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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9 22:34:49 조회 : 761         
[14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16 - 세상이란?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14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16 - 세상이란?
                                                                                
                                                          14,09,22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59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예수님의 죽으심에 참여한 자만이 세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세상' 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하나님은 이 세상을 어떻게 보시는고 하니, '예수님의 죽음을 유발하는 장치'로 보신다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 인간들은 '인간들의 노력의 집결'로 보는데, 인간들이 노력한 그 결정체로 말이다. 즉 인간들이 고생하고 노력한 그 모든 것이 집결된 것이 바로 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 이 세상은, 예수님의 죽음을 유발하는 장치 !!


그런데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예수님께서 '꼭' 죽으셔야만 하는 장치로, 혹은 그런 환경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먼저 있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죽어야만 주가 되신다" 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아들에서 주가 되려면 죽음이 있어야만 하고, 그 죽음에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세상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은 예수님의 죽음을 유발시켜야 하고, 그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은 주가 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은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창세기 1장 1절부터 적용시키면 어떻게 되는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니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유발시키기 위해서 창조하셨다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것이 사도바울을 통해서 골로새서 1장에서 알려주고 있는데, 즉 복음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너가 아니고 나다" 라는 것이다. 어제 낮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성경은 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만 뭐라고 하는가? "어떻게 하면 내가 거룩해질까? 내가 얼마나 착해질까? 그렇게 착해지면 천국에 갈 수가 있을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말씀을 봐도 어떻게 하는가? 자기 천국, 자기 구원, 자기 거룩, 자기 착함, 자기 고상함을 펼치기 위한 용도로서 펼쳐본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아니고 말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들이 다 그러한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즉 성경이 신의 말씀이니 우리는 그 앞에서 깜박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도대체 성경이 아니라고 하면 어디에서 그런 신을 말씀을 찾아볼 수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 몰몬교의 경우에 !!


몰몬교의 창시자가 동굴에서 금으로 만든 성경책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가르쳐주어서, 거기에 가보니 그게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거기에 있는 내용이 기존의 성경책과는 달라서, 그래서 기독교와 유사하지만 기독교가 아닌 몰몬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보면 몰몬교 교인들이 있는데, 왜 단정하게 머리를 깎고 까만 양복을 입고는 두 사람씩 다니는 미국의 젊은이들이 있는데, 바로 그들이라는 것이다. 몰몬교 교인들은 남자의 경우에 성인이 되면 일종의 의무로서, 마치 우리나라의 병역의무처럼, 그렇게 20살이 갓 넘은 젊은이들이 각 나라에 파견이 된다는 것이다.  


저도 과거에 그런 젊은이들을 그냥 무심코 보았는데, 지금은 'IS' 라고, 이슬람의 테러단체인데 말이다.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런 정체성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젊은이들을 동원해서 종교에 몰입시키고, 그러면 그들은 죽기 살기로 환상을 쫓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니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인생을 넓게 보기 이전에 순간적인 결심에 의해서 자기 인생을 끝내겠다는 식으로, 그렇게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젊은이들에게 종교단체가 그런 자아 정체성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을 이용해먹는데, 이런 것이 참으로 위험한 짓이란 말이다. 


그렇게 몰몬교에서는 젊은이들을 집집마다 돌아다니게 하고, 또한 좋아하지도 않는 돼지국밥을 먹게 하면서 친근감을 유발시키는데, 그리고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이 있으면 꼬드겨서 자기들 종교로 끌어들이려고 하고 말이다. 이런 몰몬교나 이슬람교, 그리교 유대교와 같은 종교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잘되기 위한 것이 우선적으로 깔린다는 것이다.


◈ 성경은, 창세기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


하지만 성경은 무엇인가? 창세기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에, 그건 창세기 1장만 그런 것이 아니라, 3장에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냥 단순히 나무가 있다고만 여기지 말고, 여기서 우리가 한 번 상상을 해보자는 것이다.


어느 날 주님의 계시가 떨어지기를, "저쪽 산에 있는 나무의 과일은 절대로 따먹지 말라" 라고 했다면, 그러면 우리가 그때부터 과연 잠을 잘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도대체 왜 그 나무의 과일은 먹으면 안 되는지, 그것이 궁금해 미친다는 것이다. 도대체 다른 나무와는 무엇이 달라서 그렇게 먹지 말라고 하시는지 말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라고 하는 금지에 대해서, 우리 인간은 그 금지선을 넘어가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금지선을 넘어가 주어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단독적으로 분석하면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관련을 짓게 되면, 비로소 "아하, 인간은 주님 앞에서 죄인임이 드러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구나" 라고, 그렇게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어제 낮 시간에도 잠시 언급을 했지만, 너무나 귀한 말씀이라서 오늘 이 시간에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고자 하는데, 로마서 3장 21절에서 25절을 살펴보자.


(롬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 율법 외에 한 의(義) !!


여기 21절에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율법이 하나님의 계시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그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적이란 말이다. 율법은 우리에게 "하지 말라" 라고 하는데, 하지만 선악과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라고 하면서, 매일같이 거기에 신경을 쓴다는 것이다. "율법에 입각해서 우리가 지켰는가? 아니면 어겼는가? 지켰으면 한 주간 복을 받을 것이고, 어겼으면 벌을 받을 것이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주님은 율법을 주시고 난 다음에 뭐라고 하시는가? '율법 외에' 라고 하시면서 율법을 치워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이것을 지켜서 복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어겨서 저주를 받을 것인가?" 라고 하는, 그리고 "내가 천국에 가겠나? 아니면 지옥에 가겠나?" 라고 하는 생각조차도, 너무나 우리들의 일방적인 근심이었고 오해였고 자기 몰두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 법에 얽매인 인간들 !!


물론 여러분들은 거기에서 탈퇴를 하셨지 싶은데, 그렇지요? 그렇게 치우면 되는데, 하지만 인간들은 치우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거룩한 말씀인 성경말씀을 주셨는데, 우리가 이것을 지켜야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벌벌 떨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율법 외에', "지키면 복을 받고,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는 것 외에, 그런 것은 제쳐두고 보면 어떻게 되겠는가? '율법 외에' 라는 것은 '법 외에' 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법으로 정당성을 보장받으려고 하는데, 즉 "내가 법을 지켰을 때는 정당하고, 법을 지키지 못했을 때는 정당하지 않다" 라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그만 그 법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 이제는 법이 아닌 다른 기준으로 !!


그러니 '법 외에' 라고 하게 되면, 졸지에 "나는 정당하다. 정당하지 못하다" 라는 것이, 그것이 그만 다른 기준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법 외에' 기준인데, 그런 기준으로 주어진다는 말이다. 모든 사람이 천국에 간다는 것이 아닌데, 분명히 지옥에 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옥에 가는 사람이 지옥에 가는 이유는 법으로 가는 게 아니라, '법 외에' 것에 의해서 지옥에 가고,  천국에 가는 사람도 역시 '법 외에' 것에 의해서 가게 된다는 말이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로마서 3장 21절에서 '율법 외에 한 법' 이라고 했을 때,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그들은 율법을 치우게 되면 덤벼들 게 없어진다는 것이다. 즉 "나는 이것을 지켰습니다" 라고 할 게 없다는 말이다. 목사가 "십일조를 하세요. 주일성수를 하세요" 라고 하면, 거기에 대해서 교인들은 뭐라고 하면서 덤벼드는가? "목사님, 제가 이렇게 바쁜 일이 있어도 교회에 나왔습니다. 형편이 넉넉지 못해도 십일조를 냈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롬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그런데 "그것을 치우시고" 라고 하게 되면, 자기 정당성을 보장받을 건더기가 없어지게 되는데, 그러면 매우 당황스럽다는 것이다. 그렇게 법이 없으면, 자기의 잘남도 없어지는데, 물론 자기의 위반도 없어지지만 말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의 우쭐거림도 사라지고 마는데, 사람은 그런 재미로 살아가는데 말이다. "나는 착하기 때문에 범사에 복을 받고, 너는 못났기 때문에 범사에 벌을 받는다" 라고 하는 재미로 말이다.


