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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지역강의 > 부산강의
2018-11-12 16:05:56 조회 : 423         
인간없음 181112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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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25.♡.150.18) 18-11-14 09:59 
20181112a 부산강의 : [시편]15(8편)-인간 없음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8편을 비롯해서 모든 성경을 보게 되면, 특히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성경 전체가 혹시 공허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던가요? 비현실적이라는 생각 또는 비실제적이라는 것, 비현실적은 아니더라도 우리 실제에 그다지 보탬이 안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요.

처음에 천국에 대해서 하나님의 복음, 십자가의 용서로 간다고 할 때 기분 좋았지요. 그 뒤에, 뭐? 그 뒤에 뭐가 있는데? 성경 전체 핵심 되는 것을 한꺼번에 내가 가졌다고 했을 때 내가 가진 복음이 마치 보험 들 듯이 내 죽음 이후도 책임지지 보장이 된다면 나머지 죽을 때까지의 그 간격을 그다지 성경이 필요치 않다는 생각이 확 들어올 겁니다.

중간에 띄엄띄엄 교회 나와도, 아예 일 년에 한 번밖에 안 나와도, 삼 년 만에 나와도 이미 알 건 알고 챙길 건 챙겼으니까 그다지 내게 손해는 되지 않겠다는 것, 내 인생에 지장이 없다는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이 자연사할 때까지 여기 생존과 뭐로 채우느냐 하는 거예요.

자연사에 대해서 우리가 거부하진 않아요. 사람은 다 늙어 죽으니까. 자연사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은 자연사, 누구나 죽는다는 것까지는 아는데 나중에 늙어죽더라도 지금은 생존에 해 있잖아요. 이 둘을 분리하는 겁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지금은 살아 있다는 거죠. 그러면 뭐가 빠졌느냐 하면, 자연사가 정상이고 생존이 비정상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거예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질 못해요. 왜 그러냐 하면 자연사할 때 누구나 죽는다고 하거든요. 누구나 죽는 것이 아니고, 이게 정상이니까 당연히 죽이시는 분의 조치에 의해서 죽는 거예요. 당연히 죽는 겁니다.

은행에 들어갔다고 합시다. 사람들이 많으니까 대기표를 뽑습니다. 자기 번호를 부르면 담당직원 앞에 서요. 그러면 호출당할 때까지 그 사람이 은행을 벗어나야 됩니까? 은행 안에 있어야 되지요. 은행 안에서 티비나 농협 광고 다 들어야 된다 이 말이죠. 왜 그러냐 하면, 볼 일 있어서 왔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제일 먼저 생각할 것은, 자연사 이 죽음이 나의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라는 발상을 가져야 돼요. 내가 죽는 것이 나의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에요. 주님의 일이 되면, 죽어도 마땅한데 생존도 내가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일로서 살아 있다는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해줘 봐야 돌아서서, 복음 챙겼는데 내 나름대로 살지, 뭐. 또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세상에, 내가 성경 얼마 안 봤지만 성경을 보면 인간이 사는 것이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없어요. 성경 자체가 용납 안 해요. 성경만 덮으면 모든 인간이 자길 위해서 살아요. 그걸 구체적으로 자기 실익, 실제 이익을 위해서 살아요.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란 말이죠. 주님은 자연사 되고 만날 분이기 때문에 지금은 털어내는 거예요. 그냥 혼자 있고 싶은 거예요, 인간은.

혼자 자기 일 하고 싶은 겁니다. 혼자 자기 일 하고 싶으니까 자기 일이 있고, 본인은 그걸 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데 그걸 왜 시비 걸어? 내가 하고 싶단 말이야. 난 더 살고 싶단 말이야. 왜 시비 걸어? 20대 젊은이가 해운대 벤츠 탄다. 음주 운전해서 구속됐잖아요. 제 아내가 그래요. 저 부모가 참 기가 찬다. 그 나이에 벤츠를 왜 사주나?

그럼 그 부모는 그럴 거예요. 내 자식한테 내가 사주고 싶은데, 왜?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이건 뭐냐 하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왜 남들이 나에게 간섭하느냐? 이거거든요. 앞으로 술 안 먹고 사람 안 다치게 하면 되잖아, 라는 식으로 모든 게 마무리될 때 그 사람은 뭘 놓친 거예요?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일이 없지요.

그럼 20대가 음주 운전한 걸 욕할 게 아니고 우린 평소에 어때요? 지금 우리는 주의 일 하고 있습니까, 내 일 하고 있습니까? 어느 것이 멀고 어느 것이 가까워요? 솔직히 말해서 주님에 대해서 모르겠다는 거예요, 우리는. 주님이 맡기신 일, 사명 하는데 그게 아까 이야기했지만 공허한 거예요. 성경에서 하는 것이 전부 공허해 보이는 거예요. 지금 나는 내가 하는 싶은 대로 살아요.

그런데 내 몸은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있다는 이 말 자체가 실내용이 없는 거라 아주 공허한 거예요. 왜 성경말씀이 공허하다고 느껴질까요, 성경 전체가? 실생활에 아무 보탬이 안 되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생각을 왜 그렇게 하게 될까요? 인간이 공허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공허하지 않는다는 말은, 내게 실제 이익이 있어야 되고, 이걸 니체 같은 철학자는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니체가 상당히 대우받는 이유가 핵심적으로 이야기해서 그래요. 인간이 실익을 얻는다는 것은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에서 현대에 맞지요. 그런데 니체는 이걸 한 자로 이렇게 이야기해요. 인간은 ‘힘’을 얻기 위해서 살아간다.

제가 어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는데 예수님의 흔적은 뭘 빼기 위함이라? 우리에게 힘을 쫙 빼기 위함이라. 니체는 기독교를 반대하기 때문에 반대로 나갑니다. 인간은 힘을 기르기 위해서, 힘을 모으기 위해서, 힘을 장착하기 위해서, 많은 힘 안에 자기가 안주하기 위해서 인간은 살아가는데 힘을 모으는 감정을 의지라고 했어요.

그래서 니체는 인간이 의지를 갖는 게 아니고 의지에 의해서 인간은 딸려 가는데 그 의지에 목적이 있다. 그건 뭐냐 하면, 이 땅에서 생존의 힘, 살고자 하는 그 힘에 의해서 인간은 모든 행위를 하게 되는데, 그 행위에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그것은 노리는 게 있고, 기대감이 있다는 겁니다. 힘을 얻기 위해서.

니체가 그런 이야기하기 전에 힘을 둘로 나눴어요. 좋은 힘과 나쁜 힘. 같은 칼인데 도둑놈이 쓰면 살인하고, 요리사가 쓰면 요리가 된다는 식으로. 독사를 물을 먹으면 독을 내지만 엄마가 물을 먹으면 젖을 내지요. 니체가 여기에 대해서 반대하는 게 좋다, 나쁘다는 게 인간의 무한한 의지에 굴레를 씌운다는 겁니다. 선악을 넘어서, 에요. 니체철학은 선과 악을 넘어서서 거기에 뭐가 있는가를 들여다 볼 생각했냐?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동안 유럽에서 선과 악을 기독교가 지배했거든요. 기독교를 이제는 잊어버려라. 기독교라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신에 의해서 선과 악을 자꾸 강요하는데 솔직히 네 자신을 들여다 봐. 기독교 떼버리고 신 떼버리고 남는 건 뭐가 있느냐 하면, 이 몸이 남아있지요. 이 몸이 아침이면 충만하게 껄떡거리면서 울렁대면서 추구하는 게 있다. 그게 바로 나를 유지하는 힘을 모으기 위해서 아침부터 껄떡거리고 설치고 있는 거예요.

힘을 모으기 위해서 의지가 동원되는 거예요. 의지가 가동되니까 좋으니 나쁘니 할 게 아니라, 좋으니 나쁘니 하는 것은 외부에서 타인이 하잖아요. 타인 중에서 제일 높은 최고의 타인이 신인 거예요. 기독교 신 없애버리면 나는 나한테 물으면 된다는 거예요. 넌 뭘 원해? 그걸 원해? 하면 돼. 해. 끝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니체철학은 네 자로 하면 된다는 겁니다. 군대에서 하고 조폭들이 하는 것 있잖아요. 하면 된다. 상당히 비윤리적으로 보이잖아요. 이 비윤리적인 것이 어떻게 해서 오늘날 21세기 사회정치경제 사상에 기본으로 스며들었습니까? 사회정치경제, 외교, 건강, 의학에 스며들었지만 가정까지 스며들었어요.

