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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8 13:43:11 조회 : 131         
[19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60 - 말씀의 입체화 이름 : 구득영(IP:183.102.224.80)
[19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60 - 말씀의 입체화

19,09,02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38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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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벨론, 앗수르, 신바벨론, 페르시아, 이 제국들은 모두가 힘을 구축해서 버틴 국가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주의 원수'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주변에서 보여지게 되는 바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힘이 많은 자신의 나라와 힘이 조금밖에 없는 약소국가인 이스라엘과의 전쟁인 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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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원수 !!

주의 원수가 추상적이 아니라 실제적인데, 즉 이스라엘의 주변이 다 주의 원수가 된다는 겁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원수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냥 우리의 눈으로 보면, 이스라엘 주변이 모두 이스라엘과 싸우니, 당연히 그들이 이스라엘의 적이라고 여겨지는데,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들을 이스라엘의 적이 아니라 주의 적,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원수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일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는 나라라는 것인데, 그것을 하나님께선 일방적으로 '계약관계'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다른 말로 하면 언약관계인데, 즉 하나님께서 다른 나라와는 언약을 맺지 않았는데, 유독 이스라엘과만 맺었다는 겁니다.

이게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지만, 주의 원수와 관련해서 정리를 해보자는 말이죠. 성경은 이스라엘 중심인데, 왜냐하면 유일하게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나라가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난 고장이나 나라를 중심으로 해서 성경을 보는 경향이 농후하다는 말이죠. 즉 자기 국가, 자기 민족을 중심으로 성경을 보려고 한다는 겁니다.

당연히 우리는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보는데, 즉 "하나님은 우리 대한민국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 라고 하면서 성경을 본다는 말이죠. 하지만 성경을 아무리 찾아봐도 하나님이 대한민국과 계약을 맺었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데, 국가적 단위로 계약을 맺은 것은 이스라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겁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에 그 계약관계는 끝나고 말았지만 말이죠.

그러니 성경말씀에 들어가려고 하면, 일단 '내 나라', '내 가족' 중심은 포기하고 나서 들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여기 지중해 동쪽의 아라비아 반도에 위치하고 있으면, 그러면 대한민국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당시는 고구려나 삼국시대이지 싶은데, 그 이전인가요? 멀리 동아시아의 한반도에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당연히 이스라엘의 바깥에 있는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겁니다. 생각해보면 간단하다는 말이죠.

* 언약을 살리기 위해서 !!

그런데 자기가 삼국시대 사람이라고 하면 그것이 얼마나 기분 나쁘게 들리겠느냐는 겁니다. "우리와 이스라엘이 뭐가 달라서 인간취급도 해주지 않는가?" 라고 나올 것이 분명한데, 하지만 성경은 이방나라를 개로 취급하는데, 그리고 시편에도 보면 주를 모르면 저주를 해버린다는 말이죠,

이것은 이스라엘이 훌륭하다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살리기 위해서 언약이 있는 나라와 없는 나라가 차별이 된다는 것은 당연하다는 겁니다. 옛날에는 학력고사를 치고 대학에 들어갔는데, 그게 요즘의 수능시험인데, 그런데 자금은 그 수능시험을 치지 않아도 갈 수 있는데, 평소 고등학교를 다닐 때의 평가가 괜찮다면 말이죠. 그게 수시모집인데, 그래서 공부보다 더 잘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대학을 간다는 겁니다.

* 착함이 아닌 긍휼로 !!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이스라엘 이외에 다른 나라들은 "착해야 천국에 간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스라엘의 경우에도 "착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긍휼로 들어간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게 신명기 9장에 나오는데, 5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신 9:5)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여기에 보면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방나라들이 구원을 받으려고 한다면,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그 언약에 동의하고, 그 언약에 참여하게 될 때, 그 언약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제가 다시 강조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은 항상 자기 중심, 행함 중심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게 우리 인간의 본능하기에 그런 고집을 부릴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전혀 성경적이 아니라는 말이죠.

*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

창세기 12장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라고 하시는데, 그 당시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잡신들을 섬기고 있었는데, 그때 하나님이 불렀다는 겁니다. 우르는 현재 이라크인데, 거기서 터키 쪽으로 빼돌려서 현재 이스라엘이 있는 곳으로 오게 하셨다는 말이죠.

그렇게 아브라함을 불러서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그리고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창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 언약에 우선권이 !!

이것이 바로 언약인데, 즉 "방주에 들어가면 살고, 들어가지 않으면 죽는다" 라는 것인데, 이 하나님의 언약에 우선권이 있다는 말이죠. 주택청약을 할 때 영순위가 있는데, 일순위나 이순위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 영순위가 바로 하나님의 계약에 있는데, 우리 인간의 착함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면 그 다음부터 우리는 그 계약이 우리에게 어떤 혜택을 주는지, 그것을 생각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일단 자기 행함은 접어두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자기 행함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 관심사가 행함에 있어야 합니까? 언약에 있어야 합니까? 당연히 언약인데,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려고 제가 이렇게 길게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 내가 그만 실수했구나. 이제 벌을 받을 거야" 라는 생각을 가지면 안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저주도 언약 때문에 오고, 복도 언약 때문에 온다는 겁니다. 굳이 예수를 믿지 않더라도 착하게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겁니다.

* 강원도 산골의 어느 할머니 이야기 !!

여기서 또 다시 강원도 산골의 할머니가 등장할 수밖에 없는데, 그야말로 자연을 벗삼아 감자를 캐면서 순박하게 살아간다는 말이죠. 정말로 산 속에서 오직 이슬만 먹는 삶을 살아가는데, 그게 참이슬인지는 모르겠지만(ㅋㅋ), 아무튼 그렇게 산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을 보고 사기를 치라고 하면 욕을 들어먹는데, 그런 나쁜 짓을 할 기회조차도 주어지지 않다는 말이죠. 그냥 닭이나 키우면서 감자를 캐면서 살았다는 겁니다. TV도 보지 않는데, 산 속이라서 제대로 볼 수도 없다는 말이죠. 물론 휴대폰도 없는데, 그저 아침에 일어나면 밭으로 나가서 일하고 산에 가서는 산나물을 뜯는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장날이 되면 나가서 그것을 내다 판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한 번 웃어주고, 그리고 집에 올 때는 호빵을 사가지고 와서 맛있게 먹고, 그러니 그것이 무슨 죄냐는 겁니다. 어디 데모를 한 적도 없고, 그냥 태어났기에 살았다는 말이죠. 그런 사람을 보고 욕을 하면, 오히려 욕한 사람이 나쁘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 할머니는 지옥에 가는데, 왜냐하면 언약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 할머니는 나쁜 짓을 할 기회조차도 없었는데, 그냥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만 했다는 겁니다. 설령 TV가 나와서 본다고 하더라도, SBS나 MBC는 패스하고 국가공영방송인 KBS만 봤다는 말이죠.

