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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지역강의 > 부산강의
2018-03-19 18:07:59 조회 : 560         
관계 재정리 180319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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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4.♡.134.25) 18-03-21 15:11 
20180319a 부산강의 : [시편]8(3편)-관계 재정리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3편 5절부터,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 하리로다”

이 해석에서 제일 핵심은 ‘나’가 누구냐는 겁니다. 나가 현재 보고 있는 나일 수 있느냐?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구성된 나입니다. 언약에 의해서 구성된 나는 없는 나에요. 언약이 없었으면 등장하지 않는 나. 언약에 의해서 구성된 나인지 어떻게 아느냐 하면, 나 주변에 비 언약이 눈에 띠죠. 언약이 아닌 걸 우상이라 합니다. 우상을 한 자로 하면 ‘신’에요.

인간들이 나라는 존재라 하는 순간 신을 요청하게 돼있습니다. 요청한다는 말이 중요해요. 요청한다는 말은 자신의 뿌리, 자기의 근원을 사람들은 놓칠 리가 없어요. 나는 어디서 나왔으며,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그 부모는 누가 만들었지? 부모의 부모, 그 부모의 부모, 최초의 부모는 누구지? 신, 하나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비 언약이에요.

신이라 하니까 비 언약 아닌 것 같지요? 비 언약 신이란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과 연결이에요. 여기가 뭐가 없느냐 하면, 언약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들어갈 이유가 없어요. 나 여기 존재하는데 누가 만들었을까? 하나님. 여기에 무슨 언약이 필요합니까? 나 여기 있음에 누가 만들었을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 이게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맞서 싸워야 될 가나안 족속들의 신이었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이 아니에요. 팔레스타인, 옛날 용어로는 블레셋.

블레셋은 뭐냐? 본인 있고 땅 있고 신 있고. 딱 이 세 가지 요소에요. 우리는 알라신 덕분에 이 땅에 산다. 그런데 알라는 신이에요. 특별한 내용이 없어요. 그냥 신이에요. 영어로는 god에요. god를 그 사람들 용어로 사용하니까 알라가 되는 것이지 알라신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그냥 보편적 신이에요.

이것은 인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도에도 땅이 있고 그 땅은 그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왔던 땅이 있고 조상 있고 그래서 내가 있고. 그 조상들은 우리한테 전달하기를 이 땅과 조상은 바로 신에서 나왔다. 그래서 힌두교도 신을 믿잖아요. 이건 태국도 마찬가지고 스리랑카,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인도네시아 다 마찬가지에요.

그렇다면 그들이 신을 찾는 이유가 뭐냐고 과거로 돌아보게 되면, 사는 게 힘들어서 그래요. 세계에 220개나 되는데 그중에 경제력이 40위까지 빼놓고 거지꼴이라 보면 됩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한국에 사니까 이 세상이 살만한 세상처럼 보이지만 40위 밖으로 떨어지면 고통의, 저주의 세계에 자기가 태어난 걸 인식해요. 아프리카나 베네수엘라 같은 경우에는 물가가 6000프로나 올라갔지요. 먹을 게 없어서 동물원에서 사자가 먹어야 될 사료를 훔쳐 먹어서 사자는 빼빼 말랐고. 난민 신청이 10만 명이 넘고. 경제대국이 졸지에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뿐 아니고 아프리카는 줄곧 그래왔어요. 그런 나라에서 사는 처신의 방법은 마음을 낮추는 거죠. 하루 두 끼 먹는 게 어디냐. 그들이 마음 낮출 수 있고 견딜 수 있는 것은 다 같이 못 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아프리카 나라에 공산주의가 잘 치고 들어가는 겁니다. 잘 사는 사람 따로 있으면 속이 뒤틀려서 죽고 자살하겠지만 다 같이 못 사니까 다 같이 쓰레기 줍고 사니까 남아있는 것은 정, 이웃의 정으로 붙들고 사는 거예요. 마치 1950,60년대 우리나라 새마을운동 이전에 사람들이 정 나누고 살았잖아요. 새마을운동이 그 정을 다 빼앗아갔지만. 이스라엘이 그 척박한 땅에서 그만큼 사는 것은 키부츠란 협동조합 때문에 그렇죠. 이걸 모델로 해서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일으켜요.

이스라엘이 다른 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우리가 온 게 아니고 신이 불러 모았다는 거예요. 이 점이 어려운데 우린 여기서 태어났다가 아닙니다. 그럼 이 땅은 자기 땅이 돼요. 그러나 가나안 땅은 하나님 땅인데 자기 백성을 바깥에서 안쪽으로 불러 모았다는 의식이 강해요. 그렇다면 이들이 사는 것은 생존이 아니고 뭐냐 하면, 주의 말씀을 따르는 언약을 따르는 사명감으로 버티는 겁니다.

그 척박한 땅에서 죽기 살기로 일하죠. 그 뜨거운 사막에서 갈릴리 바다, 사해 물 끌어들여서 대규모 야자농장을 개척해서 농산물을 생산했고, 축산은 헐몬산에서 했고, 그 다음에 치안이 되면서 관광객들이 와서 국민소득이 한국보다 조금 못하겠지만 얼추 살아요. 그렇게 사는데 픙경은 우리나라 80년대 정도밖에 안 돼요. 그렇지만 아주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혼란스러워요. 안정감이 없고 전부 총 들고 있고.

그러면서도 그들이 버티는 것은 생존이 아니고 사명감이라는 겁니다. 이건 우리한테 굉장히 시사하는 바가 있지요. 이것은 생존 때문이 아니고 살아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살아야 됩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 언약 때문에. 내 목숨보다 언약이 우선이다. 이게 이스라엘의 특징이에요. 그런데 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죽었잖아요.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죽였다면 오늘 본문 시편은 이스라엘의 교과서에요. 이 시편을 통해서 두 가지 해석을 끄집어내야 됩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이스라엘적 안목을 끄집어내야 돼요. 또 하나의 안목은 뭐냐 하면, 그들은 새 언약을 믿지 않습니다. 구약 언약에 의해서 시편을 어떻게 봤는지 하나, 두 번째는 신약, 새 언약, 이 살과 이 피로 내가 새로운 언약을 세우리니. 너의 모든 죄를 이 피로 씻어 준다는 복음적인 관점에서 시편 3편을 다시 해석해야 돼요. 두 가지 해석이 나와야 됩니다.

만약에 첫 번째 해석, 구약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고 한다면 기존 교회처럼 돼버려요. 교회 나와서 하나님 덕분에 밥 먹고 살았습니다. 이건 하나님을 죽이는 사고방식이에요. 안목입니다. 하나님 믿었는데 해준 게 뭐 있나? 이거는 기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께 대들었던 그 사고방식이에요.

어제 오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세례요한을 주목해야 된다. 세례요한 생각하지 않고 신약이 나올 수 없어요. 왜냐하면 세례요한은 구약 사람이기 때문에. 구약의 율법으로 세례요한은 어떤 인간이었느냐? 여자에서 태어난 최고의 남자는 세례요한이다. 다시 말해서 가장 율법적 인간이에요. 율법적 인간이지만 예수님 오셨을 때 오실 메시아가 당신이옵니까, 라고 단절, 끊어짐ㄴ을 의미하고 있어요. 내가 생각하는 내 세계에서는 당신은 메시아 아닌 것 같습니다. 도대체 납득이 안 된다고 한 거예요.

그런데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세례요한에게 하나님이 계시하기를 오실 메시아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돼있어요. 너는 물로 세례주지만 이쪽은 성령으로 세례 주는 거예요. 그렇다면 물로 세례 주는 구약과 성령으로 세례 주는 신약 사이에 단절이 있고 이 단절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십자가를 경유한 자에게만 물세례가 아니고 성령으로 세례를 줘버립니다. 건너올 수가 없어요.

세례요한이 지옥 갔다는 말이 아니에요. 세례요한은 하나의 배역, 역할을 맡은 거니까 역할한 사람을 나무라면 안 돼요. 배역과 자기의 속성을 일치시키면 이걸 메소드 연기라 하는데 너무 이러면 곤란해요. 배역과 그 사람의 역할에 빠져버리면 영화인지 실제인지 모르고 성폭행하죠. 이것 안 돼요. 그 배역은 본인의 속성에다 주께서 사명으로 입혀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십자가란 율법적 의식으론 뚫어낼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1번 해석을 꼭 알아야 돼요. 시편 3편에 나오는 구약적 이스라엘적 해석을 알아야 될 것은 바로 육적인 해석이기 때문에 알아야 돼요. 육적인 해석이 어떤 문제가 있기에 천국 가는 영적인 해석으로 건너올 수 없었느냐? 육적 해석 안에 어떤 요소가 영적 해석으로 건너오게 못 했는지 알아야 됩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한다면, 시편 3편 5절에서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 하리로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여기서 ‘나’가 누구냐 하는 거죠. 시편 읽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아까 이야기한 우상, 쉽게 말해서 신, 신을 믿는 이 사람들은, 힌두교가 대표적인데 베가라는 노래 작품집이 있어요. 신의 계시죠. 신의 계시를 보고 믿으면 된다. 믿음이란 본인이 본인에게 설득당하는 거예요. 이게 세상적인 믿음입니다. 자기가 자기한테 설득당하는 것. 억지에요. 본인에게 의심을 해야 되는데 의심 없이 그냥 믿어버려요. 왜 그러냐 하면 자기한테 이익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일단 끌어 모아보자.

