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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5 23:10:01 조회 : 1231         
[14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14 - 복음과 가난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14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14 - 복음과 가난


                                                            14,08,18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왜 가난하다는 것이 화가 나는가?


오늘은 교재 55페이지를 하겠는데, 그 제목이 '3강, 준비된 가난' 이라고 되어있는데 말이다. 이렇게 '가난' 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만약에 자기가 가난하다고 하면 그만 화가 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 가난하다는 것이 절대적 의미가 아닌, 상대적 의미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만약에 자기가 무인도에 혼자 사는 로빈슨 크루소우라고 하면 가난을 느끼겠는가? 그냥 개미를 보고 "개미야, 너는 왜 이렇게 못사노?" 라고 하는 정도이지 말이다. 자기와 비교할 대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 가난이 발생한다는 것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인간인가? 인간들인가?


그렇게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비교가 되어버리면, 여기서 어떤 일이 생기는고 하니, "인간이 과연 있는가?" 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들'은 있는데, '인간'이 있느냐는 것이다. 인간들은 여러 사람을 두고 이야기하는데, 이 세상에는 로빈슨 크루소우 같이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산다고 하면, 인간들만 있지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와 비슷하게 생겼으니 "우리 인간이라고 해버리자"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그렇게 인간이 등장한다고 하면, 거기에 병행해서 무엇도 등장해야하는고 하니까, "인간은 똑같다" 라는 것이 성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가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똑같다' 라는 것이 성립되려면 가난도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10명이 있어서 모두가 똑같이 살아간다고 하면 가난이 성립되지 않는데, 그런데 가난은 어떤 경우에 성립하는가? 10명이 다같이 인간들이 아닌 인간이라고 하면, 누구는 잘살고 누구는 못사는, 그런 것이 없어지면 가난도 없어지는데 말이다.


그런데 10명 가운데서 누구는 잘살게 되니, "저 인간은 뭐고, 가난한 나는 무엇인가? 저놈이 인간을 대표하는가? 아니면 내가 인간을 대표하는가?" 라는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으로 시작했다가 결국 인간들로 끝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인간이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막상 현실 속에서는 인간은 없고 인간들만 있다는 것이다. 즉 "니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라는 것만, 그런 경계 대상만 있는 것이지, "우리는 똑 같다" 라는 것은 사실 추상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여기서 추상이라는 것은, 허구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왜 가난하면 화가 나는가?" 라는 것인데, 그것을 따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기를 타인과 비교함으로서 화가 난다고 방금 이야기를 했는데, 그러면 화가 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타인을 없애면 되는가? 그렇게 타인을 제거하면 일이 해결되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자기 입장에서 남을 죽이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외로워서 살지를 못하는데, 그러니 도대체 어떻게 하면 되느냐는 말이다. 같이 있으면 비교되고, 없으면 외롭고 말이다. 부부의 경우에도, 같이 살면 매일 같이 싸우고, 없으면 서럽고 그리워지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몰라 !!


그래서 제가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모른다" 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존재인지를 말이다. 본인이 그것을 도저히 감 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철학에서는 '처분 불가능' 이라고 하는데, 즉 자기가 자기 입맛에 맞게 관리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자기가 알아서 임으로 말이다.


그렇게 처리를 함에 있어서 본인이 본인을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남은 보기 싫으면 자기가 이사를 가든지 하면 되는데, 그렇게도 하기 싫으면 죽여버리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은 어떻게 하느냐는 것인데, 그 극단적인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자살이라는 말이다. 도저히 힘이 들어서 살지 못하겠다는 것인데, 기분이 좋아서 자살하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힘이 들어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살은 결코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 이 세상 전부가 죽음 속에 놓여있어 !!


예를 들어서, 다니엘의 세 친구는 자기들이 자살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느부갓네살 왕이 무엇이라고 했는가? 우상에게 절하지 않으려면 불 속에 들어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느부갓네살 왕의 그러한 조치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 전부가 죽음 속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왕이 백성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세계라는 것은, 백성은 그 속에서 빠져 나오지를 못한다는 것인데, 갇혀 있다는 말이다. 그 왕이 없으면 다른 왕이 또 그 자리를 차지하고 말이다. 그렇게 인간은 외부에서 주는 죽음에 노출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에게 있어서 마지막 협박수단이 무엇인고 하니, "너를 죽여버리겠어" 라는 것이란 말이다.


◈ 죽음이 예수님에게 위협이 되겠는가?


그런데 그런 죽이겠다는 협박이 천사에는 어떻게 되겠는가? 천사에게도 위협이 되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면 악마에게는 어떠한가?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예수님에게 어떠하겠는가? 예수님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는데, 그러면 예수님은 왜 죽음에 대해서 겁(?)을 내셨는가? 왜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은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라고 하셨느냐는 말이다.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 특수한 죽음 !!


여기서 예수님의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닌 어떤 임무를 띠고 있는 죽음인데, 그것을 어제 낮 시간에 '특수한 죽음' 이라고 했는데 말이다. 그게 개인의 사적인 죽음이라고 하면 굳이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지만, 그게 아버지의 모든 언약을 이루면서, 즉 아버지의 저주를 받은 채로 죽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죽음은 특별히 아버지에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은 채로 감당해야하는 것인데, 그것이 힘들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가난을 생각하면서, 왜 자꾸만 이런 저런 소리를 해야만 하는고 하니, 사람들은 남이 망했다고 하면 좋아한다는 것이다. 남경필이 망했다고 하면 기분이 좋다는 말이다. 남이 안 되는 것은 그렇게 좋은데,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무엇인고 하니까, 남이 잘되는 것이 자기에는 위협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그런 존재라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항상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마치 스펀지와도 같아서 자기를 방어하려고 하는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슨 소리를 들으면 혼자서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발가벗은 채로, 외부에 노출된 채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가난 자체가 화가 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가난이라는 것이 남과의 비교에서 오는 것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가난이 무엇과 직결되는고 하니까, 가난하고 더 가난하고 더욱 더 가난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게 되면 결국 굶어서 죽는다는 말이다.


◈ 내가 죽는 것이 왜 화가 나는가?


여기서 정리해보면, "가난은 화가 난다" 라는 것인데, 기분이 나쁘고 말이다. 왜 그렇게 화가 나는고 하니, 이 가난이 죽음과 연결이 되어서, 마치 가난이 죽음이 주는 협박과 같이 느껴져서 그만 화가 난다는 말이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왜 죽는 것이 화가 나느냐는 것이다. 남이 죽으면 그렇게 화가 나지 않는데 자기가 죽는 것이 왜 화가 나느냐는 말이다. 협박으로 여겨지고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인데, 죽음에 노출된 정도가 아니라 "너는 죽는다" 라는 말을 듣는 순간 왜 그렇게 기분이 나쁘고 불안하고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초조하고 식은땀이 흐르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철학자들이 이 문제를 연구했지만, 그만 초반부터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누가 이렇게 손으로 자기를 밀면 "어어!" 라고 하면서 밀리는데, 그러면 왜 그렇게 밀리는가? 그것은 누가 힘으로 에너지를 주었기 때문에 자기가 밀린다는 것이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누가 옆에서 밀면 밥을 먹다가도 밀리고 만다는 것이다. 밥값이 없어서 주인에게 끌려나갈 수도 있고 말이다.


