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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2 22:50:52 조회 : 177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46 - 이게 나야 이름 : 구득영(IP:203.223.97.179)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46 - 이게 나야

18,11,0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제사와 행함 !!

오늘은 교재 113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여기에 '제사법'에 대해서 나와있는데, 조상제사에 대해서만 알고 있던 한국 사람들에게 성경에 들어오면서, 그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의 제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와, 이스라엘이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성경을 처음 보았던 우리는 당연히 여기에 많은 관심을 두었다는 말이죠.

거기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둘 다 인간의 행함에서 나온다는 것인데, 물론 차이점도 있어요.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그 제사법을 만들었다는 것이고, 반면에 조상들의 제사는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물론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조상 대대로 내려왔다는 말이죠.

이 조상제사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정성인데, 즉 "지성이면 감천이다" 라는 겁니다. 정성만 지극히 해서 드리면, 하늘에 누가 있던 상관없이, 그 있는 분은 감동을 받는다는 말이죠. 바로 그러한 기대감,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나왔는데, 제사에 있어서, 그 제사 드림의 본질은 '기대감' 이라는 겁니다.

제사 드림, 즉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니 동사인데, 즉 행함이라는 말이죠. 제사를 드리는 행위를 하면 뭔가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기대감, 그것과 결부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날 기독교라고 하면 여기에 당연히 예배를 집어넣는데, 즉 예배를 드리면 어떤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감과 연결이 된다는 말이죠. 그게 조상제사나 이스라엘의 제사나 똑같은 심정이라는 겁니다.

예배를 드렸다 !!

"예배를 드렸다" 라는 것, 이것을 처음에는 교인들이 편하게 "예배를 봤다" 라고 하니 목사들이 그만 화가 나서 "예배는 구경꾼이 되어서 보는 것이 아니고 드리는 것입니다" 라고 하니, 그래서 주일 오전 11부터 12시 반까지 예배를 드린 것이 되었는데, 즉 자기 몸을 드렸다는 것이죠. 오후예배까지 드리면 조금 더 길어지고 말이죠.

하지만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결국 행함인데, 그렇게 하고 나면 일주일 동안은 뿌듯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예배를 본 것도 아니고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시비를 걸 소지를 미리 없애버렸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예배를 드린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의 행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엇인고 하니, 결국은 기대감도 있지만, "내 것을 다치게 하지 않겠다" 라는 것인데, 제사를 드림으로서 말이죠. 3을 주고 30을, 아니 60이나 100을 얻겠다는 것인데, 그러니 예배를 드림으로서 100배의 기대감을 가지고 되고, 거기에 기본적으로 자기 것을 다치지 않도록, 미리 하나님 앞에 약을 뿌린다는 겁니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화를 내는데, "저는 순수한 마음으로 드렸는데 무슨 그런 소리를 합니까? 지금 목사님이 너무 오버해서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말이죠. 지금 여러분은 전혀 그런 표정이 아닌데(ㅋㅋ), 얼마든지 그렇게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오우, 너무 찜찜해 !!

만약에 그게 아니라고 하면, 예배에 한 번 빠져보라는 말이죠. 얼마나 찜찜한지 모르는데, 월요일부터 일이 꼬일 것만 같다는 말이죠. 몰려드는 불암감, 초조감, 그러니까 제가 말이 맞다는 겁니다. 그래서 수요일 정도가 되면 벌을 받을 각오까지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배를 한 번 드렸다는 것은 그 찜찜함을 자기가 해소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것을 다치지 않게 하겠다는 이 강렬한 의지, 이것은 언제 없어질까요? 그것은 자기가 죽어야 없어지는데, 평생을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평생을 두고 우상숭배를 했다는 겁니다. 교회에 왔다갔다하면서 말이죠. 우상숭배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이고 계시고 없는데, 오로지 자기 것을 다치지 않게 하겠다고 하는 것, 그게 최우선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며느리의 뜻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죠(ㅋㅋ).

제가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단정했는데, 평생을 교회에 다녀도 우상숭배 외에는 달리 할 줄 모른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정작 성경에서 제사를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죽으면 끝난다고 했는데, 자기가 곧 우상이니, 죽으면 그 따라다니던 것도 그만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섬기는 방식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자기를 지키는 것이고, 그것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고, 그렇게 모든 것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죽으면 그게 멈추게 되는데, 그래서 미리 죽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제사를 주신 취지라는 겁니다. 죽지 않았는데, 미리 죽는다는 말이죠.

니가 죽었다고 인정해볼래?

영화배우인 신성일 씨가 일요일 새벽 2시 45분에 죽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토요일에 이미 죽었다고 신문에 났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가족들이 죽음에 대비해서 장례식장을 알아보고 했는데, 그게 이미 죽어서 알아본 것으로 여겨서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일종의 오보인데, 불과 하루 차이지만 오보는 오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하루라고 여기지 말고 26년 정도를 앞당겨서 보면, 90에 죽는다고 치고 26년을 빼보면, 그러면 74 살인데, 그러면 74살인 자기를 보고 죽었다고 하면 기분이 엄청 더럽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구약에서 말하는 제사가 바로 그것인데, 우리 몸이 죽지 않아도 이미 죽은 것이 확정된 입장이기 때문에, 그래서 "니가 죽었다고 인정해볼래?" 라고 하는 것이 제사라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가 죽었다고 인정하게 되면 어떤 효과가 있는고 하니, 자기는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미리 알아차리는 효과가 있다는 말이죠. 자기가 한 짓거리가 죽어 마땅한 짓거리라는 것을 안다는 겁니다.

그것을 두고 마태복음 9장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예수님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병이 든 자라야 의사의 고마움을 알 듯이, 그렇게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 의사로 오셨다는 겁니다.

