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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지역강의 > 부산강의
2018-02-12 17:07:37 조회 : 742         
사랑과 소유 180212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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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4.♡.134.25) 18-02-15 12:20 
20180212a 부산강의 : [시편]7(3편)-사랑과 소유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3편에 시편이라고 돼있지만 사실은 무엇이 축약돼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압축이 돼있어요. 시편이 하나의 결과적인 찬송입니다. 신앙고백이기도 하고. 어떤 무엇이 됐는데 그 결과가 시편 3편이라면 도대체 어디서 출발해서 나왔는지 풀어놔야 되겠지요. 시편 하나하나가 압축돼있으니까. 보통 압축된 파일은 풀어야 되잖아요. 그냥은 모르잖아요.

시편 3편에는 다윗이 등장해요.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라고 돼있는데 여기에 두 사람이 등장하죠. 다윗이 등장하고, 또 한 사람 압살롬. 역사 속에 수많은 인간들이 있는데 하나님의 계시를 위해서 어떤 인물이 성경에 나온다면 다윗이나 압살롬이란 개인적인 역량 때문에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되겠다고 비장한 각오로 역사 속에 등장한 게 아니에요.

다윗이 이렇게 생겼다면 다윗을 이렇게 형성하도록 하나님께서 배후에 뿌리부터 작용했을 것 아니겠습니다. 다윗이 역사 속에 등장한다? 다윗 사적인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에요. 계시니까. 계시란 그 안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계시 되고 싶다고 계시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특정 인물을 지정해줘야 돼요. 지정하게 되면 그 사람의 구원문제와는 아무 관계없어요. 계시와 관련돼있습니다. “다윗이 구원받았습니까?” 이런 질문 자체가 안 돼요.

그렇다면 보통 인간이 있다면, 다윗을 보라, 시편 3편을 보라면 우리도 구원문제에 대해서는 손을 놔야 돼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계시문제에 동의해야 됩니다. 구원문제와 계시문제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구원은 내가 들어갑니다. “내가 구원받아야 되겠습니다.” 이건 구원문제에요.

그런데 계시는, 주인공이 내가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주인공이죠. 하나님께서 계시하실 때 누구는 천국 가고 누구는 지옥 간다면, 이 점에 대해서 하나님의 이런 결정에 대해서 우리는 순순하게 수용하면 되는 겁니다. 내가 꼭 천국 가고 내가 꼭 구원받을 이유가 없어요. 완전히 다르죠. 구원문제는 항상 나를 제쳐놓을 수가 없어요. 내가 잘돼야 되고, 내가 나중에 미래가 피어야 되고, 내가 행복해야 되고. 항상 내가 들어갑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내 가정, 내 교회, 내 사회, 또는 내 직장, 내 직업 할 때 앞에 ‘내가’가 붙잖아요. 그러면 그 뒤에 나오는 필연적인 말은 살아야겠다, 살아야겠다, 살아야겠다는 항상 내가 살아야겠다. 가정, 교회, 사회를 통해서 내가 살아야겠다. 내 교회를 지켜야 되겠다. 살아야 되겠다, 유지해야겠다, 보존해야겠다. 이게 항상 붙습니다.

이 전체가 나를 위한, 나의 영광을 위한, 내 체면과 명예를 위한 나의 계시가 이미 확정돼있는 거예요. 성경이야기를 듣는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나를 위한 계시 속에 나의 뿌리가 있습니까? 없어요. 너는 어디서 나왔느냐는 질문에 답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네가 죽고 난 뒤에 어디 가는지 아느냐? 몰라요. 나를 위한 계시란 그야말로 톰배기에요. 머리 떼고, 꼬리 떼고 그저 눈앞에 보이는 그것을 확대시켜서 이걸 진리인양 간주해버린다니까요.

이게 욥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욥이 그렇게 어렵다고 하니까 하나님이 대뜸 하시는 말씀이, 별 만들 때 네가 있었느냐? 밤하늘에 별이 있는데 네가 사는 게 진리라면, 별이 왜 있어야 되는지 설득력 있게 설명해보란 거예요.

평창올림픽 쇼트트랙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500미터에서 금메달 땄지요. 그런데 집사님이 뭐 보태준 것 있어요? 보태준 것 없지요. 그러면 평창올림픽 금메달 딴 것과 집사님과 관계없지요. 관계없다는 말은, 집사님이 평소에 나는 살아야겠다는 테두리에 평창올림픽 금메달은 떨어져나가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온전하게 다 품어서 설명할 있는 진리가 아니고 내 것만 챙기는 진리기 때문에 진리가 아닌 거예요.

세월호에서 사람들 죽었는데 나와 관계없잖아요. 안산사람도 아니고. 관계없으니까 죽든 말든 중요한 게 아니고 우리 애 입원하고 퇴원하는 게 중요한 문제죠. 그러면서 우리는 은연중에 내가 잘 되고 내가 행복한 게 진리고 우기고, 이건 우긴다는 말이 적당해요.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한평생 살아가면서 하늘의 별, 달과 관련성도 없으면서 왜 있는지도 모르면서 달이 있든 별이 있든 간에 나는 행복해야 돼, 라고 하는 것은 이건 말도 안 되고 우기는 겁니다. 정말 우리가 진리와 합치가 된다면 별이 있기에 내가 있다는 연관성을 부여해야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공원에서 연관성을 짓지요. 별 하나 너 하나, 별 둘 나 둘. 옆에 여자 친구가 어려운 걸 물어보면, “별들에게 물어봐.” 그리고 설날이나 되면 산에 가서 그때 해가 필요한 거예요. 우리 가정 건강하고 교통사고 일어나지 않고. 그냥 비는 거예요.

진리를 위해서 살아야 될 우리가 진리는 모르고 내가 곧 진리가 되는 예수님 흉내 내는지 내가 곧 진리고 길이고 생명 되는, 그런 식의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이 이야기하죠. 네가 범사에 감사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우리 해체입니다. 우리의 진리, 나를 위한 세계관이 해체되는 거예요.

결국 이 말은 현실관이 두 가지 밖에 없다는 겁니다. 첫째는 나를 위한 현실과 그 외의 모든 현실. 인간은 나를 위한 현실을 붙잡다보니까 여기서 싸움이 벌어져요.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싸우지요. 창세기 32장에서. 왜 싸웁니까? 복을 받아도 시원찮을 분과 왜 싸우죠? 무엇 때문에 싸웠습니까? 야곱이 자기 것 지키기 위해서 싸운 거예요. 사전에 여차하면 피하려고 가족들 챙겨놓고 자기는 따로 있었는데 그때 온 겁니다.

이건 우리가 현실 지키기. 현실 지키는 필요 전쟁과 싸움을 유발합니다. 내 것을 내가 지키기 위해서 이익이 되고 타산과 계산에 의해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내 영역 밖으로 내쫓기 위한 치열한 싸움과 전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시편 3편의 이야기에요.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시편 3편을 보면서 우리의 평소에 인생사가 무엇이 계시고 무엇이 진리인지 이미 휘말려 들어갔는데 우리는 내가 잘되는 게 진리고, 신의 계시라고 확정짓고 교회 나갔고, 확정짓고 기도했고. 모든 기도 내용은 자기 잘되라고 기도하는 거죠. 달과 별에 빌듯이. 목사의 모든 기도는 자기 교회 잘되라고 하는 거예요. 이 교회 확장되고. 그게 하늘나라 확장이라고 가르치면서. 내가 있는 곳이 잘되도록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러니 성경을 천 독, 만 독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성경은 지금 누구와 싸우느냐? 주님 중심의 하나님의 계시와 내 중심으로 굳어진 나의 계시와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이 사실을 까마득하게 몰라요. 내가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몰라요. 로마서 10장에 나오는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다. 위에서 보기에 원수들이에요. 이 웬수들!

