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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지역강의 > 부산강의
2006-04-25 22:35:14 조회 : 3782         
Re..20040913 부산강의-11, 12세기 신학 이름 : 한윤범(IP:)


20040913 부산강의-11, 12세기 신학
(강의:이근호 목사)


여러분들이 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 후딱후딱 지나가면서도 저 먼 거리에 차 타다보면 먼 풍경이 보이잖아요. 그것은 멀리 있는 산은 후딱 못 지나가요. 오히려 기차가 왜소하죠. 해 봤자, 큰 산에 못 미치니까. 큰 산이 이렇게 놓여 있는 큰 산이 뭐냐를 그걸 아시면서도 후딱후딱 지나가도 큰 산을 놓치지 않고 지나가야 됩니다.

신학이나 철학이나 그렇지만 이 책에 나와 잇는 신학 같은 것은 큰 산이 있다면, 큰 산이 모든 신학에 있어요. 그 산이 여러분들은 신앙인이니까 신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기차가 철로에 이렇게 달린다면, 큰 산이 있는데 산을 뭐로 보면 되느냐 하면, 이걸 존재로 보면 정확합니다.

나중에 이 존재에 대해서 시비 거는 사람이 나타나는데 그 사람이 루터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루터는 오늘날 신학에서도 사람들이 거부하고 싶은 신학자에요. 왜냐하면 존재에 대해서 거부했거든요.

그러면 루터는 뭐냐 하면, 신학은 존재에 대해서 이렇게 멀리서 후딱 지나가면서 이걸 탐구하는 것은 이걸 철학이고 신학이라면, 진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 둔 것은 뭐냐 하면, 십자가다 이 말이에요. 진짜 하나님은 남겨 둔 것은 큰 산처럼 존재가 아니고, 십자가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루터가 그런 이야기하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존재에다가 십자가를 보태면 될 거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십자가는 뭐가 됩니까? 내 존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십자가가 되겠지요. 글쎄, 그것이 말도 안 된다는 거지요.

루터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감을 잡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칼 바르트입니다. 루터가 뭔가 다르다 하는 것을 감을 잡은 사람이에요. 그렇게 감은 잡았는데도 불구하고 기어이 칼 바르트가 포기 못한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존재성입니다. 인간의 존재성, 신의 존재성이에요.

여기 91페이지 한번 봅시다. 위에서 일곱. 이 시간에는 11세기, 12세기 신학의 안셀무스의 합리주의와 그 다음에 아벨라드의 의지주의와 베르나르의 신비주의, 이 세 가지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신비주의나 합리주의 이것과 우리가 보려는 신비주의나 의지주의가 우리가 보려는 합리주의와 상관없다고 보지만, 아니에요. 감정이나 의지라는 것은 반드시 뭐가 성립될 때나 나오는 이야기냐 하면, 이성이 먼저 중심을 잡을 경우에서나 비로소 그게 다가 아니야, 하는 식으로 나온다 하는 게 의지와 감정입니다. 이성이 먼저 터 잡고 있는 상태에서 이성으로는 좀 미흡한 것 같아. 라고 거기에 하나 토 달고 나오는 게 의지와 감정주의지, 이성은 영 엉터리고 그래선 안 되고, 이렇게 나오는 것이 신비주의와 의지주의란 게 아니에요.

그런데 여기 합리주의든, 신비주의든, 의지주의든 이 모든 것이 관심이 어디 있느냐 하면, 관심은 이 큰 산, 이 존재라는 엄청난 큰 산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91페이지, 제가 읽어볼게요. [존재를 예를 들어 볼 때 사물들은 존재에 참여함으로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사물들은 혼자 스스로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 안에서 존립한다는 뜻이다. 바로 이 다른 것이 존재 그 자체이다. 존재 그 자체는 단 하나일 뿐이기 때문에 우리는 나아가서 이것이 지고의 존재 혹은 가장 높은 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여기 존재라는 큰 산이 있다면, 우리는 기차를 타고 이 주위를 돕니다. 돌면 이 존재라는 큰 산은 하나밖에 없어요. 그리고 기차에 탄 여러 가지 사람들은 백 명이라면, 백 명의 존재자들이 있지요. 백 명의 존재자들이 있으면, 우리가 백 명 중의 어느 한 사람을 절대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지나 개나 똑같지. 이렇게 본다고.

그러나 뭐는? 이 존재를 존재케 한 존재 그 자체, 이 존재를 낳았던 존재 그 자체는 오직 하나밖에 없잖아요. 절대 아닙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경외감을 갖고, 여기 이러한 분산된 형태에서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접근할 것인가를 시도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왜냐하면 이렇게 존재 자체에 그걸 분석해서 알게 될 때에 뭐를 아느냐 하면, 그 존재에서 분산된 떨어져 나온 ‘나’라는 존재자를 알게 되지요. 왜냐하면 거기서 한 소속이니까, 한 속성이니까.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존재가 만약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하나님 형상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이죠. 그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속성을 알면 하나님 형상을 입은 우리의 속성을 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결국 돌아오는 게 뭐예요? 내가 누구냐를 안다 말이에요.

내가 누구냐를 알아서 뭐 할 건데? 이런 사람 있어요. 내가 누구냐를 알아서 뭘 할 건데, 돈만 있으면 돼지. 내가 누군지 알아서 뭐 할 건데 이렇게 하지요. 사람이 돈을 버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돈을 벌어서 내가 누군가 알기 위해서 돈을 버는 거예요. 돈을 벎으로 말미암아 아, 나는 이렇게 돈 벌 능력이 있구나. 라는 그러한 자기에게 결국은 관심사가 자기한테 되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 와서 구원해 주세요. 구원받아서 뭐 할 건데? 하면, 구원을 받아야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구원된 자라는 것을 내가 누구냐를 안다 이 말이에요. 나는 구원된 자일까, 아니면 내가 탈락될까? 그런 것을 교회 와서 설교 가운데서 또는 목사님과 상담을 통해서 내가 누구냐? 구원받았어요? 나는 탈락된 사람입니까? 라고 평소에 자기가 자기한테 물었던 물음을 그대로 목사한테 펴 놓는다 이 말입니다.

흔히 이런 일 있잖아요. 가끔 잘 안나오는 교인들 와서 불쑥 전화하기를 목사님, 요새 내가 하나님 안 믿는 것 같아요. 하나님한테 관심이 없어요. 어쩌면 좋습니까? 이러고 있다고. 그게 재미있는 게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어쩌면 좋습니까? 라고 할 때에 관심사가 뭡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자기한테 관심 있어요? 마지막으로. 결국 자기한테 관심 있잖아요. 그러면 목사는 그때부터 바쁘지요. 일단 달래자. 우선 마음을 안정시키시고요. 너무 극단적으로 가시면 안 되고요. 다들 그렇게 다 한번씩 겪는 일들입니다. 진정하시고요. 집안에 무슨 문제 있습니까? 라고 마음을 진정시켜 놓고, 그 다음부터 성경에 이렇게 하면서 이런 자도 구원 받는데 걱정하지 마시고. 이렇게 한다 말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상담한 사람은 내가 구원된 자, 혹은 내가 구원이 아닌 자를 목사한테 이야기 나오는 그 성경 구절 몇 개 가지고 자기한테 쓱싹쓱싹 짜 맞춰 보는 거예요. 아, 이 성경은 나한테 해당되네. 그럼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네. 어, 이 성경은 해당 안 되는데. 그러면 70% 구원받았는가? 이런 식으로 견줘 본다는 거지요. 그렇게 하는 행위가 다 무엇을 위한 행위입니까? 내가 누구냐, 나라는 존재를 알기 위한 하나의 방식들이란 말이죠. 거기서 종교가 생기고 교회가 생기고 교인들이 생기는 그런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모든 것은, 우리가 공부할 때 이것을 뭐라 했습니까? ‘나’라고 하는 것은 항상 변화하는 존재고, 변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안정성이 없잖아요. 변화하는 존재가 누구냐를 종잡을 수 없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용쟁호투라는 영화를 봤습니까? 뭐, 안 볼 수가 있어요. 용쟁호투 영화 마지막 장면에 거울 수십 개에다 한 판 붙는 것 아닙니까? 어느 것이 브루스 리인지, 이소룡인지 알 수가 있나? 이리 치니까 저쪽 튀어나와 버리고, 거울 있잖아요.

