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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1 13:10:36 조회 : 83         
[19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56 - 사막 이름 : 구득영(IP:183.102.224.80)
[19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56 - 사막

19,06,03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30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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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해를 봐라. 정말 눈부시지? 참 대단하지? - 예, 해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해를 섬기겠습니다" 라고 해서, 이집트는 B.C 3,000년경부터 이 태양신을 섬겼는데, 이 태양신이 유일신입니다. 그래서 이집트는 유일신 사상인데, 그렇게 태양신을 섬기는 풍습이 유럽문명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지중해의 그레타 섬까지 이어진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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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해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

여기에 나오는 "하늘의 해를 봐라. 정말 눈부시지? 참 대단하지? - 예, 해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해를 섬기겠습니다" 라고 하는 대화내용이 참으로 단순한데, 그러면 우리는 그 단순한 것부터 출발해보자는 겁니다. 우리 자신을 어린 아이라고 생각하고, 그러면서 이 세상을 한 번 바라보자는 말이죠.

어린 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다 신기한데, 해와 달과 별이 있다는 것도 다 신기하다는 겁니다. 어른들은 왜 그렇지 않은고 하니, 거기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런 신기함이 고대인들에게는, 여기 나오는 B.C 3,000년경의 애굽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는 겁니다.

두뇌의 발달이라고 할까요? 그러한 정신발달이 고대인들은 굉장히 단순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니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해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해를 섬기겠습니다" 라는 대목인데, 그래서 그들의 신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태양신' 이라는 겁니다.

모세의 10가지 재앙 중에서 제일 마지막이 맏이를 죽이는 것이었는데, 즉 대를 끊어버린다는 말이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맏이를 없애버리겠다는 것이죠. 그런데 바로 그 앞에 무슨 재앙이 있었는고 하니, 흑암의 재앙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여기에 있는 재앙들은 다 신과 관련이 있다는 말이죠.

(출 10: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들어서 애굽 땅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곧 더듬을만한 흑암이리라
(출 10:22)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매 캄캄한 흑암이 삼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출 10:23) 그 동안은 사람 사람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이스라엘 자손의 거하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더라

* '다신교'의 시대 !!

그런데 '신' 이라는 것은 외떨어진 곳에서, 즉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따로 떨어져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인간들은 "신 없이는 살 수 없다" 라고 하는데, 즉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조치는 모두 다 하자" 라는 것인데, 그러면 인간들이 무엇을 하면 됩니까? 신이 아니라 신들을 섬기면 되는데, 그것을 '다신교'의 시대라고 하는데 말이죠.

이것을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오늘날 절에 가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이사도 손이 없는 날에 해야하고, 궁합도 봐야하는데, 그러면 이사를 가는 신과 궁합을 보는 신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르다는 겁니다. 그리고 조상신도 섬기는데, 그래서 예수를 믿지 않는 집에 시집을 가면 그 며느리는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말이죠.

결혼을 하기 전에는 주일학교 교사도 하고 성가대도 하고, 그래서 믿음이 좋은 줄로 알았는데, 막상 결혼을 하고 나니 제사를 지낸다고 바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제사를 왜 드립니까? 그것은 조상을 위해서가 아니고, 드리지 않으면 자기에게 손해가 된다는 말이죠. 조상을 섬기지 않으면 자기와 자기 자손에게 좋지 않을 일이 생길 가능성이 많다는 겁니다.

*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는?

조금 전에 "우리는 해가 없이 살 수 없습니다" 라고 했는데, 인간에게 그것은 하나의 공식인데, 그것은 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살 수 없으면 견딜 수가 없다는 말이죠. 이게 고대 이집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믿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아니고, 바로 우리 이야기라는 겁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는 이유를, 예수를 믿는 이유를 알아보자는 것이죠.

복잡하게 살지 말고 단순하게 가자는 것인데, 물론 교회에 나와도 말씀은 모르고 그냥 단순하게 살아가는데, 즉 "예수 믿고 복 받자" 라는 겁니다. 그래서 바로 그 단순한 것이 문제임을 지적하고 있다는 말이죠. "무엇 무엇 없이 살아갈 수가 없다" 라고, 즉 자기가 사는 것이 우선이란 겁니다. 해가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해가 없으면 자기가 살아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애굽 사람들도 하나의 신만 섬긴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신을 섬겼는데, 즉 곡식의 신도 있고 가축의 신도 있는데, 그런데 그런 신들 중에서 최고의 신은 태양신이란 겁니다. 산에 가면 산신령이 있고, 그리고 숲에 가면 숲의 정령이 있고, 이것은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일본에도 있고, 북유럽과 전 세계에 다 있다는 겁니다.

* 한라산이 아닌 지리산으로 !!

그래서 무당들이 어디에 가서 신을 받는고 하니, 산에 가는데, 그것도 우리동네의 이런 시시한 산이 아니고 5대 명산에 간다는 말이죠. 한라산은 대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잘 가지를 않고(ㅋㅋ), 명산의 깊은 산골짜기에 가는데, 그래서 촛불을 피우고 하다가 산불을 내고 한다는 겁니다. 태백산, 지리산, 그리고 계룡산이 여기에 속한다는 말이죠.

그런 신들이 있는데, 하지만 최고의 신은 나이키가 아니고 태양신이란 겁니다(ㅋㅋ). 그 정도의 논리구조는 고대의 애굽 사람들도 알았는데, 나무가 자라나는 이유가 태양 때문이라는 것 정도는 안다는 말이죠. 논과 밭에 심은 곡물도 결국 누가 주관하는고 하니, 결국은 태양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신들 중에서 오야붕은 태양신이라는 것이죠.

백성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러니 왕이 왕 노릇을 제대로 하려면, 요즘도 그렇지만 그때도 여론이 중요했다는 겁니다.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반란이 생길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민중들이 조상신을 의식하고 태양신을 의식하니, 왕은 자기 자신을 무엇으로 등극시켜야 합니까? 태양이 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종범은 바람의 아들이었는데, 바로 왕은 태양의 아들이라는 말이죠.

* 바로 왕과 아브라함 !!

물론 그 바로 왕이 성경에 없으면 무시해도 괜찮은데, 성경에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도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대결상태로 나오는데, 애굽의 바로 왕이 등장하는 것이 아브라함 때부터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움직이는데, 그런데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가니 바로 왕이 그의 아내를 건드리려고 했다는 말이죠.

바로 왕은 자기가 태양의 아들이기에 그 누구를 건드려도 상관이 없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그 일로 말미암아서 난리가 났다는 겁니다. 물론 바로 왕은 처음에 그 이유를 전혀 몰랐는데, 그 원인을 추적해보니 그 여자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았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브라함을 불러서 조사를 하게 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그의 여동생이 아니라 마누라였다는 겁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바로 왕은 엄청난 재물을 아브라함에게 실어서 보내게 된다는 말이죠. 그때까지만 해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약속의 땅에 왔지만 변변한 재산이 없었는데, 그 일로 말미암아서 엄청난 재산을 모으게 된다는 겁니다.

