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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5 11:19:29 조회 : 240         
[19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67 - 구멍 뚫린 허무 이름 : 구득영(IP:183.102.224.80)
[19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67 - 구멍 뚫린 허무

19,12,1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59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거기에 보면 누가복음 13장 32절과 33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눅 13:32)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눅 13: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 예수님의 갈 길 !!

여기 3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라고 하시는데,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일은 예수님이 평소에 하시던 일이란 겁니다. 그리고 33절에서는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라고 하시는데, 즉 예수님께선 자신의 갈 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자기의 갈 길에 대해서 묘사를 하시면서 뭐라고 하십니까?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이니, 그게 곧 3일인데, 이것이 시간으로 묘사된 예수님 자신의 갈 길이라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예수님의 경우에는 카운터다운이 된다는 것인데, 즉 "3, 2, 1" 라는 식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갈 길은 일반인들이 가는 길과는 다른데, 즉 예수님의 갈 길은 예정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반면에 일반인들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니 카운터다운을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카운터다운은 미국 나사에서 로켓을 쏘아 올릴 때 보면 하는데, 그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이미 그 시점이 정해져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그 시각이 오후 2시 27분 15초라고 하면, 그 이전 2시간부터인가 카운터다운에 들어가는데, 그렇게 "10, 9, 8, …, 0" 라고 해서, 그 시각이 되면 정확히 발사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미래가 정해져있다는 것인데, 그러면 현재는 미래에 수렴이 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찾아간다고 할 수 있는데, 즉 거기에 모아진다는 것이죠.

* 결정적 사건을 중심으로 !!

그러면 예수님의 기준은 무엇인고 하니까, 카운터다운을 시작했을 때, 그 이전의 시간들은 예수님의 결정적 시간, 즉 결정적 사건으로 중심으로 해서 다시 모아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예수님께서 죽고 나서 부활을 하시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모든 인류에서 일어났던 사건들, 즉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공격한 것이나, 스탈린이 철의 제국을 건설한 것이나, 몽골의 침입과 임진왜란 등등, 그 모든 사건들이 어느 한 곳에, 즉 최종적인 의미를 제공해주는 지점에 와야만, 비로소 그 모든 의미가 밝혀진다는 말이죠.

성경에서 예수님은 이것을 '나의 때' 라고 했는데, 즉 '카이로스' 라는 겁니다. 시간의 묘사된 우주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카운트다운이 된다는 말이죠. 물론 우리도 언제 죽을지를 알면 미리 카운트다운을 하겠는데, 우리는 모르는데, 그렇지요? 그러니 카운트다운이 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아무리 "3, 2, 1" 라고 해도, 그 다음에 죽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시간으로 묘사된 카운트다운으로 묘사된 예수님의 결정적인 길, 그러니 그 길은 카운트다운으로 만들어진 길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마이 웨이'와는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길이라는 것은, 과거에 살았던 기억과 경험에 의해서, "이렇게 되지 않는가?" 라고 하면서 점선으로 이어진다는 말이죠.

그것이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미래라는 것인데, 반면에 예수님의 길은 어떻습니까? 앞에 있는 것은 도리어 점선이고, 가면 갈수록 실선으로 바뀐다는 말이죠. 그러니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명확해진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길이라는 것이죠.

* 오늘과 내일과 모레, 그리고 예루살렘 !!

이것은 시간으로 묘사된 것이고, 이것이 공간으로 묘사가 되면 어떻게 됩니까? 공간에 접근하는 식으로 결정적 사건을, 즉 "예수님의 길은 이것이다" 라고 천국의 길을 묘사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처음에 읽은 누가복음 13장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33절에서 예수님께서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공간으로 묘사된 것은 어느 것입니까?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이야기하신다는 말이죠. 우리가 이 예루살렘을 한 번쯤 가볼 만한데, 예수님의 결정적 공간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신 모든 업적과 일이 집약되어있는 시간과 공간을 여기 누가복음 13장 32절과 33절에서 소개하고 있다는 말이죠.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예수님이 묘사했다는 것은, 인간은 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다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시간으로 측정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또한 공간으로도 측정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서 "바로 여기야. 이 시간이야" 라고, 그렇게 표시가 가능하다는 겁니다.

* 예수님의 시그니처 !!

그것을 시그니처, 즉 사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하늘나라가 보이지 않으니 없다고 여겼는데, 이 세상 사람들은 보이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없다고 본다는 말이죠. 하늘나라는 인간들이 위로 삼아서 지어낸 것이고, 망상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는 것인데, 그런 이성의 시대, 과학의 시대, 즉 따지는 시대라는 말이죠. 그런 시대를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가르쳐주시는 하나의 사인으로서, 자신의 육신을 통해서 그것을 보여주셨다는 겁니다.

* 독생자의 영광 !!

그게 "말씀이 육신이 되매" 라는 것인데, 즉 "하나님은 본디 없으되 독생자를 통해서 하늘나라의 모든 것이 다 알려졌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지난 시간에 했는데, 아직 기억이 납니까? 우리가 이것을 안다고 하면, 지금 이 순간 죽어도 괜찮다는 겁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런 천국이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하면 죽어도 좋은데, 지금 왜 사느냐는 말이죠. 사람들은 뭔가가 더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그것을 알려고 산다는 겁니다. 그런데 진리가 있다고 하면, 자기 목숨과 바꾸어도 괜찮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목숨보다 진리가 더 소중하니 말이죠.

신앙생활은 그렇게 하는 것이지, 목숨을 부지하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게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 자랑거리나 자존심을 붙들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자기의 업적, 자기 자랑거리, 심지어 자기 목숨조차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 인생이 어떻고, 팔자고 어떻다" 라는 짜증거리가 한꺼번에 바닷물에 휩쓸려서 사라지듯 사라질 수 있는 그 무엇, 바로 그것을 모른다고 하면 평생을 교회에 다녀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진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면 자기 목숨보다도 더 고귀한 것을 발견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실 때, 없다고 하는, 즉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시간 속에서 표시를 해주셨고, 또한 공간 속에서 표시를 해주셨다는 말이죠. 그것을 '시그니처' 라고 하는데, 즉 표시, 혹은 징조, 징후,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 영화 '사랑과 영혼' !!

과거에 '사랑과 영혼' 이란 영화가 있었는데, 도자기를 굽는 유명한 장면을 다들 기억하지 싶은데 말이죠. 사랑하는 남녀가 있었는데 남자가 그만 죽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를 잊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 여자는 죽은 남자 귀신이 자기 옆에 있다는 것을 아는데, 그런데 표시가 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표시가 났으면 좋겠다고 여겼는데, 그러자 죽은 남자가 엄청난 노력을 해서 동전을 하나 살짝 움직인다는 말이죠.

그게 그 영화의 하이라이트인데, 그런데 대구의 기독교 신자들이 왜 다들 보았는고 하니까, "주님은 살아계신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 영화를 많이 보았다는 겁니다. 그 영화의 주제곡도 유명한데, 우리나라에서 엄청난 히트를 쳤다는 말이죠.