◈ 차별이 없느니라 !!


그런데 그런 근거를 치워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그래서 그 다음에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22절에 보면 "차별이 없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법을 치우게 되니까, 그 법에 의해서 매겨지던 점수가 그만 사라지고 만다는 말이다. 


(롬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옛날에 '예비고사' 라는 시험이 있었는데, 그것은 요즘의 수능시험과는 달라서 그 사람이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지 없는지, 그것만을 판정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점수는 대학입학시험에는 전혀 반영이 되지 않는데, 다만 그 예비고사에 합격하면 대학에 들어가는 시험에, 그것을 '본고사' 라고 했는데, 그 시험을 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는 것이다.


왜 그런 시험이 있었는고 하니까, 대학에서 배우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과연 학생들이 그런 공부를 따라갈 수 있는지, 그것을 본다는 말이다. 지금도 외국에서는 이런 시험이 많이 있는데, 그래서 괜히 대학에 들어와서 아까운 시간과 돈만 날리지 말고, 차라리 살아가는데 훨씬 더 도움이 되는 기술을 배우는 쪽으로, 그렇게 유도를 한다는 것이다. 독일의 경우도 그렇고 말이다.


제가 보기에는 그게 옳지 싶은데, 일반 예비고사를 치게 되면 그 사람들끼리는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은 수능을 준비하신 것이 아니라, 예비고사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비를 빼고 그냥 '고사' 라고 하면, 주님께서 그렇게 고사를 치렀는데, 거기에 합격된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믿는 자들' 이라는 것이다. 22절에 보면 '모든 믿는 자에게'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 자들에게는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이게 분명히 로마서 3장 22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이렇게 성경에 분명히 박혀있는데, 그런데 왜 한국교회는 이 이야기를 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마귀에 들려서 그러한데, 즉 악마의 종이기 때문에 이 말을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2,000년 기독교 역사와 신학이 이 한 마디에 다 무너지는데, "차별이 없느니라" 라는 말씀에 말이다.


상급에는 차별이 없다는 것인데, 그러니 "교회에 봉사를 하나 하지 않으나 차별이 없다" 라고 하니, 완전히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이 분명히 복음인데, 이것을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과연 목사만의 잘못인가? 아니라는 것이다. "믿지 않아도 천국에 넣어주세요" 라고 하는 민중들 때문에 그러한데,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가?


◈ 예수님은 바깥에서 구경하세요 !!


그것은 바로 자기 믿음이 너무 크게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인데, 자기 안에 말이다. 평생을 자기밖에 모르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는 주님이 들어올 틈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에게 허락을 받지 않으면 누구든지 밀어내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자기에게 유리하지가 않으면 말이다.


인간은 그렇게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살아가는데,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가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하겠는가? 자기 자존심과 체면에 손상이 가니까 강력하게 밀어낸다는 것이다. 자기가 얼마나 착하게 잘 사는지, 예수님은 그것을 바깥에서 구경이나 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밀어내면 자기에게 남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법만 남게 되는데, 오히려 그것을 원하고 있다는 말이다.  


교인들이 하는 말이 무엇인가? "목사님, 시켜만 주세요" 라고 하는데, 주일에 밥을 할 때 쌀을 27컵을 하는데, 저기에 붙여놓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켜만 달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고 나서는 나중에 식기세척기를 돌려서 설거지를 하면 되고, 얼마나 간단한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런 것이 모두 행함인데, 그것을 하고 나면 얼마나 흐뭇한지 모르는데, 생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돈다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주님이 시키는 대로 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그것을 치워라" 라고 하는데, 아니 그 좋은 것을 왜 치우느냐는 것이다. 시키는 대로 하면 복을 받는데 말이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고, 그것이 몸에 딱 맞다는 것이다.


◈ 이번에는 동부리가 예배당 청소입니다 !!


시골교회에서 설교를 하면, 할머니들은 성경말씀은 전혀 알아듣지를 못하고 그냥 주무시기만 하는데, 그러다가 "동부리 교인들은 이번 주에 예배당 청소입니다. 잘 알겠지요?" 라고 하면, "예, 알겠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설교시간이 아니라 광고시간이 은혜를 받는 시간이라는 말이다(ㅋㅋ).


그러니 이미 법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어서 자기 안에 법이 들어있기 때문에, 자기가 잘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도저히 부인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재미로 살아가는데, 그래서 주님은 그런 점에 대해서 공격하신다는 말이다.


◈ 같은 곡물을 먹고 살아가는 인간들 !!


이 "차별이 없느니라" 라는 것을 어제 오전설교 끝 부분에 잠깐 언급을 했는데, 즉 "모든 사람은 같은 곡물을 먹으면서 살아간다" 라는 것이다. 이게 전혀 틀린 말이 아닌데,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국 인간은 똑같다는 것이다. 결코 유별난 인간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오후시간에 연결해서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 우울증에 걸려서 죽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이것 하나만 알면 되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라는 것인데, 이것만 알아도 그런 것들은 다 사라진다는 것이다. "내가 병에 걸렸다고? 불면증이 있다고? 내가 아무 것도 아닌데, 왜 자꾸만 내가 고치려고 했지?"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니 말이다.


특히 큰 일을 앞두고서, 박태환의 경우에도 자유형 200미터를 앞두고 너무나 마음에 부담이 심해서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고 하는데, 왜 그런가? 그냥 자기가 신인이라고 여기면 되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이 체육관이 내 이름으로 지어진 박태환 체육관이고, 이번 아시안 게임에 국민들의 기대가 너무나 커다" 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자기가 무엇이라도 된 것처럼 여기니 좋은 성적이 결코 날 리가 없다는 것이다.


◈ 우리는 그냥 하루살이 !!


정말로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데, 멀리 바다를 건너 미국까지 강의를 간다고 해도, 하지만 내일 일을 우리가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냥 하루살이인데, 주어진 환경에 의해서 살아갈 뿐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 쪽의 계획은 욕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살려주시니 하루하루를 헉헉거리면서 살아가는 것이지, "내일은 어디에서 가서 무엇을 하겠다" 라고 하는,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게 야고보서 4장 14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라고 말이다.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남들이 주목하는 그것, 우리가 거기에 대처하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까, "내가 봐도 나는 아무 것도 아닌데, 그러니 주께서 밥만 먹여주셔도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다른 기대를 하지 마세요" 라고 하면서, 그야말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라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주님께서는 세리와 창기들을 소위 잘났다고 하는 유대인들 앞에서 언급하셨는데, 세리와 창기들은 "차별이 없느니라" 라는 말씀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구원을 받은 강도의 경우에도, 자기는 지옥에 갈 줄 알았는데, 그런데 차별이 없어서 천국에 간다고 하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말이다. 전과가 몇 범이든 간에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모여 사는 이 세상의 삶의 원칙과는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모른다는 말이다.


◈ 다시, 이 세상이란?


다시 말씀을 드리자면, 이 세상은 무엇인고 하니, 잘난 우리 인간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그러한 인간들이 고생하고 힘들여서 노력한 그 노력의 집결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이고, 즉 "나는 살아가면서 이런 이런 고생을 했다" 라는 소리를 들어야하는 세상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성경말씀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너희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하는데, 그리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너희들은 메시야를 죽어야만 하는 역할을 해야하는 죄인들의 집합체이다, 너희들은 그렇게 악한 놈들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이 세상의 제대로 된 모습이라는 말이다.


◈ 모든 믿는 자 - '나도 탈락, 너도 탈락' !!


그런데 이렇게 로마서 3장 22절에서 "차별이 없느니라" 라고 할 때는 그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모든 믿는 자' 라는 것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인데, 그러면 여기서 무엇이 탈락하는가? 공자나 맹자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부처도 그렇고 말이다. 


