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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지역강의 > 부산강의
2018-07-09 18:03:19 조회 : 617         
임플란트 180709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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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4.♡.134.54) 18-07-13 10:14 
20180709a 부산강의 : [시편]12(6편)-임플란트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6편입니다. 시편을 강의하거나 설교하면서 어떤 고백만 달랑 나오니까 여기에 살을 입혀야 되잖아요. 살을 입힐 때 억지가 많이 개입돼요. 그리고 살을 안 입히면 교인들이 이걸 보면서 현재 자기 입장을 여기에다 직접 들이대서 자기가 실제로 이런 고생을 하는 것처럼 자기 위로 또는 자기 연민, 자기 격려, 자기 응원, 특히 더 나쁜 것은 자기 정당성, 자기 옹호, 이런 것에 시편을 인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비약되는 겁니다. 시편의 고백과 QT한다는 인간들 사이가 너무 벌어졌어요. 벌어졌으면 시편의 내용과 실제 내용을 촘촘하게 채워야 되고 이어줘야 되거든요. 잘못 이어지게 되면 원래 시편에서 원하는 노선이 아니고 엉뚱한 노선으로 새버립니다. 쉽게 말해서 불교의 법경처럼 활용할 수 있단 말이죠. 어려울 때 이렇게 위로해주시는구나. 가정이 어려운데 시편 보니까 은혜 받았다고. 은혜 받았다면 시편 보고 어떤 결과를 낳았습니까, 하면 그저 은혜 받았데요. 은혜 받았다면 어떤 결과를 어떤 증거를 대라 하면, 그건 없지요.

시편 말고 다른 성경으로 할 때는 창세기라든지 그쪽에 어떤 사건들이 있기 때문에 목사 입장에서 설교 30분 때우기, 대충 이야기하고 그냥 넘어갈 수 있지요. 시편엔 고백만 달랑 나오니까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 바탕을 다 채워야 되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채우는가? 채우는 방법은 허물고 채우는 거예요. 시편에 나오는 고백이 나의 고백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 말은, 나는 신자일리 없다는 자리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나 같은 인간은 신자일 수가 없어.”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래도 나는 신자인데 그럴 수 없다는 게 상상이 안 간다고 이야기하겠지요. 그건 여러분 식구 가운데 안 믿는 사람 있잖아요. 믿다가 안 믿는 사람, 그 사람 심정을 이해하면 되지요. 교회 다니다 안 다닌다는 말은, 그때 교회 다닐 때 남들에게 교회 다니는 것처럼 보이고, 신앙인인 것처럼 보였단 말이죠. ~~인 것처럼, 뭔가 보였다는 그것이 지금의 내 모습이 그렇지 아니한가를 거기다 대입할 필요가 있어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나는 결코 신자일 리가 없어. 나 같은 게 왜 신자야.” 이게 우리 출생에 합당합니다. 부합됩니다. 우리는 죄 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신자일 수 없어요. 신자 아닌 게 적당해요. 이 말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기대하지 말란 말이죠. 시편에 나오는 고백처럼 자기도 고상한 고백을 할 거라고 아예 기대하지 마세요.

시편에 나오는 고백들은 고백이 터져 나오는 그 자리와 우리의 자리가 대척관계에 있다. 마주보고 서로 노리고 원수지간에 있는 서로 섞일 수 없는 견제하는 장소에 우리는 쳐다보고 있는 겁니다. 시편을 보면서도 현재 내 자리에서 시편까지 건너갈 수 있는 다리나 어떤 연결고리를 끊어진 상태입니다. 없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은 우리에게 낯설고 시편의 고백은 우리를 약 올리고. 그럼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삐져서 그럼 앞으로 시편 보나봐라, 하고 쉽게 덮어버리는 요소가 이 시편에 들어있습니다. 너 같은 것은 볼 자격이 없어, 이런 식이란 말이죠.

제가 왜 이런 이야기하느냐 하면, 교회에서 전도할 간곡히 하잖아요. 커피 주고 휴지 주면서 우리 교회 한 번 나와 보세요. 오늘은 비가 와서 안 나왔지만 지하철 타고 오다보면 젊은 부목사와 아줌마 두 명이 늘 하는 게 있어요. 간곡하게 한단 말이죠. 그런 전도를 받는 사람은 그 순간 자기가 정상인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내가 정상인데 저 교회에서 믿는 하나님이 나를 예쁘게 보려고 아주 용을 쓰는구나. 그럼 내가 나중에 마음 풀리고 여유 있을 때 봐주는 식으로 한 번 가주지, 뭐. 이런 건방을 떨어요.

그런데 우리가 아는 성경을 문을 두드려도 안 열어주는 곳이에요. 요한계시록 같은 경우에는 문을 우리가 열 수 없게 돼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 아니면 문이 안 열리게 돼있어요. 그 다윗이 시편을 쓰신 분이거든요. 시편 전체가 문이라고 보면 돼요. 그리고 어떤 문이야? 안 열리는 문,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문. 그게 시편이에요. 그러니까 시편을 건방지게 이해한다는 자체가 이건 말이 안 되지요. 시편 자체가 못 들어가도록 막는 문이란 말이죠. 어딜 넘봐.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처음부터 인간은 닫혀 있고 안쪽에서 문고리를 잡아당겨도 바깥에서 완전히 자물쇠로 잠가버렸단 말이죠. 이쪽에서 천국 가려고 문을 열려하는데 바깥에서 잠근 거예요. 내 쪽이 문제가 아니고 게을러서 구원 못 받는 게 아니고요. 열심을 다해서 구원을 못 받게 돼있어요. 그러니 교회가 사기꾼이죠. 열심을 다한다고 구원이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럼 교회는 왜 허락했는가? 네가 어느 정도로 사기꾼과 잘 놀아나는지 교회 다니면서 같이 합작해서 서로서로 위로하면서 교회 놀이하라 이 말입니다. 둘 다 안 돼요. 구원에 넣어주려는 사람도 구원 안 되고 들어가려는 사람도 구원이 안 되고. 왜냐하면 주도권을 다윗의 자손이 갖고 있다니까. 이 말은 나한테는 내 구원에 주도권이 없어요. 이게 지당한 겁니다. 너무 당연한 거예요. 그래서 복음을 전하고 목회를 한다는 것은 사기꾼이든지 마술사든지 하여튼 눈속임하는 그런 류 밖에 없어요. 안 되는 것을 된다고 언급하니까 이건 주님 보시기에 같잖지도 않은 이야기에요. 온갖 수완과 요령들을 다 이야기해주거든요.

오늘 시편 6편을 보게 되면, 여기 어떤 사람이 굉장히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인생을 고단하게 사는 지친 모습이 나와요. 그럼 우리는 시편 6편을 보면서 난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어요.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수척이란 말이 나오고, 3절에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그 다음에 6절 보면, 눈물 나오지요.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눈물이 풀장을 다 채운 것 같아. “내 요를 적시나이다” 요를 적신 정도는 되지만 침상을 띄운 정도는 너무 심했다는 거죠. 그 다음에 7절에는 근심이란 단어 나오죠. 8절에 행악하는 자 나오잖아요.


이걸 보면서 우리는 자기 연민, 자신에 대한 위로, 자기에 대한 응원, 이런 것을 목적으로 성경을 보는데 시편 6편에 도달하게 되면, 지금 안 괴로우니까 나와 상관없이 지나가고 싶은 내용들이죠. 고생했구나. 또는 좀 안다는 사람은, 주님이 우리 대신 고생했구나. 주님께서 고생한 것 알지. 7장 넘어가자. 시편 7편, 8편으로 넘어가서 위로할 것 없는지 보는 거예요.

제가 총신 졸업하고 난 뒤에 시편에 대해서 글을 쓴 게 있어요. 그때 성서유니온 자리에서 성경고부를 했는데 지금 기억나는데 시편을 어떤 구조로 이야기했느냐 하면, 질고이란 걸 썼어요. 계곡이죠. 이쪽 지점에서 저쪽 지점으로 넘어갈 수 없는 거예요. 질곡이 시편에서 고생, 마음고생, 고난, 괴로움, 행악하는 자에게 시달림. 시달림이 적당하겠네요. 우린 행악하는 자를 모르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시달림. 이 알 수 없음을 찾아내야 돼요. 안 그러면 오늘 강의는 헛방입니다.

