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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8 16:30:41 조회 : 292         
다윗없는 다윗 190408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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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19.♡.174.49) 19-04-10 10:34 
20190408a 부산강의 : [시편]18(11편)-다윗 없는 다윗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시편 11편 할 차례지요. 다윗의 시라고 돼있습니다. 시편에서 해석의 관건은 어떻게 우리가 성도 되느냐가 아니라 주님이 어떻게 사람이 되느냐와 관련돼있어요. 우리가 천국 갈 생각하지 말고 주님이 지옥에 왔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됩니다. 주님 오시지 아니하면 내가 살던 고향 이 동네가 지옥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모르게 돼요. 지옥에 살던 사람은 이미 천국과 결별된 상태기 때문에 담이 막혀 있어요. 경계선이 쳐져 막혀 있는 상태에요.

그 막혀 있는 상태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 3장 22절에 나오지요. 요샌 성경구절이 아슬아슬해요. 맞는 게 이상할 정도로. 23, 2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의 부부를 쫓아버렸다. 우리가 굉장히 유념해야 돼요. 함께 못 살겠다는 것, 나가라. get out 꺼지란 말이죠. 나가라. 너는 나와 함께 기거할 수 있는 그런 본질을 갖고 있지 않는 것.

그러면 여기서 결별이죠. 하나님 계시는 곳과 인간이 사는 곳이 결별된 거예요.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의지 얼마나 강한지요, 천사들을 통해서 오늘 길목을 강력하게 차단했습니다. 두로 도는 화염검이란 불붙은 천사들이 못 오도록 지키는 거예요. 이 경계선이 고정돼있는 것이 아니고 극단적으로 계속 밀어붙이는 겁니다. 경계선 자체가 움직여요. 이스라엘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 등장한다는 말은 이 차이성, 경계성, 차단성을 끝까지 계속 밀어붙이는 겁니다.

흔히 제가 그런 예를 드는데 젊은 남녀가 사귈 때 사귀는 장소가 축대 있는 골목길이어야 돼요. 개 오줌 누는 전봇대 있고, 그리고 분위기는 70년대고 아가씨 집은 옛날 동네쯤에 있어야 돼요. 아가씨는 남자가 싫다는데 작구 남자가 집적대면서 사귀자고 옵니다. 여자가 기어이 싫다고 하니까, 싫다는 말이 뭡니까? 네 영역과 내 영역은 철저하게 차단돼있다. 너와 관계를 틀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니까 남자 쪽에서 화가 나서 여자를 밀어붙이는데 축대가 왜 필요하냐 하면 축대까지 밀어붙여요. 마치 뽀뽀라도 할 기세로 막 밀어붙이는 거예요. 그러면 여자는 물러설 때가 없으니까 완전히 궁지에 몰리겠지요. 끝까지 밀어붙이는 거예요.

이게 바로 창세기 3장 23, 24절에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뜻의 등장입니다. 네가 신을 찾는다는 자체가 반칙이라는 거예요. 신은 이미 차단했는데 인간 쪽에서는 이 차단을 자기 현실로 집어넣지 않고 탁 트인 것처럼 그러한 망상 속에 있는 거예요.

망상은 주로 누가 많이 하지요? 치매, 보편적으로 정신병자지요. 모든 인간은 정신병자에요. 망상이 끊이지 않으니까. 아침에 눈만 뜨면 망상이에요. 그 망상을 고상한 말로 희망이라 하죠. 희망이 뭐냐? 망상이에요. Just look don’t think 보기만 하라. 생각하지 마라. 인간은 그냥 보는 대로 살 뿐이지 생각은 망상에 속할 뿐입니다. 어떤 생각이든. 내일 해는 내일 돼야 떠요. 그렇잖아요. 내일 뜨는 해를 오늘 당겨서 걱정할 이유가 없단 말이죠.

인간에게 확실한 것은 눈에 보이는 그게 전부입니다 아침에 거울 보면 보이는 내 모습 그게 전부에요. 그래서 죽음이라든지 신이라든지 천국이라든지 인간의 망상에 속하는 겁니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 뭘 대비하자. 지옥을 피하기 위해서 뭘 해야 된다. 이게 전부 다 망상입니다. 정신병자 같은 짓이에요.

이것은 어떤 뜻이냐 하면, 하나님 거기 계세요. 내가 찾아갈 테니까. 이런 뜻이라고요. 창세기 3장 22절, 23절에 계속해서 밀어붙이는 사실을 모르고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뜻이라 할 때는 나쁘게 생각하겠어요, 좋게 생각하겠어요? 하나님 자체를 좋은 분으로 여기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도 우리한테 사랑 못해줘서 환장하신 분 있잖아요. 마치 어미가 자식을 못 보태줘서 환장한 것처럼 하나님이란 사랑을 못해줘서 더더더 뭐해줄까, 이런 식으로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 준비된 신으로 여기는데

실제로 하나님은 그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인간과 강한 대척 관계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쪽에서 우리에게 밀어붙일 때 경계선, 차단성을 갖고 올 때 차단성이 벽이나 담이라면 그 두께가 있다면 그 두께 안에 뭐가 담겨 있느냐 하면, 나는 너희를 쫓아내었다는 내용물이 그 담 안에 같이 응축돼있겠지요.

남자가 여자를 축대 밑으로 몰아넣을 때에 솜사탕으로 몰아넣습니까? 노래 부르면서 웃으면서 그렇게 합니까? 강하게 어깨로 하잖아요. 네가 싫다하더라도 나는 끝까지 너를 포기 안 할 거야, 하는 폭력성을 갖고 있단 말이죠. 큰 폭력은 아니지만 밀어붙일 때 자칫하면 나중에 엎어져서 발착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살짝 밀어붙였는데 정신적 충격 받을 수 있지요. 위협적이란 말이죠.

주님께서 밀어붙이는 그 담에는 창세기 3장 23절, 24절을 절대로 포기한 게 아니고 그걸 계속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그 차단성을.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 이미지와 달라도 너무 다르거든요. 하나님 우리를 만들었으니까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세. 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관계에요. 이게 망상인 줄 상상도 못하는 거죠. 하나님이 우릴 추방했다는 사실을 애써 안 들은 걸로 여기는 겁니다.

말썽꾸러기 시집간 딸을 친정아버지가 이제는 니가 네 남편과 같이 굶어죽든지 나는 모르겠다. 너 같은 말썽꾸러기는 처음 본다 하고 쫓아냈는데 아이 셋 데리고 살랑살랑 웃으면서 아버지, 하면서 찾아오게 되면 아버지는 안 받아주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날 받아줄 거라는 그건 망상입니다. 아버지는 어질기 때문에 아버지는 이웃도 잘 돌보기 때문에 친 딸인 나를 그냥 배척하진 않을 거야. 지 혼자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어제 낮 설교에 했지만 정신병자 네 자를 두 자로 줄이면 아담입니다. 옛 아담입니다. 흙으로 만든 아담은 안 받아줍니다. 그래서 주께서 준비한 새로운 아담,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는 동시에 사람은 딱 두 종류가 돼버리죠. 아담에 속한 인간은 창세기 5장에 죽으리라, 죽으리라, 죽어야 되고 새로운 아담은 그 죽음을 극복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죽고 다시 사흘 만에 살아나신 거예요.

문제는 이게 종교교리냐, 신학에 불과하냐 아니면 현실이냐 이게 문제에요. 이게 하나의 이론이고 우리가 살 궁리를 트기 위해서 만들어낸 제안이고 아이디어라면 이건 또 망상이에요. 따라서 주님의 십자가 복음은 우리가 망상 속에 있는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사이좋은 관계라는 그것과 완벽하게 대 충돌이 일어난 이후에 주어지는 상황이 믿음이에요.

내가 믿는 하나님이 가짜였다는 것이 완전히 구겨지고 부셔져야 돼요. 나는 내 입장에서 하나님 쳐다봤는데 이제 그 입장 자체가 나를 정신병자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진짜는 뭐냐? 하나님 쪽에서 나를 어떻게 보느냐. 이게 망상 때문에 몰랐던 새로운 인식과 사고방식이 다가오는 거예요.

사람들의 망상으로 만들어낸 게 뭐냐 하면 교회입니다. 교회가 망상이에요. 주일 좋다고 돼지고기 사 먹는데. 내가 댓글 올려놨습니다. 나중에 천국 가면 주일도 없는데 무슨 재미로 살라고. 주일에 교회 가는 재미 말고 천국 가는 재미로. (부러우면 부럽다 하세요.^^) 왜 부럽지 않은 이유는 우린 더 맛있게 먹기 때문에. 우린 맛있는 걸 못 찍어 올려요. 왜? 남들이 시험 들까 싶어서.

좋다는 것은 무엇을 유발하느냐 하면, 네가 나쁘다는 것을 조건 해서 좋은 거예요. 좋다는 소식이 복음이죠. 기쁘다는 것은 너는 그동안 슬픈 인생을 살았다는 겁니다. 비극의 창출자는 너다. 네가 비극의 창출자 되는 겁니다. 왜냐? 아담의 모든 요소가 부분이 아니고 전체적으로 우리 안에 그대로 다 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과자 콘에 아이스크림 담잖아요. 우리는 콘이라면 거기다 아담의 모든 죄가 아이스크림으로 그것도 넘치도록 소복이 담기는 거예요. 이것이 제 이야기가 아니고 로마서 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죄를 담는 그릇에 불과했다. 그걸 로마서 5장과 6장에서는 죄의 종이라고 해요. 죄의 노예라고 돼있는데 그걸 약간 틀어보겠습니다. 죄를 담는 종지기.

성경 찾아봅시다. 고린도후서 4장 7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종지기죠.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하나님을 담는 그릇이라면 우리가 매일같이 내뱉어야 될 고백이 모델로 나와 있어요. 그게 뭐냐? 모든 능력은 나한테 있다, 없다? 나한테는 없다. 그걸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다.