본인이 하나님의 원수란 사실을 모르고 그저 하나님께서 영광과 찬양을 돌린다고 할 때 이런 마음이 들 거예요.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은근히 하나님 편에 속한다고 하면서 뒤에서 엿 먹이고 뒤통수치는 거예요. 헌금하면서 자기 것 챙기다가 하나님에 의해서 부부가 하루아침에 다 죽었어요. 사이도 좋아. 끝까지 부부가 사이좋게 죽었어요. 아나니아와 삽비라. 어찌 그리 정이 많은지. 하나가 먼저 죽었으면 남은 하나가 우울증 걸렸을 텐데 둘이 같이 죽었으니 그럴 사이도 없고.

시편 3편에서 다윗에게 일어난 경우가 계시라고 시편에 집어넣었다는 말은, 다윗의 이야기로 듣지 말고 보편적 의미로 받아들이란 말이죠. 모든 인간에게. 이것은 다윗의 계시가 아니고 압살롬의 계시도 아니고 보편적 계시로. 모든 인간들이 자기를 돌아봐야 되고, 나만을 위해서 세상, 하늘의 별도 돌아가야 된다고 말도 안 되는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는, 왜 벗어나지 못하고 왜 나는 거기 갇혀있는지 그것을 생각해보란 겁니다.

지금 대구 지방에 비가 안 와서 제한급수 직전까지 갔거든요. 그래서 수돗물에서 냄새나고 그래요. 비가 안 온다. 하나님이 비를 안 내렸어요. 왜 비를 안 내렸느냐? 그건 하나님 마음대로죠. 비가 더 안 오면 대구시민들 죽어야죠. 대구시민들이, “하나님, 비가 안 와서 죽겠나이다.” 그러면 하나님 답변은 이거에요. “네가 왜 살라 해?” 아까 공식 있죠. 나로부터 시작한 것은 마지막에 뭐로 끝난다? 어쨌든 간에 나는 살아야겠다. 무슨 좋은 일을 하겠다고? 사는 이유 있어요? 살아야겠다는 건 있는데 사는 이유는 없어요.

이게 철학자들도 되게 고민이 되는 문제입니다. 제가 어제 낮에도 언급했는데. 살고는 싶은데 살아야 될 이유는 없다. 이걸 어제 낮 설교에서 인간은 거울 보면 자기 신체의 이미지, 얼굴, 덩치의 모습이 있지요. 두 번째 자아는 계속 살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연구해보니까 이게 합치가 안 돼요. 이 말은, 어떤 신체가 있다면 있으면 있는 대로 놔두면 되잖아요.

예를 들어서 비가 안 와서 굶어 죽는다. 그러면 굶어죽으면 돼요. 내 신체라고 여기는 순간, 거기서 멈추면 괜찮은데 멈추는 게 아니고 그러니까 그 신체를 내 힘으로 끌고 더 오래 살도록 해야 되겠다는 거예요. 해야 되겠다는 것이 뭔 뜻이냐 하면, 미흡하다는 거예요. 여기가 좋사오니 죽이든 말든 하시옵소서, 라고 던질 어떤 대상이 없어요.

저 신체는 내가 건사하지 않으면 아무도 건사할 수 없다는 것으로 종결돼버려요. 그러면 ‘살아있다’에서 ‘살아야겠다’로 변해요. 살아있다는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살아야겠다는 우울증 걸리고 난리도 아니에요. 자식이 교통사고 났다. 병원에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아아, 때가 되면 주께서 데려가시는구나.” 이런 마음과, “아이고 의사 선생님, 어떻게 되든지 살려내야 돼요.” 의사 선생이 퉁명하게 하나님의 천사가 되어, “왜 살아야 되는데요?” “내 자식이거든요.” 남의 자식은 죽어도 본인 자식 살려내요. 돈이 얼마나 들든지 살려주세요. 왜? 그건 몰라요.

그래서 여기서 다윗이 그 다음에 무슨 말 나와요. ‘아들’이죠. 그것 찾는데 참 어렵지요? 역사 속의 두 존재가 계시 속에 출몰합니다. 그 관계가 있습니다. 아들입니다. 여러분, 다윗 생각하지 말고 우선 아브라함부터 등장했다. 그냥 아저씨죠. 그런데 성경에서 아브라함을 앞장세우면서 뒤따르는 계시를 덧붙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받는다고, 아브라함의 출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유 있어서 그렇다는 거예요.

내 자식은 살려내야 된다고 할 때 왜 살려야 됩니까? 이유가 없는데 아브라함이 등장하게 되면, 여기에 이유가 있어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여러분 사는데 이유 있습니까? 이유 있어야 돼요. 오늘 강의 끝나면 이유가 생길 겁니다. 아브라함을 건드리면 하늘이 가만두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지정한 사람이라고 인정하게 되면, 하늘이 그냥 있지 않고 그 사람에게 구원의 축복, 영생의 축복을 준다는 겁니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이 굉장히 고맙거든요. 왜 고마우냐 하면, 모든 인간은 다른 사람을 파악할 때 내 선에서 파악해야 되는데 상대방을 내 선에서 파악하면 그 의미가 기껏 내가 알고 있는 의미만 소복하게 상대방에게 꽂힙니다. 우리는 내가 여기 온 것과 별과 관계없어요. 별을 빼놓고 내 이익과 관련된 의미를 갖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다가올 때 그 사람을 평가하고 이해할 때는 내가 아는 의미만 집어넣기 때문에 그 사람도 나처럼 별과 상관없는 의미라고 나를 함부로 평가하는 거예요. 그러니 인간이 얼마나 자기 이익을 위해서 일방적으로 세상을 봅니까. 그게 실제 현실이 아니고 나만을 위한 다른 현실을 꾸미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모든 인간이 아브라함을 생각하는 이상으로 등장했거든요. 그 아브라함의 등장을 성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없는 데서 생겼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의식하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출발이 항상 내가에요. ‘내가 여기 있다’부터 출발해요. 아브라함은 없는 데서 생겨난 거예요.

만약에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뒤에 붙지 않는다면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에요. 있는 데서 나갔을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있다’에서 ‘아브라함이 없다’로 끄집어 당기겠지요. 그게 아브라함 뒤에 붙어있는 하나님의 언약이 하나님의 의미, 계시가 아브라함이 없는 데서 나왔다고 해서 있는 데서 나왔다는 아브라함 의식을 삭제해버립니다. 아브람이 삭제되고 그 뒤에 등장한 이름이 아-브-라-함.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는 겁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이 성령을 받았다. 성령을 받게 되면 우리는 어디에 속하게 되느냐 하면, 십자가에 소속이 됩니다. 십자가는 죽어 없어진 분이에요. 죽어 없어진 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나왔지요. 우리의 이유와 우리의 뿌리는 안동 권 씨의 육이 아니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듬뿍 담고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모든 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계시에 포함이 된 존재가 된 겁니다. 그래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 되는 겁니다. 교회 백날 다니고 성경 봐도 소용없어요. 성령이 임해야 돼요. 그래야 세상에 대해서 남은 인생, 앞으로 전개될 모든 인생이 내 인생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에 준한 때가 되매 말씀에 응하기 위해서 펼쳐지게 된 인생으로 가는 겁니다.

그러면 마태복음 25장에서 소자한테 아무것도 아닌 그런 인간에게 물 한 컵 대접한 것이 곧 예수님을 대접한 것이고, 옷 입혀주는 것이 내게 입혀준 것이고, 그들을 돌아본 것이 나를 돌아본 것이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영이 임한 성도 사이의 유대관계는 한 덩어리가 되지요. 그걸 머리 되시고 지체라고 에베소서에서 교회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렇게 형성되는 겁니다.

그래서 일어나는 교통사고나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돼요. 감사하기 전에 주께서, “짜증나지, 그지?” “짜증납니다. 왜 많은 애들 중에서 내 애가 교통사고 납니까?” 그런데 짜증난다는 이것이 사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일 저의 옛사람을 다시 주께서 회상하게 하셨군요. 그런 일조차도 주께서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라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아야 돼요.

그렇게 될 때 그 사람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일어난 모든 일들이 예수님의 증인되라고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일들을 우리가, 마치 꿀 있는데 벌 달려들 듯이 나로 하여금 주님의 입에서 나온 꿀 발라 놓고 일어난 모든 사태가 예수님을 증거 할 용도로 결과물 있도록 발산케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다윗이에요.