알 수 없는 시달림. 그런데 꼭 집어서 남편이 괴롭힌다? 아니에요. 자식 때문에? 아닌데요. 뭔가 인생이 불안정한데 알 수 없어요. 취직이 안 돼서 아니라 돈 있고 자식들 무탈해도 알 수 없어요. 늘 불안증세가 일어나는 거예요. 쫓기고. 해답을 미리 말씀드릴게요. 해답은 창세기 1장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뭐라 하시느냐 하면,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돼있지요. 이건 누구 입장이냐?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창세기 3장에 들어와서 죄 짓고 난 뒤에 무엇을 고집하느냐 하면, 내가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에 고착돼있습니다. 우상처럼 거기에 자리 잡았어요. 뭐가? 이 세상 모든 것이. 부산사람이면 프로야구 롯데자이언트를 응원하지요. 롯데자이언트는 십 몇 년 동안 소원이 있어요. 올해는 가을야구 해보자. 제발 5등 안에는 들자. 처음에 이대호 펄펄 날 때는 설마 5등 안에는 들겠지 했는데 쭉 내려가서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5~7등 사이를 왔다 갔다 해요. 만약에 롯데가 연승한다. 롯데 팬들은 아침부터 미소가 얼굴에 그득해요. 기분이 좋아요. 왜냐하면 부산이 보기에 심히 좋은 거예요. 부산 땅이.

제가 어제 오후에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어떤 목적과 계산과 기대를 하지 마세요. 그 짓은 지 손가락으로 지 눈을 찌르는 것과 같다고요. 괜히 기대한 게 있고 소망과 목적이 있으니까 그것에 따라서 인생의 색깔이 오르락내리락, 인생 자체가 자기가 설정해놓고 그것 따라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거기에 농락당한다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요? 조울증도 아니고 되게 좋았다고 되게 울었다가.

그게 뭐냐 하면, 나를 위하는 내가 보시게 심히 좋았더라를 설정해놔요. 목표를. 이 정도 되면 내가 보시에 심히 좋았더라. 나는 그렇게 간주하겠다. 그 다음에 세상에 나갑니다. 이 목적 들고. 세상에 나가서 가까운 사람들 만나보면 지 뜻대로 안 되거든요. 그러니까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는 거예요. 마음자세가. 사서 마음고생 되는 거예요.

지 손가락으로 지 눈을 찌르든 말든 자기 기대 없이는 또 살 수가 없는 게 인간이거든요. 인간은 뭔가 계획이 있어야 되고 기대가 있어야 아무지게 노력하는 동기부여가 되죠. 일하는 동기부여가 되려면 뭔가 노리는 게 있어요. 직장 그만두고 퇴직해서 생각해보면 아무 탈 없는데 삶이 재미가 하나도 없는 이유가 뭐냐 하면, 동기부여가 안 돼서 그래요. 목적이 없는 것은 시체인지 사는 건지 분간도 안 되잖아요. 힘들다는 건 목표가 있어서 거기에 대해서 약간 긴장감도 느끼고 성취감도 느끼고 사는 게 그거지. 뭐 있겠어.

이 둘 사이가 끊임없이 경쟁하고 있습니다. 싸우고 있어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럼 쉽지요. 내가 보기에 좋았다는 걸 접고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걸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걸 쳐다보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은 이렇게 하는데 문제는 이걸 모른다는 거예요. 이걸 알 수가 없다는 거예요. 무엇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가를 아무리 애써도 우리는 모르게 돼있어요. 그러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걸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아예 없는 것인가? 아니, 있어요.

있다면 어떻게 발견되는가? 내가 보기에 심히 좋은 게 실패로 끝나는 현장에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게 그때 등장해요. 망하는 가운데 감사가 나오게 돼있어요. 내 뜻이 좌절되고 내 뜻이 엉망진창이 되는 그 현장에서 내 뜻이 꺾어지는 그것마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이렇게 했어야 되는 일, 그것이 바로 나는 비록 안 좋지만 주님 보시기에 주님이 원했던 거고 주님이 원래 계획했던 그 뜻이란 말이죠. 그럼 우린 뭐냐? 주님이 원래 계획했던 그 뜻의 시다바리죠. 그 뜻을 위하여 그 뜻을 모르고 우리는 항상 오해와 곡해 속에서 지 뜻 안 된다고 울고불고 하거든요.

케이블에서 방영한 <나의 아저씨>란 드라마가 있는데 그 드라마의 OST에 있는데 거기 가사를 보면, “고단한 하루일과 끝나고” 아침에 출근하면 하루일과가 메일로 옵니다. 딴 생각을 할 수 없어요. 그 메일이 지시한 그 일을 그 날 다 이뤄야 되고, 못 이루면 잔업을 해야 돼요. 항상 일거리가 잔업 하게끔 주어집니다. 그냥 실실 대충하면 퇴근 못하는 일거리가 주어져요. 그 일거리가 노는 것이라면 그 사람을 직원으로 안 뽑을 테니까. 반드시 회사 그 시간보다 오버되는 양의 일거리를 줍니다. 딴 생각 못하게. 예수님 생각도, 하나님 생각도 전혀 못하게. 그러니까 고단하지요. 일한다고 다 패스 되는 게 아니니까 일을 집중해서 해야지요.

그런데 일할 때는 고단한 줄 몰라요. 목표가 있기 때문에. 일 끝났습니다. 피곤한 몸으로 집에 왔습니다. 그러면 그 날 하루는 갑자기 목표를 잃어버렸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누가 시켜줘야 내가 된다는 것, 옆에서 나한테 지시하고 나를 밀치고 누군가 나에게 이야기하고 명령하지 않으면 내가 누군지 모호해져요. 그런데 일거리가 끝났으니까 고단한 신체만 남았어요. 그러면 내가 누군지 알려면 어딜 가느냐 하면, 정희네 집, 꼭 술집에 가요. 다시 옛날 이야기하면서, 옛날에 허세 떨었던 이야기하면서 똑같은 남자들 열댓 명 모여서 술을 먹어요. 매일 저녁마다. 술 먹었으니까 자고 아침에 또 출근하는 겁니다.

결국 인간은 내가 되고 싶은 나와 사회가 떠미는, 강제하는 나 사이에 갈등하는데 남의 지시받는 게 그렇게 싫으면 회사 그만두면 되지 않겠느냐? <미생>이란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나와요. “회사에서 모든 일과는 전쟁이다. 하지만 바깥은 지옥이다.” 지옥이냐, 전쟁이냐,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 이것저것 다 놔버리면 인간은 자기 존재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그렇게 살다 퇴직을 합니다. 내 몸이 퇴직을 한 게 아닙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지시받고 술 먹으면서 화를 냈던 내가 퇴직했어요. 그러면 나라는 게 없기는 마찬가지에요. 내 안을 뜯어보면, 시켜만 주이소. 돈만 벌면 뭐든지 하겠습니다가 들어있어요. 그런데 퇴물, 아무 쓸모도 없이 이제는 폐기처분돼 내쫓기면 안에는 시켜만 주이소가 되는데 사회가 안 시켜주니까 또 미치는 거예요.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가 뭘 설명하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행악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어요. 8절에. 시편 1편에 보면,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죠. 그러면 시편은 (율)법에 속합니다. 법은 짐승이라든지 산천초목에 이야기하지 않아요. 법은 인간에게만 이야기해요. 주님께선 인간을 시비 걸어요. 개나 소나, 원숭이, 낙타에 시비 거는 게 아니고 인간을 겨냥해서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창세기 1장에 보면, 인간이 다른 짐승과 차이점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외에는 형상이 없어요.

그런데 형상과 인간 사이가 법으로 연결돼있고 법이란 말이거든요. 언어로 연결돼있어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 2장에 선악과 심어놓고 그냥 멍하니 쳐다보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17절) 이미 그 관계를 하나님 쪽에서 선악과 심으면서 동시에 그 관계를 굳어지게 한 거예요.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가 있다면 생명나무에 대해서 지시한 게 아니에요. 선악과나무에 대해서 이것을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라고 돼있어요. 이걸 뱀이나 짐승에게 이야기한 게 아니고 인간에게 이야기한 겁니다. 그러면 선악과 자체가 이미 인간을 겨냥했다는 겁니다. 왜 원숭이한테 안 하고 인간에게 하느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이 연결고리를 갖는다면, 형상이 형상답게 되는 것은 주님의 법이 유지돼야 되고, 이 법은 인간의 언어에 의해서 하나님께 지시를 받는 겁니다.

그리고 시내 산에서 모세가 받은 게 뭐예요? 금덩어리 받았어요, 돈 받았어요, 뭘 받았습니까? 지시받았지요. 말씀 받았다고요. 말씀과 지시를 받은 거예요. 로마서 10장에 보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이게 뭐냐 하면, 사도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거예요. 이번에 사도행전 하겠지만 사도행전에서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는데 성령 받아서 슈퍼맨 됐어요? 갑자기 힘이 세졌습니까? 오순절 성령 받은 변화의 조짐이 뭘 이야기하는 거예요? 말을 하는 거예요. 어떤 말? 듣도 보도 못한 내용의 말을 하는 겁니다.

