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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지역강의 > 부산강의
2006-02-28 16:04:32 조회 : 4743         
Re..20040503-3 토마스 아퀴나스, 어거스틴 이름 : 한윤범(IP:)

20040503-3  부산강의-토마스 아퀴나스, 어거스틴
(강의:이근호 목사)


뭐부터 하느냐 하면, 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신 개념과 후대 중세 신학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론을 비교해보자 이 말이죠. 왜 신론을 비교해야 되느냐 하면, 아리토텔레스는 철학으로서 신을 이야기한 사람이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신을 배워놓고 나름대로 기독교화 시켰다고 우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둘을 비교해야 되는데 토마스 아퀴나스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제는 진리 문제인데 진리에 대해서 진리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는 그걸 이야기하는데 토마스 아퀴나스가 진리에 대해서 신경을 쓰느냐 하면, 하나님의 모든 신성이라 하는 것은 그 존재 속에 흔적이라도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우리가 모른다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 없다 하는 이야기와 동일하게 그렇게 되는 겁니다. 반대로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 있다 하는 이 말은 맞닥뜨리는 모든 현상과 모든 사물에 대해서 다 알고 있어야 된다는 이야기죠. 그런데 그 점에 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하고 생각이 같은 겁니다.

이 철학을 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전체를 자기가 아는 세계 속에 다 집어넣는 것을 철학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이만큼 있다면, 세상의 모든 변화와 모든 사물이 전부 다 자기가 아는 이 세계에 들어와야 돼요. 왜 집어넣어야 되는가? 집어넣어야지만 사람이 불안하지 않습니다. 자신만만하고.

소크라테스가 이야기 했듯이 아는 것이 곧 안다는 것이 무지는 죄를 짓고, 안다는 것이 선이기 때문에 사람이 죄를 짓는 이유는 무지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왔다. 그러면 악에서 선으로 되려면 방법은 간단하지요. 많이 알면 되잖아요.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통용이 됩니다. 많이 배운 사람이 죄를 적게 짓고, 못 배운 사람이 죄를 많이 짓죠. 교도소에 가면 재소자의 학력이 사회 학력보다 평균적 수준이 떨어지죠.

그런데 이것이 비트켄슈타인 시절, 오늘날 현대에 와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세상이라는 것은 게임의 규칙에 의해서 진행되는데 규칙에 대해서 모르게 되면 그 사람은 이 사회의 하나의 바이러스 같은 존재가 되지요. 매트릭스라는 영화를 보면, 레오라는 주인공이 나오는데 그 레오는 기계 세계에서는 하나의 버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찾아내서 없애버려야 되죠. 그러나 레오는 인간세계에 가서는 메시아죠. 문제를 해결해 주는 메시아란 말이죠. 기계와 인간의 싸움에서 한쪽은 메시아가 되고, 한쪽은 제거해야 될 인물로 간주하게 되지요.

처음에 유대교에 열심 냈던 사울은, 사울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와 예수 믿는 사람은 그 사회에 뭐와 같은 존재입니까?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이지요. 이것은 그걸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본 겁니다. 빌립보서 3장에 보면 사울이 바울 되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됐습니까? 이제는 반대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상함에 의해서 모든 것을 버려야 되는, 포기해야 된다 말이에요. 그래서 이제는 누구 쪽에서 사도 바울이 바이러스 같은 존재냐? 옛날에 자기가 적을 두었던 유대교 입장에선 사도 바울이 죽어야 될 사람이죠. 그래서 죽이려고 그렇게 애를 썼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이 왜 일어나느냐 하면, 성경에서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일어난 사실이라 이렇게 보거든요. 그 말이 오늘날 우리한테 얼마나 먹혀 들어가느냐 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데요. 자,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떻다고요? 서로 대립되고 있는 양쪽 세계에서 한쪽은 적이 되고 한쪽은 영웅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경우에만? 성령 받았을 경우에. 스데반 집사가 그랬고, 사도 바울이 그랬으니까요.

특히 예수님 같은 경우에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심문 받을 때에 예수님하고 본디오 빌라도하고 마지막 대화가 뭐였습니까? 진리에 관한 문제였어요. 그 대목에서 신학자들은 해석을 못하고 있는데요. 왜 못하고 있느냐 하면,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답변을 해주면 우리도 속 시원할 텐데 답변을 안 해 줘요. 답답한 것은 본디오 빌라도뿐만 아니라 그 성경책을 보는 우리도 답답한 거예요. 진리가 무엇이냐? 야, 나온다, 나온다, 나온다. 그런데 아무 소리 안 해요. 진리가 무엇이냐 본디오 빌라도가 물었으면 진리가 이런 것, 이런 것이라고 이야기 해 줄만도 한데 진리가 무엇인지 이야기 안했단 말이에요.

그 이유가 뭐냐? 이미 진리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어요. 왜냐하면 본디오 빌라도가 통치자입니다. 철학자가 아니에요. 통치자의 입장에서 진리라 하는 것은 이 나라가 자기의 통치 하에 있는 그 나라의 존재가 진리가 되는 겁니다. 이미 앞서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미 본디오 빌라도 입에서 뭐라 하냐면, ‘나는 당신을 놓아줄 권세도 있고, 죽일 권세도 있다.’라고 자기의 진리체제를 소개한 바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하나님이 허락지 아니하면 나를 붙잡아 둘 수가 없다 이렇게 나왔다 이 말이죠. 이미 이야기가 주고 오고 간 게 있잖아요. 거기에서 예수님이 진리라고 이야기했을 때는 이미 그 전에 진리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 쪽에서 진리라고 한 것은 본디오 빌라도가 알고 있는 진리체제가 확고한 입장에서는 그 진리에 대해서는 들어올 여지가 없습니다. 나라가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그렇죠.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야기해 봅시다. 아는 게 진리다.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도 거기에 동의했습니다. 알아야 된다. 그게 과연 진리겠습니까? 뭔가 여기에 보이지 않는 성과 속의 협잡, 음모 같은 것이 존재하고 있지요. 세상에서 많은 성스러움, 속된 것, 그게 그거고 그거 그거지, 아무것도 아니지.

제가 어느 글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인간은 죄 지을 수 없다.’라는 글을 썼어요. 왜 죄 지을 수 없는가 하면, 인간은 죄를 모르기 때문에 죄 지을 수 없어요. 인간이 이게 죄라고 생각하는 그 때는 그게 죄 전부가 아닙니다. 인간은 죄 지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죄 속에 있기 때문에 자기가 죄 짓는다고 하는 것도 죄 짓는다고 생각하는 그 죄는 죄가 아니죠. 죄 속에서 만들어낸 죄관이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은 죄 지을 수 없고 죄 속에 그냥 있는 거예요. 인간은 의를 행할 수 없다 하는 말도 같은 말로 인간은 죄 지을 수 없다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이래나 저래나 죄 속에 있기는 마찬가지다 이 말이죠.

토마스 아퀴나스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그 점을 파악을 해야 되는 데 파악할 재주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라는 것은 바로 아는 것이 많으면 그것이 보다 더 진리가 된다는 그것을 토마스 아퀴나스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아리스토텔레스와 협잡을 해도 그것은 이쪽 인간세계에서나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점을 염두에 두시고. 거기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진리가 어디서 나오는가? 진리라는 것은 어디서 출발하느냐? 존재에서 나옵니다. 존재성, 존재함에서 출발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자고, 성경을 알고 하나님 삼위일체를 이야기하고, 어거스틴 사상을 따라서 죄와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복음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을 이야기했는데 어떻게 그것이 진리가 안 닐 수 있느냐?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함은 교회의 존재함이에요. 교회라 하는 것은 사람을 상대해서 사람의 존재함이죠. 그러니까 성경을 취급한다는 것은 바로 존재함에서 절대적인 진리 추적   여기에 보태기 위해서 성경들이 동원되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은 뭐가 되겠습니까? 성경은 지식이 되지요. 또 신학이 되겠지요. 여러분들이 신학 토론하고 생각할 때는 신학을 무엇을 위한 신학인가를 먼저 파악을 하시고 책을 보셔야 돼요. 무엇을 위한 신학이냐? 교회의 존재함을 위해서 다시 말해서 사람들의 존재함을 인정하기 위해서 동원된 신학이란 말입니다.

오다가 중앙일보를 봤는데 전면광고에 박옥수 집회한다고 실렸는데 제가 꼼꼼히 다 읽어봤습니다. 박옥수의 기쁜 소식선교회에서 광고하는 문안 가운데 이런 것이 있어요. 대도시 교회부터 밭두렁 곁에 있는 저 시골교회까지 다 썩었다. 본적이 있습니까? 벌이가 시원찮아서 신문도 안 봐요? 다 썩었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그걸 이야기해요. 여러 가지 박옥수 이분은 평생을 오직 복음 전파를 위해서 했고, 심지어 선교사가 아프리카 선교하는데 50만 달러만 제공하면 여기에 당신의 모든 교회와 신앙을 허락하겠다고 했는데 그걸 단호히 거절했다는 것도 거기에 실려 있어요.

