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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1 21:04:26 조회 : 306         
[19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55 - 변동 이름 : 구득영(IP:39.120.190.106)
[19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55 - 변동

19,04,1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실험실의 흰 쥐 !!

오늘은 교재 129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제목이 '8강, 실험실의 흰 쥐' 라고 되어있는데, 인간을 이렇게 실험실의 흰 쥐로 보려고 한다면, 어떤 안목이 있어야 합니까? 그것은 인간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전체적으로 말이죠.

그러한 안목이 있을 때, 즉 전체와 각 개인을 비교하면서, 도대체 인간이 무엇인지를, 그렇게 인간의 움직임을 전체적인 입장에서, 그들이 어떤 이유에서 태어났고 살아가는지를 살펴보게 된다면, 그러면 '실험실의 흰 쥐' 라는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기 전도서에서 되풀이해서 나오는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1장 9절인데, 즉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라고 한다는 말이죠. 새 것이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새 것은 포괄적인데, 그 새 것의 반대말은 옛 것이 되는데, 그 옛 것은 실험실의 흰 쥐와도 같은 입장에 놓여있다는 겁니다.

(전 1: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새 것은 크고 전부인데, 반면에 옛 것은 새 것의 입장에서 보면 헛되고 헛되다는 말이죠. 바로 그러한 안목이,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이 우리의 개인적인 안목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생활은 변화를 의미하는데, 즉 '변동' 이라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십일조를 내지 않아도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하면, 그래서 "돈도 없는데 내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면, 그러면 여기에는 그 어떤 변화도 없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십일조를 행함으로 천국에 가는 게 아니고,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천국에 갑니다" 라고 했을 때, "그러면 십일조를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변동이라고 여기는데, 하지만 자기 자신이 달라지지 않았기에 변동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죠.

* 신앙이란 변동이다 !!

그러면 "신앙이란 변동이다" 라고 했을 때, 그게 어떤 변동인고 하니, 만약에 개인위주로 사는 것은 다시 또 다른 형태의 개인위주로 산다면, 그것은 변화도 아니고 변동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인고 하니, 전체를 다 아우르는 포괄적 안목을 가진 입장으로, 그렇게 변화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신앙이 없을 때는 무슨 입장인고 하니, 개인적인 입장인데, 즉 "나에게 이익이 될까? 손해가 될까?" 라는 것만 생각하는데, 그러한 개인주의에서 신앙이 오게 되면 포괄적인 입장으로 바뀌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포괄적인 입장이 성경을 쓰신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보시면 된다는 말이죠.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받는 것인데,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받기 전에는 우리가 누구의 마음으로 살았는고 하니, 자기 위주로 살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자기 위주가 아니라 하나님 위주로 살아간다는 말이죠.

여기에서 염두에 두어야하는 것은, 하나님 위주로 산다고 하는 것이 "내가 하나님 위주로 산다" 라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포괄적인 내용이다" 라고, 그렇게 보는 안목이란 겁니다. 그게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안목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과거에는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다가, 이제는 주님의 위해서, 즉 "내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지?" 라고 한다면, 그것은 변동이 아닌데, 왜냐하면 여전히 '나' 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이 아니고, "내가 무엇을 하든 말든, 나는 오직 은혜로 얻어먹고 산다"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주님에게 제공받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변화이고 또한 변동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목을 '실험실의 흰 쥐' 라고 했는데, 즉 "아하 나는 실험실의 흰 쥐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인데, 그게 바로 전체적인 안목이라는 말이죠.

* 결혼은 미친 짓이다 !!

하나님이 성령을 주신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마음이 서로 통해야 천국에서도 같이 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혼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마음이 통한다고 인정하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치러지는 것이 결혼식이란 겁니다. 마음이 맞지 않는데 억지로 맞추어서 살려고 한다면,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일단 "저 사람과 장기간 마음이 맞을 수 있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해야한다는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 현대사회에서 결혼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고 기적인데, 왜냐하면 각자가 자기 자신밖에 모르니 말이죠. 그런데 서로 마음이 통한다고 여기는 것은 둘 중에 하나인데, 먼저는 착각을 했거나, 그게 아니면 상대방에게 얻어 챙길 것을 간파했을 경우라는 겁니다. 그러니 일종의 처세술이라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남자 쪽에서 좀 잘산다고 하든지 하면, 반면에 여자 쪽은 궁색하게 살아왔다는 겁니다. 대식구에 화장실도 하나이고, 그래서 아침마다 난리가 난다는 말이죠. 그러면 탈출구를 모색하게 되는데, 그래서 이쪽 집에서 저쪽으로 갈아타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남자에게 애교를 부리게 되는데, 그러면 남자는 또 넘어간다는 말이죠. 여자가 물면 물리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미국의 어떤 영화배우는 결혼하고 나흘만에 이혼을 했다고 하는데, 나이는 28살이나 차이가 난다고 하는데 말이죠. 지금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는데, 한국여자와도 결혼한 적이 있었다는 겁니다. 얼굴이 길죽하게 생겼는데 말이죠. (녹취자 - 니콜라스 케이지를 말씀하시는 것이죠? ㅋㅋ)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사람이 생존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것이 의식주인데, 여기서 특히 주택이라는 것은 '세틀(Settle)' 이라고 해서 피난처, 혹은 은신처라는 겁니다. 마지막에 자기 몸을 누구에게도 간섭을 받지 않고 누울 수 있는데, 그런 최종적인 자리를 의미한다는 것이죠.

* 영혼의 안식처 !!

신석기 시대에는 그것이 움집인데, 물론 실제적으로 현대인들에게 그런 움집이, 즉 주택이나 아파트가 자기가 밤에 편히 쉬는 곳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육체적으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그런 움집과 같은 피난처를 마련해놓는다는 것이죠. 즉 영혼의 안식처를 말이죠.

그러면 자기가 아무리 개인주의나 이기주의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정신적으로 그렇게 마지막에 자기 영혼이 편히 쉴 곳을 마련해놓은 이상, 그것은 남에게 제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상대방 속에 그런 자기를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의도로 움직이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러한 정신적인 최후의 안식처를 마련하지 못하면, 그러면 우리 인간이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살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직 자살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각자 그런 정신적인 최후의 보루가 있다는 말이죠. 즉 철저한 자기 중심인데, 왜냐하면 최후의 일인자는 자기 자신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감추는 방식 중의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실질적으로 주택을 마련하는 것인데, 그래서 만약에 돈이 모자란다고 하면, 그러면 돈이 많은 남자나 그 집안을 택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자기의 정신적인 안식처를, 실제적인 안식처인 아파트에 담아두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편안하게 쉬려고 한다는 말이죠.