주부들 취미 가운데 이런 취미가 있어요. 티비 홈쇼핑 보고 무조건 사대는 겁니다. 하루 종일 하는 일이 문 열어주는 거예요. 혼자 노는 재미론 괜찮은 재미에요. 계속 문 열어주고 택배 받고 돌아서서 문 열어주고. 마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끊임없이 선물 준다는 호의, 바깥에서 나에 대한 배려 같은 느낌이 들어요. 난 외롭지 않아요. 계속 손님이 찾아오니까. 그 손님이 택배기사지만. 왔던 사람 또 오고, 왔던 사람 또 오고. 어떤 외롭지 않다는 것, 쓸쓸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아요. 본인이 그걸 요청한 거죠. 그게 바로 억지고 본인이 본인을 설득하는 거예요. 본인이 본인에게 굉장히 관대한 겁니다.

그렇게 끌어 모아놓고는 포장 뜯지도 않아요. 보면 쓸모없는 거예요. 괜히 긴박해서 저쪽에서 sos치는 것 같아서 빨리 구입했는데 보면 같은 것 두 번 산 것도 있어요. 화장품 많이 샀는데 또 화장품 사고. 샘플 더 준다고 해서 사고 그러거든요.

믿는다는 것은 본인이 본인한테 쏠렸다는 겁니다. 자기한테 이익이 되기 때문에. 이런 의식은 어떤 의식이냐 하면, 지금의 나를 블로흐라는 20세기 초기에 독일철학자가 있어요. 이 사람의 철학이 소망의 철학입니다. 이 사람의 철학을 조사해보면, 모든 예술이나 정치, 종교나 인간이 그런 행위를 하는 이유는 바로 소망 때문에 그렇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우리 철학자 강의에서는 안 다뤘어요.

소망이 뭐냐 하면, 지금의 나를 A라 하면 사람은 항상 B를 소망하게 돼있고, 더 중요한 것은 B가 있음에 A가 모든 고난과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의 결론은 인생 자체는 종교 없어도 모든 인간은 종교적이다. 종교적이고 묵시적이고 미래지향적이고. 그것을 인간은 타고난 것이다.

이 사람이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의 내용을 기독교에 머물지 말고 온 영역에 다 확대시켜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기독교에만 특별한 성도란 자에게만 고유한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만 있는 성향이 아니라 따지고 보면 절에 가든 안 믿는 무교주의라 해도 소망이 있다는 자체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묵시적 존재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시도를 매일같이 하고 있다는 겁니다. 힘은 현재에서 나온 힘이 아니고 미래에 자기가 상상해서 자기를 끌어당기는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여기서 뭐가 빠지냐 하면, 십자가, 교리, 삼위일체 이런 것은 아무짝에도 소용없지요. 근본원리 알짜배기를 뽑아내니까 나머지는 장식품에 지나지 않지요. 청교도, 믿어야 구원받는다, 이런 것도. 소망으로 산다, 끝. 인간은 소망 없이는 못 산다. 일곱 넘어져도 소망 있으면 여덟 번째 일어난다. 그거잖아요. 마치 잠언에 나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말이죠.

그래서 교회에서 교인에게 본인이 본인을 설득하는 중이란 말은 블로흐의 철학을 본인이 지금 이런 체계도 모르는 채 구동, 스스로 가동시키고 있어요. 교회 나오든 안 나오든. 그러면 목사가 할 것은 그들의 소망을 현실화 할 수 있다고 뒤에서 후원하고 격려해주면 되는 거죠. 뭐로? 성경말씀으로. 이게 복음입니까? 이게 바로 우상이죠. 그 소망의 마지막은 신과 결합되고 신과 만나는 그날이잖아요.

1992년 이장림이 예수님 재림한다는 이야기가 왜 그렇게 신드롬처럼 전염병처럼 퍼졌느냐 하면, 서민들은 복잡한 건 싫어요. 자기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블로흐에 의하면 소망의 철학이 들어있어요. 타고났어요. 또 집에서 그걸 강요하고. 다섯 살밖에 안 된 애를 유학 보낸답니다. <같이 살래요> 드라마에서. 왜 다섯 살밖에 안 된 애를 재벌 집에서 유학 보내느냐? 소망 때문에. 지금 이런 식은 안 되고 나중에 기업의 후계자가 될 그날을 생각해서 애를 유학 보내고. 엄마는 그걸 참아야 돼요. 참지 못하고 이혼하겠다면 이혼해라고 나왔지요. 세상의 모든 것이 종교적이에요. 종교가 없더라도 이미 종교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소망이 끊어진다? 자살이죠, 뭐. 나를 끌 수 있는 것이 깨졌는데 희망이 좌절됐는데 나는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에요.

그래서 블로흐란 이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무엇이 있다, 존재인데. 무엇이 있다는 생각하지 마라. 무엇이 움직이는지 봐라. 무엇이 움직일 때 그 배후에 무엇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왜 움직이는지 보라는 겁니다. 모든 것은 멈추지 않고 움직이니까. 사람들은 뭘 볼 때 스톱 시켜놓고 보잖아요. 그렇게 보지 말고 움직인단 말이죠. 만약에 스톱시키면 누가 나를 찍으면 사진이 나오겠지요. 하지만 이건 일종에 영정사진이에요. 왜? 움직임이 빠졌으니까 이건 영정사진 밖에 안 돼요. 그걸로 내가 스톱이 아닌데 마치 이걸 보는 순간 스톱이 된 걸로 알고 있어요.

우리 외손녀가 우리 집에 와서 동영상 300개 더 찍었을 거예요. 사진 찍고 집에 다 붙여놨어요. 떠나도 그리워 볼 것이라고 했는데 이 작전이 완전히 실패했어요. 왜냐하면 벌써 지난 이야기라. 재미가 없어. 계속 새로워. 아이가 나이가 드니까. 24개월에서 25개월. 옛날에 찍은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없어요. 존재는 없어요. 움직임밖에 없어요.

성경은 이야기하죠. 인간의 모든 존재는 흙이 된다, 죽음으로 간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안 믿기 때문에 죽는 건 알지만 그땐 그때 일이고 지금 내가 A에서 B로 뭐로 변하느냐? 여기에 관심 있어서 지금 나로 하여금 나답게 된다 이 말이에요.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신이시여, 도와주소서.” 신을 위해서 신을 믿는 게 아니고 내가 되고 싶은 것을 위해서 후원해달라는 겁니다.

그러면 B가 되면 끝입니까? 아니죠. B 돼야 비로소 보이는 게 있어요. B가 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C가 또 있습니다. C 있으면 D가 있고. 계속 흐름밖에 없어요. 그래서 어디로 가느냐? 죽지요. 결국은 자기가 왜 죽는지 모르지요. 사람이 죽는 것은 과학적으로 텔로미어가 닳아서 죽는다 하지만 그게 아니고 왜 죽느냐 하면 언약 때문에 죽어요.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그래요.

나는 언약 모르는데? 본인은 모르지요. 본인의 조상과 맺었으니까. 아담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있거든요. 다른 말로 하면 그때는 언약이라 하지 않고 약속이라 하는데 이 약속에 의해서 아담을 통해서 새 아담이 나오도록 약속돼있습니다. 죽음 가운데서 생명이 나오도록 돼있어요. 아담이 죽어야 두 번째 아담 나와요.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으로 오셔서 주가 되셨잖아요. 여자의 몸을 통해서 여자의 후손이 나옵니다. 여자의 몸에서 남자의 후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이 나오는 것은 뱀도 후손을 내기 때문에 병행해서 경쟁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약속의 내용이 그런데 지금 초점이 그게 아니기 때문에 여기까지만 말씀드릴게요.

하여튼 인간이 죽는 것은 인간 입장에선 섭섭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선 필수코스니까 주님의 필수코스에 참여한 것을 너무 서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죽어야 주님이 산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오잖아요. 난 날마다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를 뽑아내기 때문에 나 죽는 것을 섭섭하게 생각해선 안 돼요. 내가 죽으면 내가 믿던 신도 죽어요. 신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죽는 순간 내 가정, 내 사업, 내 하는 일에 협조했던 신들도 내가 죽음으로서 같이 은퇴해야 되고 파괴돼야 되고 없어져야 됩니다.