그 당시 재산은 가축이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기근을 만들어서 그 당시의 재벌인 애굽의 바로 왕을 잠시 거쳐서 오게 함으로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부자가 되게 하셨다는 겁니다. 마누라는 마누라대로 챙기고 재산은 재산대로 챙기고, 일이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죠.

(창 12:14)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창 12:15)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창 12:16)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창 12: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창 12:18)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창 12:19)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창 12:20)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이렇게 해서 재산이 생기면 그 다음에는 자연히 종이 생기는데, 그 종들이 바로 318명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그들과 같이 무엇을 합니까? 소돔과 고모라의 다섯 왕들과 전쟁을 해서, 포로로 잡혀있던 자기 조카인 롯을 구출하게 된다는 겁니다.

* 하나님의 약속과 멜기세덱 !!

여기서 아브라함이 획득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전쟁에서 이긴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게 문제가 아니고, 자기를 찾아왔던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와 더불어서 일을 할 뿐만이 아니라, 자기와 더불어 또 하나의 '멜기세덱' 이라는 분을 등장시킨다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언약은 자기가 알아서 챙긴다는 표시로서, 거룩한 제사장이자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나게 하신다는 말이죠.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은 이게 자기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종사하게 된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 그것을 자각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아브라함이 한 체험이라는 말이죠.

(창 14:14)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십팔 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창 14:15)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창 14:16)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왔더라
(창 14: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창 14: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창 14: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창 14: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예를 들어서, 자기 잘났다고 까불던 부잣집 아들이 월남 전쟁에 갔다오고 난 다음에 하나님을 만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자기가 천하의 돗대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런데 베트콩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죽을 고생을 다 하고 난 다음에는, "과연 나는 누구인가?" 라고, 그것을 자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겁니다. 즉 "나는 나를 위해서 있는 존재가 아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죠.

* 약속의 하나님과 만남이 없다고 하면, '꽝' !!

이렇게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여정을 소개한다는 것은, 앞으로 모든 성도의 여정이 누구를 닮는다는 겁니까? 바로 아브라함을 닮는다는 것인데,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약속의 하나님과 만남이 없다고 하면, 그 사람은 약속의 나라에 갈 수 없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원칙이 세워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만남' 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아브라함의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인데, 우리가 얼굴을 좀 뜯어고쳐도 주의 일이란 겁니다(ㅋㅋ). 모든 것이 그러한데, 자기가 했다고 하면 곤란하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 혼자 사는 버릇이 들어서, 그것 때문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기서 이사야서 1장을 보겠는데, 2절과 3절입니다.

(사 1: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사 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여기 2절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라고 하는데, 그 다음에는 뭐라고 합니까? 3절에서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혼자 사는 것에 너무나 익숙한데, 물론 옛날에도 그러했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 아무리 하나님을 불러도 모두 다 건성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오면 빨리 끝내고 장사를 하고 싶어했다는 말이죠. 그들이 비록 애굽에서 나왔지만, 애굽 사람들의 의식이나 거기서 나온 자들의 의식이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꼭 닮아있다는 겁니다.

* 혼자 바르게 사는 것이 곧 '죄' !!

그렇게 혼자 사는 것이 그만 버릇이 되고 말았는데, 물론 이것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다음에 "신처럼 되리라" 라는 원칙에 준하다가보니까, 즉 악마의 하수인이 되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하면, 혼자 살면서 깨끗하게 바르게 살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이것은 제가 여러분에게 던지는 질문인데, "혼자 살아도 죄를 짓지 않고 바르게 살면 되지 않겠는가?" 라는 겁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도 저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분들이 많은데,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언급할 필요도 없고 말이죠. 교회에 다니지 않더라도 착하고 바르게, 깨끗한 인품으로 살면 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들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보다도 오히려 더 낫다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죄가 무엇인고 하니, 반듯하게 살지 않는 것이 죄가 아니고, 혼자 사는 것이 죄라는 겁니다. 요즘 '혼밥'이 유행인데, 바로 그것이 문제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는 피조물인데, 피조물은 혼자 살 권리가 없다는 겁니다. 주님이 그렇게 방치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 나는 너를 이용하겠어 !!

현대인들은 자기 혼자 살고 싶어서 환장을 했는데, 모든 돌아가는 것이 다 그러한데, 자기 편한 것이 최고라는 겁니다. 그렇게 혼자 살고 싶다는 심보를 가지고 사회에 나가서 대인관계를 가진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단 하나의 경우뿐이란 말이죠. 그게 무엇일까요?

"나는 혼자 살겠다" 라는 것을 유지하면서도 상대방을 만난다는 것은, 그것은 "나는 너를 이용하겠어" 라는 것뿐이라는 말이죠. 물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상대방은 화를 내겠지만, 하지만 모두가 다 그렇다는 겁니다. 그 상대방도 입장이 바뀌면 역시 마찬가지라는 말이죠.

다시 질문에 들어가겠는데, "부부는 같이 산다" 라고 한다면, 그 말이 맞습니까? 틀렸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혼자 산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같이 삽니까?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이용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혼자 살면서 늙어가면 너무 외로우니까, 그래서 같이 산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내 생활에 필요한 비용과 사랑을 받고 싶은 것, 그것을 저 남자가 채워줄 것이다" 라고 하는 마음에서, 그래서 시집을 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남자도 같이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을, 그때는 철이 없어서 미처 몰랐다는 말이죠. 모양새는 같이 사는데, 그런데 따로 산다는 겁니다.

그러면 끝까지 따로 살지만 같이 살면 되는데, 뒤늦게 '졸혼'을 한다고 하는데, 사실은 처음부터 졸혼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졸혼은 결혼을 졸업한다는 의미인데, 그냥 살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인간은 혼자 사는 것을 악마로부터 배우고 있다는 겁니다. 매일같이 설득을 당하고 있는데, 즉 "남의 일에 신경을 쓰지마. 너는 너야" 라는 것이죠. 이게 유명한 공식인데, 즉 "나는 나다!" 라는 겁니다.

* 아이 엠 아이언맨 !!