(마 9: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마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마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의사에게는 환자가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서로 짝이 맞아야 하는데, 예수님의 의사라고 하면 우리는 환자라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이 생명이라고 하면, 우리는 이미 죽은 자라는 겁니다. 26년을 앞당겨보면 그렇다는 말이죠. 주님은 그렇게 죽은 자라고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고집이 세어서 자꾸만 자기는 살았다고 우긴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내 것은 다치지 않겠다" 라고 하는, 그런 강렬한 집념을 계속해서 유지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 된다는 말이죠. 달리 말해서, "하나님이 양보하세요. 저는 양보할 게 없습니다" 라는 의미인데, 그러니 인간 자체가 매우 독선적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놓고 뭐라고 합니까? 구약의 제사가 신약의 예배인데, "예배를 봤다", 혹은 좀 더 고상하게 "예배를 드렸다" 라고 하는데, 즉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저의 것을 건드리지 마세요" 라고, 그렇게 자기 것을 지키려고 하는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는 말이죠.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맞다고 하면, 결국 자기가 살려고 하는 그 모습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진작에 죽어 마땅한 인간들이 설치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26년 이후에 죽으나 지금 앞당겨서 죽으나 우리는 손해가 아닌데, 왜냐하면 어차피 죽도록 확정이 되었기에 말이죠.

신성일 씨가 살아난들 !!

이번에 신성일 씨가 폐암으로 죽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극복하고 암에서 낫는다고 해도, 그게 무슨 큰 이익이 있겠느냐는 겁니다. 사람이 "사는 것이 이익이다" 라고 여기는 것은, 자기가 그동안 줄 곧 살아온 것밖에 모르기 때문인데, 하지만 사도바울은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는 죽는 것이 소원이었다는 말이죠.

(고후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어쩌면 오래 사는 것이, 아니 실제로 오래 사는 것이 사서 고생하는 것일 수가 있는데, 우선 자기에게 힘들고, 두 번째는 주위 사람들이 자기 때문에 힘든다는 겁니다. 별로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닌데, 자기와,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루를 더 살면 그만큼 피해를 주는 것인데, 마치 피해를 주는 창고와 같다는 겁니다.

물론 손자를 키워주든지 해서 자식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는데, 그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고,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생산적이지를 못하다는 것이죠. 그러니 발상 자체를 바꾸라는 것인데, 그러면 발상을 바꾼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래서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 전도서가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전도서를 보겠는데, 2장 23절입니다.

(전 2:23)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인생이란, 근심, 수고, 슬픔, 쉬지 못함, 헛됨 !!

여기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라고 하는데, 그야말로 아멘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네 인생이라는 겁니다. 근심, 수고, 슬픔, 쉬지 못함, 헛됨,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면 제가 묻겠는데, 이게 진리입니까? 진리가 아닙니까? 분명히 진리인데, 그러면 평소에 우리가 하고 있는 그 마음가짐이 진리와 멀어져 있습니까? 가까이 있습니까? 이렇게 성경공부를 하고 있으니 가까이 있는 것 같지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진리와 일찌감치 멀어져 있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누구의 자존심을 긁고 말고 하는 게 아니라,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식당에 가서 신발을 잃어버렸다고 하면 기분이 나쁜데, 그런데 그것과 전도서의 본문을 비교해보면, 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평소에 신발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에 대해서 감사한 적이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무엇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고 하니, 걱정과 슬픔뿐인 것이 자기 몫이라는 것에 대해서, 자기가 애써 극구 반발하고 있다는 말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내 것을 다치지 않겠다" 라고 하는 강력한 집착이 우리에게 있는데, 그런데 여기 전도서 2장에 보면, 산다고 하는 것은 근심과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근심과 수고를 하라고, 슬픔을 맛보라고 살게 하신다는 말이죠. 이게 진리라는 겁니다.

여러분,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

오늘 아침에 인간극장을 보는데, 오랜만에 목사가 나왔는데 말이죠. 교인이 30명 정도가 되는 시골교회인데, 평소에 경운기나 콤바인도 몰아주고 한다는 겁니다. 주일이 되어서 교인들을 모아놓고 설교를 하는데, 그 첫 마디가 무엇인고 하니, "여러분,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뒤에 나오는 내용은 제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다 알겠지요?

그게 그 목사의 설교인데, 그러니 전도서 2장 23절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목사가 왜 설교를 하는고 하니, 목사로서 살고 싶다는 말이죠. 물론 예배를 주관하고 그 예배에 사람들이 참석하도록 하지만, 그러나 정작 예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냥 종교활동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예배, 즉 제사는 그것이 아닌데,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제사는 일찍 죽음에 참여하는 것인데, 그러면 어떤 결과가 주어집니까? 모든 생각을 그 제사 앞에 정지를 시켜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무엇이 날아갑니까? 자기의 모든 기대감과 희망, 그런 자기 것 지키기가 왕창 다 작살이 난다는 겁니다.

진리는, 냉혹해 !!

제사란 하나님의 엄위하신 현존하심인데, 신약으로 말하면 십자가의 피, 즉 어린양의 피 앞에 서있는 것이란 말이죠. 그렇게 피 앞에서 콤바인을 운전할 생각을 하겠느냐는 겁니다. 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하겠느냐는 말이죠. "보라, 이 죽음을!" 라는 것인데, 즉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지, 그 증거가 여기에 있다" 라는 겁니다. 그 엄위하심, 즉 차갑고 냉혹하다는 말이죠.

그게 진리인데, 그야말로 진리는 냉담하다는 겁니다. 또한 정직한데, 사람들이 호응한다고 해서 거기에 휩쓸리지 않는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데, 그 앞에서 좋다고 모여서 축구를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느 정도로 생각이 멈추어져야 하는고 하니, 자기 살아온 과거, 그리고 미래까지도 멈추어야 한다는 겁니다. 강도는 예수님에게 "오늘 주님과 함께 죽게 해주세요" 라고 했다는 말이죠. 구원받은 강도의 생각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죽기는 죽는데, 누구와 함께 죽는고 하니,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 바로 그것이 천국이고 하나님의 나라라는 겁니다. 더 살겠다는 생각이 없는데, 왜냐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주님의 은혜라는 말이죠.