◈ 당신은 참 못생겼다 !!


그런데 밥을 먹고 있는데 누가 옆에 와서 "참 못생겼다" 라고 해서, 그래서 그만 밥을 먹는 것을 그만 두고 밖으로 나가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도대체 누가 떠민 것인가? 여기서 학자들이 난감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이란 것이, 그게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적인 것으로 "떠밀면 밀린다" 라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그런데 누가 기분이 나쁜 소리를 한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스스로 현장을 떠난다고 하는 것은 신체로, 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물리적인 것 말고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인데, 즉 정신적인 요소도 함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함께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데, 그것이 도대체 어디에서 박혀있느냐는 말이다. 정신이 우리의 몸 어느 구석에 들어있느냐는 말이다. 정신이 어디에 있는가? 두뇌세포에 있는가? 하지만 아무리 단층촬영을 해도 그것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포만 있지 정신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과학자들은 과학을 통해서 뭔가 발견을 하려고 열심히 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는데, 하지만 과학자들이 열심히 할 때는 연구비가 많이 책정될 경우에만 그렇다는 것이다. 돈이 개입되니 연구를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자기 아이가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자랑을 하는데, 그런데 알고 보니 이번에 성적이 좋으면 컴퓨터를 바꿔준다고 해서 그렇게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 자기야, 벌써 헤어질 시간이야?


이것뿐만이 아니고, 학자들이 연구를 해보니 모르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는 말이다. 빚쟁이하고 같이 앉아있으면 5분만 있어도 두 시간이나 된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하고는 어떠한가? 애인이 부대에 면회를 와서 만나는데, 약속된 두 시간이 이미 지났는데 마치 5분이 지난 것만 같다는 것이다. 시간이 그야말로 후딱 지나간다는 말이다.


특히 여자의 경우에는 사랑에 빠지면 피부 미용에도 엄청 도움이 된다고 하는데, 하지만 꼴도 보기 싫은 남자와 같이 살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 나이보다도 훨씬 더 늙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학자들이 밝혀 내지를 못하는데, 제 아무리 의학적으로 어쩌고저쩌고 해도 말이다. 


요즘은 엉겅퀴가 간에 좋다고 하면서 난리인데, 그것이 창세기 3장에 의하면 저주의 풀인데 말이다. 그리고 마태 주스나 차를 마시면 지방이 분해되어서 살이 빠진다고 하는데, 아무리 그렇게 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사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특별히 무엇을 먹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즉 현미를 먹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에는 어떤 다른 요소가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다른 요소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데, 하지만 그 다른 요소와 신체적 요소를 결합할 본드가 없는데, 즉 그것을 설명할 연결고리가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 인간이 죽음의 위협을 받는데, 그렇게 죽음의 위협을 받으니 가난을 생각할 때도 그냥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나를 위한' 가난은 두렵다 !!


여기에서 일단 결론을 내려보면, 오늘 강의에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가난이 두렵다" 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란 말이다. 이렇게 가난이 두렵다고 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데, 왜 그런고 하니, 앞에 무엇이 그만 생략되어있는데, 우리 자신도 모르게 말이다. 그것이 바로 "나를 위한 가난은 두렵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여기에서 이야기고 싶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성경에서 말하는 가난의 의미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데, 성경에서는 "주를 위해서 가난해야 한다면 가난해야 한다" 라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이 생각하는 가난과 부는 무엇인고 하니, 전부가 다 누구를 위한 것인고 하니, 자기를 위한 것이란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나를 위해서 부자가 되고 싶은데, 그런데 나는 왜 남들보다도 가난한가? 그래서 나는 화가 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화가 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 전제로 깔리는고 하니, 세상만사가 누구를 위해서 존재해야한다는 말인가? "오직 나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있어줘야만 돼!" 라고 하는, 그렇게 너무나 자기 중심적인데, 자기가 창조주도 아니면서 말이다. 


그런데 창조된 모든 것이 누구만 잘되면 된다는 말인가? 자기만 잘되면 좋은 세상이라고 우기고 싶은 악한 본성이 우리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든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하겠는가? '나를 위해서' 라는 것을 '주를 위해서' 라고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바꾸지 않은 이상 해답은 없다는 것이다.


◈ 자기 마음대로 사는 인간은 없어 !!


제가 철학자들이나 과학자들을 언급했는데, 그들은 '주를 위해서' 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출발점은 무엇인고 하니, 각자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진리를 알아야 된다고 한다는 말이다. 정신과 물질이 어떻게 결합하는지, 그것을 알기만 하면 행복하겠다는 것인데, 해답이 거기에 있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백 날을 해보라는 것이다. 해답이 나오는지 말이다. 왜 해답이 나오지 않는가? 이미 그 출발 자체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기 때문인데, 그러니 인류역사의 모든 학문과 진리는 마귀의 손아귀에서 '정답 없음'으로, 그렇게 해결이 안 되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복음도 모르고 교회도 안 다니고 하는 것이, 그게 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지금도 불안에 떨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왜냐하면,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해답이 없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으세요" 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자기가 거부하고 또 거부하는데, 그것은 해답도 모르면서 고집을 부리는 것인데, 꼴에 또 고집은 있어서 말이다. 정답도 모르면서 "그냥 사는 대로 살아가지 뭐" 라고 하는데,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온 해답이 무엇인가? 해답은 애초부터 없었다고 하면서, 남들처럼 사는 것이 해답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 그러면 복음은 무엇인가? '모종 붓기' !!


이참에 다시 정리해보면, 복음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죄수로 가장해서 감옥에 자기 백성을 찾아오셨는데, 하나님이 죄수로 가장에서 여기 감옥에 자기 백성을 찾으려고 말이다. 자기 미리 정해놓은 자기 백성만 찾아서 데리고 가시는 방법이란 말이다.


그러면 자기 백성은 어디서 나왔는가? 그것을 모종을 부어놓은 것과도 같은데, 주인도 없는 텃밭에 고추모종을 심어놓으면 나중 가을에 고추를 따는 것과도 같다는 말이다. 왜 자기가 따는가? 자기가 심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자기 백성을 왜 거두어 가시는고 하니, 주님께서 직접, 본인이 심어놓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시작과 그 모든 주체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다는 것인데, 바로 그것을 알고 고백하는 자가 곧 주의 백성이란 말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참 쉬운데, 그동안 40년 동안 목회를 하고 했어도 이렇게 하니 참으로 쉽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는 모종을 부어놓고는 그 모종이 다 자랐다고 하면서 거두어 가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모종을 하늘나라에 부어놓으신 것이 아니라 지옥과 같은 이 땅에다가, 죄 많은 이 세상에 부었는고 하니, 자기 백성이 커 가는 모습이 예수님의 주되심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다. 그런데?


성경에는 분명히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따지고 보니 어떠한가?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미리 예수님의 생애를 대신해서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죄인으로 태어났다가 천국에 가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성도가 그렇다는 것은 오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죄인으로 오셨다가 죄인의 손에 맞아죽었는데,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의인으로 탈바꿈을 하셔서, 그것도 그냥 의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의인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자로 부활하셔서, 자기 능력을 썩히지 않고 성령을 통해서 마음껏 발산하셔서 말이다.


