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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2 01:43:07 조회 : 114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44 - 시간 공개념 이름 : 구득영(IP:203.223.97.179)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44 - 시간 공개념

18,10,0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06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 고등학교 생물 교과서에 보면 세포수정이 나옵니다. 정자와 난자와 수정되어 만들어지는 것이 수정란인데,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그 수정란에 표면에 역선(力線)이 그어지면서 두 개의 반구로 나주어져요. 이것을 '이배엽'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도 다시 역선이 그어지면서 표면이 4개로 분할되는데, '사배엽'이 됩니다. 상실기, 포배기, 낭배기를 거쳐서 수정란은 서서히 개체가 되어갑니다.

** 역선이 생기면서 표면이 계속해서 분할이 되어가고, 각각의 분할된 표면은 거기에 주어지는 조건이나 자극에 따라서 어떤 부분은 발이 되고, 어떤 부분은 머리가 되고, 또 다른 부분은 배가 됩니다. 말 그대로 '기관'이 발생하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알은 발과 머리, 배 등의 기관을 가지는 인간이나 거북이, 닭과 같은 신체가 됩니다. 그렇게 기관화가 된 신체가 발생하고, 그 기관들이 모여서 하나의 신체를 이루게 됩니다.

이렇게 머리가 되고 발이 되는 것은 우리가 표면을 관찰함으로서 비로소 파악하는 것이고, 이미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잠재성'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이 표면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그게 발이 될지 무엇이 될지 모른다는 말이죠. 그런 잠재력이 줄기세포에 있다고 했는데, 그렇게 해서 기관이 발생하게 된다는 겁니다.

줄기세포라고 하니 옛날에 유명했던 황우석 박사가 생각나는데, 연구비를 더 타내기 위해서 줄기세포를 제대로 만들지도 못했으면서 만들었다고 사기를 쳤는데 말이죠. 물론 여러 가지 말하기가 곤란한 사정들이 있었겠지만, 아무튼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는 겁니다.

하늘의 형상, 땅의 형상 !!

지금 제가 이런 생물 시간에 하는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형상' 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라는 말이죠. 인간에게는 두 가지 형상이 있는데, 하나는 흙에 속한 형상이 있고, 하늘에 속한 형상이 있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나오는데 말이죠.

(고전 15: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그러니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은 흙에 속한 형상인데, 그런 이 세상의 형상으로서 무엇을 봅니까? 거울에 비친 자기 형상을 본다는 겁니다. 단일 형상으로서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말이죠. 그렇게 흙의 형상으로서 거울에 있는 자기 모습을 보니 숨을 쉬고 있는데, 그것을 사람들은 '살았다' 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러니 출발점이 단일 형상이고, 거기서 '살았다' 라는 것이 나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형상이 단일 형상, 즉 하나가 아니고 두 개라고 하면, '살았다' 라고 하는 것은 살아있는 게 아니고, '죽었다' 라고 되는데, 왜냐하면 하늘에 있는 형상이 목표이고 또한 표준이기 때문에 말이죠. 즉 하늘의 형상에 이르지를 못한다고 하면, 그것은 '죽은 자' 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늘이 아닌 흙에서 출발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숨을 쉬고 있고 움직이고 있으니 당연히 살았다고 보는데, 그리고 나중에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에, 즉 숨을 쉬지 않고 움직이지 않을 경우에, 그것을 두고 '죽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부활체에는 죽음의 내용이 !!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즉 "비록 움직여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죽은 것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사셨다가, 무엇을 몸소 체험하시는고 하니, 인간들이 겁을 먹고 있는 죽음으로 가고, 그리고 삼일만에 부활하셨다는 겁니다.

이 부활체는 이전에 살아있을 때의 그 몸이 아닌데, 그 몸으로 다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살아있다는 것이 살아있다고 되는데, 그게 아니기 때문에, 살아있다는 것도 죽은 것이 되고, 즉 죽은 것이 죽음으로 들와왔을 뿐이라는 말이죠.

그 다음으로, 그렇게 죽어봐야 비로소 등장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하늘의 형상이라는 겁니다. 즉 '부활체' 라는 말이죠. 부활이란 것은 그 이전에 죽은 적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러니 부활체라는 것은, '죽었었다' 라고 하는 그 죽음의 내용이 삽입된 몸체라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이라는 것은 "나는 이미 죽었다" 라는 것을 인정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겁니다. 숨을 쉬고 있는 것을 가지고 '살았다', 혹은 '죽었다' 라는 것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하늘의 형상을 입지 않는 이상, 모든 인간은 다 죽어있다는 겁니다. 숨을 쉬던 말던 간에 말이죠.

심판과 저주, 그리고 은혜 !!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죽음의 의미를 어디까지 몰고 가시는고 하니, "왜 죽어야 하는가?" 라는 죽음의 의미까지 포함된 죽음의 의미를 내세우시는데, 그래서 이것을 그냥 죽음이라고 하지 않고, '저주받은 죽음'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저주를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고, 저주를 받은 것은 인간이라는 것이죠.

이 저주를 다른 말로 심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저주는 심판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실 때, 인간은 결코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데, "너희는 저주를 받아 합당한 요소로서 이 땅에 태어났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 자체가, 거기에는 주님의 창조의 은혜가 빠지고 없기 때문에, 그 자체가 죽음이라는 말이죠.

그게 흙의 형상인데, 그러면 '살았다' 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아무리 죽은 자라고 해도 거기에 무엇을 집어넣으면 살 수 있을까요? 즉 하늘의 형상이 되겠느냐는 겁니다. 창조의 은혜를 집어넣으면 되는데, 그것을 주일 낮에 '용서' 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저주는 죄에서 비롯되니까 말이죠.

미처 모르고 있는 은혜 !!

그러므로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용서해주게 되면 창조의 은혜가 담기기 때문에, 그러면 은혜로운 영원한 삶이 보장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주를 위해서 선악과나무가 있었고, 하늘의 형상을 위해서 생명나무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 두 그루의 나무가 에덴동산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사람이 아닌 나무가 말이죠. 주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니 은혜가 무엇인고 하니, 이 은혜는 자기가 알고 있는 은혜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미처 모르고 있는 은혜가 있다는 겁니다. 흔히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은혜를 달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익히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인데, 즉 자식이 공부를 잘하고, 몸 건강하고, 사업이 잘되고, 가정이 화목하고 말이죠.