이 공식을 우리가 성경에서 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두 군데인데 말이죠. 첫 번째가 출애굽기 3장에 보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나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즉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리고 두 번째는 이사야서에 나오는데, 두로 왕이 "나는 나다. 나 위에 더 높은 자는 없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녹취구 - 이 성경구절은 찾지를 못했음)

(출 3:13)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

이사야서 14장에 계명성이 나오는데, 그것을 루시퍼, 즉 악마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게 하늘에 있다가 떨어졌다는 겁니다. 그 루시퍼가 "나는 나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악마가 "나는 나다" 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간섭하지 말라" 라는 것인데, 즉 "나의 고유영역이 따로 있는데, 그 영역에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함부로 침투하지 마세요"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사 14: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녹취자 - 이사야서 14장의 계명성을 한국교회는 초창기부터 루시퍼로 받아들였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이 계명성은 문자 그대로 보면 '헬렐 벤 솨하르', 즉 'Morning Star' 라는 의미인데, 그래서 한글개역성경에서도 '아침의 아들(啓明星)'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요즘은 이게 루시퍼가 아닌 '바벨론 왕' 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또한 루시퍼도 그냥 금성(비너스)으로 보기도합니다.)

* 인간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방금 이야기한 것으로 살펴보면 원인은 간단한데, 주님이 자기 허락도 없이 자기에게 침투했다는 말이죠. 그래서 인간은 자기 본성을 유감 없이 발휘했는데, 즉 "나가소!" 라고 했다는 겁니다. 아무리 주님이라고 해도, 자기 인생은 자기가 관리하기 때문에 어서 나가 달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이사야서 1장 2절과 3절인데, 주님이 치고 들어오셨다는 겁니다. 즉 "너의 죄는 너 혼자 반듯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어제 설교시간에는 '근본 악' 이라고 했는데 말이죠. 그것은 무엇인고 하니, "내 안에 내가 있다" 라는 겁니다. 자기 안에는 자기를 지켜주는 강력한 것들이 있는데, 그런 영역을 만들어간다는 말이죠.

* '나 안의 나', '예수 안' !!

하지만 사도바울이 말하는 창세 전의 예정된 비밀은 무엇인고 하니, 그러한 '나 안의 나' 라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 이란 겁니다. 그러면 이것과 이사야서 1장 2절과 3절을 연결시켜보면, 그게 연결이 된다는 말이죠. 우리는 피조물인데, 그 값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오히려 어설픈 창조자 노릇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죠.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런데 이것을 모두가 다 하고 있으니, 그만 대세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애굽의 바로 왕과 같은 고대인들이 순수했는데, 그들은 국가적으로 태양신을 섬겼다는 말이죠. 오히려 이슬람교의 모슬렘들이 순진한데,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무조건 알라신을 섬긴다는 겁니다. 그 어떤 일을 해도 알라의 뜻이 된다는 말이죠. 테러를 하든 무엇을 하든 알라의 뜻이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것을 '신의 주권사상' 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닮은 것이 정통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겁니다. 그것도 역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하는데, 알라를 섬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죠. 하지만 신의 주권이 창세 전의 뜻이 아닌데, 그러면 주님의 창세 전의 뜻은 과연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예수님 중심이다" 라는 것인데, 그게 숨겨진 주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즉 출생의 비밀이 없는 사람은 복음을 알 수 없다는 말이죠. 설령 삼켰다고 할지라도 토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자기 몸에 맞지 않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악마이고 저쪽은 주님이란 말이죠. 악마와 주님은 함께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을 토하게 된다는 말이죠.

* 신은 저쪽에 계시고 !!

신은 저쪽에 계시고, 즉 신은 외진 곳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가 신을 섬겨줄 테니, 신은 외진 곳에만 있고 자기 영역은 침범하지 말아달라는 것이죠. 자기가 알아서 열심히 섬겨드리겠다는 것인데, 그게 바로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주류신학인데, 거기에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많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이나 이슬람이나 과연 무엇이 다르냐는 겁니다. 그들이 신에게 어떻게 절을 합니까? 엉덩이를 들고 메카를 향해서, 그게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그들의 최종성지인데, 금요일에 종이 울리면 그곳을 향해서 전 세계에 있던 모슬렘들이 모두가 절을 한다는 겁니다.

제가 이스라엘을 여행하다가 그런 광경을 실제로 보았는데, 모들들 그렇게 엉덩이를 들고 메카를 향해서 절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들은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아랍인들인데, 제가 보기에는 그야말로 모두들 병원에 있어야할 환자들라는 겁니다. 그들의 알라신은 함께 있는 것이 아닌데, 떨어진 곳에, 즉 외진 곳에 있다는 말이죠.

* 예수 안에 함께 있다 !!

그런데 성경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 안에 함께 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러한 이야기가 조금은 낯설게 들립니까? 교회에 오면 주님과 함께 있는 것 같은데, 그런데 사회에 나가면 그만 어떻게 됩니까? 다들 각자 각자 살아가는데, 즉 혼자라는 말이죠.

이사야서 1장 3절을 다시 보면,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나 여호와가 너희를 직접 키웠다. 그런데 어떻게 너희들은 나를 모르고, 너희 자신밖에 모르는가?" 라는, 그런 뜻이라는 겁니다. 그게 인간이라는 말이죠.

(사 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헌금을 하면 헌금을 했다고 티를 내고, 또 기도를 하면 기도를 했다고 티를 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자기 안에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 무엇을 하더라도 후딱 자기에게 소환이 된다는 말이죠. 자기 공로, 자기 착함, 자기 경건, 자기 거룩인데, 그렇게 해서 남들과 비교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전부다 자기에게 소환이 된다는 것이죠.

* 아브라함의 내부로 침투해온 하나님 !!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여정은 어떻게 정리될 수 있는고 하니, 저 멀리에 있던 신이 이제는 아브라함 가까이, 아니 아브라함의 내부로 침투해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기 이름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 존재 자체가 바뀌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야곱은 이스라엘로 바뀌는데, 야곱은 사기꾼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야곱이 사기꾼이 되고 싶어서 되었습니까? 그게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말이죠. 형을 속이고 싶어서 속인 것이 아닌데, 쌍둥이 형을 만남으로서 속이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야곱은 변명거리와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게 야곱의 본질이라는 말이죠. 야곱의 본질이 바로 우리의 본질인데, 즉 "너희는 나를 속였다" 라는 겁니다.

* 인간에게 패배를 당하는 신으로 오신 주님 !!

그런데 그 주님이 거룩한 분이 아닌 이제는 인간에게 패배를 당하는 신으로 와버리니, 그것은 인간을 향한 주님의 속임수라는 말이죠. 바리새인들은 거룩한 하나님을 생각했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도 변화산에서 빛나는 예수님을 보았는데, 그러자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좋사오니" 라고 했다는 말이죠.

하지만 예수님의 진수는 해와 같이 빛나는 것에 있는 게 아니란 겁니다. 진짜 예수님을 믿는 순간은 어떤 순간인고 하니, 멋진 예수님을 만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산상설교를 들었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물 위를 걸었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병 고침을 받았다고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라,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죽음, 즉 십자가와 마주쳐야 한다는 겁니다. 어린양의 모습을 한 그분과 일생에 있어서 한 번은 마주쳐야 한다는 말이죠.