* 내 영혼아,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

이게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것인데, 어떤 농부가 농사가 너무 잘되었다는 겁니다. 소출이 많다는 것인데, 그래서 기분이 매우 좋다는 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19절에 나오는데, 즉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갑자기 소출이 많아진 농부의 고백이 바로 우리 내부의 음성인데, 우리 내부에서 지금도 이 음성이 마구 울려나오고 있다는 말이죠. 우리 내부의 깊숙한 지하실에서부터 왕왕거리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남들에게 노출되면 안 되는데, "이런 이기주의자야!" 라는 소리를 듣기 때문에 말이죠.

(눅 12: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눅 12: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눅 12: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눅 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눅 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

그래서 이런 정식적 벙크를 폭파시키기 위해서 주님이 준비하신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전도서이고 성경전체라는 겁니다. 그래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서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전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 1:3)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
(전 1: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그러니 그냥 헛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겁니다. 즉 우리가 새롭지 않은 것을 껴안고 있다는 것이죠. 구닥다리를 껴안고 있다는 것인데, 최후의 정신적 안식처로서 말이죠. 그러니 "내 영혼만 잘 되면 그만이야" 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게 전도서의 이야기이고 누가복음의 이야기라는 말이죠.

자기 영혼이 잘 되기 위해서 책을 보고 공부를 하고, 또한 포도원을 경작하고, 그리고 여자를 천 명이나 계속해서 번갈아 가면서, 솔로몬이 그렇게 노력을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공부도 소용이 없고, 포도원도 소용이 없고, 여자도 소용이 없고, 그래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주께서는 옛 것 속에는 정신적인 안식처를 둘 만한 곳을 없게 하셨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즉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옛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에 정신적 안식처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인데, 새로운 것에 말이죠.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옛 것을 가지고 어떻게 해봐야, 그 옛 것이 날아가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옛 것 속에 마련한 자기 안식처도 그만 날아가고 마는데, 그러니 헛된 인생이란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만이 헛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인생도 같이 헛된 것을 추구하다가보니, 그만 헛되게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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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12장 2절에 보면,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어둡기 전에' 라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창고에 가두었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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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12:1)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전 12:2)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 어둡기 전에 !!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은 옛 것에 속하는데, 그것은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어두워진다는 말이죠. 우리 장로님의 이런 친절한 서비스도 옛 것에 속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천사표 뉴 서비스인가요? (ㅋㅋ) 아무튼 모든 것이 다 어두워진다는 것인데, 물론 애초부터 어두웠다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굉장히 매혹적으로 다가왔다는 말이죠.

그래서 "참 가지고 싶다. 저런 남자라고 하면 내 평생을 맡길 수 있어" 라고 했는데, 그런데 점점 더 나이가 들면서 피부가 늘어지고 머리카락이 빠지면서 어두워지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물론 성질머리도 역시 어두워지고 말이죠. 처음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면서, 그래서 정신적 안식처를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판알을 다시 튕긴다는 말이죠.

성경자체가 모든 것을 어둡다고 하는데, 처음의 것을 조명발이었다는 겁니다. 왜 연극을 보면, 처음에는 주위가 다 훤하게 밝다가 연극이 시작되면 어떻게 됩니까? 주위는 점점 어두워지고 한 곳에 집중해서 조명을 비추게 된다는 말이죠. 그곳에 집중하라는 것이죠.

전도서가 바로 그러한데, 그것이 12장의 말씀으로, 즉 "그동안 네가 쳐다본 해와 빛과 달과 별들에게 기대를 걸지 말고, 모든 것이 어두워지기 전에 그렇게 하라" 라는 겁니다. 그것을 1절에서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런 헛된 것에 낙을 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죠.

* 현장에서 주님이 주시는 전체성으로 !!

그러니 전도서에서 말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고 하니, 현장성에 있어서 그 전체와 개인적인 '나' 라는 것이 만나는 장소, 그것을 현장에서 찾으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 현장에 욕심을 내면 안 된다는 말이죠. 너무 기대를 많이 하지 말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내가 미리 예측하고 대처해서 살아야지" 라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 현장에는 누가 계십니까? 주님이 계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현장에 오게 되면, 자기가 미리 예측한 것이 욕심일 수가 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 집에 여호와 증인이 오면 이렇게 해서 물리치리라" 라고, 미리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욕심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장래의 일을 자기가 미리 예측해서 대처하겠다는 것은 욕심이란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 현장에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 처음부터 새로 다시 !!

늦게 오신 분들이 위해서 강의를 새로 다시 하면, 하나님이 오신다는 것은 무엇이 오는 것인고 하니, '전체성'이 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전체성은 포괄성인데, 즉 하나님은 전부를 다 주신다는 말이죠. 하나님은 세상 전체를 보는 안목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겁니다.

이게 성령을 통해서 오는데, 성령은 주님의 마음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주님의 마음으로 오는 전체성, 그게 지금의 이 현장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현장은 우리에게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안목을 제공해준다는 말이죠. 그런 안목으로 다가오니, 우리는 옛 것과 새 것이 구분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몇 시에 누구를 만난다" 라고 하는 그 현장성을 미리 예측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 현장성에서 나온 전체성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개인적으로 미리 준비해놓은, 즉 "나는 바르게 살아야지" 라는 것이 나오게 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바르게 살겠다고 하는 것이 욕심인데, 그게 개인주의라는 겁니다. 잘못된 사고방식이란 것이죠. 쉽게 말해서, "여호와의 증인이 오면 이 성경구절을 가지고 저들을 반박해야지" 라고 하는데, 그것도 역시 개인주의이고 욕심이라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은 헛되고 빛을 잃고 어둡게 된다" 라고 하시는데, 연극이나 영화를 시작할 때처럼 말이죠. 그때는 조명이 다 꺼지고 주위가 어두워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눈도 어두워지고 귀도 어두워지면, 그게 어두워지는 조명발이라고 보시면 된다는 말이죠.

왜 그렇게 됩니까? 이제는 한 곳에 집중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인인데, 즉 개인적 안목은 이제 뜯겨져 나가고 "나는 무엇인가?" 라는 것을 전체에 입각해서, 즉 "나는 이 땅에 왜 태어났으며,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에서 나를 만드셨는가?" 라는, 그런 전체적인 안목을 수용하라는 겁니다.

* 교회는, 죽은 자들의 모임 !!

