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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8 17:57:22 조회 : 38         
[20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12 - 이스라엘 만들기 이름 : 구득영(IP:183.102.224.80)
[20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12 - 이스라엘 만들기

20,07,20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이스라엘의 임금은 어떤 방식으로 오시는가?

오늘은 교재 45페이지부터 하도록 하겠는데, 여기에 보면 요한복음 1장 51절 말씀을 소개해놓고 있다는 말이죠. 일단 먼저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요 1: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나다나엘이 예수님은 보고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입니다" 라고 하면서 자신의 아는 바를 이야기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나다나엘이 무엇을 고대했습니까? 이스라엘의 임금을 기다렸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이스라엘의 임금은 어떤 방식으로 오시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나다나엘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스라엘의 그 이전 이름이 따로 있었는데, 그게 바로 야곱이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야곱을 따로 뽑아내어 보자는 것이죠.

* 야곱과 천사들의 계단 !!

창세기 28장에 보면 이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꿈속에서 말이죠.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게 되는데, 그때는 하나님이 나타나신 게 아니라 꿈에 사다리가 보였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사다리를 통해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존재가 있었다는 말이죠.

물론 야곱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천사들인데, 즉 천사들의 계단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 천사들이 어디 한 두 명이 아닌데, 많은 수의 천사들이 무리를 지어서 야곱을 향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는 말이죠.

(창 28: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창 28:11) 한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창 28: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그러니 야곱과 하나님의 연결에 있어서 천사들이 개입했고, 그러면 그 천사들은 누구의 지시를 받습니까? 하나님인데, 즉 약속을 앞장세우시는 언약의 하나님께서 천사들의 중재 하에서 언약을 야곱의 인생에 퍼붓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야곱을 그 인생에 언약이 진행되는 특별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런 일을 감행하셨다는 것이죠. 그때 그 이름이 야곱이었는데, 그런데 창세기 32장에 보면 이름이 무엇으로 바뀝니까? 이스라엘로 바뀌는데, 그리고 나다나엘은 그 이스라엘이 지금 자기가 속해있는 이스라엘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창 32: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 이스라엘은 그 책임자가 따로 있어 !!

그러면 결국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이스라엘의 임금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되는 책임자라고 하는, 그런 뜻이라는 말이죠. 그 책임자가 곧 임금인데, 그러면 이것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자신을 책임진다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임금님이 오셔서 이스라엘을 책임지게 되는데, 그 책임을 지는 방향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되는 방향이라는 말이죠. 그 이외의 어떤 다른 방향은 없는데, 다른 목적이나 목표도 없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되는 일에 임금님이 책임자가 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 임금님이 어느 자리에 있다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옛날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이 잠을 자고 있던 그 돌배개의 위치, 거기에 예수님이 계시게 되면, 그렇게 예수님이 임금님으로 오셨다고 한다면, 그것은 연결이 성사되었다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세우시는 것을 개시하고, 벌써 완성을 향해서 질주하고 있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임금님이 여기에 있다" 라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구체적으로 이 땅에 실시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디에 집중되고 있습니까?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임금님에게 집중이 된다는 말이죠.

* 야곱의 언약인생, 그게 곧 '복' !!

그런데 그 당시 야곱은 자식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냥 단신이었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완전히 솔로였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런 계단을 오르내리는 천사들의 활동을 통해서 언약이 하나님으로부터 야곱에게 집중이 되면, 그러면 야곱은 어떻게 됩니까?

거기서 야곱은 '복' 이라는 것을 보여주게 된다는 겁니다. 그 복이 바로 현재 이스라엘의 12지파인데, 물론 지금의 국가 이스라엘을 의미라는 것은 아니고 말이죠.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진짜 이스라엘인데, 그게 이스라엘의 12지파라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성경구절이 하나 있는데, 그게 요즘 들어서 신천지 때문에 유명해진 구절인데 말이죠.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천사들이 와서 하나님의 일을 집중적으로 하게 된다는 겁니다. 어떤 목표를 향해서 말이죠. 4절부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 이스라엘의 12지파 !!

(계 7:4)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계 7:5)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계 7:6)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계 7:7)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계 7:8) 스블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여기에 보면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라고 하는데, 그러니 유다 지파 전체가 아닌 그 중에서 일만 이천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르우벤 지파, 갓 지파, 아셀 지파 등등, 그렇게 해서 베냐민 지파까지 나간다는 말이죠.

* 144.000과 하나(1)의 이스라엘 !!

숫자가 전부 12,000으로 동일한데, 각 지파가 많고 적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12지파에 12,000을 곱하면 144,000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12지파가 주님의 언약의 완성상태에서 나타날 최종적인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 그러면 그 결과물이 낳는 12도 역시 동일하게 12로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 12에 1,000을 곱하게 되는데, 그러면 12,000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이 1,000이라는 것은 완성을 의미하는 최종적인 숫자라는 것이죠. 1,000 그 이상은 없는데, 1,000으로 모든 것이 다 마감이 되었다는 겁니다. 즉 12라는 원리에 따라서 12가 12로 제대로 모든 것이 언약적으로 완성이 되었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 12는 어디서 나온 숫자인고 하니, 그것은 천사들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한 그 활동함의 모습이란 겁니다. 즉 천사들이 12를 향해서 부지런히 활동하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이 12가 144,000이 된다면, 이것은 하나의 이스라엘로서 1이 된다는 겁니다. 즉 1이 되게 위한 144,000이라는 것이죠.

그렇게 144,000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이 야곱에게 주신 언약이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던 내부적 본질이 외부적 본질과 결합되어서 완성이 된 결과물로서, 그것이 곧 144,000이고, 더 나아가서 이게 하나의 이스라엘이 된다는 말이죠.