◈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 !!


그렇게 자기가 모종을 부어놓은, 그래서 자기를 위하여 미리 자기의 생애를 살아야만 했던 자들만을 골라서 자기 백성이라고 하면서 데리고 가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하나님의 형상'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 이렇게 6글자인데, 이것을 2글자로 하면 '인간' 이라는 것이다.


오늘 강의처음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인간은 있다고 했는가? 없다고 했는가? 인간은 없고 인간들만 있다고 했는데, 그런 인간들이 자기들끼리 공통점을 모아서 어떻게 했는가? "우리 스스로 무엇으로 부를까? 돼지도 그렇고 코끼리도 그렇고, 그래 인간으로 부르자" 라고 해서, 그렇게 해서 인간으로 불렀다는 말이다. 


그렇게 인간으로 불렀는데, 그 속에서 차이와 차등과 불평들이, 즉 가난한 자와 부자가 구분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구분이 되면 "그래, 니는 부자이고 나는 가난하다" 라고 하면 참 좋겠는데,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난하면 화가 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참 희한하게도 무엇이라고 하는가? 우리는 가난하면 화가 나는데, 왜 화가 나는고 하니, 자기가 죽음과 더 가까이 간다는 위협이나 협박을 느끼기 때문에 화가 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보게 되면 부자가 더 어리석은데, 부자는 기분이 너무 좋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주변에는 자기보다도 가난한 사람들밖에 없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게 저주를 받은 자들만 있다는 것이다.


부자는 그렇게 기분이 좋으니, 자기가 죽어가면서도 기분이 좋은 채로 죽는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인데 말이다. 기분 좋게 지옥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부자이기 때문에 주제파악이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 다시 정리하면 !!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알기 쉽게 정리하면, 하나님께서는 가난조차도 우리 자신을 위한 가난은 존재하지 않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즉 "너를 위한 가난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말이다. 이 세상 전체를 보고 "나는 가난합니다" 라고 하지 말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주께서 가난하게 하셨습니다" 라는 말은 하되, 그 앞에 항상 '나' 라는 것을 집어넣지 말라는 것이다.


◈ 왜 '비바 파파' 인가?


왜 '비바 파파' 인가? 왜 아버지 찬양이냐는 말이다. 그게 직역하면 '교황님 만세' 라는 의미인데, 그게 왜 문제인고 하니, 이 세상은 주님을 위해서 있는데, 즉 주님을 위해서 인간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을 빼면 인간들끼리만 인간이 되는데, 하지만 인간들끼리는 어떠한가?


인간들끼리는 불평등과 차등이 있기 때문에, 인간들끼리 생각하기를, "우리 가운데 점잖고 훌륭하고 연세가 많고 낮은 자에게 관심을 두는 어떤 특출한 신앙적인 영웅을 하나 만들어내게 된다면, 비록 우리는 불평등 속에 있고, 그리고 못나고 죄도 지었지만, 우리 가운데서 대표로 뽑은 파파는, 그 영적인 아버지는 우리와는 달리 진리의 말씀대로 살아갈 것이다" 라고 하면서, 그것 자체로서 대리만족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비바 파파' 라고 부르짖음으로서 자기 불평등을 다소 마나 위로 받고 해소하게 되고, 인류에 대한 어떤 희망과 같은 것을 여전히 만들 수 있다고 하는 가능성의 즐거움,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그게 '교황님 만세'의 의미라는 것이다.


◈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


그런 교황 찬양을 보고 느끼는 것이 예수님 찬양인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라고 했는데, 그게 '비바' 라는 의미가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오실 메시야를 그렇게 환영해놓고 결국 어떻게 했는가?


(요 12: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요 12: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요 12: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요 12: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사실은 예수님이 그들을 외면하셨는데, 그 당시 분위기가 뭔가 나라가 될 것 같았는데, 로마에서 해방이 되고 말이다. 자기들이 구약에서 문자적으로 기대했던 그 영광스러운 솔로몬 나라가 드디어 가시권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누구의 도움으로 말인가? 자기들이 기대했던 메시야의 도움으로 말이다. 그래서 그분이 그분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그만 그 메시야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기대한 메시야는 누구를 위한 메시야란 말인가? 자기 자신을 위한 메시야인데, 그러면 비바 파파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당연히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란 말이다. 즉 자기 마음이 위로를 받기 위한 교황환대였다는 것이다.


◈ 신약에서의 가난은, 자기 의가 없기 때문에 !!


인간은 상대적으로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음을 언급했는데, 여기서 좀 더 나가보면, 물론 어렵겠지만 말이다. 보통 구약에서 가난은 재물이 없을 때를 이야기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구약을 지나서 신약에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자기 의가 없기 때문에 가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 당시에 악한 자인데도 불구하고 부자가 되었으면 어떻게 되는가? 유대사회에서 용납하지를 않았는데, 하지만 그렇게 악함에도 불구하고 부자가 된 자가 성경에 나오는데, 그가 곧 '삭개오' 라는 것이다. 키기 작아서 나무에 올라간 세리 삭개오 말이다.


여러분들은 국회의원들이 부자가 되니 기분이 좋은가? 나쁜가? 좋지를 않은데, 국회의원이란 권력도 쥐고 돈도 쥐고 있으니 말이다. 너무 욕심이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너무 많이 가지면 상당히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다. 국회의원이 국민에게 봉사한다는 생각도 없이, 자기 혼자 출세의 가도를 달렸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든다는 말이다.


그런데 김연아가 광고도 많이 찍고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면 기분이 나쁜가? 그건 아닌데, 금메달을 따서 많은 위로를 받았으니 말이다. 자기가 번만큼 뭔가 국민들에게 해준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면 할 수 없고 말이다. 하지만 국회의원들은 국민들에게 뭔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등쳐먹기만 하는데, 그런데 부자가 되니 당연히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다.


◈ 바리새인들의 경우에 !!


바로 그것을 감안해서 바리새인들은 '절대의', 즉 절대적인 자기 의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구축했는고 하니, 이런 것도 참 어려운데 말이다. 그것이 곧 "고난을 받아라. 그러면 복을 받는다" 라는 것이다. 물론 사두개들은 좀 다른데, 그들은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는데, 즉 일종의 귀족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돈이 없으면 귀족이 될 수 없는데, 돈을 주고 귀족도 살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사두개인들은 그들은 돈도 있고 권력도 있는 자들인데,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처음 듣습니까? 제가 여러 번 이야기를 했는데,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그러니 고난을 자처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율법을 왜 지켜야만 하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자기 의를 위해서인가? 당연히 자기 의를 위해서인데, 그러니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의를 축적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직결이 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들어보니 오늘날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성화와 똑같지 않은가? 자기가 착하게 살아야 할 이유는, 그렇게 착하게 살면 그만큼 하나님에게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 우리 아이가 몸이 아파요. 그래도 감사해요 ??


