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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지역강의 > 부산강의
2019-03-11 16:48:34 조회 : 634         
악인의 발생 190311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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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19.♡.174.49) 19-03-13 12:48 
20190311a 부산강의 : [시편]17(10편)-악인의 발생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10편 할 차례입니다. 시편 9편, 10편, 시편을 보게 되면 악인들이 자꾸 나오지요. 악인들이 나온다는 것은, 이 세상이 처음에 하나님이 만드신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세상과 틀어졌다는 겁니다. 달라진 거죠. 처음 만드신 세상이 아니고 잘못된 길을 가고 있고 원래 만드신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폐기처분해야 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는 어떠하십니까, 를 다윗을 통해서 보여주신다 생각하면 돼요.

시작 자체가 좋게 보는 게 아니고 이건 아니라는 것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가 되면 세상을 볼 때 어떻게 봐야 되죠? 하나님의 안목과 동일한 안목으로 세상을 보시면 되는 거예요. 이건 아니야. 뭔가 하나님의 조치가 있을 거야.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조치는 무엇이냐?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성도와 불신자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성도의 특징은 하나님과 상대한다는 겁니다. 보통 학원 강사는 학생들과 상대하지요. 그리고 가게 주인은 손님과 상대하잖아요. 하루 종일. 그리고 주부는 손자나 남편이나 아들이나 그런 사람들과 상대하지요. 목사는 교인들 상대하고. 주로 상대하는 게 누구냐 하면, 사람과 상대하는 거예요.

사람 상대하는 것과 하나님 상대하는 것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사람과 상대하게 되면 자기 마음을 늘 숨길 수밖에 없어요.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사람을 상대하지요. 자식이 애 먹이면 패고 싶지만 나중에 엄마가 폭력적인 엄마로 낙인찍히면 안 되니까 참는 거죠.

이렇게 숨기는 거예요, 인간은. 서로가 서로의 본심을 내놓지 않고 인간을 상대할 때는 숨길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이 세상에서 인간과 인간을 상대할 때는 절대적 악이란 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나쁜 짓할 때도 다 그만한 이유가 때문에 그래요.

시편 10에서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것은 아까 말씀드린 데로 하나님을 상대하는 거죠. 하나님을 상대한다는 것은, 인간은 무능력하다는 것, 인간한테 기댈 것 없다는 것, 집안 식구한테 난 더 이상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것, 인간들의 모든 약속과 모든 사랑과 애정과 그리고 열심이라 하는 것은 그다지 믿을 게 못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지금 다윗을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조치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왜? 이 세상 자체의 근본적인 표준을 악인은 없어야 되는 세상을 표준으로 했을 때 이 세상은 뭔가 잘못돼있다는 겁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세계를 표준으로 하지 말고 인간 대 인간이 만들어놓고 저질러놓은 그러한 세상이라면 우리는 좀 힘들고 어려워도 세상이 다 그렇지 뭐, 그런 식으로 굴러가는 것이고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 데 내가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식으로 그저 내 것만 잘 챙기고 나만 편하고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겠지요.

그렇지요? 구태여 하나님이 어찌하여, 라는 호소를 할 필요 없잖아요. 나만 편하면 되니까. 악인이 와서 내 것을 도적질하면 경찰에 신고하면 그만이고요. 잡아서 보상받으면 그만이고. 세상에 대해서 내가 뭘 할 수 있는데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고 내 앞가림하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세상 일하겠어요?

목사님, 수면부족인데 하나님 어찌하여 수면부족입니까, 하나님께 호소합니까? 그저 잠만 푹 잘 수 있으면 더는 소원이 없겠습니다. 이런 것. 내 앞가림만 하면 그만이지 뭐 다윗처럼 인생을 거창하게 보느냐, 이 말입니다.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신자는 하는 일이 있어요. 신자의 특징을 해볼게요. 불신자가 아닙니다.

신자의 특징은 첫째, 자꾸 없는 분으로부터 공급받는다. 불신자는 인간을 상대하잖아요. 내가 주고 반대로 저가 나한테 주고, 나는 줄 것 주고받을 것 챙기고. 사람을 상대하기 때문에. 이게 성경에선 불신자인데 사람들은 그냥 인간이라 하죠. 성경에서 말하기를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범죄자로 태어났다는 겁니다.

이왕 한 것 다시 해볼까요? 첫째로 인간은 범죄자로 태어났다. 범죄자의 속성, 범죄자의 본성, 범죄자의 본질로 태어났다. 두 번째가 죄가 뭐냐 하면, 그것을 감춘다는 것. 어떤 식으로? 하나님을 상대하고 인간들과 상대하고. 그렇게 정리하는 거예요.

4절 봅시다.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하나님을 없다 하는 것은 평소에 살아가는 모든 행동이 하나님 신경 쓰지 않고 살아온 거예요.

그러면 집에 가만있는 게 아니고 누굴 상대했단 말이에요? 사람을 상대한 거예요. 목회를 해도 사람을 상대한 거예요. 장사를 해도 손님만 상대한 거예요. 교사 돼서 학생만 상대한 거예요. 사람 대 사람을 상대해버리면 뭐가 없어지느냐 하면 신자, 불신자란 기준도 소용없지요. 사람 상대하는 데 신자, 불신자가 무슨 소용 있습니까?

시편 자체가 다윗이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들은 하나님께서 호소하기 보다는 그것도 귀찮아. 그냥 내 앞가림만 그만이라는 것. 앞가림만 한다는 것은 사람만 상대하면 그만이다. 귀찮게 하지 않는 한 나도 귀찮게 안 하면 그만이고. 자기 몸 편한 게 최고기 때문에.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호소한단 말이죠. 호소하는 이유를 뭐라 했습니까? 처음에 이 세상은 이러지 않았잖아요? 하나님께서 처음에 세상을 이렇게 만들지 않았잖아요, 라고 아주 거창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대단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대해서 다윗은 여기서 뭘 생각하느냐 하면, 원 창조를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창조하실 때 없는 데서 있게 하셨잖아요. 있다는 말은, 창조가 만들어진 거니까 결과물이 있음이죠. 있음 안에 창조의 원리를 품고 있다는 본 겁니다. 창조의 원리를 있음이 품고 있을 때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다는 거예요. 심히 좋았다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인 동시에 다윗의 생각이고 다윗의 삶의 기준이 돼요. 기준점이 된단 말이죠.

자기가 이런 기준점을 가지고 이런 기준으로 세상을 보니까 세상은 지금 있음이 뭘 누락시킨 거예요? 창조의 원리를 누락하고 공격하고 있지요. 그래서 시편 10편에 뭐라고 돼있습니까?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라고 하나님께 호소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결론내릴 수 있지요.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점은 뭐다?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자고, 불신자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해도 되고, 다른 말로 하게 되면 뭐만 의식하며 산다? 사람만 의식하고 산다. 목사는 교인들 의식하면 그만이죠. 부부는 서로만 의식하면 그만이고. 시장사람들은 오는 손님만 의식하면 그만이에요. 국민들은 대통령만 의식하면 그만이고.

사람만 의식하면 그만이에요. 그게 너무나 익숙해졌으니까 너무 자연스럽게 돼버렸어요. 그러니까 시편 10편도 우리한텐 낯설어. 왜냐하면 사람만 상대하니까 자기 몸 편하고 몸 건강하고 자기인생 만족하면 더 이상 신경 쓸 게 뭐가 있느냐는 식이죠.

그래서 신자의 특징은 첫째는 자꾸 없는 데서 공급한다는 거예요. 신자의 특징 두 번째는, 두 번째가 더 중요한데, 첫 번째는 자꾸 누구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고, 두 번째는 바로 그것을 증거 한다는 거예요. 신자의 특징은 하늘로부터 뭔가 계속 주어진다는 것을 증거 하는 용도로 자기가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그럴 때 있음 안에 창조의 원리가 같이 살아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을 증거 한다는 말은 무엇을 증거 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나를 증거 하지 않겠다. 나 자신을 증거 하지 않겠다.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다윗이 보기에 이 세상이 정상이 아닌 거예요. 처음에 하나님이 보기에 좋았는데 시편 10편에 보면 왜 악한 자들이 있느냐?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조치를 해주시라는 거예요. 이런 태도 자체도 신자 태도에요. 왜냐하면 인간이 사람을 상대하게 되면 나한테 불편한 것은 조치를 누가 알아서 해요? 내가 알아서 하면 돼요.

하수구가 막혔다. 그러면 내가 뚫으면 되잖아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잘 흐르네. 누가 뚫었어요? 내가 뚫었어요. 내가 뚫었다는 말은 결국 누굴 증거 한다는 말입니까? 나 자신을 증거 하는 게 돼요. 다윗은 말하기를 그게 창조의 원리냐고 우리한테 묻고 있는 겁니다. 나는 존재할 가치 있습니다, 라고 우기는데 과연 그것이 하나님의 원리 맞습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다윗은 이 세상에서 범죄자를 찾아냈는데 범죄자의 특징으로 두 가리를 봤지요. 첫째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범죄자로 태어났다. 그로 인하여 더 나쁜 범죄가 뭐냐 하면, 그것을 감춘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증거 한다는 것은 뭘 까발리느냐 하면, 인간이 감추고 있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지니고 태어났던 창조 원리에 위배되고 배치되는 그 사항을 까발리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그래야 하나님이 천지 창조한 기준은 생생하게 유효하게 견지되고 살아 있기 때문에 그래요.