가정에서 아버지는 장로고, 엄마는 권사로 강제로 애를 교회에 데려간다고 합시다. 그러면 아버지, 엄마가 어린 자식을 교회 데려가는 것은 기독교 정신으로 둘러싸여 또는 성경 정신으로 포장하고 지키기 위해서 가잖아요. 그런데 그 애들이 학교나 사회에서 같은 또래를 만나면 뭐가 스며듭니까? 부모는 어제 교회 갔으니까 지가 버텨내고 견디겠지 하는데

막상 그들의 활동하는 대부분의 시간은 무엇이 침투하고 무엇에 영향을 받아요? 미세먼지? 물론 미세먼지일 수 있어요. 정신적 미세먼지가 뭐냐 말이죠. 바로 그거잖아요. 하면 된다, 아닙니까. 힘 모으는 거예요. 니체사상이 니체 개인적 사상이 아니고 오늘날 보편화된 거예요. 힘 있는 게 사람 대우받는 겁니다.

힘 모으는 시간에 성경을 본다? 이건 니체는 성경 제쳐놓으라 했거든요. 하나님 믿지 말라 했거든요. 네가 신이지 다른 신이 어디 있다고 네가 신되는 게 초인사상인데 네 자신이 신이지 다른 신은 없다고 이야기한다 말이에요. 그렇다면 거기에 부합되는 철학도 사상도 내가 신이라는데 합당한 철학을 인간들은 이끌어오는 겁니다.

그동안 기독교 가정에서 눌러놨지만 그렇다면 자녀들의 본 자체가 달라진 건 아니에요. 눌러놨을 뿐이죠. 누름이 해체가 되고 족쇄가 풀리게 되면 바깥이 진공상태가 아닙니다. 니체사상이 확 들어오는 거예요. 사람은 힘이 있어야 산다. 그런 식으로 하니까 성경 자체가 제가 처음에 어떻게 느껴진다 했습니까? 공허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공허한 이유를 다시 설명하게 되면, 인간은 언젠가는 자연사 되고 지금 생존해 있다. 자연사와 생존을 인간은 가시적으로 분리시키는 거예요. 죽을 때 죽더라도 지금은 살아 있잖아, 하고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을 분리시켰단 말이죠. 왜냐하면 누구나 죽으니까. 그런데 자연사, 모든 잘잘못 가리지 않고 다 죽는다는 말은 누구의 일이라 했습니까?

죽음이 인간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잖아요. 죽는 게 하나님의 일이라면 살아 있다는 것이 내가 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에 배치되는 거예요. 살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에 반대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생존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생존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 때문에 이건 안 살아도 계속 살게 된다는 생각을 이 세상에 누가 갖겠습니까?

죽을 때 죽더라도 일단 살아봐야지. 살아 있다는 것을 자기 일로 간주하지 살아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일로 간주를 안 하잖아요. 그러니까 살아 있다는 게 내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이 들어있고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는 이 성경을 볼 리가 없지요.

부산모임에 여러 명 오게 되면 강조를 안 하겠는데 전보다 없다고 생각이드니까 없는 이유를 찾아내는 거예요. 성경 자체를 시시하게 보는 거예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봐도 되고 안 봐도 되는 것, 그 이유를 줄곧 20분 동안 이야기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다시 결론내리면, 내가 사는 것은 누구 일이다? 아버지 일이 아니고 당사자 내 일이라고 우기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에게 죽음이 찾아오게 되면, 그리고 자기가 사랑하는 자에게 죽음이 찾아오게 되면, 온 동네방네 시비 걸고 화내고 분노하고 격분하지요. 왜 신이 뭔데 내 일에 방해합니까? 어떻습니까, 누가 방해자에요? 누가 누굴 방해한다 말입니까? 살고자 하는 것이 주의 일을 방해했지, 살고자 한 인간이 주의 일을 방해한 거예요.

죽는 것이 주의 일이라면, 주의 일 맞지요. 내가 죽고 싶어 한 사람 누가 있습니까? 그래도 강제로 죽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잖아요. 주의 일이라면 그 주의 일과 생존을 분리 못 시킨단 말이죠. 연속돼있다 이 말이죠. 자연사와 생존이 이어져있어요. 자연사하는 일이 내일이 될지 모레가 될지 아무도 모르는 입장에선 연결돼있어요.

그리고 95년을 살았다칩시다. 내일 안 죽습니까? 아무리 오래 살아도 주께서 그 날 죽으라면 95년 산 것, 죽음 앞에서 다 날아갑니다. 없는 거예요. 인간은 없는 존재란 말을 제가 어느 관점, 어느 지점에서 이야기하느냐 하면, 우리는 누구나 죽는다는 지점에서 없는 존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의존강의에서 이야기했지만 없는 존재의 말을 듣지 말란 말이죠. 지나 나나 없어질 존잰데 그 말 왜 듣습니까? 들어봤자 상대방에서 무슨 이야기 나오느냐 하면, 나 이렇게 사는데 버텼다고 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의 일이 나오는 게 아니고. 나는 나 사는데 이런 헌신적인 노력을 했더니만 이만큼이라도 살았다는 그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누구한테 많이 들었습니까? 사랑하는 부모님한테 많이 들었잖아요.

성경 하나 찾아봅시다. 시편 27편 10절을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누가 나를 버렸다고요?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주님을 나를 영접했다. 내가 사는 게 부모의 명예와 가문과 우리 집안의 체면을 위해서 살았다는 사람은 보이스피싱한테 걸린 거예요. 속임을 당한 거예요. 지금 내가 사는 것은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이 살아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내가 사는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주님은 나를 버릴 리가 없지요. 그런데 누군 버립니까? 부모는 버리는 거예요. 부모가 우리를 버린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상당히 의아해 여기느냐 하면, 어릴 때부터 부모한테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 이렇게 고생해서 살았으니까 너도 나처럼 고생해서 살면 된다고 그 모델케이스를 부모 자신이 생존한 원리를 자식들에게 대물림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 잘못된 것 맞잖아요. 잘못됐거든요. 부모 본인이 뭘 안다고. 주님이 직접 이야기하면 되지요.

내 몸은 남이 관리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내 몸을 관리하는 게 아닙니다. 누가 관리하겠어요? 주님이 관리합니다. 관리하는 뜻과 원칙과 계획과 방식은 바로 우리가 보고자 하는 이 성경에 나옵니다. 거기에 목표도 있고 의미도 있어요. 목적도 있어요. 과정도 다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안 듣는 이유는 벌써 마음가짐이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그 생각이 가득차서 그래요. 전에 우리가 철학 공부했잖아요. 그게 바로 니체사상이고 후배 철학자들이 니체사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살고자 하는 것은 비정상입니다. 이 생각은 잘못된 거예요. 우리가 오늘도 살아야지. 이건 비정상이에요. 성경에서 비정상으로 본다니까요. 오늘도 죽어야지. 정상으로 보는 거예요. 누가 반대로 이야기하게 해요? 그건 우리를 지옥 보내려고 애쓰는 그 존재, 악마지요. 악마가 미세먼지처럼 완전히 온 인류를 다 덮어놓으니까.

악마는 항상 예수님을 의식해요. 네가 예수처럼 망하면 안 된다고. 예수처럼 맥아래 없이 아무 대가 없이 실적도 없이 그냥 쓸쓸하게 죽어서야 되겠는가, 라는 식의 정신을 우리 내부에 계속해서 백신 주사 놓듯이 우리 정신에 집어넣는 겁니다. 우리가 복음 아니까 안 그런 것 같지요. 만약에 집안에 어떤 일이 있어 보세요. 자식이 무슨 문제가 생기고 내 몸에 어떤 병이 와 보세요. 대번에 나오는 게 격분이에요. 돌아버려요. 미쳐버려요. 울기도 하고.

나중에 교회 교인들이 전부 다 자기 사는 게 정상이라는 식으로 나가면 누가 영향 받느냐 하면, 복음 전하는 목사도 헷갈려요. 내가 저들이 원치 않는 걸 이야기해서 저들이 삐졌고 교회 들어올 때부터 입이 대발 나왔고 나갈 때까지 삐져서 돌아가고. 내가 뭔가 잘못했는가, 달리 설교해야 되는가?

그럼 명성교회 목사처럼 그렇게 설교해야 되는지, 아니면 대전에 있는 코미디언 목사처럼 그렇게 설교해야 되는지, 조용기처럼 해야 되는지 헷갈려. 반은 개혁적으로 하고 반은 복 받는다고 사람 달래고 해야 되는지, 갑자기 성경이 안 보이고 사람들이 보이는 거예요. 같이 있던 교인들 눈에 안 보이면 그 사람들 어떻게 달래서 데려오고 싶고. 이런 게 막 눈에 보이거든요.

그럼 주님께서 그 목사가 기도한다면 응답한다고 칩시다. 너, 왜 어떤 의도에서 그런 걱정하느냐고 한다면, 교인들이 안 오잖아요. 교인들이 오면 무엇이 너한테 이익인데? 내가 오래 살잖아요. 힘을 갖춘 큰 교회가 되어 오래 살잖아요. “목사님, 설교 잘못돼서 진짜 우리 교회 힘이 없습니다.” 이런 소리 귀에 들어오게 되면 진짜 교회인지, 엉터리 교회인지, 아니면 우리가 억지로 우기는 건지 목사 자체가 헷갈리는 거예요.