그래서 전도서는 허무를 이야기하면도 본격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하는고 하니, 본격적으로 눈을 뜨게 하시는데, 즉 "아하, 내가 그동안 헛되고 헛된 것에 대해서 목숨을 걸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말이죠. 이 전도서는 구약인데, 그런데 이게 신약에 오면 더 극단적으로 되는데, 즉 "내 목숨은 없구나" 라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는 산 자들의 모임이 아니고 죽은 자들의 모임이라는 말이죠.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라고 하는데, 이것은 "다른 것은 보이지 않지?" 라는 의미인데, 다른 것은 다 보이지만 십자가는 보이지 않게 성령께서 활동하신다는 겁니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 십자가는 포괄성 !!

그리고 이 십자가는 무엇인고 하니, 그 십자가 안에 전체의 내용이 모두 다 들어있다는 것인데, 즉 '포괄성' 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는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 아니고 있기는 있는데, 그게 바로 십자가라는 말이죠. 즉 자기는 이미 죽었다고 하는 것을 자랑한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런 자랑을 해보지 않았습니까?

그런 죽은 자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뻔뻔하다' 라는 것인데, 그리고 죽은 자는 패션에 대해서 그렇게 민감하지를 않다는 말이죠. 패션은 자기 연출인데, 그런 자기가 그만 죽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남들이 보기에 너무 민망하지 않도록 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 세상이 돌아가는, 그런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미 죽었다는 겁니다. 십자가 안에서 죽은 자라는 말이죠. 이것이 실감나야 하는데, 그런데 왜 그렇지를 못합니까? 그것은 개인적인 안목으로, 즉 자기 영혼의 안식처를 계속해서 추구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서울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교회라는 것은 이미 죽은 자들의 모임인데, 즉 유령들의 모임이라고 보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김 유령, 잘 지냈습니까? 최 유령은 오늘 좀 늦었네요"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 유령들이고 귀신들의 모임이 교회라는 것이죠.

그런 인생을 살면서 남기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자기 무덤이라는 겁니다. 그런 관 위에 자기 이름이 새겨진 천이 덮여있다고 생각해보라는 말이죠. 아마 여러분도 장레식에 많이 가봤지 싶은데, 그게 남이 아니고 자기라고 여겨보라는 겁니다. 자기가 그렇게 관속에 누워있고, 그 위에 자기 이름이 적혀져 있다는 것이죠. 그것을 유교적으로는 '학생(學生)' 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 지구라는 '관(棺)' !!

그러면 그 관을 한 번 넓혀보자는 겁니다. 관의 높이를 700미터, 길이를 25,000KM정도, 그리고 폭을 1,700KM 정도 한다면, 그런데 그렇게만 하면 너무 밋밋하니, 거기에 산을 만들고 강을 만들고 바다를 만들어서 넣어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지구라는 말이죠. 즉 넒은 의미의 죽음의 세계라는 겁니다.

그러한 헛된, 즉 관과도 같은 지구에서 마음껏 뛰놀다보니, 자기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착각을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너무 자유롭다는 겁니다. 관속에서 골프를 치고 야구를 하고 축구를 하니, 자기가 '고(故) 000' 이라는, 그런 죽었다고 하는 인식이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옛 것과 새 것이 합쳐져서, 그런 포괄적인 의미가 십자가에 함유되어있다는 겁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계시인데, 그러니 전도서의 내용이 어디서 완결이 되는고 하니, 십자가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전도서는 다윗언약에 속하는데, 그 언약의 완성은 새 언약, 즉 십자가라는 겁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10장을 보겠는데, 8절과 9절입니다.

(히 10:8)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히 10: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 믿는다는 것은, 제사를 믿는 것 !!

옛날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이미 자기들은 죽은 자라고 하는 흔적들을 제공해왔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제사법' 인데, 그래서 어제 낮 설교시간에 "믿는다는 것은 제사를 믿는 것이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아담의 속성을 입었다는 것 자체가 죄라는 것인데, 그런 죄인이기 때문에, 죽지 아니하면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죠.

참으로 간단한 내용인데, 그런데 이것을 오늘날에는 교회에서도 이야기하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가 교회가 아닌데, 전부가 다들 살아서 펄펄 날뛴다는 말이죠.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데, 교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모두들 앵거리 버드가 되고 마는데(ㅋㅋ), 그렇게 오만 인상을 다 쓰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죽어야만 사는데, 왜냐하면 죄인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산에는 불이 나야하고, 바다에는 풍랑이 일어야 한다는 겁니다. 땅은 흔들려야 하고 말이죠. 세상 이치가 곧 그러한데, 죽어야 산다는 것이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의미라는 겁니다. 죽지 않겠다고 악착같이 버티는 것은 어리석다는 말이죠.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망하게 하는 짓이라는 것이죠.

여기 8절에 보면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라고 하는데, 옛날에 제사제도가, 즉 죽음에 관한 형식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인 9절에 보면,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렇게 첫 것을 폐한다고 할 때, 무엇도 같이 폐해졌다는 겁니까? 열심히 제사를 드렸던 제사장과, 그래서 거기에 의미를 두었는데, 그런데 그게 어떻게 되었다는 겁니까? 제사제도로 말미암아서 구원을 받았다고 자부했던 이스라엘 전체가 모두 같이 폐기처분이 되었다는 것이죠

* '나'와 '주님'과의 교체 !!

그런데 이스라엘이 했던 그 행세를 오늘날 교회가 그대로 따라서 하고 있는데, 즉 "나는 이것을 행했기에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마세요"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주님과 자기가 바꿔치기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 변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십일조를 하겠습니다" 라고 해서, "하지 않아도 됩니다" 라고 하니까, "그러면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계속해서 무엇을 붙들고 있습니까? 정작 자기 자신은 전혀 변동이 없고, 행동을 함에 있어서 그 처신을 약간 자기가 알아서 달리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두고 "인간이 달라졌다" 라고 하는데, 그것은 달리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무엇이 변화, 즉 변동인가고 하니, '나' 라는 개인주의를 '주님' 이라는 전체와 바꿔치기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바꿔치기라고 해도 되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되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이 철없는 것은 죽어서 들어있어야 합니다" 라는 뜻으로, 포괄적인 주님 안에 자기가 죽은 자로 들어간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인데, 그래서 그렇게 된 사람은 오직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의 철없는 것을 자랑한다는 것인데, 그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란 말이죠. 또한 그것이 사도바울이 말한 '십자가 자랑' 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곤란한데 말이죠(ㅋㅋ).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 교인들끼리 친하게 지내는 것은 좋은데 !!

