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양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유튜브강의

강남강의

기타강의

HOME > 지역강의 > 부산강의
2019-07-08 17:19:21 조회 : 521         
신앙의 증거 190708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E053BSfKLPE"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DLmbceyLKG0"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한윤범(IP:125.♡.150.22) 19-07-10 12:31 
20190708a 부산강의 : [시편]20(13편)-신앙의 증거


시편 13편 할 차례입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나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나이까”

시편 13편을 하고 있지만 우린 시편 1편을 항상 잊지 말아야 돼요.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는 자로다. 내가 왜 존재하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먼저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 내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대로 이 세상에 펼쳐지는 데 있어서 동원된 사람, 그게 복된 사람입니다.

복된 사람은 단독적으로 복되지 않아요. 말씀 완성이 결합된 사람이 복되죠. 혼자서 잘났다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 아닙니다. 말씀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여기서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 아니에요.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말씀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나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나이까” 그 다음에,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를 만나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를 만나게 돼있습니다. 이것은 율법 안의 그 내용이 세상에 펼쳐지게 되면 거기에 하나님의 원수의 등장과 더불어서 하나님과 싸움을 벌이는 내용이 율법 안에 담겨있다는 겁니다.

요구르트 안에 딸기 갖은 것 들어있곤 하잖아요. 그걸 애들 책상에 놔뒀는데 툭 쳐서 요구르트가 쏟아진다면, 표면에선 하얀 요구르트가 덮여있는 것 같았는데 쏟아져서 보니까 딸기도 들어있고, 토마토도 들어있고 안에 내용물들이 나오지요. 툭 쳐서 지나가게 되면 하나님의 원수와 하나님과의 싸움의 내용이 율법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복 있는 사람은 뭐라고 했습니까? 선행된 율법이 있고 율법을 전재하는 데 동원된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죠. 그러면 시편 13편에 나오는 이 사람은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본인이 설치는 것과 상관없이 누구와 이 세상에서 맞닥뜨리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와 맞닥뜨려서 공격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요즘 이런 내용의 이야기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들릴 거예요. 현대인들은 적이냐, 아니냐를 본인이 고르고, 그리고 내 출세 길을 막는 걸 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인생길을 막는 것. 그래서 현대인들은 율법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본인의 절대성과 함께 있습니다.

본인의 절대성이란 말이 어려우면, 이렇게 말을 적으면 쉽습니다. 나는 무엇과 함께 있는가? 나의 나됨과 나의 고유성과 함께 있다는 겁니다. 나의 나됨이란 것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추구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나는 어디까지 나이냐? 어느 정도 재산을 가져야 나답냐? 어느 정도로 행복해야 나다움에 부합되고 충족되느냐? 그게 현대인들이에요.

그래서 나에게 실익이 있다 싶으면 나다움에 만족스러우면 사귀고 그렇지 않으면 아낌없이 내치고. 나의 나다움, 자기 절대성이죠. 자기 절대성입니다. 그러면 현대인들에겐 무엇이 적이냐 하면, 이런 나의 맹목적인 목적에 방해될 때 이걸 적이라 하는 겁니다. 나의 절대성, 나의 나됨, 나의 고유성에 방해될 때 적이죠. 적을 물리칠 때 나오는 멘트가 있어요.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다.” 그러면 가차 없이 내치는 겁니다. 송혜교와 송중기가 뭐 때문에 헤어진 지 모르겠어요. 아마 이것에 때문인 건 확실해요.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 다른 말로 하면, 너는 나의 절대성에 보탬 되라고 너와 살아줬어. 그런데 이제 와서 나의 절대성에 네가 훼손되니까 우리 여기서 갈라서자. 쉽게 말해서 성격차이라고 하는데…

내 성격에 맞을 이 세상은 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고유의 성격 때문에 이미 성격차를 지니고 있어요. 같은 성격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역사가 다르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자기 절대성을 주장하다 무엇을 밀어내느냐 하면, 내가 처한 환경을 밀어내야 곱게 다진 내가 하나의 우상처럼 불상처럼 조각상처럼 우뚝 솟아오르는 겁니다.

루브르박물관에 가면 특히 그리스의 조각상들이 있거든요. 조각들이 인체에 대해서 아주 이상적인 비례로 아름답게 비너스상이라든지 인간상, 신상을 만들어놨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그전에 신에게 품어져 있던 인간에서 신이란 환경을 밀어낸 거예요. 먼지 털어내듯이 신이란 환경을 밀어내게 되면 우뚝 솟아오르는 게 뭐냐 하면, 인간의 아름다움입니다.

인간의 아름다움, 인간의 번뇌, 인간의 슬픔, 인간의 관심사가 신이 아니고 인간에게 집중하던 시대가 그리스 조각들에게 펼쳐져있어요. 신이 아름답다 자연이 아름답다가 아니라 인간 자체가 인간의 인체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렇게 되면 그리스 사람들에게 목적이 생긴 거예요. 무슨 목적입니까? 우리가 극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자.

혼자서 안 되겠지요. 여럿이 모여야 되겠지요. 그게 아고라, 광장. 신은 산 위에 올려 세우고 그 신도 인간에게 도움 되는 신이지만 일단 신을 섬긴다 하고, 신을 섬기는 시간은 있지만 대부분 시간은 아고라라는 광장에서 토론과 협의에 의해서 인간을 절대화시키고 인간의 가치와 지혜를 높여주는 그런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자. 그리고 그것을 민주주의라 하고. 귀족들만의 모임이에요. 일종에 멤버십 할 수 있는. 캠브리지 멤버십 있잖아요.

그들의 멤버십이 민주주의입니다. 그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노예들이 필요하겠지요. 동물 취급하는 노예들이 노동하고 그 위에서 자기들만의 이상 국가를 형성하는 겁니다. 그리스 철학에서 플라톤 같은 사람은 가장 이상적인 사회는 철학하는 사람이 왕이 되는 사회. 철학은 인간 지혜에 극점에 놓여있는 사람, 인간의 지혜가 이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을 마음껏 발휘하는 사람이 국가의 왕이 되는 겁니다.

이게 그리스고 성경에선 헬라, 마케도니아. 그 헬라를 다니엘서에선 아주 간단하게 표현하고 있어요. 짐승. 악마의 모습. 인간이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완전히 깡그리 무시하고 나는 나다, 라고 하는 거예요. 누가 창조했는지 누가 우리를 심판할지 그런 것은 토론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또 인간의 내부에는 인간을 위대하게 치켜세우게 되면 현실, 아까 환경이라 했지요. 현실과 이상이 너무 멀어지잖아요. 그러면 좌절해요. 인생이 무엇인가? 외부의 인간을 찬미하다 다시 자기 내면의 세계를 쳐다보기 시작합니다. 그리스 철학에서는 양극단이 있어요. 그리스 철학이 그렇다는 말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신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인간이 겪는 갈등 같은 것들을 그들이 미리 다 이야기했어요.

산비탈에서 뾰족한 꼭대기에 돌을 얹어놓으면 그 순간 다시 도로 원상태로 내려가고 그러면 또 밀고. 인생이란 목적을 달성하는 순간 허무가 찾아와서 다시 허무의 바닥에서 새로운 목적을 일부러 일구어내고 정해야 되는 거예요. 스케줄을 자기의 욕망에 의해서 계속 짜야 되는 겁니다.

소포클레스라는 그리스 철학자는 비극적인 세상관을 이야기했는데 이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얼마나 인간을 비극적으로 봤는지. “가장 최선의 일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 다음에 안 태어나는 게 최선인데 이왕 태어났으면 차선이 뭐냐? “일단 태어났으면 가능하면 온 곳으로 빨리 돌아가는 것이 차선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나중에 유럽에서 낭만주의라는 문학양식으로 다시 나타납니다. 19세기에 낭만주의는 세상은 너무 더럽고 너무 허망하다. 따라서 내면의 자기 자아의 빛을 그것에 매료하고 자연의 품에 안기자. 루소란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자연으로 돌아가서 그 안에서 세상을 잊어버리고 자연과 더불어 새로운 아름다움에 몰입하자.

자기 내면에 몰입하는 거예요. 우리나라 같으면 지리산에 들어가는 거지요. 산나물 캐고 없으면 없는 데로 살고 그냥 선비처럼 갓 하나 쓰고 글씨나 쓰고. 글씨 배우러 누가 오면 수수료 받고 밥 먹고 사는 사람들. 또 아줌마들 오게 되면 사주팔자 봐주고. 자식이 이번에 좋은 대학 들어가겠어요, 구라 쳐서 돈 받고. 그게 바로 중들이 하는 일에요. 요새 중들이 암자에서 앱 깔아놓고 사주팔자 봐주는 일을 합니다.

