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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4 18:02:16 조회 : 1173         
알랭 바디우 170214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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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19.♡.174.190) 17-02-17 10:30 
20170214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9-알랭 바디우
(강의:이근호 목사)


알랭 바디우 이 분이 철학 자체에 시비를 겁니다. 그동안 줄곧 수천 년 철학역사에서 어떤 것이 문제가 되느냐 하면, 철학이 존재, 있음부터 출발했다는 거예요. 있다는 것부터 출발하니까 뭐가 배제가 되느냐 하면, 없음이 추방을 당하겠지요. 없음이 추방을 당하게 되면 있는 것부터 명칭을 붙입니다. 언어를 사용해서 명칭을 붙이게 되면 여기서 고정된 의미가 부여되겠지요. 이것은 질서가 되는 거예요. 질서는 권력으로 작용하고, 권력은 폭력을 낳고, 폭력을 낳은 권력이 과학에 와서는 지식이 되고, 이 지식들을 모아서 오늘날 현대사회를 이룬 겁니다.

이 전체에 대해서 사람들은 특히 질서니까 안정성을 갖는 거예요. 편안한 거예요. 편안하다는 것은 아무 문제없다는 거예요. 아무 문제없는데 애 다리는 부러졌는지. 뭔가 많이 놓치고 있는 것들을 안 그런 척하고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중세에는 철학이 없으니까 신학을 집어넣으면, 철학의 이 절차를 그대로 밟는 거예요. 이걸 도그마, 교리라고 하죠. 교리는 권력을 낳고 폭력을 낳죠. 이것이 지식을 낳고. 지식에 둘러싸인 그 안에 있는 사회는 안정성을 취하게 됩니다. 안정성을 취한다는 것은 아무 문제없음이에요. 과연 아무 문제없을까? 일방적으로 아무 문제없다고 우기는 게 아닌지 반성해봐야 된다는 거죠.

이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이 반대하겠지요. 철학이 그렇게 곱게 온 게 아니고 늘 반성하고 늘 그것이 맞는지 확인하고, 자체적으로 수정하고, 그렇게 해왔다는 거예요. 그렇게 반대하면 알랭 바디우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렇게 한들 있음에 불과한 거예요. 있음에서 나온 제일 먼저 명칭이 뭐냐 하면, 언어를 사용한다는 거예요. 개념에 대한 내용을 바꾸는 것. 전에는 이만큼 알았는데 과학이 발달해서 이만큼 알았다. 태양이 지구를 도느냐, 지구가 태양을 도느냐? 이걸 수정했잖아요. 아무리 수정해고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게 아니고 지구가 태양을 주위를 돈다고 해봤자 태양의 있음이고 지구의 있음에서 출발했단 말이죠. 과학이라는 게.

제가 말하는 취지를 알아야 돼요. 예를 들어서 해남 시골에 80 넘은 할머니가 있다고 합시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그 지식으로 그 할머니가 행복해요? 손자가 학교에서 배웠다고 알려주면 갑자기 할머니가 행복합니까? 전혀 상관없지요. 그게 나와 무슨 상관있는데? 이렇게 되겠지요. 지동설, 천동설이란 언어사용, 언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무릎을 치며 그렇구나. 역시 과학이 발달했구나, 하겠지만 언어에 관심 없는 사람은 그것은 관계가 없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이 그 자체적으로 철학에 반응하는 것을 알랭 바디우는 이걸 재편한다고 해요. 백날 재편해봐야 비품 옮긴다고 되는 게 아니다. 있음의 끝에 나온 지식이 문제인데 이 지식에 충격을 가해야 된다. 지식에 충격을 가하는 요소가 진리라는 거예요. 그동안 지식이 진리를 가려왔다는 거예요. 지식에 충격을 가하는 수단이 있어야 되거든요. 여기에 주체가 등장해야 돼요.

알랭 바디우의 철학에 목적은, 이 세상에 안정성을 구하는 모든 지식에 대해서 주체의 새로운 작용으로, 그걸 forcing이라 하는데 우리말로 촉성이에요. 촉구하는 것, 강하게 재촉하는 것. 주체의 촉성에 의해서 지식의 안정성을 깨는 것. 깨줘야 진리가 등장하는 거예요. 진리가 등장하려면 존재에서 사건으로 바꿔야 돼요.

사건이란 특징이 있는데 우발성입니다. 사건은 미리 예상하는 게 아니에요. 사건은 그냥 우발적으로 터지게 마련입니다. 존재의 바다에서 사건으로 되게 되면 그동안 있음에 의해서 핍박받던 없음의 것들이 새롭게 솟아나서 헛된 안정성, 가식적인, 위선적인 안정성으로 권력과 폭력 행사했던 모든 것이 충격 받고 진리로 드러나게 된다. 이게 알랭 바디우 철학의 전체적인 개략, 내용입니다.

철학의 역사가 있음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없음을 배제시켰다. 있음은 반드시 언어로 대응되게 돼있어요. 있으니까 뭔가 이름을 붙일 게 아닙니까. 그 언어가 고정된 의미가 되어 여기서 사람들은 질서를 찾으려하는 거예요. 질서가 되면 안전성을 얻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안정성이 구체적인 권력을 유지하게 되고, 이 권력이 타인에 대한 폭력을 행사하게 된단 말이죠.

예를 들면 북한 같은 경우가 그런 거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아니면 진리가 아니에요.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수익이 나지 않으면 회사가 아니라는 거예요. 회사가 결국 뭐냐? 그들이 알고 있는 있음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지식으로 끝나는 거예요. 지식에 의해서 선과 악을 규정하게 되는 겁니다. 회사의 선은 뭡니까? 잘 되는 것. 회사의 악은 뭡니까? 망하는 것. 선과 악은 이미 지식체계로, 안정성을 깨는 게 악이고, 안정성을 유지하면 선이 되는 거예요. 조폭 세계도 마찬가지에요.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에게 이익이 되면 선이고, 개인에게 손해되면 악이 되는 거죠.

이게 진리가 아니고 지식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지식이 한 개에요, 두 개에요? 사람마다 지식이 다 다르겠지요. 자기 안정성을 취하기 때문에. 사람마다 선과 악이 또 나오겠지요. 이쪽 선과 저쪽 선과의 싸움이 전쟁이라는 겁니다. 전쟁하려고 나선 사람이, 악한 일한다고 하지 않겠지요. 너희 땅을 점령해야 되는데 우리 조상이 그 땅에 있었는데 너희들이 무단 점유하고 있으니까 빨리 비켜다오. 이게 사사기에 나오는 입다의 전쟁이에요.

우리나라 삼국시대나 계속 이어지는 마한, 삼한 시대도 삼국시대지만 발해나 신라, 백제, 고구려도 삼국시대거든요. 여진족 들어올 때 전쟁하는 명분이 뭐예요? 이 땅은 우리 땅이니까 여진족은 나가라, 거란족은 나라라. 이러면서 전쟁하는 거예요. 전쟁하면서 자기가 악하다고 하면서 하는 전쟁은 없습니다. 심지어 징기스칸이 전쟁할 때도 악한 전쟁이 아니에요. 목초지를 찾아서 농사를 짓는 국가는 토지가 있어야 되지만 유목민 입장에서는 계속 목초지를 찾아서 나가는 것이 선이 되는 거예요.

철학을 아무리 발달시켜도 사람들은 점점 각박해지고 자기 잘났다고 하니까 뭐가 문제인지, 철학이 발달하고 사람들 인권은 신장했는데 문제는 전혀 나아지지 않고 해답을 어디서 찾아야 되는지도 모르고 있는 입장, 뭐가 문제인지도 몰라요. 이걸 알랭 바디우가 나서서 문제는 여기 있다고 지적하는 겁니다.

지식은 폭력을 낳는다는 것. 그래서 밤에 자기 집에 도둑이 올 때 문을 잠그지요. 도둑이 와서 집주인을 강탈하는 것도 폭력이지만 집주인이 문을 잠그는 것도 폭력이지요. 왜?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문을 활짝 열어놓고 알아서 적당히 가져가라고 해야 되는데 밤이고 낮이고 철통 같이 사수하겠다는 말은, 나는 네가 배고파 죽든 말든 내 것 조금도 줄 마음 없거든, 이 말거든요. 소극적 폭력이죠. 도둑은 적극적 폭력이라면.