다윗의 관심사가 내가 편하게 사는 게 아니죠. 창조의 원리가 생생하게 그대로 온 우주에 발휘되고 나타나고 증거 되기를 바라는 것 이게 바로 다윗의 자세입니다.

아까 제가 얘기한 첫 번째 신장의 특징은 뭐라 했습니까? 나는 한 게 없는데 자꾸 누가 줘. 하루에 잠을 세 시간이나 주시네. 잠자라고 세 시간이나 허락하시네. 자꾸 뭔가 공급해요. 그런데 세상에서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내가 이만큼 해서 이만큼 얻었다는 얘기를 계속해서 늘어놓는 거예요.

다윗이 신자가 아니고 보통 인간이라면 고개 끄덕이면서 너도 그렇게 사나? 나도 그렇게 산다고 할 수 있는데 자기 입장에선 분명히 하나님이 주셔서 사는데 저쪽은 자기 힘으로 산다고 버티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다윗은 뭐라고 평가하느냐 하면, 그래 너한텐 하나님이 없어. 아니 하나님이 없기를 원하고 있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시편 10편을 통해서 신자, 불신자를 나눴는데 신약에 와선 결정적으로 나누죠. 신자는 누굴 증거 하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자 되려면 반드시 조건이 필요해요. 혼자선 안 돼요. 모든 인간은 범죄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필히 자기 자신의 잘남과 변명으로 일관합니다. 평생을. 그걸 제가 두 번째로 자기 죄를 감춘다고 이야기했죠. 감추는데 그걸 건드리면 화를 내요. 반발하죠. 그 반발의 여파가 외부로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겁니다.

시편 10편 12절 누가 읽어볼까요.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 여기 갑자기 가난한 자가 등장해요. 가난한 자와 동급으로 등장하는 것이 14절에 보면,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고아가 등장하고.

고아와 가난한 자가 등장한다는 말은 어떤 뉘앙스를 주느냐 하면, 처음부터 이스라엘 나라는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가 심어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난할 이유가 없는 사회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가난한 자가 생겼다는 것은 누가 이 가난한 자의 재산을 탈취했다고 보는 거예요. 여기 굉장히 많지요. 7절, 8절에 그 이야기가. 은밀한 곳에서 엎드려 있다가 그들을 공격한다고 쭉 나오거든요.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를 더 전개시켜봅시다. 제가 처음에 이야기할 때는 아주 큰 범위로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기에 심히 아름다웠다. 그게 다윗이 보는 기준이라 했지요. 그런데 좀 더 심도 있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선 이스라엘을 아름답게 만드셨다. 그리고 그것이 아름답다. 왜? 이스라엘 그 국가에서만 하나님의 창조 원리가 계속 살아 있기 때문에. 그런 기준으로 이스라엘을 보는 거예요. 택한 민족을 보는 거예요.

그렇게 봤을 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는데 창조의 원리라고 제가 모호하게 이야기했는데 이스라엘이라는 구체적인 객관적인 국가가 등장하면서 창조의 원리가 용어가 바뀌어야 되겠지요. 이게 바로 언약으로 바뀌어야 되겠죠. 다윗 시대기 때문에 무슨 언약이겠습니까? 당연히 다윗언약입니다.

다윗언약만 언약이 아니고 그전에 언약이 있었지요. 무슨 언약이었습니까? 모세언약이었죠. 모세언약 이전에 최초 언약이 뭡니까?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언약인 노아언약이죠. 노아언약을 구체화시킨 것이 모세언약이고 모세언약을 구체화시킨 것이 다윗언약이란 말이죠.

노아언약은 창세기 8장에서 방주 안에 있던 정결한 짐승의 피, 희생을 받아서 하나님께서는 짐승의 희생, 제물의 희생, 죽음이죠. 죽음 안에서 은혜가 나온다는 걸 아는 사람에게는 복을 주신다는 그 내용이 노아언약입니다. 정결한 짐승 덕분에 더러운 노아가족도 물의 심판에서 무사히 벗어났다는 거예요. 이게 창세기 8장 마지막에 나오지요.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나오지요.

그래서 이것은 뭐냐 하면, 내가 무엇을 믿는 게 아니고 내가 무엇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어디 안에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정결한 짐승 안에 죽음 안에 내가 들어있는 거예요. 내가 무엇을 믿는다, 이렇게 돼버리면 이것은 세상에서 인간이 인간을 상대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나란 개체 있고 너란 개체 있는데 나와 너 친하게 지내자, 잘해보자는 것은 각자 독립적인 개체에요.

그러나 성경에선 독립적인 개체로 구원받지 않습니다. 은혜 안에 완전히 포함돼있어야 돼요. 노아가 방주에서 노를 저었습니까? 노아가 방주 위에 앉았습니까, 방주 안에 앉았습니까? 노아가 방주 안에 있지요. 방주라는 언약 안에 산단 말이죠. 그 상태에서 이 범죄한 세계에 살아가는 것은 뭔가 안에 들어가는 거예요. 독립적이지 않단 말이죠.

오늘날 현대인들은 본인이 독립적이에요. 남도 독립적이에요. 독립적인 것이 어떻게 계속 버틸 수 있느냐? 버티기에 나서는 겁니다. 현대인의 인생은 한 마디로 자기 자신을 매질하는 인생, 자학하는 인생이에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제대로 하란 말이야. 그래야 밥 먹고 살아. 이것은 내가 자기한테 매질해요. 이게 교회 가서도 마찬가지고요. 기도 똑바로 하란 말이야. 열심히 하란 말이야. 성경 열심히 봐야지. 이건 자기가 자기를 매질하는 거예요.

어디 안에 있다는 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요. 내가 다가가겠다는 거예요. 주님 계세요. 제가 주님을 내 주로 영접하겠습니다. 이런 식이에요. 시동을 자기가 거는 거예요. 엔진을 자기가 거는 거예요. 마치 뭐와 같으냐? 방주 안에서 노아가 발동기, 엔진 돌리는 것과 똑같은 짓이에요.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어요. 안 해도 되는 짓을 하고 있다고. 평생을.

이게 선악과 따먹어서 그런데 선악과 따먹으면 인간이 자기를 질 좋은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계속 자기한테 매질하게 돼있어요. 매질 열 번 했다가 너무 매질하면 기죽으니까 한 번은 해외 놀러가서 기분 풀고 또 돌아와서 정신 바짝 차리고 매질하고. 군에 가서 고생 많이 하고 휴가 나와서 기분 풀고 다시 군에 가서 열심히 살고. 어떤 텀을 주는 거예요. 계속해서.

늘 자기 채점표가 있어요. 내가 어느 정도 괜찮은 존재고 어느 정도 위상이 달라졌는지 늘 자기가 자길 점검해요. 결국 뭐냐? 자기가 혼자 사는 재미로 살아요. 요새 현대인들은 자취를 너무 많이 해요. 혼밥, 혼술 해서 혼자 살아. 결혼해도 혼자 살아요. 그리고 타인에 대해선 항상 변명조로 일관하고. 왜? 그걸 제가 불신자의 특징은 뭐냐? 자기의 허점을 본인이 알고 있으면서 두 번째는 그걸 쉴 새 없이 계속 감추고 있는 겁니다.

광안대교에 왜 박았느냐? 술 먹었지? 아니요. 박아놓고 기분 나빠서 술 한 잔 먹었다고 해요. 러시아 선장. 전부 모든 게 변명조에요. 그리고 질문 자체가 잘못됐어요. 당신은 화물선으로 광안대교 왜 박았느냐? 이렇게 하면 그 선장이 신자라면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나와야지요. 왜? 자긴 주 안에 있었으니까. 이런 무책임한 것, 징역 십년. 그러면 선장이 뭐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주께서 허락하셨으니 감수하겠습니다, 징역살이를. 이렇게 나와야지.

그게 바로 신자의 특징 일 번을 뭐라고 했습니까? 자꾸 누구한테 공급받는 거예요. 이번엔 감옥살이하라고 감옥살이를 공급해주시는 거예요. 매사가 내 것은 없고 주위에서 주신 거예요. 마치 방주 안에서 노아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방주가 가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하는 것처럼.

그게 언약의 원칙이고 아까 제가 이야기한 창조의 원리가 하나님이 인정하는 있음 안에는 이러한 수동적인 창조의 원리가 피조물로서 피조물 값을 한다고 피동적이고 수동적인 모습으로 그 안에 원리가 담겨져 있어야 되는 거예요.

보통 바쁘다 하죠. 왜 바쁘십니까? 살아야지요. 이러거든요. 사람들에게 산다는 것은 내가 숨 쉬고 사는 걸 산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일 번 신자에 의하면 주님이 살아 있으면 내가 죽어도 그게 내가 살아야겠다는 의식이 없는 거예요. 우리가 산다는 것은 주님이 살았다는 그런 원리가 공급되고 제공되는 조건 하에만 사는 거예요.

이게 언약이라 하는 겁니다. 언약관계에요. 인간은 홀로 있는 게 아닙니다. 언약과 더불어 알 때에 성도는 자기 자신이 살아 있다, 잘했다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누굴 증거 하느냐? 신약에 오게 되면 사도행전 1장 8절에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는 어떻게 된다고요? 성령이 임하면 땅 끝까지 누구의 증인이 됩니까? 예수의 증인 되잖아요.

