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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지역강의 > 부산강의
2006-03-07 15:46:48 조회 : 4165         
Re..20040517 부산강의-삼위일체교리 배경 이름 : 한윤범(IP:)
20040517  부산강의-삼위일체교리 배경
(강사:이근호 목사)


자, 강의 시작합시다.

오늘 약속대로 삼위일체가 어떻게 형성되었느냐, 왜 삼위일체가 형성되었느냐? 삼위일체를 만들자, 삼위일체 이론 조직하자, 이래서 생긴 게 아닙니다. 삼위일체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두 가지의 외부적인 요소가 있었어요. 하나는 영지주의고, 또 하나는 헬라철학이었습니다. 헬라철학과 영지주의의 이 두 틈바구니 사이에서 기독교는 저것과도 다르고, 이것과도 다르다. 라고 내세우다가 다르기는 뭐가 달라? 하고 붙은 거예요. 논쟁을 붙어보니까 이러니까 다르지. 하고 여러 가지의 이야기들, 이설들을 거기서 내놓기 시작했다 말이죠. 내놓으니까 그게 삼위일체 돼버렸어요.

삼위일체 형성과정에서 교회가 신경 쓴 것은 뭐냐 하면, 그겁니다. 너희들 교회 말 안 들으면 지옥 간다. 하는 그걸 항상 염두에 둬요. 특히 영지주의 같은 경우에. 그러면 영지주의에서 하는 말이, 교회 말 안 들으면 지옥 간다면, 교회 말, 당신이 무슨 말을 뭔가 내놔 봐라 말이죠. 그 말 듣고 복종하면 복종하고 안하면 안하는 거고. 뭔가 딱 규격화된 성경은 이렇고, 하나님은 이렇고, 예수님은 이렇고, 규격화된 뭐라도 내봐라. 내놓고 이것 복종 안하면 지옥 간다는 그따위 소리하란 말이죠. 교회 말도 한두 군데도 아니고, 의견도 한두 개가 아닌데 어떻게 되겠어요.

그래서 항상 제가 삼위일체 염두에 두는 것은 그 전에 먼저 뭐냐 하면, 교회 없으면 구원 못 받는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 가입하라. 교회에 들어오너라. 교회는 믿을 만 하다. 이 말이죠. 교회 밖에서 네가 따로 연구해 봐야 실패할 확률이 많은데 교회만큼은 안정성이 있다. 그러면 교회가 안정성이 있는 이론이 뭔데요? 안정성이 있다고 주장하느냐? 그래 이것이다. 라고 내놓기 시작하면서 그 다음에 교회 바깥에 싸움이 그 다음엔 교회 안에서 싸움이 벌어져요.

너희 내놓은 거 맞기는 맞는 거가? 하고 안디옥 신학과 라틴신학이 크게 붙어요. 그것 잘못 내놓은 거다. 우리가 맞는다. 해서 정치 싸움에서 안디옥 신학은 패배하고 라틴신학이 승리하면서 결국 라틴신학이 정립한 신학이 옳으면 그 다음부터는 삼위일체뿐만 아니고 교회의 예배, 제사, 제도 전부다 라틴신학에서 출발해야 이게 에프엠이 되는 것처럼. 전자제품은 삼성에서 만들어야 되죠. 틀리죠.

모든 것은 라틴신학에서 한번 이렇게 승리한 자가 그 다음부터는 지금까지 승리한 자가 되지요. 중세신학은 라틴신학에 대한 핵이지요. 라틴신학의 정통으로 돌아가기 운동이에요. 돌아감으로 말미암아 진짜 우리는 중세 루터와 칼빈은 우리가 바로 라틴신학과 맥을 통하는 진짜 정통이다, 이렇게 되고.

그 뒤에는 교회가, 중세철학은 하나의 관념론으로 저 밀쳐버리고 이제는 신학에 대해서는 드디어 확립되었기 때문에, 중세철학에서 칼빈과 루터에 의해서 확립되었기 때문에 신학에선 우리가 더 이상 건드릴 건 없고 이제 우리가 할 것은 어떻게 하면 이 사회를 발달시킬까 관심이 이제 그쪽으로 가버렸어요. 신학을 어떻게 발달시키는 게 아니라 있는 중세신학을 그걸 얼마나 자세하게 푸느냐 그 나머지 여력이 지금 21세기 신학까지 온 거예요. 그러니까 루터와 칼빈의 틀을 절대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칼빈은 물론 루터에게 다 배웠고. 그렇게 한 겁니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과학을 주장하고 철학을 주장하는 그런 사람들도 전부 다 신앙에 관해서는 루터주의고 칼빈주의를 그대로 추종하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천주교는 칼빈과 루터와 똑같아요. 교회관도 마찬가지고. 놀랍게도. 그런데 우리가 너무 독선적이었다. 회개한다. 이렇게 나와요. 왜냐하면 지금 대세가 과학시대가 되고부터는 과학시대에 들어갔다고 지난 시간에 얘기했지요. 지난 시간에 워낙 졸아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지요.

과학시대에 적합한 것은 개혁주의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이죠. 개혁주의 신학은 캘빈신학이나 루터까지 합쳐서 합시다. 개혁주의 신학이 과학시대에 맞아요. 이게 뭔 뜻인지 처음 참석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자세히 언급하면, 개혁신학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구원받는 계시는 성경에서 사회를 문명을 발전시키고 진보하는 것은 성경 바깥에서 끝. 끝난 문제입니다. 누가 그렇게 길을 내놨는가? 칼빈이 길을 내놨지요.

칼빈은 말하기를 구원 받는 것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에게 영광 돌리는 것은 세상에 나가서 하라 이 말이죠. 교회에서 하지 말고 세상에 나가서 하라 이 말이죠. 각자 직업이 소명이니까. 목사라 하는 것은 성경의 전문가지만 과학의 전문가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18세기부터 본격화되지만, 사실 그전부터 본격화되지만 18세기부터 이미 단언한 것은 뭐냐 하면, 진보하지 않는 것은 진리가 아니에요. 모든 것이 진보하는 거예요.

18세기 중엽에 1776년인가, 아담 스미스에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면, 이 땅에서 뭐가 신이냐 하면, 시장이 신이에요. 여기 시장. 마켓. 이게 신의 흔적들이에요. 그전까지는 뭐냐? 국가가 신이었어요. 국가가 발전하지 않느냐? 옛날에 국가 발전한다는 것은 망발이에요. 국가가 발전하면 안 되지요. 국가는 산처럼 푸근히 안정성을 갖추어야 돼요.

국가라 하는 것은 모든 영토를 신의 대리자로서, 국가가 신의 대리자라는 것이 어디 나옵니까? 그것이 다니엘서에 나오잖아요. 느부갓네살,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국가라 하는 것은 신의 대리자, 로마서 13장에 보세요. 국가의 권세자는 뭐다? 신의 사자 아닙니까? 그러니까 국가가 발전한다는 것은 국가가 변화해서 앞으로 발전할 여지를 갖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만약에 국가가 발전하고, 발전할 여지가 있다고 한다면,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잡혀 와서 너, 국가의 법에 의해서 처단하노라. 웃기고 있네. 국가가 발전한다며? 네가 뭐 아노. 이렇게 된다 말이에요. 누구 말대로 역사가 승리할 것이라. 조순형이처럼.

국가라 하는 것은 권위를 가지려면 신적 권위가 있어야 권위를 가지는 것이고, 신적 권위라 하는 것은 유동성(?)입니다. 움직이면 안돼요. 중세 국가는 푸근히 하고 앉아있는 거예요. 십자가운동을 왜 벌렸습니까? 가짜 국가와 진짜 국가와 싸움이거든요. 이것은 진짜 국가를 위태롭게 할 것 같으면 용서치 않는 겁니다. 이것은 신의 국가는 궐위될 수 없어요. 영주들이 개별적으로 프랑크 왕국이나 무슨 왕국들이 있지만 그러나 그 왕국들이 결국은 어디에 매이느냐 하면, 영원한 왕국, 교회라는 왕국에 같이 매여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근세에 들어오게 되면 아담 스미스가 이야기했듯이 신이라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는 것은 마켓, 시장이에요. 왜 시장이라는 말을 했냐하면, 각국이 여러 왕국이 식민지를 개발하다 보니까 그것은 국가가 신의 통치를 하는 것이 아니고 국가를 경영을 해야 됩니다. 경영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국사를 경영을 해야 됩니다. 일종의 회사처럼 경영을 해야 된다 말이죠.