그래서 과학이 발달하고 지식이 발달하고 아무리 발달해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지요. 특히 지식이란 아까도 언급했지요. 전쟁할 때 지식이 제일 발달하죠. 전쟁할 때 과학이 발달하잖아요. 컴퓨터부터 해서 모든 것은 전쟁용이었어요. 전쟁용이란 자기만 살기 위해서 폭력을 행사하기 위한 기술발달이에요.

그렇다면 철학에 이런 문제가 있다면 철학이 알아서 점검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지만 철학은 존재에 대한 언어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해결점이 없어요. 특히 지식은 계속 새로운 대상들을 만들어내니까. 갑자기 없는 데서 선풍기 만들죠. 없는 데서 자동차 만들죠. 자동차라고, 빌이라고 명칭을 붙이잖아요. 아이스크림이라고 명칭을 붙이잖아요.

명칭을 붙인다는 것은, 아이스크림을 먹어본 자와 먹어보지 못한 자가 지식적으로 구분되겠지요. 그리고 아이스크림 먹어본 자들끼리는 대화가 되겠지요. 그럼 자체적으로 질서가 되고 거기서 안정성을 얻고 아이스크림 먹었다는 게 자랑 질하면 그게 권력이 되고 그걸 못 먹어본 자들은 정신적 폭력을 당하는 겁니다. 그러면 지식은 대상, 그러니까 생산된 있음인데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나무, 해, 달, 별 그냥 있고 자연적 있음에다 인위적 있음을 포괄하면서 언어가 있다고 했지요. 언어는 계속해서 대상들이 플러스 되는 거예요.

철학은 어디서 시작하느냐 하면, 자동차운전 윤리가 뭐예요? 우선 자동차가 있어야 되고, 운전할 때는 양보 운전합시다, 이렇게 된단 말이죠. 양보 운전이란 윤리를 내놓는다는 것은 이미 자동차란 대상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합시다, 하다가 자율주행차가 나오면 윤리자체가 폐기처분되죠. 나중에서는 자동차 안에서 조용히 주무십시다. 너무 시끄럽게 떠들지 마시고. 왜? 운전할 필요 없기 때문에.

그러면 알랭 바디우의 아이디어는 뭐냐 하면, 언어적 대상을 철폐하잔 말이죠. 대상과 대상관계만 논하자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하느냐? 대상을 언어로 하지 말고 숫자로 해버리자. 1. 자동차든 귤이든 낙타든 아파트든 공통적으로 숫자로 하면 ‘1’이 되겠지요. 알랭 바디우가 어려운 것을 여러분에게 쉽게 하려고 하니 힘들지만 잘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숫자 1로 해버린다. 수학이 좋은 점이, 수학은 대상이 어쨌든 간에 굉장히 뭐가 되느냐 하면, 아까 말한 폭력을 유발하고 질서를 유발하고 권력을 유발하는 자체에 건더기가 하나도 없어요. 수학에서는. 굉장히 냉혹하고 냉정하죠. 그러면 뭐가 없어지느냐 하면, 그동안 찌끼처럼 돌아다닌 윤리와 도덕이 필요치 않지요. 우리 회사에서는 이렇게 해야 됩니다, 라고 하는 그것과 회사? 숫자로 치면 1인데 하는 순간, 회사 내의 윤리도덕은 어떻게 됩니까? 없는 거예요. 사라져버리는 겁니다. 윤리도덕이 사라져버린다는 말은 선과 악을 행할 수 있는 그 근거조차 날아가 버리죠.

알랭 바디우는 윤리도덕이 있음이 악을 유발한다는 겁니다. 도덕이 있다는 자체가 그 도덕법에 걸리면 악이 되니까. 그 근거가 없어지면 악도 없어져요. 이게 바로 진리라는 겁니다. 사람이 착한 일하는 이유가, 자기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 사회에서 유지하기 위해서.

예를 들어서 부산 해운대 아파트 내에서 나는 착하다, 사하라 사막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 착합니다, 하고 그 착함의 주인공은 달라지지 않았지요. 그런데 착함의 효과는 완전히 달라지지요. 해운대에서 착함은 주목하게 되고, 나중에 시의원 나오려고 하나, 국회의원 나오려고 하나 하지만 사하라 사막에서 자기밖에 없는데 착함을 알아주지 않지요. 알아주지 않는 착함은 필요 없잖아요. 결국 착함이란 수상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진정한 착함이 아니에요. 남을 의식해서 자기 안정성을 도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윤리도덕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아까 이야기한 것에 의하면 지식일까요, 진리일까요? 지식이죠, 자기 안정감을 도모하니까. 자기한테 이익을 도모하니까. 자기한테 선이 되는데 현대사회에서 자기한테 이익이 된다는 말은 남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한 거예요. 나만 살고보자, 뭔 뜻이 돼요? 너한테 피해가더라도 우선 살고보자. 양보 운전 미안하다. 오늘 바쁘거든. 속도 좀 낼게. 이게 나만 살고보자는 입장에서는 분명히 자기는 사는데 전체적인 질서는 깨지게 마련이지요.

그러면 수학은 그게 가능합니까? 수학은 언어로부터 탈출해요. 사물언어 아시죠. 칠판이고 피아노고 붙이는 것. 또 언어가 있어요. 그걸 시적 언어라 합니다. 비유로 등장하는 언어. 시적 언어는 사물언어보다는 정신적으로 고차원적이겠지요. 남한테 피해를 적게 주는 거예요. 자전거, 사물언어지요. 참 예쁘다, 자전거 스타일이 좋다. 이건 시적언어지요. 자전거라 할 경우에는 누구 것이냐는 다툼이 일어나지만, 아름답다 할 때는 남의 것이라도 할 수 있거든요.

그러나 시적언어는 모호성 때문에 사람들이 기피해요. 모호성은 권력이 안 돼요. 사단장이 중대장에게 명령할 때 시적언어로 날립니까? 우아하게 전쟁해라. 이게 말이 돼요? 너희 부하는 어디에 매복하고, 이렇게 구체적 언어를 대야지, 이번 전쟁은 우아하게 하자. 우아하게 불 낸 사람이 로마에 네로 아닙니까. 본인은 시적인데 로마 시는 불바다 되고 기독교인들은 죽어가게 됐죠.

시적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정치인이 된다는 것은 굉장히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위험한 거예요. <접시꽃 당신>이라고, 도정환, 시인이지만 국회의원 됐잖아요. 법적으로 다루는 국회에서 그 사람은 자기 입지가 온전하지 못합니다. 법을 다시 전공하든지 해야 돼요. 지역민들의 애로사항을 시적 언어로 법률화 시킬 수 없어요. 입법화할 수 없어요. 구체적인 법을 지정해야 돼요. 그 상황에 맞도록.

그런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공리에요. 수학에서는 입 다물어. 무조건 맞잖아. 이게 공리에요. 누가 봐도 납득이 되는 것. 1+1은 결코 3이나 4가 아니에요. 이건 무조건 2가 되는 거죠. 점은 면적이 없어야 되고, 선은 단선이어야 되고, 면적은 2차원이고, 3차원은 공간적인 개념이다. 이건 수학 공리에요. 공리는 처음부터 선, 악 자체를 수용하지 않아요. 들어오는 것을 거부해버립니다.

그래서 알랭 바디우는 우리가 이 땅에서 공리에 의거해서 살자, 이 말입니다. 공리에 의거한다는 것은, 전에는 있음이 없음을 배척했는데 수학에서는 이제는 없음이 있음을 주인공 자리에서 박탈해야 되겠지요. 공리로 살게 되면 힘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진리가 산출되기 때문에 그동안 지식에 우리가 휘둘린 거예요. 지식적으로 한 달 수입이 얼마야? 난 얼마야. 수입이 많아도 휘둘리는 거예요.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는 공리에 의해서 하라. 그렇게 하려면 나는 이렇다는 명칭과 호칭을 양보해야 됩니다. 그게 다수성입니다. 숫자 1로 치면 나는 1이 되는 거예요. 상대방도 1이 되고. 나는 대통령 되고 너는 국민이 되는 게 아니고, 나는 사장 되고 너는 과장이 아니고, 사장, 과장 빼고 1이 되는 겁니다. 복면가왕이에요. 복면 쓰고 다 떼고 그냥 노래로 승부하는 거예요.

