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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지역강의 > 부산강의
2006-04-18 21:49:05 조회 : 3615         
Re..20040614 부산강의-영혼론 이름 : 한윤범(IP:)

20040614  부산강의-영혼론
(강사: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부터 영혼에 대해서 굉장히 영혼 자체에 대해서 신학자들이 집착을 하고 있어요. 영혼구원. 실제적으로 인간구원하면 인간이 그냥 고스란히 다 먹을 수 있도록 경제적인 것을 다 챙겨야 하니까 그건 불가능하고 하나님이나 교회가 기껏 해줄 수 있는 게 영혼구원, 영혼을 어떻게 구원하느냐? 하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 굉장히, 이 영혼에 대해서 정립이 안 되면 구원이고 뭐고 민중들이 교회에 대해서 거부할 것이라는 그런 위기감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지금 책이 안 나왔는데, 74페이지에 보면, 거기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영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냐 하는 거기에 대해서 쭉 나와 있습니다. 75페이지에 보면, 제가 중요한 것, 읽어 보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영혼의 본성을, 그리고 영혼이 물체적 세계와 맺는 관계를 새로운 시작으로 바라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이 선재한다고 믿지 않았으며, 또한 이데아가 물체 없이 나타난다고 믿지 않았다.]

그러니까 영혼이라는 것은 있는데, 그것은 원래 없는데 물질이 생기면 거기에 영혼이 달라붙어서 생겨난다 이 말이에요. 만약에 예를 들어서 구원을,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할 때,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봤습니다. 하나님이 영혼을 언제 창조하느냐 하면, 우리 아기 몸이 태어날 때 그때 영혼이 같이 창조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 어거스틴 같은 경우에는 영혼창고가 있어서 일단 영혼창고가 있는데 그것은 아담으로 내려오는데 아기가 자기의 신체가 생길 때 그 영혼창고에서 일부가 여기에 첨가됨으로 말미암아 영혼+육체가 돼서 사람이 된다는 거죠. 하나는 선재설이고 하나는 창조설이죠. 그렇게 되지요.

그런데 토마스 아퀴나스의 문제점은, 만들 때는 영혼이 안 만들어졌지만 그럼 물질이 없으니까 죽을 때도 같이 날아가지 않느냐? 물질이 없는데 영혼도 없으니까.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죽을 때 영혼이 같이 날아가 버리니까 영혼이 없다고 보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생긴 영혼은 이게 죽더라도 영혼은 계속 영원토록 남아 있다는 거죠. 그런 차이점이 있어요. 어느 것이 마음에 드는지 여러분 마음대로 골라잡으면 돼요.

생길 때는 영혼이 없다가 인간이 생길 때 하나님이 같이 영혼을 창조해서 집어넣는데 일단 사람이 되고 난 뒤부터는 사람의 육체가 소멸돼도 영혼은 딴 데다 따로 존재해야 된다는. 왜냐하면 영혼이라는 것은 사람이 그동안 자기가 살아오면서 들었던 풍월이라든지 들었던 감각, 이런 것들을 집대성한 거예요.

책 있습니까? 책 좀 드리세요. 75페이지,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설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인데 그냥 넘어 갑시다.

78페이지 봅시다. 위에서 일곱 번째 줄에. [기독교 신학도 역시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비질료적이고, 비물질적이어서 모든 질료적 존재자들보다 탁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서 오리겐은 하나님에 대해서 이따금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존재이지만 존재의 피안이다. 이는 흡사 하나님이 누스(정신)이지만 우리 이성의 피안에 있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출애굽기 3장 14절을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한 것이라고 본 것처럼, 하나님이 존재 자체라는 사실을 근거로 해서 나지안즈 그레고리우스는 후에 하나님은 시공간적으로 유한한 만물과 달리 무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해명했다. 이것은 곧 그의 동생인 니사의 그레고리우스가 주장했듯이 신적인 본질의 고유한 차이점은 하나님의 무한성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여기에 '무한성'하고 '피안에 있다'하고 여러분, 같은 말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피안에 있다'하는 것은 현재 우리 눈, 우리 이쪽에는 안 계시다는 뜻이고, '무한'이라 하는 것은 어디에도 계신다는 뜻이에요. 그 차이점이 있지요.

우리 인간 동네에는 하나님이 개입하겠나, 하나님은 거룩한 영적인 분이고 우리는 더러운 물질적인 분인데. 라고 생각하는 것은 피안에, 저쪽 세계에 있는 것이고, 무한하다는 것은 유한한 인간을 전부다 담아낼 수 있다 이 말이에요. 포괄한다 이 말이에요. 그렇게 되니까 하나님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만약에 인간이 죽어도 어디 품안에 있습니까? 인간이 죽어도 하나님 품안에 있겠죠. 하나님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고. 하나님 손아귀를 피할 자, 벗어날 자가 없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뭐가 문제겠어요? 만약에 하나님이 저쪽 세계에 있다고 한다면, 이쪽 세계 훌훌 털어버리고 저쪽 세계 가면 되지만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장악하고 있다고 한다면 어디로, 어디로, 갈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필요가 없지요.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을 떠나서 간다. 라는 그런 성경구절이 있고, 또 성경에 보면, 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너의 안에 있다. 이렇게 되어 있다 말이지요. 어느 쪽을 선택할 거예요. 어느 쪽을 골라잡을 거예요.

왜 이 신학이라는 것은 자꾸 공부해야 되고 검토해야 되느냐 하면, 사람에서 나올 수 있는 게 뭐가 나올 수 있는가를 다 알아야 돼요.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 있는 신에 대한 개념을 거의 꿰뚫고 있어야 됩니다. 적어도 설교를 하고 목회를 하신다면 사람에게 이러이러한 아이디어들이 나오는구나. 그런데 그게 과연 복음과 맞는가? 라는 것을 검토하려면 어렵지만 이런 공부가 있어야 돼요.  

79페이지 봅시다. 이거 하나하나 다 하면 지루해서 못할 거예요. 78페이지 밑에서 열 번째 봅시다. [인간은 성경의 창조기사(기록)에 따라서 몸과 영혼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영혼만으로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다.] 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옛날부터. 이것은 토마스 아퀴나스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만으로, 영혼만으로 완전한 인간이 아니다. 이렇게 돼버리니까, 그러면 영혼만 갖고 있는 인간은 생각을 완전히 못한다는 말입니까? 그게 또 골치 아픈 거죠. 완전히 인간이란 병신, 바보, 등신 이런 종류냐, 아니면 뭐가 완전치 못하다고 하느냐? 생각하는 게 부족합니까? 귀신하고 인간하고 붙어서 장기 두면 장기가 안 됩니까? 맨 날 인간이 이기고 장기 귀신이 맨 날 집니까? 왜, 그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만약에 육체가 없어서 부족을 느낀다면 그러면 천사하고 인간하고 누가 너 낫느냐? 이 말이에요. 사실 성경에 보면 우리가 천사보다 더 낫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세상에 보면 천사보다 못하지요. 천사가 베드로 감옥에 있을 때 왔다 갔다 했는데 우리는 3차원 공간 때문에 감옥 뚫지를 못하잖아요. 천사가 와서 깨워서 옥문을 와장창 지진이 일어나서 깨뜨리고 빼내 줄 때 과연 그것이 우리보다 못하다고 볼 수 있느냐, 슈퍼맨인데.

어떤 책에 보니까 소위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물리적으로 전부다 연구해 논 게 있어요. 예를 들어서 옥문을 깨뜨릴 때는 에너지 줄이 몇 만 줄이며 그때 뒤에 오는 충격파가 과연 가능하겠는가? 물리적으로 전부다. 중력의 법칙에서 어긋날 때 어떤 과연 그것이 실시되는가? 그런 것들을 연구한 게 있어요.

그래서 여기서 어쨌든 간에 완전한 인간이 아니다. [영혼만의 불멸성은 하나님이 인간을 영혼만으로 창조하지 않았듯이 참된 인간 구원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영혼만 구원되는 것은 온전한 구원이 아니고 미흡한 구원이다 말이죠. 뭣을 곁들어야 됩니까? 육체를 곁들일 때 다시 그때 비로소 영혼과 육체가 하늘나라 결합해서 온전한 영혼이 된다.