박옥수의 책들을 보고, 박옥수의 설교를 듣고 제가 느낀 점은 뭐냐 하면, 이 존재함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고 이것을 건드리는 거예요. 마치 여기 부산의 다락방운동, 류광수와 똑같은 거예요. 이것은 안식교도 마찬가지고, 여호와증인도 마찬가지고, 소위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돈이 신학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진리에 이를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누구한테 호응을 받을 수 있느냐 하면, 나는 건드리지 말고, 더러운 한국교회나 건드려다오. 하는 이런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겠지요. 나는 건드리지 말고, 썩었으니까 썩어빠진 교회를 개혁해서 우리 아마추어들이 안심 놓고 어느 교회 가도록 안심 놓고 구원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신학을 원하는 거예요.

바로 이것을 그러한 인간들에게 존재에서 나오는 근본적인 사고방식이 그 당시 천주교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이미 앞으로 되어질 모든 교회들을 개신교가 됐든, 이단이 됐든, 삼단이 됐든 교회라고 있는 이상은 전체를 이 천주교가 담는 답습을 그대로 답습할 수밖에 없어요. 그걸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거예요.

왜 지나간 천주교 신학을 우리가 공부해야 되느냐 하면, 인간들이 아무리 새로운 신학을 해도 결국은 그것을 누가 미리 답습을 했습니까? 천주교에서 답습을 했고, 또 천주교에서 하는 모든 것은 유대교에서 2000년 동안 이미 다 한 겁니다. 에스라, 예레미야, 느헤미야에서 전부 다 실시해 본 겁니다. 실시해 놓고, 왜 괜찮은 성전, 그러니까 성전이 부서졌다? 그러면 괜찮은 성전을 지으면 되잖아요. 뭐가 문젠데? 왜 괜찮은 성전이 아니고 왜 예수님이 오셔야 되는가? 왜 자꾸 예수님뿐이냐 말이죠. 괜찮은 교회, 괜찮은 종교, 이런 식으로 개선되고 개혁되는 것이 아니고 너도 아니고 저도 아니고 왜 예수님뿐이냔 말이죠.

그것은 인간을 개선하고 인간을 보다 나은 삶을 위하여 그렇게 한 게 아니고 이 세상 본질 자체가 이미 종말이에요. 그림으로 그리면 십자가를 정점으로 해서 아담으로부터 재림 때까지 전부다 십자가를 겨냥하고 있어요. 아담에서부터 십자가까지 사람들이 어떤 낙관적인 희망을 가지고 이렇게 하지만 십자가가, 제가 동그라미 쳤지만 사실은 십자가 내리막길이었어요. 이만큼 올라갔다가 후퇴해 버렸어요.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서 14대 올라가서 14대 꼴아 박고, 14대 꼴아 박고, 이건 절망이에요. 14대, 14대, 14대. 완전히 이건 없는데서 새로 생긴 겁니다. 없는데서 모든 것이 원점 정도가 아니라 모든 것이 새로 생겨요. 예수님께서 태어나고. 여기서 이렇게 나아가는 아담의 정점으로 하는 이 모든 시도를 세상에 예수님이 십자가 졌음에도 요걸 고대로 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바라보는 게 아니고 십자가를 이제는 안녕이에요. 안녕. 안녕이고 이 식대로 그대로 날아가는 거예요.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뭡니까? 온갖 시험을 다 해봤는데 결국 문제성이 어디 있느냐 하면, 인간 자체가 문제인 거예요. 인간이 잘못했단 말이고, 인간 속에 이미 종말이 들어 있는 거예요. 죽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죽기 위해서 삶이 있단 말이에요. 죽음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거예요. 우리에게 목숨을 연장시켜 준 겁니다. 죽음이 뭔가 보여주기 위해서.

십자가는 ‘이 모든 것의 인간들의 노고가 결국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정도가 아니라 이르는 것 자체가 원래부터 계산했던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정면 도전했던 악마적인 액션들이다. 악마적인 행동들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십자가가 등장한 거잖아요. 그러면 십자가를 알고부터는 앞으로 어떻게 뭘 할 것이냐? 이걸 공격하는 일을 하면 돼요. 이걸 공격해도 십자가, 다 공격하고 난 뒤에도 역시 십자가. 사도 바울이 그렇게 살아왔었고, 그걸 우리에게 당부했습니다. 모든 것을 공격하는 거예요.

목사님, 예수 믿고, 예수 믿었습니다. 복음 받았습니다. 어떻게 살까요? 자기 자신을 공격하세요. 너무나 간단한 문제에요. 자기 속에 종말이 있다는 것을 만약에 느끼지 못하면 그 사람은 존재를 긍정하게 될 것이고, 존재를 긍정하게 되면 반드시 천주교가 했던 짓, 유대교가 한 짓을 오늘도 되풀이합니다. 필연적으로 반드시 하게 돼있어요.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누구한테 가느냐? 역시 토마스 아퀴나스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이지만 그런 사람들에 혹 빠지겠지요. 왜냐하면 가능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능성. 지금 어거스틴 하기 이전에 먼저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야기부터 나왔는데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야기를 좀더 깊이 있게 봐야 되겠지요. 그건 나중에 합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능성은 어디서부터 해야 되느냐 하면, 아까 제가 존재 속에 뭐가 들어있다고 했습니까? 종말이 들어있지요. 종말, 다시 말해서 심판이 있다 이 말이죠.  

어제 야외예배하면서 제가 채택한 본문이 요한복음 5장 29절이었습니다. 어디에 초점을 두었냐 하면, 마지막 때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그 다음에 마지막에는 '나오리라'로 되었거든요. 여기에 제가 초점을 두었거든요. 누가 호명해서 나온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뿌리는 우리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찍어서 호명해줬으니까, 찍어서 불러줬으니까. 우리의 뿌리는 처음부터 우리가 뿌리가 아니었고, 뿌리는 딴 데 있는데 우리는 그 뿌리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자기 자신이 중심인 줄 알고 살아온 거지요. 나중에 죽고 난 뒤에 보니까 죽고 난 뒤에 가만 놔두는 것이 아니라 아, 누가 와서 불러내 버려요. 그러니까 불러낸 쪽으로 우리는 부름을 끌려가서 부름을 나와야 되는 '나오리라' 나올 수밖에 없는 그러한 인간이란 말이지요.

거기서 제가 예를 들기를 산책하는 예를 들었는데, 산에 산책하다가 나뭇잎이 초록색이더란 말이죠. 그래서 저는 물었어요. 왜 저게 검은색이 아니고, 노랑색이 아니고, 왜 초록색이냐? 그래서 제가 내린 해답은 이게 나무가 하나님 것이고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초록색을 하든 뭐든 하나님 것이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로 사느냐? 내 것이 아니거든요. 빨강색이든, 노랑색이든, 조실부모하든, 나중에 부모가 백수를 하든 어차피 내 것이 아니잖아요. 내 것이 아닌데 우리는 왜 나 이렇게 사느냐고 자기한테 불만을 갖게 되고, 그 다음에 그 불만을 높이고 하나님에 대한 감사는 의도적으로 줄임으로 말미암아 불만을 하고 있다는 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터치하지 마라 이 말이죠. 불만을 품고 있는 나 자신의 불만 품음에 대해서 하나님이라도 나한테 터치하지 마라. 이게 뭐냐 하면, 존재의 가능성이 있을 때만 이걸 인간을 뭐로 보느냐? 이거는 인간됨이라고 본단 말이에요.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인간은 뭐냐 하면, 신의 가능성을 일부 흡수해서 자기 소유로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라 하는 것은 뭐냐? ‘자기가 갖고 있는 신의 가능성을 마음껏 발산하고 발휘하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으니까 모든 사람들은 뭐라 합니까? 야, 토마스 아퀴나스 분명히 신학자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신학자가 아니고 뭐예요?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지요.

어떤 의미에서? 신이라 하는 것은 중간에 존재에서 존재로 나아가는 도중에 여기에 끼어든 것뿐이지요. 사실은 존재 자체에 대해서 신이 어떻게 개입하느냐에 대해서는 그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현재 눈에 보이는 것, 현재 있는 것부터 시작하자. 말이죠. 있는 것부터 존재에서 들어가서 존재가 왜 있는가? 존재를 보고 이야기할 때 이것은 신이 만들었다 이렇게 돼버리죠.