아무튼 표시를 해주는 것인데, 그것도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하늘나라가 중심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중심이 되면 이 땅에는 중심이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없다는 말이죠. 우리는 평생을 '나' 라는 것이 중심이 되어서, 자기가 잘 되어야 모든 것이 잘된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 예수님은 왜 귀신을 쫓아내셨는가?

여기서 제가 문제를 하나 던지면, 예수님께서는 사흘만에 없던 길을 만드셨는데, 즉 생명나무로 가는 막혔던 것을 뚫어서, 시간으로도 묘사해주시고 공간으로도 묘사해서 알려주셨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예수님은 평소에 왜 귀신을 쫓아내셨느냐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로 그냥 가시면 되는데, 왜 귀신을 쫓아내셨느냐는 말이죠.

(눅 13:32)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것은 바로 인간들이 평소에 어디에 덮쳐져있다는 겁니까? 귀신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데, 그러니 천국에 가는 길을 전혀 알아먹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귀신을 이기는 방법이 우리 인간에게는 없는데, 오직 성령이 오시는 길 외에는 없다는 것이죠.

성령이 오게 되면 귀신을 이기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귀신이 그동안 자기가 거짓말을 해왔다는 것이 들통이 난다는 겁니다. 성령에 의해서 말이죠. 귀신은 언제나 자기 잘남, 즉 '나' 중심이라는 겁니다. 귀신은 그렇게 우리 인간을 교육시켜왔다는 말이죠.

* 성령과 악령 !!

반면에 성령은 그런 귀신과 싸우니 누구 중심일까요? 성령은 성령중심입니까? 전혀 그렇지가 않은데, 성령은 성령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이라는 겁니다. 만약에 성령이 성령중심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나와야 합니까? "성령을 받아라. 그러면 너희가 잘 될 것이다"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가 잘된다고 하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 악령인데, 즉 "예수를 믿으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천국에 갈 것이다" 라고 것은 악령의 가르침이란 겁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렇게 천국에 보내주겠다고 하면서 그동안 마귀가 우리를 꼬드겨왔는데, 즉 "교회에 나오면 천국에 보내줄게" 라고 한다는 말이죠.

진짜 성령이 오게 되면, 자기 천국, 자기 지옥, 그런 것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피조물 소관이 전혀 아니고 창조주 소관이라는 말이죠. 피조물이 창조주의 역할을 하려고 하면 안 되는데, 그것은 마귀가 그렇게 만든 것인데, 그러니 그 자리를 창조주에게 양보를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먹고 살아가는 문제, 천국과 지옥의 문제, 구원의 방법, 그런 것은 모두 주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인데, 우리가 거기에 호응을 한다고 해서 어떻게 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물론 호응을 해봐야 또 다시 자기 중심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카운트다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겠는데, 즉 "쓰리, 투, 원", 그렇게 한다는 것은 하나로 모은다는 것이죠. 아마 이것은 이번 주 수요일 예배시간에 하지 싶은데 말이죠. 아무튼 하나로 모은다는 것인데, 실선에서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희미해졌다가 실선으로, 그렇게 어떤 구체적인 것에 주목하도록 한다는 겁니다.

* 과연 예루살렘은 무엇을 하는 동네인가?

그리고 여기 3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라고 하셨는데, 이것을 좀 설명해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이 무엇을 하는 동네입니까? 예수님은 왜 하필이면 예루살렘에서 죽고자 하시느냐는 말이죠.

(눅 13: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 없는 길 !!

예를 들어서, 미국의 나사에서 우주로 로켓을 쏠 때 어디서 합니까? 텍사스주의 휴스턴에 있는 나사본부에서 하는데, 다른 장소가 아니라 그 한 장소라는 겁니다. 그곳이 우주와 만나는 유일한 공간이라고 한다면, 마치 영화 'E.T에서'처럼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 인간도 하늘과 만나는 장소가 여러 군데가 아니라, 딱 한 곳으로 정해져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이라는 겁니다.

길이 여러 가지라고 한다면 사실 그 길은 의미가 없는데, 길은 오직 하나의 길이어야 한다는 말이죠. 달리 말하면 '유일한 길' 이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 유일한 길로 가려고 하면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길이라는 겁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없는 길인데, 즉 길이 없다는 말이죠. 즉 아버지에게로 갈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길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안타깝게 여길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을 파악해야 하는데, 즉 주제파악을 해야한다는 말이죠. 길이 없다고 짜증을 낼 것이 아니라, 지기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길을 없앴습니까? 그것을 우리가 천국에 올 입장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그 길에 대해서 우리는 이야기할 자격이나 권리가 없다는 겁니다.

* 찢어진 하늘 !!

여기서 마가복음 1장 10절을 보겠는데, 거기에 보면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라고 하는데, 하늘이 열리는 정도가 아니라 갈라졌는데, 그 의미가 찢어졌다는 것이란 말이죠. 찢어진다는 것은 폭력적인데, 그러니 완전히 통로가 전혀 없는 상태라는 겁니다. 그렇게 길이 없는데 하늘이 찢어지면서 만들어졌고, 그 길은 인간은 오는 길이 아니라 성령이 오시는 길이라는 말이죠.

(막 1: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막 1:10)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 성령은 PD !!

그러면 성령은 이 땅에서 누구를 만나려고 왔습니까? 세례요한입니까? 그게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 고집해서 찾아오는 길인데,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무엇도 유도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없는 길인데,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면 그 없는 길이 예수님을 위해서라도 있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연예인들이 모여서 예능프로를 한다고 하면, 그러면 거기에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카메라맨이 와서 카메라를 들이대야 한다는 말이죠. 카메라가 없으면 자기들끼리 아무리 무엇을 해도 그게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카메라로 찍어서 방송을 보내주어야 시청자들이 볼 수 있고, 그래야 그게 연예인들에게는 의미가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성령께서는 카메라로 찍는다고 할 수 있는데, 즉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의 일의 역할과 연기를 성령께서 하늘에서 압박을 가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날 성도의 입장과 똑같다는 말이죠. 성도가 되어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이미 길이 확보되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굳이 길을 찾을 필요가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없다는 것이죠.

* 그냥 한 번 내질러보는 것이 인생 !!

길을 찾는 것은 저기 동화사 갓바위에서 하는 짓인데, 그래서 겨울이 되면 '동안거' 라고 해서 벽에 점을 하나 찍어놓고 도를 닦고 한다는 겁니다. 길을 찾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데, 그러니 전혀 주제파악이 되지 않았다는 말이죠. 자기에게 왜 극락과 천국에 가는 길이 있어야 하느냐는 겁니다.

그 이유도 모르고 그냥 한 번 해보는데, 어차피 태어난 인생이니까 한 번 내질러본다는 말이죠.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많은데, 사는 것이 너무 답답하니, 그래도 살아가는데 길이 있을 것이라고 여겨서 지리산에도 들어가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의 행복을 찾아서 말이죠.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니 유명한 절을 찾아가서 빌고 하는데, 그래서 성철스님이 유명해졌다는 겁니다. 요즘은 법륜스님이 대세인데, 그 양반의 팟캐스트가 유명하다는 말이죠. 그러니 귀신이 귀신이 들린 자를 찾아간다는 겁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인데, 그래서 장경동 목사가 떴다는 말이죠. 목사가 아니라 귀신이 들린 자라는 겁니다.