그럼 이야기를 진전해볼게요. 1번 해석은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편을 해석할 때, 2번 해석은 신약에 있는 성령 받은 사람 베드로, 성령 받은 사도 바울이 시편을 어떻게 해석했는가? 우리는 둘 다 해석을 알아야 됩니다. 첫 번째 해석밖에 모른 사람이 바로 세례요한이었지요. 세례요한이 큰 자지만 천국에선 소자라도 세례요한보다 더 크다고 했어요. 이미 천국 안에 있는 사람.

그래서 어제 낮에 끝부분에 이런 이야기했어요. 세례요한이 제시한 회개한 자는 이런 열매를 맺어야 된다면 오늘날 성도는 세례요한이 맺어야 할 열매를 따라야 됩니까, 어떤 열매를 맺어야 됩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존재 자체가 열매라고. 열매를 맺는 게 아니고 인간 존재 자체가 작품이고 열매에요. 바로 요한복음 15장이에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파생된 거예요. 엿가락 늘어나듯이 그리스도의 몸에 쭉 뽑아진 거예요. 우리가 따로 열매를 맺으면 그 열매는 몸체를 모독하고 있습니다.

너, 왜 그런 짓했어?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는데 그 말 외에 무슨 말 할 거예요? 너, 인생 왜 그렇게 살아? 주께서 그렇게 했어. 너, 일부러 억지로 그러는 거지? 억지가 아니에요. 억지라면 그렇게 살겠어요? 우리의 의사에 반해서 일어난 거예요. 내 뜻대로가 아님을 본인은 알아요. 남들은 그게 납득이 안 돼요. 본인은 납득되고 말고가 아니에요. 납득된다고 더 늘어지고 그런 것 없어요. 이미 주어진 상황 자체가 내가 원치 않는 상황이 자꾸 움직여지는 거예요. 존재가 아니고 자꾸 움직여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블로흐에서 특징이 뭐냐? 존재가 아니고 모든 것에 놀람이다. 소망의 철학은 한 마디로 놀람의 철학이에요. 좋아서 놀라는 게 아니고 이상해서 낯설어서 내가 원치 않는 인생에 대해서 화들짝 놀라는 거예요. 블로흐가 그런 이야기했어요. 왜 철학이 비 체험적이냐? 인생은 체험인데 체험은 놀람이다. 내가 의도하지 않는 방식으로 나는 B를 원했지만 주께서는 C를 원하는 식으로 했을 때에 그게 바로 모든 인간은 사실은 따지고 보면 종교적이라고 한 겁니다. 신비적이고 영적이고 그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그래서 기존 교회신학에 대한 도전이죠. 그것도 신학이냐? 그건 교회 장사해먹는 것이지 실제는 이거야. 너희가 인생을 알아? 이게 인생이야. 놀래는 거야. 자기에 대해서 놀래고. 놀랜다는 말을 저는 열매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주체가 아닌 열매, 내 안에 다른 주체가 만들어낸 열매, 그 열매를 놀랜다고 하지만 성경대로 하면 고마움과 감사에요.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 내가 구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사해야 되고, 앞으로도 내가 설계하지 않기에 감사하고, 내가 맡겨진 자로 다뤄주시니 감사하는 거예요.

맡긴다는 것은 구약적 안목이에요. 내가 맡길 때만 주께서 맡아준다는 것은 구약적 안목이에요. 내 시도 이전에 우리를 납치했어요. 납치하고 포획했고 덮쳤고 우리를 강간했어요. 주께서 성폭행했고. 그 성폭행 장면이 아가서에 나오잖아요. 오지 말래도 따라와요. 신랑이, 솔로몬 왕이 술람미 여인에게. 문 열어! 다 부술 거야. 문 안 열고 버티니까 저쪽에선 벌써 나를 규정해버렸어요. 사랑하는 나의 누이여, 나의 신부여. 요새 말로 하면, 여보~. 상견례도 안 했는데 여보라고 달려들어요. 반드시 여보 되고 여보 되게 하고 말거란 거예요. 그걸 두 자로 사랑이라 하지요.

오늘 강의의 핵심은 뭐냐 하면, 이 사랑을 위해서 모든 인간적 관계는 다 끊어버려야 돼요. 왜? 인간과 인간관계는 새 언약이 아니고 옛 언약, 우상적 관계로 얽혀있기 때문에. 부부나 가정이나 자식이나. 그래서 마태복음 10장에서 천하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다 끊어버려요. 아버지가 죽었는데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례하라.

이게 뭐냐 하면, 모든 인간관계를 다 끊어버리고 재규합하는 거예요. 다시 규합할 때 무슨 요소를 집어넣는가? 하나님의 새 언약 요소를 집어넣어서 새로운 가정을 만드는 겁니다. 사랑을 집어넣어요. 사랑을 집어넣는다는 것은 율법 말고 집어넣는 거예요. 내가 행한 것으로 집어넣는 게 아니고 행하지도 않는 새로운 관계로 주께서 집어넣은 십자가로써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되는 새로운 관계를 구성합니다.

그렇게 되면 복수가 아니고 한 사람이 되면서 오늘 시편 3편에서 나라고 하는 거예요. 복잡하지요. 나라는 걸 끄집어내기 위해서 바로 1번 구약적 해석부터 제가 시작했어요. 본격적으로 할 건데 그 논리를 이제부터 전개할 거예요. 구약, 옛 언약에서 나라는 것은 옛 언약에 의해서 조성된 관계로 너, 나가 돼요. 우리가 되고. 율법이죠. 그런데 신약에 와서 복음에 와서 나라는 것은 율법에서 맺어진 관계가 와해된 것을 기초로 하게 되면 너, 나가 다 끊어져요. 끊어진 것을 마치 흩어진 철을 지남철을 갖다 대면 다 끌리죠. 십자가로 다 잡아당기게 되면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다 그렇게 돼요.

그 하나 됨의 힘은 머리에서 나오고 머리의 열매가 지체가 되면서 그것을 우주의 중심 또는 그리스도의 몸, 두 자로 하면 교회, 이렇게 되는 겁니다. 교회는 인간이 만드는 게 아니에요. 머리가 만들지 지체가 교회를 만드는 그건 반칙이고 사기고 엉터리입니다. 지체가 만드는 교회는 없어요. 머리 되신 분이 만들어요.

요한복음 6장 39절에 내가 택한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때에 다 살린다.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한다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약속을 했잖아요. 그 약속을 우리 사이에 한 번 찾아보자는 말이죠. 내가 공들여서 내 사람 만들었는지 아니면 주께서 잃어버리지 않는 그 힘으로 우리가 만났는지 본드가 십자가라는 복음이라는 본드로 결속이 돼있는지 아니면 내가 준 사랑, 정성으로 됐는지 보자는 말입니다.

제가 어제 낮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사실은 선교나 전도가 있으면 안 돼요. 주님께서 이미 누가 구원될지 확정 마감했거든요. 마감되고 난 뒤에 구원하는 게 아니고 누가 구원받았는지 찾아다니죠. 성령께서. 잠자고 있는 네가 구원받았어. 너도 합격, 너도 합격. 제가 어제 낮 설교하면서 <황금빛 인생> 한 대목을 소개해드렸습니다. 1억8천만 원 종신보험으로 나눠주듯이 이미 율법의 저주로 말미암아 돌아가신 분이 자기 생명을 종신보험 분배하듯이 우리에서 이름 부르면서 그냥 주는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율법도 없는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 거예요. 성령세례로 말미암아. 무죄가 아니고 아예 적극적 의인이 돼버린 거예요. 더 나쁜 짓해도 의인됐어요. 이건 왜냐하면 나 있음이 블로흐처럼 A가 있음에 B가 되는 게 아니고 이 세상에 없는 것으로 인하여 내가 됐기 때문에 나는 낯설고 그냥 깜짝깜짝 놀라고 내 인생 어디로 가는 구경이나 해볼까? 자기 인생에 대해서 구경꾼 같은 입장에서 웃으면서 여유롭게 이론적이지만 살아갈 수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이 어렵기 때문에 제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는데 그 과정을 봅시다. 7절에 보면, “여호와여 일어나소서”라고 돼있어요. 구약적 안목부터 먼저 봅시다.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만들었어요. 없는 나라입니다. 히브리인이었지만 애굽이란 존재로 인하여 비로소 등장해야 될 없는 나라. 원래 이스라엘은 없는 나라인데 히브리인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이스라엘이 아니고 애굽이란 나라가 있는데 애굽에 히브리인도 살고 애굽인도 섞여 사는데 애굽인으로 말미암아 등장한 나라가 히브리가 아니고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뱀이 아담을 유혹함으로 말미암아 여자의 후손이 등장해야 되듯이 애굽으로 말미암아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면 애굽과 히브리인은 동일해요. 똑같은 인간들이에요. 그런데 여기에 경계선에 하나님의 언약을 집어넣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는 언약을 집어넣는 순간 똑같은 인간, 정 나누고 친하게 지낸 이웃관계가 어린양의 피 바르라는 이것 하나 때문에 죽음의 사자, 심판주가 개입해버려요. 그게 “여호와여 일어나소서”에요. 자기 백성을 애굽의 미끼로 먹히도록 허락하고, 이게 언젠가 할 날이 오겠는데요.