왜 우리에게 잡다한 생각들이 많은고 하니, 주님의 현존하심, 즉 제사와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 생각을 그쪽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돌리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제사란 하나님의 죽이심인데, 그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곧 제물인데, 그 앞으로 우리를 오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게 제사이고 예배라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눈을 돌리게 되면 남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내 것을 다치지 말게 하소서" 라는 것만 남는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것이 자기 것이니 말이죠. 이렇게 자기 것이 있다고 우기는데, 그러면 죽게 되면 무엇이 날아갑니까? 남이 죽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죽을 때, 그러면 자기 가족이나 재산뿐만이 아니고, '나' 자체가 죽는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미리 당겨서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린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제사법인데, 즉 "죽었다고 치고 살아라" 라는 겁니다. 그러면 "죽었다 치고 사세요" 라고 하는 것과, "여러분, 행복하세요" 라고 하는 것 중에서, 어느 편이 마음이 편하냐는 말이죠.

질문하는 제가 나빠요?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까? 단풍놀이를 가더라도, 이미 죽었다고 여기고 가는 것과, 더 행복하기 살기 위해서 가는 것은, 그 차이가 엄청나다는 겁니다. 이미 죽었다고 치면, 남들이 자기에 대해서 군소리를 하는 것조차도 짐이 되지 않는데,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남들이 뭐라고 할까?" 라고 하면서 걱정을 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 것을 지키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것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거기에 돈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명예, 위신, 체면 등도 다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남들이 자기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되면, 자기가 쌓아놓은 가치들이 그만 다치게 되니까, 그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전도서 9장을 보겠는데, 12절입니다.

(전 9:12)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

홀연히 걸리는 인생 !!

여기에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라고 하는데, '홀연히' 라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우리의 매일 하는 일은 사실은 예상치 못한 것이란 말이죠.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이 홀연히 임하게 되면, 우리는 거기에 걸린다는 겁니다. 그게 인생이라는 것인데, 마치 새가 올무에 걸리는 것과도 같다는 말이죠.

이게 전도서가 말하는 "너의 주제 파악을 하라!" 라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전도서를 보고 있고, 이게 분명 진리인데, 진리가 지금 우리에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이 진리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도외시했는지, 그것을 이렇게 성경말씀을 보면서 깨달아야 한다는 겁니다. 엉뚱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았다는 것을 말이죠.

그동안 우리가 무엇을 보고 살았느냐는 것인데, 진리가 이렇게 가까이에서 소리치고 있는데 말이죠.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우리 내부에게 강하게 이 진리에 대해서 반발하고 밀어내는 힘이 여전히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냐는 겁니다.

이제 잠언서 7장을 보겠는데, 23절입니다.

(잠 7:23) 필경은 살이 그 간을 뚫기까지에 이를 것이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일반이니라

여기에도 새가 나오는데, 새가 화살에 맞고 또 그물에 빨려 들어가면서도 자기가 죽을 줄을 모른다는 것인데, 우리도 역시 모른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왕 사는 것 재미있게 살자"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살고 싶어하는 것이 관성적으로 유지되기 때문에 말이죠. 새도 그렇고, 또한 우리 인생도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게 화살에 맞고 그물에 들어간 새는 살아도 살아있는 게 아닌데, 그렇게 우리 인간도 살아있어도 역시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죽을 때 "나는 왜 죽어야 하지?" 라고 하지 말고, 항상 죽음에 노출이 되어있음을 알아야 하는데, 그러니 언제 죽더라도 거기에 대해서 반발할 수 없는 존재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도대체 누구야?

그게 진리인데, 하지만 그 진리를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죠. 그러면 누가 진리를 좋아하지 않도록 만들었죠? 누가 진리를 외면하고 건성건성 대충 살도록 만들었느냐는 겁니다. 그게 사회인가요? 과연 누가 그렇게 했는지, 그것을 찾아본 적이 있느냐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나로 하여금 엉터리 삶을 살도록 한 나의 철천지 웬수야, 어서 나와라!" 라고 하면서, 그렇게 멱살을 쥐어볼 마음을 먹어본 적이 있느냐는 겁니다. 잠언서에서 벗어나고 또한 전도서에서 벗어나도록, 누가 그렇게 촉구에 촉구를 거듭했느냐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누구인고 하니, 바로 '나' 자신인데, 자기가 그렇게 했다는 말이죠. 여기서 오늘 강의제목을 말씀드리겠는데, "이게 나야" 라는 겁니다. 바뀔 때 바뀌더라도 칠판에 크게 적어보겠는데(ㅋㅋ), 적어도 우리가 말씀을 보았다고 하면, 자기가 누구인지, 그것은 알아야하지 않겠느냐는 말이죠.

74살에 골다공증에 걸린 어느 할머니 !!

제가 아는 74살을 잡수신 어떤 할머니가 그만 골다공증에 걸렸는데, 그런데 누가 그렇게 했는고 하니, 자식들이라는 겁니다. 자식과 며느리, 그리고 손자 둘이서 그렇게 그 할머니를 부려먹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교회에도 나오지 못했다는 겁니다. 자식들도 같은 교회에 다니는데, 그래도 전화도 한 통 없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열심히 교회에 다니던 사람이 나오지 않으면, 특히 자기 부모라고 하면 연락을 하든지, 아니 직접 찾아가 보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데, 그런데 그게 일절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할머니는 당연히 화가 났는데, 그러면 그것을 두고 과연 자식 탓을 할 수 있느냐는 말이죠. 그렇게 남의 탓으로 돌릴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이게 나야 !!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 탓을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혼자 병원에 가서 골다공증 약을 타먹고 해도, 자식들이 아무도 몰라주어도, 그게 누구를 원망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 74세를 먹은 할머니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누가 그렇게 만들었던 간에 이제는 그것을 끊어버리자는 겁니다. 과거에 자기가 누구에게 사기를 당했던 도움을 받았던 간에,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명확한 사실은 골다공증에 걸려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 분통을 터트릴 대상을 찾지 말라는 것인데, 자식들이 자기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하면서 자식 탓을 하지 말고, 그리고 남의 탓을 해봐야 그것이 좋아질 문제도 아니라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바로 '나' 라는 것인데, 나이 74살에 골다공증에 걸리고, 그리고 78살에는 고관절이 부러지고 마는, 그게 곧 '나' 라는 말이죠.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엄연한 사실을 억지로 외면하면서, "내가 너에게 얼마나 잘해주었는데, 그런데 너는 왜 전화도 한 통이 없노?" 라고 하면서 군지렁 군지렁거린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망상증세라는 겁니다. 골다공증에 고관절에, 그리고 망상이라는 말이죠.

