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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지역강의 > 부산강의
2019-10-14 15:59:21 조회 : 363         
죽음 사건 191014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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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221.♡.126.19) 19-10-16 14:33 
20191014a 부산강의 : [시편]22(14편)-죽음 사건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14편 5절에서 7절까지입니다. 일단 제가 읽겠습니다.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아멘.

이 본문이 너무나 너무나 많은 것이 함축돼있고 함축됐다는 것은 깊이가 깊다는 것이죠. 그때는 위에서 표면에서 뚫고 내려가야 되는데 우선 생각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즐거워하고 기뻐한다면 7절에 보면, 포로된 것을 돌이키신다고 했는데 아예 포로 안 되도록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우리 생각에.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 기뻐하지 마시고 아예 적들에게 안 잡히면 좋지 않을까, 우리 생각이거든요.

포로된 일이 없을 경우에 그냥 기뻐한다면 무엇이 누락되고 무엇을 건질 수가 없는가?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될 겁니다. 하나님께서 포로 됐다가 탈출시키는 과정이 만약에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점을 모르게 되고 빠트리게 되느냐고 질문을 던져야 되겠지요.

여기서 죽음도 사건이 포함된다, 라고 제가 말을 썼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이 태어나서 죽잖아요. 죽음이 있단 말이죠. 이건 출생이고. 출생에서 죽는 것까지 인간이 생각한 전부에요. 만약에 부활이 있다. 다시 삶이 있다면 출생이 끝이 아니고 부활이 끝이기 때문에 죽음은 이 가운데 있는 하나의 사건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죽음이 끝이기 때문에 여기서 모든 것을 결정하려고 해요. 이것을 사람들은 사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의미란 것은 시간에서 끊어지는 것이 있을 때 거기서 의미가 생기는데 그 의미는 죽음 이전에 여기서 다 모아놓은 것, 집합한 것, 구성된 의미죠. 여기에서 탈출해야 된다는 겁니다.

죽음에서 점점 부활의 세계로 간다면 우리는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 반드시 죽음이란 것을 경유해야 된다는 거죠. 죽음이란 사건이 없으면 하나님이 생각한 영생의 나라가 우리 속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예요. 여기서 어려워요. 진짜 정말 어려워요. 제가 어렵다고 미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부활의 세계가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부활을 상상하는 것과 하나는 실제 하는 것. 죽으면 부활한다.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꽝이에요. 이거는 백날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런데 부활이 실제 한다면 이건 동그라미에요. 그러면 죽고 난 뒤에 부활이 있겠지. 이거는 꽝이에요. 이건 말도 안 돼요. 이건 해봐야 헛수고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부활이 있다면, 이 부활은 미리 이 앞에서 의미가 덮치는 겁니다. 이걸 선취라고 하는데요. 미리 경험한다, 미리 맛본다, 미리 취한다, 미리 갖게 된다. 선취라 합니다. 이걸 가져다주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 우리가 죽기 전에 맛보아야 될 부활을 이건 상상밖에 안 되니까 상상은 쉽게 말해서 착각인 거예요. 보통에 교회에서 이걸 많이 하지요. 죽어도 믿습니까? 이런 건 착각이에요.

이게 실제가 되게 되면, 지금 여기 부활의 삶에 미리 들어가게 됩니다. 그럼 두 개의 의미가 있습니다. 제가 하나는 빨간 것으로 썼고 하나는 까만 것으로 했지요. 나라는 인간 안에 두 개의 의미가 작동하고 있어요. 이 의미는 뭐냐 하면, 탈출할 수 없는 이유와, 점점 말이 어려워지더라도 참으세요.

이 의미는 죽음이 끝나기 때문에 죽음에서 못 벗어나는 것들로 모여 있는 의미에요. 죽음에서 못 벗어나는 이유들로 모아진 의미죠. 사람이 왜 죽는가 하면 죄 때문에 죽고, 죄가 뭐냐? 자기 의로움이거든요. 자기 의 때문에 죽는단 말이죠. 선과 악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이게 바로 죽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런데 이 의미 때문에 죽음에서 탈출이 못 돼요.

그런데 이쪽 의미는 이게 용서거든요. 용서, 정죄함이 없느니라. 이건 선악이 아니고 생명나무, 그리고 이건 사랑이고. 앞에 있는 죽음은 율법이란 말이죠. 율법 안에 있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기 때문에 죽음 심판 안에 있기 때문에 의미는 이 의미가 전부에요. 여기서는 두려움과 무서움, 공포, 걱정근심 나오지요. 아까 두려움 나온 것 같은데요.

제가 지금 5절 강의하고 있는데요.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하나님은 위쪽에 있는데 아래쪽 있는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거예요. 죽는 게 무서워서 이것이 끝장났으니까 나는 죽음이 주는 공포의 의미가 앞의 의미로 가득 채우는 겁니다. 벌벌 떨면서.

그런데 이미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거예요. 죽는 것이 마땅함을 받아주는 의미가 두 번째 의미에요. 죽음을 겪지 않고서는 부활이란 게 없는 겁니다. 그러면 죽음의 의미는 뭐냐 하면, 인간의 한계를 말해줘요.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 부활은 누구 손을 타느냐 하면, 바로 주님이 친히 손을 대줘야 돼요. 주님의 공로가 되고 주님의 일방적인 자기 작업이 들어가야 돼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안 돼요. 빨리 공부하고 일하러 가셔야 되니까. 일해야 먹고 살지요. 잘리면 무섭잖아요. 두렵고 두렵잖아요. 잘리면 자식들 뭐 먹고 살고 나는 노후대책 하나도 안 돼 있는데 걱정근심이 가득하단 말이죠. 이거거든요. 이것을 필히 간직해야 돼요. 이게 노른자라면 흰자가 있어줘야 되거든요. 노른자가 뭐냐 하면,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 그냥 죽으면 안 되지요. 죽는 이유가 있어야 되지요. 자기 의, 율법, 법대로 바르게 살자. 그러면서도 계속 쫓기 벌벌 떨며 살아가는 것.

