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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3 16:55:44 조회 : 979         
경계선 170612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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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19.♡.174.163) 17-06-16 09:14 
20170613a 부산강의 : [시편]1(1,2편)-경계선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1편, 오늘부터 시편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시편은 성경이죠. 시편을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시와 같이 보시면 안 됩니다. 사람은 문학적 창의성으로 얼마든지 시를 지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시가 들어올 때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이 말은 인간들이 경건하고 은혜롭다 하더라도 성경 속에 들어오고 나가고는 인간의 소관이 아니고 하나님 소관입니다.

그 이유가 시편에 나와 있는 모든 말씀은 직접 하나님이 인간에게 은혜 주시려고 하신 말씀이 아니고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겨냥하고 있거든요. 주님이 친히 준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떠한 글을 선지자를 통하여, 여기는 다윗이 되겠는데, 시편을 주신다는 것은 이 자리에 인간은 도저히 끼어들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한 이야기가 성경 속에 끼어들 수 없다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에요. 그것부터 시작해서 더 깊이 들어가면 어떤 내용이 있어야 되느냐? 시편에 나오는 모든 말씀을 아무도 지킬 수 없다는 것, 그 점을 또 분명히 해요. 시편 1편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어떤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을 질적으로 규정하는 거예요. 너는 의인, 너는 죄인이라고 할 때 규정되는 내용은 주님이 따로 주신다는 거예요. 하늘에서 또는 시내 산 위에요. 지상에서 본인 양심이 비추어 바르게 산다고 해서 의인이, 선인이 되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다른 이웃과 비교할 때 월등하게 반듯하게 산다고 의인되는 게 아니에요. 달리 있어요. 조건을 따로 준다고요.

예를 들어서 만두집이 두 군데 있는데 한 집은 만두 속에 뭘 넣었는지 오묘한 맛이 나는 맛 집으로 소문나 줄을 서는 반면에 다른 집은 마트에서 냉동만두 사서 쪄내는 거예요. 겉모습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잖아요. 도대체 만두에 무슨 짓을 한 거야? 겉모습은 만두 모양인데 속이 다르잖아요. 뭘 집어넣었느냐는 거죠.

시편을 시작하면서 이것부터 우린 알아야 돼요.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성도에 집어넣는 것은 인간이 지키고 싶어도 못 지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시편에서 말하는 의인입니다. 다시 이야기해볼게요. 시편, 시들을 모아놓은 내용은 인간의 시가 여기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가, 장차오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새로 개입될 메시아와 연관해서 시편 내용이 있습니다.

따라서 시편 내용이 장차올 메시아 직접 연결되는 것이지 지금 하나님 계시고 인간 있는데 하나님 보기에 우리를 경건하게 만들고 또는 우리가 바르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주신 내용이 아니에요. 경건하게 쓴다고 시편 같은 그러한 가치가 있는 게 아니란 말이죠. 성령께서 시편 되게 하신 것은 성령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과 연결시키기 위해서 한 겁니다.

아이가 오후에 집에 있는데 등기소에서 편지가 왔어요. 초등학생이 내용을 모르죠. 그런데 뜯어봤습니다. 계약서가 어떻고 등기가 어떻고 한단 말이죠. 모르잖아요. 이건 얘가 볼 책이 아니라니까요. “아버지, 여기 편지 왔어요.” 이것이나 해야 되잖아요. 그렇다면 그 편지가 초등학생이라 글자를 안다고 해서 그 의미에 도달되는 건 아니란 말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시편을 어릴 때부터 다 가르쳐요. 또박또박 읽는 정도가 아니라 시편 같은 경우에는 외운답니다. 그것도 유대교에 철저한 신자 가정에서 그렇지만. 그게 15퍼센트 정도 된답니다. 나머지 85퍼센트 날라리들은 여호와를 안 믿어요. 하지만 여호와를 믿는 이스라엘은 믿어요. 그래서 전쟁 나면 목숨 걸고 지키는 거예요. 여호와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여호와를 믿는 나라가 있어야 본인들이 사니까. 여호와는 자기 명분이 아니더라도 유대교는 자기 명분이 되는 거예요.

얼른 들으면 상당히 모순되는 이야기거든요.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난 모르겠지만 하나님이란 유용성은 자기한테 필요하다는 뜻이에요. 그 유용성. 하나님이 있음으로써 심적인 안정성은 유리한데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보조적인 위치에 있는 거예요. 이건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있는 게 아니고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는 거예요. 어떤 신이든 내가 중요하지 하나님이 나보다 더 중요하진 않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런 점에선 굉장히 솔직한데요. 그들은 논리적이거든요. 만약에 나보다 하나님이 더 중요하다면 내가 사는 것은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게 싫은 거예요. 내가 나한테 투자하고 내 인생을 내게 맞추어서 하루하루 짜 맞추어 착실하게 살아가는 이것을 하나님이란 어르신이 등장하면 논리적으로 따져도 소용없는 거예요. 내가 나한테는 공들여서 살아요. 하지만 나 외의 문제에는 사람들은 그냥 건성으로 살아요. 이건 누가 안 가르쳐줘도 본성이거든요.

다급한 문제, 시급한 문제 다 나와 결부된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시급하고 다급하다? 그건 내 문제 아니에요. 그러면 하나님, 네가 하란 말이죠. 나한테 시키지 말고. 하나님 문제가 내게 시급한 문제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이런 태도를 본인이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래서 여호와 믿는다는 유대교에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아요. 85퍼센트의 유대인들은. 하지만 어려울 때 내가 힘들 때에 잽싸게 달려가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어떤 안전망은 필요하단 말이죠.

그럴 때는 여호와 하나님일 수는 있는데 여호와 하나님을 공유해서 믿는다는 연대성, 그 공동체의 힘이 대단한 힘이에요. 윤복희가 노래했잖아요. 누가 날 위로해주지? ‘여러분’ 아닙니까. 사람은 여러분 안에 소속돼있다는 그것 때문에 힘들 때마다 위로받을 수 있다는 그런 배경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자기 마음을 안정되게 하는지 모릅니다.

결혼 초에 독립해서 살지요. 하지만 진짜 아무것도 없는 집안과 결혼해서 사는 것과 있는 집안, 되는 집안, 뭐든지 든든한 집안, 말께나 통하는 집안, 그리고 변호사와 판사가 그득한 집안, 그런 집안이라면 나가 살더라도 법적인 분쟁거리가 있을 때 어떻습니까? 시삼촌 찾아가고 든든하죠. “조카, 뭐 어려운 일 있으면 나한테 이야기해. 내가 부장 검사인데 그것 하나 못해줄까.” 말만 들어도 얼마나 든든합니까. 그게 바로 유대인들이 말하는 유대교의 입장입니다.

제가 남의 종교를 길게 하느냐 하지만 길게 하는 게 아니고 기독교라고 걸쳐놓는 게 유리하단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솔직하다 했지요. 하나님 안 좋아해요. 하지만 걸쳐놓는 게 든든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냔 말이죠. 오늘날 소위 교회 기독교인들은 안 그러냐 말이죠.

교회 다니면서 난 예수 때문에 살지, 그것 아니면 살지 않아, 이렇게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사람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요. 예수님은 본인 일 하시고 나는 내 일 하겠다는 거예요. 아쉬울 때 찾아가겠다는 거예요. 주님 보고 싶어서 눈물 나고 그런 것 없습니다. 주님 사랑 안 해요.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도 못해 줘서 탈인데 언제 남의 일까지 챙깁니까? 정신이 그런 데까지 안 팔립니다.