* 저렇게 잘난 분이 왜 죽었는가?

다시 말해서, "저렇게 잘난 분이 왜 죽었는가?" 라고, 즉 "하나님은 왜 죽었는가?" 라는 것인데, 거기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럴 때 주님도 알지만, 그 순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게 되는데, "나는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구나" 라고 말이죠.

쓰레기라는 말도 과분한데, 그야말로 쓰레기 수준도 안 된다는 겁니다. 쓰레기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냥 냄새가 날 뿐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강도인데, 그래서 십자가 옆에 두 명의 강도가 달렸다는 말이죠. 우리가 이것을 실감해야 하는데, 그것은 성령이 오면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막 사세요!"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막 살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은, 자기 혼자서 거룩하고 경건하려고, 그런 시도를 하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십자가 앞에서는 그 어떤 짓도 막 사는 것인데, 심지어 회개하는 것도 죄라는 겁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 것도 죄라는 것이죠.

이런 이야기는 자기가 혼자 도를 닦으면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이전보다 우수한 존재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쳐들어온 십자가 피 앞에서 "제가 믿습니다. 회개를 했습니다" 라고 하는 것, 그런 말버릇조차도, 그게 구원이 되는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죠.

제가 어제 누가 부탁을 해서 어느 목사의 동영상을 보았는데, 그분은 계속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강의한다는 겁니다. 50분 설교에서 45분을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하는데, 성경번역이 잘못되었다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게 무슨 설교입니까? 누군가를 가르치려고 하는데, 속임수라는 겁니다.

* 태양신과 광야신 !!

다시 교재 처음으로 돌아와서, "하늘의 해를 봐라. 정말 눈부시지? 참 대단하지? - 예, 해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해를 섬기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애굽의 신들은, 자기가 장래에 잘 되기 위해서, 자기 욕망의 만족을 얻기 위해서 필요했다는 것이죠.

그러면 애굽은 무슨 신이었습니까? 태양신이었는데, 이제 오늘 강의의 주제에 들어가겠는데, 그러면 그 태양신과 대비되는 것이 무슨 신이고 하니, '광야신' 이라는 겁니다. 그분이 곧 여호와 하나님인데, 태양에 속해있던 자들을 광야로 보내버린다는 말이죠.

태양은 저 멀리 떨어진 곳에 있기 때문에 관찰의 대상이 되지만, 그런데 광야란 것은, 광야에서 함께 동행하는 신은 환경과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합체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인들은 하나님께서 조성하는 환경의 일부가 되고 마는데, 그러니 동떨어져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낮에 영상 40도로 올라가면서 자기가 피부가 타는데, 그게 관찰이냐는 겁니다. 광야의 일부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을 쳤는데, 하지만 그들이 놓친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살기 힘든 환경에 누가 동행하고 있었는고 하니, 하나님도 역시 함께 하셨다는 말이죠. 그들은 그것을 놓쳤다는 겁니다.

* 여호와 하나님은 결코 멋있지 않아 !!

그러니 여호와 하나님은 결코 멋있는 신이 아닌데, 우리가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 살아가는데, 그런데 그 고생 속에 누가 동참을 하셨는고 하니, 주님도 함께 고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놓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저기 계시는 멋있는 하나님을 섬기면 되는 것이 아니고, 기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모두들 고생을 하는데, 그러면 당연히 터져 나오는 불평과 불만들이 있게 되는데, 그런데 그것을 주님이 조성하셨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해놓고 주님께서는 혼자 빠지시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함께 동행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광야신' 이라는 말이죠.

* 방탄소년단(BTS) !!

방탄소년단(BTS)의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는데, "사막을 건너지 않으면 바다에 도달할 수 없다" 라고 말이죠. 그런데 출애굽기는 무엇인고 하니, "사막을 건너지 않으면 약속의 땅에 이를 수 없다" 라는 겁니다. 이것을 광야의 백성들은 어떻게 생각했는고 하니, "고생이 지나고 나면 낙이 올 것이다" 라고 여겼다는 말이죠. 즉 '고진감래(苦盡甘來)' 라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광야의 죽음에 동참하지 않으면 진짜 죽음에 동참할 수 없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 어디에도 삶은 없는데, 알다시피 약속의 땅은 이방인들이 살던 곳인데, 그런데 거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게 되면, 그들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라짐' 이라는 겁니다.

쉽게 설명하면, 이렇게 약속의 땅이 있으면 그 주위에는 높은 장벽이 세워져있다고 보시면 된다는 말이죠. 이 장벽은 인간의 힘으로 넘을 수 없는데, 그것은 홍해나 요단강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요단강의 경우에, 건너려고 해도 홍수가 나서 도저히 건널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건너지 못하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놓고, 주님께서는 건너게 하셨다는 겁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경우에는, 그 둘이 12명의 정탐꾼의 일원이 되어서 가나안 땅을 미리 정탐했는데, 10명의 정탐꾼들은 안 된다고 했고, 그런데 그 둘은 된다고 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누구의 말이 맞습니까? 가나안의 거민들은 쉽게 정복이 되는 자들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여리고 성의 경우에도, 그 성이 허술한 성입니까? 보초는 졸고 있고 말이죠. 전혀 그렇지가 않은데, 쉽게 무너지는 성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공격을 하는 자들은 적을 공격하기 이전에 어떻게 해야합니까? 적들이 아닌 먼저 자기 자신을 죽여야 하는데,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 자신을 주님이 오셔서 죽여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라는 말이죠.

죽은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데, 그게 바로 십자가이고, 그게 믿음이라는 겁니다. 자기는 죽은 자인데, 그런데 주님 덕분으로, 자기가 영생을 얻는 게 아니라, 주님의 영생이 자기에게 확산이 된다는 것이죠. 자기 생명이 아닌 주님의 생명인데, 그 생명이 쓰레기보다도 못한 우리 자신에게 흘러 넘친다는 겁니다.

* 흘러 넘치는 생명의 물 !!

에스겔서 47장에 보면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오는데, 처음에는 적게 나오다가 나중에는 헤엄칠 정도가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부흥사들이 헌금을 하는 목요일에 많이 써먹는 구절인데, 예수를 믿으면 복이 흘러 넘친다고 하면서 말이죠. 물론 엉터리 해석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 넘치는 것인데, 그런데 이렇게 물이 넘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평소에는 "내 헤어스타일이 어때?" 라고 하다가, 그 관심이 미장원에 갔다온 자기 머리까지 넘쳐나는 물이 관심사가 된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생명이 자기를 관리하는 것보다 더 우위에 서게 된다는 말이죠. 이것을 생명의 넘침, 성령의 넘침, 사랑의 넘침,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겔 47:1)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겔 47:2)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겔 47:3)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겔 47:4)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겔 47:5)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 주님의 '넘침' !!