그렇게 찾아가서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떻게 살면 행복한 인생이 됩니까?" 라고 하는데, 그 질문 자체가 잘못이란 말이죠. 우리 인간은 그런 질문을 할 자격조차도 없는데, 망하던 찌부러지던 인간은 자기 인생을 탓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부여된 것이고 주어진 것이란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자기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초월적 입장에 전혀 놓여있지 않다는 겁니다. 귀신이 들린 자는 먼저 그 귀신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그 악령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면 그 어떤 질문을 해도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하면 잘 됩니까?" 라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 인간이란, 영적실체를 육으로 덮어씌운 것 !!

방금 이야기한 것을 정리하면, 인간이란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이란 영적실체를 육으로 덮어씌운 것, 그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과학은 영을 인정하지 않는데, 육만 인정한다는 말이죠. 과학은 인간을 생물학적으로만 보는데, 즉 인간은 세포로 되어있고 새포의 움직임은 에너지의 교환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바깥 우주의 에너지가 인간에게 들어와서 인간은 그 에너지를 맛보고 살아간다는 말이죠.

이 우주는 지금부터 137억년 전에 빅뱅에 의해서 만들어졌는데, 거기서 수소와 헬륨이 나왔고, 그것이 결합해서 철과 은이 만들어졌고, 그것들이 모아져서 태양을 이루는데, 태양은 수소와 헬륨으로 되어있다는 겁니다. 핵융합으로 말이죠. 지구를 비롯한 행성들을 조사해보니 그 안에는 철을 비롯한 무거운 금속들이 있는데, 그러니 가벼운 금속에서 무거운 금속으로 가는데 137억년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지구의 경우에는 47억년 전에 만들어졌는데, 목성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설도 있고 말이죠. 처음에는 가스상태로 있었는데, 거기에 박테리아가 있어서 산소를 만들고 거기서 원시생물이 만들어지고, 처음에는 단종이었다가 이종이 되면서 번식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아미노산이 생기면서 단백질이 생기고, 거기서 DNA가 만들어지고, 그 DNA가 동질성을 가지는 후손들을 만들었다는 말이죠.

* 과학귀신은 물러가라 !!

지금 학교에서는 다들 이렇게 가르고 있는데, 그러면 여기서 무엇이 빠지고 없습니까?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낸 이야기는 없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런 과학적 사고방식은 귀신이 들렸다는 것인데, 귀신이 들렸기에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죠. 즉 "과학귀신은 물러가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그런 과학적 귀신의 사고방식으로 보니, "예수님이 물 위를 걸었다" 라는 것이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데, 물론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했다는 것도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도,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도 그렇고 말이죠. 동방박사가 별을 보고 따라온 것도 그렇고,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귀신이 들린 자가 사도바울에게 덤벼든 것도 역시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있을 때 천사가 와서 감옥의 문을 열어준 것, 또한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있을 때 계시를 받은 것도 역시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이런 빅뱅으로는, 말씀으로 "태초에 빛이 있어라" 라고 해도 빛이 있었다는 것이 전혀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에덴동산도 설명이 되지 않고, 더욱이 선악과를 따먹어서 죽었다는 것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 오직 성령을 받아야 !!

다시 말해서, 모든 성경말씀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는 것인데, 그런데 오늘날에는 과학적인 안목을 가지고 인류역사에 도움이 되라고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해석이 정반대로 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길이라는 것이, 우리 인간들이 찾고 있는, 그래서 인간에게 납득이 되는 길이 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성경공부를 해서 구원을 받는 길은 없어야 하는데, 오직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령은 목사가 주는 것이 아닌데, 우리 인간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무엇을 알게 되는고 하니, 이것이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내용인데 말이죠.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에 꽂힌다는 겁니다.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라는 말이죠.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라고 하는데, 오직 십자가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깊은 마음이라는 것이죠.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
(고전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 !!

그런데 과학적인 인간, 즉 귀신이 들린 인간들이 보기에 십자가는 무엇인고 하니, 허무의 결정체라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성령은 받은 자는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된다는 말이죠. 즉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라는 겁니다.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러니 십자가를 이야기할 때는 무엇을 빼야하는고 하니, 이 세상에서 우리가 원하는 기적은 잘라내어야 하고, 그리고 "내가 무엇을 알면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하는 성경의 모든 지식, 그런 신학적인 지식과 과학적인 지식도 다 부정을 당해야 한다는 말이죠.

이 두 가지를 부정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인데, 즉 자기가 구원을 받고자 하는 시도, 그것을 부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 라는 것인데, 그런 모든 것은 오직 예수님에게 속해있다는 말이죠.

* 하늘이 찢어졌는데, 그러면?

여기에 적힌 것은 다 지우고, 그렇게 하늘이 찢어졌는데, 그것은 어디를 겨냥합니까? 성령이 오기 위해서 길을 만드는 것인데, 그것은 예수님을 위한 길을 만든다는 겁니다. 그렇게 성령이 오시는 길이 무슨 길인고 하니까, 구약성경 전체를 예수님으로 인해서 완성이 된다고 하는, 그렇게 예언으로 본다는 말이죠.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구약성경 전체가 예수님에게 벌어진 일에 의해서 모든 것이 다 완성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자기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인데, 하지만 그게 빈 말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이 와야만 알아들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 예수님의 이야기이고, 그러한 예수님의 다 이루심의 여파와 효력으로서 자기가 흡수가 되었다는 것을 아는 자만이 성령을 받은 자라는 말이죠. 그러면 성령을 받은 자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자기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이 자기가 했다는 겁니까? 예수님께서 하셨다는 겁니까? 예수님이 홀로 다 이루셨는데, 그렇게 예수님이 홀로 이루신 것이 차고 넘쳐야 한다는 말이죠.

우리가 어릴 때 부엌에 가보면 커다란 가마솥이 걸려있는데, 거기에 무엇이 담겨있는지는, 그게 흘러 넘칠 때 알 수가 있다는 겁니다. 조금 있으면 동지인데, 요즘은 별로 하지 않지만 옛날에는 다 팥죽을 끓이고 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솥에서는 팥죽이 흘러 넘치는데, 그러면 그 안에는 팥죽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 구원이란,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흘러 넘친 것 !!

그와 같이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흘러 넘친 것인데, 그렇게 해서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주어진다는 말이죠.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고 이방인인데, 그렇지요? 이방인에게 있어서 구원을 빵 부스러기를 주워먹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우리는 개와 같은 이방인으로서 원래 언약이 없었는데, 그런데 그 언약을 받게 되어있는 유대인들이 받지를 않으니까 그 혜택의 여지가 새롭게 마련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이 거기에 초대를 받아서 구원이 되었다는 겁니다.

