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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1 16:05:45 조회 : 103         
[19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52 - 잠복된 기능 이름 : 구득영(IP:183.102.224.34)

[19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52 - 잠복된 기능

                                                             19,03,04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22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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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에게 주실 심판은 단순한 삭제가 아니라 교체입니다. 우리 이름을 치워버리고 그 자리에 예수님의 이름이 활동하는 장으로 삼으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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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판은, 삭제가 아닌 교체 !!

교체를 위해서는 심판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니 이 심판에 대해서 너무 아쉬워하지 마시고, 구원이 될 자나 되지 않을 자나 모두 심판은 필히 거쳐야 한다는 말이죠. 믿지 않는 자는 나중에 심판을 받고, 믿는 자는 미리 당겨서 그리스도와 함께 심판을 받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참으로 희한한데, 사람들과 의논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사람들의 가능성을 전혀 기대하지 않는데, 즉 인간의 행함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게 로마서 6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아니하면 살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죽음이 꼭 필요한데,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롬 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 6: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롬 6: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 그게 어떤 요소들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했을 때, 우리의 어떤 요소들이 죽는지, 그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물론 "나는 죽지 않을 거야" 라고 나오면 구원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죽었다고 하면 어떤 요소로서 죽어야 구원이 되고 난 뒤에는 그 요소들을 다시 거론하지 않게 되는지, 그것을 검토해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아니라 만약에 죽었다고 해놓고서, 그 죽었다는 것들이 다시 살아나서 길길이 날뛰고 있다고 하면, 그러면 그 사람이 과연 구원이 된 사람이 맞는지, 아니면 구원이 된 척을 한 것인지, 거기에 대해서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죠.

* '까르르' 구원과 댓글 천국 !!

제 설교에는 댓글이 거의 없는데, 어제 하나 달렸다는 겁니다. 물론 반대하는 댓글이 달리면 기분이 나쁘겠지만, 사실은 그런 댓글이 나타나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어제 설교한 '까르르'에 대해서 시비를 걸었는데, 즉 "천국에 간 사람이 어떻게 자기 죄를 자랑할 수 있습니까? 목사님은 나가도 너무 나갔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천국에 간 사람이 어떻게 자기 죄를 자랑질하면서 '까르르' 거릴 수가 있느냐는 말이죠. 제가 그 설교를 하면서 '천국' 이라는 표현 대신에 "하늘에 앉았다" 라고 했는데, 그것을 그 사람은 '천국에 간 사람'으로 보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사람은 우리 몸에 죽어서 가는 천국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천국을 말이죠.

그런데 에베소서에는 무엇인고 하니까, 이미 하늘에 앉았을 때는 자기 육신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것인데, 그 사람은 그것을 감히 생각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오늘 강의초반은 이런 댓글이 나오게 된 사고방식에 대해서 살펴보자는 말이죠.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런 것이 다 잠복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골로새서 3장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은 생각하지 말라" 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너희는 땅에 대해서 이미 죽었고, 너희 생명은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죠.

(골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골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그러니 댓글을 단 사람은 무슨 차이를 모르는고 하니, 하나님의 목적이 자기 구원인지, 아니면 주님의 계시인지, 거기에 대해서 전혀 헷갈리고 있다는 겁니다. 아니 자기 구원에 치중하고 있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천국에서 '까르르' 하는 것이 주님의 계시라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일단 자기가 천국에 갔다고 여기고, 그러면 자기가 천국에 가서 '까르르' 하는 것이 너무 경망스럽고 하나님의 존엄에 대한 도전이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데, 그런데 그 앞에 주님이 용서하신 그 죄를 다시 끄집어내어서 '까르르'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경박스럽고 촐랑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계속해서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고 하니, 자기의 구원받은 상태에 대한 즐거움, 거기에 여전히 몰입되어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성경은 그게 아닌데, 자기 구원은 없고, 성도의 구원을 어디에 포함시키는고 하니, 예수님의 계시에 집어넣어 버린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은 이런 분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 아하, 예수님은 이런 분이구나 !!

그러니 그 관심사가 자기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거기에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 구원조차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그것을 알리기 위한 용도로서,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졌다는 말이죠. 자기 구원을 신나게 챙기라는 것이 아니고, 천국에 가더라도 "예수님은 이런 분이구나" 라는 것을 알고 가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앞의 로마서 6장에도 나오듯이, 주님은 어떻게 구원을 시키는고 하니, 우리를 죽이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도대체 죽일 때 무엇을 죽이느냐는 겁니다. 즉 주님과 함께 죽을 때, 무엇이 죽느냐는 것이죠. 그것은 자기에 대한 관심사는 죽고, 예수님에 대한 관심사, 그것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겁니다. 그게 '거듭남' 이라는 말이죠.

* 산다는 것 자체가 사투(死鬪) !!

어제 설교를 하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까르르' 라는 것이 웃음인데, 그런데 그 앞에 반드시 울음이라는 것을 거론해야 한다고 했다는 겁니다. 왜 울음입니까? 한 평생 엉뚱한 것에 몰두하면서 살아온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통곡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통분의 울음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야말로 사투를 벌리는데, 자기 생존을 위해서 말이죠. 요즘 치킨집을 하면 목숨을 내놓고 한다고 하는데, 다른 것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리고 직장생활도 골병이 든다는 말이죠. 자기 몸을 챙기면서 하면 직장에서 그만 쫓겨나는데,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던져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세상이 그것을 요구하는데, 저 사람이 돈 값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 그것을 오너가 모두 파악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도 명색이 사장인데, 직원들이 어떻게 어떤 식으로 근무를 하는지, 그것을 모르겠느냐는 겁니다. 심지어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가도, 주인이 대충하는지 정성을 다해서 하는지, 그것을 다 안다는 것이죠.

*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

그러니까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그야말로 처절한 싸움인데, 그렇게 살면서 몸에 다져진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개인주의' 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게 '이기주의' 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지독하고 무서울까요? 둘이 같은 의미가 아닌데, 개인주의가 더 무섭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이 이기주의는 다른 사람이 와서 사랑과 친절을 베풀면 녹아지는데, 즉 "내가 그동안 너무 이기주의로 살았어. 앞으로 나도 베풀면서 살아야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개인주의는 어떻게 됩니까? 더욱 더 생생해지는데, 즉 "역시 나니까 그렇게 위로하고 동정해주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개인주의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죠.

방금 제가 이 세상에서 사투를 벌리면서 살아가게 되어있다고 했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세상을 뭐라고 하셨습니까? '세대' 라고 했는데, 즉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겁니다. 세상과 세대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들끼리 모인 것을 세상이라고 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와 접촉이 되었을 때 평가를 받는 세상, 그것이 세대라는 말이죠.

