이기 때문에, 조금 분위기가 있는 커피 한 잔이면 되는데, 하지만 시골은 역사가 누적된 곳이기에, 그런 자들의 마음을 연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상당한 수준의 베풂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인데, 교회에 간다고 해서 다들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그만큼 자기가 먼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교인들이라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그냥 "나는 목사님의 복음적인 설교를 들으려고 이 교회에 왔습니다" 라고 나오면, 그것은 매우 곤란하다는 말이죠(ㅋㅋ).

무임승차는 안 돼 !!

다른 사람들이 이미 자기들의 밑천을 들여서 만들어놓은 교회이기 때문에, 그런 무임승차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교회는 그렇게 심하지 않지만, 아무튼 그런 것이 다 있다는 말이죠. 우리교회도 지금 아래 층에서 에어콘의 응축수가 떨어진다고 불평을 하는데, 그런 싫은 소리도 다 듣고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이미 투자한 곳에 자기는 맨 몸으로 왔다고 하면, 그러면 일단 고개를 숙이고 겸손하게 들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왕초보로서 말이죠. 그렇게 해서 먼저 열심히 하고, 또한 그들이 시키는 대로 잘하면, 그러면 그 모임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유대교라는 말이죠. 유대교는 이방인들을 그냥 받아주는 법이 없는데, 자기들의 찬란한 역사에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들아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같은 유대인으로 여겨주는 것은 아니고, 자기들의 종처럼 여기는 유대교인이 된다는 것이죠.

올해 이스라엘에서 선언을 했는데, 14%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국민으로 간주하지 않겠다고 말이죠. 오직 유대인들만 국민으로 간주하겠다는 것인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아무리 세금을 내고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정체성, 즉 뿌리라는 말이죠.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열심히 공부를 해서 대학에 들어갔다고 하면, 그런데 정작 대학이라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건물이 있고 잔디밭은 있고, 교직원과 학생은 있어도 말이죠. 그렇지요? 인간은 자기가 가는 곳마다 다 신기루로 변하고 만다는 겁니다.

인생 자체가 신기루 !!

여러분, 신기루가 무엇인지 알지요? 높은 열에 의해서 뭔가 건물은 붕 떠있는데, 뿌리는 없고 말이죠. 그래서 사막에서는 오아시스가 보인다고 해서, 정작 가까이 가면 그만 없다는 겁니다. 햇빛에 의해서 반사가 된 것인데, 반대쪽이 거울역할을 해서 말이죠.

인생 차제가 그런 신기루인데, 자기가 가면, 간 그곳은 전부가 신기루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경치가 좋다고 해서 가보면, 발 밑에는 음식 쓰레기가 수북하다는 말이죠. 특히 유명 관광지의 경우에는 더 그러한데, 사진에는 없는 쓰레기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자기가 바보가 되어서, 그런 쓰레기와 같은 것에는 신경을 쓰지 말고 사진 그대로 라고 여기면, 그러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이미 자기 과거가 있고 역사가 있는 이상, 모든 것은 다 자기가 판단을 하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모든 것을 자기가 판단하고 측정하고 규정하고, 그래서 자기 마음에 들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 라고 하는 것이 거기에 가는 이상, 그것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거기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신기루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실제', 혹은 '실재' 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에서 '나' 빼놓고 모든 것은 다 허망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까, 일단 허무하다는 것은 받아들이겠는데, 그런데 그 다음에 심판이 있다는 것은, 그것은 근거가 모호하니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말이죠. 도대체 심판의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는 겁니다.

심판의 근거는 무엇인가?

지금부터 그것을 강의하겠는데, 사람들이 허무하다는 것은 일단 인정을 한다는 겁니다. 인간은 하루 종일 자기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기 때문에, 그러니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시시하다는 말이죠. 그러면 매 순간 순간이 실망으로 다가온다는 겁니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이 '허무' 라는 말도 괜찮지만, '실망' 이라는 표현이 더 적당하지 싶은데 말이죠.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 살아갈 수록 더 실망스러운데, 나이가 60이 되고 70이 되면 연금도 좀 받고 편할 것 같아도,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서, 이번 것만 잘 해걸이 되면 괜찮아질 것 같아도, 또 다시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런 것이 없으면, 일상이 또 지루해진다는 겁니다. 즉 실망스럽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 다음은 과연 무엇이냐는 겁니다. 실망스럽다는 것은 그래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데, 그 다음에 심판이 있다는 것은 너무하지 않느냐는 말이죠. 바로 그러한 생각, 그러면 그 생각에서 더 나가보겠는데, 그게 바로 '허무에서 심판으로' 라는 겁니다.