제일 좋은 것은 놀고먹는 것인데 그게 잘 안 되면 놀긴 놀되 아껴서 쓰자. 이런 주의죠. 극단적인 체념 생활. 그래서 이 이야기를 왜 해야 되느냐 하면, 인간이란 단독적으로 놔두면 양극단이 다 있어요. 세상에서 성공하자고 미친 듯이 설치는 게 있고 세상을 일종의 도박판으로 보는 거예요.

어디에 돈을 걸면, 어디 부동산에 돈 걸면 은행이자보다 높은가, 거기에 미쳐 사는 거예요. 펀드는 포트폴리오, 부챗살처럼 깔아야 손해가 적어진다. 이런 게 발달하는 겁니다. 어느 은행에서 새로운 펀드를 개발했는데 이걸 할까, 말까? 하도 은행이자가 낮으니까. 정기이자가 1.7%밖에 안 되니까. 자꾸 그것 하는 거예요. 그런 반면에 돈은 더럽다 해서 지리산 들어가서 암자에서 수염 기르고 도 닦는 것.

인간이 이렇게 할 때 자칫하면 나는 어느 쪽이 나의 절대함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느냐? 그거거든요. 이제 강의 처음과 연결됩니까? 인간의 나의 나됨과 그걸 찾는 과정이거든요. 나의 나됨과 나의 고유성, 누구도 손댈 수 없는 나만의 것, 테두리 치고. 그게 절대성이거든요. 선악과 따먹었으니 마귀거든요. 마귀는 누구의 간섭도 안 받고 평가를 해도 내가 평가하고. 이런 식이에요. 나만 있으면 족하다는 식이에요. 마귀가.

그래서 지금 현대인들의 이런 사고방식, 젊은 사람이나 나이 많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지만 머리 깎은 청년도 마찬가지겠지만 어떤 사람을 사귄다 할 때는 부동산 투자나 펀드 투자하는 식으로 계산해냅니다. 나의 과거, 흑역사까지 감당할 수 있겠어요? 이걸 묻는 거죠. 나한테 투자하라는 거예요. 나와 살아서 손해나더라도 아무 소리 안 할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과거에 내가 이런 여자인 것을 네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고 앞으로 나와 살면서 이런 경우가 생길 때 그러한 나쁜 역사, 검은 역사 되더라도 그걸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간 보고 사귀죠. 남자가 여자 좋다는데 그런 말이 들어옵니까? 예스, 예스 하지요. 은행에서 펀드 넣을 때 손해 볼 수 있습니다, 해도 그런 것 귀에 안 들어와요. 무조건 수익률 20%에 체크 다 해버리는데, 뭐. 그건 그때 문제지요.

나는 어디까지 돈을 벌 수 있느냐, 나는 어디까지 남보다 위에 설 수 있느냐? 지금 본인이 본인에게 돈을 거는 거예요. 본인이 본인을 두고 도박을 하는 거예요. 이 세상 자체가 도박판이에요. 전부 다. 도박이 싫다면 지리산 들어가야지요. 그래서 지리산에 쓰레기장 다 만들어놓고.

이런 두 양극단, 비극적 인생을 쓰는 것은 자기 절대성과 고유성을 포기 못하기 때문에 비극이 쾌락이 돼요. 에피쿠로스학파가 이거거든요. 쾌락이라면 차라리 굶는 것도 쾌락이다. 금식하는 것도 쾌락이다. 쾌락을 기대한다면 금식도 마다하지 마라. 왜? 사람 행복은 거기 있기 때문에.

제가 어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하나님 앞에 겸손한 것도 꼴 보기 싫다. 겸손이 뭐냐 하면, 일종에 쾌락이에요. 자기만족이라니까. 나 무척 겸손하다. 왜 이리 믿음이 좋아. 이거 자기 쾌락이에요. 자기 고유됨이에요. 이 정도로 낮아질 수 있다는 그걸 절대화시키는 겁니다. 혼자서 꼼지락거리는 거예요. 혼자서 펀드 넣었다가 혼자서 여행 갔다가 혼자서 회개했다가. 모든 것이 개인 혼자의 생각에서 나와서 혼자 시도해보고. 어떤 저질러놓고 전부 다 자기 정당성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이것을 자기변명이라 하는데 자기 정당성을 커버하기 위해서는 남들이 시비 걸까 싶어서 전체가 변명의 성채를 세우는 거예요. 변명할 수 방법이 뭐냐 하면, 교회 나가기입니다. 교회는 뭐냐? 나의 변명을 제공하는 제공처. 제가 교회 나가줬잖아요. 헌금 했잖아요. 시키는 대로 전도했잖아요.

교회라는 것은, 하나님 시키는 대로 했기 때문에 이것만큼은 안 건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것이 교회 열심히 다니기입니다. 마치 아들이 아버지가 집에 놀면서 동네 아줌마들 불러서 화투치는 게 꼴 보기 싫어서, 용돈 이만 원 드릴 테니까 노인정에 가세요, 하면 그 사람은 노인정 가요. 돈 이만 원 때문에. 이만 원 있으면 자기 나댐의 가치가 더 강화되거든요.

그래서 인간은 나라는 인생을 만들어놓고 거기다 계속해서 꽉꽉 채우는 일만 해요. 돈도 집어넣고 명예도 집어넣고 유력한 아는 사람도 집어넣고 친화력, 내 친구 어떤 사람이라는 것도 집어넣고 내가 이만큼 공부한 것도 집어넣고 내가 이렇게 경험 많은 것도 집어넣고. 군인들 매는 백 하나 마련해놓고 그 배낭에다 온갖 것 다 집어넣어요.

모든 인간은 다 그렇습니다. 지 겸손한 것도 집어넣고 개척교회 한 것도 집어넣고 굶어가면서 전도한 것도 집어넣고 배낭에다 온갖 것 다 집어넣어요. 그러면 우리의 창조주 되신 주님 오게 되면 무슨 일부터 하겠어요? 배낭 열고 집어넣은 것 다 끄집어내요. 이 쓰레기들 봐라. 겸손한 것도 쓰레기잖아. 니 절대성을 위하여 이 짓했다고, 네가 바로 나의 적이야. 원래부터 적이었었어. 인간은.

로마서 5장에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 된 자라 했거든. 지금 하나님의 작업은 원수 된 자를 어떻게 천국 백성 만드느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천국 백성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원수 돼야 돼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란 사실을 자각해야 돼요. 그건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이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자기 채우는 것을 포기 안 하죠. 원수 된 자로 그 값을 하겠다고 매일같이 채우는 거예요.

소포클레스라든지 그리스 철학자들의 문제점은 뭐냐 하면, 자기가 비극적인지 그냥 이유가 없어요. 왜 나 하는 일이 안 되지? 안 되면 내 쪽에서 인내하면 되지. 인내가 또 변명이에요. 힘들었지만 일곱 번 쓰러졌지만 그래도 일어났다는 게 자기 고유성 지키는 거거든요.

그러면 그리스 인간의 대표자들, 철학자들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율법에 의해서 복음에 의해서 핍박을 안 받았다는 겁니다. 핍박 오기 전에 지가 알아서 핍박받았다는 거예요. 수를 부리는 거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어찌하여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하는 이런 핍박은 예상 못한 거예요. 여기 나오는 신앙인은 예상을 못한 거라고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주님과 함께 있지 않으면서 단독적으로 자기변명조로 살면서 자기 고유함을 지키는 사람이 교회 와서 성경을 보게 되면 무슨 모방까지 하느냐 하면, 시편 13편까지 모방을 다 하려고 해요. 고난 받아야지. 고난 받는다고 금식해놓고 점심에 두 배, 세 배나 먹고 살 더 찌고.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에게 누군가 찾아오지 아니하면 우리는 자신의 이러한 원수 됨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찾아왔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어떤 인물이 찾아오게 되면 무엇을 몰고 오느냐 하면, 고유의 환경을 몰고 와요.

현대인들은 본인 혼자 산다고 하잖아요. 사실은 혼자 사는 게 아니고 현대를 둘러 싼 환경 속에 하나의 요소로서 살고 있습니다. 환경이 나를 그렇게 만든 거예요. 사방을 둘러봐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그렇게 사는 게 인생인 줄 알았어요. 북한에선 누구한테 굴복하는 게 사는 겁니까? 김정은한테 굴복하는 게 사는 거죠. 월북해서 북한 시민 될 때는 김정은부터 언급해야 김정은한테 순종하겠습니다, 부터 해야 돼요.

인물이 환경을 몰고 온다는 말을 같은 말인데 바꿔하면, 환경 속에는 중심인물이 있다고 보시면 돼요. 쉬운 예로 누가복음 16장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 나오지요. 이 세상 많은 인간들 중에서 두 명이죠. 예수님께서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한 것은 두 명이 아니고 두 환경으로 기획된다는 겁니다.