성경에 시편만 있는 게 아니지요. 사무엘상, 사무엘하, 수많은 다윗 가정에서 일어날 모든 사건들이 나옵니다. 오늘 제가 이야기할 거예요. 그 이야기들이 시편 3편 하나로 응축된 겁니다. 주름 진 것을 하나하나 펼쳐내야지요. 펼쳐내면 보통 사람이고 어디로 가고 왜 태어난 지도 모르는 그 다윗이 하나님이 의도한 대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천국의 백성으로 어떻게 변모됐는지 보여주는 것이 시편 3편입니다.

제 이야기 가운데 논리가 약간 비약된 건 있어요.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옮길 때 없는 데서 잡아당겨서 있음에서 출발해서 없음으로 가서 새롭게 전에 없던 있음이 되는 거죠. 대구에서 부산으로 오는 고속도로에 노포동 톨게이트 있지요. 그런데 제가 타고 온 버스는 톨게이트 지나서 해운대 쪽으로 빠져요. 빠지자마자 길이 두 개 있지요.

전에 큰 길로 출퇴근했다면 옛날 있음의 길이라면, 새 길로 빠졌다면 내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길로 가듯이 똑같은 얼굴 모습이고 똑같은 신체 이미지이지만 육의 길과 영의 길이 달라요. 이쪽은 의미가 있고 하나님의 계시적인 효과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효과를 누리게 돼요. 주님이 함께서 있으매 효과를 누리는 그런 인생을 가게 됩니다. 가는 곳은 천국이고 이 길은 지옥이죠. 노포동 톨게이트에서 길 잘못 들면 큰 일 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이쪽 길의 내력을 이쪽 길에 들어서야 비로소 보인다는 거예요. 육적인 인간들,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함께 있을 대는 정당해 보이는데 막상 빠져나가서 보니까 저쪽은 육의 길이고 마귀와 함께 있다는 것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저기는 감사가 없고 욕망과 욕망, 미흡감과 우울증, 그리고 답답함 끝까지 내 인생 내가 책임지려고 하는 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인생, 자기 인생은 없고 주님의 인생도 없고 남이 만들어준 인생이기에 남들 보란 듯이 자랑질 하고 또는 숨어 지내기 위해서 남들 눈에 띠면 안 되는 그런 불쌍한 인생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있지요. 그래서 지옥 가는 사람을 너무 나무라거나 하지 마세요. 나무란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측은하게 여기세요.

우리 아버지 안 됐다. 평생 술 좋아하다가 또 술 찾는구나. 아버지, 술이나 먹고 지옥이나 가세요. 말로 하면 안 되고 속으로. 아이고, 우리 엄마 안 됐다. 맨날 자식 잘 키운 것 자랑하다가 나중에 지옥 가서도 자식 잘 키운 것 자랑하고 끝나는 거예요. 나로부터 출발해서 나로 돌아오는 그 인생이 넓은 길이에요.

그런데 이쪽은 나로부터 출발했었는데(과거완료), <비트>란 영화에서 조인성이 오토바이에서 손 놓잖아요. 우리 인생에서 손 놔버리는 거예요. 물론 잘 생겼으니까 폼 나지만. 그냥 맡기는 거예요. 내일 일은 내일 일 주관하시는 분에게 맡기고 오늘만 감사하면 되는 거죠. 들풀처럼 사는 거예요. 바람 부는 황야에서 들풀처럼 사는 거죠. 주께서 친히 키우시고. 남들 보기에 적당하도록 남 눈치 보며 살아야 되고. 남 눈치 본다고 하는데 그건 핑계고요. 내가 지금껏 살아온 식으로 산다는 게 정답이에요. 그게 남 눈치 보는 거잖아요.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하더라도 육이란 신체가 있으니까 성령께서 그때그때마다 방향을 틀어줍니다. 새 길로 가다 더 새 길로 또 빠지게 만들고.

아브람이 아브라함 됐는데 자기 아들을 하나님이 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점이 어렵지만 중요하기 때문에 설명해야 되겠습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될 때 없음 요소에서 시작해야 되는데 그 없음 요소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아브라함의 아들에서 나와요. 우리가 생각하는 아브라함은 그 전에 선대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관심은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아니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제일 마지막 때에 오실 분 예수님에게 관심 있어요.

그러면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이삭이 가깝습니까, 아브라함이 가깝습니까? 이삭이 가깝고 아브라함은 멀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과거를 집착하지 말고 장차오실 예수님을 바라봐야 돼요. 이게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예수님 바라보기를 원했다. 그건 아브라함이 잘한 거예요. 아브라함이 과거에 이 정도로 잘나갔다고 보지 않고 미래를 바라본 게 중요하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기뻐했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책에선 나올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건 큰 반칙입니다. 이렇게 쓰면 안 돼요. 인간은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남겨놔야 돼요. 모르겠다고 남겨놔야 되는데 확정을 지었으니까 본인이 미래까지 연결되었다는 고백이거든요. 일반 인간들은 미래와 연결돼있는 게 아니고 과거와 연결돼있어요. 과거가 이렇게 했으니까 오늘날 이렇게 되었다고 과거와 연관시키는데 아브라함은 미래와 연관시켜버렸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의 본 모습은 예수님이 알려주는데 그전에 가까운 미래는 이삭이에요. 이삭이 죽고 없어지지요. 그러면 이삭에게 일어난 현상이 아브라함이 미처 몰랐던 자기의 본 모습이에요. 죽어야 되는데 양으로 바꿔치기했지요. 바꿔치기 때문에 나는 어린양과 관련된 새로운 인간으로 부활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믿음의 조상과 공통적인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게 과거와 연결돼 있다가 미래가 연결 되어서 죽어도 좋다는 겁니다.

내 자식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하지만 내 자식이 예수를 믿는다면 교통사고로 죽은 자식도 다시 살 수 있고 그 자식의 모습을 보면서 아직 살아있는 어미도 자기의 본 모습을 가까이 받아들이는 겁니다. 나도 죽으면 주와 함께 영원히 살리라. 참 이론은 멋지다, 정말. 손톱에 가시만 박혀도 원망하고, 손에 습진만 있어도 내가 이러려고 사느냐 하는데, 뭐 하나 날 건드리면 목이 아프다면 편도선암이 아닌 가해서 난리도 아니에요. 병원에 돈 다 갖다 주고. 아무 일 없습니다.

그래야 안심하는 우리 육의 한계. 얼마나 평소에 내 중심이었는지 점잖을 때는 몰라요. 주께서 사건을 일으켜서 분산을 떨어줘야 내가 얼마나 이 세상에 집착해있는지 완전히 만 천하에 공개되는 겁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세상 끝나는 것처럼 하지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는 애인과 헤어졌는데 왜 파도는 치고 햇빛은 빛나는지. 왜 새는 노래하느냐 말이죠. 애인과 헤어져서 슬퍼 죽겠는데.

아들 문제를 다룹니다. 시편 3편에서. 다윗이 솔로몬을 낳고 난 뒤에 솔로몬의 원래 이름은 여디디야에요. 하나님께 사랑받은 자에요. 참 이런 게 성경을 설명하는 저도 충격적이에요. 왜냐하면 전에 다윗은 간음했습니다. 살인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처벌은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이걸 어떻게 직결시킵니까? 천하에 나쁜 놈인데 하나님이 사랑했어요. 이게 복음이에요. 복음은 복음을 얻겠다는 착한 시도는 아무짝에도 소용없어요. 예수 믿겠다는 시도도 아무짝에도 필요 없습니다.

간음하고 살인했는데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거예요. 말로? 아니요. 자식 줄게. 간음한 여자 사이에서 사랑하는 자식이 나왔습니다. 이걸 소급해서 봅시다. 솔로몬 입장에서 다윗과 밧세바 커플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식을 낳았다면 둘 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백성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뜻에 따라서 간음하게 했고 뜻에 따라서 살인하게 하신 거예요.