제가 이 대목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창조의 원리라고 모호하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구체적이란 말이죠. 이제는 이스라엘 속에 살아 계신 주님을 증거 하는 것, 다윗이 해야 될 일 그것이 다윗언약을 증거 하는 거예요. 이제는 하나님이란 날아간 거예요. 하나님, 신이 너무 모호하니까. 하나님 자신이 구체적인 증거를 공급했으면 이제는 성도도 모호하게 따지지 말고 구체적으로 제공된 하나님의 언약에 관해서 증거 해야 돼요.

그러면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새 언약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신약의 성령 받은 성도는 뭘 증거 해야 돼요? 하나님 증거 해야 돼요? 어떻게 됩니까? 아니지요. 구체적인 것,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겁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에 의해서 계시가 종합하게 되면 뭘 증거 하느냐? 바로 사건, 십자가를 증거합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이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가 아니고 존재하신 주님의 지금 계속해서 반복해서 기능으로 움직이고 있는 앞장세우고 있는 그 십자가를 증거 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죽음을 증거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죽음을 좋아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겐 사는 데 필요한 것들에 눈이 꽂히게 돼있어요. 그래서 인간들이 주워 모으고 끌어 모으고 축적하려고 시도하는 모든 것들은 살기 위한 것들이란 말이죠. 그렇잖아요. 오늘도 성경공부해서 죽어야지. 이런 사람 없다니까. 성경공부 참석도 살기 위한 조치의 일환이에요.

왜 살아야 됩니까? 내가 살아야지요. 내가 사는 게 실익이 있다, 이익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나는 나를 증거 하는 용도로 내가 있기 때문에, 라는 말이 무심코 튀어나올 수밖에 없어요. 아차, 이건 교회 오래 다닌 사람으로 할 발언이 아닌데. 이미 쏟아놓은 입장에선 소용없어요. 무심코 튀어나와 버렸어요. 하나님 믿는 것도 나 살기 위해서. 무심코 튀어나왔어요.

덜렁덜렁 교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건들거리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왔을 때 그 마음가짐은 뭐냐 하면, 오늘도 살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온 거예요. 죽으려고 온다는 것은 비장한 마음이 돼야 돼요. 비장한 각오가 돼있어야 되는데 그런 것 없습니다. 하나님 전능하시니까 살려주시겠지. 이런 마음으로 왔다 이 말이죠.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살리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가 표준이니까 죽이는 거예요. 우린 자꾸 안 죽으려고 하니까 지렁이처럼 버티잖아요. 버티니까 못 버티게 밟아주는 그 힘을 주께서는 공급해주십니다. 감사가 나와야 돼요. 왜? 그것이 나를 위함이 아니고 이건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에요. 신약성경에 나오거든요.

나를 위함이 아니고 복음을 위함이다. 성경에 많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바로 복음으로 못 들어가요. 이런 경로가 없어요. 반드시 뭘 거치느냐 하면, 나란 인간을 둘 다 십자가 사건이기 때문에 ~는 아니요, ~는 O라는 둘 다 있어야 십자가가 돼요. 십자가는 박해하고 핍박하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래요. 핍박했는데 살아난 사건이거든요.

그래서 이게 언약이거든요. 방주란 말이죠. 은혜를 알려면 현재 내가 사는 나를 어디에 집어넣느냐 하면, 이 언약 속에 집어넣으면 반드시 경로를 거쳐야 돼요. 바로 나는 복음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이러지 말고 저를 죽여주옵소서. 이렇게 나와야 비로소 복음만 증거 되는 사람이 나오죠.

성질도 급해. 바로 교회 가서 복음 증거 하겠다고 써대는 것은 뭐냐 하면, 살려 주옵소서, 라는 우회적인 고백이거든요. 복음을 위해서니까 제발 나를 죽이지 마옵소서. 천식이 낫게 하시고 몸 건강하게. 이거는 핑계에요, 핑계. 흔히 세상에서 하는 개 같은 행세를 똑같이 한 거예요. 하나의 거래에요. 내 원하는 걸 해주시면 주님 원하는 것 해드리겠습니다, 라고 거래한 거예요.

12절에서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할 때 호소하는 취지를 이제 아시겠지요? 주님, 이건 아니잖아요. 이런 뜻으로 한 거예요. 이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고 운영되는 것은 이미 내 손을 떠났습니다. 저는 무능합니다. 아무것도 못합니다. 이게 바로 주님을 증거 하는 유일한 방식이에요.

나는 무능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게 하셨다는 뜻은 뭐냐 하면, 이제부터 너는 네 증거는 물 건너갔고 사나죽으나 내 증거, 하나님이 이런 원리를 갖고 있다는 그것만 증거 하는 용도로 쓰일 거라는 시그널이에요. 아무것도 내가 할 수 없다는 것. 평소에 사람과 상대하다보니까 교인 얼만 나와, 한 주에 헌금 얼마 나와? 맨날 신경 쓰는 게 이거에요. 목회 성공했네.

난 이게 뭐고? 주여, 왜 저를 이 꼴로 만들었습니까, 하는데 그것도 주께서 너한테 공짜로 공급하시는 거다. 처음부터 너는 범죄자였다. 그리고 그 범죄를 감추면서 그럴싸하게 인생 살고 싶은 거예요. 주부라고 다를 것 없어요. 어디 가서 내 자식 이야기할 때 이 정도밖에 안 돼, 그 정도.

어제 제 아내가 친구를 만났는데 갑자기 그분이 아내에게 한 턱 쏘겠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큰 아들은 삼성 들어가고 둘째 아들은 현대 들어가고. 기분 좋아서 한 턱 내겠다는 거예요. 그게 우리의 마땅한 일상생활 아닙니까. 우리는 그것을 세상이라고 부르지요. 우린 그걸 현실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것에는 창조의 원리가 빠져있다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자기 앞가림만 하면 그만이에요. 하나님 생각할 수 없습니다.

4절 다시 봅시다.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이걸 번역을 새롭게 해볼까요? “악인은 뻔뻔스럽게” 이렇게 번역하면 되겠지요. 악인은 뻔뻔한 얼굴로 하나님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살아보니까 인생 경험상 하나님이 그다지 내 인생 일구는 데 필요치 않다는 뜻이에요.

인간은 체험이 아니면 입으로 나올 게 없어요. 하나님이 도와줄 걸로 여기고 살아보니까 하나님이 그다지 나한테 힘 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온 몸으로 체험을 했다니까. 간증이죠. 신자만 간증 있는 게 아닙니다. 불신자도 한 간증합니다. 단단한 간증해요. 하나님이 없다는데 한 표 던진다.

이건 그냥 지식이 아니고 체험이 사상 된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의 모든 사상에는 뭐가 없다? 하나님이 없다는 말은 점점 더 확신이 드는 거예요. 기도원에서 은혜 받아서 신학교 가겠다고 할 때는 확신 있어요. 그런데 신학교 1학교 1학기부터 벌써 하나님 없습니다. 왜 없느냐 하면, 교수들이 하나님 없거든요. 교수들의 아무리 강의하더라도 전혀 하나님이 없어요.

교수들이 하는 이야기는 뭐냐? 네가 앞으로 목회자 될 텐데 사람들 교인들 상대할 텐데 이 구절 이 본문으로 이렇게 설교하면 교회 괜찮게 된다. 그런 조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신학이란 것은 신학을 위해서 신학을 하는 게 아니고 교회 유지와 지탱을 위해서 신학이 계속 뒷받침해주는 것이 신학역사의 전개과정이었습니다. 루터도 캘빈도 마찬가지였어요.

고객들이 신을 원하고 신전을 원해요. 흔히 교회라 하지요. 신전은 눈에 보이니까. 그들에 맞추기 위해서 기존에 천주교와 결별해서 이렇게 해야 옳다는 게 캘빈과 루터에요. 루터는 좀 덜한데 캘빈은 세세하게 목회하는 예배방식을 다 이야기해줬어요. 이 매뉴얼대로 하라고 이야기해줬습니다.

그러나 시편 10편에서는 그걸 전면적으로 부정합니다. 왜냐하면 시편 10편에서의 하나님은 뭐냐? 아픔 속에서의 하나님. 아픔 속에서 비로소 발견되는 하나님이거든요. 자기 자신을 지켜주는 어떤 형식 틀 속에서가 아니라 아픔 속에서. 일종의 패배지요. 자기의 무능성을 체감하는 데서의 하나님이에요. 이스라엘도마찬가지입니다. 이게 좀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다윗언약은 왕언약인데 왕언약이 확대될 때 이게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뭐와 대치되느냐 하면, 기존의 이스라엘과 대치가 돼요. 다윗언약 전에 모세언약이거든요. 모세언약에 준해서 버티던 이스라엘과 다윗언약에 준한 둘이 갈등을 일으키게 돼있어요.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를 두고 갈등을 일으키는 겁니다. 시대가 지났으니까.

전에 것이 낫느냐, 후에 낫느냐의 싸움이에요. 성경은 이미 정답을 내렸습니다. 나중 것이 정답이에요. 마지막 언약이 처음부터 있어 왔던 겁니다. 그전 언약은 마지막 언약을 위한 모형이고 그림자에 불과한 겁니다. 그림자 붙들고 모형 붙들고 놀지 말라는 거예요. 다윗언약이 되면 모세언약은 다윗언약 안에 모세언약이 포섭이 돼요.