거기에 대해서 성령께서 알려주는 바는 뭐냐 하면, 다 이루었다, 에요. 대신 다 이루었다. 처리했다. 끝냈다. 그런 것이 성도한테는 중복돼있습니다. 중복현실이라 하는데. 현실인데 불신자에겐 없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부활의 선취성, 부활의 능력이 죽음과 함께 있으면서, 그냥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 시작은 죽음의 두려움부터 그리고 그것의 끝은 이겼다는 것. 내가 법이라는 것, 법의식, 양심이라든지 거기에 구애받지 말라. 그걸 어제 낮에 주눅 들지 말라. 그런 겁니다.

그럼 우선 성도라 치고, 성도니까 선취된 입장에서 좀 더 자세하게 제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그렸던 것이 하나의 철학이론 같으면 우리는 참고하면 그만인데 예수님이 실제로 죽으시고 실제로 사흘 만에 부활했어요. 그러면 이야기 끝난 거예요. 정말 이거는 부활이 없다는 인간들이 거짓말쟁이에요. 그들이 가짜 인간이고.

예수님이 부활 안 했고 우리가 부처를 믿는다든지 어떤 철학자를 믿는다면 이건 참고사항으로 하겠는데 실제로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해버리면 우리가 아는 세계보다 포괄적이죠. 범위가 더 넓은 거예요. 사는 운동장이 더 넓다. 좀스럽게 사는 게 아니고 활짝 핀 거예요. 전체가. 그 운동장에서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살려둘 때 그 살려둔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 그 점을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출발은 인간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인간은 항상 자기를 생각하지요. 이걸 주체성이라 해요. 나는 누군가, 나는 어떻게 사는가? 출발은 이건 신자건 불신자건 관계없어요. 살 때 주체성을 이야기하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타인으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고 관심을 받게 되고 시선을 두게 됩니다. 이 타인을 개체성이라 합니다. 주체가 있으면 반대에 개체가 있거든요.

그래서 항상 주체성이 주목을 받으니까 나라는 인간은 내가 뭘 어떻게 살까, 하는 것은 항상 곁눈질하게 돼있지요. 이웃이나 주변사람. 주변사람이 대표적으로 누구겠어요? 가족, 심지어 강아지, 고양이까지 포함해요. 내가 행동 잘못하면 고양이가 얼마나 화를 내는지를 하면서 자기 행동을 수정해 나가기 시작해요. 그게 뭐냐? 개체라 합니다. 개체가 인간뿐만 아니고 환경까지 다 포함되지요.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인간이 고분고분할까요, 안 할까요? 안 합니다. 네가 그걸 요구해도 참다참다 나도 폭발한다. 나는 더 이상 네가 시키는 대로 끌려가는 인생 하기 싫다고 자기 나름대로 공격을 타인에게 시선을 주겠지요. 너는 나에게 달라지라 하지만 나는 말한다. 네가 달라져라. 이걸 시선투쟁이라 해요.

시선투쟁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게 바로 피곤함을 유발한다는 것. 공장이나 회사에서 주인 된 사람들, 감독된 사람들은 항상 이런 입장에 있어요. 공장에서 일할 때는 일사천리로 모든 직원들이 집중해줘야 돼요. 안 그러면 하자가 생기니까요. 하자 생기면 수출할 때 클레임 발생해서 안 되거든요.

집중할 때는 감독을 해요. 집에서 피자 포장지 접는 것하고, <기생충> 영화에서 온 식구가 피자 포장지 접는 일을 하다가 20퍼센트 하자나서 피자집에서 화내는 것 있거든요. 또 인형 눈 붙이는 것. 그렇더라도 이거는 피곤해요. 왜냐하면 감독관이 있기 때문에. 감독관 시키는 대로 하려하니까 또 감독관 살아온 인생이 있잖아요.

그럼 나는 내 인생 없습니까? 이걸 돈이라는 이유 때문에 억지로 맞추려고 하니까 피곤해 미치는 거예요. 단지 돈인데. 더러워서 안 한다고 식당 같으면 앞치마 던지든지, 사표를 내든지 더러워서 못하겠다. 이것 아니면 내 못 먹고 사냐고 하지요. 왜냐하면 네 인생 있는데 네가 뭔데 내가 니 인생 따라갈 필요 있느냐? 이쪽에선 말하기를, “돈 주잖아, 돈. 너 딴 데 가면 이만한 돈 주는데 봤나?” 이래 된다 이 말이죠.

우리 목사님한테는 해당이 안 되지만 다른 노회 목사들은 다 해당이 돼요. 돈 때문에 목사하기 때문에. 심지어 목사들이 이런 생각이 들어요. 돈 안 주는데 꼭 목회할 필요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니까. 돈 많이 벌면 목회 안 할래. 놀러 다닐래,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어요. 든다고 단언을 안 했습니다만 들 수도 있어요. 그 정도 피곤하다.