내가 쓸모없는 인간으로 자각한다는 것은 큰 능력이 함께 있는 결과입니다. 이건 단순한 겸손이 아니에요. 불교 중들이 도 닦는 게 아닙니다. 신나는 이야기에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고 그리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에 더 보탤 수 없는 상관없는 일인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거예요.

기도하고 전도하고 예배 참석하고 쌈 싸먹고 그 모든 일이 내 구원과 전혀 무관한 일이었음을 그리고 그것뿐만 아니고 앞으로 내가 어떤 짓거리를 해도 구원과 전혀 별개의 문제가 되는 겁니다. 착한 일을 해도 구원에 보탬이 되는 것도 아니고 지독한 악한 범죄를 저질러도 구원에 지장이 없는 거예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그 내용물이 좋은 것을 요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좋은 것 자체가 없어요. 다만 전에는 망상으로 가득 찬 자리가 게워내고 그 망상이 있고 죄가 있던 자리에 주님이 차고 들어왔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게 아니고 죄인이 되신 거예요.

내가 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내가 죄 진다고 죄를 아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죄 짓게 되면 죄를 아는 게 아니고 변명만 늘어나게 돼있어요. 변명은 곧 나는 의롭다는 뜻이에요. 이상한 모순이죠. 죄는 지으면 지을수록 자기가 점점 더 의로워지는 거예요. 그 정도로 인간은 고집이 세요.

죄라는 것은 내가 지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이게 네 자리라고 지적한 자리가 있어요. 그 자리에 가게 되면 우리는 평생 착한 일하고 희생적인 일을 해도 그것이 죄 자체였다는 것, 남을 돌보고 희생하고 남을 사랑하는 자체가 죄였다는 사실을 비로소 아는 자리를 주께서는 죄인이 되심으로서 알려준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어려운 말로 범주라 합니다. 범주는 일시적으로 칸막이 친 거예요. 일군의 사람이 있다면 여기서 여기까지는 그냥 특정 인간이라고 하고 모이면 교회라 하는 거예요. 교회란 자체가 사실은 바깥에 범주 자체기 때문에 범주 벗겨버리면 질적으로 똑같아요. 교회 밖이나 안이나 똑같다 이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라는 범주를 의미를 두는 이유는 구원받지 못해서 그래요. 아직까지 지옥에 살고 있기 때문에 위로 삼아 교회로 삼아 테두리 치는 거예요. 빨간 벽돌로 고딕 쳐서 그걸 교회라고 우기는 것은 전혀 내가 믿을만한 것이 없기에 내 쪽에서 믿을만한 것을 만들어내겠다는 종교적 열심히 유발된 게 교회라는 겁니다.

교회는 흐름이에요. 쉬운 예로 전류의 흐름이죠. 위에서부터 아래로 흐르는 데 이 경로를 이미 한 차례 다녀가신 분이 게십니다. 예수님께서 없는 길을 텄어요. 길을 길답게 하기 위해서 기다란 파이프에 성령을 흘렸단 말이죠. 예수님께서 요단 강 세례 받을 때 남들은 물만 뒤집어썼지만 예수님은 성령을 뒤집어썼지요. 예수님 자신이 성령의 흐름 따라 가는 첫 번째 모범자로 등장한 겁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무사히 모든 과업을 성취하시고 이제는 그 성령의 업무를 자기로부터 자기 백성에게 인수인계하는 겁니다. 이제는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께 성령을 보냈다면 이제는 예수님이 아버지 주의 자리에서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보내게 되면 자기 백성은 뭐가 돼요? 죄인이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천국 가는 그런 놀라움이 벌어집니다.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죄인인데 길을 잘 텄어. 길은 아까 이야기한 차단성입니다. 철저하게 다른 사람은 외부적인 인간의 힘으로 여기 끼어들 수 없는 강력한 파이프에요. 벽이 두꺼워서. 늦게 오신 분을 위해 다시 이야기하지만, 이 차단성 안에는 무슨 내용이 응축돼있다고 했습니까? 내가 너희를 추방한다. 아담의 부부를 쫓아낸 거예요. 강력한 의지. 그 다음에 두 번 다시 오지 못하도록. 그러니까 인간이냐? 오지 마라, 이거에요. 내게 오게 한 것은 인간이 아니고 새 인간이죠. 인간이 아니고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인간이냐, 그러면 글렀다. 끝났어.

그래서 아담 이름 자체로 주님께서 아재 개그를 해요. 원래 아담 이름이 인간인데 아재 개그로 흙이 돼요. 흙이니까 어디로 돌아간다? 무효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만한 권한은 있다는 거예요. 네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사람들은 흔히 그걸 죽음이라 하는데 흙으로 환원되는 겁니다.

죽어서 죽음이 아니고 이미 태어날 때부터 그 안에는 죽음의 힘이 거기서 작용하고 있는 거예요. 죽음을 색깔로 본다면, 분홍색, 알록달록 필요 없습니다. 죽음의 색깔은 무채색이에요. 검은색으로 깔아버리면 아무리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아도 나중에는 주님 보시기에는 검게 보이죠.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자기 속에 있는 검은 색을 표면으로 끄집어냅니다. 남들 보기에 굉장히 주의 일에 열심을 냈지만 너희들이 모르는 내 내면이 있다. 내면의 색깔은 죄인의 색깔이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 하지요. 안에 있는 것을 바깥으로 끄집어내줄 때 위장이 용납이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거죠.

내가 나를 조작하거나 꾸미거나 나를 연출한다는 것은 다 부질없는 짓이에요. 그렇게 보면 우리 하루하루 삶이란 다 부질없는 짓이에요. 끊임없이 자기를 연출하기 때문에. 기존에 있는 나라는 재료로 대외적으로 나는 어떻게 보일까, 치밀한 계획하에 꾸미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 11편에서 다윗의 시라 하는데 제가 잠시 수용하겠습니다. 다윗 없는 다윗의 시. 다윗을 거덜 내는 다윗. 앞에 있는 다윗은 그 당시 남자 다윗이고,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있죠. 뒤에 다윗은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다윗이에요. 다윗의 자손이 다윗을 게워낸다. 다 긁어낸다, 소멸시킨다, 없애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 속에 오실 다윗 자손의 영이 이미 침투한 거예요. 베드로전서 1장에서는 성령이 이미 선지자 속에 들어왔다고 이야기하고 구약에서는 그걸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다윗 속에 장악돼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언약이 먼저고 다윗은 나중이라는 거예요.

신자란 주님이 늘 자아를 이기는 존재, 이게 신자입니다. 신자는 내 고집, 내 자아가 이기는 게 아니고 내 속의 주님이 늘 나보다 더 센 거예요. 하나님 나는 지난주 너무 나쁜 짓했습니다. 주님은, 네가 나쁘다고 하니까 너는 엉터리야. 그건 내가 시킨 일이야. 나쁘다고 하지 마. 지난주에 너무 착한 일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죄야. 그래야 내가 없어지거든요.

주님은 완전히 청개구리에요. 내가 동으로 가면 서로 가고 서로 가면 동으로 가거든요. 내가 무엇을 하게 되면 그것을 반대로 바꿔버려요. 그래야 그것이 십자가의 의거든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인간의 기존 생각을 염두에 두고 그것과 정반대되는 코스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타난 주의 뜻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두 개의 주의 뜻을 우리에게 나타냅니다. 하나는 너희들의 율법 해석이 맞나, 아니면 예수님의 율법 해석이 맞는지를 항상 대비시키는 스파크가 일어나는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에요.

진정한 교회란 흐름이라 했지요. 흐름이란 전류입니다. 전류에는 저항하는 게 있어요. 인덕턴스inductance라는 게 있어요. 컴퓨터 끌 때 그냥 끄면 고장 나요. 잔여 전류가 남아있도록 하는 것, 유도 저항이죠. 인덕턴스라고 전기공학에 나와요.

우리가 너무 기분이 업되면 안 돼요. 구원받았다고 까불다간 자빠집니다. 그래서 항상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너무 경망스럽지도 않고 너무 침울하지도 않고. 나 죄 지었어. 지옥 가야 돼. 침울이 너무 심해지면 누구처럼 자살해요. 자살이 뭡니까? 내 인생 내가 관리하겠다는 뜻이거든요. 누가 이겼어요? 하나님이 이긴 게 아니고 자기가 이긴 거예요. 자기결정이에요. 우발적이고 충동적이 아니고 계획적인 자살 같은 거예요.

충돌적일 수 있어요. 에이, 콱 죽어버릴까? 그런 건 충동적이고. 계획적인 것, 섬세하게 계획 잡아서 죽는 날짜에 시간까지 상황 봐서 하는 것, 이걸 성령의 일이라고 간주하기에는 곤란해요. 충동적으로 죽는 것을 너무 탓하지 마세요. 그러나 계획적으로 죽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계획적인 자살을 했지요.

세상 사람들은 자살을 심각하게 생각할 자격은 없어요. 왜냐하면 지금도 그들은 매일같이 죽음으로 가기 때문에 스스로 죽는 연습을 무덤을 파고 있기 때문에 일종에 지연된 자살이라 할 수 있어요.

우리 인생 자체가 주의 것이기 때문에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주관할 게 없고 항상 살든지 죽든지 뭘 남겨야 하느냐 하면, 주님한테 졌다는 패배의식이 우리가 감사로 이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감사, 가장 큰 감사는 언제 나오느냐? 내가 죄인인 것을 인식할 때 터져 나오는 감사가 가장 큰 감사에요. 죄인이기 때문에 못할 일이 없거든요.