저도 과거에 교회에 다니면서 그렇게 많이 배웠는데 말이다. 그리고 강대상에 올라가면 흰 봉투가 놓여있는데, "심방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우리교회에는 없는데(ㅋㅋ), 그런데 그 중에서 특히 어떤 것이 있는고 하니, "우리 아이가 몸이 아파요" 라고, 몸이 아픈데 감사헌금을 한다는 것이다. 이게 잘 연결이 되지 않는데, 몸이 건강해져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아픈데 어떻게 감사헌금을 하느냐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몸이 아픈데도 감사헌금을 한다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과 일종의 수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보통 사람들은 몸이 아팠다가 낫고 난 다음에 헌금을 하는데, "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저것은 하나님을 자기 아이의 병이나 낫게 해주는 분으로 여기는 기복신앙이다" 라고, 그렇게 교회에서 놀릴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을 염두에 두고 역으로 나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아이가 아파서, 어지간한 신앙인이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할 것 같지만, 나는 믿음이 너무 좋기 때문에, 오히려 병을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합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감사하면서 노리는 것이 무엇인가? "나는 이 정도로 믿음이 좋다" 라는 것인데, 즉 "나는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혹시 하나님이 우리 아이를 어떻게 좀 낫게 해주지 않을까?" 라고 하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 몰래 다른 방법으로, 비교적 손쉽게 낫게 해줄 것이라고 하는 노림수가 있지 않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노림수나 수 싸움이 통하겠는가? 그분이 어떤 양반인데 말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것을 독려했다는 것이다.


◈ 머리카락을 밀고 산으로, 고 !!


어떤 의미에서는 불교와도 통하는데, 불교가 무엇인가? 불교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괴로움과 고통은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욕심을 죽이면 되는데, 그러면 감각적인 것을 끊어야하니, 술과 담배와 여자는 기본적으로 끊어야 하고, 그리고 즐거운 노래도 부르지 않고 말이다.


그리고 나서 거울 앞에 서서 자기 외모를 살피게 되는데, 어떻게 자기 머리카락이 어떻게 더 빠지지는 않는지, 이빨은 더 빠지지 않았는지를 고민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머리도 그만 밀어버리고 산으로 간다는 말이다. 물론 그래도 먹어야하니 이빨은 그대로 두고 말이다(ㅋㅋ).


그러니 무엇을 하기 위해서 산으로 간다는 말인가? 자기에게 줄기차게 솟아오르는 모든 욕망을 끊어버리면 행여나 마음에 평안을 얻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동안 자기가 해볼 것은 다 해봤다는 것이다. 무엇을 노리고 말인가? 자신의 행복을 염두에 두고 말이다.


◈ 온리 '나' !!


그러면 그 출발점이 무엇인가? 이런 것을 좀 크게 적어야 하는데, '나만의 행복' 이라는 말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만 행복하면 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다른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가 행복해야 한다고 하는데, 종교의 목적이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자기 행복, 그렇다는 말이다.


'온리 유' 라는 노래도 했지만, 왜 자기만 행복해야하는가?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 자신만은 인간들이 아닌 인간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얼마나 못되먹었는지 모르는데, 인간들이 많으면서도 각자 주장하기를, "나만 인간다운 인간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도소에 있는 죄수들인데, 여기에 누가 오셨다고 했는가? 예수님이 오셨는데, 예수님만이 참 인간이고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골로새서 1장에 의하면 말이다. 그렇게 참 인간이신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말인데, 즉 죄인들이라는 것이다. 지금 그 이야기가 교재 56페이지까지 적혀있다는 말이다.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런데 잠언서에서 가난한 자와 부자, 복은 받은 자와 저주를 받은 자, 착한 자와 나쁜 자가 계속해서 대조가 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일부러 인간사회를 둘로 나누기 이전부터 이미 인간 나름대로의 '온리 유', 아니 '온리 미'의, 즉 "나만 인간이고, 나만 행복해야 한다" 라는 사고방식에 의해서 세상은 개판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 형이 더 낫네 !!


지난 주일오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다시 해보겠는데 말이다. 형제가 이렇게 걸어가는데, 그런 모습을 보고 "두 사람은 참 닮았네요. 서로 형제인가 봐요" 라고 하면, 그것은 기분이 나쁜 이야기가 아닌데, 그런데 그 다음에 "형이 더 낫네" 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동생이 그만 확 열을 받는다는 것이다(ㅋㅋ). 외부에서 덩어리로 만들어주면 형제우애가 돈독해지는데, 그런데 "형이 더 낫네" 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균열이 생기면서 각자의 독단적인 일이 그만 벌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에서와 야곱은 형제간인데, 하나님은 이 에서와 야곱 사이를 통해서 인류의 뿌리를 발견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인류의 뿌리를 거기에 담아내어서 펼쳐내신다는 말이다. 이것을 어제 오후시간에 '미끄럼틀' 이라고 했는데, 이렇게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여기에 미끄럼틀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 이 꼭대기 철판에 올라선 것이 곧 야곱인데, 그러니 야곱이 죽으면 그만이 아니고, 야곱 자체가 계시이기 때문에, 야곱 옆에는 마치 그림자처럼 계시가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류는 두 가지경우밖에 없는데, 지옥에 가든지 천국에 가든지 말이다. 하나님에게 사랑을 받든지, 아니면 미움을 받든지 말이다.


◈ 에서와 야곱으로 인류의 역사가 다 설명돼 !!


그래서 에서와 야곱은 인류전체를 통합하는 개념으로서 아주 적절한데, 에서와 야곱으로 모든 인류의 역사가 다 설명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야곱은 누구인고 하니 예수님인데, 그게 요한복음 1장 끝에 나온다는 것이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라고 말이다. 인자가 곧 이스라엘이고, 유일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란 말이다.


(요 1:5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요 1: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 예수님의 죽음 속에는 생명이 !!


하나님이 인정한 아들, 이스라엘을 아들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리고 참된 인간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다 가상의 안개와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니 실제적 존재인 예수님 외에 다른 인간은 다 죽어야 하는데, 물론 예수님도 죽었는데,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그런 죽음이 아니라 언약적인 죽음이기 때문에, 그 안에 생명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부활 속에는 인간의 죽음이 들어있고, 예수님의 죽음 속에는 생명이 들어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은 특수한 죽음인데,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 삶 속에는 죽음이 들어있고, 주님의 죽음 속에는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영생이, 즉 그 안에는 천국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구원이 말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인간들도 자기의 겉을 통과해서 속으로 가는, 즉 겉과 속을 바꿀 수 있는 능력자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의 죽음을 커버하면서, 그렇게 죽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가보니, 자기가 가난하다는 것에 대해서 화가 난다는 말이다.


왜 자기 집 정수기에서 얼음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아이가 화를 내는 광고가 있는데, 옆집에 있는 아이가 "우리 집 정수기에서는 얼음이 나온다" 라고 하니, 그 아이가 "엄마, 우리 집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 집은 나오지 않는데, 그러니 순간 화가 난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느 인간이 화를 내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인간은 인간이 아닌데, 그리스도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하나의 죄 덩어리라는 것이다. 


◈ 복을 놓고 벌리는 전쟁 !!