여기 시선투쟁에서 주목해야 될 게 뭐냐 하면, 시선투쟁에서 법이 생깁니다. 율법이 생기죠. 자, 율법이라 하는 것이 인간은 법이 있지만 타인을 인간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으로 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목한다. 이게 시내 산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뭘 받아와요. 뭘 받아옵니까? 십계명+율법+제사법 받아오지요. 이걸 율법이라 합니다. 더 크게 이야기해서 선지자의 발언도 율법에 들어가요. 더 크게 이야기해서는 사도 바울이 하는 명령도 율법에 들어가요.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뜻이 법이라는 형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법의 형식으로 주어진다는 말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라 또는 하지 말라. 딱 두 종류 명령법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하라 하면 안 하고, 하지 말라 하면 하고. 이게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탐내지 말라는 순간 갑자기, 하나님께서 탐내지 말라는 말로 우리를 후비고 작업하게 되면 우리 속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탐내고 싶다는 욕망이 나온다는 거예요. 제 이야기 아닙니다. 로마서 7장에 나와요. 탐내지 말라는 순간 탐을 내는 거예요.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줄 알라고 디모데전서에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그러면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줄 알면 우리는 그게 사는 걸로 알아요. 그게 물건이지 사는 거가. 짐승도 아니고. 먹는 것으로 산다고? 사는 재미가 있어야지. 대번에 이게 나오게 돼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봐야 우리 속에 잠자고 있는 죄가 나와요. 말씀을 안 보면 자기 의로움이 돼버려요.

어제 오후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하나님의 세계에 대해서 아무 의미 없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관계는 내가 죄의식을 가질 때에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삼위일체고 이래서는 하나님은 이론 하나님이고 실제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해서 반항하는 마음이 드는 순간 누가 놀래느냐 하면, 내가 놀라는 거예요. 내 속에 이런 반발심이 내 허락도 없이 들어앉아있었구나. 이건 진짜 내 진심이 아닌데 왜 이게 들어앉아있지, 이런 생각이 들어요.

로마서 7장에 보면, 내가 선을 원해도 내 속에 원하지 않는다는 게 있다는 그게 뭐냐 하면, 원하지 않는 악이 짓밟고 까불지 말라고 선을 억누르면서 튀어나오게 돼있는 이것이 바로 인간이며, 이 인간인 것을 아는 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 성령 받은 성도에 한해서만 그렇다는 거예요.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성도는 악이 안 나오는 사람이 아니고 진짜는 내가 악 덩어리인 것을 다윗처럼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났다는 것을 어떻게 그것에 눈을 뜹니까? 이게 아까 이야기한 부활의 세계에서 오는 시선이 이미 들어왔기 때문에 가능한 거고 여기서는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시선에 동참해서 나를 다시 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란 말이죠.

그러니까 교회에 가서 착한 사람 된다는 그런 낭설을 믿지 마세요. 그건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착한 사람이 지옥 가는 거예요. 이삭에 아들이 둘 있지요. 에서와 야곱. 둘 중에 누가 거짓말했습니까? 누가 의도적으로 속였어요? 야곱이 속였지요. 천국 갔습니다. 에서는? 착실하지요. 아버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했지요. 지옥 갔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아버지 유산 빼돌려서 기생들과 다 말아먹고 탕자 된 그 사람과 평생토록 아버지 옆에서 착실하기 그지없지요. 아버지 곁을 떠나본 적이 없는 아들, 누가 하늘나라 칭찬받습니까? 탕자가 칭찬받아요. 반전입니다. 역전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회계담당직원이 횡령을 했어요. 횡령한 사람과 횡령하지 않은 사람 중 누가 천국 갑니까? 횡령한 사람이 천국 가지요. 그걸 불의한 청지기라 하지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아, 네가 네 자신이 누군지 모르고 그걸 교묘하게 덮고 있다. 평생을 덮는 인생이에요. 그래서 어제 오후 설교에서 자기로부터 개종하라 했지요.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고 밖에 있는 것을 속으로 집어넣어야 돼요. 내 종교로부터 개종하는 거예요. 전에는 예수를 믿어도 기독교를 믿어도 이게 내 종교였어요.

나를 위해서 예수 믿고 나를 위해서 부처 믿고 하는 그 종교에서 이제는 나를 위해서 살아가지 않는 종교로 바꿔야 되겠지요. 차라리 나를 까발려주시옵소서. 노골적으로 다 드러내게 하옵소서. 위층에 있는 중복된 현실이 아래층에 있는 우린 눈에 보이는 현실, 보이지 않는 현실이 보이는 현실을 완전히 뒤집어 주시옵소서. 그리 되겠지요.

인간들은 하나님 빼놓고 인간들이 나에게 요구할 때 처음에는 협력합니다. 뭔가 있을까 싶어서. 협력하다 나중에는 거절해요. 협력하다 거절하는 이유는, 너무 타인에게 끌려가는 인생이 돼버리면 내 주체성이 제거된다는 위협이 있어요. 뭔 뜻인지 아시겠지요. 너무 남한테 끌려가면 내가 제거가 되지요. 제거 위협을 받고 여기서 반발이 일어납니다.

이 반발이 바로 악마의 심술이에요. 우리 안에 사실은 아담 안이에요. 우리라는 게 없습니다. 나라는 게 없어요. 사실은 아담의 덩어리 중의 일부에요. 터럭 하나. 성경대로 하면. 그러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내 죄가 아니고 누구 죕니까? 아담의 죄. 핑계 좋~지요. 나쁜 짓해놓고 내가 죄 지었나 아담의 죄지었지. 믿음 좋지요. 선악과 내가 따먹었나? 아담이 따먹었어요.