이스라엘 유적답사하면서 이상현 목사와 아내와 이야기했어요. 쿰란공동체 이야기를 쭉 하면서 이런 이야기했어요. 그 질문은 여러 번 했어요. 왜 하나님께서 좋은 땅을 주시지 않고 사막 땅을 주셨는지 질문을 했어요. 제가 생각하는 답변을 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온 세계가 저주의 세계에요.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가 저주받아야 돼요. 그렇다면 젖과 꿀이 흐른다는 의미는 당연히 줘야 되는 게 아니고 웬 보너스냐는 입장에서 받아줘야 돼요.

하나님께서 광야를 통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게 하시는 것은 사막 경험을 먼저 해서 신명기 8장 말씀처럼 사막을 가게 한 것은 마음을 낮추고, 낮추고, 낮추기 위해서 한 거예요. 마음을 낮춘 입장에서 가나안 땅이 멋진 땅이에요. 마치 에덴동산처럼 보이도록 주께서 세팅을 그렇게 한 거예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자 노력한 자들이 있었으니 우리가 갔던 쿰란공동체에요. 동영상을 굉장히 많이 찍었는데 성경에 안 나오기 때문에 유적답사 동영상에는 올리진 않았어요. 쿰란공동체가 기독교 신학에서 중요한 게 하나 있고, 복음적으로 중요한 게 있어요.

먼저 기독교적으로 중요한 게 쿰란공동체가 이사야를 필사했는데 이 사람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사는 게 아니고 자발적으로 사막에 살다보니까 글씨가 지워지지 않고 잘 보관이 됐어요. 이걸 양치는 소년이 동굴에서 발견했는데 이사야서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은 기독교계가 잠시 긴장했어요. 현재 있는 맛소라 사본과 이것보다 더 오래된 쿰란공동체에서 나온 이사야 사본과 글자 하나하나 다르면 어떻게 하나 하고 긴장했는데 놀랍게도 글자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제대로 맞는다고 안심했는데 제가 보기엔 믿음과 관계없지만 좋아들 했어요.

제가 복음적으로 보기에는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자발적으로 결별한 점이에요. 쿰란공동체의 특징은 뭐냐?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제사를 폐한다는 말씀대로 우리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마지막 때에 의인이 된다고 우겼던 자가 쿰란공동체에요. 말씀을 지킴으로서. 제사를 인정하지 않아요. 마치 바리새인들과 비슷한 의식을 갖고 있는데. 그래서 예루살렘에선 이들을 이단시해서 추방했고 사해 근처에 황량하게 있었습니다.

사막에 있었기에 약속의 땅의 의미를 새롭게 할 수 있다. 언젠가는 예루살렘은 우리 것이 될 것이고 메시아가 감람산에 올 것이라고 믿었던 겁니다. 스스로 의인으로서. 철저하게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거룩과 경건을 유지하려고 하루일과 스케줄도 다 나와 있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그 다음에 노동하고 밭 갈고 물 모으고 다시 기도하고 성경말씀 보고 자기 몸을 씻고. 거기서 나온 게 물로 세례 준 게 나오거든요. 그래서 학자들은 세례요한이 물로 세례 주는 걸 어디서 배웠겠는가? 아마 세례요한이 쿰란공동체 제자이거나 아니면 방문해서 한 수 배웠거나 이렇다는 거예요. 그건 말도 안 되지요.

어쨌든 간에 애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어린양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나라가 만들어졌으니 밤에 나타난 나라, 그걸 여호와 밤이라 해요. 이스라엘이 낮에 있는 모든 나라를 공격합니다. 그럴 때 무엇을 앞장세우느냐 하면, 어린양의 피를 앞장세워야 돼요. 어린양의 피의 취지를 더하기 위해서 호렙산, 시내산에 모세가 올라가서 돌 판을 받고 돌 판과 나무상자를 결합해서 언약궤가 됩니다. 언약궤 실제 모형을 동영상으로 보셨지요.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해요. 언약궤를 성경 봐도 몰랐는데 동영상 보니까 눈에 들어온다는 거예요.

언약궤로 말미암아 애굽과 완전히 결별해야 됩니다. 결별하려면 그냥 결별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이들로 하여금 흩어지고 다시 모으고, 흩어지고 다시 소집되는 것을 광야에서 열 번이나 반복해요. 그렇게 해서 인식이 뭐냐? 같은 형제, 같은 친구가 같이 약속의 땅에 가는 게 아니고 새로 재구성해야 된다. 모든 가족이고 뭐고 재구성해야 되는데 재구성하는 요소가 뭐냐? 어린양의 피를 위해서 그리고 십계명 플러스 각종 규례, 율법들로 재구성하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신명기 21장에 보면, 아들이 술 먹고 개처럼 굴거든 부모가 손대지 말고 동네에서 돌로 쳐 죽여라. 안식일에 나무하거든 죽여라. 죽이라는 게 많아요. 꿈을 해몽하고 점치거든 죽여 버려요. 이건 기존의 관계를 죽여 버려라. 저 사람은 내 사람이니까 살려야 돼. 이러지 말고. 돼지고기 먹는 사람 죽여 버려라. 그래서 이스라엘서 햄 하나 못 먹어봤어요. 모든 관계를 전부 재편성하는 거예요. ‘어린양+율법’으로.

율법으로 제시해서 죄인 것은 죽이되 회개하면 살 수 있는 것은 어린양의 피의 제물을 바쳐서 어린양의 효과로 다시 어린양의 몸에 뿌렸다는 입장에서 들어올 때는 다시 내 자식이고 내 남편이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스라엘이 될 때 희한한 일이 벌어져요. 어린양을 앞장세웠더니 모든 민족이 언약궤에서 나오는 위력 때문에 이들이 이스라엘에 패배합니다.

시편 3편 7절,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언약궤여 일어나소서라고 이해하면 되지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식으로 등장한다면,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여기서부터 기존에 이방민족들이 이야기하는 악이란 개념이 깨져버립니다. 이스라엘의 악의 개념은 율법적 개념이고 피 개념이에요. 언약의 피를 믿지 않는 것은 악이 돼버립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언약궤를 믿으라는 게 아니라 어려워요. 언약궤를 살아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된다 이 말입니다. 나는 믿었으니까 죄 아니고 안 믿으면 죄다 이게 아니고 지금 우리만 있는 게 아니고 누가 우리 가운데 살아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때 그게 악이 되고 죄가 되는 겁니다.

만약에 집안에 세 식구라면 세 식구로 치면 그게 악이 돼요. 네 식구로 봐야 돼요. 주님이 우리와 함께서 있음을 인정할 때 그게 주님에 의해서 날마다 그 가정은 흩어졌다가 다시 구성되고 흩어졌다가 구성되는 것, 이것이 바로 옛날 언약적 입장에서 시편 5절에 8절을 해석한 거예요.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이 말이에요.

지금 설명한 것이 8절에 보면, 구원은 어디에 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이 말은 손 놔라. 네가 네 힘으로 이길 생각하지 말라. 소년 다윗이 바로 사울 군대에게 보여준 게 그거잖아요. 이건 여호와의 전쟁이지 할례 받지 않는 자를 못 이긴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어린양 피에 의해서 새로 구성됐다면 왜 구성되게 한 본드, 하나님의 피 약속을 믿어야지 우리 자신이 갖고 있는 사적인 힘과 저쪽 인간의 힘으로 직접 대결하려고 하느냐? 그러니까 기죽지.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몸이 큰 아낙 자손들을 약속의 땅에 버티게 만든 거예요. 강력한 여리고성부터 해서 모든 게. 저쪽을 생각하지 말고 네가 누군지 보라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4.♡.134.25) 18-03-21 15:12 
20180319b 부산강의 : [시편]8(3편)-관계 재정리
(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에 한 것 중에서 약간 낯설고 이상한 게 뭐냐 하면 기존에 모든 육적인 관계가 깨어진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구약 때 아브라함의 결속도 깨어진다. 당연히 깨어지지요. 이스라엘이라는 것이 오늘날 교회와 달라요. 이스라엘은 새로운 민족이긴 하지만 여전히 육적이에요. 왜냐하면 아브라함 자손이거든요. 아브라함 혈육의 계통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기를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아지리라는 것이 야곱언약을 통해서 계속 확산이 되지요.

제가 수요일에 했지만 야곱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등장하고 이스라엘이란 이름의 특징은 뭐냐? 싸우는 성질을 갖고 있어요. 싸우는 성질로 말미암아 싸우지 않고는 이스라엘의 성립은 없는 거예요. 기존에 애굽 같은 세계에서 광야 있다면, 애굽이 함이거든요. 가나안 땅도 함이에요. 함과 함 사이에 광야 있는 셈족에 들어가요.

