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양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유튜브강의

강남강의

기타강의

HOME > 지역강의 > 대구강의
2014-10-14 22:51:36 조회 : 1032         
[14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15 - 관계 속의 경외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14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15 - 관계 속의 경외
                                                                                
                                                          14,09,1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57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이런 관계 속에서 종을 대할 때도 여호와 경외, 아들을 대할 때도 여호와 경외, 자식을 대할 때도 여호와 경외, 왕을 대할 때도 여호와 경외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잠 19:14)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 슬기로운 아내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종도, 아들도, 자식도, 왕도 사회 속에서 여호와 경외가 피어나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은밀하게 기도한다고 해서, 그것만이 여호와 경외가 아님을 염두에 두고 이런 글을 썼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뒤에 잠언서 19장 14절 말씀을 언급했는데, 즉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 라고 말이다.


그러니 '여호와 경외' 라는 것이, 아내를 버리고 혼자 골방에 가서 기도를 한다고 해서 여호와 경외가 아니고, 물론 '슬기로운 아내' 라고 조건이 붙어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슬기롭지 못한, 어리석은 아내는 여호와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말인데, 그러니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 라는 것이 그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슬기롭고 슬기롭지 못하다고 하는 판정은 여호와께로부터 와야하는데, 즉 여호와께로부터 왔다고 하면 그 아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슬기롭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슬기로운 아내인지 아닌지 파악을 해서, 슬기로운 아내라고 판정이 나면 여호와께로 왔다는 것을 인정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가 여호와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자기가 최종판단을 내리니까 말이다.


◈ 먼저 남편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


그러므로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 라는 조건이 성립되려고 하면, 먼저 남편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편이라는 작자가 자기밖에 모르면서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좋은 아내를 주었으면 좋겠다" 라고 일방적으로 생각을 해버리면, 마귀가 주는 아내도 좋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나이트클럽에 가고, 노름을 한다고 해서 마귀가 주는 아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하룻밤에 1억을 날리는 여자도 있다고 하는데 말이다.


자기에게 좋다고 해서 슬기로운 아내이고, 따라서 그 아내는 여호와께로부터 왔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여호와 경외가 아니라 자기 경외인데, 즉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먼저 하나님 앞에서 남편이 낮아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무튼 여호와 경외가 자기가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찬양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엮이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주시는,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그 규율을 발견해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 발견, 발견 !!


어제 낮 설교시간에 '발견' 이라는 말을 했는데, 즉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발견할 뿐만이 아니라, 타인 속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의 작용에 대해서도, 신약의 표현대로 하면 복음의 작용에 대해서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말이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우리가 잘 알 듯이 "사랑은 오래 참고" 라고 하면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런 사랑이 되려고 하면 혼자서는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이다. 혼자 있으면 자기 사랑밖에 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사랑이라는 은사가 발휘되려면,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이 자가와 엮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전 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 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 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 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 만사가 귀찮아 !!


나이가 들면 엮이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데, 누구를 만나는 것도 싫고, 등산도 싫고, 동창회도 싫고 말이다. 만사가 귀찮다는 것이다. 그냥 집에서 TV나 보면서 밥이 먹고 잠이나 자고, 답답하면 바람이나 쐬고 말이다. 심지어 밥그릇에 밥을 담는 것도 귀찮은데, 그래서 밥도 대충 먹는데, 그렇게 하니 밥에서는 냄새가 나고 말이다. 그렇게 만사가 귀찮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그러니 사랑의 은사를 발휘할 기회조차도 없는데, 사랑의 은사는 '나' 말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라는 것이다. 그러한 사랑의 은사가 없는 사람은 상대방을 이용하려고 하는데, 반면에 사랑의 은사가 있는 사람은 상대방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새삼 발견하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예상치 못한 낯선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자기를 낮추는 용도로 또 다시 자기에게 적용이 되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57페이지를 보자.


** 항상 '여호와 경외'는 집단적인 관계 안에서 오로지 진정한 지혜자의 존재를 통해서 성립됩니다. 즉 내가 다른 사람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참된 지혜자가 나를 대신할 수 있음을 믿을 때에 여호와 경외가 발생하는 겁니다. 나 말고 다른 분이 나를 대신해서 아들 노릇을 하는 관계성을 말입니다. 


(녹취자 - 참고로, 여기에서 진정한 지혜자는, 진정한 지혜로, 참된 지혜자는 참된 지혜로 바꾸어서 표현해야 맞지 싶습니다. 예수님은 지혜자가 아닌 지혜이니 말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가 지혜자이고 말입니다. 목사님도 이 부분은 참된 지혜자가 아니라, 참된 지혜라고 읽고 있네요. 그런데 진정한 지혜자는 그대로 읽으시는데...)  


◈ 내가 다른 사람을 대신할 수 없다 !!


여기서 다른 사람과 예수님을 비교해보고, 또 다른 사람과 자기를 비교해보는 겁니다. 문장이 갑자기 어려워졌는데, "여호와 경외는 그 조건이 집단 속에서 가능하다" 라는 것인데, 그리고 "나는 나를 대신할 수 없지만, 참된 지혜가 나를 대신할 수 있음을 믿을 때 여호와 경외가 발생한다"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풀어보면, 여기서는 "내가 다른 사람을 대신할 수 없다" 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핵심인데, 부모가 되어서 자식을 어릴 때는 때리고 훈계를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성년이 되어서 독립을 하겠다고 하면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부모는 "오냐, 니가 알아서 해라. 나도 홀가분하고 편하다" 라고 하는데, 물론 겉으로만 그렇게 하고 속으로는 엄청 걱정이 되다는 것이다.


◈ 엄마, 나도 이제 독립을 할래 !!


그래도 아들일 경우에는 조금은 괜찮은데 딸이 그렇게 나오면, 자기도 이제 성인이 되었다고 하면서 독립을 하겠다고 나서면 어떻게 되겠는가? 마음의 한 구석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는 것이다. "혹시 어느 놈하고 동거는 하지 않을까?"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막무가내로 안 된다고 할 수도 없는데,  그렇게 하면 "엄마는 내가 아직도 무슨 어린아이인 줄로 아나?" 라고 나오면 곤란해지고 만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가 "내가 다른 사람을 대신할 수 없다" 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했는데, 이것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는고 하니, "내 인생은 누군가가 대신해주어야 한다" 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지금 현재 우리의 이런 인생을 가지고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죄송하지만 말이다.


◈ 나는 남에게 피해를 준 적이 없다 ??


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인데, 그러면서도 입을 닦고 뭐라고 하는가? "나는 남에게 피해를 준 적이 없다" 라고 하면서 뻔뻔하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입장만 챙기는 입장에서, 죽어서 가기는 어디를 간다는 말인가? 천국은 꿈도 꾸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인간들이 모여서 무슨 천국이 되겠는가? 완전히 국회처럼 난장판이 되고 마는데, 그래도 국회는 여당과 야당밖에 없지만, 천국에는 모두가 각자 자기밖에 모르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다 적이고 말이다. 그러면 천국에 가도 안 되고 어디로 가면 되겠는가? 지옥에 가면 더 심할 게 뻔하고 말이다. '왔다. 장보리' 라고, 만나자마자 출생의 비밀까지 끄집어내어서 영원토록 싸울 건데 말이다.  


사람이 뭔가 상대방이 밉고 틀어지게 되면, 그 순간을 잊지를 못하는데, 그리고 세월이 가도 잊을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다는 것이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나서 "여보, 미안해. 앞으로는 잘할 게" 라고 한다고 해서, 설령 그게 진정한 사과라고 해도, 그것이 여자의 마음에서 사라지겠는가? 다정하게 손을 잡아줘도, "그 더러운 손으로 어디를 잡아. 치워!" 라고 하는데, 그게 평생을 간다는 것이다.


◈ 살면 살수록 더 잊혀지지 않아 !!


나이 80이 되어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오래 생각하다가보니 더 깊이를 더해서, 잊고자 하는 노력으로 인해서 더욱 더 잊지를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경제적인 문제도 있고 해서 갈라설 수도 없고 말이다. 대외적인 체면 때문에 부끄럽기도 하고, 자식들 보기에도 민망해서 억지로 그렇게 산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 남편을 볼 때마다 바람을 피운 것이 생각나니, 그야말로 고문이 아닌 고문이라는 것이다. 


그때 여자가 가지는 생각은 무엇인고 하니, "내가 잘못을 자기가 하지도 않았는데, 왜 그 피해를 내가 보는가?" 라는 것인데, 정작 잘못한 인간은 잘만 먹고 잠만 잘 잘다는 것이다. 정작 피해자인 자기는 가면 갈수록 마르고 우울증 약도 먹어야하고, 잘못도 하지 않은 자기가 왜 그렇게 피해를 입어야만 하는지, 그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게 부조리가 아느냐는 말이다.