우리가 늘 변하니까 내가 누구냐를 알려고 하니까 너무나 변화무쌍하니까 변하지 않는 어떤 존재를 상정하는 거예요. 한결같은 분, 그걸 예를 들어서 신이라 합시다. 신을 내가 앎으로 말미암아 신을 믿는 나는 한결같이 이게 나구나. 내가 바로 구원받았구나. 자기의 신분을 확정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변화된 나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고, 변하지 않는 그 무엇에서 찾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합리주의나 의지주의나 관념주의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신이 어떤 하나님이냐 하는 아는 방법에 있어서 인간에게 세 가지의 사유적 요소가 있잖아요. 하나는 이성적 요소가 있고 하나는 감정적 요소가 있고 하나는 의지적 요소가 있단 말이죠. 이걸 여기서부터 출발해서 이 변할 만한 요소부터 해서 변하지 않는 것을 구축, 확정 지으려는 그런 시도가 신학이다 이 말입니다.

그게 신학이라고 해도 되고, 그 다음에 교회 다니기 이래도 되고, 성경공부하기 라고 해도 되고, 큐티라고 해도 마찬가지고, 안 그러면 돈 버는 일, 사업하는 일 전부다 여기다 포함된다 말이죠. 변하지 않는 게 무엇이냐? 하는 그것에 철저히 맞춰져 있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게 뭐냐? 그것에 초점이 맞춰 있는 겁니다. 변하지 않는 나를 찾기 위해서 변하지 않는 것을 먼저 찾고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 루터는 참, 돌발적으로 나오지요. 존재의 자리에다 십자가를 집어넣어 버린다 말이에요. 십자가를 집어넣어 버리면, 십자가는 뭐냐 하면, 나와라 이겁니다. 해체입니다. 이쪽 신은 뭐냐? 오라, 나에게 오라. 십자가는? 가라. 가도. 안 갈래. 꺼져라. 이거다 말이죠. 마치 십자가는 닫힌 문 같아요. 열린 문이 아니고, 닫힌 문이에요. 닫히기만 하면 괜찮게. 발길 차는 문이거든요. 접근하면 발포하는 문이거든요 이게.

루터가 전 신학체제, 철학체제를 훑어보고 연구해도 제일 중요한 것을 사람들이 놓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거부하는 하나님부터 새로 시작해 보자. 인간을 거부하는 인간을 환영하지 않는 그 하나님부터 모든 걸 새로 출발해 보자. 배척.

“네가 보기도 보아도 보지 못하고”이라는 말씀이라든지,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한다.”는 그 말씀. “들을 귀 있는 자를 들을지어다.” 이게 뭐, 들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니들이 뭘 알겠느냐? 아냐고 나한테 듣고 있느냐 말이죠. 너희들이 아무리 애써봐야 내 이야기를 아는가? 니들이 뭘 알아? 그런 뜻이다 이 말이죠. 절망이죠. 그 절망을, 저는 절망이라고 표현했는데 그걸 칼 바르트는 다른 뉘앙스로 이야기했어요. 위기라고 했어요. 절망과 위기가 좀 다른가? 절망이다. 칼 바르트는 위기. 루터는 십자가. 루터는 사실 십자가라는 말, 절망 쪽으로 선회하고 예정이란 말을 썼어요. 루터는 예정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칼빈의 예정론이 루터에서 어떻게 되었는지 어떻게 전환됐는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 칼빈의 예정론은 루터에게서 나온 게 아니고, 이건 유대교에서 나온 거죠. 분명히. 유대교 사상과 일치되지, 루터에서는 별로 연관 안돼요. 왜냐하면 루터의 예정론을 뽑아 올 때는 반드시 십자가와 같이 뽑아 와야지. 이것은 십자가는 떨어뜨려버리고 예정론만 턱 해가지고 거기에다 하나님의 형상하고 결합시키는 게 어디 있어요. 그런 반칙이 어디 있습니까? 그건 말이 안 되지요. 십자가를 빼 놓은 예정론은 예정론이 아니고 주권론이 되지요.

주권이란 말은 성경에는 없어요. 주권이란 말 자체가 성경에서 용납을 안 하는 말입니다. 예정이지 주권이 아니에요. 주권이라는 말은, 이것은 성경의 용어가 아니고 철학적 용어에요. 모든 인간은 다 신의 주권을 인정하고 있어요. 어린애도 신의 주권을 인정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 신학공부를 전 인류의 신학공부를 다 하는데, 하면서 여러분들이 이런 생각을 해 보세요. 십자가로부터 다시 정립하기 위해서 이쪽의 존재론 쪽으로 신학을 정립해 왔던 것을 먼저 아셔야 그게 통째로 아니구나를 알면서 그러면 당신은 뭐냐? 할 때 십자가를 이야기 해 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십자가를 들이대면, 아까 이야기했듯이 어떻게 생각한다고요? 자기 존재는 구원 받는데 거기 정보 하나 추가, 추가 밥이요, 하는 식으로 십자가 하나 추가될 뿐이지 존재론적인 것은 2000년이 말짱 존재론적 아닙니까? 지금 교회마다 십자가 꼭대기 안 꽂힌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다 꽂혀 있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신학을 공부하겠다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게 십자가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십자가를 공부하는 우리 자신에게 십자가를 들이대면서 절망케 하고 우리로 하여금 위기케 하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할게요. 십자가를 들이대는 순간 우리는 절망이고, 그 뒤에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모든 것이 은혜고 이렇게 돼요. 달리 설명하면, 성도는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일을 하시는 그런 관계에 있는 성도는 하는 족족, 우리가 우에 알겠어요? 우리의 예상을 뒤엎어버리고 예상치도 않은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더 단적으로 더 무서운 예를 들게요. 십자가라는 성도에게 갑자기 아내가 교통사고로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가만히 있지 않고 머리가 돌아갑니다. 뭔 쪽으로? 존재 쪽으로. 내 아내가 현재 교통사고로 죽어가고 있다. 그러면 내 예상을 뭡니까? 내 아내는 존재해야 된다. 아닙니까? 마지막에 아내의 존재가 없으면 모든 게 무효 되니까. 내 아내는 존재해야 돼. 라고 예상합니다. 십자가 안에 있는 성도에게만 해당되는 거지, 다른 사람에게는 해당 안 되고. 가 보니까 내 기대치는 아내가 살아 있어만다오. 했는데 집에 가니까 죽고, 난데없이 애 하나 더 아프더라 이 말이죠. 그럴 때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애 아픈 것이 은혜로 주어지고, 아내가 죽은 것이 감사할 은혜로 주어지고. 왜냐하면 내가 예상을 안 했던 것이기 때문에.

야, 이거 이해 안 되시네. 다시 할게요. 아내가 아프고 죽어가는 소식을 듣고 기대를 할 것 아닙니까? 신이시여, 제발 아내를 살려주시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부름 받아서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한다 말이죠. 그런데 막상 아내가 죽으면 따라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가보니까 아내 죽었는데 아내 죽음 자체를 그것이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은혜로 그게 이해가 되고 해석이 되더라 이 말이죠. 더구나 나는 예상치도 않았는데 애까지 하나 더 아프더란 말이죠. 아픔조차도 뭐로 보아진다? 모든 것이 은혜였다 말이죠.

그러면 아내가 교통사고 나기 전에는 은혜입니까, 은혜 아닙니까? 그것도 은혜였었는데 나의 존재가 뭘 가렸다? 은혜 됨을 평소에 가리어 온 거예요. 당연히 아내는 살렸어야지, 당연히 안 아프지 뭐. 내가 이만큼 하나님께 열심히 해 오는데 아내는 안 아파야지 그래. 다른 사람도 다 안 아픈데 왜 내 아내는 아파야 됩니까? 라고 뻔뻔스럽게 마땅히 그것은 안 아파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일이 터지는 그 과정을 통해서 십자가를 그렇게 만듦으로 말미암아 내게 주어진 모든 것, 아내, 딸, 심지어는 내 자신조차도 이것이 은혜 덩어리로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닫게 하는 식으로 주께서 십자가 진다는 겁니다.