[인간을 몸과 영혼의 단일성으로 본다는 것은 철학적으로 우선 영혼을 동물적인 육체의 형상으로 생각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과 유사하다. 이 영혼은 이 '형상'을 통해서 분리시킬 수 없는 단일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혼론과 대비해 본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 영혼이 육체의 실체적 형상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 자립적 형상이라고 한다.]

여기서 '자립적 형상'이란 말이 상당히 중요해요. 토마스 아퀴나스가 여기서 굉장히 어려운 말을 했는데요. 자립적 형상이라는 말하는 것과 그냥 형상이란 말을 하는 것의 차이점이 뭐냐? 그냥 형상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타인, 다른 사람과 유사성이 있게 돼요. 유사성이 있게 되고, 그 사람한테 일어나는 것은 독특한 것이 아니고 나한테 일어날 수 있고 이렇게 되는데. 만약에 자립적인 형상이 돼버리면 그 사람에게 있던 그러한 모든 일들은 절대로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지요. 왜? 따로따로 노니까.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죄인에게 주어진 특별한 사명의 가치가 남게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일을 시킬 때, 어이, 너희 둘이 해라. 이게 성립이 안 된다는 거죠. 우리 둘이 하면 뭐 됩니까? 너희 둘 다 천당 보내 줄게. 이건 안 된다는 거지요. 토마스 아퀴나스가 자립적이라는 말은 뭐냐? 구원은 개별 구원이라는 거죠. 개별 구원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예요. 그러니까 자기 누나가 수녀인데 나는 어떻게 되느냐, 덩달아 갈 수 없나? 안돼. 자립적 형상이기 때문에. 자립적 형상이란 말의 취지를 아시겠지요. 아버지가 목사라고 아들이 저절로 구원 되는 수는 없다 이 말이죠. 개별적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개별적으로 구원받기 위해서는 거기에 대한 신학적인 근거로서 개별적 형상으로 단독적으로 하나님과 형상 대 형상으로 관계해야지 다른 사람들이 끼어들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야기할 때, 이전까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다같이 우리는 어디에 속한다? 하나님의 형상에 속한다. 우리는 아담의 형상을 입었다. 따라서 우리 서로 협력하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이렇게 두리 뭉실, 협력이 가능하고 일치가 가능한 쪽으로 이야기했어요. 그렇게 되면 내가 저 사람을 위해서 뭔가 도움 줄 수 있고, 그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뭔가 보탬이 될 수 있는 이런 게 있는데 그 사람이 농땡이 치더라도 다른 사람이 기도하면 뭔가 효과 보고, 라는 그런 조로 말이죠. 왜냐하면 그 당시는 플라톤주의기 때문에 인간의 형상이라는 것은 니나, 개나 똑같다. 이 말이죠. 다 같은 공통의 형상이 있으니까.

결국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동일함이다. 이것이 유리된 것뿐이기 때문에 그전까지는. 그런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뭡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덩어리가 있는데 쪼개어 진 게 아니고 어떻게 된다? 각자각자 따로 있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따로 줬다는 거예요. 이런 것들이 다 구원관과 연관이 있겠지요.

이런 공부를 왜 필요하냐고 하는데 실제로 구원론에 있어서 들어가 보면, 일반교인들이 느끼고 있는 구원관에 대한 어떤 논리를 정리하는 것을 보면, 일반교인들이 좋게 말해서 순진한 것도 있지만 자기 구원을 확정하기 위해서 세세한 것 다 따진다고.

내가 구원받고 난 뒤에 다시 범죄하면 그게 다시 철회되는 겁니까? 취소되는 겁니까? 그러면 취소 안 된다면, 어떤 범죄는 취소되고, 어떤 범죄는 취소 안 되는 겁니까? 라든지. 목사님, 구원받았다고 확신했는데 저녁 5시 반 때에 확신이 사라졌는데 확신이 사라질 때 과연 그때 당장 예수님이 재림한다든지 내 목숨 달라고 했을 때는 나는 과연 확신 없는 채로 천당 갈 수 있겠습니까? 이런 문제. 그런 문제를 일일이 하나하나 그런 것은 쓸데없이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이야기고, 저쪽에서는 심각한 문제거든요. 개인적으로 봐서는. 중요한 문제 아닙니까? 그런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이게 누적이 되면서 그런 호기심과 그런 질문들이 누적이 되면서 교회가 총괄적으로 답해 줄 필요가 있단 말이에요. 그때는 아주 형이상학적으로 높은 자리에서 전부다 설명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이 뭉쳐져 있다가 각자각자 흩어졌다 이 말이에요. 이렇게 설명하면 뭐가 유리합니까? 교회여, 서로 봉사하라. 서로 협력하라. 그래서 둘이 같이 기도할 때는 하나님이 거기 계시고, 합심해서 기도하면 같은 형상이기 때문에 ... 이게 유리하지만 이건 이렇게 개별적 영혼이 유리한 것은 뭐냐 하면, 내 구원론은 내가 챙겨야 된다 말이지요. 내 구원은 내가 챙겨야지. 내가 구원론을 뚝 떼어서 남의 구원하는데 선행을 보탤 수는 없고.

그리고 또 뭐가 유리하냐면, 내가 비록 이발사가 돼든, 농부가 돼든 관계없이 하나님이 주신 고유한 하나님의 사명이 있습니다. 라는 칼빈의 소명론과 여기에 유리하겠지요. 칼빈의 소명론. 남의 직업을 부러워하지 말란 말이야. 남의 환경을 부러워하지 말란 말이야. 남의 인생을 부러워하지 마라. 그리고 본받자, 하지 마라. 나는 나에게 개별적으로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형상은 따로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칼빈의 소명론에도 이 점이 유리하단 말이죠. 따지고 보면 이게 유리한 게 있고, 이게 유리한 게 있고. 이게 불리한 게 있고, 이게 불리한 게 있거든요.

이걸 공부 안하면 에따, 모르겠다. 하고 그냥 넘어가는데. 이건 과거부터 쭈욱 이렇게 토마스 아퀴나스부터 성립한 겁니다. 책 없습니까? 책이 없어요?

79페이지, 밑에서 다섯 번째 봅시다. [토마스가 영혼의 자립성을 논증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은 존재인 만큼 현실성을 지니며 또한 행위 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행위 한다는 것이고 또한 행위를 위한 것이다.]

무슨 뜻이냐 하면, 각자각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다는 거죠. 해야 될 일이 있고 이유가 있단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사람들은 하나님, 하나님 빙자하면서 주신 그 사명을 감당 안하고 그걸 나태하게 내팽개치고 돌보지 않는 자기 사명을 감당치 않는, 그렇게 되면 그 영혼은 자기 영혼을 자기가 망치는 짓이 되는 거죠. 내가 안 해도 남이 하는데 뭐. 하나님이 형상이 여러 갈라져 있으면 뭐, 내가 안 해도 남이 하는데 성립되는데 그렇게 되면 인간은 농땡이 칠 가능성이 많다. 농땡이로 만들 수 있잖아요.  

각자각자 여러분 자율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신앙이 내 신앙되지 않고, 아버지의 그 신앙심이 내 신앙 안 되지 않느냐, 각자 하나님이 개별적으로 주셨습니다하면 그야말로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것처럼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거예요. 다만 중언부언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한다 이 말이에요.

여기에 보면 [행위는 존재를 따르며, 작용은 본질을 따른다.]

무슨 말이냐 하면, 존재라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나, 존재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게 아니고 존재를 유발시킨 하나님의 액션, 그러니까 인간이 행위 한다는 게 뭐예요? 하나님의 행위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존재했잖아요. 우리가 행위 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이런 행위를 원하는 게 있기 때문에 우리가 행위 하잖아요. 아버지가 일하시니까 내가 일한다는 그런 조로 말이죠. 이제는 너희가 내 안에서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요한복음 14장의 말씀처럼.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지금 행위 한다는 거예요. 행위 하는데 행위를 제대로 해야죠. 하나님이 나를 존재케 했던 그 행위가 내 존재를 통해서 행위로서 발산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행함이나 믿음이나 이 문제를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로부터 해서 존재 자체를 뭐로 본다? 존재 자체를 하나님의 행위의 열매로 보기 때문에 믿음이냐 행위냐 하는 논제가 그 난제가 사라져 버리죠.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존재하는데 믿을 것이냐, 행위 할 거냐? 존재가 우선이 돼버리면 믿을 것이냐, 행위 할 것이냐 갈등이 생기지만, 존재가 우선 되면, 오늘 중요한 것 합니다.

