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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6 23:37:29 조회 : 359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32 - 본래적 이름 : 구득영(IP:203.223.97.179)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32 - 본래적

08,04,02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85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 죽음이라는 것은 그냥 죽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죽음이고, 이 없음은 언약적으로 모든 것이 없음을 이야기하기에, 하나님의 언약이 포함되지 않는 신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여기 죽음이 나오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과 세상에서 말하는 죽음이 다르다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경험상 다른 사람이 죽으니까, 그것을 보고 "아하, 저것이 죽음이구나"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눈으로 보고 체험한 죽음이란 겁니다. 반면에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언약적 죽음이라는 말이죠.

언약적 죽음 !!

그러니 성경에서는 죽을 때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인데, 간단하지 않습니까? 세포가 노화되고 늙어서 죽는 게 아니라, 그만한 이유가 다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참새가 팔리는 것도 주의 뜻이 아니면 팔리지 않는다고 한다는 겁니다. 이 세상의 피조물이 태어나고 죽고 하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마 10: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니 이미 죽을 때가 다 지정되어있는데, 그러면 우리의 살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어떻게 됩니까? 언약에 배치되는 일인데, 왜냐하면 죽는 것이 이미 다 정해져 있는데, 그것을 벗어나려고 하니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죽음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일을 우리에게 표현해주신다는 겁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는데, 그런데 주님께서는 다시 살려내신다는 말이죠. 어떻게 보면 주님이 우리 인간의 죽음을 가지고 장난을 치신 것인데, 사실 장난이 아니고 주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인간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치신 것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목숨이 제일로 소중한데, 그런데 주님은 죽였다가 다시 살려낸다는 것이죠.

우리가 백숙을 먹으면서 그 토종닭에 대해서 애도를 표합니까? 그냥 맛있게 먹으면 된다는 겁니다. 뜨거운 물에 제대로 삶아야 맛이 나는데, 그렇게 주님은 우리를 죽음에 푹 적셔야지 주님의 주님다운 맛이 난다는 겁니다. 이게 창조주의 권한인데, 인간의 존엄성을 여기에 붙이면 안 된다는 말이죠.

인간의 참된 존엄성은 예수님께서 쓰시고자 할 때 마음껏 내놓으면 되는데, 그때 인간은 존엄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단독적으로는 인간의 존엄성을 찾을 길이 없는데, 자기가 혼자 있으면 아무리 "나는 존엄하다" 라고 해도, 그것은 그야말로 소음일 뿐이라는 겁니다.

만약에 산밑에서 누가 그 소리를 들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니만 귀하나? 나도 귀하다" 라고 나오는데, 서로 경쟁이 될 뿐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의 고귀함은 주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신다는 것을 자기가 인식하게 될 때, 그게 제대로 된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겁니다.

지옥은 어떤 자들이 가는가?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이란 인식에 있다" 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렇게 인식, 즉 알게 된 사람들의 최후의 집합장소가 바로 천국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천국은 주님의 공로를 아는 자들이 모여있는데, 반면에 지옥은 자기만 아는 사람들이 모여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천국이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저주를 받게 된다는 말이죠.

우리가 그런 기준을 가지고 유명 정치인들이나 연예인들에게 하나하나 적용을 해보면, 소위 성공을 했다고 하는 자들에게 화살을 쏴보라는 겁니다.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는 원리를 가지고 말이죠. 그러면 성공하고 돈을 번 것이 주님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자기 잘남에 대한 인식이 되고 마는데, 그런 인간들만 가는 곳이 있다는 겁니다.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그게 바로 지옥인데, 그러니 지옥은 나쁜 놈들이 가는 곳이 아니라는 말이죠. 오히려 지옥은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예의가 바르고 남을 배려할 줄도 알고, 그리고 인간성이 좋다는 소리를 듣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자식을 잘 키우는, 그런 사람들이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지옥에 가고, 세리와 창기가 천국에 간다" 라는 겁니다. 물론 세리와 창기가 되었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닌데, 우리 인간은 저주를 받는 것이 너무나 마땅하다는 말이죠. 즉 천국이 아닌 지옥이라는 겁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자꾸만 하는고 하니, "지옥은 나쁜 자들이 간다" 라고 인식이 우리는 뿌리가 박혀있다는 겁니다. 불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천주교에서도 이게 굉장히 심한데 말이죠. 지옥은 나쁜 자들이 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나쁘다는 것을 모르는 자들이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지 착한 사람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닌데, 착한 사람은 예수님의 나라에 갈 수 없다는 겁니다. 자기 스스로 착하다고 인정하는 자들은 말이죠. 그러니 교회가 문제인데, 천국에 보낸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다 지옥에 보내고 있다는 겁니다. 노골적으로 말이죠.

성경은 그 전체가 율법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무슨 뜻인고 하니, 모든 율법은 우리를 저주 아래에 있게 하고 죄를 더하게 한다는 겁니다. 모든 율법은 인간과 마주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율법의 완성은 십자가인데, 즉 모든 율법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있다는 겁니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런데 그 예수님이 십자가의 저주를 받았는데, 그러니 율법의 완성은 예수님의 십자가이고, 십자가 안에는 율법이 모두 들어있고, 그러니 십자가를 전하는 것 자체가 율법 전부를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어떻게 됩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롬 3: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롬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그러니 성경말씀 전부가 다 예수님을 증거하기 때문에 성경말씀 전부가 다 율법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그 율법적 기능이란, 우리가 말씀을 듣는 순간 없던 죄가 계속해서 생산되는 것인데, 바로 그러한 기능을 율법이 하고 있다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가 착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경말씀을 보지 않기 때문인데, 그렇게 성경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성경말씀을 덮고 나서 어떻게 합니까? 자기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기는 착실하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너무나 착실했던 짜장면 집 주인 !!

