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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지역강의 > 부산강의
2016-02-16 17:44:02 조회 : 1209         
폴 리꾀르 160216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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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221.♡.126.24) 16-02-19 09:46 
20160216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0-리꾀르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리꾀르란 사람, 1912~2005, 목사입니다. 목사인데 신학에 불만이 많은 거죠. 그리고 철학에도 불만이 많고.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신학과 철학이 제대로 설명 못하고 있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리꾀르가 해석학에서 근본이 있다면, 신학과 철학 자체에 악이, 죄가 있다는 그 사실을 누락시키고 신학과 철학을 펼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자기는 목사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 진리를 전해야 될 사명이 죽을 때까지 계속 있었던 겁니다.

제목이 [리꾀르의 해석학]이라고 돼있지요. 신학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라면 뭐냐? 인간은 벌써 해석된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해석된 존재다. 이것이 기존의 것과 뭐가 다르냐 하면, 인간은 세상을 본인이 해석한다, 이것과 차이를 두시면 됩니다. 내가 저 사람을 평가하고 세상에 대해서 분석하는 것. 세상, 자연에 대해서 분석하는 걸 과학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시대가 벌써 18세기 들어오면서 과학시대가 된 입장에서 교회가 또는 성경 진리가 제대로 역할을 못하고 본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남 해석하고 평가하는데 너무 분주한 거예요.

내가 저 사람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그것이 시장 경제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출세하는 방식이 되고 자기가 존재하는 버티는 하나의 방법이 되니까 여기서 교회가 져야 될 계시가 먹혀들지 않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살짝 틀어버려요. 인간은 이미 해석된 존재다. 인간 자체가 누굴 해석할 수 있는 권리, 권한이 있는 게 아니고 해석되어지는 것이다. 해석되어진다면 누구한테 해석되어지느냐? 리꾀르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바로 악으로부터 해석되어진 존재다. 죄로부터.

그럼 그 전까지는 죄가 무엇인지 분석하겠다는 거예요. 리꾀르가 불만을 갖고 있었던 신학과 철학은 인간의 죄에 대해서 악에 대해서 분석하겠다는 거예요. 분석해서 뭐하는데? 분석해서 해석해서 내가 죄에 물들지 않아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그러한 성스러운 사람으로 나서겠다고 되겠지요.

그럼 생각해봅시다. 리꾀르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악을 해석할 때는 본인은 악에 물었다고 여기겠습니까? 물들지 않았다고 평가해버리죠. 그게 문제라는 거예요. 네가 악을 평가하고 죄를 해석하고 세상에 대해서 해석하는 그 자체가 이미 악한 모습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해야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굴 해석할 입장이 못 되고 우리는 늘 인간보다 먼저 있는 악에 의해서 해석 당해야 될 존재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죠.

그렇다면 방금 제가 리꾀르의 철학과 신학을 정리하는 입장에서 악에 의해서 해석한다고 했지만 이걸 만약에 처음부터 악에 대해서 해석한다고 하면 어느 철학자나 어느 신학자가 거기에 대해서 관심을 갖겠습니까? 관심 갖지 않겠지요. 초반부터 악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언급해버리면 교회 나부랭이 하면서 처음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말이죠. 아무리 깊이 있는 철학과 신학을 제시해도 선입관이 교회 목사 나부랭이,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내놔봐야 옛날 구닥다리 캘빈주의, 루터사상 뿐이겠지, 하고 도외시해버리는 겁니다. 이건 자기교회 교인들도 안 먹힐뿐더러 왜냐하면 이미 20세기 들어오면 사람들이 교회 안 가요. 교회 안 간다는 말은 이미 세상에 물들었거든요.

로마서 12장에서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했잖아요. 본받지 말라는 뭔 뜻입니까? 이미 본받을 가능성이 너무나 농후하기에 언급하신 거예요. 디모데후서 3장에 보면, 마지막 때 말세에 고통 할 때가 이르리니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등등 열 몇 가지 나온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그냥 기도하고 교회 잘 다니면 아무 일 없어. 그게 아니고 네가 교회 가고, 안 가고 상관없이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네가 있는 자리가 마지막 세대의 자리고, 왜 고통당하는지도 모르면서 고통당하게 되는 그것이 압력으로 가해지는 세상에 네가 살고 있다. 그걸 언급하는 거예요.

달리 말해서 성경이란 우리에게 하라는 것이 아니고 네가 놓인 세계에 대해서 네가 판단하기 이전부터 이런 세계에 놓여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세계로부터 너는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해석 당한다는 겁니다. 평가당하는 거죠.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에 의해서 우리가 늘 평가당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새삼스럽게 뭘 한다는 게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뭘 한다고 해서 착하니까 두 번 다시 너한테는 평가 안 할게. 항상 넌 착하니까. 이런 분이 아니거든요.

행정적 입장에서 세금을 착실하게 납부하시는 분들은 세금조사를 면제해주죠. 그런데 성경에는 그게 없어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이 예수 믿고 난 뒤에 나한테는 해당되지 않는 말씀이라는 게 없다니까요. 그게 성립되지 않아요. 예수를 얼마나 믿든 오래 믿었든 잘 믿었든 늘 우리는 해석되어질 존재에요. 무엇에 의해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모델로써 우리를 내세우는 겁니다. 잘했다는 말입니까, 못했다는 말이에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매일같이 잣대로 들이대는 이유는, 우리가 이 세대를 안 본받고 있다는 모델입니까, 본받고 있다는 모델이에요? 이 세상에 물들고 있다는 모델이에요. 나는 성령 받았기 때문에 상관없다는 소리하지 마세요. 그럼 그 사람은 성경과 헤어져야 돼요.

바로 폴 리꾀르는 이걸 언급하는 겁니다. 우리는 해석되어지는 존재다. 그래서 2007년 5월 23일에 쓴 이 글은 해석되어지는 근거에 대해서 하이데거의 철학으로 리꾀르가 지금 언급하는 겁니다. 이 내용을 잠시만 언급할게요. 하이데거의 철학으로 리꾀르를 분석하는 이유는, 하이데거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해석되어지는 계시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노리개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애들 갖고 장난감 중에 바람을 불면 나팔에서 공이 공중에 부양하는 하이데거의 철학이 그것 하나입니다. 내가 세상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네 인생 결정하는 게 아니고 나는 노리개다. 누구의 노리개냐? 서커스에서 소녀가 누워서 발로 물통을 굴리며 놀지요. 사람들은 박수치고. 하이데거의 철학이 이거에요.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를 공으로 사용해서 마음대로 굴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어떤 결정을 하고 마음잡고 회개하고 반성하고 아무리 바르게 산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죽음으로 끝난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의 계시와 접합된 인간은 그 죽음을 앞당겨서 자기 죽음으로 모셔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야 공포, 두려움이 없어진다는 거예요. 두려움이 없어지면 그게 최고의 윤리라는 거죠. 두려움이 없어지면 거기서 뭐가 나오는가? 계시가 날 공 굴리듯이 갖고 놀면 내가 미처 모르는 계시가 갖고 있던 창조성이 내가 죽기 전에 만개한다. 계시가 개시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계시가 시작한다는 말이 아니고 열린다는 겁니다. 나를 통해서 그때그때마다 꽃봉오리가 활짝 핀다는 겁니다.

하이데거의 철학이 상당히 복음적으로 느껴지지요. 그렇잖아요. 죄인에게 성령이 오게 되면 열매가 열린다. 또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고 우리는 포도나무의 가지니 열매가 없다는 것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다는 것이고, 열매가 있다는 것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 열매가 자신의 열매가 아니고 누구의 열매다? 포도나무의 성실함과 포도나무의 일관성 있는 노력의 열매가 성도라는 것으로 피어난다. 이게 요한복음 15장의 내용이잖아요.

그걸 그대로 방금 제가 하이데거 철학으로 설명한 거예요. 공 굴리면 노는 거예요. 뭐가? 말씀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능력에 의해서. 이렇게 보니까 갑자기 새 생명운동하고 비슷하게 연관 지어지지요. 이제 십자가는 잊어라. 이제는 부활의 시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부활의 능력이 우리로 만개하게 되면 그것이 주께서 원하는 하나님 영광이고 예수님이 받은 형상이다. 그 이야기를 교회에서 왜 합니까? 돈 내고 시간 바치라는 이야기죠.