유다지파나 레위지파 전부가 아니라 거기서 12를 따로 뽑아내는데, 거기서 12라는 원리는 야곱에게 천사들이 접근했기 때문에 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야곱의 12아들인데, 그래서 이 12에는 무엇을 담고 있는고 하니, 인간의 행함이나 노력은 다 배제가 된다는 말이죠. 순전히 천사들, 혹은 하나님의 약속대로만 진행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이 12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를 하는고 하니, 인간들은 인간들 나름대로 자기의 구원시도를 하게 된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들도 자기가 천국백성이 되려고, 즉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서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 나름대로의 노력이 있고, 그리고 천사들의 활동함이 있는데, 이 둘이 서로 합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의 그 12지파가 되려는 인간의 노력을 배제한다고 했으니까,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그것은 서로가 대치상태가 된다는 말이죠.

* 천사에 의해서 제거된 야곱 !!

그래서 야곱에게 천사들이 왔지만, 그런데 그 천사들 중 하나가 야곱과 싸움을 벌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지, 그게 드러나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이 나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야곱은 천사에 의해서 제거가 되었다는 의미라는 겁니다.

바로 그러한 내용으로 이스라엘의 전체적인 것으로 꽉꽉 채우는데, 전혀 빈틈을 남기지 않고 말이죠. 그러면 이런 논리가 과연 역사에서 실제적으로 진척이 되었느냐는 것은, 그것은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오신 분께서 이 땅에서 확인해주고 실현을 시켜주신다는 겁니다.

* 인간의 노력과 수고와 지혜가 배제된 이스라엘 !!

나다나엘이 바로 이런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있었는데, 임금님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말이죠. 특히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되는 것은, 그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노력과 수고와 지혜가 철저히 배제된다고 했는데, 이 점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노력과 수고와 지혜가 배제되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가 지시하는 이스라엘을 만드는 일에 나서게 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만드시는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그게 진짜 이스라엘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예수님이 움직이기 이전에 이스라엘은 있었습니까? 당연히 없었는데,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오직 예수님의 계획 속에만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만들기에 있어서 인간은 없다는 겁니다.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의 기대이고, 진짜 이스라엘은 임금님만 알고 있다는 말이죠.

* 이스라엘은 예수님만이 알고 계시기에 !!

그래서 저는 이스라엘이라고 해놓고, 이것은 실선이 아닌 점선으로 표시를 하겠는데, 오직 예수님만이 알고 있는 이스라엘, 즉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려고 왔다" 라고 했을 때의 그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 이스라엘은 예수님만이 알고 계신다는 말이죠.

(마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그러니 임금님이 아버지가 주신 언약대로 일을 하면 할수록, 이스라엘의 이 점선은 점점 더 실선으로 변하게 되는데, 즉 실제로 이스라엘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로 나타나는 사람이 누구인고 하니, 그게 바로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나다나엘이라는 것이죠.

* 나다나엘의 인생에 개입하신 예수님 !!

그렇게 나다나엘이 첫 번째라고 지적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방금 이야기한 이스라엘을 만드는 원칙에 있어서 제가 인간의 노력과 수고와 지혜가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는데 말이죠. 그러면 나다나엘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고 하니, 나다나엘이 주님을 찾은 게 아니고 주님이 나다나엘을 먼저 찾아오셨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다나엘이 예수님에게 다가선 것이 아닌데, 인간의 노력과 수고와 지혜가 배제된다는 말이죠. 찾아오셨다는 것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개입하셨다는 것인데, 즉 나다나엘의 인생에 개입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다나엘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밥을 먹고 잠도 자고 했을 것인데, 물론 거기에도 개입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요한복음 1장에서의 개입은 무엇인고 하니, 그때 나다나엘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기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바로 이 기도에 주님이 개입하셨다는 것이죠. 여기서 요한복음 1장을 다시 보면, 47절부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요 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 1:48)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요 1: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요 1:5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요 1: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여기 47절에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나다나엘의 성품이 좋다는 차원이 아니라, 주님의 개입으로 인해서 일어날 결과물이 주님이 생각한 이스라엘 백성에 일치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즉 "주님이 계획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이러해야 한다" 라는 조건에 부합이 되도록, 주님께서 나다나엘의 인생에 이제 개입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 개입한 첫 번째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나다나엘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찾아간 증거라는 말이죠. 바로 이 대화, 이것은 예수님과 사도바울의 대화를 연상시킨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에게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했는데, 그 의미가 통한다는 말이죠. 물론 그때는 사도바울이 아닌 사울이었는데, 이 사울과 같이 여행한 일행들은 사람이 말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했는데, 그냥 우레 소리만 났다고 증언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울에게만 대화가 성사되었는데, "주여, 누구십니까? -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라고 말이죠.

(행 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행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 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행 9: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행 9: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 인간은 철저히 배제가 !!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있어서 인간은 철저히 배제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배제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다루면서도 인간 쪽에서 예상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것을 주님을 만난 자마다 이구동성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겁니다.

나다나엘의 경우에는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라고 하는데, 이것은 "내가 순수하다는 것을 주님도 인정해주시는군요" 라는 의미가 아니라, 즉 자기가 순수하고 말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어떻게 당신이 나를 평가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도대체 어떤 위치에 있기에 그게 가능합니까?" 라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당신이 나의 과거를 알아?" 라는 것이죠.

*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보았다 !!

그러자 주님은 뭐라고 합니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보았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때 나다나엘이 기도를 하고 있었는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죠. 그런데 나다나엘은 그때 그 주위에 자기밖에 없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로 "나다나엘은 평소에 나는 나를 잘 안다고 여겼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즉 "지금 여기 무화과나무 밑에서는 나만 있지 다른 사람은 없다. 그 정도로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파악을 잘하고 있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나다나엘은 자부하고 있었는데, 아무도 없었다는 말이죠.