나 같이 이렇게 배운 인간이 뭘 그런 걸 해. 이러면 아직 자기 잘났다고 하는 거예요. 정말 내가 죄인이라면 뭐 대기업 임원출신이라도 경비원 만나면, 예예. 아파트 경비원이 요새 10:1이 넘는데 얼마나 센데.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우쭐대거나 너무 붕 뜨게 하는 그것을 인덕턴스를 통해서 갈아 앉히는 거예요. 매일같이 다시 바닥부터 새로 시작, 항상 바닥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은 시작은 창대하나 나중은 미약하거든요. 제가 늘 옛날 살던 우리 집 화장실에 빗자루가 생각나요. 그 빗자루를 지금 같으면 어른들이 교체하면 되는데 몽당 빗자루가 얼마나 썼는지 손잡이는 쥘만한데 밑에는 너덜너덜 다 떨어졌어요. 인간이 이 땅에서 성공이라고 쥐는 것은 몽당 빗자루 같아. 전부 다.

땅 사놓으면 땅 값 오릅니다. 땅 값 오르면 지가 사지. 부동산 사기에 걸려들어서 뭔가 잡았는데 보면 손잡이만 잡았어. 알맹이는 하나도 없어요. 포장만 근사하고. 인생 자체가 투자 아닙니까. 시작은 거창하고 나중은 미약하게. 아무것도 없어요. 세 살, 네 살 때 천재 아닌 자식이 없어요. 우리 손자 천재다. 천잰데 왜 고등학교 가서 랩하고 아이돌 한다고 난리입니까. 공부에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요.

지금 강의 주제가 뭐냐 하면, 인간이 신이 되는 게 아니고 어떻게 시편의 내용은 예수님이 죄인이 되셨나? 그 경로가 다윗의 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 보고 천당 가고 복 받을 생각 마세요. 자신의 복과 복 받아야 될 자기 욕망 싸우지 아니하면 그건 신자가 아닙니다. 인간에게 신앙의 장애물이 있다면 복을 추구한다는 거예요. 내가 복 받을 자기 되고 싶어 한다는 거예요. 이게 유대인들이 그렇게 했고 그 다음에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뭘 준비했는가? 걸림돌을 준비하죠. 자빠지라고. 뭔가 추구하는 자는 여기서 다 자빠지고. 불의한 청지기는 통과, 세리 창기는 통관데 뭔가 으스대면 다 자빠지게 하는 그것, 그게 바로 십자가에요.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라 할 때는 그 사람만이 통과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잖아요. 정말 이것은 영구불변한 공식입니다.

그러나 공식만 알았지 그 방정식 속의 하나의 요소로서 변수로서, y=ax+b 그 공식 x자리에 들어갈 생각을 안 하고 있어요. 물론 성령께서는 들어갈 생각이 있든 없든 무조건 잡아당겨서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어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차단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구원하시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주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는 거죠.

구원이란 말을 했는데 쉽게 말해서 끄집어내주는 거예요. 제가 문제를 낼 테니 맞춰보세요. 꽉 막힌 병 안에 파리가 들어있습니다. 자, 거기서 파리가 빠져나올 방법은? (뚜껑을 연다. 병을 깨버린다.) <만다라>란 영화에 보면 그런 경우인데 불교에서 해결책은 간단해요. 문제 자체가 성립 안 된다. 이게 해결책이에요. 다시 말해서 망상이란 것.

불교에선 망상이라 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성경에선 그걸 현실로 봐요. 죽음에 갇혀있으니까. 인간은 몸부림 만부림 쳐도 죽음에서 못 벗어나요. 죽어가면서도 죽는 이유를 모르니까 주께서 계속 하나님 뜻을 율법을 투입해줘요. 그러면 조금씩 그 내막이 밝혀져요. 죽음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을 죄에서 못 벗어나는 것으로 번역해줘요. 의미를 더 추가해서 줍니다. 약간 더 추가하게 되면 야고보서에 나오는 이야기죠.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네 욕심에서 못 벗어난다.

이러면 기독교나 불교나 마찬가지 아니냐고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욕심이란 본인의 선악적인 의식으로 판단되는 욕심은 욕심이 아닙니다. 욕심은 누구와 대비가 돼야 돼요. 하늘에서 오신 새로운 아담, 예수님과 비교하면서 나타난 차이가 욕심이 되는 거예요.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욕심도 몰라요. 죄도 모르고 욕심도 모르고 아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밥 먹고 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그냥 주님을 모르면 그야말로 아는 게 전혀 없습니다.

아는 게 없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행한다, 아니 행한다. 이 차이 뿐이에요. 성령이 오게 되면 지녔다, 아니 지녔다. 내가 소유했다와 소유 안 했다, 그 차이가 찾아옵니다. 성령을 가졌다와 없다고요, 성령이 없을 때는 내가 오늘 집에서 놀까, 일하러 나갈까? 맨날 내가 할 수 있는 행위를 놀고 있다, 일하고 있다, 자기의 행위만 주목하는 거예요. 야, 공부해. 너 지금 게임하고 있잖아. 게임한다, 공부한다. 공부한다, 게임한다.

네가 움직이지 않으면 넌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인간 자체에 내장돼있어요. 하나님께 추방되었다는 사실이 인간 자체에 내장돼있어요. 그래서 인간으로 보지 말고 흙으로 보라 했잖아요. 흙으로 와서 흙으로. 그게 이름이라는 거예요. 이름 안에 이름에 부합되는 존재가 만들어져요. 이름이 먼저고 그 뒤에 그 이름의 내용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우리 신체란 존재가 만들어진 겁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흙에다 생령을 집어넣고 그 다음에 뭐가 됩니까? 사람이 되지요. 아담이 되는 겁니다. 인간에게 뭔가 들어왔는데 인간은 그게 뭔 내용인지 몰라요. 그 뒤에 창세기 2장에서 선과 악은 알아서는 안 된다는 악마와 하나님과의 경계선을 집어넣는 거예요.

악마는 알아챘지요. 인간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경계선을 내 쪽에서 삼켜버리면 된다는 거예요. 있는 것을 삼켜버리면 더 이상 나한테 잔소리할 것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죄악 된 인간의 본심은 뭐냐 하면, 복음과 하나님 말씀 소식에 대해서 아예 안 들은 걸로 자기가 자기를 유지하려고 하는 겁니다. 더 이상 주님한테 잔소리 들을 필요 없다고 자존하고 자위하는 거예요.

불교의 목적은 천상천하유아독존이에요. 내가 부처고 내가 신이기 때문에 그 누구의 간섭도 들을 필요 없다는 거예요. 그게 이방민족은 그래요. 그런데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지만 이스라엘 속에 누가 동행하고 있잖아요. 이게 차이점이라고 제가 어제 낮에 설교했잖아요. 이쪽은 1로 살고 저쪽은 2로 사는 거예요. 이쪽은 혼자 살고 늘 지적받고 간섭받고 인도함을 받는 거예요.

시작된 부부니까 신랑, 신부 관계니까 늘 신랑 되시는 분으로부터 공급받고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보다 상대를 경유해서 자기를 보는 겁니다. 성도가. 주님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라고 경유해서 보게 하는 거예요. 나에게 걸림돌을 설치한 주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나를 에덴동산에서 추방시킨 것으로 볼 때 저는 오늘도 어디에 쓸모 짝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뭘 해 드릴 거예요, 가 아니라 오늘 뭘 시킬 거예요? 단 조건이 있어요. 이 쓸모없는 인간을. 찬송가에 나오지요.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정말 쓸데없어요. 주의 일에 쓸데없는 데 쓸데없는 조건 하에 쓰게 돼요. 내가 쓸모 있다고 생각하면 주께서 쓰지 않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차단성의 내용이 안 나오기 때문에 쓸데없다는 조건에 쓰시는 거예요.

늘 인간은 자기가 가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인덕턴스로 해서 우리를 처음 자리로 돌려보내서 내가 죄인인 걸 알고 그 죄인임을 알 때 갑자기 여기서 뭐가 터져 나오지요? 감사가 나오지요. 못할 게 없으니까. 못 견딜 게 없어요. 가난해도 견뎌요. 왜냐하면 원래 가난했어야 했으니까 쓸데없이 거기서 더 생각하면 욕심이니까 뭐든지 할 수 있는 거예요. 죄인이니까.

그런 상태에서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가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가 없는 겁니다. 뭐든지 해도 감사와 뭐든지 해도 고마움과 기쁨이 나오니까. 몸 아파도 우리 동네 뒷산 산불 나도 그저 좋은 구경했네. 이것을 아까 했지요. 내가 없는 나, 다윗 없는 다윗 되게 하신 거예요.

예수님의 인생이란 예수가 없고 임마누엘이 되는 인생을 사신 거예요. 왜냐하면 처음에 이름 지을 때 예수라고 성령에 의해서 지었잖아요. 그 다음에 마태복음에 이사야 예언을 했지요. 이사야 예언은 임마누엘이죠. 그런데 이걸 이루었다고 돼있거든요. 겉으로 보면 예수, 평범한 이름이에요. 하지만 속에는 평범하지 않아요, 임마누엘.

하나님이 감히 죄인의 자리에 들어온다는 이것은 인간으론 상상도 못했어요. 거룩한 분은 거룩한 분의 동네에 살아야지 더러운 곳에 올 이유가 없잖아요. 율법에 보면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과 접촉하면 같이 부정 탄다는 내용이 구약에 줄곧 이어집니다. 그래서 구약의 모든 제사들은 부정 탄 것을 어떻게 제거하느냐에 집중돼있어요. 계속해서 구별돼야 되기 때문에 차별화돼야 하거든요. 그걸 두 자로 거룩이라 합니다.

너는 기존의 인간과 달라. 차별화돼야 돼. 기존의 인간들이 좋다는 것은 좋은 게 아니고 나쁘다고 하는 것도 나쁜 것이 아니야. 성도는 주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면 좋은 것이고 주의 모습이 아니라 악마의 모습이 나오면 그건 나쁜 것이고. 항상 주님 쪽에서 생각해야 되지요.