하이데거와 폴 리꾀르 이야기, 그리고 하이데거 철학을 신학으로 전개한 사람이 바로 불트만이에요. 불트만은 계시는 항상 숨겨져 있다는 겁니다. 숨겨져 있다니까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는 십자가는 비밀이죠. 비밀은 공개한다고 해서 비밀성이 손상되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점점 더 사람들한테 외면당하잖아요. 뭐, 저런 게 다 있어? 여기서 억울함이 생기고 그것이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고. 그 길이 사도 바울이 갔던 길이고 열두 제가 갔던 길이고.

성경 전체 또는 복음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우리는 성경 펼쳐야 설명이 된다고 여긴 모든 것이 이미 하이데거, 불트만, 리꾀르에 의해서 설명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설명된다는 그것이 오히려 잠 오는 성경이야기보다도 그런 식으로 조리 있게 함축해서 철학적인 양상으로 설명하면 이 과학시대에 성경 보기 싫어하는 대중에게 먹힐 수 있는 복음의 핵심적인 하나의 담론, 또는 화젯거리로 형성되니까 철학은 현재 목회자나 신학자들한테 유용하다는 식이 되겠죠. 그것의 접목이 바로 현대신학인 겁니다. 폴 틸리히가 그랬고 불트만, 몰트만, 칼 바르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잖아요. 신학이란 철학의 아류라고. 철학에서 이미 복음을 다 설명해놨는데 성경구절 해석해봐야 듣는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그건 어디까지나 니 해석이고 성경해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데 성경해석 이야기하지 말고 철학적인 핵심을 내놓으세요. 이렇게 요구하는 시대에요. 성경 말씀 여기 있잖아요. 다른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 안 하는데, 그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그리고 철학이 복음을 대신해버리면 결국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성경은 누가 지었지? 결국 이 문제입니다. 뭔 뜻입니까? 성경이 오류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성경은 분명히 오류가 있을 것이다. 무엇이 오류인지 말할 수 없지만. 성경이 오류라고 하면, 복음적으로 문제 되기 이전에 철학적으로 문제가 돼요. 네가 뭔데 오류를 끄집어내, 너는 오류 없나? 이렇게 되면 복잡해지거든요. 그래서 이야기할 때는 성경에 오류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돼요. 나는 아니더라도 누군가 밝히겠지, 하고 자기는 살짝 빠지는 겁니다.

고고학적으로 성경이 문제있다하면 그것 또 문제가 돼요. 고고학이 합리성 논리에 들어가거든요. 고고학은 합리적 인식, 과학적 인식이 되는 겁니다. 지금 폴 리꾀르는 초반에 과학을 쳐요. 그건 네가 과학적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고고학적으로 성경이 맞니, 홍해는 사실은 바다가 아니고 갈대숲이니, 어떠니 하는 것, 그리고 원어적으로 베들레헴은 떡집이라고 분석하는 그 분석 자체가 과학적 인식에서 나왔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 철학적으로 봐서.

그래서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 또는 미국으로 유학 간 사람들 점점 더 난처하고 곤란해요. 공부할 게 없어서. 선배들이 다 했어. 박사학위는 받았겠고. 그래야 큰 교회 당회장 이력서 낼 수 있으니까. 영어 되고 박사면 유리하니까. 그럼 뭐 하느냐? 목회학 박사 받는 거예요. 신학박사는 골치 아프니까. 목회박사는 설문조사하면 끝나요. 공장지대에서 교회 부흥의 방법은? 얼마나 쉬워요. 그건 복음에 관심 없다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나는 진리니 복음이니 관심 없고 교회는 밥벌이입니다.

폴 리꾀르가 하이데거 해석을 의존했는데 하이데거는 후설의 현상학에서 나온 거예요. 후설의 현상학 다음에 폴 리꾀르의 해석학이 나오거든요. 해석학은 우리가 남을 해석하는 위치에 있는 게 아니고 해석당하는 위치다. 폴 리꾀르의 철학을 전부 다 하고 악에 대해서 해석한다고 이야기했지만 초반에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그러면 아예 자기 작품을 보지도 않으니까. 어떻게 하느냐 하면, 비의지적인 것에 대해서 해석당해야 한다. 반대는 의지적이겠지요. 의지적은 후설의 현상학에서 나온 겁니다. 후설의 현상학은 의지를 강조하고 의지는 어디서 나오느냐? 의식에서 나오고 의식은 앞에 뭐가 붙어요. 순수의식을 구조를 정립하는 이것을 현상학이라고 합니다. 후설이란 사람이 최초로 제시한 거예요. 순수의식의 구조.

그러면 후설의 현상학의 무엇에 불만을 갖고 자기가 현상학을 주장해야 하는가? 그전에 그가 노리는 표적이 있어요. 과학입니다. 뉴턴의 만유인력부터 시작해서 과학시대에 들어가거든요. 과학에서 그냥 달은 지구를 돌고 지구는 태양을 도는데 몇 킬로 반경으로 돈다. 그런 걸 문제 삼는 게 아니에요. 과학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자연과학만 하는 게 아니고 심리학까지 침범해버렸어요. 이제는 과학이 손 안 댄 분야가 없어요. 심지어 예술까지 과학이 손댑니다. 그 흔적이 황금률이라 해요. 1:1.617이란 것, 이게 가장 아름답다는 거예요. 아름다움도 과학적 인식으로 통일시킨다는 거예요.

황금률이 패션까지 들어가요. 패션, 행동, 인간관계, 경영학까지 파고 들어가요. 심지어 야구선수가 타격 폼이 어떤 때 가장 타율이 높아지느냐? 신체구조가 1.1 대 몇, 이런 식으로 자본주의사회에서 상품화시키는 거예요. 마케팅의 전략이 돼버려요. 황금률이. 이걸 후설은 과학적 의식이라고 본 거예요. 그래서 폴 리꾀르하면서 후설까지 연결됩니다. 후설을 설명하지 않고서 폴 리꾀르의 해석이 나왔는지 설명이 안 돼요.

과학적 의식이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후설은 말하기를 이게 순수하지 않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과학이 실용성을 대체해버리고 말았어요. 물이 아래로 떨어진다. 물이 떨어지는 이유는, 위치에너지가 운동에너지로 바뀌면서 중간에 전기에너지를 뽑아낸다고 하잖아요. 왜 그것에 관심이 있느냐? 그 관심을 과학은 감추고 있다는 겁니다. 주전자의 물이 끓으면 왜 증기가 올라오지? 증기 올라오면 놔둬. 왜 올라오는지 묻는다는 자체는 그전에 순수의식이 아니라는 거예요. 인간은 순수의식을 몰라요. 왜 그런 생각이 필요합니까?

영국에서 산업혁명을 이루면서 석탄을 캐내려면 산림을 훼손하는 것은 물론이고 석탄을 캐내서 그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그 지역 간에 너무 멀어서 말로는 한계가 있는 거예요. 식민지는 개척했지요, 물건은 팔아먹어야 되지요, 동인도회사를 세워서 인도는 점령했지요, 중국까지 공격했지요. 모든 것이 산업화시대에서 에너지를 소비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럴 때는 뭘 연구해야 돼요? 어떻게 하면 에너지원을 깊이 파내어 빨리 운반해서 공장까지 옮겨올 것을 생각하잖아요.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순수의식을 떠난 거예요. 노림수가 있어, 목적이 있어. 그 목적을 순수함이라 하지 않습니다. 경제발전을 위해서 한다는 건 좋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버릇이 어디까지 이어졌습니까? 경제발전을 유용하게 하기 위해서 국가 산업을 일으키겠다는 본인의 심리마저 과학적 인식이 들어오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고 산업혁명의 일꾼이고 말이 좋아 일꾼이지 하나의 소모품, 부속품이 되죠. 이건 차가운 냉혹하기 짝이 없는 현실이죠.

후설이란 사람이 벌써 백오십 년 전 사람인데 오늘날 이 시대 과학시대에 인간들이 어떤 존재로 남은 물론이고 자신에 대해서 돈에 얽매인 무가치한 존재로 본다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어요. 간파하고 있다니까요. 이렇게 계속 나가다간 인간을 위한다는 명목 때문에 힘없는 인간으로 완전히 파괴되는 겁니다. 그리고 힘 있다는 자기도 언젠가는 힘없는 쪽으로 천대받는다면, 도대체 이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이것은 철학자들이 진짜 진리를 말하지 않은 책임을 본인들이 져야 돼요.