그러면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다 보니까 힘의 우위에 있어서 밀리는 쪽의 나라가 생기고, 앞서 가는 나라가 생긴단 말이죠. 밀리는 쪽과 앞서 가는 나라가 생겨버리면 여기는 뭐냐 하면, 자급자족하게 되면 그것은 남은 뭘 하든지 다 되는데 이게 교역, 무역이죠. 교역이 돼버리면 이쪽이 갖고 있는 저들 나라의 헐은 물건이 이쪽 나라에 오면 고가로 불리기 때문에 돈을 더 많이 지불해야 돼요. 그러면 점점 더 선진국과 후진국이 차별이 점점 더 심화된다 말이죠. 그러면 국민들 입장에서는 같은 외국의 제품을 사는데 영국에서는 5달러 주고 사는데 프랑스에서는 10달러 주고 산다면 프랑스 국민들이 가만있질 않죠.

그 당시쯤 되면 왕이라는 개념은 뭐냐? 경영자에요. 그리고 그 경영자를 지목하는 사람은 상공인들이 중심한 의회 중심입니다. 그게 민주주의 아닙니까? 의회 민주주의. 의회 민주주의 투표권을 갖고 있는 그 당시에 모든 남자들이 투표권이 없어요. 투표권은 의회에 있는 사람들이 투표해서 왕을 쫓아내기도 하고 하는데 그 투표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뭘 보냐? 국가 경영 어떻게 했느냐를 보는 겁니다.

스페인 같은 경우에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금을 해가지고 금이 엄청나게 많아서 어느 나라에서 독일 같은데 그때는 독일이 아니지, 보헤미아 쪽이나, 독일 쪽에서 또는 덴마크 쪽에서 공사를 하려면 일꾼들에게 임금을 주려고 하는데 돈이 있어야지. 그때는 돈이 곧 금이거든요. 돈의 가치가 종이에 있는 것이 아니고 돈의 가치가 금덩어리 함량에 있단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스페인에 가서 금 많다면요, 여왕님? 좀 빌려주소. 얼마 줄 건데, 이자? 쳐서 주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점점 종속되잖아요. 그러면 그 국민들이 못살겠다고 달려들고 할 것 아닙니까?

국가 경영에서 문제는 시장에서 제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교역하느냐, 어떤 위치에서 교역이 되느냐하는 그런 문제, 국가 경영문제 때문에 진보해야 되는데 진보하려면 뭐냐 하면, 기술과 과학이 발달해야 됩니다. 기술과 과학이 최초로 발달한 나라가 프랑스였고 그 다음 영국 이렇게 나오거든요. 기술과 과학이 발달해서 그것이 나중에 자본으로 형성되고 이렇게 자본을 가진 나라는 진보하게 되어 있습니다. 발전하게 되어 있어요.

발전하면서 종교개혁의 신학은 뭡니까? 하나님은 어디에 있다? 교회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 바깥에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그런데 과학이 발달되고 나면서 그 다음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되, 뭡니까? 하나님을 현장의 하나님이 아니라 진보의 제일 끝에 계시는 하나님. 그러면 진보에 진보를 해서 유토피아에 이르는데 그 중간과정에 현재 놓여 있다면, 그 중간과정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작용합니까? 그것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하는데 보이지 않는 손이 어디냐, 교회냐? 아닙니다. 그럼 뭐냐? 시장이에요. 시장과 가까이 결부되어 있는 사람은 돈을 벌어서 봉급을 받고 돈을 벌고, 시장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 시장과 무관한 사람은 촌에서 농사만 짓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적게 받기 때문에 돈을 못 버는 거예요. 상공인이 된다는 것, 기술자가 된다는 것, 과학자가 된다는 것, 전부 다 돈과 결부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교회가 하나의 자본가가 됩니다. 중세 때는 교회가 지주가 되지만 중세 넘어 근대에 들어가면 교회가 돈놀이하고 있어요. 왜? 돈이 있는 것이 축복이기 때문에. 돈이 있는 것이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칼빈의 신학에 의하면 열심히 근면하여 절약해서 돈 버는 것은 뭡니까? 그것은 신의 곧 축복이에요. 그러니까 부자는 축복 받은 자고,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서 저주 받아서 가난하게 됐기 때문에 이 차별성을 무시하지 말고 이걸 계속 권고하는 쪽으로 국가 행정이 움직일 때 그 국가는 대다수가, 대다수가 아니라 100% 신자인 그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받게 되죠.

그러면 그 왕은 뭐가 되느냐 하면, 백성들로부터 신의 사자로서 권위를 인정받게 돼요. 카리스마를 인정받게 된다 이 말이죠. 참, 하나님의 뜻대로 국가 경영을 잘 했더니만 이렇게 우리나라가 복을 받아서 잘 먹고, 잘 사는구나. 당신이 바로 신의 뜻이요, 당신이 바로 신의 사자요, 신의 대리자요. 충분하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뭐 대관식 할 때만 성경에 손 얹고 한다고 그게 신이 아니고, 국가를 얼마나 성장, 발전, 진보시키느냐에 따라서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진보라 하는 것은 가난한 자를 억눌러서 빼앗아 올 때나 진보지요. 이걸 제로섬 게임이라 하는데 없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거든요. 있는 것을 위치 변동시킴으로서 한 쪽은 많이 가지게 되고, 한 쪽은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 지식에 21세기에 들어와서 그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가장 크게 최고로 작용하는 데가 어디냐? 주식시장입니다. 지금은 주식시장이 없는 나라가 최빈국입니다. 주식시장이 형성되지 않는 나라는 이 세상에서 최빈국이에요. 주식시장이 형성되지 아니하면 외국자본이 들어오질 않고, 외국자본이 들어오지 않으면 공장 설비가 안 되고, 공장설비가 안되면 노동자는 일거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주식이라는 것이 뭡니까? 돈 놓고 돈 먹기. 특히 옵션제도 같은 것은, 선물제도라 하는 것은 이건 돈 놓고 돈 먹기. 마치 밭떼기하는 것처럼 미리 사가지고 되면 완전히 대박이고, 안 되면 꽝이고. 그러한 돈에 대한 욕구와 욕망을 충족시킬 때 백성들은 그 자유, 시장의 활동성을 마음껏 자유스럽게 보장하는 그 지도자야말로 가장 하나님의 사자다운, 하나님의 종다운 그런 면면을 가졌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는 그 당시의 국가 권위 동시에 교회 권위를 충실하기 위해서 이참에 아주 모델, 에프엠을 만들어보자. 만들어서 삼위일체가 신론, 기독론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에서 출발한 모든 것도 하나의 표준적으로 모든 질서를 휘잡아야 되겠다는 의도에서 삼위일체가 강력하게 사로잡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한 겁니다. 따라서 중세의 신학이나 종교개혁의 신학이나 전부다 그들은 자기 신학이 옳다는 기준을 뭐로 잡느냐 하면, 삼위일체 신학에 따르고 있다는 그런 선서, 그 선서의 범위 안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처음에 강의 시작하면서 헬라 철학과 그리고 복음이, 기독교가 다르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렇게 이야기한 대표적인 사람이 보면, 오리겐 같은 사람인데 또는 터툴리안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이런 사람이 자기는 분명히 기독교를 보호하기 위해서 했다고 하는데 기독교를 보호한 것이 아니고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했어요.

첫 번째 보호방법이 뭐냐 하면, 헬라철학과 하나님이 주신, 예수님이 주신 이 복음과는 다르다. 다른 것을 가지고 자기 교회를 보호하려고 하다가, 두 번째는 그게 안돼서 이제는 많이 모집하기 위해서 신학이 전개됩니다. 많이 모집하기 위한 신학. 그러니까 처음에는 뭐라고요? 지키기 위한 신학에서 그 다음에는 성장하기 위한 신학으로 전환되지요. 상당히 재미있지요. 꼭 개척교회 시작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는 뭔가 다르다. 라는 것을 부각시키면서 이슈를 가지죠. 그 교회가. 일단 안정기에 들어갔다 싶으면 그 다음부터는 포용하는 쪽으로 시키게 되는 거죠. 대표적으로 유스티누스라는 사람인데 그 사람은 체험이라는 것도 기독교의 일종이다. 일단 들어와 잡사봐! 뭐 별 다를 거 없어. 라고 하는 것이 로고스 개념이에요.

그런데 유스티누스의 로고스 개념 이전에 이미 에우도로스라는 기원전 1세기에 철학자가 있는데 삼중적 일신을 주장했습니다. 삼중적하면 뭐 생각납니까? 프로야구 생각나지요. 모르나? 쳤는데 바로 받아가지고 태그아웃하고 퍼스트 던져서, 삼중살.