그러면 모세언약에 준해서 이스라엘을 주장하는 사람이 다윗언약에 뭐라고 공격하느냐 하면, 그러면 모세언약은 어디로 날아가 버렸느냐? 다윗은 말합니다. 내 아픔 안에 다 들어와 있다. 다윗언약은 왕 개념이거든요. 왕 안에 그러니까 여러 명이 지켜야 될 법을 어떻게 됐습니까? 한 사람으로 통합시킨 게 다윗언약이에요.

로마서 1장 3절에 예수님은 어딜 거쳐서 왔습니까? 예수님은 누구의 자손이라 했어요? 다윗의 자손으로 오지요. 마태복음 22장에도 나오지만 다윗의 자손이란 뭐냐 하면, 다윗언약의 자손으로 오신다는 거예요. 사도행전 2장에 나오지요. 다윗은 죽어서 묻혀있지만 그 자손은 부활했다고. 다윗언약의 자손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여럿이 하나로 통합이 되면서 여럿은 이제 각자의 개체가 자기를 보거나 그들의 합세했던 이스라엘이란 단체를 볼 것이 아니고 한 분을 봐야 돼요. 그럼 우린 생각하기를 다윗 한 분을 보면 될 것 아니냐, 하겠죠. 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다윗은 이 단체에서 쫓겨났으니까.

십자가 믿으면 되지, 하는데 십자가를 믿을 수 없는 게 십자가 사건, 예수님이 어떤 분입니까? 그 당시 사람들에게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쫓겨났잖아요. 쫓겨난 분을 왜 신뢰해요. 죽어 보이지 않는데 믿을만한 보이는 사람도 있는데 보이지 않는 사람을 왜 의지합니까? 이것은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성립되지 않는 이야기지요.

다윗이 쫓겨났을 때 우리가 안 쫓아냈어요. 사울이 쫓아냈다고 하잖아요. 백성들이 누구의 권력을 두려워했던가요? 사울의 권력을 두려워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혼자 있는 게 아니고 권력의 압제를 받고 있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권력의 종으로 살 수밖에 없는 그러한 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거예요.

혼자 노래방에 노래 잘 부르죠. 북한의 김정은 부하들 있잖아요. 자기 집에서 자기 부하들한테는 갑질해요. 그런데 나이 칠십, 팔십 돼도 김정은 앞에서는 벌벌 떨어요. 왜? 폭탄으로 사살할까 싶어서. 전기의자가 아니라 폭탄으로 죽일까봐 벌벌 떠는 거예요. 내 속에 뭐가 있다? 우월한 월등한 어떤 권력에 대해서 자진해서 복종하는 속성이 심리가 있어요.

왜 그런 심리가 있느냐 하면, 그 권력을 나도 모르게 내 욕망이 부러워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목표가 있고 목적이 있어요. 그것은 마귀가 예수님한테 시험했던 겁니다. 뭔가 은근히 원하는 게 있어요. 눈에 보이고 좋은 것들은 다 내 소유가 되기를 나는 가만있는데 내 이성은 그걸 원하지 않는데 내 욕망은 이성보다 힘이 세서 은근히 부러워해요.

나이 많은 여자들은 젊은 여자가 왠지 부러워요. 시어머니는 누가 미워요? 젊은 며느리가 미운 거예요. 난 너를 딸처럼 여긴다. 딸 같은 소리하고 있네. 봄인데 옷 하나 해야지. 백화점에서 옷을 사왔어요. 옷은 화사해요. 그리고 그 옷을 살 때 마네킹과 모델 보면 분명히 옷과 매치가 화사합니다. 몸이 화사하지 않은데 어떡해요. 결국 그 옷은 며느리 입으라고 줘버리고. 며느리는 시어머니 입던 거라 받아놓고는 …

인간은 자기 입장은 생각 안 해요. 꾸준히 좋은 것 생각합니다. 우리교회 연세가, 이 이야기해서 집사님 화 안 내는지 모르겠습니다만, 70 넘은 분인데 저보고 이런 이야기했어요. 자기는 빨간 스포츠카 보면 부럽던데 목사님은 안 부럽습니까? 그분은 솔직한 게 주특기에요. 저는 안 부러운데요, 하면 자기는 왜 그리 부러운지 모르겠다고 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마음이 좋게 이야기해서 젊은 거예요. 그래서 했지요. 세상이 안 지겨운 모양입니다. 욕망은 처음부터 부러운 게 아니고 계속해서 부러워해 왔던 거지요. 이 세상에 남자, 여자 특히 남자들이 그런 경향이 있는데 사람은 뭐로 사느냐 하면, 게임하며 삽니다. 게임은 어디서 나왔는가? 선과 악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내부적으로 게임화 시킨 거예요.

악마로부터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여기에 승자와 패자를 늘 생각하기 마련이에요. 난 어느 편에 설까? 롯데자이언트인가, 삼성라이온즈인가? 모든 게 그래요. 일본 조져라. 한국 잘돼라. 이런 것 있잖아요. 남의 집 망해라. 우리 집 잘된다. 부부가 사이가 좋으면 누가 연예인 이혼해라. 전현무와 한혜진 헤어질 줄 알았어. 헤어져서 온 국민이 기뻐해.

이게 게임이거든요. 무조건 나는 승자 편이고 남들은 다 나보다 못해야 되고 뭔가 불행한 일이 일어나야 되고. 제가 전에 그랬잖아요.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참지 못한다. 사촌이 논 사면 배 아파서 못 참아요. 배고픈 건 참을 수 있는데 남 잘되는 것은 도저히 배알이 틀려서 못 살아요.

이게 선악체계기 때문에. 항상 나는 어느 편입니까? 선악 중에서 선한 편이다. 이미 선과 악을 내가 알고 있다. 그 지식이 인간을 망치는 거예요. 그게 악마의 늪에 빠진 겁니다. 항상 자기를 좋게 보고 의인으로 보는 겁니다. 그 인간은 자기 자신을 조작하지요. 조작하고 변명하고 또 내부적으로 선악이 있을 때는 그걸 채찍질하고.

내부적인 선악을 그대로 외부적으로 터트려서 이 땅의 못난 놈들은 죽어야 마땅하고 고아 같은 것들은 없어져도 마땅하고. 왜? 나는 고아가 아니고 잘 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존재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조져버려야 된다. 그 내용이 있을 때 다윗은 어느 편에 서느냐 하면, 고아와 가난한 자, 그런 자의 횡포에 피해를 입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여호와여 일어나소서”란 말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이게 바로 다윗이란 왕 속에 모든 하나님의 뜻이 함축돼있는 구체화된 인물로 등장한 다윗언약의 내용입니다.

사사기에 그런 게 나오지요. 사사들이 언제 하나님께 호소하던가요? 편할 때가 아니고 느긋할 때가 아니고 풍부할 때가 아니고 쳐들어올 때가 아니에요. 쳐들어오게 되면 뭘 하느냐 하면 자기가 할 수 있는 도리 다 해요. 퍼주기 하고 달래주고 다 해요.

하나의 예를 들면, 세월호 큰 배 빠져서 얘들 죽었지요. 그때 안산에 있는 학부모 말고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뭘 생각했어요? 수습이 급선무 아닙니다. 그래서 빨리 돈 주고 아직 얘들이니까 이천 만원 주고 쉬쉬 하기를 바랐지요. 그런데 액수가 점점 늘어갑니다. 사억 넘었어요. 그걸로 입 다물 줄 알았지요. 광화문에 세월호 진상규명하라고 노란텐트치기 시작했어요. 그걸로 끝나는 줄 알았지요. 팽목항에 30평짜리 기념관 세우라 하는 거예요. 진도군에선 그건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또 들고 나설 거예요.

국회의사당 앞에서 택시운전사 카풀 반대한다고 분신했지요. 빨리 차 치우고 장례 치러야겠지. 그게 아니에요. 그것 붙들고 장례를 아예 국회의사당에서 벌입니다. 떼를 쓴다고 할까요, 뭐든지 다 통하는 그것, 그게 뭐냐 하면, 아픔이 일종의 생존의 방식 또는 무기가 됐지요. 날 잊지 말라는 거예요.

날 잊지 말라가 아닙니다. 성경은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이여, 날 잊지 마. 그건 사람을 상대하는 거예요. 그러나 내가 죽는 것도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도 하나님께서 특수한 임무를 부여하기 위해서 나를 이 땅에서 아무것도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든 거예요.


10분 쉽시다.
 한윤범(IP:119.♡.174.49) 19-03-13 12:49 
20190311b 부산강의 : [시편]17(10편)-악인의 발생
(강의: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서는 이 세상 형편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악인들이 설친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버티고 있다. 언약의 문제는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주신 분이 처리를 해야지 이스라엘 형편은 인간이 해결할 없다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구약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국가 내의 문제란 사실을 생각해야 돼요. 이스라엘은 장차올 교회의 시범 공동체기 때문에 죄인들을 모아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언약이란 일종의 본드 같은데 죄인들을 모아서 하나님 자신과 합세가 과연 가능할까? 이스라엘이 이걸 실험하는 실험실이에요.

죄인들은 곱상한 사람들이 아니죠. 죄인들에겐 죄가 나오겠지요. 그래서 시편 해석할 때 이게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의인들은 그냥 무상으로 구원받은 줄 알면 안 돼요. 구약 해석할 때 의인들의 등장하잖아요. 의인이기 때문에 그냥 무상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생각하시면 해석 잘못된 겁니다.