그러려면 십자가는 뭘 먼저 선행해야 됩니까? 바로 너는 존재를 생각하는 너는, 내가 누구냐 생각하는 너는, 나한테 오지 마. 너는 내가 너를 밀칠 거야. 나는 네가 싫어. 너 같은 인간은 천국에 못 들어와. 십자가는 닫힌 문이야. 너 같은 인간은 들어오지 마. 밀치는 작업을 했는데. 밀치는 작업의 하나가 아내 죽음, 아이 아픔, 자기의 곧 죽음, 그런 거예요. 이것이 바로 존재론 쪽에서 볼 때는 절망이에요. 칼 바르트에 의하면 그것은 뭡니까? 위기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은혜성을 훼손되지 않기 위해서 모든 기존의 사고방식을 전부다 오직 택한 백성에게만 전부다 그것을 절망과 절망, 기대가 깨어지고, 모든 소망이 다 깨어져 부수는 방식으로 데려가고 인도하시고, 꿈꾸면 꿈 깨고, 또 꿈꾸면 꿈 깨어버리고, 계속 그 사람이 만들어내는 꿈을 꾸는 족족 다 깨지게 만드는 방식으로 모든 것을 은혜 됨을 깔아놓는 그런 식으로 주께서는 인도하십니다.

이걸 가지고 모세가 만났던 하나님이 뭐라고 했냐면,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을 입을 자에게 긍휼을 준다."는 진짜 하나님의 자기소개서. 나머지는 다 거짓말입니다. 나머지는 다 개떡 같은 다 엉터리 같은 거예요. 진짜 하나님은 은혜 줄 자에게만 은혜를 주고, 긍휼을 입을 자에게 긍휼을 주신다는 이 하나님의 자기소개서 빼놓고 나머지는 다 가짜 하나님이에요. 전부다.

그렇다면 그 은혜성다운 진짜 하나님을 알려 줄 자기 백성에게만 어떻게 하느냐? 모든 것을 그 사람의 포부와 기대를 다 깨부수는 절망과 절망으로 연속시키는 그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이게 십자가가 일어나는 방법이에요. 그 방법밖에 없어요. 은혜를 더 은혜 되기 위해서.

방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했는데 이게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간단한 문장으로 이야기해요. "모든 사람으로 죄 안에 가두어 둔 것은 은혜를 더욱더 은혜 되게 하심이라" 로마서 5장에서 간단하게 이야기했는데, 아아, 로마서 5장 있는 것 압니다. 그런데 막상 로마서 5장을 나한테 적용을 시키려고 하면, 아아, 차라리 나 자살하지. 차마 그런 식으로는 다가오지 마세요. 손을 흔들 거예요. 사람이 모든 꿈이 깨져보세요. 얼마나 실망스러운데요. 실망스럽기 한정 없어요. 꿈 해도 깨지고, 깨지고, 이거 한두 번 깨지는 게 아니고 계속 깨지니까 쉽게 말해서 되는 일이 없어요.

되는 일이 없는 식으로 인도해 줘야 그 사람이 성도입니다. 신자입니다. 안 그러면 그 사람은 신자가 아니고, 그 모든 사람은 신자가 아니에요. 진짜 신자는 되는 일이 없는 쪽으로 인생이 끌려가야 돼요. 혹시 여러분 어떤 ( ) 봤어요? 목사님, 신자가 어떤 사람입니까? 신자는 되는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게 당연하죠. 왜? 모든 것이 은혜였으니까. 거저 주신 은혜였으니까. 나의 존재성을 찾기 위한 내 나름대로의 노력은 전부다 의지든, 이성이든, 감정이든 다 깨져 버렸어요. 이걸 루터가 알았어요. 이 사실을.

그러니까 루터가 아니까 안셀무스, 베르나르, 아벨라드, 전부다 이건 뭡니까? 이것은 애들 장난 같은 이야기에요. 그러나 지금 막상 보면, 제가 설명하면, 와, 심오하다 이렇게 되어 있죠. 왜 그게 심오하고 감탄할 수밖에 없는가 하면, 평소에 우리는 십자가는 말로만 알았지 십자가는 근처도 않고 우리 스스로 평소에 살아가는 모든 방식이 이 안에 다 들어 있어요. 나보다 더 큰 나를 생각하는 것이 인간들의 모든 변화의 지향성입니다. 항상 나보다 더 큰 뭐?

그러니까 지금 만약에 한달 수입이 500만원이잖아요. 200만원 되는 사람한테는 500만원 같으면 와! 니 참 좋겠다. 하지만 그런 것 없어요.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500만원 보다 항상 더 많은 700만 원짜리 소득을 따라 찾아다니면서 그들이 어떻게 사는가를 바라봅니다. 강남의 부자들은 애들한테 교육시킬 때 스스로 자립심을 가르치기 위해서 은행에서 돈을 한 몇 천 만원 해가지고 뚜껑 열어놓고 야, 너 쓸 만큼 가져가. 200만 원 가지고 하루밤 여자애하고 놀다오고. 다음날, 쓸 만큼 가져가. 그렇게 해야 애들이, 큰 돈을 만져본 놈이 나중에 째째하게 안 산다 이거에요. 그런데 같은 서울 하늘 밑에서 노량진 수산시장 근처에서 바지락 장사하는 아줌마들. 하루 종일해야 2만, 3만 버는 아줌마들. 그런 사람 있잖아요. 사람이 500만원 수입되면 그걸로 만족할 줄 압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옛날에 우리 어릴 때, 이랬어요. TV 흑백 나올 때 칼라가 나오면 다른 소원이 뭐가 있겠느냐? 칼라 나온다면. 우리 나이 때, 정판옥 목사님, 그때 안 그랬어요? 김일이 박치기, 우리 안방에서 보면 꼭 문방구나 동사무소 거기 TV 한 대 있지, 그 동네에서 자기 집에 갖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소득이 얼마인데 TV를 사요. 김일이 박치기하면 저녁 때 온 동네 다 모여야 돼요. 그리고 연속극 재미있는 것 뭡니까? 여로 한번 하려고 하면, 주민들, 하고 장욱제, 다 했다고. 요새 김일이 보지도 안 해. 안방에 칼라 줘도 안봐. 1.6 대 1 해도 보지도 안해. 50개 나오는데 뭐 하려고 김일이 봐요. 그런데 그 당시에는 칼라가 나오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완벽한 존재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갈증과 갈증의 연속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글이 전도서에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도다 다섯 번 이야기하고, 그 전도서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는 인간들이 부단히 쉬지 않고 무엇을 지향하느냐? 지향점에 대해서 1장, 2장, 3장, 4장부터 8장까지 각본으로 다 찍어 놨어요. 공부하는 놈은 공부로 지향하고, 돈 버는 놈은 돈 버는 것으로 하여튼 간에 인간은 어떤 변하지 않는 존재를 알아서 내가 누구냐를 알기 위해서 그러한 존재로 지향하는 이것은 멈추지 않고 오늘도 계속 되는 거예요.

그런데 멈추지 않고 산에 등산하는 이런 교인들에게 거기에 같이 등산하라고 엎어지고 자빠지고 뒤에서 등 떠밀고 하는 인간들이 누구냐? 목사들이에요. 교인들은 그걸 원하고. 진짜 예수님 같으면요, 산 위에 올라가지 않습니다. 뭐하는데? 진리를 알기 위해서. 내려온나, 내려온나, 내려온나. 내려와. 진리가 뭔데? 니한테 안 가르쳐줘. 니는 진리고 뭐고 니는 죽게 돼 있는 놈이야. 그게 끝이에요.

다만 아버지께서 택한 자에 한해서만 예수님의 자신의 그 진리를 거기에다가 공짜로 제공하지요. 나머지 사람들한테는 그것도 비밀이에요. 아버지께서 보내지 않으면 나한테 올 수가 없다. 하고 홀연히 무대 뒤에서 사라져요. 홀연히 왔다가 홀연히 가버려요. 그걸 지금 우리 보고 하라는 거예요. 대다수의 사람들, 아니 대다수가 아니라 전부의 사람들은 존재가 뭐냐?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더 높은 고지를 향하여 나가는데.