듣도 보도 못한 것, 왜냐하면 인간은 창세기 3장에서 이미 범죄 하고 난 뒤에는 창세기 1장, 2장은 없어요. 창세기 1장에 일어난 일은 어디에 해당되느냐 하면, 듣도 보도 못한 일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 일을 복음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전해주지요. 이걸 어제 낮 설교에선 성령이 왔다는 것은 어디서 오는가? 하나님 우편에서 오는 거예요. 하나님 우편이 천지창조가 있기 전에 계셨던 자리에요. 그러니까 성령이 왔다는 것은, 인간이 듣도 보도 못한 인간이 범죄 하기 이전에 아니 태어나기 이전에 있었던 계획, 그걸 에베소서에서는 창세전의 비밀인데 예정된 비밀이라고 하고, 다른 말로 복음이라 해요.

복음은 듣도 보도 못한 천기, 비밀입니다. 그게 에베소서 3장에서 감추어진 비밀이에요. 뭐 교회 와서 돈 벌고 몸 건강하고. 도대체 하나님한테 건강하게 해 달라, 우리 집안 잘 되게 해 달라. 무슨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는 무엇을 구할지 알지 못한다. 그래도 예수 믿고 난 뒤에 힘들면 안 되잖아요, 하는데 제가 다시 이야기하지만 힘들어서는 안 된다는 게 뭐냐 하면,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내가 보기에 좋았더라고 고집스럽게 움켜쥐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요. 그래도 사람들이 자기 좋으라고 신을 믿는데 그런 것 안 하면 교회 자체가 안 될 걸. 거기에 대해서 이미 구약에서 네 자로 우상숭배로 된 겁니다. 진짜 하나님이 우상과 라이벌로 같이 등장해요.

그 말이 맞더라도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또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그런데 원래 뜻에 의하면 우리는 살려고 이 땅에 태어난 게 아니고 밟아 죽이려고 태어난 거예요.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범죄 하고 쫓겨났잖아요. 그러면 창세기 2장의 괜찮던 시절은 잊어야지요. 그때 잘 나가고 벗고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고 행복했던 그 시절은 뱀과 만난 이후에는 잊어줘야지요. 지금 상황이 지 주제를 알아야지. 범죄 하지 않을 때는 그만한 혜택이 주어졌는데 지금은 자기 자신이 범죄 한 거잖아요.

범죄 한 자에게 주어진 것은 뭐냐? 주님께서 저주로 밟아줄 때 밟히는 것밖에 없어요. 밟아준다는 말을 제가 험악하게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17장, 18장, 19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포도주 틀에 포도를 넣고 짓밟아 터뜨려서 술 되게 할 때 그 모습이 하나님이 진노하는 모습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분노로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거예요. 미국 가나 한국에 있으나 마찬가지에요. 주님의 진노가 아파트 사나 빌라에 사나 해운대 사나 대구 사나 하나님의 진노 없는 곳이 없어요.

진노가 없으니까 회개하면 되겠네요. 회개 같은 소리하고 있네. 진노가 없으니까 회개는커녕 오히려 반발만 가중될 뿐이죠. 하나님 믿는데 왜 힘들게 살게 하십니까? 이런 식으로. 하나님 믿는데 하나님은 내 뜻대로 안 해줍니까? 이런 식으로. 반발만 자꾸 확대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계획이었어요. 왜냐하면 반발할 때 자기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으란 말이죠. 도대체 화는 어디서 나는가? 왜 나는 분노하는가, 왜 나는 성을 내는가? 나는 왜 짜증내는가?

그것은 내 몸이 내 말을 안 들어요. 내 육체의 욕망이 내 말을 안 들어요. 왜냐하면 몸이 먼저 있고 나라는 게 나중에 나왔기 때문에 나중에 나온 것은 취급도 안 해요. 내 몸의 욕구와 욕망이 우선되는 겁니다. 그 욕망은 창세기 3장 이후에 범죄 한 욕망이고 쉽게 말해서 악마의 욕망, 악마의 취지를 우리 인간들이 대변해주고 있는 겁니다. 마구 그걸 방출하고 있고 발산하고 있는 거예요. 움직였다 하면 악마의 뜻이 그냥 나오는 거예요.

악마의 뜻은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내버려둬. 제발 내버려두세요. 신처럼 된다는 거예요. 네가 독자적인 인간으로 사는 것이 너한테 가장 행복하다는 겁니다. 너 홀로 사는 게 가장 행복하다는 거예요. 신이라도 네가 신을 선택해서 믿을 권한이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선택했기 때문에 모든 영광은 내 책임, 내 권한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그러니까 성경이야기가, 시편이야기가 먼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니에요.

다시 정리하게 되면, 우리는 처음 뜻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시편이나 성경의 뜻을 그대로 이야기하면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로 들려질 수밖에 없어요. 사도들이 이야기할 때 듣도 보도 못한 내용이에요. 마태복음 5~7장 산상설교 끝나고 난 뒤에 그걸 듣던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어떤 평을 내렸습니까?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고 했어요. 도대체 무슨 권세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그 권세가 어디서 났느냐? 처음 듣는 거예요. 세례요한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의 지혜로 나온 게 아니라 하늘의 권세라고 했어요. 세례요한도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예수님이라면 더 그렇게 이야기하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그 당시 권력자들이 왜 예수님을 제거하려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모든 행적과 취지와 뜻이 지금껏 쌓아놓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의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벗어난 그것을 민중들은 신의 권세로 봤고, 바리새인들은 악마의 권세로 본 거예요. 사탄의 권세로 본 겁니다. 자기 자신을 정당하다고 보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당부를 했어요. 그들과 말 섞을 생각하지 마라. 먼지를 털어버려요.

쉽게 말해서 강의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을 달래서 구원하려는 생각은 하지 마라. 왜냐하면 처음 인간이 태어나기 전 창세 이전의 계획에 의하면 누가 구원받을지 말지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겁니다. 사도행전에 사도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한 설교가 있는데 이 성에 내 백성은 많음이라고 돼있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한 거예요. 사도 바울이 그 성에서 설교한 이유가 자기 백성을 찾아내는 거예요.

우리나라 대통령이 만약에 브라질이나 독일이나 아프리카 다른 나라에 가게 되면 정상회담도 하고 짬을 내서 누굴 만나느냐 하면, 교민들을 만나지요. 그 교민들이 누굽니까? 에티오피아 같으면 에티오피아 국민이에요? 우리나라 국민이죠. 자기 나라 사람이죠. 성령께서 사도 바울에게 한 것은 천국 백성 만나라. 하늘나라 시민권 가진 그 사람을 만나라는 거예요. 만날 때 말로 만나는 거예요. 돈 주고 만나고 놀러가서 만나는 게 아니고. 그 말이 복음이란 말이죠. 그 복음의 내용이 원초적인 거예요. 듣도 보도 못한 걸 만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걱정이 돼서 듣도 보도 못한 말을 어떻게 납득되지? 지금 납득, 설득 이야기가 아니고 자기 백성, 하나님이 정한 백성이면 정말 듣도 보도 못한 말을 세상에 그쪽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거예요. 지나가는 사람이 깜놀. 어떻게 이런 말을 압니까? 진짜 그 고백에 미칠 정도에요. 어떻게 이걸 알아듣느냐 말이죠. 그러니까 설교자가 내가 설교 잘해서, 이게 아님을 내 솜씨가 아님을 설교자도 알거든요.

그러면 그 사람 보고 오히려 설교하는 자가 더 두려운 거예요. 정말 조심해야 되겠구나. 쓸데없는 소리하면 안 되겠구나. 설교에 조금이라도 교인들 끌어 모으려고 수작을 떨어서는 안 되겠구나. 천국 가지 못한 사람들은 절대로 안 받아주는 식으로 설교해야 되겠구나. 그렇게 돼야 되는 겁니다.

어제 낮에 제 아내가 그런 이야기해서 제 아내를 다시 봤어요. 내가 깜짝 놀랐어요. “여보, 교회 문제 있으면 그만 둡시다.” 저게 믿음이다! 교회는 주님이 만든다는 사실이거든요. 이걸 어떻게 인간의 이해로 납득이 됩니까. 갑자기 아내 자랑이 됐는데. 접자. 다른 말로 죽자란 말과 같은 말인데 교회는 주님이 만드는 거예요. 그럼 왜 교회가 있느냐? 가짜가 있어야 느껴지게 돼있어요.