하지만 언약에 의하면 그 할머니는 자기가 왜 죽는지 모르는데, 즉 하나님이 인간을 왜 죽이시는지를 전혀 모른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의 죄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바로 아담의 죄 때문에 죽는다는 말이죠. 그게 로마서 5장에 나온다는 겁니다.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런데 우리는 교회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언약은 생각하지 않고 남들과 비교하는데, 즉 "옆에 있는 김 집사는 어떻게 살고, 우리 목사님은 어떻게 살지?" 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렇게 같은 부류의 인간들과 대비하면서 "저 사람보다는 내가 낫다" 라는 식으로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성경은 제쳐놓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기가 더 나으면 천국에 간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즉 "30년을 믿은 저 장로보다 내가 나으니, 나는 천국에 조금은 더 넉넉하게 갈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나오는데, 정작 언약에는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다시 정리하면, 구원을 받은 사람은 "내가 언약으로부터 무슨 혜택을 입었는가?"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니 중요한 것은 혜택이라는 말이죠. 자기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있는데 그냥 혜택이 주어졌다는 겁니다. 즉 "너에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었고, 그 아브라함이 결국 나라가 되었는데, 그 아브라함의 나라가 무슨 나라입니까? 그것이 곧 이스라엘인데, 그러니 이스라엘 외에는 모두가 다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언약을 모르기 때문에 말이죠.

간단한데, 그러니 성경말씀을 보면서 자기만 생각하지 않으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챙길 것을 먼저 염두에 두고 성경을 보니 그 성경과 전혀 맞지를 않다는 말이죠. 그래서 거기에 복음을 전하게 되면 튕기게 된다는 겁니다. 매일같이 "나는요?" 라고 하는데, 즉 자기의 실익을 먼저 생각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니 자기가 성경말씀에 나오는 원수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이제 교재 139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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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마가 국가라는 형상으로 나타나는데, 그 형상을 언약에서 '짐승의 모양새' 라고 규정을 했습니다. 모양뿐만이 아니라 성질도 짐승입니다. 여분의 힘만 있으면 생리상 무조건 다른 나라를 덤벼들어서 뜯어먹게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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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 대해서, 우리가 국가를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이라고 이야기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성경을 보면서 '나'를 집어넣으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 여기서 핵심은 언약인데, 즉 "언약이 국가를 어떻게 보는가?" 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말이죠.

* 국가는 곧 짐승 !!

그게 바로 '짐승' 이라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에게 구원의 혜택을 주신 언약이 이 세상 자체를, 우리가 속한 이 나라를 짐승으로 보고 있다는 말이죠. 즉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은 짐승의 나라에서, 짐승의 권세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는데, 그런데 내가 언약으로 빼냈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제가 이 정도를 이야기하면 듣는 사람들이 거북하게 여길 수 있는데, 그것이 어떤 거북함인고 하니, "목사님, 신앙생활을 조금 조용하게 하면 안 됩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죠. 너무 요란스럽게 이것도 알고 저것도 알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조용하게 교회에 나와서 말씀에 은혜를 받고 감사하는,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물론 너무 바쁘면 교회에 좀 나오지 않을 수도 있고 말이죠.

자기 직장생활을 잘하고, 그렇게 돈벌이를 열심히 하다가, 조금이라도 어떻게 시간이 나면 교회에 나가주고, 그러면서 성경말씀도 가끔 보고, 그렇게 하는 것을 신앙생활로 쳐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에게 특별히 무엇인가를 요구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는 자기가 알아서 할테니 그냥 조용히 내버려두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왜 그것이 안 되는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원수가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원수에 우리가 속해있다는 말이죠. 왜 조용하게 신앙생활이 되지 않는지, 그 이유가 사도행전 26장 17절과 18절에 나온다는 겁니다.

(행 26: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행 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 사단의 권세에서 !!

여기 18절에 "어두움에서 빛으로"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 앞에 "그 눈을 뜨게 하여" 라고 한다는 말이죠. 눈을 뜨는데,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내가 눈을 뜨면 되잖아. 그러니 간섭하지마" 라고 하는데, 그러면 편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보면 "사단의 권세에서" 라고 하는데, 그냥 교회에 왔다갔다하게 되면 무엇을 누락시킵니까? 그 사람에게는 사단의 활동이 완전히 없는 셈이 된다는 말이죠.

성경에는 이렇게 분명히 사단의 권세, 즉 악마의 권세가 있고 그 권세로부터 벗어났다고 하는데, 그런데 정작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그런 느낌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일주일 내내 바쁘다가 마침 일요일에 좀 시간이 나고 한가해서 교회에 나왔을 뿐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악마의 권세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활동하는지, 그것이 추상적인지 실제적인지, 그게 알고 싶지도 않고 물론 궁금하지도 않다는 것이죠. 그것을 몰라도 천국에 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여긴다는 겁니다. 그냥 자기 몸 하나 편하면 그것으로 그만인데, 오늘날 현대인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사도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사도행전 1장부터 무엇을 말하는고 하니, "이 세상 전체가 악마의 권세에 눌려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게 바로 악마의 권세다" 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돌아다난다는 말이죠. 사도바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도요한, 사도베드로, 그들이 다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그들이 사도행전 내내 돌아다니면서 죽을 고생을 다하는데, 그러면서 "사단의 권세의 의식하라" 라고 외치고 있는데, 그런데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아무리 찾아봐도, 그게 신문이든 방송이든 간에 사단의 권세를 이야기하는 곳이 없다는 말이죠. 예능프로에서 조차도 그러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데, 요즘은 그런 이야기를 하면 가짜 뉴스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단의 권세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심히 수상한데, 그것은 바로 사단의 권세, 즉 짐승 그 자체일 수 있다는 겁니다. 악마가 뭔가 숨기고자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약속의 혜택이라는 말이죠. 그것을 기를 쓰고 숨기려고 한다는 것이죠.

* 이제 본격적으로 강의를 !!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강의를 시작하겠는데, 사도바울은 분명히 사단의 권세, 그 움직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단의 권세가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의 피부에 와닿는 것은 "아, 벌써 가을인가?" 라는 것인데, 그것으로 끝이라는 겁니다. 사단의 권세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는 말이죠.

우리는 사단의 권세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데, 그러니 뭔가가 분명히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그냥 자기 몸 하나 편한 것만 생각하지 다른 것은 없다는 말이죠. 즉 "이대로 살다가 죽으면 천국에 가겠지" 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뿐이라는 겁니다.

* 나타난 팔뚝 !!

예를 들어서, 제가 지금 칠판에 '손' 이라고 하는 글을 썼는데, 그러면 이것이 손입니까? 아니면 기호입니까? 그냥 기호인데, 즉 문자라는 말이죠. 그런데 쓰고 난 5초 뒤에 여기서 손이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기겁을 한다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손을 그냥 하나의 글자로만 알았는데, 그게 말씀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그게 입체적으로 튀어나오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참 무서운 일이 되는데, 그게 다니엘서 5장에 나온다는 겁니다.