그리고 두 번째로는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다고 보셨다" 라는 것인데, 이것은 무엇을 의하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나다나엘이 알고 있는 세상 범주를 벗어나서, 그 모든 전체를 다 알고 있는 분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지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이 하는 말이, "당신은 부채도사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ㅋㅋ), 그런 차원이 아니라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입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따라서 여기에서 '간사함이 없다' 라는 의미, 그것을 우리가 소급해서 풀이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 간사함이 없는 나다나엘 !!

나다나엘은 평소에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오기를 고대했는데, 그 고대한 바가 바로 주님이 보시기에 언약의 환경설정에 부합된다는 말이죠. 물론 나다나엘이 언약을 이룰 수는 없지만, 언약이란 상황에 해당된다는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 나다나엘이 자기 출세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임금이 오기를 목표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상태가 곧 '간사함이 없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게 나다나엘이 예수님에게 받은 평가인데, 예수님과 서로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말이죠. 나다나엘은 이스라엘의 임금이 오기를 기다렸고,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를 능가하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하니 뭐라고 합니까? "당신이 내가 기다리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맞지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나다나엘은 자기의 속마음을 드러내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임금과 백성이 언약을 통해서 서로 교류, 혹은 교제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 상태가 바로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임금과 백성이 언약을 가지고 서로 대화가 되는 관계, 그게 곧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하면, 여기에서는 이스라엘이 점선인데, 현재 이스라엘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모집에 나선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오셔서 서서히 이스라엘에 해당되는 사람들을 찾아서 발굴해낸다는 말이죠.

* 예수님의 양식 !!

방금 우리가 요한복음 1장을 보았는데, 그것은 4장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거기에 사마리아 여인이 나오는데, '추수' 라는 단어가 등장한다는 말이죠. 12제자들이 음식을 구하러 갔을 때, 사실은 일부러 예수님이 그들을 자기 곁에 두지 않고 보내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12제자' 라는 자기들의 집합체에서 양식은 일단 없는데, 모두 다 떨어졌다는 말이죠.

그러면 제자들이 마을에 가서 양식을 구해서 올 때까지는 예수님에게 먹을 양식은 없다는 것이 제자들의 확고한 생각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스승님을 위해서라도 빨리 마을에 가서 맛있는 빵을 구하려고 했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만들기에 있어서 인간들의 생각이고 지혜인데, 하지만 주님은 그런 것을 배제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양식을 구해서 돌아오니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여기 31절에 보면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라고 하는데, 그러자 예수님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양식을 먹었는데, 그런데 그것은 제자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양식이라는 것이죠.

그러면 그 양식은 어떻게 구합니까?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추수하는 것으로 양식을 확보할 수 있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이 친히 추수에 나서시면, 제자들이 익히 알고 있는 양식이 아니라 모르는 양식이 있다는 것인데, 그 양식을 주님은 배불리 만족스럽게 먹을 수 있다는 말이죠.

* 목마르지 않는 물 !!

달리 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임금으로 오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 땅에서 얻고자 하는 것이 있는데, 즉 맛있는 양식을 챙기기 위해서 오셨다는 겁니다. 즉 '추수' 라고 하는 마지막 때에 일어날 예수님의 작업을 통해서 양식이 확보가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주님이 제자들을 마을에 양식을 사러 보내신 것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수준의 양식과 주님이 생각하는 양식이 차이가 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양식은 무엇입니까?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에 물을 뜨려고 왔을 때, 그 물과 동일한 위치에 있는 게 인간들의 양식이라는 말이죠.

우물에 왜 물을 뜨려고 왔습니까? 목이 마르기 때문인데, 그러면 물을 뜨고 나면 다시는 오지를 않습니까? 또 와야 하는데, 또 온다는 것은 마지막 때가 아니라는 겁니다. 계속해서 반복되고 이어진다는 말이죠. 하지만 주님께서는 더 이상 목마르지 않을 마지막 물을, 더 이상 먹지 않아도 될 마지막 양식을 사마리아 여인과 제자들에게 제공해주시고자 한다는 겁니다.

* 영원한 양식을 제공받는 이스라엘 백성 !!

그렇다면 여기서 나다나엘 이야기를 다시 해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반복적인 양식을 대주는 것이 그 특징입니까? 그게 아니라면, 이제 임금님을 만나면 모든 생명에 필요한 것을 제공받는 식으로 될 때, 그것이 이스라엘 곧 백성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그것은 당연히 임금님이 선택한 그 백성이라는 말이죠. 그게 이스라엘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임금님과 그 택한 백성들 사이에는 서로 주고받는 것이 있는데, 사실은 임금님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인데 말이죠. 그게 바로 언약이라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아브라함 이야기를 했는데,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이라는 추장을 만나면서 그 지역의 여인들이 임신을 하고 말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도 전혀 몰랐다는 말이죠. 자기가 그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을 듣고, 아브라함 자신도 놀랐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기도를 해주니까, 다시 여인들의 태가 열리게 되었다는 것이죠.

* 언약과 관통 !!

이처럼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제가 여러 번 강조를 합니다만, 인간의 모든 수고와 노력이 철저하게 배제가 된다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관통' 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즉 통한다는 말이죠. 인간들 방식, 즉 인간들을 위한 방식으로 빈틈없이 꽉 차여진 이 세상에 언약이 와서 관통을 해버린다는 겁니다.

마치 언약궤가 지나가니 온 블레셋 나라가 난리가 나는 것처럼, 그들의 그 단단했던 질서체제가 해체되는 것처럼, 그들이 기대하면서 살아온 생존방식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대책이 없어지는 것처럼, 또한 오늘날의 신종 코로나처럼,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그것은 언약궤가 관통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게 되면, 이 단단한 지옥과도 같은 악마의 세계를 관통하신다는 말이죠. 그 질서를 부셔버리는데, 그러면서 마치 푸딩 안의 건포도처럼, 전제가 다 건포도는 아닌데, 대부분은 빵이지만 중간 중간에 건포도가 박혀있다는 겁니다.