간음하고 살인했다는 말은, 내가 간음하고 살인한 게 아니라 주께서 간음케 했고 살인케 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내가 내 인생에 책임진다는 요소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 새삼 느껴질 때 거기서 오는 자유함, 얼마나 큰 자유인 줄 몰라요. 분명히 천벌을 받아도 마땅한데 천벌 대신 천국을 주니. 글자 하나 바꿨을 뿐인데 “주여, 이것 받아도 돼요?” 그럼 하나님께서, “네가 나를 잘 몰랐구나.” “난 나쁜 짓하면 지옥 가는 줄 알았는데.” “그건 네가 알던 하나님이고 새로운 하나님을 알려줄게.” 주면 받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냥 천국이 온 거예요.

천국이 오니까 비로소 내가 알던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내가 알던 예수는 예수가 아니었어요. 내가 만들어낸 가짜 예수였어요. 나의 선행과 결부된 예수, 나의 착함과 결부된 예수, 나의 헌신과 희생이라는 고귀해 보이고 경건해 보이는 행동의 보상으로 간다는 그러한 천국은 전부 다 가짜입니다. 그건 산당이에요, 우상숭배에요. 그건 목사들이 교회 키우기 위해서 사기 친 거예요. 여러분 가정이 불행한 것은 온전하게 헌신하지 못해서 그런 겁니다. 돈과 시간을 교회에 바치세요. 그러면 당신에게 하나님께서 원상회복해주실 겁니다. 그런 사례가 많으니까 믿으시고 하세요. 이건 사기에요. 마귀의 소리입니다.

우리가 정상적으로 편안할 때는 이러한 복음이 안 들려요. 복음이 들릴 때는 내 일상, 나의 현실이죠. 나의 영역. 나의 현실이 아픔이 찾아와야 돼요. 내 인생이 슬픔이 찾아와야 돼요. 이번 수련회에서 상처가 온다고 했지요. 사랑보다 더 깊은 상처. 어느 노래 가사에, 슬퍼하지 마세요. 그 다음 가사가, 첫눈이 온다고요. 아이 아빠가 교통사고 났는데, 첫눈이 온다고요. 이정석이 불렀던 노래거든요. 첫눈과 무슨 관계있어요? 관계없잖아요.

슬픔을 주고 슬퍼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오신다고요. 이건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주여, 나는 간음했습니다. 나는 살인했습니다. 슬퍼하지 마세요. 주께서 사랑이 온다는 겁니다. 내가 하는 행위가 나의 운명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평생 했던 내 행동이 내 미래를 결정하는 게 아니다. 결정은 따로 하는 거예요. 왜? 피조물이니까. 피조물에게 어떤 미래를 맡긴 적이 없어요.

신학계에 기독교계에 제일 큰 코미디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시면 안 돼요. 이 땅은 더러운 곳이에요. 오시면 안 돼요. 오시지 말아야 되는데 와버린 거예요. 인간들은 멀리 하늘이 별처럼 박혀있는 하나님을 계속해서 모든 상상의 고상함과 경건함과 거룩함을 처발라놓고 내가 처바른 거룩과 경건을 내가 숭상하고 숭배하고 있는 겁니다. 기독교만 아니고 불교, 모든 종교가 다 한 가지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직접 방문하신 거거든요. 그 모습이 꼴 보기 싫은 모습이죠. 모든 사람이 그를 외면해버렸어요. 그 말은 인간들이 얼마나 엉터리로 하나님을 그동안 섬겨왔는지 들통 난 순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잘못이 아니고 내가 생각한 생각이 가짜에요. 주님의 안목에서 나를 봐야 되는데 내가 보는 안목, 또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그것이 참조사항의 전부였습니다. 내가 참고할 그 범위가 주님의 십자가는 쏙 빼고 나머지로 참고한 거예요. 나는 이렇다고 규정한 겁니다.

만약에 경매하는데 세계적인 피카소나 고흐의 작품을 경매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거기에 만약에 예수님이 계셨다면 사람들이 고가의 미술품과 예수님을 견줄 때 예수님한테 오십만 원 걸겠다고 손들 수 없을 정도로 경매에 참석한 모든 신사숙녀들에게 외면당할 때 예수님이, “저, 얼마 쳐주겠어요?” 한다면 꺼져라, 할 거예요. 그 꺼져라가 십자가 사건이에요. 모든 사람에게 외면당한 분이에요. 이 말은 우리 쪽에서 예수님에 다가설 수 있다, 없다? 내가 싫어서 안 가요. 내가 아는 괜찮은 나를 괜찮은 나로 유지하려는 입장에서는 예수는 쓸데없는 거예요. 예수님은 소용없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에게 다가가는 게 아니고 주님의 영이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면 건축자들의 버린 돌, 건축자가 쓸데없다고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어 주님이 거주할 수 있는 성전이 되는 겁니다. 만약에 내 식으로 가게 되면 주일 날 경건히 지키고 십일조 하고 주께서 하는 명령 있잖아요. 이웃사랑 하고 온유하고 할 수 있는 걸 다 했을 거예요. 그런 것은 과거 행동이거든요. 과거의 행동이 집중이 되면 우리는 미래를 보는 게 아니고 과거가 아까워서 과거를 놓칠 수가 없어요.

사람이 왜 슬퍼하느냐 하면, 그만큼 과거를 건전하게 유지하려고 애썼다는 고백이거든요. 이만한 것이라도 지켜내기 위해서 얼마나 나한테 투자했고 희생했고 인내했고 해서 과거가 만들어낸 현재인데 이걸 차버리면 과거가 와장창 다 무너지는 거예요. 마치 카드 쌓기에서 카드 하나 빼버리면 완전히 다 무너지는 것처럼 주님이 뭔데 날 무너뜨리느냐는 거예요. 주님은, “네가 안 만든 게 따로 있기 때문에 내가 무너뜨렸다. 왜?”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네가 쌓아놓은 것이 무너져야 돼요. 그게 바로 우리한테는 슬픔이고 아픔이고 상처가 되는 겁니다.

평소에 우리는 투명인간처럼 살아갑니다. 내 할 것만 생각하지 내가 누구냐고 쳐다보는 것은, 혼자서 고민거리 있을 때나 평소에는 할 일 많아 바빠요. 그런데 언제 내가 왜 이러지, 내가 뭐지? 이런 것은 갑자기 화살 쏘듯이 나에게 상처, 슬픔이 일어났을 때 그 순간 도대체 나는 어떻게 되지, 나는 누구지, 라고 돌아보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솔로몬이란 아들이 있잖아요. 그 솔로몬을 하나님께서 바짝 밀어줍니다. 유일하게 하나님의 사랑받은 이기에. 나머지 아들들도 있잖아요. 암논, 압살롬은 상대적으로 사랑받지 않았지요. 그냥 사랑받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고 어떤 속성들이 발산됐기 때문에 사랑받지 못했는지 사무엘하 13장부터 계속해서 압살롬과 전쟁을 통해서 다 보여줘요. 아들이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킬 때 아버지 다윗의 입장에서는 상처가 되지요. 슬프지요. 통곡합니다. 다윗이 통곡을 두 번 하는데 자기 아들 암논 죽을 때 통곡하고 암논을 죽인 압살롬 죽을 때 통곡하고. 아들 둘을 잃은 거예요.

암논이란 인간은 압살롬의 누이동생, 이복여동생을 너무 사랑해서 마음에 병이 났어요. 누굴 그리워해서 마음에 병이 들면 인력으로 안 됩니다. mri찍어서 안 나옵니다. 이건 약도 없고 침 놔도 안 되고 입원해도 안 되고. 이 말은 뭐냐 하면, 외쪽에서 날아온 그것이 내부를 황폐화시킨 겁니다. 모든 정상적인 육체의 가동이 꼬이고 엉망진창이 된 겁니다. 그러면 외부에서 온다는 것은, 내부와 외부를 연결시키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본다는 겁니다. 보고 그리고 신체적으로 가까이 있는 거예요.