(단 5:5)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그러니 바리새인들이나 우리는 무엇인고 하니, 성경말씀이 이렇게 있으면, 이게 2차원적으로 적혀있는데, 그것을 지키는 몫은 자기가 한다는 말이죠. 그게 말씀 쪽에서 튀어나올 줄은 상상도 못한다는 겁니다. 글씨가 있으면 그것을 문법적으로 따져서, 자기가 행하면 된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말씀이 하나의 입체를 이룰 줄을 전혀 예상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바벨론의 벨사살 왕이 무려 일천명의 손님들을 불러서 큰 연회를 베푸는데, 그런데 벽에 손이 나타나서 글씨를 쓴다는 말이죠. 그러면 거기 사람들과 왕이 글씨 때문에 놀랐습니까? 아니면 갑자기 벽에 나타난 손가락, 즉 그 팔뚝 때문에 놀랐습니까? 팔뚝 때문에 놀랐다는 겁니다.

그러면 경쟁이 되는데, 즉 자기가 말씀을 지키는 것과 실제로 자기가 성과를 이룬 것과 서로 경쟁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악마는 무엇인고 하니, 말씀이 살아있다는 것을 전력을 다해서 가로막는다는 겁니다. 말씀이 즉 스스로 성취하신다는 것을 감추기에 급급하다는 말이죠.

* 말씀이 육신이 되어 !!

그러면 그 말씀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그렇게 질문을 해도 되고, "말씀이 혹시 육신이 되신 적이 있습니까?" 라고 해도 되는데, 그렇게 손으로 나타난 그 말씀이 육신이 된 적이 있습니까? 있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나오는데,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라고 하는데,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겁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런데 사람들은 그분을 목수의 아들로만 보았는데, 하지만 그분 안에는 무엇이 응축되어있습니까?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 응축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모두 이룬 것을 '하나님의 의' 라고 하는데, 바로 그 하나님의 의로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 의가 없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이죠.

어제 낮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천국에서 온 서류에 보면 우리는 어떻게 기록되어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만든 서류가 아닌데, 거기에 보면 우리는 욕심쟁이, 망하는 자, 아담의 죄로 죄인된 자, 그렇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거기에 자기 자신을 집어넣으면 된다는 말이죠.

자기가 어떻게 해서 서류를 만들고 해서 적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양식은 천국에서 왔다는 겁니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었는데, 그 자체가 완전하다는 말이죠. 거기에 자기 백성의 이름이 적히면 어떻게 됩니까? 그 서류가 천국에 수납이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복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살면서 만들어온 그 인생관이 찢어지고, 천국에 적합하고 합당한 인생관으로 바뀌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복이라는 겁니다. 자기 인생관에 의하면 누가 주인공입니까? 자기가 주인공인데, 자기 잘남을 보여주기 위해서 꾸역꾸역 살아왔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천국에 갈 수 없는데, 그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짓거리라는 겁니다.

* 이스라엘을 빼면, 모두가 하나님의 원수 !!

강의 처음에도 말했지만, 이스라엘을 빼놓고 전부가 다 하나님의 원수라는 말이죠. 그런 원수에서는 언약이 없는데, 그러니 당연히 자기가 살 도리는 자기가 한다는 것이죠. 자기 잘남은 자기가 그 양식을 만들어야 하는데, 즉 "나에게 잘해주면 천국이고, 나를 해코지하면 지옥이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기준이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죠. 즉 자기에게 잘해주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겁니다. 그런 일들이 사사기에 많이 나오는데, 16장에 보면 미가 가정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말이죠. 여기서 17장 1절과 2절을 보겠습니다.

(삿 17:1)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삿 17:2) 그 어미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일천일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취하였나이다 어미가 가로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 복 받으세요 !!

여기 2절 끝에 "어미가 가로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내용인고 하니, 미가가 자기 엄마 돈을 훔쳤다는 겁니다. 그러자 엄마가 자기 아들인 줄 모르고 "내 돈을 가져간 놈은 저주를 받아라"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자기 아들인 줄 알고 나서 뭐라고 합니까? "복을 받을지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사사기 11장에 보면, 조폭두목인 입다가 나오는데, 그가 전쟁을 나가면서 뭐라고 합니까?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면, 그러면 집에 돌아와서 제일 처음 자기를 마중 나오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니 그 상황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기 집에서 키우던 개나 말이 아니라 그만 자기 딸이 자기를 마중 나왔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야말로 돌아가는 꼬라지가 말이 아닌데, 엉망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가 예언자도 아니면서 미리 예상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아니 자기가 왜 미리 예상을 합니까? 그것은 자기가 그만큼 잘났다는 의미라는 겁니다.

(삿 11:30)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게 붙이시면
(삿 11: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그런데 방금 이야기한 미가의 경우에, 자기 엄마가 처음에 자기 아들에게 저주를 했다가 다시 복으로 바꾸려고 하면, 그게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한 번 내뱉은 것은 주워담지를 못하는데, 그렇게 바꾸려고 하면 신상을 만들어서 그 앞에 제물을 바쳐야 하는데, 그게 사사기 17장에 보면 계속해서 나온다는 말이죠.

* 에이, 도둑년아 !!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납니까? 그 당시에 왕이 없었는데, 즉 언약을 총지휘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에, 자기가 하고 싶은 데로 하면서 살았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강원도 할머니 이야기인데, 그 할머니가 참으로 순박한데, 그런데 그 옆집의 할머니가 자기 집의 닭을 훔쳐간다고 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에이, 저주를 받아라"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순박하거나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것을 지키는데 있어서 인간은 빈틈이 없다는 말이죠. 그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흔적인데, 인간은 자기밖에 모른다는 겁니다. 언약을 모르는데, 그런데 희생을 한다고요? 미쳤다고 희생을 합니까? 희생은 오직 주님만이 하신다는 말이죠.

물론 봉사는 할지도 모르겠는데, 물론 서로 주고받고 주고받고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희생은 댓가가 없는데, 인간은 그렇게 댓가가 없는 짓은 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자기가 힘들게 일하면, 그 이상의 댓가가 온다는 희망을 가지고 일을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자식을 키워도 보람이 있어야 하는데, 언제나 그렇다는 겁니다.

* 예수님은 걸어다니는 말씀 !!

그래서 언약 외에는 달리 천국에 갈 길이 없는데, 그리고 그 언약이 곧 말씀인데, 그런데 그 말씀은 그냥 두루마리에 글자로서 된 것이 아니라, 친히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분이 곧 예수님인데, 그러니 예수님은 걸어다니는 말씀이란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흔적이 어떤 완성을 보게 되면, 말씀은 이미 완성이 되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을 다 이루었으면 우리는 더 이상 말씀을 지킬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이미 다 이루었으니 말이죠. 그래서 창세기 12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반대로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겁니다.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그러니 아브라함의 자손은 여러 명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뿐인데,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서,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아브라함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언약은 우리의 평소 생각과는 다른데, 언약은 입체적으로 말씀이 튀어나온 것이란 말이죠.