물론 교인들끼리 친하게 지내는 것은 좋은데, 그런데 상대방이 너무 들이댄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만의 공간이 위협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데, 정신적인 은신처가 말이죠. 서로의 필요에 따라서,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같이 힘을 합쳐서, 더 많은 이익을 누리자고 하는 것은 괜찮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빌미로 해서 개인적인 영역에까지 너무 들이대면, 그러면 어떤 위협을 느끼게 된다는 말이죠. 물론 우리교회는 그런 경우가 없는데, 다들 자기밖에 모른다는 겁니다. "어디 근처에 오기만 해봐라" 라고 하면서 벼르고 있다는 말이죠(ㅋㅋ).

그런데 다른 교회에서는 첫째가 돈 문제인데, 물론 둘째도 돈 문제, 셋째도 돈 문제라는 겁니다. 우리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가 그렇다는 말이죠. 자기가 장사를 하고 영업을 하는데 얼마나 보탬이 될 것인지, 그런 것만 생각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인맥을 자꾸만 만들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교회에 몇몇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저는 그것을 80퍼센트 정도로 보는데, 더 솔직히 말하자면 90퍼센트가 넘는다는 말이죠. 그것을 노리고 교회에 나오는데, 즉 "장로님, 혹시 도우미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라는 식이라는 겁니다.

물론 상대방이 필요해서 요구할 때는 괜찮은데, 그럴 때는 교인들끼리 서로 도와주고 하면 좋다는 말이죠. 그런데 상대방이 요구하지 않는데, 자기의 경제적인 이익, 즉 생존을 위해서 상대방에게 접근한다면, 그것은 이미 교회가 아니라는 겁니다. 일종의 장터인데, 즉 정보를 교환해서 자기 이익을 챙기려고 한다는 것이죠.

* 당신은 나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러니 자랑할 것이 없는데, 왜냐하면 개인적인 것이니 말이죠. 그럴 때는 그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지면 되는데, 그러면 상대방이 그만 멈칫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은 나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라는 것인데, 직선적으로 대놓고 바로 물어보라는 말이죠.

"당신이 나에게 접근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라는 것인데, 즉 "그런 식으로 나오면 관계를 그만 끝내겠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그 다음에 또 준비된 답변이 있을 것인데, 아무튼 움찔하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교회는 그런 질문을 날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데, 다들 눈치껏 한다는 말이죠(ㅋㅋ).

* 요까지만 하세요 !!

그런데 이렇게 될 때는, 이런 질문을 날리는 사람도 그만 피해(?)를 입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알면 참 대단한데 말이죠. 여기 "당신은 나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라는 것에서, 그만 들어가지 말아야 하는 단어가 들어갔는데, 포괄적인 의미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것이 말이죠.

그것이 바로 '나를' 이라는 것인데, 그러니 포괄적 의미로서 살아야하는 사람이, 그만 '나' 라고 하는 정신적인 은신처를 지키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 개인주의적 행태가 그만 폭로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즉 "요까지만 하세요"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 답변을 해서 상대방을 물리치는 것은 좋은데, 그런데 거기서 그만 자기도 신자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들통이 났다는 겁니다. 자기가 지키고 싶은 것이 따로 있었음이 말이죠. 그것이 그만 노출되고 말았는데, 그러니 이것을 어쩌면 좋으냐는 겁니다.

* 여전히 변동이 되지 않아 !!

그러니 목사가 아무리 강단에서 복음을 외치고 전해도, 교인들끼리의 실제의 만남에 있어서는 전혀 복음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이죠. 복음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알맹이는 전혀 꿈쩍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변동이 된 겁니까? 변동이 되지 않은 겁니까? 여전히 변동이 되지 않았다는 말이죠.

그러면 상대방이 들이대면,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들이대면 그렇게 질문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않으면 계속해서 들이대면서 밀고 들어온다는 말이죠. 자기 인생에 쳐들어와서 마구 휘젓고 돌아다니는 것을 그냥 둘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당신은 나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라고 단호하고 차갑게 이야기를 하면, 그런데 그것 자체가 이미 문제가 있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해서 달리 대안이 있습니까? 없는데, 또한 문제는 문제대로 그대로 남는다는 겁니다. 왜 달리 대안이 없는고 하니, 이것 외에 다른 질문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도 우리는 이것을 해결해야만 하는데, 하다가보니 성경공부를 하는 것보다도 이런 실천적 문제가 더 재미가 있는데 말이죠. 아무리 복음을 들어도 개인적으로 만나게 되면, 다들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즉 "요기까지만 합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 주님이 준비한 '현장성' !!

그렇다면 이런 상황을 누가 마련했을까요? 주님인데, 전체적인 포괄성을 가지고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오늘 강의제목이 '현장성' 인데, 이런 현장성 속에서 무엇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까? 제가 조금 전에 분명히 그런 말을 했는데,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것이죠. 그러니 현장성에서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런 질문을 통해서 상대방을 물리치는 이 사람의 잘못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이런 질문을 가지고 대처하겠다고 사전에 미리 준비했던 것, 바로 그것이란 말이죠.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왔다고 하면, 그것은 주님의 발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이런 질문을 하면 상대방이 떨어지겠지" 라고 생각을 한다는 것은, 그것은 자기의 정신적 안식처를 지키겠다고 하는 욕심에 해당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전도서에 의하면 내일 일은 주님의 소관인데,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오늘도 헛되고 내일도 헛되다고 하십니까? 그것은 계속해서 우리를 통해서 무엇을 끄집어내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숨길 수 없는, 즉 "내 인생의 가치는 내가 지킨다" 라는 요소를 계속해서 끄집어내기 위해서, 주님 쪽에서 그런 상황을 유발시킨다는 겁니다.

물론 제가 여기서 일부로 잘잘못을 거론했는데, 하지만 성도는 그렇게 잘잘못을 자기가 생각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냥 실험실의 흰 쥐처럼 다루어질 뿐이란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다루어질 때 잘남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 무조건 지켜야한다" 라는 헛된 요소가, 남들을 보고 헛되다고 하지 말고, 자기도 그 헛된 요소, 즉 옛 것에 포함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 '너는 옛 것이야' 라는 것이 들통나야 !!

그런데 히브리서 9장 10절에 보면, 옛 것은 폐기된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옛 것은 폐기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새 것에 포함된 사람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옛 것이 폐기될 때는, 반드시 그 이전에 "너는 옛 것이야" 라는 것이 들통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이 들이댈 때는, 결론적으로 감사해야 한다는 말이죠. 복음, 복음, 그렇게 우기지만, 자기의 진짜 본심은 "이것만큼은 내가 지키리라" 라고 하는, 자기의 이기주의적 심보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게 감사함으로 발각이 된다는 겁니다. 즉 발각이 되면 감사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러한 발상 자체가 바로 새 것이란 것인데, 왜냐하면 구약은 폐기가 되어야 하지만, 그런데 그렇게 폐기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 속에는 장차 올 십자가의 새 언약이 스며들어있다는 겁니다. 즉 옛 언약은 새 언약이 만들어내었다는 말이죠.