그것이 수학만이 할 수 있어요. 인간의 철학적 언어로는 안 되고 수학적 언어만이 가능합니다. 그러면 그게 수학이지 철학이냐고 할 때 알랭 바디우는 칸토어란 사람의 이야기부터 시작돼요. 이 사람이 최초로 집합론을 이야기했습니다. 집합론을 끄집어낸 의미가 뭐냐? 그동안 사람들이 어떤 대상을 볼 때 수로 세는 거예요. 1, 2, 3, 4 이게 셈하기거든요. 셈을 하다보면 전체가 하나의 셈이 되겠지요. 그러면 일자, 하나밖에 없는 존재, 하나로 궁극적인 정답을 추구하게 돼있어요. 일자가 되면 나머진 그 밑에 서열상 굴복이 돼버립니다. 이 사회가.

그러면 일자를 없애면 어떻게 되느냐? 다수가 되죠. 동등한 똑같은 자격으로 다 들어가는 것, 다수가 될 때 이걸 기호로 표시하면 집합이 돼요. 이런 속성을 가진 것들끼리 모여. 그러면 그거는 다수가 되죠. 수학에서 다수가 되면서 칸토어란 사람이 뭘 했느냐 하면, {1, 2, 3, 4, 5} 이렇게 6 이하의 자연수 집합이 되잖아요. 칸토어는 무한도 집합으로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한 거예요. 그런데 무한을 생각하니까 어떤 딜레마에 빠졌어요. 무한보다 더 큰 게 뭘까, 하는. 발상이 희한하죠. 무한을 하나의 집합으로 만들 수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무한은 +1, +1, 이런 식으로 계속 보태니까 이게 닫히질 않네. 끝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무한을 집합으로 하니까 찝찝한 거예요. 끝이 없어, -The End-가 나오질 않는 겁니다. 그리고 칸토어가 더 걱정한 것은, 1과 2 사이가 뭐가 있을까? 1.2 이런 게 있겠지요. 그러나 이렇게 해도 안 돼요. 1.2와 1.3 사이에 또 나온단 말이죠.

그래서 칸토어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무한으로 설명이 될까? 이걸 연속체 가설이라 하는데, 자연수의 집합을 다뤘다칩시다. 하지만 자연수 1과 2 사이에 떠 뭐가 있는가? 실수의 집합이라 할 때 이 둘 사이에 어떤 연속성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고 나중에 지가 자기 생각을 못 이겨서 정신병으로 죽고 말았어요.

그런데 그 뒤에 괴델이란 사람이 나와서 하는 말이, 수학의 공리로써 모든 걸 증명하는 것은 증명할 수 없음을 증명한 거예요. 수학은 수학 내의 공리로써 수학이 옳다는 것이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거예요. 이건 이성의 한계, 인간의 한계를 정리한 거예요. 그걸 불확정성의 원리라 해요.

그러면 알랭 바디우는 수학으로 진리를 추구하는데 진리가 뭔지 안 나타나게 돼있어요. 왜? 진리를 모르니까. 과연 방법이 없는가? 여기서 알랭 바디우가 수학이 못한 것을 철학이 도울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게 미규정적인 것, 미확정적인 요소를 도입하면 되는데 이게 없음이에요. 이걸 수학에서는 공백이라 하고, 공백을 집합으로 만들면 공집합이라 합니다. { } ∅

이게 어떤 방법이냐 하면, 그동안 있음으로 해결이 안 되니까 없음을 집어넣으면 된다는 거예요. 집어넣으면서 등장하는 게 바로 인간의 주체가 되는 거예요. 없음이 있음에 들어올 때는 필히 여기서 사건이 일어나는 거예요. 사건이 일어나면서 지식에 머무는 것에 충격을 줘서 진리로 이끌 수 있다는 거예요.

사건은 우발성이죠. 예를 들면 둘이 결혼을 했는데 결혼하기 전에는 지식적으로 알았는데 어떤 예상 못한 사건이 벌어지니까 남자/여자의 새로운 면이 등장했을 때 내가 알던 지식이 깨어지면서 이게 사랑인가, 하고 진리에 가깝지요. 진리는 반드시 그 절차가 사랑과 정치와 예술과 과학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그중에 하나가 사랑(종교)지요. 어쨌든 진리가 등장할 때는 사건이 터지면서 주체가 관여돼야 됩니다. 주체란 우리를 말하는 게 아니고 과정을 의미하는 거예요.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하는지 모르는데 조금 있으면 나와요. 이것까지는 서론이에요. 본격적으로 해보겠습니다. 알랭 바디우는 수학의 집합론으로 지식에서 진리로 옮겨갑니다. 지식은 폭력적이고 권력적이기 때문에 안 되지요. 진리로 살아야 되니까. T={1, 2} 집합에서 1과 2가 있다. 이렇게 되면 지식이 돼요. 그런데 지식을 진리로 바꾸지요. 진리로 바꿀 때 공집합, 공백, 없음이 개입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없음을 어떻게 찾아내느냐는 겁니다.

집합에서 부분집합을 만드는 거예요. 부분집합을 만들면, 상식적으로 {1, 2} 이게 전체니까 일자가 되니까 폭력적이에요. 일자 폭력을 다수로 바꾸는 거죠. 지식을 진리로 바꾼다는 것은 일자를 다수로 바꾸어서 접근해 나가야 돼요. 그동안 철학은 모든 것이 일자 중심이고, 일자는 인간이 셈하기 때문에 생겼다. 하나하나 셈한다는 자체가 주인공 이익을 위해서, 자기 편리를 위해서, 자기 안정성을 위해서 셈하거든요. 우리 식구가 네 식구다. 강아지 두 마리. 그걸 왜 이야기해요? 이것까지는 나의 전체 집합, 총집합이 되니까. 내 것이 되고. 안정성이 되고, 질서가 되고, 권력이 되니까.

일자에서 다수가 된다면 우리 집은 두 식구다. {1}, {2}, { } 공집합이 나오고, {1, 2} 전체가 또 하나 나오고. 전체 집합에서 얼른 보면 두 개인데 막상 해보면 네 개가 나오는 거예요. 네 개가 나온다는 것은 일자, 지식으로 통하던 전체 집합이 있음에서 버티다가 갑자기 미규정적인 미정합적인 규정되지 못한 없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방법이 부분집합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두 개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네 개가 되니까 초과해서 이런 사실이 나온다는 겁니다.

지금 제가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개로 보이는 것이 어떻게 네 개로 보이느냐? 이것만 풀면 알랭 바디우 철학은 다 풀려요. 집합론 선택공리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항상 언어가 아닌 공리로 이야기해요. 집합론의 선택공리의 내용이 뭐냐 하면, 그 함수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더라도 존재하는 것이 나온다는 것이에요. 그 자체적으로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선택공리에 의해서 충분히 증명이 된다는 거예요. 이게 일리가 있는 거예요.

대통령이 나쁘다. 대통령이 옳아. 탄핵할 만큼 나쁜 건 아니야. 탄핵해야 돼. 지금 옳다, 그름을 자체적으로 하지요. 대통령에 합당해, 합당하지 않아. 그런 가운데 그녀는 대통령임이 증명됐지요. 여기서 그녀가 대통령이라고 누가 이야기했어요? 대통령답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나중 문제가 일단 비판할 대상이 대통령이라는 것을 누가 정했어요? 정한 사람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걸 선택이라고 본 거예요. 선택한다는 것은 반드시 없음과 있음이란 둘을 전제로 한 거예요.

그래서 T={1, 2}에서 어떻게 네 개가 되느냐 하면, 이걸 선택공리를 집어넣어요. 선택공리를 집어넣으면 확률이 되는 겁니다. 1을 할 때는 0/1 둘 중에 1을 고른 거예요. 2를 할 때는 0/2 이 중에서 하나 고르는 거예요.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0을 근거로 하니까 0은 당연히 포함되는 것이고, 전체 {1, 2}도 여기 포함돼서 총 네 개가 된다 이 말이에요.