성경은 그렇게 설명하고 있는데, 그런 설명이 가능하려면 구약성경이 예언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구약성경은 누가 뭐라고 해도 예언이라는 것이죠. 바로 그 예언이 하늘이 찢어지면서 예수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 왜 예루살렘을 고집하는가?

그래서 누가복음 13장 33절에서 예수님은 어디를 고집합니까? 예루살렘을 고집한다는 말이죠. 예루살렘은 다른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에 있는데, 그 예루살렘은 예언의 장소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예언을 이루는고 하니, 하나님의 거처, 그런 하나님의 처소가 어디인고 하니, 특히 시편과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있는 곳이 예루살렘이라는 것이죠.

이 예루살렘을 다른 말로 시온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실제로 가보면 예루살렘은 시온보다 범위가 넓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다윗성이 있는데, 그 성전의 중심이 시온이라는 말이죠. 시온, 혹은 시온산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 시온산에 황금돔이라고 해서, 진짜 금으로 만든 집이 있는데, 그것은 마호메트가 만들었다는 말이죠.

마호메트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곳이 그곳이라고 해서,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슬람의 모슬렘들이 그 지역을 꽉 잡고 있는데, 하지만 실제적 질서유지는 이스라엘 군인들이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들을 쫓아낼 수 있다는 겁니다.

* 무엇을 좋아하는가?

그렇다면 이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처소가 될 때, 그러면 하나님이 거기에 그냥 계시면 됩니까? 그게 아니면 거기에서 어떤 일을 하신다는 겁니까? 그림을 다시 그리면, 인간이란 육으로 되어있는데, 또 하나는 정신분야, 혹은 영혼분야라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실제로 우리에게 영적인 요소가 있다는 겁니다.

이 정신적인 것은 철학에서만 말하는 게 아니라, 여기서는 귀신을 말하는데 말이죠. 그러면 이런 영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즉 영이 있어서 달라졌다면 어떻게 달라졌느냐는 겁니다. 그것을 바깥에서 어떻게 판정을 하는고 하니, 그것은 "무엇을 좋아하느냐?" 라는 것으로 가능하다는 말이죠. 그 질문에 대해서 답변하는 것으로 알 수가 있다는 겁니다.

"나는 예수님이 좋아요" 라고 하면 그 사람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아직도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것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지금 여러분이 한 살이 된 돌을 맞이한 갓난아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 앞에 뭔가 놓아둔 것이 있다는 겁니다. 즉 실도 있고 마이크도 있고 청진기도 있고 돈도 있고, 그리고 성경책도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러분은 한 살이 된 입장에서 무엇을 선택할까요? 그러니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가?" 라는 것은, 자기 정신이 어디에 팔려있는지를 본다는 겁니다. 자기 영혼의 상태를 바깥에서 측정할 때는, 그것은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것으로서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이죠.

한 살이니 실과 마이크를 놓고 하지만, 어른이 되면 그 앞에 자기 부동산, 자기 자식, 자기 가정, 자기 건강, 자기 사업체, 자기 교회, 자기 성경책,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라고 하면, 그 중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는 겁니다. 지금은 없지만 자기가 욕망하는 것, 즉 무엇을 가지고 싶어하느냐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순서대로 나열해보면, 물론 그것도 쉽지 않지 싶다는 겁니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건강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데, 그리고 아무리 자기가 잘 되어도 자식이 잘 되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것이죠. 또한 자기 손자도 잘 되어야 하고 말이죠.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하면 자기 과거의 기억인데, 즉 추억이라는 겁니다. 주로 앨범을 그런 것이 담겨있는데 말이죠.

* 나의 자존심인가? 주님의 자존심인가?

결국 이것은 두 가지로 요약이 되는데, 즉 "나의 자존심이냐? 주님의 자존심이냐?" 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내 중심인가? 주님 중심인가?" 라고 할 수 있는데, 과연 누구 중심으로 살아왔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좋아하는 것이 그만 바뀐다는 것이죠.

성령을 받지 않으면 제 아무리 그 앞에 예수님을 가져다 부쳐도, 그것은 자기 자존심의 연장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육과 정신이라고 했을 때, 육은 이러한 것을 교묘하게 감추기 위한 것인데, 이 육을 저는 '껍질' 이라고 했는데 말이죠.

여기서 구약성경인 열왕기상 8장을 보면, 거기에 예루살렘이 나온다는 겁니다. 지금 예루살렘을 설명하려고 하는데 말이죠. 그리고 여기에는 자기 활동성도 포함시킬 수가 있는데, 즉 "나는 지금도 놀지 않고 일하고 있다" 라는 겁니다. 자기를 알아주는 친구나 팬들까지도 여기에 포함을 시키면, 정말로 순서를 정하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말이죠.

* 열왕기상 8장의 성전건축 !!

아무튼 열왕기상 8장에 보면 예루살렘이 나오고, 거기서 솔로몬이 일을 크게 벌리고 있다는 겁니다. 다윗은 하지 못하고 그 아들 솔로몬이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성전건축인데, 그러면 성전을 솔로몬이 지었습니까? 하나님이 지었습니까?

(왕상 8:20)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도다 내가 여호와의 허하신 대로 내 부친 다윗을 대신하여 일어나서 이스라엘 위에 앉고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고
(왕상 8:21) 내가 또 그곳에 우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저희와 세우신바 여호와의 언약 넣은 궤를 위하여 한 처소를 설치하였노라

여기서 솔로몬은 일종의 하청업체라고 보면 되는데, 그러면 하청업체에서 기공식을 하는데 주인공이 되어서 참여를 합니까? 가위로 테이프를 자르는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그들이 진짜 오너라는 말이죠. 하청업체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일만 해주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솔로몬은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하청업체인데, 그런데 그것을 솔로몬은 뭐라고 합니까? "나는 하나님의 일을 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렵게 뭐라고 하는고 하니, "우리 아버지 다윗과 맺은 계약서에 의해서 진행이 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계약인데, 즉 하나님은 계약서가 없이는 일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 하나님은 예언이 없이는 일하지 않아 !!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인 다윗과 맺은 약속인데, 그게 아까 이야기한 예언이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은 무엇이 없이는 일하지 않다는 겁니까? 하나님은 예언이 없이는 일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예수님 자체가 카운트다운이고 예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십자가라는 완성을 향해서 "쓰리, 투, 원", 그렇게 진행이 된다는 겁니다.

누가복음 13장 33절에서 "오늘, 내일, 모레" 라고 했을 때, 오늘이란 것이 하루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길다는 말이죠. 물론 내일도 긴데, 사흘만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난 다음에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이고, 그러니 그 이전에 있는 모든 것을 시간으로, 즉 카운트다운으로 설명해서 "오늘, 내일, 모레"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 지향점 !!