힘이 없기 때문에 힘이. 은연중에 뭘 기대했습니까? 결국 오늘 강의에서 뚜렷한 비정상이 나왔네요. 인간에게 뭐가 문제입니까? 기대감, 이게 화근이네. 이게 사단 냈어. 기대가, 은근히 노리는 것. 성경을 백 독, 천 독해도 기대갖고 보는 거예요. 성경 보고 우리 남편 어떻게 꼬셔서 교회 나오게 하는가, 이런 기대감. 성경 보고 자식은 어떻게 변화시킬 수 없을까, 하는 기대감.

이런 기대감이 내 뜻인 건 맞는데 과연 그게 나를 생존케 하시는 주의 뜻인가? 지금 나와 더불어 생존하시는 하나님의 뜻 맞는가? 이것을 여러분 성경에서 확인해본 적 있습니까? 성경에서는 우리의 기대감을 완전히 배제시킵니다. 일체 인정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모든 기대감에는 전제가 있어요. 나의 기대감이기 때문에 일단 내가 살아야 돼. 내가 산다는 걸 기정사실화하고 그 다음에 내가 원하는 걸 기대감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덧붙이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기대감을 박살내느냐 하면, 이미 죽은 자로 박살내요. 지금껏 제가 수십 년 복음 전하면서 듣는 사람들이 제일 이해 안 되는 게 이 말이에요. 우린 이미 죽었다는 말. 아마 그들도 수천 번 들었을 거예요. 수천 번 들으면 뭐합니까? 이해가 안 되는데. 괴리라 하지요. 너무 괴리현상이 벌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오늘 강의에서 뭐라 했습니까? 공허하다는 거예요.

성경대로 했는데 이상하게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대목에 와서 결정타를 날리는 겁니다. 이미 죽은 자란 것을. 이게 실감이 나지 않는 거예요.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이미 죽은 자. 이미 죽은 자라고 인정하게 되면 그 다음에 나오는 논리들은 굉장히 쉬워요. 죽은 자가 무슨 기대를 하겠어요. 이미 죽었으니까. 죽은 자가 무슨 욕심을 내겠어요. 이미 죽었으니까.

이미 죽었다는 이것만 되게 되면, 그 다음 성경에 어려운 공허하니 관념적인 그것이 진짜 실제적이고 현실적이라는 것이 그대로 쉽게, 쉽게 다 연결되는데 문제는 딱 어디에 걸리느냐 하면, 과연 성경에서 나를 죽은 자라고 하는데 갈라디아서 2장 20절, 이미 우린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분명히 하는데 그게 마음에 와 닿질 않으니까 이게 고민인 거예요.

와 닿지 않으니까 기대감 같은 게 생기고 내 뜻대로 해보면 복이 온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복이 안 오고 일이 꼬이게 되면 하나님 앞에 분통을 터뜨리고. 죽은 자가 무슨 분통을 터뜨려요. 말이 안 되거든요. 말이 안 되지만 말이 안 되는 게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올 땐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말이 안 되는 줄 알지만 내 쪽에서 어떻게 처신하란 말입니까? 성경 세계가 현실이 아니고 지금 말이 안 된다고 화내고 있는 이게 현실이라면 무슨 수로 그걸 내가 떨쳐낼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아침에 눈만 뜨면 살아야 되겠는데.

시편 8편입니다. 시편 8편의 주제는 이겁니다. 사람이 그립다. 어디 사람 없소, 이게 주제입니다. 사람 같은 사람이 없어요. 언약으로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이 없어요. 전부 다 혼자 잘 먹고 잘 살아요. 관계가 끊어진 채. 관계가 끊어진 걸 죽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자연사와 달라요. 인간이 자연사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고 있다는 걸 그때야 알겠지요. 죽고 난 뒤에는 알겠지요.

부자가 죽어서 지옥 가고 난 뒤에 비로소 진짜 자기의 위상을 알게 됐지요. 죽어서 지옥 간 게 아니에요. 살아서 지옥 가야 될 짓거리만 한 거예요. 생각이나 마음이나 태도가 지옥 갈 그것만 한 거예요. 술을 먹는다. 왜 먹느냐? 아까 니체철학에서 술을 먹는 이유는, 힘이 없다는 그 상실감을 메우기 위해서 그걸 감추기 위해서 술을 먹는 거예요. 내가 개뿔도 아닌 것이 싫다는 거예요. 개가 들으면 기분 나쁘겠지만.

왜냐하면 자기 기억 속에는 잘 나가던 자기가 괴물처럼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까. 잘 나가던 내 모습과 초라한 현실이 너무 괴리가 크니까 이게 싫어서 잠이 오지 않는 거예요. 술을 먹어야 잠이 온다는 거예요. 늘 술 먹을 순 없지요. 벤츠 타고 돌아다니는 그것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근사하게 여기는 내 기대감을 충족한 나는 어디 있느냐고 호소하면서 술 먹고 담배 피우고 온 짓 다하는 겁니다. 내가 되고 싶은 기대감에 충만한 그 나를 못내 잊지를 못하는 거예요.

제가 전에 설교시간에 예를 들었는데요. 나이가 팔십이 넘은 안다성이란 가수가 있어요. <사랑이 메아리칠 때>나 <바닷가에서> 부른 노래 들어보면 바닷가에서 여인이 머플러 날리며 서있다고 했잖아요. 혼자 바닷가에 왜 갔습니까? 해녀도 아니고 바닷가에 왜 가요. 뭔가 찾고 싶은 거예요. 권혜경 씨가 불렀던 노래 <산장의 여인>, <호반의 벤치> 이런 것 있거든요.

그 노래 들어보세요. 자아 찾기 나선 겁니다. 이 자아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아까 이야기한 내 관리는 누가 한다? 기어이 내가 하고 싶다는 거예요. 이 말은 누구한테 맡기기 싫다? 주님한테 맡기기 싫은 거예요. 주님이여, 내 일에서 손 떼세요, 라는 거예요. <호반의 벤치>가. 모든 드라마 주제가 그거에요. 신이시여, 손 떼세요.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하고 내가 가꾸고 나갈 겁니다. 내 기대감에 충족되게.

그걸 우리 주님은 아셔요. 그래서 시편 8편을 통해서 어디 사람 같은 없는지 찾는 겁니다. 그것을 두 자로 ‘인자’라 하는 거예요. 사람 같은 사람 없지요. 전부 다 악마에 속했지요. 자기밖에 모르죠. 힘 키우기 위해서 어떤 기대감 갖고 미친 듯이 설치지요. 자기한테 항상 실익, 실제적인 이익을 오늘 얼마나 획득했는지 정산하지요. 저녁 때 자기가 판단하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판단할 때 실제 모든 힘, 은행통장에 있는 힘, 그리고 내가 느끼는 힘, 내가 유력한 몇몇 친구를 안다는 힘, 세상에 나가면 이만큼 알아준다는 그 힘을 부러워해서 그 힘을 추앙하고 숭상하고 있는데 그게 바로 니체의 의하면 오늘날 뭐냐 하면, 초인들의 누리는 종교입니다.

유럽의 남자들의 종교는 뭐라 했습니까? 축구. 전 세계 청소년들이 종교는 뭡니까? 방탄소년단. 이게 어디서 겁나게 일본이 건드려. 댓글 달아서 일본방송국을 마비시켜버렸어요. 어딜 우리의 신을 건드려. 우리의 신인데. 왜 방탄소년단이 신이냐 하면, 내가 그렇게 되고 싶은 거예요. 춤만 추고 노래만 해도 조회수가 무려 40억 되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은 것이 어릴 적 꿈이에요.

남들이 알아주는 거예요. 누구를? 그 중심부에 뭐가 있습니까? 모든 알아줌의 중심부에 내가 있는 거예요. 거기에 비해서 60대, 70대 해운대 앞에 까마귀도 똑같은 시커먼 옷 입고 앉아있을 때 본인이 얼마나 초라하겠습니까? 방탄소년단과 75살 먹은 나의 초라함 모습. 샤워해도 냄새나고 어떻게 해도 자식들도 근처에 오지 말라고 하고 손자들도 오지 말라 하고. 이쪽은 춤 좀만 해도 40억 조회수, 이쪽은 오라해도 안 가고.