(갈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 스카이 캐슬 !!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게 하나의 예를 들겠는데, 구약시대에 여기에 예루살렘이 있으면, 이곳을 앗수르가 포위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앗수르가 왜 예루살렘 성을 바로 들어가지 못할까요? 여리고 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바로 쳐들어가지 못할까요?

그것은 벽, 즉 성채(캐슬)가 놓여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두고 지형적인 분리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는 반드시 성벽을 타고 올라가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비행기가 발명되었다고 하면, 이러한 성벽이 필요할까요? 필요가 없는데, 그냥 날아가서 폭탄을 퍼부으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중국의 만리장성도 그러한데, 그렇게 지형적으로 분리를 한다는 것은 입체적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냥 평면적인 대결인데, 그러니 벽으로 막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입체적이 되면, 즉 비행기가 등장하게 되면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죠. 지형적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벽으로 길을 막으면 된다는 겁니다.

* 지형적인가? 입체적인가?

그런데 입체적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땅이 아니라 하늘로 올라가는데, 그러면 하늘과 땅이 중첩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늘과 땅이 중첩이 되면, 땅에서 일어나는, 즉 땅이 도모하는 일들은, 그러한 성공과 실패는 하늘에서 보면 다 쓸데없는 일들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성(城)을 가졌다" 라고, 요즘 말로 "나는 출세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하늘에서 보면 어떻게 됩니까?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땅에서의 문제인데, 즉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 자리다. 그러니 너는 나의 자리에 들어오지마. 너의 자리는 여기서 여기까지야" 라고 하는 것들은 그야말로 입체적이 아니라 지형적인 문제라는 말이죠.

"네가 살아온 과거가 있고 내가 살아온 과거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없다" 라고 하면, 그것은 모두 지형적인 것인데, 그런데 하늘에서 보면, 달리 말해서 예수 안에서 보면 "너와 나가 하나가 된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지형적인 구분이 의미가 없는데, 즉 남녀노소, 학벌과 직업, 그런 것을 예수 안에서는 전혀 구별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구약에서는 지형적으로 이스라엘이 따로 있고 이방나라가 따로 있다고 하면, 이스라엘 바깥에는 하나님의 원수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 의해서 하늘나라에 진짜 이스라엘이 마련된다고 하면, 이 지상에서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기독교, 불교, 그러한 종교의 구분이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 땅에 내려오셔서 구경을 한 번 하고 그냥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마치 팔도강산을 유람하듯이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뭔가 일을 다 치르시고 올라가셨다는 말이죠. 여기까지는 일단 이해가 되었지 싶은데, 그렇지요?

* 다시, 사단의 권세 !!

그러니 주님께서 우리를 사단의 권세에서 뽑아내었다고 한다면, 그러면 먼저 우리 자신이 그 사단의 권세에서 어떻게 버티려고 하면서 살았는지, 그것을 충실하게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과거에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면, 물론 사단은 보지 않으니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만 보인다는 말이죠.

물론 그때 우리는 사단의 권세 아래에 놓여있다는 생각을 감히 하지를 못했는데, "이왕 태어난 인생이니 돈이나 벌어서 몸 편안히 살아보자" 라고 했는데, 그것으로 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감자를 캐면서 살았는데, 5일마다 장에 한 번씩 나가고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두고 "사단의 권세에 있습니다" 라고 하면 곤란하다는 것이죠. 그런 식으로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하면 과연 먹혀들겠습니까?

* 할머니, 마음을 곱게 써야 복을 받습니다 !!

그 강원도 산골에도 교회가 있는데, 그러면 그 교회의 목사님이 설교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최저 75세에서 최고는 95세인데, 장로님은 설교하기 시작하면 주무시기 시작해서 축도를 하면 눈을 뜬다는 겁니다. 물론 점심시간에는 교인들이 좀 분주한데, 자기 음식솜씨를 자랑한다고 말이죠.

그리고 소가 새끼를 낳으면 심방을 와달라고 하는데, 축복기도를 받아야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교인들에게 할 수 있는 설교내용은 이것뿐인데, 즉 "여러분, 마음을 곱게 써야 복을 받습니다. 그래야 여러분도 복을 받아서 천국에 가고, 여러분의 자식도 그런 복을 받습니다" 라고 말이죠.

그것말고 달리 설교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자식에게 교통사고가 났다고 하면, "그것은 부모의 책임입니다. 평소에 여러분이 기도생활을 게을리 해서 그렇습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이야기를 교회에 나오는 할머니들이 잘 알아들을까요? 알아듣지 못할까요? 너무 너무 잘 알아듣는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 이유는 "나의 착한 기도가 다른 사람에게 효과를 준다" 라고 하는 그 조직신학, 그것을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미 악마가 할머니의 마음 속에 다 담아놓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착하다고 해도, 그 마음은 악마의 것으로 가득하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교회에 제가 가서 설교를 한다면, 아니 사도가 가서 설교를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단의 권세에 눌린 삶이 바로 당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이고 예수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의 기독교라는 것은 사단의 짓입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를 설명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즉 "할머니, 당신이 죽는 이유를 아십니까? 나쁜 짓을 할 기회조차도 없었는데, 당신이 왜 죽어야 합니까? 성경에 보면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하는데, 당신이 악마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 속에 있는 죄를 향해서 저주하기로 작심을 하셨습니다" 라고, 그것 외에 달리 할 말이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 껍데기는 할머니, 속은 마귀 !!

껍데기는 할머니이고 할아버지인지 몰라도 속에는 마귀가 들었다는 말이죠. 마귀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것인데, 그것으로 계속해서 버티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언약의 혜택이 아니고 자기 행함의 혜택인데, 그것을 평소에 쥐고 살아왔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내가 잘나서 내가 산다" 라는 것인데, 다른 분의 혜택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여기가 강원도 산골의 교회라고 치고 고린도후서를 보겠는데, 오늘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인데 말이죠. 15절을 누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

그야말로 눈물이 날 이야기인데, 평생 자기가 신앙생활을 한 것이 다 헛방이었다는 말이죠. 평생을 자기를 위해서 살았는데, 그런데 사도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어떤 사람이 대신해서 죽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우리는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그것을 챙겨서 도망치기에 바쁘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정말 고맙습니다. 제 힘으로 천국에 갈 수 없는데, 주님이 이렇게 힘을 써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면 안녕히 계십시오" 라고 하면서, 자기 몸 편한 대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이 그것으로 끝이 아닌데, 그 뒤에 뭐라고 합니까?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것을 지금 한국교회에 한 번 들이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기를 위해서 살던지, 자기 교회를 위해서 살던지, 두 개 중의 하나라는 겁니다. 사실은 두 개가 같은 것인데, 자기가 다니는 교회라는 말이죠.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다니는 교회이니 그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고, 그러면 그게 자기에게 복으로 돌아온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러니 끝까지 "나를 위해서" 라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예수님에게 충성하면 그게 자기에게 돌아온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못했는데, 그게 사단의 권세가 아니면 무엇이냐는 겁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사단의 권세아래에 놓여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성경은 그게 아닌데,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라는 겁니다. 장로님이 해외여행을 자기를 위해서 간 것이 아닌데, 전도하러 갔다는 말이죠(ㅋㅋ).