왜 제가 이렇게 초반에 길게 하느냐 하면 시편이 직접 예수님과 연관된다고 했지요. 시편에 가장 진지한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 외는 아니에요. 그걸 의도해서 시편 주신 겁니다. 어느 누구도 율법 준다고 해도 날마다 묵상하는 사람 없어요. 그래서 날마다 묵상하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시편을.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시편을 예수님을 향하여 왔다면 우리는 좋으나마나 한 것 아닙니까? 하는데 하지만 예수님과 관련된 시편을 우리한테 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해서 시답지 않게 대하는지를 폭로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거예요. 말씀을 듣지 않고 복음을 듣지 않으면 자기가 사는 것이 남들처럼 사니까 평균 쯤 되는 줄 알고 있어요. 사람들 보기에 평균으로 묻어가면 하나님 보시기에도 그렇게 봐줄 줄 착각하고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의 분위기에 옹야옹야 그렇게 인정 많은 엄마 아니에요. 냉혹합니다. 비정해요. 주님은.

성경 주고 성경대로 재판하십니다. 판검사 사법고시 준비하는 사람들, 로스쿨에 있는 학생들이 뭘 배웁니까? 헌법 배우잖아요. 그것은 헌법이 있다는 이야기거든요. 한국에 법률이 있으니까 법을 공부하는 거잖아요. 그러면 성도가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뭡니까? 천상천하유아독존, 이 세상에 나밖에 없으면 성경은 그냥 만화책이에요. 옛날 신화이야기에요. 그 당시 시대상, 역사문집, 그것뿐이에요. 그런데 성경을 본다는 것은 지금 하나님이 계시다는 겁니다. 마치 사법고시 준비하는 사람이 법이 현실적인 것처럼 그것보다 더 확실하게 하나님의 존재가 우리에게 현실적이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율법을 모르는 것은 현실에 대해서 맹인으로 살아가는 어리석게 살아간다는 것을 스스로 자인하는 사람에게만 성경을 진지하게 볼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되는 겁니다.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 교회 나와도 그만 안 나와도 그만, 이게 아니고 나 살아있는 것보다 더 오래 살아있는 거예요.

의미란 영원과 관련지어야 된다. 이 세상에 사는 의미란 영원함과 관련돼야지요. 영원함과 관련되지 않는 의미란 그때그때의 구멍 메우기밖에 안 돼요. 정의를 위해서 변호사 됐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 사회정의를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변호하면서 법이 법대로 실현되는 사회를 위해서 나는 불의에 굴하지 않고 검사든 판사든 재벌과 결탁하지 않고 오직 민주주의,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사법인이 되겠다고 선언한다고요.

그런데 승진이 늦다. 갑자기 검사가 전세는커녕 월세를 전전하는데 다른 동료는 어떤 수단을 부렸는데 승진 되고 몇 억짜리 집으로 이사한다. 그럴 때 마음이 흔들린다면 승진이 누락되고 자꾸 지방으로 가고 바른 소리하니까 조직에서 따돌림 받을 때 사건도 안 맡기고 할 때 그 사람의 사회정의는 용두사미가 될 가능성이 많겠지요. 바르게 한다하다가 오래 안 가지요. 그러면 바르게 한다는 것이 의미 있습니까? 의미 없어요. 왜? 영원함과 관련 없어서 안 되는 거예요. 나 하나 외친다고 사회가 정의롭게 되나. 꿈쩍도 안 하는데 내가 뭘 어떻게.

또 이런 식으로 핑계될 수 있어요. 나 하나 외친다고 안 되더라. 일단 조직을 만들어볼까. 하지만 그 사람은 그걸 알아야 돼요. 사회정의를 한다고 조직을 만들게 되면 사회정의가 우선이 아니고 자기가 만든 조직에 자기 자존심이 걸려서 그게 우선이에요. 조직 잘 되기 위한 온갖 부정과 불의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영원과 결부돼야 의미 있다는 말은, 시편 율법을 주신 이유는, 결국 인간들은 의미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뭔가 없다, 뭐는 아니야, 너는 엉터리야, 라는 말은 우리를 통해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애초부터 그 말을 우리한테 할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넌 안 돼. 자꾸 윽박지르지 말고 가만있으면 되지 않겠느냐 그런데 하나님께선 그렇게 하지 않아요. 인간 내부에 의미도 없으면서 자꾸 의미를 만들어내는 어떤 괴물이 있어요. 그것을 주님께서 놓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을 시작하면서 먼저 우리가 생각할 것은 이겁니다. 나는 신자가 아니다. 이 고백을 내놓으면서 본격적으로 구원의 길, 신앙생활의 길, 신자의 길을 주께서는 인도하십니다. 내가 신자가 돼버리면 자신이 신자인 것을 움켜쥐려고 해요. 그러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완전히 밑바닥까지 말씀이 와서 다 들춰내는 것을 누가 방해하느냐 하면, 내가 그렇게 해요. 나는 신자인데 나를 개무시하는구나. 암세포를 완전히 핵심부분까지 도려내야 되는데 어설프게 도려내면 또 번지잖아요. 깔끔하게 뿌리 채 뽑아내야 돼요. 그래서 신자 아닌 거기에 신자 되게 하는 겁니다.

방금 이 말에 대해서 오늘 강의에서 적절하게 예를 든 게 있어요. 만두 비유 있잖아요. 두 집이 있는데 한쪽은 맛있고 다른 쪽은 맛이 없더라. 겉모습은 똑같은데 속이 다르지요. 그 속이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속을 이스라엘이란 껍데기에 심어주는 거예요. 결국 이것은 교체 작업=신앙생활입니다.
 
주께서 후벼낼 때 후벼내는 수단은 말씀이에요. 후벼낼 때 딸려오는 것은 고름 같은 것, 저건 가져오면 안 되는데, 나의 의미, 의미는 영원과 관련될 때 의미가 있는데 우리는 영원과 끊어져 있으면서도 자기 고유의 의미라고 쥐고 있겠지요. 그건 일종에 고름 같은 거예요. 그런 건 나한테 있으면 안 돼요. 그러면 천국에 못 가요. 그러면 말씀이 전부 도려내는 작업이 있겠지요. 그게 바로 신앙생활이라고. 신앙생활은 나는 신자 아니라는 고백이 날마다 나올 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거예요.

만약에 나는 신자라고 교회 오면 이건 의미가 있습니까? 의미가 없지요. 그렇다면 나는 신자라고 우기면서 교회 나올 때 만약에 복음 아는 목사가 묻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신자입니까?” 그러면 자기가 느낀 걸 재료로 해서 이야기할 것 아닙니까. 바쁜데도 교회 나왔습니다. 바쁜데 교회 나올 정도로 정성이 대단하다든지, 오년 전에 암에 걸렸는데 기도해서 나은 것, 십년 전에 십일조 했더니만 30배나 채워진 것, 중보기도 하니까 안 믿는 집안 식구 전부 교회 간 것, 새벽기도 하고 난 뒤에 교회가 부흥한 것, 하여튼 자기가 자기한테 의미 있을만한 건 다 갖다 붙이지요. 머리가 빠졌는데 기도하니까 갑자기 머리카락 났다든지, 아들이 갑자기 성령 받아 새사람 됐다는 이런 것 있잖아요.

하여튼 내가 원인이 되어서 괜찮은 열매 맺었다는 걸 다 끌어 모으는 거예요. 여러분이 그런 것 생각하나거든 버리지 마세요. 왜? 그런 걸 갖고 말씀 앞에 설 때 나는 신자가 아니구나. 왜냐하면 그런 것은 영원한 하늘나라와 관련이 없어요. 영원까지 이어지지 않아요. 만약에 내가 방언을 한다. 적어도 영원까지 이어질 방언이라면 툭 치면 나와야 돼요.