허무에서 심판으로 !!

이제는 강의주제가 바뀌는데, 즉 '허무 → 심판',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허무하니까 심판을 받는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말도 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니가 산을 보았는가? 보았다면 심판을 받아라" 라고 하면,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이게 무엇인가? 그게 의자인 것을 알았다면 벌을 받아라" 라고 하면, 그게 어디 말이 됩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허무에서 심판으로 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에서 지옥과 심판 이야기를 하면 거부반응을 보인다는 말이죠. 그런데 제가 허무를 이야기하면서, 인간들은 반발을 한다고 했는데, 어떤 경우에 반발을 합니까? 하나님의 꿈과 같은 계시, 혹은 하나님의 질문, 혹은 주님의 그런 지시가 왔을 때, 우리는 반발을 한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오로지 자기에게 집중을 하기 때문에, 자기가 질문하고 자기가 먼저 나서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일단 거부하고 본다는 겁니다. 자기가 선택하고, 자기가 결정하고, 그렇게 자기가 의도한 일이 아니라고 하면, 일단 주춤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반발을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심판이 있다고 하는데, 무슨 근거에 의해서 그런 말을 하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심판이 있다면 그 근거를 제시해보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정말로 심판이 있다면, 즉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고 하면, 자기가 볼 수 있도록 자기 앞으로 가지고 오라는 겁니다.

그렇게 지금 가지고 오면 믿어주겠다고 하는데, 죽고 나면 있다고 하면서 구라를 치지 말라는 겁니다. 있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공갈을 치지 말라는 것이죠. 그러니 지금 당장 눈 앞에 가지고 오면, 인정하기 싫어도 믿어주겠다고 나온다는 말이죠.

복숭아 씨 !!

이렇게 인간이 허무 속에 응축이 되어있는데, 언젠가 이것을 '복숭아 씨' 라고 했는데, 그렇게 딱딱하게 굳어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심판은 무엇인고 하니, 반드시 죄를 지었을 때 받는 심판인데, 즉 나쁜 짓을 했을 때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이미 자기에게서 나오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착한 일을 했는데도 지옥으로 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말이 안 되는데, 그런데 전도서에 보면 착한 일을 한 자도 지옥에 간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나쁜 짓을 한 자가 천국에 간다고 하는 것도 역시나 말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인간은 어디서 반발을 하는고 하니, 자기와 의견이 다르니 반발을 한다는 겁니다. 자기는 이미 의견이 정리가 되었는데, 즉 "나쁜 놈은 지옥에 가고, 착한 사람은 천국에 간다" 라고 말이죠. 그러면 다른 사람이 "당신의 그 나쁘고 착하고 하는 그 판정의 기준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다는 겁니다. 자기 기준에 맞추어서 착하다고 하면 착한 것이고, 자기 기준에 나쁘다고 하면 나쁜 것이란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배가 고픈 자를 도와주게 되면, 그것도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말이죠. 그러면 상대방이 하는 말이, "내가 제대로 보답도 해주지 못하는데, 그러니 어디 가서 복이나 받아라"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저절로 복이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고, 동창생이 자기에게 사업을 하자고 하면서 투자를 하라고 해놓고, 그 돈을 떼먹고 필리핀으로 도망을 갔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믿는 놈에게 당했으니 그만 죽이고 싶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인간이 필리핀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들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죽어서 불쌍하다는 것보다도, 자기 돈을 때먹었으니까 지옥에 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이 살아있구나" 라는, 그런 생각까지도 말이죠. 그렇게 평소의 속내를 그대로 드러낸다는 겁니다.