원래 셈족은 이라크 쪽에 있어요. 남쪽은 전부 다 함족이에요. 이라크에 있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리를 떠나서 하란을 떠나서 셈이 함에 침투된 거예요. 함 땅에 셈족이 침투해서 자기 땅이라고, 약속의 땅 광야에 침투하지요. 여기 브엘세바에 와서 내 땅이라고 했는데 다시 애굽에 갔다가 와서 내 땅이 되는 거예요. 애굽에 갔다 오면서 이게 내 땅이 아니고 하나님 땅이구나.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봐야 돼요. 왜 가나안 땅을 하필 많은 땅 중에 이곳을 하나님 땅으로 했을까? 그게 내내 세 사람이 같이 다니면서 궁금증이 뭐냐 하면,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을 자기 땅이라고 했을까? 알래스카, 미국 북아메리카, 남극도 있고 오스트레일리아도 있는데 왜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했느냐는 겁니다. 물론 에덴동산이 나왔다는 그런 의미도 있지만 가나안 땅이 하나님의 땅이 아니에요. 원래 약속의 땅은 없어요. 약속이 나타날 때만 나타나는 게 약속의 땅이 에요. 만약의 약속의 땅이 약속에 따라 진행되지 않으면 그 땅은 저주의 땅이 돼버려요. 추방돼버린다니까요.

그래서 약속의 땅은 구약 입장에서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 애굽과 싸우면서 약속의 의미가 충족된다면 이게 구약이라면, 신약은 모든 인간을 상대로 예수님이 싸움을 벌이면서 인간 속에는 약속의 땅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약속의 땅이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나는 겁니다. 골로새서 3장 3절,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하늘이 뭐냐 하면, 예수님 안, 성령 안에 약속의 땅이 준비돼있습니다.

이것이 의존강의에서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나와요. 하나님이 마련하신 영원한 기업, 그것은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들어갈 수 있는 나라에요. 그래서 강의하면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참 베드로는 희대의 사기꾼이다. 왜 사기냐 하면, 보통 사기가 아닌 것은 시킨 대로 행하면 얻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시킨 대로 했는데 얻을 수 없다면 이건 사기죠. 베드로전서에서 이미 아신 자라 했어요. 이건 인간의 행함으로 주는 게 아니고 이미 아신 자에게만 할당되고 배당되는 식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얻고자 하는 사람은 때려죽어도 얻을 수 없는 곳, 그게 바로 약속의 땅입니다. 천국입니다.

그래서 성령 안 받은 사람, 안 믿는 사람한테는 사기 중에 이런 사기가 없고 이단 중에 이런 이단이 없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이단이 안 되면 구원을 못 받는다는 사실. 예수님은 배척당해야 됩니다. 우리가 설명할 것은 인간이 이렇게 행하면 구원받는다는 게 아니라 행하지도 않았는데 주께서 행하셔서 열매로 주어졌다는 말을 함으로써 내 잘남의 증인이 아니고 주님의 활동하심의 증인되라고 우리로 하여금 구원시키는 거예요. 예수님 이야기만 나와야 됩니다.

어쨌든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함께 있어서 싸우는 성질을 부렸고 싸우려면 누가 있어야 돼요? 적, 상대가 있어야 되죠. 그 상대가 바로 아브라함의 언약이 없는 자들이 상대가 되는 겁니다. 함 땅이 있는데 셈족이 애굽에 가서 광야를 거쳐서 이 땅에 감으로써 그냥 함이 살고 있는 땅이 셈 족속의 땅 정도가 아니라 셈 족속 중에서도 아브라함의 땅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 족속의 땅이라면 아브라함 땅이냐, 아니면 아브라함 자손의 땅이냐? 아브라함 자손의 땅이에요. 아브라함의 자손이 누구냐?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의 특징이 뭐냐 하면, 아브라함언약이 완성되는 그날이 약속의 땅의 모든 것이 완성이 되는 날이에요. 그러면 아브라함 족속이 되는 방법이 뭐냐? 이게 아까 제가 피라고 했지요. 출애굽기 4장에 나옵니다. 약간 어려우니까 참으세요.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다. 모세야, 내 아들 건지러 가라고 할 때 그냥 가요. 갈 때 하나님이 누굴 죽이느냐? 하나님이 모세를 죽여 버립니다. 죽어가는 모세를 십보라라는 부인이 취한 조치가 바로 할례언약이에요. 아들의 고추 끝을 잘라서 던지니까 모세가 살아났어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보통 육의 관계인데 십보라는 아버지를 죽이려하니까 아들의 할례를 통해서 아버지를 살려냅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할례언약의 관계에요. 그때 십보라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당신은 피 남편이다. 자기가 피고 당신은 남편이란 뜻이 아니고 당신은 피로 맺어진 피를 증거해야 될 남편이라는 겁니다. 왜? 할례언약이 피를 내니까. 할례언약을 행함으로 관계 지음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애굽에서 처음에 유월절 할 때 조건이 있어요.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어린양의 고기를 먹을 사람들은 반드시 할례를 행해야 돼요. 이방인, 종마저도.

할례를 행한다는 말은 이스마엘 아니요, 이삭이란 뜻이에요. 이스마엘은 아브람 자식이거든요. 이삭은 누구 자식입니까? 아브라함 자식이에요. 아브람일 때 아브라함이 없어요. 아브람이 부정당할 때 거부당하는 그 뒷면에 아브라함이 등장합니다.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의 자식이 이삭이 아니고 이삭의 아버지가 아브라함이 돼요. 새로운 관계에 들어갑니다. 후손,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위상이 새로 구성이 돼요. 그러면 이삭의 위상은 야곱이 돼요. 그런데 이삭도 불임여성에게서 나왔고 야곱도 불임여성에게서 나왔어요.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었어요.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까 아브라함과 이삭 사이에, 이삭과 야곱 사이에는 누가 개입돼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직접 개입돼야 돼요. 직접 개입된 증거가 할례언약이란 말이죠.

그렇게 돼버리면 이게 중요한 건데요. 아브라함 있다, 이삭 있다, 야곱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을 때 하나님이 하나씩, 하나씩 끄집어내는 게 아니에요. 이 관계가 있어요. 관계가 광주리를 한 손에 들고 끄집어낼 수 있는 하나의 손잡이밖에 안 돼요. 관계를 끄집어내면 내 아들이 돼요.

드라마 보면 병문안 할 때 꽃장식한 과일 사가지요. 제 입장에서는 그래요. 대구에 칠성시장이나 부산에 재래시장에 가면 저 돈으로 백 박스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식 좀 했다고 되게 비싸게 받아요. 드라마에 나올 때마다 저게 비싼데 시장가면 저 돈으로 더 많이 사는데. 이런 엉뚱한 생각하는데. 그 꽃바구니나 과일바구니에 손잡이가 예쁘게 돼있단 말이죠. 그 손잡이가 하나밖에 없어요. 그것은 내 아들들이 아니고 내 아들이에요.

이게 신약에 가면 어떤 원리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의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나는 착하다고 의를 소지하는 것이 아니고 너와 나 사이의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 그리고 성령과 우리 사이, 이 모든 사이에 하나님의 의를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으면 이들은 죄인이 돼요. 죄인들을 하나님의 의로 구원하는 겁니다. 죄인이 의인 되어서 의인을 구원하는 게 아니고 죄인은 끝까지 율법의 저주로 죄인 돼야 되고 우리 힘으로는 저주받아야 되는데 이 관계, 주님과 우리 관계, 이웃과 형제 관계, 관계가 의가 되는 거예요. 이 의가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의는 창세전에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그 의가 새 언약으로 인하여 우리 속에 스며든 거예요. 교각, 연결고리를 이루어서 그것만 바짝 들면 모두가 한 몸이 돼버려요.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주님의 의가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 만날 때는 자신이 못난 것을 나타내요. 까불다가 맞은 것.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서 했잖아요. 못-난-놈! 이순재의 못난 놈. 시집간 딸이 이혼하고 돌아오면 친정엄마가 등짝을 때립니다. “어이구, 이 못난 것.” 거기다 애 하나 들고 오게 되면, “못난 것. 내가 이러려고 시집보냈냐? 니 잘 살 줄 알았다.” 하고 등짝을 치죠. 그러면 딸은 울고. “니가 소박맞을 줄 몰랐다.” 요새는, “엄마, 내가 찼다니까.” 요새 무슨 소박이 있어요. 소박하게 소박맞지 않습니다. 차지요. “참고 살지.” “미쳤어, 엄마.” “니 어떻게 살래?” “엄마 내 애나 키워줘.” “너 뭐할래?” 홈쇼핑?? 화려한 돌씽 해쌓고. 배낭 매고 북유럽 놀러 다니고 있어. 요새는 친정엄마가 이혼을 독려하고 있어요. “그 인간이랑 살지 말라. 니 밥 못 먹여줄까.” “엄마, 그렇지. 잘했지.” 짝이 잘 맞아.