우리 눈에 부자로 보이지만 부자를 둘러 친 환경은 뭐냐 하면, 지옥과 연관돼있어요. 지옥이죠. 나사로는 거지로 보이지만 나사로의 환경은 낙원입니다. 천국이죠. 천국과 지옥에 대표하는 중심인물이 등장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 중심인물이 궁금해요? 천국의 대표자는 이 땅에서 나사로, 거지. 예수님이 거지 아닙니까.

거지의 특징은 이 세상이 마음 둘 곳이 없다. 펀드 할 돈도 없어요. 이 땅에서 펀드 해야 소망이 생기고 화투판에 돈을 걸어야 세 배, 네 배, 딴다는 게 있는데 거지는 투자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거지가 이 땅에 보여줄 것은, 나 죽는다. 나, 가거든. 자기 죽는 것이 이 더러운 세상에서 보여줄 것은 나 죽는다는 거예요. 진짜 나의 나됨은 나의 고유성은 자기 죽음으로 보여주는 게 거지 나사로에요.
그러니까 거지 나사로는 누굴 예표하고 있는 겁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이 얼마나 더럽고 살만한 동네가 아니냐는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나 죽는다 이 말이죠. 그런데 부자는 이 땅이 좋아. 죽으면 섭섭해요. 왜? 친구도 많지, 여기에 날마다 열락하니까 그만큼 투자를 얼마나 해놨는지 수익률도 높은 모양이라. 수익률 높은 게 축복이 아닙니다. 점점 이 땅을 떠나기 싫게 하는 마음을 줘요.

축복이 뭐라고요? 축복이란 선행된 율법을 증거하기 위해서 율법이란 환경 속에 같이 놓여있는 상태가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계시, 예언, 하나님의 뜻과 더불어 환경을 조성해 있는 사람, 그게 복이죠.

거지 나사로 이야기하면서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언급한 대목이 나와요. 16절에 보면,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이렇게 돼있지요. 복음이 전파된다 해놓고 복음의 내용은 뭐였습니까? 거지였습니까? 아니지요. 거지+부자. 복음의 내용은 거지만 아니에요. 거지와 부자가 결부돼야 돼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둘로 구획했다. 나누었다는 그 사실이 복음이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두 중심인물, 거지냐 부자냐, 에서 거지 나사로는 보이지 않는 환경의 대표자로 등장한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이런 관점이 장착되었다면 이런 관점으로 주변인들, 가까운 가족들, 친구들, 교인들, 지인들부터 탐사를 해보세요. 조명을 비춰보세요. 그들은 어떻게 사는지. 이 말을 달리하면, 그들은 무엇을 사랑하는지. 같은 말로 그들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당신은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까? 지금 당신은 뭘 목적으로 열심히 싸대면서 매일같이 살아가고 있습니까? 물어보세요. 무슨 환경을 위해서, 거지되기 위해서? 다 털어먹기 위해서요? 온 가족, 자식까지 남편 거지 만들기 위해서 살아갑니까? 아니면 부~자 되세요, 잘 풀리는 집. 휴지 사들고 와서.

이게 자기를 단독자로 생각하는 겁니다. 라이프니치는 단독자를 단자, 모나드라고 이야기했어요. 닫힌 창. 그걸 어제는 제가 그런 표현했지요. 자기 속을 테이프로 밀봉해놨어요. 내부적인 공포와 두려움은 다 감추고 여긴 내 영역이니까 바깥에서 들어오지 말라고 완전히 밀봉해놨어요. 오늘날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그겁니다. 단자, 자기 개인위주에요. 자기가 돋보이는 거예요. 환경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버티면 환경은 알아서 한다는 겁니다. 환경을 무시해도 보통 무시하는 게 아니에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나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나이까” 여기 나오는 비탄의 사람은 율법 안에 하나님의 말씀 안에 비탄의 요소가 들어있는 거예요. 환경이 어떠함을 알기 위해서 내가 어떠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내 행복과 나의 절대성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환경을 주신 게 아니고 네가 정하기 전에 이미 규정된 너를 집어넣은 그런 환경이 어떠함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그 환경에 맞추어서 하나님께서 사건, 사건을 유발시킨 겁니다.

거지 나사로가 거지되고 싶어 한 게 아니에요. 이 땅에서 천국은 어떠하냐를 보여주기 위해서거지 나사로는 대표자로 거지가 될 수밖에 없어요. 이 땅에서 천국은 떠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떠나는 성향을 나타낸다. 아무것도 이 땅에서 기대할 것도 없고 소망할 것도 없다는 거예요.

그걸 극한 대비로 보여주지요. 부자는 이 세상이 전부에요. 이 세상뿐이에요. 오늘날 과학자 같아요. 오늘날 초등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육부에 인정된 모든 교과서 내용이 부자 쪽입니다. 어린 딸자식을 서울로 보내면서 엄마가 시외버스정류장까지 따라와서 버스에 올라타는 딸에게 쥐어주는 하얀 봉투 하나, 순자야 잘 살아야 돼. 꺼내보면 얼마 되지 않는 고추 판 돈. 이제는 엄마 잊어버리고 좋은 남자 만나서 잘 살아야 돼.

좋은 남자가 그냥 만나집니까? 좋은 남자 만나기 위해서 얼마나 좋은 여자 돼야 되는데 그것도 모르고 참. 아르바이트 취직해서 재벌2세와 부딪쳐 커피 쏟고, 그런 것은 드라마에서나 있는 이야기고. 자칫하면 근본도 없는 것들 해서 임신해서 애 낳고 쪽 난다니까요. 순박하기 짝이 없는 세상에 법 없이도 살 우리 어머니가 이미 이 부자 쪽에 속한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는 일자무식이고 순박하게 산 그 순박이 결국 순박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 시대의 환경을 대변해주고 있어요. 잘 살아야 돼, 부자 돼야 돼. 부잣집 마나님 돼야 된다.

<기생충> 영화 안 봤지요. 봉준호 감독이 상당히 재치 있게 이야기했어요. 저택이 있는데 부잣집 마나님이 마중을 나옵니다. 주인공 아들이 사모님 되십니까? 아닙니다. 저, 일하는 사람입니다. 부잣집에 일하는 사람이 그 정도로 사모님 포스로 나타난다면 안에 있는 사모님은 어떻겠어요? 가난과 부자가 건너 뛸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어지고 단절돼있다는 그걸 보여주는 영화거든요. 두 계급이라고.

그러나 성경에서는 두 계급이 아니고 두 영역이에요. 여기는 두 계급이 눈에 보이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두 영역이 눈에 안 보여요. 오직 하나의 영역만 보입니다. 부자가 칭송받고 부자가 사람 대우받는 그 모습만 보이지 가난한 것은 모습에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교회 많이 다니고 아시죠. 교회 아무리 오래 다녀도 항상 자기가 되돌아볼 질문이 있어요. 과연 난 영생 얻었는가? 나는 구원 얻었는가? 나는 천국을 얻었는가? 그 질문을 항상 해봐야 돼요. 수십 년 지나도 해봐야 되고 목사 장로가 되도 권사 집사가 되도 그 질문을 해봐야 돼요.

왜냐하면 이 세상 환경에서는 얻었다는 말은 눈에 보이는 물체를 내 몸이 지녔다는 걸 얻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느 집에 가니까 전자레인지가 있어요. 전자레인지 얼마 줬어요? 얻은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외부에 있던 것을 나한테 가져와서 내 눈에 보이는 나의 영역에 자리를 하나 차지할 때 그건 얻었다고 되는 거예요.

우리 인간의 한계가 그겁니다. 얻었다는 것은 눈에 보여야 돼요. 손에 쥐어야 되고 만져져야 안심이 돼요. 도마가 생각은 믿음은 보고 안심하는 믿음이었어요. 그게 도마의 한계고 인간의 한계입니다. 주님께서 도마에게 믿음 좋다고 했습니까, 뭐라고 했습니까?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복되다고 했거든요.

복이란 것은 이 땅에서 눈에 보이는 것은 일단 탈락이죠. 눈에 보이는 것은 복은 아니에요. 보이지 않는 요소와 결합이 돼야 복이니까. 그런데 일단은 교회 다닌다는 이유 때문에 지식으로는 받아들입니다. 현실이 그게 증빙이 됩니까? 전혀 안 되는 거예요. 한 이십 년 되면 증명되겠지? 안 돼요. 삼십 년 교회 다니면 되겠지? 안 돼요.

갈수록 의심, 의심이 더 내가 믿는다는 내 믿음조차도 의심의 대상이 돼버립니다. 이건 인간의 본성은 죽을 때까지 변치 않는다는 겁니다. 눈에 보이고 실적이 있어야 되고 손에 잡혀야 되고 그래야 안심이 되는 거예요. 안심이 될 때 나는 믿겠다고 지가 그렇게 결정을 한 겁니다.