기도해서 뭔가 응답받았다면 내가 하는 기도는 다 응답받아야 돼요. 진짜 중보기도가 능력 있다는 걸 증명하려면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안 되는 걸 골라서 기도해줘야 돼요. 가능성 있는지 계산하면 안 돼요. 예를 들어서 오늘 집에 가면 누가 벤츠차를 줘야 되는데. 이런 건 말도 안 되지요. 이런 걸 기도해야 된다니까요.

믿음 있다 할 때 주님이 뭘 상품으로 걸었습니까? 네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산을 옮길만해요. 주님께서 미리 경품을 걸었어요. 믿음이 있다고 티내는 사람은 도전해보란 거지요. 믿음 그것도 큰 믿음이 아니고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여기에 도전해봐라. 산을 옮겨봐라. 기도 응답을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정한단 말이죠.

제가 물어볼게요.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대단합니까, 예수 십자가 믿는 믿음이 대단합니까? 십자가 믿음이 대단해요. 아까 유대교 이야기했지요. 85퍼센트는 건성이라고. 15퍼센트를 이야기하면 군대도 안 가. 나라에서 생활비 줘요. 그 사람의 하루일과가 성경만 연구하고 안식일엔 바빠요. 괭가리 치면서 안식일에 가게 문 닫으라고 지시하고. 민방위훈련에 완장 찬 사람과 똑같아요. 그것 하라고 나라에서 보조받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85퍼센트에겐 눈엣가시 같아. 꼭 선생님 편에 선 아주 성질 나쁜 반장 같은 느낌. 그런데 국가에선 그 사람들 때문에 대부분이 유대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으로 해서 미국에서 엄청난 보조가 들어와요.

미국에서 유대인이 잘 되는 이유가 있어요.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면 예수님이 재림하기 때문에. 안 믿지만 걸쳐놓으면 좋은 것 있잖아요. 그러니까 미국에 있는 많은 부자들이 이스라엘에 보조하고 원자폭탄까지 제공하고. 이스라엘이 승리해야 주께서 감람산에 재림하기 때문에. 아랍, 이방민족들 요한계시록대로 아마겟돈 전쟁해서 몰살시켜버리고 이스라엘이 우뚝 설 때 주께서 재림하고. 생각만 해도 신나지 않습니까? 알라 신 믿는 이슬람 사람들 원자폭탄에 죽는다면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이 얼마나 속이 시원하겠어요.

21세기 역사가 성경대로 될 때 자기가 걸치고 있는 기독교를 제대로 믿었다는 반증이 되니까 얼마나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성령이 역사에 비춰서 믿어지는 거예요, 아니면 그것 없이 믿어지는 거예요? 그것 없이 믿어져야 되거든요. 그런데 믿음은 없지, 성경대로 하면 마지막에 지옥 갈 수 있지, 그러니까 지옥 가는 건 싫고 성경에 나오는 천국은 가고 싶고 믿음은 없고.

그러면 남는 건 뭡니까? 계속 이스라엘 주변을 살피면서 확인 작업에 들어가는 거죠. 잘 됐다. 시리아, 카타르 봉쇄되고, 수니파, 수아파 어디 있는지 찾아보자. 찾아보기는 지 마음대로 해석하면 그만이지, 뭐. 아랍, 이스마엘 후손 제국들이 요한계시록 어디에 나오더라? 안 나오거든요. 그들은 나온다고 우기면서 슬슬 삼년 반 전 환란기에 들어갔구나. 휴거할 때 됐다. 흰옷 준비하자. 공중에 떠가면서 나머지 대 환란에 있는 사람들 보면 얼마나 시원하겠습니까. 교회 안 다닐 때부터 알아 봤어, 하면서.

혼자 탈출했을 때 그 가뿐한 느낌, 미리암이 언제 찬양했습니까? 바로 홍해에 애굽 군대의 창과 갑옷과 마차의 잔해가 떠오를 때 아마 제 생각엔 이대로 세상 끝났으면 좋았을 거예요. 더 진척하지 말고. 감히 히브리인들을 따라왔던 수많은 군대가 바닷물에 완전히 잠겨서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일 때 하나님 믿는 보람이 절로 날 것이고 찬양하지 말래도 찬양할 거예요. 이건 찬송가 불려서 찬양이 아니고 유행가 불러도 그게 찬양 될 거예요. 송대관의 네 박자 불러도 찬양 될 거예요. 너무 기분 좋아서.

그런 경우가 사사기, 여호수아에 나오거든요. 해가지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에서 우박 떨어졌습니다. 사사기에선 미디안 군대가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도 못하고 서로 싸워서 완전히 전멸했어요. 엘리야 시대엔 문둥병 거지 세 명이 나와 보니까 포위했던 아람 군대 다 죽었어요. 이사야에선 앗수르 군대 십팔만 오천 명이 다 죽었어요.

왜 그렇게 신나는 일이 오늘날 21세기에는 안 일어납니까? 구약 때는 있고 신약 때는 해가 멈추는 일이 왜 안 일어나요? 동방박사가 별 따라 오는 일이 왜 안 일어납니까? 그들은 자기 잘 되기 위해서 그런 획기적인 일을 기다렸지만 신약 때는 십자가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분시키는 겁니다.

십자가를 어떻게 믿을 수 있어요. 산 옮기면 십자가 믿는 믿음이에요? 그 믿음 아니에요. 물 위를 걸으면 그 믿음이에요? 그 믿음은 예수님 배반한 믿음이에요. 베드로가. 그 잘난 베드로가 십자가 이야기할 때 그러면 난 못 믿겠습니다, 할 때 그게 마귀 들린 거예요. 그렇게 많은 기적과 교회를 부흥시켜서 결국은 그들은 십자가 앞에서 가짜임이 들통 나는 겁니다. 여러분, 아로나민 골드 먹은 날과 먹지 않은 날이 차이가 나요. 십자가 믿는 것과 안 믿는 것이 차이가 날 수밖에 없어요.

시편 자체는 안에 내용은 없어요. 이걸 경계라 합니다. 경계는 안과 밖을 규정하는 그 기능으로 끝나는 거예요. 이게 엠피쓰리 케이스거든요. 얇지요. 케이스가 있다는 말은 케이스 안에는 엠피쓰리가 들어있고 바깥엔 없다는 것을 케이스로 설명할 수 있지요. 그냥 엠피쓰리 보여주면 되는데 왜 케이스가 있느냐? 사람들은 케이스 안에 엠피쓰리가 안 보이니까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 가능성이 반반이죠. 안에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고 있을 수도 있는 거고. 그래서 반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니까요. 그래서 케이스가 있음으로써 엠피쓰리 보고 이게 뭐지? 엠피쓰리. 이런 식의 믿음은 안 받아주는 거예요.

율법을 줌으로써 사람들은 율법 안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할 겁니다. 그런데 율법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아요. 말씀은 경계적 기능만 할 뿐이에요. 굉장히 중요한데요. 여러분 거울 앞에 섰을 때 거울에 서기 전에 내가 예상하지 않은 것이 거울에 나온다면 그건 귀신입니다. 그런데 거울 앞에 설 때 반드시 자기 예상한 대로 하지요. 거울 앞에 누가 보입니까? 내가 보이지요. 그러니까 평소에 거울 앞에 서나 안 서나 인간은 자기만 믿고 사는 거예요.