(마 12: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 차별화, 차별화 !!

그러니 세상은 인간들의 눈에 보이는 현실의 전부인데, 반면에 세대는 위에서 볼 때는 이 세상은 망해야 하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너희는 이미 이 세대를 꾸준히 본받아왔고 형성해왔다. 하지만 성령이 임한 사람은 그 세대와 차별화가 되어야한다" 라는 것이죠.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사도바울은 "위를 봐라" 라고 했는데, 드론을 생각하면 되는데, 드론의 안목으로 보라는 겁니다. 그런데 위에서 보는 안목이 없다고 하면 개인주의가 되는데, 그러면 자기만 챙기게 되고, 거기서 나오는 미래를 걱정하게 된다면, 그것은 자기 구원, 즉 개인 구원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몸에 좋다는 보약을 다 먹듯이, 말씀을 그렇게 챙겨먹으면서 "나는 살아야한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 18차선 4거리와 5만원짜리 지폐 !!

여기서 진도를 더 나가면, 예를 들어서, 저기 광주터미널에 가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넓은 도로가 나오는데, 거기가 기아 자동차 앞인데 말이죠. 제가 헤아려보니 양쪽을 모두 다 합쳐서 18차선인데, 엄청나게 넓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기 4거리에 5만원짜리 지폐가 떨어져서 날린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호는 멈추지 않는데, 이쪽이 빨간불이면 저쪽이 파란불이고, 계속해서 차가 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5만원이 거기에 분명히 있지만 가질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래도 가지려고 하면 도로에 뛰어들어야 하는데, 그런데 막상 그렇게 하면 5만원을 손에 쥐기도 전에 어떻게 됩니까? 차가 와서 박아버리는데, 그러면 그만 죽는다는 말이죠.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고 하니까, 우리가 천국에 가고 싶은데, 그래서 가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마침 교회에서 천국은 믿으면 된다고 하니까, 자기가 믿으려고 한다는 말이죠. 마치 4거리에 있는 5만원을 가지가 가지면 된다고 여기는 것처럼,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여기 테이블이 아이가 두 명 앉아있는데, 그런데 엄마가 떡을 하나만 준다는 말이죠. 그러면 아이들은 얼른 손을 내밀어서 그 떡을 먼저 집어서 먹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속담에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이" 라는 것이 있는데, 아주 빠르다는 말이죠. 이게 어디서 유래되었는고 하니, 뱃사람들이 남쪽에서 부는 남풍을 마파람이라고 하는데, 그 바람이 비를 동반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면 게가 눈치를 채고 얼른 숨어버린다는 겁니다. 

아무튼 "날아다니는 영생과 천국을 믿으세요", 혹은 "영생과 천국을 가지세요" 라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이 가지려고 한다는 말이죠. 길거리에 5만원이 있다고 하면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인데, 아닌가요? 사실은 경찰서에 신고를 해야 하는데, 아무튼 그것을 후딱 가질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도로에 차가 쉴 사이 없이 돌아다닌다는 겁니다.

* 천국은, 율법의 거물구조 속에 !!

이렇게 천국이 널려있는 것 같아도, 그게 율법이라는 거물 구조 속에 놓여있다는 말이죠. 율법의 그물구조가 없다고 한다면 천국이든 뭐든 간에 "믿습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을 믿습니다. 삼위일체를 믿습니다. 천국을 믿습니다" 라고 하면,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게 기존 교회에서 하는 짓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분주하게 차가 다닌다는 말이죠. 이 차를 율법으로 보면, 이 율법 안에 영생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먼저 주었는데,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복음은 언제 옵니까? 이스라엘 역사 이후, 즉 마지막 때에 온다는 겁니다.

* 너희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 !!

율법에 보면 분명히 메시야가 온다고 약속이 되어있는데,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율법을 지키면서 메시야를 손에 넣어서 천국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율법이 그들을 살리는 쪽으로 갔습니까? 죽이는 쪽으로 갔습니까? 죽이는 쪽으로 갔는데, 모두 다 죽여버렸다는 겁니다. 

그게 선지서인데, 즉 "너희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물론 자기들은 나름 지킨다고 했지만, 그게 소용이 없었다는 겁니다. 즉 5만원짜리가 거기 18차선의 4거리에 있다는 것을 알기는 아는데, 하지만 그것을 가지려고 들어가는 순간 차가 와서 그만 박아버린다는 말이죠.

마찬가지로 우리가 천국에 가려고 하는 순간 율법이 날아와서 죽어버리는데, 이게 바로 사도바울이 말한 복음의 체제라는 겁니다. 그래야 사도바울 안에 구약이 살아있는데,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아닌 복음으로 살아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시가 된다는 겁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는 망하는 역사인데, 그게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계시에 포함이 된다는 말이죠. 그것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우리나 다 개인주의인데, 세상 자체가, 즉 세대가 개인주의를 양산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개인주의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욕심을 내시는데, 죽어서 천국에 가려고 한다는 말이죠.  

* 천국에 가려는, 개인주의의 욕심 !!

그런데 예수님께서 믿으면 된다고 하니, 거리에 날아다니는 5만원짜리로 여기고, 그렇게 쉽게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가지려고 하니 어떻게 됩니까? 차가 와서 들이박는다는 겁니다. 그게 로마서 6장인데, 즉 생생하게 살아있는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함께 살지 아니하면 살 수가 없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이야기를 교회에서 왜 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지식이 아닌데, 즉 "아, 저것 괜찮네. 내가 가져야지" 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는 살아있는 계시인데, 즉 자기를 삼키는 포크레인과도 같다는 말이죠. 십자가를 믿으면 자기는 생생하게 살아있는데, 그런데 진짜 십자가의 죽음의 능력이 오게 되면, 자기는 그만 그 포크레인에, 불도저에 깔리고 만다는 겁니다.

* 율법과 파리채의 위력 !!

아까 우리가 파리를 한 방에 잡았는데, 완전히 박살을 내는데, 그것이 파리채의 위력이라는 말이죠. 그게 곧 율법인데, 율법은 하나라도 어기면 몽땅 다 어긴 것이 된다는 겁니다. 그 촘촘한 율법의 그물망을 예수님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빠져왔습니까? 어디 그런 자가 있습니까? 바리새인은 안 되는데, 그러면 우리도 역시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어떤 인간도 질주하는 율법의 횡포를 당해낼 재간이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율법의 완성이 바로 예수 안에서 아버지에게 저주를 받는 것인데, 즉 율법은 저주를 하기 위해서 주어졌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라고 하는 갈라디아서 3장 10절이라는 겁니다. 율법 아래에 있다는 것 자체가, 자기가 개인적으로 얼마나 지키든 말든,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저주 아래에 있다는 말이죠.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예수님이 저주를 받으신 이유 !!