우리는 못난 사람이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건 신약적 의미고요. 그 의가 완성이 되지 않았어요. 구약은 그 의를 본인들이 해야 돼요.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가 되어 움직여야 됩니다. 엄청난 율법의 부담을 줬어요. 신약적 안목으로 보면, 책임질 수 없는 것을 책임지게 만들었어요. 이것이 바로 구약의 언약입니다.

인간들 중에 과연 하나님의 영광에 이룰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시키는 겁니다. 로마서 3장에 나오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더니”(23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그 환경을 구약 내내 조성해왔어요. 퍼질러놓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서 화목제물로 그 다음에 나와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렀으니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인하여 너희들은 구원을 받았느니라. 방식이 구약을 허투루 버리지 않아요. 그들의 실패를 가위로 잘라버리지 않습니다. 실패를 모아요. 우리의 인생 실패를 다 모아요. 버릴 게 없어. 다 모아놓고 그러니까 너는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 것이지 너의 행함으로 구원받은 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를 통해서 내 자랑이 아니라 주님만 자랑하게 만들어요. 십자가만 자랑하게 만드는 그 방식을 하나님은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어떤 경우냐 하면, 이게 시편이잖아요. 시편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율법의 문제가 아니고 이게 다윗언약이라는 겁니다. 모세언약에서 더 진보된, 추가된 것이 다윗언약입니다. 언약의 추가는 반드시 죄의 추가와 연동해서 병행해서 주어져요. 모세언약으로 죄를 유발시키고 그 죄에 대해서 율법적으로 해결이 불가능하게 만들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사무엘상 1장 뒤의 이야기입니다.

모세언약은 제사장언약이에요. 왕이 필요 없어요. 제사장 하나 잘 되면 잘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제사장이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엘리 제사장입니다. 엘리 제사장에게 전에 아브라함언약과 똑같은 원칙으로 해요. 없는 자식이 등장합니다. 원래 사무엘은 없는 자식이에요. 아기를 못 낳아요. 사탄도 다 쓸모 있다니까. 마귀들인 첩 브닌나가 아기 없다고 축복 못 받을 걸로 간주해버려요. 나는 아들 있고 너는 아들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했지 형님을 축복한 게 아닙니다.

약이 오를 줄 알았어요. 분명히 그럴 리 없는데 자식 없는 건 마땅하고 딱히 제시할 성과는 없는데 분명히 그건 아닌데 뭔가 이유가 있을 건데 하고 한나가 그 이유를 달라고 열심히 기도하죠. 엘리 제사장이, “술 먹었나? 왜 중얼거려.” “술 먹은 게 아니고 너무 억울해서. 뭘 가졌다고 복이 아닌데 잉태치 못한 자가 복이 있다 했는데 잉태했다고 복이라 하니까 뭔가 바뀌어야 되지 않습니까?”라고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한나가 하나님께 바치지요. 어린 사무엘이죠.

어린 사무엘은 아무것도 몰라요. 밤중에 세 번씩이나 찾아오지요. 어린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 목소리인 줄 찾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음성을 내리고 사무엘이 엘리 제사장에게 왔을 때 세 번이고 백 번이고 찾아가는 이유는, 내 나라가 내 노선 망했다는 걸 알 때까지 계속 찾아가요. 그게 세 번이었습니다. 엘리 망합니다. 이 사람이 나쁜 짓해서 망한 게 아니에요. 아들 잘못 교육해서 망한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식이라면 사무엘은 자기 자식 제대로 교육 못했어요. 같이 망해야 돼요. 하나님께서 망하게 해놓고 구실을 뒤에 붙이는 겁니다.

엘리 가문은 새 시대에서 허물어져야 될 가문인데 그 허물어지는 이유를 보니까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존중히 여겼다. 나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경홀히 여기고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는 존중히 여긴다는 원칙을 내세워서 핑계 삼아 조진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잘못해서 저주받는 게 아니고 이미 저주받기에 저주받는 구실을 억지로 찾아내는 거예요.

야곱의 형 에서는 태어나기 전부터 저주받아야 돼요. 그런데 저주받아야 될 에서가 나쁜 짓한 게 없어요. 놀라운 거예요. 거기에 비해서 야곱은 태어나기 전부터 태어나지 않았으니 행한 것도 없잖아요. 행한 것도 없는데 이미 사랑받기로 작정돼있어요. 그렇다면 야곱이 하는 모든 것들이 사랑받을만한 새로운 기준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이게 세상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데 33살에 죽은 사람이 있다. 그러면 그 청년은 그 나이까지 인생에 일어난 모든 일은 다 33살에 죽는 결과를 야기 시키기 위해서 벌어진 일이에요. 게임한다든지 돌부리에 걸려 인대 나간다든지 모든 것이 그때 33살에 죽기 위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야만 한 일이에요.

그걸 사무엘상에서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고. 이게 신명기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것을 사무엘상이 받았고, 그것을 누가복음 1장에 마리아찬가에도 나와요. 하나님은 높은 자를 낮추시고. 죽이고 살리고 하시는 모든 것은, 발걸음을 세시고, 참새가 시장에서 팔리는 것까지 전부 다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한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 해석을 한 마디로 뭐냐고 물으면, 인간이란 복음으로 재 해체된다. 이게 핵심이에요. 인간에게 일어난 모든 것은 복음과 관련지어서 다시 해석해줘야 그 사람이 성도라고 하는 거예요. 내 인생에 대해서 복음과, 언약과, 십자가와 관련돼있어야 돼요. 왜냐? 모든 것은 새 언약, 복음을 위해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유일하게 아는 사람은 바로 성도고. 따라서 성도에게 일어난 모든 인생이나 구성도 새 언약과 복음과 관련성을 갖고 있고 이들을 해치는 자는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전에는 언약궤를 앞장세워야 되지만 이제 성도는 움직이는 언약궤에요. 본인언약이에요. 만약에 나한테 해코지하면 주께서 친히 원수의 뺨을 쳐버립니다. 오늘날 성도에게. 그러면 성도와 구약에 다윗언약의 이스라엘과 그냥 연결되나? 그냥 연결되지 않습니다. 단절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내 아들이라 했다면 그 아들이 중간에 등장해야 돼요. 바로 시편 3편 이야기는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치는 자는 내가 진노하리라. 이것과 연결되어서 성도는 예수 안에 있거든요. 예수님은 머리고 우리는 공동운명체란 말이죠. 그러니까 세상이 너를 미워하는 것은 너를 미워함이 아니고 나를, 예수님을 미워함이라는 원칙에 의해서 이 본문은 해석돼야 됩니다.

해석1과 해석2가 대략적으로 건성건성 이렇게 연결됩니다. 논리가 복잡하기 때문에 일단 이렇게 해놓고 그 다음에 세밀하게 들어가는 겁니다. 시편은 다윗언약 시대거든요. 다윗언약 대표자는 다윗이에요. 시편 3편 1절 들어가기 전에 뭐라고 돼있습니까?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 압살롬이 우리가 알기에 다윗의 아들이지요. 아들이 아닙니다. 왜 아니냐? 인간적 육으로는 다윗이 낳은 아들 맞는데 언약궤 관계로는 적이 돼버려요. 자식이 원수라니까.

압살롬의 묘가 어디 있느냐? 내가 이스라엘 답사를 안 갔다 왔으면 말을 안 하는데 갔다 왔어요. 가기 전에 동영상을 많이 봤거든요. 이왕 가는 것 본전 뽑자고. 뽑지도 못했어요. 하도 볼 게 많아서. 동영상 보면서 뭘 궁금해 했느냐 하면, 여기 황금 돔이 있고 통곡의 벽이 있고 동쪽에 감람산이 있습니다. 감람산이 예수님 승천했다고 곳이라 했는데 전부 다 엉터리라고 했지요. 좀 내려가면 예수님께서 주기도문 가르쳐 준 곳이 있다는 거예요. 그 밑에 학개, 스가랴, 이름 모를 선지자 무덤이라 하는 곳이 있어요. 그 다음에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 잡혔던 곳, 이건 동영상으로 올려놨고. 그 밑에 내려가면 겟세마네가 있는 거예요. 뽕나무 있고 거대한 성당 있고.