그런데 말씀 앞에 섰을 때도 마찬가지에요. 말씀 앞에서 뭘 끄집어내느냐? 내가 율법 안에 들어있는 것 끄집어내서 내가 지켜서 죽어서 좋은 나라, 천국 가겠다고 나온다면 그건 믿음이 아니라니까요. 나를 믿어요. 말씀을 믿든지 불경을 믿든지 뭘 하든지 나를 믿는 거라니까요. 새로운 게 없어요. 그냥 다짐이에요. 역시 믿을 건 나밖에 없구나. 그렇게 다짐을 할 뿐이에요. 사람들이 교회 나올 때 다짐을 할 뿐이에요. 전혀 믿음은 없고. 교회 등록하길 잘했어, 헌금했으니까 이번 주에 좋은 일 있겠지, 이런 것.

이것을 자기 최면이라 합니다. 교회는 자기 최면의 장소만 제공할 뿐이에요. 조폭들이 놀음은 안 해요. 뭘 합니까? 산 밑에 도박장만 개설하고 10% 떼어먹지요. 교회가 하는 일이 이거에요. 교회는 자기만 믿을 만하고 자기 포부, 자기 이상만 처음부터 그것만 소망하면서 자기 잘되길 소망하면서 온 거기에 대해서 도박장 개설하고 10% 떼먹는 것처럼 그걸 십일조라 하는데 그렇게 장소 개설한 것이 교회입니다.

이왕이면 에어컨 빵빵하고, 얘들 쉼터까지 만들고, 노인네들 색소폰, 꽃꽂이까지 개설하면 어차피 어느 교회든 도박장이니까. 이왕이면 시설 좋고 교인수 많으면 자기 헌금 부담이 적어지잖아요. 큰 교회 가면 천 원만 내도 점심은 이천 원짜리 먹는데. 갈 때마다 천 원 이익 보잖아요. 그러니까 젊은 얘들 필리핀 선교여행 보내주지. 이득 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세상에 이런 교회는 없어요. “여러분, 여러분이 죽어 마땅한 줄 아시죠. 죽여 드릴게요. 여러분, 돈 잃으려 도박하지요. 야무지게 돈 잃게 해드리겠습니다.” 이런 도박장 없어요. 노력하면 딸 수 있다고 그런 희망 주잖아요. 어차피 하나님이고 이런 건 다 부수적이고 우리한테 그다지 중요한 계약이 아니고 필수과목도 아니고 그냥 선택과목에 지나지 않아요. 우리한테. 그렇지 진지한 게 아니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시편 준 것은 시점이 언제냐 하면, 이미 전에 줬던 모세율법이 쓰레기로 다 처박히고 그 시대가 율법 없는 종교로 바뀐 시대에 주어져요. 율법은 있는데 율법을 버리고 다른 종교로 바뀌었습니다. 그게 바알과 아세라 종교로 바뀐 거예요. 바알과 아세라 종교가 산당, 높은 산 위에 세워졌어요. 뿐만 아니고 여호와 제사장들도 장사가 잘 되니까 겉에는 여호와인데 안에는 바알과 아세라 종교로 바뀐 거예요.

오늘부터 시편 하는데 시편 안에 담긴 내용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내용이 아니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어요. 그래서 시편이 어려워요. 너희는 이렇게 하라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을 너희들이 왜 그렇게 미워했고 구박했느냐는 것이 시편 내용이에요.
 
따라서 안 믿는 분위기가 필요 없단 말입니까, 필요 있단 말입니까? 필요 있어요. 안 믿는 분위기라 해서 주님께서 실수했구나가 아니에요. 의도적이에요. 문제는 그 당시 다윗 시대에 안 믿는 분위기는 대세가 그것도 믿음으로 쳐주자고 완전히 확연하게 바뀐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너나 나나 믿는 자가 없기 때문에. 그냥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예요. 그냥 이 조시로 가자는 겁니다. 별 것 있나 옛날부터 관행적으로 그래 왔다는 거예요.

조직사회에서 아주 생기발랄하고 뭔가 해보려고 의욕이 넘치는 신입사원들이 제일 부딪치는 것이 뭐냐 하면, 노털들, 부장, 과장들이 했던 관행상 해왔던 것이 초반에 굉장히 충돌을 일으킵니다. 힘들어요.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는 거예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뭣도 모르고, 요새는 1도 모른다고 하는데 교회에 취업한 신출내기 목사가 의욕이 넘치거든요. 설교도 김성수 목사 설교 듣고 한국교회 문제 있다고 하는데 진짜 요새 말로 1도 모르는 거예요. 교회가 어떻게 해야 운영이 된다는 사정을 전혀 모르는 거예요.

지금 판이 갈렸잖아요. 건물 부동산 있지요. 자기한테 월급 주지요. 강대상 아름답게 있지요. 이미 자기가 취업하기 이전에 50구역에 구역장들 다 있고. 밑에 하부 시스템이 다 짜여있는 거예요. 지는 중간 관리자로 온 거예요. 부목사로, 과장급으로 온 겁니다. 위에 부장이 있는데 장로들이에요. 장로들은 부교역자를 자기 밑에 부하직원으로밖에 생각 안 해요. 그러면 이 시스템 속에 뛰어든 거예요. 의욕 가지고. 심방 가면서 이야기를 해대는데 주위 사람들 보니까 같잖지도 않아요.

만약에 자기한테 새벽기도나 수요일 설교가 맡겨줬다고 합시다. 거대한 예배당 안에서 그 사람은 강단은 누가 기증했으며 피아노는 누가 기증했으며 꽃꽂이는 누가 봉사했으며 커튼과 휘장은 언제부터 달았으면 건물 지을 때 얼마짜리인데 그런 것은 부교역자는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전부 다 돈 덩어리고 헌금해서 한 것을 모르고 지가 바른 소리 할 자격이 되는지 분간도 못하는 거예요.

만약에 같이 부교역자 취업했는데 눈치 빠른 사람은 앞으로 승진 될 거예요. 그럼 수요 설교에서 뭐라고 해야 됩니까? “이 교회 와서 보니 수십 년 동안 피땀으로 새벽기도하고 철야기도 한 덕분에 하나님께서 거대한 성전 주셔서 나로 하여금 여기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 서게 역사하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럼 뒤에 앉아 있는 당회장 목사는, “사람 하나 잘 들였네. 저게 뭘 아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른 놈이 와서 “여러분, 이건 성전이 아닙니다. 성전은 끝났습니다. 신약에는 십일조 없습니다.” 벌써 뒤쪽 장로들부터 수군거리고 분위기 이상해지는 거예요.

바르게 산다. 나 하나 정의롭게 산다. 그러면 주위에 가족들은, “네가 정의롭게 산다는 언어를 내뱉기 전에 그 말을 하기 위해서 나는 수십 년 동안 너를 키웠다. 부모 말을 무시하느냐?” “어머니, 제가 원하는 여자와 결혼하겠습니다.” “결혼이 너만 하는 결혼이냐? 하나밖에 없는 아들, 내가 너 결혼시키기 위해서 그동안 고생한 것 다 무시하느냐?”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아버지가 이상해>란 드라마에 그 이야기가 나와요. “너는 너무 이기적이야. 너밖에 몰라.” “어머니 그게 아니고요. 치워라. 자식 키워도 다 소용없어.” 그럼 그 자식은 어떻게 합니까? 협상과 타협을 하면서 평화를 도모하겠지요.

이 이야기로 첫째 시간 마치겠는데 이 이야기를 왜 합니까? 이 말씀 줘도 지킬 사람 있다, 없다? 없어요. 신자 되고 싶지요. 사회가 신자 되도록 방치하지 않습니다. 말씀 지켰다고 하지요. 다 끄집어내보면 전혀 말씀과 관련 없는 나의 잘남을 집어넣고 도로 끄집어낸 거예요. 열심과 행함을.