(롬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런데 특히 누가 탈락하는가? 존경하는 우리 아버지가 탈락인데, 기도를 많이 하는 우리 어머니도 탈락이고, 그리고 '나'도 탈락이란 것이다. 물론 마누라와 자식도 탈락인데, 처나 자식이 결코 우리가 믿을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못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마저도 주님이 죽으시기 위해서, 그 죽음을 유발시키기 위한 장치로서 우리 앞에 깔아놓았기 때문에 말이다.


우리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해서, 그런 자들로 인해서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종종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7장에서는 "사랑하는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을 사랑하지 않게 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남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자의 경우에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고전 7:33)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고전 7:34)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물론 요즘은 이런 남편이 참 귀한데, 결혼할 여자들은 그냥 아예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아무튼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그 남편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이 아니라 아내라고 여기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되면, 자기 인생은 아내를 사랑하는 시간들의 뭉치가 되는데, 그것은 자기만의 세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인간은, 계속해서 'MY WAY' !!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예수님의 죽음을 유발시키기 위한 것인데, 그것을 잊어버리게 되면, 그러면 "내 인생은 내가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가 없는 인생이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렀던 노래가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웨이' 라는 것인데, 즉 "내 인생의 마지막 커튼이 드리워질 때, 친구야 나는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다" 라고, 그래서 '마이웨이' 라는 것인데, 즉 "내 갈 길을 갔다" 라는 것이다.


50대나 60대의 남자들이 노래방에 가면 이 노래를 종종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부르면서 자기도 영어를 조금은 할 줄 안다는 티도 내면서 말이다. 어떻게 한 집사님은 어떻게 노래방에서 그런 불러보지 않았습니까? 그 노래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비틀즈의 '렛잇비'를 부르면 되는데, 될 대로 되라고 하면서 말이다(ㅋㅋ).


아무튼 그놈의 마이웨이가 문제인데, 즉 "너와 내가 차이가 있다" 라는 것이다. "너는 개코같이 살아도, 나는 그렇게 살지 않고 진지하게 살았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주님 앞에서 무엇인고 하니, "모든 믿는 자에게는 차별이 없느니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세리와 창기는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자기들은 죄만 지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이렇게 차별이 없다고 하니, 얼마나 고맙겠느냐는 말이다. 그야말로 기쁜 소식이고 복음이라는 것이다.


◈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


아직까지 제가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율법 외에 한 의' 라는 것은 25절에 나온다는 것이다. 왜 이제는 율법을 치워도 되는고 하니까, 그것은 여기 25절에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말이다.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그러니 화목제물이 되신 분도 하나님이고, '그의 피로' 라고 계획을 세우신 분도 역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계획을 세운 일에 하나님의 아들이 자진해서 참여해서, 그렇게 아들이 스스로 화목제물이 되어서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피를 흘렸다는 말이다.


◈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기도하기를,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했는데, 그게 마귀로는 굉장히 아슬아슬한 순간이라는 것이다. 마귀를 지나기를 간절히 소원했겠지만, 하지만 예수님은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했는데, 그러니 아버지의 뜻대로 피를 흘려야 한다는 것이다.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 두 분께서 자기들끼리 의논해서 일을 하시는데, 그것이 우리의 이 세상일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뒤늦게 우리에게 알려주신다는 것이다. 즉 "니가 평생 고생하는 것이 너에게는 중요하겠지만,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벌이신 일이다" 라고 말이다.


◈ 주님은 인간을 건드리면서 !!


어제 날 설교에서 시작을 이렇게 했는데, "인간은 자기를 건드리면 싫어한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을 건드려야만 한다" 라고 말이다. 왜 그런가? 인간을 건드리지 않고는 이 대자연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될 수 없기에 말이다. 우리는 자기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지만, 하지만 주님은 이 세상을 바꾸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려면 피를 흘려야 한다는 것이다.


(녹취자 - 목사님, 그러면 새 하늘과 새 땅이란 것은,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기존의 이 하늘과 이 땅을 예수님의 피로서 새롭게 바꾼 것입니까?)


◈ 마치 철길의 아가씨처럼 !!


그러니 그 피는 우리 자신을 위한 피가 아니고, 아버지가 아버지 스스로 위해서 흘린 피인데, 우리는 그런 과정에서 혜택을 입은 것이고 말이다. 마치 어떤 아가씨가 철로 변에 서있는데 기차가 지나가서 치마가 흔들리는 것처럼(ㅋㅋ), 그렇게 우리가 서있는데 주님이 지나가시는데, 그런데 보니 주님께서 피를 흘렸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주님의 혜택을 입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아가씨는 기차가 지나가면 그만이지만, 주님께서 기차의 문을 열고 우리를 납치해서 데리고 가신다는 것이다. 즉 아버지와 아들의 계획에 놀랍게도 우리가 동참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리오란 말이야. 철길에 서있지 말고 아예 기차를 타란 말이야" 라고 해서 말이다. 그렇게 주님이 몰고 가시는 기차에 우리를 태워서 가신다는 것이다. 마치 보쌈을 하듯이 해서 말이다. 그것을 마태복음 12장에서는 도둑이 와서 가지고 간다고 하는데 말이다.


(마 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


계속해서 로마서 3장 24절에 보면, 여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 모든 일이 예수님 바깥으로 나가는가? 결코 나가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다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를 구원하는 것도 우리의 일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일이란 말이다. 그 예수님 안에만 들어있는 구원에 참여되기 위해서 우리는 납치를 당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느끼고 증거하라고, 그리스도 바깥에 있던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말이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렇게 들어가 보니 우리가 무엇을 알게 되는가? 이 세상이라는 것이 우리가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꼭 피를 흘려야 하는지를, 아버지와 아들의 결정으로 인해서,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을 창조한 근거였고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 얼마든지 납치하세요 !!


이제 여러분이 이 정도만 되어도 누가 묻더라도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지 싶은데, 그렇지요? 간단하게 정리하면, "율법 외에 한 의, 차별 없음, 어서 타!"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우리는 거기에 납치가 되었다는 말이다.


물론 처음에는 그것을 거부할 수도 있는데, "어머나, 왜 이러세요? 왜 저를 납치하세요" 라고 하면서 반항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납치가 되어서 들어가 보니 어떠한고 하니, 그 안이 너무나도 좋아서 "주님, 얼마든지 납치하세요"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다.


◈ 시켜만 주세요 !!


그런데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은 여전히 바깥에서 법에 의존하게 되는데, "시켜만 주세요. 무엇을 할까요?" 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우리는 벌을 받을 거야" 라고 하면서 벌벌 떨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목사는 그것을 이용하고 말이다.


목사는 목사의 권위를 주장하는데, 주님의 권위가 아니고 말이다. 목사의 권위로 그들을 자기 노예로 만들려고 하는데, 물론 교인들은 그것도 모르고 말려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뒤에서는 목사를 욕하면서 한 풀이를 하고 말이다. 실컷 건축헌금을 다 해놓고는 나중에 "목사가 엉망이다" 라고 하는데, 그것은 사기를 당하고 나서 그 사기꾼을 욕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이 주기는 왜 주었는가?" 라고 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까 싶어서 바쳤다" 라고 하는데, 그러한 소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본인이 복음을 전혀 모른다는 것인데, 그래서 마귀의 종들이 마음껏 유린한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성폭행인데, 지금도 교인들은 그렇게 해달라고 대기하고 있는데, 그렇게 하면서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60페이지를 보자.


**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경외'를 위하여 그런 인간의 과시욕에 '아들의 죽음'을 깔아놓습니다. 해를 입은 자가 흘린 피 위에서 '정말 나의 존재는 무엇인가?' 라는 것을 다시 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고 하니,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은 오직 아들의 죽음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찬양을 하고 헌금을 한다고 해서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죽음에 동참하게 된다면, 그게 곧 영광이라는 말이다.  


◈ 엘리야의 경우에 !!