이게 나야 !!

왜 남에게 자기 인생을 맡기느냐는 겁니다. 왜 그 사람의 위로와 돌봄에 자기 인생을 맡기느냐는 말이죠. 전도서 2장 23절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분명히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라고 했는데, 그러니 우리로 하여금 헛된 인생을 살게 하셨다는 말이죠. 즉 "이게 나야" 라는 겁니다. 이게 전도서 2장 23절에 나오는 딱 맞춤형의 '나' 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 진리에 도달한 '나'를 왜 자기가 부정하려고 애를 쓰고 하느냐는 겁니다. 즉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라고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그것을 우리를 머리를 싸매고 반대를 한다는 겁니다.

아무튼 계속해서 70평생을 엉터리 교회에 다니고 있는데, 모태신앙이라고 하면서 말이죠. 제가 옆에서 보고 있으려니까 안타까워 미치겠는데, 그 교회는 가봐야 매일같이 "여러분, 행복하세요" 라고 있다는 겁니다. 74살이 될 때까지 이 할머니는 진리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는데, 설령 그 교회가 진리를 이야기했더라도, 아마 피해서 다른 교회에 갔을지도 모르겠다는 말이죠.

제가 다시 묻습니다. 전도서 2장 23절에 나오는 이 진리를 누가 피하라고 했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그렇게 교묘하게 유도했느냐는 겁니다. 바로 하나님인데, 그분이 우리에게 낭패와 실패를 주신다는 말이죠. 어제 오후시간의 설교가 그것인데, 그런 좌절과 실패가 없으면 우리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남들이 보기에 자기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여기고 있다는 말이죠.

아까 본 전도서 9장 12절에 의하면, 새가 자기가 잡힐 것을 예상했나요? 그렇지 않은데, 새는 날아가는 것이 주특기인데, 그래서 날아가다가 홀연히, 갑자기, 졸지에 죽음에 포위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전도서에서 그 이야기를 왜 우리에게 합니까? 우리는 새가 아닌데, 가수 싸이가 새지 우리는 새가 아니라는 겁니다(ㅋㅋ).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보고 새라고 하는데, 새보다도 더 나은 것이 없다는 말이죠. 버드 신세나 휴먼 신세나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라고 한다면, 자기는 이미 죽었다고 치고 진리를 접하라고, 그래서 여전히 살려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성도가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마음대로 자기를 욕하고 험담해도 괜찮다는 말이죠. 이미 죽은 놈인데, "죽은 놈 불알 만지기" 라는 명언도 있듯이, 죽은 놈에게는 그 무슨 짓을 하더라도 괜찮다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이 전혀 동의하지 않는 표정이라서 제 목소리만 자꾸 높아져 가는데, 누가 뭐라고 해도 이게 진리라는 것이죠.

잠시 꿈 이야기를 !!

제가 오늘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그게 주님의 계시라고 여기고 이야기를 하겠는데, 꿈 내용이 강의내용과 이상하게 맞아떨어진다는 겁니다. 이러다가는 신비주의자가 될지도 모르겠는데(ㅋㅋ), 꿈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경치가 좋은 산 속에 기도원이 있는데, 아주 큰 저택처럼 지어놓았다는 겁니다. 3층 건물인데, 거기 3층 본당에 신학생들이 300명 모여있었다는 말이죠.

젊은 신학생들은 없고, 대부분이 40대에서 60대인데, 거기에 50대 여자가 강의를 하는데, 그 주제가 "목사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거기에 해당되는 성경구절들을 일일이 모두 다 뽑아서 설명을 하는데, 물론 신학생들은 그 내용이 지루해서 졸고 있고, 그러면 졸지 말라고 하면서 야단을 치고 한다는 말이죠.

그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첫째, 목사는 헌신적이어야 합니다. 둘째, 목사는 인내해야 합니다. 셋째, 목사는 양들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넷째, 목사는 게으르면 안 되고 열심을 가져야 합니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강의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다들 아는 상식적인 이야기인데, 그것을 강사가 가르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다가 잠을 깼는데, 그때가 새벽 3시 정도 되었지 싶은데, 일찍 자니 일찍 깬다는 겁니다. 9시에 잤으니, 6시간은 잤다는 말이죠. 그러면 제가 묻겠는데, 이 여자 강사가 하는 말이, 이게 진리입니까? 아닙니까? 둘 중에서 하나인데(ㅋㅋ), 물론 진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살아가는 요령인데, 그 요령을 기도원에서 여자강사가 그야말로 자기 딴에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감으로 목사가 될 사람들을 가르쳤다는 말이죠.

목사는 살아야 한다 !!

그 꿈이 저에게는 너무나 귀했는데, 왜냐하면 "목사는 살아야 한다" 하는 것인데, 죽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진리는 무엇인고 하니, 자기 속에 하나님을 반박하는 공격력이 있다는 것이 진리라는 말이죠. 그러니 다른데, 다르다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진리가 없는데, 진리는 외부에서 온다는 말이죠.

그렇게 외부에서 왔을 때, 자기 속에 있는 진리에 포함되는 요소가 무엇인고 하니, 전도서와 잠언서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든, 자기는 그런 진리에 대해서 강렬하게 반항하고 공격하는, 즉 "저리가. 나는 그 소리를 듣지 않겠어. 나는 내 마음대로 살겠어" 라고 하는, 그런 힘이 나오는 현상을 발견하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의도라는 겁니다. 그러니 진리는 "내가 죄인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게 진리라는 말이죠.

다시 74세 할머니 이야기를 !!

다시 74세 할머니 이야기를 좀 더 하면, 자기가 나이가 들어서 병이 들었는데, 그런데 자식들에게는 전화도 전혀 없다는 겁니다. 자기는 평생을 자식들을 위해서 헌신을 했는데, 그런데 자식들은 어떻게 합니까? 매주 교회에서 얼굴을 맞대는데, 그런데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연락도 전혀 없다는 말이죠. 오죽 화가 났으면 우리 집에 다 전화를 했겠느냐는 겁니다.