20년 전에 팔공산 밑에 짜장면을 맛있게 한다고 소문이 난 집이 있었는데, 저도 두 번을 가보았는데 말이죠. 얼마나 손님이 넘쳐나는지 모르는데, 그래서 주인은 쉴 날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인의 소원이 무엇인고 하니, 짜장면 집을 그만 두는 것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짜장면 집을 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착실하다고 여겼겠습니까? 일년에 단 하루도 쉬지 않았는데, 손님이, 아니 돈이 들어오는데 그 돈을 마다할 사람이 누가 있느냐는 겁니다. 여자 돈, 남자 돈, 아이 돈, 그렇게 돈이 들어오는 그만 둔다는 것은 어지간한 용기가 없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하지만 몸이 도저히 견디지를 못하니 할 수 없이 그만 두었다고 하는데, 아무튼 그 이전까지 자기는 참으로 착실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는 공식인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라는 것에 의하면, 그 짜장면 집 주인은 어디로 갑니까?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챕니까? 알아채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착실하다는 말이죠.

그리고 우리 건물 1층에서 장사하는 미장원 주인도 참으로 착실한데, 화요일만 놀고 다른 날은 계속해서 일을 한다는 겁니다. 마음씨도 얼마나 곱고 착한지 모르는데, 하지만 어떻습니까? 지옥에 간다는 말이죠. 방금 제가 한 말이 미장원 주인 귀에 들어가면 곤란한데, 왜냐하면 평일에 우리교회에 오는 택배를 대신해서 자기가 다 받아준다는 말이죠(ㅋㅋ).

그러니까 가정교육, 학교교육, 국가교육, 그리고 교회교육도 다 무엇입니까? 그야말로 지옥에 보내는 교육인데, 그것이 엄연한 현실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지옥은 나쁜 사람들이 가는 곳이 아니라, 착한 사람들이 간다는 말이죠. 그게 지옥이라는 겁니다.

물론 못된 사람들도 지옥에 가는데, 다만 "나는 천국은 생각도 하지 않아. 나 같은 놈이 천국에 가면 천국은 다 엉망이 된다" 라는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보고 인정하는 사람은, 즉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천국에 간다는 겁니다.

똑똑똑, 주님의 의가 있습니까?

그래서 어제 낮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성도와 성도의 대화는 "똑똑똑, 주님의 의가 있습니까?" 라고, 그것으로 대화를 해야 그게 성도의 모습이고, 또한 성도끼리의 교제라는 겁니다. 자기 자식을 가지고 하지말고 말이죠. 성도들끼리의 대화에 자식자랑이 왜 끼어 듭니까? 그러니 자기 잘남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의, 그게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마치 삶은 계란처럼 껍질은 깨어져도 괜찮은데, 먹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공기가 쏙쏙 들어가서 맛이 더 있을 수도 있는데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다 깨어져도 괜찮은데, 세리가 되던 창기가 되던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다만 그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 피, 즉 보혈의 용서가 있다고 하면 말이죠.

주님께서는 자기가 심어준 것만 찾는데, 그것을 두 글자로 '언약'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언약이란 것이 참 쉽지요? 그렇다면 언약은 인간이 만들었습니까? 주님이 만들었습니까? 당연히 주님이 만들었는데, 그래서 인간들은 언약을 믿지 못하는데,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상징적 존재 !!

이번에 우리나라의 연예인들이 평양에 가서 공연을 하는데, 김정은이 등장하니까 전부가 그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하던데, 그런데 김정은은 이제 겨우 30대 중반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아직 세상물정도 제대로 모르는 나이의 젊은 아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상징적 존재' 라고 하는데, 북한의 인민들이 지금은 죽고 없어진 김일성이 그리워서, 그것을 대신해서 드러낸 것이 김정은이라는 말이죠. 마치 교인들에게 예수라는 상징적 존재가 있어서, 그래서 교인들은 자기 교회의 당회장은 예수처럼, 그런 유사 예수를 당회장으로 뽑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유사 예수 !!

그러면 "예수님처럼 생긴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가?" 라고 나와야 하는데, 제가 신학교를 다니고 목회를 하면서 한국교회의 교인들이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모델을 하나 발견했는데, 그가 곧 한경직 목사라는 겁니다. 그리고 소망교회의 곽선희 목사, 물론 조용기는 전혀 아니고 말이죠(ㅋㅋ).

그러니 나름 전통이 있다고 하는 교회들의 당회장을 보면, 전부가 예수의 얼굴에 접근하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또 한 사람의 예를 들면 할렐루야 교회의 당회장인 김상복 목사, 그리고 충현교회의 김창인 목사도 그렇고 말이죠. (녹취 구 - 김상복 목사 강추 !!)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점잖게 생겼다는 것인데, 그러니 사람들은 예수님이 점잖게 생겼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북한의 경우에도 북한 인민들이 김정은이 아니라 김일성을 여전히 사모하고 있다는 것인데,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언약이 없어서 그렇다는 말이죠. 언약이 없으니 비언약, 즉 우상숭배이고, 그 우상숭배가 인간 속에 깊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겁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국회의원인데, 특히 젊은 나이에 국회의원이 된다고 하면 전부가 한 인물을 한다는 겁니다. 안희정이나 안철수가 그러한데, 아닌가요? 그리고 청와대의 조국 수석, 특히 조국은 정말 잘생겼는데, 보통이 아니라는 말이죠. (녹취 구 - 홍정욱 강추 !!)

그러면 지옥은 누가 갑니까?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라고 하는데, 바꾸어 말하면 "사람 중에 미움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 높임을 받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식적 사고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말이죠.

(눅 16: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우리는 죽음을 두고 "슬프다. 애통하다. 사라진다. 안타깝다" 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을 언약 안에서 바꿀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다음과 같은 당부를 하셨는데, 여기서 요한복음 15장 11절과 16장 20절과 21절을 보겠습니다.

(요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 16: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요 16: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기쁨, 명랑, 생글생글 !!

여기 요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가는 자의 모습을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그것을 여자가 아기를 임신해서 낳게 될 때의 근심, 왜냐하면 고통이 따르니 말이죠. 그리고 새롭게 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기쁨으로 묘사를 하신다는 말이죠. 그리고 앞의 15장에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성령 안에 살면 그것으로 인해서 이 세상에서 살면서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고 하신다는 겁니다. 다같이 '기쁨' 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이죠.

어제는 그것을 설교시간에 '명랑' 이라고 했는데, 즉 명랑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자유롭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말이죠. 만약에 어떤 사람의 부모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그야말로 생글생글하다고 하다면, 그런 모습이 자식들에게 어떻게 비춰지겠습니까? 그런 부모에게서 자식들은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는 겁니다.