선악과를 아담이 따먹었잖아요. 그러면 아담이 죄를 지은 게 아니고 아담 안에 죄가 들어온 거예요.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이 차이가. 이 차이 모르면 정말 성경 이해 안 됩니다. 아담이 죄를 지은 게 아니고 죄가 아담을 덮쳤지요. 그러면 아담을 자식을 낳고 자식을 낳고 자식을 백날 낳아도 큰 단지 안에 있는 쥐새끼처럼 그 단지를 못 벗어나요. 로마서 5장 이야기입니다. 성경이 아니면 그 실정을 어느 누구라도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시 정리할게요. 타인이 요구할 때는 그냥 요구하는 게 아니고 법적인 체제를 가지고 요구합니다. 법적인 체제는 뭐냐? 하라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이 하지 말고. 그래서 엄마가 자식에게 게임 그만 하라, 스마트폰 그만 봐라, 공부해야지, 숙제해야지. 벌써 어릴 때부터 부모라는 타인이 나라는 아들에게 계속해서 시선하고, 시선이란 다른 말로 하면, 관찰이죠. 그 아들의 스케줄을 파악하는 거예요.

아침에 학교에 몇 시에 도착했고 끝나는 시간은 몇 시야? 전화할까, 딴 데 빠지는지? 학원가야 되는데 몇 시에 갔어? 학원선생한테 전화해볼까, 몇 시에 끝났는지? 친구와 어디 갔어, 이실직고해. 완전히 장악해서, 너 그래서 좋은 대학 가겠어? 벌써 목표까지 다. 이 목표는 누구 목표입니까? 엄마 목표에요. 이 세계를 엄마의 나라라고 하는 거예요. 엄마의 나라가 확대되는데 있어서 자식은 기여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엄마의 나라를 다른 말로 엄마의 주체성의 나라에요. 엄마의 주체성을 위해서 엄마는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이거는 누구냐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아들이 엄마한테 대들면 그 다음부터 엄마는 자기 과거 스토리가 나오지요. 네 아버지 독일 가서 죽고 난 뒤에 나는 너와 시장바닥에서 시래기 줍고 살았다고 하면서 <하얀 나비> 부르면서 <수상한 그녀>란 영화에 나와요. 이렇게 키웠다고 늘어놓는데 이건 한 번만 더 들으면 구백구십 번 듣는 이야기라.

끊임없이, 끊임없이 하고요 다만 엄마는 술 안 먹고 이야기하고 아버지는 술 먹고 이야기한다는 그 차이. 술만 먹으면 아버지는 그 이야기하고 엄마는 술 안 먹고 맨 정신에 한다는 거예요. 그 차이뿐이에요. 그걸 기억의 횡포라고 합니다. 과거의 횡포. “엄마, 왜 그렇게 사는데?” 안 그러면 우린 죽거든.

처음에 강의 뭐라 했습니까? 죽음이 죽음 되면 더 이상 사건 없다는 거예요. 사건은 죽음이 사건이 아니고 출생과 죽음 사이가 사건이라 보고, 이게 만약에 부활까지 영역이 확장이 되면 죽음도 반드시 치러야 될 사건에 포함이 되지만 만약에 부활의 현재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죽겠다는 거예요. 죽음은 사건이 아니니까 일단 내가 있어야 의미가 생기고 죽으면 의미 없기 때문에 죽기 전에 나의 나됨을 극대화시키자. 이게 악마의 심술이고 악마의 발악입니다. 네가 신인데 죽기 전에 신 노릇하고 죽어야지, 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시 정리하면, 인간은 나 외에 주변에 둘러싸여있다. 그때부터 교육받는다. 말이 좋아서 양육이지 이거는 아빠 엄마의 세계에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너,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라고 물을 때 아이들은 이미 이런 법적인 권력체제를 알기 때문에 우리 집에서 누가 서 센지 보고, 엄마가 세면 엄마가 좋아, 하고 아빠가 세면 아빠가 좋다고 하는 거예요. 경제권을 누가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결정되겠지요.

그러면서 애들은 주체성이 드디어 나중에 청소년기, 사춘기라 하지요. 사춘기가 되면 반발합니다. 반항아 되어 반발하면서 자기의 주체성을 살려주는 친구를 찾아서 엄마의 눈을 피하고 아빠의 눈을 피하면서 드디어 자아성이 형성이 돼요. 주체성이 형성됩니다.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그런 여자를 데리고 왔느냐고 하면서 드라마에 나오는 수준 낮은 여자를 데려오면 집안 꼴이 어떻게 되겠느냐고 이런 식으로 갈등이 생기는 이유가 전부 다 이러한 과정을 겪는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보면 내 안에 나라고 형성된 것은 사실은 내가 아니고 남, 타인의 생각이 나에게 꽉 차있고 나는 그냥 포장지에 지나지 않아요. 이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주체성이 없어요. 인간은 주체라고 했는데 어설프게 포장한 것뿐이고 뜯어보면 남들이 나를 수정하고 개선하고 남들의 눈에 맞춤에 따라서 형성된 것들이 가득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사회생활 해보다가 가끔 명절에 고향에서 아는 친구들, 가까운 일가친척들 만나면 이상하게 이야기가 잘 되지요. 서울에서는 점잖아야 되고 행동 똑바로 해야 되고 할 말 안 할 말 가려야 되지만 촌에 옛날 어릴 때 물가에서 놀던 순자고 뭐고 그런 친구들은 허물없이 사이기 때문에 옛날이야기하면서 명절이 후딱 지나가요.