교회가 있으면 목사가 붙들게 돼있고, 붙들면 목사 보기에 심히 좋았다는 교회가 되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이건 목사뿐만 아니고 목돈 낸 그 교회 오래된 장로들, 집사들, 이 사람들은 자기가 다니는 교회를 자기 자존심인 줄 알고 붙잡는 거예요. 붙잡을 때 백날 복음을 전해도 안 먹혀들어갑니다. 이미 그들에게는 교회가 우상 덩어리에요. 그래서 그들의 목사 뽑을 때는 지가 돈 투자해서 세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 잘 되라고 설교하는 사람만 뽑고, 맨날 당신 와서 교인 몇 명 왔고, 몇 명 빠졌고 그것만 따지는 거예요.

심히 내게 좋아 보일 때 정말 위험한 순간이에요. 심히 좋은 기억이 없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뭔가 내 뜻대로 될 때 내가 신자일리 없어요. 그것에 푹 빠져서. 그것이 내 인생인 양 여기고 있단 말이죠.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살지요. 그러면 사람은 떡을 포기하고 말씀으로 살아야 되는데 떡이 좋을 때는 절대로 말씀으로 올 수 없어요. 돈 세고 떡 먹는다고 바빠서 말씀으로 오지 않습니다.

이 말은 뭐냐? 자기는 원래 자리와 끊어져있는 상태인 것을 본인이 인정을 못해요. 창조 이전의 원리와 원칙과 끊어진 상태를 본인이 아주 우습게 여깁니다. 남들 그렇게 사는데 나도 그렇게 살지, 뭐. 내가 뭐 별거냐.

야고보서에 보면 욕심이 잉태한다는 말이 있지요. 욕심이란 딴 게 아니에요. 내게 주시지 않는 걸 기대하는 게 욕심이에요. 내가 이런 형편에 사는 것은 주님 보시기에 최적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기에 지금 이 상태에요. 내 몸이 아프다든지 집안이 어렵다든지 이 상태가 가장 좋은 상태에요. 하나님 보시기에. 이 말은 내가 좋은 것을 주님이 발길로 차버린 겁니다.

마태복음 5장 36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아멘. 바리새인이 맹세하는 거예요. 맹세할 때 점점 낮아지다가 가장 현실적인 맹세가 뭐냐 하면, 내 머리로 맹세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네가 백날 용을 써도 창세전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대로 갈 뿐이다. 그러니까 현재 내 형편에 대해서 입을 다물어야 되는데, 이게 주님께서 입을 다물라는 이야기거든요. 그 뒤에 나오잖아요. 문제는 입을 못 다물게 우리의 육신이 내 안에 있는 괴물이 나를 들쑤시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우리는 시편 볼 때 어떤 마음으로 봐야 된다? 내가 신자일 리가 없다. 그 말이 맞아요. 우리는 이미 육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기독교 신자일 리가 없습니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시편도 율법이라 했지요. 그러면 로마서 3장에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입을 막고 저주와 진노 아래 있음을 알기 위해서. 그리고 로마서 3장에서 계속 나가기를 너희들이 백날 그런 자세로 해봐야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해요.

지는 행복하지요. 세상에 나가보세요. 행복한 사람 얼마나 많습니다. 특히 해운대 앞 바다에 가면 지금 비오는 데도 행복한 사람 많아요. 자기는 행복한데 문제는 행복한 것이 하나님의 영광은 아니란 말이죠. 자기 보기에 심히 좋은 것이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건 아니에요. 하나님까지 챙길 것 뭐 있어, 나만 챙기면 되지. 하는데 문제는 심판 날이 오면 모든 것이 개꿈으로 끝나는 거예요. 꿈꾸면서 멋진 일하는 것, 좋지요. 아침 돼서 꿈 깨면 어떻게 됩니까? 꿈이었었어?

꿈 깰 것까지 없어요. 우리는 매일같이 조금씩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치 않는데 죽음이 날 끌고 있어요. 생각해보면 지나간 어제가 그렇게 아까워요. 어제 하루가 얼마나 괜찮고 재미있었어요. 그러나 오늘 그 재미있었던 것이 없어졌어요. 국가가 보상해야 됩니까? 어제란 시간이 날아간 걸 누가 보상해요? 내일 되면 오늘이 없어지는 데요. 그냥 팔다리가 잘라지는 거예요. 이게 우리의 진짜 모습이에요. 다람쥐가 쳇바퀴 돌듯이 하나님의 그 정해진 자리에서 우리는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이왕 빠져나오지 못할 것 신처럼 네가 하나님이다, 하고 그냥 살면 나름대로 행복할 걸. 이게 마귀가 우리 육체를 통해서 계속 우리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덩달아 께 좋다고 축제 벌이고, 대구는 왜 그리 축제가 많은지. 돈을 다 거기다 쓰는가.

그러면 시편 6편을 어떻게 할까요? 이제부터 이야기합니다. 시편 6편 말씀을 보지 마세요. 안 보면 어떻게 되느냐? 시편 6편 말씀이 그대로 현실화 되어서 자기 백성을 방문합니다. 찾아오지요. 원치 않는 사태가 내 인생에 시편 6편 자체가 덮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시편 6편이 다윗이야기,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어느새 이게 나를 지적하시고 나를 지목해서 주신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이 왔을 때 ①지켜야 된다. ②지키게 돼있다. 몇 번입니까? 우린 다 알지요. 지키는 게 아니고 지키게 돼있어요. 어떤 식으로 지키는가? 이건 두 번째 시간에 하겠습니다. 변화. 우리의 변화로. 심령의 변화, 마음의 변화를 통해서 남의 이야기로 여겼던 시편 6편이 바로 my story나의 이야기로 들려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행함의 의미가 새롭게 부각되고 주님으로 인하여 내가 견책 받는 것이 어떤 느낌이고, 주의 진노가 무엇이며, 내가 수척한 게 무엇이며, 긍휼이 무엇이며, 영혼이 심히 떨린다는 그 조짐마저 우리가 감지되는 인생이 되면서 그때부터 내 인생은 뭐냐?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의 인생이 되는 겁니다. 주님의 인생이 되면서 내 인생은 변화를 통해서 사라져줘야 돼요.

그동안 내가 힘들게 살았던 것은 죽으나 사나 내 인생은 내 것, 내 인생 여기 있다, 내 인생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애를 쓴 거예요. 지가 주인이니까 조절하는 거예요. 때로는 예수도 믿고 때로는 교회 못 간다고 미안해하면서 변명들을 늘어놓으면서 주님과 밀당하는 거예요. 지난 주 빠졌지만 그래도 헌금은 천 원 드렸잖아요.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이렇게 위기가 왔을 때 바짝 기도할 테니까 우리 애 문제는 알아서 해결해주시고. 내가 안 사라져. 내가 안 사라지면 그 자체가 고통입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4.♡.134.54) 18-07-13 10:14 
20180709b 부산강의 : [시편]12(6편)-임플란트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6편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분란을 우리 쪽에서 일으키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부러 분란을 일으킵니다. 이미 인간은 망가졌거든요. 자기 백성도 망가졌고. 그런 가운데 자기 백성을 끄집어내야 되기 때문에 창세전의 계획으로 인간세계에 침투할 때는 이게 고요하게 되면 분리가 안 됩니다. 분란이 일어나야 돼요. 분란을 통해서 분리가 일어나지요. 분리라고 하면 택한 백성의 몸과 불신자의 몸으로 분리한다고 생각하실 건데 이렇게 되면 참 쉽지요.

더 어려운 게 있어요. 분란을 일으켜서 분리할 때 이 사람은 성도, 이 사람은 성도 아님으로 분리하는 게 아니고 시간의 분리를 일으켜요. 그러면 누가 저 사람은 성도 맞다, 아니다를 확정 질 수 있는 권한이 사라져버려요. 시간의 분리가 뭐냐 하면, 과거에서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간다. 이렇게 생각하는 쪽과 이미 완성의 시간은 도달했다고 믿는 그 시간의 층과의 분리. 이런 걸 설명하려면 시간이 많이 가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이스라엘에 누가 동행해요.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동행해요.

그러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의 차이점이 뭔지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이름이 있으면 하나님 쪽에도 속하고 인간의 시간과 공간에도 같이 거주가 가능한 어떤 분, 쉽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요. 신약 같으면. 구약에서는 그리스도라 하지 않고 이름이란 분으로 동행하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신약에서는 예수라는 실제 몸으로 오셨고, 구약에서는 몸이 아닌 그냥 이름으로 오신 거예요.