존재가 우선되면, 존재라는 말이 나, 나가 우선되면 내가 믿을 것이냐, 행할 것이냐 이렇게 되지만, 나라는 것을 뭐로 본다? 원천적인 하나님의 행위로 봐 버리면, 행위에서는 행위가 보이지요. 하나님의 행위로 말미암아 내가 있고, 그래서 나는 존재했고, 따라서 하나님의 행위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마땅히 나에게서 하나님의 독자적으로 주신 남이 흉내 못내는 나만의 인생, 나만의 사명감이 행위로 나올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야고보서의 말이 맞죠.  행함으로 네 믿음을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것. 야고보서 다 풀려 버렸어요.

그리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이것은 악마의 믿음, 귀신도 안다는 거예요. 귀신도 하나님 존재를 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것이 믿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행동을 아는 것이 믿음이라고 보는 거지요. 하나님의 행동 때문에 내가 있고, 따라서 나는 하나님처럼 행동하게 되는 게 뭐가 어렵고, 뭐가 이상스럽냐 말이지요. 그럼 야고보서 다 풀려 버린 거예요. 그럼 로마서의 믿음은 뭐냐? 그것은 바로 행함으로 보여주는 믿음이지요. 여기에 어려운거 없잖아요.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말이에요.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행위,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위한 자기를 존재케 하신 하나님을 위한 행위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행위라고 볼 수 없고,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볼 수 없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반드시 그 하나님의 행위에 따라서 존재해야 될 사명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저주 받아 마땅하다 이 말이에요.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에 따르면 궁금한 것, 어려운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제가 볼 땐 그게 종교에요. 오늘 중앙일보에 보니까 이상적인 오늘날 이 시대에 참된 모범적인 교회 상이 나왔다. 이렇게 해요. 보니까 민중 신학을 이야기한 사람인데, 그 사람은 모든 교회를 가지고 전부다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서 500개의 문화센터를 운영한데요. 교회가. 문화센터 해서 진짜 바람직한 오늘날 교회 상이라고 중앙일보에서 칭찬을 늘어지게 해 놨다고.

그래서 그걸 보면서 예수님께서 문화센터 원장하려고 십자가 진 거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십자가가 빠져 버렸어요. 십자가가 빠진 채, 사람들은 뭘 좋아합니까? 사람들은 돈 낸 만큼 자기에게 혜택이 돌아오는 걸 원하잖아요. 사람이 그걸 기뻐하잖아요. 그래서 교회가 입맛에 맞춰서 여러분, 헌금 한 만큼 여러분, 사회에 되돌려 줍니다. 여러분들이 꽃꽂이라든지, 여러 가지 컴퓨터 기술 배우고 싶으면 컴퓨터 배우고, 농악하고 싶으면 농악하고, 이런 식으로 취미활동과 사회에 유익되는 그런 활동을 하게 해서 그래서 교인수가 뭐, 10가정 시작해서 4000명 됐다 하데요. 우리는 10가정해서 나중에 2가정 남고 이렇게 되는데. 10가정 해서 4000명 됐다는 거예요. 사회에 환원했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는 딱 자기 월급 공개해서 200만원 이상 받지 말고, 서울에서 200만원 같으면 적은데, 교회가 모범적으로 해서. 나이는 49살이에요. 사실 어린애들까지 해서 사람이 많은데.

야, 사람을 좋게 하려면 무슨 짓은 못해. 그래서 제가 왜 그 목사 이야기를 하냐 하면, 토마스 아퀴나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주교가 어떻게 포교를 합니까, 천주교가 어떻게 전도합니까? 바로 그 식이잖아요. 하나님은 행동하시는 하나님이다. 따라서 하나님 믿는 자도 행동한다. 어떤 행동? 하나님은 선하시다. 그럼 그 선한 행동을 우리가 보이자. 우리가 보이는 게 뭐냐? 질병으로부터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무지와 문맹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교육과 의료사업, 거기에 매료되어서 사람들로부터 좋은 인상을 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수녀들과 이런 사람들의 월급부터 없애야 됩니다. 왜? 월급 받고 다하면 기업이 돼지, 자선사업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성직자들과 신부와 수녀들은 안 해야 되고, 수녀들이 여자야 얼마 안 되지만, 남자들은 가정 가지면 안 되니까 가정을 안 가지고, 아예 독신으로 살면서 성직자 노릇을 할 때 이것이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장 하나님의 액션, 하나님의 행위의 바람직한 교회 상이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에 대해서 이런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이 그 당시의 중세 때 먹혀 들 수밖에 없어요. 둘 다 왜? 다 인간을 위한 하나님, 좋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거기에다가 반대할, 도와준다는데 뭘 반대해요. 착하지. 착한 하나님. 아주 선하시고 착한 하나님 아닙니까? 못된 하나님이 아니고, 착한 하나님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십자가라 하는 것은 선지자처럼 인간을 고발하는 건데 십자가가 확 빠져버렸으니까 그게 과연 복음에 복종치 않는 자는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고 했는데 복종할 복음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그게 과연 바람직한 교회라고 할 수 있느냐 말이지요.

그래서 그 목사가 3가지 이슈가 뭐냐 하면, 영성으로 사회에 봉사하고, 경제적으로 봉사하고, 그 다음에 문화적으로 봉사하는 게 교회의 임무라 하는 거예요. 좋아요. 경제적, 문화적 다 좋은데 그러면 영성으로 뭘 봉사한다는 거예요. 영성으로 봉사하는 게 뭐예요? 여러분들이 이 교회는 아무 의미 없습니다. 이런 조로 봉사해야 되는 데 그것은 앞의 모순되니까. 사람들이 일년 예산 반 이상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기존의 교육관과 주차장 짓는 것과 차이가 나긴 나지요.

그 다음에 넘어가 봅시다. 80페이지 봅시다. 제일 위에. [그러므로 지적 작용의 주체인 인간 영혼은 본질적으로 비물질적이며 자립적이다.]

여기서 보세요. 토마스 아퀴나스가 인간의 육체를 분명히 인간의 육체가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해 놓고는 심리적으로 모든 초점은 어디 입니까? 영혼에 집착했지요. 육체에다 집착한 게 아니고 영혼에다 집착한 거예요. 이것은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 당시 철학이 뭐냐 하면, 인간이 구원받는 데는 육체는 도움이 안 되고 영혼이 장려되고, 영혼이 계승되고, 영혼이 정화될 때 씻음 받을 때 비로소 인간은 구원된다. 그것과 관련되어 있어요.

[인간 영혼은 그 자체로서 자립적 형상 혹은 자립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 영혼은 육체의 형상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형상 혹은 자립적인 존재이다.]

왜 이런, 인간의 육체, 아까 여러분 또 잊어버렸지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뭐라고요? 육체 없이는 뭐가 안 생긴다? 영혼이 안 생긴다고 이야기해 놓고 여기 와서 갑자기 영혼이 육체가 주름지어서 만들어낸 게 영혼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동시에 자립적 형상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마지막 죽었을 때 육체는 없어져도 뭐는 남아있다? 영혼은 남아있다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육체는 사라지고 영혼은 남아있다. 라고 했을 때 여러분, 신학적으로 무슨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까?

이게 문제점이에요. 예수님께서 그러면 뭐가 자립적 존재입니까? 영혼이죠. 그럼 자립적 존재니까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유의지론에 의하면 죄는 자유의지에 의해서 짓잖아요. 그러면 인간이 자유의지를 발휘하는 게 아니고, 인간 중에서 어디가 발휘한다? 영혼이 자유의지를 발휘하고 육체는 따라올 뿐이죠. 그렇다면 예수님의 구속은 어디를 겨냥하면 돼요? 영혼을 겨냥하면 되잖아요. 그러면 십자가 질 필요도 없이 성령을 바로 보내면 된다 말이에요. 성령이 뭐예요? 하나님의 마음가짐 아닙니까? 하나님의 좋은 마음 아닙니까? 착한 마음이잖아요. 하나님의 선한 마음 아닙니까? 정의로운 마음. 그러니까 성령을 바로 주면 되는데 십자가 왜 지느냐 이 말이죠. 성립이 안 되잖아요. 아니, 잘못은 영혼이 잘못했잖아요.