아무튼 여기 꼭대기에서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는데, 야곱이 에서와 같이 병행하게 되는데 말이다. 이게 인류역사를 생성한다는 것이다. 타고 내려오면서 말이다. 그렇게 내려오면서 전쟁이 일어나는데, 그래서 성경은 인류의 모든 전쟁을 야곱과 에서의 전쟁으로 규정해버렸다는 것이다. 복을 받은 자와 복을 받지 못한 자로 말이다. 즉 복을 놓고 벌리는 전쟁, 그것이 인류의 전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무엇인고 하니, 복을 받으려고 하면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는 어디서 나오는고 하니, 율법에서 나온다고 보고, 그래서 그 율법을 지키면 의가 생산되고, 그런 의가 있으면 복의 전쟁에서 승리한 자가 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말이다.


◈ 율법의 완성이 복이 아닌, 가난으로 !!


그러니 오늘날 교회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데, 비바 파파를 외치는 천주교와도 똑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한번 보라는 것이다. 이게 바리새인들이라고 하면 예수님은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은 "나는 율법을 폐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려고 왔다" 라고 하셨는데 말이다.


그러니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이 이 땅에서는 무엇인고 하니, 놀랍게도 이 땅에서는 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가난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게 율법의 완성이란 말이다. 이러한 가난을 다른 말로 하면 고통, 고난, 십자가의 죽음, 그런 식으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제 가난의 의미를 좀 알았지 싶은데, 그러니 이 가난은 주님의 하나님 아버지를 위한 가난이고, 인간들이 생각하는 가난이나 저주와 복은 다 누구를 위한 것인가?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한, 즉 자기를 위한 율법이었고, 자기를 위한 하나님이었고, 자기를 위한 메시야였고, 자기를 위한 기독교였고, 자기를 위한 교회였고, 자기를 위한 가족이었고, 그리고 자기를 위한 조국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무엇인가? 아버지를 위한, 하나님 아버지와의 숨겨진 약속, 그 언약을 위해서 예수님은 자기 일평생을 살아오셨다는 것이다. 아버지를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아버지를 위할 때만 진정한 아들이라는 것이다. 일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아버지를 제대로 보여줄 경우에만 아들이지, 아버지를 제대로 말하지 못하면 아들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


로마서 8장에 보면 "너희는 아들이 아니었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 다음에 뭐라고 하는가? "성령이 오셔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순간부터 아들이 된다" 라고 하는데, 물론 양자(養子)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양자의 영을 받은 아들이라고 하면,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영광을 받기 위해서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된다고 하는데, 그래서 여기 8장에서는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하여" 라고 한다는 것이다.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율법 전체가 함성을 지르면 곧 예수님 !!


제가 강의를 처음 시작할 때 인간들끼리 무엇을 만든다고 했는가? 인간들끼리 모여서 '인간' 이라는 추상개념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그러한 추상개념이 필요가 없는데, 예수님은 맏아들인 동시에, 자기에게 속하게 함으로서 진짜 하나님의 아들들을 만들어내신다는 것이다. 그러한 아들들 가운데 맏아들이 곧 예수님인데, 그러한 아들들과 다른 맏아들의 관계인데, 즉 맏아들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아들이 되는 관계, 그것이 곧 언약의 관계라는 말이다. 


그것이 구약에서는 할례로 나타나는데, 출애굽을 할 때 그 가정에서 누가 할례를 받는가? 아니 누구를 위해서 어린양이 죽느냐는 것이다. 그 집안의 맏아들, 즉 장자를 위해서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장자 하나가 산다는 것은 곧 그 가정이 산 것으로 본다는 말이다. 그러니 맏아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일종의 십일조라고 볼 수 있는데, 즉 맏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미 하나님의 율법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물론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지키면 된다고 보았는데, 왜냐하면 평소에 자기를 위해서 살았기에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에는 그것이 아니라, 율법이 드러내기만 하면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즉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 전체가 함성을 지르기만 하면 예수님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성경말씀은 예수님에게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어제 오후시간에 "하나님의 일에 우리가 관여하면 안 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말씀자체가 예수님을 발현하고 있는데, 그런데 새삼스럽게 우리가 지키겠다고 한다는 것은, 그 시작을 주님으로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로부터 한다는 말인가? 바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하겠다는 것인데, 그러면 왜 그렇게 하는가? 그것은 노림수가 있는데 말이다.


인간들이 평소에 하던 행색이 무엇인가? "나만 행복하면 된다" 라고 하는, 그렇게 자기만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온 버릇대로 성경말씀을 보면서, 그것이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를 위한 종교생활을 하고, 자기를 위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의 교회가 되고 말았는데, 물론 천주교도 그렇고 말이다.


◈ 저는 그냥 누릴 뿐입니다 !!


그래서 신앙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라고, 그러한 고백을 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지금도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베풀어주시고, 우리는 그냥 주님 안에서 누리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누리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곧 신앙생활이란 말이다.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니 분명하게 차이가 나는데, 한 쪽은 "우리 인간들끼리 인간을 만들자" 라는 것이고, 다른 쪽은 "이미 인간은 따로 계신다" 라는 것이다. '비바 교황님'이 아니라, '비바 예수님' 인데,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참된 인간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분이 맏아들이 되시고, 그분에 의해서 혜택을 받은, 그야말로 감옥에 찾아오셔서 미리 모종을 심어놓은 자기 백성을 데리고 가듯이, 그렇게 심어놓은 사람 속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피어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먹든지, 마시든지 !!


그 피어나는 방식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에게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 그 말씀이 주어지는 동시에 스스로 그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이 움직여지도록, 그렇게 조치가 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살아가는 모든 것이 말이다.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라는 것인데,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지키려고 하지만, 성경말씀은 그게 아니고 "먹든지, 마시든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바리새인들에게 "먹든지, 마시든지" 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법이 아닌데, 그들은 회당에 가서 말씀을 지키고 구제를 한다든지 해서 어떤 착한 일을 할 때, 즉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구제를 할 때, 그리고 십일조를 할 때, 그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고 신앙생활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도의 경우에는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라고 하는데, 즉 "니가 교회에 오든지 말든지, 그것과 상관없이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라는 것이다. 그러니 매사에 있어서 주님의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서 이런 상황이 주어진다는 말이다. 그것을 어제 오후시간에 다음과 같이 표현했는데, 즉 '복음적 상황' 이라고 말이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복음적 상황 !!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시켜보면, 처음부터 돌아가서 말이다. 자기 통장에 돈이 다 떨어져서 천 원밖에 없다고 하면, 그야말로 화가 나는데, 미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식에 어디에 가서 사고를 쳐도 화가 나는데, 자식이 못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은 처음부터 못났는데 말이다. 돈을 꼬라박을 생각을 하니 화가 난다는 것이다. 사고는 자식이 치고, 돈은 자기 돈이 나가고 말이다. 경기도 도지사로 있는 남경필이 그런 경우인데 말이다(ㅋㅋ). 그게 화가 난다는 것이다.


왜 부인이 남편에게 화를 내는가? 남편이 저지레를 하니 화가 나는데, 그 저지레가 무엇인가? 자기는 시장에 가서 콩나물 값도 깎고 하는데, 그런데 그만 돈을 엉뚱한 곳에 처박으려고 하니 화가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업을 하지 말고, 직장이라도 다녀서 따박따박 돈을 벌어오는 것이, 따박따박 말이다. 그것이 곧 여자들의 희망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난하면 화가 나니 말이다.