그런 건포도와 같은 자기 백성을 빼내는 작업을 할 때 언약이 쑤시고 들어오는데, 바로 그런 방식을 주님이 사용하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왜 예수님의 세계, 즉 천국인데, 천국은 왜 인간들이 사는 이 세상의 원리와는 다른가를 보여준다는 겁니다.

* 죄가 관영해질 때까지 !!

구약에서의 구원, 혹은 구출, 그것은 무엇을 전제로 하는고 하니까, 애굽이라는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제국, 그 애굽 속으로 하나님은 야곱의 12명의 자식들을 일부러 집어넣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죄가 관영할 때까지 약 300년 동안을, 즉 4대에 이르기까지 두신다는 겁니다. 가나안 땅의 죄도 숙성이 되고 이스라엘의 죄도 숙성이 될 때까지 말이죠.

(창 15: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그런 다음에 여기서 건포도와 같은 자기 백성들인 히브리인들을 일차적으로 애굽에서 끄집어내신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구원의 개시인데, 그래서 홍해를 건너고 또한 요단강도 건너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일차적으로 끄집어내시는데, 그렇게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의 이방민족들을 쫓아내는 것과 동일한 원리원칙이 일관되게 계속해서 관통을 하면서 깨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깰 때, 애굽에 살았던 히브리인들은 자동적으로 자기들이 구원을 받는다고 여겼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말이죠. 오히려 탈락과 탈락이 계속 이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생각했던 이스라엘도 주님의 뜻이 아니었는데, 주님의 언약에 의해서 구원될 때, 그게 진짜 이스라엘이라는 말이죠.

사람들이 자기가 생각하는 구원, 천국백성, 그런 것은 구원도 아니고 언약도 아니라는 겁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자기가 공부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직접 주님이 자기 안에 관통해서 쳐들어와야만 한다는 것이죠. 마치 아브라함처럼, 나다나엘처럼, 그리고 사도바울처럼 말이죠.

* 인간의 본질을 까밝히면서 !!

이삭에게 하나님이 다가왔을 때는 아주 특이했는데, 이삭은 자기가 밀어주고 싶은 아들이 따로 있었다는 겁니다. 이삭에게는 아들이 하나가 아니고 둘이라는 점이 중요한데 말이죠. 만약에 자식이 하나라면, 그 하나에게 모든 것을 다 물려주면 된다는 것이죠. 그렇지요?

그런데 이삭의 경우에는, 자식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게 되고, 그러면서 어떻게 됩니까? 본의 아니게 그만 자기 본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노출시키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이 일을 그렇게 꾸미셨는데 말이죠.

*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

그것은 오늘날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주님께서 일을 하실 때는 그냥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들어있는 것, 그 감추고 있는 것이 얼마나 예수님의 뜻과 맞지 않는지를, 그게 얼마나 주님에 대해서 공격적이고 싫어하는지를, 그게 우리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까밝히는 식으로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게 우리의 본질이라는 겁니다.

그게 로마서 5장에 나오는데,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원수라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은 누구를 구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원수된 자를 구원하시는데, 그러면 우리 안에 도대체 어떤 놈이 자리를 잡고 있느냐는 겁니다. 물론 자기가 알아서 끄집어내는 게 아니고, 그것을 주님이 쳐들어와서 하신다는 말이죠.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 우리의 악마적 본성을 발휘하면서 !!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야곱을 이야기고 사도바울을 이야기하니, 사람들은 주님이 주신 꿈으로 어떻게 하는 줄을 하는데, 길을 가다가 만나고 말이죠.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이 성령으로 오실 때는, 우리의 본질이 얼마나 주님을 싫어하고 배격하는 악마적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를 드러내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악마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공부를 하고 도를 닦아도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데, 주님께서 찾아와야만 하고, 그렇게 찾아오시게 되면 우리는 죄인 중의 괴수임이 발각된다는 말이죠.

여기서 죄라고 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짓을 하나 하지 않으나 그 자체가 바로 죄가 된다는 겁니다. 그 자체로서 주님에 대해서 싫어하고, 주님에 대해서 공격하고 밀치고 싶은 속성을 노출하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 선택을 하게 되는 이삭 !!

그래서 이삭의 경우를 보면, 아들이 하나가 아니고 둘이 있다는 점인데, 그것이 자기 본심에 의해서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이삭이 자기가 원해서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아들1'과 '아들2'에 있어서, 이삭의 본질과 동일한 본질을 가진 자식에게 마음이 끌리게 되어있는데, 그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가 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식은 아버지도 있어야 하지만 어머니도 있어야 생기게 되는데, 아버지인 이삭의 입장에서는 자기를 빼닮은 아들인 에서를 선호하게 되는데, 그런데 어머니의 경우에는 야곱과 친하다는 것이죠.

그러니 이삭 개인에게는 자기 아내의 속성은 들어있지 않다는 겁니다. 에서와 야곱이 아버지인 남자의 자식인지, 그게 아니면 어머니인 여자의 자식인지, 그렇게 부모사이라도 이미 경쟁이 시작되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선택을 아버지인 이삭에게 하도록 하시는데, 즉 남자가 선택을 하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 남자가 아닌 여자가 승리를 !!

그런데 승리는 누가 합니까? 여자가 한다는 말이죠. 여자가 밀어준 쪽이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는 말이죠. 아버지는 에서를 선택하기 위해서, 에서가 이기도록 에서에게 유리한 조건들을 내걸게 되지만, 쉽게 말해서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겁니다. 그 점에 있어서 야곱은 복을 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이죠.