그러면 눈에 보이지 들리고 손에 잡히고 그래서 안심이 되는 그런 대상들은 전제가 뭐냐 하면, 나의 나됨이 그대로 건재한 효과거든요. 나의 나됨은 인정되면서 믿을 건 믿자, 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고 하는 거예요. 나의 절대성은 보장되면서 나의 절대성은 더욱 더 절대성 되고 나중에 천국까지 보장하기 위해서는 내가 판단해서 믿을만한 것을 가리자.

그렇게 하고 싶은데 계속 성경에서는 보이지 않는 걸 이야기하니까 나중에 나이 들면 다 떨어지고 남는 게 뭐냐 하면, 나의 예배당만 남아요. 교회 장로들 기도하는 것 보세요. 전부 다 나의 예배당 아닙니까. 그들의 예수님 십자가에 죽었다고 그렇게 비탄하고 애통해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 예배당 터가 헐값에 넘어가는 것이 제일 괴로워요. 내가 아버지 유산 받아 헌금한 내 지분인데 그게 뜯기게 되고 보상 적게 받게 되면 다 같이 철야합시다, 라고 나와요.

부동산은 눈에 보이잖아요. 말뚝 박으면 된다고요. 여기는 교회 터. 교회 터라 하면 상스러우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플랜카드 걸면 그게 교회 터에요. 교회 터도 인정하고 전도도 될 겸 남한테 고상하게. 교회는 뭐냐? 교회는 □다. 교회는 부동산이다. 이게 정답이에요. 손에 잡히니까. 이 교회가 있음으로 나의 고유성도 사니까, 안 죽으니까. 그게 바로 부자적 사고방식이에요.

여기 누가복음 16장 16절에 율법과 선지자의 모든 완성은 마지막 때 하나님 나라로 온다고 했지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천국을 부자와 결부시켰어요, 나사로와 결부시켰어요? 거지 나사로와 결부시켰죠.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 할 때 복음의 대표자로 누굴 제시하고 있어요? 지금 거지 나사로를 제시하잖아요. 바로 뒤의 이야기가 뭡니까? 거지 나사로 이야기 나오지요.

하늘나라 눈에 안 보입니다. 맞아요. 하지만 눈에 보이는 식으로 나왔지만 사람들이 거부했지요. 부자 되기를 쳐다보고 있는데 거지는 눈에 안 들어오잖아요. 눈을 못 보고 있는 것이 아니고 눈에 안 들어왔지요. 천국이. 거지가 거지되고 싶어 한 게 아니고 천국 때문에 거지된 거예요.

율법과 함께 있기 때문에 율법이란 환경 때문에 지금 이 거지는 비탄에 잠긴 거예요. 어느 때까지이니까. 주여 나를 영영 나를 잊으셨나이까. 모든 세상 사람들은 나를 놀립니다. 실패자라고 망했다고. 신약에 거지 나사로가 있다면 구약에는 시편 13편이 있는 거예요. 이런 요소는 본인이 공부를 못해서 거지된 게 아니에요. 잘못 투자해서 말아먹어서 거지된 게 아닙니다.

뭐냐 하면, 주의 말씀 때문에 이렇게 힘들다는 것이 바로 1절에 보면, “주의 얼굴을 언제까지 나에게 숨기겠나이까” 하나님께서 함께 있었는데 왜 지금은 얼굴을 돌리십니까? 그 돌린 이유가 3절에 나옵니다. 인생이란 무대에 하나님의 원수를 등장시키기 위해서 이러한 서러움과 고난을 받게 하시는 거예요. 비탄에 잠기게 하시는 겁니다. 개인 탓이 아니고 환경 탓이에요.

인간의 몸은 아담에게서 나오고 아담은 이미 원리적으로 악마에 정신적으로 지배받고 있어요. 에베소서 2장 1절에 나오지요. 이 세상의 신이 모든 인간을 불순종 가운데 가둬둔 거예요. 따라서 인간의 몸이 있는 이상은 몸적인 세상적인 요소가 계속해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관통하지 않으면 이 세상 사람과 똑같이 원하는 대로 부자 되는 쪽으로 가는 거예요.

그런데 믿음이 뭐냐? 어디서 구원받았는가, 영생 얻었는가? 그 답변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아느냐?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대표적으로 이야기했어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일이 나한테 붕 띄워놓고 그 뜻이 안 되게 하시는 거예요.

아예 안 띄워놓으면 모르겠는데 희망 품게 해놓고 희망 좌절시키든지 희망대로 됐는데 갑자기 허무가 찾아온다든지. 에게 이것 하려고 내가 그동안 애를 썼나, 공들였나. 이것 하나 얻으려고 수련회 참석도 안 하고 그랬나, 이런 식으로.

우리는 육에 있기 때문에 말씀이 우선순위가 아니에요. 돈이 우선순위에요. 돈이냐, 말씀이냐? 당연히 돈이죠. 심지어 돌잔치에도 그게 나오잖아요. 돌잔치 선택리스트에 성경책이 아예 올라오지도 않아요. 마이크, 실, 돈, 그 다음에 청진기. 청진기는 의사 되라고, 마이크는 아나운서 되라고, 실은 오래 살라고. 돈은 노골적이죠. 그러다 애가 실 잡으면 억지로 돈 쥐라고.

세상 자체가 자연스러워요. 그게. 그게 너무나 악하다 나쁘다는 의식이 없고 마땅히 그러해야 돼요. 그러니까 제가 전에 어떤 강의에서도 그랬습니다만 이미 믿음이 있어요. 돈 벌어야 된다는 믿음이 있는 입장에서는 새로운 믿음은 이론에 불과하고 기존의 믿음을 차고 들어올 여지가 전혀 없어요.

교회 가도 돈이라니까. 전부 다. 교회는 아까 뭐라고 했어요? 변명거리에요. 그래도 이 바쁜데도 교회 나와 줬잖아요. 그러니까 내 몸이 추구하는 것 건들지 마세요. 이런 식이에요. 내가 자꾸 이런 이야기하다보니까 아예 교회 나오지도 않아. 우리 교인들. 지 수법 다 들켜서.

루터가 십자가 이야기했다고요. 이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오직 하늘나라만 전부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이 믿음은 없고 그 당시 기독교 세계니까 성경말씀은 옳으니까 군주들이 무슨 아이디어를 끄집어냈느냐 하면, 하늘나라에서 볼 때 너무 허무하니까 허무한 속에서도 뭔가 숨 쉴 곳은 찾자. 그래서 생긴 것이 세속화라는 거예요. 허무하니까 너무 아쉬운 게 많으니까 허무함 속에서도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 세속화로 나간 거예요.

이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일단 우리가 받아준다는 겁니다. 세상 허무한 것 알아요. 허무하지만 허무한 세상을 떠날 때까지는 나름대로 즐겁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라는 제안이 세속화고 이 세속화가 오늘날 현대 행정이에요. 모든 근대국가의 행정입니다. 세속화하다보니까 하나님을 위로 보내버렸어요. 어차피 허무하니까. 정답은 안다는 거예요.

이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정답은 아니까 그 다음부터 교인들이 안 나오기 시작했어요. 왜? 아니까. 허무한 걸 내가 받아들인다니까요.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고 이 세상은 죄뿐이고 결국 멸망한다는 걸 내가 받아들인다니까요. 아니까 더 배울 것 없지요? 그러니까 내 마음대로 합니다. 수긍은 하되 동의는 안 하는 거예요. 내 몸이 동의가 안 된다니까.

그러니까 교회 쪽에서 놀랜 거예요. 교회 안 오니까 돈이 안 나오는 거예요. 운영을 못하지요. 지금도 영국이고 독일이고 교회를 나이트클럽 만들고, 제가 이번에 벨기에 갔는데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서점이 뭐냐? 옛날 예배당을 살려서 책 모아놓은 곳에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서점이에요. 네덜란드 강가에 있는데 사진 찍고 했어요.

교회가 이제는 신학을 수정하기 시작했어요. 교회는 부동산이고 돈이니까 운영이 안 되니까 수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게 세속신학, 세속적인 신학.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겁니다. 우리의 지친 육신을 달랩시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25.♡.150.22) 19-07-10 12:32 
20190708b 부산강의 : [시편]20(13편)-신앙의 증거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중요한 것은, 과연 내가 구원받았는지 어디서 확정할 수 있는지. 인간적인 확정은 안 됩니다. 눈에 보이는 건 안 돼요. 눈에 보이지 않는 확정이라면, 나는 어떤 경우에 구원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벌 받는 세상 속에 살게 하신 그것이 증거가 돼요. 떠나야 될 세상을 이 땅에 평생을 살게 만드는 게 증거가 되는 겁니다. 시편 13편이죠.