영혼이라 하는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보면 영혼은 무슨 관계이냐면, 언어적 영역. 영혼이라는 것은 언어적 영역에서 시작해요. 언어라 하는 것은 말이다, 말. 그러니까 하나님과 뭣을 한다? 기도가 뭐예요? 대화 아닙니까? 대화. 인간은 정신은 영혼이 쥐고 있고, 하나님은 누스라 했지요. 아까 정신이죠. 하나님과의 관계는 육체 대 육체의 관계가 아니고 정신 대 정신이 통한다고 할 것 같으면 인간의 죄에 대해서 구속하려면 영혼에서 직접 다가오면 된다 말이에요. 그게 뭐냐?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깨우치라, 똑바로 살아. 바보야. 똑바로 살아. 이 죄인아. 니, 제자 맞아?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직접 다가오면 되는데 왜 십자가 지느냐 말이죠.

제가 크로스빌리지에 글 써 논 것 읽어 봤지요. 여러분. 십자가 지지 않고, 십자가 질 필요도 없이 바로 성령을 마지막 때 종말의 영으로 주면 될 것 아니냔 말이죠. 왜 십자가 진 것을 근거로 해서 왜 성령이 오시는가? 왜 십자가 영으로 성령이 오시는가?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서 몰라요.

왜? 토마스 아퀴나스 때문에. 자기 영혼구원에만 눈독을 들이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윤리 도덕적이에요. 그 사람은 뭘 모르냐? 거룩을 몰라서 그래요. 거룩이라 하는 것은 영혼, 육체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거룩한 분의 만남에서 우리는 거룩이라 하는 것이 조금도 없다는 겁니다. 이미 우리는 죽은 자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걸 제가 죽을 병에 든 환자로서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고 설교한 적이 있는데.

그 영혼을 정화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육체적 형상에도 불구하고 자립적 형상, 존재라고 강조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은 육신의 모양으로 오신 분이다. 예수님의 육신의 모양을 거부한 것을 요한일서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적그리스도라고 하지요.

적그리스도의 특징이 뭡니까?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다. 그게 영지주의라는 건데, 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느냐 하면, 육체가 구태여 필요치 않기 때문에 그래요. 육체는 어차피 없어질 것 아닙니까? 없어질 것, 뭐하려고 챙깁니까? 하나님께서 없어질 것까지 챙길 필요는 없지 않느냐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네 들이끼리. 그게 하나님의 언약의 거룩이 뭔지 모르고 기껏해야 하나님 뜻을 살펴서 자기 구원만 챙기겠다는 겁니다. 자기 영혼구원만 챙기고 육체야 보~너스 준다고 하니까 저거들 따라오지. 이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아마 사도 요한이 들었다면 대번 적그리스도라고 할 거예요.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을 적그리스도라고 이야기한 그 대목을 제가 언젠가 설교하면서 이런 이야기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잘 했어요. 뭐냐 하면, 사람들이 하나님 믿으면 구원받습니까? 시키시는 하나님 믿으면 구원받는다. 하는 아주 간단하게 생각해요. 그런데 사도 요한의 입장에서는 적그리스도냐, 구원될 자냐? 분간하는 조건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그것도 부인해도 지옥 간다 말이에요. 촌의 할머니들 같은 경우에는 뭐냐 하면, 예수님의 인성, 신성 같은 것은 듣도 보도 않을 것이고, 아이고, 목사님, 하나님 믿습니다. 하고 천당 가려고 내민다 말이죠. 그러니까 그런 할머니한테 성경은 필요치 않지요. 성경도 필요 없고, 교회도 필요 없고, 그냥 자기 알고 있는 대로 우기면 천당 가는 줄 알고 있다고.

성경에 십자가 중심으로 예수님 중심으로 모든 것을 해설했으면 할머니가 됐든, 아주머니가 됐든, 아이가 됐든 간에 그걸 알아야 돼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십자가 중심으로 해설했다면 그 해설을 그들이 알아야 돼요. 신의 존재를 안다고 아이고, 신자입니다. 신의 말씀대로 사세요. 라고 이렇게 부추길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그것 하기도 바쁜데 뭐, 문화사업을 펼친다? 세상에. 바쁜데 교회해서 문화사역을 500군데나 하는 기가 그래. 그것 하기도 바쁜데. 이게 무슨 이상적인 교회, 모범적인 교회입니까? 여기에 점점 여러분들이 어렵더라도 참으세요. 참을 줄도 알아야 돼요.

[이와 같이 인간 영혼의 자립성이 주장된다면, 이 두 가지가 서로 화해될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자립성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자세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영혼의 자립성이 곧 인간의 자립성이냐, 아니냐? 자, 보세요. 이게 지금 예를 들어서 상대방을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상대방 나라에 가서 무기를 사용하고 잔혹하게 육체를 죽일 수 있느냐 이 말이에요.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인간의 영혼구원을 위해서 무슨 짓을 해도 된다고 한다면, 아프리카의 정복이 정당화되고, 인디아에 대한 학살이 정당화되겠지요. 그렇지요? 인간의 신체는 구원과 상관없잖아요. 줘 패서 죽여서 사람을 예수 믿게 할 수 있단 말이에요. 왜? 사람은 극한의 죽음이 올 때는 뭐든지 믿고 그 사상에 동의한다고 해서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는 심리가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게 과연 그런 전도방법이 옳으냐 이 말이에요. 영원구원 받으면 될 거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영혼은 육체의 실체적 형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하나의 온전한 실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인간 본질의 한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만약 영혼이 하나의 온전한 실체라면 인간의 실체적 단일성은 파괴될 것이다.]

이게 골치 아픈 문제에요. 영혼이 단일하면, 단일한 게 있는데 뭐하려고 인간의 육체와 결합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이 말이에요.

[만약 영혼이 개별적 실체라면, 인간의 실체적 단일성에 대한 문제는 제기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러한 난국에도 불구하고 인간 영혼이 그 자체로서 자립적 형상이라는 전제가 더 이상 음미도 되지 않는 않은 채 폐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 가지는 명백하다. 인간 영혼이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그 종적 완전성을 모두 끌어안는 온전한 자립적 형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자립성은 있지만 그 자립성이 온전성은 아니란 말이지요.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설명하기를 천사는 형상 자체로서 온전하고, 인간은 천사와 같은 형상을 갖고 있지만 그 자체로 온전치 않고 그런 차이점이 있다

81페이지 봅시다. 왜 영혼 자체를 주장하는지 보세요. 위에서 네 번째 줄에. [영혼은 지적작용을 수행하며, 바로 그 때문에 오직 인간의 감각적 능력들이 수행될 수 있을 때에만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존재라고 말해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러니까 왜 영혼이 자립적이냐 하면, 내가 꿈을 꿀 때 남이 간섭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간섭 못 하잖아요. 그러니까 각 개별적 영혼은 하나님이 주신 개별적이지요. 하나님이 각자각자 내가 상상할 때 남이 내 상상에 끼어들지 못해요. 내가 구상하고 있는데 남이 거기서 간섭 못합니다. 왜? 나만의 자립적 존재이기 때문에.    

따라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까 이야기했듯이 왜 자립적인 게 좋으냐 하면, 독자적인 하나님의 사명이 각자각자 주어졌기 때문에 그 사명은 남들이 탈취하지 못해요. 또 그렇게 될 때 마지막 심판은 단체로 심판하는 게 아닙니다. 2학년 2반, 단체로 지옥. 이런 게 없어요. 2학년 3반은 전부다 천당. 이런 게 없어요. 단체로 대하는 게 아니고,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끄집어내서 선악 간에 심판한다.  