◈ '부조리'와 까뮈의 '이방인' !!


'부조리' 라는 말이 나왔으니 조금만 더 해보면, 여기에 관련해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소설이 있는데, 여러분도 알지 싶은데, 까뮈의 '이방인' 이라고 말이다. 이 양반이 마지막에는 엽총으로 자살을 해서 인생을 마감하고 마는데, 그 소설의 주제가 무엇인고 하니, '부조리' 라는 것인데, 즉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 세상 자체가 따지면 따질수록 이상하다는 말이다. (녹취자 - 엽총 자살은 헤밍웨이가 아닌가요? 까뮈는 자동차 사고로 부조리하게(?)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네요.)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은 괴상한 인간사회이다" 라는 것인데, 왜 괴상한가? 결국은 까뮈라는 사람이 자신의 '이방인' 이라는 책에서 발견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어느 누구라도 남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다음이 중요한데, 즉 "부모가 자식을 대신해서 살 수 없는데, 그런데 마치 대신할 수 있는 것처럼 행세하는 너는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그게 부조리하다는 말이다. 


과연 남편이 아내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가? 아내는 그런 남편과 자식들 사이에서 나름대로의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을 본인이 설계해서, "이 정도면 그래도 내가 행복하다고 견딜 수 있어" 라는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습득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편은 그게 아니라, 스카프나 목걸이를 사다주면 무조건 아내는 행복해야하는 것으로, 그렇게 자기의 정신세계 안에 가두어두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내는 "당신이 내 인생을 대신할 수 있어?" 라고 하는데, 그러면 또 남자들은 뭐라고 하는가? 큰소리를 마구 치는데, "그럼, 내가 대신해줄 게. 나만 믿어. 내가 있잖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다는 것이 기껏해야 생일에 선물을 사주는 것인가? 선물을 보따리로 사오면, 자기의 잘못이 모두 사라지느냐는 말이다. 


◈ 까뮈가 말하는 현대사회의 특징은?


까뮈가 이야기하는 현대사회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여기서 제가 굳이 현대사회라고 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고, 아무튼 현대사회는 누구도 누구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대신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런 척들을 하면서 권위를 붙잡고 있는 것이 도무지 꼴도 보기 싫다는 것이다.


그렇게 대신해주지도 못하면서, 마치 어른 행세를 하는, 즉 권위자 행세를 하는 꼴이 얼마나 불합리하냐는 것이다. 그것이 현대사회라고 하면, 그러면 고대사회는 어떠했는가? 그 이전의 사회에서는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이 없는데, 우리나라의 조선시대의 경우에도 그러했고 말이다. 쌍놈이면 그냥 쌍놈이고, 양반이면 그냥 양반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서양도 마찬가지인데, 봉건시대에는 "그게 신의 뜻입니다" 라고 하면, 그냥 그것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너는 백정으로 태어났기에 백정이다" 라고 하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자기는 백정이기에 인간취급도 받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말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으니 부조리도 없다는 것이다. 왜 정박아에게는 암이 없다고 하는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니 말이다.


◈ 에이, 오늘은 사표를 내고 만다 !!


그러면 암은 누구에게 생기겠는가? "내가 이렇게 살아서 되겠는가?" 라고 하면서, 자꾸만 자기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는 자들인데,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회라는 것이 그것을 훼방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움직일 때마다, 그만 수 천 개의 가시에 찔리게 된다는 것이다. 차라리 집에 가만히 있으면 찌르는 것도 없는데, 바깥에 나가서 돈이라도 좀 벌려고 하면 온 천지에 눈에 거슬리는 것이고, 짜증나는 것들뿐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에이, 사표를 내고 만다. 내가 이것이 아니면 밥을 먹지 못하겠나?"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자식이 20대 중반이나 30대가 되면, 부모들을 그것을 말린다고 난리인데, 즉 "야야, 제발 좀 그만해라. 아무런 소리도 하지 말고 그냥 다녀라. 제발 사표는 안 된다. 어디 그만한 직장은 없다" 라고, 자식을 붙들고 하는 이야기가 그것이라는 말이다. 딸의 경우에는 "야야, 그만한 남편이 없다. 그냥 죽었다고 생각하고 살아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엄마가 내 대신에 인생을 살아줄 거야? 나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어. 내 인생은 따로 있단 말이야"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 엄마가 죽었는데, 왜 내가 꼭 울어야 하는가?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일상의 모든 일들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딱 한 마디로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가? 없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까뮈는 대신할 수가 없다고 했는데, 이방인의 주제가 무엇인고 하니, 갑자기 날씨가 더워져서 정신이 혼미해져서, 주인공인 뫼르소가 아라비아 사람을 해변가에서 권총으로 쏴 죽였다는 것이다. 어떤 특별한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날씨 때문이라고 하면 5년이나 7년 정도로 언도를 받아서 감옥에 갔다오면 되는데 말이다.


판사도 그렇게 판결을 내리려고 했는데, 그런데 그 와중에 주인공이 어떻게 나오는고 하니,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에 대해서, 이 이야기가 주인공의 엄마가 돌아가신 것을 시작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는데 말이다. 거기에서 이 주인공은 "엄마가 죽었는데 왜 내가 꼭 울어야만 하는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자 판사가 그것을 보고 독이 올라서 그만 사형을 언도하고 마는데, 아무튼 내용이 그런 식으로 진행이 된다는 말이다.  


◈ 이 사회자체가 얼마나 부조리한가?


이게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품인데, 즉 "엄마가 죽었는데 왜 내가 꼭 울어야 하는가?" 라는 것이 바로 까뮈가 말하는 현대인의 '자기주의' 라는 것이다. 그렇게 일단 자기밖에 모르는 상태에서 "누가 나를 대신해서 행복을 책임져줄 수 있는가? 라는 것을 차근차근 따져보니, 엄마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결국은 아무도 없더라는 것이다. 


아무튼 판사는 그 뫼르소를 보고 "저것은 인간도 아니야. 도대체 부모도 모르고 말이야" 라고 하면서, 그만 자기 감정을 개입시켜서 사형을 내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판사라는 권위는 제대로 된 권위가 아니라, "판사인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감정을 니가 뭔데 하루아침에 모독하는가? 그 죄로 너는 벌을 받아야 한다" 라고 해서 그만 사형을 언도하고 말았다면, 이 사회자체가 얼마나 부조리한 사회냐는 것이다.


그러니 정직하지 못하고, 일순간의 기분과 컨디션으로 함부로 판결하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까뮈는 여기에 대해서 "아무도 나를 대신할 수 없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그 누구라도 자기를 대신할 수 없다는 말이다. 


◈ 선한 사마리아인의 등장 !!


이러한 까뮈의 이방인과 비슷한 이야기가 성경에 있는데, 그것이 누가복음 10장에 나온다는 것이다. 요즘은 점점 더 성경구절에 대해서 자신이 없어지는데, 이번에는 맞은 것 같은데, 누가복음 10장 30절 이하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눅 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눅 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눅 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눅 10: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눅 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눅 10: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눅 10: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눅 10: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왜 그것이 왜 부조리하고 합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이야기인고 하니, 강도를 만난 자의 경우에 자기가 그렇게 강도를 만난 책임을 누구에게 돌려야 하는가? 강도에게 있는데, 그러니 경찰에 신고해서 강도를 잡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때 거기를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물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 사람에게 그런 짓을 한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러니 제사장과 레위인 경우에는 "내가 한 짓이 아니다" 라는 것인데, 이게 중요한 것이니 잘 들어보라는 말이다. 이것이 '여호와 경외'와 관련이 되어있는데, 일반사회에서 우리는 단독적으로 경외할 수 없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한다는 것을 말하면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경우에는 결코 자기들이 잘못한 것이 아닌데, 그래서 율법으로는 그 책임을 물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0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니가 그런 짓을 하지 않더라도 율법 속에는 니가 책임질 조항이 있다"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행한다는 것은, 자기가 잘못하지 않은 일조차도 그것을 발견한 순간 자기가 책임져야할 위치에 놓이게 만드는 것이 율법 안에 들어있는 내용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율법은 그물망과도 같은데, 그 어느 누구라도 "내 책임이 아닙니다" 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율법은 '대신'을 요구해 !!


그러면 율법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대신'을 요구하는데, 즉 남을 대신해서 희생하기를 요구하는데, 그러면 그 율법을 누구만이 지킬 수 있다는 말인가? 바로 예수님인데,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이야기를 미리 앞당겨서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던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 이야기인데, 예수님이 그렇게 자신의 길을 가셨다는 말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강도를 만난 책임을 제사장과 레위인이 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율법은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묻는가? 그들에게도 묻는데,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한 짓이 아닙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강도를 만난 사람을 대신해서 책임을 져야하는, 그러한 율법의 기능을 그 누구도 예외가 없이 다 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율법의 그물망 속에서는 말이다.