그렇게 "나쁜 놈은 지옥에 가고, 착한 사람은 천국에 간다" 라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창세기 3장에서 '선악구조' 라고 한다는 말이죠. 선과 악을 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선과 악을 통합하면 무엇이 됩니까? 선악을 안다는 것 자체가, 즉 분별력이 있다는 것 자체가 좋은 것인데, 그래서 그것을 선으로 보는데, 그러면 그렇게 선과 악을 아는 자기 자신은 선한 인간이 된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불교의 논리인데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그만 실수를 해서 잘못한 것이 있더라도, 돌아서서 반성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 잘못에 대해서 반성까지도 할 줄 아는 더욱 더 훌륭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자기에게 스며든다는 겁니다.

양심에 돌돌돌 감겨있는 선악구조 !!

바로 이러한 선악구조가 멈춘 곳이 있는데, 그게 바로 인간의 '양심' 이라는 겁니다. 선악구조가 자기 양심에 돌돌돌 감겨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변한다고 했습니까? 변하지 않는다고 했습니까? 변하는데, 그러니 허무하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이 변한다고 하면, 선과 악의 기준은 어떻게 됩니까? 역시 변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안동 권씨 양반 집에서 태어난 자제 분의 경우에는, 방에 들어갈 때 신발을 나란히 놓지 않으면, 그러면 그것은 악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방글라데시에서 살다가 온 사람은 그냥 신발을 집어던져도 괜찮다는 말이죠. 방글라데시 사람들을 무시해서 죄송한데, 아무튼 그렇게 윤리체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선과 악의 기준이라는 것이 모호하다는 겁니다.

선과 악을 뛰어넘은, '인권' !!

최근에 불거져 나온 논쟁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동성 간의 연애인데, 즉 남자는 남자를 좋아하고 여자는 여자를 좋아한다는 말이죠. 남자의 경우는 게이라고 하고, 또한 여자는 레즈비안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우리나라의 유교적 문화관에서는 결코 용납이 되지 않는데, 그런 자식은 집안의 수치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런데 '퀘어축제' 라고 해서, 서울에서도 허용을 하고, 또한 대구에서도 허용을 했는데, 그래서 대구 동성로에 가면 해마다 그런 축제를 벌린다는 겁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는데, 동성애 자체를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을 넘어서는 인식을 가지고 살아야, 그게 현대인에게 합당하다는 겁니다. 선과 악을 뛰어넘는 구조, 그게 무엇인고 하니, 바로 '인권' 이라는 말이죠.

약한 자를 배려해주는, 즉 자기와 같지 않다는 것 때문에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은, 과거 봉건사회에서 있던 사고방식이지, 현대에는 맞지 않다는 겁니다. 다수자는 소수자를 보호해주어야 하는데, 소수자는 주류가 아닌 비주류인데, 그런 자들을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신사답다' 라는 것은 자기들끼리 노는 것이 아니고, 자기보다도 약한 자를 배려해줄 줄 아는 것, 그것이 진정한 신사도가 아니냐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현대사회에서 소수자를 보호해주는 인권을 주장하게 되면, 이것은 무엇을 뛰어넘는고 하니, 사상을 뛰어넘는다는 겁니다. 이데올로기를 말이죠. 지금까지의 사상은 "사회주의인가? 아니면 민주주의인가?" 라는 것인데, 이것 때문에 그렇게 전쟁이 일어나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전쟁을 해소하는 방법은 무엇인고 하니, 사상자체를 뛰어넘는 것인데, 그러면 거기에는 인권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북한의 경우에도, 과거에 6.25를 누가 일으켰는지, 그런 것을 따지지 말고, 오직 하나 인권만 따져서, 미래를 향한 새로운 새로운 출발을 시작해야한다는 겁니다. 남한의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서로 손을 잡고 말이죠. 그게 인권인데, 그러니 현 정부는 성소수자의 문제도 당연히 용납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선과 악의 케케묵은 대립구조에서 벗어나면서, 인간의 도덕체계가 이제는 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용납할 수 있다는 겁니다. 대승적 차원에서 말이죠. 그래서 불교에서는 악마까지도 용서한다고 하는데, 그런 대자대비의 마음가짐으로 정치를 해야하고, 다른 것도 다 그런 식으로 인식이 흘러가야 한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점점 더 단단해지는 '복숭아 씨' !!