왜냐하면 벌 또는 심판, 저주를 면하게 한 그 방식 안에 벌이 오게 된 이유와 내력이 담겨있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죄 씻음 받았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그것 믿을래, 그것 믿을래. 좋은 소식이다. 기쁜 소식, 복음이라고 피 터지게 하잖아요.

하지만 이걸 믿으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었다고 하면, 벌과 저주를 예수님의 피로 면하게 해줬다 제거해줬다는 걸 믿으려면, 벌이 주어진 이유와 내력이 한껏 들어있는 이 세상에 푹 젖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이게 증거거든요.

구원받은 증거는 뭐냐? 내가 벌 받을 세상에서 평생 지내야 된다는 그 당위성, 마땅함 그게 바로 구원받은 증거에요. 두 개의 안목을 가지고 봐요. 이 세상은 이래서 벌 받아 마땅해, 라는 것을 세상도 보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살아가는 겁니다. “나는 진작 죽어도 괜찮아.” 자기 자신을 볼 때 두 개의 안목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했으면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 시편 13편에서 1절부터 4절까지는 비탄입니다. 비탄의 시라 하는데 슬픔, 비애, 비탄. 5절에 보면 기쁨이 돼요. 그러면 진정한 기쁨은 뭐 안에 있어야 기쁨이 나오지요? 바로 슬픔 속에 있어야 돼요. 슬픔은 희망이 끊어지지요. 좌절될 때 희망 자체가 아예 없을 때 절망스러울 때 슬퍼요.

그러면 그 슬픔이 기쁨으로 극복된다면 그 기쁨이 5절 끝에 나옵니다.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어디에 잠겨있을 때나 터져 나올 솔직함이냐 말이죠. 절망에 잠겨있을 때에. 거지 나사로가 지옥에 갈 사람과 앞집에 살아요. 낙원에 갈 사람이 매일같이 코앞에 마주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지옥에 갈 사람과 마주치고 그 집 개와 마주치고 있는 거예요.

이 말은 무슨 의미겠습니까? 비록 거지지만 다른 기쁨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니 꼬라지 볼 때마다 기뻐. 부자 됐다는 소리 들을 때마다 기쁘기 한량없어.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넓은 길로 가는 사람 앞집에 살면 돼요. 그 넓은 길은 찾는 사람이 많아. 넓은 길은 계속 도로공사해도 모자라. 차가 미어터졌어. 다들 그 길로 가. 이쪽 길은 가는 사람이 없어요. 복음의 길은 거의 안 찾아요.

진정한 소수자는 좁은 길로 사람이 소주자에요. 동성애한다고 퀴어축제한다고 소수자가 아니고. 정말 말빨조차 이 세상에서 일체 알아주지 않는, 교회 가서 언급해도 다른 교인들이 개무시해버리는, 사회 나가서 무시당하는 것. 분명히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옳은데 옳다는 이유 때문에 밀침 당할 때. 분명히 임금님은 벌거벗었는데 신하들이 전부 다 김정은, 김정은 하면서 받들어주는 거예요.

내가 아는 김정은 서른여섯 먹은 철딱서니 없는 아거든요. 내가 아는 재벌2세에요. 교육도 그렇게 받았고. 지도자라고 할 수 없어요. 그래서 김정은과 회담할 때는 서른여섯 살짜리 보내야 돼요. 나이 많은 문재인 나오지 말고 같은 또래를 보내야 돼요. 까부는 재벌2세, 3세 많잖아요. 마약하고 하는 애들과 맞아요. 노는 가락이 비슷할 건데, 뭐. 룸살롱에 여자 부르고 할 건데. 뻔한 건데.

왜 세상을 진실한 그대로 볼 줄 모르느냐 그 말이죠. 보고 그걸 그대로 발설해야 돼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율법에 의해서 압박을 받을 때 그렇게 발설이 저절로 누르니까 터져 나오는 거예요. 치약 누르면 치약이 터져 나오지요. 이런 사실을 보고 참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시편 13편의 인물은 누구냐? 이렇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복음으로 인하여 괴로워하는 사람, 복음으로 인하여 고난 받는 자, 이게 정답이에요. 그게 누구냐? 다윗입니다. 다윗의 시니까. 복음으로 인하여 핍박받는 자, 이게 복된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복 리스트 나오지요. 제일 마지막 복이 뭐였던가요?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하나님의 의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도리어 뭐하라? 즐거워하고 기뻐하라. 선지자들도 그와 같이 기뻐하였느니라. 너희 상이 큼이라. 상은 이 땅에서 주는 상이 아니고 하늘에서 주는 상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그 상은 바로 영생이고 구원입니다.

자, 내가 과연 구원받았을까, 영생 얻었을까, 정말 내가 죽으면 천국 갈까? 상 받으면 돼요. 그 상은 뭐냐? 이 땅에서 받는 상은, 내가 아는 누가 뭐래도 그게 아니고 이게 진실이라는 것을 분명히 앎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무시당하는 모욕당하는 그게 바로 내가 신자인 증거에요.

우리 입을 너무 다물어서 문제지요. 입 벌리면 돈 나갈까 싶어, 입 다물고 있다. 이런 식으로. 입을 다물어서 문제에요. 그러나 치약이 누르면 나오듯이 터져 나올 때가 있을 거예요. 도저히 못 참겠다고 터져 나올 때가 있을 겁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의 악이, 하나님의 원수가 더 심하게 몰아붙이는 것은 하나님이 악마를 보내서 시키는 일이라고 보시면 돼요. 나를 복음 때문에 그렇게 미워한다면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입 다물지 말고 터져 나가란 말이죠. 복음을 외치라 이 말이죠.

그럴 내 마음은 여기 5절에 보면,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이게 하박국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 있잖아요.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지라도. 이것은 포로 잡히기 전에 약속의 땅에 있었던 율법적인 복과 내용이 완전히 배치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에요. 젖이 흐르고 꿀이 흐르고 포도가 많이 열릴 때 그걸 사람들은 신앙생활 잘하는 증거로 삼았어요.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 땅을 떠나면서 증거가 180도로 확 바뀝니다. 이제는 포도나무에 포도가 풍성한 것, 요즘으로는 돈이 많이 들어오는 게 복이 아니다. 새로운 환경에 걸 맞는 복은 따로 있는 거예요. 천국에 들어갈 인물들, 그 인격을 따로 있는 겁니다. 이 땅에 적합한 인물은 이 땅과 함께 망하도록 돼있어요.

잠시 요엘 찾아봅시다. 이걸 봐야 나머지 본문 시편 13편이 이해가 돼요. 구약 1271페이지 요엘 2장 3절에 이렇게 돼있어요.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 전의 땅은 에덴동산 같았으나 그 후의 땅은 황무한 들 같으니 그들을 피한 자가 없도다” 누구든지 하나님 주신 심판에서 면제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돼있어요.

요엘 선지서 자체가 메뚜기가 덮여서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을 완전히 황폐하게 만들어버립니다. 특히 요엘 1장 16절 같은 경우에는 이렇게 돼있어요. “식물이 우리 목전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하나님의 전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이 대목이 굉장히 깊이가 있어요.

뭔 뜻이냐 하면, 가나안 땅 약속의 땅에서 곡식이 안 되면 거주민들 이스라엘 사람들이 굶어죽는 것도 문제가 되지만 하나님의 전에 바칠 제물도 같이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바칠 제물이 없어지는 걸 하나님이 감수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일으킨 재앙에 하나님이 거기에 동참해서 그 고통을 감수하겠다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영광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고생 같이 할게. 내가 만든 재앙에 나도 참여할게.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바로 그 이야기가 시편 13편 이야기에요. 여호와여 어찌 잊으시나이까, 할 때 여기 있는 다윗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다윗의 원수가 하나님의 원수가 돼요. 왜냐하면 하나님과 결부된 사람이거든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율법이 생생하게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율법과 관련된 인물을 이 땅에 하나님께서 다윗이란 이름으로 미리 보낸 거예요.

그럼 다윗 주변에 일어나는 일은 율법 안에 감추어진 내용이 죽죽 펼쳐지는 거예요. 요구르트 병이 엎어져서 쏟아질 때 안에 있는 요구르트가 지면에 퍼져나가듯이 다윗 통해서 율법 안의 내용이 퍼져나가는 거예요. 사람은 하나님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창으로 찔러도 너무 높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보낸 자, 율법이 와서 같이 있는 자를 이 땅에 살게 되면 하나님이 보낸 자를 찌르는 것이 곧 누굴 찌르는 겁니다. 하나님을 찌르는 거예요. 사울이란 사람이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사울아 사우라 왜 나를 핍박하느냐?