◈ 그래, 별이야 !!


그렇다면 이러한 율법을 지키는 것이 과연 인간으로서는 가능한가? 전혀 불가능한데, 그것을 까뮈는 '부조리함'으로 본다는 것이다. 부조리하다는 것은 자기밖에 모르는 것이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무도 자기 인생을 책임져줄 수 없다는 말이다. 그 누구도 자기를 대신해서 말이다.


그래서 이방인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별이 등장하는데, 사형집행을 앞두고서 감옥에 있는 마지막 날 밤에 주인공에게 밤하늘의 별이 비친다는 것이다. 그러자 이 뫼르소가 그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래, 별이야. 나는 저 별과 같은 존재로 살았으면 좋겠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이 오늘날 현대인들의 가장 근본적인 심리를 얼마나 잘 묘사해주고 있는지 모른다는 말이다. 즉 "나는 밤하늘의 외로운 별이 좋다" 라는 것이다. 까뮈 자신도 하늘의 별처럼 되고 싶어서 그런지 몰라도 자살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게 바로 오늘날 아무도 자기 인생을 책임져주는 않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니까 성경말씀이 전혀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인데, 현대인들이 이런 지경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누군가와 사귀지만 그것은 이용해먹기 위해서 사귀는 것인데, 이게 아니다 싶어서 그렇게 이용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자기가 살아가지를 못하겠고 말이다. 그러니 서로 이용하면서 뜯어먹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남이 자기를 대신할 수 없음을 알고 실망하고, 은근히 기대를 하면서도 말이다.


◈ 나, 여기에 있잖아 !!


그렇게 우리 인간이 도저히 '대신'할 수 없는, 전혀 '대신' 치를 수 없는, 그 '대신'의 자리에 지혜, 혹은 여호와 경외, 즉 장차 예수님이 그 자리에 계셔서 우리로 하여금 발견되게 하신다는 말이다. "나 여기에 있잖아. 고민하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나? 나 여기에 있잖아. 너희들의 인생을 대신해서 치러줄 인생이 여기에 말이야" 라고, 예수님이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아멘 !!)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 주님께서 어떤 골목골목으로 가셨는가?


그러니 성도는 무엇인고 하니, 이미 치러진 인생에 대해서, 그 내용이 어떤 내용인지를, 그것을 뒤에서 다시 차근차근히 소급해서 주님의 고생담을 다시 밟아 가는 것이 성도의 인생의 인생이란 말이다.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주님께서 어떤 골목골목으로 가셨는지, 주님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이 세상에서 빠져나가셨는지, 그 길을 따라서 우리도 이 세상을 빠져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대구 종로(?)에 가게 되면 '대구 50년사' 라고 해서, 대구의 옛날 골목을 그대로 보존을 해놓았는데, 그래서 나이가 좀 드신 분들은 친구와 함께 거기에 가보면, 옛날의 그 골목길 생각이 새롭게 난다는 것이다. 그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갔던 그 길을, 우리도 역시 그 길을 밟아가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말이다.


그게 곧 신앙생활인데, 자기 인생의 밥상을 따로 근사하게 차리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우리는 전혀 근사할 것이 없는데, 오히려 그러한 근사한 자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생활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표어를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는데, '근사하지 않기' 라고 말이다. '고상하게 살지 않기', '멋있게 살지 않기' 라고 말이다. 그렇게 사는 것은 간단한데, 꿈을 버리면 된다는 것이다.


◈ 예상하지 말고, 기대하지 말고, 짐작하지 말라 !!


그래서 제가 미리 예상하지 말고, 기대하지 말고, 짐작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그런 상태에서 나타나는 '나' 자신은 아주 멋있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으로, 위기를 극복한 의지의 한국인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이 멋있게 포장되는 순간, 우리는 대신 죽으신 분을 놓치는 순간이고, 마귀가 박수를 치는 순간이란 말이다. 


주일예배를 드리면서 은혜를 받고 다시 월요일이 되면, "성도로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것이 또 다시 궁금해지기 마련인데, 겨우 얼마나 지났다고 말이다. 과연 성도로서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그것은 바로 주님의 고생담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인데, 그것이 곧 신앙생활이란 말이다.


주님이 가신 길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인자는 머리를 둘 곳도 없다" 라고 하셨는데 말이다. 이것은 바꾸어서 말하면, 주님 앞에서 따로 자기 것이 없고, 그렇게 고생한 몸뚱아리 자체도 아버지의 것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고 하는데 말이다.


(눅 9: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그 말씀을 해석하기 위해서 교재 57페이지를 보자.


** 이런 해석을 위하여 우리의 소유 욕구는 늘 잠언의 지혜 앞에서 배척되어야 합니다.


◈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


예수님의 인생 자체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인자는 머리를 둘 곳도 없다" 라고 하셨는데, 그게 무엇을 함축하는가? 예수님은 이 땅에서 일체 자기 소유를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말이다.


법정 스님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그분은 '무소유'를 주장했는데, 하지만 성도는 무소유가 아니라 소유자라는 것이다. 즉 다 가진 자라는 말이다. 그러니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소유에 연연하지 않을 뿐이지,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무소유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성도가 가지는 것은 자기 노동의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상속된 것을 부여받게 된다는 것이다.


◈ 아들이 아니면 상속분이 없어 !!


지금부터 어려워서 제가 긴장이 되는데, 아무튼 상속이 되려면, 구약부터 내려오는 조건이 있는데, 즉 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들이 아니면 상속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종은 상속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들이 되면 되지 않겠냐고 할지 몰라도, 즉 하나님이 만들었으니 다 아들이 아니냐고 말이다. 인간에서 아들이 되려면 그 중간에 단계를 하나 거쳐야 하는데, 종의 단계를 말이다. 이것은 종2, 즉 하나님의 종인데, 그 이전에 종1, 즉 악마의 종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인고 하니, 인간 자체가 악마의 종인데, 그 악마의 종이 하나님의 종으로 바뀌었다가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노릇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는데, 그러니 하나님의 종노릇을 한다는 것은 율법의 종이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악마의 종은, 로마서 5장(6장?)에 보면 죄의 종이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롬 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롬 6: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성경에 이렇게 나오니, "아하, 성경의 이론은 저렇구나" 라고 할 수 있는데, 하지만 여기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이론이 아니라,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은 실제라는 말이다. 우리가 죽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율법에 의해서 죽어야하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하게 숨이 끊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영원한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 율법의 종과 사랑의 종 !!


"누구든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다" 라고 해서,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은 종으로서, 종이라고 하면 어려우니 그냥 쉽게 부하직원이라고 하면 되는데 말이다. 직원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냥 못하는 것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대로 살지 못하면 벌을 받아야 하는데, 즉 율법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종이 된다는 것이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런 율법의 종에 대한 반대말이 사도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여러 가지로 나오는데, 그 중의 하나가 '사랑의 종' 이라는 것인데, 즉 율법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의 반대말이 사랑에 의해서 사는 것이란 말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이전에는 율법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즉 아들의 영을 받아서 아들로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 하나님의 의 !!


그렇게 아들로 살면 어떻게 되는가? 아버지의 것을 상속받게 되어있는데, 그러면 상속을 받을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통해서 그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곧 '하나님의 의'를 말하고 있는데, 즉 "하나님이 의로운 것처럼 너희들도 의롭게 된다" 라는 것이다. 그것이 로마서 3장, 5장, 고린도후서 5장, 그리고 갈라디아서 등에 보면 계속해서 나온다는 말이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죽어도 살겠고 !!


율법으로는 우리가 늙어서 죽고 지옥에 가는 것이라고 하면, 반면에 하나님의 의를 받았다는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 '죽어도 살겠고' 라는 것이 정답이라는 것이다. "죽어도 산 사람이 보이지 않는데, 그것을 누가 믿겠는가?" 라고 하신다면, 예수님이 아들이기 때문에 죽었다가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맏아들은 형제가 있어 !!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예수님처럼 된다고 해서, 예수님을 그냥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맏아들'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맏아들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계신다는 의미이고, 또한 다른 형제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만 그런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형제들 중에서 맏이이니 말이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따라서 맏이에게 일어난 현상은 그 뒤의 동생들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형에게 일어난 현상을 동생들에게 그대로 반복해서 적용시키는데, 구약에서는 그것을 '맏물' 이라고 하고,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부활의 첫 열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예수님이 첫 열매라는 것이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그러니 같은 뿌리를 가진 나무에 있다고 하면, 그래서 이쪽 가지에 열매가 맺혔다고 하면 다른 가지는 전혀 초조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동일한 뿌리이고 동일한 줄기에 붙어있다고 하면, 이쪽 가지에 열매가 열렸는데, 그러면 다른 가지에 열매가 열리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즉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라는 말이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래서 성도를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하는 것은, 나무줄기와 가지와의 관계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나무 원 줄기에 붙어있는 가지라고 말이다.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관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풀나풀 돌아다니는 것도 주님 안에서, 주님의 가지로서 그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듯이,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란 말이다. 즉 주님은 문어이고 우리는 그 발의 촉수로서 살아가고 있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 주님은 머리, 우리는 촉수 !!