제가 궁금한 것은 이 사이가 뭔지 궁금한 거예요. 이 사이에 길이 나있어요. 이 길을 제가 동영상으로 다 찍었어요. 이게 기드론 골짜기입니다. 기드론 골짜기를 건널 수 있어요. 도로가 났어요. 여기에 압살롬의 무덤이 있어요. 아주 황폐한 무덤이. 물론 압살롬 무덤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거길 건너오면 다윗 성이 있어요. 그래서 성경에서 다윗 성이 예루살렘이 아니냐 하는데 아니에요. 다윗 성 따로 있고 시온산은 여기 있고 예루살렘은 따로 있고. 거리는 가깝지만 다윗 성에 보면 히스기야의 동굴이 있고 그런데. 이 거리가 약 150미터 돼요. 관광객들은 전부 이리로 가요. 우리는 걸어서 갔어요. 분문(똥문)을 통해서 가면 검문하고 들어가게 돼있는데

압살롬이란 자식이 아버지에 반란했지요. 그것은 언약에 대해서 대든 겁니다. 언약에 대든 동기가 뭐냐? 정의가 정의답게 구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말을 배다른 형제 암논이 건드렸지요. 그렇게 건드려놓고는 전보다 더 미워했다고 했어요. 그럴 때 친오빠 압살롬이 제대로 아버지가 징벌을 가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한 분노가 정의를 찾아 형을 죽여 버렸는데 그 과정을 보면서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의의 실현방법과 인간적으로 욱하면서 나온 육적인 실현방법이 다르고요, 인간이 보기에 죄라는 것과 하나님 보시기에 죄라는 것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 언약 안에서 죄와 언약 밖의 죄가 너무 달라요.

언약에서 죄와 의가 어떻게 차이가 나느냐 하면, 맡기는 것, 이게 의입니다. 그리고 못 참겠다. 이게 악이 돼요. 이 설명하는 게 어려운데요. 왜 어려우냐 하면, 맡기는 것 같으면 그렇게 당했다. 심판은 하나님께 있으니 하나님께 맡기지, 라고 하면 의겠네요? 아니에요. 인간은 맡기고 맡겨도 절대로 내 손으로 해결하게 돼있어요. 이게 인간입니다. 다윗은 이미 자신이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맡긴다는 게 뭔지 알았어요.

맡긴다는 것은 그냥 맡기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일을 만들어 가시는 거예요. 우리는 소극적으로, “난 몰라.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이거잖아요. 하나님이 친히 주변상황을 언약에 의해서 조종하는데 조종하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는 저주받아 마땅하며 모친이 나를 죄 중에서 태어나게 했다는 것을 구체화 시키는 일에 하나님이 일을 만들어 나가는 겁니다. 네가 지금 낮췄다고 하지만 낮춘 것조차도 죄야, 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일을 만들어 가시는 것이 하나님께 맡기는 거예요. 낯설고 상당히 황당하기도 하고 그렇지요.

내 인생은 이렇게 몰아세웁니까, 하는 반면에 못 참겠다는 것은, 처음부터 못 참은 게 아니에요. 맡겨 봐요. 1년 지나고 2년 지나고. 더는 못 참는다. 기어이 과거에 참은 것 다 무효로 돌리고, 이래서 어느 세월에 내가 하겠느냐. 이런 경우가 자식 전도할 때 많이 생겨요. 그냥 맡기면 되는데. “복음 들어라.” “얼마나 들어야 되는데?” “1년은 들어야지.” 1년 지나도 변화가 없네. “엄마,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더는 못 참겠다. 이것 안 하면 집 나가라.” 엄마가 갑자기 급진적인 조치를 하는 거예요. “네가 복음 듣는 것 때문에 용돈 줬고 네가 저지른 걸 참았는데 이제 복음도 안 듣는다고? 나가!”

이게 압살롬이에요. 본인이 기대한 것을 기다리다 성질나서 더는 못 기다려서 일을 저지른 거예요. 이것을 다윗은 이미 경험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에 쫓길 때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합니다. 그때 다윗이 한 유명한 말이 있어요. “그냥 둬라. 저주하는 것도 주께서 알아서 저주케 하고 내가 만일 저주받을 일 없다면 그 저주가 나한테 날아오다 저절로 복이 될 것이다.” 이게 맡기는 거예요. 주변상황이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시고 모든 게 주의 뜻이기 때문에 주께서 친히 일을 만들어 가시는 거예요.

만들어 가실 때 뭘 노리느냐? 나는 지금보다 더 죄인 맞군요, 라는 결과를 유발하기 위해서 일을 만들어 가는 겁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해서 주께서 일을 만들어 놨는데 나는 팔짱 끼고 놀래. 그게 아니고 주께서 만든 일이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압살롬적이고 얼마나 내 일에 못 참는가를 들춰내는 식으로 주께서 일을 벌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는 1번, 맡기는 쪽에 절대로 설 수 없어요. 성도는 어디냐? 2번 쪽입니다. 불신자도 2번이고. 똑같아요. 다만 차이점은 뭐냐 하면, 내가 성질 급하게 주이 일을 못 기다리는 죄를 들춰내기 위해서 주께서 일을 만들어냈다고 2번에서 1번으로 갈 수 있으면 성도고, 2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압살롬입니다.

2번에서 1번으로 가면서 뭐가 나오느냐? 고마움과 감사가 나와요. 내가 주제파악을 못했구나. 내가 죄인이라 하면서도 실제로는 왜 저한테 이런 엄청난 일을 하시는지 원망스럽다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오는, 내 안에 아직도 생산되는 죄를 바깥으로 끄집어낸 그 일이 주께서 내 주변에 유발시키는 일이에요. 그래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걸 알게 하는 겁니다. 그 결과가 감사와 고마움으로 나올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2번에 있는 불신자들은 우리와 똑같은 처지에 있거든요. 제가 울산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울산에 화학공단에서 가스관이 터져서 독가스가 울산시내 남부 쪽에 퍼졌다. 남부 쪽 사람들 중에서 신자는 냄새 못 맡습니까? 신자나 불신자나 동일하게 그 역겨운 냄새를 맡지요. 제가 그 말을 하면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결국 신자나 불신자나 우린 이 세상에서 똑같은 형편에 있어요. 신자라고 더 봐주는 게 아닙니다.

그 말은 뭔 뜻이냐? 내가 나쁜 짓해서 저주받는 게 아니에요. 내가 나쁜 짓 많이 해서 인새이 망가진 게 아니에요. 신자나 불신자나 전부 이런 고통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다만 성도는 그 고통 가운데서 자기 주제파악을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당해도 쌉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피로 천국에 가게 해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로 나올 때는 성도고, 많이 누리면서도 틱틱거리고 더 없느냐고 간절히 기도하고. 이건 신자 아니죠. 이건 압살롬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이 압살롬에 좇길 때 이 본문 내용은 다윗이 ‘나’가 되고 공격하는 압살롬이 되는 것처럼 보이죠.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도 그렇게 유대교에서 다 그렇게 해석해요. 다윗이 압살롬에 좇길 때 했기 때문에 “여호와여 나의 대적들이” 할 때 여호와여 다윗의 적들이 어찌 많은지요? 나를 치는 자가 많다고 했지만 사실은 다윗이 압살롬에 대해서 적으로 간주했습니까, 아들로 간주했습니까? 아들로 간주해서 죽었을 때 물론 하나님 뜻에 의해서 치지만 그것이 다 내 탓이요, 나 때문에 내가 밧세바를 건드린 그 죄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그래서 자기는 아들한테 당해도 싸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들인 내가 아버지한테 어떤 짓을 했는지 생각하면 당해도 싸다는 마음으로 한 거예요.

그래서 유대교처럼 다윗, 압살롬 그렇게 해석하면 안 돼요. 달리 해석해야 돼요. 이게 개인 대 개인의 문제가 아니에요. 이스라엘의 적은 곧 이스라엘이라고 봅니다. 더 나아가서 나의 적은 나다. 이런 관점에서 이걸 봐야 됩니다. 1절에 보면,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이런 말을 하려면 조건이 있어요. 내가 누구 편에 있어야 돼요? 여호와 편에 서 있을 경우에만 이 고백이 나오지요. 그러나 인간은 나는 날 위해 존재해요. 하나님마저도 날 위해 있어야 하나님답다고 우기게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걸 보는 사람들이 소위 은혜 받았다는 게 수상해요. 3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이건 꼭 회사승진시험 칠 때나 이런다고. “주여, 라이벌이 승진되려고 하는데 이번에 내가 과장되게 하옵소서.” 이것과도 연관되고, “내가 나의 목소리로” 이건 뭐 집 계약할 때 또는 재개발 들어가서 돈 떼먹히느냐 마느냐 할 때 모든 분야에서 전부 나를 중심으로 보게 되면,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5절) 내가 자고 깨어나니까 나를 괴롭혔던 사람들이 이사 간다든지 하면 주의 응답이라고 한단 말이죠.