그것이 정립되려면 너는 왜 식품업자로서 만두의 속을 썩은 걸 넣었느냐?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심판을 내리겠지요. 그런데 그 식품업자 사장 형님이 공무원인데 너는 왜 동생이 만두 넣는데 가만있었느냐? 이렇게 심판하지 않는단 말이지요. 너는 공직에 있으면서 왜 어떤어떤 일을 했느냐? 이렇게 묻을 것 아니냔 말이에요. 그러니까 장차 심판을 개별적으로 한다면 지금부터 우리는 개별적인 독자적인 영혼을 지니고 있는 것이 옳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이러한 신학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정말 범사에 감사할 수 있도록, 자기 직업에 대해서 고마움을 먹도록 감사할 수 있도록 되어있지요. 이렇게 가르치면 사람들이 데모하겠습니까, 데모 안 하겠습니까? 데모가 안 되지요. 왜냐하면 내가 농사꾼이 된 것은 뭐 때문이다? 내게 주신 사명이다. 내가 영주한테 당하는 것도 내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이다. 이걸 참아야 된다. 중요한 것은 나라를 뒤집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영혼을 아주 천사처럼 가꾸어 나가는 것이 그게 중요하지, 내가 이 사회를 뒤집어서 이 감각적인 것, 없어질 물질에 대해 이런 육체를 가꾸기 위해서 내가 힘쓴다는 것은 내 영혼에 대해서 손상을 준다 이 말이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육체에 힘쓰면 뭐가 소홀 됩니까? 영혼이 소홀하게 되고, 영혼에 힘쓰면 뭐가 소홀 돼요? 육체가 소홀하게 마련이란 말이죠. 그래서 육체는 영혼을 핍박하고 영혼은 육체를 또 감시하기 때문에 너무 육체를 좋아하고 감각적인 걸 좋아하고 쾌락을 좋아하면 그 사람의 영혼은 망친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래서 영혼 위주, 육체 밑에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것이 나중에 오늘날 칼빈주의 문화관에 들어가면 클래식은 괜찮은데 대중가요는 안 된다. 클래식이라는 게 다른 것이 아니고 옛날의 대중가요가 클래식이거든요. 옛날 대중가요는 되는데 오늘날 대중가요는 안 된다는 것은 모순이 생긴다는 겁니다. 찬송가는 되는데 다른 대중가요는 안 된다. 이런 식으로 해요. 왜 안 됩니까? 대중가요는 우리 감각적인 것을 작용하고, 찬송가는 우리 영혼을 살지게 하기 때문에. 또 영혼이란 걸 집어넣어요. 분명히 사람은 단일성이라고 하지만 단일성이 아니고 자꾸 뭔가 떼어 놓는, 떼는 작업을 해 놓는 거예요. 자꾸 떼어 놓는 거예요.

제가 어릴 때 젊을 때 교회 다니면 어떤 부흥사가 와서 담배 피우지 말라. 왜냐? 우리 몸이 성전인데 담배연기 들어가면 성전이 뿌예져서 공기가 탁해져서 하나님이 콜록콜록 기침을 한다는 거지요. 촌의 할머니들은 그걸 믿습니다. 하고 할렐루야 아멘. 믿음 없다하면 지옥 간다하니까 겁나서 믿습니다하고 있지요. 그게 또 더 나가면 검증한다 하면서 폐가 시커먼 것을 검증하겠지요.

그런데 아직도 뭔가 아닌 줄 알면서도 왜 우리 몸이 성전이라는 걸 우리나라 신학에서는 정립이 안돼 있어요. 전혀 뭐가 뭔지 모르고 있어요. 그러니까 모든 것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벌어진다.

81페이지 밑에 네 번째. [그러나 이러한 당혹감은 죽음 이전과 이후에 존재하는 영혼의 동일한 영혼이라는 진리에 의해, 다시 말해서 영혼은 죽음 이전이나 이후 모두에서 동일한 본성을 유지한다는 진리에 의해, 그리고 또한 죽음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여러분, 죽음 이전과 이후가 동일하게 되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자체가 깨져 버립니다. 왜 깨지냐 하면, 81페이지 위에 보면 영혼이라는 게 뭐냐? 직접 작용하는 것 아닙니까? 소위 말해서 영혼이라는 것이 살아생전에 정보를 모으잖아요. 그래서 지금 나쁜 영혼들, 불량 영혼이에요. 나쁜 영혼들이 이 땅에서 살면서 나쁜 짓을 많이 해서 나쁜, 불량 영혼이 되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심판받아서 지옥 갔잖아요. 그런데 죽고 난 뒤에는 나쁜 것을 못 보잖아요. 그러니까 천사들 보고, 하나님을 볼 것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만일 동일한 영혼 같으면 어떻게 돼요? 계속해서 직접 작용을 계속 발휘하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나쁜 생각을 안 가지고 무슨 생각을 가진다? 좋은 생각을 가져 버리면 그 사람을 지옥 보낸 하나님의 심판이 나중에 빼내 줘야 돼요. 아이씨, 너 죽고 난 뒤에 사람 되어 버렸네. 안 되겠다. 너는 지옥 갈 사람이 아니고, 천당 가자. 나중에 도로 그 사람을 어떻게 해요? 천국으로 보내야 할 판이에요.

여러분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신학을. 영혼이 동일하냐, 안 하냐? 여러분 고견을 부탁합니다. 동일합니까, 동일 안 합니까? 그런데 만약에 죽기 전의 영혼과 죽음 후의 영혼이 동일하다고 만약에 그렇게 되면, 지옥 간 사람들 다 빼내주고 천당 다 보내야 돼요. 아이씨, 죽일 수 없네. 착하게 사네. 이러면 천당 보내고 끝나요.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 죽고 난 뒤에는 영적인 영혼의 직접 능력은 스톱이 돼야 돼요. 스톱이 된다면 이것은 동일합니까, 동일하지 않습니까? 안 동일하잖아요. 그렇죠? 논리가 그렇잖아요.

그래서 천주교는 어떻게 합니까? 비록 영혼이 지옥 가더라도 남들이 그를 위해서 밑의 후손들이 기도해 주면 그게 감동감화 받아서 어머니, 내가 이렇게 어머니가 천당 가고 어머니가 지옥에 있는 나 보고 이렇게 지금도 천당에서 기도하는 걸 진작 알았더라면 나쁜 짓 안 하지. 아이, 어머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지옥에서도 회개하면 뭐가 됩니까? 천국으로 빠질 수 있고, 천국에 간 그 엄마는 지옥에 있는 아들이 지금 나의 정성을 이해해서 나쁜 마음 영혼, 불량한 영혼 되더라도 우량 영혼으로 개조할 수 있도록 열심히 도고, 중보의 기도를 열심히 하게 되지요.

그러니까 천당 가기 바빠. 자식만 그런 게 아니죠. 같은 계원들끼리도 다 해줘야 되지요. 초등학교 동창생들, 46회 동창들 위해서 다 해야 되지요. 왜? 성당 다니다 지옥 갔으니까. 천당이 되게 바쁜 데가 됐어요. 뭐, 합당합니다. 면류관 반환할 시간이 없어요. 전부다 그거 하느라고 바빠. 방금 제가 이야기한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참, 그러니까 영혼을 따로 빼낸다는 거 이렇게 위험해요. 이러한 얽히고설켜 있는 난제들도 모르고 그저 개신교들도 죽으면 육체는 흙에 묻히고 영혼은 하늘에 갑니다. 이렇게 하는데 그러면 짓궂은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러면 그 영혼은 이 땅의 우리의 중심을 이야기하는 거요, 우리의 자아를 이야기하는 겁니까? 물어오면 목사는 난 모르니까 그것은 알아서 하소. 하고 넘어가지요.

[따라서 죽음 이후에 영혼의 상황 역시 마찬가지로 비자연적으로 진리에 의해 어느 정도 설명될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의 문제점이 여기에 등장하는 거예요.

[영혼의 자립성은 인간 영혼이 신에 의해 직접 창조된 것이며]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직접 창조. 여러분, 영혼이 하나님께 직접 창조된 겁니까, 아니면 성경을 봐서 우리 인간 자체가 창조된 거예요? 영혼이 직접 창조된 게 아니고, 인간이 창조된 것 아닙니까? 저는 그렇게 알고 있는데.