바로 시편은 그걸 탓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것부터 시작해야 된다는 거예요. 성경을 볼 때는 하나님이 너와 거래하는 것이 아니고 따로 있다는 것을 네가 지금 너를 믿어서는 안 되고 따로 준비하신 분을 의지해야 된다는 것을 이미 시편 자체가 시작하니까 시편은 벌써부터 복음이에요.


10분 쉽시다.
 한윤범(IP:119.♡.174.163) 17-06-16 09:15 
20170613b 부산강의 : [시편]1(1,2편)-경계선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두 번째 시간은 약간 난해합니다. 율법을 예수님이 가져올 때 율법만 달랑 가져오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취지가 로마서 3장에 보면, 죄인 되게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거든요. 율법과 관련된 죄인들마저 인수인계해서 예수님이 가져오면 우리가 예수님을 찾아가는 게 아니고 찾기 전에 이미 나는 너를 알았다가 돼버려요. 구원은 그렇게 되는 겁니다.

창세전에 예정된 것은 창세전의 문제고 그 취지가 지상에서 구체화되는데 이스라엘을 통해서 형성되는데 내가 나를 데리고 주님한테 찾아가는 게 아니고 나는 율법 못 지켜. 행함으로 안 되니까 예수님을 믿자. 이렇게 되면 역시 자기 행함으로 자기를 구원하는 것밖에 안 돼요. 갈라디아서 3장의 몽학선생을 대부분 그런 식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율법 지켜서 안 되니까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죄로 예수 믿으면 된다. 그렇게 되면 그 믿는다는 것이 행함이 된다니까. 믿음이 아니고. 내가 믿었기 때문에 내가 구원받는 게 돼버려요. 행함이 그게 아니고 예수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미 예수님 안에 우리 사정이 다 들어있는 거예요.

결혼식 안 했는데 상대방이 나 몰래 혼인신고 한 것과 똑같아. 난 허락한 적도 없는데 이미 혼인신고 한 거예요. 사기꾼일 가능성이 많은데 복음에선 예수님이 그렇습니다. 바로 이 점이 잘 나와 있는 것이 산상설교에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 율법의 완성은 내게 대접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거예요.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누가 하느냐? 예수님이 해버리면 예수님 사랑의 대상이 된 이웃은, 이웃되고 싶어 하는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주님이 일방적으로 너는 내 이웃이라고 결정하면 그 사람은 주님이 다 완성하신 이웃사랑의 혜택을 입게 돼요. 따라서 우리가 이웃사랑을 실천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님이 혼자 이웃사랑을 완성했기 때문에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것에 대한 실적으로 결과물로 우리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 작업을 바로 성령께서 하셔요. 성령께서 통보를 해주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군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동사무소에 근무하는 공익이 스무 살 되면 통지서를 보내주지요. 언제까지 논산훈련소 들어오라고 통지서를 받으면 마음이 심란해집니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자기 마음대로 노는 시절은 끝났어요. 지옥 시작이에요. 지옥이 딴 게 있습니까? 내 몸인데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게 지옥이죠. 그동안 내가 나를 처분했는데 이제는 마음대로 처분 못하는 처지.

사실은 인간은 원래부터 자기 몸을 자기가 처분 못해요. 자기가 원하는 가정에서 못 태어나잖아요. 저는 그걸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오늘 강의 제목을 이렇게 하고 싶어요. 원판. 원판이란 처음 원래의 것. 어떤 사람이 공부를 되게 많이 했어요. 온갖 것 다 알아요. 그래서 책도 내고 그랬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뭘 모르느냐 하면, 내가 이런 공부를 왜 해야 되는 이유를 몰라요. 내가 왜 이런 짓을 해야 되는지.

다시 말해서 누가 내 허락 없이 나한테 이 몸을 준 거죠? 부모한테 물으면 모른다고 할 것은 뻔하고. 누가 줬는지 그분을 몰라요. 불신자의 절망이 그런데 있습니다. 열심히 행복하고. 인생사는 게 뭐 있어요. 순간적인 일시적인 만족의 연쇄 고리 아닙니까. 젊은 사람이든 늙은 사람이든 마찬가지지만 그때그때 만족하면 행복이라 하잖아요. 그날 행복한 게 내일 되면 전이가 안 되냐 말이죠. 전에 갔던 식당의 맛있는 것이 오늘 가면 왜 그 맛이 안 나느냐 말이죠.

왜 도대체 인간은 날이 갈수록 늙느냐 말이죠. 아는 건 많고 갈수록 착하다고 하는데 착하면 그만큼 만족해야 되는데 점점 더 만족도가 떨어져요. 삶의 질이 떨어져요. 온 몸이 아프니까. 스무 살 때는 한 달에 250만원 월급 주면 더는 더 달라고 안 하겠다고 했던 사람이 삼백만원 이상 주는데 왜 데모하고 그래요. 사회가 어떻고 하지 마세요. 처음에 십년 전에 했던 다짐, 각오를 내가 어떤 존재기에 왜 그걸 유지 못하느냐 말이죠. 결혼할 때 뭐라 했습니까? 당신만 있으면 더는 필요 없다. 당신보다 더 원한다면 나는 그게 죄가 됨이라. 더 바라면 죄가 된다던 그들이 6개월도 안 돼서 헤어진다는 말이 왜 나옵니까?

그것은 누가 나를 일방적으로 데려간 사람이 없어요. 처음부터 원판을 주신 분이 원판에 맞는 밀가루 반죽해서 토핑해서 피자가 나와야 돼요. 주께서 자기 작품을 만들어냄이 없으면 아무리 기독교가 어떻고 공부를 많이 해도 나중에 처절한 참혹한 미래가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걸 이를 갊이 있으니라. 공부를 못 해서가 아닙니다. 원판을 몰라서 그래요.

원판 모른 사람이 구약에 나옵니다. 시편이나 잠언, 전도서, 아가서를 지혜문서라 분류해요. 역사가 없으니까. 그중에 욥기에 원판을 모르는 사람이 나옵니다. 욥과 세 명의 친구, 네 명이 원판을 몰라요. 그래서 욥이 강력하게 신에게 대듭니다. 대드는 내용은 이거에요. 제가 뭐가 잘못됐는데 왜 힘든 인생을 삽니까? 딱 그것 한 마디에요. 나보다 못한 얘들은 멀쩡한데 나는 무슨 죄를 지어서 힘들 게 살아갑니까? 그걸 영어로 하면, Why me, Lord? 왜 하필이면 저에게.

그런데 주님이 나타날 때는 주님은 어떤 차원에서 욥을 추궁하고 압박하느냐 하면, 네가 원판을 아느냐? 이게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데 인간은 질문을 신체에서 발생된 이념, 왜 나를 힘들게 합니까, 할 때 하나님은 황무지와 염소새끼, 하마, 하늘의 별까지 너 하나 만들기 위해서 요소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왜 모르느냐 말입니다.

왜 모르느냐, 알란 말이 아니에요. “네가 꼭 알아야 돼. 알면 구원해줄게.” 그런 말이 아니고 네가 인간이면서도 인간이 뭔지 모른다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 보세요. 그들이 자기밖에 모르는데 신체 위에 걸쳐있는 모든 정신세계는 어디서 들어오느냐 하면, 살아온 인생이 경험한 모든 관계자들의 아우성이에요. 저는 이걸 이렇게 표현합니다. 세상의 합창. 모든 합창소리가 다 들어왔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내뱉는 모든 언어와 사고방식과 생활방식과 태도, 이 모든 것은 그동안에 자기가 들었던 것, 남들이 자기한테 잔소리했던 것을 아우성 등 그런 것을 고려해서 자기 정신세계로 육체와 반응을 나타내서 다듬어놓은 거예요. 그게 무슨 진리입니까? 네가 지금 우간다의 사정을 알아? 우리가 우간다 사정을 왜 알아야 되지요?