그만큼 목표는 지향점이 있는데, 그러면 여러분의 지향점은 무엇입니까? 지향점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지향점이 없기 때문에 의미가 없는데, 그렇게 의미가 없으면 사는 재미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에게 의미가 되는 것을 만들어버린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이번 금요일에 여행을 간다" 라고 하면, 그러면 그때부터 카운트다운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의미가 생기는데, 그 앞에 어떤 일이 있어도 시시한데, 오직 그 날만 오기를 고대한다는 말이죠. 앞에 날씨는 비가 와도 괜찮은데, 그 날만 날씨가 좋으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자기가 정한 목표를 중심으로 수렴이 된다는 말이죠. 즉 응축이 되고 몰린다는 것이죠.

"손자가 수능시험을 친다" 라고 하면 얼마나 중요합니까? 자기 손자라는 말이죠. 그런데 자식들이나 손자들 중에서 수능도 다 치고 취직을 해서 결혼을 했다고 하면, 그러면 수능시험을 치는 날이 의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와 상관이 없다는 것인데, 그러면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인생이 너무나 심심하고 무의미하니, 인간은 매일같이 어떤 행사를 만들어낸다는 겁니다. 새로 달력이 나오면 일일이 표시를 하는데, 이 날은 결혼 15주년, 이 날은 처음 만난 날의 17주년, 그리고 장소도 여기는 처음으로 커피를 마신 곳, 그런 식으로 한다는 말이죠.

그것은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즉 "이 날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 이 날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이 날은 일년 농사에 감사하는 날, 그런 식으로 말이죠. 그게 성탄절, 부활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모두가 돈을 내는 날이라는 말이죠. 그래야 교회가 존재의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데, 그렇게 중요한 사건들을 만들어서 자기가 무의미하지 않다고 여기려고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게 무슨 상태라는 겁니까? 귀신이 들린 상태라는 것이죠. 달리 말하면, 귀신이 들린 상태는 무엇이 빠지고 없는고 하니, 예언이 없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계획과는 무관하다는 말이죠. 주님이 가신 길과는 다른데, 전혀 엉뚱한 길로 가고 있다는 겁니다.

길에 있어서 각 사람마다 다 길이 있으면 그 길은 의미가 없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가신 길은 아주 위험하다는 말이죠. 이 길이 위험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찾지를 않는데, 그래서 마태복음 7장에서는 '좁은 길'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게 여호수아서 1장에서는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광야의 위험한 길이 되는데, 민수기도 그러하고, 위험한 길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율법을 따라간다는 것은 위험하기가 짝이 없다는 겁니다.

(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수 1: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 위험한 길, 죽음의 길 !!

그런데 예수님에게는 위험한 정도가 아니고 십자가의 길, 즉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시범적으로 보여주셨다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죽으면 천국에 갑니까?" 라고 하는데, 자기가 죽는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이 터놓은 길로 가야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이 터놓은 길이라고 한다면, 자기가 하는 일마다 술술 잘 풀리고 해도, 즉 장사를 해도 대박이 나고, 펀드에 들어도 100프로의 수익이 나고, 또 집을 사면 하루가 무섭게 집값이 마구 오르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좁고 좁은 길이란 겁니다. 제 아무리 돈이 많고 건강하게 살아도, 자식들도 모두가 잘 되고 말이죠. 아무리 그렇게 살아도 그게 고난의 길이란 말이죠.

이것은 다른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뚫을 수 없는 길인데, 그러니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미리 예상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망하는 것을 가지고 십자가의 길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루 세끼를 다 챙겨먹으면서도 얼마든지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다는 말이죠. 성령께서 그렇게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어진 것에 대해서, 즉 자기 수입이 얼마든 건강이 어떠하든 간에, 그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자기 자존심을 뭉개는 주님의 자존심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 인간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껍질이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즉 껍질이 영혼을 감추고 있다는 말이죠.

* 껍질, 그리고 구멍 !!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육이라는 껍질에 드릴을 가지고 그만 구멍을 내시는데,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 하는 기능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껍질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지 한 번 살펴보자는 말이죠.

여기 열왕기상 8장에 보면, 이 8장이 상당히 긴데, 솔로몬이 언약궤를 성전을 지어서 안치를 시킨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인정하셨는데, 9장에 그 내용이 나온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솔로몬이 성전을 다 짓고 난 뒤에 다시 나타나셔서, 함께 하겠다고 하시면서 성전을 인정해주신다는 겁니다.

*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

그러면 8장에 어떤 내용이 나오는고 하니, 11절에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라고 하는데, 솔로몬이 성전을 제대로 지었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계약서대로 접수해주시는데, 그래서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찼다는 겁니다.

(왕상 8:11)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니 인간인 제사장은 제대로 그 앞에서 서지도 못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제사장이 나이가 들어서 관절이 아파서 제대로 서지를 못하고 하는, 그런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인간의 건강 문제, 돈 문제, 자식 문제,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죠.

* 복음을 위한 결혼이고 가정 !!

이사야서 6장에 보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하는데, 어제 낮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어떻게 성도가 부부생활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 서로가 망해도 마땅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게 되면, 그러면 모든 것이 다 통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행복을 위한 결혼이 아니고 복음을 위한 결혼이고 가정이라는 것이죠.

그 복음 앞에서 망해도 마땅하다는 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러면 아주 화목한 가정이 된다는 겁니다. 모두들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당신보다 더 못났어" 라고 하는 마음으로 말이죠. 아닌가요? 제가 지금 약을 올리고 있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너는 내가 아니면 죽었어" 라고 하고 있습니까? (ㅋㅋ)

* 인간은, 인생 그 자체가 곧 껍질 !!

하나님의 그 영광스러움 앞에 서지 않으니 자꾸만 교만해지는데,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그 교만이, 이 껍데기가 말을 하는데, 이것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사람들은 자기 인생전체를 이 껍데기를 만드는데 다 투자를 한다는 겁니다. 즉 "나는 이 정도야" 라고 하는 껍질을 만드는데 말이죠. 고생고생을 하면서 껍질만 만들었다는 겁니다. 자기 자존심을, 자기 허점을 감추기 위한 껍질을 말이죠.

그래서 성경은 그 껍질에 구멍을 내는데, 그러면 어떤 껍질이 있는지를 살펴보자는 겁니다. 그게 22절부터 나오는데, 여기 30절에 보면, 솔로몬이 자기와 백성들이 이 성전을 향해서 기도할 때는 거기에 응답해달라고 한다는 말이죠.

(왕상 8: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그렇다면 그것이 어떤 경우인고 하니, 여기 31절과 32절에 보면 그 내용이 나온다는 겁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그 이웃에게 범죄를 했다면, 그게 껍질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해달라고 합니까? 그 사람이 성전에 와서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용서해달라고 한다는 말이죠.

(왕상 8:31)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이웃에게 범죄함으로 맹세시킴을 받고 저가 와서 이 전에 있는 주의 단 앞에서 맹세하거든
(왕상 8:32)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국문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돌리시고 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 의로운 대로 갚으시옵소서

* 하나님의 자존심 !!