그래서 이런 말 있잖아요. 대화가 된다는 말은 고생을 같이 한 경우에 한한다. 역경이 같이 이겨낸 경우에는 대화가 돼요. 왜냐하면 같이 고생했기 때문에 스스로 설 수 없기 때문에 남에게 의지했거든요. 의지한 쪽의 도움 받는 것이 내 기억에 차고 있으니까 그 기억에서 언어가 나와요. 개념이 나온다고.

지금까지 나라는 인간을 형성하면서 모아놨던 모든 개념이 그때 나에게 도움과 고마움이 섞인 채 개념이 나온단 말이죠. 만약에 도와준 사람이 안경 쓴 사람이라면 이상스럽게 안경 쓴 사람에게 호감이 가고, 만약에 사기 친 사람이 안경 쓴 사람 같으면 두 번 다시 안경 쓴 사람 만나면 죽여 버린다. 그런 게 있겠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과거의 횡포에 시달리는 겁니다. 이게 악마의 횡포에 시달리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뭘 하느냐? 우리에게 성가신 악마를 수사하라. 우리에게 형사 일을 맡기는 거예요. 악마를 수사하라. 보통 교회에서는 악마를 피하라고 하잖아요. 악마를 피하라, 도망치라 이러잖아요.

하나님은 성도로 하여금 포로된 것, 네가 재수 없어서 잡혔다가 아니라 의도적이에요. 하나님께서 악마의 목구멍에 캡슐로, 천사 가브리엘과 같이 노는 게 아니라 우리가 기피하는 악마의 목에 우리가 침투하는 겁니다. 뭘 보라 하느냐 하면, 바로 악의 발악을 보라는 거예요.

요나가 배에 있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나로 하여금 배를 파손시키는 원인제공자로 보고 요나를 바다에 빠뜨리죠. 인간의 악은 바다처럼 깊어요. 그러면 요나 선지자가 예수님을 대행해서 바다에 빠져야 돼요. 그러면 배에 있는 사람들은 저 사람 죽었다고 하죠. 예수님은 죽었다가 부활했습니다. 이게 요나의 표적이에요.

예수님은 누가 봐도 이건 죽었다. 저 사람 끝장났어. 죽으면 그 뒤는 없는 거야. 예수님은 왜 그걸 모를까? 전부 다 측은해하고 예루살렘 여자들은 울고 하지요. 예수님은 말하기를,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네 딸을 위해 울어라. 예수님께서 죽음의 끝이 되는 바다, 우리는 악마로부터 그렇게 교육받았던 그 세계에서부터 이 세계 말고 다른 세계 있네. 몰랐지롱, 해서 나오면서 이 세상을 재수사에 들어가는 겁니다. 화상연쇄살인사건 재수사에 들어가는 것처럼.

예수님이 경험한 예수님이 다녀간 이 세계에 대해서 성도들을 보내서 재수사에 들어가요. 이런 적극적 삶의 태도, 내 인생을 수사하는 거예요. 피하는 게 아니고 도망치는 게 아니고 도피하는 게 아니고 이 세상 허무하다. 나는 기도원에서 기도하다 천당 가야지. 이러는 게 아니고 내 인생을 도마에 놓고 재수사에 들어가는 겁니다. 마귀야 정체를 밝혀라. 나를 괴롭게 한 게 너지, 하고 재수사 업무를 형사과에 배정해서 재수사에 들어갑니다. 그 말은 이미 수사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이 있다는 거죠.

성경 찾아봅시다. 로마서 8장 8절을 누가 읽어볼까요.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 아담의 육을 갖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그러나 이건 성령 받은 사람의 고백이고요 성령 안 받으면 육신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나님이고 뭐고 관심 없고 육신으로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참혹합니까? 지금 그것만 짜증을 낼 뿐이에요. 아까 그게 반발이고 반항이죠.

내가 엄마 아빠와 살 때는 좋았는데 세상에 나가서 힘들 때 내가 어느 타인을 잘못 만나서 이런 사단 났는가를 자기 행복을 위해서 점검해나가지요. 그런데 이미 부활의 능력이, 성령님은 부활의 능력이니까 부활의 능력이 온 사람은 자기를 확정지어버려요. 나는 죽어 마땅함을 확정시킵니다.

죽는 이유가 뭐냐? 육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누구를 기쁘게 못했다? 하나님을 기쁘게 못하면 지옥 가야 돼요. 이 원칙에 토 달지 마세요. 하나님, 저만 빼주세요. 또는 제 딸은 빼주세요. 제 아들은 봐주세요, 없어요. 그건 어떤 외부의 압력, 어떤 수사 압력도 통하지 않아요. 그냥 원칙이에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 사람은 지옥 가야 돼요.

그럼 천국은 어떤 사람이 간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만 가는 거예요. 둘 사이에 중간지점은 없습니다. 어중간한 지역은 없어요. 양 다리 걸치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의 관심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면 어떻게 되느냐? 그게 9절부터 나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이렇게 돼있지요. 그 뒤의 말은 제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성령이 있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요. 제가 이것을 설교시간에 서랍장에 있는 보물이라 했는데 이사 가는 사람이 서랍장을 옮길 때 옛날 서랍장 놔두고 가지요, 하는데 서랍장이 문제가 아니고 서랍장 열어보면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귀한 보물이 들어있거든요. 그 보물 보고 옮기는 거예요.

우리는 구닥다리에요. 이 세상 육신에 속하고 우리는 어떤 면을 봐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요소는 없고 그럴 재주도 능력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께서 쓰레기 같은 육신에다 귀한 걸 집어넣은 거예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말씀이 뭐 됐다? 육신이 된 거예요. 육신이란 더러운 거고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으신 거예요. 죽어야 마땅할 육체에다 예수님이 오셔서 죽을 육신을 그 다음에 성령에 의해서,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 된다.