플라톤이 세 가지 신을 이야기했어요. 하는 절대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부동신하고 그 다음에 데미우르고스라는 이 세상을 만든 신이 있어요. 세 번째는 만들어진 피조물이 있어요. 그래서 플라톤은 삼신을 주장했습니다. 플라톤의 삼신에 의하면 이게 하급신이잖아. 일등신이라는 진짜 신이 있고, 데미우르고스라는 중개자인데 중개자는 인격신이 아니고 중개 원리고 원칙이에요. 복잡하지요.

어떤 인격신은 신은 하나이어야 하니까 플라톤의 생각에서는 신이 둘되면 신이 아니잖아요. 둘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니까. 누가 더 높으냐,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가 더 높으냐 하듯이.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평등시 하지요. 누가 더 높으냐가 성립 안 되잖아요. 그러면 베드로가 수제자는 뭡니까? 베드로가 높아서 수제자가 아니고, 이걸 제대로 모르고, 대변자로서 수제자지요.

일급 신되고 이급 신되고 이러면 안 된다 말이지요. 그래서 이걸 아까 얘기한 에우도로스라는 사람은 그 중개자를 뭐로 보느냐하면, 신격화시켜 버렸어요. 분명히 최고의 신보다는 한 수 아래지만 그러나 우리 쪽에서 쳐다보기에는 신 맞다. 하는 삼중적 일자의식을 이렇게 내세웠습니다.

그런데 삼중적 일자의식에서 그 다음에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필론이라는 사람, 기원전 1세기부터 1세기 중반에 살았던 이 사람은 헬라철학과 기독교와 상관없고 유대교와 관계있어요. 유대교와 헬라철학을 결부시키는데 필론이 로고스를 이야기했어요. 아까 유스티누스의 로고스 이야기를 했다 했지요. 그런데 그전에 이미 필론이라는 사람이 로고스를 이야기했는데 그 로고스가 뭐냐 하면, 이게 이 세상을 다스리는, 신이 다스리는 원리, 원칙입니다. 로고스라 하는 것은 원리원칙이니까 그건 아니죠. 어떤 어르신네는 아니지요. 신의 원리원칙이 담겨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기독교에 들어와서는 영지주의가 두 가지 신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나의 신은 뭐냐 하면, 영지주의도 여러 가지 파가 있는데,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 두 가지 신을 이야기했고 그 중에서 구약의 신은 나쁜 신이고 신약의 신은 좋은 신이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아까 이야기했지만 교회 내에 그런 일이 있을 때에 그때 그 당시 교부들이 뭐라고 반박했느냐면, 거기에 대표적인 사람이 이레니우스라는 사람인데 영지주의와 싸웠던 사람인데, 그 사람은 뭐냐 하면, 신은 이론 불구하고 하나다.

그러니까 삼신론으로 출발한 게 아니고 단일신, 단일신론부터 생각해서 나중에 삼신론까지 갑니다. 처음에는 단일신이에요. 우주론이라 하고 단원설, 여러 가지 설이 많은데 왜 그 단일신을 이야기했느냐 하면, 영지주의가 하는 말이 구약의 신은 옳은 신이 아니고, 신약이 신이 옳은 신이다. 이렇게 했는데 그 사람들, 영지주의가 왜 그런 소리를 했냐 하면,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인간이 뭘 한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뭘 해주어야 되냐 하면, 인간의 고통과 절망에서 구원하면 그게 하나님의 자기 서비스 정신이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영지주의 말 한번 들어보세요. 영지주의 말은 뭐냐 하면, 신은 계신데 신이 있어서 우리한테 요구하는 신이 아니고 신이라는 것은 신약의 신이 좋은 신이라고 했지요. 왜 좋은데요?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도와주는 신이라도 좋다 이 말입니다. 뭘 도와주는데? 사람 살면서 괴롭잖아요. 힘들잖아요. 뭔가 인생사는 게 힘들기 때문에 뭔가 진짜 신이 있다면 이 세상이 이럴 수가 없다 이 말이죠.

지금 교부들에게 있어서 제일 고민거리가 뭐냐 하면, 이 세상에 악이 있는 문제 때문에 제일 고민거리였어요. 악이 있다면 신은 능력 있는 신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얼마나 무능했으면 자기 마당에 그러한 진드기 같은 놈들과 나쁜 놈들이 설치는 걸 보고 멍하니 바보 같이 그게 무슨 신이고. 뭐 믿을 만 해야 신이지. 그러니까 신이라면 악이 없어야 되는데 실제로 악이 있으니까.

교부들 생각에 이것은 뭔가 하나님께서 특별한 뜻이 있어서 뜻이 뭐냐 하면, 악은 없다. 다만 선이 결핍됐기 때문인데 그것은 나중에 고쳐 가면 된다 그거죠. 살살 구슬리고 달래주면 그 악한 놈들도 지옥 있다, 까불래? 예수 믿으라 하면, 예, 믿겠습니다. 그러면 선이 되는 거죠. 뭐가 빠졌기 때문에? 복음이 빠졌기 때문에 악이지, 복음만 들어가면 어떤 놈도 선한 자가 된다 이 말이거든요.

이게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 하면, 교회가 방어도 해야 되고 또 포섭도 해야 되고. 바빠. 많이 바쁘다니까. 김용옥 씨가 얼마나 전에 강의시간에 복음이 1800년대에 들어왔는데 어떤 그런 것이 다 있나, 세상에. 그럼 복음을 믿어야 구원받는다면 복음 들어오기 전에 옛날에 우리나라 훌륭한 선조들은 다 지옥 가란 말이냐? 하니까 완전히 박수요. 좋아가지고. 무슨 그따위 하나님이 다 있냔 말이죠.

그러면 신이 필요 없다는 건 아니고 다만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도 사람에게는 나름대로의 본성이 있어서 다만 몰랐던 것뿐인데 보충하면 된다 이 말이에요. 좀 보충하면 구슬리고 달래면 충분히 되는 거지요. 그렇게 해서 교회가 커집니다. 교회가 커지는 데는 교리적으로 포섭해서 그렇고, 또 하나는 구제사업을 많이 했어요. 자기 먹을 것 안 먹고 구제했습니다. 남아서 구제한 것이 아니고. 꼭 여호와증인 같아요. 14만 4천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도해야 돼요. 전도 안하면 14만 4천은 없어요. 그러니까 전도 안하면 어디 갑니까? 지옥 간다니까. 14만 4천에 포함 안 되니까.

자기 구원 받기 위해서 제가 영지주의 이야기하는데 영지주의가 뭐냐 하면,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완전히 죽을 둥, 살 둥 다하는 거예요. 이게 대순진리회도 마찬가지에요. 대순진리회, 안산홍, 안산홍 이 사람 죽었지만. 안식교. 모든 사람들이 목회자들이 교인들을 윽박지르는 것이 뭐냐 하면, 그따위 식으로 천당 못 간다. 이 한 마디만 하면 깨끗하게 정리돼요. 뭐 깊은 교리가 필요 없어요.

에라이, 그따위 식으로 천당 가나 한번 봐라! 전도도 안한 놈이 무슨 천당 가고, 헌금도 안한 놈이 천당을 가나? 돈 깔고 죽어라! 이놈들아! 대학생한테 공납금 깔고 죽어라! 지옥 가라하면, 예, 공납금 가져 왔습니다. 공납금 있으면 타내면 될 텐데 너희 천당 갈 생각하면 지금 여기 얼마나 헌신한, 말만 주둥아리로만 하지 말고 진짜 한번 보여라! 말이죠. 공납금 얼맙니까? 300만원이요? 그것 가지고 대순진리회 부동산 짓습니다. 충분히.

무슨 목회를 그렇게 어렵게 하냐 말이죠. 그러니까 대순진리회나 이런 사람들, 안식교 보면 목회를 어렵게 하는기라. 간단한 문제거든요. 도를 아십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집에 조상제사 드리면 복 받고, 제사 안 드리면 저주받는다는 그거거든요. 도 이야기가 그 이야기에요. 제사 드리는데 얼마 받느냐? 100만원, 200만원. 그걸 대순진리회에서 그대로 한다고.