* 과거란, 미래에 대해서 앞서서 보여주는 것 !!

어제 설교시간에 주보의 내용을 이야기하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과거가 밀어서 미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미래에 대해서 앞서서 보여주는 것이 과거라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이 있다고 하는 것은 새 것이 준비되어있다는 것 때문에, 그래서 폐기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오늘 전도서에서 이 세상이 어두워진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밝은 세상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 라는 것을 아는 자들에게는, 그렇게 헛되고 헛된 것에 대해서 반기고 감사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헛된 것 속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이 되는데, 거기에 대해서도 감사하게 된다는 말이죠.

* 구원론, 그것이 알고 싶다 !!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정리를 해보면, "지켜야 될 것과 지키지 말아야 될 것",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인간의 행동과 말과 그 모든 것을, 즉 평소에 자기가 하던 것을 다 모으게 되면, 그러면 거기서 무엇이 나오는고 하니, '구원론'이 나온다는 말이죠.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되면, 즉 "만약 당신이 하나님이라면, 그래서 천국에 있다면, 거기에 어떤 기준을 동원시켜서 넣어주겠습니까?" 라고 하면, 그것이 상당히 흥미롭다는 겁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어떤 기준을 말하게 되는데, 즉 "천국에는 적어도 김정은은 가면 안 되고, 트럼프도 곤란하고, 문재인은 괜찮을 것 같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특정인물에 대해서 범주화를 시켜서, 즉 테두리를 만들어서, "이런 인간은 지옥에 가야하고, 저런 인간은 천국에 가면 박수를 친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평소에 자기가 그런 기준으로 살아오고 있음을 노출시킨 것이란 말이죠.

만약에 어떤 여자가 "자식이나 마누라에게 개 같은 짓을 놈은 절대로 지옥에 가야한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평소에 자기가 많이 당했다는 겁니다. 즉 한이 맺혀서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남자가 "여자는 다 지옥에 보내야한다" 라고 하면, 그것은 여자에게 사기를 많이 당한 어리석은 남자라는 말이죠. 그래서 여자라면 한이 맺힌, 그런 남자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구원론' 이라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닌데,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그리고 앞으로 살고 싶은, 자기의 모든 인생관과 가치관을 거기에 모두 다 집대성해서 넣어놓았다는 말이죠. 그런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응축시켜놓은 것이 구원론이고 구원관이라는 겁니다.

* 도를 아십니까?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광화문 사거리에서 아줌마 둘을 만났는데, 그 아줌마 둘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도를 아십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도대체 어떤 도입니까?" 라고 하니, 하는 말이 "당신이 이 도를 알면 당신 생애에서 항상 좋은 일만 생깁니다. 만사형통의 복을 받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말에 넘어갔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그 아줌마 둘을 만나기 이전에 그 사람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었는고 하니, "나는 앞으로 복 받는 쪽으로, 그런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다" 라고 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이죠. 바로 그것을 전도서에는 일거에 없애버리는데, 즉 "인생은 헛되고 헛되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그 사람이 이 전도서를 알 리가 없는데, 설령 교회에 다녔다고 해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자기 것을 쥐고 있다가 아줌마 둘과 아다리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따라갔는데, 즉 낚였다는 말이죠. 어디로 데리고 가는고 하니, 가서 보니 모여서 열심히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는데, 소위 천도재를 드리고 있었다는 겁니다.

* 천도재(薦度齋) !!

이 천도제를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는데,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것을 아예 노골화를 시킨다는 말이죠. 천도제를 드린다고 플랜카드도 붙이고 한다는 겁니다. 천도재가 무엇인고 하니, 이것이 허무와 관련이 있어서 설명을 해드리겠는데 말이죠.

사람이 죽게 되면 혼령이 되는데, 그러면 그것은 민족마다 다 다른데, 사흘만에 간다는 지역도 있고 바로 간다는 곳도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동양은 보통 그 기간이 49일인데, 즉 혼령이 49일 동안 있다가 떠나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서 산 자와 죽은 자를 확연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은 그렇게 구분하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이것은 상식적인 입장에서 다 납득이 되는 이야기인데, 그렇지요? 죽은 자들은 지역도 공동묘지라고, 그렇게 따로 분류한다는 겁니다. 시내 한 가운데 공동묘지를 만들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산 자들이 있는 곳은 따로 있는데, 그래서 죽은 자들은 거기서 보내야 한다는 겁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던 동양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혼령이 죽은 자에 바로 합류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이게 자꾸만 떠돈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한이 맺혀서 말이죠. 그러니 한을 풀지 못하면 떠나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산 자들은 일을 해야하는데, 그런데 제3자인 죽은 자가 한을 풀어달라고 하면서 보채면 곤란하다는 것이죠. "내 다리 내놔라" 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하는 일이 자꾸만 꼬이고 하면, 그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이 자꾸만 시비를 걸어서 그렇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물론 귀신이 자기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고 한을 풀어달라고 그렇게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 한을 풀어서 달래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특히 처녀귀신이나 아이귀신은 아주 지독한데, 한이 많이 맺혔다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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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재(薦度齋) - 죽은 이의 영혼을 극락으로 보내기 위해 치르는 불교의식이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이 49재이고, 그밖에도 100일재·소상·대상 등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7일째 되는 날부터 49일째 되는 날까지 매 7일마다, 그리고 100일째와 1년째, 2년째 되는 날 모두 합하여 10번 명부시왕으로부터 한 번씩 심판을 받는다. 이중에서도 49재를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명부시왕 중 지하의 왕으로 알려진 염라대왕이 심판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불교신자가 아니라도 49재만큼은 꼭 치렀던 것이다.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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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억울하다고 생각하는가?

여기서 사람들의 생각은 무엇인고 하니, 그들은 죽은 자들의 세계가 주류가 아니고, 살아있는 세계가 좋은 세계인데 하지만 죽어서 억울하다고, 그렇게 본다는 겁니다. 왜 이런 관점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평소에 살아가면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여겼기 때문이라 겁니다. 그것을 반영해주고 있다는 말이죠.