그것을 에베소서에서는 "주님은 머리이고 우리는 촉수이다" 라고 하는데, 물론 사람으로 표현해도 되겠지만, 왜 문어가 적절한고 하니, 문어는 머리가 대부분을 차지하니 그렇다는 말이다(ㅋㅋ). 머리와 발만 있는 문어, 그래서 "주님은 머리고, 우리는 그 머리에 달린 촉수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욱 쉽다는 것이다. 주님의 촉새라고 해도 할 수 없고 말이다(ㅋㅋ).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런데 그게 아니고 사람의 몸으로 하면, 목사가 자기는 모가지라고 우길 수가 있다는 것이다(ㅋㅋ). 머리와 지체를 연결해준다고 하면서 말이다. 장로는 쇄골이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정말로 곤란한데, 계급이 너무 많이 생기니 말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머리에서 나오는 힘으로 살아간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아주 간단한 논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힘이 무슨 힘인고 하니, 율법의 완성으로 말미암는 힘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아까 제가 뭐라고 했는가? 율법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까,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을 대신해주는 것이라고 했는데, 선한 사마리아인을 언급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율법의 힘은 "너의 인생을 내가 대신했노라" 라고 하는 그 능력이고 효과라는 것이다. 


◈ 부처를 만나면 부처도 죽여라 !!


불교와는 다른데, 불교는 철저히 개인이라는 것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도 죽여라" 라고 하는 것은, 부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즉 자기가 부처가 되는데 있어서 방해가 된다면, 그것은 부처라도 용납이 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을 깨닫게 되면 해탈한 것인데, 천하에 자기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런 것은 자기 혼자 조용하게 명상을 하면 깨달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조금 전에 이야기한 까뮈의 이방인의 경우에, 주인공이 뭐라고 하는가? "저 하늘의 별처럼 되고 싶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요즘 사람들이 스타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러면 당연히 별에서 온 그대가 스타라는 것이다. 어려울 때 도와주는 영웅이 등장하는데, 그게 별에서 온 그대라는 말이다.


흔히 사람들이 "나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남도 같이 챙깁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것도 잘못된 것인데, 왜냐하면 거기서 말하는 남은 주께서 붙여준 강도를 만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에서 난 자식들, 자기에게 너무나 잘해주는 친구들,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들, 같이 일하는 회사 동료들, 그런 사람들에게 잘해주는 것은 남에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본인이게 해주는 것이란 말이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서 두 가지를 해보면, 먼저 "니가 누구에게 대접을 하려고 하면, 차라리 거지나 못난 사람에게 해라. 왜냐하면, 그 사람이 너에게 대접을 하려고 하면 대접을 할 것이 없으니 할 수가 없다, 얻어먹는 주제에 말이다. 따라서 하늘나라의 상이 크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율법의 완성자는 예수님뿐 !!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하늘나라의 상은 어떤 상인고 하니, 아들 됨을 보일 때 받는 상인데, 그 아들 됨은 우리가 아들이 아니고, 아들의 모델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맏아들이 되는 예수님이 아들인데, 그 아들이신 예수님이 아낌없이 주셨다는 말이다.


(눅 6: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눅 6: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그리고 또 하나의 말씀은 무엇인고 하니,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먼저 하나는, 대접할 경우에 자기에게 갚을 입장이 되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라는 것이고 말이다. 이 두 가지를 합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대신'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누구밖에 없다는 말인가? 예수님뿐인데, 즉 율법의 완성자는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마 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입장에 있음을 발견하면 되는데, 하지만 우리가 만약에 주님과 함께 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소리를 들으면 뭐라고 하겠는가? "아하, 그런 것은 기독교 교리 가운데 하나다" 라고 하면서, 자꾸만 자기가 선택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불교 교리가 더 낫겠나? 기독교 교리가 더 낫겠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것은 부처나 예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선택한 것인데, 그것은 스스로 자기가 부처라고 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하늘의 별처럼 사는 것밖에 되지 않는데, 물론 그것이 불교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한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대신 살아주심이 성사되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다.


◈ 지혜만이 대신할 수 있어 !!


그렇다고 하면, 잠언서에서 종이나, 친구나, 아내나, 왕이나, 그런 여러 사람들 가운데서 여호와 경외를 뽑아내는 것은, 그 어느 누구도 자기를 대신할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아내를 자기를 대신해줄 수 없지만, 그런데 그 아내 속에 슬기로움이, 즉 지혜가 있을 때는 그 지혜가 자기를 대신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만난다고 할 때는,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면서 만나도록 하는 모습이 곧 여호와 경외가 된다는 말이다. 여호와 경외를 설명하는 것이 이렇게 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하, 이런 아들을 주께서 낳게 하셨구나" 라고, 즉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서 저 아들이 생겼구나" 라고 말이다. 


이제 교재 58페이지를 보자.


** 그래서 이 잠언은 "나는 아들이다" 라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우리는 아들이다" 라는 것만 허용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아들이다" 라는 것은 오직 한 분에게만 허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바로 잠언 8장에 나오는 지혜자입니다. 창세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그분을 모델로 삼아서, 그분을 중보자로 삼아서, 그분을 통해서 아들답게 전체 우주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서 '지혜자' 라고 하는 부분은 '지혜'로 바꾸었으면 좋겠는데, 지혜자와 지혜는 구분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즉 지혜자는 지혜를 받는 사람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지혜를 통해서 우주를 만들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유대인들의 해석법에 의하면, 그들의 해석법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 유대인들의 해석법에 의하면 !!


"세상 안에 지혜가 들어있다. 그러면 우리 유대인들의 할 일은 이 세상의 모든 학문 가운데서 지혜만 뽑아내면 된다. 인간의 모든 행동과 의식과 사상과 생각과 문화와 문명 속에서,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지혜를 뽑아내면 우리는 잘살 수 있다" 라는 것이 유대인들의 희망사항이었다는 것이다.


지혜를 뽑아낸다는 것은 질서를 뽑아내는 것이고 진리를 뽑아내는 것인데, 그 진리가 법으로 바뀌게 되면, 그것이 안식일 법이고, 성경말씀을 잘 지키기 위한 부차적인 법 제정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과 우리 사이에 가교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그런 식으로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 위해서 두 번째, 세 번째로 계속해서 연속되는 법들을 따로 발췌해내자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의식이 그렇다는 말이다. 


◈ 랍비여, 이것이 탐내는 것에 해당이 됩니까?


예를 들어서, "탐내지 말라" 라는 말씀이 나오면, 사람들은 자기들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랍비에게 가지고 가서 "랍비여, 이것이 탐내는 것에 해당이 됩니까? 안 됩니까?" 라고, 그러면 랍비는 뭐라고 하겠는가? "가만히 있어봐라. 이것이 탐내는 것에 해당이 되는가? 안 되는가?" 라고 하다가, "이것이 해당이 된다", 혹은 "해당이 안 된다" 라고, 그렇게 판정을 해주는 것이 랍비이고 스승답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랍비들은 자기 마음대로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과거 자기들이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믿음의 조상들이 어떻게 했는지를 잘 살펴서, "예, 그것은 지혜입니다", 혹은 "그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라고 판정을 내려준다는 것이다.  


◈ 내가 왔잖아 !!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보고 "너희들은 말씀을 버리고, 전통과 대대로 내려오는 전례들을 더 섬긴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을 유전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율법의 전통은 뭔데요?" 라고 나올 것이 분명한데,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왔잖아!"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막 7: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막 7:9)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곧 법이 되는데, 즉 "모세는 이렇게 일렀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 라는 것이다. 산상설교가 그런 식으로 되어있는데, 즉 예수님 자체가 법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율법은 우리가 봐도 알 수가 없는데, 하지만 예수님을 경유해서 보면 율법이 보인다는 말이다.


(마 5: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살인하지 말라' = '예수님을 사랑하라' !!


이것을 한 번 실험해보면, "살인하지 말라" 라는 것의 본래 뜻은 예수님을 경유하게 되면 "예수님을 사랑하라" 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살인하지 말라" 라는 것의 본래 뜻은 "예수님을 사랑하라" 라는 것이다. 그리고 "탐내지 말라" 라는 것의 본래 뜻도 역시 "예수님을 사랑하라" 라는 것이다. 즉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라는 것이다.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모든 율법을 다 어긴 것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것이 안 되는데, 왜냐하면 경유할 분을 놓쳐버리고, 직접 하나님의 말씀과, 또한 자기가 찾아내었다고 여기는 관행과 관습을 모세법과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가위로 끊어버리고 나서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 나는 오늘부터 40일 금식기도를 한다 !!