성령 때문에 죽을 우리가 성령이란 요건 때문에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내가 도로 뺄 수 없는 이미 들어와 버렸기 때문에 아무리 나가라고 빌어도 사정해도 안 나가는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부활의 세계에다 집어넣어준다 이 말이에요. 사도 바울은 이걸 복음이라 해요. 로마서 1장에서. 나는 복음을 위해서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사도로 부름 받았다는 겁니다. 정말 이 시대에 이슈가 돼야 될 내용입니다. 이 내용이.

따라서 수사가 가능한 것은 성령의 입장이기 때문에 육신을 놓고 본격적으로 내가 나를 놓고 수사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 거예요. 성령이, 내가 어느 점에서 미처 모르는 죄들이 내 육신으로 과거에 저질렀고 앞으로도 저지르게 되는지를.

만약에 여러분이 집에서 혼자 로마서 8장을 보고 기뻐서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주체성 아닙니까. 딸이 있다가 “엄마, 나 공부하는데 시끄럽다.” 하면 조용해야 돼요. 이게 바로 혼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던 뭘 하던 간에 같이 사는 타인이 시끄럽다 하면 말 들어줘야 돼요. 안 그러면 따로 나가서 살아야 되기 때문에 조용히 해줘야 돼요. 동영상 소리 줄여라, 하는 이야기 많이 들었지요. 지 혼자 은혜 받지 남까지 강제로 전도하려 하지 말라. 이런 식으로.

이게 바로 육신의 연약함이거든요. 아까 제가 딸이라 했거든요. 딸은 내 육신에서 태어난 딸이에요. 그래서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내 딸의 운명은 누구 책임에 있느냐 하면, 내가 낳았기 때문에 내 책임 아래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어요. 그러나 이것은 아까 이야기한 이 세대, 딸이 잘못 되면 내가 힘들다는 두렵고 두려워하는 세대, 딸이 굶어죽으면 안 되지, 하는 죽음 사이에 있는 나의 의미가 이거죠.

그러면 부활의 세계에서 와버리면 딸은 뭐로 보이느냐 하면, 제2의 나에요. 전에는 나만 두고 수사하다가 이제는, 잠간 올래? 날 빼닮았어. 이게 좀 기분 나쁠 때는 수정하겠습니다. 반은 나 닮았어. 그것까지는 양보해주세요. dna가 50%는 닮았으니까. 저거 지 애비 빼닮았어. 나쁜 건 지 애비잖아요. 그러지 말고 반은 나 닮았다고 긍정적으로 표현합시다.

어쨌든 반이 나 닮았잖아요. 그러면 딸이나 아들이나 얽힐 수밖에 없는, 아들 장가 보내놓고 계속 김장해줘야 하나, 마나 김장하다가 집어던지는 것 아닌가, 며느리 눈꼴사납지 않는가? 이렇게 계속 신경 쓰는 이유는, 이게 얽혀야 될 이유는 나의 육신의 확장이에요. 내가 눈 뜨고 살아 있는 한 내 육신으로 번진 결과에 대해선 나의 육신의 연장입니다. 관심 끊을 수가 없어요.

아들이 질질 울고 딸이 울면 찾아가봐야 돼요. 대출 좀 해 달라 하면, 내가 제2금융권이가, 이렇게 화를 내면서도 오빠, 돈 좀 있나? 뭐 할라고? 우리 아들이 뭐 한다 하는데 한 달 되면 갚는단다. 이자 쳐줄게. 이러면서 또 찾아본다고요. 엄마, 이천만 당기면 위기 넘기겠는데, 하면 또 엄마가 나서야 돼요. 무슨 팔자가, 장가보냈으면 끝났는데.

에베소서 5장에 나오잖아요. 자식은 부모를 떠나라고. 안 떠나요. 떠나질 않아. 빨대 꽂고 이용해먹고 있어, 지금. 나는 떠났는데 지는 안 떠났어. 이게 바로 내가 부모한테 했던 타인의 시선에서 본 내 모습이에요. 그것조차도 수사대상에 들어갑니다. 지독하구나. 육신이라는 게 이렇게 지독하구나.

그러니까 오늘 말씀대로 우리가 포로 된 자지요.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것은 포로 된 경우가 있어줘야 더러운 악마의 지배를 받는 세월이 있어줘야 왜 하나님께서 그냥 기뻐하는 게 아니고 포로 된 것을 돌이키실 때 기뻐하는지를, 하나님이 기뻐하면 그만이지요. 그걸 같이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겁니다.

인생 구원받고 난 뒤에 그 다음 날 죽으면 참 좋겠는데 주께선 그렇게 하질 않습니다. 밑천 들였는데 본전 뽑아야 될 것 않습니까. 니가 99세까지, 참 지난 금요일에 우리 외숙모님 돌아가셨는데 내가 설교시간에 잘못했어요. 99세가 아니고 백세에 돌아가셨어요. 만으론 99지만 백세 끊고 돌아가셨어요. 돌아가면 뭐 합니까? 본인은 딱 하루인데요. 남들은 백세라 하지만 할머니 본인의 입장은 뭡니까? 기억나는 건 오늘 하루 뭐먹고 사나, 오늘 아침은, 인생은 그거에요. 마찬가지에요. 자기를 기쁘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 없어요.