그렇게 모든 것을 다 포용하자는 것인데, 그러면 과연 그 결과가 무엇이 됩니까? 2가 됩니까? 1이 됩니까? 1이 되는데,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기 체질에 맞다는 겁니다. 즉 인간이 자기가 절대자가 되는 것에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사고방식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인권운동' 이라는 겁니다.

지금은 개고기를 먹지 말자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결국 노리는 것은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서 서로 나누지 못할 대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북한에서는 어떻게 나옵니까? 김정은의 형인 김정남을 제거해 버렸다는 말이죠. 그러니 아무리 인권이라고 해도, 이것이 2가 아닌 1이 되는 인권, 즉 "나에게 이익이 되는 인권인가? 아닌가?" 라는 겁니다.

인간이 나름 선과 악을 넘어서 인권까지는 왔는데, 그런데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 손해가 되는가?" 라는 것은 넘어섰습니까? 그것은 넘어설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은 돈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의 자존심까지 포함하는 것인데, 명예까지도 말이죠. 아무리 교회에 다니고 아무리 기도를 해도, 자기의 명예까지 실추시키는 바보짓은 하지 않겠다고 하는, 그것이 마치 '복숭아 씨'처럼 점점 더 단단해진다는 겁니다.

하나님마저도 인간을 설득할 수 없어 !!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자기 자존심이고 명예인데, 지금까지 자기가 쌓아온 것이 있는데, 그러니 자기 양심만큼은 아직 살아있다는 겁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만큼은 꼭 지키고 싶다는 말이죠. 따라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마저도 인간을 설득할 수 없다" 라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지금까지 제가 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 인간이 하나님에게, "하나님, 지금 당장 제 눈 앞에 천국과 지옥을 들이대서 보여주시면, 그러면 믿지 말라고 해도 믿겠습니다" 라고 하는, 그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은 답변을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 쪽에서는 나오는 질문은 이미 그 해답을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 3더하기 5는 얼마입니까?" 라고 하는 너무나 뻔한 질문을 해도, 그 대답은 '8'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8이라는 것이 과연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지, 손해가 되는지, 그것을 따져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심성이고 또한 본성이란 말이죠. 다시 강조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인간은 그 어떤 경우라도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죠.

인공지능과 인권 !!

여러분, 인공지능이 나쁩니까? 좋습니까? 상식적으로 다들 좋다고 본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인공지능에 대해서 조금만 공부한 사람은, 이것을 약한 인공지능과 강한 인공지능으로 나눈다는 겁니다. 약한 인공지능은 인간이 시키는 대로 하는데, 그런데 강한 인공지능은 인간의 자존심과 체면, 심지어 돈까지도 자기가 다 빼앗아 간다는 말이죠.

인간의 일을 대신해서 해주면서, 동시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귀한 것도 다 빼앗아 가는 것이 바로 강한 인공지능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 강한 인공지능과의 관계에 있어서 주인이 됩니까? 종이 됩니까? 종이 된다는 것이죠. 물론 약한 인공지능에게는 주인이 되겠지만 말이죠.

그러면 국가에서는 당연히 강한 인공지능은 허락하지 않고 약한 인공지능만 허락할 것이라고 여기는데, 그런데 그게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공지능에 인권이 있다는 말이죠. 현재의 로봇청소기의 경우에는 때려도 별 문제가 안 되는데, 그런데 만약에 인간과 똑같이 생긴 로봇이 청소를 하는데 때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인격모독이 된다는 말이죠.

그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 개는 분명히 개인데, 인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개에게 옷을 입히고 같이 잠을 자고, 그렇게 개에게 정성을 다하게 되면, 그 개에게 '개권'이 생긴다는 겁니다(ㅋㅋ). 이것이 그냥 웃을 일이 아닌데, 그래서 개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고 나온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개는 더 이상 고깃덩어리가 아니니 말이죠. 그래서 인권주의자들이 전국에서 개고기를 제일 많이 취급하는 경기도의 성남시장에서, "개는 더 이상 고기가 아닙니다" 라고 하면서 데모를 했다는 겁니다.