그럼 어디서 손대야 돼요? 과학이 심리학까지 넘어오는 것을 막아야 되죠. 후설은 그것뿐만 아니에요. 아예 과학이 심리학, 인간 자체 영혼까지 해석하는 것을 금지할 뿐만 아니고 공격에 들어가요. 과학의 모든 기초는 뭐냐? 바로 수학이라는 거예요. 후설이 수학자에요. 수학은 규정짓는 거예요. 칸막이하는 겁니다. 생활에 편리하도록 칸막이하는 게 수학이에요. 자기 시대를 위한 편리죠. 순수하지 않아요. 그래서 모든 것을 괄호 치자는 겁니다. 모든 것을 공란으로 비워놓고 다시 세상을 보자. 남는 것은 내가 세상을 본다는 의식만 남는다. 의식작용을 ‘노에시스’라 하고 의식 결과를 ‘노에마’라고 합니다. 이걸 현상 그 자체만 보자는 겁니다. 이 말은 기존의 모든 철학은 가라. 인간의 모든 철학은 노림수가 있다, 목적이 있다는 거예요. 목적 없는 철학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후설이.

무엇이 있는가? 물이 있다. 아니. 물이 있다고 느끼는 노에시스. 물이 있네. 물이 왜 있는가? 모르지요. 그럼 물은 어디서 나오는가? 물이 있다고 의식하면서 물이란 것을 다시 이미지화시키는 자신의 의식이죠. 그걸 나라고 하지 않느냐. 나는 쪼개면 의식만 있을 뿐이라니까요. 나라 하면 과학적 대상이 돼요. 나라는 게 있기 때문에 과학이 심리학까지 침투한 겁니다. 뭔 뜻인지 아시겠지요. 나라는 게 있기 때문에 나를 해부해볼까? 이건 간이네, 이건 쓸개네. 이렇게 되면 의학이라는 과학이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근원성을 다 해체해버린 겁니다.

간 괜찮네. 괜찮으니까 팔아먹으면 되겠네. 간은 반 없어도 산다니까. 간을 볼 때 돈으로 보는 거예요. 병원 원장들이 환자를 볼 때 어서 오라고 환영하는 이유가 뭐예요? 이번에 우리 어머니가 요양병원에 두 달간 있었는데 총 비용이 580만원 들었거든요. 하루에 8만원입니다. 요양병원 우리 어머니 모실 때 아주 대환영하는 거예요. 8만원이 며느리 손잡고 들어온 거예요.

후설이 이걸 안다니까요. 세상 돌아가는 게 전부 가짜고 그래요. 여기서 윤리를 담당할 철학자들이 책임을 져야 된다는 겁니다. 과학이 생산한 에너지와 돈에 시대를 앞서야 될 지성인들이 왜 침을 흘리면서 다 넘어갔느냐? 재벌의 돈에 넘어가는 <리멤버>가 아니에요. 다 넘어가요. 철학이고 뭐고. 검사고 판사고 변호사고. 지 아들 마약했는데 돈 먹이면 다 넘어가게 돼있어.

지난 낮 설교에 <시그널>에서 변호사 잡혔어요. 돈으로 다 때우려다가. 사람들이 왜 그런 드라마를 왜 보느냐? 본인이 그런 세계에서 못 빠져나온다는 것을 스스로 자괴감을 느끼기 때문에. 내가 백날 뛰어봐야 세상은 절대로 저런 가진 자의 세상에서 빠져나올 구멍은 조금도 없다는 자기 자신을 보는 요술 거울이에요. 거울아, 거울아 내가 누구냐? 리멤버 보면 지가 거울이에요.

그 정도로 후설은 모든 걸 괄호치고 순수하게, 순수하게 되면 선과 악도 없지요. 예술도 없고 종교도 없어요. 과학도 필요 없고. 오직 있다는 것은 내가 뭔가 의식한다는 것과 그 의식의 결과로 이미지를 구성하고 대상을 정한다는 것, 끝. 이게 철학의 마지막이에요. 후설이 그런 제안을 했을 때 전부 입 다물고 있는 거예요. 반박의 여지가 없어요. 인간 자체를 쪼개고 인간을 의식덩어리로 봤으니까.

그런데 가만 보니까 이미 기원전 오백 년 전에 인도에서 싯다르타, 부처가 이야기한 거잖아요. 그래서 불교를 의식종교라 합니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이게 육식이에요. 그 다음에 세 가지의 무의식 세계를 보태는 겁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모든 것을 불교의 교리로 설명이 되는데 이게 후설의 현상학과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후설의 현상학을 배웁니다. 젊은 중들이. 배워놓고 점치려 다니고.

반박이 안 되는데 폴 리꾀르가 반박을 합니다. 도저히 반박 안 되는 걸 반박하니 궁금하지 않습니까. 후설의 주장은 기독교가 아니고 불교지요. 힌두교, 동양철학이 돼버리죠. 그래서 후설은 의지적으로 본 거예요. 폴 리꾀르는 여기다 비의지적을 추가시킵니다. 비의지적이 뭐냐? 죄, 악, 죄와 악이 달라요. 나중에 할게요. 그 다음에 무의식, 탄생, 죽음, 초월, 이런 것을 비의지적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후설의 현상학의 문제점은 뭐냐? 죄, 악, 무의식, 탄생, 죽음, 초월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게 신화적이거든요. 무의식, 혼돈. 신화적 내용은 어디 나옵니까? 폴 리꾀르가 목사지요. 이 이야기가 성경에 나오지요. 지금 후설은 성경 자체를 배제했지요. 폴 리꾀르는 목사기 때문에 성경을 이야기하려니까 성경은 후설의 철학으로 해석이 안 된다는 거예요. 리꾀르는 근원적이라 하고 태고적이라 하는데 태고적인 사실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주장하는 해석에 불과하다고 리꾀르가 이야기한 거예요.

신화가 나올 때 하이데거가 공 굴리는 소녀 같이 계시가 나온다고 했지요. 이게 하이데거와 리꾀르의 차이에요. 하이데거는 숨겨진 존재의 계시가 존재자를 통해서 나온다고 했지요. 하이데거는 우리를 존재자라 했어요. 존재자는 존재라는 바탕은 따로 있다는 뜻에서 숨겨져 있고 비밀이라는 것을 존재라는 말을 통해서 다른 게 있음을 간접적으로 말한 거예요. 존재가 존재자를 찢어버리고 창조성을 나타낸다고 이야기했잖아요.

폴 리꾀르는 목사에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현상학을 고려할 때 비의지적인 것이 악에 대한 고백을 통해서 의지적 세계로 나온다는 겁니다. 그게 상징이고 상징은 의지적 세게, 언어세계에서 풀지 못하기 때문에 해석되어야 한다. 그래서 해석학이 나온 겁니다. 해석학은 기존의 것을 해석한다는 것이 아니고 숨겨진 것을 해석하는 거예요.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나올 때부터 내가 해석하는 게 아니기에 이미 우리는 해석되어진 건데 해석되어진 원천, 그건 성경에 나오는 대로 혼돈이고 죄요, 악이요, 또는 죄과요. 폴 리꾀르는 죄과와 죄, 악을 다 분간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이데거의 방법을 사용해서 그것이 우리 존재자를 째고 나오는 거예요.

그럼 인간은 뭐냐? 인간은 본인이 본인을 해석하는 게 아니에요. 본인을 본인이 해석하면 두려움이 생긴다는 겁니다. [백설공주]에서 계모가,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이렇게 묻는 것 자체가 거짓을 유발하고 동시에 그 근거는 두려움에서 나온다고 본 거예요. 두려움이 오는 것을 두렵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이걸 해석해야 되겠지요. 그래서 폴 리꾀르는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돼있어요.

꿈은 아무도 몰라요. 다만 우리가 깨고 난 뒤에 아는 것은 꿈이 아니고 의식세계에서 꿈이 정리가 안 되니까 억지로 정리하고 스토리 만들고 편집하고 짜깁기한 줄거리, 소설이 우리가 꿈이라고 나온 거다. 무의식은 의식세계에서 절대로 해석 안 돼요. 뭘 꿈꿨는지 모르기 때문에 본인이 불안하기 때문에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내가 알고 있는 이미지로 무의식 세계에 있었던 것을 일방적으로 꿈이라고 이야기하는 그 시점에 매워가는 겁니다. 일종의 간증집회지요. 숨겨진 체험, 원초적 체험, 무의식 체험, 그걸 비의지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폴 리꾀르에게 당신 주장은 프로이트 정신분석과 같네. 차이점이 있어요. 폴 리꾀르는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셀의 철학을 인용합니다. 마르셀은 최초의 실존주의 철학자에요. 그 사람은 본인이 스스로 고백하는 신자입니다. 천주교 신자겠지요. 프랑스 사람이니까. 하이데거는 자기가 신자인지 아닌지 자꾸 감춰요. 그러면서도 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고. 마르셀은 노골적으로 자기는 신자라 하고.