자기는 자식들에게 부모에게 그렇게 하라고 가르친 적이 결코 없는데, 그런데 막상 현실은 무엇인고 하니, 전혀 자기 생각과는 다르다는 말이죠. 그래서 분통이 터져서 저에게 전화를 해서 하소연을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강의제목이 뭐라고 했지요? 네 글자인데, "이게 나야" 것인데, 모든 것은 남에게 핑계를 대고, 남에게 화살을 쏘아대는 그 공격력, 바로 그것이란 말이죠.

그러면 자식이 전화를 하지 않도록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하나님이 하셨는데, 그런데 "나는 골다공증에 걸리고 폐암에 걸려도 됩니다" 라고 하는 생각이 없이, "나에게 암세포가 있는데, 자식이 되어서 그것을 방치한다는 말인가?" 라고 나온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런데 그렇게 남의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는 공격력, 즉 "내 것을 다치면 나는 무조건 분노한다" 라는 것, 그것이 바로 자기가 보여줄 진리라는 겁니다.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말이죠.

성도에게는, 그것이 진리에 포함이 !!

그런 반발심과 공격력은 나이 80이 아니고 죽을 때까지 가는데, 여기 전도서에 나오는 진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인생이 슬픔과 고난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반대하는데, 짧은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도 모자라는데, 그런데 왜 슬픔과 근심거리를 주느냐는 말이죠. 그런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 "여러분, 이렇게 하시면 행복합니다. 복을 받습니다" 라고 하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고 '삶의 요령' 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니, 교회가 부흥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 데도 부흥하지 않는 교회가 있다면, 그것은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ㅋㅋ). 그것은 진리가 아닌데, 이런 사태, 이런 사고방식 자체가 비진리라는 말이죠.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도는 이런 생각자체도 진리에 포함된다는 겁니다. 말이 좀 어려운가요? "나는 진리에 관심이 없고,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관심이 있다" 라는 것, 그것이 죄가 된다는 생각을 가질 때, 그게 바로 진리에 포함된다는 말이죠. 주님께서는 그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죄 많은 우리를 계속해서 살려주시고 있는데, 즉 "너는 기껏 이것밖에 안 되는 존재다" 라는 겁니다.

율법은, 더욱 더 죄를 들추어내기 위해서 !!

그러면 전도서가 신약에 있습니까? 구약에 있습니까? 구약성경인데, 그런데 로마서 3장에 보면 구약, 즉 율법을 준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죄를, 그 죄를 들추어내기 위해서 주셨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전도서라는 말이죠.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뿜뿜 !!

우리는 전도서 2장과 9장, 그리고 잠언서 7장을 보았지만, 하지만 이것을 지킬 위인은 없다는 겁니다. 만약에 지킨다면 우리가 메시야인데, 우리는 지킬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해서 거기서 머물면 안 되고, 그렇지 지키지 못하는 이유를 알아야 하는데, 그게 바로 하나님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발하는 요소가 있더라는 겁니다.

우리 속에 그것을 늘 뿜어내고 있는데, 그것을 '뿜뿜' 이라고 하는데 말이죠(ㅋㅋ). '모모랜드' 라는 아이돌 여성그룹이 그런 노래가 있는데, 자꾸만 우리 속에서 뭐라고 합니까? "나는 행복해야 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이언티' 라는 랩 가수가 부른 노래가사에 보면, "아프지 말고 행복해야 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런 관심사에서 자기 몸을 돌린다고 하는 것, 그것이 우리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 자체가 위선자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목사고 교인이고 간에 다 위선자인데, 그러니 자기 자신에게 그 어떤 기대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위선말고 달리 나올 것은 없는 전혀 존재라는 말이죠. "아프지 말고 행복해야 돼" 라는, 그게 우리의 잠재된 희망이고 소망이란 겁니다.

아무리 성경공부를 열심히 해도, 조그마한 일이 하나 터지게 되면 그동안 했던 것은 다 날아가 버리고 마는데, 그래서 "누구야?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놈이 도대체 누구야?" 라고 하면서 튀어나온다는 말이죠. 그렇게 분노를 마구 폭발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런 분노와 폭발을 누가 먼저 맞이하는고 하니, 그것을 제물이 먼저 맞이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교재 113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제사법에 관해서 마찬가지입니다. 거룩한 제사장 나라에서 제사는 일상적인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스라엘은 그 제사도구마저 이방민족에게 다 빼앗깁니다. 이는 곧 하나님에 의해서 "그만 해라. 많이 먹었다" 라는 식입니다.

(사 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사 1: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여기 이사야서 1장 11절에 보면, 수양, 수송아지, 어린양, 수염소 등이 나오는데, 그것을 제믈로 해서 제사로 드리는 것이, 그게 인간들이 마음을 맞추어서 드린 겁니까? 그게 아니면, 하나님의 지시사항이었습니까? 분명히 하나님의 지시사항이라는 겁니다.

성경을 한 군데 더 찾아보겠는데, 시편 51편 16절과 17절입니다.

(시 51:1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시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상한 심령 !!

하나님께서는 민수기와 신명기 등에 보면 제사를 드리라고 그렇게 강조를 하셨는데, 여러 가지 방법까지도 제시하면서 말이죠. 그것을 가지고 오늘날 목사들이 뭐라고 합니까? "여러분, 교회에 나오는데 빈손으로 오면 안 됩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아마추어이니, 전문가인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성경에 보면 그런 내용도 적혀있다는 겁니다. 물론 그냥 순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을 받는다고 하니 그렇게 하는데, 교인들은 자기들 관심사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것을 다치니 않게만 해준다면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 시편 51편 16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제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요? 17절에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상한 심령은 말 그대로 부패한 심령이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냉장고에 넣어두어야 하는데, 그만 잊어버리고 넣어놓지를 않았다는 말이죠. 그래서 일주일이 지났는데, 그래서 그만 푸른 곰팡이가 피어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두고 사람들은 '부패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시는데, 그냥 오지 말고 우리 마음에 푸른 곰팡이를 피워서 가지고 오라고 한다는 겁니다. 주님도 취미가 참 특이한데, 깨끗하고 착한 심령이 아니고, 즉 "제가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제 마음이 이렇게 썩어빠졌습니다" 라는 것, 바로 그것을 가지고 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신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그 부패한 심령을 누가 마중을 나오는고 하니, 깨끗한, 즉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어린양이 되신 주님께서 이것을 인수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는데, 왜냐하면 우리 마음은 이미 부패했기 때문에 말이죠.