그것은 이미 자기가 과거에 경험해서 기억 속에 있는 것인데, 그런 것의 미흡함을 보완해달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을 은혜라고 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공짜선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사실은 공짜가 아니죠. 왜냐하면 자기가 빌었으니 말이죠. 자기가 주님 앞에 기가 죽어서 아주 겸손하게 빌고 있으니, 그런 겸손의 값을 쳐달라는 겁니다.

선생님, 잘못했습니다 !!

왜 숙제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학교에서 선생님이 때리면, 학생들은 뭐라고 합니까? "선생님,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는데, 사실 그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선생님, 더 이상 때리지 마세요" 라고 하는, 그런 뜻이라는 겁니다. 정말로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인데,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라고 해도, 인간은 자기 잘못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내 인생, 이제부터 잘 풀리게 해주세요"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것이죠. 그래서 잘 풀리는 화장지가 나오고 했는데 말이죠(ㅋㅋ).

그러니 힘의 논리에 의해서 미리 항복을 함으로서 저쪽의 동정을 유발시키는, 그런 기회를 자기가 만들어나간다는 겁니다. 즉 "내가 이 정도로 고개를 숙였으니, 하나님이 설마 내치지지는 않겠지?" 라는 것이죠. 자기가 이렇게 비굴할 정도로 낮아지고 했으면, 하나님도 뭔가 주시는 것이 있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주고받는 상거래와도 같은 것을 노리면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자기도 미처 모르는 은혜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오늘이 10월 1일인데, 만약에 주님이 10월 3일에 은혜를 주신다고 하면, 우리가 오늘 그 은혜를 알 수 있어요? 없지요. 그러면 내년 6월 7일에 주시는 은혜는 알 수 있습니까? 몰라요. 그렇다면 2025년 3월 1일에 주시는 은혜는 알 수 있어요? 역시 모르죠. 그러면 2117년에 주시는 은혜는 알 수 있습니까? 역시 모른다는 겁니다.

그때 우리는 이미 죽고 이 땅에는 없는데, 그런데 그 은혜를 주님께서 지금 주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철이 없어서 과거에 자기가 받은 은혜가 은혜의 전부인 줄로 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주면 좋다고 헌금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삐쳐서 교회도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죠.

복음으로 산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작 우리에게 주시고 싶은 것은, 우리가 아는 게 아니고 우리가 모르는 은혜인데, 물론 우리는 내일 일도 모르지만, 하지만 미리 다 알고 계시는 분이 그때 필요한 은혜를 지금 주신다는 겁니다. 그것을 두고 "복음으로 산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현재에서 보면 그 복음은 돈도 안 되고 힘도 안 되고, 그야말로 시시한 것으로 보인다는 말이죠.

그런데 살고 살다가 죽었을 때, 그때 가장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남편, 아내, 자식, 그런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과연 누가 구원해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미래에서까지 기다리고 계시는 분, 바로 그분이 그때 필요한 것을 지금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죠. 그것도 매일같이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지금 당장 자기에게 돈이 안 된다고 하면서 그 얼마나 무시했느냐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들은 "귀신을 쫓아주세요. 내 눈을 뜨게 해주세요" 라고 했지, "내 죄를 용서해주세요" 라고 하는 사람은 거의(전혀?) 없었다는 겁니다.

어떤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그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걸린 중풍병이 낫는 것인데, 즉 자기가 알고 있는 은혜를 달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신 것은 무엇인고 하니, 놀랍게도 병을 고쳐준 것이 아니라 죄사함을 주셨다는 것이죠. 즉 '용서' 인데, 죄를 용서해주셨다는 말이죠. 즉 "니가 앞으로 어떻게 살던, 거기에 상관없이 내가 너를 용서하겠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을 형상과 관련을 시켜보면, 여기 교재에 "각각 분할된 표면은 거기에 주어지는 조건이나 자극에 따라서 어떤 부분은 발이 되고, 어떤 부분은 머리가 되고, 또 다른 부분은 배가 됩니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표현이 형상이 되는데, 즉 통합된 실체가 된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 성도를 통한 하나님의 형상이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대지의 습곡운동(지층이 물결모양으로 주름이 지는 현상)처럼, 사막이 꿈틀거리듯이 스스로 주름이 잡혀서 엉겨붙고 내부적으로 감기면서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지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어떠한고 하니,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날 때 부모를 자기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부모라는 환경조건, 일가친척이라는 환경조건, 심지어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유전적인 질병이나 DNA의 요소도 자기가 정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자기가 태어난 그 가정이 그대로 주입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작업과 조건' 인데, 쌍둥이로 태어나도 사는 것이 다 다르듯이, 쌍둥이라고 해서 동일한 운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생물학에서 보통 50퍼센트는 DNA의 요소라고 하는데, 그리고 40퍼센트는 자기 결정이고, 10퍼센트는 외부조건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이 DNA의 성향이라고 할 수 있는데, 키가 크고 적고 뚱뚱하고 날씬하고 하는 것이 말이죠. 배를 나오게 하는 DNA가 있다는 겁니다. 운동을 해도 안 된다는 말이죠.

작업과 조건(환경) !!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한 끼에 5인분을 먹어도 살이 찌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유투브로 만들어서 개인방송을 해서 일 년에 50억을 버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저도 그런 방송을 여러 번 보았는데 말이죠. 자기 앞에 음식을 5인분이나 차려놓고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모르는데, 그런데 자기는 빼빼 말랐다는 겁니다.

매 주 그런 방송을 하는데, 개인 방송 중에서 돈을 제일 많이 번다고 하는데 말이죠. 물론 어떤 사람은 화장을 하면서 번다고 하는데 말이죠. 그렇게 자기 집에서 음식을 맛있게 실컷 먹으면서 엄청난 돈을 번다는 겁니다. 물론 그것도 젊었을 한 때겠지만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이 천국의 자기 백성을 만드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그것은 백성들도 모르고 오직 주님만이 아시는데, 그래서 주님의 죄사함, 즉 용서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용서와 함께 하나님의 형상이 주어지는데, 그것을 아까 조건과 자극이라고 했는데, 조건과 환경이라고 해도 되고 말이죠.

하나님의 형상은 용서와 관련이 있어 !!