몸이 아닌 이름으로 어떻게 구체적으로 나타나는가? 그것을 우발적 사건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아까 권사님께서 아주 좋은 말했어요. 은혜를 받았으면 그 다음부터 은혜 안 받아도 될 정도로 꾸준히 계속 됐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셨는데 누구 좋으라고 그런 계획을 세웠지요? 그래서 권사님이 하는 말이, 왜 재방송이 없느냐 말이죠. 자동적으로 재방송이 되도록 은혜를 비우면 리필 해드릴까요, 이런 식으로. 계속 은혜를 채워줬으면 하는데 실제로 주님께서 리필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인간의 시간과 공간에 들어왔을 때 당하는 수모와 아픔과 미움을 재탕해줘요.

어제 주일 낮 설교의 핵심이 뭐냐 하면, ‘나’가 없어지고 체계가 재편성돼요. 내가 있고 하나님 있다는 체계가 내가 없어지고 그 자리에 기능이 와버려요. 어제 기능 이야기했잖아요. 종의 멍에가 되는 건 어떤 경우고 거기서 벗어난 자유는 어떤 상태인지 한꺼번에 담아서 보여줄 때 그것이 바로 주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신체가 되는 겁니다. 마치 구약에서 주의 이름이 우발적인 사건이 되었다가 신약에 와서 구약의 주의 이름이 예수님 육체로 오신 것처럼. 그러면 주의 이름은 경계선이 쳐지지요. 경계선이란 기존의 것과 외재적인 것, 또는 외부적인 것이 공존하는 것.

어려운 것 하려니까 제가 미안하지만 이건 중요해요. 마태복음 1장 봅시다. 3절에 보면, “유다는” 그 다음에 뭡니까? “다말에게서”죠. 2절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지요. 여기선 사라라는 자기 부인 이름이 없지요. 그냥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잖아요. 그런데 3절에 보면, 유다는 그냥 베레스와 세라를 낳는 게 아니에요, “다말에게서”에요. ‘에게서’란 말은 외재적, 외부에서 주어진 겁니다. 그런데 주어진 여인들의 특징이 뭐냐? 전부 다 이방여자에요.

마태복음 1장 족보는 경계선입니다. 외부적인 것과 내부적인 것이 공존하는 경계선을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그 경계선 끝에 뭐가 있느냐 하면, 바로 16절,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리아에게서”지요. 그런데 마리아에게는 남편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리스도를 낳게 남편이 없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여자의 자손 아닙니까. 예수님은 외재성의 자손이에요. 외부가 내부에 침투한 거예요.

외부가 내부에 침투하는 걸 누가 가장 싫어하는가?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지요. 시험받을 때 악마한테 시험받지요, 이 말은 예수님이 외부성의 대표자라면 내부성의 대표자는 사람이 아닙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아니에요. 문재인이 우리나라 대표자가 아니에요. 악마가 대표에요. 우리는 얼마 전에 악마를 뽑으라고 투표한 거예요. 모든 대표자는 악마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대표자는 예수 그리스도에요. 그러나 그건 우리가 뽑는 게 아니에요. 그분이 찾아오시는 거예요. 시편 6편을 가지고.

찾아오시면 우리를 데려가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행하셨던 기능을 이 땅에서 행하게 해요. 예수님의 기능이 뭐냐 하면, 외부성과 내부성을 공유하면서 이 땅에서 자기 백성을 끄집어내는 일을 해요.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분신이 되는 겁니다. 어제 낮 설교하면서 부활 이야기했잖아요. 요한복음 20장 이야기하면서 예수님 떠나고 난 뒤에 세마포 있지요. 그 세마포가 성도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어요. 죽고 난 뒤에 알맹이는 빠지고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와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천국 가고, 어떻게 해서 지옥 가느냐를 그 기준의 패러다임이에요. 우리는 그 기준이에요. 그 기능을 해야 돼요. 나 편하라고 은혜가 재방송되는 게 아니고 내가 원하는 것을 나한테 주질 않아요. 하지만 우린 육체가 있잖아요. 우리 육체가 내게 심히 좋았더라를 요구하지요. 요구할 때 정말 최적화 반가운 것은 그 요구를 꺾는 식으로 주께서 감안해서 내 뜻대로 안 되는 은혜를 주셨다는 사실, 말이 어렵다만, 내 뜻대로 안 되는 은혜를 주시는 겁니다. 욥처럼.

그러면 집사님 같은 경우엔 후딱 떠나고 싶지요. 아이고, 지긋지긋해. 자식이고 남편이고 외손녀가 그냥 놓고 떠나고 싶다. 이거,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성도 계통입니다.(아멘) 장거리 기차여행하면 담배 피우는 사람은 꼭 흡연실 찾아가죠. 본능이잖아요. 우리는 내 뜻대로 되면 기분 좋은 게 아니고 기분 좋은 것은 며칠 안 가요. 이게 좋아도 떠나고 싶다는 생각, 한 대 피우고 싶다는 생각처럼 그냥 떠나고 싶어요.

여행 가면 좋지요. 일본여행 가고 다 좋은데 가봤자 가면서 싸우고 오면서 싸우고 집에 오니까 안 싸우고. 이상하게 떠나고 싶어. 성도의 특징은 자기 뜻대로 잘 되게 되면 얼마 안 가서 허무가 찾아온다는 거예요. “이게 뭐야? 이게 다야? 이것 때문에 내가 주님 버리고 교회도 안 가고 이 짓하려고 했어?”허무가 찾아오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분란을 누가 일으키느냐 하면, 주님 쪽에서 일부러 분란을 일으킵니다. 이런 표현하면 안 되지만 예수님의 자기 새끼를 계속 까는 거예요. 이 땅에서. 그걸 주의 이름으로. 어제 낮에 사도행전 4장 12절하면서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 없다. 그걸 설명하면서 절망하라, 그리고 찬미하라. 그게 천사의 찬양이라 했지요. 절망이 없으면 찬미가 안 돼요. 이것도 해보고 구원받으려고 애를 쓰고 용을 써도 그게 다 실패로 끝나야 진정한 찬미가 나옵니다. 안 되는 걸 되게 하셨으니까.

어제 종의 멍에를 무능성이라 표현했거든요. 그냥 무능함이에요. 종의 멍에란 힘들다가 아니라 그냥 무능함이에요. 돈 있어서 골프 치고 놀러 가는데 그게 구원에 전혀 보탬이 안 돼요. 뭔가 했는데 그게 나의 무능함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무능함이 감사해야 될 텐데 감사는 짧고 또 돌아서면 마귀가 부추겨서 결국 중요한 것은 돈이야, 인간아. 현실은 돈이 최고야, 하고 정신 차리게 만들지요. 맞아, 맞아, 맞아. 정신 차리는 거예요. 돈 없이는 못 사는 거예요. 당연한 현실인데.

내재적 현실에 외재적 사건을 일으켜버리죠. 그러면 돈이 최고다. 돈 없으면 못 산다. 아까 광야에서 마귀가 시험한 게 그거잖아요.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다. 사람은 돈 없이는 못 사는데 그런데 말입니다. 돈보다 더 소중한 것, 그리고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뭐냐? 나보다 더 소중한 것, 내가 하는 기능이 내 생존보다 아니 나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에 기능이 발휘되는 그 순간 나는 사라져줘야 됩니다. 나는 없어져야 돼요.

회사직원이 메일로 그날 할 작업지시를 받을 때 과장은 대리한테, 그리고 과장은 부장한테 지시받은 거죠. 그러니까 떠밀려서 떠미는 거예요. 사람 산다는 게. 더러워서 못하겠다. 밖에 나가서 자영업자 하면 돼요. 자영업자는 라이벌이 나를 떠밀어요. 동종업자들이 나를 힘들게 한다고요. 그러면 나는 장사 접을래. 월드컵 기간에서 새벽 두시까지 장사해야 되는데 나는 월드컵이고 뭐고 싫어. 열시에 잠잘래. 장사되든 말든 4년마다 오는 장사 호황도 싫어. 이렇게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돈이 안 되는데. 그래, 나 돈 없이 살래. 그 말은 몸 아플 때는 잘 나요. 그런 소리할 때는 약간 배부르고 안 아프다는 뜻이에요.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인간이란 없어요. 현실의 표면입니다. 현실은 돈으로 구성돼있고 악마가 지배하고 있고 현실에 뾰루지 난 게 인간이에요. 인간과 따로 살 수가 없어요. 이게 인간의 현실이라니까요. 이걸 제가 어느 강의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유적지에 묻혀있는 유물이라고 표현했어요. 유적지의 유물을 유적지를 발굴하지 않으면 거기서 떼어낼 수 없잖아요. 그처럼 우리는 유적지가 만들어낸 생산물이에요.