존재가 우선이고 다음에 신은 존재를 위해서 존재하고 인도하시고 인간의 가능성을 펼치고 그 가능성을 많이 펼치기 위해서 많이 아는 것은 뭐에 가깝고? 절대 진리에 가깝고. 이의 있으면 이야기하란 말이죠.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주 당당했습니다. 내가 말한 논리에 대해서 이의 있으면 이야기해 봐라 이 말이죠. 가하시면 가하시고, 이의 있으면 이야기해봐라 말이죠. 누가 이의를 답니까? 다들 좋아하는데. 다들 고개 끄덕이면서 훌륭하다고 박수치는데 누가 이의를 달아요.

당신은 그야말로 박사 중에 박사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아직까지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위대한 박자는 못 봤다 하는데. 최고 인간의 최고의 학자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학자로 보죠. 토마스 아퀴나스를. 뭐 칼 바르트, 폴 틸리히 이렇게 까불어도 천주교 신부들은 끄떡없습니다. 너희들이 토마스 아퀴나스 만큼 알아? 이러는 거예요. 세계의 철학자들, 뭐 아인슈타인 과학해도 천주교 신부들한테는 그 상대성원리도 시시해요. 왜냐하면 토마스 아퀴나스가 있기 때문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뭐냐 하면, 신이 인간에 존재할 때 존재 속에 신적 가능성을 집어넣고 존재는 그 가능성을 발휘하는데 그중에 하나가 나중에 과학이 나왔잖아요. 그러면 과학에 대해서 천주교가 옹호하면서 긍정하면서 그것은 결국 어느 큰 범주? 존재의 가능성 범주에 그냥 합쳐질 포함될 자그마한 요소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아는 이상은 남한테 기죽을 이유가 없다 이 말이에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을 모르는 철학자보다 더 위대하다 본 거지요. 왜냐하면 그들은 신을 모르는 채 자연을 연구했기 때문에. 신만 알면 신과 자연과 다 합치면 아래 위 전부 다를 아는 것이 되기 때문에 더 이상 거기에 대해서는 모자람이 없겠지요. 그래서 제가 토마스 아퀴나스를 이렇게 언급을 한 겁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 가능성을 이야기할 때에, 특히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을 이야기할 때에 영원론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원론을 할 때 한 가지만 생각하면 돼요. 딴 건 다 잊어버려도 하나만 생각하면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개별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존재하실 때는 하나하나 구획된 딱딱 끊어진 개별자로 창조했다 하는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간론의 핵심입니다.

루터의 인간론의 핵심은 뭡니까? 죄인이라고 하는 거지요.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간론은 뭡니까? 개별자란 거지요. 독립적인 존재란 거지요. 왜 인간을 독립적인 존재라는 것을 왜 그렇게 강조할까요? 그것은 인간은 신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작은 신이에요. 작은 신이기 때문에 만약에 개별적인 인간의 영혼과 생명을 개별적으로 존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인정한다는 것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참 어려운데요.

보통 우리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하잖아요. 철학자들이 이야기하잖아요. 하나님이 창조해 버리면 사람들은 어디다 관심이 있어요? 하나님이 창조했으면 신에게 관심이 있겠지요. 이렇게 되면 자연적으로 어디에 손을 댄다? 사람을 죽이고 악하게 해도 하나님만 쳐다보면 된다 이 말이죠.

유대교인들이 아버지한테 봉사해도 아버지한테 드릴 돈을 하나님께 드리면 고르반해서 아버지께 드린 게 되잖아요. 그렇게 돼버리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일반적인 이방종교나 일반적인 사람들의 상식에 해당된다는 것이죠. 하나님만 쳐다보기 때문에 자기 하는 일의 모든 것은 뭐가 되겠어요? 자기 긍정이 되고, 자기 하는 일은 모두 의롭다고 여기지요. 그렇다면 뭐가 빠지겠어요? 뭐가 빠지냐 하면, 윤리성을 찾을 데가 없어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로부터 마지막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이 세상을 하나님 형상대로 윤리적인 도덕적인 것까지 정착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이 땅에서 펼쳐지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 윤리성을 하려면 타인을 볼 때 뭘로 봐야 됩니까? 이 더러운 놈, 이렇게 보지 말고 개별적 하나하나를 뭐로 보잔 이 말이죠? 하나님이 직접 자기 형상대로 넣어 줬단 말이에요. 형상을 세 사람 모인 형상이 아니고, 다섯 사람 모여서 한 형상이 아니고 한 사람당 하나의 형상들이 다 담겨 있는 거예요.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어린아이라도 함부로 하지 마라. 왜? 어린아이라도 직접 거기에 영혼을 주신 분이 누굽니까? 하나님이죠. 그러면 어린아이를 귀하게 보잖아요. 그러면 그것은 뭡니까? 그 사회의 윤리성이죠. 윤리성은 곧 그 사회의 거룩의 성취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성경의 모든 말씀은 이런 개별적인 한계로 말미암아 완성되겠지요? 개별성만 기억한다면, 다시 말해서 개별적인 존재마다 하나님의 형상이 다 들어 담겨있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한다면 도덕과 윤리에 대해선 더 이상 걱정할 필요 없겠지요. 사람 대할 때 함부로 대하지 않고 뭘로 봅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같은 형제로 보기 때문에 하나님 대하듯이 대하기 때문에 천사 대하듯이 대하기 때문에 거기서 어떻게 남을 해칠 마음이 나겠느냐 이 말입니다.

오늘 무궁화 타고 오다가 애가 몇 번 왔다갔다 하기에 야, 네 자리에 가! 아니요. 이러는 거예요. 너 까불면 맞는다. 휑하니 가더니 또 오는 거예요. 가! 또 안 가요. 탁 때리니까 아아악, 우는 거예요. 그 애 할머니가 뭔 일인데 하는 거예요. 까불면 맞지 뭐. 다른 사람들 속이 시원해 가지고. 다른 사람들 손을 못 대요. 왜냐하면 애 손대면 엄마가 거칠게 미친 듯이 달려들기 때문에 뒷감당을 누가 합니까? 나는 뒷감당이고 뭐고 지금 애가 왔다갔다 해서 잠을 못 자는 거예요. 전부다. 기차길 좀 깁니까? 자기 형하고 둘이서 달리기 하고 운동회를 해요. 아무도 그 애 부모가 겁나서 손을 못 대는 거예요. 한 번 경고했거든요. 맞는다. 애가 한 4살 됐어요. 큰 애하고 싸운다, 큰 애하고 싸워. 내가 보기에 줘 패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라.

자, 여러분 보세요. 개별의 윤리성, 우리가 교회 가고 예수 믿을 때 사람들의 심정이 뭐냐 하면, 내가 인간 한 번 돼보자. 나도. 개 같은 인생 살다가 사람 한 번 돼보자. 윤리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 교회를 찾아요. 교회 다니는 자체도 착하지만 봐라, 나 교회 다니고 사람 변했잖아. 윤리성이 덮여진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기를 사람들은 원하고 있단 말이죠.

그렇다면 목사는 그 사람들, 온 고객들의 윤리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뭔가 성경적인 근거로 해서 신학적인 근거를 대서 대책을 세워줘서 윤리적으로 사람으로 거듭나게 배려를 해야 되는데 이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보다 더 월등한 것이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없잖아요.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아 우리는 형상을 입었다. 그러니까 남을 대할 때 하나님 대하듯 대하라. 더 이상 뭐가 더 필요한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합니까?

그런데 여기에다 루터의 신학이 집어 들어와서 백 날 해도 인간은 죄인이라 하면, 지금 죄인 안 되기 위해서 교회 왔잖아요. 그런데 교회 와서 아무리 착하고, 아무리 도덕적 해도 죄인 돼버리면 그러면 그 고객들이 낙담할 게 분명하단 말이죠. 그래서 캘빈은 토마스 아퀴나스로 돌아서 버렸어요. 루터에서 배워서 토마스 아퀴나스로 가버렸어요. 왔다구나 저것이구나.

이제 토마스 아퀴나스의 문제점을 우리가 찾아낼 수 있어야 됩니다. 이 개별자론을. 그래서 천주교는 지금도 낙태 반대하는 거예요. 여러 가지. 그리고 불신자라도 어려운 사람한테는 하나님의 성령이 들어있다. 그 사람들 돌보는 것은 곧 그 사람을 먹이고 입히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는 것은 곧 누구한테 하는 것이다? 예수님한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렇게 하면 천주교회가 부흥되고 이 사회에서 존경받는다는 것을 그걸 노려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도 있지만 신부입장에서 자기 성당이 커지고 세상 사람들이 납득이 되는 식으로 하는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바로 모든 존재는 어디서 나왔다? 그 사람이 예수 믿든 안 믿든 간에 하나님 소속이다. 이 말이죠. 따라서 그 존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해 주는 것이 곧 하나님의 성도의 먼저 믿은 사람의 마땅한 도리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래서 만약에 여기서 그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전하고, 복음을 전하면 그것은 바로 이 지옥 가는 불쌍한 존재를 잘 들어 보세요. 지옥 가는 불쌍한 존재를 천국에 보내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십자가 지러 오셨다. 이렇게 이해하거든요. 목사님, 그렇게 이해하지, 달리 이해하는 게 어디 있습니까? 못 들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이 사람들에게 천주교 사람들에게 예를 들어서 신부나 수녀들에게 복음을 이야기하면, 그들은 이렇게 이해한단 말이죠. 제가 천주교 서점에 자주 다녀서 책을 많이 사봐서 다 아니까 하는 말이에요.