그러니 하나님의 형상은 용서와 관련이 있는데, 이 용서는 기쁜 소식이니, 복음이라고 할 수도 있고 말이죠. 그렇게 용서와 관련된 체로 모든 조건과 연계가 되어있다는 겁니다.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말이죠. 남자가 아니고 여자가 되어야할 이유, 그리고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되어야하는 이유도 이 용서와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그런 DNA를 가지고 반드시 그 가정에서 태어나야 될 이유는, 꼭 구원을 받아야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어떤 사람은 중국에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중국에서 태어나는데, 거기에 대해서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용서를 받고 천국백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자기의 개인적인 인생에서 대해서 원망을 하든지 불평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된다는 말이죠. 원망보다도 더 해서는 안 되는 것이 후회인데, 만약에 자기 인생에 대해서 후회를 한다고 하면, 후회는 스트레스를 받게 하는데 말이죠. 그래서 후회는 짜증을 낳고 짜증은 암을 유발시킨다는 겁니다.

미래에 대해서 미리 걱정을 하고 염려를 하는데, 사실 이것은 어떻게 전혀 말릴 수가 없다는 말이죠. 잘 되도 걱정이고 못 되도 걱정이라는 겁니다. 어떤 일을 제대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걱정하고, 심지어 풍부하게 많이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도로 빼앗길까 싶어서 걱정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걱정이 그만 팔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두고 성격이 좋다고 하는고 하니, 내일 큰 일을 앞두고 오늘밤에 잠을 푹 잘 수 있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잠이 보약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 겁니다. 시편에 나오는데 말이죠.

(시 127: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주님은 왜 걱정할 조건과 환경을 주시는가?

그러면 내일 걱정할 일을 만들지 않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할지 모르겠는데, 하지만 내일 걱정할 조건과 환경을 주님이 만드시는 것은, 그것은 주님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즉 용서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놓고 우리에게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특히 사돈이 될 사람과 상견례를 앞두고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옷은 무엇을 입지? 말은 어떻게 하지?" 라고 하면서 말이죠. 낯선 사람을 만날 때는 언제나 조마조마하고 긴장이 되고 염려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교회에 처음 나올 때는 양복을 입고 오는데, 그 다음부터는 양복은 굿바이라는 것이죠. "이 교회는 옷에 별로 신경을 안 써도 되겠네" 라고 하면서 말이죠.

왜 미리 걱정을 하는고 하니, 자기가 알고 있는 은혜에서 실패가 경우를, 그것을 과거를 따져서 "미래도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지?" 라고 하면서, 그래서 걱정을 한다는 겁니다. 즉 과거의 자기를 기본모델로 사용한 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그러니 과거의 잘나가던 자기를 모델로 여기지 말고, 자기가 미처 모르던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셨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의 미래에 대해서 걱정을 하면 결국 자기만 손해인데,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말이죠. 그렇게 모르면 걱정을 하지 않으면 되는데, 그런데 몰라서 알아보려고 또 애를 쓴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게 오히려 화를 불러일으킨다는 말이죠.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 !!

진도를 좀 더 나가보겠는데, 아는 은혜와, 사실 이것은 은혜가 아니고 오해인데 말이죠. 자기의 제한된 정보를 가지고 이 세상을 파악하려는 어설픈 시도라는 겁니다. 살아보면 다 헛되고 헛된 것들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정작 자기가 모르고 있는 것, 그게 오히려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렇게 모르고 있는 것을 성경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것을 '영의 세계'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알고 있는 것은 '육의 세계' 라는 겁니다. 육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 가는 방법은 단 하나뿐인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피' 라는 말이죠.

방금 제가 누구의 피라고 했습니까? 저의 피도 아니고 여러분의 피도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피라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시지 않고 피를 흘리지 않았다면, 그러면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끊어져 있다는 겁니다.

먼저 육의 세계를 등장시키니까 영의 세계라는 개념이 생기게 되는데, 그런데 육의 세계는 이 육을 때고 그냥 '세계'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저와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곧 단일현실이라는 말이죠.

우리 인간에게 세계는 이것밖에 없는데, 단일현실뿐이었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피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영의 세계가 따로 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 영의 세계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그냥 세계가 아니고 육의 세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육의 세계는 저주의 세계 !!

그러면 왜 예수님이 피를 흘려야 하는고 하니까, 그 피 속에는 육의 세계의 속성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즉 "육의 세계는 저주의 세계다" 라는 것이 예수님이 피 속에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게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나오는데 말이죠.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여기에 보면 예수님이 무엇을 받았다고 합니까? 저주를 받았다고 하는데, 즉 '저주' 라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잠시 살았던 그 세계가 몽땅 다 저주의 세계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았다는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난 뒤에 부활하셨다는 것은, 즉 영의 세계에 들어갔다는 것은 어디에서 빠져나왔다는 겁니까? 저주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이고, 그것은 예수님이 아닌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은 결코 자기가 짊어진 저주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기독교든 천주교든 간에, 그런 인간의 종교로는 안 된다는 말이죠. 구원이라는 것은 복음으로만 되는 것이지 교회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오직 예수님의 피로서만 가능한데, 그것을 아까 '용서' 라고 했는데 말이죠.

이중계약 !!

예수님은 출발점이 육에서 시작해서 영으로 가셨는데, 즉 하늘에 계신 분이 이 땅에 오심으로 육의 세계가 그 실체를 드러내었고, 그래서 예수님은 육에서 영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제시하셨다는 겁니다. 이것을 '새 언약', 혹은 '새 계약'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옛날 언약을 '옛 언약' 이라고 하고 말이죠.

제가 광주강의에서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이중계약' 이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육의 세계 속에 이것이 같이 들어있으니 말이죠. 옛 언약은 어떤 구조인고 하니,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인데, 즉 "해봐라. 지켜봐라. 잘하면 복을 받고 못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간에게 요구를 하실 때, 사실은 이 자체가 새로운 것이란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은 자체적으로 자기를 살릴 방안이 따로 마련되어있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에는 저주조항이 들어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를 살리는데, 거기에 왜 저주가 들어갑니까? "잘 되면 더 잘되고, 못 되도 지금 그대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니가 뭔데?

인간은 자기가 자신에게 스스로 든든한 보험이 되려고 했으면 했지, "이것을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는, 그런 법을 스스로 만들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옛 언약도 그만 듣기 싫은 잔소리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인간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남녀노소 불구하고 잔소리인데, 잔소리를 하는 인간의 입을 그만 바늘로 꿰매고 싶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신에게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니나 잘하세요!" 라고, "당신이 뭔데 건방지게 나에게 간섭하는가?"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잔소리를 하나님 쪽에서 실시했을 때, 우리 인간은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런 요구에 절대로 부응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이게 무엇인고 하니, "니가 뭔데?" 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 어떤 잔소리를 해도, 인간내부에는 이게 바탕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니가 뭔데?" 라고 말이죠.