그 모든 것이 다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인데, 그렇게 돈이 나가니 어떤 특단의 조치로서 교회에 가서 금식기도를 하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감사헌금도 하는데, 그러니 결국 그 모든 것이 가난하기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그런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복음적 상황인데, 남편이 사고를 친 것마저도 말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자기 중심이라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음을, 즉 자기가 지금 망상에 사로잡혀있음을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된다" 라는 것보다 더 큰 망상은 없는데, 그야말로 꿈이란 말이다. 


바로 그런 큰 망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자극제로서, 주님께서는 "니가 망해도 복음적 상황은 따뜻하게 너를 둘러싸고 있다" 라고, 그것을 깨닫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복음적 상황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뭐라고 하는가? "그 복음적 상황 때문에 내가 산다" 라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데, 그렇게 자기를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


복음적 상황이 무엇인가? 자기가 감옥에 갇혀있는데 주께서 깨운다는 것이다. "젊은이여, 깨어나라" 라고 이번에 교황이 이야기했는데, 그것이 에베소서 5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말이다. 무슨 의미인가? "너는 지금 죽은 자가 아니고, 잠을 자는 자가 아니고, 너는 유일하게 깨어있을 집단에 속한 자이다" 라고, 즉 "너는 내 백성이고 내 몸이다" 라고 하시면서 깨워주신다는 것이다. 


(엡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그런데 그렇게 깨어나서 "돈을 좀 부쳐주세요" 라고 하면 안 되는데, 그것은 아직도 돈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이니 말이다(ㅋㅋ). 깨어난 그 자체가 자기만 있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그렇게 주님이 만들어나가는 상황 속에 우리가 놓여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소급해서 늘 깨닫는다는 말이다. 


그것뿐인데,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부자가 되고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것은 그 자체가 마음이 불안하다는 것인데, 자기가 상대적으로 가난하다고 여기니 부자가 되고 싶어한다는 말이다. 즉 "나는 이미 가난 속에 갇혀있고, 벗어난 적도 없다" 라고 하는 자기 고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갇혀있다는 말이다.


◈ 이제 정리해보면 !!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보면, 우리는 항상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다가 보니, 가난하게 되면 화가 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안하고 말이다. 그래서 따져보니 그 가난이 계속해서 이어지면 결국 자기 죽음으로 간다는 것인데, 그러면 죽음이 왜 불안하고 겁이 나는가? 그것은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인데, 죽으면 그냥 죽으면 되는데 말이다. 옆방에 가는 것은 겁이 나지 않는데, 죽는다는 것은 왜 겁이 나느냐는 말이다. 


저기에 경산에 가면 대구의 시립 장례식장이 있는데, 거기에 가면 기분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 옆에 있는 포도밭에 가는 것은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자기를 처분할 수 없는, 그것을 '애매한 존재' 라고 하는데, 인간은 그렇게 자기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 자기로부터 출발하니 자기 자신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깨어라' 라는 것인데, 즉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주께서 주신 복음적 상황이라고 한다면, 그러니 자기가 죽는 것도 복음적 상황이라면 그것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 큰 일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어제 낮 시간에 설교했는데, 즉 레위지파가 거룩한 주님과 같이 있으면서, 자기들이 보기에는 조그마한 잘못인데도 그것 때문에 무서운 저주가 주어진다고 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 그것이 어떻게 작은 일이냐는 말이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큰 일을 감당하고 있는, 끝까지 큰 일을 감당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 삼손이 과연 실패자인가?


삼손이 과연 실패자인가? 물론 개인적으로 보면 실패자인데, 눈알도 빠지고 머리카락도 잘리고, 결국 죽임을 당하니 말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삼손이 삼손이 된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나실인으로 태어나야했고, 그렇게 태어난 나실인의 사명은 죽음으로서 완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실인이 무엇인가? 거룩한 존재로서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을 구원할 책임이 있는 자가 나실인이라는 것이다. 언약백성으로 구원할 책임이 말이다. 아무튼 그 책임을 감당했는데, 여자를 좋아하던 말던 말이다. 그런 것에 관계없이 한번 나실인은 영원한 나실인이라는 것이다.


(삿 13:7) 그가 내게 이르기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죽을 날까지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하더이다


◈ 십자가 피의 견고함이 성도의 견고함으로 !!


그러니 한번 성도는 영원한 성도로서, 그 어떤 경우에도 순교적 의미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교통사고로 죽으나, 까불다가 자빠져서 죽으나, 그냥 나이가 많아서 죽으니 말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성도라고 하는, 즉 거룩한 자라는 개념은 단 한 순간도 누락되거나 삭제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너무나 견고한데, 즉 십자가 피의 견고함이 성도의 견고함으로 감싸지게 되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한 생각을 한다는 것이 깨어난다는 것인데, 즉 안목이 확 열린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에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게 되고 항상 기뻐하게 된다는 말이다. 항상 기도로서 자기를 주님께 바치게 되고, 그게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임을 파악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아이들이 개학을 했어요? 그래서 참석하지 못한 것 같은데, 저는 또 삐친 줄 알고 말이죠(ㅋㅋ). 그런 그렇고, 제가 항상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중심이 아니라 복음적 상황인데, 즉 주님을 위해서, 주님 때문에, 주님 자신을 위해서 우리가 뽑혔다는 것이다. 


◈ 간택된 자로서, 부모와 헤어져서 궁궐에서 살아야 !!


그러니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주님이 오신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우리가 간택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궁녀인데, 부모와 헤어져서 궁궐에 가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좋던 싫던 간에 주님의 신부가 되어서 신부수업에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왕비로 간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것을 두고서 제목에도 나와있듯이 '준비된 가난' 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가난한 이유가 무엇인가? 자기가 가난하지 않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말이다. 20억을 가지고도 가난하다고 우긴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가 가난한 것은 우리 자신을 힘들게 하기 위해서 가난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가난하게 사신 주님을 묘사하고 표현하고, 그 생애에 참여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도록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천사처럼 날아다니지 못하니 가난하고 !!


우리는 천사처럼 날아다니지 못하니 가난하고, 또한 가브리엘과 같은 빛나는 옷도 입을 수 없으니 지극히 가난하다는 것이다. 프랑스 명품밖에 없는데, 천사표 옷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얼마나 가난하다는 말이다. 천사는 하늘나라가 자기 나라인데, 우리는 기껏해야 70평 정도의 아파트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가난한지 모르는데, 70평이 뭐냐는 말이다. 그것도 좀 떠들면 아래층에서 올라오고 말이다. 마치 감옥과 같다는 것이다.


여기 앞에 노태우 전대통령이 50평 짜리 아파트 두 개를 하나로 만들어서 100평 짜리 아파트로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러니 노태우가 얼마나 가난하냐는 말이다. 하늘나라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찢어지는 가난인데, 우리가 가는 곳이 어디인가? 70평 짜리 아파트인가? 아니면 100평 짜리 아파트인가? 말 그대로 하늘나라라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그 하늘나라에는 입장료도 필요가 없고, 그리고 아픈 것도, 슬픈 것도, 괴로운 것도, 눈물도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보석과도 같이 빛나는 곳인데, 우리는 겨우 5캐럿 다이아몬드밖에 없지만 말이다(ㅋㅋ). 그것도 도둑이 들어올까 싶어서 금고에 넣어놓는데, 그러니 외출을 해도 마음이 불안하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해도, 먼저 "여보, 오늘 문단속을 잘했나?" 라고 하고 말이다.