이미 육은 불합격 !!

어제 낮에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이미 우리의 육은 율법에 의해서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려도 불합격이고, 기도를 해도 불합격이고, 헌금을 해도 불합격이란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불합격 제품을 버리지 말고 자기에게 가지고 오라는 겁니다.

누구에게 말인가요? 그것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에게 가지고 오라는 것인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자진해서 어린양이 되셨는데, 즉 제물이 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피를 흘리셨다는 말이죠. 그러므로 그 피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왜 피를 흘려야만 하셨는지를 말이죠. 그래서 그 피 앞에 나오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인간극장에 나오는 목사님 차에 보니 십자가가 달려있는데, 하지만 그 십자가를 과연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까? 깨끗한 마음인가요? 부패한 마음인가요? 부패한 마음인데, 그러니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던 기독교를 완전히 뒤집어야 한다는 겁니다.

성경구절 하나, 간증 하나 !!

상식적인 기독교는 무엇인고 하니, 그래서 제가 꿈 이야기를 했는데, 신학생들을 모아놓고 성경말씀을 달달 외우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사상은 이것입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성경에도 나와있는데, 즉 "목사가 된 자는 인내하고 나그네를 섬기고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리고" 라고, 그런 것이 분명히 있다는 겁니다.

(딤전 3: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딤전 3: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딤전 3:4)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그런데 이런 성경구절들을 일일이 떼어 가지고, 소위 목회를 성공했다고 하는 목사 이야기를 결부시키게 되면, 그리고 그런 기독교인 부자들이 있다는 말이죠. 특히 미국의 그 유명한 록펠로는 십일조를 잘하기로 소문이 나있는데, 그런데 그가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고 하니, 다른 기업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는 겁니다. 그것을 '독과접' 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국가에서 법을 바꾸게 된다는 말이죠.

이게 그 기도원의 여자강사만이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부흥회가 다 그러한데, 자기가 강의한 것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성경구절을 다 가지고 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듣는 사람들이 지겨워하는데, 그래서 그 사이 사이에 간증이 동원된다는 것이죠. 성경구절 하나에 간증거리 하나, 물론 실패한 간증이 아니고 소위 성공했다고 하는 간증을 들이댄다는 겁니다.

그렇게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면 교인들은 은혜를 박았다고 좋아한다는 말이죠. 물론 결론은 처음부터 나와있는데, 즉 "말씀대로 살면 복을 받는다" 라는 겁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러니 진리는 없다는 것이죠. 살아가는 요령만 배워서 가는데, 그것을 진리라고 착각하면서 말이죠.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 !!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다' 라는 것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상인인데, 재벌이 무엇입니까? 다들 장사하던 사람들인데, 반도체를 개발한 사람이 재벌이 되는 게 아닌데, 잘 만들어서 그것을 잘 파는 사람이 재벌이 되는데, 그게 바로 삼성전자라는 겁니다.

장사하는 사람의 목적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이윤인데, 그래서 자본주의는 이윤을 극대화하게 되는데, 그러니 당연히 비용을 줄인다는 말이죠. 그래야 이윤이 극대화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경쟁업체를 마구 조지는데, 그렇게 해야 비용이 줄어든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본주의는 경쟁사회인데, 더불어 사는 사회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가 모든 것을 다 가진다는 것이죠. 그래서 10이 있으면 5와 5로 나누는 것이 아니고, 한 사람은 10을 다 먹고 나머지는 0이 되는데, 심지어는 마이너스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인간사회에서 비정상적인 현상인데, 욕망을 어떻게 주체를 하지 못해서 계속해서 욕망이 욕망을 낳는다는 겁니다. 그게 자본주의 사회인데, 그러니 인간의 욕망이 있는 이상 자본주의 사회는 영원하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했다는 것은 이 세상이 끝까지 왔다는 것인데, 그게 요한계시록에 나온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8장 이하에 보면, 자본주의 사회를 모든 것이 통합된 큰 성 바벨론으로 본다는 것이죠. 울산에서 그런 강의를 했는데 말이죠. 그러면 초창기 인간은 어떠한고 하니, 땅의 부(富)라고 하는 것, 자본주의에서는 이윤인데 말이죠. 그런 부(富), 즉 재산이라는 것을, 그것이 땅에서 경작을 해서 나왔다고 하면, 그것은 봐주고 인정해주겠다고 나왔다는 겁니다.

(계 18:2)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항구는 오염되었다 !!

그래서 최초의 문화에서는 제일 고상한 것이 농업이고, 반면에 제일 천한 것이 상업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자는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항구를 봉쇄하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 당시 그리스는 바다와 접해 있었기 때문에, 섬도 많고 말이죠. 그래서 "항구는 오염되었다" 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항구는 경작이 아니라 경작과는 충돌이 되는 교역을 하는 곳이란 겁니다.

땅에서 곡물을 생산하는 것이 경작인데, 그런데 교역이라는 것은 항구를 통해서 들어오는 물건을 바꿔치기 하는 것인데, 서로 남는 물건을 말이죠. 그렇게 해서 이윤을 그냥 공짜로 얻는다고 해서, 게으름뱅이, 혹은 도둑놈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유한 것이 선이 되는데, 하지만 고대의 농업국가에서는 무엇이 선이 되는고 하니, 체제질서가 선이 된다는 말이죠. 즉 땅에서 농사를 짓는 계급 그 자체가 선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부자가 선이라고 하면, 그러면 공부할 필요도 전혀 없는데, 그야말로 장사꾼들의 천지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무식해도 돈이 많은 사람이 최고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시대가 되고 마는데, 그런 시대에 대해서 옛날 사람들은 엄청 걱정을 많이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도둑놈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항구를 오염된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죠.