엘리야가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할 때, 그들은 춤을 추고 북을 치고 그야말로 난리가 났는데, 자신들을 자해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엘리야가 준비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는데, 오직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할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엘리야가 준비한 것은 하나도 없고, 하나님이 시켜서 했다는 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위한 장치인데, 그러니 거기에 엘리야의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 주님을 위해서 준비한 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나오게 된다는 말이다.
 
◈ 여호와 이레 !!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인 이삭을 바칠 때, 그렇게 바치라는 이야기도 주님에게서 나왔고, 또 그 다음에 그 아들이 약속의 아들로 살 수 있는 것은, 친히 주께서 준비한 것으로 인해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준비하셨는가? 수풀 속에서 수양을 준비하셨는데, 그래서 그곳의 이름이 '여호와 이레' 라는 것인데, 즉 '하나님의 준비하심' 이라는 말이다.


(창 22: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창 22: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그러면 우리 자신이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가 곧 여호와 이레인데, 우리가 이 땅에서 태어나서 죽고 하는 그 모든 것도, 주님이 준비하신 그 여호와 이레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해서 생긴 사건의 이름도 함께 포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 시키는 대로 했을 뿐 !!


엘리야의 경우에는, 이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할뿐이라는 것이다. 즉 12통의 물을 길러와서 붓고, 돌을 가지고 돌단을 쌓고, 그 위에 제물을 올리고 하는, 그 모든 것은 주님의 일인데, 그렇게 하니 주님이 불로서 응답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동안 비가 오지 않았던 곳에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면서 가물었던 대지가 회복이 된다는 말이다. 


(왕상 18:32)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만한 도랑을 만들고
(왕상 18:33)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왕상 18:34)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 그리하라 하여 세 번 그리하니
(왕상 18:35)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 …
(왕상 18: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다시 말해서, 이 땅은 인간들의 노동에 의한 집결이 아닌, 그런 문명적인 땅이 아니라, 이 땅은 오직 제단에 있는 제물의 죽음으로, 즉 장차 오실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기 위해서 주의 이름으로 미리 준비된 땅, 그게 바로 약속의 땅이란 말이다.


그런 약속된 땅의 성취도가 곧 천국인데, 즉 어린양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냥 모습이 아니라 어린양의 모습으로 성전에 앉아 계시는데, 그러면 14장로가 와서는 그분의 발 앞에 자기들의 면류관을 벗어서 반납함으로서, 그렇게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주께서, 주를 위한, 주로 말미암는 세상이었습니다" 라고 하면서 영광을 돌리게 될 때, 그게 바로 우리가 그리워하던 천국이란 말이다. 


◈ 준비된 '의' !!


우리가 이 땅에서 그 어떤 짓을 해도 그게 다 준비된 것이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 말을 오해하면 안 되는데, 즉 "예수님을 믿게 되면 의인이 된다' 라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예수님 중심으로 해서 저도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주님이 되게 믿도록 선택된 자가 바로 저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믿도록 해주셨습니다" 라고 하면서 믿는 자가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의도 준비된 의라는 것인데, 결코 자기가 믿는다고 하는 행함으로 주어지는 의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렇게 '의'를 이야기하다가보니 딸 결혼식에서 하신 서경수 목사님의 주례사가 생각나는데, 하박국서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는 말씀인데 말이다. 


다시 교재 60페이지를 살펴보자.


**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경외'를 위하여 그런 인간의 과시욕에 '아들의 죽음'을 깔아놓습니다. 해를 입은 자가 흘린 피 위에서 '정말 나의 존재는 무엇인가?' 라는 것을 다시 보라는 겁니다.


◈ 인간의 세상에서 아들의 세상으로 !!


여기에 보면 "인간의 과시욕에 '아들의 죽음'을 깔아놓습니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 다음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들의 경우에는 인간들의 노력과 희생의 결실이 이 세상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1번이라고 하고, 그런데 하나님이 생각하는 이 세상은 아들의 희생이고 죽음인데, 그게 곧 이 세상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2번이라고 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남은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어떻게 1번에서 2번으로 이끌어내는지, 그게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 작업도 누구의 몫이라는 말인가? 역시 주님의 몫이면서, 모든 인간에게 혜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택한 백성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2번으로 가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모든 자의 것이 아니고, 물론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지만, 모든 자들이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는 그 믿음을 받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방금 제가 믿음을 '받는다' 라고 했는데, 그러니 그 믿음을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믿음이란 것은 받거나, 혹은 받지 못하거나, 그 둘 중의 하나라는 말이다.


다시 강조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그 믿음은 자기가 믿는다는 믿음이 아니고, "이 믿음조차도 주님의 일입니다" 라고 여기고 받는 믿음인데, 자기가 만들어낸 믿음이 아니고 말이다. 그렇다고 자기 안에 잠재되어있던 믿음도 아니고, 자기에게는 전혀 없는 믿음인데, 그런데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믿음이기에, 자기에게 삽입된 믿음이라는 말이다. 주님께서 집어넣은 믿음인데, 그래서 이 세상은 전적으로 주님 중심이라는 것이다. 


◈ '가난'을 경험함으로서 !!


그렇다면 이렇게 모든 사람이 다 1번에서 2번으로 건너오는 것은 아니라고 했는데, 사실은 거의 없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건너오는 사람이 있을 것이란 말이다. 그러면 그들이 어떤 변화를 겪으면서 오느냐는 것인데, 그게 바로 잠언서에서 말하는 '가난' 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해서 말을 타신 게 아니라 나귀를 타고 오셨다고 하는데, 그리고 출애굽기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은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를 지켜주시는 분이라고 하는데, 하지만 우리 생각에는 어떠한가? 아예 처음부터 고아와 과부로 만들지 않으면 되는데, 하나님은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으니 말이다.


(출 22: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출 22:22)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


옛날에는 토지를 개간해서 살아가는 토지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에, 노동력을 발휘하는 남편이 없으면 참으로 살기가 힘들었다는 것이다. 여자는 거기에 아이까지 낳아서 키워야하니 말이다. 물론 지금도 그러한데, 그래서 사채라도 빌려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여성에게만 빌려주는 사채은행도 있던데 말이다.


사업을 하기 위해서 돈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당장 먹고 살 것이 없어서 빌린다는 것이다. 이자가 아무리 비싸도 일단 먹을 양식이라도 있어야 목숨을 부지하니 말이다. 그렇게 빌려서 쌀이라도 팔아야 하는데, 경상도 말은 이래서 어려운데, 쌀을 사는 것을 왜 판다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빌려주는 사람이 무엇을 보고 빌려주겠는가? 담보가 있어야 하는데, 없으면 몸으로 때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식을 노예로 팔고, 자기도 노예로 팔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재정적으로 너무 어렵기 때문에, 고아와 과부들은 남들에게 수탈의 대상으로 노출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사회에서 말이다.


원래 이스라엘 사회는 그 자체가 하나로 된 통합체제인데, 그런데 주변 나라들과 교제를 하면서 어떻게 바뀌는고 하니까, 통합체제에서 계급갈등의 국가로 전환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계급갈등이라고 하면 너무 어려우니, 계층갈등이라고 하면 더 적당하지 싶은데 말이다. 즉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이 그만 구분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골고루 인구 숫자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유산을, 돌아가시지 않았는데 유산이라고 하면 좀 이상하지만, 아무튼 하나님이 주신 그 지분을 대대로 상속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유업' 이라고 하는데, 가족중심의 사회에서 맏아들이 그 유업을 잇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집안마다 각자의 고유의 땅이 있는데, 살기가 어려우면 그것을 내다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농사를 지을 여력이 안 되니 말이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하나님께서 그런 고아와 과부가 생겨나지 않도록 하시면 되지 않겠느냐는 할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그 당시에 이렇게 고아와 과부가 생겨나는 것은, 물론 병이 들어서도 그렇게 되겠지만, 그런 것보다는 주된 원인이 바로 전쟁이라는 것이다.