주님의 사랑을 같은 두 글자로 '넘침' 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로마서 5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우리가 죄를 지었지만, 그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그 은혜의 넘침, 바로 그것이라는 겁니다. 그런 관계, 그 상태가 바로 '의' 라는 것이죠.

(롬 5: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비록 우리가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의 용서하심은 그것을 능가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보다도 주님의 사죄의 능력이 더 큰데,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주님의 용서를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 어디서 그 어떤 죄를 지어도 말이죠.

그것은 우리 좋아라고, 우리를 천국에 보내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주님 되심을 보여주는 본질인데, 쓰레기보다도 못한 우리를 통해서 더욱 더 넘치게 드러내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사함을 많이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어떤 동네에 죄 많은 여인이 있었는데, 그 여인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면서 향유를 부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비아냥거린다는 것이죠. 그 비싼 향유를 발에 붓는다고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흘러 넘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의 용서하심의 능력이라는 겁니다.

(눅 7:44)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눅 7: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눅 7: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눅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눅 7: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바로 그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서, 태양신을 멀리에서 관찰하고 있던 그들로 하여금, 광야, 즉 사막에 가게 한다는 말이죠. 방탄소년단(BTS)의 말대로, 사막을 통과하지 않으면 바다에 도착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막은 관찰하고 말고 할 것이 없는데, 왜냐하면 자기 몸이 그 높은 열기로 인해서 죽을 지경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일종의 고문인데, 물론 사막에 도착하기 이전까진 자기 자만심으로 가득한데, "내 인생을 내가 알아서 산다" 라고 말이죠. 그런데 사막에 도착하게 되면, 어떻게 자기가 해볼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는 것마다 모두 부도가 나고 실패로 끝난다는 말이죠. 결혼이든 자식농사든 간에 개판인데, 그야말로 답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자기 뜻이 아니고 주님의 뜻이라는 말이죠.

* 무계획이 계획이다 !!

'기생충' 이라는 영화를 보면, 송강호가 "아버지, 계획이 무엇입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자 아버지는 "무계획이 계획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계획을 세워도 계획대로 되지를 않는다는 것인데, 그러니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실망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쩝', '쩝' 입맛을 다시는 대목이 나온다는 겁니다. 이 영화가 현대인들의 좌절된 인생을 다루었다고 하는데, 계획을 세워봐야 소용이 없는데, 그러니 무계획이 최고라는 것이죠.

사막, 즉 광야가 바로 그러한 곳인데, 계획을 세워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자기 계획, 자기 솜씨, 그런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그러니 이것이 입체적으로 전부가 집단화가 된다는 말이죠. 자기 의사와는 상관이 없이 한 통속이 되었다는 겁니다.

마치 군대생활과도 같은데, 자기 집안에서는 귀한 자식이지만, 그러나 군에 가게 되면 동일한 유니폼을 입고 생활하게 되는데, 그러면 자기 개성은 없다는 말이죠. 훈련소에서 "지금 제일 보고 싶은 분이 누구입니까?" 라고 하면, 모두가 "어머니!"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눈에 눈물이 고인다는 겁니다.

* 광야신은, 인간을 무장해제 시켜 !!

아무튼 광야라고 하는 곳은, 즉 광야신은 인간을 무장해제를 시킨다는 말이죠. 일단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을 수밖에는 없는데, 그러니 죽기 위해서 산다는 겁니다.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시간이 계속 늘어난다는 것이죠. 죽는데 그런데 죽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기에 말이죠.

그러니 광야는 일종의 방사선실과 같은데, 엑스레이로 우리를 촬영한다는 겁니다. 우리의 겉모습은 다 배제시키고, 진짜의 모습으로 하나님과 만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 우리의 내부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으로 가득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었습니까? 그것은 마실 물이 없고 먹을 양식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물과 양식이 과연 인간을 위해서 제공될 것인지, 그것에 대해서 광야에서 심사숙고를 해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주신 만나와 메추라기는 그들을 살리기 위함이 아니라, "현재 너희 속에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라는 것을 알리는 것인데, 광야가 그런 무대장치라는 말이죠.

* 흔들리고, 파괴되고, 깨어지고, 찢어지고 !!

인간은 악마의 하수인이 되어서 자기밖에 모르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생은 너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너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일러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광야에서는 흔들려야하고, 파괴되어야하고, 깨어져야하고, 더 나아가서 찢어져야 한다는 말이죠.

실제로 광야에서 깨어진 것이 있는데, 바위가 깨어졌다는 겁니다. 그리고 전쟁을 통해서 흔들리고 파괴가 된다는 겁니다. 즉 애굽 군대가 좇아오고, 아말렉 군대가 좇아오고, 그리고 모압 군대가 공격을 한다는 말이죠. 정작 자기들은 고기도 먹지 못해서 힘이 없어서 늘어져 있는데 말이죠.

그러니 '나' 라고 하는 그 귀한 자아는 그만 너덜거리게 되는데, 완전히 찢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마치 백숙의 닭고기처럼 말이죠. 처음에는 온전한 닭 모양이지만, 그 뜨거운 고난을 이기고 나서 다 찢기고 나면, 우리의 맛있는 식사거리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닭이 찢어지듯이 우리의 자아가 찢어진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것이 나다" 라고 할 것이 없는데, 배가 부를 때는 "나는 잘났다" 라고 하면, 어려운 환경에 부딪치게 되면 모두 찢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찢어지면, 그게 성도라는 말이죠.

* 성도는, 경쟁력 '제로' !!

그러니 성도는 "주여, 믿습니다. 사랑합니다" 라고 하면서 폼을 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쪽에서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다가온 주님이 나를 어떻게 다루시는가?" 라고 하는, 그것을 보라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어떤 경쟁력도 허락하지 않는데, 경쟁력 제로라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의 품위는 그만 손상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버릴 수 없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희망' 이라는 겁니다. 즉 "그래도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통과하면 모세가 우리를 좋은 곳으로 인도할 것이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신명기 마지막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주님께서는 그 희망마저도 완전히 시원하게 날려버리시는데, 그들의 앞길에 축복을 베풀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저주를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을 광주강의에서 했지 싶은데, 즉 "주님께서는 갈 수 없는 곳으로 몰아세운다" 라는 것이죠.

* 문경의 채석장으로 가자 !!