그런데 그것을 유대인들은 경험을 했지만 이방인들은 경험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방인들로 하여금 율법의 거물 안으로 집어넣는데, 그렇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율법을 지킬 필요는 없고, 그런데 그 율법의 통합체가 십자가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에 달려서 저주를 받은 것은, 예수님이 죄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단지 이 세대의 사람이 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는 말이죠. 즉 이 세대에 들어왔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방금 어려운 이야기를 했는데, 개인주의적 관점에서는 자기가 나쁜 짓을 하면 악인이 되고 착한 일을 하면 의인이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개인주의적 관점이 아닌 세대적 관점인데, 즉 예수님은 개인구원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 세대에서 자기 백성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오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대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즉 자기가 잘하면 천국에 가고 못하면 지옥에 간다는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은 결코 위에서 본, 그런 드론의 안목이 아니라는 말이죠. 위에서 보는 것은 세대로 본다는 것인데, 그러니 그 어느 인간도 악한 세대, 즉 저주받을 세대에서 단독으로 홀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대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이 세대 안에 어떤 구원의 자리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 광목이불에 그만 구멍을 !!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우리가 어릴 때만 해도 남자들은 막 살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술을 먹고 집에 와서는, 그냥 자면 되는데 담배를 피우면서 그 재를 그만 광목으로 된 이불에 턴다는 말이죠. 그렇게 열심히 다림질을 해서 만들어놓은 광목이불에 그만 구멍을 낸다는 겁니다.

예를 든 것이 좀 그렇지만,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에 구멍을 낸다는 말이죠. 지금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방식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자기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는지, 그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 어느 인간도 이 세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데, 그런데 구멍을 낸다는 말이죠.

그 구멍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구멍인데, 그것을 성령을 통해서 여기에 만들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은 물체가 아니기 때문에, 성령이 오시게 되면 그 구멍은 고정된 특정 구멍이 아니라, 그게 '사건'이 된다는 말이죠.

우리 전도사님이 이번에 유럽여행을 갔다왔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유럽을 집으로 가지고 왔습니까? 그게 아닌데, 가지고 와봐야 기념품 몇 개 정도인데, 아마 그런 기념품도 시시하다고 사지 않았지 싶은데 말이죠. 그러니 집은 유럽이 아니고 여전히 울산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유럽에 갔다온 것은 사건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친구가 "유럽에 갔다온 것은 구라지?" 라고 하니, "아니야. 갔다가 왔어" 라고 하는데, 그러자 "증거를 대봐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경험한 것이지 증거가 없다는 말이죠. 유럽을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만약에 가지고 왔다고 하면 그 친구에게 그 유럽에 데리고 들어가서 구경을 시켜주면 된다는 겁니다. 

* 성령이 주시는 '단절성' !!

그러니 사건이라는 것은 대체불가인데, 사건을 당한 사람은 알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사건에 동참이 불가능하다는 말이죠. 이런 것을 용어로 정의하는 것이 힘이 드는데, 이것을 불트만이라는 신학자는 '처분불가' 라는 어려운 용어를 쓰기도 했지만, 저는 그것을 간단하게 성령이 주시는 '단절성' 이라고 보고 싶다는 겁니다.

옆 사람이 그대로 흉내를 내도 그게 안 된다는 말이죠. 성령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인데, 다만 성령을 받은 사람은 안다는 겁니다. 즉 십자가의 단절성이 성령이 오심으로서 유지가 된다는 말이죠.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기가 구원을 받은 근거를 제시할 필요도 없고, 근거도 없다는 겁니다.

그저 "주께서 창세 전에 예정하셔서 나를 찾아왔어"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상대방이 "객관화할 수 있는가?" 라고 하면, 객관화를 할 자신도 없고 방법도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구멍과 옆자리가 연결이 되지 않는데, 이어지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둘 다 성령을 받았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연결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 그러면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사도바울 이야기를 했는데, 어디를 보라는 겁니까? 위를 바라보라는 것인데, 그러면 그것은 위를 보는 것도 되겠지만, 드론처럼 위에서 이 세상을 보게 된다는 겁니다.

그 위를 경유하게 되면, 그 십자가 안에서 "너도나도 우리 둘 다, 우리의 개인주의적인 관심사는 주님께서 일체 받아주지 않는구나" 라는 것을 공통적으로 고백하게 된다는 말이죠. 자기 기도, 자기 헌금, 그런 것을 주님께서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을 십자가 안에서 공통적으로 고백하게 되는데,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라는 겁니다. 그러니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만, 오직 그분이 하신 일만 증거하게 된다는 말이죠.

* 선교는 없다 !!

그래서 사도행전을 강의한 '소리 없는 현실' 이란 책에서, "선교는 없다" 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선교는 주님이 위에서 하실 일이기 때문에, 땅에서는 선교는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선교의 실적, 말이 안 되는데, 그 사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어떻게 아느냐는 말이죠. 주님께서 다 알아서 자기 백성을 건지는데, 그러니 교회차원에서 할 선교는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댓글을 단 그분의 천국이라는 것은 가짜인데, 왜냐하면 자기가 상상했다는 말이죠. 소설을 썼는데, 그 주인공이 누구인고 하니, 당연히 자기 자신인데, 즉 "나는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것을 흠집내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구원에 대해서 지독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자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이야기하니 반발을 한다는 말이죠.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다 잠복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교재 122페이지를 다시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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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에게 주실 심판은 단순한 삭제가 아니라 교체입니다. 우리 이름을 치워버리고 그 자리에 예수님의 이름이 활동하는 장으로 삼으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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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름이 지워지고, 거기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교체가 되는데, 그러니 우리 이름은 가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을 자기 이름으로 사는데, 그러니 자기 이름으로 하는 각오나 선택과 같은 것은 주님의 이름 앞에서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천국의 개념이란 것이, "저기에 있는데 우리가 열심히 하면 들어갈 수 있다" 라고 하는 개인주의적 관점이 아니라는 말이죠.

(마 21: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개인주의는 세대에서 나온 것으로, "내가 천국에 가려면 말씀대로 살면 된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교체가 일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이름의 교체인데, 즉 자기 이름은 사라지고, 주님의 이름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데, 그것도 완벽하게 꽉 차지를 한다는 말이죠. 