그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어떻게 되겠는가? 성경에서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다" 라는 것이 한 두 번이 나오는 것이 아닌데, 그래서 "나는 오늘부터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한다" 라고 했을 때, 그렇게 해서 자기 아들이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다고 한다면, 하지만 여기에 무엇이 빠졌는가? 끝까지 자기 사랑이라는 것이다.


아까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자기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자기 사랑의 다른 표현이라고 했는데, 결국 예수님처럼 남의 '대신' 사랑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것은 끝까지 자기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에 하나의 힘을 보태는 것이고, 자기 영토를 넓히는 작업일 뿐이지, 자기를 비우고 남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40일 금식기도를 해서 효과를 보았다. 성경말씀이 있고,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나는 그것을 믿었고, 그러한 기적이 나타났으니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 맞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모든 교회와 성당에서도 그런 식으로 설교를 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들의 입에서는 "여러분, 기도를 믿지 마세요" 라고 하지 않는데, 오히려 "결국 믿을 것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디모데전서에 보면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고 했습니다" 라고 하면서 더 부추긴다는 것이다. 말씀을 지키는 것도 자기가 할 수 있고, 기도를 하는 것도 자기가 할 수 있다고 하니, 그것은 결국 자기 도를 닦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절간이 아주 적절하다는 말이다.


(딤전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은 사람이 맞는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고 하니까, 아브라함을 만나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즉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이삭의 하나님이다.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다. 그들은 이미 천국에 가있다. 그리고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라고 말이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실제로 천국으로 갔다고 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그 얼마나 희망적이냐는 말이다. "그래도 가봐야 알지, 실제로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고 할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엘리야도 모세도 변화산에 나타났고, 실제로 거기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 그들은 실패자들 !!


그러면 그때부터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기에, 엘리야는 어떻게 했기에, 또 모세는 어떻게 했기에 갔는가?" 라고 하면서 살펴보게 되면, 그들은 당연히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실패자들인데, 심지어 모세는 가나안 땅에도 들어가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모세와 엘리야가 이미 구원을 받은 상태에서 변화산에서 주님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 언제 별세하십니까?" 라는 것인데, 그러니 구원은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된 문제이지, 자기가 얼마나 성실한지, 그런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2000년의 교회역사는 십자가를 가리는 쪽으로, 인간의 성실을 강조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 교인들에게 사기를 친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교인들도 복음을 모르니, "어, 뭔가 조금은 이상하다" 라는 생각은 하겠지만, 그렇게 까지 근본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거기에 대해서 시비를 걸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목사는 그런 것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자들이라서, 교인들에게서 그런 느낌이 있다 싶으면, 친구 목사를 초청해서 헌신예배를 드린다든지 하면, 교인들은 뭐라고 하는가? "아하, 우리 목사님이 맞구나. 우리 목사님이 이상한 게 아니구나" 라고 하면서 넘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친구목사도 와서는 똑같은 소리를 하니 말이다.


물론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해서 그게 통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러면 목사는 또 전문가답게 다른 방법을 동원하고 말이다. 그래서 교인들의 입에서 "우리는 우리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꼴을 먹어야해" 라고 하게 만다는 것이다. 물론 모두가 복음을 모르니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데, 지금 돌아가는 형국이 그렇다는 말이다.  


◈ 어떻게 종에서 아들이 되는가?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아들만이 상속을 받을 수 있는데, 그러면 아들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종에서 아들로 가게 되는데, 그것을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서 펼쳐놓은 것이 아브라함의 인생이란 말이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갈은 무엇이고 이스마엘은 무엇인가? 노골적으로 말해서 종년이고, 종년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말을 하고 보니 좀 그러한데, 즉 하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녀에게서 나온 아들은 상속자가 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나서 자기가 자식을 하나 그렇게 만들었는데, 하지만 그런 자식은 안 된다는 것이다. 즉 "하늘의 상속자는 니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만들어서 너에게 준다" 라는 것이란 말이다. 오직 약속에 의해서 만들어서 주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 사랑하기에 딱 좋은 나이 !!


그것 때문에 3명의 천사가 미리 현지답사를 겸해서 아브라함을 찾아왔고, 그 자리에게 아내인 사라는 키득거리면서 웃었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이 나이에?"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자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지금 니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에 딱 좋은 나이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ㅋㅋ). 그래서 이삭을 만들었는데, 그러니 주님의 말씀이 맞다는 것이다. 사랑하기에 딱 좋은 나이라는 말이다. 


(창 18:1)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창 18: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
(창 18:14)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창 18:15)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 인간의 아이디어가 전혀 포함되지 않은 '이삭' !!


그래서 이름을 '이삭' 이라고 했는데, 즉 인간의 아이디어가 절대로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아브라함이 믿는데, 아브라함 자신의 뜻이 전혀 포함되지 않았음을 말이다. 그게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믿음은 자기가 기대하고 예상하지 않은 내용들인데, 거기에 대해서 신뢰가 갈 때, 그게 믿음이라는 말이다. 자기 노동의 대가가 아니고, 자기와의 연속성이 끊어진 것, 그렇게 자기와 단절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뛰어넘는 능력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즉 믿음을 선물로 받지 아니하면 그 단절을 도저히 넘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데, 그런데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사람이 죽는 것은 죄를 지어서 죽는 것이고, 본래는 죽지 않는다"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참된 인간은 죽어도 다시금 살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다만 신분의 문제에 있어서, 즉 저주의 종이기 때문에 죽은 것인데, 만약에 아들만 될 수만 있다면, 즉 저주가 없는 상태가 된다면, 맏아들처럼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영광된 몸으로 부활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불교와는 전혀 다른데, 도를 닦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잊어버리지 싶어서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월요일 아침이 되면 "어떻게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지?" 라고 나올 것이 뻔하니까 말이다. 이미 대신 그 길을 가신 것을 뒤따라서, 그렇게 소급해서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항상 자기의 원대로 되지 않으니 감사할 뿐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항상 자기가 바라는 대로, 그런 자기 우상화에 몸이 가동되지 때문에, 주님은 그것을 기피하는 쪽으로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 종이 어떻게 아들이 되는가?


그렇다면 이렇게 종에서 아들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종에서 아들이 되는 과정을 따져본다고 했는데, 그러면 "종이 어떻게 아들이 되는가?" 라는, 그것부터 따져보자는 말이다. 여기서 종은 죄의 종, 혹은 악마의 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악마가 죄의 원형이니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종에서 아들이 된다고 했는데, 그렇게 되려면 뭔가를 찢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갑오경장 이후에 무엇이 없어지는가? 노비문서가 그만 폐기가 되는데, 즉 "인간이면 평등하다" 라는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김옥균 등이 주동해서 하다가 그만 3일 천하로 끝나는데, 러시아 군대가 쳐들어와서 말이다. 하지만 그 뒤에 근대국가가 되면서 모든 신분이 다 폐지되고, 능력이 있는 자라면 누구든지 공무원 시험을 칠 수 있는, 진급에도 지장이 없는 시대가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종에서 아들이 되려면 노비문서가 찢어져야 하는데, 그 장면이 골로새서 2장에 보면 나온다는 것이다. 13절부터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골 2:13)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골 2:14)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 2: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골 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골 2: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이섯이 무슨 의미인가? 주님은 우리를 직접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율법을 상대해서 우리에게 적용되던 모든 죄책을 대신 주님께서 다 가지고 가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의로운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는데, 즉 저주를 받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저주를 받음으로, 구원이 되어야할 자들이 지니고 있던 죄 값을 대신해서 치러주셨다는 것이다.


그것을 '대속(代贖)' 이라고 하는데, 즉 대신해서 값을 치러준다고 말이다. 그게 레위기에 보면 율법으로 나와있는데, 그러니 율법 안에 대신 죽음이 가득 담겨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레위기의 율법해석을 다시 해야한다는 말이다.


지금 성경말씀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러니 교회에서 자꾸 법을 새롭게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있는 법도 도말을 시키는데, 왜 자꾸만 법을 다시 만드느냐는 말이다. 또한 교인들도 그것을 원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라는 것이다. 자존심 때문에 그러한데, 그렇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암에 걸리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


그 다음에 여기 15절에 보면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너희들은 지금까지 패배한 채로 살아왔다" 라는 것이다. 자존심에 패배하고 위신에 패배하고, 그렇게 패배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주님이 승리하심으로서, 우리를 그동안 그렇게 힘들게 하고 패배로 몰아넣었던 것을 어떻게 하시는가?