이것은 하나님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인간에게 죄가 저질러지는 사태를 일부러 일으켜놓고, 그 해결책을 인간이 스스로 만들지 못하게 하는 하나님의 자존심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게 곧 십자가의 자존심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내가 이렇게 죄를 지었으니, 내가 스스로 벌을 내려야지" 라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자존심이라는 겁니다. "내가 이런 죄를 지었으니 헌금을 많이 해야지. 더 충성해야지" 라는 식으로 말이죠. 주님의 자존심은 용서하는 장치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다시 설명을 해드리겠는데,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은, 인간들은 귀신이 들려있기 때문에 자기 자존심인데, 그게 마귀의 자존심이라는 것이죠. 마귀가 그렇게 요청을 하는데, 그런데 거기에다가 성전을 지었다고 하는 것은, 모든 사태가 하나님의 자존심이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자존심이 무엇인고 하니, "네가 어떤 죄를 지어도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면 용서해주겠다" 라고 한다는 것은, 그것은 이미 죄를 지을 때부터 생각해놓은 하나님의 예언인데, 그러니 결국 용서해주시는 주님의 자존심을 드높이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내일, 모레, 그 사흘의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그러니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가장 깊은 속마음인데, 그 하나님의 본심, 그것이 곧 성령이고, 그것을 주님이 바깥으로 드러낸 시그니처가 십자가라는 말이죠.

그 다음에 33절과 34을 보면,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왕상 8:33) 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주께로 돌아와서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이 전에서 주께 빌며 간구하거든
(왕상 8:34)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 열조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어떤 사람이 전쟁에 나가서 패배를 했는데,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기분이 나쁘다는 겁니다. 어제 낮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남자들은 모든 것을 숫자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죠. 숫자가 되면 디지털이 되고 그러면 기호가 되는데, 그러면 그 기호는 어디에 사용이 됩니까?

이 세상을 자기가 벌리는 게임판으로 보는데, 즉 승부를 건다는 겁니다.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잘라야 하는데, 그러니 남자에 있어서 이 세상은, 즉 게임판에서 자기는 승리자라는 겁니다. 자기가 잘나서 이겼는데, 결단코 패배자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것을 증명해주는 것이 곧 세상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지기 싫다는 것인데, 그런데 여기 33절과 34절에 보니, 전쟁에서 졌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 성전에 와서 기도하게 되면, 주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승리케 해준다는 말이죠. 달리 말해서, 전쟁에 나가서 패배하는 것도 자기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이 자기 자존심을 걸고 하신 일인데,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네가 전쟁에서 패배하고 나서 나에게 돌아오는지 보겠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돌아오면 주님의 백성이고 자기 기분이 나쁘다고, 즉 자존심이 상했다고 돌아오지 않으면 주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말이죠.

* 정신이란, 주님의 자존심과 나의 자존심이 부딪치는 장소 !!

그러니 이것은 육으로 덮어진 이 정신문제인데, 이게 주님의 자존심과 자기 자존심간에 서로 승부가 벌어지는 장소라는 겁니다. 정신이 그런 영적인 장소라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은, 정신을 뒤덮고 있는 육을 드릴로 뚫는 것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을 제대로 섬겼다고 여겨도, 다시 드릴로 뚫어보면 어떻습니까? "내가 왜 그렇게 했을까? 참으로 내가 믿음이 없어구나" 라고 하면서 회개를 한다고 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따져보면 회개가 아니고, "나는 이렇게 잘난 존재다" 라는 것을 뽐내고 있는 중이라고 보면 된다는 겁니다.

반성을 했는데 그 결과가 이상하게 '반성한 나'를 '잘난 나'로 전환을 시키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은 "아직도 나 자신은 붙들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다" 라는 것인데, 즉 "비록 지금은 좀 힘들지만 아주 망한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을, 그렇게 스스로 위로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인데, 얼마나 못났는지 모른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망해가면서도 뭐라고 합니까? "그래도 잘난 맛은 있다" 라고 여기는데, 즉 "내가 세상적으로는 패배했지만 자존심만은 놓치지 않겠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 것이 굉장히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런 인생을 살면서 무엇을 두려울까요? 가난해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존감이 무너질까봐, 그게 두렵다는 겁니다. "내가 이것을 하려고 평생을 이렇게 힘들게 살았는가? 돌아갈 수도 없고 후회막급이다. 그러나 내일은 잘 될 것이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 내일이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 구멍난 인생 !!

지옥으로 가는 길인데, 전혀 주님에게 가는 길이 아니라는 말이죠. 주님에게 가는 길은 자기 인생이 구멍이 나야하는데, 그것도 드릴 정도가 아니라 압착 프레스로 천공이 나야한다는 겁니다. 왜 화폐를 폐기시킬 때 조폐공사에서 어떻게 합니까? 중간에 커다란 구멍을 내서 이제는 쓸모가 없다는 표시를 낸다는 말이죠.

그와 같이 우리가 구원이 된다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로 구멍이 나야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구멍이 나면 쓸모가 없는데, 하지만 그렇게 구멍이 났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주님께서 "너는 나의 자존심에 필요한 존재다" 라고 인정해주는 것으로서, 그게 바로 성도라는 말이죠.

오늘이 전도서 마지막 시간인데,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고 하니, "허무는 허무로 뚫려야 한다" 라는 겁니다. 허무하다고 낙심할 문제가 아니라, 제대로 된 허무가 와서 여기에 구멍을 내야한다는 것이죠. 허무는 허무가 접수해주어야 하는데, 쓰레기는 쓰레기차가 와서 치우듯이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그래야 쓰레기에게 의미가 생긴다는 겁니다. 우리는 쓰레기인데, 우리보다도 더욱 더 쓰레기로 오신 주님 속에 우리를 집어넣을 때, 비로소 우리는 부활이 되는 주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셨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35절과 36절을 보겠습니다.

(왕상 8:35) 만일 저희가 주께 범죄함을 인하여 하늘이 닫히고 비가 없어서 주의 벌을 받을 때에 이곳을 향하여 빌며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그 죄에서 떠나거든
(왕상 8:36) 주는 하늘에서 들으사 주의 종들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 마땅히 행할 선한 길을 가르쳐 주옵시며 주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신 주의 땅에 비를 내리시옵소서

무슨 말입니까? 주의 백성이 죄를 지어서 성전에서 빌면, 그러면 이 땅에 비가 오게 해달라고 한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37절에서 39절을 보겠습니다.

(왕상 8:37) 만일 이 땅에 기근이나 온역이 있거나 곡식이 시들거나 깜부기가 나거나 메뚜기나 황충이 나거나 적국이 와서 성읍을 에워싸거나 무슨 재앙이나 무슨 질병이 있든지 무론하고
(왕상 8:38)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이 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왕상 8:39)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유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왕상 8:40) 그리하시면 저희가 주께서 우리 열조에게 주신 땅에서 사는 동안에 항상 주를 경외하리이다

이번에는 재앙과 질병인데, 그런 일이 생겨도 여기 성전에서 회개하는 기도하면 그 질병이 낫게 해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루살렘은 무엇인고 하니, 성전이 있는 곳이고, 그리고 이 성전은 무엇을 하는 곳인고 하니, 자기 백성들에게 천공, 즉 하늘에서 구멍을 뚫는다는 말이죠.