옛날 지금 60,70대 되는 부모님들이 자식들 죽을까, 살까 공부시켰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너무 어렵게 살았기 때문에 공부시켜 놓으면 이놈의 자식들이 나중에 돈 좀 벌어 놓으니까 부모한테 나중에 우리가 몸 아플 때 우리 안 도와주겠나. 라고 그렇게 착각들 하면서 자식 공부시켜 놨더니, 서울에 유학 보내서 공부시켜서 큰 회사 임원이나, 기업 사장이나, 하여튼 우리나라 요직에 고급 공무원이 되서 돈 벌어서 그것도 맞벌이 마누라와 해서 둘이 돈 벌어서 어디다 갖다 바치느냐 하면, 자기 초등학생 아이 미국유학 보내는데 돈 다 바치는 거예요. 부모한테 돈 한 푼 아끼면서 자기 자식한테는 유학 보내는데, 옛날에는 대학공부 마치고 유학하더니 요새는 한동안 고등학생 간다더니, 중학생 가고, 요새는 유행이 뭐냐 하면, 서울에 초등학생 아이들 유학보내기. 적어도 회사의 과장 쯤 되면 아이들 전부 유학 다 보내요. 초등학생들. 중학생도 아니고 초등학생들. 가면 얼마냐? 일년에 최소 5천만 원, 최대 1억입니다. 그것 보면 목사들 미친다니까. 헌금 돈 들어가 전부 아이들 다 때려 넣고. 목사들 환장해요. 그거 보면. 뭐, 이런 게 있나. 교인들 돈 안 내고 있지. 아이들 밑에 다 넣고. 저거들 퍽퍽 거리는 거예요.

사람이, 왜 애를 유학 보내느냐 하면, 그 이유가 뭐냐? 유학 보내는 유행. 아니에요. 그걸 여러분 잘 몰라서 그래요. 아니고 사람은 보다 나은 것에 변화가 없으면 사람은 미치게 되어 있기 때문에. 뭔가 꿈틀거려야 돼요. 빠른 시간 내에 꿈틀거려야 돼요. 옛날에는 5년마다 한번씩 꿈틀거리다가 이제는 1년마다 이벤트를 벌려야 돼. 자꾸 일거리 만들고 자꾸 변화 줘서 거기에 돈 때려 넣고. 그런데 그냥 하는 게 아니고, 누가 더 나은가 경쟁적으로 더 높은 것, 더 나은 것, 조기교육, 계속해서 이것은 여자들이 더하죠. 집이 심심하니까 여자들이 더하죠. 변화 없으면 미치는 거예요. 변화를 줘야 존재의 높은 자리까지 빨리 단시간 내에 갈 수 있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에 나오는 교인들의 심리가 뭡니까?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변화를 추구해서 거기다 돈 때려 넣는 사람들, 끝났어요. 그것 보다 더 정확한 말 있으면 이야기해 보세요. 변화를 추구해서 거기에다 돈 때려 넣는 사람들. 그게 전부에요. 전부라니까. 교회, 은혜 받는 곳. 그건 초짜들. 교회 한 1년 내지 6개월 다닐 때지. 그래서 교회가 환장해서 교인들 변화한다고, 온갖 어머니, 좋은 아버지 되기. 변화를 안 하면 맛을 안 내니까.

그 변화를 잡는데 안셀무스는 이성으로 잡았고, 여기나오는 아벨라르는 의지로 잡았고, 베르나르는 신비주의로 잡아버린 거예요. 그 변화를. 정답을 이야기해 줄게. 라고 이야기하면서 하는 이야기한 게 안셀무스는 이성이었고, 아벨라르는 의지였고, 베르나르는 신비였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안목에서 십자가 속에서 얼굴을 쏙 내밀고 들여다보니까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에 의해서 발길질 당하고 추방돼야 될 놈들이에요. 예수님이 전부다 가라하는 인간들이에요. 오라, 왜 안 그러냐? 와도 못 알아먹게 돼 있어. 와도 메시야를 사람의 능력으로 이해 못하게 돼 있어요. 메시야의 영이 와야 메시야를 알지, 메시야의 영이 와야 메시야를 알게 되어 있어요. 성령이라는 게 원래 구약에 보면 이사야 20장에 보면, 메시야의 영입니다. 이새의 아들에게 하나님의 신이 떨어져야 그게 메시야를 알아보게 되어 있어요. 메시야의 영이 와야 메시야를 알아보지, 메시야의 영이 안 오면 못 알아 봐요.

메시야의 영이 오게 되면 십자가를 알게 되고 십자가를 알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바로 하나님께서 나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일한다는 걸 알아요. 그러니까 모든 나의 꿈꾸는 것은 내 마음대로고, 깨부수는 것은 하나님 마음대로고. 맨 날 꿈꾸고 깨지고, 꿈꾸고 깨지고, 꿈꾸고 깨지고. 그러면 꿈을 안 꾸면 될 거 아닙니까? 안 꿀 수 없어요. 존재인데. 존재니까 안 꿀 수가 없고 하는 족족 깨질 때 그것이 구원받은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신자에요. 그래서 모든 것이 은혜인 줄 아는 겁니다.

이러한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이르기까지 여기 안셀무스부터 해서 우리는 뭘 해야 되느냐? 도대체 존재가 어디까지 가느냐 하는 것을 탐색을 해 봐야 돼요. 결론적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존재가 어디까지 가는지 아십니까? 마지막에는 쿠자누스까지 가요. 쿠자누스가 이런 소리했습니다. 신은, 말하지 마라. 신은 언어로 유일함이다. 이게 끝이에요. 신에 대해서는 입 다물라. 신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야 된다. 왜? 모든 곳에 계시고, 모든 곳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쿠자누스에요. 그래서 쿠자누스, 뒤에 나와요. 쿠자누스는 나중에 후대 사람이거든요. 루터 약간 이전의 사람이라고.

그래 쿠자누스는 이런 이야기를 하기까지 안셀무스부터 시작해서 이성부터 해서 쿠자누스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을 정립하고 신이란 이거다 하고 해답을 내기 위해서 얼마나 나름대로의 사고논리를 총동원 안 했겠습니까? 했겠지. 그걸 우리가 공부를 해줘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걸 교인들이 산등성을 기어 올라가고 있어요. 그리고 한국교회의 모든 목사들이 한 짓거리가 그 안에 다 들어있어요. 다 쓸데없는 짓거리가 그 안에 다 들어있어요.

한국 목사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인간이 일하지 하나님은 일 하지 않는다는 거, 이게 특징 아닙니까? 하나님은 바보가 되서 전혀 일하지 않고 하늘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고 어떤 일을 하던 구원을 하던 우리가 설쳐야지, 우리가 설치지 않는다면, 절대로 하나님은 일하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이 먼저 설쳐서 되는 일은 없다. 우리가 먼저 설칠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는 형식이지, 우리가 먼저 나서서 일해야 되지, 안 그러면 우리는 가만있으면 안 된다는 주의 아닙니까? 그걸 보면 진짜 발길질 차일만 해요.

그런 경향은 로이드 존스 목사님 책에도 나와 있어요. 믿고 가만있으면 되는 게 아니다. 이런 소리가 로이드 존스 책에 여러 군데 나와 있습니다. 제가 로이드 존스의 책을 가만히 보면서 로마서 보면서, 에베소서 강해서 다 보면서, 권위라는 책부터 베드로전후서 강해를 보면서 이 분이 종잡지를 못하는구나. 안 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종잡을 수가 없어요. 이 사람을. 자기가 오늘 꼭 박영선 목사님을 보는 것 같아요. 도대체 중구난방이라. 자기도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교인들을 보면 괘씸해 미치겠고, 전혀 신앙생활 안 하는 것처럼 분통을 터뜨리고, 그리고서 그들에게 이야기하려니까 내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고 있고.

그러니까 결국 한다는 것이 쿠자누스처럼 부정적 용어죠. 하나님은 뭐는 아니고, 뭐는 아니고, 뭐는 아니고 식으로 이야기해요. 부정적 단어, 압니까? 아시죠. 부정적 단어를 가지고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삼위일체 마찬가지지요.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인간입니까? 인간만이 아니고, 그럼 하나님입니까? 하나님만은 아니고. 뭐가 아니고로 해서 대충 짜 맞춰 가라는 거지요. 대충 얼기설기 짜 맞춰 가라는 거지요.