* 교체는, 다른 것으로 꽉꽉 채워 !!

교체라는 것은 빈 공간이 아닌데, 다른 것으로 꽉꽉 채운다는 겁니다. "내 이름을 지우니 허전하더라" 라는 것이 말이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 안을 주님의 이름이 대신해서 차지하고 있다는 말이죠. 이렇게 "내 이름을 지우니 허전합니다" 라는 것과, "목사님, 기도할 것이 없습니다" 라는 것이 똑같은 것인데, 이런 소리를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복음을 듣고 나서 기도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동안 철저하게 자기 이름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것인데, 그게 복음에 의해서 구박을 받고 거부를 당하니, 달리 대체물이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제가 "주께서 시키실 겁니다" 라고 했는데, 이것은 기도할 것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기도하는 것이 텅텅 비어있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기도를 한다는 겁니다.

* 주기도문 !!

어제 주일학교 시간에 한 것을 다시 하면, 주기도문의 내용에 대해서 설교를 했다는 말이죠. 그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이방인들의 기도는 자기 쪽에서 하는 기도라는 겁니다. 아쉬울 때, 결핍이 될 때, 필요할 때 말이죠. 그래서 자기 몸이 아프다든지 집안에 우환이 있다고 하면, 기도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기도를 인정해주지 않았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주기도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입장에서 기도하게 되면, 그 기도의 내용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자기를 위한 기도는 삭제가 되고 예수님의 코스가 있는데, 이 땅에 오셔서 밟으신 코스가 말이죠. 그것이 그대로, 그게 아버지의 할 일을 아들이 이 땅의 대표자로서 그대로 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아버지의 뜻과 아들이 뜻이 일치된다는 겁니다.    

그게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는데, 즉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을 생각할 이유가 없는데, 예수님이면 족하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버지의 뜻 그대로 라는 것인데, 그 이외에는 없다는 겁니다. 

(요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 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 주의 길로 가게 하옵소서 !!

그러니 주기도문이 무엇인고 하니, 새언약의 길, 즉 예수님의 길인데, 그러니 기도내용이 "주의 길로 가게 하옵소서"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성도의 기도인데,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게 해달라는 겁니다. 즉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의 계시가 되게 하옵소서" 라는 것인데, 그게 주기도문의 내용이라는 말이죠.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그 내용대로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데, 또한 예수님은 어떻게 살았는고 하니, 내일 양식을 모은 것이 아니고, 옷도 두 벌을 가지지 말고, 전대나 지팡이도 가지지 말라고 했는데, 참 지팡이는 가지라고 했습니까? 아무튼 필요한 것은 그때 그때마다 주신다고 했다는 겁니다.

(마 10: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마 10:10)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 주님은 복음을 위해서만 !!

그러니 이것이 바로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인데, 그것을 제가 일반화를 시켜서 평소에 이렇게 말했는데, 즉 "주님은 복음을 위해서만 도와주신다" 라고 말이죠. 즉 우리가 예수님의 계시가 될 경우에만 도와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개인주의는 거부하시는데, 교체가 되어야하기 때문에 말이죠.

계속해서 주기도문에서는 용서에 관한 것이 나오는데, 즉 예수님의 길을 가는 사람은, 세상이 자기에 대해서 시비를 걸어도 충분히 용서를 해야하고, 다투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복음 이외의 개인적인 문제를 가지고 다투면 곤란하다는 말이죠. 자기 명예나 체면을 가지고 싸우지 말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주님이 위에서 다 보고 계시는데, 즉 위에서 "나다나엘아!" 라고 하시는데, 그런데 꼭 개인적으로 이겨야 하느냐는 겁니다.

* 3가지 질문 !!

젊은 아이들이 컴퓨터 게임에 왜 빠지는고 하니, 물론 우리도 젊었을 때가 있었지만 말이죠. 그리고 어떤 사람이 저에게 진지하게 질문을 하는데, 자위행위를 어떻게 하면 끊을 수 있느냐는 겁니다. 또한 성인 동영상에 관한 질문도 한다는 말이죠. 그런 질문을 할 때는, "그게 나쁜데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습니까?"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3가지 질문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녹취자 - 개인주의 아닙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가치인데, 자기 이름이 손상되지 않게 해달라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 가치를 지키려고 한다는 겁니다. 즉 자기가 이런 지저분한 짓을 해도 되느냐는 것이죠.

그러니 일종의 게임이고 승부인데, 괜찮은 '나'와 지저분한 '나' 사이의 경쟁이라는 겁니다. 즉 "내가 나를 이기느냐? 아니면 지느냐?" 라는 것인데, 그러니 도를 닦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니 사람들이 교회에 오면서 은연중에 무엇을 노리는고 하니, 자기가 어느 정도 괜찮은 존재인지, 그런 목표와 기대를 가지고 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관심사가 누구에게 있는고 하니, 이 세대이고 개인주의이기 때문에,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제가 처방전을 내리기를, "이제는 컴퓨터도 치우시고, TV도 보지 마시고, 오직 성경말씀만을 보면서 금식도 일주일만 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의사가 감기환자를 보고, "일주일 정도는 푹 쉬시고, 물을 많이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것은 위장약이 같이 들어있는데, 식후 30분에 드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실제로 천주교에서는 그렇게 하는데, 교인이 와서 고민을 털어놓으면 신부가 삐딱하게 앉아서 뭐라고 합니까? "그렇다고 하면 주기도문을 외우시고, 금식을 하시고, 당분간 하던 일을 멈추시기 바랍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처방전을 내린다는 겁니다.

* 욕망은 모양만 바꿀 뿐 !!

그렇다면 게임과 자위행위와 성인용 동영상을 보는 것을 멈추면 과연 자기 욕망도 멈출까요? 멈추지 않는데, 그래서 그 다음에는 더 폭발을 하던지, 그게 아니면 욕망은 변신할 뿐이지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죠. 욕망은 모양만 바꿀 뿐인데, 그래서 골프를 한다든지 자동차를 바꾼다든지, 그렇게 다른 것으로 대체가 된다는 겁니다.

그것도 아니면 경건의 모습으로, 즉 갑자기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금식기도를 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로 망가진 자기 모습에 대해서, 그것을 이기기 위해서 과도한 자기의 선한 행위를 가지고 그만 덮어버리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제가 제시한 방법은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하시라는 겁니다. 그것도 지겨워질 정도로 해보라는 말이죠. 그래서 어제 낮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세상의 유혹을 받는 것은 아직도 이 세상이 지겹지 않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아직 떠나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혹시 떠난다면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딸 시집은 보내고 떠나고 싶다는 말이죠. 그런 개인주의적 야망이 우리 안에 잠복되어있다는 겁니다. 