이런 일조차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하시고 하는 일은 어떻다는 겁니까? 우리는 자기 본성과 동일한 것에 대해서 친화성을 가지기 마련인데, 그것을 고려해서 주님은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밀어주어야, 그래야 자기와 동질성을 형성하게 되고 자기와 연대를 이루어서, 그러면 마음이 흡족하게 되니 그것을 복이라고 여겼다는 말이죠.

하지만 실제로 주님이 치고 들어오는 것은, 우리가 악하다는 쪽으로 치고 들어오는데, 우리의 본성상 자동적으로 "주님,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말이 안 됩니다. 주님, 다시 해주세요. 제가 소원한 것과는 다릅니다" 라고 불만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도록, 그렇게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말이죠.

우리는 자기가 하는 행동이 자기가 주인공이라는 사실로 되돌아오는 행위에 대해서 우리는 선뜩 나서게 되는데, 그렇지요? 그런데 자기가 행동을 하는데 있어서, 그 모든 영광과 찬사가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되면, 우리는 자기 행위가 성공한 것이 아닌 실패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많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여, 제가 예수를 믿겠습니다" 라고 고집을 부리면 곤란한데, 왜냐하면 예수를 믿겠다고 하는 그 말조차도 "나는 당신을 밀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믿겠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약점을 캐내려는 주님이 싫어서 주님을 밀어내는, 그런 자기의 표현일 수 있다는 겁니다.

* 주님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예수를 믿어주자. 그러면 더 이상은 나에게 닦달을 내지 않겠지" 라고 한다는 말이죠. 왜 그렇게 나옵니까? 자기의 고귀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님 앞에서도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 주님이 찾아오시면 자기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야곱은 자기 어머니와 공모해서 어떻게 됩니까? 아버지와 에서의 노선은 저주를 받게 되는데, 야곱은 복을 받는다는 겁니다. 즉 야곱에게 힘이 실린다는 말이죠. 어머니와 야곱이 승리자가 되는데, 그래서 약속은 남자의 후손이 아닌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이어진다고 할 있다는 것이죠.

이처럼 이삭에게 주님이 찾아오신다는 것은, 아주 멋있고 휘황찬란하게 오시는 것이 아니고, 이삭의 가족에게 일어나는 모든 상황이 주님이 찾아오시는 자국이고 흔적인데, 그게 이삭의 뜻과는 실제로 진행되는 것은 맞지 않다는 겁니다. 그런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은 언약적으로 오셨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즉 언약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식으로 찾아온다는 것이죠.

물론 사도바울처럼 주님께서 우레와 같은 소리로 찾아오실 수도 있고, 그리고 동방박사들처럼 별을 통해서 찾아오실 수도 있는데, 그 방식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 내용이 아무튼 간에 자기 뜻대로는 되지 않는 식으로 주님이 우리의 인생이 개입을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복으로 여기고 감사하면 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의 뜻대로 된다면 그것은 언약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영광이고 자기 찬사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에 말이죠. 주님은 그런 것을 결코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 주님의 홀로 '이스라엘 만들기' !!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나가면, 주님의 '이스라엘 만들기' 라는 것은 임금님이 먼저 오시고, 임금님이 생각하는 그 누구도, 심지어 12제자들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는 말이죠. 주님이 만들고자 하는 이스라엘의 실체를 아무도 몰랐다는 겁니다. 그렇게 몰랐지만 임금님이 설치고 기적을 베푸는 과정을 통해서 어떤 결실물로서 이스라엘이 하나 둘 생겨나게 시작한다는 것이죠.

바로 이 사실을 두고 주님께서는 "네가 이것을 믿느냐?" 라고 하시는데, 인자, 즉 예수님의 머리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한다는 것은, 예수님은 부지런히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놀지만 주님은 그런 적이 없다는 말이죠. 즉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하신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요 1: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그렇다면 주님이 늘 분주하게 활동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만들기에 주님이 홀로 나섰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물론 천사들이 도와주고 또한 성령께서 인도하셨는데, 그렇게 해서 주님은 이 땅에서 무사히 이스라엘 만들기에 성공하셨다는 겁니다.

* 예수님의 피 !!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성사시킨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어떤 죄인이라고 해도, 비록 세리와 창기와 강도라고 해도, 이스라엘이 되게 하는 그 근거, 즉 예수님의 피로 무사히 제대로 하셨다는 말이죠. 즉 예수님의 살과 피인데, 그래서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그러니 여기에 야곱이 있고, 그곳에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서 그 천사들이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면서 활동을 하는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피' 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바로 그것으로 인해서 주님의 일은 실패가 아닌 이미 성공했다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났다는 말이죠.

따라서 그 다음부터는 무엇인고 하니, 물론 "목사님, 제가 구원을 받았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맞습니까?" 라고 물을 수 있는데, 하지만 그 대답은 제가 준비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충분하고 넉넉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피를 가운데 놓고 대화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백성의 대화고, 그런 가운데 피가 언급되기 때문에, 주님이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피로서 서로 이야기가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이스라엘이고 천국백성이라는 말이죠.

(마 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 천국백성과 지옥백성 !!

이삭 이야기를 계속해서 해보면, 이삭에게는 아들이 두 명이 있는데,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것이 바로 에서와 야곱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이 시대를 보면, 주님에게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그게 천국백성과 지옥백성이라는 말이죠.

여기서 천국백성이 가지는 공통점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언약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십자가의 피로서 이야기가 된다고 하면, 그러면 저에게 구원문제를 두고 닦달을 낼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피의 요소가 있으면, 즉 언약의 완성을 피를 두고 계속해서 대화가 된다면, 그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목사가 아무리 지옥에 간다고 해도, 그 사람은 천국백성이라는 겁니다.