그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면 대충 듣는 사람이 알아서 짜 맞춰 가야 돼요. 행동도 바르게 반듯해야 되고. 이런 행동은 어떻게 반듯하게 됩니까? 그건 말 못하고. 로이드 존스 목사님에게 노조해야 됩니까? 하니까 노조하면 안되지. 이렇게 하거든요. 어떤 때는 노조할 때는 해야지. 아무튼 전혀 맞지를 않아요.

이것은 바로 안셀무스부터 해서 그 당시에 수많은 소위 수도원들이, 수도원 사람들이 이것만 연구하는 사람 아닙니까? 성경과 신학만 연구하고, 철학만 연구하고, 학문만 연구하고 매진한 사람인데 그 사람들의 업적들을 우리가 그냥 못 본체 건너갈 수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 속의 모습이고 현재 인간들 사는 모습을 그대로 다 보여주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안셀무스의 이성론에 있어서 초점은 뭐냐 하면, 더 큰 것, 최고 큰 것이 신이다. 이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 들어보면 제가 간단히 이야기했습니다만 납득이 돼요. 최고 큰 것, 제일 높은 자리, 이렇게 확정지음으로 말미암아 그 말하는 순간에 우리는 뭘 느낍니까? 우리는 겸비해야 되고, 겸손해야 되고, 마음을 낮추어야 돼요. 그러니까 안셀무스의 말에 대해서 은혜롭다고 동의할 수밖에 없지요. 이게 바로 이성적인 거예요.

그러면 이성적이라는 경우에 약점이 뭐예요? 최고 자리에 신이 있기 때문에, 그러면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은 굴복하고 마음을 낮추고 결국 뭐예요? 가만히 있어라. 이것 아닙니까? 그죠?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거예요. 뭐하면 안 되고? 쫄랑대면 안 되고, 까불면 안 되고, 가만있으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점수 따는 거예요. 입 다물고 가만있으면 신의 형상이로소이다. 주의 피조물입니다. 그만 가만있어도 칭찬이 늘어지지요.

그래서 이걸 이용하게 되면, 보통 큰 교회 예배시간에 시작할 때 늘 하는 상투적인 용어가 뭐냐 하면, 예배 첫, 붕~하고 올갠 탁 치고 나면 주님은 성전 안에 계시니 그 다음에 뭡니가? 잠잠할지어다. 애들은 가라. 이 말이죠. 애들은 유아실로 보내버리고, 잠잠할지어다. 하고 분위기 꽝하고 올갠, 밑에 잡고 나가죠.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뭡니까? 동의를 하지요. 왜? 사람들의 속에 이게 들어있으니까. 하나님은 어떻다? 오야봉이다. 최고 오야봉. 우리는 뭐다? 형님. 하고 고개 팍 숙이고. 그러면 일단은 은혜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요.

그런데 잠잠하고 이러면 아무것도 안 한 게 되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이것 가지고 모자라더라 이 말이죠. 그러면 뭐가 있어야 돼요? 여기에. 뭔가 움직여야 되잖아요. 그게 뭡니까? 의지.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는 균형을 맞추어야 돼요. 무슨 균형? 이것도 버리지 말고, 이것도 버리지 말고, 양쪽 다 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설교 가만히 들어보면, 설교 내에 모순점이 발견돼요. 그래 주권, 좋지. 하나님, 높다. 아, 좋지. 그러면 우린 가만있으면 되겠네. 아아, 뒷부분, 끝부분 가서 열심히 하자! 이게 무슨 말이고? 앞에 조용하라며. 잠잠하라며. 뭘 열심히 해? 그러면 그 다음부터 교인들은 어떻게 되느냐? 자기 나름대로 교인들이 마음씨가 좋아서 목사를 해석해 주는 거예요. 마음속으로는 겸손하고 행동은 열심을 내고. 그렇게 되는데.

그 뒤에 봅시다. 92페이지.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게 이 신학생 때 보면, 오늘날 교회 움직임과 같이 가요. 같이 연관되어 갑니다.

92페이지 제일 위에 보면, 안셀무스의 보상론이 나오는데. [그럼에도 인간은 여전히 보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신 자신이 스스로 보상하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성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합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우리는 개뿔도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니까 가만있으면 되는 거지요. 그런데 가만있으면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라고 집사들이나 평신도가 목사한테 대드니까 목사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것은 이성적인 신앙이고. 신앙은 세 가지가 있어야 되는데 그게 뭐냐? 이성적인 신앙, 그것만 다가 아니라, 의지적인 것도 있어야 되고, 감정적인 것도 있어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면 교인들은 헷갈리는 게 첫째, 둘째, 셋째가 어떻게 모순 없이 공존할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에 대해서 해답에 대해서 누구 하나 이야기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구를 1/3로, 33% 이런 식으로 이런 식밖에 안 돼요. 여기 이성적인 것, 의지적인 것, 감정적인 것. 의지라 하는 것은 전도고, 감정이라 하는 것은 기도고, 이성은 뭡니까? 성경공부 아닙니까? 그죠? 지정의. 보통 이런 식으로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 세 가지 다 해야 되거든요. 세 가지 해서 균형을 맞추어야 된다는 거죠.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것이, 사실은 전도를 열심히 할 때는 이성적 감정을 이걸 잠재워야 됩니다. 그냥 이성적으로 동원해서는 전도가 안 되지요. 저, 실례합니다. 교회 나오세요. 이래 가지고 안돼요. 이래서 무슨 전도 됩니까?

그러면 의지는 어떤 게 의지인가 봅시다. 피터 아벨라드.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이라 하는 것은 의지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생활은, 하나님이 지금 자기 백성에게 원하는 윤리적 도덕적 행위는 이성적으로 보면 알아서 행하는데, 알아서 행하는 게 아니고 알아서 행하면 그냥 위선적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진짜 하고 싶다는 의지가 동해야 그게 진정한 하나님이 원하는 거룩한 행동이 나오지.

거짓말 하지 마라. 거짓말 안 하면 되지.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도둑질 하지 마라. 그럼 도둑질 안했으니까 됐지. 이것은 이러면 안 된다는 거지. 도둑질 안했다. 그러니까 나, 하나님이 착하다 할 것을 이루었다. 그러니까 복 주세요. 일반교인들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도둑질 하지 마라 하면 목사가 도둑질하지 마세요. 하면, 목사님, 그건 우리한테 해당 사항이 아닙니다. 도둑질 안합니다. 요새 바쁜데 밤중에 들고 가는 그것도 기술 있어야 되지. 도둑질 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십계명에 도둑질 하지 마라는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들은 지금 도둑질 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하고 있으니까 하지 마라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고 있으니까 너희는 백 날 내가 하지 마라해도 안 멈춰지지. 그런 뜻이에요. 간음하지 마라 말은, 지금 간음하고 있는데 내가 간음하지 말라고 해도 안 멈춰지지. 네가 그런 인간이다. 그런 뜻이에요. 아니 우리가 무슨 도둑질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십계명이 어려운 게 도둑질이라 하는 것은, 제가 예를 들게요.

잠언서에 보면 몰래 먹는 떡이 맛있지요. 왜 같은 떡인데 몰래 먹는 게 맛있을까요? 몰래 하면 ( )치는 겁니까? 몰래 먹는 떡하고 과일이 맛있다 말이지요. 왜 그래요. 왜 몰래가 들어가면 왜 그렇게 맛있는 거예요. 훔쳐 먹는 그게 맛있다는 거죠. 왜 훔치는 게 똑같은 재료로 되어 있는데 맛있는 겁니까? 그것은 우리가 날 때부터 도둑놈이기 때문에 그래요. 도둑놈은 도둑놈 심보를 발휘해줘야 그 값을 하고 있는 겁니다. 도둑놈은 도둑놈처럼 살아야 그 맛이 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맛이 나는 거예요. 같은 떡이라고 엄마가 먹지 말라 하는 그 떡을 몰래 먹어 보세요. 얼마나 맛있다고.