그래서 16절 이하에 보면,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장래의 그림자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러면 실체는 무엇인가? 몸은 그리스도의 것인데, 즉 자기 개인의 몸으로 보지 말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도말하시고 찢어버리신, 그런 상태에서 부활하신 분이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너희를 정죄하던 자가 어디에 있는가? 너희를 고소하던 자가 어디에 있는가? 너희를 대신해서 죽으신 분이 계시는데, 그런데 왜 너희들은 그 찢어진 것들을 다시 붙이려고 하는가? 이미 주께서 모든 것을 다 해체해버렸는데 말이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1절에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가? 주님의 십자가의 믿는다면 율법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면 말이다.


(갈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그렇다면 바리새인들 중의 바리새인이고, 가브리엘 문하에서 교육을 받은 그가, 도대체 주님으로부터 어떤 소식을 들었기에 그런 말을 하느냐는 것이다. 이것을 기쁜 소식이라고 편지를 남기면서, 성령을 통해서 그 일에 대해서 전혀 거리낌이 없이 꿀리지 않고 외쳤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비록 얽매이지만 복음은 매이지를 않는다. 복음을 위해서 내가 있는 것이지, 나를 위해서 복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매여서 죽는다고 해도, 한 번 복음은 영원한 복음인데, 그러니 그 누구도 훼방하거나 방해할 수 없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그 어떤 것 너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는데, 그게 악마의 권세라고 해도 안 된다. 땅땅땅, 끝!" 라는 것이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롬 8: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 당황하지 말고 십자가를 들이대면서, 끝 !!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당황하지 말고 십자가를 들이대면서, 끝!" 이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 모든 중심에서는 대신 죽으심이 있고, 그 대신 죽으심 앞에서 '나' 라는 인간은 그 어떤 경우에도 남을 위해서 대신 살 수 없는데, 왜냐하면 자기 자신도 감당하지 못하니 말이다. 자기도 악마에게 얽매여서 살아가는데 어떻게 남을 대신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분들은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은 맞는데, 그런데 왜 거기에서 멈추십니까? 그 이후의 이야기도 해야하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렇게 해서 성령을 받은 우리가, 이제는 우리도 남의 위해서 대신 살 수 있지 않습니까?" 라는 것인데, 하지만 여기에는 무엇이 빠져있는가?


이게 우리가 보기에는 지금 이 때의 마지막 적그리스도인데, 왜냐하면 예수님을 경유해야하는데, 그게 그만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제 아무리 좋고 그럴 듯하게 말을 해도, 예수님을 쏙 빼버리면, 그것이 바로 적그리스도가 아니고 무엇이냐는 말이다. 즉 "예수님, 잘 알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나도 독자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어제 낮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수동적이다가 갑자기 본인이 주체자로 등장하고 마는데, 그것은 바로 처음부터 악마가 웅크리고 있다가, 즉 복음의 탈을 쓰고 있다가 자기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는 것이다. 마지막 종말의 때이니 활짝 자기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말이다.


◈ 다른 예수, 다른 복음 !!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목회자들이 어디 복음을 이야기하지 않았겠는가? 예수님도 이야기하고 성령도 다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는가? "너희들이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성령을 이야기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양의 탈을 쓴 악마의 종이기에 말이다.


(고후 11:1) 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
(고후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고후 11:3)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고후 11:4)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길로 가는데, 매사에 우리의 뜻과는 차별되게 주님께서 우리를 다루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순간 주님이 긍정되니 말이다. 자기도 긍정되고 주님도 긍정되는 법은 없는데, 그런 방법은 주님이 사용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 선지자의 특징은?


선지자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처음에는 자기들이 한 것 같은데, 하지만 마지막에는 이구동성으로 그들이 하는 말이 "이것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닙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게 곧 자기 부인인데, 기드온도 그렇고, 삼손도 역시 그렇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자기들이 주의 종이라고 설치는데, 자기들이 모두 다 알아서 할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얻어터지면서 나중에는 "주께서 저를 사용하셨군요"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적으로 나도 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웅크리고 있는 마귀가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마지막으로 결투하겠다고 나서는 것인데, 즉 드디어 악마가 본래 자기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말이다. 그게 바로 악마의 음성이고 모습이라는 것이다.


◈ 십자가 마을이여, 안녕 !!


이러한 멘트로 인해서 그동안 수많은 목사들과 교인들이 십자가 마을을 떠났는데, 저는 그것이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운지 모른다는 것이다. 가짜인 줄도 모르고 같이 있으면 곤란하니 말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이야기를 헤어지면서 이미 그들 앞에서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종에서 아들이 될 수가 없었는데, 종에서 아들이 되려고 하면 말씀에 의해서 자기가 날마다 죽어져야 한다는 것을 수용해주어야 하는데, 즉 종이 죽는 자리에서 아들이 나오는 것이지, '종 따로, 아들 따로'가 아니라는 것이다. 늘 종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성령께서는 우리를 아들답게 만들어내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참된 아들은 오직 한 분밖에 없는데, 그분이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을 맏아들로 섬기는 아들, 즉 양자인데, 그러니 예수님에게 "니만 아들이가? 나도 아들이다" 라고 하면서 막 먹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우리가 문어 속에 있는데, "니만 문어가? 나도 문어다" 라고 하면 곤란하다는 말이다. 만약에 자기가 따로 문어가 되려고 하면, C.C.C.나 구원파처럼 자기가 머리가 되고 자기 밑에 다리들이 수천 명이 깔리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기존교회도 마찬가지인데, 신천지도 그렇고 말이다. 모두들 자기가 머리 행세를 한다는 것이다.


◈ 이근호는 다리가 두 개 !!


이렇게 따로 문어가 되고 싶고 그 머리가 되고 싶어하니, 본인들에게 그러한 욕구가 있으니 자꾸만 저를 보고 하는 말이, "니가 머리가 되라" 라고 하면서, 그렇게 교주가 되라고 공격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십자가 마을에서 그것을 인정해줄 사람도 없지만 말이다. 그렇게 자기들이 문어이기를 원하기 때문에, 문어다리가 8개이지 싶은데, 그래서 "너거 교회는 교인이 몇 명이고?"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저는 알다시피 다리가 두 개밖에 없는데 말이다(ㅋㅋ).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 세상을 그렇게 보니, 아마 당신도 그렇게 생각할거야" 라고 여겨서, 그래서 그따위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이 눈에 보이는 질서와 형태를 가지고, 그것을 믿음으로서 예수님을 믿는 척을 하고 싶다는 말이다.


그래서 십자가 마을을 공격하는 사람들의 제일 큰 이슈가 무엇인고 하니까, 눈에 보이는 구체적이고 이상적인 교회형태를 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보고 싶고 그리운 것이 아니고 말이다. 성경말씀대로 살아가는 집단이나 무리, 그런 공동체를 자기들 힘으로 만들어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 이상적인 교회가 어디 없어요?


아마 김성수 목사와 그 무리가 그렇게 될 것 같았는데, 그런데 그분이 졸지에 '자살' 이라는 이름으로 순교를 하심으로서 이제는 유훈통치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저기 북한처럼 말이다. 즉 죽은 귀신이 통치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귀신이 통치하든 그 누가 통치하든 간에, 우리가 그렇게 고대하고 그리워하던 이상적인 교회가 지금 '서머나 교회' 라는 이름으로 잘 되어가고 있잖아? 우리가 노렸던 것이 바로 이것이야. 그런데 이근호 목사는 그것을 부정해버리면, 그렇게 바라던 것을 우리가 정작 만질 수가 없다고 하면, 그러면 우리는 도대체 누구를 믿어야만 한다는 말인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는 무엇이라고 답변을 하는고 하니, "주님의 복음을 믿으세요"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들은 차마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성령을 받지 않아서 말이다. 그러니 그것을 대신해서, 자기들의 믿음 없음을 감추는 방법으로 이상적인 교회는 찾는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교회'는 거기에 미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상규 집사가 저렇게 똥폼을 잡아서 꼴보기가 싫고, 거기에다 최종운 장로님까지 버티고 있으니 나오기가 싫다는 것이다. 물론 안 집사님은 아직까지 그럴 사람이 별로 없지 싶은데 말이다. 혹시 있습니까? (ㅋㅋ)


복음을 외치면 그 복음에 감사하면 되는데, 그런데 "누구 꼴보기가 싫다" 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자기가 꼴보기 싫은 사람이 나가주면 나오겠다는 것인데, 그러니 그것은 결국 이상적인 집단을 손에 쥐고 싶다는 것인데, 그러니 이게 도대체 뭐냐는 것이다.


◈ 복음 앞에서는 교회도 부정되어야 !!


그래서 제가 항상 강조를 하지만, "복음 앞에서는 교회도 부정되어야 한다" 라는 것이다. 우리가 설령 돈이 없어서 이 건물에서 나가게 되면, 길바닥에 앉아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그것이 엄연한 교회라는 말이다. 얼마나 이런 이야기를 많이 했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다들 듣는 순간에는 '아멘' 이라고 해놓고는, 그런데 돌아서면 뭐라고 하는가? "나는 누가 보기 싫고, 누가 마음에 들지 않고, 또한 목사님은 누구를 편애하고" 라고 하면서,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핑계를 대면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가 어떻고 저떻고" 라고 하면서 말이다.