◈ 고아와 과부는, 여호와 전쟁 때문에 !!


그런데 그 전쟁이 누구를 위한 전쟁인고 하니, 사실은 하나님을 위한 전쟁이라는 말이다. 다른 나라들과 전쟁을 하게 되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지켜주시면 단 한 사람도 죽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이 함께 해도 죽을 사람은 죽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위한 전쟁에서 희생이 되었다고 하면, 그 보상은 누가 책임을 져야하겠는가? 하나님을 위한 전쟁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이 해주셔야하는데, 그런데 실제로 남편이 전쟁에서 죽고 난 다음에 유족들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전혀 보은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오히려 빈민층으로 그만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데, 즉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시는가? 하나님께서 본인을 위해서 전쟁을 일으켜서 피해를 보았다고 하면, 그 책임도 하나님이 지셔야하는데, 그런데도 하나님은 마치 남의 일처럼 모르는 척을 하시는데, 그러면 당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라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전쟁의 유족들이 고아와 과부가 되고, 결국 노예로 팔리게 되고, 그것도 외국으로 팔리게 되면 그야말로 고국으로 다시 돌아올 기회조차도 잃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참으로 비참하게 대대로 노예생활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고대국가에 노예가 많은 것은 그만큼 전쟁이 많았다는 것을 반증하는데, 아프리카는 전부가 다 노예인데, 아시아도 비슷하고 말이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 참 이상인데, 그러면 왜 그렇게 하시느냐는 것이다. 전쟁이 나서 남편이 죽어서 졸지에 그 집은 여자와 자식만 남게 되는데, 그런데 엄마도 밭에 나가서 일을 하다가 그만 과로로 죽게 되면 그 집의 아이는 고아가 되고, 그 아이는 농사를 짓지 못하니 가까운 친척에서 넘기게 되는데, 그러면 그 친척은 부모가 없으니 만만하게 여겨서 그 땅을 개인적으로 삼켜버리고, 아이도 그만 노에로 팔아먹고 만다는 것이다. 


◈ 고아와 과부는, 이스라엘의 내부 고발자 !!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외부와 시작된 전쟁이 어떻게 되는가? 이스라엘 외부에서 내부로 이어지면서, 말이 좋아서 이스라엘이지 그야말로 하나님의 원수이고 적이란 것을 까발려주는 모델로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증거물로서, 그래서 그들은 더욱 더 고아와 과부가 되어야하는데, 이스라엘이 바로 그런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섬뜩한 이야기인데, 아버지만 조지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 대대로 인생을 완전히 박살을 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도 아버지는 바깥의 이방나라들과 싸우다가 희생이 되었지만, 그 자식들은 이스라엘이 썩어빠졌다는 것을 증거하는 용도로서, 하나님을 위해서 계속해서 희생이 되어야하는, 그런 희생물로서의 증표가 된다는 것이다.


◈ 짝사랑에는 이유가 없어 !!


쉽게 생각하면, 다윗의 왕궁근처에서 사는데, 날씨가 더워서 바깥에서 목욕을 하다가 그만 우연하게 다윗의 눈에 띄게 되었다는 것이다. 몸매가 얼마나 잘 빠졌는지 몰라도, 다윗이 멀리서 보고도 그만 한 눈에 반해서 "저 여자를 가지지 못하면 잠을 잘 수 없다" 라고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짝사랑에는 이유가 없는데, 그때는 인간의 이성과 감성도 아무 소용이 없는데, 몸이 말한다는 것이다.


어떤 할머니가 TV에 나와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지금 농사는 지어야만 하는데 나이가 많아서 몸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눈은 겁을 내고 있는데, 손은 일을 하고 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 할머니의 표현이 너무나 멋있는데, 나이가 91살이나 되는데 말이다. "저 많은 밭을 언제 다 가노?" 라고 하면서 눈은 겁을 먹고 있는데, 그런데 손은 밭에서 이미 일을 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이게 우리의 어머니인데 말이다. 남편도 없이 혼자서 자식을 키우면서, 특히 겨울에 날씨도 춥고 하면 어떻게 장사를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자식을 생각하면서, 겁을 내면서도 계속해서 반티(다라이?)를 머리에 이고 여기 저기로 생선을 팔러 다닌다는 말이다. 그러니 몸은 어떻게 우리가 말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윗이 바세바를 범하고, 따라서 그런 자기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서 그녀의 남편인 우리야를 전쟁터로 내보내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밧세바가 낳은 자식도 죽게 되는데, 그런 것을 통해서 다윗은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이 세상을 나를 죄인이 되게 드러나게 하는구나" 라고, 그렇게 주님이 자기를 위해서 희생하셨다고 하는 장치가 곧 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 성도의 인생은, 번지점프 !!


어제 낮에도 그런 말을 했는데 제대로 이해를 못했지 싶어서 잠깐만 다시 하면, '번지점프' 라는 것이 있는데, 뛰어내릴 때 어떻게 하는가? "자신이 있습니까?" 라고 하면, "자신이 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뛰어내리려고 하니 눈에 비치는 것이 너무 무섭다는 것이다. 그래서 몸이 자기도 모르고 뒤로 물러나는데, 그러면 뒤에서 모자를 쓴 조교와 같은 사람이 자꾸만 밀어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도의 인생은, 자기가 살아가면서 나락과 절망을 눈으로 보게 하는 사태가 일어난다는 말이다. 뭔가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 위주의 세상과 천국 사이에는 어떤 갭과 같은 것이 있어서, 그 갭은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음을, 그것을 살아가면서 점점 더 느끼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건너뛸 수 없는데 누가 건너뛰게 하셨는가? 그것을 바로 주님이 건너오셔서 우리는 심적으로 가난하게 만들어서, 그렇게 하셔서 아들 중심의 세계로 옮겨가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들의 세계로 옮겨가게 될 때 자기 재산이 얼마인지, 그게 10억이든 20억이든 간에 마음으로는 이미 가난한 마음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난한 마음이 무엇인가?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이런 재산을 이루었다" 라고 하는, 그 생각이 자기가 천국에 가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 방해를 하게 한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느끼게 하신다는 것이다. 지금 저는 미국비자를 신청해놓고, 마치 입학시험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심정인데 말이다(ㅋㅋ).


여기서 신명기 8장을 12절에서 14절을 살펴보자.


(신 8:12)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신 8:13)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신 8:14)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 네 마음이 교만하여 !!


여기 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네 마음이 교만하여" 라고 하시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가? "나는 가난하지 않다. 나는 부유하고 그만한 가치가 있다. 나는 이런 집과 재산을 가질 자격이 된다" 라고 하는 생각, 그리고 "저 고아와 과부는 나보다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저렇게 가난하게 산다. 반면에 나는 교회에 충성하고 죄를 적게 지었기 때문에 이렇게 잘산다" 라고 하는 생각, 이런 생각이 바로 애굽과 같은 이 세상에서 벗어 나야할 필요성을 우리에게 인식시킨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데, 가고 싶어도 도저히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가지 못하는데, 그런데 조교가 자꾸만 민다는 것이다. 천사가 와서, 또한 성령이 와서 말이다. 그렇게 밀리게 되면, 아무리 자기가 재산을 많이 가졌다고 해도 "땡, 당신은 탈락이야" 라고 불합격의 통보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불합격이 될 때 비로소 우리 마음이 교만한 마음이 아니라, "정말이지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 내가 삼성그룹의 이사라고 해도, 그게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니구나" 라고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로소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를 언급하신 이유를 알고, 강도가 오늘밤에 낙원에 가는 이유도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주님의 은혜가 아니라 구원이 될 수 없음을, 그것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이전에 주님끼리 서로 의논한 비밀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그것을 안다고 하면서, 그것을 가지고 얼마나 아는 척을 하면서 살아왔느냐는 것이다.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주님이 벌이신 일을, 그것을 자꾸만 자기 일이라고 여긴다는 말이다. 


◈ 예수님을 본받아 !!