이렇게 설명한 이유가 뭐냐 하면, 뭘 선택한다는 것은 기존에 있음보다 우선된다는 겁니다. 알랭 바디우의 진짜 핵심적인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뭔 뜻이냐 하면, 사람에게 뭔가 있다, 없다 할 때 본인이 죽었으면 있다, 없다가 아무 의미 없지요. 내가 살아있으니까 선택하게 된다니까. 결국 수학의 집합론의 공리 중에 하나가 수학은 왜 존재하느냐? 뭔가 없음에서 선택해서 수학이 됐다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왜 자기를 인간으로 봅니까? 나는 인간이라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인간인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라고 할 때는 be동사니까 인간이 뭘 전제로 해요? 인간이 없음을 맞은편에 설정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뭔가 있다는 것은 반드시 없음을 동반하니까 없음의 바다가 되는 거예요.

없음의 바다, 이게 진리인데 그동안 지식에서는 없음을 배척하고 있음만 갖고 했지요. 그걸 알랭 바디우는 이걸 상황이라고 해요. 알랭 바디우가 쓰는 용어 하나하나가 함축적이라서 설명하기 힘들죠. 어쨌든 간에 현재 있음의 바다를 상황이라 하는 겁니다. 상황이라 하니까 좀 반칙성 같은 걸 느끼죠. 지금까지 설명을 들어보니까.

그런데 알랭 바디우 이론에 의하면 현재 있음의 세계가 상황이죠. 인간은 일자가 아니고 다수성이니까 배운 것 해봅시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셈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여기 있다. 상황의 뜻이 이거에요. 속했다. belonging, 우리말로 속함. 이것과 차이 나는 게 포함, including. 포함은 지시에 관한 거예요. 속함은 지식에 관한 거예요. 수학에서 포함이 되면 부분집합이 네 개가 돼버려요. 속함은 달랑 두 개밖에 없어요. 1과 2에서 1과 2밖에 없어요. 속함의 세계가 상황의 세계에요. 그럼 나는 상황에 속해 있지요.

알랭 바디우가 이야기하는 건 그거에요. 인간은 자기가 속해 있는 상황은 못 벗어난다는 거예요. 이게 굉장히 중요하지 않습니까? 나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도록 던져진 존재에요. 나는 키 얼마고, 나는 부잣집에 태어나고 이걸 우리가 선택했습니까? 아니지요. 포함이 아니고 그냥 속했지요. 속했다는 것은 상황 속에 있는 겁니다. 상황 속에 있다는 말은, 인간은 결코 자기 자신을 변할 수 없고 이 안에 예속돼있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끝까지 진리에 갈 수 없고 지식에 머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 그동안 철학과 신학 모든 것이 진리에 이르지 못하고 지식에 머무느냐 하면, 항상 어디에 속한 그것으로 현실의 전부로 보기 때문에. 나는 어디에 속했다, 넌 어디에 속했다 이걸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면 없음이 작용하게 되면 상황에서 상태가 돼요. 원래 번역은 상황상태라 하는데 이러면 말이 너무 어려워서 제가 일부러 상황을 지우겠습니다. 상황에서 상태로 바뀌면, 상황은 어디에 속함인 반면에 상태는 여기에 포함이 됩니다.

이 말을 아주 쉽게 예를 들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했어요, 아니면 포함됐습니까? 포함된 분이에요. 말씀이 육신이 되었지만 속한 게 아니고 이 세상에 대해서 언제든지 다룰 수 있는 이 세상을 심판할 수 있는 주가 되시는 거예요. 포함이 되는 거예요. 이 세상은 포함된 자를 건드리면 안 돼. 왜? 포함은 이 세상에 없는 분이기 때문에. 없는 분으로서 이 세상에 있음이 된 겁니다.

없음을 알랭 바디우는 공백, 또는 집합으로 한다면 공집합. 공집합이 그냥 있으면 안 돼요. 집합이 되서 들어와야 이 세상이 부분집합이 되면서 상황을 상태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바꿔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면 알랭 바디우의 철학을 오해한 거예요. 우리가 바꾼다는 것은 이미 속한 자가 포함된 행세를 한다는 자체가 속함에는 있을 수 없어요. 그냥 현실에 예예 할 뿐이에요. 마음에 안 들면 재편할 뿐이지, 재편해서 적당하게 자기 살기 좋은 것으로 바꿀 뿐이지 이 세상을 부정하면 본인의 선택도 본인의 존재도 부정한 게 돼서 죽도 밥도 아닌 게 돼요. 이해하시겠어요, 알랭 바디우의 철학을?

그러면 지식에서 진리로 나가는 방법이 없네, 이런 논리가 되죠. 없는데 부단히 상황 바깥에 공백이 있죠. 없음이 부단히 충격을 가하는 거예요. 왜? 우리가 부단히 없음을 배척했기 때문에, 없음을 무시했기 때문에.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집에 있는데 지나가는 과객이 한 소리합니다. 이 집에 액운이 끼었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럴 때 그 사람을 우리가 초청했습니까? 초청 안 했어요. 예상 안 했지요. 사건인 거예요. 부릅니다. 액운이 끼었네요. 뭐 하나 붙이면 되겠네요. 이렇게 되면 예상 못한 현재 상황에 없음이 있음으로 인하여 새롭게 상황이 상태로 바뀌는 거예요.

그런데 처음부터 그런 스님 있기를 고대했어요? 아니지요. 상황에 없는 요소잖아요. 우발적으로 누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사건이 터져버렸잖아요. 터져버린 사건이 나로 하여금 이 세상에 속한 인생에서 포함된 인간으로 새롭게 바뀌게 되는 겁니다. 이걸 재편이 아니고 재현이라고 합니다. 상황 속에 있는 걸 현실이라 하는데 알랭 바디우의 용어가 굉장히 난해해요.


10분 쉽시다.
 한윤범(IP:119.♡.174.190) 17-02-17 10:31 
20170214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9-알랭 바디우
(강의:이근호 목사)


수학자 칸토어가 고민했던 것은 모든 무한의 집합이 존재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 무한도 하나라고 봤는데 둘이 있고 셋이 있는데 둘과 셋 사이를 숫자로 일대 일 대응을 해보니까 대응이 되더란 말이죠. 그러면서도 빠져있는 전체를 포함할 수 있는 집합이 있느냐? 그것이 있다, 없다를 수학 내에서는 확정하지 못하겠다는 거예요.

수학자라는 게 뭡니까? 진실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고 진리를 추구하는 자인데 진리를 모르고 한 평생 산다는 것이 학자 입장에서 자존심 상한 거죠. 그렇게 해서 백과사전식으로 하나의 있음에 언어를 붙여서 해버리면 그것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권력의 서열이 생기기 때문에 진정한 삶이라는 것은 형성되지 않는 겁니다.

이 시간에는 뭘 하느냐 하면, 지식에서 진리로 나가면서 여기서 공백이란 없기 때문에 어떤 것을 다룰 수 없어요. 그런데 공백의 가장자리, 테두리 자리에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사건이 유발된다는 겁니다. 사건이 유발되는 것도 집합론에서 공리로써 밝혀져요.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사건이 터지면 속함이 아니고 포함이 돼버립니다. 아까 예수님 오신 이야기했지요. 유대인들이 요청했습니까, 초빙했습니까? 아니죠. 그냥 막무가내로 들어왔잖아요.

현재 상황에서 없는 세계를 몰고 왔으니까 이번 수련회 골로새서 할 때 이걸 다중 현실이라 했지요. 골로새서를 제가 강의하기를 현실에 유대인들이 있잖아요. 그들이 모세 율법을 연구한 사람이죠. 율법은 언어지요. 법이잖아요. 아까 공부한 걸 여기 적용시켜 봅시다. 언어, 법이 있다는 말은 없음과 연관되는 게 아니고 있음과 연관돼요. 왜냐하면 있는 내가 법 지켜서 있는 내가 천국 가는 거잖아요. 현재 있는 내가 나한테 주어진 십계명 지켜서 하나님 나라 간다. 모든 것이 있음에서 출발하죠.

그런데 요한복음 7장이나 8장에 보면 뭡니까? 예수님께서 오셔서 너희들이 모세 법을 지켜? 모세가 너희에게 심판할 것이라고 했단 말이죠. 그 말을 보세요. 모세가 누굴 심판해요? 모세 율법을 신봉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심판한다면 그들은 모세 율법을 통해서 본인이, 있음을 심판받는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생각은 예수님이 와서 이야기했지 사전에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지요. 할 수 없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을 전제로 하지 않은 사고방식을 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을 전제로 한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이 있음 자체가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 생각이잖아요. 설교를 한다. 설교해서 심판받는다. 이게 전제가 돼야 돼요. 설교하는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심판받는다. 강의하는 내가 죄 짓고 있기 때문에 나는 심판받아 마땅하다. 헌금하는 나는 헌금하는 죄 짓고 있기 때문에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을 이 세상에 어느 인간이 그걸 장착하고 있겠어요? 못하지요. 그럼 누가 와야 돼요?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15:22) 내가 와서 너희에게 비로소 죄가 생겼다.