그런 수법이 초대교회에도 마찬가지에요. 뭐냐 하면, 교회 없이 뭐도 없다? 구원 없다. 간단한 문제거든요. 그러니까 교회가 너희들한테 얼마나 많이 해 주었는데 교회 말 안 들어? 그러면 너희는 끝난다, 이런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모든 신학이 무슨 중심이냐? 교회중심으로 돌아간다 말이죠. 지금 개신교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중세에 루터나 칼빈이 그렇게 카톨릭을 치면서도 결국은 뭐로 돌아섭니까? 교회 중심으로 돌아섭니다. 루터는 그래도 처음부터 일관되게 불가견교회, 다른 말로 하면, 무형교회를 주장했지만 칼빈은 초반에 맛 좀 뵈다 그 다음에 교회 중심으로 싹 돌아섰어요. 그래서 지금도 칼빈의 후예들은 그 사람이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를 무엇으로 측정하느냐 하면, 예수 믿느냐로 측정하는 것이 아니고 어느 교회 다니십니까? 노회 있습니까? 그걸로 측정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칼빈이 그렇게 가르쳤다는 거예요. 칼빈은 정통 삼위일체 교리를 따르기 때문에 삼위일체 맞으면 칼빈 맞고, 칼빈 맞으면 우리 맞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보고 믿으라고 하지 마라. 이 말이죠. 그렇게 되는 거지요.

로고스 신학을 개입하면서 문제는 로고스와 단일신이 맞지 않는다는 게 문제예요. 이게 고민이라. 삼위일체 신학에서 제일 첫 번째 딜레마요 마지막 딜레마, 이겁니다. 해결이 안돼요. 그래서 여러 가지 이론들이 나와요. 로고스가 예수님이냐? 로고스가 예수님 됐느냐? 로고스가 예수님의 인성은 아니고 신성이냐? 로고스가 예수님 인성을, 신성을 만들어냈느냐? 이런 몇 가지 이론들이 내놓고 싸움을 벌입니다. 누구끼리? 이단끼리? 아니요. 정통끼리. 교부들끼리. 웃긴다하이. 아직 삼위일체 시작도 안했는데 싸우고 있어요.

그런데 로고스가 예수님 가운데 인성과 신성이 있는데 그 중에 신성이 로고스냐? 아니면 로고스 자체가 육신이 되었느냐? 로고스 자체가 인간이 되었느냐? 로고스가 인간이 되었습니까, 육신이 되었습니까? 이거 참, 골치 아픈 이야기다. 그래서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다는 설과 로고스가 살이 되었다는 설과 로고스가 인간이 되었다는 설. 기독론에도 세 가지 설이 있어요.

그런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 모든 그런 설을 내세우는 그 배경에는 뭐가 깔려 있다? 교회부흥과 관련되어 있어요. 교회권위성 다툼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안디옥의 교회들은 안디옥의 민중들이 원하는 신학을 삼위일체를 빗대어서 핑계 삼아 드러내고, 라틴교회에 있는 교인들을 고려한 라틴 신학자들은 라틴신학에 맞는 것을 그걸 내고, 같은 라틴계통이지만 저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에 신학자들은 그쪽에 있는 민중들의 교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그쪽에 맞는 신학을 해버리고. 그 나중에 누가 평정했습니까? 라틴신학이 평정했잖아요.

안디옥 신학은 뭐냐 하면, 로고스가 예수님 된 것이 아니다 이 말이죠. 로고스가 예수님 돼버리면 로고스는 뭐라고요? 신이거든요. 신이라고 하지 말고, 로고스가 신 돼버리면 신이 둘되니까 사람들은 로고스를 신이라고 하지 말고 신성이라고 해야 돼요. 로고스가 신되는 것은 나중에 또 문제가 돼요. 나중에 또 튀어나와요. 로고스가 신 돼버리면 신이 몇입니까? 둘되니까 그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처음에는 뭐라고요? 때려 죽으나 사나 뭐 해야 됩니까? 단일신이어야 돼요. 왜? 뭣 때문에? 뭘 겨냥해서? 영지주의를 겨냥했어요. 영지주의가 뭐가 나쁜데 겨냥하느냐? 영지주의가 나쁘다 이전에 영지주의가 교회 말을 안 들은 기라. 로마교회 말을 안 들은 거예요. 말을 안 듣는 놈은 어떤 구실을 만들어서라도 이단으로 만들어야 되는 거라. 이근호 신학을 추종하는 그까짓 것 가지고 이단이라고 만들듯이 어떤 구실을 달더라도 만들어야 된다니까요.

여기서 삼위일체 이론을 잠시 중단하고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삼위일체를 다 배웠고 어렴풋이 기억은 나지만 이 삼위일체 지금 제가 이야기한 논쟁을 보면서 여러분, 깜빡 뭣을 잊어버리느냐면, 잘 생각하면 논쟁 속에 빠져 들어가지, 가만 있어봐, 성경은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그걸 놓치기 쉬워요.

자, 여러분, 성경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삼위일체는 교회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출발하는 이론이라면 그래서 오늘날도 삼위일체 안하면 이단이라고 전부다 이구동성 이야기하는 이 판에 성경을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말이죠. 그만 삼위일체가 성경을 대신해 버릴까요? 성경이야기하지 말고 삼위일체 이야기한 걸로 성경의 전체를 같이 합치된 것으로 동의해 버릴까요? 그래야 됩니까? 그럴 수 없지요.

그렇다면 논쟁에 들어가 버리면, 이쪽의 약점, 저쪽의 약점 해서 약점을 빼먹고 서로서로 어느 편을 할까? 어느 것을 약점을 줄이는 방향으로 새로운 제3의 이론을 만들까?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하나의 사변적이고 그래선 안 되고, 성경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는, 그러니까 성경의 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참 그러니까 잘 들으세요.

신론은 교회에서 신론을 만들어낸 게 아니고, 실제로 계셨던 예수님에게서 신론이 나오는 겁니다. 교회에서 말하기는 신이 있고, 예수 있고, 교회 있고 이렇게 보잖아요. 그게 아니고 성경은 예수님이 나타난 걸로 하나님이 나타난 것이에요. 교회라 하는 것은 예수를 믿는 그게 교회지, 교회 있어서 사람들 포섭하거나 혹은 교회 자기 자신을 수호하고 방어하기 위해서 성경을 통해서 기독론, 신론을 만들어내는 그런 경로, 거꾸로 된 경로를 성경은 용납을 안 해 줍니다.

왜 이 이야기를 해야 되냐 하면, 저나 여러분들이 진짜 주님의 백성이라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대로 이야기하고 손 털면 그만 이에요. 너 삼위일체 어떻게 생각하나? 삼위일체 네 이론은 맞나? 질문은 그렇게 들어오더라도, 너희들 그렇게 만든 내막을 아냐, 배경을 아냐? 그래도 가볍게 넘겨 버려야지, 같이 논쟁에 말려들어가서 이게 맞다, 생각해 보세요. 로고스에서 인성이 되었습니까, 로고스에서 인간이 되었습니까? 만약에 로고스에서 인성이 돼버리면 신성을 포기하고 인성이 되어야 돼요. 이것은 안디옥 신학이에요.

안디옥 신학이 뭐냐 하면, 예수님은 두 본성을 가지고 있단 말이죠. 예수님은 두 본성을 갖고 있으니까 이 문제가 큰 문제에요. 예수님이 밥을 먹을 때는 인성이 그런 겁니까, 신성이 그런 겁니까? 그건 인성이지. 그럼 물 위를 걸을 때는 뭡니까? 인성입니까, 신성입니까? 그건 신성이지. 그럼 땅에서 물에서 막 걸을 때는 이 때는 뭔 때냐? 안디옥 신학이 이렇게 이야기할 만한 이유들이 있어요. 따져보면.

라틴신학에서 단일신론, 유스티누스. 라틴신학은 이렇습니다. 라틴신학은 뭐냐 하면, 사벨리우스의 양태론. 양태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어요. 두 가지 종류를 다 이야기해 드리면,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이 없어요. 나사렛 예수는 오늘날 패션 오브 그리스도나 전에 나왔던 예수님 영화 많잖아요. 그 예수님 영화의 특징이 뭐냐 하면, 신의, 아버지 주시는 힘이 있을 경우에만 양자가 되는 양자설입니다. 삼위일체 이론에 의하면.

무슨 뜻이냐 하면, 그냥 인간이에요. 목수에요. 태어날 때 자기도 아무런 자각이 없어요. 그런데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그때 자각을 하게 됩니다. 자각을 하면서 그 다음에 성령에 그 힘에 이끌리어, 성령이라 하지 않지요. 힘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기도하다 보니까 아하, 내가 이것을 해야 되겠구나. 내가 이제 목수일 때려치우고 이걸 해야 되겠구나. 비로소 그걸 안다는 거지요.