마르셀의 실존주의 철학이 뭐냐? 인간은 나그네 삶이라는 게 철학입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인생은 멈추지 않고 어디로 떠나는 여정의 기간이다. 이 말은 실존이란 그걸 잡으면 해답이 안 나온다. 그냥 실존으로 나아가버려요. 떠나는 흔적들이 바로 나다. 그걸 보고 싶어서 붙잡는다면 흔적들이 날아가 버리죠. 마르셀의 철학은, 인간은 나라는 것은 없애고 몸이 바로 나라는 거예요. 그걸 화신론이라 합니다. 나는 내가 몸을 가진 것이 아니고 몸이 곧 나다.

여기서 뭐가 생각납니까?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메를로-뽕띠의 몸의 현상학. 현상학은 다 좋은데 몸이 빠졌다는 거예요. 마르셀, 메를로-뽕띠, 여기 폴 리꾀르 전부 몸을 강조하는 거예요. 왜 몸을 강조할까? 이 사람이 목사지요. 폴 리꾀르는, 내가 몸을 만들었습니까? 아까 비의지적 속에 탄생이 들어있지요. 탄생할 때 나와 의논해서 디자인했습니까? 하나님이 아담과 의논했습니까? 안 했지요. 그냥 던져진 존재잖아요. 던져진 존재는 사르트르고, 사르트르는 하이데거한데 배웠고. 그걸 실존주의라고 합니다. 실존주의는 인간은 존재 중심이 아니고 실존주의라는 거죠. 존재 중심은 나라는 존재가 있으면 신이 등장해요.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죽느냐, 설명하기 위해서.

그러나 실존이란 말은, 내가 있고 나한테 신이 있으면 그건 우상이 돼버려요. 왜냐하면 먼저 있는 나를 위해서 신이 필요한 요소가 돼버려요. 중세신학과 모든 철학이 존재 중심의 철학이 된 겁니다. 나를 의해서 신이 일해야 되고 신이 존재한다면 이게 국가로 집단화되면 여왕이여, 영원하소서. 이게 영국국가지요. 남북전쟁 때 태극기 휘날리고 하는 것은 미국국가 가사고. 피난처 있으니, 독일국가지요. 히틀러 영화 보세요. 찬송가 막 나옵니다. 그리고 루터도 국가를 만들었어요.

어쨌든 존재 중심으로 신이 우리나라를 지켜줘야 된다는 거예요. 사실은 그 안에 본인이 들어 있잖아요. 신은 존재합니다. 왜? 내가 존재하니까. 그런데 사르트르는 그걸 거부했다니까요. 왜냐하면 신은 우상이다. 내가 필요해서 만든 거니까. 나는 나란 존재를 몰라.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여기 내가 존재라고 끄집어내는 그 존재보다 내가 여기 있다는 실존이 앞선다. 이게 실존주의 철학입니다.

이런 주장이 왜 나오느냐 하면, 시대가 과학적이고 자본주의 시대로 바뀌면서 도대체 나란 인간의 존엄성, 인격성, 이런 것이 완전히 개무시 당하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뭔가 윤리적으로 대안을 제시해야 돼요. 이건 말이 안 된다. 19세기 말에 아일랜드에서 감자 농사가 흉작이 들어 굶어죽은 사람이 30%가 넘었어요. 그래서 미국 동부 쪽으로 집단적으로 이민 갔어요. 그렇다면 미국은 그들에게 뭘 제공해야 됩니까? 자유. 어떤 자유? 실존적 자유.


옛날에는 국가와 전통과 인습에 의해서 강요당한 너는 하나님 믿는 나라의 백성이어야 돼, 라는 그런 것보다 이제는 자신의 생존이 우선이죠. 실존이 우선이잖아요. 실존이 우선이면서도 겉으로는 하나님 믿고. 서부영화에 보면, 무식하고 흉악하고 총만 쏠 줄 아는 인간들이 기독교 목사한테는 고개를 숙여요. 왜 그래요? 전통이 그래요. 자기 주체성 안에는 기독교로 둘려 있는 겁니다. 그랬던 미국이 20세기 들어와서 이차대전 끝나고 난 뒤에 존재가 아니고 실존으로 바뀌지요. 알라 신을 믿든 절에 가든 누가 정한다? 내가 정한다. 이게 실존주의의 확대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부처를 믿습니까? 아니. 신을 믿습니까? 아니. 알라신을 믿어요? 아니. 그들은 뭘 믿는가? 바로 무의식, ‘무’를 믿는 겁니다. 무에서 창조성이 나오지요. 그럼 다시 묻습니다. 뭘 믿습니까? 하면 된다. 자기의 창조성을 믿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프로이트가 뭐라 합니까? 창조성 같은 소리하고 있네. 너의 리비도, 다시 말해서 네 속에 있는 욕망이라고 본 거예요.

프로이트가 그런 이야기할 때 기존의 철학자들이 그것이 옳다, 그르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게 사회도덕과 사회질서 잡는데 그 이론이 무슨 도움이 되느냐 이야기한 거예요. 왜냐하면 프로이트가 리비도란 에너지, 무정형의 에너지가 성욕이에요. 프로이트를 욕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는 겁니다. 네가 쉬쉬하는 걸 왜 까발렸느냐 이 말이죠. 프로이트는 억울한 거예요.

이미 프로이트에 의해서 과학적 인식에서 인간은 뭐냐? 어쨌든 간에 인간은 다윈에 의해서 진화론이 나왔잖아요. 인간은 짐승이죠. 짐승은 딱 한 가지밖에 없어요. 종족 보존의 본능밖에 없지요. 종족 보존하려면 성관계를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인간의 행동은 성적 욕망에서 나왔다. 그래야 새끼를 까지. 원숭이와 인간과 차이점 있어요, 없어요? 진화론에선 차이점 없어요. 원숭이와 인간의 dna 차이는 0.4%밖에 안 돼요. 학교에서 다 배운 거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프로이트에 대해서 불만이 많지요. 네가 그래서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느냐. 그게 진리냐, 아니냐는 나중이고 인간들은 안 그래도 욕망 챙기는데 불을 더 지피는 게 아니겠느냐. 그 뒤에 라캉이 이야기한 겁니다. 인간의 윤리와 도덕이란 인간이 욕망을 사회에서 타인과 만나면서 수정해요. 감추지요. 뭐로 감추느냐? 상징으로 감춘 거예요. 폴 리꾀르가 바로 그 이야기가 자기 이야기에요. 악이 바깥으로 나오면 상징이 된다. 상징은 가만두면 안 된다. 해석해야 된다. 그래서 해석학이 나온 겁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221.♡.126.24) 16-02-19 09:47 
20160216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0-리꾀르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아까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을 나눴지요. 비의지적인 것은 본성이라고 할 수 있고 의지적인 것을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폴 리꾀르는 인간의 본성과 자유를 언급하면서 몸의 본성 자체가 자유를 발휘할 때 오류가 발생된다는 겁니다. 이걸 제가 다 알기 때문에 처음부터 악에 의해서 해석된다는 것을 하도 복잡하기 때문에 미리 쉽게 여러분이 아시라고 악에 의해서 해석된다고 했는데 처음부터 그렇게 가게 되면 거부반응 일어나니까 차근차근 그 당시 철학들을 종합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기 생각을 가미해서.

인간이 오류가 발생될 때 그 오류를 그냥 묵과하지 않아요. 그걸 넘어서려고 하지요. 오류가 있는 이것을 인간은 초월로 대처해요. 본성과 자유가 있는데 이 자유는 그냥 자유가 아니고 오류가 있는 것을 초월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인간은 자유적인 의지, 행동을 하게 돼있다고 돼요. 오류를 초월하고자 하는 여기서 반성이 생기고 이 반성을 해석학이라고 합니다. 이제 윤곽이 좀 나오지요.