지금 한 이야기는 알랭 바디우가 이야기한 게 아니고 제가 이야기한 거고, 알랭 바디우는 현재 있음의 세계의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이야기한 겁니다. 윤리와 도덕의 한계를. 없음을 배척하니까 사단난 거예요. 문제가 컸단 말이죠. 있음이. 없는 세계는 다룰 수 없어요. 왜냐? 없기 때문에. 그런데 없는 세계는 뭘 유발하느냐 하면, 바닷가에 조개를 미역줄거리를 밀어내지요. 분명히 바다에 조개가 안 보여요. 바다 밑에 있어서 안 보이는데 아침에 되면 조개 있고 해변에 미역줄거리가 나와 있잖아요. 파도에 휩쓸려서.

사람들은 바다를 생각하지 않는 이유가, 땅에 사니까 땅만 생각하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알랭 바디우는 그러니까 그게 폭력적인 지식이 된다는 거예요. 나만 잘 되면 끝난다는 거예요. 진리는 바다까지, 없는 세계까지 고려해야지요. 미역줄거리가 땅까지 올라오게 되면 이걸 땅에 속했다고 하지 말고 땅에 포함됐다고 이야기하라. 포함됐다는 말을 구태여 하는 이유가 이게 초과적이기 때문에. 땅에 원래 없는 건데 여분의 것이 생겼는데 그것을 기존의 땅에 있음으로서는 손댈 수 없어요. 왜? 있는 것은 그동안 땅의 법칙으로만 다뤄졌기 때문에 손댈 수 없는 거예요.

그럼 누가 손대야 돼요? 포함된 그것이 속함에 있는 것을 손대야 되지요. 당해야 되지요. 우리가 배척한 것에 의해서 당해야지요. 사건에 의해서 존재가 당해야지요. 충격 받아야지요. 진리에 의해서 지식이 당해야지요.

이렇게 포함까지 합한 것을 괴델 이후에 코헨이란 수학자가 등장해서 유적 집합이라 해요. 유적 집합이란 공통분모가 없는 집합. 이 유적 집합을 알랭 바디우가 그래도 사용해서 이 사회는 있음과 없음이 섞여 있는 걸로 포함돼있는 걸로 그렇게 이 사회를 우리 자신을 다시 보자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자아와 주체가 완전히 다르겠지요. 자아는 상황에 있는 거예요. 상황은 속함만 인정하는 반면에 주체는 속하지 않은 것, 포함된 것만 주체가 되기 때문에 주체는 실체가 없어요. 실체가 없기 때문에 사건에 따라서 그때그때마다 나타나겠지요. 변화, 과정 자체를 주체로 봅니다.

당신은 누굽니까, 라고 묻는 질문을 상태 입장에 다시 물으면, 당신은 당신 되기 위해서 어떤 사건의 도움을 받았습니까, 라는 질문과 같은 질문이에요. 상태에선 그렇게 되는데 상황에서 만약에 당신은 어떻게 결혼했습니까? 내가 이렇게 잘나서, 내가 이렇게 준비해서 했습니다, 라고 상황에서는 그렇게 하겠지요. 상태에선 어떻게 설명해야 돼요? 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잘하고 뭐고 없어요. 어떻게 부자 됐어요? 하다 보니 부자 됐어요. 팔자인 모양이라, 이렇게 되고. 상황에서는 돈 번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나 잘났어요. 얼마나 훌륭한지, 이렇게 됩니다. 다르지요.

만약에 상황 같으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아에 대해서 불만이 가득하겠지요. 나는 이 정도는 안 돼. 더 벌어야 돼. 나는 이 정도는 돼야 돼. 상태에 들어가면 주체는 하나의 흐름에 불과하고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에, 내일 되면 또 어떤 주체가 될까, 궁금해지네. 그러면 욕심이 없는 거예요. 탐욕이 없는 거예요.

알랭 바디우가 현대인에게 외치는 게 그런 겁니다. 지식을 무장하는 식으로 살지 마시고 진리를 소유하자가 아니라 진리의 분출이라 해요. 그래서 사건에 충실성이 진리가 되고 거기에 관여하면서 튀어나온 게 바로 주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건이 상황에서 상태로, 지식에서 진리로 나오는 어떤 과정이 있을 것 아니냐? 그 과정을 세 가지로 나눕니다. 정규, 돌출, 특이로 나와요.

정규는 속함도 되고 포함도 되고. 돌출은 포함은 되지만 속함은 안 돼 있고. 특이는 속함에는 돼있고 포함에도 안 돼 있는 것, 이렇게 설명하는데 맞는지 확인해볼게요. 맞아요. 알랭 바디우 용어를 원래대로 사용하면 너무 어려워서 쉽게 풀이하다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정규는 정규직이라 하잖아요. 쉽게 말해서 고요함이에요. 아무 일 없어요. 원시사회라든지 촌락. 촌락은 봉우리 있고 강이 흐르면서 열댓 집 사는 곳, 굉장히 고요하지요. 우리나라로 치면 마한, 신라, 백제, 위에 고구려. 여기 마한 지역은 아주 고요해요. 여러 부족들의 모여 삽니다. 백제 13대 왕, 근초고왕이 와서 완전히 싹 쓸어버려요. 이게 돌출이에요. 돌출이 되기 위해선 특이성, 사건이 나타납니다. 돌출을 알랭 바디우는 국가라 해요. 국가에 속한 것을 국민 또는 백성이라 해요.

알랭 바디우가 왜 이런 예를 드느냐 하면, 국가란 게 없다는 말이에요. 국가는 없어요. 없는데 있어요. 군에 왜 갑니까? 국가를 위해서 가지요. 돌출은 속함은 없고 포함만 있어요. 포함이란 없음이 이미 있음 세계에 같이 섞여 있잖아요. 국가가 어디 있어요? 없잖아요. 그런데 국가라 할 때 태극기 흔들며 상징으로 할 뿐 없단 말이죠. 이걸 기존의 철학으론 설명할 수 없는 거예요. 대학이 어디 있어요? 대학이라고 가봐야 캠퍼스 있고, 직원들, 학생들이 있을 뿐이지 대학이 어디 있어요? 없어요.

그걸 말이 안 되니까 그동안 어떻게 했습니까? 대학은 메타적인 초월적인 상징으로 한 거예요. 그렇게 이야기해도 뭔가 확실하게 오질 않는 거예요. 그런데 알랭 바디우가 확실하게 이야기했어요. 국가라는 것은 포함되기 때문에 없음에서 돌출된 거예요. 없음이 유지되는 거예요. 놀라운 사실은 그 국가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친다는 겁니다. 국가 자체가 명분이 되는 거예요. 안중근 의사. 어제가 안중근 의사 제삿날인지 모르겠다.

알랭 바디우가 국가와 백성을 이야기했는데 이걸 가정으로 이야기해봅시다. 나는 우리 집안을 위해서 산다, 우리 회사를 위해서 산다. 회사가 월급 줍니까? 회사가 월급 주는 게 아니에요. 본인이 노동한 것 중에서 회사에서 필요한 비용 빼고 자기 얻을 것 챙기는 겁니다. 개인회사라면 세금 빼고 다 갖고.

그걸 돌출 입장에서는 포함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속함 입장에서는 자기밖에 없어요. 자아에요. 포함은 주체가 되겠지요. 주체는 실체가 없어요. 국가는 실체가 없어요. 가정은 실체가 없어요. 그냥 명분이에요. 있는 것은 자아밖에 없어요. 왜 없느냐 하면, 자아밖에 없기 때문에, 나의 신체라는 있음밖에 없기 때문에 이게 인간 이성의 한계입니다.