* 다시 정리하면 !!

다시 정리를 하면, 인간은 자기의 힘으로, 자기 선행으로 자기 안에 있는 괴물을 이기고 싶어하는데, 즉 자기 행함으로 이겼다고 외치고 싶다는 말이죠. 왜 그런고 하니, 그게 바로 자기 이름의 성과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괴물을 끄집어내어서 바깥에서 양성화를 시켜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천국은 무엇인고 하니, 지금 하늘에 앉혀져 있는, 죽기 전에 천국에 갔던 성질, 즉 '까르르' 라는 겁니다. '나' 라는 괴물, 남자 창기를 100명 상대했다고 하는 그 괴물, 그것은 돈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서 한다는 말이죠. 그것을 내놓고 '까르르' 웃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모독하는 겁니까? 자기가 자기를 모독하고 있다는 말이죠. 자기 과거를 심하게 모독한다는 말이죠. 즉 "어이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독한 이놈아!" 라고, 자기 자신을 보고 그렇게 '까르르' 웃는다는 말이죠. 그것을 음성적으로 숨기는 것이 아니라 까발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까발린다는 것은, 더 이상 자기는 자기의 위신과 체면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야말로 자기는 엉망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를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사도바울이 지옥에 갑니까? 그리스도와 끊어집니까? 이미 성령을 받았다는 말이죠.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런 논리가 왜 필요한고 하니, 지금 내부에서 악마를 우리를 개인주의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창세기 3장에 근거해서 하는 이야기라는 말이죠. 뱀이 뭐라고 했습니까?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죽지 않고 신이 된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개인주의라는 겁니다.

창 3: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 3: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창 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그리고 난 다음에 아담은 하와를 비난했는데, "저 여자 때문입니다. 저 여자 때문에 제 인생을 조졌습니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리고 여자는 그만 뱀을 탓하고, 일이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누구를 탓하고 밀어낸다는 것은 개인을 절대화시키는 사고방식이라는 것이죠. 

(창 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 3:11)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창 3: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 3: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 과연 누가 책임질 문제인가?

여기에 대한 주님의 조치방식은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를 탓하는 것이 아니고, 더욱이 책임을 지라고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악마로 무장이 되었기 때문에, 마귀가 "선악을 알고 있는 네가 네 인생을 책임져야지, 누가 책임을 지겠는가? 정신을 차려, 이 인간아!"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네가 바르게 하면 천국에 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으로 가는 거야. 물론 성경에 보면 예수의 피가 너의 죄를 용서해준다고 하는데, 그것은 원죄는 몰라도 자범죄는 안 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게 마귀의 소리인데, 오늘날 한국의 15만명(?) 목사의 소리이기도 하고 말이죠. 그러니 이게 바로 인간들을 코디하는 목사들의 목회기술인데, 영적전쟁이라는 겁니다.

* '까르르' 웃자 !!

그런데 제가 조금 전에 게임과 자위행위와 성인용 동영상을 지겹도록 하고 보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지겹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는 말이죠. 그게 지겹게 되어있는데, 새롭지 않으면 지겹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겨워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영원히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잠시 지겨워서 그만 둔 것인데, 다시 여유가 있으면 하는데, 즉 인간의 본성은 고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잠복되어있는 본성은 아무리 캐내고 깨내도 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변하지 않는 자기 모습을 보고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까르르' 하고 오히려 초연하게 웃으면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것을 가지고 심각하게 되면, 그것은 자기 안에 있는 괴물의 수법에 말려들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아내가 계속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러면 남편의 경우에 더 정신을 차리고 복음을 전하면 아내가 개과천선해서 받아들 것이라고 여기지만, 그게 마귀의 수법이라는 말이죠. 그게 안 된다는 겁니다. 괜히 그런 것에 승부를 걸리 말라는 것이죠.

전도와 선교는 주님이 하시는 것인데, 결코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것에 올인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인생을 구렁이가 담을 넘어가듯이 유들유들,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여행을 해보면 알겠지만, 왜 옛날에 그런 노래도 있었는데,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 라고 말이죠. 정말로 그렇다는 겁니다.

그게 전도서에도 나오는데, 12장 1절에서 6절입니다.

(전 12:1)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전 12:2)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전 12:3)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
(전 12:6)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
(전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그러니 이게 바로 우리 자신이 사라지는 것인데,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는 말이죠. 게임, 자위, 성인 동영상, 그런 고민에 대한 주님의 조치는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사라지게 만든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같이 삭제를 당하고 또한 교체를 당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사라진 것을 붙들고 이기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마치 게임을 하듯이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 잘남의 보여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잘남, 즉 주님의 계시를 위해서 편입된 자들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증거하기 위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 아듀, '나' !!

그러니 자기 자신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안목이 사라져야 하는데, 자기 자신과 작별을 고해야 한다는 겁니다. "회생불가한 존재야, 이제 너와는 작별이다" 라고 말이죠. 아무리 해도 변하지 않는 자기 자신과 헤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죽은 자로 간주하게 되는데, 물론 어차피 죽지만 먼저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죽은 자로 간주할 때, 그것이 죽음은 헛된 것이 아니라, 자기 죽음이 주님의 계시에 포함이 되어있다는 사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자기 이름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증거하는 식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소급적용' 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게 교재에 나오는데, 122페이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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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전두환 때문에 이 소급적용이 유명해졌지요? 그렇게 소급해서 적용을 시키는 겁니다. 전두환이 뇌물을 받은 돈이 5천만원인데, 그것을 투자해서 전부 50억이 된다면, 처음 5천만원만 회수하는 것이 아니고, 이번에 새로 바뀐 '전두환 환수법'에 의하면 50억을 전부 다 회수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죄가 죄를 까고 죄가 죄를 낳고 하는 모든 것은, 죄가 원천적으로 소급 적용이 되어서 전부 해소되고 용서되는, 그게 전두환 법이 아니라 '십자가 법' 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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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전두환 법이 나오는데, 왜 50억을 다 회수합니까? 그것은 씨앗 자체가 잘못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까도 까도 죄가 나오는데, 그리고 죄를 짓지 않겠다고 하면서 잠시 쉬어가도, 다시 죄가 나온다는 말이죠. 일주일, 한 달, 그렇게 참을 뿐이지 다시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두환 법이 동원되어서, 다시 소급 적용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바로 '십자가 법' 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죄를 지었다고 인정하고 단정하는 죄만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미처 몰랐던 아담의 죄를 용서하는 차원에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주님은 우리를 용서한 것이 아니라 아담을 용서하셨는데, 즉 아담을 용서하심으로서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이 다 용서를 받는다는 겁니다. 이것을 칼 바르트가 이야기했는데, 그래서 '만인구원설'을 주장했다고 다른 신학자들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는 말이죠.