이것 재미난 이야기에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집니다. 연예인들 사귀다 헤어질 때 서로 활동이 바빠서 헤어졌다고 합니다. 주로 그런 식으로 핑계 대거든요. 눈에서 멀어지면 안 보이게 되면 마음에서 멀어져요. 이게 마태복음 5장에 나오잖아요. 눈은 마음의 창이에요. 눈을 통해서 그 사람과 교류가 되는 겁니다. 눈을 보면서. 여러분, 예쁜 얼굴이라고 끌리고 그런 것 없어요.

지금 암논이 다말을 너무너무 사랑해서 병이 났어요. 암논은 사랑이라 하지요. 그런데 암논에게 요나답이란 친구가 있어요. 성경에 보면 간교하다고 돼있거든요. 재벌 3세의 친구라고 보면 됩니다. 보는 데서 그 다음에 신체적으로 가까이 접근해야 돼요. 본다는 말에 앞에 나만 봐야 돼요. 나만 보기 위해선 다른 사람들은 물러가야 돼요. 결국 이건 내 마음으로 둘러 싼 덫에 다말을 가두는 겁니다. 그러면 사랑이 뭐냐? 사랑은 소유의 다른 표현이었다는 게 드러나요.


이 이야기는 10분 쉬고 합시다.
 한윤범(IP:14.♡.134.25) 18-02-15 12:20 
20180212b 부산강의 : [시편]7(3편)-사랑과 소유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사랑이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솔로몬, 여디디야를 사랑하는 사랑의 이미를 사람들이 받을 때 그 사랑이 뭔지 인간 쪽에서 접근해서 안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다윗 가정에 진정한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뭔지 알기 위해서 보통 큰일이 벌어진 게 아니에요. 솔로몬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솔로몬 외에 다른 아들들을 통해 사랑이 아닌 게 뭔지, 그리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벌어지는 그것이 얼마나 사랑과는 거리가 먼지 보여주는 계시의 사건으로 다윗의 남은 역사를 채우게 되는 겁니다.

어떤 것 하나라도 성도에게 일어나는 것은 복음과 관련돼있지 개인의 구원과 영광과 행복과 관련돼있는 게 아니에요. 하나라도 버릴 게 없어요. 하필이면 저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무슨 억하심정으로 일어났냐고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사람들이 이해하는 데 있어서 도대체 뭐가 그렇게 막혔느냐? 막힌 게 뭐냐 하면, 다윗이 갖고 있던 것에 대해서 대적하는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이 택한 백성, 다윗에 대해서 대적하는 것은 대적하는 쪽이 이해하는 사랑 개념이 진짜 하나님의 사랑 개념을 가로막고 있었다는 것이 결론적으로 정리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적이 아니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우리 가정에 무슨 일이 벌어졌다. 동원되는 게 뭐냐 하면, 저건 내 새끼, 내 자식이라고 갑자기 없는 사랑이 막 나오게 돼있어요.

첫째 시간 끝에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 소유지요. 소유라면 소유자가 있을 것 아닙니까? 소유자의 명예와 존재의 의지를 더욱 더 유지하기 위해서 사랑이란 이름으로 꽉 쥐고 있는 거예요. 내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한테 유리하다고 생각하면 뭐든지 내 것으로 모아요. 치매 현상 중 하나가 길거리 나온 쓰레기를 자기 집에 다 가져옵니다. 우리 어머니도 마찬가지거든요. 치매 걸려서 집에 수시로 가보는 이유가 동네 있는 쓰레기가 어떻게 이동해 있는지 살펴보는 겁니다. 예뻐 보이는 스티로폼 통, 아이스크림 통이라든지. 치우면 두 시간에 가보면 또 들고 옵니다.

치매란 장기기억은 계속 살아있습니다. 장기기억 속에는 나는 평소에 이런 사고방식과 이런 사상과 의식으로 살아왔다는 남아있는 자료거든요. 인간은 소유의 연발, 연발로 인생을 살아가는 거죠. 그것도 자기한테 좋다는 것. 그러면 자기 것으로 소유했다면 평소에 누굴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말은 사실은 나에게 너는 쓸모 있고 가치 있다는 조건 하에 내 것을 소유화시키는 겁니다. 상대방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그래서 제가 결혼에 대해서 요 근래 여러 번 강조한 게 있는데 일단 이혼하고 결혼하면 돼요. 이미 이혼한 거예요. “이혼했는데 왜 우린 같이 살지, 이상해?” 이래 돼야지 나는 너한테 다 줬다는 거예요. 그런데 너는 왜 다 안 주냐는 거죠. 말이 안 되죠. 다 주었으면 박박 긁어서 다 주어야지요. ‘나는 너의 것이다’까지 줘야 되는데 주기는 다 주었는데 나의 것은 비워놓기만 하고 주지는 않았어. 이 쟁반은. 다 줬는데 왜 나한텐 다 안 줬어? 이러려면 헤어져. 말끝마다 헤어지제.

이것이 암놈과 압살롬을 통해서 사랑이 아니면서 사랑으로 통용되는 개념들을 살핌으로서 정작 솔로몬이 암놈 제치고 압살롬 제치고, 그것도 간음한 여인에게서 낳은 아들이 어떻게 해서 다윗의 언약을 이어받을 자격자가 되는지 하나님은 계시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도 성도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버릴 없어요. 꼭 소고기 같아. 어떤 부위도 다 먹을 수 있는 것처럼 버릴 게 하나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계시의 내막을 알기 위해서 인간의 내막을 사용하시는 거예요. 약간 엽기적이지만 참아내시고. 인간의 신체를 잘라요. 내장을 다 드러냅니다. 그러면 인간의 표면적만 남지요. 이걸 펼치면 그냥 가죽이 되지요. 이 가죽에다 주께서 하나님의 계시를 계시의 장으로 사용해요. 우리라는 인생에서 다 끄집어내버리고 우리가 하던 모든 짓거리를 뒤따라오면서 주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다 접촉을 시도하면 인생에 일어나는 하나하나가 복음과 관련된 인생이 되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뒤따라오면서 추월함으로써 결승 진출이 빛이 나는 거예요. 한 번 넘어졌는데 다시 일어나서 3000미터 여자 쇼트트랙에서 결승 진출하잖아요. 꼭 사랑보다 먼저 상처를 줘요. 하나님의 하나님 됨은 하늘에 계신다고 하나님 되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와서 하나님 자신이 상처를 입어야 돼요. 상처 입히는 쪽이 있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마귀에 속한 인간 세계가 반드시 있어야 하나님이 하나님답게 드러나는 겁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망하는 하나님이에요. 절대로 실패가 없는 하나님이 아니고 무너지고 망해버리고 하나님한테 버림받는 하나님, 이게 십자가에서 예수님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외친 그분이 인간이 알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이에요. 멀리 있는 하나님은 몰라요. 바로 코앞에 오신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에요. 십자가에 달리신 그 하나님을 사도 바울은 복음으로 응축시켜놨어요. 십자가가 복음이에요.

예수님의 존재가 복음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살아있다, 존재가 돼버리면 우리가 알고 있는 존재, 살아있다는 개념이 십자가에서 나머지는 다 부정당해도 살아있다, 존재한다, 이것만큼은 손 안 댄 게 되기 때문에 이건 잘못이거든요. 인간에 있는 모든 것이 죄고 잘못됐다면 인간이 알고 있는 사랑, 살아있다는 모든 개념도 문제 있음이 드러나야 된단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존재한다. 난 그 존재를 믿어. 이렇게 되면 다른 것은 다 탈락이 되도 존재하는 개념은 안 다치고 생생하게 정상적으로 가동된다는 인식이 됩니다. 그게 안셀무스 신학의 시작이에요. 안셀무스부터 시작된 교회 이천 년 신학이 거기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청교도 있지요. 퓨리탄들(淸敎徒, Puritans).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를 받은 자답게 말씀대로 바르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이게 청교도에요. 청교도의 사상을 뭉친 것이 개혁주의사상입니다. 은혜 받고 바르게 사는 집단을 그들은 교회라고 해요. 그래서 교회 건드리면 화를 내는 겁니다. 괜찮은 데 왜 건드리느냐? 우리가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격려는 못할망정 왜 건드리느냐는 겁니다. 그 사람 신학의 근본은 뭐냐 하면, 나라는 존재가 존재하는 하나님에게 믿음을 제시했으니까 이건 분명히 성경에 나오는 믿음이라고 보는 겁니다.