신이시여, 고마운 줄 아세요 !!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바쳐라" 라고 하면, 인간은 "신이시여, 고마운 줄 아세요. 나니까 이 정도로라도 대우해주지,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해주지 않습니다" 라는 자기 절대성을 유지하게 된다는 겁니다. 가짜 신자들, 즉 신자인 척을 하면서 신자가 아닌 자들인데 말이죠. 교인들인데 여기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교회에 나와주었지, 헌금을 했지, 그래서 예배당을 지었지, 열심히 봉사했지, 그러니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나 정도가 되니까 그래도 하나님을 찾고 귀하게 여겼지, 다른 사람들은 어림도 없지"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잔소리는 그만 하세요!" 라는 것인데,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는 말이죠.

추석이 되면 시골에서 전화가 와서 뭐라고 합니까? "야야, 차가 많이 막힌다. 이번에는 그만 내려오지 마라" 라고 하는데, 이게 내려오라는 겁니다. 자기가 이렇게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말이죠. 처음에는 부모의 그런 관심이 좋았는데, 그런데 점점 살아가면서 그런 부모의 관심이 부담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는 전화고 뭐고 간에 가만히 있는 것이 제일 좋다는 것이죠.

그러니 부모는 자식이 주는 대로 먹으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부모는 아직도 자기가 어른인 줄로 알고, "이번에 올라갈까? 찌짐은 내가 붙일까?" 라고 하는, 그런 소리조차도 귀찮다는 겁니다. 그냥 찾아가면 고마운 줄 알고, 오지 않으면 당연한 것으로 여기라는 말이죠. 돌아가실 때까지 재산관리나 잘하면서 있으면 되는데, 다른 소리는 일절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이 자식들의 소원인데, 물론 차마 부모 앞에서 그런 말을 하지 못해서 그렇지 말이죠. 그런데도 부모랍시고 자꾸만 어른 행세를 하려고 하니 그만 잔소리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자식들은 자기가 곧 신인데, 작은 신, 즉 절대자라는 말이죠. 아무리 부모라고 해도, 그런 절대자를 감히 공격하지 말라는 겁니다.

추석이 되면 가족이 화목해야 한다고 하면서, 며느리를 불러서 남해에 가서 방을 잡아놓고 하면(?), 자식의 입장에서는 그게 얼마나 부담이 되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여러분에게는 서러운 소리인지는 모르겠는데, 부모로부터 자식을 걱정하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것, 그것이 가장 자식을 위하는 것이란 말이죠.

그리고 "아프다. 돈 없다. 외롭다" 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말이죠. 나이가 들면 당연히 그렇게 되는데, 자식들도 알고 있는 이야기이니,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고 만나봐야 어디에서 가짜뉴스를 듣고서, "문재인 대통령을 조심해야 한다" 라고 하는데, 그런 소리를 듣기 위해서 몇 시간이나 차를 몰고 올 이유가 뭐가 있느냐는 말이죠.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

그러니 매우 간단한데, 서로 간섭하지 않고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그렇게 살면 된다는 겁니다. 부모든 자식이든 간에 말이죠. 이게 인간의 타고난 절대적 존재로서의 감각이라는 겁니다. 이런 인간에게 하나님이 계약을 해버리니, 그런 하나님을 인간이 용서할 수 있느냐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을 밟아버린다는 겁니다.

종교는 신을 위한 것이 아닌데, 오히려 신의 변덕과 신의 횡포를 예방하기 위해서 뇌물을 바치는 것인데, 인간은 자기가 절대자라는 것을 결코 포기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심지어 24개월이 된 아이라도 말이죠. 말을 하나님께 영광이고 찬양이라고 하는데, 다 복을 달라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이 나타났을 때, 진짜 인간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에게 버림을 받은 하나님으로 나타났다는 말이죠. 그게 진짜 하나님인데, 인간이 누구를 버렸습니까? 하나님을 버렸는데, 즉 인간내부에는 하나님을 버리는 요소가 이미 들어있었다는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분배를 받았다는 말이죠.

아는 은혜와 모르는 은혜와의 격돌현장 !!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인고 하니, '격돌'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자기가 알고 있는 은혜와, 자기가 미처 모르는,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있는 은혜와의 격돌현장이라는 겁니다. 또한 바로 그것이 성도가 살아가는 인생사이고 말이죠.

우리는 날마다 자기 미래를 자기가 개척하려고 하는데, 그래서 자기가 자기에게 지시한다는 말이죠. 자기가 계획을 잡아서, 즉 "나는 오늘 이렇게 살겠다" 라는 것에 있어서 하나님은 후원과 협조만 해주면 되는데, 그러니 신도 자기 뜻을 따라주어야 하는데, 그래야 자기가 신에게 신의 대우를 해주겠다는 겁니다. 그러지 인간은 자기가 알고 있는 은혜에 대한 집착이 너무나 강렬하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그런 인간을 주님께서 구원하실 때는 어떻게 합니까? 그런 인간의 뜻을 항상 좌절시키게 되는데, 즉 "내가 믿는 신이 나를 화나게 만든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신을 믿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고, 그 존재를 인정해주고 나중에 천국에 만나자고 인사까지 다 나눈 관계라는 말이죠.

그러니 그 신도 이제는 어느 정도 자기의 뜻을 이해해주고 배려를 해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계속해서 자기의 뜻을 좌절시키고 만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는 도저히 동업자가 될 수 없는데, 그래서 그만 삐친다는 겁니다. "나도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해주지 않을 거야. 기분이 너무 나빠요"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은 오히려 그렇게 하라고 하는데, 신을 사랑하는 척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신을 미워하라는 말이죠. 자기가 절대자인 것을 감추지 말라는 겁니다. 여기서 잘 들어야 하는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나는 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다" 라는 것을 오히려 돋보이게 들추어내는 일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겁니다.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밖에 모른다고 하는 그 게이지를 극단적으로 높이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교회에 나감으로서, 비로소 자기는 남들에게 양보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을 더욱 더 깊이 깨달아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용가치만 있을 뿐이지, 자기가 하나님에게 복종할 의사는 없다는 말이죠. 물론 고개를 숙이는 척은 하겠지만, 소중한 것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 자기 재산이 더욱 더 소중하다는 겁니다.

더욱 더 돋보이는 '용서' !!