제가 문경에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 산에 보면 채석장이 있다는 겁니다. 채석장이니 산을 완전히 깎아놓았는데, 그러면 거기는 절벽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이쪽으로 차를 타고 돌진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차는 절벽 밑으로 떨어지고, 운전자는 죽고 만다는 것이죠.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형국인데, 자기들은 광야를 지나서 약속의 땅으로 간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그 약속의 땅에는 자기들보다 더 큰 민족이 버티고 있는데, 즉 절벽이라는 말이죠. 요단강도 강물이 너무 깊어서 건널 수 없고, 건넌다고 해도 여리고 성은 천하의 요새라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갈 수 없는 곳으로 몰아세웠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주님은 왜 이렇게 하십니까?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과 소망을, 즉 "고생을 많이 했으니, 이제는 천국에 보내주겠지" 라고 하는 일말의 염원을 좌절시켜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내 생각과 연류된 메시야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런 구원자는 없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자기가 믿는 예수는 '나'에게서 나왔다는 이유 때문에, 그 예수는 가짜 예수가 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가짜가 아니라 진짜 예수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가 가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데,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는데 말이죠.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내가 바로 가짜입니다" 라고 고백하게 되는데, 그러니 자기 인생이 마치 닭백숙처럼 갈가리 찢어진 것에 대해서, 그것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임을, 그리고 그것이 축복이고 자유임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죠. 성령께서 오셔서 십자가를 보여줄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요한복음 13장을 보겠는데, 36절에서 38절입니다.

(요 13:36)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요 13: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요 13: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 빠이, 빠이 !!

여기 36절에 보면,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베드로가 그래도 명색이 수제자인데, 제자가 없는 스승은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택해서 제자로 삼았다는 것이죠.

그러니 스승이 가는 곳에는 제자도 갈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생각인데, 그런데 그 당연한 생각이 십자가에 이르러서는 "빠이, 빠이" 라는 겁니다. 헤어져야 하는데, 바로 그런 헤어짐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진짜 주님을 안다는 것은, 자기 쪽에서 도저히 다가설 수 없는 분이 주님임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쪽에서 다가설 수 없다고 하면,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어제 '납치' 라는 말을 했는데, 성령으로 납치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말이죠. 주님에게 납치를 당해야 하는데, 그것 외에는 달리 어떻게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 내세울 것이 없어요 !!

이방인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까, 유대인들과는 달리 율법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죠. 그저 성령세례를 받아서 구원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내세울 것도 없고, 또한 내세우고 싶지도 않다는 말이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버렸지만, 주님은 그 빈자리에 이방인들을 납치해서 그 자리를 채웠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셨는데, 바리새인들이 알아듣지 못해서 그렇지 말이죠. 그 대표적인 것이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인데, 그는 회사돈을 횡령했다는 겁니다. 자기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니 누가 봐도 불의한데, 주인도 그것을 인정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불의한 자가 천국에 간다는 말이죠.

(눅 16: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눅 16:2)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이것은 엄청난 반전인데, 우리는 자기 자신을 우수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엄청난 관리를 해왔다는 겁니다. 한 평생을 통해서 말이죠. 남들에게 욕을 듣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모르는데, 그리고 그것을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런 우리의 눈에 불의한 청지가 보인다고 하면, 우리는 "그런 인간은 지옥에 갈 수 없다" 라고 판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는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수준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자기의 생존문제와 자기가 잘 되는 쪽으로 나가는데, 그러니 거기에 막혀서 그만 모든 해석이 뒤틀리고 만다는 겁니다.

* 엉터리, 엉터리 해석 !!

주님이 그 어떤 진리의 말씀을 주셔도, 모든 것을 자기가 잘 되는 쪽으로 여긴다는 말이죠. 거기에 부딪쳐서 그만 전부가 다 엉터리 해석이 되고 마는데, 그러니 그것을 피하려고 하면, 먼저 자기 자신의 체면, 품위, 그런 것이 갈가리 다 찢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아무 것도 아닌데, 그런데 영생을 주셨다는 말이죠. 즉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를 천국에 보내주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해석하기 때문에, 자기가 흔들리면 세상도 같이 흔들린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바꾸어서 말하면, 이 세상이 고정되면 자기도 고정이 되었다고 여기는데, 그것을 두 글자로 '평화' 라고 하는데, 그런 평화의 시대를 원하고 있다는 겁니다. 세상이 평화롭기를 원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자기가 만족을 느끼니 말이죠.

* '아미'와 예수님의 제자들 !!

그런데 주님은 이 세상을 흔들어버렸는데, 그러면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팬들은 어떻게 됩니까? 물론 방탄소년단의 '아미'에는 미치지를 못하겠지만 말이죠(ㅋㅋ). 정권이 예수님을 핍박하니까,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이 그만 어디로 가고 말았습니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반기던 그 수많은 팬들이 다 숨고 말았다는 겁니다.

충성을 다짐했던 12제들도 도망을 가고 말았는데, 즉 성령이 찾아오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죠. 아무리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도 안 된다는 겁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성령의 이야기가 왜 나옵니까? 그들이 지금 무서워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벌벌 떨고 있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벌벌 떨어라. 무서워해라. 그것이 너희의 본 모습이다. 하지만 내가 며칠 내에 성령을 줄 때는, 그때는 너희가 반대로 담대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뛰쳐나올 것이다" 라는 것인데,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성령을 받게 되면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미 의미는 바닥이 났는데, 우리는 무채색인데, 끝났다는 말이죠. 더 이상 자기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주의 성령이 함께 하기에 말이죠.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땅 끝까지 주님의 증인이 되는데, 바로 여기 지묘동이 땅 끝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사는 곳이 땅 끝이라는 말이죠.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러니 자기 자신에 대해서 더 이상 묻지 말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자기는 개판이라는 겁니다. 그런 개 같은 자에게 부스러기라도 주신 것에 대해서 증거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놀랍게도 영생이라는 겁니다. 자꾸 개가 등장해서 미안한데, 개를 좋아하는 분들은 싫어하지 싶은데 말이죠(ㅋㅋ).

* 집사님, 주무십니까?

아무튼 인간의 힘으로는 되는 것이 아닌데, 우리는 자기를 목적지에 도달시키지 위해서 남들에게 얼마나 피해를 주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자기 컴퓨터가 고장이 났다고 하면서 밤새도록 근무한 사람을 불러내서 고생을 시킨다는 말이죠. 제가 이상철 집사님에게 얼마나 미안한지 모르겠는데, 그런데 컴퓨터가 작동이 되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핑계를 대는데, "주의 일을 위해서!" 라고 말이죠(ㅋㅋ). 물론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닌데, 모든 것이 주의 일이고 복음을 위해서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자기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데, 그러니 "나는 정당합니다" 라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주님이 아직까지 우리를 살려두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얼마나 질이 나쁜 놈인지를, 그것을 깨달으라고 살려두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주님만 증거하면 되는데, "나도 잘났고, 주님도 잘났다" 라고 한다면, 그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죠.