그런데 그게 아니라 하는 것마다 자기 뜻대로 된다면, 그런 놈은 인간이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라고 했는데, 그러니 우리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야 한다고,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는 것이다.


(눅 22: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주님이 "내 뜻대로 마옵시고" 라고 했으면, 우리도 역시 우리 뜻대로 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니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간다" 라고 했다면, 우리도 역시 각오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매사가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 예수님은 가난하게 오셨다 !!


그래서 신구약 전체의 주제는 간단한데, "예수님은 가난하게 오셨다" 라는 것이다. 즉 인자는 머리를 둘 곳도 없다는 말이다. 그것을 디모데전서 6장에서는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그네를 잘 대접하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행여 천사를 대접하는 것일 수가 있으니 말이다.


(딤전 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천사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이 땅에 자기 소유의 부동산이 없는데, 자기 이름으로 된 통장이 하나 없다는 말이다. 거지도 아닌 것이 그냥 들이대면서 나타나는데, 그러니 천사를 대접한다는 것은 "당신이나 나나 똑같은 신세이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서로 같다는 입장에서 도와준다는 것이다.


그냥 왔다가 돌아가는, 그렇게 나그네로 살아가는 인생, 그러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없애라는 말이 아니고, 아무리 있다고 하더라도 안개처럼 '훅'하고 한 방에 다 날아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놓고 가야하는데, 그렇게 가는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어디로 가는가? 율법 외에 한 의를 주신 분이 있는 곳으로 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잠언서에 나오는 가난의 모델을 보여주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는데, 그러니 이미 잠언서에 예수님이 계신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잠언서에 해당되는 모든 것들의 직결된 이상적인 모습은 곧 예수님인데,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지혜'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잠언이 곧 지혜이니 예수님도 지혜가 된다는 것이다.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 !!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곧 하나님의 지혜이고 능력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지만, 자기가 전하는 것은 십자가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게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이란 말이다.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래서 제가 어제 낮 시간에 "여러분이 아니고 주님입니다" 라고 했는데, 즉 "니가 아니고 나다" 라는 것이다. 모든 지혜와 표적이 말이다. 그것을 얼마 전에 김 집사님이 요약해서 기도를 하셨는데, 제가 얼마나 떨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떨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데, 기도를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정답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정답이란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60페이지를 보자.


** 신약의 이 '그리스도 피' 라는 주제가 구약에서는 '가난' 이라는 주제로 나타납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가난을 기피합니다. 가난하면 사회에서 천민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중심의 희생과 노력으로 된 결실을 보고 싶어하기 때문에, 자기가 하루하루 가난하다는 것은, 그것은 자기가 정말로 미워질 정도로 싫어지는 것이란 말이다. "남들은 저렇게 근심도 없이 살아가는데, 나는 무슨 이렇게 더러운 팔자로 태어나서, 단 하루라도 마음 편히 살아갈 날이 없는가? 그런 인생이라고 하면 아예 끝을 내는 게 낫지, 이렇게 속이 불편하게 살아가야 하는가?" 라고,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 야, 춘옥이 아이가?


그러니 자기가 자기를 보기에 수치스럽고 부끄러운데, 남자들도 그렇지만 특히 여자들이 여기에 대해서 민감하다는 말이다. 길에서 우연히 잘 사는 동창생을 만나보라는 것이다. 자기는 인생에 찌달려서 옷을 허름하게 입고 걸어가는데, 그런데 그때 "야야, 춘옥이 아이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악수를 청하는데, 그야말로 손을 뿌리치고서 얼른 도망치고 싶은 마음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꼬라지를 자기가 아니 말이다.


그럴 때 자기가 얼마나 미워지며, 또한 자기를 그렇게 만든 남편이 얼마나 원망스럽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망가진 인생이 더욱 더 슬픈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래도 망가진 자기 인생을 회복할 기회라도 있으면 괜찮은데, 그런데 그럴 기회마저도 사라져버리고 없다고 하면, 정말이지 짜증이 난다는 것이다.


시가나 친정에 그래도 집안에 좀 유력한 자가 있다고 한다면, 생활하는 것이 어렵다고 해도, "형수님, 아이는 제가 키워드리겠습니다" 라고 나오면 괜찮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그런 친척도 전혀 없고, 아무런 아는 사람도 없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하늘만 쳐다보고 산다고 하면, 난감하기가 실로 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식들을 불러놓고 "우리 다같이 약을 먹고 죽자" 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피하고 싶어서 사람들은 교회에 나와서 기도를 한다는 것이다. "주여, 제가 다른 욕심은 없습니다. 그냥 남들처럼, 하루 세 끼에 밥이나 먹으면서 살아가게 해주세요" 라고 말이다.


◈ 여보, 이 많은 아파트 중에서 우리 것이 없어요 !!


왜 흔히 여자들이 그런 말을 하지 않는가? 일이 있어서 남편과 같이 서울에 가게 되면, 서울에는 그렇게 아파트가 많은데, 그 아파트를 보면서 뭐라고 하는가? "이 수많은 아파트 가운에서 우리 집이 하나 없다는 것이 참으로 슬프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주로 신랑에게 바가지를 긁었을 때 그런 소리를 많이 한다는 것이다.


교회에 와서도 하나님에게 그런 바가지를 긁어대는데, 그것도 새벽부터 말이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데, 그래서 서울에 있는 대형 교회들은 그런 하소연을 하는 장소를 서비스해주면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잠언서는 뭐라고 하는가? 사람의 본성이라는 것이, 그래도 자기가 뭔가 있을 때는 하는 짓은 위선에 불과하고, 아무런 가진 것도 없고 먹을 것도 전혀 없을 때 비로소 인간의 본성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럴 때 돈을 보면 훔치고 싶고, 또한 잘 사는 사람을 보면 시기하고 싶어진다는 말이다.


◈ 가림막이 사라질 때, 비로소 !!


사람은 그렇게 자기가 가난하게 되면 더 이상 자기를 가릴 수 있는 가림막이 사라지게 되는데, 바로 그때 그 모습에 딱 맞추어서 장차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모습이 곧 장차 오실 주님의 본래 모습에 점점 더 접근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는 말이다.


제가 방금 이야기한 것은 경제적인 것도 이야기했지만, 그러나 사람은 경제적인 것보다도 정신적인 것으로 살아가는데, 가난해도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의 성격이 좋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반면에 부자라고 해도 절망적인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데 말이다. 그러니 주님은 이런 처지, 저런 처지를 다 아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에 보면 "내가 너희들의 처지를 다 안다. 내가 만들어 놓았는데 모를 리가 있겠나?"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에게 "주님, 우리의 형편을 다 아시지 않습니까?"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형편을 주님이 이미 다 아신다는 말이다.


(히 10: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히 10: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그런데 정작 주님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즉 "내가 원하는 것은 너희들의 형편이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예수님도 너희들과 함께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이런 기회에 깨우치게 된다면, 너희들은 죽어도 살고, 살아도 산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마치 나사로의 가족처럼 말이다.


우리는 그런 기회를 통해서 1번에서 2번으로 건너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경제적 어려움에 대해서 너무 미리 공포감을 가질 이유가 없는데, 이 세상의 일은 우리 손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지니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60페이지를 보자.


** 그래서 지혜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잠 30: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이 잠언서 이야기가 곧 예수님 이야기인데, 지혜에 의한 지혜자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여기에 보면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바로 우리가 지킬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 기준에 의하면 우리는 전혀 지킬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1번에서 2번으로 건너오는 것은,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인간세계에서 진짜 하나님의 세계로 건너오는 것은 주님의 차별이 없는, 즉 '율법 외에 한 의' 라는 것이다. 그 의로 말미암아서 주님께서 희생을 하셔서, 그 희생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건너오게 되었는데, 그러니 그 어찌 예수님의 피를 부정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런데 인간이 가진 반(反)지혜는 그냥 본성으로 담아두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반드시 행동으로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가난해지면 그 본성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겁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는 모든 이의 친구로 지낼 수 있지만, 가난해지면 친구도 이웃도 모두 떠나고 맙니다.