이것을 분명히 해주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격돌의 현장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이죠. 죄된 형상, 악마된 형상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죄인이 될 때, 비로소 무엇이 더욱 더 돋보이겠습니까? 자기가 교회에 가서 극단적인 죄인으로 폭로가 될 때 무엇이 더욱 돋보이는고 하니, 그게 바로 '용서' 라는 겁니다.

"아니 세상에, 이런 인간이 천국에 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라는 소리가 나오게 되는데, 즉 주님의 용서에 대해서 감사와 고마움이 생긴다는 말이죠. 자기가 봐도 자기는 인간도 아닌데, 그런데 그런 인간을 예수님의 희생으로, 예수님의 피로 용서를 받아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많이 용서를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는데,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말이죠.

이제 정리를 해보면, "이 영의 세계는 우리가 그냥 들어갈 수 없는데, 지금 우리가 태어난 곳이 육의 세계이고, 이 육의 세계에서 영으로 세계로 간다" 라고,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이 육의 세계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자는 말이죠.

인간과 토지 !!

이 육의 세계는 창세기 3장에서 시작할 수가 있는데, 거기에 보면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그만 떨어져 나왔는데, 그렇게 해서 인간이 사는 세계를 창세기 3장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두 글자로 그것을 '토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 토지는 알다시피 자연물인데, 이 자연물은 주인이 없다는 겁니다. 물론 지금은 토지가 주인이 있지만, 처음에는 없었다는 말이죠.

(창 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것을 황량한 광야라고 생각해보면, 그런 광야에 어떤 사람이 터를 잡고 살았는데, 사방 200km 안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데, 물론 물은 있어서 농사는 지을 수 있고 말이죠. 그러면 그 다음에 온 사람은 어디로 올까요? 이미 터를 잡은 곳에 오게 된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거기에 가면 먼저 살았던 사람의 노하우가 있다는 겁니다. 그 지역의 풍토나 날씨, 기온, 이런 것에 대해서 적절하게 대처하는 말이죠. 그래서 그들이 계속해서 살고 있었다는 겁니다. 하루만 살고 도망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살아온 것을 보니 말이죠.

그러면 그런 사람 옆에 가서 살게 되면, 그 사람이 미리 고생한 것을 통해서, 자기는 그것을 피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노하우' 라는 말이죠. 여기서 나온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의 노동에 필요한 것은 분업과 협업이라는 겁니다. 즉 "인간은 노동은 협동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자연에 인간의 노고가 들어가게 되면,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문화, 혹은 문명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 노고를 창세기 3장에서는 노동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토지에 노동을 더하게 되니 초막집이 생겼다는 말이죠. 즉 문명이 생겼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의 사람은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그 옆에 붙게 되고, 그리고 세 번째 사람도 역시 그 옆에 붙게 된다는 말이죠.

중국역사에 보면 '5호제' 라고 나오는데, 즉 중앙에 집이 하나 있고 사방으로 네 채가 있을 때, 이것을 가장 작은 단위의 사회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작은 사회' 라고 할 때는 의논을 할 수 있는 상대자가 된다는 것인데, 즉 커뮤니게이션이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토지 옆에 사람이 붙고 또 붙었으니, 그러면 '1+1+1'이 되고 이게 3이 되어야 하는데, 그게 이게 3이 아니고 4나 5가 된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노동의 가치가 제일 먼저 산 사람에게는, 이것을 이렇게 한 번 그려보겠는데 말이죠.

토지에서 위치로 !!

여기에 이렇게 사람이 살고 있는데, 물론 바로 옆에 사는 것은 아니고 약간의 거리는 두고 산다는 겁니다. 그러면 서로 의논을 하려고 하면 만나야 하는데, 그래서 만나려고 걸어온다면 토지 상의 비용이 발생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처음에 산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그 다음에 온 사람이 오게 되는데, 그러면 처음부터 산 사람은 비용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사람의 경우에는, '1+1+1'이 3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가 더 추가되어서 4가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지대(地代)'가 되는데, 즉 추가된 이익을 얻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점점 더 커져서 도시가 되면, 이것은 단순히 토지가 되는 것이 아니고, '위치'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이 중심부가 변두리보다 훨씬 더 비싸진다는 겁니다. 토지나 집 값이 말이죠. 이게 바로 사회에서 얻은 순 생산물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의 모든 노동과 투입된 자본의 이자와 같은 것은 그 기반이 무엇인고 하니, 토지가 위치로 바뀌면서 창출되는 이익인데, 그게 바로 노동과 자본의 수익이 된다는 말이죠.

자기가 혼자서 농사를 지으면 모든 수고를 처음부터 다 해야하는데, 그런데 먼저 짓고 있던 사람의 노하우에 붙게 되면 그런 수고를 덜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다음의 사람들도 거기에 붙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집은 다른 곳에 지을 수는 있는데, 하지만 의논을 하려고 하면 모여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 의논 자체가 분업과 협업인데,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달해도 사람들이 모여서 의논하는 가운데서 일이 생긴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대구시청에 40층의 건물을 짓는다고 하면, 사실 토지는 얼마 들지 않는데, 그런데 40층을 짓게 되면 그 토지 이상의 위치의 가치가 나온다는 겁니다. 그 위치가 멀리 변두리가 아니고 대구 시내의 한 가운데 있으면, 위치 값을 한다는 말이죠. 그 위치 값은 그냥 정해진 값이 아니고, 그동안 거기서 사람들이 모여서 분업과 협업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부동산 가격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류의 문명이 발달하면서 무엇을 고려하지 않는고 하니, 그 토지를 누가 준 것입니까? 토지는 자연물이고 하나님의 주신 것인데, 거기에 인간의 노동을 정해서 이익을 얻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세금을 받지 않으니까 빼고, 여기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고 하면, 그러면 임금이나 자본에 세금을 매길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합니까?

토지를 소유하겠다는, 사실은 소유하면 안 되는데, 아무튼 소유한 사람에게 막대한 세금이 부과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 토지에 대해서 한 것이 없기 때문에 말이죠. 물론 와서 의논해서 분업과 협업을 한 그 모든 가치가 이 토지에 퍼부어져 있는데, 그런데 그 토지가 갑자기 위치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자기는 그냥 중앙에 토지를 가지고 있었을 뿐인데, 거기에 상가를 짓자고 해서 짓게 되고, 그러면서 상가의 임대료가 올라가면서 토지 값도 같이 덩달아 올라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토지를 가진 자에게 불로소득이 생기게 되는데, 그러니 세금을 임금과 자본에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를 소유한 사람에게 세금을 때려야 한다는 겁니다.