그러니 아무리 강원도 산골의 교회라도 이런 설교를 하면 할머니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제 그만 가세요. 전에 계시던 목사님과는 설교가 너무 달라서 도저히 들을 수가 없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강냉이도 얻어먹지 못하고 쫓겨날 판이라는 것이죠.

예수님이 욕을 먹은 이유를 알겠지요? 그리고 사도바울이 욕을 먹은 이유를 알겠지요? 그것은 사람들이 사단의 권세아래에 놓여있기 때문인데, 즉 사단에게 완전히 길들여져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고린도후서 5장 15절은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이죠. 물론 다른 성경말씀도 마찬가지겠지만 말이죠.

이것이 바로 주의 원수인데, 그 모양새가 오늘날의 기독교와 같다는 겁니다. 겉모습은 그야말로 신앙이 좋은 사람의 모습인데, 그런데 정작 그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그 모든 것이 나를 위하여" 라고, 그야말로 완전히 악마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현상만 지적할 것이 아니라 해결점을 제시해주어야 하는데, 즉 어떻게 하면 자기를 위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겁니다. 여기서 요한복음 12장을 보겠는데, 처음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예수님이 자기에게 간섭도 하지 말고 자기 편한 대로 조용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겁니다.

* 내가 땅에서 '들리면' !!

그러나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은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 것인데, 그러면 자기를 위해서 살던 자가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면 어떤 절차가 필요한데, 그것은 이미 주님께서 마련하셨다는 말이죠. 일단 여기서 요한복음 12장 32절을 보겠습니다.

(요 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여기에 "내가 땅에서 들리면"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게 지형적이라면 거기에 장벽이 있으면 더 이상 가지를 못한다는 말이죠. 평지, 즉 이차원적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비행기가 등장하면서 이게 의미가 없어졌는데, 날아가서 포격하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땅의 문제에서는 자기 몸 하나, 즉 자기가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가면 그만이라고 여기는데, 그러면서 편하게 살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나 주님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은 땅 전체가 문제가 아니라 하늘을 마련하셨는데, 그렇게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과정을 여기 32절에서는 '들리면' 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들려서 올라간다는 겁니다.

* 땅에서는 죽었고, 하늘에서는 살았다 !!

그렇게 들리게 되면, 현재 2019년 9월 9일, 이 지점에서 이 세상이 하나입니까? 두 개입니까? 두 개가 되는데, 왜냐하면 올라간 다른 질서, 즉 주님의 영토가 따로 있고, 그리고 아랫동네가 따로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골로새서 3장에 보면, "땅에서는 죽었고 하늘에서는 살았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죽었지만 살았다는 것이죠.

(골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골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그야말로 반신욕인데, 아래의 절반은 물 속에 있고 나머지는 바깥에 있다는 말이죠. 주님이 그런 반신욕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지체로서, 남들이 보기에는 땅에 속했지만 실상은 하늘에 속했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늘에 속한 것을, 예수 안, 성령 안, 십자가 안이라고, 그렇게 표현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땅에 우리의 자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데, 왜냐하면 하늘에 속했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에베소서 2장 6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라고 하는데, 분명히 하늘에 앉혔다고 한다는 겁니다.

(엡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엡 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그러니 이 땅에는 우리의 자리가 없는데, 즉 우리가 지킬 것이 없다는 말이죠. 지킬 자식, 지킬 부동산, 지킬 나라, 그런 것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땅에서 죽은 자로 간주된다는 겁니다. 죽었다는 것은 이미 철수했다는 것인데, 그게 골로새서 3장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말이죠.

그렇게 이 땅에서는 죽었는데, 그런데 하늘에서는 어떻다는 겁니까? 살았는데, 그게 그게 자기를 위해서 산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잠시 그 생각이 날아가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그렇게 다시 돌아온다는 말이죠.

* 나 지키기 !!

그러면 자기를 위해서 산다고 한다면, 자기 몸만 달랑 사는 것이 아니고 마누라가 있고 자식이 있고, 그렇게 해서 같이 산다는 겁니다. 그리고 결혼을 시켜서 내보내는데, 그러면 또 그 자식에게서 전화가 오고 하면 손자도 좀 돌봐주고 해야한다는 말이죠. 그러다가 그 손자가 몸이 아프고 하면 또 걱정이 되는데, 그것이 바로 '나 지키기' 라는 겁니다. 시집간 딸로부터 새벽에 전화가 오면 가슴이 덜컥 하는데, 그것이 바로 '나 지키기' 라는 말이죠.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의하면, 그것은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맞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집 앞에 다른 사람이 주차를 하면 차를 빼라고 당장에 전화를 하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살아가는데 불편하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땅에서는 자기를 위해서 살아갈 수밖에는 없는데, 그것을 부정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자기는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부정하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라는 겁니다. 물론 믿음이 있는 사람은 부정하지도 않지만 말이죠.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무엇입니까? 주님에 의해서 악마의 권세에서 빠져나오기 이전에 우리가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 그것이 악마의 권세에 눌려서 살았음을 확인하고, 또한 자기는 이미 하늘에 살아있다는, 그 두 가지를 가지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평소에 자기를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을 감추거나 부끄럽게 여길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오히려 "꼴랑 이 모습이지만 구원을 받았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그래, 내가 가야지 !!

자기는 이제 믿음생활을 한답시고, "나는 이제 자식이고 뭐고 다 내 것이 아니다" 라고 하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오면 어떻게 됩니까? "그래, 내가 손자를 돌봐주어야지. 오늘 성경공부도 있지만, 그것은 다음에 하면 되고 당장에 내가 갈게" 라고 한다는 말이죠(ㅋㅋ). 마귀는 눈에 보이지 않는데,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분주한 '내 것 지키기'는 있다는 말이죠.

사도행전 26장에서 사도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뭐라고 합니까? 복음을 전하는데, 즉 악마의 권세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그것은 성령을 받지 않으면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자 듣고 있는 베스도가 사도바울을 보고 미쳤다고 하는데, 그러니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것이죠.

(행 26:19)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행 26:20) 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행 26:21)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행 26:22)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행 26:23)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행 26: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행 26:25)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사람들은 집에 있다가 교회에 가면 구원을 받는 줄 아는데, 그게 지형적이라는 겁니다. 교회에 가는 것은 이차원적이고 수평적인데,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는 말이죠.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면 교회와 교회가 싸우고 교단과 교단이 싸운다는 겁니다. 무슨 파, 무슨 파,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이것은 이스라엘과 여리고 성과의 싸움과도 같은데, 둘 다 지형적인데, 비행기가 없을 때라는 겁니다. 교회에 가면 "신천지는 출입을 금합니다" 라고 하는데, 이게 지형적 싸움이라는 말이죠. 전부가 자기 교인들을 지키고 자기 교회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짓을 한다는 겁니다. 신천지가 왜 싫은고 하니, 와서 교인들을 데리고 가면 돈을 내는 사람도 같이 없어지기에 밉다는 말이죠.