반대로 주위에서 아무리 천국에 간다고 해도, 그런데 자기는 피가 이해가 되지 않고, 그 피로서 다른 사람들과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하면, 그러면 누가 뭐라고 해도 지옥행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피가 없으면 사함이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변동성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죠.

(히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열심히 공부해서 의학박사가 되고, 그리고는 전염병을 치료하는 치료제를 개발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을 구했는데, 그런데 그 사람이 남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제가 여러분이 보기에는 많은 일을 했지만, 제가 믿는 것은 예수님의 피입니다. 제가 한 이런 것은 천국에 아무런 의미가 없고, 오직 예수님의 피밖에 없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한 고백과, 그리고 두 번째로는 "제가 이런 치료제를 개발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 속에는 피가 없으니, 즉 자기 부인이 없으니, 그 사람은 어디 소속이라는 겁니까? 누가 뭐라도 해도 지옥에 속한 백성이라는 말이죠.

제 아무리 하나님을 언급하고 예수님을 이야기해도, 즉 "모든 것이 하나님 덕분입니다. 제 아이디어가 아니고 주님이 주신 지혜입니다" 라도 해도, 그렇게 아무리 신앙적인 흉내를 내어도, 자기가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기도를 해서 응답을 받았다고 해도, 피라는 것은 자기 기도, 자기 봉사, 이러한 모든 것을 다 부정한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언약이라는 것은, 제가 몇 번을 이야기했지만,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을 다 배제하고 제쳐버리는데, 그러면서 주님의 홀로 피를 흘리심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언약의 작업이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 만들기' 라는 것이죠.

* 하나님의 군대, 마하나임 !!

계속해서 진도를 나가보면, 여기 교재 47페이지를 보면, "회사뿐만이 아니라 교회에서도 따져볼 일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따져야 하는고 하니, 다윗은 골리앗과의 전쟁현장에서 '만군의 하나님이 계셨고, 나는 그 사건에 말려들었다' 라고 했습니다" 라고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게 사무엘상 17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말이죠.

(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요한복음 1장에서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보고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입니다" 라고 했는데, 그 원칙에 의해서 보자면, 임금이란 이스라엘이 있는데 임금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있다는 것을 무효로 하고 임금이 오심으로서, 즉 인자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그렇게 언약적인 작업을 하면 할수록 서서히 생겨나는 것이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 요한복음 1장에서, "임금님이 되시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만들 때 어떤 형식으로 일을 하시는가?" 라고 했을 때, 거기에 대한 해답은 방금 본 사무엘상 17장의 경우처럼, 소년 다윗이 골리앗과 함께 있을 때 충분히 보여주었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싸움' 이라는 것인데, 언약의 하나님은 언약을 가지고 언약이 없는 세력에 대해서 전쟁을 벌리시고 승리를 하시는 방식으로, 그렇게 없는 이스라엘을 만들어내신다는 겁니다. 그 싸움을 뭐라고 표현을 할 수 있는고 하니, 그게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에게 나타난 천사무리에 대한 명칭과 관련성이 있다는 말이죠.

(창 32:1)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창 32: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여기 32절에서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라고 되어있는데, 하나님의 군대, 즉 '마하나임' 이라는 겁니다. 군대는 노는 기능이 아닌데, 싸움이란 말이죠. 그리고 싸움은 그 대상, 즉 적이 있는데, 그것은 언약이 없는, 언약과 연결이지 되지 않는 쪽과의 싸움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 인간과 통하는 신 !!

그러면 언약이 없는 쪽은 무엇을 가지고 있는고 하니, 그들이 믿는 신이 있는데, 요즘 말로 하면 종교라는 겁니다. 기독교든 불교든 간에 말이죠. 언약은 없는 신은, 언약이 없으니 인간들이 배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 신과의 교류에 나서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신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고 하니,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성질과 통하는 것으로 구성된 신이라는 말이죠. 그래야 인간들은 그 신과 교류가 된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신은 보이지 않은데, 인간들은 그것을 답답하게 여겨서 보이는 신으로 만들 때, 이것이 바로 신의 물질성인데, 이것을 보통 우상이라고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든 금송아지와 같은 것들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나타난 신의 형상이 인간들이 보기에 신답다고, 즉 신의 성품에 부합이 된다고 여기는 요소들을 묶어서 신의 형상으로 만든다는 겁니다. 여기에는 여러 형상이 있는데, 자기들의 경제활동 가운데서, 자기가 되고 싶은 것들을 형상화시킨다는 말이죠.

* 신의 형상화, 불뱀과 놋뱀 !!

인간들의 이런 초월적인 것에 대한 형상작업에 대해서, 그러한 인간의 본성을 잘 이용해서 하나님이 인간들 앞에 제시한 것이 있는데, 민수기 21장에 보면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든 이야기가 나온다는 겁니다. 백성들이 광야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즉 모세를 통해서 말씀은 하시지만 나타나지는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 백성들은 그것을 원망의 대상으로 간주했다는 것이죠.

(민 21: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민 2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민 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그렇게 백성들이 원망했다는 것은, 그들은 원치 않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자기들이 고생한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자기들이 선택하지 않고 원하지도 않았던 신이 자기들을 괴롭힌다고 생각했기에, 그래서 모세의 하나님에 대해서 원망을 했다는 말이죠.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가 어떻다는 겁니까? 서로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것을 그들의 불평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백성들이 불평했을 때 하나님 쪽에서 나타난 것은 무엇인고 하니, 광야에 불뱀이 나타나서 그들을 그만 물어 죽게 했다는 말이죠.

* 구원과 저주의 십자가 !!