결국 호반의 벤치고 바닷가에서, 바다라는 죽음의 깊이와 그 경계선에 설 수밖에 없지요. 나, 이대로 죽어야 되나? 그동안 평생을 나 살리기 위해서 이렇게 애썼는데 그 결론이 결국 내가 알아서 내 목숨 없애야 되는 이게 진정 나란 말인가, 하고 서있는 거예요. 그런데 바닷가에서 죽을까말까 하고 있는데 자기야, 하고 헤어진 애인이 돌아오게 되면 또 좋다고 있지요.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도 거짓말, 돌아온다는 것도 거짓말. 이래도 거짓말 저래도 거짓말. 조항조의 <거짓말> 가사 읽어보세요. 정말 남자를 그리워하는 여자가 또 속고 속지만 그래도 너의 빈자리는 남겨두겠다는 거예요. 돌아올 생각도 안 하는데 빈자리는 남겨두겠다는 겁니다.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돌아온다는 말 좀 해달라는 거예요. 얼마나 인간이 자기 혼자 산다는 게 힘들어요.

그런데 과연 인자, 모든 사람이 자기한테 박수 치고 자기를 잘한다고 다들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이게 서로 경쟁관계잖아요. 결국 이용당하지 않으면 이용할 사람이 없다는 이 모순된 관계 속에 아무런 실적도 없이 살아간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러한 세상에 대해서 시편 8편 1절은 뭐냐 하면,

시편 8편 1절과 2절에서 시도하는 것은 전쟁입니다. 전쟁을 벌여요. 전쟁은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면, 자기 공동체에 경계를 만들기 위해서 전쟁이 일어나요. 내가 사랑하는 쪽과 내가 미워하는 쪽을 구분 짓기 위해서 전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인간 전쟁에서 우리 공동체에서 책임져야 될 것과 책임지지 않을 것과의 구분, 이 구분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구분되지 않습니다.

북한에 귤 보내면 북한과 전쟁상태가 안 돼요. 왜? 그들에게 맛있는 것 주겠다고, 책임지겠다고 나서기 때문에 전쟁상태가 안 되는 거죠. 북한이 핵무기를 어디 써먹으려고 만들었느냐? 설마 남한은 아니겠지. 이렇게 될 때는 하나의 민족공동체가 되는 거예요. 둘 사이에는 전쟁이 없는 거예요. 종전선언을 할 수밖에 없어요. 전쟁이란 내가 책임져야 할 것과 책임지지 않을 것과의 전쟁이에요.

전쟁이란 말이 너무 거창하니까 다른 말로 옮길게요. 경쟁이라 합시다. 경쟁이란 자기 딸이 입사시험에서 서류합격하고 면접 보는 날이다. 그러면 엄마는 마음이 답답해서 그 현장에 찾아가본다고. 그런데 면접시험장에 두 명이 아니고 백 명 왔다고 하면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쟁과 전쟁이 있겠지요.

전쟁을 왜 하느냐 하면, 재는 내 딸이라는 내가 평생을 다하여 책임질 같은 테두리 안에 집어넣는 거예요. 전쟁을 하는 것은 내 사람과 내 사람 아닌 것,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사랑할 사람과 미워할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서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아말렉과 전쟁했지요. 아말렉에 대해서 아예 작살내라 했거든요. 요즘 용어로 하면 섬멸. 진멸, 섬멸 비슷한 말이에요. 섬멸은 깡그리 씨를 말리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전쟁이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나의 약속의 땅, 천국이죠. 약속의 땅에서 주님이 사랑하지 않는 책임지지 않는 대상들을 만나게 해서 이스라엘을 어디까지 규정할 수 있는가를 전쟁을 통해서 정리하는 겁니다. 이게 전쟁이에요.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같은 데서 우리의 싸움은 영적 전쟁이라 했지요. 에베소서 6장에서 그 전쟁의 무기를 뭐로 무장하라 했어요? 복음으로 무장하지요. 복음의 세계가 천국이에요. 새 언약이니까, 살과 피. 그런데 복음으로 무장하라 했는데,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인간은 사는 게 자기 일이다, 주의 일이다? 주의 일이죠. 그런데 그냥 주의 일이라 하면 너무 공허하잖아요. 공허한 주의 일에 실제적인 계획이나 프로젝트나 과정이나 목표, 목적은 성경말씀에 있다고 분명히 이야기했잖아요. 그게 에베소서에서 전쟁을 복음으로 해요. 복음으로 전쟁하게 되면 어떤 패로 나눠지겠어요? 복음으로 천국 가는 패와 복음을 거부하는 쪽이 나오겠지요.

여러분, 이게 공허합니까? 안 들어도 그만인 이야기에요? 처음에 강의할 때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사람들이 복음 듣고 그 다음부터 코빼기도 안 보이는 이유는 보험 들어놨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죽어서 좋은 데 가기 위해서 일단 아니까 지금 생존과 자연사 될 때까지 그 간격은 이제는 뭐로 메운다는 거예요? 자기가 하고 싶은 자기 포부와 자기 계획으로 그걸 메우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생존은 주의 일이 아니고 누구 일이 됩니까? 나의 일이 되는 거예요. 나의 일이라고 우기는 그 순간순간에 주께서 복음을 줬어요, 안 줬어요? 복음으로 이 땅이 움직이잖아요. 그걸 놓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이 없는 거예요. 사람다운 사람이 없는 거예요.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말해서 전쟁을 위해서 해야 되는데 전부 다 자기 일에 급급하고 자기 일에 정신 팔려서 지금 내 몸으로 하시는 주의 일에 관심이 없는 거예요. 무관심한 거에요.

그러면 목사님, 짜증내지 마시고 복음이 이렇게 한다고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걸 이야기하면 되지, 라고 한다면 그걸 아까 이야기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미 우리가 죽은 자다. 그게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이미 우리가 죽은 자라고 한다면, 우리에게 덧씌워지고 덧입혀진 것은 뭐냐? 주의 일만 남아있거든요. 그러면 사도 바울처럼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해서 십자가 일을 위해서 우리가 하루하루 살고 있다. 매일 살려주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죽었다는 것이 전~~~혀 납득이 안 돼요. 주님께서 납득이 안 되는 것을 조각냅니다. 시간으로 조각내요. 하루치를 뭐요. 예를 들면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고 너희들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했지요. 그 뒤에 뭐라고 합니까? 그 날 염려는 그 날에 족하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에 아침 되고 저녁 되니, 그 날 속에 인간을 가둬놓고 그걸 인간으로 규정한 거예요.

아침을 누가 만듭니까? 주님이 만들지요. 저녁을 누가 만듭니까? 주님 만들었지요. 그럼 아침, 저녁이라는 박스 안에 인간을 세웠을 때 인간은 누구의 솜씨입니까? 주님의 솜씨지요. 그러면 주님의 일은 뭐냐 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만 살아라, 이 말입니다. 그걸 너한테 허용했다는 겁니다. 거기 필요한 양식으로 하루치만 줘요.

그게 바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친 겁니다. 내일 양식을 쌓아두지 마라. 그러면 내일은 어떻게 살라고? 내일 살고 죽는 것을 네가 판단할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인간의 일에선 내일이 기대가 되지만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내일은 없습니다. 내일은 없다니까 제임스 딘 영화가 생각나네. 내일 죽을 테니까 오늘 먹고 마시자는 성경말씀도 갑자기 생각나고.

내일은 없는 날인데 의도적으로 생각한 네 잘못이다. 그래도 사람이 계획을 잡고 살아야지 성을 쌓아도 계획 잡고하고 전쟁을 해도 계획 잡고 한다는 성경말씀도 있는데 내일 뭘 할 건지 미리 예상해야 되지 않습니까? 불의한 청지기도 자기가 퇴직하고 난 뒤를 생각해서 챙길 것 챙기지 않았습니까? 내일을 생각하지 안 할 수 없지요, 라고 하는데

내일은 여기서 과제를 줘요. 나를 위한 내일이란 게 없고 주님의 과제가 내일까지 넘어가게 되면 비록 내일이 안 되더라도 오늘 우리가 그 내일을 생각해야 되는 겁니다. 주님의 지시와 명령이 오늘 범위를 넘어간다면 이건 주께서 주신 과제가 넘어가는 거예요.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네가 원하는 일을 한다, 원치 않는 일을 한다? 원치 않는 일에 네가 종사하고 있는 거예요.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이 먼 타국으로 갔다. 이건 누구 뜻입니까? 주님의 뜻이잖아요. 제발 갔으면, 갔으면. 아니죠. 주의 뜻이라고요. 아마 제발 갔으면 하는 것은 게으른 종이나 그런 소리했을 거예요. 귀찮아 죽겠다.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

그렇게 우기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이 자기 일이라는 것을 죽음을 통해서 아예 제거를 한 거예요. 제거를 하고 그 다음으로 넘어가는 거예요. 그럼 이 일을 누가 하시는가?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서 이런 식으로 아버지한테 순종하신 거예요.