그래서 플라톤의 경우에, 그리스가 페르시아와 전쟁에서 항구에서 대승을 거둔 살라미스 해전을 별로 좋게 보지를 않았는데, 왜냐하면 땅에서 전투를 해야하는 육군이 바다 위에서 승리를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전쟁다운 전쟁이 아니라는 말이죠.

미국의 카터 대통령 시절에, 이란을 공격하기 위해서 비밀리에 작전을 펼치다가 그만 비행기가 고장이 나서 군인들이 다 죽고 말았다는 겁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는, 이런 것이 이상하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제대로 싸우다가 죽어야 군인답고, 그것이 선하다는 겁니다. 플라톤의 철학에 의하면 말이죠. 그런데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죽었으니, 그것은 허무한 죽음이라는 겁니다.

플라톤 당시에는 제대로 된 해군이 없는데, 배는 노예들이 젓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육지에서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바다에서 이겼으니, 그것은 이겨도 선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면서, 플라톤은 분통을 터트렸다는 겁니다. 즉 항구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죠. 물론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라는 노래도 있지만(ㅋㅋ), 아무튼 항구 자체를 봉쇄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이 더러운 사기꾼들아 !!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봉쇄까지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남아도는 물건을 교환을 해야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국가가 관리를 해서 장사꾼들이 너무 많은 이윤은 남가지 못하도록, 그렇게 조절은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항구에 있는 세관 관리들이 나쁘고, 그렇게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사기꾼들이라고 보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업을 하는 자들이 모두가 사기꾼들인데, 왜냐하면 물건 자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그 만든 물건을 팔아먹기 위해서 일을 하기 때문이란 말이죠. 그러니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인데, 그러니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농업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그야말로 사기꾼들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힘들이고 수고해서 땅을 경작하는 것이 아니라, 교역을 해서 이윤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말이죠. 그리고 교역을 하면 순수하게 하는 게 아니라, 반드시 자기의 반대세력을 제거하게 되어있고, 그래야 자기 비용이 절감되고, 광고비도 줄어들고, 그렇게 됨으로서 자기가 원하는 이윤을 더 챙길 수 있다는 겁니다.

진주에 가면 '대동공업' 이라고 있는데, 경운기부터 해서 농기구를 만드는 회사인데, 그야말로 거의 독점적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라이벌이 생기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윤이 완전히 줄어들게 되는데, 그 경쟁이 매우 심하게 되면 이윤은 고사하고 손해를 보고도 팔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출혈경쟁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우리나라에 노끈을 만드는 곳이 한 군데라고 하면 광산 김씨는 돈을 버는데, 그 사람은 노끈을 만든다는 말이죠. 그런데 너무 많으니까 별로 남기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무엇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고 하니, 도대체 정신머리가 어떻게 되었기에, 노력을 해서 돈 벌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자꾸만 수작을 부리려고 하느냐는 말이죠. 그게 추악하고 더럽다는 겁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 시대는 어떠합니까? 추악하고 더럽든 간에, 그 어떻든 간에 일단 돈만 가지면, 그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마는데, 누가 돈이 있는 사람을 감히 욕을 하느냐는 겁니다. 자기가 그런 능력이 되지 않아서, 자기가 바보등신이라서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이지, 돈만 있으면, 그 돈이 곧 정의고 돈이 곧 선이라는 말이죠.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데, 그래서 상인들을 보고 더럽다고 감히 욕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자기가 그런 상인이 되지 못해서, 그래서 돈을 제대로 벌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상인들이 부러워서 욕을 한다는 말이죠.

아직 오늘 강의의 해답을 내리지 못했는데, 그렇다고 하면, 땅을 경작해서 곡물을 내게 되면, 그것은 과연 선한 것이냐는 겁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농사를 지으면, 그것은 과연 바르게 사는 것이냐는 말이죠. 우리가 아까 진리를 살펴보았는데, 잠언서를 보고 전도서를 보았는데, 거기에 정직하게 농사를 지으면, 그것도 유기농 농사를 지으면,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게 선한 것이냐는 겁니다.

자연 + 노동 = 잉여생산물 !!

물론 그것도 옳지 않는데, 그 이유를 대겠는데 말이죠. 경제원리는 무엇인고 하니, "자연+노동=잉여생산물", 이것이 바로 공식이라는 겁니다. 자연은 대자연이고, 그리고 노동은 새나 소가 아니고 사람인데, 사람이 소를 부려도 그것은 소가 아닌 사람이 한 것이란 말이죠.

그렇게 자연과 노동이 합쳐지게 되면 잉여 생산물이 생기는데, 즉 많은 추수를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추수한 것을 인간에게 가지고 가는데, 그것을 두고 '사유재산'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게 '존 로크' 철학의 기본이라는 겁니다.

고대에서는 "토지+경작", 그렇게 해서 곡물을 내는데, 그런데 이 노동라는 것이, 그렇게 곡괭이를 가지고 땅을 파는 것만 노동이고, 주식투자를 위해서 컴퓨터 앞에서 밤새도록 환율을 보는 것은 과연 노동이 아니냐는 겁니다. 컴퓨터는 어디 공짜로 주어집니까? 그리고 그것도 배워하고, 그렇게 해서 증권사에 취직하게 되면, 수많은 투자자들의 돈을 잘 굴려주어야 하는데, 어느 회사의 주식이 좋은지, 일일이 다 살펴서 말이죠.

만약에 고객이 원하는 것이 연 5퍼센트라고 하면, 은행이자는 1,5정도 밖에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고객의 요구에 맞추어 주어야 하는데, 그것도 200만원이 아닌 200억을 들고 왔다는 말이죠. 그래서 포트폴리오를 잘 짜서 그 요구에 맞추어주었다고 하면, 그게 펀드매니저로서의 자기 신용이 되어서, 자기가 속한 증권회사에서도 실력을 인정받고, 그 돈 많은 고객도 자기의 손님으로 확보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만 금융위기가 터져서 고객의 돈이 50억밖에 남지 않았다면, 물론 고소를 할 수는 없는데, 계약자체가 손해를 봐도 감수하도록 되어있으니 말이죠. 그러면 그 손님이 다음에 그 펀드매니저에게 돈을 맡기겠습니까? 맡기지 않는데, 그러면 그는 회사를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이 이 펀드매니저에게는 노동인데, 공부를 해도 많이 해야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농사를 짓는 것만 힘이 드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라는 말이죠. 즉 "자연+노동=잉여생산물" 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바로 '사유재산' 인데, 즉 자기 것이라는 것이죠. 물론 옛날 사람들은 이것을 몰랐다는 말이죠.