그 불뱀은 인간들을 유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이면서 해를 끼치는데, 그러니 인간들은 기겁을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그들이 기겁을 할 수밖에 없는 불뱀, 바로 이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형상화가 된 것이라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백성들을 괴롭게 한 그 뱀을 놋뱀으로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쳐다보게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쳐다본다' 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인정하라' 라는 것인데, 즉 "하나님을 원망한 대가가 필히 저 뱀에 의해서 물려 죽을 만한 것임을 스스로 인정하라" 라는 뜻이라는 말이죠. 그들 속에서 원망이 터져 나왔다고 하면, 그런 원망을 유발하게 된 다른 신을 이미 그들은 상정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여호와를 원망했다는 것, 그것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신이 따로 있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은 이런 불뱀의 형상화를 통해서 양발차기를 하시는데, 양쪽을 다 보여준다는 겁니다. 즉 "너희들은 불뱀과 같은 신을 자비로운 신이라고 여기지만, 그것은 너희들을 죽이는 불뱀과 같은 것에 불과하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또한 무슨 의미도 있는고 하니, "너희들에게 말하는 여호와는 너희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불뱀과 같은 기능으로도 나타난다" 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들에게는 저주로 나타난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를 부인하고 쳐다보면 되는데, 그러니 이 불뱀과 같은 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겁니다.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을 싫어한다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일관되게 선언해버리신다는 것이죠.

* 주여, 저는 죽어 마땅합니다 !!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싫어하는 모습인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등장하시는데, 저주를 받아서 말이죠. 그러면 그 십자가를 자기가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여, 저는 죽어 마땅합니다" 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이렇게 형상이 있고 그것을 쳐다보라고 하면, 그것이 어려울 것 같지 않은데, 그냥 바라보면 될 것 같다는 겁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인간의 능력을 그만 배제해버리는데, 그러니 우리 인간은 그냥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

다시 다윗에게로 돌아와서, 그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이라고 했는데, 즉 마하나임의 하나님, 수많은 천사들을 부리시는 하나님인데, 그 천사들의 기능은 전쟁을 하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물론 공격과 수비가 다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하나님됨을 적들로부터 침범을 받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위한 공격이고 방어인데, 그것을 위해서 천사들이 활동을 한다는 말이죠.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간직하고 있는 자들을 도와주는데, 요즘 말로 하면 복음인데, 그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들을 모두 다 도와준다는 겁니다. 주님은 그들을 외면하는 법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라는 것을 염려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그런 고민을 하는데, 그러니 주님이 도와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산다고 하면, 주님은 그런 자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제공해주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주님은 자기가 잘되기 위해서 하는 것은 철저하게 피해가면서 도와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복음을 위해서, 즉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활동을 하면 주님께서 부자가 되게 해주십니까? 그것은 주님이 친히 관여할 때 비로소 우리가 몰랐던 그 나라와 그 의가 나타나고 발견이 된다는 겁니다. 아무튼 하나님은 전쟁을 하시는데, 즉 싸우신다는 말이죠.

* 힘을 의지하는 이 세상 !!

그러면 주님께서 그런 전쟁을 하실 때 그 적을 묘사해보면, 우선 그 적은 골리앗이라는 겁니다. 저기 울산의 현대 조선소에 가면 '골리앗' 이란 이름을 가진 크레인이 있다고 하는데, 작아서 골리앗이 아니고 거대해서 골리앗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 골리앗은 힘의 상징이라는 겁니다.

이 힘은 모든 인간이 다 원하고 있고 주목하고 있고 기대하고 있고 요구하고 있는 것인데, 그렇지요? 그러니 모든 인간은 이 힘에게 정신이 다 쏠리고, 이 힘을 가진 자에게는 영혼까지 다 탈탈 털렸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인간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도 그 당시 사울 왕의 밑에는 엄연히 군대가 있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군대가 골리앗의 등장으로 그만 쫄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렇게 힘을 가진 자에게 그만 쫄았다는 것은, 사울 왕이 가진 군대의 결속은 인간의 힘으로 상대방의 힘을 꺾고자 하는, 그런 지극히 비언약적인 방식으로 군대의 진영을 갖추었다고 보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서도 그들은 어떻습니까? 자기들이 이스라엘의 군대라고 자부하고 있다는 겁니다. 전혀 이스라엘적인 요소도 없으면서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인데, 그러니 이런 엉터리 군대에게 하나님은 결코 언약을 맡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언약은 언약대로 성취를 해나가신다는 말이죠.

* 소년 다윗의 전쟁 !!

그래서 이 이스라엘의 군대에서 언약적인 요소를 따로 하나 뽑아내어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20세가 되어야 군인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힘을 의존하는 이 이스라엘 군대에 포함이 되지 않는 다른 쪽에서, 즉 하나님의 '언약대로 전쟁하기' 라는 것이 성립되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은 20세가 되지 않은 소년 다윗을 그 전쟁에 참여하도록 유도를 하셨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사실을 소년 다윗이 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인데, 그래서 사무엘상 17장 45절에 보면, 다윗이 뭐라고 합니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라고 하는데, 이것은 결코 자기의 용기로 나가겠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소년 다윗은 이 사실을 아는데, 자기 의지와 자기 능력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것은 마치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의 다섯 왕과 전쟁을 할 때, 자기의 개인적인 용병인 318명으로 그 많은 적들을 이겼을 때, 아브라함은 이번 전쟁이 자기의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아브라함은 살렘 왕이고 대제사장인 멜기세덱을 만나게 되는데, 그러자 아브라함은 살렘 왕인 멜기세덱에게 전쟁에서 챙긴 전리품의 10퍼센트를 바친다는 말이죠. 즉 모든 것을 다 드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다윗은 이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는 말이죠.

* 성도를 중심으로 새로운 전쟁터가 !!