언약에서 말하는 죽음은 기쁨이고 명랑이고 생글생글인데,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온갖 인상을 다 쓰면서 살아가느냐는 겁니다. 날씨가 좋아도 인상, 나빠도 인상, 미세 먼지에도 인상,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날씨가 좋은데 왜 인상을 씁니까? 돈이 없어서 놀러가지 못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매사에 기쁨이 없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거기에 대해서 말씀해드리겠는데 말이죠. 주님께서 심어준 것이 언약인데, 그리고 더 기쁜 것은 그것을 자기가 애써서 만들지 않았다는 겁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은 언약을 만들 수 없다는 말이죠.

언약은, 의인과 죄인이 만남으로서 !!

언약은 죄인을 찾아오는데, 하지만 죄인이 언약을 만들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찾아와서 의인과 죄인이 만남으로서 언약이 구성된다는 겁니다. 주님은 의인이고 우리는 죄인이란 말이죠. 구태여 자기 쪽에서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언약의 기쁨을 우리가 누리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의외로 간단한데 말이죠. 언약 바깥의 인식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를 하면, 잘못된 인식을 말이죠. "지옥은 나쁜 놈들이 가는 곳이다. 나는 천국에 가기 때문에 나쁜 짓을 하면 안 된다" 라고 하는, 그게 바로 비언약이란 겁니다.

비언약은 그 안에 상징적 인물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가 만들어내는데, 즉 "내가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간다" 라고 하는, 자기가 만든 상징적인 인물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처럼 착하고 점잖게 살아야 한다는 것인데, 행동을 똑바로 하면 천국에 간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경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잘못된 사고방식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목사님, 그래도 우리 인간에게는 양심이란 것이 있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자기에게 양심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양심이 남의 양식이 아니라 자기 양심이기에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언약 속에 들어가면 이런 잘못된 사고방식을 어떻게 뜯어고치는고 하니, 잔소리를 한다고 해서 고쳐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잔소리를 자꾸 하게 되면 '방어기재' 라고 해서, 오히려 거기에 대해서 반발하는 장치만 더 개발될 뿐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마누라가 잔소리를 하면, 남자는 처음에는 그냥 듣다가 나중에는 그 잔소리를 줄이는 방안을 따로 만들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떻습니까? 인간이 바뀌는 것이 아닌데, 다른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남편의 변화를 기대하는 아내 쪽이 잘못이라는 말이죠.

'나의 하나님'에서 '우리 하나님'으로 !!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되는고 하니, '나의 하나님'에서 '우리의 하나님'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언약이라는 겁니다. 보통 이 세상에서는 '나'와 '우리'에 대해서 말하기를, '나' 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에 포함된 '나' 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성경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말이죠.

성경에서 말하는 '나'와 '우리'는 무엇인고 하니, '나'에서 '우리'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나'가 도중에 없어져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중간에 없어진 그 '나'를 대신하는 '나'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 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나'를 자기 백성의 '나'로 교체하시기 위해서 마중을 나오셨다는 겁니다.

(마 27: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쉽게 말해서 '바꾸자' 라는 것인데, 즉 "너의 '나'는 아담에게서 나온 '나'이고, '나'의 '나'는 '나'에게서 나온 것인데, 이제는 그 '나'에게도 들어오너라" 라고 하는 의미라는 겁니다. 즉 "이제는 더 이상 아담, 즉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나' 예수의 일부로 살아라" 라는 것이죠.

바뀌는 '이름' !!

그렇게 되면 이름이 바뀌게 되는데, 이름은 누가 짓습니까? 자기가 짓는 게 아니라 아버지가 짓는데, 어릴 때는 그럴 정신력이 되지를 않으니 말이죠. 아버지의 이름은 그 아버지가 짓고 말이죠. 그렇게 인간들이 지은 전체 이름이 있는데, 이 이름을 주님께서 바꿔치기를 하신다는 겁니다.

이렇게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름이라는 것은, 그 이름을 지어준 자에게 복속이 된다는 의미인데, 즉 한 통속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의 테두리 안에서 계속해서 이름이 바뀐다는 겁니다. 그런 가운데서 이름을 또 짓고, 또 짓고 한다는 말이죠.

창세기 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아담' 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는데, 그러자 아담은 자식을 낳아서 '셋' 이라고 이름을 짓고, 셋은 또 자식을 낳아서 '에노스' 라고 이름을 짓는다는 겁니다. 이런 모든 것을 여기 창세기 5장에서는 '아담의 형상' 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창 5:1)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창 5: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 5:3) 아담이 일백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 5:4)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 5:5) 그가 구백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창 5:6) 셋은 일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그러니 아담의 형상은 사람 이름으로 대변되고, 반면에 하나님의 아름은 예수 이름으로 대변된다는 겁니다. 이름이 바뀌지 않으면 노선이 바뀌지가 않은 것인데, 계속해서 한 통속으로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름이 바뀌면 어떻게 됩니까? 그 바뀐 이름의 효능을 그대로 부여받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이 자기 이름을 계속해서 유지를 하게 되면, 썩어질 그 기능이 계속해서 자기에게 유지가 되는데, 하지만 이름이 바뀌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 바뀐 이름이 가지고 있던 효과가 자기 것으로 넘어오게 된다는 말이죠. 이름이 바뀌면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아브람'과 '아브라함' !!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까, 그 취지를 말씀해드리겠는데 말이죠. 창세기에 보면, 분명히 같은 사람인데, 그런데 '아브람'이고 또한 '아브라함' 이라는 겁니다. '아브람' 이라는 이름은 아버지인 데라가 지어주었는데, 그러니 아브람은 아버지의 영역에 놓여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아브라함' 이라는 이름은 누가 지어주었습니까? 하나님이 지어주셨는데, 그냥 하나님이 아닌 언약의 하나님이 말이죠. 그러면 언약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땅에 심어준 것이 곧 언약인데, 하나님께서 뭔가 지상에 일을 하시고자 해서 심지처럼 심어놓은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심어진 것이 바로 언약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을 무슨 하나님이라고 했습니까? '언약의 하나님' 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모세가 하나님에게 "당신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하면 됩니까?" 라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출 3: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아담의 이름으로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것이 아닌데, 이름을 묻는 자기가 죽고 난 다음에 이름을 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뀔 때, 야곱은 바뀐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겁니다. 즉 '야곱' 이라는 이름의 영향력은 사라지고,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의 영향력으로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러니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인데, 그러면 아브라함의 미래는 천국인데, 그 시작은 어디인고 하니 아브람인데, 그 아브람 속에는 지옥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즉 지옥과 천국, 두 가지 속성이 다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천국의 복을 받고, 저주하는 하는 지옥의 벌을 받는다는 겁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지옥에 가고, 그리고 예수를 믿는 자는 천국에 가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실제로 이 지상에서 인간으로 사셨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천국의 요인을 하늘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을 가지고 이 지상에 오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4살 때 한 행동이 언약입니까? 12살 때 한 행동이 언약입니까? 33살 때 한 행동이 언약입니까? 그 어느 하나를 꼭 집어서 이야기해주세요" 라고 하신다면, "예수님의 살과 피가 바로 새언약입니다" 라고 대답해줄 수 있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음식을 나누시면서 제자들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라고 하셨는데, 바로 이것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언약이 세워지게 된다는 말이죠.