숨어있는 무의식, 혼돈이 바깥으로 나오면서 제가 분명히 해석한다 했지요. 상징이 나오지요. 상징은 그냥 두면 안 돼요. 그걸 해석하지요. 해석하면서 뭘 하느냐? 반성하면서 나오지요. 지금 폴 리꾀르가 해석이 맞는지 따지는 게 아닙니다. 해석한다고 하는 거예요. 실은 해석한다고 느껴지겠지만 악에 의해서 오류 있게 해석되어진 것이라고 본 거예요. 상당히 복음적이죠. 어떻습니까?

성경을 해석할 때 우리는 부족하다. 누구나 이야기해요. 그전에 신학 다 마찬가지. 우리는 부족하다. 인간은 신이 아니고 유한한 존재다. 누가 이야기 못해. 옛날부터 다 있었던 이야기인데. 심지어 기독교 오기 전에 그리스 철학에 다 있는데. 스토아 철학, 에피쿠로스 철학에서도 인간은 유한하다. 감히 무한에 대들다니 겸손하자. 겸손한 게 스토아철학이고 불교에요. 그걸 복음이라고 말하면 안 돼요.

지금 폴 리꾀르가 불교라든지, 스토아철학, 에피쿠로스철학, 에피쿠로스철학이 부족하다고 하는 목적이 있어요. 인간은 평정심을 유지해야 행복하다는 겁니다. 너무 과한 욕심 내지 말고 너무 나대지 말고 살면 행복해진다. 복음 아닌 그리스철학, 헬라철학에는 목적이 있어요. 인간의 행복이 최고에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목적은 행복이에요. 최고의 선은 행복이에요. 누구 행복이겠습니까? 나의 행복이죠.

이 소리를 폴 리꾀르가 들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네가 성경을 알아, 네가 신화를 알아, 네가 혼돈을 알아? 네가 행복을 추구한다는 자체가 행복하다는 말입니까? 불행하다는 이야기에요. 불행한 것을 일시적으로 행복하게 되면 그게 행복의 끝이에요? 갑자기 결핍을 느끼지요. 그때 인간은 뭘 하느냐? 자신이 행복했다고 봤는데 얼마 안 가서 시들해지고 지루해지고 권태를 느끼고 행복을 못 느끼는 것은 뭔가 오류가 있다. 행복은 아직도 미진한 거야. 나의 행복을 마저 채워야 돼, 라는 이것을 폴 리꾀르는 반성이라 하고 해석이라 한단 말이죠. 자기는 해석되어지면서 해석되어진다는 것을 감추고 맨날 자신의 욕망을 맞추기 위해서 그냥 해석하는, 해석한다는 것은 스스로 반성한다는 겁니다. 반성은 칸트의 철학에서 나왔어요.

칸트의 철학에서는 주체 안에서 감성과 오성이 분리돼있어요. 감성과 오성이란 말은 칸트는 안다는 겁니다. 뭔가 인간 속에 욕망이 있고 그리고 현실은 안정된 것을 원하고, 이게 안 맞아요. 내가 착하기를 원하지만 내 속에 악이 있어서 날마다 악이 이기는구나.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칸트가 이미 알고 있어요. 기독교국가니까. 칸트가 성경박사거든요. 그러니까 이후의 모든 탁월한 신학자들이 칸트를 베끼잖아요. 칸트의 윤리를 배운다고요. 인간은 목적 없이 착해야 된다. 따지지 말고 대가없이 까닭 없이 무조건 착해야 돼. 왜? 인간 속에 하나님 형상이 있기 때문에. 이게 칸트 철학입니다. 완전히 개혁주의신학이에요.

폴 리꾀르에 의하면, 반성한다 했지요. 뭔가 감성은 죄 짓고 싶은데 실제는 죄 짓지 말아야 되고, 이게 주체 내에서 분열을 일으켜요. 갈등을 일으키는 겁니다. 갈등을 일으키면 불행하잖아요. 인간은 불행해지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않아요. 갈등을 해소하는 것을 화해라고 해요. 새 생명 운동하는 사람들이 화해를 굉장히 많이 이야기하죠. 교인들에게 여러분 원하는 것을 제공한다고. 하나님과 화해하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행복해질 겁니다. 이건 칸트철학이죠.

칸트가 아주 예리하게 이야기했어요. 칸트철학의 시작은 인간의 이성에 한계가 있다는 거예요. 이성비판이거든요. 오성과 감정 사이에서 분열이 일어나고 갈등이 생기지요. 어디에서? 주체 안에서. 인간의 주체란 늘 분열되고 갈등을 일으킨다는 겁니다. 이게 인간의 유한한 존재의 한계라는 거죠. 그런데 이걸 어떻게 외우느냐? 이게 바로 상상력이에요. 근원적 상상력으로.

이걸 나중에 프로이트나 라캉에 오면 자아가 돼요. 거울단계, 상상계. 인간은 한시도 상상을 멈출 때가 없어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순간도 상상을 중지하는 법이 없습니다. 화장실에 가든지, 목욕하든지, 길을 가든지, 버스를 기다리든지 항상 상상해요. 버스 정류장에 가자마자 내가 타야 될 버스가 빨리 오는 것을 상상하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폴 리꾀르에 의하면, 인간은 두려움을 그냥 방치하지 않아요. 상상을 통해서 두려움을 해소하고 화해해야 되니까. 내가 힘들면 안 되니까. 내 자체 내에서 상상력이 발동해서 매우는 거예요. 이걸 이미 칸트가 이야기한 거예요.

칸트는 그 상상력마저 행복할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 숭고의 세계, 숭고함이 경외함이에요. 경외는 선지자들이 하나님 영광을 볼 때 나타나는 그 모습이에요. 요한계시록 1장에 나오는 사도 요한이 주님의 영광된 모습을 보고 엎드려 죽은 자처럼 됐지요. 그게 경외함, 숭고함. 그런데 칸트의 경외함, 숭고함이 종교적일 뿐만 아니고 실제 모든 일상에서도 느낀다는 겁니다. 어떻게? 거대한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 섰을 때, 넓은 거대한 대지를 바라볼 때, 그리고 황금빛을 발산하는 막 지는 노을 볼 때 왈칵 눈물이 쏟아지죠. 그걸 포착해서 메를로-뽕띠, 마르셀은 몸의 현상학이라 했고, 그걸 마르셀은 화신론, 내가 몸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몸이 발산한 이미지에 불과하다. 사실은 몸이 나의 전부라고 본 겁니다.

그러면 이 몸은 결국 상징이 돼요. 그 상징은 해석돼야 될 상징이 되겠지요. 해석은 누가 하느냐? 내가 하는 게 아니고 해석되어진 해석을 내가 해석한 걸로 여기는 겁니다. 폴 리꾀르의 결론은 그거에요. 악이 있다는 걸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그는 목사답게 이야기합니다. 구원되는 순간 악의 전부는 밝혀진다. 회고적으로 회상하듯이. 내가 구원되지 않으면 악의 전부는 보이지 않는다. 네가 악에서부터 인간이 상징화된다는 것을 어느 근거에서 이야기하느냐? 폴 리꾀르는 이야기합니다. 네가 구원되지 않아서 그걸 이해 못하지. 이게 폴 리꾀르의 철학이에요.

우리가 남아있는 게 뭐냐 하면, 그 상징을 해석하는 것만 남아있겠지요. 상징을 해석하는데 세 가지 방식으로. 상징은 인간은 태어나면서 하는 언어는 그냥 언어가 아니고 죄악 된 고백이 언어가 될 때 상징어라 합니다. ‘상징어+상징어’가 신화가 돼요. 이 신화를 해석할 때 어떻게 하느냐? 몸이 처해있는 몸은 이 신화에 휘둘리니까 그 교류, 관계에 의해서 해석이 나오는 겁니다. 이 의미에서 폴 리꾀르는 현상학을 그대로 받아들여요.

현상학에서 의식이란 의지의 지향성이라 하는데, 이것은 몇 가지 기능이 있어요. ①대상화하고 ②통합하고 ③관계 맺고 ④구상하고, 이것이 후설의 현상학에서 의식이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폴 리꾀르와 차이점은 뭐냐? 현상학에서는 의식이 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폴 리꾀르의 해석학에서는 몸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몸이 모든 걸 대상화하고 통합하고 관계 맺고 구상하고. 사람을 만날 때 저 사람이 누구지? 그 다음에 저 사람과 내가 생각이 같을까? 통합이죠. 앞으로 어떻게 지내지? 관계죠. 저 사람은 저런 사람이구나. 구상하죠. 모든 걸 규정하고 평가하죠.