전도서와는 정반대인데, 전도서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아무리 살아도 헛되고 헛되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헛된 것이 아니라 전부로 본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전부라는 것이 주님의 전체적인 안목에 의하면 일부가 된다는 겁니다. 전부가 아닌 일부라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어떤 창고에 나방 한 마리가 하루 종일 날아다닌다고 하면, 아까 관 이야기를 했는데, 그 관을 좀 넓혀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그 나방은 아무리 날아다녀도 그 창고 안이 전부라는 말이죠. 그게 나방의 세계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외부에서 이야기를 해주어야 하는데, 즉 "나방아, 너는 헛된 짓을 했다" 라고 말이죠.

* 뚫은 자의 음성이 들렸다면 !!

물론 그것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이 가능한데, 왜냐하면 인간과 하나님 사이는 죄 때문에 가로막혀 있기 때문에, 그게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벽을 뚫을 수 있는 소리라야 들린다는 말이죠. 그런 힘을 가진 분이 아니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죠.

바로 그 '뚫었다' 라는 것은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분의 능력인데, 그 능력이 임해야만 비로소 우리는 "헛되고 헛된 세계에서,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 라는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러한 생각이 든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성령을 받은 자라는 말이죠. 그게 구원을 받은 자라는 것이죠.

그런데 성령을 받지 않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게 되면,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이 세상에 살던 버릇과 습관과 같은, 그러한 환경을 그대로 죽은 자의 세계에도 가지고 가는데, 그렇게 해서서 "이곳도 역시 마찬가지일 거야" 라고 여기게 된다는 겁니다.

* 그들은 천국도 우물이 있어 !!

고대 이집트 사람들의 천국관을 보게 되면, 그들은 천국에 가도 무엇이 있는고 하니, 우물이 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들이 평소에 이 세상에서 사막의 우물 옆에서 살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천국에 가도 최소한의 그런 우물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즉 천국에 가도 이 세상의 모습이 계속해서 이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주특기를 천국에서도 그대로 한 번 살려보겠다는 것인데, 이 세상과의 단절성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고대인들의 구원관이라고만 여기지 말고 오늘날 우리의 속성이라고, 즉 아담의 속성이라고 보면 된다는 말이죠. 아담의 속성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을 떠나면 억울해서 못살겠다고 하는 한 맺힘이란 겁니다. 즉 지극히 세상적인 사고방식으로, 그게 문제라는 말이죠.

* '지켜야 될 것'과 '지키지 말아야 될 것' !!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지켜야 될 것'과 '지키지 말아야 될 것', 그렇게 두 가지로 나누었다는 겁니다. 아직은 기억이 나지요? 이것은 포괄적인 주님의 안목인데, 즉 지켜야 될 것은 새 것에 속하고 지키지 말아야 될 것은 옛 것에 속한다는 말이죠.

히브리서 10장 9절을 다시 보면, 여기에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면 여기 둘 중에서 어느 것이 지키고 어느 것은 지키지 말아야 하는 겁니까? 둘째 것은 지키고, 첫째 것은 지키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히 10: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골로새서 2장을 보겠는데, 13절에서 17절입니다.

(골 2:13)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골 2:14)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 2: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골 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골 2: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 이미 찢어버렸다 !!

13절의 '너희' 라는 것은 죽은 것은 전제로 하는데, 그리고 14절에 "증서를 도말하시고" 라고 하는데, 즉 찢어버린다는 말이죠. 노예증서를 없애버린다는 겁니다. 즉 "이제는 네 인생을 네가 책임질 필요가 없어. 왜냐하면 이미 찢어버렸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네가 왜 이렇게 살았어? 그렇게 살면 안 돼" 라고 지적할 수 있는, 그런 모든 기록이 담겨있는, 우리의 한 평생이 기록되어있는 그 기록부를 다 찢어버리는데, 그러니 이제는 그런 문서가 아예 없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없애버렸다는 것이죠. 이것을 개인적으로 생각하면 안 되고, 포괄적이고도 전체적인 입장에서 보자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자기가 훌륭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전체적인 새로운 환경에 이동하다가 보니, 그것을 변동이라고 했는데 말이죠. 그런 변동이 일어나다가 보니, 새롭게 도달한 곳에서는 자기 죄를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는, 그런 환경으로 이동했다는 겁니다. 강의 제목도 '현장성'에서 '변동'으로 이동을 시켜야 하겠는데 말이죠(ㅋㅋ).

* 욕심부리지마, 부질없어 !!

그러면 그 환경은 누가 친히 만들었습니까? 우리가 만들었습니까? 주님이 친히 만드셨는데,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안다는 겁니다. 그렇게 포괄적인 안목이 왔을 때, 개인적인 것을 지키려고 하는, 즉 정신적인 안식처를 지키려고 하는 시도가 부질없는 짓이란 말이죠. 그래서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다 부질없는 짓이란 말이죠. 주님이 그런 현장을, 즉 난처하게 만드시는 것은 그런 변동을 확인하라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자꾸만 들이대는데, 엄청 귀찮고 짜증이 난다는 말이죠. 그래서 "당신과의 관계를 끊겠습니다" 라고 하는 현장성 속에서, 그런데 그것을 미리 예측하지 말라는 겁니다. 즉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것이죠.

그러니 이렇게 "욕심부리지 말라" 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너는 이미 이동했어" 라는 것인데, 그 누가 들이대던 욕을 하던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이미 새로운 환경에 도달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주님은 왜 그런 사람을 보내고 들이대게 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너는 어떤 환경에 속했는지를 아는가?" 라고, 즉 자기가 속한 환경을 재차 확인하라는 겁니다. 즉 "나는 이미 새 것에 속했구나. 이미 성령을 받았기에, 폐하여질 옛 것이 무엇이며, 새로운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구나" 라는, 그런 차원에서 주님께서 그런 환경을 조성하신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성령이 왔기 때문에 그것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안 되는데, 그래서 고린도전서 2장에서는 그것을 '은혜' 라고 한다는 말이죠. 아직 골로새서 2장의 해석이 끝나지 않았지만, 먼저 고린도전서 2장 12절을 잠시 보겠습니다.

(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 은혜로 주신 것 !!

여기에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하는데, 즉 성령 자체가 선물이라는 겁니다. 성령을 받으려고 애를 써서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사실 우리는 무엇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환경 속에 들어간 것인데,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포괄적이고도 새로운 안목이 열렸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매일같이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제는 소경이 아닌데, 놀랍게도 전체를 본다는 겁니다.

자기가 그렇게 붙잡으려고 했던 영혼의 안식처마저도 조명발에 의한 것이었고, 그래서 그게 다 어두워지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국민건강검진까지 받아가면서 지키려고 했던 건강도 모두 다 폐해지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무너지고 부서져야 한다는 겁니다. 전체적 안목으로 보면 당연한 것인데, 허무한 것이니 그 허무한 값을 보여준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게 무슨 한이 맺히고 하느냐는 겁니다.