(마 26: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마 26: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마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심판주와 중보자 !!

바로 그 기능을 하는 것을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중보' 라고 한다는 겁니다. 중보는 한 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양쪽을 다 위함이라는 말이죠. 그냥 오시면 심판주가 되지만, 중보자로 오시면 심판을 받을 자들 가운데서 건질 자는 건지겠다는 겁니다. 그 작업이 중보자가 해야하는 일이 포함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갈 3:20) 중보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성도는, '움직이는 성령' !!

달리 말하면, 예수님의 이름에는 기능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천국에 갈 자는 천국에 보내고 지옥에 갈 자는 지옥에 보내는 것, 그게 예수님 이름의 기능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이 삽입된 자는 이제 자기 인생이 아니라, 예수 이름의 기능으로 살게 되는데, 그래서 성도를 '움직이는 성령'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는 인간이 아닌데, 물론 껍데기는 인간이지만 그 속에는 주님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주님께서는 자기 기능이 계속해서 이어지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그것이 곧 성도의 역할인데, 성도가 이 정도라는 것이죠. 지금 아무도 감동을 받지 않는데 말이죠(ㅋㅋ).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그런 자는 천국에 간다는 겁니다. 또한 왼 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소자를 무시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그런 자는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마 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마 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이것이 바로 양과 염소를 나누는 예수님의 방법인데,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추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지극히 작은 자 속에 주님의 영이 들어가서는,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주님의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결코 끊어지지 아니하고 말이죠.

다시, '나'가 아닌 '우리' !!

그러니 우리 인간에게 '구원론'은 없는데, 오직 '그리스도론' 뿐이라는 겁니다. 성경말씀은 예수님에 과한 이야기밖에 없는데, 그러니 "나는 구원을 받습니까?" 라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 라는 것이 없는데 무슨 구원이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천국에는 누가 겁니까? '나'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천국에 간다는 말이죠. '나'가 모여서 '우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모인 '나'를 다 죽여버린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담의 이름, 즉 인간의 이름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래서 중간에 예수 이름으로 바뀌어야만 하는데, 그러면 예수님이 '나'고, 그러면 한 분의 '나' 라는 이름으로 여러 명이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즉 한 분이 '나'고, 그 나머지는 '우리'가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 '우리' 속에 예수님이 포함되어야 하는데, 즉 예수님이 심지가 된다는 말이죠.

인간은 원천을 몰라 !!

요단강의 원천이 어디인고 하면, 북쪽으로 가면 그게 '가이사라 빌립보' 라고, 갈릴리 호수 위쪽에 있다는 겁니다. 그 지명 이름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지역 총독 이름이 가이사라 빌립인데, 거기서 유래된 것인데, 자기를 기념하기 위해서 그 지역에 갖다 붙였다는 말이죠.

그 샘은 그 뒤에 보면 눈이 덮인 헐몬산이 있는데, 사막에 눈이 덮인 산이 있으니 참으로 신기한데 말이죠. 그 샘에서 물이 마구 솟아오르니 사람들은 그곳을 에덴동산이라고 하는데, 물론 에덴동산이 거기가 아닌 것을 알지만 너무 좋아서 그렇게 부른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사막의 오아시스인데,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면 별로인데, 우리는 그곳보다 좋은 곳이 얼마든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호수가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널려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게 사막 가운데 있으니 상대적으로 아름다워 보인다는 겁니다. 인식이 그렇다는 말이죠.

원천을 이야기하려다가 그만 성지순례가 되고 말았는데, 우리 인간은 원천이 있다는 겁니다. 요단강의 원천이 '단' 이라고, 그것이 빌립보에서 나오듯이 말이죠. 우리 인간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는데, 그런데 원천이 인간들과 연계가 되어서 받는다는 겁니다.

'비본래성'과 '본래성' !!

그것이 바로 '비본래성'에서 '본래성'으로 와야한다는 것인데, 현재 우리 인간은 비본래성인데, 즉 자기가 어디서 왜 태어났는지, 그것을 아무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니 본래성을 모르는 비본래성에서 본래성으로 옮겨가게 되는데, 예수님이 오시면 말이죠. 물론 세상 사람들이 보면 기독교는 하나의 종교이지만, 복음은 들어도 그만 듣지 않아도 그만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에는 전혀 그게 아닌데, 즉 "니가 인간이냐? 그러면 너의 본래 원천도 모르면서 인간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살려고 하는가? 도대체 너에게 그런 권한이 있느냐?" 라고, 그렇게 따지고 계신다는 겁니다. 본래의 자기 자리를 모르면 인간이 아닌데, 짐승이라는 말이죠.

이미 죽은 자의 '태(胎)' !!

그렇다면 본래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사랑을 받기로 되어있던 야곱, 그리고 미움을 받기로 되어있던 에서, 하지만 그들이 나온 것은 하나의 '태(胎)' 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미 죽은 자의 '태' 라는 말이죠.

리브가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데, 사라도 그렇고 말이죠. 이미 태가 죽었다는 겁니다. 살아있는 태는 사라가 아니고 하갈인데, 그래서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이 나왔다는 말이죠. 하지만 성경은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는데, 오히려 그것을 율법의 저주의 대상자라고 한다는 겁니다. 어제 갈라디아서 4장을 설교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죠.