모든 철학과 과학, 의학이 당신의 유령은 어디 있는가? 도깨비가 어디 있지? 이런 의사가 어디 있어요. 간이 어떻고, 위, 쓸개가 어떻고 하잖아요. 그걸 지식이라고 한 겁니다. 알랭 바디우가 처음부터. 지식과 진리를 나누지 않으면 알랭 바디우가 철학 자체를 할 이유가 없다고 본 거예요. 알랭 바디우 본인이 그렇게 주장할 이유가 없지요. 모든 게 지식으로 과학으로 가는데.
알랭 바디우가 그건 잘못이야, 그래선 안 돼. 그건 폭력적인 윤리도덕이야. 지밖에 모르는 거야, 라고 내세울 때는 우리가 익히 아는 이야기를 뒤집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없음이 있음을 지배하고 있는 거예요. 그걸 알랭 바디우는 something이라 해요. 전라도 말로 거시기. 다른 말로 하면 유령이에요. 인간은 유령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있음은 도저히 소리칠 수 없는 없음이 공백이 있음을 지금 정신적으로 압박을 가하고 있다는 겁니다. 명분이란 이름으로, 명예란 이름으로, 위신이란 이름으로, 체면이란 이름으로.

그게 바로 진리라는 거죠. 진리는 사건을 통해서. 부분집합은 항상 총집합보다 많아요. 많다는 말은 나는 나라는 일자에서 항상 다수성으로 바뀌어야 돼요. 나는 다수성에 의해서 내가 되지 나는 나라고 우기는 것은 자아에 불과하고 다수성은 주체에 해당되는 겁니다.

다수성은 불교와 통해요. 불교에서 자아는 공, 무아로 바꿔요. 무아로 바뀌는데 왜 있느냐? 자아는 하나의 결과물이고 그 속에 있는 무수한 인연, 관계의 그물망에 의해서 오늘날 내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부모한테 효도하라 하지 않습니까? 왜? 부모 없이는 내가 없기 때문에. 그런데 불교는 그것보다 더 나가요. 일단은 부모로부터 내가 태어났기에 부모에 효도해야 되고, 동창생은 오늘날 나를 안 만들었어요?

내가 그 학교 안 갔으면 그 동창생 없을 거고 그 동창생이 20년 뒤에 사기 안 쳤으면 잘 살 텐데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다. 완전히 보증 잘 못 서서 재산 다 날리고. 그렇게 지금 내가 빈털터리 된 이 지경, 이 주체는 그동안 나한테 스쳐지나간 수많은 관계, 인연의 그물망, 인드라망이라 하거든요. 그 많은 그물망에 의해서 내가 됐을 때 진정 나란 것은 없다고 해야 맞다는 겁니다. 그걸 알랭 바디우는 다수성이라 이야기하는 거예요.

알랭 바디우의 철학은 없음의 철학이에요. 없음의 가치를 다시 등장시키는 겁니다.

그 다음에 계속 진도 나가봅시다. 주체는 실체가 없다. 유령이죠. 주체는 없다 했을 때 이것을 무정의적이다. 정의 내릴 수 없는 것들의 바다,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그 무엇. 우리 자신에 대해서 꼭 집어서 말할 수 없지요. 그러면 선택한다는 것은 선택 당함으로 바꿔야 되고, 내가 판단한다는 것은 나의 판단을 점검하는 계기가 되는 거예요. 내가 누굴 판단하는 것은 이 판단이 옳았을까? 만약에 있음의 세계에서는 내 판단은 항상 진리가 아니고 지식이 되고 내 생활의 안정성을 도모하겠지요.

“아줌마, 이 콩나물 사 가세요?” 판단합니다. 이 콩나물을 사는 게 오늘 밥맛이 날까? 판단하잖아요. 밥맛이 왜 좋아야 하는데? 밥맛 좋으면 나는 있음에서 더 있음의 희망이 있잖아요. 밥맛없어 죽겠다고 하잖아요. 죽겠다는 말은 살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 된다는 그런 뜻이잖아요. 죽겠다는 말 자체가 제발 있음아, 꺼져라. 이 말이란 말이죠. 이제 알랭 바디우가 이해되겠지요.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모든 것이 폭력으로 행사된다고.

애들 교육할 때 너는 왜 내 말 안 들어? 너, 꼴 보기 싫으니까 나가 살아. 아이는 다리가 왜 아파요? 다른 아이들처럼 튼튼하게 안 살고. 다리가 안 아파야 될 이유가 있습니까? 아무리 봐도 우리 애 다리가 부러지지 않아야 될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런데 안 부러지면 좋겠다는 마음이 왜 듭니까? 나는 이 상황에 너무나 익숙하게 길들여있기 때문에. 상태가 아니고 상황에. 그 상황은 있음과 있음으로 전체가 된 거예요. 그 전체가 일자가 되는 겁니다.

알랭 바디우는 일자를 다수성으로 바꾼 거예요. 그래서 알랭 바디우는 종교를 부셔버립니다. 신을 부셔버려요. 신은 궁극적인 존재, 일자기 때문에. 신, 일자를 만든 요인이 있음, 있다는 자아의 선택에 의해서 되기 때문에. 모든 민족에 신이 다 있어요. 무신론자는 있어도 무신자는 없어요. 이유를 따져서 신이 없다고 우기는데 가설에 불과한 거예요. 그런 가설은 수학 집합론의 공리를 따라야 돼요.

아까 선택 공리에서 선택은 무조건적이지 이건 옳고 그름을 떠난 결단적 상황이 선택 공리에요. 알랭 바디우가 거론하는 공리가 굉장히 많아요. 그건 너무 전문적인 지식이 돼서 별로 도움이 안 될 것 같아 제가 거론하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한 걸 정리하고 복음과 관련성을 지어보겠어요. 존재, 이 말도 어려우니까 있음, 있음에서 사건이 일어나게 돼요. 사건은 없음이 밀려온 거예요. 있음에 대해서 습격을 가하죠. 이건 진리가 되고 그 과정 속에서 주체가 나온다. 이쪽은 존재니까 진리가 아니고 지식이 되겠지요. 지식은 늘 있음이니까 없음은 다루질 않아요. 대표적인 것이 과학인데, 진리는 네 가지 경로가 있어요. 사랑으로 이를 수 있고, 과학으로 이를 수 있고, 예술로서도 이를 수 있고, 그 다음에 정치로서도 이를 수 있단 말이죠.

예술을 봅시다. 예술은 감정적이에요. 예술의 특징은 항상 있음을 부정해버립니다. 이걸 초현실주의라 해요. 아방가르드, 전위적, 앞장서서 하는 것. 작품 좋네, 하면 삐져서 저들이 내 작품의 의도를 모르면서 아는 척했어. 이건 분명히 저들에서 들킨 거야. 예술가로서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나는 아무도 의미를 모르는 걸 그리겠어. 그래서 산 속에 들어갑니다. 더 깊은 것. 이래서 미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에요.

기존에 나왔던 것은 식상해요. 창조성이 식상했다는 뜻입니다. 창조성이 익숙해버리면 자본주의사회에서 상품화 돼버립니다. 화장실의 남자 변기를 떼서 샘이란 이름으로 전시했더니만 그게 작품이 되고 말았어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다른 사람이 다른 변기를 놔두면 그게 작품일까요? 아니에요. 사건이 돼야 되니까. 최초인 동시에 최후로 마감이 돼야 그 시간적 단락이 사건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술 하는 사람이 진리 추구 보세요. 얼마나 오늘 강의와 닮았습니까? 알랭 바디우가 맞는 거예요. 예술을 통해서 진리를 추구한다. 예술은 항상 있음을 부정하고 이 땅에 없는 지구상, 역사상 한 번도 없었던 것을 만들어내는 그 고된 작업이 예술작업이에요. 쇤베르크는 화음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작품을 했고. 어떤 작품은 이제부터 연주한다고 해놓고 지휘자가 지휘봉 쥐고 있어요. 처음엔 관객들이 참아요. 연주한다고 해놓고 언제 하는 거야. 아무것도 안 해, 라고 웅성거리죠. 그게 음악이에요. 연주를 안 함으로써 노이즈, 나타난 소음이 지금까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작품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작곡가가 뭘 작곡했는지 모르지만 그런 작품 내놓고 다음에 제자가 같은 작품 내놓으면 이미 실효 끝났어요. 항상 새로운 것.