* 칼 바르트의 '만인구원설' !!

그의 주장을 잠시 살펴보면, 그의 주장이 어느 부분이 문제가 있는지 들어보면서 찾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택하실 때 그냥 택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 표상으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택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나오는데, 즉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을 택한 것을 미리 보게 되면 그게 곧 아담을 택한 것인데, 그러면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고 하면, 그렇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했다고 하면, 그런데 그 아담이 곧 예수님의 표상이기 때문에, 아담에 속한 자는 모두가 다 용서를 받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불교처럼 모든 인간은 부처가 된다고 했는데, 불교에서는 아무리 짐승으로 태어나고 해도 결국 윤회가 끝나는 시점이 오면 부처가 된다고, 그렇게 주장한다는 말이죠. 이게 불교이론이기 이전에 힌두교에서 이미 주장한 것인데, 힌두교의 '리그베다' 라는 경전에 보면 그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칼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님을 하나님이 사랑했다고 하면, 예수님과 아담이 연결되기 때문에, 아담에 속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모두 용서를 받는다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무엇이 문제입니까? 칼 바르트의 문제점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제가 너무 어려운 질문을 던졌습니까?

* 칼 바르트의 문제점은?

방금 제가 "자기가 미처 몰랐던 아담의 죄를 용서하는 차원에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다" 라고 했는데, 이게 같은 이야기입니까? 제가 칼 바르트가 잘못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는데, 무엇이 문제냐는 말이죠. 로마서 5장에 나오는 '표상' 이라는 말을 오해했는데, 그는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으로 나아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죠.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하지만 시간상, 순서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아담이라는 겁니다. 즉 아담은 예수님의 주도권과 결정권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다는 말이죠. 예수님에게는 어떤 주도권이 있는고 하니까, 천국에 보낼 사람은 천국에 보내고, 지옥에 보낼 사람은 지옥에 보낸다는 겁니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담이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칼 바르트는 예수님의 이러한 일을 기능으로 보지 않고 존재로 보았다는 겁니다. 그가 기존 신학을 공격할 때, "너희는 왜 기능으로 보지 않고 존재로 보는가?" 라고 공격을 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은 존재로서 보았다는 말이죠. 즉 예수님에게 일어나는 일을, "같은 존재, 같은 표상 안에 있는 아담도 혜택을 본다" 라고 보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기능으로 보게 되면, 아담을 두 조각으로 내게 되는데, 즉 천국으로 가는 아담과 지옥에 가는 아담으로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야 심판주로서의 예수님이 기능이 그대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대번에 생각나는 것이 이 세대에 속한 '개인주의' 인데, 그것이 본능이니 말이죠. 그래서 "나는요?" 라고 하게 되는데, 즉 기능적이 아닌, 존재적 질문이 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 '나' 라는 존재를 다시 찾을 이유가 없어 !!

그런데 제가 처음부터 일관되게 주장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계시에 포함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나' 라는 존재는 어디에 갔습니까? 로마서 6장에 의하면,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는데, 그렇게 교체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시 '나' 라는 존재를 찾을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이 무엇 때문에 지금도 일용할 양식으로 살려주시는지, 그것이 궁금해야 하는데, 어차피 우리는 없어질 존재이에 말이죠. 우리는 주님의 존재가 하신 일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런 피조물로서 우리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 값으로 죽는데, 즉 "죄의 삯은 사망이다" 라는 것이죠.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렇게 죄 때문에 죽는다는 것은 무슨 기능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고 하니까, 예수님은 죄를 미워하고 싫어하신다는 것을, 그것을 우리는 죽을 때까지 계시화를 시켜서, 그런 주님의 취지를 우리가 살아서 발산하고 있는 중이라는 겁니다. 

* DNA가 달라요 !!

예를 들어서, "나는 이가 아프다" 라고 하면, 그것은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물론 양치질을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아픈 사람은 역시 아프다는 겁니다. DNA가 다 다르기 때문에 말이죠. 담배의 경우에도, 아무리 피워도 80을 넘기는 사람이 있고, 그 근처에도 가지 않았는데도 젊은 나이에 폐암에 걸리는 사람도 있다는 겁니다.

가습기 문제의 경우에도, 가습기 안에 넣는 살균제로 인해서 많은 아이들이 희생을 당했는데, 그런데 그렇지 않은 99퍼센트의 아이들도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DNA가 달라서 그러한데, 물론 그런 것도 다 예상해서 제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거기에 소홀히 한 회사의 책임도 막중하지만 말이죠.

그래서 통계학이 필요한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옹호를 하면 문제가 없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의사가 아픈 사람을 수술하다가 실수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의사를 감옥에 넣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고발을 해도 대부분이 무혐의나 벌금형에 그친다는 겁니다.  

요즘 유치원 문제로 시끄러운데, 부모가 맞벌이를 해서 아무리 맡길 곳이 없어도, 자기 아이들을 맡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항의를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유치원을 자기 돈으로 세워서 하면, 그것은 원장이 알아서 판단을 하면 된다는 겁니다. 물론 공금을 횡령하면 감옥에 집어넣으면 되고 말이죠. 우리가 어릴 때는 유치원에 가지도 않았는데, 방앗간이나 과수원 정도를 하면 몰라도 말이죠.

이게 곧 개인주의인데, 그만 고마움과 감사가 사라지고 말았다는 겁니다. 인간이 그만 돗대가 되어서 바닥을 너무나 높이 설정을 했는데, 사회 자체가 시건방져서 그렇다는 말이죠. 이것은 어느 특정인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우리 모두가 다 그렇다는 겁니다. 유치원의 원장들이 하는 짓도 보면 그야말로 욕심이 끝이 없다는 것이죠.

이런 개인주의로 인해서 욕망이 더욱 더 높아지면 어떻게 됩니까? 있는 행복마저도 모두 다 까먹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니 선진국이 되어서 잘 산다고 해서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차라리 아프리카에 사는 사람들이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 다시 정리하면 !!