그런데 죽은 자의 태에서 나온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것을 '약속'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그런 약속의 자녀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데, 그렇게 없는 것을 보면, 이 세상은 본래성이 아니나 비본래성이란 말이죠. 즉 이 세상은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고 그냥 갈 때까지 가보자고 한다는 겁니다.

어디, 갈 때가지 가보자 !!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역사를 하나의 선(線)으로 보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역사는 선이 아니라 폐쇄된 '원(員)' 이라는 겁니다. 동그랗다는 말이죠. 무슨 의미입니까? 갇혀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과거, 현재, 미래', 그렇게 해서 갈 때가지 가보자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가보면 뭔가 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미래는 지옥인데, 조선시대도 지옥이고 지금도 지옥이고 앞으로도 지옥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동그라미 속에 갇혀있으니 말이죠. '이생망' 이라고, "이번 생애는 망했고" 라고 하는데 말이죠. 하지만 '다생망' 인데, 즉 "다음 생애도 망했다" 라는 겁니다. 다음에도 이 세상에 태어난다면 역시 똑같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세상은 바로 지옥이다" 라고 하는 증거를 잡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을 보는 인식이 전혀 잘못이라는 말이죠. 결코 그것은 천국에 가는 자들의 인식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른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던데요" 라고 하는데, 왜 성경말씀을 볼 생각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느냐는 겁니다. 물론 성경은 보면 잠이 오겠지만, 그래도 졸면서라도 봐야하지 않겠느냐는 말이죠. 그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압니까? 다같이 원천을 모르는 주제에 무엇을 안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언약 안에 들어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나'에서 '우리'로 변화가 되는 것인데, 그러면 언약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 모든 일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어난다고 하는 그 인식인데 말이죠. 그래서 지난 수요일에 야곱과 에서가 서로 싸우지만 하나에서 나왔다고 했는데, 그것이 죽은 태이고, 그리고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이라는 겁니다.

긍휼과 공의 !!

예수님에게는 긍휼과 공의가 있는데, 즉 공의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지옥이 필요하고, 긍휼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천국이 필요하다는 말이죠. "저들에게 나의 사랑을 주었다" 라는 것이 천국이고, "저들에게 내가 행한 대로 갚아주었다" 라고 하는 것이 지옥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죽기 전에 기준을 제시해주세요. 문제도 없이 그냥 빵점이라고 하면 됩니까?" 라고 하는데, 그 기준이 바로 이스라엘에게 먼저 준 율법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그게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모든 사람들에게 다 확대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2장?)에 보면, 인간의 양심도 율법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즉 이방인들도 율법이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율법은 25살 때 알았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살면 살아갈수록 점점 더 법이 증가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기가 처벌을 받는, 즉 자기 저주성도 늘어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이 80이 되어서 뒤돌아보면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한 것이 없다는 말이죠.

(롬 2: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롬 2: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구렁아, 꼼짝마라 !!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살았다고 여기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어서, 즉 자기가 곧 상징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 잘남을 증명하기 위해서 인생을 잘게 나누는 것이 아니라 크게 나우어서, "대체로 자식을 둘 낳고 잘 키웠다. 이 정도면 남들이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부모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구렁이 담을 넘듯이 슬쩍 넘어가려고 하는데, 그만 주님의 공의에 딱 걸렸다는 말이죠. 바리새인들도 자기들 나름대로는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려고 했는데, 그만 예수님이 오시게 되니까 그만 딱 걸리고 말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율법해석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것이 전혀 달랐다는 말이죠.

그러니 바리새인들은 성전이 있으면 본래성을 유지한다고 보았는데, 왜냐하면 그게 하나님이 자기가 만든 성전이기 때문에 그것을 파괴할 리가 없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감람산에 메시야가 와서 택한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만 건진다고 보았다는 말이죠.

문제는 '구원론' !!

메시야닉 크리스찬과 같은 자들은 지금도 여기에 의미를 두고 있는데, 그들은 기존의 신학을 어떻게 보는고 하니, 이스라엘을 대체해서 교회가 생겼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다는 겁니다. 기본적으로 유대인은 일단 다 먹고 들어간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상황을 포착하게 되면 예수님이 언제 오실 지를 알 수 있다고 하는데, 그 징후가 보인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론인데,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기를 천국에 보내고야 말겠다는 것인데, 그러니 결국은 '나' 라는 겁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아직도 '나'가 죽지 않았다는 말이죠. 그 '나'가 아직도 구원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우긴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율법이 덮치고 난 다음에 십자가가 덮침으로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게 만들고 말았다는 겁니다. 의인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모두가 그 저주로 인해서 그만 입을 막게 만들었고, 그만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는 것이죠.

로마서 3장 23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 도중에 가다가 다 떨어지고 말았는데, 합격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의 행함으로는 합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믿음으로도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게 자기 믿음이기 때문에 말이죠.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러니 구원은 자기 믿음이 아니라 성령으로 인해 받은 선물이어야 하는데, 즉 예수님의 믿음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예수님의 믿음이 언약 안에 들어있는데, 언약은 하나님 쪽에서 심어준 것으로, 그 언약 안에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다 들어있다는 말이죠.

하늘나라에서 온 택배 !!

이것을 가지고 고린도전서 13장에는 '은사' 라고 하는데, 즉 하늘나라에서 택배가 왔다는 겁니다. 우리가 신청하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뜯어보니 그 안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들어있는데, 그러면 주님은 택배를 받은 우리를 데리려 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회수하려고 오시는데, 다시 찾으신다는 겁니다. 던져놓고 다시 찾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왜 포경선에서 포를 쏘고 나서 어떻게 합니까? 밧줄을 끌어당기면 고래가 끌려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이 주신 것으로 다시 뽑아낼 때, 이것을 두고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고 "니가 사람을 낚는 어부라 되리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반드시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데, 베드로부터 출발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이미 천국에 도달한 분의 낚싯줄이 베드로를 통해서, 혹은 소자를 통해서, 혹은 여러분을 통해서 작살이 꽂혀야 한다는 겁니다. 그 꽂힌 것이 성령인데, 그래서 이제 살살 잡아당기게 되면 성령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는고 하니, 이제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깨지고 부서지는 인생 !!