그렇게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은 단일세계로 보면 안 되고, 중첩세계, 즉 이중세계로 봐야한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는데, 친절하게도 에베소서 2장 6절을 주셔서, "너희는 하늘에 속했다" 라고 알려준다는 겁니다. 물론 주님이 시켜서 그렇게 했지만 말이죠. 그런데 그 고마움을 모르는 우리의 고집도 보통은 아니라는 겁니다.

* 예수님이 하늘에 올라갔다 !!

계속해서 해보겠는데, 그런데 여기서 무엇이 어려운고 하니, 하늘에 속했다고 하면, 이렇게 땅과 하늘이 갈라져있다는 말이죠. 우리는 하늘에 속했다는 것을 죽어서 가는 줄로 오해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이방민족적 사고방식인데, 전혀 언약적이 아니라는 말이죠.

"예수님이 하늘에 올라갔다" 라고 하는 것은, 이미 같은 몸이 있어도 하늘과 땅을 둘 다 걸치고 있는 권한자가 된다는 겁니다. 이 땅에 우리는 자리는 없는데, 그런데 우리가 이 땅에서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없는 자리가 새로운 사건으로 말미암아서 자리가 마련이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사건이 없어지면 우리의 자리도 같이 없어진다는 말이죠.

좀 어렵지요? 쉽게 설명을 해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인데, 그분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분은 머리를 둘 곳도 없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자리는 없다" 라는 말도 되고, 그리고 "예수님을 품을 수 있는 여건은 이 땅에 전혀 없다" 라는 의미도 된다는 말이죠.

(마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영원히 이 땅의 사람의 고착시킬 수 있는 조건은 이 땅에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의 완성에 의하면 이 세상은 짐승의 세계라는 말이죠. 그 짐승의 세계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은 짐승에게 맞아서 죽었는데, 그리고는 들렸다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다른 질서로 가심으로서, 이 땅은 멸망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죠.

* 악마가 악마를 침으로서 !!

그런데 그 다음으로 우리가 이해해야하는 게 무엇인고 하니, 악마가 악마를 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떠나고 난 이 세상이 어떻게 멸망하는고 하니, 예수님은 악마가 악마를 치는 방법을, 즉 자기가 자기를 침으로 같이 와르르 무너지는 방법을 예수님이 사용하신다는 말이죠.

* 아마겟돈 전쟁 !!

요한계시록 16장 16절에 보면, '아마겟돈' 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게 아마겟돈 전쟁이라는 겁니다.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고 그냥 추상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말이죠. 그런데 이게 13절에 보면, 개구리가 나오는데, 이것은 출애굽 때의 그 재앙이라고 보시면 된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세 더러운 영, 즉 용의 입, 짐승의 입, 거짓 선지자의 입이 나오는데, 이것을 소위 악마의 삼위일체라고 하는데, 악마의 형태라는 겁니다. 즉 보이지 않는 악마가 지상에 형태를 드러낼 때는 이런 형태로 나타난다는 말이죠. 이들이 이 세상의 임금에게 가서 그들을 모이서 전쟁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계 16: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계 16:14)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계 16:15)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계 16:16)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이것이 구체화된 것이 요한계시록 9장 14절 이하에 나오는데, 여기에 유브라데 강이 나오는데, 그것은 이 강을 중심으로 해서 양쪽 진영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이것은 지형적이란 겁니다. 입체적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러니 하늘이 없는 상태에서 땅만 가지고, 그 땅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지, 그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하늘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말이죠.

물론 불교와 같은 세상 종교에서도 하늘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인간들이 상상한 하늘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신 곳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가신 곳이라야 완전한 하늘로 인정해줄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을 이루셔야 그게 하늘나라라는 겁니다.

* 하늘나라는 예수님의 자리 !!

그 이전까지는 하늘나라가 없는데, 물론 하나님은 계시지만 하늘나라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다 이루셔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늘나라는 예수님의 자리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는 예수님에게 적합한 환경, 즉 예수님에게 적합한 시간과 공간이 동원되는 나라가 하늘나라라는 말이죠.

반면에 이 땅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아니라, 인간에게 적합한 시간과 공간이라는 겁니다. 특히 그 공간이라는 것은 유브라데 강을 중심으로 한 것인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에덴동산이 그 유브라데 강에 있었다는 겁니다. 즉 땅의 시작점을 유브라데 강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계 9:14)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계 9:15)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더라
(계 9:16) 마병대의 수는 이만 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계 9:17) 이같이 이상한 가운데 그 말들과 그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주빛과 유황빛 흉갑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계 9:18) 이 세 재앙 곧 저희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을 인하여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계 9:19) 이 말들의 힘은 그 입과 그 꼬리에 있으니 그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
(계 9:20)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계 9:21)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

* 이 땅의 발원지, 유브라데 강 !!

그리고 에스겔서 47장에 보면 주님께서 천국을 지형적으로 설명을 하시는데, 거기에는 성전이 있고 거기에서 물이 넘쳐서 흘러나온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창세기 2장에서 에덴동산을 처음 만들 때도 보면, 강이 4개 나온다는 말이죠. 넷째 강이 유브라데 강인데, 아브라함이 살던 곳도 그 동네라는 말이죠. 아브라함을 거기서 불러내었다는 겁니다.

(겔 47:1)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창 2:10)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 2: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창 2:12)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 2: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창 2:14)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주님은 알파요 오메가인데, 즉 처음부터 끝인데, 그렇게 시작과 끝이 만나면서 완성이 된다는 말이죠. 인간은 시작과 끝에 갇혀있다는 겁니다. 지금 제가 계속해서 '자리'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 땅에는 우리의 자리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을 사건을 일으키게 되면, 일시적으로 우리의 자리가 마련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 몸이 사라지면 그 자리도 없어진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자식들, 그리고 아파트나 주식과 같은 것들이 모두 다 일시적이라는 겁니다. 즉 있다가 없어진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식이 먼저 죽고, 사업이 부도가 나고 해도 너무 섭섭해하면 안 되는데, 그것도 다 사건이라는 겁니다. 사건이 자기 자리인 것이지, 자기 자리에 사건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즉 사건이 우선이라는 것이죠.

* 다만 사건이 생기면 !!

이 땅에는 우리의 자리가 없는데, 다만 주께서 허락하시면, 즉 사건이 생기면 우리는 여기 지묘동에 살던지 그렇게 살면 된다는 겁니다. 오늘은 이 동네에 살고, 몇 년 뒤에는 저 동네에 살고, 그게 사건인데, 그러다가 죽으면 없어지고 말이죠. 우리의 본향은 이미 준비가 되어있는데, 그런데 그것을 우리를 위한 자리가 아니고 예수님을 위한 자리인데, 즉 영원한 축복의 나라인 천국이 있다는 겁니다.