얼마 전에 주차 때문에 약간 신경 쓰인 사람이 있었는데 내가 강의하고 집에 오니까 아주 기쁜 소식을 접했어요. 그 사람이 죽었어요. 난 사람 죽는 게 그렇게 기쁜 줄 몰랐어요. 생생해요. 아침까지 차 닦았다니까요. 꼭 내 자리에 차를 대거든요. 바로 이웃집이라 뭐라 할 수도 없고. 우리가 이사 오기 전에 그 사람이 차를 댔는데 그 자리에 차를 댄다고 늘 틱틱거리는 거예요. 아침에 차 닦고 저녁에 죽어 돌아왔어요. 이제는 주차문제로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얼마나 범사에 감사한지. 그만 시편 3편에 자고 일어나니까 주께서 원수를 죽여 버렸어요.

바로 그런 내 모습이 주님의 원수가 돼요. 나라는 것은 없습니다. 이 나는 창세전에 시편에 있다고 보면 돼요.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밖에 없어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하나님의 의고, 그 의를 드러내가 위해서 나중에 이스라엘이 차후에 만들어졌고 그 이스라엘을 통해서 다윗도 압살롬도 만들어졌고 그들을 통해서 “여호와는 나의 방패시오” 예수님 이야기하기 위해서 배역들을 역할들을 맡은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아버지와 예수님밖에 없어요. 이것이 바로 신약에 성령 받은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의 해석이 그 해석이에요. 시편에 나오는 모든 나는, 긍정적 나는 예수님입니다. 우리 아니다.

그러면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나일 것이라고 여기는 데서 나를 빼는 해석을 해야 돼요. 이것은 내 돈 떼먹은 사람 죽고, 내 주차 반대한 사람 죽고. 생각할수록 기분 좋아요. 그 사람 죽었다는 사실을. 난 그 사람 죽으라고 기도한 적 없습니다. 진짜 아닙니다. 억울합니다. 정말 예상 밖에 죽었어요.

결론내립니다. 죽으니까 원수에요. 내 원수가 있고 죽으라고 고사지낸다고 원수가 아니라 이게 죽으니까 원수에요. 예수님으로 인하여 죽는 모든 자는 원수가 되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뭐냐? 로마서 5장에 나오죠.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 된 자지요. 하나님을 내 위주의 하나님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누가 마음이 괴로웠고 슬펐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나로 인하여 그렇게 괴로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노래가 아니에요.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노래입니다. 예수님의 시편이에요. 다윗이 아들한테 당했을 때 아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본인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 다시 말해서 잘못한 짓을 하는 압살롬의 대표자로 다윗이 아버지한테 대신 용서를 구하는 심정이란 말이죠. “저것들 다 내 자식인데 나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압살롬을 어떻게 살릴 수 없습니까?” 하나님이 압살롬을 죽여 버려요. 요압한테 죽지요.

다윗은 요압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요압 주의하라. 언젠가 그는 내 손에, 다시 말해서 다윗언약에 죽을 인간이죠. 하나님이 죽어야 될 내 아들을 자기가 공을 세우겠다고 죽여 놓고, 요압도 그걸 알아요. 아버지가 아들 죽는 걸 안 좋아는 걸 알고 부끄러워하며 들어가요. 그래야 사무엘하가 설명이 돼요. 그렇게 안 보면 설명이 이상해요. 분명히 이겨놓고 이기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는, 세상에 돌아가는 모든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는 나는 옳다, 바르다하는 자체가 중간에 할례언약으로 이어주신 하나님의 의를 전부 다 개인적으로 자기 위주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모독하는 식으로 모든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진짜 그중에 하나가 우리 자신들이에요. 복음을 안다하지만 나 위주에요. 주차 시비 좀 걸었다고 그 사람 죽었다고 지금 이러면 안 되지만 감수성이란 게 있잖아요. 감수성을 말릴 수 없어요. 기분 좋은데 기분 좋다고 하지. 기분 되게 좋아요. 누가 나한테 담배피고 노려보는데 담배피우면 어떤데, 하고 까불다 뒤에서 트럭에 치면 겉으론 저 사람 안 됐다 하지만 속으론 고소하다, 이놈아. 우리는 남 고소한 재미로 살아요. 제발 고소한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날 건드려서 많이 불행해졌으면 좋겠어. 그 불행한 양만큼 우리는 행복이 증가되는 겁니다. 그래서 롯데를 응원하고 프로야구 보고 도박하는 이유가 나로 인하여 망하는 자가 있을 때 존재의 의미가 새록새록 새롭게 신나게 드러나는 거예요. 남편이 바깥 일 힘들면 아내 탓하는 것처럼, 가정 탓하는 것처럼.

종영된 시청률 40% 넘었다는 <황금빛 인생> 보면서 속이 얼마나 상했는지. 바보 등신 같은 남자. 책임질 수 없는 가정을 지가 책임지겠다는 것이 얼마나 자기는 겸손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교만의 극치에요. 가정은 하나님이 책임지지 자기가 책임지는 게 아닙니다. 자기 자식 아니에요. 그런데 왜 아빠가 아빠다워야 돼. 나 하나 희생하고 봉사하면 가정이 화목해. 드라마 주제가 그거잖아요. 그게 바로 교만의 극치라니까. 그게 바로 악이에요. 언약에서는.

우리는 악한 역할 하라고 배정받았어요. 언약 입장에서 예수님만 드러내야 돼요. 예수님만 의인되고 우린 죄인 돼야 돼요. 그렇게 된 것을 감사합시다. 주차 때문에 죽은 사람을 기뻐하는 내 모습을 보고 내가 고소해하는 나를 감사해야 돼요. 못 돼먹었어요. 왜? 아담의 족속이니까. 성경 알고 교리 안다고 해서 누를 상황이 아니에요. 누를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솔직하세요. 솔직해야 이 본문을 보게 되면 이건 나한테 해당되는 아니라 내가 이런 일을 저지를 동기유발자라는 것을 주께서 십자가 피 흘러 죽도록 내가 이런 짓거리를 했습니다.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그런 배역에 우리가 들어가야 돼요.

베드로가 예수님한테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 마지막에 해준 게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도와줬습니까? 앞장서서 이럴 분 아니라고 말렸습니까? 비겁한 사람. 장모 병도 낫게 해주고 물 위도 걸었지만 다 말짱 소용없어요. 비겁하게 배신자의 길로 가잖아요. 가룟 유다만 배신자인 줄 알아요? 열두 제자들도 배신자 아닙니까? 그게 원래 우리 자이에요. 예수 안 믿는 자리가 우리 자리라니까요. 그러니까 기적이죠. 그러니까 천국 가는 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그걸 여러분 혼자만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도 안 되는 기쁨을.

누가 이야기해도 설명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목사님 겸손하니까 구원받았겠네요. 이런 되도 않은 소리해요. 무슨 겸손해요. 남 죽은 걸 고소하게 여기는 사람인데.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밖에 몰라요. 시편 3편에 의하면 우리는 뭐냐? 우린 원수의 역할을 계속 수행함으로써 시편 3편을 이루는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게 내 위주로 쓰인 것처럼 착각하는. 시편을 외움으로 하나님이 마치 내 편인 것처럼. 내가 누워 자고 하면 하나님께서 다 내 일을 도와줘야 하는 것처럼, 나를 해코지하는 사람의 뺨을 쳐야 옳은 하나님인 것처럼. 그렇게 착각들 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다윗이 압살롬을 통해서 하는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다윗이 끝까지 압살롬을 사랑했다는 거예요. 압살롬이 지옥 갔느냐8? 그 문제는 질문할 사항이 아니에요. 역할을 그렇게 맡았어요. 나쁜 역할. 다윗은 다윗 역할, 압살롬은 나쁜 역할을 맡았어요. 그리고 다윗은 아들을 끝까지 사랑하는데 죽었을 때 울어도 너무 울어요. 압살롬아, 압살롬아. 지금은 예루살렘에서 못 된 인간이라고 내팽개쳤지만 황폐하기 짝이 없어요. 철문으로 못 들어가게 만들어놨어요. 압살롬의 묘에 오줌도 막 누고. 그리고 그 친구 묘도 같이 있어요. 이스라엘에선 압살롬은 아주 나쁜 인간. 다윗의 무덤은 가묘인데 어디 있느냐? 시드론 골짜기에서 보면 시온 산에 다윗의 가묘가 있고 여기에 마가의 다락방이 바로 옆에 붙어있어요.

다윗과 압살롬을 통해서 하나님과 원수를 사랑하는 관계, 좇기면서도 끝까지 사랑하는 그런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은 어떤 인간의 행함으로 따지지 않고 죄인인 것을 기정사실화 시켜서 그냥 주께서 예수님을 아버지께서 일으키는 그 가운데서 그 의를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킵니다. 바로 시편 3편을 통해서 우리로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을 학대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을 학대한 우리를 구원하는 그것이 모든 언약을 다 취소시키고 다 폐기시키고 마지막 언약 하나로 끝내버린 거예요. 자, 예수님이 피 흘렸다. 네 죄 때문에 피 흘렸다. 오케이! NO or YES? YES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 없이는 신약이 없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관계가 이제는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맺어지는 새로운 형제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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