물론 주님께서 때로는 확 잡아당길 수도 있는데, 제가 보기에 우리교회 교인들은 대부분이 확 잡아당긴 것 같은데 말이죠(ㅋㅋ). 살아가면서 조용하게 구원을 받는 분도 있고, 유별나게 구원을 받는 분들도 있다는 겁니다. 하는 일마다 다 박살이 나고 그야말로 엉망이라는 것이죠.

그러면 주위에서 말리는데, 실익이 없다고 하면서 말이죠. 즉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도 예수를 믿나?" 라고 하는데, 그러면 "오기가 나서 더 믿을 거야. 주님이 나를 어디까지 밀어 부치는지 지켜볼 거야"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을 믿는 모습인데, 그러니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라는 언약의 원칙은 변함이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꽂히게 되면 그때부터는 기존의 자기 이름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인생의 주도권자가 드디어 나타났다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동안은 비본래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자기라도 자기 인생에 관여를 했어야 했는데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본래적인 원천이 들어오게 되면,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를 사용하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때는 언약대로 사용을 하시는데, 즉 말씀대로 사용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좁은 길로 가게 하시는데, 넓은 길로 가지 못하도록 하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속은 영이라도 겉이 육이기 때문에, 여전히 그 육의 본성이 남아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주를 받아 지옥에 가는 자들의 행세를 그대로 하게 되는데, 그것 중에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성경말씀을 자기가 지키려고 한다는 겁니다. 누가 지킨다는 겁니까? 자기가 지킨다는 말이죠.

점점 쌓이는 자기 의 !!

그게 바로 바리새인들의 방식인데, 하지만 그렇게 되면 쌓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가 아니고 자기 의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의 인생을 연속적이 아니라, 단락 단락 끊어지는 불연속적인 인생으로 만들어버리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나' 라고 여겼던 자기 성질이 내일이 되면 그만 달라지는데, 즉 몸의 컨디션에 따라서 달라지고 기분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는데, '나' 라는 것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자기도 전혀 모른다는 말이죠.

분명히 몸은 그 몸인데, 물론 조금씩 늙어가고 있지만, 그런데 그 정신상태는 기분에 따라서, 그리고 주변의 상황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응원하던 팀이 지면 괜히 마누라에게 화풀이를 한다는 것이죠. "집안 꼴이 이게 뭐꼬? 청소도 안 하나?" 라고 하면서 말이죠.

요즘 개를 많이들 키우는데, 다들 "우리 개는 물지 않아요" 라고 하는데, 정말 그런가요? 그리고 집집마다 다 개가 있다는 겁니다. 사람도 술을 마시면 다들 개가 되는데, 그렇지요? 왜 그런고 하니, 인간 속에는 개가 들어있는 것이 아니고, 분노가 들어있다는 말이죠.

분노의 질주 !!

이것은 제가 여러분에게 장담할 수가 있는데, 우리 인간 속에는 공통적으로 모두 다 울분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분노가 말이죠. 그러면 그 분노와 울분은 어디서 나왔는고 하니, 그것은 결핍에서 나왔다는 것이죠. 오늘의 강의제목을 '분노와 결핍'으로 하겠는데, 물론 이것은 장담하기가 조금 곤란하지만 말이죠(ㅋㅋ).

여기에 대해서 스스로 해결한다고 하면서 나온 것이 바로 '후회와 자책' 이라는 것인데, 그렇게 후회와 자책을 한다는 것은 평소에 그만큼 알 수 없는 분노가 일어나고 있었다는 말이죠. 분노가 일어나는 이유가 바로 결핍이고, 그 결핍은 모자람인데, 그리고 그 모자람도 어떤 기준점이 달라지게 되면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가,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라는 겁니다.

어떤 아가씨의 분노 게이지 !!

예를 들어서, 어떤 아가씨가 자기가 좋아하던 남자에게 차여서 헤어지는 바람에 그만 다른 남자와 홧김에 결혼을 했는데, 즉 분노라는 말이죠. 그런데 자기가 결혼한 남자와 헤어진 남자의 회사가 그만 합쳐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헤어진 남자는 과장이고 자기 남편은 대리가 되어서 회사에서 매일같이 까인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여자는 분노의 게이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 올라난다는 겁니다. 반대로 되었으면 내려갔을 텐데 말이죠. 그러니 분노라고 하는 것은 외부환경에 의해서 오르락 내르락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결핍은 욕망이 다 채워지지 않아서 생기는 것인데, 그런데 이것을 눌리게 되면 분노는 생기지 않지만 정신병에 걸리고 만다는 겁니다.

남자들이 술을 마시고 집에 와서 행패를 부리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분노를 풀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데, 자기를 때리는 대신에 남을 때리는데, 그 중에서 제일 옹졸한 것이 가족을 괴롭히는 것이고 말이죠. 그것도 안 되면 그만 자살을 하고 만다는 겁니다. 자살은 분노에서 나오는데, 기분이 좋아서 자살을 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참고 참고 또 참았지만 !!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래도 좀 더 참지?" 라고 하면서 쉽게 말을 하는데, 하지만 참다가 참다가 결국 자살을 선택했다는 겁니다. 참지 않은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죠. 온갖 방법을 모두 동원해서 참아보았는데, 남들처럼 술도 마시고 골프도 치면서 말이죠. 또한 난도 치고 다도를 하면서 참았다는 말이죠.

여기는 다도를 하는 분이 없어서 하는 말인데(ㅋㅋ), 거기서 뭐라고 합니까? "여러분, 마음을 정결케 해야합니다. 이것을 하면 인생의 모든 찌꺼기가 다 씻겨 내려갑니다" 라고 하는데 말이죠. 왜 그렇게 합니까? 사람들이 다도에 빠지는 이유가 다 있는데, 뭔가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살아온 자기 인생을 돌아보니, 무슨 돼지우리도 아니고 말이죠.

하지만 그런 돼지우리도 상황에 따라서는 호텔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러니 상대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윤리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당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라" 라고 하는데, 그래서 마음을 가라앉히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면 일시적인 효과는 있어 보인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이사를 했는데 그게 하필이면 강남이라는 겁니다. 가나한 동네로 가야하는데, 그만 부자동네로 가고 말았다는 것이죠. 거기에서 아줌마들이 돈 쓰는 것을 보면서, 자기는 그야말로 거지인생을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러면 분노의 게이지가 또 올라가고 만다는 겁니다.