다시 정리를 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의 죄를 용서해주셨는데, 그것은 아담이 용서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자격이 없는데, 다만 용서해주면 고맙게 여기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아담의 죄를 용서했다는 것은 그런 차원에서, 즉 아담은 용서를 받지 않아도 되는데 주님께서 우리 자아를, 세대에 속한 개인주의, 우리 속에 그런 괴물이 있음을 주님은 알면서도 교체를 시켜주시는데, 즉 구원을 시켜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감사해야 하는데, 그러면서 무엇을 대비해야 합니까? 그것이 바로 '까르르' 라는 것인데, 즉 "나는 이 따위의 인간인데, 그런 죄인을 주님이 용서해주시고 구원해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댓글을 단 사람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복음서에 보면 베드로의 배신이 적나라하게 나오는데, 요한도 배신을 때리고 도망을 갔는데, 그게 자기가 쓴 요한복음에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가면 이런 복음서를 없애버릴까요? 왜냐하면 자기들의 치부가 거기에 나오니 말이죠.

하지만 없애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게 있음으로서 어떻게 됩니까? 주님에 대한 감사가 극대화가 된다는 겁니다. "저는 이 정도로 개판이었는데, 주님이 살려주셨습니다" 라고 하면서, 자기 면류관을 가볍게 다시 내어놓게 된다는 것이죠. 억지로 반납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제 교재 123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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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꾀를 낼 수 있는데, "어차피 나의 죄에 대해서 책임을 묻지 않고 피해간다면, 내가 실컷 죄를 지어도 구원을 받는데 지장이 없겠네" 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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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될 수 있기 때문에 복음이 죄를 조장한다는 혐의를 받는다는 겁니다. 즉 "당신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 그동안은 은밀하게 짓다가 이제는 노골적으로 짓잖아. 당신이 거기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있어?"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말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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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형편을 제대로 볼 필요가 있는데, 십자가의 안목에서 말이죠. 그 어떤 경우라도 우리의 독자적인 개인행동을 인정해주는 영역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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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적인 개인행동의 영역은 없어 !!

여기에 보면 "우리의 독자적인 개인행동을 인정해주는 영역은 없습니다" 라고 하는데,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죄를 짓고 싶어도 자기 마음대로 죄를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도 자기가 관리한다고 될 문제가 아닌데, 치과의사가 아닌 이상은, 농사를 짓다가 보면 스케이링이고 뭐고 그냥 지나간다는 말이죠. 

그러다가 치과에 가면 의사가 잔소리를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모르는데, 물론 대부분의 의사는 관심도 없이 그냥 이를 뽑으려고 하지만 말이죠. 그래도 제대로 된 의사는 손님이 싫어하든 말든 잔소리를 하는데, 물론 듣는 사람은 귀를 막는다는 겁니다. 인생이 사는 목적이 치아관리가 아닌데, 그게 아니더라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것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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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개인적 운명은 우리가 애를 쓴다고 달라지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 라고 지칭할 조건은 자기 자신이 정해놓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지정을 받은 조건 하에 부여된 것이 때문입니다. 너무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조실부모하고 혼자서 동생을 키우면서 살아보려고 그렇게도 애를 썼지만, 결국은 생활전선에서 너무 무리하게 몸을 굴리는 바람에 평생을 약봉지와 더불어 뒹굴면서, 본의 아니게 남들에게 페만 끼치다가 죽어가는 잡초와 같은 인생이 있다고 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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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TV를 보면 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데, 그렇지요? '인생극장'에 나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렇다는 말이죠. 그게 인생이라는 겁니다. 여기 이 사람의 경우에, 자기 인생이 그렇게 망가진 것은 자기 탓이 아니고 조상 탓이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하지만 재벌 부모를 만난다고 해서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도저히 그런 변수를 모두 다 찾아낼 수가 없는데, 그런 가운데 자기는 잘못이 없다는 것을 핑계대기 위해서,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린다는 말이죠. 즉 조금이라도 제대로 된 집안에서 자기가 태어났다면, 자기는 그런 막 사는 인생을 살지 않았을 것이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러면 교도소에 사고를 치고 들어온 사람들이 전부가 다 부모들이 형편이 없고 가난한 자들입니까? 그렇지가 않다는 말이죠. 물론 부모가 가난한 사람도 많이 있지만, 돈이 많은 부모를 둔 사람도 있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오히려 부모가 돈이 많기 때문에 사고를 친다는 겁니다. 그 돈으로 마약이나 도박을 한다든지 해서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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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 사람은 그 어떤 노력을 다해도, 자신이 당하는 비참한 형벌을 납득시킬 합당한 죄를 찾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욥이 바로 이러한 사람입니다. 욥이 애초에 이해하지 못한 것은, 욥 자신이라는 개별적인 존재와 친구라는 개별적인 존재 사이에는, 동일한 규칙이 적용되고 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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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욥과 친구들, 그리고 환경의 격차 !!

드디어 욥이 나오는데, 욥의 경우에는 욥과 욥의 친구들에 주어진 환경이 달랐다는 겁니다. 주님이 일방적으로 몰아세웠던 환경과, 친구들에 주어진 환경의 격차, 그리고 단절됨, 즉 조화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연결고리가 없는데, 자기가 이렇게 망가진 것에 대한 합당한 이유를 찾을 수 없는데, 그러면 인간은 자살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에 대해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감을 잡지 못하는데, 그래서 우울증에 걸린다는 말이죠. 즉 욕망은 높고, 현실은 따라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을 낮추어야 합니까? 주어진 환경을 탓해야 합니까? 자기를 낮추어야 합니까? 당연히 자기를 낮추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게 전혀 안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낮추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데시벨을 더 높이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욥에게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욥은 마지막에는 막 가는데, 하나님까지 들먹인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등장하시는데, 그 하나님이 욥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욥아, 너를 너 되게 한 환경의 변수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욥이 되게 하기 위해서 투입된 수많은 요소 중에서, 그 중에 몇 가지나 챙기고 있느냐는 말이죠. 물론 욥이 답하지 못하는데, 그런데 같은 지혜서인 잠언서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16장 9절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라고 하는데, 아주 간결하게 말씀하고 있다는 겁니다.

(잠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원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제비를 뽑는 것은 인간이 정하는데, 그런데 그 결과는 누가 정한다는 겁니까? 주님이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제비를 뽑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냥 헛폼만 잡았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노력하는 것은 다 그런 헛폼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러한 폼마저도 주님의 계시에 포함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의미에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마음껏 헛폼을 잡아야 하는데, 그게 바로 욥의 한계이고 인간의 한계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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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욥은 개별자 자격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따지려고 기도하면서 직접 대면하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욥이 놓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욥을 집단의 대표자로서 지정해버렸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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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42:7)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욥 42:8)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 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 욥은, 구원받은 자들의 대표자로서 고난을 !!