심지어 죽으면서 개에게 유산을 남기는 사람도 있는데, 그러면 그 개가 죽으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그 유산은 누구에게로 돌아가야 합니까? 그 개의 자식들인지, 아니면 개 주인의 친척들인지, 앞으로 분명히 그런 문제가 생기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선과 악을 넘어서서 인권을 주장했는데, 그래서 모든 것을 용납하자고 하는데, 하지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자신의 절대적인 '1'을 다치게 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의 용납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이 최고인데, 물론 다 안다는 뜻은 아니고, 아무튼 인간이 최고인데, 그 인간을 넘어서 이상하게도 허무가 깔려있다는 겁니다. 즉 인간이 최고인데, 그것은 분명히 진리인데, 그런데 왜 허무가 있느냐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인간은 왜 죽는가?" 라는 겁니다.

주님의 질문과 그 답변 !!

물론 우리가 이런 질문을 주님께 해도 주님은 답변을 하지 않는데, 모든 질문은 먼저 주님이 하신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주님은 그런 질문을 하시면서 우리 인간의 대답을 원할까요? 원하지 않을까요? 원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이미 반발이 들어있다는 것을 주님이 잘 아시니 말이죠.

그렇다면 그 답은 어디에 있는고 하니, 주님의 질문 안에 이미 그 대답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강의제목이 되겠는데, 즉 '질문 속의 답' 이라는 겁니다. 그게 교재 96페이지에 보면 나오는데, 누가 한 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 계시에 의하면, 계시를 공격하는 요소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을 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하면, 우리 인간들은 그것을 자기 앞에 내놓을 것을 요구하는데, 그렇게 보여주면 믿겠다고 나온다는 말이죠. 하지만 주님은 인간의 그런 요구, 즉 그런 질문에 답변해주지 않는데, 그런데 주님께서 먼저 다가오게 되면, 그 안에 답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 질문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고, 우리 인간은 그 누구도 그 질문에 대답을 내놓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질문에 답하는 분으로 오신 분이 누구인고 하니, 여기서 제가 그분을 '예수님' 이라고 하지 않겠는데, 왜 유보를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오셔도 그 예수님은 75억 인구 중의 한 명의 개인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물론 좀 괜찮은 분이라고 인정해줄 수는 있지만, 아무튼 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 즉 요셉의 아들로 보았다는 겁니다.

여기서 마태복음 1장을 보겠는데, 19절과 20절입니다.

(마 1: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마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요셉을 덮친 주님의 질문 !!

이게 어제 오후시간에 한 내용인데, 요셉이 자기 여자친구인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런데 자기는 동침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하지만 떠들지 않고 조용하게 그 관계를 끝내려고 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마리아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고마운데, 그리고 일을 제대로 정상적으로 잘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그런데 20절에 보면, 생뚱맞게 주의 사자, 즉 천사가 등장해서 이 일에 개입을 한다는 겁니다. 인간들의 일에 천사가 말이죠. 이래서 성경이 골치가 아픈데, 왜 인간들의 문제를 인간들이 다 알아서 해결하도록 놓아두지 않느냐는 겁니다. 천사는 우리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데, 그러니 이것은 일종의 반칙이라는 말이죠.

이것은 덮친 것인데, 즉 요셉이라는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일종의 강간을 당했다는 겁니다. 표현이 좀 그러한데,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죠. 요셉은 인간들끼리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는데, 이번 일을 자기 약혼자인 마리아와 상대를 해서 해결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게 그의 인생관이고, 또한 우리가 봐도 그게 정상적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주의 천사가 개입을 하는데, 달리 말해서 주님께서 요셉에게 질문을 던졌다는 말이죠.

졸지에 2가 된 요셉 !!