부산 강의할 때 신학 했잖아요. 모든 신학은 인간의 존재와 신의 존재를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라는 이론적 이성적 논리가 신학입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이 세상 모든 학문은 다 마귀에 물들었더라도 신학만큼은 하나님께서 칭찬해줄 것이고 영광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비슷한 사고방식이 찬양학이라는 겁니다. 이건 노래하는 목사들이 있어요. 선교학교에서 찬양학을 가르쳐요. 찬양학은 주로 시편으로 이성적인 학문적 토대를 갖추려고 합니다. 그들은 생각합니다. 시편에 나오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올라가는 찬양이라는 겁니다. 여기 시편 3편 2절 끝에 괄호 속에 (셀라)라고 돼있지요. ‘셀라’는 올려드린다, 바친다는 뜻이에요.

성경에 찬양시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도 지상의 출발점을 시편으로 잡자. 시편에 나와 있는 말씀으로 가사로 만들면 하나님께서 흔쾌히 기뻐하실 것이다. 이게 찬양학입니다. 이 논리에 중간에 뭐가 빠졌습니까? 사도 바울이 말한 십자가가 빠졌지요. 빠지고 노래하는 존재자, 누굽니까? 본인들. 그리고 노래 듣는 존재자, 누굽니까? 신. 신과 노래 사이에 찬양만 있으면 된다는 거예요.

찬양학에서 나온 게 율동학이에요. 개량한복도 아닌 것이 이상한 옷 입고 율동하는 거예요. 길 가다 보면 율동선교학원이 있을 거예요. 돈 내면 율동 가르쳐주는 거예요. 율동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음을 고백하는 게 영광이 아니고 행동으로 보여줘요. 행동이 춤추는 거예요.

율동학 하는 사람 중에서 여자는 많은데 남자는 본 적이 없어요. 제가 의존교회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왜 교회에 여자만 많고 남자는 없느냐? 제가 그 이유를 밝혔지요. 2차, 3차가 없기 때문에 남자는 안 와요. 뭐든지 학술모임이든, 시인들의 모임이든, 검사들의 회식자리든, 독서모임이든 반드시 2차, 3차가 있어야 남자들이 와요. 특히 시인들 모임에. 시만 논해선 재미없어요. 정작 노리는 것은 리비도, 인간의 욕정을 달래줘야 마무리 짓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이 있어요. 세미나만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어요. 아무 직업도 없이. 세미나 들으려고 가는 게 아니고 세미나 뒤에 식사 시간 노리고 가는 사람도 있어요. 보통 나이가 육십 넘으면 그런 것도 생각하는 모양이라. 할 일이 없으니까. 얻어먹으려고. 공짜니까.

어쨌든 간에 인간의 존재에서 하나님께서는 너의 존재를 안 받는다는 게 아니고 항상 뒤따라가니까. 인간이 어찌해서 하나님께 왜 영광이 안 되는지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사람과 인간들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과 합치시켜서 하나님 쪽에서 나온 사람이 고난 받게 만들어요. 상처받게 만들고 슬프게 만들고. 왜냐하면 하나님 사람도 마찬가지로 인간이니까. 자기 다치면 하나님께 원망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다윗언약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언약입니다. 아브라함한테 네 아들 바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장차 보내실 자기 아들을 아들 관계를 유지하면서 보냈다는 것은 미리 당겨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아브라함보다 이삭이 가깝다고 이야기했지요. 아브라함의 자손이 예수님이에요.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님의 사람이 될 때는 어떤 원칙이 있는 일관적으로 내부적으로 같은 줄기로 연결된 게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서 아들은 지상에서 죽는다. 상처받고 죽는다. 이게 일관된 원리입니다. 그게 이삭이 아버지 손에 죽어야 돼요. 죽지 아니하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죽이는데 죽이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 에덴동산에 선악과 심어서 인간은 따먹고 거기에 마귀까지 들어오도록 허락하셔서 결국 이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이 주가 되기 위한 환경조성에 하나님께선 계획하시고 선악과 심고 뱀 집어넣고 인간은 따먹도록 허용하시고. 허용하신 것은 선악과나무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러워서 10년째 참아도 11년째는 못 참게 만들어요. 12년 참아도 마찬가지에요. 결국 그걸 따먹을 수밖에 없어요. 왜? 아름다운 것은 계속 아름다우니까.

그렇게 해서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그대로 들어오게 되면 그게 구원이에요. 아까 사랑은 소유지요. 인간은 소유를 통해서 자기 자아를 구축합니다. 소유를 비껴가는 방법은 뭐냐? 내 안에 들어오지 않고 바깥과 바깥을 연결시키면 되지요. 그럼 내 소유가 안 되지요. 하나님의 의는 내 소유용이 아니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 하는 거예요. 다리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안 중요한 거예요. 내가 어떤 자리에 있더라도 다리의 역할은 변함이 없어요. 내가 교도소 일곱 번 왔다갔다해도 남한테 욕을 얻어먹더라도 다리 역할은 관계없이 꾸준하단 말이죠.

만약에 하나님의 의가 소유가 된다면, 내가 만약에 치매 걸렸다고 칩시다. 믿음도 내 소유, 예수도 내 소유가 돼버리면 치매와 더불어 모든 것이 다 날아가 버려요. 모르는 데 뭐. 목사님이 와서, “집사님, 마지막인데 고백합시다. 예수님을 믿습니까?” “예수가 누구세요?” 전혀 몰라요. 옛날에는 잘 믿었는데 이제는 갔네. 그러면 구원방법을 새롭게 만들어야 돼요. 치매 안 걸린 자, 요건이 하나 더 붙지요. 건강할 때 예수 믿고, 두 번째, 단 치매엔 걸리지 않은.

여러분, 치매가 우리 마음대로 됩니까? 우리 신체가 주님 거잖아요. 주님 것을 주님이 치매로 만든 이유는 그 관계를 돈독하기 위해서. 치매라도 어디 간다? 천국 간다. 치매라도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은 변함이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치매 걸리게 했는데 그걸 누가 거기에 대해서 시비 걸어요? 시비 걸 수 없잖아요.

참 그래서 복음이 쉬우면서 어려운 이유가 방해요소가 있어서 그래요. 평소에 내가 나를 건사하고 관리하는 그 방식이 죽을 때까지 계속 가동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주신은 시시하게 보고 내가 나한테 투자한 것은 세상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겨서 귀한 것 때문에 자꾸 감춰지는 거예요.

오늘 시편 3편의 모든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라 하면, 나한테 무시당하고 나 때문에 가려진 것이 더 소중합니다. 그런 내용이에요. 나로 인하여 멀어지고 내가 귀찮다고 갖다 버린 것이 역전되어 오히려 나를 살리는 계기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압살롬에게 쫓겨 다니는 다윗이, 백성들은 압살롬 편이에요. 이야기가 뛰었습니다만. 모든 백성들은 아들 편이에요. 압살롬이 잘 생겼기 때문에. 옛날에는 털이 많은 사람이 하나님에 복 받은 것으로 봤어요. 다윗은 이제 노인네 아닙니까. 식상할 때 됐어. 지겹다. 갈아보자. 백성들의 여망이 촛불처럼 타올랐다. 다윗의 아들 중에서 괜찮은 인물이 낫다. 그래서 추앙하고 있단 말이죠.

이 말은 사람들이 시시하게 여겼던 다윗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4,5백 명 밖에 안 돼. 숫자로 칠 것도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무시했던 그들이 이스라엘을 살려냅니다. 우리가 무시했던 예수님이 나보다 더 소중한 것처럼. 나에게 있는 모든 것보다 소중한 것처럼. 그걸 계속 알려주거든요.