또 어떤 분은 자기 남편을 건드렸다고 하면서 나오지 않는데, 하지만 제가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는 것이다. 복음 말고 말이다. "내 남편이 복음을 믿지 않으니, 나는 나올 수 없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개뚱단지 같은 소리냐는 것이다. 자기는 복음을 믿는데, 자기 남편이 믿지 않아서 교회에 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 남편도 하나 전도하지 못하면서 무슨 교회에 다니노?" 라는 소리가 듣기 싫다는 것인데, 그러니 제발 좀 주님을 경유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라고 하지 말고, 제가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는가? 잠언이라는 것은 자기밖에 모르는, 즉 그 누구도 자기를 대신할 수 없는 모임 속에서 '여호와 경외'가 피어난다는 것이다. 제가 이전에 있던 교회에서는 "사모님이 좋아서 나옵니다" 라고 하는 교인들도 있었는데, 다른 여자와 결혼했으면 큰일이 날 뻔했다는 말이다(ㅋㅋ).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택하신 자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인데, 따라서 그런 사람들을 보고 불평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을 불평한다는 것은, 우리도 그런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이상적인 공동체를 그리워하는, 그러한 우상숭배에 빠질 가능성이 많으니 말이다.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 라이프니찌 - '현재가 최적이다' !!


다음과 같은 말이 있는데, "현재가 최적이다" 라고 말이다. 이게 라이프니찌라는 철학자가 한 말인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에, 주신 것에 감사하고 더 욕심을 내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불만이 가득하지만,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가장 적절하기에, 그런 사태와 상황을 지금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믿으면 안 되는데, 믿게 되면 또 다시 뒤틀리게 된다는 말이다. "주여,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라고 베드로가 이야기했는데, 그렇게 베드로가 뒤틀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초막을 세 채나 짓고 해도, 그것은 베드로의 뜻이지 주님의 뜻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어떤 일을 하더라도 스트레스를 받을 이유가 없는데, 왜냐하면 지금의 그 일이 주님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일이고 최적의 일이기에 말이다. 그런데 그게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인상을 쓰고, 그래도 자기가 신앙인이라고 남에게 말도 못하고 말이다. 감사헌금을 하지만, 그게 감사가 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본인이 힘든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58페이지를 보자.


** 집단이 없으면 아들이 생성되지 않습니다. 너와 나가 모여야 지혜가 서로 간에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가 보이게 됩니다. 혼자 잠언을 펴놓고 도를 닦으면 여호와 경외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 집단이 없으면 아들이 생성되지 않아 !!


여기에 "집단이 없으면 아들이 생성되지 않습니다" 라고 되어있는데, 모두가 다 종이기 때문에 아들은 하나님이 만드시는데, 그 아들 만들기는 아들의 영이 와야만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아들의 영은 십자가를 통해서 오시는데,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고 하니, "너희들은 다 종이기 때문에 아들이 될 수 없어" 라고 판정을 하신다는 말이다.


그렇게 판정을 하고 난 다음에, 즉 아들이 될 수 없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율법완성이라는 공로가 덧입혀져서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아들이 전혀 될 수 없는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아들이 되고 싶어서 아들이 되었습니다" 라는 소리가 도저히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모든 원리원칙이 집단 속에서 이루어지는데, 애를 먹이는 자식들, 돈도 벌지 못하면서 큰 소리만 치는 남편, 늘 인상을 쓰는 시어머니, 틈난 나면 시기하고 질투하는 교인들 사이에서 말이다. 그러니 "에이 꼴보기도 싫다. 나는 집에 있을 거야" 라고 하지 말고, 그런 가운데 자기도 남들을 비난하면서 그들의 잘못을 대신해줄 수 있는, 그러한 역량이 자기에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도 역시 자기만 챙기는데 있어서 급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런 이기주의적인 속성을 품고 있다는 것을, 그것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는 것을, 그것이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집단 속에서 다시 한 번 재확인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 뺑소니 인생 !!


어제 오후시간에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서 살아가는가? 다른 사람이 잘못하는 것은 신고하기에 바쁘지만, 자기 잘못에 대해서는 뺑소니치기에 바쁘다는 말이다. 자기의 잘못에 대해서는 그렇게 숨기기에 급급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숨으려고 해도 주님 앞에서는 결코 숨을 곳이 없다고 하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즉 "홀로 있어도 주님과 함께 있다" 라고 말이다. 마치 나다나엘처럼, 무화과나무 밑에서 기도해도 주님이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이다.


(요 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 1:48)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사람에게 있어서 제일 서러운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가 고생 고생해서 했는데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 때인데, 하지만 주님이 이미 그런 체험을 하셨다는 것이다. 12제가 있어봐야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모든 오해와 곡해 속에서 주님은 홀로 가셨다는 말이다.


자기는 분명히 주님의 뜻대로 하는데 남들이 박수를 쳐주지 않고, 심지어 자기가 가장 투자를 많이 하고 사랑한 그 가족마저 무시하면서 돌아설 때 얼마나 낙담이 되겠는가? 하지만 그런 체험이 성도가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겨 달라는 것이다. 그렇게 믿어야 한다는 말이다.


◈ 내 아들을 내가 만든다 !!


이제 정리하고 마치도록 하겠는데, 종에서 아들을 만든다는 것은, 먼저 우리는 아무도 종에서 아들이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종에서 아들을 만드는데 있어서 무엇이 개입되어야 하는고 하니, 여기에 다윗언약이 개입된다는 것이다. 이게 지금 잠언이니 말이다.


그렇게 다윗언약이 오게 되면, 다윗언약은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 프로젝트가 곧 다윗언약이란 말이다. 즉 "내 아들을 내가 만든다. 너는 성전을 만들지만 나는 아들을 만든다. 너는 니가 만든 그 성전 안에 내가 있기를 원하지만, 나는 내가 만들 아들 속에 있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예수님은 "내 안에 아버지가 계신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즉 아들 바깥에는 아버지가 없다는 것인데, 아들 외에는 말이다.


◈ 밥상을 걷어차라 !!


흔히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하나를 추가하듯이, 그렇게 있는 하나님에게 예수님을 추가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밥상이라고 오해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밥상은 걷어 차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에게서 예수님에게도 넘어오는데 있어서는 기존의 하나님을 차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고상하신 하나님, 그것은 사울이라는 인간이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알았던 하나님이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 하나님 외에 다른 하나님은 모르는데, 모두가 그 안에 있다는 말이다. 그게 모든 인간들의 모습인데, 하지만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십자가를 통해서 기존의 자기가 알던 하나님은 숟가락만 하나 얹어도 되는 하나님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러한 가짜 하나님이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숨어계시는 하나님을 비로소 발견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오로지 예수님을 통해서만 아버지의 상속을 공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잠언이 아들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 아들은 우리를 대신해서 살아줄 수 있는 아들임을 이제 알았사오니, 이렇게 우리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이라고 할지라도, 그것마저 하나님께서 최적으로 만드신 환경임을 의심하지 않고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4,10,04 오후 11시에 마침.


                                                                      오늘이 어머님 생신이었는데,
                                      그 어머님을 통해서 주님의 아들 만들기가 됨을 감사케 하옵소서 !!


 


-----------------------------------------
* 질문 - 목사님, 변화산의 모세와 엘리야의 경우에는 아직 주님이 별세를 하기 이전이라서 처소를 만들기 이전인데, 그러면 그들이 있던 천국과 처소를 만든 다음의 천국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천국에 가면 기존의 이 땅에서의 관계로서, 그런 식으로는 서로를 알아볼 수는 없는 것으로 아는데, 그런데 모세야 엘리야는 서로 아는 사이처럼 보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아직 처소를 만들기 이전의 상태라서 기존의 모세와 엘리야로서 아는 것인지, 아니면 천국백성으로서 아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
※ 이방인(L'Etranger)
1942년에 발표한 카뮈의 처녀작으로서, 그의 명성을 일약 세계적으로 떨치게 한 작품이다. 주인공인 뫼르소는 북아프리카의 알제에 사는 평범한 하급 샐러리맨인데, 양로원에서 죽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이튿날, 해수욕장에 가서 여자 친구인 마리와 노닥거리다가, 희극 영화를 보면서 배꼽을 쥐는가 하면, 밤에는 마리와 정사(情事)를 가진다. 며칠 지난 일요일에 우연히 불량배의 싸움에 휘말려, 동료 레이몽을 다치게 한 아랍인을 별다른 이유도 없이 권총으로 사살한다. 재판에 회부된 그는 바닷가의 여름 태양이 너무 눈부시기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고 주장하고, 속죄의 기도도 거부하며, 자기는 과거에나 현재에도 행복하다고 공언한다. 처형되는 날은 많은 군중이 밀려들 것을 기대하며 이 수기(手記)는 끝난다.
뫼르소는 언제나 현재의 욕망에 강하게 지배되어 이해타산도 없이 행동에 몰입하는 인간이며, 그런 의미에서는 순진하고 자신에게 정직한 인간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를 부조리(不條理)한 인간의 전형, 즉 인간 존재의 무상성(無償性)을 자각한 인간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그러한 의식이 그에게 있는지 없는지는 의문이며, 오히려 자신의 욕망에만 집중하는 실존주의적 현대인들과 닮은 점이 많다. 그러나 뫼르소를 현대사회에서 소외된 '비극적 인간상'(반소설 작가인 로브그리예의 말)으로까지 승화시킨 것은 카뮈의 작가적 역량이다. 카뮈 자신이 영어판 서문에서 뫼르소는 현대에 있어 유일한 그리스도일 수 있다고 한 것은 흥미 있는 말이다. - 두산백과에서
-----------------------------------------