이게 에베소서 1장 같으면 예수님은 머리가 되고 교회는 몸이라 했잖아요. 머리 되는 하늘과 몸 되는 땅이 완전히 연결됐어요. 그래서 땅의 것을 건드리면 누가 화내느냐 하면, 머리 되신 하나님이 화내게 돼있어요. 그게 바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증거입니다. 나를 위한 인생이 아니고 주님을 보여주기 위한 인생, 성령 받아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그 증거가 뭐냐?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뭐냐고 물으면, 이 세상은 예수님이 포기한, 예수님이 포기했고 이 세상도 예수님을 죽여서 포기한 속성이 작용하는 세상이란 것을 살아가면서 온 몸으로 절감하는 거예요. 살아가면서 느끼는 겁니다.

이 세상은 빈 공간 아니에요. 혼자 있을 땐 상상하면 신앙 좋지만 막상 움직여서 누굴 만나 보세요. 그들이 나한테 내뱉는 소리와 내가 그들에게 내뱉는 소리들이 어울려서 두 영역을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지양하는 바가 달라도 이렇게 다르다는 차이성을 그 현장에 다 녹아내려져요. 그럴 때 여러분은 시편 13편을 외우고 있는 중이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이 땅에서 힘들어서 더러워서 못 살겠습니다.

2절 봅시다.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이 땅에서 승자가 누굽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에요, 안 믿는 사람이에요?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승자지요.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자기가 이겼다는 거예요. 너는 패배자고 나는 승자다. 너는 루저란 말이죠. 너는 졌고 나는 이겼다.

3절에 보세요.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누구의 눈이냐? 여기는 다윗의 눈이죠. 다윗이란 인물 주변에 엮여져 있는 환경요소를 제가 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왕이죠. 무슨 왕? 이스라엘 왕이죠. 이스라엘 왕으로 책임을 다 지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뭐냐? 시온입니다.

세 번째는 왕의 자식 또는 왕의 자손에서 누가 오느냐 하면, 바로 이 세상을 완전히 해야 될 메시아가 오는 거예요. 그래서 메시아 앞에서 한시적 존재입니다. 우리의 자세가 이래야 돼요. 우리가 절대적 존재가 아니고 우리는 나의 고유됨을 유지해서는 안 되고 우리는 예수한테 모든 걸 일임해야 돼요.

내 고유함이 아니고 주님의 고유함, 주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내가 있습니다. 이래야지 주님 끊어버리고 나의 나됨, 자존심 그것 유지해서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나의 절대성이 아닙니다. 우리는 절대로 절대성이 아니에요. 절대성을 생각도 말아야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꾸 어려움을 주는 것은 뭘 포기하라는 거예요. 나의 절대성, 나의 나됨을 포기하라는 겁니다. 사람이 부부싸움이라든지 뭔가 다툴 때는 서로의 고유함을 끄집어낸 거예요. 저기서 창 내면 나도 창 내고 저기서 칼 내면 칼 내는 거예요. 나한테도 이런 것 있어. 너 키 크다고 날 무시해? 난 깡다구 있어.

미국 사람 같은 경우에는 자기의 절대성과 고유함을 지키기 위해서 뭘 사용하느냐 하면, 총기를 사용해요. 총. 총을 갖고 있는 게 아니고 총이 자기 일부에요. 가장 가까운 자리에 총을 두고 있어요. 미국 잠깐 갔다 왔지만 미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맞지요. 법이 아니고 내 총이 나를 지켜주는 겁니다.

그럼 한국 사람은 뭐로 지키느냐? 글자로 한 자인데. 총 대신 술입니다. 자기 도피적이죠. 아이고, 더러워라. 한 잔하는 거예요. 술 안에서 자기 고유함과 절대성을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을 우기려고 하는 거예요. 상사한테 꾸중 듣고 여자들 모여서 술 먹고 집에 들어가고. 요새 젊은 여자들도. 술. 여보세요 나야 거기 잘 지내니~ 임창정의 <소주 한 잔> 들어보세요. 할 말을 못해 소주 한 잔 먹고 자기 할 말하잖아요.

얼마나 평소에 우리 몸이 내 것만 지키면 인생 살았다, 할만하다. 이것뿐이에요. 돈은 미국이고 한국이고 간에 공통적인 거고. 돈을 왜 이렇게 하지 않느냐 하면, 돈은 10억 있어도 20억에 밀려서 짜증나서 또 술 먹어요. 돈은 인간의 욕망은 한정도 없기 때문에 최종적인 것은 아니고 최종적인 몸을 갖고 있는 총이고 한국 사람한텐 술이에요. 러시아나 한국 사람은 술로 때우는 거죠.

술로 때우는 개인을 국가는 애국주의로 바꾸는 겁니다. 나라가 네 술보다 낫고 총보다 내가 지켜줄게. 그러면 애국주의가 없는 중국이 문제고 중국이야 북한이 문제고. 영국은 뭘 지켜주느냐? 축구입니다. 손흥민이. 한 골 넣으면 토트넘 경기장에 손 노래 나오고 전광판에 골인~ 손흥민 이름 나오고요. 손흥민 가치는 1500억, 우리나라 중소기업, 현대자동차 몇 대 팔아야 돼? 그래서 어제 아이들한테 물어봤어요? 너, 앞으로 뭐 될래? 축구선수요. 그렇게 말씀을 가르쳐도, 축구선수요. 공기가 그래요. 우리는 그런 공기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어떻게 잘 묘사하는지요. 하나님의 원수가 우리에게 뭘 요구하느냐 하면, 우리의 죽음을 요구합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3절 끝에,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잡을 잘까 하오며” 세상의 공격은 죽음으로 느낍니다.

다윗이 다윗언약을 통해서 죽음+그 이후가 다윗을 통해서 새삼스럽게 계시로 주어지는 겁니다. 여기 다윗 행위로 말미암아 죽게 된 사람이 두 사람 있지요. 하나는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 장군 죽지요. 그 다음에 또 하나는 다윗의 죽음을 대신한 죽음이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 밧세바와 동침해서 낳은 자기 자식이 죽어요. 이 죽음이 결합된 것이 다윗언약입니다. 다윗을 빠져버려요.

죽음과 죽음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언약이 구성이 안 됩니다. 한쪽은 죄로 인한 죽음이고 한쪽은 죄 때문에 억울하게 죽어야 될 죽음, 억울한 죽음과 마땅한 죽음의 결합이에요. 이게 다윗언약입니다. 시편 51편에 나오거든요. 억울한 죽음이 억울하게 안 되려면 나는 마땅한 죽음으로 내 인생을 수용해야 된다. 내가 죽는 것은 마땅합니다. 이게 세리고 강도고 창기거든요. 이 땅에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거예요.

어제 낮 설교 한 대목 말씀드리게 되면, 예수님께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귀신들린 자 소경된 자 절뚝발이를 낫게 하잖아요. 사람들은 그걸 남의 이야기로 여겼다고요. 그러면 내가 찾아가야 될 본래의 자리를 주님께서 콕콕 찔러줬어요. 죄악으로 덮여있으니까 눈이 다 감겨있는 거예요.

그래서 콕콕 찔러준 게 뭐냐?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이 나갔다는 말은, 우리가 이미 귀신들려 있다는 것을 콕콕 집어주는 거예요. 소경된 자가 이미 우리가 소경이란 뜻이에요. 내 자리는 소경이고 내 자리를 절뚝발이에요.

마태복음 11장 봅시다. 세례요한이 오실 분이 당신이냐고 자꾸 의심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한테 이야기해라. 4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그 다음에 뭐라고 돼있어요? “죽은 자가 살아나며” 이건 바로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살아났잖아요.

그렇다면 우리 자리는 뭡니까? 죽어있는 거예요. 심장이 뛰어도 산 게 아니에요. 죽어있는 거예요. 주님이 우릴 살려내지 아니하면 우리 몸은 죽은 거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껍데기를 품고 살아가는 거예요. 제가 껍데기라 했지만 고린도후서 5장에서는 뭐냐? 겉 사람은 버리고 속사람은 뽑아내는 거예요.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사도 바울의 소원이 옷을 벗는 거예요. 육체를 벗는 겁니다. 육체를 벗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게 소망이에요. 물론 그때까지는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봉사 일을 해야 되지만. 늙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그날이 가깝다는 뜻이에요. 어떤 사람은 새치기해서 젊은데 죽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그런 죽음도 복음으로 죽어야지 헝가리 놀러가서 죽지 말고.

그러니까 우리는 복음적 의미를 보여주지 못하면 성도라고 할 수 없음이죠. 다른 말로 하면 지하철에서 예수 믿으라고 외치란 말이 아니고 우리 주변 환경 자체가 이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사람 되려고 그렇게 애를 써도 주님이 그걸 용납을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정말 더러워서 못 살아요.