소설이나 영화가 왜 그래야 됩니까? 그래야 대중들과 이게 연결고리가 있잖아요. 그래서 안디옥 신학, 신은 유일신으로 남고, 예수님은 하급신으로 뭘 받을 때? 요새 말로 성령, 또는 능력을 받을 때는 두 번째 신으로서 등극하는 거예요. 로마서 1장에 비슷하게 있잖아요. 양자의 영을 받아서 메시아 되었다고. 그런 유형의 단일신론이 있고.

또 하나 뭐냐 하면 아예 노골적으로 하나님이 자기 변장을 했다는 거지요. 아버지의 역할을 할 때 있다가 이쯤해서 아들 해 볼까, 아들 하다가 성령하다가, 형태만 바꾸는 그걸 양태론적이라고 해요. 그런데 왜 이렇게 양태론적으로 해야 되냐면, 그래야 유대인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의 신 아닙니까? 유일신이거든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교회가 민중들에게 교회는 이것이 정통적인 신학입니다. 라고 제공해야 될 그러한 중차대한 임무가 있거든요.

그런데 그 임무 중에 하나가 바로 신구약을 결합을 시켜야 돼요. 지금 영지주의는 성경을 펴놓고 하는 말이 세상에 성경에 어떻게 구약의 여호와하고 신약의 예수님하고 같은 게 어디에 나오느냐 말이죠. 그것은 지금 유대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여호와냐 이 말이죠. 그건 말도 안 된다. 그걸 아직도 세상에 수억이 기독교 신자고 믿는다 하지만 말이 안 된다. 솔직하게 해보자. 우리 선입관 다 떼어버리고 솔직해 보자. 구약의 신은 화내고 질투하는 신이고, 신약의 신은 죄 지었다고 용서해주는 신 아이가. 그러니까 구약의 신은 믿지 말고 신약의 신을 믿으면 된다 이 말이죠. 유식한 체, 공부 많이 한 체 하지 말고, 무식한 아줌마도 볼 줄 알 수 있도록 그렇게 하자 이 말이죠.

그러니까 유식한 신학자가 마, 그게 너희들의 무식의 폭로 아이가. 이렇게 나와서 그러면 납득하도록 이야기해 봐라. 납득해 줄께. 해서 나온 게 삼위일체라고. 그러니까 이것은 어쩔 수 없이 인간사회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아까 이야기한 그런 단일신론하다 보니까 뭐가 되느냐 하면, 구약의 유대인의 하나님 여호와와 일치된다니 그건 좋은데 그것은 오케이인데 문제는 로고스가 걸리거든요. 하급신 아닙니까? 로고스는 딴 게 아니고 그 하나님,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신성이다 이렇게 해버렸거든요. 왜? 그러면 시원하게 풀렸으니까.

자, 그러면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이 뭐냐? 말씀이 육신이 된 거냐, 사람의 옷을 입은 거냐? 입었다고 하면 영지주의가 되니까 그건 안 되고. 여기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 삼위일체 공부하다 보니까 공부하기 전에는 삼위일체가 어떻게 흘러가는가, 궁금했는데 공부하다 보니까 참, 시시한 걸. 그거 뭐 못 알아 되겠냐 그런 생각 안 듭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육신을 허용한 것이냐, 아니면 진짜 육신이 돼버린 거냐? 육신이 돼버리면 곤란해요. 육신이 돼버리면 말씀이 없어져요. 그렇잖아요. 말씀이 육신 속에 들어간 겁니까, 육신으로 변한 겁니까? 육신은 사람이라 하고. 사람이 돼버린 겁니까, 사람이 몸에 입은 거예요? 지금 이 싸움이 아직도 안 끝났어. 이 싸움이 아직도 안 끝났다고. 로마서 8장 3절 때문에 그래요. 로마서 8장 3절에 뭐라 되어있죠? 뭐라고요? 죄 있는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그러니까 원판은 양보 안하고 사람 껍데기만 육신 껍데기만 덮어써서 잠시 빌렸다가 다시 부활할 때는 그동안 입었던 것, 홀랑 벗어버리고 원상태로 돌아간 게 되지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게 이단인데 흔히 말하는 이단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뭐가 돼요? 지금의 예수님은 사람입니까, 사람이 아닙니까? 사람이 아니지요. 잠시 사람이었던 적이 있었지요. 그런데 이게 문제가 커요. 문제가 크다고. 그러니까 로마서 8장 3절에 '육신의 모양으로' 되어있는데 만약에 말씀이 사람이 되어버리면 그 말씀은 어디 있습니까? 로고스 어디 있어요? 아니 말씀이 로고스 아닙니까? 말씀하니까 또 로고스, 말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요한복음에 로고스가 말씀이라 합니다. 로고스가 사람 됐잖아요. 그러니까 로고스, 사람 하니까 너무 추상적이니까 일단 말씀이 사람 됐잖아요. 그럼 말씀 어디 있습니까? 없잖아요. 어디 빙어입니까? 도플갱어입니까? 한 사람이 두 입 있게.

되었다는 말이 뭐예요? 되었다는 것은 빌려줬다는 게 아니고 이쪽은 팡하고 없어지고, 이쪽은 됐다잖아요. 그러니까 없잖아요. 말씀 없잖아요. 제 말을 못 알아듣는데, 고함만 지른다고 이해되는 게 아니죠. 내가 만약에 승진한다하면, 철수가 순자 된다 합시다. 철수가 어디 있습니까? 없지 뭐.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말씀이 뭐 됐어요? 사람이 되었어요. 없는 거예요. 그건 아니라는 거예요. 그건 아니니까 그러면 요한복음 1장에 의하면 뭐 돼요? 말씀이 육신이 됐지요. 로마서 8장에 의하면 뭡니까? 육신의 모양을 입었지요. 둘 중에 어느 겁니까? 바울이 이기는가, 요한이 이기는가, 붙은 겁니까? 둘 중에 어느 거냔 이 말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뭐 됐습니까? 예수님이 돼버렸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제3의 인물이 등장해 버린 거어요. 예수님은 이 땅에 없었고 말씀만 있었는데 말씀이 육신이 됨으로써 육신도 없고, 예수님도 없고, 곧 제3의 인물, 예수님이 등장한 거죠. 그런데 예수님 속에 말씀이 어디 있느냐? 말씀이 없어야 되는데 없다하니까 너무 심하니까 예수님이 완전히 인간 돼버리잖아요. 인간 돼버리니까 인간 쪽에서 완전한 인간이지. 죄 없는 흠 없는 인간이겠죠. 인간되니까 어떻게 생각하느냐면, 거기에다가 신성으로서 남겨 둔 거예요.

이제 알겠어요? 왜 안디옥 신학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로고스라 한 이유를 알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신성을 남겨 둬야 뭐와 연관됩니까? 아버지하고 연관이 되죠.

자, 보세요. 예수님 속에 뭐가 있다? 두 개가 들어있어요. 하나는 인성이 들어있고 하나는 신성이 들어있지요. 신성을 남겨 둬야 하나님은 뭡니까? 신성이죠. 신성과 연결고리가 성립되지요. 연결고리가 성립되면서 완전한 인간, 완전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인간으로 들어왔다가 그러니까 밀가루로 들어왔다가 떡 됐지요. 여기서 밀가루로 들어왔다가 여기 변압기에서 내부적으로 교환됩니다. 인성으로 들어왔느냐? 신성으로 바꿔줄게. 바꿔줘서 신성이 되어서 신성으로 바꿔져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이거죠. 이게 하나의 변압기 역할을 하는 거예요. 변압기.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뭐가 문제가 되느냐 하면, 오리겐의 신학이 문제돼요. 오리겐의 신학은 영과, 혼과 육으로 되어 있잖아요. 이것이 너무 복잡하다 해서 뭐로 바뀌느냐 하면, 나중에는 영혼과 육로 바꿨다가 영혼과 육하니까 참, 말장난 보세요. 영과 혼과 육 되었다가 이게 합쳐 영혼 되잖아요. (    )하니까 영과 육으로 되잖아요. 인간 속의 영은 어거스틴이나 이런 쪽에 보면 인간 속에, 다시 이야기합니다. 복잡한 것 들어갑니다.

거듭난 사람은 구원론에 의하면, 지금까지 한 것은 신론입니다. 자, 신론과 구원론과 개방시키면서 복잡해집니다. 왜 복잡해지냐 하면, 인간은 뭐로 되어있다? 헬라철학에 의하면, 영과 육과 혼으로 되어 있다. 아까 영과 혼과 (    )했으니까 뭐 돼? 영혼과 육. 그것도 진짜는 뭐고? 영혼과 육으로 되어있지요.