그래서 성도가 보여주는 선과 악이란 것은 다윗 없는 다윗이니까 다윗이 등장하게 되면 악한 일이 되고 다윗 없는 다윗이 등장하게 되면 좋은 일이 돼요. 다윗이 등장하면 나쁜 일이고 다윗의 후손이 등장하면 좋은 일이 되는 겁니다. 후손이 다윗이란 죄인, 다윗이 죄인이라는 것이 사도행전 2장 베드로 설교에 나옵니다.

다윗은 죽었지만 무덤에 그대로 있잖아, 라고 이야기해요. 죽을 만해서 죽었다는 거예요. 죽는 것이 당연했고 합당했고 마땅했다는 겁니다. 죽음 외에 다른 대가를 기대해서는 안 되는 존재로 너는 태어났다는 거예요. 그에 비해서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이라는 거예요.

사도들이 설교할 때 어떻게 설교했는지 생각해보세요. 사도의 설교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 이야기뿐이에요. 교회부흥 이야기 없습니다. 바른 가정, 행복한 가정 그런 내용이 없어요. 어떻게 취직하고 어떻게 결혼하느냐 그런 내용은 사도의 설교에 없습니다. 오늘날 목사의 설교에도 그게 포함되면 안 돼요. 광고시간에나 하지만 설교시간에는 그런 게 있을 수 없어요.

이미 죽은 인간 보고 죽었다고 여기고 주께서 일하시는 데 우리는 안 죽었다고 버티고 있으니까 이걸 때려죽여야 되는 거예요. 그냥 신체 죽는 거야 늙으면 죽겠지만 살아 있는 우리 마음을 쓸모없는 자로 만들어내시는 작업을 성령께서 계속 해내시는 겁니다.

그러면 가만히 도서관에서 공부하면 됩니까? 아니지요. 계속 가정에 우환, 환란, 건강의 문제 등으로 주변에서 벌처럼 쏘아대는 거예요. 어떤 예상 밖의 사태가 일어나는 거예요. 깜짝깜짝 놀라고 경기 나게 만들지요. 그럴 때마다 우리는 이럴 순 없습니다. 주여 왜 저를 이렇게, 온갖 것 해대면서 이렇게 나오시면 정말 주님 못 믿습니다. 협박 공갈 나오고.

그러면 주님이 하는 말이, 그 정도로 네가 의롭다고 우기니까 문제잖아. 의롭지 않은데 의로우니까 나만 존재해야 된다는 자격을 자꾸 자기한테 강변하는 겁니다. 변호사가 왜 필요합니까? 세상 변호사는 이 피고는 그다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그것 변호하기 위해 있잖아요. 그런데 성령의 변호는 뭐냐 하면, 이놈은 죽어야 마땅합니다, 주여. 이렇게 변호하는 거예요.

우리 내부에서 계속 육적인 생각, 인간적인 생각, 악마적인 생각이 나오는 겁니다. 그게 나와 줘야 경계선 되는 십자가만을 드러내는 거예요. 우릴 구원하려고 주께서 오신 게 아닙니다. 이건 내가 수천 번 이야기해도 모자란데.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게 아니고 구원이 안 되는데 어떻게 구원이 되었어, 라는 그 경계선에 개입했던 주님이 하신 공로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거예요. 그걸 주의 증인 된다는 겁니다.

처음에 십자가마을 만들어놓고 갈라질 때 싸움이 그 싸움이었어요. 전에 십자가는 뭐냐? 하나님이 우릴 구원하려 왔다는 거예요. 왜? 그게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우리의 사적 구원은 그것도 욕심이다. 그게 아니고 예수님이 누군지 증거 하기 위함이다. 그게 십자가마을 갈라질 때 주장이 너무 대조적으로 달랐어요.

주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수적으로 건지는 것이다. 그게 주의 증인 되는 것이다. 만약에 내 구원받기 위해 오게 되면 이건 주의 증인이 아니고 나의 증인 되거든요. 나 사랑받을 만해서 사랑받았다고 우긴다 말이죠.

백날해도 성령을 안 받으니 알 수가 없어요. 그렇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왔다는 그게 뭐냐? 개혁주의신학이에요. 앞에 하나 더 붙였네. 정통개혁주의신학이라고. 인간을 구원한다는 거예요. 인간 구원하려면 아예 내좇지를 말든지.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아예 선악과를 확 뽑든지. 미안하다. 내가 위험한 물건을 갖다놨구나, 하고 아예 심지를 말든지.

이미 심어놓은 게 꼴 보기 싫은 형상이 아니에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까지 해요. 나무가 아름답단 말이죠. 나무가 아름다우면 우리가 아름다움을 모르는 그야말로 미에 대해서 치매 현상을 일으키고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만들든지 그게 아니고 너무 끌리게 만들고 따먹었다고 닦달내고. 이게 무슨 짓이에요.

전기 철조망을 쳐놓든지 접근하면 발포한다고 표지라도 붙여놓든지. 그것도 안 보이는 저 구석이 아니라 동산 한 가운데 집어놓고요. 너희는 따먹게 될 거야, 하는 이야기밖에 안 되잖아요. 기어이 따먹게 될 거야. 너희는 죽게 될 거야. 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너는 죽어야 돼. 그 이야기 아닙니까.

그래서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간다. 거기서 인간이 어딜 끼어듭니까? 인간이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주님이 눈에 안 보이지만 살아 있는 이유가 바로 성도를 통해서 자기가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근원적으로 죄인인 것을 안다는 것은 이미 성도가 언약의 운반체로서 새롭게 새 사람 됐다는 것이 결과물로 나와 있잖아요. 인간의 지혜로서는 그런 고백이 나올 수가 없어요.

별짓도 안 했는데 파출소 서너 번밖에 안 갔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근원적으로 죄인이라는 거예요. 부모가 나를 죄에서 태어나게 했다. 이게 자기를 의인으로 보는 게 아니에요. 죄인으로 본단 말이죠. 더 살 자격도 없고 뭔가 요구할 거리도 없고 기도할 입장도 안 된다는 것, 용서받을 쨉도 못 된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한다는 것이 놀라운 피조물이거든요.

누가 그렇게 손질한 거예요? 주님이 손질하신 거예요. 욥은 자기를 멀쩡하다고 여겼어요. 멀쩡한 욥이 자식 열 명 다 죽이고 재산 다 날아갔습니다. 욥은 자식 열 명과 재산 있는 걸 멀쩡하게 본 거예요. 한 번도 욥은 멀쩡한 자기 모습을 찾은 적이 없어요. 극렬하게 반박합니다. 멀쩡한 나를 왜 이렇게 만들어놨습니까?

나중에 주님의 해답은 뭐냐? 황무지에 비 오는 이유를 아느냐는 식으로 황무지도 내가 사용하는데 똑같이 내가 너를 좀 사용했다고 해서 사용당한 자가 그렇게 길길이 뛰면 되냐? 이게 해답이에요. 고난주겠다면 고난 받으면 되지 왜 저에게 고난 옵니까? 다른 사람 나쁜 사람한테 가지 않고. 왜 그런 생각하느냐 말이죠. 너니까 가는 거야. 너니까 고난 가는 거예요.

이 모습을 베드로전서에선 욥 안에 누가 들어있다? 주님의 영이 들어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아버지에 의해서 쓰일 대로 빡빡 다 쓰인 거예요. 심지어 죽기까지 다 쓰인 거예요. 주께 호소해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저를 버리지 마옵소서, 에 대한 주님의 응답은 침묵이었고 응답을 거부했습니다. 건지지 않았어요. 그냥 버렸어요.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 지나가게 해달라는 건 뭔 뜻이에요? 죽는 척은 하겠지만 아예 죽이지는 마옵소서. 그런 뜻이거든요. 그 기도에 대해서 응답되지 않음이 기도의 응답이었어요. 그게 겟세마네 기도의 마지막 응답은 응답이 없구나. 그게 기도입니다. 그러면 포기하지요. 내 뜻은 철회하시고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인간의 힘으로 갈 수 없는 곳까지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가야 될 곳을 인간이 가지 않아요. 자기가 가야 될 본래의 자리에 인간은 갈 수도 없고 가지도 못하고 악마가 그걸 말려서 가지도 않아요. 그런데 주님 혼자 인간이 아무도 모르는 본래의 자리에 가셨으니 그게 빌립보서 2장 8절에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19.♡.174.49) 19-04-10 10:35 
20190408b 부산강의 : [시편]18(11편)-다윗 없는 다윗
(강의:이근호 목사)


신자란 자기보다 하나님이 더 센 사람이라 했지요. 하나님이 더 세단 말은 하나님이 오실 그냥 오신 게 아니라 우르르 자기 영역으로 밀어붙이지요. 첫째 시간에 했잖아요. 밀어붙인다고요. 밀어붙이는 내용이 11편에 나옵니다.

우선 근원이 뭐냐 하면 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구약 시대기 때문에 그래요. 하늘에 근원을 두고 계속 땅으로 밀어붙이는 거예요. 밀어붙일 때 6절에 보세요.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치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하나님께서 차단시킬 때 불붙는 천사로 차단시킨다 했잖아요. 시내 산에서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마지막 때 이 지구가 소돔과 고모라처럼 유황불 떨어지는 것도 마찬가지고. 하나님이 갖고 있던 인간의 차단성을 끝까지 밀어붙이는데 다윗 시대기 때문에 다윗의 활동을 통해서 다윗 없는 다윗이니까 눈에 보이는 건 다윗이 활동해요.