인간은 진리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지요. 진리에 대해서 모르면 주는 대로 먹어야 되지요. 그럼 왜 궁시렁거리면서 말이 많아요. 저 사람은 85층 아파트에 살고 나는 지하에 살고 왜 말이 많아요. 그게 욥기에서 하는 이야기에요. 고난을 주면 고난 받고. 내 마음인데 니가 왜 말이 많으냐 이 말이지요.

세상이 말하는 진리가 뭐냐? 아까 진리교회 주보에서 봤어요. [주님의 사랑은 주체를 이동시킨다. 죄인이라는 원천으로. 그래서 나에게 이익이면 선, 성공이고 나에게 손해면 악, 실패라는 사상을 바꿔버린다.] 이번 주 주보에 보셨지요. 이 말이 맞아요. 인간이 나름대로 선과 악을 규정했어요. 욥이란 지혜와 시편 지혜가 관련성이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다 치고 그 다음에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나와 같이 끌어올 때 바구니라면, 바구니를 언약이라 합니다. 이 이야기하려고 두 번째 강의가 어렵다고 한 거예요. 2인용 보트가 있지요. 연인끼리 타는. 저는 이걸 바구니로 봐요. 예수님과 같이 타는 거예요. 이것이 신약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주신 바구니가 없을 때 사람들은 교회 등록으로 대체해버립니다.

성경에 들어가면 이 바구니를 언약이라고 합니다. 언약을 완전히 지키는 자와 언약을 전혀 지키지 못한 사람이 짝을 이룰 때 그게 언약이 돼요. 언약을 못 지키는 자만이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가 보이게 돼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이 안 보여요. 이게 바구니입니다. 이 바구니를 사실 시편은 다윗이거든요. 다윗 이전에 이미 바구니를 소개해줬어요. 그 바구니가 어린양의 피입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강의 요약하면, 처음에 오늘 시편을 시작하면서 인간이 시를 짓는다고 시편에 들어올 수 있는 게 아니고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돼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편에서 말한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못 지키라고 준 거예요. 그러면 우리 생각에 못 지킬 것을 줄 필요가 없지 않느냐 하는데 못 지킴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다른 분이 끼어든다는 사실을 예고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다윗 이후에 이런 시편을 준다는 말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다른 분이 끼어든다는 걸 위해서 시편을 줬지만 이미 사람들은 하나님을 건성으로 믿고 다른 걸로 채웠다 했습니다. 그게 바로 바알과 아세라란 우상으로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집어넣었어요. 시편에 대해선 말씀에 대해선 관심도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선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미 형편이 신앙적으로 잘못된 것을 아시고 시편을 성경 속에 집어넣은 거예요. 시편대로 살아야지 하지 마세요.

만약에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믿음 좋은데 시를 적어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 시를 지으면서 나는 믿음도 없고 나는 신자도 아닙니다. 그런 내용으로 쓴다면 다른 사람 보기에 은혜 될 사람은 은혜 되겠지만 갸우뚱하겠지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신앙 좋은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나처럼 이렇게 하면 은혜가 된다는 내용이길 원했는데 나는 신자 아니라고 쓴다면 난감하겠지요. 바로 성경은 우리 자신이 신자가 아님을 나타내기 위해서 성경을 준 겁니다. 그런데 신자가 아님을 알게 된다면 이미 그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고 이미 신앙생활이 개시된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그때부터 한 바구니에 담긴 예수님이 행하신 그것만 빛이 나는 순간이 시작되는 겁니다. 내가 잘났다는 게 아니라 주님이 잘났다고 시작되는 거예요.

그런데 첫째 시간에 제가 이야기하기를 아무도 지키지 못한 율법, 말씀을 줬을 때 사람들은 평소에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방식으로 율법을 지키려고 해왔던 겁니다. 말이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줄 때 자기들은 율법을 잘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약속의 땅 앞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보니까 여호와 율법 지키는 것보다 바알과 아세라 지키는 것이 마음이 편하고 당기거든요. 그래서 산당으로 갔어요. 이스라엘 산마다 심어놨어요. 열왕기상 보면 다 나옵니다.

평소에 바알과 아세라에 쏠렸다는 말은 평소에 율법 지켰다는 그 마음도 언제든지 바알과 아세라로 갈 마음이 담겨있다는 뜻이에요. 그걸 주님께서 알려주는 거예요. 율법 주시고 이방나라 근처에 얼쩡거리면서 마음 돌리는 것은 평소에 네가 지키는 율법은 온전한 것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걸핏하면 그쪽으로 가니까. 저쪽이 더 좋은데, 자기 복 받는 걸 좋아하니까 그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율법은 예수님만 지켰다 했지요. 인간은 못 지킨다. 예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것을 경계라 했지요. 경계에 시편이 들어가는 겁니다. 경계란 안에 내용이 전혀 없어요. 다만 안과 밖,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는 기능만 발휘할 뿐입니다. 시편이 주어지게 되면 우리 속의 불신앙 요소를 들춰내는 거예요. 들춰내면서 내가 되고자 하는 그 목표가 아니고 다른 분에게 모든 것을 준수하실 분이 따로 준비돼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거예요.

그걸 아까 바구니라 했고 그 바구니를 하나님의 언약이라 했어요. 신약에 오면 사도 바울은 바구니라 하지 않고 예수님 안, 갈라디아서 6장에서는 구체적으로 십자가 안으로 돼있습니다. 십자가 안에 우리가 들어있어요. 그러면 우리는 세상과 경계가 돼요.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세상은 나에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 성도는 결국 경계 역할이지요. 경계는 내놓을 게 아무것도 없어요.

자꾸 자기 것 내놓으면 안 됩니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믿었습니다. 경계는 경계 기능만 해야 되지. 성도를 경계로 사용하게 되면 만두 속엔 언약의 완성된 것으로 담긴다 했지요. 예수님이 다 이루신 거예요. 다 이룸 속에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가 이미 예수님 안에 다 담겨있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해석은 너무 억측이 아니냐고 하실 분이 있을 거예요. 그러나 그 사람은 사도행전 2장을 생각하지 안 하고 있는 거예요. 베드로가 어떻게 설교했어요? 시편으로 복음이야기 끄집어냈어요. 요한복음에 시편 나와요. 사도행전 열두 제자 뽑을 때 시편 이야기했잖아요.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 시험할 때 시편 이야기했어요. 천사가 와서 발을 바친다.

시편 2편 봅시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참 이런 말씀 하나가 정말 난해해요. 우리 보기엔 세상 조용한데 시편이 일방적으로 우기는 게 생각되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의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세상에 모든 민족들이 기름 부은 자와 하나님 관계를 끊어버리고 그 사람을 죽여 버리자고 활동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유엔총회에서 이야기하게 되면 많은 이백 개의 나라가 뭐라고 합니까? “우린 언제 그런 생각했어? 우린 그런 생각 안 했어. 우리나라는 기독교가 활성화되고 있어.” 이렇게 이야기하지 시편 2편에 대해서 뭔가 낯설어 한단 말이죠. 현실적이 아니라고 보는 거죠. 그래서 이 말씀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여러 절차를 걸쳐야 돼요.

언약을 바구니에 담는 겁니다.