그런데 인간은 영혼과 육으로 되어 있잖아요. 그럼 영혼과 육으로 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구원론에 의해서 이그나티우스의 구원론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이죠. 하나님의 형상이 무슨 부분? 인간 속에 있는 신성부분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러니까 아까 여기에서 인간 속에 들어올 때 그냥 들어오는 게 아니고, 인간 들어온다 생각하지 말고 뭐가 들어온다? 영혼과 몸 또는 육이 결합된 어떤 존재자가 들어온다 생각해 보세요. 들어오면 주님께서 어디를 간섭해야 됩니까? 영혼을 간섭해야지 몸을 간섭하면 안 되잖아요.

왜냐하면 예수 믿어도 죽잖아요. 그러니까 자기가 관찰해 보니까 예수 믿어도 부활체가 안 되고 그냥 썩어 죽더란 말이죠. 아아, 여기서 하나님께서 뭣은 간섭 안한다? 몸은 나둬 버리고 뭐만 한다? 이것만 떼어 논 거에요. 이것은 떼어버리고 어디에 들어간다? 예수님께서 인간 속에 들어가지요.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예수님의 인성 속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영혼과 육이 들어갔지요. 그러니까 육은 손 안대니까 영혼 들어가서 어디에 갑니까? 문제라. 예수님의 육신에 들어갑니까, 영혼에 들어갑니까? 육신에 들어갔다 영혼에 들어갔다가 (    ) 말이죠. 예? 어느 쪽이에요?

이게 지금 한국교회의 잡 교단들, 자기 교단의 정당성을 유지할 때 이런 이론에 이런 이론이 정립 안 되어 있는데 무조건 뭔가 뜰 거 없나? 뭐 화끈한 것 없나? 워치만 니 계통들, 박옥수 계통들. 박옥수는 뭐라 합니까? 절대로 때려 죽여도 예수 믿고 난 뒤엔 죄 없다. 죄 없다가 아니라 죄를 절대로 짓지 않는다. 그래서 밭두렁부터 도시까지 한국교회가 다 썩었다 하거든. 박옥수의 주장이 조선일보에 광고 이만큼 해서.

그러니까 여기서 뭐가 문제죠? 지금 신론과 뭐가 만나서 그래요? 신론과 뭐가 만났다? 신론과 구원론이 만났잖아요. 아시겠어요? 신론에서는 좋았는데 갑자기 구원론, 자세한 미세한 부분, 구원론과 만나니까 대혼란이 벌어져 버려요.

대혼란이 벌어지면서 심지어 예수님의 인성 속에 뭐가 들어있다? 영혼과 육으로 되어있는데 그러면 예수님의 의지는 어디 있습니까? 이게 두 의지설이에요. 예수님의 의지 어디 있습니까? 의지가 몇 개 돼야 돼요? 한 개, 두 개, 세 개 돼야 됩니까? 의지가. 이쪽의 인간의 의지는 어디 있습니까? 인간의 의지가 몸에 있다는 사람은 없지요. 최근에 있지요.

최근에 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의지는 몸에 있어요. 다시 말해서 DNA를 구성하는 세포의 자발적인 활동에 있다고.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의 신체에 있는 이 세포들은 자기가 전체를 구상해서 세포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나름대로 맘에 맞는 세포들이 있어요. 거기에 맞는 세포들이 간을 이루고, 위장을 이룬다고. 간하고 위장이 싸워버리면 간은 승리하는데 우리 몸이 죽고 하는 현상이 벌어진다고요.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우리 인체를 못 고칩니다.

옛날에는 인간 전체가 하나의 통째로 보고 고쳤잖아요. 지금 그게 아니고 뭐냐 하면, 지역구도 지방 권리를 존중해야 돼요. 지금은 지방시대라 지금. 둘이 잘 달래줘야 돼. 위하고 간하고 싸우면. 세포가 우리 위해서 있는 세포가 아니라 세포 자기 위해서 세포가 있어요. 이것은 과학적으로 실험적으로 증명이 되고 있어요. DNA가 각자 각자가 독자적인 활동을 하니까 DNA지 인간을 위한 DNA가 아니란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의 의지, 배고프단 의지가 어디서 생깁니까? 머리에서 생깁니까? 아니라니까. 이것은 배고프다 하는 것은 여기에 위장이 텅텅 비었을 때 여기에 신경조직까지 신경이 올라가면서 두뇌에서 배고프다, 배고프다, 삐리삐리 배고프다, 이게 왔을 때에 그 다음부터는 배고프구나 식당가야 되겠다. 몸이 움직이게 되어 있다고요.

그러니까 이 정신이 없다는 게 아니고, 그 사람들이 정신없다는 말 쓰는 게 아니고   정신없다하면 정신없는 사람이죠. 정신이 있는데 정신이 있는 것은 뭐냐 하면, 그런 몸들이 움직이면서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그 이미지가 그 투영이 정신이고, 정신을 쪼게 보니까 각자 각자 독자적인 활동이다 이 말입니다.

정신이 없다가 아니라 마치 간 있고 허파 있는 게 아니고 옛날에는 우리 몸 안에 간 있고, 허파 있잖아요.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고 간 있고 허파 있고 창자 있고 하는데 그걸 모아 노니까 아무개더라. 김철수더라 이 말입니다. 김철수가 되는 거지요. 그걸 누가 모아 노는가? 자기 아버지, 자기 엄마의 DNA에서 모으지. 김철수가 모아 논 게 아닙니다. DNA가 모아요. 아버지, 엄마 반쪽 닮아요. 반쪽 닮아서 만들어 낸 거예요.

자꾸 정신, 영혼 이렇게 생각하지만 정신, 영혼이 그걸 부수적이라 하는데 부수적이라는 게 뭡니까? 이게 먼저 있고 이게 목적을 가지는 게 아니고 있으니까 하나의 그림자다 이 말입니다. 뭐가 있는데 나오는 게 그림자, 부수적이죠. 정신은 부수적이기 때문에 정신을 바꾸려면 어떻게 하면 돼요? 배고플 때 정신이 혼미할 때 바꾸려면 정신아, 맑아져라! 이러면 안 되고 간단한 문제에요. 밥 먹으면 정신은 맑아지는 거예요. 왜? 정신은 부수적이기 때문에. 뭐 어려워요. 간단한 문제라니까. 믿음 좋다. 돈 많이 벌면 기분 좋으면 믿음 좋은 거고, 돈 없으면 짜증나면 그건 믿음 없는 거고. 믿음 좋다는 게 부수적인 문제라니까 현대 교인들에게.

그래서 삼위일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을 안 된다 하는데 의지가, 말을 어렵게 했는데 쉽게 해 봅시다. 제가 방금 이야기한 것을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손가락이 아플 때 아프다는 것을 처음으로 시작하는 것은 손가락입니다. 손가락 아프라고 명령한다는 것이 아니고 손가락이 아프니까 몸이 아프고 머리 아프고 다 아픈 거예요. 따라서 출발점을 몸에서 출발해 버리면 의외로 문제가 수월해지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까지는 뭡니까? 이 고상한 영혼, 아이고, 하나님이 만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영혼. 이 영혼을 고상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배가 아파도 배한테 그러는 거예요. 이놈아, 참아라! 이놈아. 내 영혼 조지겠다. 너 때문에. 너 배 아픈 것 때문에 내가 사랑은 못 베풀겠다. 참아라! 이게 뭡니까? 바알과 아세라 그거죠. 지금 정신은 옛날 육체에 의해서 정신은 뭡니까? 신을 향한 마음이 있으니까 그게 고상하니까 유지하고 싶단 말이죠.

그런데 막상 제단의 송아지 두 마리는 지금 불 안 붙고 있단 말이죠.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옛날 가졌던 신적인 영혼을 유지하면서 몸이 제발 무슨 말을 들으라? 이 고상한 내 영적인 말을 들으라, 몸아! 하고 몸을 때리는 거야. 몸은 아픈데요. 아파도 참아. 이놈아! 참아야 돼요. 하다보면 나중에 너무 맞아도 안 아플 수가 있죠. 엑스터시 한 상태죠. 은혜 받은 거예요. 손바닥 치면 손바닥 아픈 줄 모르듯이.  

바로 영, 혼, 육 삼분설인데 문제가 이렇습니다. 이 사람들이 오늘날 현대과학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옛날식으로 영혼은 앞서 가고 아주 괴로워 나태하고 못된 육신은 나중에 따라오니까 이 죄 많은 육신아, 차라리 손가락 끊어버릴까? 예수님도 그랬지요. 네가 죄 짓게 하거든 네 손도 끊어버리고, 눈도 빼버려라. 에이, 눈 빼버릴까? 실제로 눈 빼버리고 손가락 잘라버리고 고추 잘라버린 사람이 안 있습니까? 고추 자른다고 참, 음란이 없어지고. 생각 괜찮아. 기가 찰 문제입니다.