하지만 다윗 속에 다윗의 자손이 오시면서 파생되는 파급되는 현상은 언약을 모르면 파멸이 돼요. 언약을 모르게 되면 지옥 불 들어가요. 이 내용을 다윗 시대에 다윗의 활동을 통해서 계속해서 그걸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당시 다윗 시대 사람들은 누구만 보입니까? 달랑 다윗만 보이고. 다윗과 같이 다니는 사람은 400명? 500명? 그것도 많다 만은 그 당시 기득권 사울 왕보다는 적잖아요. 그리고 계속 쫓겨 다니는 겁니다.

쫓겨 다니는 지명들이 있지요. 그 지명들이 지금 이스라엘 가도 찾는 사람들이 얼마 안 돼요. 하도 작고 숨어있어서. 예루살렘이나 베들레헴이나 많이 가지 다윗이 쫓겨 다닌 곳은 많이 안 가거든요. 사해 근처 엔게디란 곳에 사울 왕에 쫓겨 숨었던 동굴이 있어요. 예쁜 폭포가 있어서 거기까진 올라가봤어요.

남들 보기엔 소수의 정치적인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정치적으로 쫓겨나는 식으로 밖에 안 보이는 거예요. 예수님이 왜 죽었습니까? 사고사입니까? 그냥 에피소드에요. 그 당시에 까불다가 대들다가 바리새인이란 기득권에 눌려서 정치적으로 죽었다. 끝. 그렇다면 그거는 사울이란 사람이 등장할 이유도 없고. 500명의 제자들에게도 아무 감각이 없겠지요. 왜냐하면 부활했기 때문에 열두 제자가 사도가 됐잖아요. 열한 제자에 나중에 하나가 포함되지만.

사도가 된다는 말은 본인이 주님한테 미안해서 사도가 된 게 아니에요. 베드로가 미안해서사도가 된 게 아닙니다. 주님이 왔어요. 인간적인 형태로 계시던 주님이 아예 다른 형태로 살아 있는 채로 덮쳤어요. 질그릇 같은 베드로에게 성령이 임한 거예요. 성령이 임하니까 그전까지는 내가 살고자 자기 자신을 증거 하다가 예수님을 증거 한 거예요. 사도행전 1장 8절에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제가 강의 처음에 성도를 뭐라 했습니까? 부르심을 받은 자죠. 부르심을 받은 자에겐 자기 계획이 없어요. 계획은 저분이 생각할 문제지 내가 따로 계획을 만들 필요 없어요. 따라서 성도한테는 뭐가 없느냐 하면, 기도 없고 전도 없고 헌금 없고 선교 없어요. 사도행전 강의할 때 선교 없다는 말했지요. 이런 것은 인간들이 지어낸 거예요. 교회 없고.

왜냐하면 없어도 괜찮기 때문에 그래요. 없는 자의 여유로움이에요. 아무것도 안 하는 자의 여유로움. 왜냐하면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찾아온 그분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그분이 살아계시면 무슨 조치가 있겠지요. 그분 그냥 사신 게 아니고 무슨 일을 하잖아요.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식으로 주님 일하니까 우리는 그냥 일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해운대 해변을 거니는 일, 골프 치는 일, 설탕 없는 단팥빵 먹는 일. 그냥 일할 수밖에 없는 모든 게 주의 일이에요. 잠자는 것, 새벽 세 시에 깨어나는 것도 모든 것이 주의 일일 수밖에 없어요. 이게 내 계획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증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따라서 예수 믿지 않는 사람에게 유황불 떨어진다. 이걸 누굴 설득하거나 그 사람을 꼬실 용도로 하면 안 돼요. 그건 내 계획이 돼버려요. 그건 내가 없는 나, 주님이 계시면 주님의 계획이 나를 통해서 그냥 목격자 노릇을 하래요. 사도의 원 뜻은 목격자란 뜻입니다.

요한복음 마지막에 보면 사도란 말은 뭐냐 하면, 본대로 나타난 사람, 아는 대로 말하는 사람이지 자기 계획은 일체 주님이 용납 안 해요. 제가 주님 위해서 선교센터 만듭니까? 쓸데없는 짓하지 말라 해요. 교회란 모이는 장소가 아니고 그냥 흐름이에요. 전류가 흐르고 저항이 있으면 흩어지게 돼있고 흩어지면 다시 또 산불 나듯이 모이게 돼있고. 그리고 그렇게 되길 원할 필요도 없어요. 내일까지 살지도 모르는데 뭘 내일 일을 걱정해요.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가려면 그것도 주의 일이고요 한 시 오십 분에 데리러 가는 거도 주의 일이고요. 모든 것은 내 일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그러다 감기 걸리면 걸리는 거고요. 그러나 세상이 저항 없이 흘러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순간순간 그 흐름보다 내가 가로막아요. 주의 일 이래 하시면 안 됩니다. 이러면 일 안 됩니다. 제가 한 수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주님보다 자기가 더 세. 그럼 주께서 너 맞을래, 이렇게 나오지요.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참 시편 11편을 보면 어려워요. 다윗이 여호와께 피했지요. 다윗이 보여준 증거는 뭐냐 하면, 나를 공격한 것은 나를 공격한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본부를 공격한 것이다. 이 인간들아, 라는 것을 증거 하는 거예요. 얼핏 들으면 광신자 같은 고백이 나오지요.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이 어찜인고” 이 겁쟁이야 내빼라고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거예요. 난 여호와께 했는데. 그럼 여호와께서 준비된 게 뭐냐 하면, 6절에 보면 불과 유황이에요. 그러니까 다윗은 너희들의 모르는 걸 내가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뭘 하면서? 쫓겨 다니면서.

그럼 쫓겨 다니는 것이 누구 일이다? 주께서 다윗을 구원하는 일이죠. 다윗도 그들과 똑같아요. 몰랐어요. 몰랐는데 갑자기 동지가 적으로 변해서 공격하고 나는 본성상 도망쳤는데 나중에 보니까 도망친 게 아니고 여호와의 품에 안기는 과정이었다는 말이죠. 흐름이었어요. 쫓겨 가면서 하는 말이 뭐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럼 쫓겨 가기 전에는 누가 목자다? 아는 친척들이 목자지요. 그러나 홀로 되고 보니까 여호와가 목자가 되고 말았어요. 그리고 나로 하여금 선한 길로 인도하는데 이건 내가 요구한 게 아니고 이미 준비된 거예요. 주께서는 모든 걸 다 갖춰놓고 그리고 몰아넣은 거예요. 마치 새를 새장 안에 몰아넣듯이 마귀를 통해서 나를 몰아넣은 겁니다.

마귀가 없으면 일이 안 돼요. 고마워해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단이 없으면 복음이 전파되지 않아요. 교인 중에 이단 교인이 있어야 목사가 복음을 전파해요. 제가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어떤 교회가 복음으로 싸움이 벌어졌어요. 언약을 이야기하니까 기존 교회 목회자가 언약은 성경의 주제 중에 하나일 뿐이지 전부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쫓겨난 목사가 그러면 심판의 기준이 뭡니까? 심판의 기준은 새 언약뿐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너무 과격하다고 된 거예요. 교회가 우선이에요. 그들에게는.

그래서 쫓겨나서 목회를 시작했거든요. 교인도 몇 명 안 되고. 제가 예언했어요. 처음에 나오면 씹어댄다고 설교거리가 많아요.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 쫓겨난 거리도 씹을 것도 별로 없어요. 없을 때 긴 설교시간을 뭐로 때울 것이냐? 이건 자기 싸움이거든요. 쫓겨났다. 그래서 나는 의인이다. 우겼던 그것이 나의 자만이고 교만인 것으로 내가 나와 싸워야 된다는 사실을 그 싸움이 설교로 나와야 되는 거예요.

우리 교회 참 좋다. 이게 목사의 교만으로, 우리 교회 같이 다정스럽고 매 주일이 기다려지는 교회 봤냐. 이게 하나의 새로운 자만으로 안심으로, 천국 갈 생각하지 않고 주일에 교회 올 생각만 하는. 이런 싸울 거리를 매일같이 순간순간 주께서 설교자에게 줍니다. 설교자에게만 주면 안 되잖아요. 교인들에게도 줘요. 그래서 아멘 하는 겁니다. 네가 까인 것과 내가 까인 것이 질적으로 동일하냐 말이죠.

다윗의 모든 시들은 자기를 미워할 때 미워할 건더기를 모르겠어요. 다윗은 이유를 모르겠어요. 왜 미워하는지. 자기가 골리앗을 이겼잖아요. 혜택 입었잖아요. 그러면 누굴 해야 돼요? 백성들이 분명히 칭찬했다고요.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입으로만? 만만하면 뭐합니까? 최고 정부 공격할 때 촛불집회하든지 도와줘야 될 텐데 만만이라 해놓고 막상 권력자가 까불지 마, 하니까 갑자기 가만있는 거예요.

의롭고 정의로운 것은 값을 못하고 쫓겨나는 신세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릴리 나사렛 지방에서 병고치고 할 때 무려 남자만 오천 명입니까? 이걸 정치화시키면 정권 바뀔만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남쪽 유다정권에서 걱정을 했어요. 예수 패가 너무 많다. 이러다 정권 유지 못한다. 족보를 따져보니까 갈릴리 출신이란다. 강원도 촌놈이 어디서 까부나.

우리는 정통 사독 계통이라 하는데 막상 예수님이 체포되니까 전부 다 도망가고 심지어 가장 근접해서 선거대책위원장부터 해서 직원들, 열두 제자 전부 다 정권 잡으면 하늘나라 한 자리하겠다고 하던 그 사람들, 자신이 밀어주던 대권주자가 맥없이 체포되니까 비겁하게 다 도망쳤잖아요.

그걸 알고 주께서 하신 말이 있어요. 가장 나쁜 죄는 바로 배신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친구는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친구는 서로가 친구가 돼야 되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친구로 보지 못했는데 예수님을 배신한 친구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는 이야기를 미리 하고 친구 될 자격 없는 너희들에게 내가 친히 친구가 되어주마. 이 이야기가 요한복음에 나옵니다.