♣ 이방인 [ L'Etranger ] ♣


『이방인』은 카뮈 생전에 완성되고 출판된 첫 번째 소설이다. 프랑스에서 1942년 5월 19일 판매되기 시작한 이 작품에서 뫼르소는 어머니의 사망을 전하는 전보를 받고, 장례를 치르고, 아랍인을 총으로 살해하고, 재판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는다. 카뮈의 '부조리 사상'이 『시시포스 신화』라는 철학적 에세이와 더불어 『이방인』이라는 본 소설에서 제시되고있다.


작가,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1913~1960)
발표, 1942년 간행
장르, 장편소설
 
카뮈의 『이방인』은 그가 알제리에서부터 구상하기 시작해 1940년 6월에 집필을 완료했다고 알려져 있다. 프랑스가 전쟁에 패했을 때 카뮈는 클레르몽페랑 시로 피난을 가면서 타고 간 자동차의 트렁크 속에 『이방인』 원고를 싣고 갔는데, 그 원고는 그 후 느리고도 어려운 길을 거쳐 마침내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그리고 생전의 카뮈는 스스로 가장 '부조리한 죽음'이라고 말했던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이방인』은 "오늘, 엄마는 죽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여 곧바로 "아니 어쩌면 어제였을지도 모른다."라는 서술이 뒤따르는 간결한 문체와 밋밋하고 건조한 문장들이 독립적으로 병치되어 있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방인』은 '자기 자신과 사회에 대해 낯설게 느끼는 자' 혹은 '사회가 이상한 사람으로 치부하는 자'이고,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괴팍한 인간' 뫼르소가 등장한다.


주인공 뫼르소는 보통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괴팍한 인물로 비춰지기도 한다. 하지만 뫼르소는 어머니의 사망을 전하는 간결한 전보를 받은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보여주었을 것처럼 뒤이을 의례화된 장례절차에 따랐으며, 어떤 면에서는 보통사람과 마찬가지로 무난히 장례를 마쳤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슬픔이 외부로 표출되든 그렇지 않든 어머니의 죽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동반한다. 다만 뫼르소는 그 슬픔을 눈물이라는 매개를 통해 외부의 타인들에게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여러모로 자신의 심리상태, 내면의 모습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진술했다. 요컨대 『이방인』의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에 의해서 유죄를 선고받았다고 할 수 있다. 작품 속 검사의 시각에서 보자면 그런 인간은 이미 살인의 마음을 품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며, 결국 법정의 판단은 그런 마음을 품은 모든 독자들에게 유죄를 선고할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카뮈의 『이방인』은 어머니의 죽음, 아랍인의 죽음, 뫼르소에게 선고된 죽음을 통해서 인간 실존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뫼르소의 거짓 없는 자기 드러내기를 통해서 카뮈는 인간의 삶에서 '이방인'이었던 인간 존재가 부조리를 자작하도록 이끌고 있다. 정상으로 올려놓으면 다시 밑으로 굴러 떨어지고 마는 바위 덩어리를 다시금 묵묵히 밀어올리기 위해서 아래로 내려가는 '시시포스'처럼, 『이방인』의 뫼르소는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우리 인간을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 등장인물 ]
* 뫼르소 : 주인공으로서 '부조리'라는 개념을 구현하고 있는 정직한 인물. 알제리의 수도 알제에 거주하는 젊은 사무원.
* 마리 카르도나 : 뫼르소가 전에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던 타이피스트.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난 바로 다음날 상중의 뫼르소와 밤을 함께 보낸다.
* 레이몽 생테스 : 뫼르소와 같은 층에 사는 이웃. 뫼르소에게 친구가 되어 달라고 제안하고 자신을 대신에 편지를 써주기를 부탁하며, 뫼르소와 마리를 문제의 일요일에 자신의 친구의 별장으로 초대하여 뫼르소의 아랍인 살해의 단초를 제공한다.


[ 작품 줄거리 ]
 
『이방인』은 전체 2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1부는 6개의 장으로, 2부는 5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
1장. 알제에 거주하는 젊은 사무원 뫼르소는 마랭고의 양로원으로부터 엄마의 죽음을 알리는 전보를 받고서 양로원으로 간다. 그리고 양로원 원장과의 대화, 문지기와의 대화, 문지기가 뫼르소에게 밀크 커피를 제공, 끝날 것 같지 않은 밤샘이 이어진다. 다음날 장례식을 마치고 알제로 돌아온다.
2장. 토요일이다. 잠에서 깨어나자 뫼르소는 해수욕을 하러 가고, 그곳에서 마리 카르도나를 만나 그날 저녁 영화관에 가고 함께 밤을 보낸다.
3장. 월요일. 뫼르소는 층계에서 살라마노 영감을 만난다. 그 영감은 같은 층에 사는 이웃이고, 그의 옆에는 구박덩어리 개가 항상 함께 있다. 그리고 같은 층에 사는 다른 이웃인 레이몽 생테스를 만난다. 그리고 레이몽과 친구가 된다.
4장. 한 주가 흘러간다. 토요일에 마리와 해수욕을 한다. 증인이 되어 달라는 레이몽의 부탁을 들어주고, 살라마노 영감이 방안에서 우는 소리를 듣는다.
5장. 레이몽이 한 친구의 알제근처에 있는 조그만 별장에서 오는 일요일을 보내자고 뫼르소와 마리를 초대한다. 레이몽은 하루 종일 자기 옛 정부의 오빠도 낀 한 패의 아랍인들에게 미행을 당했다.
6장. 일요일에 뫼르소, 마리, 레이몽은 별장으로 간다. 그곳 해변에서 뫼르소는 아랍인을 권총으로 죽인다.


제2부
1장. 예심판사의 여러 차례의 심문이 이어진다. 예심이 11개월 동안 진행된다.
2장. 뫼르소의 감옥 생활, 마리의 면회와 감방에서의 뫼르소의 관심사들이 소개된다.
3장. 다시 여름이 되고, 재판이 시작된다. 심문을 통해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것, 마지막으로 어머니 시신을 보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 담배를 피우고 밀크 커피를 마셨다는 것이 알려진다.
4장. 뫼르소는 마치 이방인처럼 법정에 앉아 있다. 사람들이 그에 대해 말을 하면서도, 결코 그에게 의견을 묻지 않는 것이다. 검사의 눈에는, 뫼르소가 범죄를 사전에 계획했다는 것이다. 검사는 피고의 '냉담함'을 고발하면서 여러 사실들을 추적한다.
5장. 뫼르소는 형무소 부속 사제의 면회를 계속 거절하다가 결국 사제와의 면회를 하게 된다. 이후 뫼르소는 자신의 사형집행을 인정한다.


* 작품 속의 명문장 - "오늘, 엄마는 죽었다."


이 번역문은 『이방인』 원문 첫문장, “Aujourd'hui, maman est morte.”(오주흐뒤, 마망 에 모흐뜨)를 옮긴 것이다. '죽었다', '죽는다'라는 동사에 앞서는 '엄마는'이란 주어 자리에 모든 인간은 예외가 없음을 카뮈는 말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방인』에는 죽음이 여럿 나온다. 먼저 엄마의 죽음, 아랍인의 죽음, 그리고 뫼르소의 선고된 죽음이 뒤따른다. 이 죽음들은 자연사, 살해, 또한 법에 의한 죽음의 선고라고 할 수 있다. 죽음에 직면한, 인간의 숙명에 직면한, 아니 엄마의 배에서 나온 인간 존재 자체의 실존에서 엿보이는 '부조리'는 죽음에 대한 성찰로 이끌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방인 [L'Etranger] (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 프랑스문학, 2013.11, 인문과교양)


 


 


 


 

 첨부파일 : 14대구강의('잠언'속의그리스도)15-관계속의경외(57페이지).zip (55.5K), Down:5
  ◁ 이전글   다음글 ▷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 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