인간이란 것은, 깜부기가 없고 제 때에 비가 와서 농사가 잘 되면, 그러면 하나님도 필요가 없는데, 그것으로 족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존심이 살 곳이 없는데, 그래서 하나님은 일부러 일을 일으킨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가 귀신에 들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 나사회전 !!

구약의 사사기를 보면, 뭔가 자꾸만 반복이 되는데, 그것을 일종의 '나사회전' 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처음부터 계속해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가끔은 숨을 쉴만한 평화로운 시대가 온다는 겁니다. 그런 시대가 오면 사람은 주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성공을 의식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람은 돈이 생기면 딴 짓을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가운데서도 이번 토요일에 복권에 당첨이 되면, 여기 성경공부에 참석하지 않을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말이죠(ㅋㅋ). 그 돈을 쓰려는 사업계획을 세운다고 정신이 없어서, 여기에 올 시간이 없다는 겁니다.

일이 잘 풀리면 인간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어있는데, 그런데 하는 일마다 꼬이게 되면,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이 도와주시는데, 하지만 거기에는 희생물이 따르게 되는데, 그런데 그것을 인간들은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즉 누군가가 대신 희생을 한 공로로서 도와주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그게 아니라 자기가 기도했기 때문에 도와주신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제가 여러 번 이야기를 했는데, 예를 들어서, 암에 걸려서 기도했더니만 나았다고 하면, 그러면 암에 나았다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게 아니라, "나는 암에 걸렸다고 짜증을 내는데, 나는 너의 죄 때문에 죽었다" 라고 하는 그 십자가를 알게 될 때, 그래서 자기가 암에 걸렸다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란 것을 아는 것, 그게 바로 기적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고 자기가 암에 걸린 이유를 아는 것이 기적이지, 자기가 목표로 한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기적이 아니라는 말이죠. 즉 "도대체 나는 누구 덕택으로 사는가?" 라는 것이 속에서부터 올라와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존심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겁니다.

* 룻, 그리고 다윗 !!

그래서 사사기에서 반복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처음에는 잘 되면 좋아하다가 이방민족들이 쳐들어오면 난리가 나서 부르짖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나사회전을 하는데, 즉 뺑뺑 돌아서 올라간다는 것이죠. 어디까지 말인가요? 마지막에는 이스라엘 전체가 아니라 이방여인이 룻이 구원하게 되는, 그곳까지 말이죠.

그 룻의 4대 자손이 바로 다윗인데, 그 다윗에 의해서 성전이 준비되고, 그리고 그 아들인 솔로몬에 의해서 성전이 세워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성전이 세워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는 이제부터 성전위주로 일하시겠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죽는다는 말이죠.

* 예수님께서 단번에 죽으심으로, '완료' !!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고 그 성전은 어떻게 돌아갑니까? 자동차가 움직이려고 하면 휘발유가 있어야 하듯이, 성전이 가동이 되려면 계속해서 매일같이 희생물이 주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단번에 죽으심으로 완료가 되어버리는데, 즉 모든 예언이 완료가 된다는 것이죠.

(히 9: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히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그래서 이제는 예수님이 용서한 자는 천국에 가고, 예수님과 무관한 자는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즐거운 사람들은 천국에 가고, 반면에 주님과 같이 있는 것이 짜증이 나고 부담스럽다고 하면,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의 소원대로 주님과 함께 하지 않는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우리 인생의 길이란 것은, 왔던 곳은 있지만 갈 곳은 정해져있지 않는데, 그래서 주님께서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이미 확정된 길을 가지고 점선으로 우리에게 마중을 나오신다는 겁니다. 그것이 성령님의 일인데, 그러니 성령님의 일은 이미 확정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최종점을 찍었는데, 확정된 십자가로 인해서 우리를 미리 받아주신다는 겁니다.

* 세 쌍둥이 이야기 !!

이게 KBS의 '인간극장'에 나온 이야기인데, 어떤 부부가 세 쌍둥이를 낳았는데, 그만 이혼을 했다는 말이죠. 엄마가 이 아이들을 키우면서 철원에서 미장원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만 자궁암에 걸려서 죽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 쌍둥이는 갈 곳이 없는데, 즉 길이 없다는 것이죠. 물론 아버지는 소식도 없고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마중을 나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73살의 할아버지와 63살의 할머니라는 겁니다. 이들이 아직까지는 초등학생들인데, 그러니 자기들이 알아서 살아갈 수 있는 입장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누군가가 거두어 주어야 하는데, 그것을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해준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내일, 모레, 그렇게 사흘동안 자기의 길을 가시고, 또한 예루살렘에서 죽는다고 하신 것은, "내가 너희를 거두어 주겠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그것도 미확정이 아니라 이미 확정된 상태에서 거두어 주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세 쌍둥이들은 누구의 은혜를 잊으면 안 됩니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거두어 주신 것을 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 야, 독립해라 !!

그런데 우리는 자존심이 있어서 인생을 자기 혼자서 어떻게 하려고 하는데, 즉 자기 혼자서 제대로 만들려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악마의 심보인데, 악마는 자꾸만 우리를 보고 "야, 독립해라" 라고 부추기는데, 즉 "너희가 비록 피조물이지만, 그 티를 내지 말고 알아서 해라. 하나님이 너희들은 만들었지만, 이제는 너희들이 알아서 살아가야 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바로 그런 사고방식, 그런 육으로 가득한데, 주님은 그 껍질에 구멍을 내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우리의 육을 드러내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사고를 치고, 몸이 아프고, 죄를 짓는, 그런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란 말이죠. 정작 문제는 우리 자신의 자존심인데, 즉 악마의 본성이 문제라는 겁니다.

우리의 인생이 제 아무리 힘들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데, 그것을 주님께서 뜯어내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아무리 반성을 해도 뜯어내는데, 왜냐하면 그것도 역시나 껍질이라는 겁니다. 남들에게 성공했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역시 껍질인데, 그런 껍질에 교만을 자아낸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우리가 문을 열고 나가면 세상살이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타인과의 유사성을 가지고 그들과 경쟁해서 그 분야에서 밀리지 않고 성공하고 싶어서, 자꾸만 그들을 모방한다는 겁니다. 유사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을 흉내내는데, 그렇게 해서 앞질러 가면 그게 성공이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평소에 우리 자신이 가지고 정신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육의 밑에 놓여있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이 문제인데, 자꾸만 비교한다는 겁니다. 이웃과 비교하고 또 동창생과 비교하고, 끊임없이 그렇게 비교하고 비교한다는 말이죠.

* 제대로 된 허무를 만나야 !!

이제 이 전도서를 마치면서, 이 전도서를 두 글자로 요약하면 '허무'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외면하고 싶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허무하지 않기를 원한다는 말이죠. 그러나 우리 자신의 자존심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제대로 된 허무를 만나야 하는데, 그게 바로 길이라는 것이죠. 그러면 허무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엇입니까? 자기보다도 더 허무한 분을 제대로 만나게 될 때인데, 그렇게 되면 "아하, 내가 가진 허무는 허무도 아니구나" 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 교재 160페이지를 보면, "제대로 허무하게 살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니 우리는 이왕 사는 것 허무하게 살면 된다는 말이죠. 돌잔치를 할 때 허무를 쥐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 "인생이란 허공에 쓰는 낙서와 같은 것" 이라고 되어있는데, 허공이라고 하면 다들 생각나는 노래가 있지 싶은데 말이죠.