왜 토마스 아퀴나스가 영혼을 직접 창조 하느냐 하면, 인간의 육체는 어디서 창조되었냐 하면, 직접 창조가 아니고, 간접 창조지요. 그러면 인간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아빠, 엄마에서 태어났지. 뭐. 간접 창조죠. 직접 창조가 아니고. 간접 창조인데 다만 그 아이의 정신상태는 부모가 간여 못하고 누가 손댄다? 신에 의해서 손댄다. 따라서 육체는 별로 말하지 않고, 영혼은 직접 하나님이 간여하기 때문에 부모라도 개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이가 무슨 생각하는지 부모는 모르기 때문에. 부모는 외인이기 때문에. 바깥에 있기 때문에.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쭈욱 거기 나옵니다. 그렇게 이야기한 것은 아까 이야기했죠. 여기 어렵게 어렵게 살았는데 아까 제가 줄여서 이야기하면 결국 뭡니까? 왜 이런 영혼, 자립적 영혼을 주장하는 이유가 뭐다? 제가 뭐라 했습니까? 그것은 각자각자 받은 하나님의 사명에 충실히 하라. 이런 윤리적인 교훈을 그런 목적을 제공하는 그런 훌륭한 신학이 되기 위해서 이러한 신학이 준비되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87페이지 봅시다. 붕~ 날아서 시원하게 나가는 재미도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위에서 여섯 번째에. [이제 기독교는 인간이 지상에서 유일회적으로 현존하는 개체 인격이라고 명확하게 규정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사상은 이미 바벨론 포로기 이후 유대교의 종교적 개인주의를 통해서 사전에 준비된 바였다. 이렇게 인간을 개인으로 보려는 사상의 출발점은 예수님의 사신(私信)에서 그 동기를 발견할 수 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봅시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전에 있는 신학자들과 차별 나는 게 뭐냐? 라고 물으신다면, 그전에 있는 신학자들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이야기했죠. 좀 참으세요. 여러분. 힘들더라도. 그전의 신학은 뭐냐? 하나님과 집단 인간들, 인간 전체가 하나님에서 어떤 운명을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끝이 난다. 이렇게 보던 것이 이게 어거스틴에서 정리되었지요.

어떻게 정리되었습니까? 모든 인간의 영혼은 어디서 나왔다? 어디서 흘러 나왔습니까? 아담이라는 죄로 오염된 영혼이 모든 인간이 물려받았지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 항상 이야기할 때 어떡해? 모든 인간, 모든 사람. 이렇게 해서 모든 성경을 설명을 해 왔었다 이 말이지요.

토마스 아퀴나스의 공헌도가 뭡니까? 공헌보다도 변화된 게 뭡니까? 이렇게 일단 이건 맞고, 이건 알고 그 다음에 뭘 따집니까? 따지는 것이 영혼은 개별적이라는 것. 아시겠습니까? 여러분 이것 기억하세요. 어거스틴은 뭡니까? 포괄적으로 인간에 대해서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면, 토마스는 개별적으로 이야기했으며, 이 개별적이 강조된 것은 나중에 종교개혁 때 루터와 칼빈에서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루터, 칼빈이 툭 튀어나온 게 아니고 벌써 토마스 아퀴나스를 거쳐서 나온 거예요. 토마스 아퀴나스 그 다음에 둔스 스코투스. 둔스 스코투스는 토마스 아퀴나스보다 한 걸음 더 나가요.

어거스틴은 하나님과 전체 인간의 관계, 토마스 아퀴나스는 전체 인간은 그건 맞고, 더 구체적으로 개별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존재의 존재성, 둔스 스코투스는 존재성 중에서도 본질에 대해서. 존재와 본질을 구분합니다. 존재는 하나님이 주신 거예요. 제일 밑바탕. 그런데 본질은 인간의 됨됨이는 자기하기 나름이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우리 책임이 다한 것이 아니고 일단 하나님 믿었으면, 그 다음에 각자각자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 것인가는 그 사람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겁니다.

노력 여하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사고가 등장하면서 뒤에 둔스 스코투스 다음에 윌리안 오캄이 나옵니다. 오캄이 나오면 뭐가 발달하느냐 하면, 과학정신이 발달합니다. 신을 믿습니다. 안 믿는다는 것이 아니고 믿습니다. 믿고, 그 다음에 우리 생활을 향상한다는 것은 신에게 의지할 필요 없고, 이것은 우리가 따로 아까 개별적이고, 무슨 존재? 자립적 존재. 자립적으로 우리 살림은 우리가 꾸려 나가야 이것이 신이 내린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게 나중에 데카르트, 칸트, 뉴턴, 근대 과학의 사상의 기초가 되겠죠. 아시겠습니까?

신이 안 믿겠다는, 신을 버리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신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긴 이상은 개별적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되는데 하나님 주신 사명, 맨 날 하나님 찾지 말고 이제는 하나님 일단 믿지만 이제는 그것 찾지 말고 내가 나의 지혜, 내 속에 있는 본질, 그런데 내 본질은 다른 사람하고 달라요. 내 재능, 내 아이큐는 다른 사람하고 달라요. 나의 아이큐는 내가 발휘해서 나만의 뭔가,  신에게 봉사하는 독특한 지혜를 썩히지 말고 계발해야 된다. 이게 바로 서양 근대 과학의 사상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여러분, 한 번 물어 봅시다. 왜 동양에서는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습니까? 왜 서양에서는 근대 과학이 발달되고 왜 동양에서는 안 튀어나온 이유가 뭡니까? 뭐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신에 대한 사명감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간단한 문제에요. 학교에서는 그걸 쉬쉬하는데. 신에 대한 사명감이 없어서 그래요.

동양의 중세 때는 농경시대 아닙니까? 농경 시대는 신이 있지요. 신을 믿지요. 그 신은 무슨 신입니까? 하나님과 집단 인간이지요. 개별적인 게 아니고. 하나님과 우리 왕, 임금님을 세워서 이렇게 임금님이 제사를 잘 드려서 이렇게 농사짓는데 비가 오게 되었다. 만세, 만만세. 우리 황제여, 만만세. 끝이에요. 끝이란 말이죠. 개별적으로 독특하게 신이 뭐, 황제를 위해서, 웃기지 마라. 신은 개별적으로 나와 직접 영혼을 다룬다. 이런 신과 내가 직접적으로 나의 사명이 있다는 개념은 없고, 신은 어디서부터 온다? 임금님에게 오고, 임금님 제사 잘 드리면 우리 농사짓는데 비가 잘 오고 농사 잘 지으면 우리는 그러면 자연의 신에 대해서 그들의 신은 자연의 신이니까 풍요의 신에 대해서 찬양하자. 그러면 끝나잖아요. 그게 전부 아닙니까?

그러니까 과학이라는 것은 개별적으로 독자적으로, 여러분 과학이 처음에 할 때 과학 했다고 월급 준 줄 압니까? 각자 직업 가지고 짬 내어서 시간 내어서 그래서 힘들게 육체의 손상해 가면서 거기에 매진한 사람들이 초기의 과학자들입니다. 과학협회라는 것이 나중에 등장해요. 처음에는 과학자하는 사람은 그것은 미친놈이라 했어요.

에디슨 알지요. 그게 완전히 둔스 스코투스에 의하면, 에디슨이 왜 다른 사람은 계란 보면 톡 깨어서 먹는데 애가 암탉이 되어서 달걀을 품고 왜 그런 짓을 하느냐? 둔스 스코투스에 의하면 존재는 같은 존재이지만 뭐가 다르기 때문에?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특별한 사명을 받아서 그렇게 한다고 이렇게 보지요. 다른 사람은 그냥 아르바이트하고 신문배달하면 되는데 지는 뭐, 기차간에서 신문 찍는다고 찍다가 불내고 그랬잖아요. 그 사람, 나중에 사기꾼으로 변했지만. 남의 제자가 발명한 것을 직접 했다고 하다가 욕먹고, 나중에 한계가 떨어지니까 발명이 안 되잖아요. 안되니까 텍스라는 그런 제자들이 한 걸 자기 이름으로 하다가 걸려서 우사 당하고. 아주 말로가 희안했어요. 좋지 않았어요. 에디슨은 발명가로 보지, 과학자로 안 보죠. 그래서 교육 안 받으면 아이가 ... 아인슈타인을 막 높이고 그렇게 하지요.

그것은 인간의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의 본질 자체가 정당화될 때 그 다음부터는 개별적인 이유는 신부한테 물을 필요도 없고, 교회한테 물을 필요도 없고 내가 신의 자녀로서 내가 나하고 싶은 것, 내가 즐기는 것을 해 나가면 되는 거예요.