그런데 제가 조금 전에 질문 안에 답변이 있다고 했지요? 그러니 사실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질문이 주어지게 되면, 요셉은 지금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일어난 그 모든 일들이, 그것이 자기 일이 아닌 주님이 일임을, 그것을 주님에게 납치를 당함으로서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이 일만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가 태어난 것부터 해서 3살, 10살, 20살, 30살, 그 모든 일이 주님이 자기에게 덮치는 순간 소급해서 "아하, 내가 주님의 사람이구나. 천국에 갈 사람이구나" 라는 것을, 천사의 개입으로 인해서 한 순간에, 그리고 한꺼번에 모든 것이 다 새롭게 정립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요셉은 주님의 일에 답하기 위해서 태어나야하는 증거물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요셉은 1이 아닌 2가 되는데, 1일 때는 인간적인 도리를 다하는데, 그래서 정혼자인 마리아를 보고, "이번 일은 내가 크게 벌이지 않겠다. 너도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지 싶은데, 우리 조용히 이제 관계를 정리하자"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가 알고 있는, 즉 양심에 준한, 자기가 생각에 옳다고 판단해서 한 일이라는 말이죠. 1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천사가 개입하는 순간 갑자기 1이 아니라 2가 되면서 신앙이 되고 말았는데,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이익을 위해서 자기가 부림을 당한다는 겁니다. 즉 다루어진다는 말이죠. 여러분은 1입니까? 2입니까?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돌아서면 또 다시 1이 되고 마는데, 즉 "나는 내가 편한 것이 최고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 20절에 보면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라고 하는데, 무서운 일을 일으켜놓고 무서워하지 말라고 한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과연 요셉이 원했습니까? 요셉은 전혀 원하지도 않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런 이야기를 풀어놓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라는 것은 일방적으로 주님에게 덮침을 당한 자들이라는 말이죠. 그런 자들이 성도라는 것이죠.

(마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여기서 누가복음 2장을 보겠는데, 8절과 9절입니다.

(눅 2: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눅 2: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그 지경에 목자들이 !!

제가 이 베들레헴 들판에 실제로 가보았는데, 정말로 비행기 값이 아깝지 않았다는 겁니다. 밀려오는 그 감동, 지금 생각해도 다시 가슴이 뭉클한데 말이죠. 제가 사진을 찍어서 게시판에 올려놓았는데, 이 들판에는 목자들만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목자들을 싫어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는데, 그래서 좋지 않게 여긴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들을 왜 싫어하는고 하니, 양들을 맡아서 키우게 되며, 물론 양의 숫자는 다들 아는데, 그런데 새끼를 밴 양들이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겉으로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니, 자꾸 속인다는 겁니다. 양들이 새끼를 낳으면 그대로 주인에게 다 돌려 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120마리의 새끼가 태어나면 주인에게는 100마리라고 속이고, 나머지 20마리는 자기들이 챙긴다는 말이죠.

물론 그것을 주인들도 알지만, 달리 대안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맞긴다는 겁니다. 조금만 챙기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목자들에 대한 인식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겁니다. 안식일도 지키지 않는 그런 자들이 양들을 키운다는 것이죠. 요즘은 이주한 사람들이 그 일을 하지 싶은데 말이죠.

그런데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이 덮치는데, 그래서 14절에 보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기뻐하심을 입은' 라고 하는데, 그러니 그들이 하나님을 기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한 자들이라는 겁니다.

(눅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눅 2: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눅 2: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눅 2: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눅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너희는 나의 기쁨이야 !!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너희는 나의 기쁨이야" 라고 한 자들, 왜 윤복희의 '여러분' 이라는 노래에 보면 그런 가사가 나오지 않습니까?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너의 기쁨이야" 라고 말이죠. 하나님께서 기뻐한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자기 사람을 만들겠다는 것인데, 그러니까 질문 속에 답이 있다는 말이죠

목자가 기도하는 사람이 아닌데, 그냥 양을 키워주고 그 대가를 받으면 된다는 말이죠. 일종의 도급제라는 겁니다. 그런데 천사가 개입해서 뭐라고 합니까? 누구를 만나라고 하는데, 베들레헴에 가서 아기 예수를 만나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그냥 만나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 아기 예수가 바로 천국과 지옥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보여주는 지옥 !!