일가친척 주변 사람들이 맨날 하는 이야기가 그거에요. 너, 그러면 죽는데. 그들은 벌벌 떨고 있어요. 악마한테 매여서 내부적으로 자기 떠니까 나도 떠는 줄 알고 있어요. 너 아프냐? 나도 아프냐? 같이 떨고 있어요. 죽는 게 무서워서. 그럼 사는 방법은 뭐냐? 돈이죠. 그럼 얼마나 벌어야 돼? 그건 몰라요. 돈 있어봤자 행복하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어제 뉴스 보니까 문신한 한국 남자가 베트남 여자를 팼지요. 죽으라고 팬 거예요. 한두 번 팼겠어요. 남자는 구속당했는데 베트남 여자가 한국에 왜 왔어요? 돈 벌려고 왔지요. 그들은 돈만 벌 수 있다면 조폭이라도 괜찮다. 그걸 감수하고 온 거예요. 이 세상에 살기 위해서는 우린 아낌없이 악마한테 고개 숙일 만반의 준비가 다 돼있습니다. 그게 원자적인 개인이 취할 수 있는 한계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은 개인과 개인의 만남이에요. 그래서 허약한 유대입니다. 아주 허약해요. 거미줄보다 더 약해요. 언제 끊어질지 모릅니다. 자, 베트남 여자가 얻어맞아서 남편 구속되고 지는 갈 데 없어서 베트남으로 왔다 칩시다. 친정부모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더러운 것 잘 됐다고 이야기하겠습니까? 등짝 때리면서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란 말이죠. 어디 가도 돈 없으면 사람대우 못 받습니다.

실패한 것 위로하는 것도 며칠이나 가겠습니까. 그것도 더는 위로 안 됩니다. 인생 실패하게 되면 주변 사람들로부터 천덕꾸러기가 되는 거예요. 카프카의 [변신]이란 소설에서 평생을 가장 노릇했는데 하루아침에 벌레가 되었을 때 처음에는 돌보는 양 하지만 나중에는 온 가족이 다 떠나버리는 거예요. 그 유대관계가 돈으로 엮여진 관계에요. 네가 뭔데 날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 그겁니다.

제가 어느 강의에서 했잖아요. 엄마가 아플 때 자식은 도리 합니다. 허나 마음속으론 뭐예요? 아버지, 지금까지 돈도 못 모으고 치료비도 없이 왜 나한테 덤터기를 씌웁니까? 내 청춘 있고 내 인생 즐길 권리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아프면 내 남은 인생 보상할 겁니까? 돈을 아들한테 다 주고 딸이라고 무슨 이런 죄가 다 있나. 또 요양병원 가라니까 말 안 듣네. 환경이 다르다고 버티는 거예요.

안 가면 어떻게 할 건데, 안 가면. 난 정신 우울증 걸릴 판인데. 무슨 고집도 그런 고집이 다 있습니까. 왜 안 갑니까? 나의 고유함과 나의 나됨을 나의 절대성을 자식이 죽든 말든 지키겠다는 거 아니에요?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도 나이 들면 그럴 것 아니냔 말이죠. 너 키운다고 5억 들었다. 이렇게 나올 것 아니냔 말이죠.

따라서 구원 찾지 말고요, 하나님 나부터 조져주세요. 마귀를 보내든지 누굴 보내든지 나로 하여금 살 가치도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해 달라. 이게 복이에요. 전부 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나로 인한 내가 살고자하는 것에서 튀어나온 거예요. 그걸 다윗이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번제고 제사, 그런 변명거리가 아니고 교회행사하고 참석하는 게 아니라 상한 심령이다.

얼마나 다윗의 마음이 상했는지 몰라요.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우리야 죽기 전에 지가 죽는 게 나아요. 범죄 하고 난 뒤에 살래, 죽을래? 범죄 한 게 부끄러워서 죽는 게 나아요. 안 죽입니다. 왜? 상한 심령으로 살아야 되기에. 너 때문에 예수님 죽었다는 것을 살아 있으면서 증거하라 이 말이죠.

하나님은 다윗언약 그 틀 안에 주님 계시고 우리를 그 안에 집어넣었어요. 다윗만 경험하는 경험이 아닙니다. 우리도 같이 경험하라고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그게 바로 새 언약이에요. 우리는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살인하지 않았습니다. 남편 죽이지 않았습니다. 웃기지 마. 마음속으로 나에게 무시하고 모욕감 줬다고 저 인간 죽어도 마땅하다고 한다면 그건 이미 살인죄고, 그리고 어떤 여자가 아름답다는 생각만 들어도 어떤 남자가 멋있다고 들어도 이미 간음죄에요.

방탄소년단 다 죽어야 돼요. 세계의 소녀들 마음을 멍들게 만들었어. <겨울연가> 일본 아줌마들 좋아하는 배용준이 욘사마 죽어야 돼. 진짜 일본 남자들이 항의했잖아요. 욘사마 때문에 이혼하게 생겼다고.

세상 자체 속에 다윗언약을 집어넣는 거예요. 율법은 하늘에 있어요. 허나 율법에 따라서 어떤 인물이 등장하게 되면 환경이 전부고 동일한 현실이라고 여겼는데 낯선 현실이 뿜어져 나올 때 그 낯선 현질 중에 그중에 한 사람이 우리라면 우리는 이미 영생 얻고 구원 얻고 천국 간 사람입니다.

요엘 다시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재앙과 심판에서 마땅히 멸망당해야 되는데 그러면 여기서 누가 구원받을 자냐? 여기서 요엘 선지서의 전개는 이렇게 돼요. 벽에 부딪쳐버려라. 아까 요엘서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황충이 다 갉아먹지요.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나중에 잡혀갑니다. 그 황폐한 땅을 떠나요.

27절에 보면,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하나님께서 함께 있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뭘 포기하고 뭘 감사하라? 젖과 꿀, 외양간의 소 이런 걸 포기하고 무엇으로 기뻐하라? 하나님이 함께 있음에, 하나님 존재의 언약적 기능으로 참여된 것을 기뻐하라는 거예요. 그런 사람이 남은 자가 되고, 그 남은 자에게 뭘 주느냐? 28절에 보면,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라고 돼있어요.

그렇다면 여기서 세 가지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은 우리한테 세 가지를 집어넣습니다. 첫째는, 죽은 자가 생명을 얻어요. 생명은 율법 지켜서 오는 게 아니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갈라디아서 3장 2절에 나오지요. 네가 의롭게 된 것은 율법을 행함이 아니고 오직 성령으로 돼요. 영생은 성령으로 오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영생 주시는 분이에요. 영생 받겠다고 성령에게 손들지 마세요. 손든다고 주는 게 아니에요. 그냥 성령이 오게 되면 영생이 주어져요.

두 번째 성령은 뭐냐 하면, 이 땅의 고난을 견디는 힘을 주십니다. 고난을 없애주는 게 아니에요. 고난을 없애주면 우린 예수님과 무관한 사람 되고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이에요. 고난을 없애주는 게 아니고 고난 속에 일부러 집어넣고 그 고난조차도 우리의 성령의 힘을 이기지 못함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이건 어디 나오느냐 하면, 고린도후서 4장 7절, 신약성경 289페이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성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항상 내가 아니란 것이 그냥 습관처럼 저절로 튀어나와요. 제가 한 게 아닙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지난번에 보쌈집에 갔잖아요. 우겨 쌈을 당하여도, 환경입니다. 환경이 나로 하여금 이질적 존재라는 것을 환경이 말해줘요. 우겨 쌈을 당하여도 어떻게 합니까? “싸이지 아니하며” 그걸 부러워하지 아니하며 거기에 대해서 겁내지 아니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다음에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참 이런 표현이 어려워요. 설명하기도 어려워요. 왜냐하면 일단 답답한 일이기 때문에 답답합니까, 답답하지 않습니까? 일단 답답하지요. 그런데 답답하지 않데. 무슨 이런 기적이 다 있어요. 답답하라고 주신 환경인데 안 답답하데. 이것은 자기를 시체로 간주할 때나 가능합니다.

성경은 이거에요. 가시는 길 곱게 하시옵소서. 보람상조에요. 가시는 길 곱게 보내주는 거예요. 그냥 살았다고 여기지 말고 이왕 죽었다 치고 가는 거예요. 그들 말에 고개 숙이고, 죽은 자가 무슨 고갤 숙입니까, 죽었는데. 뭘 더 얻겠다고. 죽은 자는 죽음만 얻으면 되지 더 이상 플러스알파 얻을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얻어봤자 허무가 또 찾아옵니다. 꼴랑 이것 얻으려고 그 더러운 짓을 했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여행 갈 때 짐 쌀 때 제일 기뻐요. 비행기 탈 때 기분 좋지요. 그때부터 기분 끝났습니다. 가자마자 열세 시간, 허리 아프고 앞에 애가 울지요. 내려서 기분 좀 내려고 하는데 세 번, 네 번씩 짐 꾸리고 테러 때문에 한국 사람입니까, 짐 풀어보세요, 하면 또 다 풀어야 돼. 벌써 지쳤지요. 나오면서 소매치기 방지한다고 가방 앞으로 돌리고 지갑 단단히 챙기고. 짐 관리해야지 건물 봐야 되지, 정신이 없어. 또 가이드가 빨리 가자하고. 나이 육십 넘어서 갈 일이 아니죠. 나중에 여행 갔다 와서 주일날 교회도 못 갑니다. 퍼져서 시차 때문에 잔다고요.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혼자 사는 게 아니지요. 예수님의 새 언약 속에 십자가 안에 있는 겁니다. 십자가 안에 있기 때문에 내가 주님 앞에서 하나에 참새가 되고 들풀이 되면 돼요. 왜? 직접 살려주니까. 들풀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때까지 걱정할 권한은 없어요. 아궁이에 들어가면 주께서 들어가게 하면 목 잘려서 들어가는 거고, 참새가 굶어죽으면 참새가 그걸로 다 된 거예요. 그저 가시던 길, 주님과 동행해서 가면 되는 겁니다.