헨리 조지의 '토지 공개념' !!

이게 바로 19세기 말의 미국의 헨리 조지가 주장한 '토지 단일세 제도' 라는 겁니다. 즉 '토지 공개념' 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세금은 단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교통세, 통행세, 부가세, 그런 것은 다 필요 없고, 토지세만 제대로 부과해도 국가의 모든 재원을 충당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토지를 갖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토지를 가져야 하는데, 토지를 국가가 가지는 것은 사회주의이고 말이죠.

토지를 가지기는 가지되, 거기에 세금을 왕창 때려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세금은 굳이 거둘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그는 경제학자가 아니라 신문기자였는데, '발달과 빈곤' 이라는 책을 냈는데 말이죠. 즉 "문명은 발달하는데, 즉 총생산량은 늘어나는데, 왜 사람은 빈곤한가?" 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이 세상에서 세금을 토지에게 매기지 않고 노동자나 자본가에게 매긴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게 바로 '왕' 이라는 말이죠.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의 7대 손인 '라멕'이 나오는데, 그가 가인의 요소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는 겁니다. 완전히 독재자라는 말이죠.

(창 4:23)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말하였다. "아다와 씰라는 내 말을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은, 내가 말할 때에 귀를 기울여라.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 (새번역)

원래 토지는 하나님의 것인데, 그런데 여기에 갑자기 왕이 등장해서 모든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돌려버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 토지에 노동력을 바치게 되는 종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목사님, 그것은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까?" 라고 하는데, 지금은 이게 무엇으로 바뀌었는고 하니, 토지 자본가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조물주보다 더 높은 건물주 !!

조물주보다도 더 높은 것이 누구입니까? 바로 건물주인데, 달리 왕이 아니라 옛날에는 토지를 가진 자가 왕이라는 말이죠.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부동산을 가진 자가 왕이라는 겁니다. 우리교회도 건물주가 있다는 겁니다. 지금이 민주주의 사회라고 하는데,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일지 몰라도, 경제적으로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민주주의는 없는데, 왕이 하던 짓을 자본가가 계속해서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땅을 사기는 샀는데, 좋은 위치의 땅을 사야 하는데 그만 변두리의 땅을 샀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똑같이 흙으로 된 같은 평수의 땅인데, 변두리는 평당 오천원이고 가운데는 오천만원이라는 겁니다. 아무리 땅을 파봐도 똑같은 흙으로 된 것인데 말이죠.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이런 장난을 쳤을까요? 예를 들어서, 대구의 아파트가 2억이라면 서울의 강남에 있는 아파트는 무려 20억인데, 똑같은 평수인데도 말이죠. 강남성경공부 때문에 강남의 아파트를 제가 실제로 가보았는데, 너무나 오래 되고 낡아서 대구보다 더 오히려 형편이 없는데, 그런데 20역이라는 겁니다.

똑같은 평수의 아파트인데, 그런데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습니까? 그것은 바로 '위치 값' 때문이라는 겁니다. 위치 값은 주변에서 다가오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지, 소유주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자기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가 있는데 둘이 모이고, 그리고 둘이 모이는데 넷이 모였다는 말이죠.

끊임없이 대도시로 대도시로 몰리는데, 제주도도 서울로, 광주도 서울로, 대구도 서울로, 충청도도 서울로 간다는 겁니다. 특기 고령이나 의성에 가보면 사람들이 없는데, 젊은 사람들은 다 서울로 갔다는 겁니다. 노인네들은 죽고 말이죠. 그러니 당연히 서울의 집 값은 오를 수밖에 없는데, 이게 바로 육의 세계라는 겁니다.

그래도 집을 가진 나이가 든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좀 안심이 되는데, "나는 살았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젊은 아이들은 어떻게 되던 자기는 괜찮다는 겁니다. 마치 선택을 받은 듯한 느낌이 드는데, 옛날에 왕이 그런 입장이었다는 말이죠.

시간 공개념 !!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이 육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 가시는데, 조용히 가시는 것이 아니고 육의 세계를 치고 가시는데, 그러면 어디를 치겠습니까? 그것은 왕이나, 왕이 되고자 백성들을 친다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헨리 조지는 '토지 공개념' 이라고 하면, 성경의 경우에는 '시간 공개념'의 입장을 취하게 된다는 말이죠.

이 시간 공개념은 굉장히 어려운 말인데, 왜냐하면 지나간 시간을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도 토지는 그대로 있다는 겁니다. 물론 위치에 따라서 번화가가 되기도 하고 황폐해지기도 하지만 말이죠. 고려 말의 신하인 길재가 개성을 둘러보면서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보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라고 했는데, 위치를 한양으로 빼앗기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되어도 토지는 남아있는데, 그렇지요?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시간 공개념은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이 생각하는 토지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시간을 마치 토지처럼 사용하는 하나님의 안목이라는 겁니다. 우리 인간에게서는 이런 것이 나올 수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에 '시간여행'이 도입되는데, 이 시간여행이 가능한 곳이 바로 영적인 세계인데, 육의 세계에서는 전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음이라는 한 쪽 방향으로 가기 때문에, 과거의 세계로 결코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죠.

여기서 마태복음 17장을 보겠는데, 1절에서 3절입니다.

(마 17: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마 17: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마 17: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시간으로 만든 공간 !!

1절에 보면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라고 하는데, 여기까지는 토지 공개념인데, 즉 육의 세계라는 겁니다. 그런데 3절에 보면,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라고 한다는 말이죠.

여기에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하는데, 그 당시로 봐도 모세는 1,400년 전의 사람이고, 그리고 엘리야는 800년 전의 사람인데, 그런데 놀랍게도 그 둘이 예수님과 함께 같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마치 시간이 토지와도 같다는 말이죠. 시간으로 만든 공간이라고 할까요? 아무튼 그렇다는 겁니다.

'타임머신' 이라고,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기계인데, 하지만 이런 기계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것을 물리학에서는 시간흐름의 불가역성이라고 하는데, 불가역성 한 번 진행되면 다시 돌이킬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도 다중현실의 '끈 이론'에 의하면, 자기가 사는 우주에서는 과거이지만, 옆 동네의 우주에서는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는 겁니다.