십계명은 우리의 실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이 가미된 겁니다. 도둑이라 하는 것은, 엉뚱한 이야기하면 잠깐 이것만 이야기하고, 십계명 해석이 중요하니까. 도둑이라는 것은 나의 것이 있을 때만 타인의 것이 눈에 띄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내 것이라는 게 성립될 때만 저것은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이라는 것이 확립된다 이 말이죠.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도둑이라는 것이 언제 성립되느냐 하면, 남의 것이라고 확인될 때 그게 성립되는 겁니다. 그러면 남의 것은 언제 확인되느냐 하면, 이것은 무조건 내 것이라고 성립될 때만 그게 반대 대상의 남의 것이 생기는 거예요. 만약에 내 것이 없다면 남의 것이라는 것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것은 때려 죽여도 남한테 빼앗기기 싫은 나의 것이라는 것이 확인될 때 그때부터 내 것과 남의 것이 구분에 의해서 구분성, 구분인식이 발생되는 겁니다.

그런데 십계명이 누구한테 준 겁니까? 이게 출애굽 해방됐던 백성들에게 준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출애굽 할 때 모든 것은 누구 것이에요? 자기 게 없어요.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애굽에 살던 사람이라서 반드시 뭘 갖고 있다? 나의 것, 내 것이라는 것이 안에 들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도둑질 안 해야 되는 약속의 땅의 백성으로서 애굽에 살던 사람, 내 것이 성립되어 있는 사람은 이것은 반드시 충돌하게 되어 있어요.

더 쉽게 이야기하면, 내 것이라는 게 없으면, 만약에 내 것이라는 것이 성립 안 되는 것 같으면, 쉽게 얘기해서 지갑이 딱 떨어져 있다. 보니까 지갑이 떨어져 있으니까 지금 내 영역 안에 있잖아요. 내 영역 안에 있더라도 이것은 내 것이 아니야. 그렇다면 그건 주인 찾아 주는 거지요.

출애굽할 때에 너희들이 종 되었던 고아와 과부 되었던 것을 건져내었잖아요. 그러면 현재 있는 것이 누구 겁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있는 겁니다. 땅도 그렇고 나의 생긴 것도 전부다 하나님의 것, 우리는 죽어야 마땅한, 뒤따라오는 애굽 군사들처럼 물에 빠져야 마땅한데, 세상에 물에서 기어 나온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물에 빠져 죽었겠지. 물에서 누가 살아요.

그런데 죽어야 될 인간이 살았잖아요. 그렇다면 내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고 누구 것입니까? 하나님 거라고 하나님께 도로 반납을 해야 될 입장이잖아요. 현재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도 하나님 것이라고 반납해 버린다면, 도둑이 성립하겠습니까? 성립 안 하겠습니까? 성립할 수가 없지요. 지 것이 없는데 무슨 남의 것이 생기겠어요. 자기 것도 없는데. 그냥 나한테 주어진 것, 다 내 것도 아니고 주님의 은혜거든요.

그러니까 고린도전서에 보면, “너를 값 주고 샀나니 너는 네 것이 아니고 내 것이라” 되어 있고. 그러한 인식에서 율법에서 벗어난 걸 가지고 성령이라고 합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네가 구원받은 것이 성령의 행함이냐 율법의 행함이냐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네가 뭘 해서 구원받은 그 뜻이 아니고 너희 현재 모으게 된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너를 덜렁 구원 받은 것을 네가 아느냐 이 말입니다. 아까 처음에 존재와 십자가 이야기할 때 했잖아요.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 은혜인 것을 알려면, 사실은 진짜 제대로 알면, 사실은 천국 가게 되면 그걸 아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한테 뭐가 없어야 됩니까? 절망이라는 게 없어야 되고, 왜? 자기 것이 없는데 무슨 절망이 있어요. 위기라는 게 없어야 되는데, 그 위기와 절망이 없는 곳이 어디냐 하면, 하늘나라에요, 천국이에요.

그런데 왜 우리가 아직 있냐 이 말입니다. 우리가. 이럴 수 있습니까? 하나님. 왜 외치느냐 말이에요. 이것은 아직도 우리가 구원된 자로서 이 세상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그 머물러 있는 자로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매일 같이 절망과 위기로서 우리를 인도하신다 말이에요. 그러면서 나중에 모든 것이 네가 나된 것은 나의 은혜라고 이야기해요.

아벨라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동을 하는데 인간의 이성이 아니고 의지로만 돼야 된다. 따라서 이것은, 92페이지 중간에 보면, [아벨라드는 그리스도가 마귀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 오셨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반대했으며, 또한 인간이 하나님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 하나님이 오셨다는 견해도 거절하였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님의 사랑을 문자적으로, 그리고 사실적으로 가르치며 한 모범을 보이기 위함이라는 이론을 전개했다.]

아, 이것 뭐 좀 다르지요. 뭡니까? 아벨라드가 속죄, 그러니까 값을 치러서 보상했다는 보상설을 거부하고 그 자리에다가 뭐를 집어넣느냐 하면, 예수님의 자발적인 의지적인 사랑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모범적이었다.

[안셀무스가 법률적이고 계량적인 방식의 보상논리에 입각해 있다면 아벨라드는 용서와 화해를 사랑의 행위라는 인격적 사건으로 보았다. 이로써 그는 의지의 자율성과 인격주의를 특성으로 하는 근세의 중요한 씨앗으로 간주되기까지 한다.]

자, 여러분 이 이야기 들으니까 옛날이야기에 멈추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계통에서 뭔가 본 훼퍼 계통의 신학에서 상당히 이것이 많이 대두되지요. 뭐냐 하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시키신 분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점에서 모범이 되었는가?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 아는 것처럼 달랑 구원받는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마음껏 자기의 의지를 발휘해서 사랑을 베풀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천국을 이루는 그 일을 하셨다. 따라서 그 의지를 본받아서 예수님처럼 살아갈 때 이것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라고 현재 자유주의 계통에서 이야기한다면, 제가 처음에 이야기한 존재의 산을 오르는 십자가 그 사이에서 뭐가 문제 됩니까?

자, 그런 이론이 십자가와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일단 안 맞지요. 왜냐하면 십자가는 십자가고, 십자가는 오지 마. 천당 오지마라 하고, 이쪽에는 뭐냐? 의지나 감정이나 이성을 통해서 신에게 나갈 수 있다는 용인데, 그중에 하나가 방금 이야기한 아벨라드의 의지주의입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입니까? 들어보니 좋은 소리네요. 예수님처럼 사랑을 베풀고 우리도 사랑을 베풀자. 뭐가 문젠데요?

이겁니다. 예수님이 모범된다는 말은, 결국은 예수님을 뭐에 이용하느냐 하면, 내가 진정 나는 어떠한 존재냐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이용물이 되지요. 하나의 모범 케이스가 될 뿐이죠. 결국 최종적으로 남는 관심사는 누구에요? 결국은 나에요. 나. 나란 말이죠. 쉽게 말해서 예수님이 산인데 어떤 산이다? 아벨라드 같은 경우에 예수님이 산이라면 존재의 산인데 무슨 산입니까? 사랑하는 산. 사랑의 산이에요.

그럼 나는 뭡니까? 나는 아침에는 사랑했는데 오후에는 사랑 안하고, 지난주는 마누라하고 놀러 갔는데 이번 주는 마누라하고 싸우고. 그러니까 사랑의 의미에서도 우리는 흔들립니까, 안 흔들립니까? 하루에 열두 번도 더 흔들리지요. 예뻤다가, 안 예뻤다가 자식 때려 팼다가, 칭찬했다가. 흔들리지요. 그러니까 이성만 흔들리는 게 아닙니다. 뭐도 흔들린다? 의지도 흔들리고, 또 뭐도 흔들리고? 감정도 흔들리고. 그걸 유지를 바로 잡아주는 모범은 누구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큰 산이다 이 말이죠. 따라서 예수님을 본받아서 우리도 같이 뭐가 된다? 하나의 큰 산에 소속되어 있는 안심을 할 수 있는 그러한 나는 주님께 소속된 구원받은 자다. 이러한 술책과 방식에 해당된다. 이게 뭡니까? 이게. 의지주의 나빠요.

그러니까 일반인들이 흔히 윤리 도덕적인 사람들이 교회 왔을 때 목사님, 설교는 맞는데 내가 보기에는 너무 합리적이고 너무 이성적입니다. 논리적으로는 맞는데 틀렸다는 말은 아닌데 너무 사랑이 없는 것 같아요. 라고 할 때에 하하하, 저 사람 또 아벨라드 후계자로군. 이렇게 파악을 하고 있어야 돼요. 그때 이렇게 해야 됩니다. 적당히 균형 맞춰. 이렇게 하면 안 되고. 당신이 십자가를 아냐 말이죠. 사랑한다고 넣어 주냐 이 말입니다. 사랑한다고 천국에 넣어 주냐 말이죠.