아까 상상하듯이 천당 있다 하지만 상상은 소용없습니다. 꽝이에요. 실제로 죄의식이 있어야 돼요. 죄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육신 자체가 죄고 이젠 나는 느긋한 마음에서 죄 진 나를 의의 입장에서 수사하면 되는 거예요. 긍정적으로. 나는 죄인이다. 빨리 죽어서 천당 가야지. 이러지 마시고 죽여 달라고 하지 마시고.

이제는 본격적으로 어떤 점에서 죄냐? 전에는 내 몸까지인데 이제는 나와 관련된 몸까지, 내 친구까지 확대해서 친구 몸이나 내 몸이나 똑같은 성질이니까 그걸 보면서 악마를 뽑아내는 겁니다. 뽑아내서 뭐할 건데? 뽑아내서 주님이 이미 승리했다는 것.

로마서 8절 32절 봅시다. “자기 아들을 아까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정죄하리요”를 어디서 끊느냐 하면,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하고 끊지 마세요. 의롭다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우리는 서랍장이고 서랍장 안에 하나님의 의로움이 우리 안에 들어있는데 누가 정죄합니까? 내가 정죄하지요. 내 육신이 정죄하는 거예요. 좀 더 완벽했으면 얼마나 좋을꼬, 내가 그때 실수 안 했으면 얼마나 좋을꼬.

실수 아닌 게 없는데 무슨 따로 실수를 고릅니까. 고를 걸 골라야지 모든 게 실순데요. 육신이 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실수가 되는 거예요. 내 기뻐하는 모든 것이 주님 기쁨과 관련 없다는 점에서 실수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육신을 할 수 있는 재주가 실수하는 재주 외에는 다른 재주가 없어요. 하지만 느긋하지요. 왜? 이미 죽었다가 살아난 몸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성령이 왔다는 것은, 너는 이미 산 자라는 신호란 말이죠. 죽고 난 뒤에 오실 부활의 영이 미리 왔다는 것은, 너는 이 세상의 소속이 아니고 소속이 죽고 난 뒤에 천국에 집합된 그쪽 단체의 소속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주민등록은 하늘나라고 육신은 지상의 주민등록이고. 지상의 주민등록도 필요해요. 그래서 65세 돼야 지하철 공짜로 타지. 주민등록증 있거든요. 이것 없으면 오늘도 돈 주고 타야 돼요.

필요하지만 되게 아쉬워 할 건 없어요. 우리의 시민권, 주민등록은 하늘에 있는지라. 빌립보서 3장 20절에 나오는 말씀 아닙니까. 그것도 복음입니다. 기쁜 소식이에요. 사도 바울의 로마서 8장, 빌립보서 3장, 로마서 1장, 여기에 그냥 덩어리 채 주어지는 이 복음을 구약 시편 14편이나 구약에서는 그걸 단락, 단락, 단편적으로 약간씩 깔아놓은 겁니다. 타일처럼 깔아놓은 거예요.

우리는 지금 타일을 조립하고자 하는 겁니다. 신약의 해답을 이미 아는 입장에서 구약을 보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신약 안 믿는 유대인이라면 그들은 맨날 오실 분만 기다립니다. 기도하면서 기다립니다. 주여, 우리가 시편을 다 외웁니다. 14편을 알고 있습니다. 시편대로 오시옵소서. 이미 왔는데? 언제 왔는데? 너한테 안 오니까 안 온 거지 나한텐 왔잖아요.

어떻게 확정하는데?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 그럼 유대인은 말하기를 인간이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있어. 이 모든 말씀을 다 이루기 위해서 죽었다가 살아났어요. 그러면 우리 안에 성령 왔다는 말은 다 이루었다가 들어오는 거예요. 시편 14편을 다 이루었다가 들어오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무엇의 증거자가 되느냐 하면, 시편 14편을 다 이루었다의 증거자가 되는 겁니다.

하라, 하지 말라를 다 이룬 증거자가 우리가 되는 거예요. 하라, 하지 말라가 이뤄진 게 하나님의 의거든요.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서랍장에 보물로 들어오면 우리는 하라, 하지 말라를 다 이룬 거예요. 이룬 입장에서 우리 육신으로 수사에 나서면 되는 겁니다. 아아, 이래서 하라 할 때는 안 했고 안 하라 할 때는 했구나. 우리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의 죄, 악마에 포로 된 우리를 주께서 이미 십자가로 돌이키셨구나.

시편 14편의 예언대로 딱 맞춤 인간을 주께서 제조하신 거예요. 성도란 이름을 제조하신 거예요. 구두 한 켤레 맞출 때도 종이에 그리잖아요. 종이일 뿐인데 한 3일 지나면 종이에 있는 평면의 구두가 입체화된 구두가 등장하지요. 구약에 있던 성도가 입체화되어 우리가 됐잖아요. 성령이란 보물을 담는 육신. 그래서 우리의 육신은 날마다 옅어지고 소멸되고 소멸되면 그 사람은 후패하나 속은 등반해서 같이 새로워지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너를 죽인다. 네가 잘못 죄지어서 죽는 게 아니고 주님이 쓸 것 다 쓰면서 소모용으로 제거하는 거예요. 제가 중국에 가서 첫 번째 강의가 달란트 비유했잖아요. 인간은 소모용으로 타는 촛불처럼 사용한 거예요. 그러니까 남길 생각하지 말고 타들어가는 게 남는 거예요. 주님께서 요만큼 제거하고, 요만큼 제거하고, 요만큼 제거하고. 점점 더. 그래서 날이 갈수록 주의 십자가가 더욱 더 고마워지고 감사해지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221.♡.126.19) 19-10-16 14:34 
20191014b 부산강의 : [시편]22(14편)-죽음 사건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6절에 보면,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라고 돼있지요. 5절에 보면,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라고 해놓고,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라고 돼있어요. 왜 갑자기 가난이 튀어나오느냐? 하나님은 의인의 세대에 계시다는 이것을 우리는 이해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가난한 자가 나왔어요.