왜 식빵을 칼로 자르게 되면 여러 개가 나오지요? 그러면 우리가 사는 우주는 여러 개의 잘려진 식빵 중에서 하나의 단면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단명의 우주가 또 있는데, 거기는 같은 시간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시간을 적용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타임머신도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시간 공개념은 시간을 공간으로 보자는 것인데, 그러면 시간은 의미가 없이 날아가 버린다는 말이죠. 오직 공간만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 사두개인들이 "우리가 죽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라고 하니, "천사와 같이 된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마 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마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육의 세계를 덮친 영의 세계 !!

그러면 "천사는 몇 살입니까?" 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런 것은 묻는 게 아니죠. 천사들이 사는 동네가 영적세계인데, 그런 영적세계에서는 시간이 얼마나 흐르고 남고 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것은, 시간이 있는 육의 세계에 시간이 있는 영의 세계가 그냥 덮치는 겁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마지막 때에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겠네" 라는 것이 아니고, 토지 공개념, 즉 "토지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라고 하는 이 자연세계 속에 시간 공개념이 같이 섞여있다는 것을, 그것을 마태복음 17장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난해합니까? 황당합니까? 황당하게 느껴지면 곤란한데 말이죠. 이것은 착하게 살아서 천당에 가는 문제가 아니고, 다른 세계로 가야한다는 겁니다.

다시 복습을 하면, 육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 가는 방법은 무엇이었는고 하니, 예수님의 피였는데, 그런데 거기에는 저주가 들어있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잘못해서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속해있는 이 세계자체가 창세기 2장이 아닌 창세기 3장의 세계이기 때문에, 착하게 살던 살지 않던 간에, 그런 것은 차이가 없는데, 착하게 살아도 죽고 살지 않아도 죽는다는 겁니다.

어제 오후에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정작 술을 마시고 운전한 인간은 멀쩡하고, 거기에 바친 인간은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보기에도 참 안타깝고 당사자는 억울할 것 같은데, 하지만 그게 잘못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죽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기에 말이죠.

그러니까 너무 억울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만약에 죽는 것이 나쁜 것이라고 하면 억울하겠지만, 우리가 인간은 살아오면서 다를 그렇게 알고 있는데, 하지만 그게 잘못된 공식이라는 겁니다. "죽는 것이 나쁘다" 라고 하는 것은 마귀가 가르쳐준 공식인데, 오래 산다고 해서 그게 과연 좋은 것이냐는 말이죠. 어떤 신문기사를 보니, "어쩌면 인간은 재수 없이 200년을 살지 모른다" 라고 하던데 말이죠.

오래 살면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데, 그러니 적당히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 옆 사람에게 적당한 것은 88세 정도이고, 자기는 107세라는 말이죠. 자식들이 어떻게 고생을 하든 간에, 자기는 그렇게 살고 싶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이 얼마나 자기 중심이고 일방적이냐는 말이죠.

옛날에 왕이 설쳐도 별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각자가 다들 왕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힘이 센 왕과 힘이 약한 왕, 그 차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힘히 센 왕이 되면 똑같은데, 모든 토지는 다 자기 것이고, 여자도 다 자기 것이란 말이죠. 백성들도 다 자기가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제 나이가 겨우 30대 중반인데 그런 인간이 있는데, 저기 북쪽나라에 말이죠. 헤어스타일도 완전히 조폭인데, 소위 지도자라고 하면서 그런 행세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자기 자식이 그런 위치에 있다고 하면, 그러면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하겠느냐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비단 이것은 김정은만 그런 게 아니고 사람들은 모두 마찬가지인데, 자기가 누구인지도 전혀 모르고, 모두들 왕 짓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토지 안에 있는 인간은, 모두가 다들 그렇고 그런 인간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진짜 인간이 되려고 하면 타임머신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인간이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모세 시대가 기원전 1,400년이라고 하면, 모세는 "나는 나가 아니고, 장차 1,400년 이후에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서 있을 나다" 라고, 그것을 모세가 과연 그 당시에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생각하지 못했죠. 모세나 엘리야에게는 시간의 공개념은 없는데, 오늘날 우리도 그렇고 말이죠. 오직 주님만 아시는데, 그 주님께서 타임머신으로 1,400년 전에 모세를 그렇게 움직이셨다는 겁니다.

여기서 타임머신 이야기가 왜 나오는고 하니, 베드로전서 1장 10절과 11절입니다.

(벧전 1: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벧전 1: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예수님은 타임로더 !!

여기 11절에 "미리 증거하여" 라고 하는데, 즉 예수님이 모세 안에 미리 들어가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모세는 모르는데, 자기는 살려고 애를 쓸 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부딪치면서 일어나는 모든 결과가 무엇인고 하니,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해서 미리 보여주는 게 된다는 말이죠. 즉 모세라는 타임머신을 예수님이 타고, 예수님의 활동이 미리 거기서 일어나도록 조치를 하셨다는 겁니다.

그게 팩트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오늘날 2018년도는 어떠합니까? 아직 예수님이 재림하지 않았는데,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 속에 성령을 부어주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물론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이미 주님의 시간여행에 있어서 운반체가 되어버렸다는 것이죠.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죠.

이것을 예레미야서에 보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1장 5절에 보면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태어나는 것도 전적으로 주님의 선택에 의해서 태어난다는 말이죠.

(렘 1: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우리는 몰라 !!

우리는 왜 태어났는지 모르는데, 물론 생물학에 의하면 부모의 수정체에 의해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것은 이미 나타난 현상의 결과로서 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창세기 3장 이후에 나오는 토지 공개념에 의해서 아는 것이고, 시간의 공개념은 우리 인간들에게 있을 수 있는 개념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데 마태복음 17장에 나오는 변화산의 경우에, 거기에 몇 명이 나옵니까? 예수님, 모세, 엘리야가 등장하고 있는데, 그런데 그 장면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지켜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모두 6명이 그 산에 옹기종기 모여있다는 말이죠.

제가 또 그 산에 가보지 않았겠습니까? 그게 다골산인데, 지금은 거기에 성당이 있어서 모세와 엘리야를 모시고 있다는 말이죠. 바로 거기에 6명이 모여있는데, 시간의 공개념으로 말이죠. 즉 변화산이라는 토지 공개념에서, 시간이 공간이 되는 시간 공개념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했다는 겁니다.

여기서 마태복음 16장을 보겠는데, 27절과 28절입니다.

(마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 16: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28절에서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라고 하는데, 이들이 17장에 나오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란 겁니다. 그리고 이 왕권은 예수님의 왕권인데, 그러니 인간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이고, 또한 하나님은 인간의 왕권을 공격한다는 겁니다.