시편 1편 봅시다. 복 있는 사람이 나오지요. 이 사람은 복에 종속됩니다. 복이 사람을 새롭게 생산해내는 겁니다. 있는 사람을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복이 새롭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 게 생겨난다는 거예요. 못 믿겠지만 복이 스스로 이 땅에 복이 내려와서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내게 되면 만들어진 사람은, 사람이 복을 얻은 게 아니고 복 안에서 이 사람이 태어난 거예요. 마치 엄마가 아기를 낳듯이 해산한 겁니다. 만들어진 거예요.

꼭 젤리 같아요. 또는 껌 같아요. 복을 잡아당기면 복은 안 보이지만 복 있는 사람만 이 땅에 등장하는 조치를 하나님께서 하신 겁니다. 복으로 오신 분이 누굽니까? 팔복 이야기하신 분이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떠나고 난 뒤에 열두 제자를 남겼잖아요. 예수님 아니면 나타나지 않을 예수님이 택하지 않으면 등장하지 않을 인물들, 그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복과 사람을 분리해놓고 다리로 연결해보겠어요. 복=예수님. 복의 내용을 보니까 율법 완성이에요. 구약에 시편이 포함돼있습니다. 시편에 말씀하신 모든 것이 예언인데 그 예언의 완성자로 오게 되면 완성상태를 복이라고 해요.

세례요한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가 뭡니까? 밥 먹고 살려고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세례요한은 그냥 어떤 분을 소개하는,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쇼를 하기 전에 미리 분위기 잡는 무대 사회자, 세례요한의 특징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역할을 합니다. 그걸 예인선 역할을 하는 겁니다. 배를 예인하고 자기는 빠지는 거죠. 그분은 흥해야 되고 나는 쇠해야 된다. led 등이 나타나고 촛불은 커야 돼요. 그래야 확 드러나지. 앞에 얼쩡거리면 안 됩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끌어당기면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공포 분위기에요. 심판 분위기였습니다. 이상하죠. 유대인들은 하늘나라 온다는 것을 학수고대했습니다. 이제는 불행 끝, 행복 시작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제대로 복과 연결되어 끌고 오는 세례요한의 복장 좀 보소. 복장이 어떻습니까? 이 땅에 살겠다는 복장이 아니고 이 땅을 포기한 복장이잖아요. 기인도 그런 기인이 없어. 복장이 여름철에 모피 옷 입고 생식하나.

왜 그런 짓을 해요? 그것도 장소도 사람들이 기거하는 도시가 아니에요. 찾지도 않는 광야에서 오려면 오고 말래면 말라. 그게 경계선이에요. 남들이 모르는 것을 등 뒤에 깔고 있는 겁니다. 네가 내 등 뒤에 뭐가 오는지 알기나 알아? 이런 식이에요. 그게 오늘 성도의 경계선 위상이에요. 양쪽을 다 보여주는 거예요. 나는 모든 걸 아는데 너희는 너희들이 아는 것만 알고 내 뒤에 몰고 오시는 분은 모르잖아. 우리는 양쪽을 다 알고 있어요.

하늘나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깽판을 놓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늘나라 우리가 챙겼어. 지금까지. 완전히 시스템 갖췄어. 메시아만 오시면 되도록 다 구비돼있어요.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너희들이 천국 가면 돌멩이가 천국 가겠다. 그리고 세례요한이 실제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도끼 이야기를 하죠. 그냥 도끼로 작살을 내야 주제파악이 되냐, 인간들아. 너희는 돌멩이만도 못해. 너희들의 구원받아? 세상에 돌멩이가 구원받으면 너희도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해줄게. 너흰 안 돼.

이건 뭐냐? 세례요한 자체가 경계선이에요. 경계선은 인정사정이 없습니다. 그냥 도끼로 가운데를 쪼개는 거예요. 쪼개면 기존 체제 자체가 거짓 하나님이라면 쪼갰다 칩시다. 저쪽은 없잖아요. 이미 있는 사람이라면 쪼개서 우리 편, 네 편 되겠는데 없잖아요. 체제 자체가 한 체제 아닙니까. 바리새인 중심으로 해서 패밀리 구조로 돼있단 말이죠.

아까 뭐라 했습니까? 살아가는 게 세상 모든 소리의 아우성, 합창소리를 듣고 살았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쪽은 없어요. 없으니까 세례요한이 예수님과 관련된 관계로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푼 겁니다. 세례를 경유했다는 것, 물속에 잠수했다가 나온 사람만 새롭게 그리스도 편에 생산되겠지요. 생산이란 말은 뭐냐? 없었는데 새로운 기능이 주입되니까 기능에 맞춰서 새로운 존재가 발생됐네. 그럴 때 생산이란 말을 하는 거예요. 이번에 책이 나왔어요. 제목이 [복음의 생산]입니다. 표지가 기계부속품으로 형상화해서 보시면 정말 아름답습니다. 생산이란 말은 없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믿은 게 뭐예요? 구원될 자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기능이 나에게 작용해야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될 자가 생산된다는 게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어요. 아브라함의 믿음의 실체가 뭐냐 하면, 죽었고 죽은 자가 사흘 만에 살아나는 그것으로 지금 구약 전체가 구라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종교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교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십자가 믿는 것은 거짓말도 아니고 구라가 아니고 생생한 현실이에요.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으니까.

그리고 그 생생한 현실은 그것을 위해서 창세전부터 준비해왔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것이 구라가 아니라는 거죠. 이스라엘은 단순한 특이성이 아니고 그때 끝나는 게 아니고 마무리 지어야 될 지금까지 끌고 왔다는 겁니다. 그게 언약이라는 거예요. 옛날 언약을 구약이라 하고 구약의 완성을 신약이라 하는 겁니다.

신약의 구체화는 예수님이 언급했어요. 이 잔을 마시라. 내가 흘리는 내 피. 오직 그 구체성은 피에요. 피는 어떤 인간의 행함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죽어야 될 놈을 건진다는 거예요. 죽어 마땅한 것을 건진다는 뜻이 피에 담긴 의미입니다. 살아서 얼쩡거리면서 뭘 했습니다. 십일조 했습니다. 그런 소리하지 마라. 죽게 해놓고 피로써 건져내는 자만 성도가 되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이 세례요한의 경계선, 그리고 예수님과 예수님 제자들의 경계선 이야기했어요. 경계선의 특징은 기존에 있는 것으로 하는 게 아니고 없는 것을 새로 만들어낸다. 그러나 기존에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새로 만들 때는 새로운 원칙이 주어지는데 그 원리원칙이 다 이루었다. 언약의 바구니, 다 이루었다가 왔을 때 그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생깁니다.

방금 한 이야기는 신약이고 시편 이야기에선 어떻게 되느냐? 시편에선 이렇게 경계선이 처집니다. 다윗의 고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라고 외친 사람이 고난 받는 모습을 그 시대에 보여주게 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라는 말을 내뱉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는 그 사람을 핍박할 때 그 사람이 피 흘려 죽을 때 그 피 안에 시편의 완성이 일찍이 연결되어서 포함돼있어요. 예수님과 연결되어 포함돼있습니다.

따라서 시편을 우리가 공부하고 보는 순간, 복 있는 사람 챙겨야지, 라고 챙길 생각 마세요. 챙기는 것이 아니고 이걸 모를 때는 고난이 없다가 아는 순간부터 이 땅에 경계선 상에 존재하는 성도가 되는 거예요. 경계선이란 말이 어려우면 쉬운 말로 고치겠습니다. 영화의 스크린 같은 거예요. 스크린을 아무리 후벼도 그 뒤에 사람이 없어요. 그 위에 투영될 뿐이죠. 만져보면 그냥 천이에요.