분명히 제가 그랬어요. 죄인들+하나님 자신이라 했습니다. 죄인들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만들 때 유월절이니까 어린양의 피를 바르지요. 피는 극단적 조치입니다. 최후의 조치에요. 저쪽의 어떤 행함도 안 받고 나의 행함이라도 너를 구원하지 못하고 구원하시는 분의 뭘 제공한다는 거예요?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영생이 없다. 요한복음 6장 53절 말씀처럼 그걸 그대로 앞당겨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행위가 뭐냐 하면, 우리 인간들 보기에 극단적이에요. 도 아니면 모다. 어중간한 것 없어요. 다 이루었다 하면 다 이룬 것이지 거기에 뭘 보탠다, 믿음으로 됐지만 행함으로 보태고, 이런 것 없습니다. 극단적이란 말은 최종적이란 말이에요. 최종적과 같은 말이 결정적이다. 결정적 세계에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이것만 반복하면 된다.

이것만 반복하니까 완료성이라 할 수 있어요. 십자가 사건 이후에도 십자가만 계속 되는 거예요. 에베소서 2장 7절에 보면, 너희가 하늘에 앉혔다고 돼있지요. 완료성이잖아요. 앉을 것이다가 아니라 앉혔다. 성령이 임하면 이미 하늘에 앉힌 거예요. 완료성이에요. 언약이에요.

아까 제가 이야기한대로 의인이라고 그냥 무상으로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죄인으로 해서 결정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여기서 나오는 것은 의인은 없는 거예요. 의인은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있는 효과 또는 효력으로 없던 의인이 발생되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이 돼서 나 죄인 안 하고 의인 할래, 라는 그러한 선택 권리는 인간에게 없습니다. 모두 다 죄인에 집어넣어야 돼요.

죄인으로 집어넣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죄인으로서는 나올 수 없는 의가 나와서 그 의로 말미암아 죄인이 구원받는다고 시편에 나와 있습니다. 애굽의 말과 병거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뭐로 구원한다고 돼있어요? 하나님의 의로 구원한다 했지요. 시편에 여러 군데 나와요. 그냥 하나님의 의로 구원하면 되는데 앞에 애굽의 병거와 말을 왜 집어넣습니까? 이스라엘이 그걸 원했기 때문에. 원하는 그게 바로 죄라고 보는 거예요. 이스라엘 자체적으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논리를 따르면 이렇게 되지요. 이스라엘 입장에선 죄인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보통 사람으로 들어가죠. 사람으로 들어갔는데 하나님이 언약으로 해보니까 이 사람이, 사람이 아니고 뭐로 달라져야 돼요? 죄인이 되고 의인은 하나도 없이 돼야 되고 주께서 계속 함으로써 죄인밖에 없어야 되는데 희한하게 의인이 발생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의 결과물로 의인이 나오고 그 의인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 효과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의인의 나라가 돼야 된다는 것을 지향한다. 그걸 바라보는 그런 나라인 거예요. 온전한 나라는 아닙니다. 지금 어딜 가야 돼요. 신약으로 달려가야 됩니다. 완전한 의인의 나라로 지향해야 되는 거예요.

그럼 이 논리에 방금 제가 두 가지를 제시했는데 하나는 뭐냐 하면, 자기가 죄인이라고 아는 죄인은 있다, 없다? 없다. 자기가 의인이라고 여기는 의인은 있다, 없다? 없다. 결국 죄인이나 의인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개입하기 전에는 인간의 아이디어에 의해서는 그게 나올 수 없는 거예요.

인간에게 선악이 있지요. 선악은 항상, 여러분 지식이 있으면 간직합니까, 판단합니까? 지식은 판단하지요. 아까 먹었던 빵이 굉장히 맛있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제일 빵을 잘 만드는 제빵사 앞에서 맛있다 하면 그 빵은 재료를 뭘 넣었고 뭐가 문제고 반죽을 숙성을 몇 시간 안 했기 때문에 빵 맛이 없다고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절대적인 표준이 없는 한 우리는 내가 맛있으면 맛있는 게 되고 내가 잘했으면 그냥 나는 선한 사람으로 간주하는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동행하지 않고 인간들 단체가 돼버리면 서로가 서로를 비교하기 때문에 얼추 그 정도하면 넘어가자는 쪽이 돼버려요. 절대적 기준이 아니고. 그래서 인간은 절대적으로 자기 죄를 모릅니다. 그리고 인간은 절대적으로 자기 의를 모릅니다.

그때그때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십자가 기준으로 봤을 때 사람을 백 명 죽여도 절대적인 의인이 돼요. 창기가 남자를 천 명을 상대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절대적인 의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에게서 나올 수 없는 인식이에요. 정말 하나님이 갖고 있는 인식이지 우리에게 나올 수 없는 인식이에요.

그러면 그 의를 소지할 수 있느냐? 소지하는 용도가 의가 아닙니다. 의를 위해서 우리가 오히려 소지당하죠. 선악은 내가 소지하고 있는 입장이지만 하나님이 준비한 의와 죄는 우리가 소지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의와 죄의 기능을 발휘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언약 안에 방주 안에 있는 자의 특징입니다.

일단 그렇게 정리해봅시다. 두 번째 시간엔 뭘 하느냐 하면, 현재 형편은 이렇다. 악인들이 설친다.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이 세상은 악인이 없어야 되는데 등장했다. 이게 첫 번째 이야기라면 두 번째 시간에는 어떻게 이걸 처리할 것이냐? 어떻게 악인을 처리할 것이냐의 문제에요. 미리 한 번 봅시다.

18절 누가 읽어볼까요, 다른 분이. “고아와 압박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로 다시는 위협치 못하게 하시리이다” 여기 심판 나오지요. 심판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고아와 압제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한다고 돼있어요.

심판이란 말을 우리가 너무 흔하게 듣다보니까 식상해하는데 무슨 느낌인지 안 오지만 이걸 이렇게 봅시다. 소제한다, 청소하는 것, 제거하는 거예요. 어디서 제거하느냐? 제가 아까 강의할 때 이스라엘로 국한해서 봅시다. 이스라엘에서 그 자를 내보내는 거예요. 성경의 이런 생각이 우리 생각과 너무 다른 거예요.

우리 생각은 내 중심이기 때문에 내가 여기 있어요. 내가 인생 살다가 죽습니다. 죽으면 갈 곳이 두 군데에요. 하나는 지옥이고 하나는 천국이죠. 그러면 우리 입장에선 지옥에 들어간다고 돼있지요. 그리고 천국에 들어 간다가 되지요. 그런데 언약에 이미 앉은 사람은 뭡니까? 만들어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신약의 문제에요.

구약에서는 천국을 만드는 중입니다. 진행형이에요. 어떻게 만드는가? 있을 자격도 없고 있을 수도 없고 있을 필요도 없는 것을 어떻게 한다? 내보내는 식이에요. 구심점은 언약입니다. 언약을 모르는 자는 내보내야 되는 거예요. 내보낸다는 말은 이곳은 내가 포기 못한다는 뜻이겠지요. 집주인이 와서 세든 사람을 내보낼 때 그 말은 뭡니까? 이 집은 내가 주인인 것을 포기 못한다, 나가라.

시편에서는 나가라가 되고 신약에서는 들어 가라가 되는 거예요. 특히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들은 언약도 없고 율법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따라서 천국 간다면 하나님이 언약 중심으로 만든 이스라엘 중심으로 만든 그 나라에 합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돌 감람나무가 참 감람나무 되는 것은 접붙임 외에는 없어요. 하나님의 계획은 이스라엘을 포기한 게 아니에요. 끝까지 이스라엘을 본부로 삼아요.

본부로 삼고 이스라엘 가운데 이스라엘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내쫓아버리고. 그리고 이스라엘 밖에 있는 사람을 안에 들여보내는 방식으로 천국을 구성한 겁니다. 하늘나라를 만든 거예요. 내쫓고, 내쫓고 할 때 안 내쫓긴 사람을 뭐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오늘 제목으로 정할까? 남은 자. 로마서 9장 27절에 나오는 말씀이죠. 남은 자 개념이에요.

남은 자 개념이 마태복음에도 나와요. 두 사람이 쟁기로 밭을 갈고 있다가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두고 하죠. 남은 자 개념에 누가 받느냐는 개인구원은 위험천만한 발상입니다. 저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교회가 왜 교회답지 못하는가? 개인구원 때문에 그래요. 애초에 그런 건 없어요. 주께서 우리와 거래하질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은 자기 때문에 죽은 자에서 만들어낸 범죄자기 때문에 범죄자에게서 나오는 모든 죄, 천국, 영생, 구원, 예수, 삼위일체, 모든 개념이 죄 개념이에요. 개인구원 사적인 욕망과 결부된 개념이라니까.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방인 구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 되면 몰라도. 봐주는 식으로. 왜냐하면 그들은 개인 위주에요. 그 사회가. 자기만 살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사회에선 이스라엘을 위한 예정론, 선택론이 있는 거예요. 캘빈이 그래서 실패한 거죠. 개인구원용 예정론을 주장한 거예요.

창세전에 당신은 구원받기로 작정했습니다. 성경에 그런 것 없어요. 성경에 나오는 것은 창세전에 예수 안이죠. 예수 안에선 인간은 없어요. 개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 개인을 대표하기 때문에.