토지를 가지고 있는 인간의 대표자가 곧 왕인데, 사실상 왕에게는 그런 권한이 있다는 말이죠. 왕은 나라를 키우기 위해서 무엇을 합니까? 전쟁을 벌리는데, 그렇게 이웃나라를 침공해서 그들을 노예로 삼아서, 요즘말로 하면 노동자인데, 그들을 데리고 와서 나라의 힘을 키우면서 자기의 위치를 점점 더 높인다는 겁니다.

미국으로 튀자 !!

나라에 무슨 일이 있어서 사람들이 이민을 가면 어디로 갑니까? 가난한 나라로 갑니까? 아니면 부자 나라로 갑니까? 미국으로 가지 북한에 가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정서적이나 전통적으로 역사가 있고, 신이 도와주어서 부강한, 그런 나라로 간다는 겁니다. 선교사들도 그런 나라를 선호하는데, 그게 인간이라는 말이죠.

나라에 일이 생기면 돈이 많은 사람들은 튈 생각부터 먼저 하는데, 강남의 부자들이 나라가 편안할 때는 세금을 많이 낸다고 해서 큰소리를 칠지 몰라도, 위험한 일이 닥치면 제일 먼저 도망을 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프리카로 갑니까? 아니죠. 안전한 나라, 즉 아무런 탈이 생기지 않는 선진국으로 간다는 말이죠. 브라질이나 멕시코와 같은 나라로는 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르는 은혜에 의하면, 우리가 갈 나라는 도대체 어디입니까? 신이 보호해준다는 미국입니까? 아니면 영국입니까? 우리나라 애국가도 그러한데 말이죠. 그것이 아니고, 천국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천국백성답게 무엇을 인식해야하는고 하니, 천국의 백성다운 인식, 그게 바로 '시간의 공개념' 이라는 겁니다.

나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

지금 우리가 혼자 있습니까? 그렇지가 않지요. 한 번 적어보겠는데, "나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 계실 때, 예수님 옆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있었는데, 그렇게 세 명이기에 숫자를 맞추어서 제자들 중에서도 세 명만 불러서 올렸는데, 그들이 곧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야, 너희들이 혼자 있는 게 아니다. 이들을 봐라. 시간이 달라도 이들 모세와 엘리야는 함께 있었다" 라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로 모세 속에 그리스도의 영, 엘리야 속에 그리스도의 영, 그리고 오늘날 우리 속에도 그리스도의 영,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지금 죽어도 모세를 만나고 엘리야를 만나고 아브라함을 만나고, 그렇게 모두 다 만난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천사와 같이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는 것이라는 말이죠. 그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피흘림으로 저주에 풀려난 자들인데, 즉 용서를 받은 자들이라는 겁니다.

새로운 공동체 !!

이게 복음인데, 그래서 교회가 아니고 복음이라는 겁니다. 교회는 토지라는 부동산을 가지고 있지만, 복음은 시간이라는 부동산을 가지고 있는데, 그래서 어디에 있든지 간에 모든 사람이 한 형제가 된다는 겁니다. 복음 안에서 말이죠. 미국에 가던 영국에 가던 북한에 가던, 거기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들은 한 형제이고, 이미 시작된 천국의 백성들이라는 겁니다. 새로운 공동체라는 말이죠.

이 세상의 토지에서는 인간과 인간들이 의논을 하는데, 하지만 천국에서는 그게 아니라, 주님이 주신 값없는 은혜를 누리면서 산다는 겁니다.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왕이면서도 이 세상에 종으로 오셨는데, 즉 섬기는 자로 오셨다는 말이죠.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렇게 오셔서 자기 백성을 위해서 희생하시고, 또한 그들을 위해서 삼일만에 부활하시고, 그 부활한 효과로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심으로서, "너는 다른 사람과 달리, 다른 사람이었어!" 라고, 그것을 성령을 통해서 이제야 우리에게 알려주신다는 겁니다. 성도의 위치와 위상을 말이죠. 그러니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에 오면서 사람을 보지 말고, 눈치를 보지 말고,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주님께서 떠밀어서 왔다고 여기고, 그리고 교회에 오지 못하는 날은 주님에 오지 못하게 해서 그렇다고 여기라는 겁니다. 토요일에 침을 너무 많아서 그만 다운이 되어서 못 나왔다고 하면,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성도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닌데,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일곱 교회를 초월하는, 하나밖에 없는 교회 !!

이게 바로 일곱 교회를 초월하는 하나밖에 없는 교회인데, 그것이 에베소서 4장에 나오는데 말이죠. 주도 하나고 믿음도 하나고 세례도 하나라는 겁니다. 그러니 만약에 하나가 아니고 하면, 그것은 결코 교회가 아니라는 말이죠.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라는 겁니다.

(엡 4: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엡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엡 4: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그런데 교회가 되면 어떻게 됩니까? 교인들이 교회에 헌금을 하니까, 그것을 가지고 토지를 겁니다. 그러니 나중에는 복음은 없고 부동산만 남아서, "이것을 누가 차지할까?" 라고, 그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명분은 좋은데, "우리는 한 형제다" 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거기에 돈 문제가 걸려있다는 말이죠.

하여튼 교회에 돈 문제가 개입이 되면, 저는 교회에서 사직하고 나오는 경우가 있어도 그것은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복음인데, 왜 갑자기 관심사가 부동산으로 바뀌느냐는 말이죠. 그런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우리집에서 모이면 되는데, 우리교회에 우리집으로 말이죠(ㅋㅋ).

새털처럼 가볍게 가볍게 !!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모세가 되고 엘리야가 되어야 하는데, 베드로가 되면 안 되고 말이죠. 모세와 엘리야처럼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성령을 받았으면 말이죠. 물론 성령을 받고 난 뒤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도 모세와 엘리야 못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시간여행, 그렇게 여행을 하는 곳이란 말이죠. 이미 구원을 받아놓고 떠나기 전에 지옥구경이나 하는 셈으로, 즉 팔도유람이 아니라 지옥유람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아주 가볍게 새털처럼 가볍게 살면 된다는 말이죠.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으면, 어디에 구애받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가볍게 가볍게 살면 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말씀을 다시 보게 하옵소서. 인간들이 과연 어디에 목을 매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부동산에 모든 다 걸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악마의 시험이고 우리에게는 큰 짐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런 죄의 짐에서 벗어나서 천국의 백성이 되게 해주신 주님의 은혜에 날마다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8,10,12 새벽 1시에 마침.

미처 모르는 은혜가 있음에 대해서 감사하게 하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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