그러한 개별적인 자립적인 주체의식이 어디는 없다? 동양에는 없다 이 말이에요. 동양은 기가 이와 기에 의해서 모든 것이 지배받는 거예요. 자연에 순화되고 자연에 그냥 자연에 복종하면 그게 올바른 인간인 줄 알았지, 개별적으로 신의 사명을 감당해야 인간답다 하는 것을 그런 사상은 토마스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 그 다음에 칼빈, 루터 이런 사상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는 말하기를 이게 오늘날 야벳이 축복한다고 노아를 거론하는 사람이 있어요. 자, 그 다음에 87페이지 봅시다. 키케로, 이 사람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고 철학가입니다.

[키케로Cicero(106-32)는 인간이 품격을 동물로부터 인간을 구별하는 이성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니까 인간의 품위는 어디 있느냐? 동물하고 다른 점에 있다는 이 말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글들이 굉장히 어렵지요. 그냥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 하면 되는데 인간의 품격을 동물로부터 인간을 구별하는 이성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았다.

[기독교 교리는 인간의 품격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개개인들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그 토대를 두었다. 창세기 9장 6절에 따르면 개개인들의 생명은 신성불가침이다.] 신성불가침, 이 말도 옳은 말이 아닙니다. 신성불가침이란 말은 별로 좋은 말은 아니지요.

[우선적으로 기독교는 유대교의 신앙적 동기를 이어가면서 하나님과의 일치로 인해서 주어지는 생명과 자유라는 시각에서 인간의 품격을 개인에게 속한 신성불가침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여러분 다 아시겠지요.

[더 나아가서 분명히 기독교 사상에서 그 의미가 심화된 인격(person) 개념이 이런 정황들과 연관된다. 이런 심화를 통해서 인격적 존재는 개인의 품격에 대한 총괄 개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개인의 품격을 높이기 위한 인격이 아니라, 개개인에게 분여될 표준적인 인격 개념이 선행된다.] 이 개념이 뭡니까? 이게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개별적인 인간들 가운데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그것은 뭐냐?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이 로고스의 인격에 참여하는데 ...

88페이지 중간에 봅시다. [레온티오스는 이런 관계를 명시적으로 주체화했는데]

여기서 조금만 참으세요. 여기 무슨 단어가 있어요? '주체'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있다, 없다를 뭐로 안다고 했습니까? 주체. 주체에서 파악되면 하나님이 있는 거고, 주체자가 파악되지 못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야기했습니다. 다 잊어버렸죠. 옛날에 있다, 없다는 뭐로 봅니까? 옛날에 있다, 없다는 모든 게 그냥 있음이죠. 없음이 없는 모든 게 있음이에요. 왜냐하면 있기 때문에 있는 우리에게 눈에 띠잖아요. 모든 게 있음인데 주체사상이 들어오면 주체가 알 수 있는 것만 있고, 주체가 봐서 없는 건 없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신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냥 모른다고 해야지요. 그냥 있을 가능성, 신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신이 눈에 안 띠니까 그냥 가능성만 있을 뿐이죠. 이게 기초가 뭐냐? 주체사상이에요. 그 주체사상을 조직적으로 설명한 사람이 칸트에요.

칸트는 감각에서 나온 것을 인간의 오성이 재구성함으로서 비로소 진리화 되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거요. 느끼는 것이 믿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그걸 칸트식으로 목회하게 되면 뭘 강조해야 됩니까? 간증을 강조해야 되고 기적을 강조해야 되지요. 하나님 있습니다. 한번 경험해 보세요. 간단한 말이에요. 한번 경험해 보세요.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 살아 계심을 아실 것입니다. 또 간증집회. 어릴 때 이렇게 살았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인도했고, 몇 살 때 이렇게 인도했어. 이걸 봐서 하나님 살아 계심을 압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했고, 체험한 그걸 모아 모아서 나의 오성으로 나의 직감으로 재구성하니까 그것이 나만의 신, 주체자에 맞는 신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주체적인 신개념이 근대의 관념론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데카르트고 칸트고 여기에 나오는 이 책의 뒷부분이. 아시겠습니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전에는? 목사님. 그전에는 개인에게 신이냐, 아니냐? 물을 필요 없이 무조건 있음입니다. 존재니까. 그전에는 어땠습니까?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나를 존재케 한 존재자가 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신의 존재는 뭣 때문에 있다? 내가 존재하니까 신은 존재하는 거예요.

그런데 근대사는 뭡니까? 신이라 하는 것은 나의 존재에서 아는 것이 아니고 나의 인식으로 아는 거예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인식하는 한에서 내가 존재를 알지, 내가 꿈속에서 만약에 내가 죽어 버리면 나는 없어 버리는 거죠.

그래서 데카르트를 말하기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존재가 우선이 아니고 뭐가 우선이다? 내가 생각하는 게 우선이고 그 다음에 존재가 나온다 이 말이죠. 참, 중요한 걸 내가 지금 이야기하는데. 이게 실제 목회나 실제 설교에서 빈번하게 나옵니다. 여러분 나처럼 믿으시면 구원받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쉽게 쉽게 나옵니다. 그러나 나처럼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의 핵심이 뭐며, 성경의 복음의 중심이 뭐냐? 이렇게 성경을 소개해야지, 나는 지난날 기도원에 가서 이런 체험을 했다.

자꾸 잠이 오니까 여담 하나 이야기할게요. 대구의 부광교회 있는데 그 부광교회 교인들이 우리교회 몇 명 와버렸어요. 부광교회 박노진인가 있어요. 미친놈 하나 있어요. 배재인이라는 서리집사가 있는데 복음을 알고 내촌감삼의 책들을 읽고 강하게 밀어 붙였어요. 뭐, 이게 무당이냐? 강하게 밀어 붙였어요. 그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가지고 우리교회에도 올리고, 자기 교회 사이트에도 올리고 그랬다고. 그러니까 박 목사라는 그 사람은 정치적 통박이 돌아가야 되잖아요. 배라는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이, 지가 서리집사 하나가 뭐, 한다고 꿈쩍이나 할까 이렇게 했는데 아, 자기도 예상 못할 정도로 부교역자나 장로들이 영향이 되게 세게 나갔어요. 왜냐하면 그 사람이 그냥 이야기만 한 게 아니고 찾아다니면서 장로 똑바로 하라고 이렇게 해서 되느냐고, 하나하나 이야기 했다고. 그리고 그 장로들이 가만히 들어보니까 전부다 맞는 이야기에요. 맞는 이야기니까 그만 거기에 동조 해버렸어요. 그래서 장로가 목사를 불렀지요. 내가 이 교회 60년 봉직했는데 니 나갈래, 내 나갈래? 그게 삼천 명 모이는 교회인가 이렇게 하고 있는데.

그때 보통 목사들이 자기의 모든 재능을 발휘합니다. 그 첫 번째 하는 흔히 하는 수법이 뭡니까? 기도원에 갔다 오겠습니다 합니다. 기도원에 갔다 오겠습니다를 왜 하느냐 하면, 목사가 어려움이 왔을 때 결국 인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한다는 신앙적인 길을 교인들에 부각시킴으로서 아직도 주의 종으로서의 품위를 상실하지 않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기도원에 갔다 온다고 하지요. 기도원에 갔다 와서 2차 처리가 뭐냐? 부교역자에 대한 단도리. 너희들, 이 틈에 내 편 안 되면 작살난다. 잘 해. 만약에 니가 잘 안하면 조진다. 갔다 와서 세 번째가 뭐냐 하면, 기도 응답 받았습니다. 하는 이야기죠. 응답이 뭐냐 하면, 서리집사를 치리하는데, 원래 서리집사는 교회에서 치리하게 되어 있는데 교회에서 치리하게 돼버리면 전부 누구 편입니까? 장로가 저희 편인데, 치리하면 문제가 있기 때문에 서리집사 치리하는 걸 노회에다 걸어 버린 거예요. 세상에 서리집사 치리하기 위해서 노회에다 거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배 집사님이 하는 말이, 참, 목사님, 웃기데요. 아들. 서리집사 치리하기 위해서 노회에다 고소하는 사람 첨 봤다. 얼마나 옳은 소리가 무서웠으면. 막 자기 선전하기 위해서 기독교 TV에 돈 주고 설교 나오고 해서 그동안 자기 카바하기 위해서 온갖 것 했는데, 서리집사 하나 못 이겨서 하고, 그 다음에 배 집사가 칠곡에 있는 어느 개척교회, 교인 세 명 모인다고 하든가, 엠디비 나와서 석사학위 받아서 엘리트인데 지하실에서 하는데 그 목사하고 성경 공부한다는 거죠. 그렇게 되니까 네 번째 작전이 뭐냐 하면, 그 목사가 같은 칠곡 교회에 있는 세 명 모이는 그 교회의 목사의 뒷조사를 시작한 거예요. 노회 쪽으로, 목사를 조진다기보다는 협박용으로 사용해서 그 목사도 이제는 아이고, 형님 잘못했습니다. 이제는 그 집사하고 안 놀게요. 라는 소리를 받아내서 전부다 자기편으로 포섭하게 하는 작전에 들어가는 거죠. 그래서 지하실에서 개척 교회하는 목사들 동기, 부목사들이 있으니까, 조심해라. 노회에서 네 뒷조사 들어간다.