다만 이 땅에 사는 것은 임시적인 거처인데, 그래서 우리는 나그네라는 말이죠. 임시적인 거처가 없다고 해서 지옥에 가는 것처럼 여기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대인관계도, 즉 자녀와 관계도 다 일시적인데, 천국에 가면 다른 관계로 엮이고 만다는 것이죠.

그러니 오직 성령을 받은 자만이 같은 패밀리이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가족은 가족도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는데, 반드시 언약적으로 봐야지 자기 중심으로 보면 안 된다는 말이죠. 모든 것은 언약중심이라는 것이죠.

* 다시, 아마겟돈 전쟁을 !!

다시 아마겟돈 전쟁으로 돌아와서, 그게 유브라데 강을 중심으로 해서 양쪽진영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청군과 백군으로 한다면, 그러면 어느 쪽이 주님 편입니까? 없는데, 왜냐하면 주님은 떠나버렸다는 말이죠. 어떤 분이 "마지막 대환란 때에 우리가 어떻게 버틸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했는데, 그래서 제가 골로새서 3장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이미 이 땅에서 죽은 자입니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아니 죽은 자가 무슨 버티고 말고 할 것이 있느냐는 말이죠. 뭔가 계속해서 버티겠다는 것은 자기의 자리가 있다는 것인데, 그러나 죽은 자는 자기 자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관에 집어넣는데,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죠.

요즘은 자식들이 울지도 않는다고 하는데, 그게 맞다는 겁니다. 울면 무엇을 할 겁니까? 죽으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장례식을 하고 나서 각자의 유산과 조의금이나 칼 같이 챙기면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는 아무리 형제라고 해도 다시 만날 이유가 없는데, 예수도 믿지 않는데 무슨 가족이고 패밀리냐는 겁니다.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는데, 죽었는데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것이 죽은 자의 모습인데, 죽은 자가 싸움은 무슨 싸움을 하느냐는 것이죠. 더 이상 지키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주님의 뜻도 모르고 자꾸만 자기를 위해서 뭔가를 하려고 한다는 것이죠. 주님은 자기를 위해서 살지 말라고 했는데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버티려고 한다는 겁니다.

* 내 자리 지키기 !!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이 세상에서 '내 자리 지키기' 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자기 교회 지키기, 자기 아파트 지키기, 자기 자식 지키기, 그렇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악마의 권세에서 살아가던 행세고 모습이라는 겁니다. 바로 여기에서 건짐을 받았는데,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해서 자식이나 아파트를 가져다 버리라는 말이 아니고, 다만 그런 것은 주님께서 일시적으로 주셨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 살 때까지만 허락하셨다는 말이죠.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모르는데, 그런데 왜 이 세상에 미련을 두면서 울고불고 하느냐는 것이죠.

그러한 자기 자리 지키기가 구원을 받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데,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마겟돈 전쟁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러면 천사가 와서 3분의 1을 작살내는데, 이것이 요한계시록 9장 16절에 보면, 그 숫자가 이만 만(이만×만), 즉 이억이라는 겁니다.

* 재림이란, '이 땅에 예수님을 위한 시간과 공간은 없다' !!

그러면 나머지는 어떻게 됩니까? 그 다음의 재앙에 의해서 역시 날아간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떠난 세계를 작살내겠다" 라는 겁니다. 그 마지막 작살내는 시점이 재림인데, 그러니 재림의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내 자리는 여기에 없다" 라는 것인데, 즉 "이 땅에 예수님을 위한 시간과 공간은 없다" 라는 것이 재림의 취지라는 말이죠.

그러니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좋아하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자기 자리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인데, 그래서 "주여, 지금 당장에 오셔서 작살을 내어도 저는 대환영입니다. 짝짝짝!",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인사가 무엇인고 하니, '마라난타', 즉 "주께서 곧 오십니다" 라는 것이었다는 말이죠.

요한계시록에 보면 초대교회가 환란을 받는데, 그러면 그렇게 환란을 받게 하는 것에는 무기가 있다는 겁니다. 즉 "너, 까불면 죽어" 라고 하는 무기가 있는데, 그게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온다는 것이죠. 지금 주의 원수, 즉 사단의 권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말이죠. 그렇게 공격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땅에서 자기 것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인데, 그렇게 되면 차차 공격을 하는 셈이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주님이 떠난 마당에, 이 세상에서의 아마겟돈 전쟁이라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 애를 쓸 때에, 그게 바로 아마겟돈 전쟁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요한계시록 13장을 보겠는데, 16절에서 18절입니다.

* 육백육십육 !!

(계 13:16)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계 13: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계 13: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

육백육십육, 그 짐승들에게 협박을 받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자기 자리가 있기 때문인데, 이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죠. 아마겟돈 전쟁이란 말만 나오면, 그만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목사님, 이제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면 목사는 뭐라고 합니까? 당연히 "교회에 돈을 바치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조그만 더 풀어보면, "이란이 이스라엘을 칠 때가 마지막 전쟁인데, 그때 유브라데 강 저쪽이 이스라엘 쪽이고 그 반대편이 이란 쪽인데, 그러면 이제 각 나라들이 동참하면서 마지막 전쟁인 3차대전이 발발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도는 이기게 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죠.

* 반발하는 인생 !!

하지만 이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되면, 결국 이것은 골로새서 3장 3절의 말씀인 "나는 이 땅에서 죽었고" 라는 것을 정면으로 부정하게 된다는 겁니다. 악마는 반발인데, "악마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하는데, 악마는 반발로 나타난다는 말이죠. 인간이 왜 반발합니까?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주님, 이것은 나의 것이니 손대지 마세요" 라는 겁니다. 그렇게 반발할 때, 그것이 바로 악마의 힘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항상 짜증난 얼굴로 돌아다닌다는 겁니다. 혹시 누가 자기 것을 흠집이라도 낼까 싶어서, 혹시 누가 자기 자존심을 건드리고 자기 재산에 손이라도 댈까 싶어서 말이죠. 그렇게 자기 것이 날아가는 것이 무서운데,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 것은 자기가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사실은 자기 것이 아니라 주의 일을 하라고 주님이 임시적으로 허락한 것인데, 그런데 계속해서 자기 것이라고 우기니, 결국 감사함이 아니라 반발과 원망이 튀어나온다는 말이죠.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는데, 그 감사는 그만 날아가 버리고, 불평과 불만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내부가 불안하기 때문인데, 안정되지 못하고 뭔가 출렁거리고 있다는 말이죠.

* 흔들흔들, 궁탕궁탕 !!

왜 옛날에 비포장도로를, 그게 택시도 아니고 버스도 아닌 것이 있는데, 그것을 뭐라고 하지요? '합승' 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타고서 대구에서 경산까지 가면 얼마나 흔들리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머리를 천장에 박는 것은 기본이고 말이죠. 그와 같이 우리의 인생이 흔들리고 들이박고 한다는 겁니다.