그러니 누가 종인지 주인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데, 괜히 그런 것도 없으면 서글프고 말이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지옥과 같은 삶이냐는 것이다. 준비된 가난, 그러니 우리 자신 자체가 가난한 자들인데, 이것이 왜 그렇게 위로가 되는지를 모르겠는데 말이다(ㅋㅋ).


그런 이야기를 하니 갑자기 기분이 엄청 좋아지는데, 아무튼 우리는 아주 가난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마치 이건희 회장처럼 말이다. 아직 깨어나지도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늙어가기까지 하는데, 가난한 것도 서러운데 늙어가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 역시, 따박따박 !!


그래서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전도서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잘살아도 헛되고 못살아도 헛되고,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어차피 같은 세상이라고 하면, 그 세상은 우리가 전혀 기대할 만한 세상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리 밟아도 헛된 것을 밟은 것이고, 저리 밟아도 헛된 것을 밟은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이런 사업을 하고 저런 사업을 해본들 역시 남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따박따박이라는 말이다. 통장에 돈만 따박따박 들어온다고 하면, 그것 이상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국가재정이 흔들리게 되면 연금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을 수가 있겠지만 말이다. 


(전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렇다면 잠언서에서 의도적으로 복을 받은 자와 저주를 받은 자, 부한 자와 가난한 자, 그리고 착한 자와 악한 자를 그렇게 의도적으로 구분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사회가 자체가 자기가 복을 받은 것을 티를 내기 위해서, 그렇게 자기 중심으로 모든 것을 의도적으로 이미 분류를 해놓고 있는, 그런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 새로운 기준 '지혜' !!


다시 해보면, 주님께서 죄수로 가장해서, 사실은 가장한 것이 아니라 진짜 죄수로 오셨는데 말이다. 그렇게 죄수가 되셔서 이 감옥에 오셨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감옥소의 상황을 예수님은 온 몸으로 다 받으시는데, 그러니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도 이 세상의 상황을 그대로 수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일단 수용해놓고 그 안에 무엇을 집어넣는고 하니, 가난과 부와 같은 우리 인간들이 정해놓은 일방적인 기준을, 즉 "너는 복을 받았어. 너는 저주를 받았어" 라고 하는 기준 자체를 철폐해버리고 새로운 기준을 집어넣는데, 그게 곧 '지혜' 라는 말이다. 


이 지혜가 동원되면 모든 사람들은 지혜 안에서는 인간들이 아닌 인간이 되는데, 예를 들어서 "부한 자들아, 너희들이 부자라는 이유 때문에 인간처럼 행세하지 말라. 가난한 것도, 자기가 가난하고 싶어서 가난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만들어내셨다. 왜 만드셨는가? 부한 자들이 정신을 차리라고 만드셨다. 부한 자들이 재물이 아닌 지혜를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 지혜와 출애굽 생각 !!


다시 정리하면, 잠언서에는 서로 대조가 되고 반대가 되는 상황 속에서 지혜가, 즉 인간들이 싫어하고 배척하는 반대편에 주님은 가난한 자, 즉 지혜로서 등장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출애굽 생각이 나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다음과 같은 것인데 말이다.


잠언서에 보면 돈이 없고 가난한 자가 고통을 받는데, 보통 사람들이 힘들어서 고통을 받아서 하나님께서 기도할 때는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이여, 제가 지금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마음이 괴롭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게 자연스럽게 우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의 응답은 무엇인고 하니, "내가 너를 위해서 고통을 받았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는 그동안 아무런 일도 없어서 그만 잊어버렸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가 지금 당하는 고통을 통해서 그동안 주님이 이미 고통을 받았음을 다시 정립하는 순간으로,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고통을 일부러 유발시켰다는 것이다. 즉 자기의 고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왔다가, 이 땅에 지혜가 덮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 인간들이 아닌, '만나를 먹은 사람' !!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갔을 때, 그들이 먹던 양식이 무엇이었는가? 만나였는데, 그러면 그 만나가 똑똑한 사람에게는 맛이 있고 그렇게 못한 사람에게는 맛이 없었는가? 만나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그 사람의 됨됨이와 성격과 성장과정에 상관없이 동일한 음식이 제공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만나를 먹는 사람들끼리는 무엇인가? 인간들이 아닌 '만나를 먹은 사람'이 되는데, 주님이 우리를 보는 관점이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교회에 대해서 나오는데, 21절에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라고 하는데, 교회가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과거 광야에서 만나를 먹던 것과 동일한 차원에서 대우해버린다는 것이다.


(고전 12: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고전 12: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그런데 교회에 그만 분쟁이 생겼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어제 낮 시간에 거기에 대해서 설교를 했는데, 자기 집착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면 자기 집착이 왜 생기는가?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의 역사가 다 있는데, 자기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같은 것이 말이다. 남들과 비교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되는가? 권위가 오면 깨어지는데, 영적인 권위가 말이다. 그러한 자기 집착이 바로 오늘 강의한 것처럼 '나만을 위하여' 라는 것인데, 즉 "나만 행복하면 된다" 라는 것이다. 그것이 모든 인간들이 다 추구하는 자기 집착이라는 말이다.


◈ 인류역사는 '에서냐? 야곱이냐?' !!


다시 이야기하겠는데, 인류의 역사는 이미 정해져있는데, 즉 "에서냐? 야곱이냐?" 라는 것이다.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면서 인류역사는 진행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야곱적인 입장은 이미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야곱은 사랑을 따내기 위해서 온갖 요령을 다 부렸는데, 그게 자기 집착이란 말이다.


그러니 야곱은 복을 받는 순간 무엇이 등장했는고 하니, 자기가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음이 다 들통난다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열심히 산다는 것이, 그것이 전혀 자기 운명이나 팔자가 근원적으로 바뀌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을, 그것을 새삼 무릎을 치면서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바보같이, 내 인생은 주님이 인도하시는데, 그런데 왜 내가 그렇게 애를 썼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항상 말이다. 


◈ 자기 죄를 그대로 노출시키는 이스라엘 !!


그러면 인류역사에 있어서 야곱과 같은 이스라엘은 어떤 역할인가? 자기 죄를 그대로 노출을 시키면서 폭로를 당하는 역할인데, 그들이 바로 야곱에 속한 자들이란 말이다. 그 죄가 다름이 아니라 "내 인생은 내가 하기 나름이다" 라는 것인데, 그런 요소가 바로 죄라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다 그러한데, 자기 인생을 남이 책임질 수는 없다는 말이다.


자기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그래서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죄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러면 왜 그것이 죄가 되는가? 그게 바로 복음적 상황이기 때문에, 즉 "나는 복음적 상황 때문에 뽑혀서 나온 자이지, 내 인생을 잘 챙기라고 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어떻게 살던 간에, 이렇게 살던 저렇게 살던 간에, "복음적 상황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간다는 말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지금 어디서 자꾸 담배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여러분도 나지요? (녹취자 - 지금 녹취하는 저에게도 납니다) (ㅋㅋ)


◈ 다시 정리하면 !!