죽어라, 이 놈아 !!

이런 것들이 다 비본래적인 것인데, 그러니 아무리 왔다갔다해도, 율법을 지키고 해도, 분노가 해소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죽어라, 이 놈아!" 라는 겁니다. 그것이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은 홀로 있기 때문인데, 즉 "나 안에 내가 갇혀있다" 라는 것이죠. 즉 주님을 만나지 못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이 분노를 느끼고 또한 결핍을 느끼는 것은, 그것은 바로 지옥불 앞에 있지 않아서 그렇다는 말이죠. 지금 여기가 지옥이라고 생각하면, 그러면 여기에 있는 이 물 한 컵이 얼마나 소중하겠습니까? 그렇지요? 이 세상이 곧 지옥인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천국생활을 하게 해주어도 우리는 불만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지옥에 합당하게 마음을 낮추어야 하는데, 어디까지 말인가요? 그것은 자기가 죄인이 되면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죄인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태어난 것 자체가 죄니까, 무엇을 해도 죄라는 겁니다. 남들이 자기를 함부로 대해도 거기에 대해서 반발을 하거나 화를 낼 그 어떤 자격도 전혀 없다는 말이죠.

거기에 대해서 주님이 제시한 그 모델이 바로 세리와 창기인데, 그들은 "나를 잡아 잡수세요" 라고 하면서 살아간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살고도 부끄럽지 않는가?" 라고 하니, "부끄럽지 않습니다. 이미 버린 몸입니다" 라고 하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게 강도의 마음가짐이기도 한데, 많이 뻔뻔스러운 마음가짐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곧, 주님에 대한 분노 !!

인간이 분노를 품고 있다는 것은, 물론 그 분노를 남들에게 풀기도 하지만, 결국 자기 인생을 그렇게 만든 주님에 대한 분노이고 공격이라는 겁니다. 노골적으로 공격하면 저주를 받으니 안 되고, 그래서 후회를 하고 자책을 한다는 말이죠. "앞으로 내가 이런 짓을 하면 개다" 라고 하는데, 사실은 그게 더 못되었다는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화를 모면할 수 있는 임시적 방책이 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 다음에는 뭐라고 합니까? "제발 살려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문둥병자 10명이 "다윗의 자손이여, 살려주세요" 라고 해서 다 고침을 받았는데, 그런데 9명은 "헤헤, 살았다" 라고 하면서 그만 가버리고 말았다는 겁니다.

(눅 17:12)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눅 17: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궁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눅 17: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눅 17: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눅 17:16)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우리가 교회에 나올 때 그런 마음으로 옵니까? 자기에게 미흡한 것은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챙기면 되는 겁니까?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는 것인데, 자기를 사랑하면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분노도 줄이고 결핍도 줄여서 남들에게 그럴 듯하게 칭찬을 받는 자가 되겠다는 것인데, 그런 자들만 모이는 곳이 바로 지옥이라는 말이죠.

'에너지의 낭비'는 너무 싫어 !!

그러니 후회나 자책에 의미를 두면 안 되는데, 그것은 주님을 사랑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에너지의 낭비', 그것 때문이라는 겁니다. 근대에 들어와서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에너지 낭비인데, 그래서 사장이 회사에서 노는 것을 보면 또 분노의 게이지가 올라간다는 말이죠. 월급은 월급대로 받고 논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반 국민들이 공무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일을 대충 한다는 겁니다. 물론 자기들은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상대적으로 그렇게 않게 보인다는 말이죠. 모든 에너지는 자기 이익을 겨냥해주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 에너지는 자기 노동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그것은 일절 낭비가 없이 몽땅 다 자기의 것으로 다 쏟아져 나와야 한다는 말이죠.

수능을 앞두고 부모들이 기도를 하는데, 교회나 갓바위와 같은 곳에 가서 말이죠. 그 기도내용을 요약하면 무엇인고 하니, "제발 우리 아이가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게 하소서" 라는 것인데, 달리 말하면 "공부한대로만 성적이 나오게 하소서"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경제적 효율성인데, 그것을 세 글자로 '가성비(cost-effectiveness, 價性比)' 라고 하는데, 오늘 강의제목이 또 바뀌겠는데 말이죠(ㅋㅋ). 가성비가 높다는 것은, 들어간 비용과 그 효과가 거의 동일할 때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사람을 기계로 본다는 것인데, 즉 사물로 본다는 말이죠. "얼마나 빼먹을 것이 있는가?" 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비본래성인데, 즉 자기 혼자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 옆에 주님이 계셔서 주님 안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래야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효율성이 있는 '나' 라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나'에 대한 분노의 수치를 낮추고 결핍을 줄여서 넉넉하게 됨으로서, '나'로 인한 기쁨을 충만토록 하겠다는 것이 노림수, 그것이 바로 '나'밖에 없는 세계를 꿈꾸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게 '나'밖에 없는 세계가 바로 지옥인데, 반면에 천국은 주님을 사랑하는 세계인데, 그런 고백을 하는 피조물들이 모인 곳이 천국이란 말이죠. 즉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피조물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피조물이 바로 '나'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 그게 천국이란 겁니다.

성도는, 죽기 위해서 사는 존재 !!

이제 끝으로 이것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그러면 우리가 이런 생활을 미리 하면 안 되겠느냐는 겁니다. 죽지 않고 이 땅에 있을 때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언약을 주심으로서, 그 언약 안에는 죽음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지금 살아있는 성도를 이 죽음 속에 집어넣는데, 그러면 성도는 살기 위해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 사는 존재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죽음이 목표가 되는데, 그러면 결핍이 목표가 되고, 그리고 모자람, 즉 에너지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는 것이 목표가 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생을 털어먹는 것인데, 그게 목표가 되면, 지금 털어먹었다는 것이 아니고, 그게 목표라는 말이죠. 그러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겠느냐는 겁니다.

그게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오는데, 29절에서 32절을 보겠습니다.

(고전 7: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고전 7: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고전 7: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고전 7:32)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고마운 줄로 알아라, 이것들아 !!