그게 뭐냐 하면, 이름이에요. 이름이라 하는 것은 존재를 의미하는데 이쪽 이름을 지워진다는 것은 존재에 대한 말살을 의미해요. 어떤 키운다는 것은 그 존재를 인정한다는 겁니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을 줍니까, 안 줍니까? 다른 이름이 없다는 말은 다른 존재는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개인 존재는 구원의 대상이 안 됩니다.

그리스도만 구원의 대상이고 그리스도 몸의 확대를 통해서 지체의 자격으로만 우리가 구원이 되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몸을 구약 출애굽기에서 아들이라고 해요. 아들이 하나가 아니에요. 이스라엘이 아들이니까. 출애굽기 4장 22, 23절.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라 했거든요. 우리가 생각하는 아들은 개체를 생각해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언약적으로 개체를 아들이라 하지 않고 집단을 아들로 본 거예요.

그 집단은 조건이 있어요. 언약에 부합되는 조건이에요. 그래서 아들이라 해놓고 모세가 할례를 행하지 않으니까 모세를 죽이려고 했잖아요. 없애겠다. 언약은 살리고 너는 죽이고. 십보라가 아주 훌륭한 부인이 됐어요. 남편 살리는 방식이 남편에게 보약이라든지 비타민C 이런 것 주는 게 아니고 언약으로 해놓고 언약에는 피가 나오지요. 할례 한 피를 제시했을 때 그 피 보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살려줬습니다.

그때 십보라가 하는 말이, 당신은 내 남편 될 사람이 아니고 피를 증거 할 피 남편 돼야 된다. 의미심장한 이야기죠. 하나님께서 왜 그런 일방적 고집을 부리시냐 하면, 이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래요. 죄를 어떻게 조치해서 거룩한 그야말로 죄인은 근처도 못 가는 천국에 어떻게 집어넣을 것이냐는 그 고심.

그 고심책이 뭐냐? 자기 아들을 피 속에 합류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죽음에 합류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를 위해서 죽으면 되지 않느냐? 주를 위해 죽는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성경해석하면서 우리가 이제는 너무 기복신앙하지 말고 예수를 위해서 죽읍시다, 하는데 그 해석 잘못된 거예요. 예수를 위해 죽을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시험이에요. 마귀의 시험 같아요. 채찍질하고 자기를 매질하는 거예요. 자기를 학대하는 거예요. 낮추고 더 낮추기. 그것 무슨 짓이에요. 도 닦는 거예요? 그런 짓하면 안 돼요. 알아서 하시면 된다. 그런 마음 가지면 되는 거예요. 어차피 내가 못하는 것을 인정하는 그것이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자기 일이 아니잖아요. 주의 일이지.

우리는 특히 이방인이잖아요. 이방인이 뭘 해요. 자기 해당되지도 않는데 남의 시험에 왜 칩니까? 그건 이스라엘 보고 치라 하세요. 우린 시험 안 치르고 무시험 합격이에요. 이런 복이 어디 있어요. 티오가 차서.

여기서 제가 강조하는 것은 남은 자를 제거할 때 누가 남았다. 개인적으로 넌 안 됐다. 난 살아남았다. 이러지 말고 개인구원 논리로 하는 게 아니고 그걸 잘라낼 때 뭐로 잘라내느냐 하는 겁니다. 그 자르는 작업이 언약이에요. 자르는 작업에서 발생되는 것이 고아와 과부에요. 그리고 가난한 자.

고아 예를 들어봅시다. 오늘 여러 번 나오기 때문에. 부모가 없는 사람을 고아라고 합니다. 특히 고아라고 할 때 성년 된 사람이 아니라 어린아이를 고아라고 하지요. 그리고 고아의 특징은 뭡니까? 부모가 없기 때문에 자기를 돌볼 사람이 없겠지요. 그럼 유력한 집안의 양자로 팔려가든지, 보아스 나오미 가정을 챙겼잖아요.

이스라엘 법에 그러한 조항이 있어요. 그걸 고엘법이라 해요. 약자보호법이라 해서. 누가 건사를 해줘야 된단 말이죠. 왜 고아와 과부를 건사해야 되느냐 하면, 이게 땅 문제 때문에 그래요. 원래 이스라엘 땅은 여호수아에 보게 되면 땅은 자기 소유가 될 수 없어요. 약속의 땅은. 소유는 옛날 가나안 땅 토착민들이나 하라 하세요. 이스라엘이 정복해서 열두 지파에 땅 분배했을 때 열두 지파 자기 소유 아닙니다.

거기에 전부 다 파견나간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이에요. 이 땅이 유지가 되려면 레위언약, 모세언약이죠. 모세언약의 실효성이 계속 유지되는 한 땅을 임대차계약용으로 쓸 수가 있어요. 임대차계약금이 십일조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영원한 땅 주인이고 그들은 품꾼이에요.

그러면 십일조를 내야 되는데 십일조를 낼만큼 풍성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걱정이 되겠지요. 그런데 주님의 조건은 뭐냐 하면, 이 땅이 풍성하냐, 풍성하지 않느냐는 것은 너희들이 이 계약조건에 관심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저절로 풍성하게 젖과 꿀이 흐르도록 내가 조치를 하겠다는 거예요.

말은 쉬워요. 믿을 사람이 없어요. 말은 쉬운데 내 노동력이 제공되지 않았는데 결과가 나온다? 믿을 사람 없습니다. 그것을 분명히 하고 훈련시키기 위해서, 훈련이란 말은 어폐가 있지만, 그것을 각인시키기 위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무슨 경험을 하게 했느냐 하면, 내 노동력과 무관하게 생존되는 환경을 제공했는데 그 환경이 뭐냐? 광야입니다.

광야에서 주께서 일부러 뺑뺑이 돌렸는데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뭐였습니까? 하늘에서 뭐가 내려와요? 만나지요. 만나가 요한복음 6장에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만나를 예수님께서 나의 떡이라 했어요. 내가 곧 만나에요. 내가 생명의 떡이에요. 예수님이 떡을 주니까 사람들이 떡으로 알았던 거예요. 주님이 주는 떡에 관심이 있었지 주시는 분엔 관심이 없었어요. 그들은 뭐냐? 떡을 주는 조건 하에서만 예수님을 왕으로 모실 용의가 돼있는 거예요.

아까 제가 했잖아요. 인간은 체험한다고요. 인간의 체험은 뭐냐 하면, 내가 사는데 무엇이 실익이 있고 유익이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체험해서 자리 나름대로의 간증거리가 있어요. 주님한테 잘 보이는 나한테 살 것이 온다. 이게 생존 생계도 문제지만 더 나가면 개인구원과 관련돼있어요. 주께서 나를 구원해주시기 때문에 믿을 용의가 돼있습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이건 기독교가 아니고 무당종교입니다.

주님은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증거 하라고 성령을 준 적이 없어요. 성령 받게 되면 주의 일을 하겠지. 그것도 잘못된 생각이에요. 주의 일하라고 성령을 준 제 아닙니다. 내가 내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성령 준 게 아니에요. 주님은 나한테 관심 없어요. 죽을 인간한테 관심 둘 이유 없어요. 주님은 죽을 인간이 나한테 와서 어떻게 나를 증거 하는가,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게 관심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죽했으면 자기를 부인하고 따르라 했습니까. 그 떡 먹던 사람들이 오니까 물었지요. 답변을 안 해요. 네가 나를 따르는 이유를 내가 안다.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다시 말해서 나한테 이분이 있으면 실익이 있다고 생각하고 나를 따라왔다. 그러나 너희들은 떡을 달라는 것이 하나님 일이라고 자꾸 믿고 싶은데 그건 떡에 관심 있기 때문에 그렇다. 진짜 하나님 일을 이야기해줄까? 하나님 일은 뭐냐? 나를 믿는 것이다.

그들이 듣고 뭐라고 하느냐? 믿지요, 뭐. 떡 주는데 못 믿을 게 뭐가 있습니까. 그 사람들 어디서 다 떠났습니까? 무슨 이야기에 다 떠났어요? 그렇지요. 내 살을 먹지 않고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한 자는 다 떠나요. 다 떠났다고 돼있지 않고 함께 다닌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돼있어요. 그 많은 사람이 다 가버렸어요.

너도 갈래? 제자들 보고 이야기했지요. 예수님 이야기했습니다. 새로운 공식을 떠난 상태에서 보낸 상태에서 이야기합니다. 선택 이야기에요. 너희를 위해서 내가 너희를 선택한 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신 자, 그러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일을 증거 하라고 너희를 나한테 붙여준 사람 외에는 내가 다 잘라낼 거야.

개인구원용 같으면 누가 예수님 곁에 붙여있으면 안 되는 겁니까? 그렇지요. 가룟 유다가 붙어있으면 안 되는 거예요. 가룟 유다가 왜 붙어 있었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선택이기 때문에. 이제 캘빈이 뭐가 잘못됐는지 알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 선택인데 캘빈은 기존 천주교를 의식해서 새로운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성경에 보면 창세전에 여러분들이 구원받기로 돼있다. 이래 된 거예요. 개혁신학에 그게 포함이 돼버렸어요.

개인구원,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캘빈신학이 더 우수한 신학이라고 덤벼든 거죠. 실익이 있으니까. 그 신학 붙들고 살려고 하는 거예요. 의도 자체가 살려고 하는 거예요. 죽으려고 하는 게 아니고. 죽으려고 사는 게 아니고 죽는 척해서 살아보려는 거예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조치를 취했느냐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때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다시 해봅시다. 이스라엘이 다윗 때 두 종류의 이스라엘로, 하나는 사울의 이스라엘과 다윗의 이스라엘입니다. 현재 사울의 이스라엘, 하늘에 태양이 둘이 없듯이 나라의 왕도 둘이 될 수 없겠지요.