그런데 방금 이야기한 국지적이라고 하지요. 지엽적인 감각에 의해서 영혼이 조종 받는다? 지옥론이죠. 그 이론이 우세 정도가 아니고 진리처럼 통하거든요. 현재에. 그러니까 정신은 뭐라고요? 아까 이야기한 정신은 하나의 모이다 보니까 일종의 분위기죠. 그 말이 적당할 것 같아. 일종의 건강한 육체에서 나오는 건강한 정신의 고상한 분위기죠. 분위기인데 그 분위기가 너무나 그리워서 너무나 좋았기 때문에 지금은 그 분위기가 안 나올 때는 자꾸 강요해서 때려서라도 그 분위기를 유지하려고 하더란 말이죠.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의지가 어디서 나옵니까? 의지가. 그런데 의지가 두 군데에서 나옵니다. 베르그송은 의지가 두 군데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과거의 의지, 신의지. 보세요. 얼마나 멋있는 말해요. 한 때 지나갔던 괜찮았던 의지, 새로운 의지.

남자들은 첫 사랑은 못 잊잖아요. 여자도 마찬가지지만. 그러면 다음에 사랑하는 사람은 어디다 맞추려 합니까? 잊지를 못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 하면, 새로운 것에 만족해야 하는데 그것과 비교하면서 새로운 사랑을 하겠지요.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첫 사랑은 늘 아름답잖아요. 사실 또 하라면 안 아름다운데 아름다움이 남잖아요. 그러면 두 번째 사랑은 아름다움을 맞추려고 하지요. 맞추니까 두 번째 사랑이 백날 다 따라와도 뭘 못 미친다? 첫 사랑 못 미치니까 그냥 아이고, 할 수 없지. 뭐. 너하고나 살지. 뭐. 자꾸 이런 쪽이라. 왜? 첫 사랑은 신화적 표상으로 남고.

그런데 따져보잔 말이죠. 베르그송 말이. 그 첫 사랑은 어디 있는데. 그것은 과거 때, 그 육체가 만들어낸 그때 사랑이고. 지금의 시시하게 여기는 두 번째 사랑은 시시한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첫 번째 사랑을 아름답게 유지하기 때문에 생긴 그러한 피해 입은 사랑이죠.

목회 천명하다 두 명하고, 세 명해 보세요. 못 견딥니다. 그런데 교인들 하나도 없는데 두 명 나와 보세요. 즐겁지요. 왜냐하면 비교 대상보세요. 비교대상이 너무나 좋잖아요. 처음 목사 될 때 얼마나 기뻤습니까? 목회지 없어도 기뻤어요. 나는 목사라고. 지금 목사하면 가져가라 해요. 귀찮으니까. 별로 좋아하지 안잖아요.

그러면 제가 묻는 것은 의지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니까 과거 의지는 의지가 아니고 의지는 하나밖에 없는데 그 의지라 하는 것은 지금 인간의 육체와 정신이 혼합돼서 만들어진 거죠. 그런데 그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니까. 왜냐하면 이분론이기 때문에. 인간을 두 조각, 또는 세 조각보기 때문에 도저히 그런 사고방식이 안 나와요.

삼위일체는 뭐냐? 그때 그 당시 그 사람 신학이에요. 삼위일체가 뭐냐 하면, 삼위일체 이런 교회들 뭡니까? 그때 그 시대에 유행했던 거예요. 교회가 원했던 신학이었고. 뭐 결론은 간단한 문제에요. 그때 민중들이 원했던. 왜? 모든 민중들은 헬라철학에 물들었기 때문에 인간은 영혼이다. 그럼 육은 뭐냐? 고생스러워 죽겠다 말이죠. 그럼 뭐라도 살자? 영혼이라도 살자. 교회는 뭐하냐? 영혼 안 살려주고. 살려 줄게. 누구? 예수님께서 오셨다. 아멘. 끝난 문제에요.

그러니까 지금 삼위일체 문제를 거론하라면 도대체 신론하고 구원론하고 연관이 됩니까, 안 됩니까? 연관이 안 됩니다. 되지를 안 해요. 왜 되지를 않으냐 하면, 성경적으로 봐서 예수님을 통해서 비로소 예수님의 아버지로서 참 하나님, 진짜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소개하는데 문제는 어떤 사람이 이걸 납득을 하는 그 관계, 또는 그 상황, 그 장, 영역, 그 영역을 뭐라 하면, 이걸 구원 상태로 봅니다.

그러니까 구원론이 따로 있을 리가 없지요. 구원 안 되는 놈을 구원 시켜줄 필요가 없다니까요. 구원 안 되는 놈, 납득시키는,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유스티누스는 호교론자, 교회를 변호하고 잘 해보려고 하는 사람들. 사람은 안 가르쳐서 그렇지 가르치면 되게 돼있다. 인간은 철학을 몰라서 그런데 조금만 더 보태면 요것까지 알면 알게 돼있다. 하는데 그러한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성경과 어긋난다 말이죠. 그게 삼위일체를 만들어내는데  삼위일체가 필요가 없는 것이, 그리고 삼위일체가 반드시 필요 없지만 하고, 나오게 돼있지만.

삼위일체가 주님께서 원하는 것이 아닌 이유가 뭐냐 하면, 지금 구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예수님의 아버지가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는 상태가 이미 구원 받은 상태인데 뭐가 더 필요하냔 말이죠.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뭡니까? 그들이 나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 구세주입니다. 이게 구원 받은 사람의 특징인데 나 이렇게 해서 구원받았다 그걸 주장하는 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아니거든요.

지금 근원적인 문제가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이 교회를 위한 신학, 이게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정말로 옛날 교인들이 교회가 들어와야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한 것은 이 책에도 나와 있지만 하나님이 자기한테 위탁했다는, 업무분할을 했다는 겁니다. 구원 문제와 예배 문제는 우리한테 맡기고 그리고 우리가 일 잘 해서 상급하면 그때 하나님께서 아이고, 충성해서 좋아함, 반기면서 잘했다는 거죠.

이러한 인식은 사업적인 조직적인 인식인데 이런 인식은 모든 인간이 다 갖고 있는 거예요. 그 갖고 있는 조직적인 인식에다 교회가 호소해 버리니까 지나니나 하여튼 되지도 안한 인간 모두 전부다 교인 다 돼버리고 무조건 목사 말 들어 구원 받았다, 교회 있어야 구원 받는 줄 알고 전부다 들어온 거죠. 들어왔는데 사실은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 문제는 만약에 그 사람들에게 바로 예수님이 구세주인 줄 믿는 것이 구원이라 했을 때에 사람들은 아마 이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멘 할 거예요.

하지만 뒤에 앉아 있는 그 목사는 화가 날 거예요. 짜식아, 그렇게 되면, 교회는 있으나 마나 아니냐? 안 그래도 교회만 생각하고 있는데 당신 그렇게 설교해버리면 교회는 있으나 마나다. 이렇게 화딱지를 낸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제가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달려라 고속도로, 달려라 하니. 이야기한 것처럼 신학생들이 자기가 주의 종이라고 착각하고 오너라, 내가 조직신학 가르쳐 줄 테니까. 나한테 배우면 구원받는다. 그 대신 나한테 값 내라. 이런 식으로 자기중심, 교회중심으로 해버리면 정말 예수님이 원하는 그러한 복음은 안 된다 이 말이죠. 복음 되지도 않아요.

자세한 것은 여기에 나와 있는데 여러 가지 이야기 쭉 나와 있는데 이 삼위일체, 끝으로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이 삼위일체 이야기는 이 삼위일체신학은 종결이 안 됩니다. 왜 종결이 안 되느냐 하면, 아까 이야기했지만 교회가 형편에 따라서 옛날에 이단시했던 이단을 다시 들 끊을 필요를 느낍니다. 필요를 느끼면 그것을 개작한, 그러니까 그냥 이야기해버리면 그때 옛날 이단하고 똑같아. 이러면 안 되니까 들키니까 정통인데 신학이 발전했기 때문에 뭔가 추가돼서 몰랐던 것을 더 할 수 있습니다. 하는 핑계와 변명을 대면서 새롭게 또 삼위일체를 여러 가지 것을 끄집어 대게 돼요.