그 사태가 얼마나 긴박하게 돌아가는지. 왜 긴박할까요? 세상 권력이 무시 못 할 권력이라는 것을 몸 속 깊이 느끼는 긴박함. 모든 걸 버리고 예수님 따라다녔을 때 자기는 그야말로 예수님과 한 마음인 줄 알았지요. 한 마음 같은 소리하고 있네. 우리는 평생 예수 믿어도 주님과 한 마음 아닙니다.

주님께서 끝까지 친구가 되시고 사랑을 해주시고 끝까지 우리의 죄를 사해주는 대사로 구원받는 거예요. 내가 주님과 친하게 지낸다고 그 공로로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여차하면 튈 준비 다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잘 아셔야 돼요. 우리 마음이나 악마의 마음이나 한 통속이거든요. 손해되는 짓을 안 하겠다는 겁니다. 내 미래가 확실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첫째 시간에 자기 복과 싸우지 아니하면 못 싸우면 그건 신앙이 아니다. 나의 잘 되는 것과 싸워야 돼요. 내가 잘 될 이유가 없어요. 아니 내가 잘 된다는 자체가 욕심입니다. 마귀가 준 심보에요. 그 심보와 싸워야 돼요. 절대로 나는 잘 되선 안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못 됐다, 실패했다는 것도 약간 건방진 말이에요. 왜냐하면 원래 실패해야 되고 원래 잘 되는 게 이상스러워야 돼요.

이 땅이 지옥이거든요. 숨만 쉬는 것도 호사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지옥은 건짐 받아야 될 대상이거든요. 지옥은 거기서 빠져나와야 될 환경이거든요. 떠나야 될 곳에서 왜 성공하려고 합니까? 영웅담. 이 영웅담에 조심해야 됩니다. 우리한테 이런 게 있어요. 영웅담을 마이스토리입니다. 어떤 일들로 구슬 꿰는 거예요. 옛날에 이런 역경과 고난이 있었고 시험이 왔지만 난 그걸 이겨내고 이겨냈다. 영웅담이에요. 자기를 영웅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윗을 영웅이 아니고 뭐로 만드느냐? 파편, 조각조각 내버려요. 난도질 쳐버려요. 두 개가 뭉쳐서 자아 되지 않도록 자아 되면 또 잘라내고 또 잘라내고. 순간순간 사건이 되는 거예요. 사건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내가 있는 겁니다. 사건화 된 나, 그렇게 만들어요. 그게 파편이에요.

이 세상은 왜 구성되고 유지되느냐 하면, 지옥이라는 조건 하에 계속 유지되는 겁니다. 지옥이 지옥답게 되는 조건 하에 세상은 계속 이어져나가는 거예요. 지옥이란 게 뭐냐? 그것은 우리가 몰라요. 지옥에 있는 사람은 지옥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서 누가 억울하게 쫓겨 다니면서 하나님 품으로 안긴 사람이 등장하거든 이 땅은 지옥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거기서 한 패 먹었다는 사실도 자인해주셔야 돼요.

로마서 7장의 예를 들면 쉬운데요. 하나님의 율법에 탐내지 말라는 게 들어와요. 탐내지 말라는 순간 우리는 갑자기 탐내지 말아야 될 편에 서는 게 아니고 처음부터 우리는 탐낼 수밖에 없는 인간, 탐내지 말라와 반대편에 서서 살아가는 사람인 것이 발각 당하게 돼요. 율법을 준 것은 소속을 분명히 하게 하기 위함이에요. 지키고?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어제 오후설교에도 언급했는데 율법은 전체로 다가온다. 율법은 부분으로 다가오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면 넓은 저택이 있는데 하도 사람들이 사유지에 접근하니까 소리 나는 방울을 울타리에 달아놨다고 칩시다. 집 주인이 방울 소리를 다 듣는 연결매체가 있다고 한다면 한 곳을 건드리면 전체가 다 울리는 장치란 말이죠.

율법 하나를 건드리면 율법 전체를 다 건드린 소리 나게 돼있어요. 야고보서 2장 10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율법 하나를 건드리면 모든 것을 어긴 것이 돼요. 방금 어긴 것이라 했지요. 율법을 왜 줬느냐? 네가 어길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새롭게 파악하라고 율법을 준 거예요. 율법은 나중에 온 겁니다. 430년 후에. 아브라함 언약 이후에.

왜 언약이 있는데도 율법이 주어졌느냐? 언약을 주면 그걸 지키려고 한단 말이죠. 우리가 예수 믿어서 구원 못 받아요. 예수 믿는 것이 불가능하고 예수 믿는 것을 위반함으로써 우리는 구원받는 겁니다. 내 믿음으로 구원이 안 되는 걸 알 때 그걸 믿음이라 해요. 나를 가미해서 내가 실패자란 요건 하에 주어지는 것이 믿음이에요.

주님의 믿음이 십자가로 오는 이유가, 너는 애초부터 믿음이고 소망이고 사랑이고 너를 구원할 수 있는 자질은 네 속에 없었다가 통째로 택배로 다가오는 것이 십자가로 다가오는 겁니다. 부활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로 다가오는 거예요. 십자가가 복음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택배니까 우리가 주문한 것도 아니에요. 0xx 눌러서 한 것도 아니에요. 급하다고 매진되겠구나, 하고 빨리하자 이런 것도 없어. 그냥 택배가 온 거예요. 이건 신나는 일입니다. 감사할 일이고 고마운 일이에요. 어느 순간에? 내가 죄인인 걸 아는 순간에. 그것만큼 기쁜 순간이 없습니다. 성령이 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내가 죄인인 걸 알겠어요.

자기변명과 자기 잘남을 끝까지 해서 자기가 역경을 이긴 모험담을 영웅화시키는 겁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에 실패했다고 보상을 기대하지 마세요. 그건 비겁한 짓입니다. 왜 세상은 날 위해 존재해야 됩니까? 이 세상은 날 위한 구조가 아니에요. 이 세상은 지옥 위해서 있는 구조기 때문에 세상 편들고 같이 지옥 가든지 지옥 가면 마귀가 여러분 편들어줄 겁니다.

그러나 끄집어낸다면 세상과 대척관계에 있어야 돼요. 세상과 싸워야 돼요. 세상과 싸운다 하면 누구와 싸우느냐? 그러면 문재인 정권과 싸워야 되느냐? 김정은과 싸워야 되느냐? 아닙니다. 본인과 싸워야 돼요. 잘난 척하는 아니지. 잘났지. 나와 싸워야 되지요. 잘난 나와 싸우려면 잘난 나는 나부터 시작하는 게 주특기고 못난 나는 주님부터 시작하는 게 주특기고.

그 부딪침의 현장이 오늘 시편 11편입니다. 11편의 내용이 내 안에 들어옵니다.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이제 본문에 본격적으로 들어갑니다. 다윗은 여호와께 피했지요. 우리는 누구한테 피하지요? 청와대 하는 사람한테 피하지요. 아이 아프면 병원에 어디 아는 의사 없나 하지요. 우리는 항상 힘을 원합니다. 내 친구는 집안 빵빵한데 우리 집은, 우리 엄마 아빠는 아는 사람도 없고, 뭐. 내 인생은 왜 이리 꼬라박았느냐? 이런 식으로. 이래선 내 미래가 암담하구나. 난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지? 걱정하지요.

우리는 어디로 피하느냐 하면, 지옥 속으로 피하지요. 나를 인간답게 내 능력을 좀 써줬으면 좋겠다. 나도 사람처럼 살고 싶어요. 지옥은 대환영입니다. 세상에서는 의사라든지 병원, 이런 걸 환영해요. 어디 임대 나오면 밑에 안경점, 병원 대환영이라고 돼있지요. 은행대출이 많이 나오니까. 의사한테는 무조건 대출해주니까요. 임대 수입이 안 끊어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세상 사람이 되면 될수록 우리는 이 세상에 딱 적합한 사람으로 변신될 겁니다. 절대로 여호와께 피하는 게 아니고 우리는 세상 사람으로 피하는 겁니다. 젊을 때 성가대 하고 앞자리에 주일학교 교사에 청년회 하고. 둘 중에 하나에요. 취직하고 결혼해줄 것이라는 조건으로 그렇게 열심히 할 수 있고 또 하나는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있을 경우에는 죽도록 충성합니다. 무슨 면류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죽도록 충성하게 돼요.

그런데 결혼했다, 취직했다 하면 교회고 뭐고 빠이빠이입니다. 끝났어요. 왜냐하면 세상이 그 사람을 그냥 두지 않거든요. 철저하게 세상 사람으로 변신합니다. 여호와께 절대로 피하지 못하도록. 이거는 열두 제자도 마찬가지고 다윗 당시에 사울 백성들도 마찬가지고. 다윗은 만만이라고 말은 했지만 까불지 마, 하니까 전부 다 들어가 버리잖아요.

2절에 봅시다. “악이니 활을 당기고 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이게 진짜 어려워요. 왜냐하면 복음을 알고 회사 취직을 했는데 신입이면 일을 배워야 돼요. 특히 대리나 약간 고참들이 가르쳐주는데 일만 가르쳐주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의 인격, 성격 다 파악이 돼요.

저 신입은 뭐로 다루면 되고 술 좋아하는지 담배 피우는지 내부적으로 다 알게 돼요. 따라서 그 사람의 종교, 집안, 그 사람의 친인척 가운데 뭔가 빵빵한 게 있느냐? 저 신입이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살고 자기 아버지 직업이 뭐냐? 만약 아버지 직업이 여유 있으면 신입은 신입이 아니에요. 완전히 어른 대접한다고요. 왜? 잘 보이면 퇴직해서 이용할 수도 있으니까.