성경을 보는 사람은 한가하게 생각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으면 사울이 알아서 졌다 하든지, 왜냐하면 골리앗을 자기가 못 이겼잖아요. 하나님 나라 전쟁을 자기가 못했잖아요. 그러면 순수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나가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세상의 정치판이 그렇지 않지요.

우리는 어디서 초점을 맞추느냐 하면, 왜 사울은 자기가 왕이 안 됐음을 인정 못하는 이유가 뭐냐를 우리가 집중해서 봐야 돼요. 왜냐하면 그 사울의 모습이 우리 모습이기 때문에 그래요. 사울은 왜 권력을 내놓길 싫어했습니까? 이거에요. 자기 존재성을 위하여 나라도 있고 백성도 있어요.

처음에 사울은 나 같은 것이 어떻게 왕이 될 수 있습니까? 잘 생기고 키 크고 허우대는 좋다마는 나 같은 인간은 찾지 말라고 숨었어요. 굉장히 겸손하죠. 왕 되기 전에 사울은 겸손했어요. 그러나 누가 겸손하지 않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겸손하지 않아요. 우리에게도 왕이 필요하다고 했고 하나님은 그걸 허락해서 기어이 사울을 왕으로 뽑은 것이 아니고 백성의 본심, 욕구 욕망의 대변자로 사울을 뽑은 거예요. 이것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홍준표, 나는 대권 도전 안 한다. 유시민도 안 나온다. 선언했지요. 만약에 여론조사에서 홍준표가 70% 됐고 유시민은 한 60% 된다면 내 뜻은 아니지만 국민의 뜻이라면 국민을 위해서 봉사하겠습니다. 나올 수 있어요, 없어요? 나올 가능성이 있지요. 사울은 헛방 허수아비에요. 사울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당시 이스라엘 전체 신앙상태가 얼마나 개판인지 대변해서 보여주는 인물이 누구다? 사울인 거예요.

사울은 누구 눈치 보는 거예요? 백성들 눈치 보는 겁니다. 아말렉 군대가 쳐들어왔는데 분명히 제사지내자고 사무엘과 약속이 돼있거든요. 약속시간을 누가 어겼느냐 하면 사무엘이 어겼어요. 적들은 점점 더 사기가 높아지고 이쪽 이스라엘 군대는 사기가 떨어져 기죽어있습니다. 누가 초조합니까? 사울이 초조하지요.

선지자 없는데 제사 드려, 말아? 에라 모르겠다. 백성들 사기를 고려해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백성들 눈치를 봐서. 딱 드리고 난 뒤에 까꿍하고 누가 등장했습니까? 사무엘이 등장했지요. 뭐라고 했습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진즉 이야기하지. 약속을 누가 어겼습니까? 사울이 약속 어기고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얼마나 선지자를 존경하고 존중하는 데요. 떠나는 사무엘 옷을 붙잡을 정도로 겸손한 사람인데요.

백날 겸손하면 뭐합니까? 저쪽 백성들의 권력이 더 의식되는데, 살아 있는 사람들의 존재들이 더 의식되는데. 결국 사울이란 존재는 백성들 존재의 모자이크의 작은 조각에 불과한 거예요. 꼭 오늘날 우리를 닮았어요. 목사님, 우릴 너무 개무시하지 마세요, 라고 하는데 우리는 어지간한 경우를 미리 생각해서 까짓 것 내 목숨 달아나도 하겠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천하장사라도 의식 안 할 수 없는 일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자식입니다. 제가 어제 오후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믿음 시험할 때 적들을 치라 했습니까? 세상에서 벗어나라, 그런 것 했습니까? 그런 것 까짓 것 하지요. 어디 산에 가서 양 잡고 제사 지내라. 양 두 마리, 세 마리 잡겠지요.

뭘 잡으라 했습니까? 그것도 미운 자식입니까? 마약하고 술 먹다 벤츠 타고 사람 죽인 그런 자식이에요? 어떤 자식이에요? 사랑하는 자식을 잡아요. 야곱이 어느 자식을 잃어버렸습니까? 사랑하는 요셉을 죽였잖아요. 그게 언약 안에 살아 있다고요. 모든 언약은 그 기준에 의해서 남은 자 되고 남은 자 잘리고 천국에서 내보는 바로 그 기준이에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기준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다고 천당 가는 게 아니에요. 예수 믿는 것도 하나의 핑계에요. 믿음 없음을 커버하는 핑계에 지나지 않아요. 주께서 직접 손대야 돼요. 가장 귀한 것을 잘라내는 그러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니까 그 나물에 그 밥이니까 그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믿음의 조상에게 일어났던 그 일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얘 하나 잡아야 됩니까? 부엌에 가서 칼 갈아야 되겠네. 오늘 잡자. 오늘 너, 죽었다. 좋다. 아빠는 이기주의다. 나 잡아서 천당 가서 좋겠네. 잡을까요? 안 잡아도 돼요. 왜냐하면 새 언약은 이미 잡은 걸로 간주해서 그에 대한 모든 혜택, 잡음으로 인한 모든 혜택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기 그 앞에서 우리는 내가 아무것도 못한다는 것을 정말 기쁨으로 또는 슬픔으로 또는 참담한 자기 모습으로 슬프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안 해도 된다는 이게 얼마나 큰 부여된 자유냐 말이죠. 이 자유를 만끽하는 즐거움으로 우리는 주의 증인으로 살면 되는 거예요.

다윗이 고아 편들고 가난한 자 편드는 이것이 취미 아닙니다. 다윗은 죽을 지경이에요. 시편 22편 보세요. 오죽했으면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지만,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돼있지요. 구약은 나의 하나님이고 신약의 예수님은 나의 아버지에요. 아버지기 때문에 아버지라 불러요. 본인만 아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리고 오늘 시편 10편 1절에,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이게 다윗이 본심이 착하다는 말이 아니고 주께서 언약 중심인물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지금 어디까지 이야기했느냐 하면, 잘라내는 남은 자 이야기했습니다. 남은 자를 계속 추려내면서 이미 완성된 언약에서 나가는 겁니다. 미리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남은 자를 잘라내는 데 남게 되는 자는 몇 명이겠어요? 제로에요. 한 명도 없어요. 이사야가 이미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유명한 말씀 나오잖아요. 그루터기 나오지요. 그 그루터기가 어떻게 될까요? 십분의 일이 남아 있더라도 십분의 일도 용납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럼 뭐만 남아 있어요? 그루터기만 남아있는 거예요. 그 그루터기를 남아 있다고 이해하면 안 되고 잘렸다는 것의 증거로서 그루터기가 있다고 보라는 겁니다. 이사야가.

제가 읽어볼게요. 13절에,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그루터기의 기능은 뭐냐 하면, 요즘 말로 급작스럽게 논리를 비약시켜 적용시키면, “주여, 저는 왜 안 잘라냅니까?” 그런 뜻이에요. 진즉에 지옥 가야 되고 진즉에 저주받아야 될 저를 천국에 왜 넣어주십니까, 라는 쪽으로 반문이 돼야 돼요.

이 반문을 누가 하느냐? 사울이란 사람이 했지요. 주여, 누구십니까?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너는 이제부터 나의 증인될 것이다. 이미 합격했다는 뜻이에요. 합격의 통보를 그렇게 해요. 이제부터 너는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나중에 사도 바울이 그런 식으로 반응을 보이죠. 내 능력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두 자로 얘기해서 ‘자유’다. 나한테 신경 안 써도 되는 자유, 내가 안 챙겨도 되는 자유, 내 소유 아무것도 없어도 되는 자유, 그걸 오늘 본문에서는 가난한 자라 해요. 아무것도 없으니까 누구만 쳐다본다? 주님만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자유를 주신 거예요.

그럼 사도 바울의 재산이 얼마입니까? 재산이 아무것도 없었습니까? 그렇게 따지는 게 아니에요. 사도 바울이 백억이 되던 집이 열 채 있던 부동산이 15만 평이 되던 그는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워요. 성도는 그래야 돼요.

집 팔고 논 팔고 교회 갖다 바치지 말고 먹을 것 다 먹고 골프 칠 것 다 골프 치고 좋은 차에다 크루즈 여행에다 영화 나오는 족족 다 보러 다니고 봄 되면 봄옷 챙겨 입고 다 챙기면서도 세상에 그렇게 가난한 자가 없어. 왜? 내 것이 없으니까. 내 것을 챙기지 않으니까.

이상한 예를 들었습니까? 왜냐하면 나 이만큼 가졌다 너보다 낫다는 게 아니라 주여, 이 세상은 왜 이 모양 이 꼴입니까, 에 관심을 두는 거예요. 오늘 시편에 의하면. 남들은 지는? 할 거예요. 나도 좀 즐긴다마는 내가 날 알거든. 왜 이 꼴이냐? 나 같은 인간은 지옥 가야 되는데 왜 보내주는지 모르겠어. 무심코 던지는 그 말이 선교고 전도에요. 실적 있고 없고 따질 것도 없어. 난 이렇게 살아. 그게 전도고 선교라니까. 선교는 주님이 하시니까요.