또 어떤 목사는 여러분 이성적으로 십자가를 알아야 되고, 그걸 멈추면 안 되고 균형을 맞춘 중에서 의지적으로 사랑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이성적으로 십자가를 알고 의지적으로 사랑 맞추면 구원해 줍니까?

세 번째 봅시다. 신비주의. 아벨라드의 속죄론, 아벨라드가 이해하는 십자가를 잘 알았지요. 십자가는 뭐라고요? 보상해 주는 게 아니고 계산해서 우리한테 회계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모범설. 사랑이 이것이다. 사랑이 여기 있으니 사랑이라는 걸 봤으니까 너도 본받으라. 하는 모범적으로 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듣던 여러 가지 성경 해석들이 이미 옛날부터 이렇게 눅눅히 나와 있는 거예요. 이걸 다 공부해주셔야 합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신비주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그냥 베르나르라 하죠. [안셀무스가 신 존재의 개념적 객관성에 입각한 확실성을 주장한 것과 달리 아벨라드가 신 인식의 주관성을 강조했다고 할 때 이는 지성과 의지 사이의 대조로 읽힐 수 있다. 그런데 아벨라드처럼 주관성을 강조하면서도 의지보다 감정에 더 초점을 맞춤으로써 신비주의를 표방하는 또 다른 입장이 나타났으니 바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였다.]

신비주의에서 여러분들이 하나 꼭 알아두셔야 할 것은, 신비주의는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어어, 야, 목사님, 지금까지 십자가 반대편은 존재요, 존재의 반대편은 십자가라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신비주의에 오니까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제가 말한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이 말은, 개별성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러니까 개별성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면 신은 존재자가 되잖아요. 신비주의가 되면 존재가 아니고 존재성, 다른 말로 하면, 신성,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신성. 신다움. 거기에 관심이 있어요. 신다움.

하나님이 만약에 한 분이 계셔 버리면 우리는 그 분만 상대하면 돼요. 그러면 신성과 신에 대해서 여러분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만약에 어르신이 위에 계시면, 하나님이 계셔 버리면 여기 있는 장소 말고 다른 장소에는 하나님이 안 계시잖아요. 하나님이 없는 곳이 생기잖아요. 맞지요. 하나님이 여기 계셔 버리면 하나님이 없는 곳이 계시잖아요. 그런데 신성이 돼버리면 어디에도 다 계시잖아요.

우리가 어떤 하나님을 한 인격자로 간주해버리면 하나의 개인으로 간주해버리면 개인만을 상대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하나의 개인으로 생각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요. 하나의 개인으로 상대할 수 있느냐? 예수님 같으면 되지요. 예수님이라고 이름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름이 없잖아요. 하나님은 이름이 없다고. 누굴 꼭 집어서 철수야! 하면, 예. 영희야! 하면, 예. 이름을 부르면 누가 특정 인물이 일어나듯이 예수님 하면, 예수님 일어서는데, 하나님 하면 특정 하나님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 합리주의고, 의지주의 아닙니까?

그런데 신비주의는 그게 아니고 뭐예요? 신에 대한 것이 아니고 신성에 관한 거지요. 어떻게 나쁘게 생각하면 두루 뭉실. 그렇지만 신성의 장점은 뭐냐 하면, 가만있어도 신과 교류가 된다는 점이 좋지요. 한 분이 아니고. 자자, 기도합시다. 꿇어 앉아! 꿇어 앉아! 손 모으고. 기도합시다. 라고 특별히 어떤 의식이나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삼위일체 하나님이여, 누구 이름을 불러 가지고 할 때 되는 게 아니고, 가만있어도 뭐가 됩니까? 마치 여름에 장맛비 오듯이 추적추적 온 어깨에 온 몸을 적시지요. 지금 이 더위에 서경수 목사님 온 몸을 적시듯이. 푹 젖는 거지요. 이게 궁극적인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 누구의 의견이다? 베르나르의 의견이다. 그 거룩성과 그 신의 충만성에 푹 젖어 들어가 보는 거예요.

쉽게 이야기 해 봅시다. 신을 만나는 게 아니고 신 속에 들어가 버리는 거예요. 신을 만나는 게 아니고, 만난다는 것은 다방에서 만나는 거죠. 신을 만난다 하면 신을 안 만나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신을 안 만나는 경우를 없애 버리자 이 말입니다. 신을 안 만나는 경우를 없애 버리고 늘 신과 함께 있는 이것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존재성이고, 그 존재성은 신의 신성에 합류하는데 이것이 바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요구하는 최종 최고 절정의 수준을 말한다. 라고 하는 것이 베르나르의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가 내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처럼 그때는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으리라”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아버지와 내가 하나 된 것처럼 그때는 너희와 내가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된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둘이 아니다 이 말이죠. 둘이 아니란 말은 한 덩어리란 말이고, 한 몸이란 말이고, 결국 쉽게 말해서 하나다 이 말입니다. 하나, 그러면 끝난 이야기 아니냔 말이죠. 말 되죠. 말 된다고.

말 되는데 다시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그렇다, 제가 분명히 존재하고 십자가하고 서로 맞은편이라고 했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성경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데 뭐가 문제에요? 특히 여기 94페이지 봅시다.

[이런 참여는, 그 다음 중요합니다. 율법주의적 복종을 요구하는 도덕적 명령이 아니라는 점을 주목하자.]

이 말입니다. 법은 뭐예요? 법은 합리적입니다. 법을 모르는 할머니들은 법을 못 지켜요. 똑똑한 사람만 법을 알고 지키고, 안 지키고가 있습니다. 법이 있다는 말은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간주한다는 말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법에서부터 해방시키고 했다는 말은 법 없어도 구원된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결국 합일, 일체, 그 다음에 연합, 오늘 이상봉 목사님, 졸지를 않는데 희한하네. 그런 거잖아요.

무슨 말이냐 하면, 구원이 뭐라고요? 뭐로부터 구원이라고요? 율법에서 구원 아닙니까? 율법에서 구원된다는 말은 베르나르 식으로 해석하면, 율법으로 구원된다는 말은 법 안 지켜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그런 뜻이 아니고, 가만있어도 어디 안에 있다? 신성 안에 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라는 말을 할 수 있어야 그게 제대로 된 율법에서의 구원이다. 이 말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이것은 배웠던 못 배웠던, 창녀가 되었던 세리가 되었던 상관없어요. 율법의 모든 인간된 규정은 치우고 신성 속에 있으면 모두 다 신이 된다. 그래서 이런 논리에 의하면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들이 하나님 말씀만 듣고도 신이라 하거늘 내가 아버지와 하나라 해서 하나님이라 하는데 뭐가 나쁜 게 있느냐 하는 요한복음의 8장 이야기를 써 먹을 수가 있겠지요. 뭔가 문제인데? 되게 은혜로운데. 율법에서 구원됐다고 했는데 복음적 아닙니까?

그리고 여기 보면 도덕주의. 도덕주의라는 것도 이미 사랑이라는 굴레가 있지요. 그러면 뭡니까? 감정주의는 뭡니까? 신비주의는 뭐예요? 그딴 것 사랑 행함도 벗어나 버리란 말이죠. 사랑 행함이 주어져 버리면, 사랑을 행하자가 뭐가 돼요? 법이 돼버려서 사랑 행할 때와 사랑 안 할 때가 또 구분 되잖아요. 그러면 사랑 안한 놈은 뭐가 됩니까? 신성을 맛도 못 보잖아요. 구원 되지도 못하잖아요. 그죠? 그러면 그런 식은 하나님이 아니란 말이죠. 하나님은 사랑한 놈이나, 안 한 놈이나, 신을 안 놈이나, 모르는 놈이나 전부다 신성은 동일한 신성이 될 때 그것이 인간이 도달된 궁극적인 차원이다 이 말입니다. 자기의 주관조차 넘어서는, 자기의 주관을 넘어서요.

자, 이게 뭐가 문제입니까? 94페이지 위에서 네 번째. [그런 신비주의적 경험은 베르나르에 의하면 숙고와 참여와 초월의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마지막에 초월이죠. 넘어서 버리는 것.