아버지와 아들 관계입니다. 솔로몬을 드러내기 위해서 다른 아들이 있어요. 암논, 압살롬. 이 관계가 복잡하지만 상당히 흥미 있어요. 암논이 병이 났습니다. 상사병, 누이동생이 아름답기 때문에 병이 난 거예요. 아름다우면 그냥 보면 되는데 사랑이란 이름으로 소유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암논이 요나답이란 간교한 친구의 말을 듣고 소유를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물리적인 육체의 힘을 사용합니다. 다말이 여성이니까 이겨내질 못하고 강간당했지요.

이 대목이 사무엘하 13장에 나오는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은 뭐하고 계셨습니까? 이러한 범죄가 일어나는 현장을 하나님은 무능한 분처럼 지켜보고 계셨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꾸몄습니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런 사태를 꾸몄다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섭섭함을 지울 길 없지요. 우리는 제삼자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못할 게 뭐가 있느냐고 하겠지만 강간당한 당사자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성폭행이라 하는데 저는 그 말이 듣기 싫어요. 성폭행이 아니에요. 그냥 강간이에요. 그런 것 보면 약간 짜증나요. 왜 자꾸 인권을 고려해줍니다. 그냥 강간범이지 성폭행이라 하면 다른 폭행과 같은 폭행이 되잖아요. 저항할 수 없는 상태에서 강간이에요. 강간이라 하면 성폭행이란 것과 느낌이 어떻습니까? 폭행은 당해도 회복할 여지가 있어 보이지만 세월 지나면 아물잖아요. 강간은 한쪽이 한쪽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다 삼킴을 당한 겁니다. 강간당한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그러니까 모든 책임에 대해서 강간범이 져야 된다는 거고.

폭행했다는 말은, 맞을 만 해서 맞았겠지 하는 그런 뉘앙스가 있어요. 성폭행이라 하면 폭행이니까 돈으로 해결하든지 약간 살고 나온다든지 어떻게 해결하면 다시 그 여자는 옛날처럼 돌아갈 수 있다는 뉘앙스를 보인단 말이죠. 하여튼 강간이라는 말은 오히려 더 정확하다는 표현이지 성폭행은 영 마음에 안 들어요. 폭행범도 인간이니까 인권을 보호하자는 차원에서 있는 건데, 강간이란 말이 너무 참혹하기 때문에 민주사회에서는 너무 부정적인 것은 빼자고 한 것인데, 이건 뭐 중요한 건 아니고요.

어쨌든 강간이었어요. 사랑이 아니고 소유지요. 그러면 다말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슨 뜻이냐 하면, 암놈의 아내가 되는 것이 그 다음에 이런 일이 벌어지게 한 하나님의 준비된 사태의 원활한 진척의 의미는, 내가 배다른 오빠의 아내가 되는구나. 옛날에는 왕궁에서 근친결혼이 많았어요. 그러면 아무 문제없는 거죠.

여자 입장에서 결혼하기 전에는 예뻤다는 것이 유죄가 되지만 결혼하게 되면 남은 인생의 책임은 나와 결혼한 남자가 다 져주기 때문에 나는 당신만 의지하면 내 인생은 불행 끝, 행복 시작이다. 이게 보상책으로 여자한테 남게 마련이에요. 그런데 암논이란 인간이 얼마나 비겁한지 그렇게 병이 날 정도로 사랑했으면 자기 아내로 삼아서 행복하게 해줘야 되잖아요. 그런데 성경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관계 해놓고 전에 사랑했던 것보다 더욱 더 미워했다고 돼있어요. 무슨 이런 변태가 다 있어요. 남자는 다 그런 거예요?

사이다가 병 안에 있을 때 거품이 막 올라와요. 사이다 병 따서 마시는 순간 김새지요. 탄산가스 빠지면 설탕물이죠. 쏘는 맛에 먹는데 없잖아요. 여기서 하나님께서 암논과 다말을 만나게 하시는 것은 인간의 소유의 허망함, 인간 소유 자체가 없음이에요. 인간이 소유하겠다는 욕망만 있고 실체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소유할 때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결국 무슨 욕망으로 변했느냐 하면, 꺼져, 라는 욕망으로 전환된 거예요. 암논이 다말에게.

그러니까 결국 암논은 자기 소유욕을 소유한 거예요. 일단 소유욕을 만족했잖아요. 그러면 다른 소유를 또 소유를 찾아가야 돼요. 그래서 남자는 여러 여자를 원하고 여자는 한 남자를 원하고. 내가 지어낸 명제입니다. 여자가 결혼하기 전에는 여러 남자에게 보이고 싶고, 결혼하고 나면 한 남자만 세퍼트처럼 무는 거예요. 요새는 좀 달라졌지만.

너, 내 것 다 가져갔으니까 네 것까지 포함하여 내 것으로 인수인계하겠다는 의도로 결혼하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결혼 남자들이 식겁한다 하죠. 남자들이 여자와 함께 있기 싫어하는 베스트 1위가 잔소리가 많다는 겁니다. 잔소리 때문에 같이 못 있겠다는 거예요. 여자가 남자와 같이 있기 싫어하는 첫 번째가 신선한 새로운 게 없다는 거예요.

어쨌든 암논을 통해서 인간의 소유욕이란 허망하기 짝이 없다는 겁니다. 왜 허망하냐? 내 소유욕은 내가 거둬들였으니까. 내 욕망이 진실이고 진리고 그게 곧 내가 꾸민 현실을 가동시키는 원리원칙이 되고 말았어요. 내 욕망대로 될 때만 가장 좋은 세상이고 그 욕망에 하나님이 동원해줘야 나는 그런 하나님을 아낌없이 하나님으로 인정하겠다. 그걸 암논을 통해서 보이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서 다시 솔로몬으로 돌아가면, 솔로몬은 여디디야죠. 솔로몬은 누구의 욕망입니까? 다윗의 욕망이었어요? 아니요. 밧세바 욕망이 아니죠. 누구 욕망입니까? 하나님의 자기 욕망을, 자기 사랑을 그냥 다윗에게 줘버린 겁니다. 하나님이 자기 의지대로 만들어가는 현실과 인간의 욕망이 갖고 있는 현실과의 싸움, 그것이 바로 시편 3편에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여기서 많다는 것은 하나와 다수를 대비하는 거죠. 하나는 다윗이고 다윗 외에 전부가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겁니다.

암논이 그렇게 할 때 다말이 희생자가 되고 오빠 압살롬 집에 있었습니다. 처녀의 티를 내는 공주 옷을 그 현장에 잃어버렸어요. 나는 이제 처녀가 아닌 데 나를 쫓아냅니까, 하니까 아내 삼을 마음 없다고 강제로 무조건 몰아냈어요. 그래서 다말이 오빠 집에 가 있었어요. 오빠는 다말은 그냥 가족으로 사랑했겠지요. 사랑은 뭐라 했습니까? 소유입니다. 다말을 건드린 것은 압살롬, 내 것을 건드린 거예요. 그러니까 가족을 사랑한다는 말은 태생부터 갖고 나온 나의 소유욕의 다른 표현에 불과한 거예요.

내 자식이 유치원 달리기 1등해야 돼. 남의 자식 1등하는 건 싫어. 나의 질투심을 유발해요. 인간은 혼자 사는 게 아닙니다. 뭔가 자기 소유에 둘러 싸여 살아요. 자식을 건드리면 날 건드린 게 돼요. 이걸 존재의 확장이라 합니다. 메를로퐁티의 철학이 이겁니다. 신체만 내 것이 아니고 신체에서 확장된 것도 내 것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처음에 초보운전시절에는 보닛 앞에 있는 물체와 부딪칠까 걱정하잖아요. 벌벌 떨면서. 그런데 운전대를 해보면 운전대와 차가 한 몸이 되는 겁니다. 교회에 누가 피아노를 증정했는데 얘들이 피아노로 장난치면 다른 사람들은 가만있는데 그 피아노를 증정한 집사님한테는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교회 꽃꽂이도 마찬가지고. 교회 갖다 바치는 게 화근이라. 그것만 주시해. 혹시 누가 흠집 낼까 싶어서. 내 존재의 확장이기 때문에.