그러니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후설의 현상학이 등장할 때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니까. 너무 완벽해서. 더 설명할 게 없어요. 기존에 있는 모든 것도 내 의식의 산물에 불과하다. 끝. 내가 의식하매 그는 나와 관계 맺었고 구상되었고 통합되었고 나의 대상화되었다. 여기에 대해서 이의 있나? 이의 없다. 와~ 그게 진리네. 후설의 현상학에 철학자들의 놀란 겁니다.

신이 있다. 예수가 있다. 그건 뭡니까? 누가 만든 거예요? 후설의 현상학에 보면, 내가 그러고 싶은 거예요. 내가 아니고 내 의식이. 나는 우선이 아니에요. 의식에서 나중에 ‘나’가 나오기 때문에. 내 의식이 신을 믿고 싶은데, 그럼 예수를 믿어볼까? 대상화시키고, 예수를 만나면 하나가 되면 얼마나 좋겠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건 요한복음 16장에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내가 너와 우리가 하나가 된다. 통합. 주님과 나의 관계는 목자와 양의 관계,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이건 관계지요. 그 다음에 주님은 어떤 분이라고 고백해야지. 이건 예수님은 주님이라고 구상하지요.

그러니까 현상학으로 보면, 우리가 성경에서 무슨 소리해도 그건 내 의식의 이미지에 불과한 거예요. 폴 리꾀르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게 의식이 아니고 몸에서 나온 거예요. 그런데 그 몸은 어떤 몸입니까? 감추어진 본성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도록 그쪽에서 해석하는데 폴 리꾀르는 목사니까 거기에 그게 오류가 있는 걸 집어넣었지요. 그 오류를 악이라 한다 이 말이죠.

이게 남은 문제는 오류 있는 해석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 내막이 어떻게 되는지 그것만 남아있는 겁니다. 그걸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딱 세 가지에요. 부정, 더러운 것. 두 번째 부정에서 더 나가면 죄가 되고, 세 번째가 죄과가 됩니다. 죄 이전에 부정이 있어요. 부정이란 거룩한 것과 더러움을 구분하는 것. 쉬운 우리말로 하면 오염된 것, 흠집 난 것. 이건 바로 폴 리꾀르가 목사니까 성경을 근거로 했어요.

구약에 보면, 죄보다 먼저 있는 것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 지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만 신화가 아니고 모든 인류에게 공히 주어진 것으로 보는데 그게 어디에 근거하느냐 하면,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들고 하신 말씀이 금기에 대해서 나오죠. 금지가 되겠죠. 선악과 과실을 먹지 말라는 금지죠. 금지하고 등장한 존재가 누구죠? 인간이었습니까? 금지를 주목하고 금지를 겨냥하여 시비 걸며 나온 게 바로 뱀이죠. 그 뱀은 신약성경에서 옛 뱀이고 마귀죠. 마귀는 상징 이전의 존재잖아요. 본성. 그게 자연세계에 나오면 뱀이라는 상징이 되죠. 존재만 되는 게 아니고 그 법칙도 마찬가지요. 내가 따먹지 말라 했잖아. 금지를 건드리면 이건 더러움이 되는 거예요.

아까 비의지적인 것에 탄생, 죽음, 무의식, 초월, 죄도 포함돼요. 이런 것들이 인간보다 먼저 있는 겁니다. 먼저 있다는 말은 탄생해야 될 이유에 대해서 인간은 모른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죽는 이유에 대해서 죽을 인간을 왜 만들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모르는데 창세기 2장에 보면 나오지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죽지요.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는 죄 이전에 죄가 죄 될 수밖에 없었던 금지조항이 먼저 있었던 겁니다. 그걸 부정이라 합니다. 그 흔적이 지금도 이 세상에 남아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어부가 고기를 잡는데 이상하게 고기가 안 잡혀. 고기 안 잡히는 이유를 대는데, 자기 아내가 부정한 행위를 했기 때문에 고기가 안 잡힌다는 겁니다. 고기가 안 잡히는 현상, 상징에 대해서 그 어부는 해석을 한 거예요. 해석을 함으로서 본인은 뭘 장착하느냐 하면, 아까 대상, 통합, 관계, 구상 또는 구성. 고기가 안 잡히는 이유는 아내가 간음했기 때문이라는 현상학적이지만 나한테는 해석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벌써 어부 이전에 죄, 금기가 있기 때문에 해석되어진 존재가 어부가 되는 거예요. 그게 주체가 된다 말이에요. 그게 자아가 되고.

금기라는 것은 인간이 죄 이전에 설치한 하나님의 그물망 속에 태어난 겁니다. 그래서 보통 교회에서 불만 있는 사람이, 선악과 따먹으면 죽는다고 하지 말고 아예 선악과 안 심으면 어떠냐? 그것도 본인의 해석이죠. 그런데 그 사람이 어디에 말려들었어요? 진짜 선악과 관심 없어야 되는데 이미 관심을 가진 거예요. 신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거예요. 어디 그런 신이 다 있어. 난 그런 신 안 믿겠어. 그런 신을 안 믿겠다는 자체가 나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늘 뭐로부터 늘 해석되어진다는 티를 낸 셈이 된다 이 말이죠.

아무리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 돈을 그렇게 많아도 마지막 때 내가 죽으면 어디 가는데? 신부 붙들고 묻는 거예요. 그러니까 폴 리꾀르 말이 맞잖아요. 돈 벌 때 설탕 만들고 할 때는 관심 없어요. 죽을 때 되니까 묻는 거예요. 신화에 대해서 상징에 대해서. 자기 자신이 죽으면 어디가? 신부 붙들고 묻는 거예요. 똑같은 인간인데 해답을 알겠어요. 신부가 교회밖에 모르는데 무슨 해답이 있겠습니까.

폴 리꾀르는 말합니다. 죽어서 그러기 전부터 이미 그 사람은 나름대로 자본주의사회를 보면서 해석을 해온 거예요. 그런데 그 해석이 자본주의사회를 통해서 해석했지요. 자본주의사회는 돈을 원한다. 돈 있어야 인간 대접 받으니까. 그 사람은 평소에 자본주의사회라는 상징을 상징으로 보지 않고 현실 자체로 본 거예요. 자본주의사회, 이게 눈에 보이는 다라는 겁니다. 폴 리꾀르는 말합니다. 그러니까 현대사회는 비복음적이고 비기독교적이고 악마적이지. 내가 이야기할게. 인간은 너희들의 자본경제구조, 이것 말고 숨겨진 비밀이 있고 인간의 본성을 따로 있다. 네가 자유를 논해? 그 자유는 오류가 있다. 오류 있는 자유로 어떻게 하면 돈 벌까, 여기에 매진한 거다.

따라서 나는 철학자로서, 신학자로서, 목사로서 이야기한다. 신화를 상징을 우리는 상징에 불과한 존재인 것을 다시 말해서 우리는 가짜며 우리는 진짜로부터 해석되어진 가짜일 뿐인 것을 명심하라. 이게 폴 리꾀르가 목사로서 외치고 싶은 내용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냥 기도하세요. 돈 법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옛날 그 당시에 그래서 교회가 운영이 된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폴 리꾀르가 기존 교회에 화를 내고 있는 겁니다. 유럽 자체가 기독교 나라니까 화를 내고 있는 거예요.

그 다음에 두 번째, 부정에서 죄로 옮겨집니다. 인격적 신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계약, 언약이 등장해요. 폴 리꾀르의 주장입니다. 더러움과 깨끗함이 드디어 이스라엘에서 계약이 되면, 여자가 아들을 낳았을 때는 33일 동안 경도가 더럽다가도 딸을 낳으면 66일 동안 더럽다. 이게 문장화 되죠. 법률화되죠. 이게 부정에서 죄로 넘어온 겁니다.

문자화 되고 법률화됐다는 말은 무슨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에요? 이게 죄라고 지적하는 동시에 뒷면에 보면, 이 죄는 이렇게 해야 씻어진다는 것도 같이 세트로 갖추어진 거지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회복할 수 있는 화해할 수 있는 다시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문자적으로 규정지으면서도 혜택, 회복할 수 있는 희망을 제공한다고 본 거죠.