내가 따로 살겠다. 마귀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백날 도망쳐봤자 돈이 전부인 이 세상에서 우리 몸은 한시도 떨어나갈 수 없어요. 그래서 그걸 제가 무능함이다. 우리는 구원받고 싶어도 발목을 잡힌 게 너무 세기 때문에 못해요. 안 돼요. 구원이 안 됩니다. 우리는 신자 아닙니다. 안 되는 걸 되게 하시는 거예요. 누가? 시편 6편이, 말씀이.

시편 6편을 누가 데려온다? 시편 6편은 글자다. 맞아요. 글자 맞습니다. 글자가 뭉쳐지면 그게 어떤 분이 돼요. 그분이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그냥 맹탕으로 오시는 게 아니라 시편 6편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와요. 우리 구원하려고? 아니요. 시편 6편을 기능화 시키기 위해서. 시편 6편을 기능화 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너처럼 다른 사람 데려오도록 사람 낚는 어부가 되도록 그런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럼 시편 6편 내용이 뭐냐고 물으면, 우리에게 떨어질 수 없는 우리의 현실상이 여기에 그대로 반영돼있습니다. 갈등 일으키고 고민하고 걱정하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고 뭔가 편안해도 안심 못하고. 평생을 살면서 얼마나 이게 숙달이 됐는지 조용하면, 조용해도 얼만 안 갈 거야, 우린 알아요. 며칠 안 간다는 것. 자식이 둘 있으면 다 잘 되는 게 아니고 하나 잘 되면 하나 문제 있다는 걸 알아요. 우린 익숙해있는데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맞으면 또 아파요.

교인수 적은 교회가 약간은 자존심 상할 순 있지만 교인수 적으면 좋은 게 한두 점이 아닙니다. 괴롭히는 사람이 그만큼 적어요.(아멘^^) 시답지 않은 것으로 시비 걸고 전화하는 이런 사람이 없다니까.

시편 6편을 다시 한 번 이야기하면, 시편 6편이 살아서 움직인다. 이렇게 보시면 제일 이해가 쉽고요. 뚜벅뚜벅 걸어서 시편 6편이 나타난 걸 보니까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이 자신이 시편 6편이에요. 시편 6편의 얼굴이 상한 얼굴이에요. 고생에 절은 모습으로 육체로 온 천지에 상처투성이의 모습으로 시편 6편의 내용을 품고 우리 앞에 나타나셔서 최후까지 아낌없이 자기 육체를 찢어버렸습니다. 그게 십자가 사건이죠. 그래서 십자가 사건은 신약만 연결시키지 마시고 시편 6편과 다이렉트로 연결시키면 시편 6편의 내용대로 주께서 환경을 조성해 나가신 겁니다.

그럼 환경을 조성할 때 아까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인간들의 육신이 자력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은 시간+공간에 완전히 새롭게 얽매여있습니다. 악마 쪽에서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공간을 계속 만들어내요. 그러면 창세기 3장을 알다시피 우리는 이미 쫓겨난 공간은 수상한 공간이에요. 원래 안 살아야 될 공간입니다.

인간은 그 공간마저 없으면 못 사니까 이걸 어쨌든 간에 절대화시키고 살려고 하니까 저주 속에서 살려고 하니까 이게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죠. 저주받았으면 저주받아 죽으면 되는데 이마에 땀 흘리고 결국 흙으로 돌아가면 되는데 그게 우리 성적표 아닙니까. 당연한 거거든요. 이 모습이 하나님에게 심히 좋은 모습이에요. 우리 매 맞는 게.

매 맞는 입장에서는 주의 뜻에 합당하더라도 막상 맞으니까 아프잖아요. 아플 때 가만있는 게 아니라 여기서 뭔가 반발이 나오는 거예요. 내가 사는 공간 아무 탈 없게 해주시고 지금은 힘들지만 우리의 미래는 영광스럽게 해 달라. 희망이 넘치는 나중에 완벽하고 완전한 세계가 돼 달라고 미래에 대해서 희망과 기대를 걸고 그 기대를 위해서 지금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참아내면서 감내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게 인간들 평소의 삶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외재적인 적이 내부로 뛰어들면서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무엇을 하면 됩니까, 라고 하니까 무엇을 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다 이룸을 심어주는 거예요. 그게 바로 문둥병자가 즉각 나았고, 십이 년 병든 자도 나았고, 그 나은 결과가 백부장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온다고, 이건 배알도 없어. 지 주장도 없어. 그냥 주님 부르시면 조르르, 이것도 하겠나이다. 저것도 하겠나이다. 종이 바깥에서 음식 먹는 건 당연한 겁니다. 주인부터 챙기고 종이 먹는 거지. 종은 할 바를 다할 뿐입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희한한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자기 주관도 자존심도 없어요. 그냥 시켜만 주이소, 하는 식이에요. 너무 감사해요.

달란트 비유 있지요. 달란트 비유가 하도 유명하니까 다섯 개가 다섯을 남겼지요. 두 개가 둘 남겼지요. 그럼 한 개 받은 사람은 두 개나 다섯 개 남기면 돼요, 안 돼요? 안 되지요. 하나는 하나만 남기면 돼요. 그런데 한 개도 안 남겼어요. 다섯 개가 다섯을 남겼는데 다섯 개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떠난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주신 게 있다는 말은, 예수님이 떠나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거예요. 두 달란트 받은 사람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거예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예수님이 없어요. 떠나버렸다고 본 거예요. 떠나버렸으니까 분리가 된 거예요.

예수님이 함께 있을 땐 종으로 행세하다가 떠나니까 헤헤거리면서 “나, 종 아니지. 독자적인 나의 의식이 있지.” 이렇게 된 겁니다. 그럼 처음부터 주인과 함께 있더라도 뭡니까? 딴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달란트 비유의 특징이 뭐냐? 분리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비유, 기름 준비하는 것도 뭐예요? 분리에요. 아무리 섞여서 아닌 척해도 기어이 주께서는 내 백성과 아닌 백성을 분리해내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분리했을 나오는 결과, 백성의 특징이 뭐냐? 이것은 오히려 모든 일에 대해서 주님의 공로로 돌린다는 특징을 갖고 있어요. 그 특징에 하나가, 제가 언제 주님이 목마를 때 마실 걸 주었습니까, 하는 식으로 의아해하는 겁니다. 기능이니까. 제가 주님 목마를 때 마실 걸 주었잖아요, 해버리면 이건 기능이 아니고 자기에게로 환원돼버리죠. 내가 했습니다가 되는데 막상 구원받은 백성은 뭐가 없어졌지요? 내가 사라진 거예요.

인생이 엉망진창이든 뭐든 주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했잖아요, 라는 고백을 지금부터 해도 됩니다. 집에 가셔서 하시면 돼요. 누가 힘들거든 주께서 그렇게 내 남편 술 먹게 하셨잖아요. 그리고 나는 그 앞에서 성질나게 하셨잖아요. 성질 안 내란 말이 아니고 낼 때는 내야지요. 그것도 주께서 하신 거예요. 주님 보시에 심히 좋았더라.

이 작업을 위해서 주님께서 다가오실 때 그 작업의 모습은 시편 6편의 내용이 신기하게도 딱 들어맞아요. 누구한테? 예수님한테. 예수님한테만 맞고 우리한텐 안 맞네요. 그게 아니고 예수님한테 일어난 일이 그대로 우리 일로 복사가 돼버립니다. 시편 6편이 그 기능으로 찾아오게 돼요. 복사가 되면 힘들다가 아니라 감사가 돼요. 힘 안 드는 게 아니고 감사함이 되죠.

그래서 어제 낮에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성도는 사는 것이 불편하지만 재미있다고 이야기했지요. 이건 어디서 표절했느냐 하면, <같이 살래요>란 드라마에서 장미희한 대사 중에 이게 들어가요. 정신 바짝 차리고 보는 거예요. 메모지 들고. 사는 게 불편해요. 그렇지만 다 이룬 입장에서는, 다시 합시다. 외재성이 내재성에 들어와요.

이야기 다시 합시다. 많은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정리해 나갑시다. 우리는 이 세상 따로, 나 따로 안 돼요. 유적지의 유물처럼 같이 박혀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산다 해도 돈 없이는 못 살아요. 돈 푼이나 있고 배부르니까 괴롭다가 있지 정말 몸 아파 보세요. 기가 찰 일이에요. 진짜 도적질 안 할 수 없고 나쁜 생각 안 할 수 없어요.

현실이란 내가 현실을 바라볼 입장이 아닙니다. 왜? 현실의 일부니까. 그러니까 치마에 무늬가 있다면 우리는 치마 입장이 아니고 치마에 새겨진 무늬에 지나지 않아요. 치마가 바람에 펄럭이면 무늬도 같이 펄럭여요. 미국과 중국의 무역 전쟁이 일어나면 내 가계가 출렁이는 거예요. 이 세상이 같이 묶여있다니까. 뭐 현실이 어쩌고저쩌고 해요. 우리 자체가 현실인데. 안 되는 거예요.