예수님이 보여주는 지옥이 무엇인고 하니,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은 상태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성령을 받는 사람은 아는데, 이러한 예수님의 고백이 예수님만의 고백이 아니라, 이 지구상의 75억의 모든 인구가, 꿈과 같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면, 이미 버림을 받은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마 27: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그러면 그렇게 버림을 받았으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다시는 버림을 받지 않도록 달리 어떤 조치를 해야합니까? 그래서 더 착하게 살고 해야합니까? 그게 필요합니까? 오늘 강의제목이 힌트인데,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버림을 받은 그 자체가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해답이기에 말이죠. 달리 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게 아니라, 버림을 받았으니 자기가 살기 위해서 꼼지락거리면서 무엇인가를 더 해보겠다는 것 자체는 아직도 누가 살아있다는 겁니까? 자기가 성경말씀을 보고 질문을 던지는데,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라고 말이죠. 그렇게 질문을 던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이익인데,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아하, 버림을 받았구나. 성경이 허무하다고 해도 그 이유를 몰랐는데, 버림을 받았기에 당연히 허무할 수밖에 없구나" 라고 하면서, 인생이 허무한 이유를 제대로 알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 답변 중에 무엇이 있는고 하니,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를 만나라고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목자들은 하나님의 이 명령에 순종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자기들이 던진 질문이 아니기에 말이죠. 만약에 자기들이 질문을 던지고 했으면 자기들 선에서 어떻게 조절을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이것은 전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학교에서 수학 선생님이 "오늘이 20일이지? 20번, 이 문제를 풀어봐" 라고 하면,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20번은 그 문제를 풀 수 있든 없든 간에, 그것 그 다음 문제이고, 일단 자리에서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즉 반응을 보인다는 말이죠.

그렇게 주님이 호명을 하게 되면, 자기가 천국에 가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이 찾아오시게 되면 거기에 대해서 반응을 나타낸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죽은 나사로를 보고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일방적으로 불렀는데, "나사로야, 나오너라" 라고 말이죠. 거기에 대해서 나사로가 거부했습니까? 호명에는 그런 반항이 없다는 겁니다.

성도의 인생자체가 주님이 만든 인생이기에, 성도에게는 반항이나 반말이 사실상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어쩌면 반항이라고 여기는 것 자체가 주님의 일에 대해서 호응하고 있다는 겁니다. "나는 싫어요" 라고 하는 것도, 주님의 일에 대한 호응이란 말이죠.

신앙은 1에서 2가 되는 것 !!

그래서 주님의 질문 앞에서 선과 악을 넘어선다는 겁니다. 선과 악밖에 모르는 아담에게, 주님께서 "아담아, 어디에 있느냐?" 라고 하면서 찾아오실 때, 그때 이미 아담은 구원을 받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먼저 시작을 하셨기에 말이죠. 먼저 시작을 하신 분이 주님이시기에, 우리는 걸려들었다는 겁니다. 주님이 덮쳤다는 말이죠.

그 자체가 바로 구원인데, 그러니 새삼스럽게 무엇을 더 하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허무하면 허무한 대로 살면 되고, 나쁜 짓을 하면 나쁜 짓을 하는 대로 살면 된다는 말이죠. 못나면 못난 대로, 잘나면 잘난 대로, 그렇게 살면 된다는 겁니다. 다만 그때부터는 이제 더 이상 1이 아니고 2로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러니 신앙은 1에서 2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이라는 말이죠. 1은 신앙이 아닌데, 2가 신앙이란 겁니다. 자기가 아무리 고치고 도를 닦고 어쩌고저쩌고 하더라도, 심지어 성경말씀을 다 달달 외우고 해도, 그게 신앙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냥 살면 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그냥 사는 것, 막 사는 것, 성도에게는 그것조차도 누구의 일이라는 겁니까? 자기 일이 전혀 아니고 주님의 일라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마리아, 요셉, 목자, 그리고 나사로와 같은 자들이 보여준다는 말이죠. 이들이 이 일에 증인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겁니다.

누군가가 찾아왔습니다 !!