이제 교재 131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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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다룰 수 없는 것, 즉 해, 달, 별 등의 자연을 배치해놓고, 가뭄이나 태풍을 배치해놓고, 자연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고 좋은 것인데, 자기가 이 땅에서 살려면 자연의 말을 잘 듣고 순응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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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력적인 바알종교 !!

이렇게 해서 자기가 잘 되는 것, 그게 바로 가나안의 종교인데, 즉 바알종교라는 말이죠. 구약을 보면 이 바알종교가 백성들의 삶을 도배를 하다시피 하고 있는데, 또한 우리가 그것을 보면서 얼마나 욕을 했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민족의 우상을, 즉 바알종교를 섬긴다고 말이죠.

그러면 과연 우리는 그렇지 않느냐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라는 말이죠. 누구 좋아라고 교회에 나오고, 누구 좋아라고 예수님을 믿느냐는 겁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죽을 때까지 버릴 수가 없는데, '나' 라는 이유 때문에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나는 나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버린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럴 능력이 전혀 없다는 말이죠. 우리는 자기 자신을 결코 버리지를 못하는데, 우리는 그냥 쓰레기라는 겁니다. 그러면 쓰레기로 살아가면 되는데, 그러면 주님이 찾아오셔서 구원을 시켜주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영생은 넘치는 것인데, 그러니 자기가 자기를 고칠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내일이 되면 또 다시 내일의 죄가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말이죠. 다시 한 번 강조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인간은 결코 자기 자신을 버릴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면류관도 천국에 가면 반납을 한다는 말이죠. 민망해서 도저히 쓰고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전혀 면류관이 어울리지가 않는데, 그래서 후딱 벗어서 던져버린다는 말이죠. "아니, 이것을 내가 왜 쓰고 있지? 내가 한 것이 무엇이 있다고?"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죠.

* 주님의 흔들기 !!

우리는 이 세상이 흔들이면 같이 흔들리고, 이 세상이 안정되면 같이 안정이 된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세상을 그만 흔들어버린다는 말이죠. 물론 우리는 바알종교를 통해서 안정되기를 소원한다는 겁니다. 가을이 되면 곡식이 풍성하게 잘 익고 말이죠. 하지만 주님은 태풍을 보내서 그만 흔들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데, 오늘처럼 아직 6월초인데 낮 33도가 되고 하면 짜증이 난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번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럽에 놀러가서는, 헝가리에 다뉴브 강에서 그만 단체로 유람선을 타다가 물에 빠져죽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하겠느냐는 말이죠.

* 우리의 삶은 죽음이 바탕화면 !!

하지만 어제도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의 삶은 죽음이 바탕화면이라는 겁니다. 어차피 죽는다는 것은 복음을 몰라도 다 아는 사실인데, 하지만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 죽음이 아닌 다른 죽음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처음 죽음은 숨이 끊어지는 것이지만, 다른 죽음은 무엇인고 하니까, 영원히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어제 오후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이 세상은 하나님의 원한이 서려있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창세기 3장에 의하면 이 세상은 저주의 바다인데, 이것이 배경화면이고 바탕화면인데, 그러니 다뉴브 강에 빠져 죽은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고 하니, 전부가 죄인이라는 겁니다. 거기서 죽으나, 한국에 돌아와서 더 살다가 죽으나, 모두가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었는데, 그러자 제자들이 참 측은해 했는데, 인간적인 동정심을 발휘해서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저들이 죽었다고 동정하지 말라. 너희들도 마찬가지이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바로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망대를 무너지게 하셨다는 말이죠.

우리는 공동운명체인데, "너 인생 따로, 내 인생 따로!", 그것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똑같은 인생인데, 다만 "주님의 성령이 찾아오는가? 오지 않는가?" 라고 하는, 그 차이라는 말이죠. 성경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그런 차이점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신학교를 나와서 성경을 가지고 원어풀이를 하고 있는 목사들을 보면 한심하기가 짝이 없는데, 학원강사라면 몰라도, 그게 무엇이냐는 말이죠. 반면에 글자로 제대로 모르면서 복음을 듣고 나서 자기가 죄인임을 안다고 하면, 이 세상에서 말하는 죄가 아니라 근원적인 죄를 안다고 하면, 그것은 그야말로 횡재를 했다는 겁니다. 복도 그런 복이 없다는 말이죠.

* 울 때 같이 울고 웃을 때 같이 웃어야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광야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한다면, 그 백성들은 하나님은 닮아야 한다는 겁니다. 울 때 같이 울고 웃을 때 같이 웃어야 한다는 말이죠. 물론 웃을 때는 거의 없었지 싶은데, 그래도 웃을 때가 있었는데, 그것은 홍해를 건너고 난 직후에, 그 바닷가에는 애굽 군사들의 갑옷과 병거가 떠밀려왔는데, 그때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찬양을 했다는 겁니다.

이 누나가 모세가 갓난아이일 때 나일 강에 띄워보낸 바로 그 누나라는 말이죠. 그 누나가 소고를, 즉 탬버린을 치면서 "하나님이 승리하셨습니다" 라고 하면서 찬양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실컷 그렇게 해놓고 나중에 광야에 가서는 또 다시 짜증을 낸다는 겁니다. 주께서 울게 하면 울고, 웃게 하면 웃는 것인데, 하지만 그것을 자기 공로로, 즉 자기가 훌륭해서 그렇다고 나오면 곤란하다는 말이죠.

(출 15:1)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 흐느끼는 통역사 !!

오늘 아침에 매우 특이한 골프 동영상을 보았는데, US여자오픈에서 우리나라의 이정은 선수가 우승을 했는데, 상금이 무려 백만 달러라는 말이죠. 우리나라에는 이정은 선수가 많아서 이 선수를 '이정은6' 라고 부르는데, 동일한 이름이 무려 8명이나 된다는 겁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이 선수가 골프를 제일 잘 치는데 말이죠.

그렇게 우승을 하고 나서 인터뷰를 하는데, 오늘 컨디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인터뷰를 하다가 마지막에 우승상금을 이야기하는데, 이 선수가 그만 흐느끼면서 운다는 말이죠. 그동안 고생한 것이 생각났던 모양인데, 즉 자기 아버지가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되었는데도 장애인 자동차를 몰면서 자기를 뒷바라지를 해주었다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는데, 그런데 통역을 해주던 여자 통역사도 같이 운다는 말이죠. 저는 이런 모습은 생전 처음 보았는데, 그러니 그것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들 공감을 한다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 "바로 저것이다" 라고 여겼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성도가 바로 주님의 통역사라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의 성령을 받았다는 겁니다.