예수님, 하나님 아들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얼마나 불쌍한 존재입니까? 존재. 불쌍한 존재를 천국에 보내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우리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서 오셨다 말이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럼 그렇게 생각하지, 뭐 어떻게 달리, 그 말이 맞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으리라. 그 말이 맞잖아. 뭘 달리 생각하느냐 이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바로 제가 시비 거는 것은 바로 그 존재를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 지지 않았단 사실이에요. 제가 왜 박옥수 그 사람 신학에 대해서 불만이 그거에요. 그 사람들이 억대, 수천만 원이 넘지요. 각 신문사의 전면광고가 억대가 넘습니다. 그 사람들이 억대 돈을 쓰면서 광고해도 그 돈이 안 아까운 이유는 뭐냐 하면, 사울처럼 이것이 하나님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이런 거예요. 박옥수의 신학은 이런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못 들어서,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무지해서 구원을 못 받고 있는 거예요. 기성 교단에 빠져서 못 믿는 거예요. 따라서 돈 아끼지 말고 광고해서 그들에게 하나님은 사랑이며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면 그들의 불쌍한 존재가 뭐 된다? 구원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돈은 바로 그러한 전도와 선교에 헌신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최고로 잘 쓰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막대한 선전과 막대한 홍보비를 써도 정당하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한국의 기성교단은 박옥수의 집단을 굉장히 부러워하는 거지요. 그런 교인이 우리교회는 왜 없노? 다 같은 교회인데 그런 괜찮은 사고방식을 가진 교인은 왜 없노? 한 푼 두 푼 아껴 가지고 전도도 안 되고, 이게. 원래 팍팍 쓰는. 나도 복음 전하는데 왜 안 도와 주노? 오히려 부러워하지요. 박옥수의 그 주장이 뭐가 문제인지 우리가 생각 안하고 그게 잘못 됐다고 생각 안하고 왠지 부러워지는 거예요. 너는 좋겠다. 입에 밥이라도 들어가야 그런 소리하지.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예수님의 십자가라 하는 것은, 이사야 6장의 말씀대로 이사야 이야기대로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십자가 지신 겁니다. 설득시켜 납득시켜 한 것이 아니고 인간은 처음부터 구원될 자격이 그들에게는 들어있지 않다. 이 말이지요. 그래서 홍보용으로 거액을 쓰는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 속에 그들이 우리를 구원하려는 나라는 존재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보면 하나님 쪽에서 나라는 존재에 걸맞고, 막대한 자금을 동원시켜서 건져내 봐라. 그게 아니라 ‘너 같은 존재한테는 돈 쓸 한 푼도 없어.’라는 식으로 다가와야 한다 이 말입니다. 그래야 자기 존재 자체의 무가치성을 사람들은 그걸 인식할 수 있다 이 말이에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있는데 여기 건물에 보니까 다음 생식하는 사무실이 있데요.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데 다음 생식에서 선물을 가지고 와서 한 달간 무료로 드셔보세요. 이만큼 다 드리겠습니다. 보시고 좋으면 그때 구입하세요. 하고 이렇게 주면 은연중에 우리가 팔짱 끼고 으스대기 쉽거든요. 그래, 그래. 한 푼이라도 팔려고. 내가 이해하지. 잘 먹을게요. 그게 자기 부인이 안 되잖아요. 그렇지, 나를 진작 알아 모셔야지. 이렇게 돼지. 주여, 난 죄인인데... 이렇게 되질 안는다 이 말입니다. 건방만 늘지요.  

그런데 사람들의 본성이라는 것은 자기를 알아 줄 때만 그 사람을 존경해요. 전에 그런 말 했잖아요. 사람들은 자기를 안 도와주면 원한 관계가 성립된다고. 제가 설교시간에 그렇게 했단 말이죠. 그게 애비든, 자식이든 관계없어요. 자기 일을 안 도와주면 원한 관계가 발생되면서 그게 한이 맺히게 됩니다. 사람들이 교회와도 하나님에게 불만을 터뜨리는 이유가 하나님이 교회 다녀도 자기 일을 안 도와주니까 원한 관계를 교회에 나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스스로 자기를 위로하기를 내가 사람이 좋아서 아직도 교회 다니고 있지,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 교회 안 나왔다고. 내가 워낙 인간성이 좋으니까 내가 이렇게 하나님이 뜻을 안 들어줘도 봐주는 거지. 하나님 그런 줄 아소. 이런다 말이죠. 아까 제가 얘기 했잖아요. 내가 신에 대해서 세상에서 불만을 갖고 있는 이 불만에 대해서 내가 불만 갖더라도 하나님 터치하지 마소. 나는 불만 가지고 싶으니까 내 마음대로 가질 수 있도록 좀 허락해 달라. 이런 식이죠. 불만은 높이고 감사는 줄이고. 왜? 그래야 자기가 돗대니까. 다음 생식에서 말하자면 선물은 높이고 사주는 것은 참치 사주고. 왜? 그래야 자기 가치 값이 올라가니까.

천주교가 한 짓들이 바로 그겁니다. 인간의 가치를 마음껏 높여 놨어요. 세상 사람들 같이 높여 놨어요. 그중에 세상 사람들을 높이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해 주는 신부와 수녀는 가치가 더욱더 높지요. 그러니까 신부와 수녀가 많은 사람들을 봉사하고 헌신하지만 그것은 은연중에 뭘 노립니까? 봉사해 주는 자의 그 가치는 봉사 받는 사람들보다 더 높다는 것을 먼저 전제로 깔고 봉사한단 말이죠. 그런 재미도 없이 뭔 봉사를 하겠어요.

목사가 교인들에게 봉사하고 수고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변치 않은 대우도 못 받지만 하지만 목사의 마음속에 싹터 오르는 것은 뭐냐 하면, ‘이 더러운 같은 놈들 뒷바라지 해주지만 너희들이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워낙 잘났기 때문에 너 같은 놈들에게 봉사해 준다.’라는 의식이 과거에 든다 이 말이죠. 이것은 목사로 하여금 자기가 뭐 돼요? 이것은 죄인이 아니고 자기가 의인이에요. 자기가 의인이라고. 주기철, 손양원, 한경직 대부분 사람들이 여기에 빠져요. 주위에서 가만 놔주질 안 해요. 또 자기도 그렇게 되고 싶어 하고.

그것은 정말 목사라는 이름을 걸고도 빠져 나오기 힘든 죽음의 덫이에요. 신학을 공부해도 자기의 품위를 높여주는 방향으로 신학을 공부하고 내가 왜 죄인인가? 내가 목사한다는 자체가 이게 왜 죄인인가를 알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품위를 높여주는. 아까 얘기한 소크라테스는 뭐라 했어요. 무지하면 죄다. 알면 뭐가 된다? 죄에서 알기만 많이 알면 의로운 사람이 점점 더 가능성이 있지요. 이게 뭐냐 하면, 개별적으로 전부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기 때문에. 그 개별성을 그러니까 개별적이라고 했기 때문에 개별적인 가치에 경쟁의 우위에 경쟁의 비교에 들어가는 거예요. 이 세상은 누가 하나님에 대해서 열성을 내느냐에 따라서 경쟁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시합을 시켰다는 거죠.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들어가 보면 교회 목회하는데 도움 안 되는 게 없어요. 전부다 도움이 돼요. 야, 멋지다. 개별적인 영혼이기 때문에 경쟁을 해서 누가 신의 성품을 많이 닮느냐 내기하는 거예요. 세상에서 돈 못 버는 것을 교회 와서 인간답게 살아서 한번 복이나 받아라. 신부한테 인정받고, 하나님께 인정받고 그런 보람이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라는 쪽으로 목회를 유도할 수 있어요.

남 돌보지 않는 치매 걸린 시어머니를 돌봄으로 말미암아 성당에서 칭찬해줌으로서 그 며느리로 하여금 더욱더 그 선한 일에 매진하도록 재촉해서 이 사회에서 치매환자 하나 가볍게 처리하게 만들고 봉사했던 며느리한테 상 줌으로서 말미암아 자기가 못하는 것 며느리한테 다 떠넘길 수 있고, 며느리는 그걸 통해서 칭찬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나는 이것 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띠고 이걸 한다는 보람을 갖게 되는 거예요.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삼중, 삼중으로 좋아. 이 보람 있는 일을 왜 마다하겠어요.