10분 쉽시다.
 한윤범(IP:125.♡.150.18) 18-11-14 10:00 
20181112b 부산강의 : [시편]15(8편)-인간 없음
(강의: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제가 시편 8편의 핵심은 사람 같은 사람은 없느냐고 던졌고 사람 같은 사람을 찾거나 만들어내는 과정은 전쟁이에요. 전쟁을 하게 되면 경계를 짓는 거예요. 책임질 사람과 책임지지 않을 사람 또는 내가 끝까지 구원할 사람과 구원하지 않을 내보내야 될 사람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전쟁이 이스라엘 외부와의 전쟁이라고 생각하겠지요. 외부 전쟁을 통해서 내부 전쟁을 유발시킵니다. 전쟁할 때 원리원칙이 나오지요. 전쟁하면서 이스라엘은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느냐 하면, 내 나라가 아니라 주님의 나라라는 쪽으로 변경이 일어나야 돼요.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식으로 하면, 주께서 복음으로 전쟁을 벌이면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주의 몸이다. 또는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의 인생이라는 변화가 일어나야 돼요.

내가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주와 함께 살아 있다는 조건 하에 지금 내가 살아 있는 것이다. 그 조건을 철폐시키면 안 돼요. 없애버리면 안 됩니다. 주님 자꾸 껄떡거리지 말고 나가세요, 라고 밀어버리면 내가 사는 게 돼요. 그러나 이미 죽으신 주님이 들어와 버리면 둘 다 살 수는 없어요. 주님이 살아 있으면 내가 죽든지 내가 살아 있다고 우기면 주님은 나한테 꺼지든지. 둘 중에 하나밖에 없어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전쟁에는 외부를 통해서 내부의 실정을 까발리는 겁니다. 이스라엘 주변에 많은 이방민족이 있잖아요. 그들이 들락날락하면서 치고받고 하면서 우리 자체에 변화를 유도하는 것, 그게 전쟁의 의미거든요. 나중에 전쟁에서 이기거나 패배할 때 이유가 있단 말이죠. 이유가 뭐냐? 원칙인데 그 원칙이 법이에요. 율법입니다. 전쟁을 통해서 율법이 정리가 된다. 또는 율법이 제자리 잡는다. 착상이 된다. 이렇게 보면 돼요.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 앞장세워서 전쟁했는데 빼앗겼잖아요. 그리고 사울이 아말렉과 전쟁하기 전에 제사부터 했는데 그것이 잘못이었지요. 결국 사울 왕은 먼저 제사 드려서 잘려버립니다. 사무엘에게. 이것은 말로 아니라 바깥에 있는 전쟁을 통해서 내가 뭔가 세상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이 과연 성경이 공허한 걸까요? 아니면 실제적입니까? 실제적이죠. 전쟁이라 했지만 오늘날 다른 말로 하면, 경쟁이죠. 경쟁을 하려면 기대가 있고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뭔가 계획이 있겠죠. 이런 것 하나하나 모든 것이 경쟁심에서 유발된 겁니다. 남한테 안 지려고 힘을 더 모으기 위해서. 니체철학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기대해서 실제적으로 나서지 않더라도 은근히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 라는 그것조차도 율법에 의하면 이게 악이 됩니다. 부산강의 듣는 사람들에게 미리 이야기하지만 이번에 아가를 하는데 아가서를 하면서 미리 알아야 할 것은 사랑이 자기에게 악행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 아셔야 돼요.

부부끼리 서로 사랑 안 하면 좋은데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순간 그 부부는 본인들이 감당 못할 부부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랑에는 끝이 없기 때문에. 그리움이 멀찍이 있을 때 그립다 하잖아요. 그거는 그리움 반도 안 간 거예요. 진짜 그리움은 옆에 보고 있어도 그리워요. 그립다는 것은 불만족이거든요. 못다 채워진 게 있어요. 간격이 있단 말이죠. 못다 채워지면 그 결핍으로 견딜 수 없는 거예요.

정말 사랑하면 눈에 보고 있어도 그립고 동침을 해도 그리워요. 그 넘어설 수 있는 간격, 아무리 인간이 몸으로 할 수 있는 걸 다 동원해도 그 사람을 내 안에 집어넣을 수 없다는 육적인 한계로 인하여 고통하고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거예요. 합궁을 해도 그립다니까. 그러니 사랑한 게 잘못이에요. 노래 가사 같다.

그러면 차라리 그 사람이 죽었으면 좋겠다. 죽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죽으면 두 번 다시 못 본다는 그리움이 더욱 더 배가 되지요. 눈앞에 봐도 그립고 그리움을 참을 수 없어서 죽어라 해도 두 번 다시 못 본다는 것 때문에 고통스럽고. 인간에게 주어진 사랑이란 것은 사랑만 형벌이 아니고 모든 게 형벌입니다. 인간은 완벽한 완전한 사랑을 행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큰 아픔을 줘요.

그러면 사랑은 지가 하고 싶어 합니까, 생기는 겁니까? 생기는 거죠. 이게 미치는 거예요. 내가 하고 싶어 것 같으면 사랑을 그만두면 돼요. 그런데 그만두는 것은 아예 사랑이 아니죠. 그냥 장난친 거죠. 내 것 만들어보겠다고 수작을 부린 것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랑을 없애기 위해서 다른 사랑을 찾아요. 이 사랑을 하게 되면 저 사랑을 잊을까 싶어서. 그래서 잊어질 사랑이라면 애초부터 사랑이 아니죠. 미치는 거예요.

대타로 사랑한다고 잊어질 사랑이라면 그건 첫사랑도 아니에요. 장난친 거고. 정말 사랑은 그 사람 말고 백 명을 사랑해도 그 사람보다 못한 아내 후보감밖에 안 돼요. 조약한 조잡한 대용물밖에 안 돼요. 그 사람에게 이쪽 사랑하면 할수록 허한 감정은 점점 더 커져요. 그럼 어쩌라고? 죽어야 되지요. 그럼 죽을 때까지? 아니. 이미 죽었어.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은, 제가 언젠가 그런 강의했는데, 죽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걸 어제 낮 설교에서 했지요. 인간이 사는 것은 내 죽음을 내레이션하기 위해 산다고.

사랑을 하게 되면 세상에 그동안 이건 실제적이다, 이건 분명히 있다 하는 모든 것도 공허하게 돼요.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사랑 자체가 공허해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이 밥 먹여 주냐고 욕하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한테는 밥이 공허해요. 밥 먹을 때 숟가락으로 국물 뜨면 국물에 그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 거예요.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지금 나와 같이 사는 사람 말고 다른 사람이 보이면 괜찮지만 국물에 자기 남편 얼굴 보이면 어쩌라고? 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워진다면 사랑이 스톱이 돼야 되는데 사랑엔 스톱이 없어요. 죽어야 멈추는 병이에요. 그런데 아가서에 보면 사랑이 나와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 사랑은 없는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걸 수련회 때 강의하고자 합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사랑 앞에 인간은 어떻게 없어진다? 내가 죽어야 하잖아요. 그러면 해답은 나왔어요. 내가 있기에 나의 망상으로 나의 이미지로 나의 허깨비로 등장한 것이 밥보다 더 중요한 사랑, 돈보다 더 중요한 사랑이 나오는 겁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우리한테 골머리가 되는 거예요.

제대로 우리가 복음을 알면 죽는 사람을 오히려 출감한다고 생각해서 부러워해야 돼요. “아이고, 형님. 좋겠습니다. 감옥에서 고생하다가 이제 출감하네요.” 물론 복음을 아는 조건 하에 그동안 나는 이미 죽은 자로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살아 있다는 사람에게만 출감이지, 그것도 모르는 사람한테는 “죽음아, 가라.”

신성일이 부산영화제에서 한 소리 있잖아요. “암세포를 이길 겁니다.” 일주일도 안 돼서 죽었어요. 암세포가 얼마나 웃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자기 자신을 못 놓았다는 거예요. 이게 신성일 본인의 결정적인 오류였어요. 인생 잘못 산 거예요. 자기 자신을 못 놓은 거예요. 그걸 말 달리 하게 되면, 여러분은 놨습니까? 생존의 나를 놓았습니까? 그걸 놔야지요. 안 놓으면 천국 못 가니까 놔야 돼요. 놓을 때 내가 하지 말고 그분이 강제로 교체시키면 되는 겁니다.

그게 히브리서 2장에 나옵니다. 6절에,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지금 우리가 보려는 시편 8편을 그대로 인용하지요.

그런데 히브리서 2장에서 핵심을 뭐로 하느냐 하면, 여기 나오는 그분이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시는 분, 인자라고 지칭되는 그분이 누구냐 하면, 이 땅의 사람이 아니라는 게 핵심이에요. 이 땅에 인간 같은 인간 없다는 게 핵심이에요. 이건 누굴 이야기하느냐 하면, 아예 물어요. 8절 끝에 보면,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6절에 나오네요.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이렇게 나온다고요.