여기 29절에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라고 하는데, 아내가 없는 자를 뭐라고 합니까? '홀아비' 라고 하는데, 얼마나 지저분한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니 아내가 고등어를 굽어준다는 말이죠. 아내가 없어야 하는데, 아내가 있어서 콩나물국까지 끓여서 맛있는 아침을 차려준다는 겁니다. 그러면 일류 뷔페가 따로 없는데, 그 얼마나 맛이 있겠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아침을 먹고 나면 종합비타민에 프로폴리스에 오메가3까지도 챙겨준다는 말이죠. 그런데 남자들은 마음을 낮추지 않으면 그런 것을 자꾸 잔소리를 여기는데, 귀찮게 약을 먹으라고 한다고 말이죠. 그러니 보통 간이 큰 남자들이 아니라는 겁니다(ㅋㅋ).

그러니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라고 하는 말씀이 결코 이혼을 장려하는 말씀이 아니라는 겁니다. 결코 "신난다, 이제 이혼하자. 자유다!" 라고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마운 줄로 알아라, 이것들아!"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리고 30절에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라고 하는데, 여기서 운다는 것은 분노의 게이지가 높다는 겁니다. 물론 좋아서 우는 사람도 가끔은 있지만 말이죠. 그러니 이 말씀은 "니가 어디 울을 군번이나 되나?"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그 다음에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라고 하는데, 우리가 기쁠 때는 분명히 세상 것과 관련이 되어있는데, 로또 복권에 당첨이 된다든지 말이죠. 계속해서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라고 하는데, 너무 욕심을 내서 투자를 하지 말라는 겁니다. 아예 투자할 것도 없는 자처럼 살라는 말이죠.

그리고 32절에 보면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라고 하는데, 염려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야말로 부질없는 비본래적 상황을 붙잡으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본래적 상황은 천국이 아니면 지옥인데, 지옥이 아니면 천국이란 말이죠.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잠시 파견근무를 나왔다는 겁니다. 여기는 남의 동네인데, 그러니 오래 머물 곳이 아니라는 말이죠.

죽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은 빨리 제대를 하겠다는 것인데, 왜 군대에 가면 제대를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까? 맞지요? 그래서 "이제 그만 가자"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도대체 염려가 어디서 생깁니까? 그것은 후회와 자책에서 나오는데,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염려가 되고 후회가 되고 또한 자책을 하게 된다는 말이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온 은혜 !!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지 않으면 살아가는 목적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재미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구비해서 한 평생을 살게 해주신 그 은혜, 도대체 그게 어디서 왔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예수님에게 왔다고 하지를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왔다고 해야하는데, 왜냐하면 그냥 예수님에게 왔다고 하면, 그것은 예쁘다고 하면서 장난감을 사준 것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라고 하면, 그것은 주지 않아도 되는데 주신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우리는 벌레가 발에 밟히듯이 지금 당장 죽어도 전혀 할 말이 없는데, 그런데 주의 일을 하라고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살려주신다는 겁니다. 십자가 복음과 화끈하게 통하라고, 그렇게 십자가 복음의 관련성이 있다고 하는 신호로서 우리를 살려주신다는 말이죠.

나는 간음죄를 지었어 !!

진짜 마지막으로 마태복음 5장을 보겠는데, 이 마태복음 5장은 분명하게 율법인데, 그렇지요?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마음 속으로 간음한 것도 분명히 간음죄라는 말이죠. 구질구질하게 다른 핑계를 대지 말라는 겁니다. 자기는 누구처럼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고 하지 말라는 것이죠. 최종적인 것은 율법이고 말씀인데, 그러니 분명히 간음을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미워했으면 살인을 했다는 말이죠. "나는 칼로 찌르지 않았습니다" 라고, 그런 변명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고 맹세를 했으면 죄를 지은 것인데, 왜냐하면 맹세를 하지 말라고 했으니 말이죠. 그리고 오른손을 잘라야 하고, 그리고 오른 눈을 빼야 한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와서 한 문둥병자를 만나게 되는데, 우리가 그 문둥병자라는 겁니다. 우리는 문둥병자를 보고 저주를 받았다고 놀렸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럴 입장이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받게 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런 피부병에 걸리게 되는데,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그 어떤 항의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마 8: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마 8:2)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여기서 마태복음 5장 43절에서 45절까지 보겠습니다.

(마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원수 !!

여기 43절에서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라고 하는데,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햇빛을 골고루 주시고 또한 비도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이 세상의 형편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나서 주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어디서 왔는지, 그 본래적인 것을 찾아라"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분명히 받아놓고도 정작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는데, 자기가 열심히 해서 생긴 줄로 안다는 겁니다. 창조주에게서 왔는데 말이죠. 그러면 그 창조주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겁니다.

만약에 이런 이야기를 여러분이 믿지 않는 자에게 했다고 하면, 그러면 그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당신이 어디 죽어봤어? 천국에 가봤어? 지옥에 가봤어?" 라고 나오는데, 그러면 우리는 그 순간 무슨 말을 해야하겠습니까? 그냥 꿀 먹은 벙처리처럼 가만히 있을 겁니까?

제가 어느 집사님의 전화를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는데, 순간적으로 그 집사님의 입에서 그 말이 바로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그 집사님이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까, "이미 죽었다가 살아난 자의 영이 아니면 그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신학을 공부한 목사라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닌데, 오히려 목사라고 하면 "내가 너에게 그렇게 에너지를 쏟아 부었건만, 그런 나에게 그런 말을 해? 에이, 쓸데없이 에너지만 낭비했어" 라고 하면서 투덜거리게 된다는 말이죠(ㅋㅋ). 그렇지 않습니까?

움직이는 성령의 사람 !!

죽었다가 살아난 자의 영이라는 것은, 자기는 비본래적인 것이 맞는데, 즉 "너나 나나 똑같은 죄인이 맞는데, 그런데 본래적인 분, 즉 주님의 마음이 나에게 임하게 되니, 모르던 나도 알게 되었다" 라고, 그렇게 수동적으로 이야기를 하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열심히 연구해서 안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알게 해주었다는 말이죠.

물론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완벽하고 술 담배를 모두 끊었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아니고야 어떻게 순간적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움직이는 성령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문제해결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셨는데, 그 요소가 지금도 계속해서 강렬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느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8,4,16 오후 11시에 마침.
고등어를 굽어주는 마누라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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