죄로 옮겨놓는 것을 폴 리꾀르는 속죄라고 봤어요. 지난 낮 설교에서 속죄를 뭐라고 설명했습니까? 출애굽기 33장 이야기했지요. 모세가 하나님과 직접 만났을 때 뭔가 덮었지요. 덮기 전에 나는 은혜 줄 자에서 은혜 주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긴다고 하시면서 덮어줬잖아요. 나중에 덮어줌이 언약궤가 돼요. 언약궤 뚜껑을 속죄소라 하는데 속죄소는 물체지요. 아카시아 나무에 금박 입힌 겁니다. 그 위에 천사가 마주본 모형물이 조각돼있고. 이건 상징물이잖아요. 상징물의 취지가 덮어준다는 거예요. 속죄소 만든 이야기가 출애굽기 37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33장에서 모세가 하나님과 독대해요. 그걸 히브리서 9장에서 뭐냐? 실체는 저기에 있고 이 땅에 있는 것은 모형이고 그림자다. 모형과 그림자를 폴 리꾀르는 상징으로 보는 거예요. 상징 아닌 게 없다는 거죠. 그 말은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의미가 종결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자유를 발휘하지만 자유를 자유 되게 하는 본성이 있고 그 본성과 자유는 이미 인간에서 오류 된 채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이걸 복음적으로 이야기하면, 인간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날 때부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그런 뜻이에요. 처음부터 우리는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난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그걸 철학적 용어로, 일방적 용어로 바꾼 거예요.

쉽게 갑시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를 믿는다는 자체가 우리가 보기에는 착한 일 한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그것이 오류 있는 나를 양산한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내가 그 다음부터 의인되는 게 아니고 예수 믿는다는 그 죄를 나한테 더 추가한 셈이 돼요. 어째서 그러냐 하면, 진짜 구원을 받으면 악에 대해서 전부를 아니까 만약에 구원받았다고 우기면서 예수 믿는 것은 착하다고 하면 어떻게 돼요? 전체 악이 아니고 예수 믿는 것은 착함과 예수 안 믿으면 악함을 본인이 그걸 대상화하고 통합시키고 관계 맺고 규정하겠지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내가 예수 믿고 난 뒤에 죄를 지었다. 죄 지었다는 것이 욕을 했다든지, 차 추월했다든지 사소한 것이라도 마음속으로 돈을 좀 사랑했다. 이런 것을 했을 때 그 사람은 뭘 생각하겠어요? 옛날 돈을 사랑하지 않을 때를 선으로 보고, 돈을 사랑할 때를 악으로 보겠지요. 평소에 그 사람은 구원 다 받은 거예요. 왜냐하면 나중에 이 상징물이 몸이 아프다든지 치매 걸린다든지 나이 들면 실수를 많이 해요. 한 번 할 때나 실수지 두 번하면 실수가 아니에요. 이건 타고난 본성이 돼버립니다.

참 희한한 것이 평생 교회에 산 권사들이나 목사가 누가 건드리면 욕이 나온다는 거예요. 치매 걸리면. 그 욕 어디서 배웠어요? 욕도 아주 구체적인 욕을 해요. 기승전결 된 욕, 정돈된 욕이 나와요. 욱해서 하는 욕이 아니고 중2들이 하는 욕이 나온다니까. 담벼락에 여기서 오줌 둔 인간은, 하면서 나오는 욕 있잖아요. 교회에서 새벽제단 쌓으면서 평생 엎드려 기도한 사람 입에서 나온다니까요.

그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가 선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래야 복 받으니까. 자기가 선해야 나중에 자식들이 복 받으니까. 얼마나 자기 종족 위주에요. 다윈 말이 맞잖아요. 자기 종족밖에 몰라요. 프로이트 말이 맞아요. 지 새끼밖에 모른다니까. 지금 폴 리꾀르는 그것까지 치고 있는 겁니다. 네가 어느 시점에서 네 마음대로 스톱해서 선과 악을 논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럼 어쩌란 말이냐? 네가 구원받게 되면 회상적으로 처음부터 우리는 뭘 해도 죄였다는 드러나는 거예요. 이게 폴 리꾀르의 사상이에요.

그렇다면 구약에서 율법을 줬잖아. 율법을 준 것은, 이미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오염된 거예요. 오염된 존재를 문장으로 법률화시켜서 구체적으로 확실히 주지시키는 거예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더 죄 되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율법으로 죄라고 죽이면 그만이잖아요. 부정일 때는 죽이면 그만이에요. 그럴 일 없겠지만 아내가 간음해서 고기가 안 잡힌다. 그럼 고기가 안 잡힌 것으로 끝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예를 들면, 아내가 부정한 짓을 해서 고기 하나도 못 잡았다. 여기에 어부야, 어부야, 네가 왜 고민하느냐? 누가 인격적 모습으로(신인동형설) 나타났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한다? 그 죄를 속죄하고 옮겨주겠다는 하나님 자신의 의사를 제시한 것으로 폴 리꾀르는 보고 있습니다. 인격적인 교류, 그게 바로 계약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계약이 점차 이스라엘 민족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처음에는 집단적인 계약인데 개인적이고 내면적이고 정신적인 계약으로 굳어진다는 겁니다. 이건 에스겔에 보면 나오지요. 성경 봅시다. 출애굽기 20장 5절을 읽어보세요.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만약에 우상에게 절하면 삼사 대까지 벌하지요. 증조할아버지가 우상을 섬기면 그 벌이 삼대니까 적어도 증손자까지 내려가지요. 이게 초판기 계약에 의하면 본인이 죄 안 져도 아버지 죄 진 것이 본인에게 내려간다는 거예요. 요한복음 9장에서 소경 된 자가 지나갈 때 제자들이, 저 소경이 날 때부터 소경된 것은 자기 죄 때문입니까? 조상의 죄 때문에 그렇지요. 조상의 죄는 출애굽기 20장을 말하고, 자기 죄는 에스겔에서 이야기합니다. 부모가 죄 짓더라도 그 자식에게 벌을 주지 않겠다. 계약이 일관성 없게 바뀌어요. 앞에 출애굽기 20장을 무효가 되는 거예요?

물론 폴 리꾀르는 그걸 설명하지 않아요. 초반에서 집단적이었는데 나중에는 개인이 된다.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신약에 가면 모든 법은 인간에 내면화되고 정신 화된다는 겁니다. 그건 에스겔이나 예레미야에 보면 새 언약 시대에는 율법과 말씀이 마음밖에 있다가 새 언약을 통해서 우리 안에 들어온다고 돼 있잖아요. 히브리서 10장에 나옵니다. 이게 새 언약이에요. 폴 리꾀르는 그걸 설명하는 겁니다.

여기서 폴 리꾀르 이야기를 계속 해보겠습니다. 일번에서 이번으로 가면서 일번이 무효화 되지 않고 이번의 입장에서 일번을 다시 설명한다는 겁니다. 이걸 폴 리꾀르는 신화의 순환, 돌고 도는 것. 어떻게 예를 들 수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계약 안에 우상이 등장하죠. 우상숭배는 일번 단계가 아니고 이번 단계에 등장한다는 겁니다. 출애굽기 20장에 있잖아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이사야에서 우상을 무라고 해요. 바로 무가 일번이에요. 부정, 무.