법대로 하자 !!

그렇다고 하면, 이것을 오늘 말씀과 한 번 비교해보자는 것이죠. "자연+노동=잉여생산물" 라는 것이 경제공식인데, 즉 자연에 노동한 사람에게만 자기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사유재산이 돌아갈 가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재산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누가 와도 손을 댈 수가 없다는 말이죠.

이런 경제공식을 토대로 해서 법이 생기는데, 상법을 비롯해서 여기서 헌법이 생기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의 모든 법은 자기 재산을 지키고 목숨을 지키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법대로 해라"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자기 재산은 국가의 법이 보호해준다는 겁니다.

사립 유치원에 보내지 말자 !!

40억을 들여서 땅을 사서 유치원을 지었는데, 그러면 그 유치원은 누구의 재산입니까? 자기 것인데, 그러니 그것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해도, 벤츠를 타고 명품을 입고 생쇼를 해도 누가 간섭을 하면 안 됩니까? 자기가 노동을 해서 유치원을 지었다고 하면, 그런 가치를 국가가 지켜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마음대로 폐업도 하지 못하고 하고 아이들을 받아들이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다만 국가에서 예산을 지원해주었기 때문에 그만큼 감사를 하면 되는데, 그러니 그동안 제대로 감사를 하지도 못한 교육부 책임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교육부 공무원을 조사하면 되고, 그런 과정에서 유치원 원장과의 결탁이 드러나면 모두 교도소로 보내면 된다는 말이죠. 일을 그런 식으로 처리를 해야한다는 겁니다. 여론에 떠밀려서 호도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학부모들은 억울하지 하지 않느냐고 할지 몰라도, 과거에는 유치원에 보내지 않았는데, 다들 엄마가 키웠는데, 그런데 요즘은 맞벌이를 하니 유치원에 보내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사정이라는 말이죠. 지금 우리나라가 갑자기 이상해졌는데, 국가가 사유재산도 제대로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게 기본인데 말이죠.

물론 농사를 짓는 것이나 사립 유치원이나 모두가 문제가 있는데, 아까 "자연+노동" 이라고 했는데, 그게 잘못이라는 말이죠. 그게 아니고, "자연+자연=자연" 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전도서이고 잠언서인데, 모든 것을 다 흘러가는데, 즉 흐름이란 말이죠.

여기서 전도서 1장 6절과 7절을 보겠습니다.

(전 1: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전 1: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자연1 + 자연2 = 자연3 !!

여기 7절에 보면,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흐름' 이라는 말이죠. 6절에서도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라고 하는데, 즉 바람도 불고 불어서 불언 곳으로 돌아간다고 것이죠.

그러면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자연세계를 '자연1' 이라고 하고, 그러면 거기서 일하는 인간은 '자연2'가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몸도 썩어서 결국 흙으로 돌아가기에 말이죠. 자기가 자연의 일부인데, 여러분은 그런 생각을 평소에 해봅니까?

그렇게 되면 '자연1'이 '자연3'으로 변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흘러서 왔던 대로 돌아간다는 말이죠. 그게 전도서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잠시 태어났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데, 이게 진리라는 것이죠. 세상을 크게 봐야 하는데, 괜히 사립 유치원 문제로 열을 받지 말고 말이죠. 페업을 하든 말든 그대로 두라는 겁니다.

그러니 장사를 하고 공장을 돌리고 자기 몸이 아프고, 그런 것만 생각하지 말고, 이 세상을 크게 보자는 겁니다. 이 땅에서 인간이라는 자연으로 살아가게 해주신 것이 과연 누구의 은혜입니까? 당연히 주님의 은혜인데, 그런데 거기에는 목적이 있다는 말이죠.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그것은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어린양이신 예수님과 창세 전에 이미 결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을, 즉 창세 전에 이미 택해서 천국의 백성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이 땅에 알리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런 너무나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것이죠.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는 말이죠. 물론 우리가 근심을 하지만, 그것도 이 짧은 인생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서 마지막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이 땅에서의 모든 것은 주님께서 임의로 알아서 정하신다고 하는데, 자기 백성과 아닌 백성을 말이죠.

예수님 + 자연 = 천국 !!

따라서 "자연1+자연2=자연3" 인데, 그런데 여기 인간 자리에 자연2에 자연이 아닌 하나님이 들어오시는데, 자연의 일부인 흙으로 와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인간인데 말이죠. 그래서 아담, 즉 흙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흙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작업을, 그것을 자연은 하지 못하고 누가 하시는고 하니, 예수님이 하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천국은 "예수님+자연=천국"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자연세계에 들어오셔서, 거기서 하늘나라를 만들어내는 작업에 우리는 그만 말려들어서 졸지에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보다 더 복된 소식이 어디에 있느냐는 겁니다. 바로 이게 진리라는 말이죠.

그러니 독자적으로 "목사답게 살자" 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는 요령이지 진리가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죽는데, 그리스도를 증거하라고 죽는다는 말이죠.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완벽하게, 모든 것은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 그 계획의 일환으로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몸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잘남을, 자기 노력을 증거하라는 것이 아니고,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주님을 피 흘리신 노동을 하셨고, 그 노동의 댓가로 영원한 안식이라는 결과를 낳았구나" 라는 것을 증거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매일같이 바빠야 한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진리를 거역하고 반발했는지, 그렇게 하나님을 대항했는지 헤아리기조차 힘이 듭니다. 그런 죄인을 위해서 피를 흘리신,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노동과 그 결과로 인한 안식을 받아들이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8,11,12 오후 10시에 마침.

자연이 아닌 예수님을 믿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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