그래서 내가 아무리 구원받아도 남들이 나를 볼 때는 평면적인 사람일 뿐이에요. 세 끼 밥 먹고 잠잘 때 잠자고. 아무 다른 게 없어요. 그러나 무엇이 나오는가가 그 사람의 존재 위상을 말해주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툭 치면 지 자랑 나와요. 성도는 툭 치면 나는 못난이, 자기 못난 게 나와요.

제가 주일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왜 실패하는 걸 목표로 삼지 않습니까? 실패자 되라고 우리를 만들어놨는데 왜 우리는 자기 원판을 가리고 실패에서 무슨 성공이 나와요. 안 나와요. 실패는 실패만 나오지. 그런 양하고 살면 되는데 자꾸 은근히 인생 성공을 꿈꾸는, 그건 분명히 가짜에요. 성도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실패로 산다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모든 일에 감사가 됩니다. 염색 안 해도 감사하고, 머리 다 빠져도 감사하고. 모든 게 감사밖에 안 나와요. 다른 게 나오려 해도 못난 주제에, 죄인 주제에 뭘 더 얻고자 합니까? 자기 주체를 알아야지.

다시 이야기합니다. 복이 만든 생산된 사람, 그게 복 있는 사람입니다. 복과 사람 사이에 연결돼있는 건 언약의 완성이 복 있는 사람을 만들어냅니다. 완성됐는지 어떻게 압니까? 이 땅에서 말씀에 의해서 복음에 의해서 복 때문에 고난을 받을 때 그 사람은 지금 연결돼있는 사람입니다. 지 먹고 살라고 고난 받는 것 아니고 주님이 주신 복 때문에 고난 받는 사람이에요.

복의 실체는 뭐냐? 말씀 완성이라 했습니다. 말씀 완성 때문에 고난 받는 사람, 어떤 사람입니까?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한다고 알고 사람은 모든 장소에게 고난 받습니다. 논리가 이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잘나기를 원한다. 부자 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부자 되려면 착해야 된다. 이건 기본 모토에요. 타고 났어요.

그런데 어떤 복음 아는 사람이 말하더라. 인간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 그때부터 죽이고 싶어. 내 목표는 내가 착함에 해당되는 복을 받아서 잘 되길 원하는데 인간은 처음부터 뭘 해도 죄인 되면 그건 내 기대치를 완전히 꺾어버리니까 나는 그 사람의 공격 대상이 되는 거예요. 인간은 날 때부터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행복만 지 성공만 원하고 착하기를 원해요.

그걸 제가 평소에도 알고 있었는데 외손녀를 보면서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외손녀가 1년 반도 안 됐어요. 그런데 너무나 복음적으로 마음에 드는 동영상을 우리 딸이 보내왔어요. 마음 같아선 지금 소개하고 싶은데 그건 나중에 기회 있으면 하고. 어떤 사무실에 광고지가 있는데 그걸 획 버리는 게 재미있는 모양이라. 그런데 아빠가 봤거든요. 평소에는 아빠와 사랑의 교감을 하는데 다른 데 보는 거예요. 이게 뭐냐? 죄 지은 거예요. 다른데 보면서 그 죄의 행동을 멈추는 게 아니고 웃으면서 또 해보는 거예요. 아빠가 안 된다고 하니까 씩하고 또 하는 거예요.

이미 자기가 죄인 걸 알면서도 그 죄를 하고 싶은 거예요. 아빠가 제지하면 불쌍히 여겨달라는 식으로 달려와서 안기는 거예요. 저거구나. 인간은 죄 짓고 싶어서 환장을 하는구나. 환장하면서도 굉장히 만족스런 거예요. 그러면서 아닌 척한다는 자체가 얼마나 의로운 존재로 드러내고 싶어 하느냐 말이죠. 거기서 영상은 끝났어요. 실컷 2분 동안 죄 지어놓고 안아달라고 달려오는 것, 그 모습이 아직까지 우리 몸에서 지워지지 않았어요. 그게 그대로 가요. 온갖 나쁜 짓해놓고 교회에 화서 용서해달라고 달려오는 것.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말씀 주신 이유는, 얼마나 내가 말씀을 지켜서, 말씀이 좋은 게 아니죠. 내가 원하는 것을 행운을 얻고 싶어서 말씀에 치중하는가를 원초적으로 다 보여주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 다시 이어봅시다. 그렇게 똑똑하고 많이 아는 사람들이 결국 그 책에 해답이 없어요. 해답이 없다는 말은 원판을 몰라요. 이렇게 똑똑한데 그 뒤에 말은 뭐냐? 이렇게 힘든 나를 누가 건져내랴. 예수를 안 믿으면서도 호소는 해요. 나 어찌할꼬. 세상의 모든 소설책 보세요. 절 살려주세요. 말은 안 해요. 자기 체면이 있기 때문에. 모든 작가의 저서, 인문학 책, 공학기술책의 끝은 뭐냐? 저, 이래서 살겠어요, 이렇게 해서 천국 가겠어요, 합당합니까? 그 질문을 쏟아내고 있어요. 베스트셀러 책들을 보세요. 저 이 정도 되는데 좋은 미래는 있겠냐고 질문하는 거예요.

해답을 제가 제시해드려야지요. 복 있는 사람은 그 다음에 뭐가 나오지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죠. 주께서 이미 악인으로부터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능력이 성령으로 오게 되면 이미 악인의 꾀에서 성도가 말려들지 않도록 지켜줍니다. 성도는 뭘 알아야 됩니까? 악을 알아야 돼요. 악을 알기 위해서 죄를 지어야 돼요. 느긋하게 죄 짓는 그 즐거움. 이미 죄 용서가 해결된 입장에서 내 몸에서 내 욕망이 뿜어져 나오는 그 죄를 죽을 때까지 체험해야 돼요. 느긋한 마음으로.

사랑? 사랑이 무엇이냐, 사랑 그렇게 이야기해도 사랑이 뭔지 궁금해요? 사랑은 과도한 욕망입니다. 어느 인간 치고 사랑받기를 원치 않는 인간이 없어요. 있는 욕망에 만족하지 못해요. 허탈과 결핍을 느낍니다. 팔십 됐는데 설마 연애하고 싶어 할까? 그런 선입감 갖지 마세요. 사랑에 나이가 문제가 아닙니다.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람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과도한 욕망은 본인이 말려도 안 돼요. 계속해서 욕망이 나와요. 그런데 욕망 나온다고 용돈 주고 하지 마세요. 진짜 부모가 원하는 것, 어린 자식이 원하는 것, 남편이, 아내가 원하는 것은 뭐냐 하면, 아무리 채워도 채울 수 없는 것은 본인의 과도한 욕망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완전한 가정, 완전한 가족은 없습니다. 어느 세월에 다 채워줍니까? 채워주면 좋다고 하다가 이것까지야? 더 없냐? 자식이 부모 사랑, 부모가 자식 사랑, 나중에 자식이 부모를 힘들어하고 부모가 자식을 힘들어해요. 손자 오면 좋지요. 가면 더 좋고. 정말 힘들어요. 손자 낳으면 예뻐하지요. 엄마가 자기 딸 사랑한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수돗물에 물 똑똑 나올 때 좋았지요. 점점 시간 가면 눈치도 없어. 다 치우려면 힘들어 죽겠다. 빨리 가라. 나도 내 인생이 있다. 과도한 욕망은 누구도 채워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죽을 때까지 남들한테 과도한 욕망을 발휘합시다. 그래서 너나 나나 바구니, 용서의 바구니에 예수의 피로 감사해야 되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시편을 보면서 악인의 꾀를 좆지 않는 그 악인의 정체가 우리 몸을 통해서 체험되고 느껴지고 그래서 복이 진정 이미 완료됐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날마다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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