그런데 그런 예술이 현대인에게 먹히느냐 하면, 현대는 정보사회거든요. 정보는 데이터지 의미가 아니에요. 써먹기 위한 용도지 의미를 찾는 게 아니에요. 정보사회란 말은 계속 실용적으로 활용할 정보만 분류할 뿐이에요. 쓰레기 같은 정보 중에서 나한테 필요한 게 뭘까, 하고 취하고 버리고, 취하고 버리죠. 이런 선택의 반복이죠. 여기서 자아는 있음에서 본인이 누군지 몰라요. 본인이 누군지 알려면 새로운 정보가 알려줘야 돼요. 너는 이런 사람이야. 그때 나는 이렇구나, 하고 바로 그 순간에 아는 겁니다.

소녀시대가 나오기 전까지 원더걸스가 최고라고 여겼지요. 그런데 소녀시대가 나오고 난 뒤에 원더걸스보다 낫다고 하는 순간 원더걸스를 좋아했던 자아는 식상하죠. 오늘 내용을 적용시켜봅니다. 원더걸스를 좋아했을 때 그게 자기 주체가 다 입니까? 뭔가 없음으로 둘러싸여 있지요. 그러면 소녀시대가 등장하는 것은 사건이 되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가수가 있다니. 원더걸스 팬에서 소녀시대로 갈아타는 겁니다.

갈아타는 순간 사건, 없음에 밀리면서 자아에서 주체가 되지요. 주체는 실체가 없지요. 그러면 본인이 있어요, 없어요? 본인은 없는 거예요. 없으면서 왜 삽니까? 소녀시대보다 뛰어난 가수가 또 있을 것 아닙니까. 요새 가수가 많잖아요. 거기에 빠지면 되겠지요. 이게 오늘날 젊은 애들이 맨날 새로운 게임을 스마트폰에 다운받는 이유입니다. 본인이 누군지 몰라요. 정보에 휘둘리면서 살아요.

어떻습니까? 이게 행복이에요, 비극이에요? 촌락에, 산에 가려서 혼자 아늑했던 정규직인 사회에서 그때는 전통적인 설, 그대로 대대로 합니다. 새로운 정보가 밀려오는 것은 골짜기로 말미암아 차단됐어요. 그런데 어떤 아줌마가 우연히 남자한테 납치되어 도시에서 춤을 배웠어요. 그 다음에 원상복귀 됐다면 난리 났습니다. 춤바람 났어요. 촌락에. 차차차 배우다고 이게 다야? 살사가 있어. 살사가 다야? 아니야 지르박이 있어. 새로운 정보가 계속 들어와요. 이게 정보사회에요.

다음 달에는 지젝 하고, 다음, 다음 달에는 정보사회에 대해서 언급할 겁니다. 정보사회는 자아가 귀찮아요. 내가 누군지 묻지를 말라는 거예요. 그런 걸 묻는 자체가 전혀 내가 사는데 보탬이 안 돼. 그저 새로운 정보로 해서 많이 알아서 시험 칠 때 유리하고 새로운 시험 경향 알아서 빨리 빨리 취직해서 밥 먹고 사는 거예요. 밥 먹는 것도 삼대 천왕 보고 맛 집 찾아다니면서 먹는 재미로 살아가는 거예요. 새로운 정보로 살아가는 거예요. 내가 나 됨을 유지하는 어떤 고정적인 폐쇄적인 정보는 싫다는 겁니다. 식상하고 구닥다리라는 거예요.

아까 예술 이야기했지요. 예술로 점점 더 진리로 가지요. 방금 이야기한 정보사회는 어디에 속합니까? 수학과 과학에 속하지요. 과학에서 정보사회는 계속해서 새로운 것 내놔라. 핸드폰이 처음 나온 것이 불편해서가 아니라 소비자는 새로운 걸 원하지 편리한 걸 원하는 게 아닙니다. 새로움이 편리함을 이깁니다.

전에는 생산하고 소비했지만 지금은 소비욕구에 의해서 괜찮은 생산물도 폐기처분해야 돼요. 저런 것은 고물로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에 수출하고 삼성은 새로운 걸 내놔야 돼. 이건 학원도 마찬가지에요. 새로운 강의를 내놔야 돼요. 학생들은 항상 점검합니다. 어느 것이 더 새로운지, 짜릿한지, 더 재미있는지, 더 쏙쏙 들어오는지, 출제경향에 맞춰주는지. 뭘 하나 꾸준하게 직업이라고 잡을 수 없어요. 힘들어 죽겠어. 산다는 게 아는 건 많고 맛있는 것 먹고 수입은 많은데 힘들어 죽겠어.

사랑은 뭐냐 하면, 사랑은 줘도, 줘도 끝이 없어요. 알랭 바디우는 사랑을 사도 바울의 복음에서 찾아냅니다. 알랭 바디우의 서적에 보면 믿음이란 책도 있지만 사도 바울의 구원관에 관한 책도 나와 있어요. 물론 복음 아니에요. 복음 아닌데 사랑은 일자가 아니고 둘로 나눠져야 된다. 이것부터 해요. 사랑은 부분집합에서 출발한다. 아까 이게 없다고 했는데 알랭 바디우는 이걸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진리의 없음을 그리워한다는 거예요. 그냥 미친 거예요.

고려의 공민왕이 정치를 잘하다가 원나라 여자인 노국공주가 죽고 난 뒤에는 완전히 미쳐버렸어요. 당신이 죽고 난 뒤에 어떤 여자도 가까이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미쳐버렸는데, 물론 그 다음에 여자는 가까이 하지 않는 대신 미소년을 가까이 했지만. 사랑이란 내가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한 게 아니에요. 사랑이 찾아온 거예요. 사랑이 찾아오게 되면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다고 보는 겁니다. 내가 심장이 아파도 당신만 좋다면 아파도 좋다는 게 사랑의 경지거든요.

슬퍼도 행복하다잖아요. 이승철이 부른 노래에. 당신만 좋다면 나는 얼마든지 슬퍼도 좋습니다. 이게 사랑이에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물론 사랑이겠지만 그 사랑이 오래 갑니까? 나중에는 시큰둥해지지요. 이게 아까 과정과 똑같아요. 정규에서 돌출, 특이로. 계속 특이성을 또 찾아요. 시들해지잖아요. 그때 그 짜릿함을 그리워해서 또 어떤 사랑이 나에게 돌발적으로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뭔가 찾아오기를 고대하고 있어요.

내가 이야기하는 건 사람을 대상을 사랑한 게 아니고 사랑 그 자체를 사랑해요. 오늘 좋은 말 많이 한다. 사랑을 사랑한다니까요. 아예 사랑을 안 해봤으면 사랑을 찾지도 않아. 사랑을 해봤으면 그 사랑을 못내 그리워서 계속 사랑을 찾는다니까요. 남자가 연애할 때 자기 아내를 사랑했잖아요. 남자의 사랑은 결혼한 지 10년 된 아내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결혼하기 전에 그 여자, 풋풋한 그 모습, 단발머리, 그걸 사랑한다니까. 젊을 때 아내를 찾는다니까. 사랑의 맛을 봤으니까. 여자도 마찬가지에요.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일곱 번 결혼했잖아요. 사랑에 무슨 나이가 있고 국경이 있습니까. 그런 게 무슨 소용 있어요. 그때 내가 좋아했던 나의 없음의 자리, 나는 아파도 슬퍼도 괜찮다는 그렇게 돌발시켰던 그때 그 진리를 사랑한 거예요.

감정에서는 두 가지에요. 예술도 감정의 문제에요. 사물, 물체가 아니고. 사랑도 감정의 문제에요. 못다 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신을 찾아요. 종교가 여기서 생기는 거예요. 십자가 사랑을 사랑함으로써 자기는 있음의 세계에서 없음으로 세계로 해탈 되고 또는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의 구원론을 알랭 바디우는 사랑으로 해석해놨어요. 복음은 아니에요.

알랭 바디우의 복음은 예수님의 사랑을 믿자는 겁니다. 그러나 복음은 뭡니까?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지 예수의 사랑을 믿자, 말자는 그 이야기 아니잖아요. 성경이야기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뭘 해주느냐 그 이야기지 내가 예수님 사랑을 어떻게 유지하느냐에 관한 이야기 아닙니다.  음과 알랭 바디우의 철학을 혼동하지 마세요. 그것 때문에 이 시간이 굉장히 중요해요.