결국 교회란 것이 이렇게 되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그 칠곡이란 동네가 무슨 동네냐 하면, 신개발지거든요. 아파트거든요. 사람들이 거기에 왜 가느냐 하면, 일단 건물이 크고, 그 다음에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머니까 시내에서 배웠던 그 상식적인 종교를 그대로 가르치는, 그러니까 그냥 가까운 곳에 정성 드리려 가는 것처럼 갔다가 거기에서 사람들이 ... 그러니까 이 부광교회가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고, 목사님, 다 잘못되었네요. 과거에 다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와서 그들이 뭐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방금 공부를 했지만 그 목사, 교회의 사명이 복음적이 아니고 뭐냐 하면, 존재. 내가 그러니까 그동안 뭐라고 속였느냐 하면, 하나님이 살아 계십니다.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에 살아 계신 게 아니고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교회, 우리가 크잖아요. 컸으니까 크다는 것은 뭔 뜻이다? 신께서 복을 많이 주고 있는 증거다 이 말이지요. 거기에 교인들도 동의를 한 거지요. 그리고 거기에 목사 보고 당신이 나가든지, 내가 나가든지 하는 장로도 마찬가지에요. 그 장로도 복음이 좋아서 하는 게 아니고, 자칫하면 이 교회가 깨질 판이니까, 내가 수십 년간 봉직한 교회니까 이것이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니, 좀 나가줘. 니, 몇 년 전에 왔노? 나 오래 있었다.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그런 교회들의 출신들이 신학교 가서 목사 됐으니까 복음이라 하는 것이 서로 다 모르는 상태지요.

그래서 지금 복음을 안다는 것이 신기해요. 복음을 알고 있다는 게 있으니 수상쩍하고 신기하고 그래요. 많이 수상하고 신기하고 그래요. 복음을 안다는 게.

우리가 이런 공부를 해가면서 아아, 결국은 그런데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교인들은 교회가 썩었다 이렇게 알면, 많이 반대해야 되지 않습니까? 교인들은 교회 일에 관심이 없어요. 왜 관심이 없냐 하면, 개별적으로 교회 와서 들은 풍월이 뭡니까? 나의 존재는 신이 주신 신이 내리신 선물이다. 따라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가스배달이든지, 내가 하고 있는 어떤 공무원, 직장 시험 쳐서 합격한 것은 신의 기적이다. 내가 나름대로 갖고 있는 신에 대한 확신, 경험, 체험한 것에 대해서 나의 오성으로 재구성된 그런 신개념을 그것을 터치 않는 이상은 별로 관심이 없어요. 그래서 나같이 훌륭한 사람을 집사 시켜주고 장로 시켜주고 그러면 나는 그 교회에 헌금해 주겠다는 거지요. 하지만 나는 건드리지 마라. 나는 신의 흔적을 가졌노라. 그런 조로 지금 교회 안에 있어요. 십자가 앞에 모두 굴복하는 이런 게 없어요. 십자가는 빼버리고 나머지 면에서 내가 조립한 나의 신, 나의 하나님, 그걸로 무장된 것이 교회 형편입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 듣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누가 불쌍하냐 하면, 가만히 있는 지하실에 교인 세 명 데리고 가만히 있는 그 사람이 치리 당할 판이라. 그 사람은 누굴 존경하느냐면, 그 사람은, 권성수 교수, 그 사람은 학교 때 교수할 때는 뭔가 복음 전하는 것 같은데 설교하는 것 보니까 엉망이다. 그 사람은 설교 되지도 않았어. 목회하면서 사람 버렸어. 이 정도 아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뭘 좋아하냐면, 박영선 목사 좋아하고, 주님의 교회의 이재철, 그 사람 좋아하고. 그 정도 수준에 해당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그 사람의 논문이 오바댜 논문인데 내가 봤는데, 뭐냐 하면, 국어시간이에요. 문자적으로 구조학적으로 김지찬에게 배워서 하는 거예요. 그 정도에요. 그러면 이근호 목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사람도 필요하고. 우리나라 한국교회에. 그런 사람도 필요하고. 그런데 졸지에 가만있는데 ...

자, 그래서 그러면 목사님, 칸트가 그렇게 하나님을 가르쳐주는 그 하나님은 엉터리 아닙니까? 칸트는 자기가 엉터리라고 보지 않지요. 칸트의 마지막 것은 뭐가 나오기 때문에? 윤리가 나와요. 인간은 뭐냐? 인간은 체험한다.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최고의 체험은 뭐냐 하면, 산상설교에 나오는 신의 세계,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의 윤리가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최고의 윤리입니다. 따라서 사람이란 뭐냐? 무조건 선한 일을 해야 된다. 왜? 인간 속에 하나님 나라, 신의 윤리가 들어 있기 때문에. 이게 칸트의 철학의 전부입니다.

인간의 신은 자기가 체험한 것을 모은다. 모으는 가운데서 최고의 체험은 뭐냐?  동물과 달리 짐승과 달리 왠지 착하고 싶고, 왠지 바르게 살고 싶은 그것이 있는데 그것은 누가 줬는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니까, 그 윤리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 최고의 신학이다. 라고 했을 때 그 당시의 성직자들이 좋아했겠습니까, 안 했겠습니까? 둘 중에 하나. 안 했어요.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교회 갈 필요 없이 양심적으로 바르게 살고 가정교육 잘 받고 교육 많이 받은 사람은 어디 갈 필요 없습니까? 교회 다닐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유럽에 교회 안 다니잖아요. 니, 뭐 아노? 나도 많이 안다.

개별적으로 그러니까 신부하고 목사한테 매일 필요 없다는 거죠. 우리 속에 스스로 돌아보면 내 속에 뭐가 있습니까? 양심이 있고, 그 양심은 하나님이 주신 선한 형상이기 때문에 이걸 발휘하면 이것이 신의 뜻인데 내가 뭐 하려고 돈까지 줘가면서 교회에 왜 가느냐 말이에요.

그러니까 점점 더 한국교회가 동양적인 의식에서 근대사상이 들어오면서 뭐도 들어왔다? 칸트의 개별적인 주체사상도 들어왔고 개별적인 영혼은 어디서 나왔다? 아까 해 왔죠.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거기서 하나님과 연관된 개별자가 떨어지고 개별적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둔스 스코투스, 그것이 발달되면 어디로 나옵니까? 드디어 내가 돌입하는 내가 생각하는 나, 내 속의 하나님을 생각하지요. 그게 데카르트고, 칸트고 그것이 몽땅 우리나라에 근대 구조로서 수입해 왔기 때문에 옛날에는 농경시대니까 아버지, 어머니의 효자가 지금은 핵가족해서 지 살기 바쁜데 뭐. 하나님도 마찬가지고, 교회 다니는 것도 마찬가지고, 교회 그런데 관심 없고, 복음도 관심 없고, 내 잘났다 그것만 관심 있습니다. 이게 바로 절대 자아고, 그렇게 번지는 겁니다.

오늘 강의 어려운거 너무 많이 했는데 너무 많이 하면 모르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합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실상을 지나온 과거 허점을 통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고 인간적인 육적인 요소들이 비 복음적인 것이 어떻게 그럴싸하게 신앙이란 이름으로 우리 곁에 왔는지를 우리가 잘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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