아까 사람들은 천국과 지옥을 보며주면 믿겠다고 한다고 했지요? 그러면 왜 주님은 천국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를 주님이 덮쳤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덮쳤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연구를 하지 않았는데,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그게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이것은 논리로 따질 수가 없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보입니까?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죠.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입니까? 타임머신도 없는데, 그러니 2,000년 전의 그 십자가 사건이 당연히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선악과도 보이지 않고 말이죠. 요한계시록이 마감이 된 지도 이미 오래 되었기 때문에, 성경의 내용도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무엇이 보이는고 하니, 어떤 사람이 졸지에 달라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에게 묻는데, "당신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달라졌습니까?" 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 사람이 답변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 대신에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누군가가 찾아왔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상하게도 그분이 오고 난 뒤에 자기가 달라졌다고 한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1에서 2가 된 것인데, 그 이전까지는 평생을 자기 혼자 살았는데, 그리고 앞으로도 혼자서 살아갈 것만 생각하는데, 다른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1이 갑자기 2를 의식하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 이외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전히 당구를 좋아하고 야구도 좋아하고, 고스톱도 좋아한다는 겁니다. 다만 과거에는 자기가 전부이고 최고였고 제일 중요했는데, 그런데 이제는 그 '나' 라는 것이 누구로부터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런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이죠.

꿈에서 깨어나세요 !!

그러면 상대방이 뭐라고 합니까? "꿈에서 깨어나세요" 라고 하는데, 즉 "너는 달라지면 안 돼. 당신이 얼마나 지성적인 사람이었는지 몰라. 그러니 그러면 안 되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 개꿈에서 말이죠. 그렇게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꿈, 즉 신기루로 여기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전혀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렇게 가봐야 신기루라는 말이죠.

그런 자들에게 성경말씀은 봐도 되고 안 봐도 되고, 그냥 선택이지 필수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지만 덮침을 당한 자들에게는 선택이 아니고 필수라는 말이죠. 어떻게 자기 힘으로 거부할 수가 없는데, 그리고 도망칠 수도 없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완전히 푹 빠져서 미쳐버렸다는 말이죠.

여기에서 미쳤다고 하는 것은, 집 팔아서 교회에 바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은 믿음이 없어서 있는 척을 하는 일종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몸부림을 치지 않아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과거에는 이 세상을 보면서 눈에 보이는 것이 사라지고 해서 안타까웠는데, 그런데 이제는 "이 세상은 원래 아무 것도 아니야" 라고 하면서, 그런 이야기가 술술 나온다는 겁니다.

그 이전에는 뭔가를 따지면서, 그것이 자기에게 어떤 이익이 되는지, 그렇게 살았는데, 그런데 이제는 그런 것을 따지지 않고 이야기가 그냥 나온다는 겁니다. 마치 "산에 나무가 있네" 라고 하는 이야기가 그냥 술술 나오듯이 말이죠. 즉 "죽고 난 뒤에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그게 무슨 따질 것이 되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또한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았는데, 그러면 사람들에게 개꿈이 되고 아버지(예수님?)에게는 지옥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는 다들 조용했는데, 제자들도 다 끝난 줄로 알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흘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는데, 실제로 본 사람은 별로 없다는 것이죠. 500명의 무리들, 그리고 야고보와 글로바 정도라는 말이죠.

달라진 사람들 !!

사람들은 나타나주기를 원했지만, 그러나 주님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령의 오심으로 인해서 달라진 사람들, 그들이 예수님을 증거하기 시작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천사가 실제이고, 또한 개꿈이 진짜로 영원한 실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라고 하는데, 쉽게 말해서 "개꿈은 영원하다" 라고 한다는 것이죠.

(고후 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다만, 증거할 뿐 !!

다만 우리가 이 일에 증인으로서 이것을 증거할 뿐이지, 그 누구에게 설득은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미 하나님 안에서 예수님이 답인데,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지옥이 되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천국이 된다는 말이죠. 즉 천국과 지옥은 십자가에서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전혀 기가 죽을 이유가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인생이 아니니 말이죠.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사업이 그만 부도가 나서 사기꾼이 되고, 자동차로 사망사고를 내서 교도소를 들락거린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기죽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다 어차피 헛된 것들인데, 그런 것들에 목숨을 걸지 말라는 것이죠. 그게 바로 2로 살아가는 자들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믿지 않는 것이 당연한데, 그런데 믿어지니 참으로 신기합니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따져도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 것들이, 그것이 성경말씀에 들어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주님의 질문과 답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에게 받아들여지게 해주시니 너무나 감사를 드립니다. 자기 인생이 아닌 주님의 인생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되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8,9,3 오후 11시에 마침.

주님의 군화발을 날마다 경험하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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