우리의 인생이란 파티는 어차피 다 허무하게 끝나게 되어있는데, 그러니 성공이든 실패든 간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미 죽은 자에게는 소유도 전혀 소용이 없는데, 소유라는 것 자체가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 아무리 '아모레 파티' 라고 방방 뛰면서 외쳐도 전혀 무의미한데, 물론 그 파티는 다른 파티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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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허공에 쓰는 낙서와 같은 것
흩어지면
게임도 끝나고
이미 죽은 자에게는 소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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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여기서 교재 166페이지를 보겠는데, 이제 우리가 전도서를 다 살펴보았으니 이것을 편하게 볼 수 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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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내용구성
첫째(1:1-4:3) : 전도자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열거되어있다.
둘째(4:4-9-9:16) : 지혜로운 자가 경험한 사실이 열거되어있다.
셋째(9:17-12:14) : 모든 인생들을 위한 충고가 기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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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헛된 인생 !!

여기 첫 번째로 나오는 전도자의 인생관과 세계관이란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온갖 것을 다해도 어떻다는 겁니까? 즉 마누라가 천 명이고, 돈도 많고, 책도 많이 쓰고, 강의도 많이 다니고, 가는 곳마다 담뱃불을 끄라고 해도(ㅋㅋ), 아무리 그렇게 해도 그 결과가 어떻다는 겁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는 것인데, 전도자는 그게 자기 인생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전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러면서 두 번째로는 그러한 인생을 무엇으로 확산시키는고 하니까, "계시를 받은 전도자의 경험은 곧 너희들의 경험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 솔로몬을 모델로 삼아서, "나는 돈이 많고 똑똑한 솔로몬처럼 될 거야" 라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여자가 많고 돈이 많고 해도, 모든 것이 다 헛되다는 말이죠. 그러니 너무 착하거나 악하게 살려고 하지 말라는 것인데, 즉 착해서 유명해지려도 하지 말고, 악해서 유명해지려고 하지도 말라는 겁니다. 그저 살아있다는 것 자체를 신비로 여기고 살라는 말이죠.

그러면 마지막으로 세 번째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결국 무너지게 되어있다. 하지만 무너지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하늘에 있는 해와 달과 별이다. 그러니 그것을 바라보자"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인생은 자기밖에 모르는 인생이기 때문에, 해와 달과 별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를 몰랐다는 말이죠. 자기만 생각하니, 들풀이 왜 있고, 참새가 왜 짹짹거리는지를 몰랐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들이 풀과 동물을 전혀 키우지 않았는데, 그런데도 인간은 자기 손을 거쳐야 의미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일방적으로 자기 생각밖에 하지를 않았다는 말이죠. 하지만 인간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훨씬 더 많은데, 그런데 우리는 평생 자기에게 매여서 사느냐는 겁니다. 자기 올곧음, 자기 훌륭함, 왜 그런 것에 얽매여서 사느냐는 말이죠. 죄 때문에 죽기는 다 마찬가지인데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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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제별 구성
첫째(1:1-18) : 창조의 순환과 허무
둘째(6:10-12) : 사람의 한계
셋째(11:7-12;14) : 즐거움과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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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세 번째로 '즐거움과 종말'이 나오는데, 그러니 모든 즐거움은 다 종말로 끝나고 마는데, 그러니 결혼식장에 가는 것보다 장례식장에 가는 것이 낫다고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은 결혼식장이 아니라 장례식장에서 미리 볼 수 있다는 말이죠. 그것을 남의 장례식이 아니라 자기 장례식으로 여기고, 거기에 미리 참여하라는 겁니다. 그 누구도 이 장례식장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죠.

* 미리 참여하는 자기 장례식 !!

예를 들어서, 자기가 파티마 병원의 장례식장에 누워있다고 여기자는 겁니다. 그런데 유족들은 어떠합니까? 정작 죽은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매우 바쁜데, 손님을 받고 조의금을 챙긴다고 말이죠. 다들 그렇게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죽은 사람을 지금까지 그렇게 대우하면서 살아왔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죽은 사람은 죽은 것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렇게 산다는 것이 과연 사는 것이냐는 말이죠. 그것은 죽음의 반복인데, 즉 죽기 위해서 산다는 겁니다. "아하, 이래서 죽는구나. 이런 짓을 하면서 죽음으로 말려 들어가는구나" 라는 것인데, 그렇게 나사회전에 빨려 들어간다는 말이죠.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교재 171페이지의 '결론' 부분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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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의 주제는 주제의 권력화도 아니요, 윤리의 위기성을 다루는 것도 아니다. 뭔가 지킬만한 것이 없음을 주목하라는 말이다. 인간은 짜여진 대로 산다. 한정된 능력과 인식으로 공장같이 돌아가는 세상에서 한낱 기계처럼 움직인다. 지금 이런 식대로 살도록, 더 이상 벗어날 수도 없고 뛰어넘을 수 없도록 제한을 가하신 분의 면전 앞에서 산다. 달리 살 수 없기에 이대로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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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가 오신다 !!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공장과 같이 돌아가는 세상에서 그야말로 기계처럼 살아가는 인간, 그러니 이 세상에서 허무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이 허무한 것은 당연지사라는 겁니다. 마땅히 허무해야하기 때문에 허무하다는 것이죠.

그러면 허무하지 않은 세계는 무엇입니까? 그러한 세계는 우리 인간에게는 발견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아직까지 하늘이 찢어지지 않았으니 말이죠. 즉 누군가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전도서는 예언인데, 그게 무슨 예언입니까? 누군가가 오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누가 오십니까? 이런 허무를 유발할 정도로, 그런 허무를 통해서 오시는 분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분을 여기 전도서에서는 '지혜'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은 지혜에 의해서 움직여진다는 것이죠. 그 지혜가 오기까지 그 앞에는 허무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즉 허무, 그리고 다음이 지혜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 허무를 허무라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곧 지혜가 오기 이전에 인간이 해야하는 지혜로운 태도이고, 그리고 그것이 제대로 된 인간의 삶의 자세라는 말이죠. 즉 "나는 허무하고, 지혜는 오직 주님에게 있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여기는 하나님의 지혜, 즉 십자가의 의미라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이 이 전도서의 결론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허무로 충만한 세상이지만, 그런 허무 가운데서도 지혜로 충만한 줄 압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이제는 오직 주님이 되게 하시고, 그래서 주님의 희생과 공로와 사랑만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감사하게 여겨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9,12,25 오전 11시에 마침.

허무 앞에서, 그 허무로 인해서 '지혜'를 만나게 해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
 첨부파일 : 19대구강의('전도서'속의그리스도)67-구멍뚫린허무.hwp (62.0K), Dow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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