[초월에서는 자기를 잃지 않으면서 자기를 넘어선다.] 야, 어렵다 이거. 완전히 선불교 같지요. 자기를 잃지 않고 자기를 넘어선다.

[무릇 모든 종교가 자기를 넘어서기를 가르칠 때, 신비주의는 이미 종교의 핵심이다.] 자기를 부인하라. 뭔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자기를 잊어버리라.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아벨라드나 베르나르나 안셀무스를 보면, 안셀무스를 보면 안셀무스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베르나르 보면 베르나르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벨라드면 아벨라드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셋 다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결국 셋 다 틀렸지요.

신비주의는 뭐가 문제에요? 누가 한번 이야기해 보세요. 어떤 점이 문제입니까?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이런 소리하는 사람들 가끔 있는데 이런 소리하는 사람에게 그때 우리가 복음을 이야기해 줄 때 뭐라고 이야기해 줘야 합니까?

정답은 이거에요. 네가 죄를 아느냐?

신비주의의 약점은, 치명적인 점은 십자가가 최종점이 아니라 십자가까지 넘어선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진다는 쓸데없는 짓을 한 거예요. 낚시대로 신비로운 신성으로 건져내면 될 뿐이지, 십자가 죽는 그러한 쓸데없는 과정을 겪은 거예요.

이 신비주의자들이 주로 내세우는 그러한 그들의 근거가 뭐냐 하면, 선지자들이 성신 받을 때 그들이 뭐라고 받았습니까? 신비주의 주장에 의하면 성신은 그냥 온 거예요. 맞는 말 아닙니까? 아니, 사울이라는 염소 키우는 그런 목자도 어느 지역에 가니까 자동적으로 뭘 했습니까? 이상한 소리하면서 예언을 해서 소문이 돌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하나다. 하는 소리를 들었잖아요. 그러니까 신비주의는 뭐다? 신비주의는 뭐가 있기 전에, 신비주의 구속사가 있기 전에, 신비주의는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도, 이미 처음부터 성신께서는 천지창조 할 때 어두움을 감싸고, 암탉이 감싸고, 이미 신성, 아까 제가 강조했잖아요. 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신 위에 뭐가 있다? 신성이 있다 이 말이죠.

신은 우리가 아는 범위까지고, 여호와나 예수님은 우리가 아는 범위고, 그것 까지 너, 맞아? 넘어설 때 거기에 누가 기다린다? 신성이 기다린다. 신이 아니고 신성. 거기까지 초월해야 돼요. 거기까지 들어가야 돼요. 이러한 이런 주장 많~습니다. 요새 뜹니다. 불교하고 트랜스젠더는 아니고, 트랜스... 종교간 교통도 이런 식 아닙니까? 신이라 하는 것은, 여호와는 하급신이에요. 상급신은 신이 있는 게 아니고 신성만 있어요. 그것은 새로 인간이 만든 게 아니고 창조 전부터 이미 있었던 신성이 먹구름처럼 내려앉은 거예요.

그들은 뭐를 모르느냐? 죄를 몰라요. 그들에게 뭐가 없습니까? 죄가 뭔지를 몰라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헛되이 하는 거예요. 이게 헬라 철학적인데 헬라인들은 십자가한테 미련한 거예요. 유대인들은 거리끼는 것이지만, 십자가의 지혜가 헬라인들은 이런 신성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쓸데없는 짓을 한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뭐만 전합니까? 십자가만 전한다 말이에요. 결국 그들은 뭘 몰랐어요? 죄를 누락시킵니다. 죄라는 것, 죄의 무서움, 그러니까 지옥의 무서움도 몰라요. 지옥 없는 거지요. 그냥 즐기는 거지요. 지옥 없이 자기의 초월 자체를 즐기는 거예요.

이제 대충 정리하고 마치고자 합니다. 강의를 한번 정리해 봅시다. 꼭 몇 명 빠진 것 같네. 한번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이야기했던 것은 뭐냐 하면, 배척하는 하나님, 인간의 구원을 배척하는. 왜 인간을 배척해야 하느냐?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구원 받으려고 환장한 놈들이에요. 구원 안 될 까봐 걱정이 늘어진 사람들이에요. 그게 인간이에요. 그 소원을 그들이 부르짖고, 달음박질하고. 그들은 그런 부르짖고 달음박질 하면서 뭘 모릅니까? 죄를 모르는 상태에서 부르짖고 달음박질해요. 그러니까 그들은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차단한 것을 까마득히 몰라요. 그런 실제와 현실을 전혀 그들은 모릅니다. 다만 그들이 아는 현실은 뭐냐? 내가 구원받고 싶어 환장하겠다, 죽어서 천당 갈란다. 하는 자신의 욕구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돈을 천만 원 번들, 일억을 벌든 사람은 허전하기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전도서에 의하면 인간은 최후의 존재가 되지 못한 이상은 아무리 돈 벌어도 돈 번 만큼 전도서에 의하면 마음이 괴롭게 되어 있어요. 네가 돈을 많이 벌었느냐? 그만큼 괴롭다. 차라리 노동자가 잠을 달게 자느니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미 이것은 확정적입니다. 인간은 지가 돈을 벌고 아무리 출세해도 남 부러워하는 박사학위 따도 소용없어요. 인간은 헛되고 헛된 존재입니다. 그리고 헛되고 헛된 존재라는 사실을 안다 할지라도 헛됨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이에요. 왜냐? 죄 값은 치러야 되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뭐가 안 되서 안달입니까? 뭐가 안 되서 괴로운 거예요? 복음을 못 전해서 안달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욕망이 안 이루어져서 안달입니까? 한번 따져보세요.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복음 전하는 것은 돈이 안 들어와서 안달이에요? .... 안달입니까? 정말 복음을 아는 사람 같으면 복음을 전할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해야 되는데, 복음을 잘 전하고, 아니, 복음 안 전해도 괜찮아요. 지금 예수님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같이 합류하여 만족하면 될 텐데 뭔가 만족을 못해요.

그건 나름대로 꿍꿍이를 따로 챙기고 있어요. 그 꿍꿍이를 챙기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나는 이와 같은 번듯한 사람이 돼야 돼. 나는 이와 같은 가치 있는 사람이 돼야 현재 내 수준에 맞는다는 거예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지 수준은 죽는 게 수준입니다. 지금. 지금 죽고 지옥 가는 게 내 수준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기 수준도 모르고 이 정도 돼야 만족하겠다, 이 정도 안 되니까 짜증나는 거예요. 삶이 자체가 짜증나는 거예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가 하던 안 하던 간에 주님께서 일을 잘 처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맹세대로 세상 일이 주께서 와서 주로 말미암아 잘 돌아가고 있어요. 같이 동조하거나 찬송할 줄 모르고, 뭔가 거기서 입이 툭 튀어나와서 그렇게 하루 살면서 불만이 많고, 운동해도 살이 안 빠져서 문제고, 이렇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적어도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이 정도 인간은 돼야 만족하겠다. 그거 돼 보세요. 만족하는지, 만족 안 하지. 헛되고 헛된 거지.

바로 그런 인간을 주께서 차버리고 절망케 하시고, 절망한 그 자리에 보니까 예상치도 않은 것이 하나님께서 준비한 것이 있어요. 거기 보니까 전부다 우리에게 은혜에요. 세상에 이 모든 것이 은혜인 줄 모르고 당연한 것처럼 여겼던 이 교만.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한테는 모든 것을 절망케 하면서 사실은 당연히 절망해야 되기 때문에 절망케 하는 거지, 일부러 절망케 하지는 않습니다만 마땅히 우리가 쓸데없는 것을 쥐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결국은 영생을 누리게 하는 그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 줬습니다.

따라서 이 기쁜 소식을 우리가 전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이 주신 축복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세상이 어리석은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참으로 어리석었습니다. 내가 위대해야 되고, 내가 잘나야 되고, 남한테 지면 안 되고, 멋있어야 되고, 훌륭해야 되고, 신앙인다워야 되고, 마음씨도 착해야 되고, 착한 일만 해야 되고, 전도도 잘해야 되고, 온갖 것 좋은 건 다 집어넣는 우리를 하지만 이런 우리를 차버리시고 멀리하시고 십자가만 열심히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로 이끈다는 것을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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