사람이 다 얻는 게 있으니까 주는 거예요. 호의를 베풀지 말라고 제가 했잖아요. 호의를 베풀면 베푼 기대만큼 안 나오면 사람이 보복에 나서게 돼있어요. 부부사이에 너무 많이 해주지 마세요. 하라 해도 안 하겠지만. 나중에 내가 해준 만큼 내게 안 돌아오면 보복이 들어옵니다. 인간은 손해 보는 장사를 안 하거든요. 철저히 이기주의잖아요.

그런데 다윗한테는 희한해요. 다윗은 아무것도 없는데 자꾸 공격한다고요. 이것은 다윗 없는 다윗을 향하여 공격하는 거예요. 다윗은 그냥 그 전쟁에 말려든 거예요. 영적 전쟁에 육으로 말려든 겁니다. 자기를 향한 공격이 자기를 공격하는 게 아니고 자기 안에 수상한 다른 분, 미래의 인물이죠. 미래의 인물이 현재에 오다보니까 정체가 드러날 악마가 미래의 전쟁을 앞당겨서 현재에 실시되고 있는 겁니다. 성도가 꼭 이런 신세에요.

회사 취직했는데 교회 다닌다. 교회 다니면 술 담배 안 한다고 좋아하겠지요. 그런데 갑자기 어느 장소에서 이게 복음이고 성경이야기하니까 신천지 아닌가, 이렇게 시작해서 그냥 교회가 아니고 이상한 교회가 되면 되도 않은 간교한 핍박과 놀림과 조롱이 막 들어오지요. 그럴 때 누가 억울하냐 하면, 괜히 성령 받은 사람이 억울하지요.

3절에 보면,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갑자기 여기서 다윗은 자기를 의인으로 보지요. 착한 일 한 게 아니고 핍박받는 일만 한 걸로 의인이래. 왜? 이게 의와 죄는 관계망에서 나오기 때문에. 의와 죄가 관계망에서 나온다는 말을 이래서는 잘 이해가 안 될 테니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면 예수님에서 율법이 나오거든요. 예수님이 믿음의 대상이니까. 율법은 파이프에요. 율법이 오게 되면 뭘 한다? 지적하지요. 죄를 알지요. 의인이 죄인으로 변해놓고 율법 완성을 통해서 죄인입니다, 죄인입니다. 주님만이 의인입니다. 그럼 이 관계가 이 파이프가 의에서 나왔기 때문에 죄인이 의인 돼버려요. 죄인이라고 느낀 자체가 의가 도달했기 때문에 비로소 아는 인식이에요. 그것 없으면 자기가 죄인인 걸 몰라요.

여러분들이 아무 예술가나 유명 예술가라든지 작가들 문학가나 철학자들 과학자들 만나보세요. 자기가 죄인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없어요. 없지요. 그러니까 바보 등신인 거예요. 자기 자신도 모르는 거예요. 불경공부하고 성경공부 다 했는데 미국유학하려면 성경 봐야 되지요. 인문학 계통에 가려면. 성경에서 다 나왔기 때문에. 전통적인 인문학이 성경의 해석이거든요.

칸트라든지 헤겔이라든지 괴테라든지 성경해석입니다. 모든 작품에 성경내용이 다 들어가 있어요. 불의한 청지기 다 들어있다고. 신학도 마찬가지에요. 신학도 철학이거든요. 신학이란 이름의 철학을 배우고 하는 말이 뭐냐 하면, 나는 신학 했기 때문에 이건 죄가 아니라고 우겨요. 신학 자체가 나는 구원 못 받았다는 티를 내는 것밖에 안 돼요.

신학뿐만 아닙니다. 목회해도 마찬가지에요. 목회를 한 그것이 내가 죄인이라고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성령 받았으면 목회를 하면 할수록 죄인이 아니고 주를 위해서 열심히 희생했다고 돼버려요. 그러니까 그 밑에 있는 교인들도 집단으로, 물론 성령 받았으면 빠지겠지만, 교회 자체가 소규모 지옥이 돼버립니다. 자기 의가 드러나는 교회가 돼버려요.

그래서 그런 교회는 복음이 들어오게 되면 복음으로 이해하지 않고 우리 교회 망치는 걸로 이해해버려요. 왜냐하면 교회 지키는 게 교인들의 급선무기 때문에. 목사는 자기 자존심 때문에 교회 지키고 교인들은 자기가 목돈 냈기 때문에 자기 지분을 갖고 있거든요. 자기가 주주기 때문에 특히 장로들 자기 자존심이 걸린 문제기 때문에 그걸 지킨다고 우리 교회 욕하지 마,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결국 마지막은 뭐냐? 내 교회가 나를 구원한다는 식이 돼버려요. 내 종교단체가. 그게 바로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에 사단 난 게 재현되는 것 아닙니까. 제가 백날 해도 기존교회에 계속 다녀야 될 이유가 거기에 부조를 너무 많이 깔아놨어. 곧 딸 시집가는데 부조를 일단 긁어내고 와야 되는데 그래놓고도 안 나와요. 왜 그러냐 하면, 권사들 노인네 아닙니까. 놀던 가락이 그들과 같이 놀았거든. 그것 없으면 재미가 없어요. 재미난 취미생활하려고 교회 다닌 거예요. 취미단체 만든 겁니다. 목사는 들러리고요.

3절 봅시다. 자꾸 공격하는 거예요.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꾜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다시 말해서 이 지상에서 다윗으로 하여금 머물 곳을 주지 않았어요. 여기 또 제가 이야기할 게 많아요. 시편 11편을 통해서 인간의 본성, 인간이 추구하는 게 뭐냐 하면, 이겁니다. 이 땅에 터 잡기에요. 특히 젊은 사람들 더 심하고요.

잔소리 심해서 독립해야 되는데 독립하려면 원룸이라도 얻어야 되지 않습니까. 서울 강남은 보증금 삼천만 원에 월세 백만 원 줘야 합니다. 돈 어디서 나옵니까? 삼천만 원도 없을뿐더러 백만 원을 어떻게 감당해요. 그래서 경기도로 간다. 동탄 그런데. 가만있는 동탄 또 화내겠다. 멀리 가는 거예요. 멀리 가면 교통비는 어떻게 감당하려고요? 버스 타지. 버스는 비좁은데 만원인데 힘든데요.

어디 가야 되느냐 하면 촌에 빈 집이 많거든요. 촌에 가면 돼요. 그러면 벌이가 안 되는데? 거기 가서 지 혼자 도 닦습니까. 산짐승과 놀 일 있습니까. 그래서 노인네들 자식들 집 사주고 털어주고 나머지 돈으로 경기도 화성이라든지 멀리 뚝 떨어진 데 집 값 싼 데서 텃밭 가꾸면서 연금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이게 하나의 현재 코스입니다. 일본이 그렇게 하거든요.

이 코스도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몸이 아프면 병원 가려하니까 자식 부르는 것도 한두 번이지 병원 있는 데로 가야 돼요. 또 그냥 밥이나 먹고 살면 짐승 같아서 문화생활도 해야 돼. 또 슬슬 사람 모이는 곳을 올라가요. 처음에는 전원주택 싸긴 한데 몇 년을 못 내다보고, 거긴 친구가 없잖아요. 심심하니까 전원주택 있어도 안 가. 안 가고 우르르 동네에 모입니다. 아이고, 삼년, 사년을 못 내다보고 쓸데없이 돈으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게 전부 다 터 잡기, 인간의 본성은 터 잡기입니다. 제일 인간이 견디기 힘든 것은 갈 곳이 없는 거예요. 꼭 최백호 이야기 안 해도 되겠지요.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갈 곳이 없는 거예요. 남자는 터 잡는 것, 여자는 터 잡은 남자 잡는 것. 세퍼트처럼 물었다 하면 끝까지 놓지를 않는 거예요. 내 아파트 줄 때까지 임신을 하든지 뭔가 조치를 해서 무조건 갈라서더라도 일단 내 아파트는 갖고 안 그러면 니 아파트가 내 아파트 되든지. 그러면 인생 역전돼버려요.

성경에 보면 남자는 가정을 다스리라 하잖아요. 요새는 남자가 다스리는 게 아니고 처신해야 되지요. 다스리는 것과 처신이 달라요. 처신은 가만히 아무 소리도 않고 몸 사리는 거예요. 처신을 잘해야 돼요. 안 그러면 이사 갈 때 개와 더불어 딴 데 터 잡는 수가 있어요.

사람이 터 잡을 때는 물리적인 집이지만 나중에 터 잡는 게 뭐냐? 내가 호의를 베풀고 내가 투자를 한 사람이 나를 배신하지 않도록 그냥 바짓가랑이 붙들고 사는 거예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니가 날 위로해야 되지 누가 위로해주느냐, 이런 식으로 하는 겁니다. 마음의 터. 여기 시편에선 터가 하늘에 있습니다. 하늘에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이 있는 다윗은 힘들어요. 다윗이 있다는 것은 터도 잡아야 되지 그런데 하나님 계시는 하늘에 있다 하니까 무슨 고생이냐 말이죠. 남한테 왜 고생시킵니까. 그때 골리앗한테 질걸. 괜히 오지랖 넓게 나대놓고 결과는 지가 감당이 안 되는 겁니다. 본인이 이긴 게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미사일 궤적 따라서 이마 빈틈 찾아서 공격해놓고 모든 영광은 자기가 받고 그땐 신났지요. 하지만 그때로부터 쫓겨 다닐 줄은 상상도 못한 겁니다.

주님이 성령을 줄 때 우리 원대로 준 게 아니고 미사일 쏘듯이 쏴버렸어요. 그때부터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 생활하는 겁니다. 아파트 하나 없다가 아니라 어디 있어도 마음이 떠있어요. 이게 다가 아닌데. 아파트 하나 마련하려고 주께서 십자가 죽은 건 아니잖아요. 이게 다가 아닌데 왜 나는 이 세상에 붕붕 떠야 되는 그런 팔자냐 말이죠.