그런데 그게 몽땅 죄라고 얘기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게. 세상에 그런 고귀하고 멋들어진 그런 프로젝트를 몽땅 죄라고 이야기해버리면 목회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전부다 목회 예수님 혼자 다 해버리고 인간들이 하는 짓들은 다 죄다 이렇게 나오면 얼마나 듣는 사람이 황당하겠습니까?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알고자 할 때는 철저하게 왜 루터가 토마스 아퀴나스를 그렇게 싫어했고 싫어하면서 영향 받았지만 왜 중세 신학을 그렇게 싫어했던가? 그것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알아야 돼요. 그 당시는 루터 당시에는 개신교가 없었어요. 자기도 천주교 신부였고, 천주교 자체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 몸 떼는 것과 똑같아요. 죽으라고 남보고 이 죄인아, 죽어라! 나쁜 놈 보고 칼 대는 것이 아니고, 이 죄인 죽어라! 하고 자기 배를 찌르면서 에이, 나쁜 놈하고 찌른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게 루터에요. 자기 나쁜 놈이라고 자기 배를 찌른 거예요.

아하, 비로소 예수님 십자가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는 사실을 루터가 신부 된지 수십 년이 지나서 알았어요. 배우기야 얼마나 배웠겠습니까? 또 눈으로 로마서를 한두 번 봤겠습니까? 백날 본들 무슨 소용 있습니까? 전부다 뭡니까? 자기의 존재의 가능성, 개별적인 영혼의 아름다움, 자기 영혼의 고귀함, 자기가 갖고 있는 하나님 형상의 숭고함, 그걸 기초로 해서 그 숭고함을 신적 숭고함으로 끌어당기는 거기에 필요해서 신학을 배웠고, 기도를 했고, 목회를 했고 이랬단 말이지요.

그런데 그 영혼의 숭고함이 악마의 숭고함이었단 말이에요. 악마가 이야기한 숭고함. 현재 이 진리도 아닌 것이 이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숭고함이 가짜였다, 가짜. 전부 다 가짜란 이 말이죠.

루터보고 당신은 가짜인 것 어떻게 알았어요? 루터의 대답은 하나밖에 없어요. 성령 때문에. 경험을 했다든지 계단을 올랐다든지 그런 것 소용없는 거예요. 그냥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 십자가의 영으로 오기 때문에 십자가의 영을 받아보니까 내가 이유 없이 무조건 죄인인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대신 죽으심 때문에 내가 구원받고.

이제 루터는 마음 놓고 결혼할 수 있어요. 그래서 천주교에서 하는 말이 루터는 좋아하는 사람하고 결혼하고 싶어서 종교개혁을 했다 그런 소리를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마음 놓고 결혼하고, 또 뭐 하겠어요? 마음 놓고 이혼할 수도 있고. 뭐든지 마음 놓고 하는 거예요. 왜? 뭐를 해도 죄기 때문에. 뭐 해도 죄 아닐 수가 없기 때문에. 이젠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길로 나갔거든요.

(질문 : 루터하고 토마스 사이에 그런 사람은 없었나요? 죽였지요. 있었는데 밟아버렸지요. 나오는 사건은 있었는데 사건화 되지 않았지요. 싹이 올라오면 그냥. 그럼요. 극소수기 때문에)

그 사이에 물론 여러 가지 신학사상, 둔스 스코투스 나오고 합니다만 그 사람들의 관심사는 뭐냐 하면, 그 사람들의 관심사를 다시 이야기할게요. 둔스 스코투스 하는 이런 사람들의 관심사는 아까 이야기했지요. 무지가 죄기 때문에 많이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그 당시 이슬람교로부터 새로운 고급문화, 중국으로부터 과학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과학과 수학과 물리학과 천문학이 막 쏟아져 들어오니까 그동안 뭘 막았어요? 그딴 것은 이방민족들의 악마의 학문이라고 해서 막았는데 토마스 아퀴나스로부터 해서 뭡니까? 모든 존재의 신이 있는데 왜 그걸 우리가 막냐? 그걸 연구해야 하나님에 대한 영광과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더 늘어나는데 그것 때문에 공부하는데 공부하기 시작하니까 관심사가 뭡니까? 이제는 무지에서 벗어나서 더욱더 앎의 세계에 그 아는 재미에 빠졌는데 그 십자가 외칠 이유가 있습니까? 더 알아야 되는데. 더욱더 많이 아는데. 그러니까 알고 신학자들은 그걸 정당화할 수 있는 신학을 만들어내고.

왜냐하면 교회가 사람들 모임이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쪽으로 신부들은 그의 신학을 새롭게 조립해서 추가적으로 이렇게 갖다 붙일 필요가 있어요. 자꾸 그런 짓들을 하는 거예요.

여기에 이왕 본대로 스코투스의 '존재보다 본질이 우선입니다.' 이걸 설명해야 되겠지요. 존재보다 뭐가 위에 있다고요? 본질이 위에 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이게 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나온 건데, 존재라 하는 것은 쉽게 이야기해서 존재함이라. 존재함은 뒤에 뭐와 연관되어 있습니까? 신과 연관되겠지요. 왜 어째서 존재하느냐?

김지하라는 시인 알지요. 운동권 속의 김지하. 그 사람이 평생을 운동권하면서 시집내면서 오적 같은 시를 지으면서 결국 감옥소, 반국가적 범죄로 감옥소 갈 때에 자기가 우연히 창틀에 어디서 날아왔는지 씨앗이 날아와서 꽃을 피우는 거예요. 그 꽃을 보면서 우주를 본 거예요. 자기는. 왜 저 꽃이 저기에 왜 존재하느냐 말이죠. 그 전에 자기가 꽃을 한두 번 봤겠습니까? 수천만 번 봤을 것 아닙니까? 살아가면서. 그런데 자기가 감옥에 갇혀서 창살에 핀 꽃을 본 순간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모든 인생은 저 꽃의 존재함을 통해서 존재의 숭고함, 존재한다는 자체의 숭고함.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왜 저 꽃이 저기에 꼭 있어야 하는가? 그 이유. 왜 저 꽃이 저기 존재하는가에 대한 신비로움. 그것을 위해서 한 평생 살아왔다는 것을 본 거에요.

보세요. 김지하 씨가 전에 뭐 했다고요? 민주화 운동해서 억압받는 사람들, 독재에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그것에 자기의 인생의 보람을 느꼈잖아요. 그것이 바로 신이 있다면 자기를 착하다고 생각할 것이고 사회정의를 위해서 부르짖었잖아요. 그래서 감옥소 갔잖아요. 그런데 감옥소 가서 보니까 무엇의 경외함? 존재함의 경외함, 생명의 경외함이 아니에요. 뭔가 존재한다는 것에서 오는 경외함. 왜 너는 거기에 있느냐? 라는 것에서 오는 경외함. 누가 그렇게 했는가? 경외함. 거기에 대한 고개 숙임. 그때부터 사람이 달라졌어요. 거듭났지요. 유에서 유로 거듭나버렸어요.

그 다음부터는 민주화운동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생명운동으로 나가요. 이 세상은 생명이라는 기로 되어 있고 이 기는 누가 누굴 억압할 수 없는 그저 만나면 생명으로 이야기한다면 이 세상은 누가 누굴 미워하지 않을 거고.

아까 윤리이야기, 윤리가 어떻게 이야기했다고요? 개별자. 사람 안에 뭐가 있어? 생명이 있어. 그 생명 누가 줬어요? 하나님이 줬어요. 사람 안에 뭐가 있어요? 양심이 있어요. 그 양심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은 누가 줬습니까? 하나님이 심어 준 거에요. 그렇다면 그 사람 속에게 뭘 발견해야 됩니까? 신의 흔적만 발견하면 그것보다 더 위대한 이 세상의 윤리와 도덕은 없으며 그것이 주기도문에 나오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듯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여기서 이의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이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본래의 형상으로 되돌아가게 만들고 그 하나님의 형상 속에서 지내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구현해서 하나님의 그 생명주심의 존재함의 경외를 온 몸을 통해서 우주에 발산시킬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다. 여기에 뭐가 빠졌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빠졌어요. 신과 인간의 만남은 종결돼 버려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뭐냐? 잠시 출현했다가 곧장 퇴장하지요. 생명이 중요하지 십자가는 안 중요한단 말이죠.