그러면 오늘날 성도를 생각해보면, 성도가 어떤 위치에서 산다고 하는 것은, 그 성도를 중심으로 새로운 전쟁터가 형성이 되고, 그 성도는 그 전쟁에 말려들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무엇인고 하니, 다윗과 골리앗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이 세상은 힘을 기대하게 되고 의지하게 되는데, 그러니 힘만 있으면 인생에 성공했다고 여긴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그런 세계의 한 복판에서 성도를 일으키시는데,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보여주는 방식과 차이가 나는 다른 방식, 그것을 성도를 통해서 실시를 하신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성도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성도 안에 있는 언약의 완성이 싸운다는 말이죠.

그렇게 언약의 완성이 싸우게 되면, 이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되는고 하니, 힘과 힘의 전쟁이 아니고, 기술과 기술의 전쟁이 아니고, 정보의 전쟁이 아니고, 누가 정교하게 돌팔매를 했는지, 그런 전쟁이 아니고, 언약의 있음과 없음, 그것으로 최종 판결이 나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언약 있음의 효과와 언약 없음의 효과, 그것을 전쟁, 즉 적과의 마주침을 통해서 적의 실체가 드러나도록 하신다는 말이죠. 그게 성도가 마주하는 새로운 현실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땅에 언약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언약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주님은 성도를 앞장세워서 계속해서 보여주신다는 말이죠.

* 성도와 차이남 !!

그게 바로 '차이남' 인데, 즉 성도는 이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소년 다윗과 같은 성도를 앞장 세워서 주님은 계속해서 전쟁을 해나가시는데, 이미 승리한 전쟁을 말이죠. 왜냐하면 언약이란 것은 언약이 없는 것의 정체를 드러내어야, 그들에게 저주와 심판의 정당성이 찾아가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은 힘을 의지하는데, 사람의 숫자, 돈의 유무, 건강의 척도, 즉 자기가 자기를 살리는데 필요한 것이 이런 것임을 누구나 다 알고 있는데, 지극히 상식적인 것들이라는 말이죠. 특이하다면 소년 다윗이 특이한데, 그래서 형들이 다윗을 말렸다는 겁니다. "거기에서 네가 왜 튀어나와?" 라는 식으로 말이죠(ㅋㅋ).

그렇게 그들은 다윗에게 야단을 쳤는데, 하지만 소년 다윗 속에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래서 다윗은 비록 자기가 소년이지만 거기서 그냥 물러날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나서셌습니다" 라고 했는데, 그것은 다윗이 자기 목숨을 바치는 비장한 각오로 나선 게 아니라는 말이죠.

다윗의 형들이나 거기에 참여한 20살 이상의 어른들은 무엇을 고려하지 않았습니까? 자기들이 이렇게 전쟁을 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곧 승리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소년 다윗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이 현장에 계셔서 열심히 일하신다는 것, 그것을 드러내는 것을 승리의 목표로 삼았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언약은 어제나 오늘이나 계속해서 유효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전쟁이기를 원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의 전쟁과는 반대라는 겁니다. 즉 "나는 괜찮다" 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은 그 어떤 경우에도 괜찮다" 라는 것인데, 그 둘 사이의 차이성을 하나님은 소년 다윗을 통해서 보여주신다는 말이죠.

*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자들 !!

사무엘상 17장 27절에 보면, 소년 다윗이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라고 하는데, 여기서 할례가 없다는 것은 할례가 곧 아브라함 언약이니, 언약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무슨 뜻입니까? 언약이 없는 군대가 건방지게도 언약이 있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했으니 하나님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삼상 17:26) 다윗이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 누가 하나님의 군대인가?

이렇게 다윗이 하나님의 군대라고 하면. 현장에서 듣는 자들은 당연히 이스라엘 군대로 알아듣게 되는데, 그런데 이것은 다음과 같이 이해가 되어야 하는데, 즉 "다윗의 말을 알아듣는 자들이 곧 하나님의 군대다" 라고 말이죠. 하나님은 자기들이 이스라엘이라고 우기는 그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시는 것이 아니고, 언약의 있음과 없음, 그것이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존재, 그런 것은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자들, 그게 곧 하나님의 군대이고 오늘날의 성도라는 말이죠. 그런 자들이야말로 언약 안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언약이 언약대로 일을 하는데 있어서, 자기의 개인적인 사정은 전혀 고려사항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 편안한 마음, 그야말로 고민이 없이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설친다고 해서 천국이 되는 것이 아닌데, 천사가 설치고 주님이 일을 하고 계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그 천사들 앞에서, 기존의 자기 생각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설픈지, 그게 전혀 언약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뻐하면서 받아들이면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교재 47페이지에 보면, "따라서 이 전쟁의 양식은 다윗과 골리앗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전쟁을 통해서 그 원칙이 계속해서 뿜어져 나온다. 즉 사람의 힘이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이름으로 하신다" 라고 하는데, 그 주의 이름 안에는 바로 언약이 담겨있다는 말이죠.

* 주여, 더 이상 나를 위해서 살지 않게 하소서 !!

이제 이것만 하고 마치도록 하겠는데, 세상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내가 있다", 혹은 "내가 없다" 라는 것이 중요한데, 그래서 셰익스피어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라고 했는데 말이죠. 세상 사람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은 무엇이 중요한고 하니까, "내가 있고, 내가 없고" 라는 것이 아니라, "언약이 있고, 언약이 없고" 라고 하는 것, 그게 더 우선적이고 결정적인 토대가 된다는 말이죠. 그게 자기가 살아가는 터전이 되고 뿌리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를 해도 "주여, 더 이상 나를 위해서 살지 않게 하소서"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자기를 위해서 이렇게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님을 매일같이 깨우치게 해달라고, 그런 기도를 하게 된다는 겁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로서 언약이 완성되었음을, 그 피가 유일한 증거임을, 그것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이 아닌 자들을 이스라엘이 되게 하시고, 이렇게 피로서 이렇게 나타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니 그 십자가의 피 앞에서, 그 피로 인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0,07,26 오후 5시에 마침.

주님의 양식에 참여하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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