* 인간은 한 맺힐 자격이 없어 !!

그런데 조금 전에 이야기한 천도재의 경우에는, 귀신이 한이 맺혔다고 한다는 말이죠. 솔직히 말하면, 자기가 한이 맺혀놓고, 그것을 귀신을 핑계삼아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죽은 것이 억울하다는 것인데, 사실은 귀신이 아니고 자기가 그렇다는 말이죠.

조금 있으면 세월호 천도재를 지내는데, 온 국민을 우울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정치적으로 이용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아무리 기가 막히고 억울하고 어이가 없어도 일종의 해난사고인데, 그것을 가지고 무려 5년이나 끄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죠. 물론 뭔가를 자꾸 숨기려고 하고, 또한 사고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아서 의구심이 들 수도 있겠지만 말이죠.

아무튼 한이 맺혔으니 풀어주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런데 왜 한이 맺힙니까? 욕심이 많아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욕심이 많습니까? 포괄적인 안목이 아니라, 자기 자신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악마의 마음인데, 그러니 온 나라가 그만 악마의 나라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유일하게 빠져나온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인데, 우리는 빠져나오지 못했는데, 그런데 성령이 오니 어떻게 됩니까? 우리를 보고 빠져나왔다고 하신다는 말이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주님께서 모두 다 제거를 시켜주셨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헛된 이 세상에서 옮겨주셨으면, 그런 변동이 일어났으면 그것으로 감사하면 되는데, 그런데 무슨 한이 맺히고 하느냐는 겁니다. 대중가요를 보면 다들 한 맺힌 내용들인데, 자꾸 대중가요를 들먹여서 죄송한데, 한이 아니라 화를 내지 싶다는 말이죠(ㅋㅋ).

* 용두산아, 용두산아 ♬

이왕 말이 나왔으니 하나만 더 소개하면, '용두산 엘레제' 라고, 주현미가 불렀지 싶은데, "용두산아 용두산아 너만은 변치 말자 ♬" 라고 한다는 겁니다. 용두산은 부산에 있는데, 용두산 공원이라고 말이죠. 거기에 유명한 194계단이 있는데, 그 계단에서 변지 말자고 약속했는데, 그런데 그 놈은 지금 도망을 가고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한이 맺혔다는 겁니다.

과거에는 이런 한을 무당이 풀어주고 그리고 절에서 풀어주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도시로 들어온 절, 즉 교회가 그것을 대신한다는 것이죠. "주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은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니 천도재와 예배가 그 차이점이 없어지고 말았는데, 물론 천도재가 예배가 되었으면 참 좋겠지만, 반대로 예배가 그만 천도재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죽은 자기를 달래 달라고 한다는 말이죠.

* 주님의 일은 폐기하는 것 !!

하지만 주님의 일은 폐기하는 것인데, 그래서 골로새서 2장 16절에 보면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부활절이고 뭐고 간에 다 주님께서 찢어버렸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것을 지키게 되면 자기에게 복으로 들어온다고 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옛날의 기존 것을 폐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 고착화하게 되고 강화가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그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그러니 "십일조를 하면 복을 받습니까?" 라는 질문자체가 잘못인데, 그런 것은 장래 일의 그림자라는 말이죠.

히브리서 10장을 다시 보면, 9절과 10절입니다.

(히 10: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히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여기 9절에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뜻은 폐기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어제 그런 설교를 했는데, 하나님의 뜻은 사람을 죽이는 것인데, 즉 유대인을 죽이고 헬라인을 죽이고 모두 다 죽이는 것이란 말이죠. 왜냐하면 죽어야 산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죽으면 되는 겁니까? 그럴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이미 죽었다는 말이죠. 김 귀신, 최 귀신, 박 귀신, 그렇다는 겁니다. 교회는 귀신들의 모임이라는 말이죠. 물론 한 맺힌 귀신들이 아니고 고마워하는 귀신들인데, 죽지 않은 자기를 죽은 자로 간주해주셔서 감사하는, 그런 귀신들이라는 겁니다.

* 단번에 드리심으로 !!

그러고 여기 10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라고 하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즉 첫 것을 폐하고 둘째 것을 세우려고 하는 것인데,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셨다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겁니다.

그러니 어떻게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말이죠. 십자가를 자랑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고 하면, 그것은 성도가 아니고 저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제가 말하는 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런 사람은 성도가 아니라는 말이죠.

* 다시, '지켜야 될 것'과 '지키지 말아야 될 것' !!

아무튼 지킬 것과 지키지 말아야 할 것에 있어서, 지킬 것이 아닌 지키지 말아야 할 것을 먼저 이야기를 해드리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먼저 이야기해서 약간의 분노와 거북함과 나온다고 하면, 그것은 아직 지켜야 할 것이 없어서 그렇다는 말이죠.

지켜야 할 것은 진지한 것이고 엄숙하고 엄정한 것인데, 즉 크다는 겁니다. 심각하다는 말이죠. 그러면 지키지 말아야 할 것은 이와 반대인데, 진지한 것의 반대이니까, 사소한 것, 시시한 것, 아무 것도 아닌 것, 허무한 것, 그런 것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지키지 말아야 하는 것은, 자식, 사업체, 목숨, 교회, 찬란한 역사, 사기를 당한 아픔, 부부관계, 결혼, 국가와 민족, 대충 이 정도만 해도 되겠지요?

이런 것이 다 지키지 말아야 할 것들인데, 그러면 반대로 지켜야하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는데, 그게 곧 '복음' 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일을 하실 때 어떻게 하십니까? 지켜야 할 복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지키지 말아야하는 것들을 지키지 않는 쪽으로 일을 하시는데, 그게 곧 성령님의 일이란 말이죠.

만약 우리가 울고불고 할 때 성령님이 찾아오셨다고 하면, 그러면 성령님은 우리가 그렇게 울고불고 한 이유에 대해서 묻는데, 그러면 우리는 구차한 변명들을 줄줄이 늘어놓는다는 겁니다. 즉 "제가 열심히 해보려고 했는데 사기를 당해서, 그래서 어쩌고저쩌고" 라고 한다는 말이죠.

*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

이것은 저의 이야기가 아니고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오는 것인데, 31절에 보면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아내가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여기라고 하는데, 그리고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고 한다는 말이죠.

(고전 7: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고전 7: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고전 7: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사도바울은 일관되게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지키지 말아야 할 것으로부터 미련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 즉 변동된 사항이 무엇인지, 그 내용을 알려주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이죠.