순환이란 뭔 뜻이냐 하면, 순환을 함으로써 네가 이 법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가 아니라 그 무에 의해서 해석되어진다는 거죠. 제가 오늘 강의하면서 제일 먼저 이야기했지요. 인간은 해석되어지는 것이다. 무에 의해서, 부정에 의해서, 오염에 의해서, 악에 의해서, 죄에 대해서 해석되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신화의 순환으로 폴 리꾀르가 설명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야기 다 끝났네. 더 이상 뭐가 남아있어? 남아있다는 거예요. 죄과. 일번은 부정, 이번은 죄, 삼번은 죄과. 순환 논리에 의해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여자가 딸을 낳으면 정결의 기간이 늘어나고 아들을 낳으면 반으로 된다는 말은, 인간의 부정적인 것이 율법 안에 포함돼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약이 구체화 되게 되면 덩달아 일번, 원초적인 부정과 무의 세계가 펼쳐지는 거예요. 곧 인간은 무에 의해서 해석되어지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 다음에 세 번째 죄과에요. 죄는 인격적인 관계로 성립되지만, 이사야 6장에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런 게 인격적 관계에요. 죄과는 양의 관계에요. 죄는 죄되 죄의 많고 적음이 정해지는 겁니다. 갑자기 개혁주의적인 신학이 생각나지요. 같은 죄인이라고 많이 진 죄인이 있고 적게 진 죄인이 있지요. 그러면 죄를 많이 진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바르게 살게 되면 인간이 개과천선해서 그 다음부터 안 짓든지 적게 짓겠지요. 담배 피고 술 먹다가 교회 나와 은혜 받고 난 뒤에는 술, 담배를 끊겠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살겠지요. 이걸 죄과의 차원에서 설명이 가능하다고 폴 리꾀르는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걸 어떤 근거가 있느냐? 구약에 율법이라든지 제사법이 있는 이유가, 항상 인간에게 희망을 주는 거예요. 네가 이런 죄를 지었지만 여기서 개과천선하고 회개를 하고 앞으로 이렇게 살게 되면 너한테 유보되었던 복을 허락해줄게.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고” 복 있는 사람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어떻게 산다? 자기의 죄과를 줄여나가는 방향으로 살게 돼있다는 겁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돼있지요. 묵상을 왜 합니까? 아무 성과도 없으면 묵상하겠어요? 묵상했으면 한 만큼 성과가 나야 되잖아요. 이게 죄과를 줄이는 결과물을 내놓는다는 거예요. 흔히 이걸 개혁주의에서는 자범죄, 고범죄라고 나와요. 원죄는 해결됐지만 고범죄, 자범죄는 남아있다는 거죠. 그것을 줄여나가는 쪽으로 주께서는 계속해서 말씀을 주신다는 겁니다.

그게 부정에서 죄, 죄에서 죄과. 그래서 죄과 쯤 되면 그 다음부터 죄라는 것은 하마르티아, 목적물에서 벗어낫다. 남자가 흘릴 것은 눈물만 아닙니다. 화장실에 붙여놓은 것 있잖아요. 똑바로 오줌 누란 말이죠. 제대로 조준해서 하라 하듯이 하나님께서 인간이 살 도리, 성도가 가야 될 도리를 제시했기 때문에 제시한 대로 하라. 만약 안 하게 되면 어떻게 되죠? 하나님께서 똑바로 하라고 징계를 내리죠. 벌칙을 내리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살라고 희망을 주고 회복을 주고 이게 종말론적으로 마지막 때가 되면 이런 혜택을 준다는 것이 하나님이 준비한 신화 속에 이미 들어있다는 겁니다.

폴 리꾀르가 이런 이야기했을 때 기독교 신자들은 좋아한다고 치고, 만약에 불교신자라든지 교회를 싫어한다든지 교회 안 나가는 사람들은 여기서 무슨 반박을 하겠습니까? 네가 이야기하는 것은 성경이라는 신화이야기잖아, 라고 반박하겠지요. 그 반박을 대비해서 폴 리꾀르는 기독교 외에 모든 종교의 신화를 조사한 거예요. 조사해보니까 전부 다 이런 혼돈의 순환, 신화의 순환이 예외 없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어요.

예를 들면 자연의 탄생 이전에 신의 탄생부터 먼저 나온다는 것, 그리고 신이 인간적인 모습을 띤다는 것, 신인동형설이죠. 그 다음에 급작스러운 격변, 개벽, 대순진리회, 그것도 불교에서 나왔지만 신화잖아요. 마지막 종말, 탄생, 죄, 모든 종교의 공통점은 폴 리꾀르가 성경만 두고 이야기한 게 아니고 모든 데 적용되는 이야기를 자기가 했다고 하는 겁니다. 종교와 관계없이. 성경은 하나의 사례가 될 뿐이고. 자기는 성경을 전파하는 게 아니고 인간 자체가 뭔지 이야기하고 있다는 거예요. 목사 입장이 아니라 철학자 입장에서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에게 적용될 때 철학이 되거든요.

강의를 맺고자 합니다. 폴 리꾀르가 주장한 것을 보게 되면, 오류가 있고 그 오류는 주체 내에 불균형을 일으킨다. 갈등을 일으킨다. 그것은 바로 인간들이 뭔가 놓친 게 있다. 뭘 놓쳤느냐? 신화가 주는 상징을 놓쳤다. 상징은 그냥 상징으로 풀지 말고 해석을 통해서 반성을 통해서 상징을 이해해야 된다. 상징은 그 자체가 가짜란 의미가 있다. 그럼 진짜는 뭐냐? 상징이 있기 전에 먼저 있었다. 그게 뭔데? 어떻게 아는데? 지금 우리가 주체에 분열을 일으키고 오류가 있다는 것, 뭘 해도 오류가 생기고 뭘 해도 미흡하다는 것은 인간이 처음부터 오류 있는 존재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세계는 뭐냐? 오류 있다는 말은 오류 없는 다른 세계에 비해서 인간은 오류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죽어야 되고 인간은 무의식에 시달려야 되고 갈등이 있어야 되고 그걸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서 종교를 만들어서 초월하려고 애를 쓰는데 그런 것들은 사실은 원초적인 무의식에 의해서 본성에 의해서 새삼 해석돼야 된다는 것이 바로 폴 리꾀르의 주장입니다.

자, 이제 늘 있었던 절차입니다. 복음적으로 봤을 때 이 철학의 문제점은 뭡니까? 무엇이 빠졌느냐고 묻는 겁니다. 지금 폴 리꾀르는 목회자고 철학자지만 존재에 대해서 언급하지요.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언급 못하고 있어요. 십자가 사건을 언급하려면 필히 십자가 사건 입장에서 구약, 다시 말해서 옛 언약이 설명돼야 되지요. 이게 뭐냐 하면, 베드로전서 봅시다. 1장 8절에 보면,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지금 베드로 사도의 입장에서 모든 성경은 누구 이야기입니까? 인간의 갈등은 어떻게 하고 인간은 어떻게 불균형을 깨달아서 구원으로 회복될 수 있는지 그 문제가 아니죠. 그냥 예수님 이야기에요. 인간을 자기를 증거하라고 한 게 아닙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존재입니까, 사건입니까? 여기 나오잖아요. 10절을 봅시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

이게 바로 사도가 알고 있는 복음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절에서 피 뿌림을 얻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 뿌림이에요. 베드로전서에서 사도는 십자가 피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존재가 아니라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한 거예요. 사도 바울이 목숨 바쳐서 외쳤던 것은 십자가 사건이에요. 히브리서 1장에서 세상은 무너져야 된다. 왜? 십자가 사건의 의의를 위해서. 요한계시록에서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이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두 증인이 죽은 장소가 뭡니까? 소돔과 고모라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장소지요. 현재 여기 부산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장소가 될 수 있어요. 십자가 사건, 성령의 사건이 일어나면 이 장소가 해운대가 아니고 십자가 못 박힌 장소에요. 공간 개념, 시간 개념 자체가 예수님 십자가 사건 때문에 주님의 해석이 우리에게 덮치는 겁니다.

그래서 폴 리꾀르는 십자가를 언급해야 되는데 사람들이 무엇에 미흡한지, 무엇 때문에 갈등을 일으키는지 목회적 입장에서 특히 그들의 죄과라든지 회복이야기 나온다는 것은 기존의 개혁주의신학을 답습한 것밖에 안 되잖아요. 개혁주의신학조차도 죄라는 사실을 본인은 못 밝히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인간 존재 이전을 알면 구원받습니까? 방금 했던 이걸 알면 구원받습니까? 구원은 십자가 피의 능력으로 구원받지 십자가 피를 믿는다고 구원받는 것 아니거든요. 내가 뭘 믿고 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폴 리꾀르가 한 말 중에서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은 구원을 받게 되면 죄를 알게 된다. 그 말은 맞아요. 그러나 구원을 받는 그게 뭔지 이야기 안 해요. 기독교 들어오면 구원받는 게 아니잖아요. 십자가와 관련된 그게 바로 고린도전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던 십자가는 세상의 모든 지혜로도 어리석고 심지어 부끄러울 정도의 내용이란 말이죠. 그런데 그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는 것은 성령을 받은 사람은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고, 주님처럼. 우리는 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복음만이 유일한 구원의 능력인 것을 우리는 감사하죠. 그게 우리 존재의 이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십자가의 증인으로써 살기 위해서 성령을 주셨사오니 성령께서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린 일을 복음의 일을 증거한다는 사실을 늘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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