헌금이란 내게서 떠나가야 헌금이 되는데 헌금해도 나를 떠나지 않으면 그 교회에 투자한 게 돼요. 주식을 산 게 돼요. 결국 교회 문제 있으면 누구 지분이 많은지 발언권과 관련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에 그런 일이 있었어요. 어떤 권사가 장로님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니까 장로가, “권사님, 이 교회 얼마 다녔어요? 헌금 얼마 냈어요?” 지분 문제로 나와요.

암논이 배다른 여동생을 강간했다는 소식이 아버지 다윗의 귀에 들어갔거든요. 다윗은 인간적으로 갈등이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둘 다 자기 소유 아닙니까. 자식은 소유거든요. 자기 소유를 친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치는 거예요. 암논을 치면 내 자식 치는 거니까 만약에 암논을 덮고 봐주게 되면 피해 입은 가정, 압살롬이 싫어할 거잖아요. 다말은 뺍시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니까.

그래서 그냥 덮고 가는 거예요. 여기서 압살롬은 아버지를 못 믿겠다는 거예요. 압살롬의 계획은 아버지의 소유권에서 본인의 소유권으로 따로 설정하겠다는 거죠. 그게 반란입니다. 반란이란 나는 이제 당신의 소유가 아니라는 겁니다.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암논을 죽여 버립니다. 암논이 그런 나쁜 짓을 했지만 아버지가 아들을 쳐낼 수 없는 이유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다윗 본인이 설정한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기 가정에 관여한 거예요.

그런데 압살롬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암논을 봐준 게 돼요. 아버지 다윗도 간음했잖아요. 간음했음에도 주께 사랑을 받았지요. 그게 아버지의 위상이고 아버지의 자리에요. 아버지 신체 말로 깔고 앉아있는 방석이란 말이죠. 방석 자체가 용서 위에 앉아있는 겁니다. 방석이 더 중요해요. 우리 인생이 어떻게 남보란 듯이 사는 인생보다 내가 깔고 앉은 십자가 피 묻은 방석이 더 중요하다니까요.

그걸 압살롬이 끊어버립니다. 양털 깎는 축제가 있어서 다윗의 아들들 다 불렀는데 보는 앞에서 암논을 죽였습니다. 죽인다는 것은 힘이 센 거예요. 힘이 세다는 것은 소유의 능력이 남보다 더 많다는 겁니다. 자기 소유권을 유지하는데 강력하게 굳어져있단 말이거든요. 어지간해선 소유권이 안 깨진다는 걸 보여준 겁니다.

압살롬이 자기 소유권으로 왕 되겠다면 백성들은 뭘 봐요? 백성들의 오해한 것이 다윗을 강력한 왕으로 본 거예요. 영토가 넓었으니까. 힘 때문에 강력한 게 아니고 다윗이 보여주는 천국은 힘의 강력이 아니라 끊어지지 않는 용서의 강력, 간음과 살인했음에도 구원받는 사랑의 강력함인데 그 사랑은 안 보이고 그저 누가 힘이 세냐? 지금 대세가 어느 쪽이냐? 대세가 이미 압살롬으로 기울여졌다면, 하나의 대세가 치고 나온다면 마치 그쪽이 대세인 것처럼 시늉을 해도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게 대세라고 마음에 결정을 내리고 딸려갑니다.

하나가 이슈가 된다는 것은 사회질서가 재편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보인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인간의 예상하면 안 돼요. 갑자가 돌발 사태를 일으켜요. 압살롬이 다 죽인 게 아니고 암논만 죽였는데 들리기는 왕자들 다 죽였다는 소식 때문에 다윗이 낙담을 했고, 다윗언약이 특징은 뭐냐? 아들이 왕이 돼야 되는데 솔로몬은 어려서 그 힘의 대결장에 끼어들 수 없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전체가 압살롬에 넘어갈 입장이 됐어요. 여기서 중요한 게 다윗이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옛날에 내가 죄를 지어서 이런 벌을 받는다는 생각이 다윗에게는 전혀 없다는 거예요. 오히려 반대로 이야기해요. 압살롬이 그렇게 나한테 해를 끼쳐도 하나님께서 선으로 바꿔줄 것이라고 시므온이라는 자기를 저주하는 사람에게 말했어요.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어디 출신이냐 하면, 다윗이 유다지파거든요. 사울이 죽고 난 후에 베냐민지파에서 왕이 나와야 되는데 유다지파가 이스라엘 왕이 되니까 억하심정들이 베냐민지파에게 잠재돼있지요. 잠재돼있던 것이 다윗이 어려울 때 네가 하나님께 벌 받아서 그렇게 됐다고 한 거예요. 다윗이 한 짓거리를 보니까 벌 받아도 싸다는 거예요. 다윗은 절대적으로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걸 우리한테 적용시키면 옛날에 하나님 앞에 잘못하고 교회 안 다녔기 때문에 이런 고생한다는 것은 버림받아야 될 지옥 가야 될 생각인 거예요. 그런데 내 행동이 원인이 되어 이런 나쁜 결과가 온 게 아니고 주께서 그게 선이고 옳기 때문에 주신 거예요. 원인은 주님한테 있고 주님이 원인이 되어서 우리를 살려내기 위해서 영생 얻게 하기 위해서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건의 원인은 우리한테 찾으면 안 된다는 것은 다윗언약에 속한 사람의 생각이에요.

이것 무지무지하게 중요한 겁니다. 교회에 온 사람들이 울고 기도하는 이유가 반성하잖아요. 반성을 왜 합니까? 내가 행동을 잘못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로 벌 받았다고 하는데 그 사고방식 자체에서 벗어나야 돼요. 그게 제일 힘든 거예요. 인생에서 제일 힘든 게 내가 행동 똑바로 안 했기 때문에 이런 벌을 받는다는 것에서 벗어나야 돼요.

반대로 내가 행동 잘하게 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겠지, 하는 그 발상에서도 같이 벗어나야 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선물, 나란 자체가 결과물이고 선물이에요. 선물 받은 사람은 선물 준 사람을 증거 하면 되지 나를 거기에 끼어 넣으면 안 됩니다. 잘했기 때문에 복 받았고. 그런데 그걸 자꾸 우리는 테스트해요. 인생을 살면서 쓸데없이 매일같이 테스트합니다. 오늘은 기도가 잘 되네. 아마 오후 쯤 좋은 일이 있을 거야.

압살롬 같은 그리고 압살롬을 따르는 잘못된 이스라엘의 사고방식이 육이 있는 우리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걸 시편 3편에서 지적하지요. 2절에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라고 남들이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내가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매일같이 주입시킨다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나는 안 돼. 이렇게 교통사고 나니 나는 안 돼. 지옥 갈 거야. 난 나쁜 사람이야. 태어날 때부터 우린 죄 속에서 태어난 걸 모르고 나쁜 짓해서 벌 받는 차원에서 나쁜 사람이라고 자꾸 자기를 잘못 이해하고 있어요.

정말 제가 강의 더할 이유가 없어요. 그것만 바꾸면 돼요. 그게 바로 적이라는 겁니다. 지금도 마귀가 계속 적이 되어 우리한테 이야기하는 것은 “너, 행동 똑바로 안 하면 네 미래 없어. 넌 몰라도 네 자식들, 삼대를 작살내는 거야.” 이런 생각은 내가 나한테 한다고. 내가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원수가 바로 나야 나. 다윗을 보여주시면서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그저 있는 그대로 찬양하고 감사하고 고마워하면 돼요. 그게 바로 나 아닌 내 안에 계신 주님은 새로운 나를 만든 새로운 길을 가게 하신 영생 쪽으로 가게 하신 주님을 못난 모습을 통해서 얼마든지 감사하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평생을 속임을 당했고 또 내가 나를 속이지 않았습니까? 아직도 우리 자신을 속이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것으로 만들어졌는데 내 것이라고 소유권을 자랑하고 소유권을 확보하려는 저희들 이제는 이런 짓거리에서 벗어나서 주님만 감사하고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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