그 다음에 정치, 이것 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랑, 과학, 예술. 예술가, 과학자, 종교가 그걸 누가 이깁니까? 정치가가 이겨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입니다. 히틀러에요. 항상 정치가 이겨요. 왜? 때론 몇 명 순교자가 나타날 수 있고 자기 사랑을 위해서 목숨 바칠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정치가 이깁니다. 이게 이번 여름수련회에 할 열왕기에 나와요. 아합 왕이 나오는데 아합 왕 배후 세력자가 이세벨이죠. 이세벨이 아합 왕을 조종합니다. 아합 왕이 여호와 믿는 제사장을 다 죽였어요. 그걸 엘리야가 인정합니다. 다 죽고 달랑 나만 남은 거예요.

알랭 바디우 철학에 의하면 엘리야는 신의 사랑에 도취된 사람이에요. 신의 사랑에 도취됐지만 있음의 세계에서는 다 죽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여호와께서 뭐라고 합니까? 달랑 너만? 아니야. 남은 자 칠천 명이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정치의 위력이라는 것은 있음의 세계, 상황에서, 알랭 바디우에 의하면 상황의 상태, 상태의 세계에서는 있음의 세계가 없음의 세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어둠이 빛을 이길 수가 없다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알랭 바디우는 상황에서 상태로 바뀌면서 새로운 사건에 의해서 주체로 등장한다고 해서 철저하게 사도 바울의 복음적인 것을 철학적 용어로 바꿔 이야기해서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성도란 이름, 교회란 이름의 새로운 집합적 주체가 등장한다고 설명하는 철학적 논리를 자기 철학으로 제공하고 있는 거예요.

그 제공하는 것 중에서 상당히 놀라운 일을 해요. 새롭게 돌출되는 사건화 된 새로운 주체는 오직 이름뿐이라는 거예요. 이걸 어디에 적용시키느냐 하면, 사도행전 4장 12절에 적용시킬 수 있어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 상태에서 이름뿐이라는 것은 주체가 없지요. 있음의 세계에서는 예수님이 안 보이죠. 그런데 로마서 10장에 보면 오직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럼 구원된 나라는 어떤 나라에요? 로마서 14장에 보면, 하나님 나라는 의와 희락과 평강이 되죠. 왜 하늘나라를 눈에 띠는 기적적으로 안 보여주는 거예요.

알랭 바디우 철학은 이게 해명이 돼요. 있음은 있는 내가 선택하기 때문에 선택해서 잡아놓은 상황의 세계기 때문에. 왜 그러냐? 있음을 긍정해야 되기 때문에, 나의 선택을 긍정해야 되기 때문에, 나는 옳은 선택을 했다는 걸 늘 긍정해야 되기 때문에. 이게 자기 의죠. 예수 믿는 것도 내가 정신 바짝 차려서 믿었다는 거예요. 이걸 긍정하기 위해서는 이런 세계가 유대인의 세계고 그 세계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됩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잖아요.

그리고 요한복음 20장에서 도마에게 하는 말이 있어요. 네가 보고 믿느냐?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있지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지요. 복이 뭡니까? 알랭 바디우 철학에서 잘 해명돼요. 있음의 세계에서 없음의 세계로, 속함의 세계에서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이 세상에 섞였다는 것, 포함됐다는 거예요. 포함됐다는 말은 나그네가 됐다는 것,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의 소망이 뭐였습니까? 난 떠나고 싶다. 섞였는데 이 땅을 떠나고 싶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 기도에 이런 게 있어요. 내가 너희에게 속하지 아니했다. 속하지 않았는데 남겨둔 이유는, 내가 전한 진리를 너희에게 전하기 위해서. 알랭 바디우가 진리란 말을 할 때 요한복음 17장을 인용했는지 나는 모르겠어요. 내가 너희를 남겨두고 속하지 않았지만 포함되게 한 이유는,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 했다는 거예요. 진리로 거룩하기 위해서 같은 말이에요. 

알랭 바디우의 [존재와 사건] 책 말고 다른 여러 가지 책을 함께 제가 봤거든요. 기독교 복음을 철학으로 설명하려고 애를 많이 쓰고 있어요. 그 중에 핵심은, 진리는 네 가지 노선으로 한다고 해놓고 그 중에 사랑이란 노선, 종교 있잖아요. 신, 일자, 궁극적인 오직 한 분, 이것을 쳐버렸단 말이죠.

알랭 바디우는 뭘 이해하느냐 하면, 십자가는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는데 왜 그러냐 하면, 십자가 주변의 있는 모든 것이 상황상태가 아니고 상황이기 때문에 일자를 노리고 있는 일자를 원하고 있는 종교적 세계기 때문에 그 세계에서 십자가 사건은 하나의 사건으로 터질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겁니다. 설명이 제대로 된 거예요. 알랭 바디우 철학으로 복음이 철학적으로 얼추 됐다고 볼 수 있어요.

특히 아까 주체에서 실체가 없다는 말은, 이름만 있다고 해서 이걸 어디까지 적용하느냐 하면, 구약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 분이 하나님입니까, 하나님 이름입니까? 하나님 이름이겠지요. 이스라엘 전쟁은 하나님 전쟁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이름이 벌이는 전재이에요. 출애굽기 15장.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의 용사니. 시편 보세요. 젖먹이를 통해서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리라. 주의 이름이라고요.

그런데 알랭 바디우의 철학이 나오기 전까지 신학에서 도무지 이름을 설명할 길이 없어요. 지금도 알랭 바디우 철학을 몰라요. 그들은 모든 현재 교회의 신학은 존재로부터, 상황에서 나온 거예요. 우리 교회 부흥되면 되고, 목회 잘하면 되는 그만이라는 거예요. 하늘나라 확장하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신학이 알랭 바디우한테 배워야 돼요. 다음에 나오는 지젝한테 배우고. 지젝은 알랭 바디우에 대해서 약간 공격하고 있습니다. 정치부분에서. 지젝은 알랭 바디우가 아직도 정치에 대해서 희망을 걸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최근에 나온 지젝의 책에 보면, 자본주의에 희망이 있느냐? 왜냐하면 정치는 경제가 바탕인데 알랭 바디우는 경제 이야기 안 하고 있지요. 정치의 폭력성, 우리나라 잘 되면 전쟁도 선이 된다는 그것. 우리나라만 좋다면 얼마든지 전쟁에서 승리하면 우리한테 유리하다는 것. 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 따면 다른 나라 동메달 따든지 상관없이 우리만 기뻐하면 그만 아니냐. 이게 상황이고 있음의 세계에요. 이게 무슨 윤리고 도덕이에요. 자기들끼리 윤리도덕이지.

그래서 알랭 바디우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진리는 내다파는 용이 아니다. 이 말은 현대사회가 진리를 어디서 찾고 있다? 시장에서 결정된다. 그걸 가치라 하지 않아요. 가격이라 해요. 이번 신랑은 가격이 어느 정도 되느냐? 이번 신부는 얼마짜리야, 이렇게 되지요. 가치는 없어요. 그냥 가격이에요. 그런데 가격 결정에서 정보가 결경해요.

그러니 이 세상이 정보라는 찌꺼기, 쓰레기에 밀리고 있어요. 오늘도 오다보니까 지하철에 어른들이 모르는 정보가 나와 있습니다. 요새를 지켜라. 다운 받으세요. 이게 게임하는 청소년들은 아는데 여기 해운대에 사는 노인네들, 저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그게 정보거든요. 정보사회에서 그걸 모른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지식이 적게 확보됐지요. 그러면 시장에서 가격이 어떻게 형성됩니까? 단가가 떨어지지요.

그래서 노인들은 이 세상에서 상황세계에서 아무 가치 없는 겁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가격을 높이기 위해서 시장이 원하는 것을 따라 잡아야 되겠지요. 바로 그런 경제적인 문제를 기초한 정치에 대해선 알랭 바디우는 거기까지 많이 관여하지 않아요. 그건 지젝이 관여했고. 그건 다음에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사는 세계를 다시 한 번 점검해보길 원합니다. 참 주님을 위해서 만든 세곈데 머리로선 그걸 안다고 하면서도 자꾸만 우리 자신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 우리도 같이 잘 되길 바라는 그러한 비 복음적인 성향을 다시 노출시킵니다. 이러한 지옥 같은 세상에서 복음을 알게 된 것에 늘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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