패션 오브 그리스도에서 현재 한국에서 상영된 영화는 2시간 50분짜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잔혹한 부분을 잘라낸 거예요. 그래서 우리 아는 사람이 러시아에서 나온 안 잘린 패션 오브 그리스도를 갖고 있답니다. 거기는 현재 시중에서 상영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더 참혹해요. 그러면 그 영화가 왜 그렇게 참혹 일변도로 나가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의 죄를 알기 위해서?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은, 누구나 형상을 갖고 있는데 죄 없는 사람이 참혹하게 희생을 당하면 뭐가 일어나겠습니까? 측은지심. 불현듯이 죽어있던 하나님의 양심이라는 하나님의 형상이 되살아나면 그것이 뭐로 이어지겠어요? 신에 대한 그동안 불충성한 것에 대한 미안함, 신에 대한 어떤 죄송스런 마음, 그런 것들은 다시 회생시키게 되면 이 사회는 다 남 탓이 아니고 다 누구 탓이요? 내 탓으로 돌아오게 되니까 그것은 바로 신의 뜻에 의해서 이 사회가 윤리적 도덕적 사회로 들어갈 수 있는 약간의 일련의 기여를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게 그 영화의 취지고 목적입니다. 더 이상 없어요.

애매한 정말 죄 없이 애매한 사람을 극도로 희생하신 분으로 등장시켜서 인간들의 동정심을 유발시켜서 사랑과 서로 불쌍히 여겨줌이 넘치는 그런 사회로 만드는데 기여를 하자 말이죠. 다시는 사람이 사람의 이름으로 학대하는 일 없기, 자기의 권세 때문에 약한 사람을 핍박하기 없기. 그렇게 되면 이 사회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건전한 사회로, 경건한 사회로, 거룩한 사회로 전이될 수 있는데 약간 도움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 그것이 바로 패션 오브 그리스도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제 딸래미 같은 경우, 어떤 사람은 그 보고 난 뒤에 하는 말이, 저 영화보고 다른 사람들이 우는 이유를 모르겠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내 딸은. 아, 독해, 독해. 저게 뭔데. 저거 왜 우는데. 시건이 연기지. 하나님의 개별적인 형상도 없나. 아마 너무 복음을 어릴 적부터 많이 들어서 그러나. 뻔뻔스러워서 그런지 분간이 안돼요.  

둔스 스코투스는 바로 여기서 벗어납니다. 존재가 우선이 아니고, 무엇이 우선이냐? 본질이 우선이다. 존재라 하는 것은 없다 이 말입니다. 본질의 있음이 존재에 불과하고 실제로 존재를 깨어보면 그 안에 본질이 들어있다. 그러면 본질하고 존재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존재는 신과 연관되어 있지만 본질은 신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유사성, 같은 형제    관계되어 있어요.

아, 이거 모른다. 다시 이야기합시다. 우리는 같은 형제다 하잖아요. 그건 무슨 뜻입니까? 부모가 같기 때문에 같은 질을 받았지요. 속성, 성질을 받았잖아요. 본질 위주로 나가버리면 신에 대한 관심사가 아니고, 이웃에 대한 관심사로 변하죠. 이웃에 대한 관심사로 변해버리면 나중에 오캄에 가면 더 이웃에 대한 관심, 이웃에 관심을 갖는다는 말은 이웃과 합체하려고 애쓰겠지요. 그죠? 그렇겠지요.

잘 보고 오세요. 이웃에 관심 있다는 말은 뭡니까? 이웃과 친해지려고 하지요. 친해지려면 자기가 갖고 있던 절대성을 포기해야 됩니까, 포기 안해야 됩니까? 포기해야지요. 그러니까 둔스 스코투스 나가면 점점 뭐가 됩니까? 기독교가 전부가 아니고 뭐가 돼요? 사람은 어떠한 모습과 종교를 믿던 간에 궁극적으로 뭐다? 신이 주신 하나의 다양한 면 가운데 한 면이잖아요. 그렇게 되면 천주교 신은 폐쇄적인 것에서 넓혀지겠지요.

어떤 놈이든 온나. 다 신이 만든 신의 자녀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만약에 십자가 복음을 전하다가 저쪽에 형제가 뭘 한다? 거부반응 나타나도 이젠 말 안하죠. 그래서 십자가 뺏기고 이렇게 되죠. 왜? 중요한 것은 존재가 아니고 우리는 다 같은 신의 형상을 입은 본질이기 때문에 한 형제이기 때문에. 암요. 알죠.

아까 스코투스 이야기하다 보면 토마스 아퀴나스 다 잊어버렸다. 둘 다 갑자기 신학하다 보면 그래요. 이 쪽 이야기하다 보면 제일 뒤에 것이 맞는 것 같아요. 그러면 스코투스보다 더 맞게 이야기해 볼까요.

그러면 나중에 꽁트나 이런데 와보면 과학이라 하는 것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신자가 만들었습니까? 아니죠. 과학 하는데 무슨 신자와 비신자가 있습니까? 벼를 재배하는데 무슨 복음 아느냐, 모르냐 묻고 쌀을 구분하는 게 아니잖아요. 여러분 과학자들 많지 않습니까? 실험실 대덕단지 많지 않습니까? 전부다 기독교 신자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그들이 만든 항생제나 그들이 만든 의약품이 예수 잘 믿는 목사를 살리고 예수 안 믿는 죽을 지경에 있는 권사를 살리느냐 말이에요.

그러면 과학은 뭡니까?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죠. 그 은총은 유독 신자에게만 오는 겁니까? 아니란 말이죠. 그 아이디어, 파스퇴르라는 사람은 광견병 종두 개발한 사람이잖아요. 그 사람이 2만 번 실패했어요. 2만 번. 상상이 갑니까? 여러분들이 신약 개발하고 주사제 개발할 때 딱딱하면 딱딱 튀어나오는지 압니까? 연구소가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지금도 복제 양, 복제 돼지 있잖아요. 전 세계 3천군데 연구소에서 연구를 합니다. 방식은 유사해요. 비슷한데 이것은 어느 한 군데 톡 튀어나와 버리면 나머진 실패하기 때문에 그래요. 네이처 같은 과학 잡지에 발표해 버리면 아이고, 접어야겠다. 누가 행운이 따라서 누가 아다리 딱 되어서 누가 그 기술을 처음으로 개발하느냐 문제에요.

그러면 그 기술을 어떻게 획득하는가? 그냥 해보는 거예요. 무작위로. 몇 번씩? 수만 번씩. 그래서 연구소에 막대한 돈을 주면서 빨리 업적을 내놔라 독촉해봐야 소용없어요. 연구라 하는 것은 순간적으로 운이 따라줘야 돼요. 아다리 딱 될 때 야, 떴다. 이러면 되는 거예요. 황우석 교수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과학하는 사람들이 배고픈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연구비를 줬는데 준 사람은 많아요. 받는 사람은 한 번 딱 아다리 되면 괜찮은데 몫 돈 되는데 계속 일년 지나고, 이년 지나면 나중에 연구비 각하됩니다. 희망을 접을까, 접을까. 그래도 어떤 사람은 5년 만에 됐다는데 꼭 그 시험 치루는 것 같아. 계속 해보는 거예요. 그러면 조교들 다 떠나지요. 선생님, 포기합시다. 이 방법 말고 딴 방법이 있다던데  포기합시다, 아예. 될 꺼야. 선생님 우리가 한두 번 속아본 게 아닙니다. 더 속아봐. 이런 식으로 밤샘하면서 연구하는 거예요. 벤처기업도 마찬가지에요. 될 때까지 하는 거예요. 될 때까지.

그게 여러분들이 보려면, 신화창조인가 화요일에 KBS에서 하는 것 있죠. 금요일에 해요? 그게 사회에 대해서 그것보다 더 잘 알려주는 게 없어요. 정말 이 사회 과학자들이나 일하는 사람들이 완전히 운에 따라서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기독교 신자들은 기도해서 됐다고 하거든요. 기도한 게 그런 식으로 하면, 서해대교 하는 것도 완전히 그 사람들이 기도한 적도 없는데 그냥 됐어요.

그러니까 결국 이것은 나중에 칸트 이후의 철학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진보시키고 병마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옛날에는 예수님이 와서 그냥 손 얹어서 나았지만 지금은 그 방식을 사용하지 않고 다른 방식을 사용하는데 무슨 방식? 과학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그것도 신자가 아닌 불신자들의 손에 의해서 얼마든지 하나님께서는 이 존재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복을 주고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의 공로를 생각해 볼 때 비록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신부보다 목사보다 열심히 믿지는 않지만 결국 하늘나라의 큰 뭐가 되겠습니까? 공로자가 되겠지요. 그런 사람들은 안 믿고 갔어도 연옥에서 빼 줘야지. 빽 써야지.