주님이 웃을 때 같이 웃고, 주님이 울 때 같이 울라는 것인데, 어디에서 말인가요? 광야에서 그렇다는 말이죠. 저는 통역사가 울면서 통역하는 것을 정말로 처음 보았는데, 통역사가 "아임 쏘리" 라고 하면서도, 자기도 어떻게 자기 감정을 주체하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저도 그것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는데, 그러니까 서로 마음이 통했는데, 즉 하나가 되었다는 말이죠. 물론 골프선수인 이정은과 하나가 되는 것은 의미가 없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는 주님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것인데, 살아계신 주님과 말이죠. 그것이 바로 '예수 안' 인데, 주님 안에 있으면서 따로 놀면 안 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목욕탕의 같은 탕 속에 우리와 주님이 같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물이 뜨거우면 주님도 뜨겁고, 주님이 차가우면 우리도 차갑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인생이 자기만의 인생이 아니라, 옷을 홀라당 다 벗고 볼 것 말 것 이미 다 본 사이란 말이죠. 즉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관찰자의 힘이 아닌데, 즉 "하늘에 계신 위대하신 신이시여, 하나님이시여!" 라고 하는, 그런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주님께서는 우리의 일상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광야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해서 우리와 같이 살아가겠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 131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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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데, 물론 제자들은 예수님이 있으니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풍랑이 일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노력을 다 했는데, 물을 퍼내고 힘껏 노를 저으면서 그야말로 애를 다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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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랑인가? 예수님인가?

조용하던 갈릴리 바다에 갑자기 풍랑이 일기 시작하는데, 여러분들도 직접 가셔서 이 갈릴리 바다의 정경을 한 번은 보아야 하는데, 호텔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말이죠. 언젠가 그런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무튼 배를 타고 가는데 풍랑이 일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바닷가에서 보면, 배에는 예수님이 타시고 제자들이 타고 있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하면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풍랑이 일고 있는데 누가 보입니까? 예수님이 보일까요? 풍랑이 보일까요? 먼저 풍랑이 의식이 되고 보인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일상이고 인생이라는 말이죠. 잘 되면 자기 탓이고, 못 되면 조상 탓이라는 겁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데,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말이죠. 어쩌면 우리와 그렇게 똑같은지 모르는데, 우리가 매일같이 겪는 일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해서 주님을 알고 십자가를 아는 것이 아닌데, 몸으로 알게 하시는데, 즉 현실을 통해서 실감나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풍랑이 일어나니, 그 다음에는 제자들이 배에서 물을 퍼낸다고 난리라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풍랑이 일어난 것이 자기 일이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바다를 건너가서 무사히 자기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자기 일이고, 그게 목표라는 겁니다.

그러면 과연 자기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자기 일입니까? 주님의 일입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그것을 공부했는데, 그게 주님의 일이라는 말이죠. 이번에 장로님이 여행을 가시는데, 거기서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모르지만, 하지만 그 어디든지 주님이 따라붙는다는 겁니다. 무사히 돌아와도 주님의 일이고, 그렇지 않아도 역시 주님의 일라는 것이죠.

* 다뉴브 강은 결코 아름답지 않아 !!

이번 헝가리의 유람선 사고를 보고 많은 것을 느꼈는데, 물론 주님께서 친절하게 가르쳐 주신 줄로 아는데 말이죠. 이전에 제가 알고 있던 다뉴브 강은 참으로 아름다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만 참혹한 강이 되고 말았는데, 그 강의 수심이 어느 정도 되는고 하니, 7,5미터라는 말이죠. 올림픽에서 다이빙을 할 때의 수조의 물의 깊이가 그 정도 된다고 하는데, 그러니 그렇게 깊지 않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래도 제대로 구조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유속이 빠르고 물이 탁하다는 겁니다. 물 속에 들어가면 바로 앞에 있어도 보이지가 않는다는 말이죠. 저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어쩌면 이 세상과도 그렇게 똑같을까?" 라고 여겼다는 말이죠. 이 세상은 그 흐름이 너무나 빠른데,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다는 겁니다. 패션의 유행도 그렇고, 주식시세도 그렇고, 너무나 그 흐름이 빠르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 세상은 혼탁한데, 내일 일도 전혀 알 수 없다는 말이죠. 장사를 하나 하더라도, 언제 문을 닫을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앞이 완전히 막혀있는데, 그러니 개업을 허더라도 폐업을 어떻게 잘할지, 그것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죽을 날을 생각하면서 오늘 하루를 살라" 라는 것과 같은 것인데, 이 세상은 유속이 빠르고 혼탁하다는 겁니다. 다뉴브 강의 깊이가 겨우 7,5미터인데, 그러니 깊어서 구조를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물의 흐름이 너무도 빨라서, 잠수부가 들어가도 구조는 고사하고 자기 몸도 제대로 가눌 수가 없다는 겁니다.

* 얘들아 !!

아버지가 복음을 알아서 자식들에게 가르치는데, 그래서 "얘들아, 이 세상이 너희들이 노력한 만큼 응당한 대가를 줄 것이라고 여기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지금은 학생이라서 교회에도 열심히 다니고 성가대도 하는데, 그런데 졸업하고 취직을 하면, 그리고 결혼을 가면 그것이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닥쳐도 신앙생활을 잘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식들은 아버지가 걱정하지 않도록 뭐라고 합니까? "잘 알겠습니다. 아버지, 우리가 누구의 자식들입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사회에 나가서 취직을 하게 되고, 또한 사귀는 사람이 생기면, 그때부터는 예수와 교회는 작별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유속이 빠른데, 또한 탁류라는 말이죠. 그리고 항상 흔들리는데, 그러니 자기 몸 하나를 간수하기가 너무나도 힘들다는 겁니다. 그러니 언제 교회에 가고 하느냐는 것이죠. 나중에는 교회에 대해서는 관심조차도 없어진다는 말이죠.

* 이 세상은 늘 그런 세상이었어 !!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여러분의 자식 가운데서 혹시 복음에 관심이 있는 자가 있다고 하면, 그게 바로 축복임을 아시라는 겁니다. 자기가 자식농사를 잘 지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주님의 축복이고 은혜라는 말이죠. 이 세상은 그 정도 빠른데, 다뉴브 강에는 항상 폭우가 쏟아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살아온 세상을 되돌아보면, 늘 그런 세상이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복음을 알았다고 하면, 그것은 전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주님 자신의 일인데, 거기에 우리가 납치를 당했다는 말이죠. "너는 천국에 가야만 돼. 이미 창세 전에 결정이 되었어. 빼도 박도 못해. 너의 자유가 아니고, 나의 자유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이고, 그것은 넘치는 사랑이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바알을 섬기는 저희들이었는데, 그래서 우리 한 몸만 편하면 그만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찾아오셔서 주님을 알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니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알아서 어떻게 고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활용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뻐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9,6,11 오전11시에 마침.

수영도 할 줄 모르면서, 까불지 않게 하소서 !!


 첨부파일 : 19대구강의('전도서'속의그리스도)56-사막(수정).hwp (63.5K), Do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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