이게 성령이라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그래요. 성령 안에서는 이미 그 자체로 의기 때문에 율법 지키고 안 지키고 평가하지 마세요. 자기가 스스로 자길 심사할 자격이 없습니다. 살았으면 심사하세요. 이미 죄로 죽었거든요. 죽은 놈 만져봐야 소용없잖아요. 죄로 인해 죽었는데 뭘 거기서 흔들어서 기도하라고 왜 깨우느냐 말이죠. 죽었는데. 무슨 낙을 보겠다고, 이 땅에서.

네가 가난한 것은 기도 안 해서 가난했다. 목사가 맨날 교회에서 하는 보이스피싱이 그거잖아요. 기도 안 해서 가난하다는 거예요. 애 성적 떨어진 것이 말씀 안 지켜서 그렇다는 거예요. 말씀대로 안 살아서 그런 게 아니고 말씀대로 살려고 애썼기 때문에 저주받는 거예요. 그럴 필요도 없는데 헛짓한 거예요. 내 욕심 때문에. 기도해서 이익보겠다고 그 자체가 마귀한테 꼬임당한 짓거리한 거예요.

기도는 안 하는 게 아니고 하게 하셔요. 치약 배 터지도록 누르는데 아예 안 할 수가 있어요? 주여, 이것 너무 심합니다. 안 할 수가 있겠어요? 그게 기도에요. 기도는 반드시 옳은 기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내 목숨을 이 내용과 바꿨습니다, 라고 해야만 기도에요. 더는 안 살겠다는 내용과 바꿔치기 해주세요, 할 때나 기도지, 이것 이뤄지면 더 살겠다는 것은 가식이죠.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자주 되는 게 아니에요. 나의 계획이 좌초될 때 나의 모든 의도한 것이 다 망가졌을 때 깨지는 거죠.

다시 오늘 본문 13편 봅시다.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아까 다윗 앞에서 했던 것을 다시 해봅시다. 다윗의 환경들. 첫째는 왕, 두 번째는 시온이라 했지요. 세 번째는 뭐라 했습니까? 죽음이라고 이야기했지요.

시온 봅시다. 시온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도시에요. 천사의 도시, 신의 도시. 그걸 다윗한테는 시온이란 이름으로 주신 겁니다. 시온은 언약궤가 안치되는 곳이에요. 언약의 최종 도착지점이에요. 시온에서 지옥도 나오고 천국도 나오는 겁니다. 성전이 없는 곳 언약궤가 없는 곳이 지옥이고 언약궤 있는 곳이 천국이 돼요.

전에 여러 번 봤는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나오거든요. 11장 19절에 보면,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이래서 성경은 언약궤의 만들어짐과 이동경로, 그게 성경의 중심사상입니다. 그걸 달리 이야기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부활승천하신 경로, 그게 성경의 중심이에요. 예수님이 언약궤니까, 예수님이 어린양이고. 그래서 언약노선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비현실적 사람입니다. 망상 속에 있는 사람이에요.

남은 자에게만 성령이 오는 데 남은 자들의 어디 모이느냐 하면, 시온 산에 집결해요. 시온은 다윗 궁전이 있는 도성이죠. 다윗은 사실은 껍데기는 다윗이지만 속에 예수님이 계시거든요. 예수님이 시온의 왕으로 오시고 시온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시편 13편에서 기뻐한다는 것은 곧 시온에 그 정체가 높은 산처럼 우뚝 솟은 그 순간이에요. 그게 요엘에 나옵니다. 요엘에 보면 성령이 남녀노소 관계없이 남은 자에게만 오게 되고 성령이 온 사람은 나중에 시온에서 기뻐해요. 어디서 기뻐하느냐? 시온에 모여서 기뻐해요. 최종 도착지점에서 기뻐하는 겁니다. 이게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이끄시는 도착지점이 시온이에요.

그러면 나머지 도성들은 어떻게 되느냐? 시온 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나머지 모든 민족들은 다 멸망해야 돼요. 그래서 이사야나 예레미야, 에스겔에 보면 이방민족의 멸망이 예언돼있어요. 이스라엘 예언자가 자기 것만 하면 되지 남의 민족 멸망까지 왜 하느냐? 이게 숨겨져 있는 시온을 높이기 위해서는 다른 것을 낮춰야 돼요. 다 없애버려야 돼요. 이 땅에서.

그렇다면 이 땅이 단순히 나쁘다, 악하다가 아니라 이 땅을 두 종류로 구획, 두 영토로 나누기 위해서는 땅이 있어야 되지요. 이 땅은 좋다고 그게 지옥인지 천국인지 구분도 못하면서 그냥 이 땅에서 있어야 돼요. 그런데 언약이 등장하게 되면 언약에 속한 다윗은 특이성을 나타내는 겁니다.

그 특이성을 오늘 본문대로 설명하게 되면, 바로 하나님의 원수가 등장하죠. 그 원수는 새로운 환경을 일체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믿는 언약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돼있습니다. 핍박하는 모습이죠.

그러면 그 시온이 오늘날 교회가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베드로전서 4장 17절에 보면, 하나님의 집에서 먼저 심판이 시작된다. 이 말은 구약 이스라엘 자체가 이스라엘 아니었다 이 말이에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거든요. 손에 만져지잖아요. 이스라엘은 가나안이란 부동산을 갖고 있어요. 손에 만져지고 눈에 보이고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 소유다, 내 터다, 라고 있는 그것은 항상 쪼개져야 돼요. 쪼개지고 그 안에서 감추어진 내용이 솟구쳐 올라와야 돼요. 시온 성이.

그렇다면 우리 몸이 눈에 보이죠. 거울 보면 우리 몸이 있잖아요. 잘 봐놓으세요. 죽고 나면 더 이상 못 봅니다. 물론 늙어서는 거울도 잘 안 보려 하지요. 아무리 발라도 안 예뻐지니까. 내가 안 예뻐지는 게 문제가 아니고 내가 안 예쁘면 그동안 나한테 나의 고유성과 나의 나됨을 칭찬해주던 그런 사람들이 꼴 보기 싫다고 하나둘씩 연결고리가 헐거워져서 떠나 버릴까봐 그게 걱정이 되는 겁니다.

남편이 바람피우는 건 여자가 똥배 나와서 그렇다는데 똥배 안 나와도 마찬가지에요. 예뻐 봐야 인생 고락을 같이 했는데 뭐가 예쁘겠어요. 그땐 같이 바람피우면 되지, 뭐. 능력이 안 되는데? 능력이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해야지.

하여튼 법을 찢어버려야 돼. 법은 뭐냐? 변명입니다. 모든 법은 변명이에요. 법대로 해라. 자기 잘났다는 변명이에요. 법은 필요 없어요. 영생은 뭐로 온다? 성령이 와서 법이고 나발이고 이 세상 자체가 지옥이라는 걸 깨닫게 하는 그 안목이 증거인데 법을 지켜서 영생은 없습니다. 그거는 악마의 속임수가 교회가 그렇게 속이고 목사가 그렇게 속이는 거예요.

이제 마지막 마치겠습니다. 세상 멸망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터무니없이 너무 거리가 있어 보이죠. 이렇게 괜찮은 세상에 하늘에서 유황불 떨어진다? 말이 안 된다. 난 못 믿겠다. 그건 자기가 멀쩡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은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고발하기 때문에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기어이 자기 잘남을 이야기하고 성령 받은 사람은 처음에는 변명대고 내가 어떻고 하지만 자긴 알아요. 또 죽은 놈이 이 땅에서 떠나기 전에 잘난 척해봤구나. 주여, 용서하옵소서.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다. 다시 한 번 말씀의 세계로 되돌아올 수 있는 그러한 능력, 그게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을 받았기에 이 세상을 부러워하면서 견딜 수 있는 힘이 작용함을 저희들이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을 제발 부러워하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이전글   다음글 ▷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 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