다시 정리하면, 인간들은 없고 인간만 있는데, 물론 그 인간은 예수님이고 말이다. 그러면 잠언서의 지혜에 속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위하여 간택된 자들인데, 그래서 가난하게 되어야하기 때문에 가난하게 된 것이고, 또한 부자가 되어야하기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위해서 말이다. 


사업을 해서 부자가 되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가만히 살펴보면 그게 다 자기가 열심히 해서 된 것이 아니라 운이 좋아서 되었다는 것이다. 똑같이 노력을 해도 다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아마 사업을 해본 사람은 공감을 하지 싶은데 말이다. 그게 타이밍이 있는데, 그래서 "부자는 타이밍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난하게 된 것도 타이밍이고 말이다.


그것을 합쳐서 "운이 없어서 가난하게 되고, 운이 좋아서 부자가 되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깨어있으니 그것을 바꾸어야 하는데, 즉 "운이 좋아서 지혜를 알았고, 또 운이 나빠서 지혜를 몰랐다" 라고 말이다. 즉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 운이 나쁘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니 거지 나사로는 운이 좋은 사람이고, 부자는 운이 나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제 교재 57페이지를 살펴보자.


** 잠언 19장 14절에 보면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면 그 아내는 누구의 소유입니까? 슬기로운 아내는 나의 소유가 될 수 없거든요. 나의 소유가 될 수 없도록 지혜가 되시는 분이 작용해줘야만, 그래야 아내와 더불어 한 아들이면서 동시에 여호와 경외가 가능한 거예요.


(잠 19:14)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


여기에 보면 슬기로운 아내가 나오는데, 이 세상에서 결혼한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혼한 사람들이라고 하면 모두가 다 아내가 있는데, 하지만 그 아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남편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돈을 잘 벌어다주는 고마운 아내가 아니라, 직장생활을 열심히 해서 따박따박 통장에다 돈을 다달이 넣어주는 아내가 아니라, 바람을 피우는 아내인 경우에는 말이다. 그런 아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서 주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남편이 과연 얼마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남편은 없다는 말이다.


◈ 에스겔 선지자의 경우에 !!


에스겔 선지자의 경우에, 아내는 아내이고 자기가 선지자인 줄로 알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아내의 존재가 자기가 선지자 역할을 하는데 이미 참여되었다는 것을, 그것을 자기 아내가 죽었을 때 울지 말아야 한다는 통보를 받고 비로소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설명해보면, 이렇게 에스겔이 있을 때 그 주위에는 포로가 된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이 있다는 것이다. 에스겔이 기록된 곳이 바벨론이니 말이다. 요즘 수요일 저녁에 에스겔을 설교하고 있는데, 그런데 에스겔은 누구와 통하는가? 그 이름이 인자인데, 그러니 인자는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러면 에스겔이 포함된 이것이 새로운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에스겔이 포함된다는 것은 곧 인자가 포함이 된다는 것인데, 그런데 신약에 오면 누가 누구를 보고 인자라고 부르는가?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인자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인자인 에스겔이 포함된 것이 새로운 이스라엘이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에스겔은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왔다가 다시 회복하게 되는 것을 증거하게 되는데, 그래서 에스겔서에 새성전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내가 죽는데, 왜 죽는가? 백성들이 죄를 모르기 때문에 그 죄 값으로 저주를 받아야함을, 그것을 에스겔에 속한 가족 중의 하나가 대표해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표자로 나선 사람이 곧 자기 아내인데, 그 아내가 죄를 지은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 너는 이제 그만 죽어라 !!


그러면 여기서 여러분은 에스겔의 아내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사모가 되어서 온갖 교회 일에 다 신경을 쓰면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데, 교인들의 잔소리도 겨우 참아가면서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너는 이제 그만 죽어라" 라고 한다면, 그게 얼마나 억울하냐는 것이다.


지금 이 땅의 목사 사모들이 희망이 하나 있는데, 그게 무엇인가? 아들을 낳아서 아버지의 교회를 물려받아서 따박따박 월급을 챙기는 것인데, 그게 사모들의 희망이란 말이다(ㅋㅋ). 아들이 없으면 요즘은 딸도 목사가 되니까 신학교에 보내면 되는데 말이다. 그렇게 해서 "이 교회는 내 교회다" 라고 하면서 틀어잡는 것이 희망사항인데, 못된 장로들은 다 늙어죽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아내가 죽는다고 하면, 만약에 여러분이 그 아내라고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그런 연극을 한다고 하면, 마지막에 숨을 거두면서 "아니, 당신마저 나를…" 라고 할 것이란 말이다. "나를 사랑한다고 해놓고, 자기 선지자의 일만 생각하고, 그러면서 실컷 나를 이용해먹고, 내가 이렇게 죽는데 당신이 훌륭한 선지자라니, 그것이 말이 되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욥기에도 보면 마누라가 나오는데, 그녀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도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결혼했는데, 참 꼴좋다. 자식들은 다 죽이고, 아이 열 명을 낳아서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말이야. 그리고 재산도 다 날아가고,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라면 나는 믿지 않겠다. 그러니 당신은 그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라" 라고, 자기 남편에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처지를 한번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 여보, 고마워요. 당신을 만나서 !!


그런데 그런 가운데서 이 전체가 무엇인고 하니, 잠언서에서는 이것을 두고 지혜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제가 다른 말로 '복음적 상황' 이라고 했는데 말이다. 그러면 에스겔의 아내는 어떻게 되는가? "여보, 당신이 있어서 나는 지금 큰 일을 담당하게 되었어요. 백성들이 벌을 받아서 죽어야 하는데, 그것을 대신해서 내가 죽어야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어요. 그러니 당신과 결혼한 것을 너무 영광스럽게 생각해요" 라고 나온다면,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라는 말이다.


남편과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여자의 로망이고 희망인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당신으로 인해서 나의 죽음마저도 하나님의 계시를 위해서 쓰여졌다는 것, 그것 자체가 나에게는 영광입니다" 라고 한다면, 물론 성경에는 그런 내용이 없지만 말이다(ㅋㅋ).


아무튼 예를 들어서 그렇게 생각해볼 때, 지혜라는 것은 바로 "모든 것이 복음적 상황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으로 자기가 속한 땅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아내를 보고도 "당신은 여호와께서 주신 아내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자가 곧 지혜가 있는 자이고, 그게 바로 지혜가 하는 이야기라는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가난하다는 것이 화가 납니다. 그래서 가난하지 않기 위해서 지금도 애를 쓰고 있는데, 하지만 그것 자체가 덫이고 함정임을 깨닫게 해주옵소서. 그러니 내가 주인공이 아닌 주님이 주인공임을, 그렇게 바꾸어서 생각할 수 있는 지혜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4,9,4 오후 3시에 마침.


                                    목사님, 어제 마누라와 한 바탕 싸웠는데, 하필이면 이런 강의를...


 



 

 첨부파일 : 14대구강의('잠언'속의그리스도)14-복음과가난(55페이지).hwp (62.7K), Down: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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