시편에서 증거한 핵심 내용은 뭐냐? 그 뒤에 8절, 9절에 보면,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여기에 핵심이에요. 그러니 이것이 히브리서 2장을 보지 않고 시편 8편을 보면서 난 이렇게 돼야지, 라는 그런 기대감 발상 자체가 히브리서에 보면 잘못된 거예요. 너 자체는 시편에서 나가! 시편에 나오는 인자, 사람이라 하는 것은 우리 보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예수님을 보고 한다고. 예수님을 겨냥해서 다윗이 시편을,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 앞에 펼치신 겁니다.

여기 천사가 등장해요. 9절에 보면,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히브리서 2장에서 핵심되는 주제는 예수님 묘사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분이라고 묘사함으로서 천사들의 누구한테 복종하느냐 하면, 사람한테 복종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에게 복종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냥 복종하는 게 아니고 시편 8편과 연관시켰어요. 그럼 예수님을 뜯어보면 그 안에 시편 8편에 하나님이 하셔야 될 일, 해야 될 주의 일이 포함돼있어요.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했잖아요. 우리는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우리 안에 스며들었단 말이죠. 그렇지 않으면 천사들이 성도들에게 복종할 필요가 없어요. 천사들은 말씀이 완성되는 상태에서 복종하게 돼있어요.

천사가 어디가 못나서 우리한테 복종합니까? 왜 우리를 도와줘요. 껍데기 외피 보고 도와주는 게 아니에요. 신성일은 물론 인물 잘 생겼어요. 많은 사람은 거기에 복종할 거예요. 그러나 천사는 신성일에게 복종하지 않습니다. 껍데기를 보는 게 아니고 고등학교 어디 나왔는지 보는 게 아니고 시편 8편이 완성된 상태인가 그걸 보고 천사가 복종하지 말래도 복종하고 도와주지 말래도 도와줘요. 천사는 곧이곧대로 살아가는 존재물이에요.

천사한테 유도리를 요구하면 안 됩니다. 천사한테 감히 협박 공갈치면 안 돼요. 천사는 하나님 말씀의 완성에 대해서는 복종하는 그런 속성을 지니고 이 땅에 만들어진 피조물이에요. 쉽게 말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천사가 안 도와주려야 안 도와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의 일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이여 도와주소서. 성령님이여 도와주소서. 천사여 도와 달라 하니까 이건 번지수를 잘못 계산한 거예요.

주님은 내 일 안 도와줍니다. 내 안에 있는 말씀이 만개되도록 내 안에 적용된 말씀이 바깥으로 전개되고 확장되고 확대되는 일에 우리를 쓰시는 거죠. 주의 증인 노릇할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겁니다.

그럼 이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천사들이 예수님께 복종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시편 8편을 어떤 식으로 완성시켰는지 그것만 찾으면 되겠죠. 예수님께서 시편 8편의 완성을 자기 백성에게 집어넣게 돼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완성시킨 시편 8편이 이제는 우리 안에도 있는 거예요. 시편 8편이 살아 있다는 조건 하에 우리도 살아 있는 겁니다. 시편 1편이 살아 있는 조건 하에 우리가 살아 있는 거예요.

말씀이 살아 있는 조건 하에 우리가 살아 있고 좁은 문으로 가라, 넓은 길로 가지 말라는 그 기능이 살아 있는 조건 하에 우리가 살아 있는 거예요. 말씀이 나오니까 꼰대 아니라도 터져 나올 수밖에 없지요. 지적질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말씀이 있으니까. 없으면 그런 소리 하겠어요? 있으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그렇다면 이 시편 8편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느냐 하면, 히브리서 2장 9절에 보니까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시편 8편을 할 때 예수님이 살아 있는 채로 하는 게 아니고 시편 8편에 의하면 예수님을 어디에 집어넣어서 이루게 했다? 잠간 동안 죽음과 고난에 하나님이 집어넣게 하고, 여기에 천사들이 도와줬어요. 주님을 고난과 죽음에 집어넣음으로써 드디어 예수님이 시편 8편의 완성된 인자에 합당한 존재로서 등장한 겁니다.

우리가 보는 시편 8편을 설계도에요. 시편 8편대로 살면 돼요. 우리는 일종에 하늘나라의 인공지능이라 보면 됩니다. 중국에서 인공지능 앵커가 나타났어요. 표정도 어색하지 않고 앵커 잘합니다. 원고를 컴퓨터에 집어넣은 그대로 이야기해요. 해설하는 사람이, 이 앵커는 휴식도 없고 화장실도 안 가고 태업이나 반발도 없고 월급도 없고 스물네 시간 잠도 자지 않고 앵커 일 한다는 거예요. 꼭 우리를 닮았어요. 우리는 잘잘 때도 시편 8편. 낮에도 시편 8편, 항상 시편 8편. 다른 말로 하면, 천사가 우리를 도와주는 게 되는 겁니다.

그건 조금 있다 더 하고요. 다시 시편 8편 2절에 보면, 주의 대적이 나오잖아요. 아까 한 것 기억나지요. 전쟁이란 어떻다? 무엇이 이스라엘이냐 테두리 지을 때 반드시 이스라엘 아닌 쪽과 전쟁을 붙여서 여기서 전쟁의 원칙, 하나님의 율법이 이스라엘 속에 실제적으로 현실화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공허하게 보지 않아요. 왜냐하면 자기 역사기 때문에. 오늘날 교인들은 성경 보면서 공허하다 하지만 실제로 성도도 매일같이 당하는 전쟁과 경쟁 속에서 주님이 원하는 것은 바로 넓은 길로 가지 말라. 좁은 길로 가라는 것처럼 모든 성경말씀, 네가 반석 위에 집을 지어라. 모든 성경말씀과 관련되어서 우리에게 실제라고 들이닥치게 한 거예요.

조건이 있지요. 나를 위한 내 인생이 아니고 주을 위한 인생이란 그런 조건만 된다면 그것이 얼마든지 공허한 게 아니고 실제적인데 우리는 성경 들을 때뿐이고 또 내 인생과 내 가족만 남아요. 그래서 시편 8편 2절에 전쟁할 때 맞장 뜨는 사람이 있어요.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무슨 말인지 앞뒤가 전혀 연결이 안 되지요.

연결이 안 될 때는 이렇게 생각하면 연결이 돼요. 젖먹이와 어린아이를 결과물로 보자. 젖먹이한테 칼 쥐어주고 나가라는 게 아니고 걷지도 못하는 어린아이에게 갑옷 입히고 창 들고 싸우라는 게 아니고 전쟁의 부산물로 뭔가 전쟁은 벌어지는데 계속 뭔가 생산되는 것이 뭐냐 하면, 젖먹이와 어린아이가 되는 거예요.

건방지고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산다는 이런 인간을 주님께서 이스라엘로 간주하시고 거기에다 전쟁을 유발시키면 이렇게 건방지고 내 인생만 챙기고 자길 알아달라고 살던 인간이 주께서 이루시는 일을 경과해보니까 그들이 뭐가 됐어요? 젖먹이와 어린아이가 돼버렸어요. 이건 철저하게 종속되고 예속되는 존재다.

젖먹이와 어린아이는 누가 일으켜주지 않으면 일어서질 못해요. 젖을 지가 알아서 먹습니까? 젖먹이잖아요. 누가 먹여줘야 되잖아요. 어린아이가 스스로 힘으로 밥을 떠먹을 수 있고 돈을 벌 수 있습니까? 보호자가 있고 후견자가 있잖아요. 이게 그들에게 준 뭐가 돋보이느냐 하면, 권능이 돋보이는 거예요. 하나님의 권능이 돋보이려면 그동안 하나님의 권능을 훼방하고 방해했던 세력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네 인생 네가 알아서 살아라. 이게 내 가정과 나에게 주신 오늘의 은혜를 사람들이 다 가리고 있는 겁니다.

어제 열한 시 넘어서 메시지를 주고받았는데 제가 알던 분인데 답변을 해줬어요. 저한테 뭐가 불만이냐 하면, 사람이 예수 믿고 새사람 되어서 하는 일을 왜 목사님은 그걸 공격하십니까? 그런 쪽으로 이해한 분이었어요. 물론 내가 그런 뜻이 아닌지 알지만 그런 분과 중재하려고 애쓰다보니까 그쪽을 이해해줘야 되지 않겠느냐. 목사님이 너무 복음만 이야기하지 말고 평소에 사람들이 예수 믿고 새사람 되려고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그것도 좀 감안해서 그 가치를 너무 묵사발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말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했지요. 저는 사람을 전부 다 죽었다고 간주해봅니다. 사람이 죽으면 사라져요. 사라지면 그 사람 뒤에 남는 게 있지요. 하나님의 은혜가 남아있다고. 그 은혜를 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주님의 은혜를 누가 가리고 있어요? 살아서 잘났다고 펄펄 뛰는 그 인간이 그 존재가 복음을 가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전쟁인 거예요. 날 알아달라는 거예요. 못 알아주겠다는 거예요, 저는.