인간은 자력으로 그것을 놓지 않는데, 자기 자존심과 관련이 있어서 놓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는데, 인간은 죽을 때까지 육을 가지고 있기에, 그 육은 본성을 발휘한다는 말이죠. 즉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큼은 정말 곤란합니다" 라고 하는, 그런 정신적인 안식처가 있다는 겁니다. 뭔가 자기다움을 마지막으로 받쳐줄 수 있는, 그 무엇, 자기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켜줄 수 있는 말이죠.

그것은 자신도 모르는데, 다만 살아가면서 점점 느껴진다는 겁니다. "이것마저 날아가면 나는 번개탄을 피우고 자살하겠다" 라고 하는 그 무엇, 사람마다 그게 다 있다는 말이죠. 그것은 자기 힘으로 어떻게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그런데 성령이 오시게 되면, 놓게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이게 자기의 그 귀한 것이라고 하면, 성령님은 우리의 손가락을 제치는데, 물론 우리는 버티기에 들어가고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비명을 지르는데, 하지만 성령님은 우리의 마지막 남은 손가락마저도 다 제쳐버리는데, 그러면 저절로 놓게 된다는 겁니다.

* 여러분에게는 긴 머리카락이 없습니까?

인도에 세계에서 가장 긴 머리카락을 가진 아가씨가 살고 있었는데, 그런데 어느 날 밤중에 누군가가 와서 그 머리카락을 잘라버렸다는 말이죠. 기네스북에도 올라있는, 20년 동안 고이고이 기른 머리카락을 그만 가위로 싹둑 잘랐다는 겁니다. 물론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치자는 말이죠(ㅋㅋ).

그렇게 되어서, 만약에 그 아가씨가 싱글벙글 나온다고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런데 그 머리카락이 미련이 남아있다고 하면, 얼마 가지 못해서 몸이 시름시름 아프든지 해서 죽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는 그런 머리카락이 자라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 여러분에게는 그런 것이 없느냐는 것이죠. 다들 없다는 표정들인데 말이죠(ㅋㅋ).

* 땀방울이 핏방울이 된, 예수님의 기도 !!

하지만 아무리 없다고 해도 성령께서 환경을 만들어주면, 그것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는 일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미리 보여주셨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는 것인데, 그러니 왜 예수님이 기도를 하시면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었는지를 아시겠지요?

(눅 22: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물론 예수님 본인도 가지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예수님은 성령의 힘으로 기도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기도하시면서, 자기를 아무런 미련도 없이 던질 수 있도록, 그런 마음가짐을 준비할 수 있도록 예수님은 간절히 기도하셨다는 것이죠.

그러니 모든 것은 예수님의 기도덕분인데, 자기 기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 주님의 기도가 우리에게 응답으로서 적용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는데, 그런데 주님의 뜻에 의해서 그렇게 되지 않는 것 자체로 인해서, 이미 다른 세계에, 즉 천국에 살고 있다고 하는 변동, 그것을 확인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에게 제공된다는 겁니다.

* 성령의 열매는 십자가의 반복 !!

그것을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 라고 하는데,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말이죠. 그러면서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라고 하는데, 이게 성령의 열매와 짝이 되어서 나온다는 겁니다. 즉 십자가의 반복인데, 성령을 받은 자는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죠.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 천국의 예비군 !!

군에서 제대를 하고 나면 몇 년 동안은 예비군 훈련을 받으라고 통보가 계속해서 나오는데, 그것은 제대를 한 예비군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예비군이 아니라면 통지서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누가 훈련을 받으러 가고 싶어서 갑니까? 그것은 자기 뜻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그렇게 통보하시는 것도, 우리가 천국의 예비군이라는 것을, 아니 천국의 백성이란 것을 분명히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천국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서 이미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인데, 사도들이 그러했는데 말이죠. 그게 바로 '변동' 이라는 겁니다.

* 너희는 이미 죽었고 !!

십일조를 하고 말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복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모든 욕심은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있다고 여기고 버티는 것 때문인데, 그런데 성령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너는 이미 죽었고, 너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라는 것을 깨우쳐주시는 행복, 그것이 바로 축복이라는 겁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천도재를 지내는 교회에서 말하는 축복이 아니고, 오히려 그런 것은 악마의 유혹인데, 그런데 그것을 안다는 것은, 그것은 결코 우리의 솜씨가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가 아무리 성경공부를 해도, 우리의 능력으로는 알 수 없다는 겁니다. 다만 성령께서 알려주셔서 우리가 안다는 말이죠.

* 적용을 시켜보면 !!

그러면 이제 이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시켜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매일같이 거울을 보고 일터로 나가는데, 그러면서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한지 모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오늘도 내가 일이 잘 되야 할 텐데" 라고 하면서 나가니 말이죠. 그러면 TV에서는 얄밉게도 "잘 될 턱이 있나?" 라고 한다는 겁니다(ㅋㅋ).

그러니 아무리 성경공부를 하고 복음을 들어도, 그것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이 자기 일이기 때문에, 그래서 잘 되기를 바란다는 말이죠. 자기 아이가 시험을 치면 백점을 받기를 원하고, 계약을 앞두고 있으면 원만하게 체결되기를 원하는데, 그래서 "잘 되야 할 텐데" 라는 것이 그야말로 서슴없이 나온다는 겁니다. 변동되기 이전의 모습이 말이죠.

다시 말해서, 주님이 폐기하신 그 요소가, 그야말로 폐기처분이 되어야만 하는 것들이, 여전히 본래의 마음인양 행세를 하면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 현장성에서 주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밖에 없는데, 즉 "그러니 욕심을 내지 말라" 라는 것인데,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해서 사망에 이른다는 말이죠.

현재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아야지, "이번 일만 잘되면 부자가 될 거야. 스타가 될 거야" 라고, 미리 예측하지 말라는 겁니다. 현장성에 계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인데, 십자가를 지신 그 주님이 이미 우리의 일을 틀어쥐는 그 가운데서,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고 놓쳤던 감사와 기쁨을 허용하신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의 힘으로 무슨 변동이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저 하는 일이 잘 되면 좋고, 건강하면 좋고, 남들이 박수를 쳐주면 좋고, 그렇게 남들에게 인정을 받으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우리의 본성, 물론 그것이 헛된 것임을 저희들도 알고 있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현장성 가운데 성령께서 오셔서, 모든 것이 오직 주님의 뜻대로만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9,4,21 오후 9시에 마침.

오늘이 부활절인데, 변동의 기쁨을 맛보게 하소서 !!
 첨부파일 : 19대구강의('전도서'속의그리스도)55-변동.hwp (60.2K), Dow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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