거기에 성령을 통해서 외부성이 와버려요. 시편 6편이 찾아오지요. 찾아오게 되면 시편 6편 때문에 내가 구원받았다는 게 아니라 시편 6편에 나오는 내용대로 내가 기능하고 그렇게 움직이는구나, 하는 거예요. 그러면 현실에 묶여있는 이것은 시편 6편에 아주 적절하다고 누가 판단한다? 창세전에 하나님이 판단해서 시편 6편만 발산하라는 겁니다.

그럼 우리보다 먼저 선배가 있네요. 시편 6편 봅시다. [다윗의 시], 다윗이 우리보다 선배에요. 다윗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으면 대우 좀 해주지. 대우 없어요. 오히려 골리앗한테 이겼는데 그 다음부터 백성들한테 예쁨 받는데 그것이 화근이에요. 고생, 고생 그렇게 많이 해요. 그리고 거기서 생기는 게 뭐냐? 원래 다윗이 원수 만들어서 남 저주하는 걸 취미로 삼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능을 하다보니까 갑자기 원수가 생겼어요.

여기서 다윗을 통해서 원수의 변동이 일어나요. 처음의 원수는 블레셋의 골리앗이었지요. 참 이런 게 재미있어요. 골리앗을 이겼잖아요.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때 이긴 이유가 뭐냐? 골리앗은 할례가 없어요. 할례 받은 민족은 할례 없는 민족을 반드시 이겨야 된다는 이것이 하나님 언약의 기능입니다. 이 기능 속에 있는 순간 이스라엘이 기능 밖,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이 드디어 밝혀졌지요. 이게 하나님의 개입이에요. 다윗이 자기 일했습니까? 골리앗과 싸움이 본인의 일을 했습니까? 인간이 본인의 일을 해버리면 절대로 하나님의 원수를 모르게 돼있어요.

교회 성가대 봉사하고 주일학교 봉사하다가 취직했습니다. 삼성에 취직했다면 그건 자기 일이 되지요. 그럼 하나님의 원수는 어디 있습니까? 없지요. 왜냐하면 이미 나는 삼성맨이 되는 순간, 삼성이 교회 가지 말라는 소리하는 게 아니고 내 일이 따로 있는 그 순간 내 일을 위해서 내게 심히 기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조건 때문에 하나님의 원수가 없지요. 본인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기 때문에. 자기 원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원수는 없어요. 하나님의 원수가 없으면 시편 6편이 삼성그룹에 들어가고 난 뒤에 해석이 안 되네. 취직하고 시편 6편을 볼 일도 없고. 자기는 직장에서 일하면 되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게 자기 일이 아니에요. 삼성맨으로 골리앗 이긴 게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의 일을 한 거예요. 목사님, 하나님 일했다는 걸 어떻게 압니까? 그게 상대를 볼 때 현실을 볼 때 그냥 본 게 아니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봤습니다. 언약적 관점에서 봤어요. 할례 없는 쪽은 할례 있는 쪽에 필히 망한다. 왜?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만들어졌을 때 할례 받는 조건 하에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그들이 건너왔기 때문에. 그 언약은 하나님이 동행하는 이상 줄곧 이어져온다는 논리에 의해서 다윗은 언약에 의해서 전쟁을 한 겁니다.

하는 순간 형이 그렇게 미워할 줄도 몰랐고, 요셉 형들이 요셉 미워한 것과 비슷하게. 그리고 사울이 그렇게 싫어한 줄 몰랐어요. 백성들은 좋아하잖아요? 여러분, 백성들이 좋아한다고 단정하지 마세요.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고 팬들 많았잖아요. 그것 믿지 마세요. 인간은 권력 편입니다. 어느 쪽에 권력이 있느냐에 따라서 붙어요. 정치판과 똑같아요. 권력은 어디서 생기는가? 그때그때 승리한 쪽이 권력입니다. 롯데자이언트 응원하다고 두산이 독보적으로 1위할 때는 바꿔요. 이제 두산 팬이다. 롯데 포기했어. 이게 권력을 따라가는 거예요. 잘 되는 쪽에 몰빵하는 겁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승자독식이라고. 승리자가 돼있으면 패배자라 할지라도 노력한 만큼 그 비율을 따져서 이득을 나눠주는 것이 우리 상식인데 승자독식은, 일등만 하면 노력해서 얻은 것까지 몽땅 제로로 만들어버려요. 승리자가 다 가져가는 겁니다. 삼성화재 배 바둑대회하면 우상상금이 1억이라면 2등은 오천만 원 정도 생각하지요. 그런데 오천만 원 안 돼요. 승자독시이라면 일등은 1억, 이등은 제로인데 너무 야박하니까 이천만 원 정도 주는 거예요. 깃발은 하나밖에 없으니까. 승자독식을 누가 잘하는가? 우리 주님이 승자독식을 합니다. 마귀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항상 주님의 일은 인간이 저질러놓고, 창세기 2장에서 3장으로 넘어왔기 때문에 저질러놓은 것으로 분란이 일어나는 방식으로 주의 일이 나타나요. 그래서 주의 일은 몰라요. 하나님이 심히 좋았더라는 그 뜻이 뭔지 몰라요. 다만 내가 심히 좋았더라고 하고 있는데 그것이 와해되고 실패로 끝났을 때 외재성, 외부의 일이 내부에 침투한 흔적으로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도둑이에요. 강도에요. 북한한테 미국은 강도입니다. 주님이 우리한테 강도에요. 강도질하는 이유가, 내 것이라는 걸 용납 안 해요. 왜냐하면 아예 내 자신이 사라져야 되니까. 사람이 아무리 양보하고 주님한테 잘해도 여전히 남아있는 것은, 내가 남아 있잖아요. 그걸 유도하는 신학이 개혁주의신학이라 합니다. 아무리 주님께서 영광, 퍼줘도 꾸준히 끝까지 내 것은 챙기는 거예요. 기존교회가 그렇게 설교해요. 그러니까 마지막 내 것 챙기기 위해서 교회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단이죠.

내 것은 없어요. 딴 꿍심 먹고 오면 안 돼요. 주님이 오시면 내 것을 아예 거덜 냅니다. 그게 아쉬워도 후에라도 내 것은 따로 챙기죠. 주의 은혜로 이렇게 잘 살았습니다. 또 챙기는데 내일 되면 또 깨집니다. 그냥 기능이라니까. 오늘 내가 사는 게 나한테 일어난 우발적 사건이에요. 그래서 살 때는 살아야 되고 아프면 병원 가야 돼요. 그것도 사건이니까.

지가 무슨 거룩한 척해서 그냥 죽겠다고 하지 마시고, 어떤 분이 병원도 안 가고 그냥 죽겠다는 사람 있습니다. 그냥 아플 땐 하고 돈 쓸 땐 쓰고 놀러갈 땐 놀러가고, 그게 사건이에요. 골프 칠 땐 골프 치고. 골프 치는 사건을 일으킨다니까. 차 바꿀 땐 바꾸고. 사건이죠. 바꾸면서 얼마나 고민했을까요. 주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가면서 차를 바꾸는 거예요. 주님께서 나의 영혼을 심히 떨리게 하시는군요. 내 영혼을 수척케 하시는 거예요.

다윗에게는 두 원수가 새롭게 생겼다. 하나는 골리앗에서 그 다음에 자기 백성 자체가 원수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시편 전체가 다 이해가 돼요.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버림받도록 조치했기에 배치돼있는 그 주변에 깔려있는 자들은 자기 백성이었어요. 그런데 언제 분리가 일어났느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제대로 사용하는 그 순간 내 백성처럼 여겼던 그들이 하나님의 원수가 된 겁니다. 아니 내가 말 잘못했네.

원수가 된 게 아니고 하나님의 원수가 이스라엘 모습으로 암약하고 거기에 잠재돼있었지요. 우리는 창세전의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그저 눈에 보이는 데로 한 형제다, 교인이다, 하고 얼싸안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창세전의 계획이 언약의 이름으로 다윗에게 침투되는 순간 이스라엘에 있는 다윗을 공격하는 그게 원래 이스라엘이 아니고 악신이 들렸다는 거죠.