그러니까 기독교가 그런 식으로 흘러가니까 결국은 뭡니까? 모든 신학체제는 사람들의 신론을 비위 맞추는 아부하는 사람들의 기존의 신론에 대해서 접착제를 붙이는 그들에게 납득이 되는 그런 식으로 교회 신학이 지금 전개되고 있는 거예요. 기생하는 사람은 십자가 정신을 갖고 있든지 하고 아부를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홍합 파는 아줌마 같으면 홍합 팔고 있다 하고 아부해서 신의 자녀로 삼아버리고 다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십자가는 그게 용납이 안 된다 말입니다. 네가 과학자냐? 네가 의사야? 네가 목사야? 그게 십자가 앞에서 무슨 소용이 있어요. 네가 강도야? 네가 창녀야? 그게 십자가 앞에서 무슨 구분이 있어요. 절대 구분이 있을 수 없어요.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체적으로 뭘 내장돼 있습니까? 자체적으로 종말이에요. 자체적으로 종말인데 종말의 입장에서 의사를 하고 목사를 하고 뭘 하든 무슨 상관이 있냐 말이죠. 다만 그것이 흔적을 드러낼 뿐이죠. 평생을 살면서.

그러니까 토마스 아퀴나스는 십자가 신학하고 안 맞아요. 영 안 맞는 거예요. 맞을 수가 없어요. 제가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렇다면 그 당시에 천주교도 라틴 벌게이트, 불가타 번역해서 라틴성경도 있는데 성경을 본 신부들이 다 로마서 봤을 것이고, 갈라디아서 봤을 건데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런 이야기하면 아니다. 임마. 십자가다 하고 들고 일어나든지 하지. 왜 그런 것을 보고 놔두느냐? 놔둔 정도가 아닙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오히려 쫓겨 다녔어요. 토마스 아퀴나스가 오히려 욕을 얻어먹었어요. 왜? 너무 새롭다고.

그 전에 누구냐? 안셀무스였어요. 안셀무스는 그것보다 토마스보다 더 심한 사람이거든요. 사람의 이성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해 버렸는데 할 말 다해버렸지요. 존재론적 증명, 도덕적 증명, 우주론적 증명. 이미 신을,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하면, 그건 이단이에요. 이단. 왜? 안셀무스가 있거든. 이미 정통이, 이미 모든 신학은 마무리 지어버렸는데 네가 왜 까부느냐 이 말이죠.

그때부터 토마스 아퀴나스를 공격하기 시작하는데 공격한 게 뭐냐 하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무슨 신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을 했기 때문에 이단이다 이런 소리하면서 공격을 하고 핍박을 하고. 지나와서 보니까 현대 취향에 좀더 토마스 아퀴나스가 닮아서 그 당시 욕 얻어먹었지, 우리가 보기에는 같은 급인데, 그 당시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주 위험한 인물로 그렇게 간주되었어요. 그러면 둔스 스코투스는? 마찬가지에요. 하여튼 기존의 신학대로 가르쳐야 되지 만약에 그게 아니고, 이렇게 나오면 그 내용 보지도 않고 무조건 조지는 거예요.

만약에 토마스 아퀴나스 같이 개별자를 주장해 버리면 뭐가 됩니까? 사실 이 개별자 주장이 나중에 캘빈, 루터까지 받아들이는데 개별자를 주장해 버리면 하나님의 형상을 누가 독점할 수 없습니까? 교회가 독점 못해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사이의 문제란 말이죠. 그러니까 기존 교회가 어떻게 되겠어요? 야, 저 신학을 놔두면 이 교회가 뭐가 되겠어요? 이젠 반발해도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그 권위가 안 먹어주겠지요.

그래서 어떤 신학을 할 때 우리 권세를 얼마나 지탱할 것이냐를 우리 권세에 얼마나 도움 될 것이냐, 손해가 될 것이냐를 그걸 제일 먼저 우선적으로 생각합니다. 그게 바로 본디오 빌라도가 생각했던 진리에요. 내 나라는 내 통치하에 있다 이 말이에요.

자, 여러분 아시겠지요. 어려운 이야기는 확 넘어가고요. 참, 책이 나만 갖고 있어서 미안해서.


어거스틴 이야기해 봅시다. 자, 어거스틴의 중요한 점 몇 가지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어거스틴는 플로티누스와 유사한 처지에서 반 육체적인 태도에 무지한 측면을 ...  바로 여기에 어거스틴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어거스틴은 토마스 아퀴나스보다 한 800년 일찍 태어난 사람인데, 어거스틴은 플라톤주의입니다.

플라톤주의는 뭐냐? 이데아만 성스럽고 나머지는 다 타락했다. 플라톤주의는 간단하죠. 플라톤주의는 뭐라고요? 완전한 것은 이데아 세계만 있고, 나머지는 모든 것은 타락했다. 그럼 타락했다는 증거가 뭐냐? 정돈되지 않고 변화하기 때문에. 그게 이겁니다. 변화한다는 거죠. 완전한 것은 정숙하고 바뀌지 않고 달라지지 않아요. 침착한 것은 항상 침착해요.

어떤 선수가 우수한 선수냐면, 한결같이 컨디션 조절이 항상 유지된 선수. 잘 던질 땐 잘 던지고, 못 던질 땐 6:0 지고, 잘 던질 땐 6:0이고. 이렇게 뭔가 그럴 듯 하고 한결같죠. 든든하죠. 믿을 만하죠. 저 선수 나오면 된다. 김선우 봐라! 2회까지 2점 막았잖아. 오늘 김선우 하는 날. 든든해요. 서재응, 갸는 믿을 게 못 돼. 이런 거예요.

신이 뭡니까? 자, 신이 어떤 존재에요? 신하면 딱 떠오르는 게 뭐예요? 든든함, 안정됨. 옛날 사람들은 언약이란 걸 몰라요. 맨 날 생각하는 것이, 신 개념이 자기 상식에서 나와요. 언약이 어떻고, 모세언약, 하나도 모르고 자기 든든함, 안정됨. 그게 산당이에요. 산당. 솔로몬의 산당. 그러니까 우리는 쫄랑댐, 까불까불됨, 변화 많음. 그래서 우리는 늘 죄를 짓고, 우리 주님은 어떤 경우에도 죄를 짓지 않는다.

예를 들어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경건생활을 다짐하기 때문에 식구들로부터 욕을 얻어먹었어요. 그래서 식구들이 토마스 아퀴나스를 고치기 위해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경건생활에 들어갔을 때 몰래 예쁜 여자를 집어넣었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보니까 아무 일 없이 나오거든요. 여자 보고 너, 무슨 일 있어나? 아무 일 없었어요. 그냥 자대요. 그 이야기가 왜 크게 칭송 받는 이야기입니까? 봐라! 토마스 아퀴나스가 경건이 대단하잖아요.

이것은 뭡니까? 인간의 능력이 아니고 신에 가까운 능력이잖아요. 아름다운 여자와 한 밤을 지내도 아무렇지도 않고 말이죠. 이 더러운 여자야, 나를 시험하지 마라. 마귀야. 하고 이 분산 떠는 것이 더 쫄랑대는 거잖아요. 괜히 참으면 되는 걸 가지고 자기가 못 참으니까 나가란 말이야! 네가 나를 넘어지게 하는구나. 오히려 그게 더 분잡하고 어색하단 말이죠. 안녕하세요. 하고 자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나가란 말이야! 자기가 자기를 못 이기니까 자기가 겁나서 자기가 불안하니까 불안의 대상을 없애버림으로써 자기가 하려고. 그것도 아니고 자냐? 자면 아무 일 없는 거예요. 이것이 세상 사람들한테는 놀라워라. 이것은 신의 경지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거지요. 이것은 바로 인간의 내부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신이라 하는 것은 적어도 이 정도 이상이란 말이죠.

그래서 어거스틴에 있어서의 플라톤주의가 뭡니까? 바로 그것을 모든 사람이 예수 믿는 모든 사람이 신자와 모든 사람이 신과 닮아가도록 노력하는 그것이 이 세상의 교회를 위한 윤리성과 도덕성 확보.

아까 토마스 아퀴나스의 윤리성은 뭐로 된다 했습니까? 이런 플라톤주의가 아니고 뭐라 했어요? 개별성. 각자각자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기 때문에 함부로 상대를 대역하지 마라. 아니, 이거 내 여자 아이가? 아니지, 하나님 형상을 입은 나의 여동생이지. 했거든요. 나의 엄마지. 왜? 개별적이니까. 붙어서 태어난 게 아니잖아요.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이 일리가 있잖아요. 우리가 붙어서 태어난 게 아니잖아요. 형제간도 떨어져 나왔잖아요. 원래 샴쌍둥이처럼 붙어서 태어나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 샴쌍둥이 해도 영혼은 두 개 아닙니까? 따로따로 아닙니까?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왜 따로따로 만들었겠느냐? 둘이 서로 신을 보고 사랑하라고 개별자로 만들었다 말이에요. 그 말은 신이 사랑이 아니라 신의 사랑은 어디 있다? 마주보는 상대방 속에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거기에 비해서 어거스틴은 뭡니까? 그건 나중에 발달된 거고, 하나님의 형상론이 나오고 난 뒤에. 어거스틴은 그전의 사람인데 뭡니까? 그냥 이것은 개별적 이런 것이 아니라 뭡니까? 안정됨, 쫄랑댐. 그러니까 우리는 뭐가 된다? 점점 더 안정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영혼을 고양시킬 필요가 있다, 그겁니다. 그래서 선한 자는 선한대로 선한 모습으로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제 강의 들어보면 옛날 철학은 마지막에 뭐와 연관되어 있다? 윤리성과 연관되어 있지요. 그리고 그 윤리성은 그 당시의 국가의 질서와 연관되어 있어요.