누가 건드리지 않아도 자기 혼자서 그러한데, 아침에 눈만 뜨면 흔들흔들, 궁탕궁탕, 그렇다는 말이죠.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데, 우울증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반발하는 증세인데, 제발 자기 것을 건드리지 말라는 겁니다. 누가 건드린 것이 아닌데, 자기 혼자서 흔들리고 마귀에게 협박을 받아서 그렇다는 말이죠.

우리의 생명은 주님의 반신욕인데, 우리는 이 땅에 있어도 그 소속이 어디입니까? 주님이라는 겁니다. 어제 설교제목이 '허망' 이었는데, 무엇이 허망하다고 했습니까? 소속이 없는 것이 허망하다는 말이죠. 그러니 어디에 소속되었다는 그 안정감이 없다는 겁니다. 자기 인생을 자기가 돌봐가면서 살아가는데, 그러니 아무도 자기를 돌봐주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이죠.

그게 바로 불안정인데, 그리고 허망함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소속이 있는데, 고엘, 후견자, 즉 보혜사가 있다는 말이죠. 그러나 이방인들은 어떻습니까? 자기 인생을 자기가 알아서 살아가야 하는데, 믿음이 없으니 자꾸만 믿고자 한다는 겁니다. 불안해서 말이죠.

* 말씀의 입체화 !!

그러니 '말씀의 입체화' 인데, 이게 오늘의 강의제목이라는 겁니다. 말씀 자체가 의도적으로 요한계시록의 말씀대로 돌아간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말이죠. 그렇게 보여주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아하, 내가 저런 세상이 전부인 줄로 알고 살았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세상이 눈에 보이는 이 세상 하나뿐인 줄 알고 있었다는 말이죠. 주님이 들려서 간 세상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어려서부터 자기가 자기 눈으로 본 이 세상이 전부였다는 겁니다. 즉 한국이 있고, 중국이 있고, 미국이 있고, 일본은 없고(ㅋㅋ), 그게 전부였다는 말이죠.

'역사의 흔적' 이라는 TV프로가 있는데, 제목은 정확하지가 않지 싶은데, 사람들이 여러 명이 모여서 역사를 다시 재구성을 해본다는 겁니다. 그러면 역사를 연구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게 과연 언약적입니까? 아니면 비언약적입니까? 이제 오늘강의를 다 들었으니, 여러분이 한 번 답변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 역사는, 땅의 역사 !!

비언약적인데, 왜냐하면 역사라는 것은 그 앞에 무엇이 붙습니까? 어디까지나 땅의 역사라는 말이죠. 그런데 요한계시록 9장과 16장에 의하면, 땅의 역사는 이미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역사인데,이 아마겟돈 전쟁이라는 것은 매매를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돈은 굴려야 하는데, 그런데 짐승에게 절하지 않으면 그게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것을 계속해서 지키기가 힘들어진다는 것인데, 악마는 그것을 잘 안다는 말이죠. 그래서 "너는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먹고 살기가 힘들어" 라고 협박과 공갈을 하는데, 그런 것을 매일같이 받으니까 어떻게 됩니까? 이 땅에서 자기 자기를 지키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자처해서 불안과 근심이 쌓이게 되는데, 온갖 정신병은 혼자 다 뒤집어쓰고 살아간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밥이 있으면 감사하면서 맛있게 먹으면 되는데, 그런데 그렇게 밥을 먹으면서도 자기 몸무게를 걱정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여전히 자기 것을 지키기는 것밖에 되지 않는데, 그러니 밥을 먹는 순간에도 근심걱정이 떠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의 생각은 항상 자기 것을 지키는 것에서 시작해서 그것으로 간다는 겁니다.

* 주님의 '추방작업'과 '회수작업' !!

이제 정리하는 의미에서 이것만하고 마치겠는데, 우리는 그 이전까지는 자기 것이 있는 땅의 세계를 전부로 여겼는데, 그런데 주님께서 들려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 하늘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주님만 계십니까? 우리도 함께 있습니까? 골로새서 3장에 의하면, 우리도 함께 있다는 겁니다. 우리의 머리는 여기에 있고, 발은 땅에 믿고 산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괴로운데 주님은 가만히 있을까요? 아니면 무슨 일을 할까요? 무슨 일을 한다는 겁니다. 그게 두 가지인데, 즉 추방작업과 회수작업이라는 말이죠. 먼저 추방작업은 무엇인고 하니, 구원을 받지도 못할 자가 구원을 받으려고 자꾸 오는 것을 내쫓는다는 겁니다.

이들은 복음을 알아듣지 못하는데, 언약의 혜택 때문에, 즉 고린도후서 5장의 말씀에 의하면, 주님의 대신 죽으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갈 수 없다는 원칙이 수립되었다는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그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거부하기 때문에, 그 말씀이 그들이 천국에 오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밀어내는 작업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이 합쳐져야 전도인데, 교회에 오라고 하는 것만이 전도가 아니라, 오지 말라고 하는 것도 전도라는 말이죠.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갈라디아서 1장 8절에서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했는데, 전도를 하면서 왜 저주라는 말을 끄집어내느냐는 말이죠.

(갈 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갈 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갈 1: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것이 바로 추방작업인데, 천사라고 해도 안 되는데, 그러니 자기도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일하신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거기에 자기가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죠. 자기가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작업을 하시는데, 그 첫째가 추방작업이라는 말이죠. 오지 말라는 겁니다. 즉 생명나무를 갈라놓은 것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죠.

그리고 두 번째가 회수작업인데, 그럴 때는 우리를 반드시 무엇으로 만드는고 하니, 탕자로 만든다는 겁니다. 탕자는 자기 기여도가 전혀 없는데, 오히려 다 말아먹었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자기 기여도가 제로인데, 그러니 언약의 혜택이 100퍼센트 그대로 다 남아있다는 겁니다. 자기 쪽에서 한 것이 없기 때문에, 섞일 것이 없다는 말이죠.

헌금을 하든 전도를 하든 그 무엇을 하든, 그게 전혀 구원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헌금을 하고 전도를 하면서 우리는 여전히 헌금하고 기도하는 죄를 짓고 있다는 말이죠. 따라서 추방작업과 회수작업, 이게 둘 다 시행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3장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 자들만이 복음을 알아듣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입체적으로, 즉 지형적이 아닌 입체적으로 주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는 말이죠.

(행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만 일하는 줄 알았습니다. 주님은 그냥 팔짱만 끼고 계시는 줄 알았는데, 하지만 매일 같이 일하심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것을 지키겠다는 것이 사단의 협박으로 인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 성령의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9,9,18 오후 2시에 마침.

코코야, 잘 가라 !!
 첨부파일 : 19대구강의('전도서'속의그리스도)60-말씀의입체화.hwp (63.8K), Down:5
 구득영(IP:183.♡.224.80) 19-09-18 13:43 
늦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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