그럼 지금까지 한 걸 정리해볼게요. 주께서 하신다가 뭐로 변경됐습니까? 나를 통해서 하신다로 바뀌었죠. 마지막 어려운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뭐가 있다? 하나님 있다는 데 이 하나님이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이스라엘 자체에서 누가 쫓겨 갔습니까? 400명+다윗, 다윗이 쫓겨났지요. 그러면 둘 중에 어느 것이 이스라엘이냐는 겁니다.

권력을 쥐고 있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아니지요. 이건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이미 하나님께 대들었다는 증거가 바로 다윗이 쫓겨났다는 겁니다. 증거가 된다면, 내가 묻는 건 그거에요.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이 하나님이겠습니까? 아니지요. 그게 시편의 핵심이에요. 움직이는 다윗을 봐라. 하나님의 기능은 그 움직이는 다윗을 추적해봐야 아는 거예요.

약속의 땅에 걸터앉고 거기서 농사짓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아니에요. 새로운 이스라엘이 남은 자의 잉태, 다윗을 통해서 배태되는 것으로 다윗언약이 있고, 다윗언약 안에 장차올 하나님 나라가 응축돼있어요.

그러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면 뭐가 퍼진다? 풍선 안에 하나님 나라가 들어있다면 그 입구가 예수님의 십자가라면, 십자가가 반복되면 풍선 안의 공기가 확 퍼지겠지요.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에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숨겨져 있어요. 복음의 비밀이거든요.

어디 있느냐고 묻지 마세요. 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고 너희 안에 있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하늘나라는 뭐냐 하면, 나 자체 존재를 뭐로 보고 있느냐 하면, 주님의 증인이라는 사건으로 보는 거예요.

지금 나 아무것도 아니고 지옥 보내도 되는데 왜 주님은 저를 이렇게 언약 안으로 집어넣습니까? 그것도 쏙 집어넣었습니까, 라는 이러한 고백이 나오는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남은 자가 된 동시에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이게 외부에서 보면 고아와 과부.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의 공통점은 세상에 의지할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이에요. 그것을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그런 고백이 나오도록 몰아가시는 거예요.

그러면 4절 다시 해보겠습니다. 오늘 4절이 중요하니까요.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이제 4절 말씀만 설명하면 본문 해석, 시편 10편 해석된 거예요.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할 때 해석 이렇게 됩니다. 악인은 이 땅에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 없습니다. 그 다음에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그런 사람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왜 없느냐 하면, 이 세상은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하나님 찾고 교만 안 하려 하고 하나님 공격하지 않습니다. 이게 해석이에요. 이 세상 모든 인간은 자기중심이기 때문을 놓치지 마세요. 내 중심이기 때문에 나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도 믿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하나님 멸시하지도 않고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게 한 사회가 무슨 사회지요?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사회지요. 예수님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유대사회는 뭡니까? 하나님 있다, 없다? 하나님 없고. 교만하고, 하나님을 배반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배반했지요. 왜냐하면 오신 하나님을 찔러 죽였으니까.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가 죄인인 줄 몰라요. 그런데 언제 죄인인 줄 아느냐 하면, 십자가의 영, 성령이 올 때 십자가를 앞장세울 때 비로소 내가 죄인 중의 괴수인 것을 아는 거예요. 그리고 거리에 나가보세요. 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당신 죄인이지, 하면 완벽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바르다는 식으로 살아왔다고 다 그렇게 생각해요.

특히 사울이란 사람이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고 율법에 흠이 없는 자이지요. 그러면 자기를 뭐로 봅니까? 자기는 의인이지요. 상대방은 죄인이 아니고 자기보다 약간 질이 떨어지는 의인이고. 다 그런 거예요.

스티븐 핑커라는 사람이 하버드대 교수로 심리학자인데 우리 안에 착한 천사 있다는 책이 있고, 또 우리나라에 번역된 책 중에 [빈 서판]이란 책이 있어요. 타블라 라사라 해서 존 로크가 이야기한 인간은 본성은 없고 비어있다는 것을 반박한 책이거든요. 우리나라 번역상 받은 책이에요. 번역만 잘 된 게 아니고 내용도 뛰어나다고 하거든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제55회 한국출판문화상>(2015년) 번역부문 수상작, 번역자 김명남.

이 사람이 인간의 본성 가운데 폭력성을 감화시키는 자동적인 속성이 진화되어 와서 옛날보다 지금 이 세상에 폭력이 줄어든 이유가, 인간이 더 착한 쪽으로 진화되고 있다는 주장을 한 거예요.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상줄 만하죠.

오늘 시편 하나님의 언약과 비교해보세요. 언약과 비교할 때 그것 때문에 다윗은 쫓겨났고 그것 때문에 예수님은 죽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세요. 우리의 타고난 죄가 얼마나 하나님을 죽게 한 것인가를 우리는 깨달아야 돼요. 왜냐하면 이 시편 10편을 유대인들이 몰랐을까요? 아는 정도가 아니고 어릴 때부터 달달 외웁니다. 랍비한테.

그래서 그들은 해석할 때 어떻게 합니까? 이스라엘은 영원해야 된다는 그 전제를 깔고 시편 10편을 보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것은 전부 다 악인이 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개인적인 집단이에요. 집단인데 모든 움직임은 마치 개인의 움직임처럼 똑같이 움직이는 거예요.

이게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내 교회, 우리 교회. 뭡니까? 교회란 단체를 이야기해놓고 자기 자존심에 대한 증거물로 사용하잖아요. 세상 모두가 출발이 뭐냐? 나부터 출발해요. 그런데 아까 처음에 강의했듯이 하나님 보시기에 그 나가 문제 있다는 거예요. 그 안목은 언약 속에 있을 때나 비로소 알아요.

끝으로 한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에 봅시다. 18절에 보면, 그전에 악인의 팔을 꺾으시고 하는데 18절에 심판이 나오지요. 심판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심판인데 첫 번째, 잘못된 심판은 뭐냐 하면, 나를 심판하는 게 잘못된 심판이에요. 구원도 개인주의 구원처럼 심판도 개인주의 심판인 줄 알고 있어요. 나를 심판하는 것이 심판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노아언약에 의하면 심판은 우리 안에 뭔가 둘러싸는 게 심판이에요. 개인이 아니고 환경이에요. 환경 자체가 심판이에요. 만약에 개인 심판에 빠져있으면 누가 삿갓 쓰고 와서 염불 외우면서 아아, 이 집에 액운이 끼었구나. 이건 천도제를 지내야 돼. 도를 아십니까? 사 대가 복을 받을 거요. 이러면 거기에 아줌마들은 넘어가요. 왜냐하면 아줌마들은 지 자식밖에 모르기 때문에. 자기 해로움은 끄덕도 안 하는데 자기 자식 해롭다면 완전히 혼이 다 나갑니다.

그래서 교회 헌금 봉납도 자식 잘되라고 하게 되면 헌금이 나오게 돼있어요. 자식 위해서 이 교회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면 부모의 모성과 부성에 호소하면 아낌없이 나오게 돼있어요. 여러분 잘된다고 하면 안 나와요. 늙어 죽으란다. 있는 연금도 귀찮은데 뭐하려고. 자식 하면 예하고 다 바쳐요.

기어이 사적인, 가정도 하나의 사적 아닙니까. 사적인 저주에 떱니다. 따라서 제가 일반교인들한테 합니다. 누가 저주하거든 찬스인 줄 알고 저주를 받으세요. 그게 구원의 길입니다. 시궁창에 들어가지 않으면 천국에 못 들어가잖아.

사도 바울처럼 십자가 저주 아닙니까?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저주받음으로써 비로소 안 보이던 천국이 환하게 보여요. 내가 그동안 틀어막았어. 내가 그 좋은 천국을 살고자 하는 의욕과 욕망이 천국의 소식, 복음을 엉덩이로 틀어막았어요. 전부 다. 그래서 성령께서 네 엉덩이 좀 치워라. 엉덩이 치우면 하나님 보이는데. 맨날 저주 오지 말고 복 주옵소서. 이러고 있으니까 자기가 천국을 막아놓고 자기가 자기 구원 막아놓고 누구 탓을 합니까.

심판은 환경으로 옵니다. 우리는 거기 소속된 거예요. 따라서 환경만 바뀌면 환경만 천국이라면 이미 그 사람은 어떤 인물이던 관계없이 세리가 되던 강도가 되던 이미 천국입니다. 왜냐하면 환경 자체가 부활의 환경이면 이미 심판을 이긴 거예요.

누가 율법으로 널 쏘더냐 말이죠. 율법이 널 쏘도록 왜 허용하느냐 말이죠. 왜? 율법이 쏘는 것은 생명한테는 죽음에서 벗어난 사람한테는 율법이 쏘질 못하게 돼있어요. 율법이 쏘는 과녁은 생명을 보고 쏘는 게 아니고 죽으라고 쏘거든요. 이미 죽은 자한테는 선악적인 율법이 아무 소용없어요.

율법은 우리 육신이 어떤 성질이 성깔머리가 있느냐를 까발려서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기뻐하는 용도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거예요. 로마서 7장 이야기입니다.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곧 이어서 뭐라고 합니까? 기뻐하리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뭐가 없나니? 정죄함이 없나니. 정죄함을 가지자는 말이 아니고 이것을 증거 합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 심판에서 벗어난 상태인 것을 우리가 왜 몰랐습니까? 자꾸 독자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니까 우리가 우리 구원을 기쁨을 막았습니다. 이제는 혼자 살지 말고 주와 함께 있는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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