주님을 사랑하잖아요. 사랑하는 것도 너한테 악행이죠. 아까 사랑도 악행이라 했으니까. 원래 공동체에서 전쟁할 때 외부에서 와서 내부에서 전쟁을 벌이면 징벌이 있어요. 그게 추방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할 때 결과가 뭐냐? 내가 사랑하기로 작정한 데서 추방시키는 것이 가장 무서운 형벌이에요. 네는 내 보호망 속의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요한복음 10장처럼 너는 내 양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에요. 이것보다 무서운 이야기 없어요. 피 흘리고 괴물 나오고 이게 무섭지 않아요. 주님으로부터 너는 내 양이 아니라는 그게 제일 무서워요. 그 반대로 가장 기쁜 소식은 뭡니까? 너는 내 양이라는 된다면 우리가 거지 되도 노숙자 되도 괜찮아요. 우린 아무 상관없어요. 너는 내 양이라는 것, 그것조차도 주님께 예속되고 종속된 그 모습으로 죽어도 괜찮아요.

따라서 추방된 게 제일 무서운 형벌인데 그게 창세기 4장에 나옵니다. 아벨 죽인 형벌이 뭐였습니까? “내 동네에서 나가. 꺼져!” 이거거든요. 내 공동체에서 나가. 이게 제일 무서워요. 물론 목사님 교회는 알아서 나갔지만. 복음 듣기 싫어서 나가버린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내가 머물 동네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에 그렇게 잘 아는지. 이게 영이 다르다는 거예요. 고상하게 포장해서 영이 다른 게 아니고 내가 관심 두고 복음 있는 성도가 관심 두는 것에 관심이 없는 거예요.

성도와 주님이 관심 두는 것은 인자거든요. 인자가 어떻게 됩니까? 인자가 그냥 받습니까? 뭔가 고난과 죽음을 경유했기 때문에 획득한 거잖아요. 그럼 우리는 인간도 아닌 게 시편 8편 속의 그리스도와 하나 되려면 반드시 뭘 경유해야 돼요? 고난과 죽음을 유발하는 체험을 해야 돼요. 그걸 본인이 알아서 하겠다고요? 턱도 없는 소리.

누가 알아서 합니까? 우리를 젖먹이처럼 먹이시고 키우시는 주님께서 시편 8편에 목표를 정해놓고 천사가 와서 우리로 하여금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게 하시는 거예요. 우리의 의도가 아닙니다. 그래야 악마에 장악된 이 세상이라는 테두리에서 노는 동네에서 다른 동네로 분리가 가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빠져나올 때 우리가 어떻게 힘써야 됩니까, 라고 물으면 우리가 힘쓸게 없어요. 왜냐하면 권능이니까. 우리에게 나왔으면 권능이라 하지 않아요. 우리는 그냥 실력이지 권능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힘을 우리에게 주실 때 권능이에요.

어제 낮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예수의 흔적은 뭐냐 하면, 큰 구멍 같은데 거기다 뭘 집어넣느냐? 그동안 이 세상에 살면서 성도가 세상과 경쟁하고 비교할 수 있는 거리 있잖아요. 너는 경제적으로 수입이 얼마다, 건강한가, 건강하지 않느냐, 정치적으로 누구 편이냐, 더 나아가서 나는 평생 동안 악하게 살았다, 선하게 살았다, 그 선악의 기준을 구멍 속에 다 집어넣어요. 그런 조건이 다 없다면 더 이상 남과 비교할 건더기가 없지요. 여지가 없잖아요.

그럼 뭐만 자랑하겠어요? 쓰레기통만 내가 이런 것 때문에 마귀한테 시달렸다는 쓰레기통이라 할 수 있고 그걸 태워버려요. 소각장을 들고 다니는 거예요. 이게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니 눈앞에 십자가 안 보이나, 이 말이에요. 그동안 나를 힘들게 조건들, 인간들과 경쟁하기 위해서 내건 조건들, 힘자랑하기 위해서 내건 조건들을 다 소각시킨 그걸 들고 나설 때 그걸 바로 예수님이 시범해 보이신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얼마나 주위에서 평가가 다양했고 얼마나 치밀하고 날카롭게 차갑게 다가왔습니까. 죄인들과 밥 먹으면 밥 먹는다고 난리고, 금식 안 한다고 시비 걸고, 안식일에 병 고치니까 안식일 어겼다고 이야기하고. 하는 족족 사단의 짓이고 악마의 짓이라고 귀신의 대장 짓이라고 그렇게 욕을 얻어먹었잖아요. 견디다 못한 제자들도 예수님과 결별했잖아요.

제자들 모습이 정말 그들의 거쳐야 될 필수코스를 거친 겁니다. 사실은 우리도 그 코스를 매일같이 겪는다고 보면 돼요. 나, 주님 싫어. 이러려고 예수 믿었나. 그 코스. 벌써 우리가 그런 생각한다는 자체가 세상이 주는 조건을 못 벗어난 거예요. 그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없어요. 없을 땐 권능이 임해야 되지요. 그 권능이 속 시원한 권능이죠.

권능 받는 건 좋지만 너무 외롭지 않느냐고 하는데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외롭지 않아요. 47절에.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저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을 이스라엘이라 해요. 어떤 테두리라 해요. 너는 내 양이라 이 말입니다. 너는 내 관리 하에 있는 사람이고 내 책임 하에 창세전부터 사랑받기로 작정된 사람이라고 넣는 거예요. 나다나엘이 외롭습니까, 지금? 나다나엘은 권능과 함께 있어요. 나다나엘은 지금 무엇에 놀라느냐 하면, 내가 기도해서 갈 수 없는 나라를 주께서 내가 기도하기 이전부터 권능으로 나를 안다고 하신 그 힘에 푹 빠져서 사는 거예요.

세상에 이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복권 당첨됐다고 복? 그 돈 다 떨어져요. 돈 떨어지면 다시 맹탕 됩니다. 또 허전하고 쓸쓸하고 없어요. 그 권능을 누가 방해했습니까? 내가 방해했지요. 누가 따라가려고? 악마 쳐놓은 그 조건 있잖아요. 같은 인간이니까 우리 패라는 거예요. 아니에요. 우리 패 아니에요. 주께서 강제로 두 패로 나누는 겁니다.

사람 같은 사람과 사람 아닌 사람으로 두 패를 나누는 거예요. 어떻게? 예수님을 보내십니다. 예수 체험되지 아니하면 예수 편이 아니거든요. 그럼 예수님은 어떻게 살았는가? 하루하루 죽음의 길로 고난의 길로 가셨단 말이죠. 우리는 죽기 싫은데 고난 받기 싫은데. 염려하지 마세요. 권능이 오실 거예요. 권능이 오게 되면 우리로 하여금 세상 자체가 세상의 평가나 경쟁 자체가 시답지 않고 시시하게 느껴질 겁니다. 참 웃기네.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그걸 제가 지난 낮 설교에 예수의 흔적이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예수의 흔적만 남기고 나머진 망치로 다 쳐버린다 하지 않습니까. 튀어나온 것. 주님의 관심은 그게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그래서 뭐만 자랑한다 했던가요?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시죠.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자랑할 것과 자랑하지 않을 것도 분간 못하고 지킬 것과 지키지 못할 것도 분간 못하는 겁니다.

시편 8편 계속 해봅시다. 젖먹이와 어린아이로 뭘 세운다? 결과물이라는 증거는 젖먹이와 어린아이가 있는데 시편 8편에선 이런 결과를 낳는 걸 뭐라 했습니까? 권능을, 그 다음에 뭐라고 돼있습니까? 세운다, 에요. “저 능력 봐. 자랑할 만하잖아.” 주님께서 자랑하고 싶은 거예요. 저 봐. 저 사람들 마귀한테 속해서 경쟁하고 자랑질하고 기분 좋다 또는 절망한다.

놀이동산 롤러코스트 타듯 인생 그렇게 살아야 되는데, 저 봐. 꼭 어린아이 같잖아. 젖먹이 같잖아. 지적질 해도 젖먹이로 지적질 하는 건 괜찮아. 주님의 젖만 바라보고 살잖아. 젖먹이가 젖을 먹고 만족스러워서 엄마 얼굴 쳐다보는 그 관계 그 연결로 살아가잖아. 어떻게 인간으로서 저런 인간이 나올 수 있는가. 봐라. 하나님의 하신 일의 권능을. 이 놀라운 위력을 봐라 이 말입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고린도전서에 나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교인들끼리 재판하고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어려운 일을 너무 쉽게 이야기했어요. 그것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아유, 쉽다. 결혼했는데 고민이에요. 갈라서라. 아유, 쉬워요.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 아유, 쉬워요. 여자가 사십이 다 됐는데 좋은 사람 하나님이 중매시켜줬으면 좋겠습니다. 결혼? 혼자 살거든 주의 뜻인 줄 알고 혼자 살아. 결혼하면 네가 고생이야. 말을 너무 쉽게 해버려요. 나 봐. 결혼 안 했잖아. 이런 식으로.