그러니 욥이 기존의 인간과 다른 점이 있는데, 자기 친구들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새롭게 구원받은 인간들의 대표자로서 고난을 받았다는 말이죠. 그런 대표자의 자격으로 그 시대에 등장해야했던 계시의 사람인데, 그게 바로 욥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욥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드론의 입장에서 욥을 어디에 집어넣는고 하니,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욥을 미리 앞당겨서 욥기 당시 시대에, 마치 폭격기가 폭탄을 투하하듯이 내리꽂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2019년에 투하된 자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는 말이죠. 짜장면을 먹는 기능, 여행을 가는 기능, 아니 자기가 유럽여행을 간다는 것을 3살 때 알아서 미리 기도를 했느냐는 말이죠. 그게 아닌데, 그런데 가야한다는 겁니다. 여비도 보태주지 못하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좀 그렇지만 그런 일이 일어났어야 한다는 말이죠(ㅋㅋ). 그리고 몸이 아프다면, 그렇게 아파야 한다는 겁니다.

* 고마움과 감사로 이어지면, 그게 성령의 일 !!

마치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밑에서 기도한 것처럼, 모든 일이 주님의 안목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말이죠. 창세 전에 이미 우리가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갈지, 주님은 모두 알고 계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는데, 하지만 그것을 지식으로만 여기면 안 되고, 그것이 감사로 이어져야 한다는 말이죠. 미리 그렇게 해주신 것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가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신학이 필요하고 성경공부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감사가 이어진다면 성령의 일이고, 반면에 짜증이 이어지면 그것은 악마의 일이라는 말이죠. 물론 우리는 하나만 경험할 수는 없는데, 이런 경험 저런 경험을 다 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 소풍을 왔으니 말이죠. 잠시 왔다가 돌아간다는 겁니다. 

이제 교재 124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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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겪는 모든 일은 이미 예수님께서 대표자가 되어서 다 겪은 일입니다. 심판이란, 이처럼 대표자와 대표자 사이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겨냥하시는 죄는, 첫 번째 아담의 죄이기 때문에 아담의 범죄 여파에 모두가 시달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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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 예수님이 대표자로서 이미 다 겪은 일 !!

이것을 다음과 같이 보면 되는데, 이렇게 풍선이 있다고 하면 여기에 공기가 들어있다는 말이죠. 주님이 풍선인데, 그런데 그 풍선에 묶인 고무줄을 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 공기가 바깥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성도의 인생이라는 말이죠.

예수님의 성육신한 그 십자가 인생을 '혹' 하고 불어낸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인생이 어떤 인생인고 하니, 죄인이 당한 고난이 포함된 인생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이 죄가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살인죄를 짓던, 간음죄를 짓던, 그 어떤 죄를 지어도, 그것이 이미 대속한 상태에 포함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께서 내놓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그 대속의 효과와 능력만 뿜어내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뿜어낸 열매가 바로 오늘날 성도라는 말이죠. 그래서 성도의 입에서는 "나는 이래. 하지만 용서를 받았다" 라고,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 욥과, 지껄이는 친구들 !!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두 번째 아담으로 보내셨다고 하는 것은, 그게 욥기와도 똑같다는 말이죠. 욥의 친구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데, 다만 자기가 살아온 방식대로 지껄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욥을 향해서 욕을 하게 되는데, 우리도 역시 이 세대에 속해서 지껄인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욥의 친구의 입장에 있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우리의 지껄임으로 인해서 주님께서는 아파하셨는데, 그 아픔을 욥은 이미 품고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욥의 친구들을 통해서 그런 조치를 하셨다는 말이죠. 그리고 난 다음에 그런 아픔을 당한 당사자가, 즉 피해자가 가해자를 대신해서 사죄의 제사를 드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욥기 42장 8절에 보면,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라고 하는데, 여기서 이렇게 의미를 두고 '일곱'이 나오면, 그것은 흠이 없는 창조자의 입장이라고 보시면 된다는 겁니다.

* 감사, 또 감사 !!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창조를 어디에 소모를 시키는고 하니,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데 그 창조물을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감히 우리가 예수님의 계시가 된다는 것인데, 비록 겉모습은 배도 나오고 볼품이 없어 보이지만, 예수님의 계시를 위해서 선택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까르르' 라는 것이고, 또한 감사가 중요한데, "범사에 감사하라" 라는 것처럼 말이죠. 물론 그 과정에 있어서 처음부터 감사하게 되는 것은 아니고, 짜증을 내고 울고불고 난리를 친다는 겁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라고 하면서 말이죠. 삐치기도 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등한시하고, 그렇게 태업에 들어가도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결국 성령은 받는 사람은 어디에 관심을 두게 되는고 하니, 자기가 힘들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고생한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데, 즉 주님의 십자가에 말이죠. 그래서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는 기쁨을, 슬픔이 아닌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만하고 오늘 강의를 마치겠는데, 교재 124페이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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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정도 모르고 오늘도 병마와 외롭게 싸우면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아픔이? 왜 나의 운명은 이러해야 하는가?' 라고 하면서 신에게 화를 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사는 것이 곧 죄고, 합당한 징벌이고, 허무고, 심판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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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아픔이?

우리는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아픔이?" 라고 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아픔보다 더 높은 차원의 개념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죽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겁니다. 사망이 우리에게 임했다는 말이죠. 우리는 없어져야 하는데, 그것도 고생고생을 하면서, 그런 운명을 우리가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것마저도 예수님을 증거하는 용도로서 활용되고 있음을 안다고 하면, 당연히 그 사람은 이미 구원에 이른 자라는 말이죠. 그게 구원을 받은 자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사는 것 자체가 곧 징벌이라는 말이죠. 잘 살고 못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서는 뭐라고 합니까? "마지막 때가 되게 되면 이런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여기서 마지막 때는 언제를 말하는 겁니까? 세상이 끝나는 날이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때, 그때가 되면 "아하, 나는 그리스도의 계시로서 활용을 당하고 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혼자서가 아니라 모든 것을 주님과 연결해서 생각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 안에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우리 자신의 의도가 아니라, 주님의 뜻으로 인한 일인 줄 알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9,3,11 오후 4시에 마침.

                                                            목사님, 기침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네요.
                                                           기침이 나도 갑사, 나지 않아도 감사 !!


 

 첨부파일 : 19대구강의('전도서'속의그리스도)52-잠복된기능.hwp (63.5K), Down: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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