자, 어거스틴의 말을 한번 들어보세요. [우리 몸은 우리 정신이 원하는 곳에 함께 있도록 해야 할 것이요.] 참 어렵다. 다시 읽어봅니다. 우리 몸은 우리 정신이 원하는 곳에 함께 하도록 해야 노력될 것이며.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들이 예수님 본받기를 원하십니까? 곧 정신이죠. 나는 예수님 본받기 원합니다. 또 기도할 때, 찬양할 때 뭐라 합니까? 주여, 저는 주를 본받기 원합니다. 이렇게 되지요. 그러면 그것은 우리의 정신이지요. 어거스틴은 뭐라 이야기합니까? 당신의 정신이 그러하지요. 예. 그렇다면 당신의 정신에 맞추도록 노력하라 이 말이죠. 뭔가 토마스 아퀴나스와 비슷하지요. 그것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어거스틴에게 배워서 그런 거예요. 어거스틴의 위대한 점이 거기에 있죠.

토마스 아퀴나스는 개별성하면서 논리적으로 다 따졌지만 어거스틴은 그 정도는 까지는 안됐지만 정신이 있는 곳에 몸도 함께 있는 거죠. 그러면 정신은 누굴 위해서, 몸을 위해서? 아니, 아니야. 오직 정신만을 위해서. 몸은 오직 정신을 위해서 봉사해야 되고.

그러면 왜 토마스 아퀴나스는 몸이 정신을 위해야 되느냐? 그것은 정신은 신에 가깝고, 몸은 신으로부터 멀기 때문에 그래요. 아시겠습니까? 요즘 말로 말하면 법보다 주먹이 더 가까운 것이 우리 몸의 생리죠. 쉽게 이야기합시다.

여러분, 몸은 배고프면 기분 나쁘잖아요. 날씨가 더우면 기분 나쁘죠. 옛날 사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옛날 사람도 인간 아닙니까? 자, 옛날 사람으로 돌아가 봅시다. 윤리고 도덕이고 다 그런 것, 골치 아픈 것 생각하지 말고 상식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사람이 언제  화냅니까? 더울 때, 되게 추울 때, 배고플 때, 편두통 날 때, 성질나지요. 그러면 성질난다는 것을 무슨 뜻이에요. 이게 지금 몸의 컨디션 때문에 성질나잖아요. 이것이 아까 식으로 나가면 범죄가 되는 거예요. 너 까불면 맞는데 뛰어다니지 마라. 에라, 이놈, 철퍼덕. 이게 어른 같으면 이렇게 안 하지요. 어떻게 합니까? 아저씨, 뛰어다니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동의하지요.

그런데 애들은 뭐가 발달 안 됐어요? 정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가 약이란 말이지요. 왜냐하면 육체에 피부가 있고 피부를 때리면 아프잖아요. 아프니까 뭐가 정지가 돼요? 몸이 정지가 되잖아요. 아니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철학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잔 말이죠. 지금 사람이 나쁜 짓하는 이유가 뭐냐? 몸이 안 좋아서 그래요. 기분 좋아보세요. 기마이 팍팍 쓰지. 술 먹고 팁 주는 것처럼. 술 깨면 아까워하지만.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그 당시에 귀족들은 배불리 먹고, 농민들은 못 살잖아요. 그럼 죄 누가 많이 짓습니까? 역시 배부른 사람보다 못 먹는 사람이 죄를 더 짓게 되어 있지요. 한스러워서. 그러면 어떻게 죄를 잡아야 돼요? 이 짐승 같은 놈아, 너 몸 밖에 모르나? 해서 정신을 닮아라, 정신. 그런데 귀족들은, 사실 귀족들도 배고파 보세요. 동물 되지. 귀족들은 일단 몸은 되잖아요. 몸이 배부르니까 어디가 발달한다? 정신이 발달하죠. 정신이 발달하니까 자연적으로 못 배운 놈들은 누구 따라야 돼요? 그 정신이 발달되면 정신을 따라야지요. 그때에 뭐가 생긴다? 질서가 생겨요. 계급이 생기고 안정된 질서가 유지되면서 그 안정된 질서, 신은 뭐라고요? 안정감, 안정된 신적 세계가 확립되는 거예요.

1500년 이후에 농민운동 벌릴 때에 누가 반대했습니까? 루터가 반대했어요. 왜? 농민들 운동할 때 농민들 반 죽었습니다. 귀족들 잡아서, 귀족 자식들 잡아서 바베큐 해 먹었어요. 못 배웠으니까 감정은 처리해야 되겠고 나오는 것은 성질대로 나오니까. 그런데 그걸 듣고 루터가 농민운동을 반대했고, 그 주동자 이름 누구에요? 뮌스터, 그 사람을 이단시했어요. 배고파서 정신이 조절 안 돼서 몸이 몸으로 막 튀어나오니까 감각을 감정으로 푸니까 질서가 완전히 개판되어 버리고 사람이 사는 세계가 아니고 짐승들이 사는 세계가 되지요. 그러니까 그들이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되지요.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하겠습니다. 만약에 여러분 교회에 무식하고 막가파 출신이 만약에 교회에 왔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을 만약에 집사도 안 시키고 평신도로서 이것도 모르고 저것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고 기 팍 죽여 놨는데.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아이고, 오셨습니까? 옛날에 한가락 해겠네요. 한가락 했습니다. 옛날에 좀 놀았지요. 그래요, 집사하세요. 이렇게 해서 그 사람한테 일을 맡겼다 해 봅시다. 그러면 그 사람 옳은 일만 하지요. 이번 주일날 식사당번 누구? 김 집사님, 나오세요. 왜 안나왔습니까? 한번 맞아볼래. 이렇게 된다고. 하는 방법이 우악스럽지요. 그러니까 그렇게 될 때 뭐가 됩니까? 교회가 사랑의 교회가 안 되고 완전히 폭력이 난무하는 교회가 되겠지요.

그러니까 그 점을 그 당시로 한번 돌아가 보면 충분히 그런 신학이 나온 것을 이해가 하겠지요. 왜냐하면 그 당시는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아서 책을 몇 권만, 문자해독을 누구만 했어요? 신부와 고위직만 했잖아요. 밑에 사람은 못 배웠잖아요. 못 배워서 자기 마음대로 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 질서를 잡기 위해서 이런 신학이 나올 수밖에 없었단 말이지요.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건 진리가 아닙니다.

그건 나중에 루터에 와서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누가 좋아했는 줄 알아요? 소영주들이 좋아했어요. 그것도 대영주가 아니고 소영주들이 좋아했어요. 요새 말로 중소기업들이 좋아한다고. 왜? 자유분방하니까. 결국은 루터를 좋아하는데 루터를 좋아하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개떡 같이 살든 짐승 같이 살든 교회여, 국가여, 간섭하지 말라. 우리는 뭐가 있다? 사유재산이 있다.

사유재산이 있다는 말은, 나는 그 누구로부터 아쉬울 게 없다. 새로운 금융지주, 새로운 자본가의 등장은 새로운 신학을 요구한 겁니다. 이제는 누가 나를 간섭할 생각하지 말라. 내 위에 어른은 없다. 네가 뭐 잘났다고. 우리도 가질 만큼 가졌다. 옛날에는 토지가 없어서 빌빌 기었지만 이제는 토지 이상으로 수입을 얻는 그런 자본가가 되었다 이 말이죠.

따라서 이 자본가에 맞는 사유재산을 인정해 주는 그런 신학이 필요한 거예요. 그런데 십자가 이야기하고, 자유 이야기할 때 루터를 대환영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루터가 보기에도 아쉬운 게 좀 많았죠.

우리 다음 시간에는 삼위일체의 발달과정에 대해서 다음다음 주에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십자가를 제대로 알게 하옵소서. 남을 가르친다고 우리가 의인이 아닌 것을 우리가 한시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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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2004년 5월 3일 강의 토마스 아퀴나스 - 이근호 ┼

날짜 순으로 올리겠습니다. 앞부분 1번 2번 강의는 어덯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구요. 구득영 목사님 요청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해 다룬 내용 입니다.

http://222.231.1.74/~woorich/study/busan/busan040503-3.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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