그런데 아까 해결책이 안 났는데 뭐냐 하면, 예수님의 로고스가 사람이 됐느냐, 안 됐느냐 하는 그 문제는 지금 전혀 해결이 안 되어 있어요. 해결 된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라틴에서는 두 의지론입니다. 본성은 한 본성인데 어디에 있다? 신성과 인성으로 되어있고. 의지는 한 의지나 두 의지로 되어있고. 대충 봉하고 그냥 대충 때운 거지요. 뜯어 맞춘 겁니다. 나중에 동방교회, 동방교회라 하는 것은 안디옥 신학에서 연장돼요. 안디옥 신학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는데 잠시 제가 안디옥 신학자로 생각하고 들어보세요.

제가 잠시 안디옥 신학자로 변했으니까 여러분 오해 없길 바랍니다. 안디옥 신학에서 라틴신학을 공격합니다. 너희들 로마신학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주장하는데 인정한다. 인정하는데 하나님이 한 분 같으면 성자는 어디서 나오고, 성부는 어디서 나오느냐? 그것은 바로 신이 혼자 있으니까 적적하니까 대상을 찾는 것이다. 대상 찾는 것이 바로 신은 인간을 대상하기 전에 먼저 무엇을 대상하느냐? 성자와 성령을 대상으로 해서 주고받는 호혜적인 사랑의 관계를 통해서 신의 시험을 더욱더 풍족하게 나타냈다. 왜? 그냥 있으면 외로우니까.

신이 외롭다는 것이 어디서 나타나는가? 신이 외롭다는 것은 성경에 안 나타나 있지만 신이 만든 인간이,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외롭다고 했으니까 아담은 누가 만들었다? 신이 만들었다. 그런데 아담이 혼자 있는 게 쓸쓸하다. 그러니까 결국 그 품성은 무슨 품성이냐? 신의 흔적이다. 신도 혼자서는 심심할거다. 심심하니까 만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는 거죠.

자, 신은 이렇게 되었으니까 신만 이렇게 자기 대상을 만들어서 안 심심한 게 아니라 진짜 신은 인간을 만들었다. 인간을 통해서 영광을 받기를 원한다. 이거 크로스빌리지에 나왔던 그것하고 비슷하죠. 박봉서 씨인가 또 그 쪽에 있는 이상한 사람들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말이에요. 어머니가 자식한테 맛있는 음식을 해주니까 지나가는 사람이, 아이고, 참 너희 엄마 고맙네. 너한테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아들이 하는 말이 발칵 성을 내면서 그 맛있는 음식을 먹어주는 나는 얼마나 착합니까? 이렇게 화내는 거라. 어떻게 돼요? 야, 참 부모가 너를 사랑하는구나. 참 부모사랑이 높지. 하니까, 아니에요. 아니에요. 사랑 받아 줄줄 아는 내가 얼마나 위대합니까? 이게 인간이래요. 용서 받겠다고 나서는 나는 얼마나 대견스럽고 착하고 훌륭한데 왜 이것을 무시합니까? 이거에요. 말 되잖아요.

제가 안디옥 신학자인데 안디옥 신학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아담이 실수해서 한 범죄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인간이 남긴 사랑을 미끼로 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남긴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미끼로 삼아서 다시 흩어서 인간을 불러 모으는데 그 인간을 뛰어넘는 분이 누구다? 예수님이기 때문에 만약에 무슨 행사를 하면, 신적 행사를 하면 안 된다는 거지요.

예수님이 신성이 있다는 것은 아는데 그 신성이 무슨 신성이냐 하면, 자기를 비어두는 신성이란 이 말입니다. 붕붕 날아다니는 신성이 아니고 대속물로 주는 신성이고, 또 뭡니까? 사랑할 수 없는 자에게 사랑해 주는 장렬한 그 사랑이야말로 그게 신성이다 이 말입니다. 이거 뭐 오늘날 사람들 감동감화 받아서 쓴 거예요. 신성을 하나님께 찾지 말란 말이죠. 패션 오브 그리스도라니까 완전히. 자기를 악에게 내어주는 이게 참된 신성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뭡니까? 모범입니다. 모범인데 제가 달려라 조직신학, 제목은 마음대로 합니다. 하여튼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뭐라 합니까? 이걸 견본인물. 여러분이 녹취했는데 많이 부분 고쳤습니다. 그대로 하면 현장 분위기 때문에 앞뒤가 안 맞는 게 있기 때문에 고쳤는데. 견본 알지요? 모델하우스. 예수님은 뭐라고요? 견본인물이에요.

예수님은 완전한 인성이에요. 그래서 안디옥 신학은 완전한 인성인데 그 인성 속에 뭐가 들어 있다? 뭐가 들어있어요? 신성이 들어있지요. 그 신성이 뭐냐 하면, 삼위일체에서 신이 자기를 내주고 다시 거두는 성부와 성자의 그 고유한 사랑을 뭐 돼서? 예수님이 견본인물로 모범을 보여주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형상을 입어서 거듭난 사람은 어떻게 된다? 예수를 본받아서, 토마스 아 켐피스.

예수를 본받아 어떻게 됩니까? 우리도 상대방에게 자기를 내어주고 그 사랑을 내어주면서 그 사람과 한 형제가 되고 하나가 되는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현상을 보여주는 사람에게만 뭐가 된다? 구원이 된다. 이것이 안디옥 신학입니다. 그걸 달려라 고속도로에서 자기 해방성이다, 조직신학의 고속도로에서 자기 해방성.

그리고 이 신학 외에 다른 신학은 일체 이단으로 간주하는 것이 오늘날 통합, 합동, 감리, 침례, 천주교 모든 여호와증인이나 이런 것 빼놓고, 박옥수 빼놓고, 십자가마을 빼놓고, 하여튼 모든 유학물 먹고 온 놈들 전부 다 주장하는 것이 전부 다 안디옥 신학이에요.

예수를 본받아서 모범적으로 살자. 여러분 속에 뭐가 있다? 여러분 속에 있는 것은 죄가 되는 것이 아니고 선한 자질이 있다. 선한 자질은 대략 키우고, 악한 자질은 줄여나가면 그것이 바로 거듭난 사람의 점점 많은 분량에 있어서 어느 분량은 많이 차지하고 하나님 형상은 많이 할 때 영광은 많이 드러나고, 점점 밀리는 것은 악마의 형상은 밀리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더욱더 영광 받고. 그러니까 기도 안하면 밀려서 이쪽으로 밀리고.

그러니까 교회에서 교인들이 해야 될 일은 기도해서 이쪽을 많이 밀어붙이고, 기도하면 이쪽이 많이 붙이고. 그래서 만약에 사업이 안 된다 그러면 이쪽이 많이 남기 때문에 벌 받아서 그래요. 사업해서 헌금 많이 내면 이쪽이 밀리게 되고.

목회는 쉽지요. 착한 일해서 복 받으라. 착한 일해서 돈 바치고, 시간 바치라 하면 되지요. 결국 목회자는 신학공부, 성경공부 할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기본적인 윤리와 양심이 있기 때문에 그것만 빗대어서 그럴 듯하게 포장만 해주면 교인들도 은혜 받고 목사도 지 돈 챙기고. 예수님 과거 인물이에요. 지금 내가 예수님처럼 살면 그만 이에요. 그게 구원 받은 사람이에요. 이게 뭐가 문제 있느냐 라고 내가 안디옥 신학자라면 그렇게 주장하지요.

이 모든 것이 그 당시 민중들의 호응을 받아 내기 위한 신학이지요. 이 신학이 나중에 동방신학이 됩니다. 동방박사가 아니고 동방교회의 신학으로 자리 잡습니다. 결국 이것은 한평생 교회 다니고 한평생 삼위일체 다 공부하고 예수 앞에 자기가 개 같은 인간인 줄 모르고 지옥 가는 겁니다.

내가 어제 아침에 그런 이야기했는데 개에서 출발하지 않는 조직신학은 조직신학이 아니라고. 모든 조직신학은 개에서 출발해요. 주여, 개입니다. 개로부터 시작해서 개로 끝나는 신학입니다. 우리가 하나의 잡종 개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개 같은 인간을 구원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그것만이 의이고, 나머지는 의가 없는 겁니다. 이것은 그 당시의 바리새인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무산시키는 이러한 신학을 우리가 잠시 살펴봤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연중에 우리의 신학 가운데서 인간의 본성들이 많이 살 때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남이 하나님인 것을 너무나 간단한 이야기인데 그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시인함으로 말미암아 오늘 죽어도 구원 받는데 이 간단한 복음을 우리는 양보하지 말고 마음껏 외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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