여성들이 늙으면 화장이 잘 먹고 뜬다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뜨게 되면 이게 시커멓다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안 시커먼데 예민한 사람은 다 아는 모양이라. 뭔가 괴리, 격이 생겨버린 겁니다. 맛있는 것 먹어도 처음엔 맛있어도 그 다음부턴 이게 식상하고 그게 뜨게 되는 거예요.

그럴 때 주께서 주시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우리로 하여금 네가 아직 네 자리를 찾지 않았다. 결국 나그네란 하늘나라에 가는 게 아니라 이 땅에서 먼저 네 자리를 찾아가야 돼요. 죄인의 자리에 내 죽음의 자리에 가야 거기서 부활이 기다리고 있어요. 바로 내가 없어질 나의 빈 무덤, 이것 찾아가는 자리에요. 이것이 다윗이 보여주는 겁니다.

내가 아무데나 죽으면 공원묘지에 가잖아요. 공원묘지에 가면 안 돼요. 내가 죽을 자리, 이건 주께서 주와 만나는 자리에요. 만남의 장소에요. 미팅 장소에요. 내 죽은 자리에 너 죽고 같이 합체되는 겁니다. 진정한 부부에요. 나는 죽고 신부라는 신분세탁이 되고 예수님은 죽으시고 신랑이라는 신분세탁이 돼서 신랑과 신부의 자격으로 언약으로 세팅된 입장에서 만나는 그것, 성령 안에서 그걸 주선하는 거예요.

성령은 우리 소원을 들어주는 게 아니에요. 성령이 탄식소리를 들리게 하는 겁니다. 아이고, 인간아. 주께서 원하는 네 자리로 안 가고 자꾸 엉뚱한 자리로 헤매고 다니지 말라 하는 거예요.

처음에 윤복희나 윤항기가 예수 복음 받아들이고, 복음을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지만, 일체 세상 노래 유행가 부르지 않는다고 했거든요. 요새 윤항기 목사님 유행가 불러서 먹고 삽니다. 이주 신났어요. 행사가 이렇게 많을 줄 몰랐다며 다니고 있어요.

사실은 그래야 돼요. 왜냐하면 내 선에서 경계선을 세상과 결별한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 자리로 안 갔어요. 이거는 세상이 나쁘고 나는 옳다가 돼버려요. 내가 가장 나쁜 인간 못지않게 나쁜 인간이라는 그 자리까지 내려가야 돼요. 그야말로 남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나한테 적용시키라고 한 거예요. 저 인간은 왜 사나 죽어버리지, 라는 비판을 나한테 적용시켜야 돼. 아이고, 나야. 니가 왜 사나 죽어버리지.

가장 참혹한 일이 벌어졌을 때는 그게 참혹하지 않아요. 가장 참혹한 것은 이겁니다. 참혹하고 난 뒤에 기억이 참혹해요. 세월호 물에 빠진 아이들은 그렇게 참혹하지 않아요. 엄마, 살려줘. 하고 물에 빠졌지요. 그러나 정작 아픈 사람은 세월호에 지 자식 죽이고 3억, 4억 들여서 대학 갈 때까지 키웠던 돈 투자했던 부모 마음속에 자식뿐이었는데 그 자식이 현실적으론 없는데 있다고 우기니까 그 괴리현상으로 오는 트라우마, 그게 괴로운 겁니다.

기억이 괴로운 거예요. 망상이 괴로운 거예요. 노란 리본 달아도 위로 안 됩니다. 4.5억 받고 5억 받아도 위로 안 되거든요. 중요한 것은 그걸 사회가 무시해줘야 돼요. 세월호는 이제 무시하는 게 그 사람을 살리는 겁니다. 맨날 기억해. 그날만 되면. 노란 꽃 달고.

효심이 아버지 호스를 못 빼게 만들잖아요. 아버진 죽을 지경이라 아파서. 그런데 자식들이 못 빼게 만들어요. 마지막 순간에 없는 효심 다 동원한다고. 자기 의만 챙기고 남은 생각 못하는 거예요.

우리의 자리는 내가 나쁘다고 여기는 순간까진 아직 내 자리 안 찾은 거예요. 어떤 인간보다 죄인 중에 고수라는 그때까지는 우리에게 주어진 빵 하나 호흡 하나 감사할 줄 몰라요. 이건 기본인줄 알아요. 이거는 당연한 거고, 이런 식으로. 아직까지 자기 자리 찾아간 게 아니에요. 주에 의해서 내가 이 정도까지 악랄하구나. 이 정도로 내가 악한 남자고 여자구나.

일단은 거기까지 갑시다. 고 정도 괜찮아요. 보너스 받은 거예요. 그런데 이 정도 악합니다, 하면 좀 더 기다려봐. 준비해놓은 게 있어요. 가장 악한 가룟 유다까지 가는 거예요. 내가 예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거예요. 가짜 예수 말고 진짜 예수를 내가 싫어한바 되는 거예요.

그럴 때 십자가의 강도가 구원받은 것은 기적이지 지가 예수님에 대해서 분석해서 그래서 믿어서 구원받은 게 아니고 그냥 일방적인 극악한 인간에게 배신자에게 일방적으로 구원한 거예요. 가룟 유다는 왜 구원 못 받았는가? 일방적으로 구원 안 해줬기 때문에 구원 못 받은 거예요.

오직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받으니까 이 사실이 실감날 때까지는 우리는 계속해서 이 땅을 헤매고 다녀야 되지요. 지 잘난 맛에.

4절 봅시다.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통촉하고 감찰하기 때문에 다윗으로 하여금 고생, 고생시키는 거예요. 감찰하기 때문에 고생이 없는 게 아니고 감찰하시기 때문에 고생을 시키는 겁니다. 니 자리 찾아가라고.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 비로소 여기 악인이 등장해요. 악인은 내가 정하는 악인은 악인도 아니에요. 그건 선악원리에서 쓰는 것이고 나한테 해코지 한다고 악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적이 악인이에요. 그러니까 그 악인 중에 나도 포함될 수 있어요.

다 같은 악인인데 한쪽은 사랑을 받았고 한쪽은 미움을 받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지 주님만 의인이고 우리는 그 앞에 악인이에요. 구원받은 악인이고 악인을 아는 악인이죠. 세상에 그런 복이 어디 있어요. 지가 악인인 것을 아는 악인이 어디 있어요. 그게 최고 아닙니까.

6절에 봅시다.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치시리니 불과 유황” 불과 유황불, 지옥 불 전부 다 나한테 마땅히 와야 되지요. 그런데 십자가 안에서 그 대가를 치렀다는 거예요. 저한테 물어보지도 않고요. 나와 의논도 안 했어요. 너, 용서해줄까? 의논한 적도 없어요. 일방적으로 다 처리했다고 성령을 통보했을 뿐이에요.

그래서 무슨 일 있나 싶어서 십자가 보니까 이미 처리했어요. 채찍 맞음으로 우리가 졸지에 나음을 입었어요. 나음을 입은 꼬라지가 별 대수롭지 않지만 어쨌든 나음을 입었다는 거예요. 어떤 죄도 죄를 묻지 않겠다는 겁니다. 하늘나라 동사무소에서. 동사무소에 이름이 있네요. 네 시민권은 하늘에 있느니라. 무슨 난리에요.

이거는 교과서에 안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골로새서 3장에 나오는 이야기란 말이죠. 빌립보서 3장 20절에 나온 이야기고. 성경에 보니까 너는 죽었고 네 생명이 금고 안에 있다고 돼있단 말이죠. 그러니 이게 너무 귀해서 남한테 전도하기가 아까워요. 말을 이러면 안 되지만 아까워서 못해요.

그래서 정 마음 가시거든 이 소식을 살짝 귀한 걸 내놓으세요. 개한테 진주 던지지 말고요. 되지도 않은 인간에게 주지 말고. 이건 안 가르쳐주는 건데 너한테만 알려줄게. 이런 식으로 하세요. 그런 식으로 해도 모든 실적은 주님 몫이기 때문에 실적은 기대하지 마시고요.

악인이 등장한다는 것은 바로 내 악인이 아니고 주님의 악인, 주님의 원수, 내 안에 계실 장차오실 다윗으로 오실 분의 악인을 미리 다윗 안에 담았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 7절에,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자, 뭔 뜻인지 아시겠지요. 주님만 의롭고 우리는 항상 주님에 틱틱거리는 철도 없고 앞일도 모르면서 왜 날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맨날 불평불만 원망만 쏟아내는 그런 모습이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만 의롭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다윗과 함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은 성령이 함께 있고요. 성령은 새 언약에서 나오기 때문에.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얼굴은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처럼 그때는 얼굴을 같이 볼 겁니다. 그게 어떤 순간이냐 하면, 내가 죽는 순간이에요. 그래서 주일 낮 설교에서 이랬습니다. 성도의 유일한 취미가 있다면 바로 조금씩, 조금씩 내가 주님 만나는 그 길로 가고 있는 변화를 감지하는 재미, 그게 취미란 말이죠.

오늘도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흔적을 화장이 안 맞고 붕 뜨는 걸 통해서 찾아내는 그 재미, 곧 끝나겠구나, 내 인생. 끝나면 쌈 싸먹어야지. 뭘 아껴. 퍼먹고 즐기는 거지, 뭐. 전도서 말씀처럼 아끼지 말고. 아끼다가 마귀 좋으라고? 놀러갈 때 가고 크루즈 가고 돈 없으면 못 가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에게 죄인이란 감각이 없어서 그동안 우울하게 살았습니다. 이제는 기쁘고 감사하면서 살게 해주시고 날마다 주시는 주의 일에 주의 증거로서 감당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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