(잠 14:20) 가난한 자는 그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나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


◈ 반(反)지혜 - '우리도 역시 떠난 버린 친구' !!


여기에 잠언서 14장 20절의 말씀이 있는데, 즉 "가난한 자는 그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나,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 라는 세상임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세상을 원망하라는 것인가? 하지 말라는 것인가? 원망하지 말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원래 하나님께서 그런 세상을 일부러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돈이 있으면 친구도 우르르 달라붙고 하지만, 돈이 없으면 모두가 다 떨어지고 없고, 그야말로 외로운 세상인데, 그런 세상이 바로 우리가 좋다고 하면서 살아가는 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떠나버린 친구들 가운데는 우리 자신도 얼마든지 포함될 수가 있고 말이다.


서로 격이 맞을 때만 "우리는 친구 아이가?" 라고 하면서 좋아하다가, 한 사람이라도 어려운 형편이 되면, 부담이 될까봐서 슬슬 피해버린다는 것이다. 전화번호도 바꾸고 말이다. "나에게 보증을 서라고 하지 마라. 나는 해주고 싶지만, 내 아내가 용납하지 않는다" 라고, 자기 아내 핑계를 대면서 도망을 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 주변에 깔아놓은 조건들은 무엇인가? 이렇게 우리 속에는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반지혜의 본성이 들어있어서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는 것을 폭로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게 교재 61페이지에 그대로 나오는데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주변에 깔아놓은 조건들은, 이렇게 우리 안에 감당 못할 반지혜의 본성에 우리가 사로잡혀있음을 폭로시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어쨌던 나는 반드시 가난하면 안 되고, 무조건 나는 부자이어야 한다는 본성입니다.


◈ 악에 바쳐서 살아가는 인간들 !!


자기가 저지른 짓은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자기는 남보다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고, 그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고 하는 일방적인 주장인데, 그게 과연 어디서 배운 버릇이냐는 것이다. 도대체 누가 그런 생각을 집어넣었느냐는 말이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그런 생각이 있다는 생각은 하는데, 그런데 누가 집어넣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말씀과 반대되는 생각에 대해서는, 그것이 로마서 7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사도바울은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가? "내 안에 내가 아니라 악이 있어서 그렇다" 라는 것이다. 악이 그런 생각을 마치 불을 지피듯이 해서 피워댄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속에는 악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악에 바쳐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롬 7: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참된 지혜이신 예수님께서 주저 없이 가장 가난한 자리, 힘없는 자리에 오신 이유를 아시겠지요? 우리가 주저 없이 가장 부유한 자리를 넘보는 본성을 지녔기에 오신 것입니다.


◈ 한국의 거지는 '노숙 페이스'를 !!


물론 이것은 정신적인 부자를 의미하는데, 왜냐하면 양적으로 제 아무리 부자가 되어봐야 어떻다는 말인가? 왜 한국의 거지가 아프리카의 부자보다도 더 부자라고 하지 않는가? 그들은 아무리 부자라도 옷도 입지 않고서 그냥 맨 몸으로 살아가지만, 한국의 거지는 그 비싼 '노숙 페이스'를 입고 잔다는 것이다(ㅋㅋ).


그러니 이러한 부자는 더욱 더 부자인 동네에 가면 자기는 상대적으로 가난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욕심을 내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시골에서 살다가 서울의 강남에 가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가 거지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는데, 그것은 사람이 겸손해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목표가 새롭게 생긴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드라마가 아시아를 다 버려놓았는데, 그저 부처님만 바라보면서 순진하게 살아가던 그 미얀마의 아이들이, 한국 드라마를 접하고 난 다음부터는 '코스메틱' 이라는 한국의 화장품을 바르고, 또한 그것을 구입하기 위해서 한국까지도 온다는 것이다. '코스메틱' 이란 말 자체가 '허울뿐' 이라 의미인데 말이다. 물론 중국의 아이들은 두 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한국 드라마를 보면 모두 다 재벌들인데, 물론 연세가 많은 분들은 아는데, 그게 극히 일부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청소년들의 눈에는 그게 전부라는 것이다. 그렇게 바람이 들어서, 웬만해서는 결혼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눈만 높아 가지고는 말이다. 그것을 두고 여기 교재에서는 가짜 인생, 가짜 현실이라고 하는데, 그야말로 자욱한 환상의 안개에 갇혀있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62페이지를 살펴보자.


**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믿습니까? 우리 각자는 우리 자신을 믿습니다. 나를 믿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자 하는 겁니다. 즉 예수를 믿어주는 나만을 죽자고 믿고 신뢰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중에 치매에 걸려서 "예수가 누구지?" 라고 나오는 상황을 미리 대비하셨습니까? 왜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을 철회하지 못하는고 하니, 가난의 힘이 그만큼 지금도 우리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누구를 믿습니까?


여기에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믿습니까?" 라고 되어있는데, 구약에서 누구를 믿는다는 말이 과연 나오는가?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다. "제가 행하겠습니다" 라는 것만 나오지, 누구를 믿는다는 것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정도로 인간은 아직 가능성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음을 구약은 보여준다는 것이다.


◈ 예수가 누구지?


그러면 누구를 믿으려고 하면 그 전제조건이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가 누구지?" 라고, 즉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다시금 생각해야한다는 것이다. 잠언이나 시편이나,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기존의 우리가 알고 있던 하나님에 대해서 수정하라고 주신 말씀이라고 보면 100% 맞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고 듣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것을 수정하고 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또 주셨다는 것이다.


◈ 잠시 '해석학'에 대해서 !!


지금부터 조금 어려운 이야기를 해야하겠는데, 피곤하시더라도 정신을 조그만 더 집중하시고 들어주었으면 하는데 말이다. 해석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하고자 하는데, 쉽게 '풀이한다' 라고 보면 되는데 말이다. 그렇게 풀이하는 방법을 '해석학' 이라고 하는데, 거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먼저 첫 번째로는 "문자가 된 것을 우리가 당겨서 이해한다" 라는 것이고, 그리고 두 번째로는, 이렇게 문자가 있으면, 그것을 쓴 작가가 있고, 그리고 읽는 독자가 새롭게 그 의미를 발굴한다는 것이다. 처음은 작가의 의미를 독자가 충분히 동의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작가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독자가 읽으면서 달리 그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면, 작가조차도 독자의 그 의미에 따라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수용미학(受容美學)'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첫 번째는 작가의 생각에 대해서 독자가 동의하는 것이고, 즉 작가가 우선이고 그 다음이 독자라는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까, "작자의 생각은 이렇지만, 나는 나의 현장에서 이것을 새롭게 느꼈다" 라고 하면, 글을 쓴 작가가 따로 있더라도, 독자가 제2의 작가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 두 번째에서 조금 더 확대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작가나 독자가 현재 이것은 이런 뜻이다" 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작가와 독자를 한 곳으로 묶는 옛날의 전통적인 견해를 가지고, 그것을 '선입견(先入見)'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선입견에 의해서 해석하게 된다는 것이다.


◈ 가다머의 '선입견(先入見)' !!


'가다머' 라는 해석학자가 주장한 것이 바로 세 번째의 경우인데, 여기에 책이 있으면 그 책을 자기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책과 자기가 같은 카펫으로 깔려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지평' 이라고 하는데, 즉 한 자리에 같이 있는데, 같은 평지에 말이다. 물론 그것을 처음에는 몰랐는데, 잡아당기면 같이 움직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시대에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에 같이 있으면서 이해를 하는데, 그러니 자기의 해석이 아니라,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보편적인 해석을 자기가 대표해서, "이것은 이런 이런 뜻입니다" 라고 이야기할 뿐이라는 것이다. 


◈ 영화 '명량'의 경우에 !!