왜 쉽게 하느냐 하면, 당연하기 때문에. 사도 바울님, 돈 많은데 어디다 투자하면 됩니까? 요새 부동산도 안 되고.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해라. 네 집에 돈 없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라. 말을 너무 쉽게 해버려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 뜻과 같이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어린아이에게 자기를 키우고 보호자 되시고 자기를 인정해주는 주님 외에는, 어린아이에게 돈 만 원짜리 지폐라든지 금붙이는 아무 의미 없습니다. 금으로 구원받는 것 아니잖아요.

참 저도 말을 좀 쉽게 한 셈이 됐는데 어린아이와 젖먹이처럼 사는데 밖에 나가면 이왕이면 랜드로버 타는 어린아이, 벤츠 타는 젖먹이 또 이러고 싶거든요. 그러면 작은 자 안에서 또 경쟁이 시작되는 거죠. 그럴 때는 주께서 더 권능을 입히시죠. 수난과 고난과 죽음이 가까이 있다는 걸 깨닫게 해서 낮아지고 더 낮추는 겁니다. 상관없잖아요. 네가 그런 것 없더라도 네 신분과 네 위상과는 상관없다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 오늘날 성도들의 제일 큰 문제점은 뭐냐 하면, 자기의 신분의 얼마나 귀한 줄을 모르고 살아간다는 게 안타까워요. 얼마나 큰 걸 얻고 얼마나 많은 걸 얻고 얼마나 누리게 했는데 너무 세상이 탐이 나서 그 고귀한 가치를 버리지 말아야 할 걸 엉뚱하게 쓰레기통에 버리고 외면하고 살아가는 모습으로 질질 눈물 흘리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안타깝다 이 말이죠.

3절을 봅시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갑자기 해와 달 이야기하다가 왜 인자와 결부시키느냐 하면, 해와 달보다 사람이 더 귀하다 이 말이죠. 꽃보다 사람이 더 아름답다는 노래…….

그 사람은 우리를 말하는 게 아니고 주님의 권능에 의해서 생긴 주님의 권능이 여기서 작열하는 인간, 주님의 인공지능(오늘 제목 후보), 해와 달보다 위대한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면서 얻어낸 생산물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보기에는 아주 초라하고 대수롭지 않고 남들 보기에도 그렇지만 우리 자신도 그렇게 봐요.

평생 뭐했노. 바닷가 갯바위에 앉아서. 자꾸 자기 자신을 외로운 존재로 간주하는데 주의 일이 작열하는 곳이에요. 외로워도 괜찮아. 왜? 우리가 외로워도 그게 주의 백성이라는 권능으로 덧입혀진 그러한 인식으로 살아가셔야 돼요. 나는 몸이 아파서 골골댄다. 골골대더라도 그 자체가 주의 권능으로 생각하자 말이죠. 넌 그 짓하다 죽어.

5절에 보면,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잠시 못하게 하셨다. 천사보다 낮아지게 했다. 고난 받고 죽으니까 천사보다 못하잖아요.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주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실 때 과학적으로 따지면 이해 안 되는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성전세를 어디서 끄집어냈습니까? 그냥 주머니에서 내주면 되는데, 물고기가 하나 왔는데 입을 열어보니까 많지도 않아 딱 성전세 액수만큼만 있는 거예요. 요새 마술사들이 하는 마술 같아. 카드에 사인해놓고 여기 당신이 사인한 카드가 있습니다, 하고 내놓는 거예요. 미리 예정됐고 미리 작정됐다는 사실 미리 예정되고 작정된 그 계획이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 속에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계획, 주님의 작정 때문에 우리는 요 모양, 요 꼴로 필히 살아가야 돼요. 왜냐하면 인생이 나를 위한 인생, 잘 나라고 보낸 인생이 아니잖아요. 주님과 겸하여 있지 않습니까? 주님이 주님답기 위해서 최적화된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 내려서 우리로 하여금 이 인생을 살게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알 수 없는 변수의 작용이에요.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닙니다. 그렇게 잘못하도록 유도한 변수는 수천 가지, 수만 가지가 있습니다. 어디 것 하나라도 빠지면 지금 내가 잘못했다는 이야기가 안 나오는 다른 상황이 벌어졌어요. 그 상황은 일일이 인간의 지능으로 다 헤아릴 수 있습니까.

만약에 남편과 선 볼 때 차를 놓쳤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 다방이 아니고 다른 다방이라면? 온갖 변수를 능히 만들어낼 수 있어요. 그러나 이 변수, 저 변수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남편을 주님이 몰아넣었다고 보면 돼요. 그것도 주님의 권능이죠. 권능인데 그 성질은 뭐냐? 고난과 역경과 결국은 너 만나서 나 죽는다는 죽음이죠. 죽음과 고난과 역경을 통해서 주님이 이 땅에서 하신 그것을 계속 우리 인생을 통해서 복제를 하는 거예요. 똑같은 걸 복사해버려요.

고난주고, 고난주고 아무나 와도 고난주고, 고난주고. 꼭 붕어빵 하는 것처럼 밀가루반죽에 앙꼬 넣고 돌려버리고, 밀가루반죽에 앙꼬 넣고 돌려버리고. 똑같은 것, 예수님의 공생애 고난과 십자가 가는 길을 우리에게 그대로 복제해서 집어넣어버린 겁니다. 그런 작용이 일어날 때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의 권능에 속했다, 주의 백성으로서 마무리 복종하는 그러한 위상으로 존재하는 사람이라고 보면 돼요.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봅시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이걸로 설명 끝내겠습니다. 인격, 인물을 시편 8편 마지막에선 인물이 뭐로 바뀌었습니까? 이름이죠. 왜 바뀌어야 되냐 하면, 인물은 시간적으로 한 장소에 제한돼있어요. 주의 이름은 시간과 공간을 벗어났을 때 효과 있는 게 이름이에요.

예수를 만나면 구원받을 것이라는 게 아니에요. 주의 이름을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을 구원을 얻으리라. 인물로 있으면 존재가 되고 이름은 뭘 유포하느냐? 사건들을 발산시킵니다. 주의 이름으로 벌어진 사건이죠. 인물로 있을 때는 내가 그분에게 다가가야 돼요. 지금 비행기 타고 팔레스타인, 이스라엘로 가야 돼요.

그러나 이름은 공간적인 제한을 두지 않고 사건이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이 한국 땅에 있는 나에게 사건을 유발시키면 권능을 행사하면 우리는 어젯밤에 이렇게 생긴 주님을 만났다는 게 아니라 완성된 주의 이름으로 내 이름이 삭제되는 기쁨을 누립니다. 내 인생이 지워진 내 인생이라는 게 없다는 것, 주의 인생이 엎어져서 주의 이름으로 소속된 예속된 사건의 일부가 되죠. 내가 살아가는 게. 내가 존재하는 것이 주께서 일으킨 사건의 일부가 돼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남 앞에 교인들 앞에서 주의 이름으로 나서야 되지요. 그게 로마서에 나오잖아요. 무엇을 하든지 주의 이름으로 하라. 이게 예수님 마태복음, 마가복음에 쭉 나오는 이야기에요. 선지자 이름으로 하면 선지자 상을 받고, 주의 이름으로 하면 주님의 사람이 되는 거예요. 내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이면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이름을 외치는 곳에 함께 있겠다는 약속이 주의 이름 안에 이미 포함이 돼있어요.

그동안 주의 이름을 누가 방해했어요? 내 이름이 방해한 거예요. 내 인생이 방해했고, 내가 유발한 사건이라고 우겨서 방해한 거예요. 그런데 주의 이름이 사건으로 권능이 오게 되면, 내가 고난 받아야 되고 내가 이 땅에 힘들게 살아야 될 이유가 있구나. 이게 전쟁이구나. 주의 이름과 내 이름의 전쟁, 나 잘났다는 것이냐, 아니면 주님의 공로가 우월한가의 전쟁을 나를 앞장세워서 세상에 내보내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인자가 가신 그 길을 우리로 같이 가게 함으로써 날마다 주님이 주신 권능의 고마움이 되고 우리는 그 결과로 날마다 젖먹이와 어린아이 같은 좀 뻔뻔스럽지만 이미 우리는 주님한테 맡겨놨기 때문에 살아도 그만이고 죽어도 그만이고 주님께서 끝까지 보장한다는 그 기쁨 안에서 믿음 안에서 그 포근함 안에서 권능 안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시편 8편이 움직인다는 것을 우리가 감지하게 주시옵소서. 그동안 내 인생이라고 여겼던 것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때마다 주께서 깨우쳐서 네 인생은 없다고 일러주시는 그 복을 늘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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