성신이 있으면 반대쪽은 악신이 있겠지요. 악신 들린 사람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다윗을 공격하는 사울.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악신은 노림수가 있다는 것. 악마는 어떻게 아느냐? 악마의 노림수를 보면 안 돼요. 악마가 있고 어떤 노림수를 몰라요. 악마는 눈에 안 보이니까 악마를 괄호쳐놓고 그 사람이 말하는 투, 노림수, 방향, 목적, 의미, 기대, 그 모든 것이 어딜 노리는지 보세요. 언약이 다 이루었음을 미래가 오지 않았더라도 현재 다 구원되었음을 시비 거는 그것을 추적해보면 악마에요.

그러면 그 악마가 다윗 외부에 있느냐고 묻겠지요. 하나님은 더 나갑니다. 악마가 다윗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윗 내부에 악신이 들린 거예요. 인구 조사하는 것도. 그러니까 다윗이 스스로 자기를 포기하고 사라지지 못해요. 아까 현실 이야기했지요. 현실에 꽉 묶여져 있어요. 현실이 우리고 우리가 현실이에요.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 일어설 수 없습니다.

여기선 나온 원칙이 있습니다. 오늘 제목을 이걸로 정해봤습니다. 임플란트. 임플란트 하려면 발치해야지요. 발치와 임플란트, 둘 중에 어느 게 아플까요? 임플란트의 아픔 정도가 1이라면 발치는 10이 돼요. 요새는 컴퓨터로 조정하기 때문에 임플란트가 아프질 않아. 옛날에는 두 시간씩 붙들고 사람 죽였는데 요새는 25~30분이면 깔끔하게 임플란트 끝납니다. 며칠 전에 두 개 했어요. 지금 약 먹고 있습니다. 발치는 상상도 못합니다. 아파요.

이게 시편 6편입니다. 이게 내 이빨이거든요. 이건 내 내부성이에요. 내부성, 외부성은 주님이 오니까 그게 분리되지 원래 내부성, 외부성 없고 이게 나의 전부에요. 그런데 이걸 찢어내는데 안 아플 수가 있어요? 내 남편이고 내 형제고 내 자식이고 내 손자고 내 평생 일궈낸 내 인생인데요. 그걸 어떻게 발치합니까? 심수봉 노래 있지요. 미워, 미워, 미워. 정말 너무 미워요. 내 인생을 왜 이렇게 모질게 몰아세우는지 미워요.

몰래 까치발해서 뭐 하나 숨기려하면 그것마저 들키게 하잖아요. 몰래, 주님 이것만큼은 허락해주세요. 그것 들고 나오다가 그것마저 놓게 만드니까. 왜 저를 이렇게 괴롭히십니까, 하면 주님께선 네가 없거든. 네가 없는데 왜 자꾸 너를 상정하느냐. 너를 설정하니까 너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자동적으로 딸려 나오고 그 좋았다는 내용들이 악마가 설치해놓은 미끼들, 유혹거리가 내가 원하는 욕망을 자극해서 악마가 원하는 걸 내가 좋아한 그게 제2의 자아가 돼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발치하기가 점점 더 힘들지요.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하셨어요.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어린아이가 뭐냐 하면, 세상 것에 물들기 전이에요. 그냥 생속이라. 이것다, 하면 그런 줄 알아요. 그런데 어른들 자아는 너무 악마의 유혹에, 선악과 과일을 너무 많이 먹었어요. 그걸 다 뜯어내는 거예요. 오래 산다고 죽고 싶은 게 아닙니다. 오래 살면 살수록 말로는 무슨 말을 못해. 오래 살면 뭐하노, 가야 될 건데, 가야 될 건데. 막상 몸 아프면 온 자식들한테 전화 걸어서 아파서 다 죽게 됐다고 엄살을 떨어요. 가보면 종기 하나 났을 뿐이고. 인간은 사랑 받기 원하기 때문에 자기가 자길 위로하려니까 안 되잖아요. 자식들 불러서 위로해 달라는 겁니다. 그냥 말로만 위로합니까. 돈 봉투가 오고가지요. 모든 만남은 돈이니까.

그러니까 발치가 어려워. 발치가 안 돼. 발치는 죽을 때 하는 게 아닙니다. 미리 당겨서 발치하고 임플란트 하고 박아버립니다. 아예 수술을 해버리죠. 발치에 비해서 하나도 안 아파요. 수술하면 이제는 내 이빨 아닌데 외재적이죠. 외부에서 온 이빨이 내게 심겨져있지요. 심겨진 이게 주가 돼버려요. 나는 백부장이 돼서 이게 가게 되면 따라갈 수밖에 없는 기능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원치 않는 주의 원수가 우리 눈앞에 등장합니다. 내 원수기 때문에 화내는 게 아니고 주의 원수기 때문에 화낼 필요 없어요. 안 됐다고 하지요. 나도 옛날 저 모습이었다. 술 가져 와라. 지금도 내가 돈 좀 있다면 아마 저렇게 될 걸. 돈 있으면 이혼 대번해서 새 남자 만나서 내가 또 저 짓하고. 할 수 있는 문제에요. 왜냐하면 같은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얼마나 성질났으면 이젠 이해가 돼요. 이해가 된다는 말은, 예쁘다는 말이 아니고 이해가 되지요.

아직까지 숨쉴만하니까 그렇지 만약에 아파보세요. “아이고, 여보. 전에 술 사오라 할 때가 좋았는데 이젠 그 말도 못하고. 불쌍해 죽겠다.” 하지만 인간은 다 죽는다는 점에서 불쌍해요. 개인적으로 불쌍한 게 아니에요. 죽음의 암반 위에 나오는 화석 같은 존재기 때문에 죽음의 힘을 이기지 못해서 죽는 겁니다. 다 이루었다는 게 뭐냐 하면, 같이 죽어가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 아니고 산 자가 된 채로 살아요. 그러니까 인생은 불편하지만 재밌어요.

허망한 것을 좋다고, 치어스! 하면서 축배를 드는 그 모습을 보면 허망하다니까. 고급아파트에 살고 요트, 누리는 그 모습 자체가 허망하지요. 물론 내가 요트 사기 전까지는 허망해요. 사면 재밌을 거예요. 그러나 주께선 아직까지 적절하지 않다고 여겨서 그런 환경을 안 줘서 그렇지만. 사람은 주어진 기능 속에서 뭘 발견하느냐? 사망을 발견하죠. 여기 5절 봅시다.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죽기 때문에 주를 기억 못하는 게 아니고 주를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가 살아도 그게 사망의 상태란 뜻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지혜에선 안 나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가운데 다 들어있어요. 네가 살았다하나 실은 죽은 자로다. 죽은 놈이 진리를 말하면 안 돼요. 빌라도가 예수님한테 진리가 무엇입니까? 물을 자격도 안 돼요.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군지 평할 자격도 안 돼요. 우리도 자격이 안 된 사람이었는데 구원받고 난 뒤에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과 관계가 성립된 존재가 된 겁니다.

그 기능은 우리 쪽에서 열심 낸다고 하는 게 아니고 관계가 성립됐기 때문에 주님 쪽에서 우리에게 계속 과제를 주고 기능을 주잖아요. 그러면 우리 살아가는 것이 뭐냐 하면,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할 사람이 없다. 다른 말로 하면 기억하지 못한 걸 보니까 예수님이 누구냐고 핀잔주는 걸 보니까 당신은 살았다하나 죽은 자요. 그러니까 이해 못하는 사람은 같이 살아도 죽은 사람과 같이 사는 거예요. 남편이 유품입니다. 안 믿는 남편 자체가.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6절) 적어도 우리가 이 수준까지는 안 되지요. 예수님 그리워서 울고불고 할 수준은 안 되잖아요. 하지만 그렇게 될 순간이 오게 되면 시편 6편 기능이 발휘된다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시편 6편을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북한에 잡혀서 요덕정치수용서 갇혀서 밥도 못 먹고 눈물지을 때 시편 6편과 겸하여 생각하시면 주님 보실 때 그것도 이미 구원받은 자가 하는 하나의 작업이야. 오늘 작업은 그거야. 그게 시편 6편에 나오잖아, 하고 이렇게 끝나는 거예요.

8절에 봅시다.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자동적으로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말이 안 되기 때문에 떠나게 돼있어요. 떠날 때 시편 6편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시편 6편 참 쉽지요. 주께서 그대로 우리 인생을 가는 겁니다. 특히 마지막 10절 봅시다.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하나님의 원수가 떠나는 거예요. 내 돈 사기 친 사람이 떠나는 게 아니고 주님의 원수가 떠나는 걸 봐서 주께서 이미 우리를 구원하셨고 주의 일을 하심을 알고 감사하시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이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우리는 자주 잊어버렸습니다. 자꾸 내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니까 주님 살아있음을 놓쳤습니다. 이제는 주님이 시편 6편과 더불어 살아서 우리에게 일시키는 그런 관계에 놓여있음을 다 이루어진 구원의 표적이라고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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