그 대표적인 것이 '명량' 이라는 영화인데, 저는 보지 않았는데 무려 1700만 명이나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이 시대의 한국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대변하는데, 아무튼 그들은 영화가 재미가 있고 잘되었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거기에 나온 이순신은 진짜 이순신과는 같을 리가 없는데, 왜냐하면 진짜 이순신은 21세기를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와 같이 살지 않아서 당연히 모른다는 말이다.


이순신은 16세기에, 그것도 전 세계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그 좁은 조선 땅에서 그 당시의 선입견으로서 자기 인생을 살았다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어떠한가? 21세기의 눈을 가지고 16세기의 이순신 장군을 다시 해석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전통적인 해석법인데, 즉 1번, 2번, 3번의 경우를 가지고 해석을 한다는 것이다.


◈ 복음은, '십자가의 반복성' !!


그런데 복음은 무엇인가? 1번, 2번, 3번에 해당되지 않는데, 4번이라는 말이다. 즉 십자가의 죽으심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뭔가 이해한 것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죄와 더불어, 주님의 사랑의 넓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더욱 더 확대해 나간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3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말이다. 


(엡 3: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엡 3: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우리는 그야말로 절망인데, 도저히 건너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는 도저히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자기 자신이 너무나 잘 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절망의 갭을 뛰어넘어서 저쪽에서, 즉 이미 구원을 받은 입장에서 자기가 뛰어 넘어온 자기 과거를 계속해서 바라보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할 수 있는 영역은, 오로지 십자가의 반복성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 비록 사업이 망하더라도 !!


쉽게 이야기하면, 이것만 하고 마치겠는데 말이다. 자기가 이번에 사업을 했는데, 예를 들어서, 운동화 세탁업을 했는데, 신문광고에는 놀면서 돈을 벌 수 있다고 했는데, 그런데 막상 해보니 수입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절망을 하게 되는데, 아무리 작은 사업이라도 돈이 들어가니 말이다. 그 사업이 망할 때는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사업에 성공하면 자기는 잘난 존재가 되는데, 그런데 실패를 함으로서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고 하니, '너와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잘나기만을 바라는 세상이기에, 그런 쪽으로만 자기 자신이 살아가면서 천국에 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 이미 구원받은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봄으로서 !!


그러므로 이 세상 자체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만 챙기다가 결국 절망과 나락으로, 그런 자기 실망에 빠지는 세상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어디서 본다는 말인가? 이미 구원을 받은 입장에서 주께서 다시 보게 할 때, 우리는 죄인으로 발각되고, 그것을 용서하신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세상으로, 그렇게 합류가 된다는 말이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능력인데, 그러니 결국 모든 것이 주님에 대한 감사로 이어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권사님의 경우에도, 남들에게 빠지지 않게 자식들을 정말 잘 키웠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세상적으로 볼 때 말이다. 참 대단한 집안인데, 하지만 잘 키웠다고 해서 구원받을 수 있느냐는 말이다. 오히려 잘 키웠다고 자랑질을 하는 자기 모습에 절망을 느껴야하는데, 그것은 오만이고 교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그런 죄인의 모습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자기가 잘난 척을 하면 정작 자기만 힘이 드는데,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 늪에 빠지니 말이다. "내 정도의 수준이라면 그 정도는 유지를 해야지" 라고 하는데, 그것이 얼마나 힘드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 비록 연금을 적게 받더라도 !!


오늘 아침뉴스에 공무원 연금에 관한 것이 나왔는데, 받는 것은 45프로를 줄이고 30프로를 더 낸다고 하는데, 은퇴하신 우리 장로님을 생각하니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실망이 크겠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실망스러운 모습을 건너오지 못한 상태에서 하지 말고, 이미 건너온 상태에서 실망스럽게 보자는 말이다.


그러면 그게 바로 자기도 몰랐던 죄가 된다는 것이다. 돈밖에 모르는 인간, 그러면서도 천국에 가려고 하는 우리들을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는가? '율법 외에 한 의'로서 이미 해결을 다 보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율법으로는 전혀 안 되니 말이다. 그렇게 이미 끝을 내셨는데, 그러니 우리는 주님만 자랑하면 된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율법 외에 한 의'로서, 차별이 없이, 화목제물이 되신 주님께서 이미 끝장을 내신 줄 압니다. 그런데 마귀는 자꾸만 거기서 우리의 시선을 돌리도록 합니다. 하지만 그런 마귀의 장난까지도 건너와서 바라보면서 주님께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4,10,18 새벽 2시에 마침.


                                                   오늘 하루도 악에 바쳐서, 단 2초만 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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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용미학(受容美學, Rezeptionsasthetik)
작품을 받아들이는 독자의 수용을 통해 작품해석이 이루어진다는 미학개념.
중세 프랑스 문학 연구가인 독일의 H.R.야우스가 1967년 4월 13일, 신설된 콘스탄츠대학에서 행한 교수 취임 강연 <도발로서의 문학사>에서 처음으로 그 구상을 밝힌 이후, 세계의 문학사 연구, 특히 미학이론 영역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후, 야우스는 《행위로서의 독서-미적 작용의 이론》(1976)의 저자인 W.이서 등과 함께 연구 그룹인 ‘시학과 해석학(Poetik und Hermeneutik)’을 조직, 보고서를 계속 간행하였다. 야우스의 저서로는 《미적 경험과 문학 해석학 I》(1977)이 있다.
종래의 문학사나 예술사는 한결같이 작가와 작품의 역사 바로 그것이었으며, 여기서 취급되는 것은 문체론과 시학, 양식사(樣式史)와 장르사, 또는 정신사 등이다. 그러나 이미 폴란드의 현상학적 문학이론의 대가 R.인가르덴이 ‘구체화’에 대한 이론에서 밝혔듯이, 작품이란 이들을 수용하고 향수(享受)하고, 판정하는 각 시대 독자들의 경험을 매개함으로써만 비로소 구체적인 역사 과정이 될 수 있다. 이에, 종래의 이른바 작가와 작품의 관계만을 문제로 하던 ‘생산의 미학’에 대하여, 작품과 독자의 관계에 있어 역동적 역사과정을 주제로 하는 ‘수용과 작용의 미학’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런데,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작품의 해석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독일에는 19세기의 F.E.D.슐라이어마허에서 W.딜타이에 이르는 해석학의 전통이 있었으며, 문학이론에서도, 1950년대의 E.슈타이거와 W.카이저 등에 의한 ‘작품 내재 해석법’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작품의 역사를 초월한 자율성과 이것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이상적인 독자를 전제로 한다. 이에 대하여, 독자 및 독자에 의한 독서행위 바로 그 자체의 역사성을 해석의 본질적 계기로서 도입한 것이, 하이데거의 ‘해석의 존재론’에 의거한 H.G.가다머의 ‘진리와 방법’(1960)이었다. 야우스가 문학사를, 무엇보다도 독자에 의한 작품해석의 수용사(受容史)로서 구성하려고 목표를 세웠을 때, 그 이론화의 기초가 된 것은 바로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이었다.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의 문화적 상황의 ‘지평(地平)’과, 이와는 시대적 ·문화적으로 상이한 독자가 위치하는 상황의 ‘지평’과는 결코 완전히 일치할 수는 없다. 작품의 향수와 평가는 이 상이한 두 ‘지평’의 일치와 어긋남이라는 상호작용 속에서 전개되며, 이렇게 해서 작품의 수용사는 ‘작용사(作用史)’로서 기술할 수 있다. 예컨대, 이미 존재해온 사회 전체의 ‘기대의 지평’에 대하여, 새로운 작품의 출현은 이에 영합 ·배반하거나 쇼크를 준다. 이와 같은 상황을 바탕으로, 작품이 어떤 시대에 어떻게 수용되었으며, 혹은 이것이 기성의 지평 변경을 어떻게 강요하였는지를 기술할 수 있다. 또, 역으로 작품의 예술적 성격(전위적 ·오락적 ·진부함 등)도 기술할 수 있다.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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