의의 세대라고 해도 되는데 여기선 ‘의인’이라고 했어요. ‘의+사람’으로 했습니다. 그리고 가난도 ‘가난한 자’죠. 그렇다면 마지막이 7절이죠. 7절이 어디까지 통하느냐 하면, 이스라엘과 통하고 야곱과 통해요. 의를 갖고 있는 사람이 이 땅에 왔을 때는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왔고 거기에 대해서 가난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가는 인생의 목표로 하는 방향과는 정반대 방향이죠.

가난하려고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가난이란 개념 자체가 기피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일가친척 가운데서도 아무리 친하고 촌수가 가깝더라도 가난하게 되면 기피해요. 특히 동생, 형 올 때 가난한 동생, 가난한 형, 누이동생, 오빠가 오게 되면 대화를 잘 안 합니다. 밥이나 먹고 가라. 또 무슨 질질 짜는 연기하려고? 보세요. 벌써 돈 이야기 나올까봐 겁이 나서 돌아서죠. 기피대상이라고요, 가난이.

그런데 말씀이 육신이 돼버리면 사람들이 제일 기피하는 가난한 자가 되는 거예요. 이 가난한 자의 특징은 마지막 때까지 사람들의 선호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가난한 자가 죽으면 관심 없어요. 거지 나사로가 죽은 것은 하늘나라나 관심 있지 관심 없어요. 사람들은 맞은편에 살고 있는 부자의 죽음에 대해서 애도합니다. 부자 죽음이 애도되지 가난한 자가 죽으면 그건 별로로 치지요.

그렇다면 가난이란 개념자체에 이미 선제적인 죽음의 두려움, 죽음의 공포, 죽음의 참혹함이 포함된 인생, 그게 가난한 인생이라는 거죠. 얼마나 팔자가 더러우면 가난하겠어, 이렇게 되죠. 저건 살아도 죽은 것이죠. 살아도 산 것이 아니죠. 어는 노래 가사에, “그녀를 주시옵소서. 그녀 주신다면 벌이라도 받겠습니다.” 임재범의 <고해>에 나와요.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라고.

가난한 자는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지 못하고 기피대상이에요. 그러면 누가 기피대상이냐 하면, 메시아지요. 메시아는, 아까 첫째 시간에 육신 자체가 죄기 때문에 육신이 원하는 메시아는 백 프로 가짜입니다. 하나님 믿고 복 받겠다. 백 프로 가짜입니다. 진짜 메시아는 사람들에게 주목도 받지 못하고 기피대상이었습니다. 메시아 옆에 양들이 몇 명 있었는가? 다 도망가고 말았어요.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졌어요. 아무도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멀리 하고 싶은 사람.

베드로가 하는 말이, 나 당신을 모르는 걸로 쳐달라고. 나 저 사람, 모르는 자입니다, 라고 자기 입으로 고백했지요. 그러니까 그 말은 뭐냐 하면, 우리 육신으로 어떤 맹세나 고백을 하더라도 우리가 그걸 스스로 개 무시하세요. 내 말을 내가 개 무시하세요. 농담도 못하느냐고 그냥 넘어가세요. 괜히 자기 철저히 한다고 약속을 지킨다 하는데 약속을 인간은 못 지킵니다. 왜냐하면 약속을 한 그 분위기가 몇 개월, 몇 년 지나면 그 분위기가 아니기 때문에 약속을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가 없어요.

삼년 전에 나와 같이 여행 간다고 했잖아. 가만, 삼년 전에 내가 그런 말 했나? 이 양반 봐라. 생 까는 것 봐라. 삼년 전에 크루즈여행 간다고 했잖아. 그런 망발을 했을까? 아, 그때는 돈이 있을 때고 지금은 없잖아. 없는 걸로 하자.

약속이란 못 지키기 때문에 하는 게 약속이에요. 지킬 것 같으면 그때 지키지 뭐 때문에 미리 약속하겠습니까? 어음도 부도어음이에요. 약속 자체가 소용없습니다. 하나님 잘하겠습니다. 지키지 마세요. 못 지키기 때문에 말이라도 한 거예요. “주여, 내가 뭐든지 하겠습니다.” 난 할 마음 없다는 뜻이에요, 그게. 말이라도 해줘야 벌을 덜 받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선악적 관점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기피대상인데 문제는 주님이 가난하게 될 때 가난이란 모습 정도가 아니고 그 주위의 환경자체도 가난이 되는 거예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단절된 구역, 단절 영역이에요. 예수님께서 오실 때는 움직이는 그 공간은 바로 그 자리에 있던 공간과 단절돼버려요. 주님이 사건을 일으키면 동일한 자리고 동일한 시간대이라도 그 자리가 같이 단절돼버려요.

포도주가 떨어졌는데 예수님께서 물 여섯 동이 준비하라 했지요. 그 순간 포도주와 물의 세계, 인간이 준비할 수 있는 건 물, 주님이 할 수 있는 건 포도주, 그 순간 그것은 바로 단절의 계기가 된 겁니다.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건이라 합니다. 주님이 일으킨 사건이 되면 부활에 이르지만 주님이 일으키지 않은 사건은 이 땅에 사는 것도 지옥이고, 어떤 특정 출구 없는 채 그대로 가버리는 게 지옥이에요.

지옥의 긴 혓바닥이 뭐냐? 이 세상이에요. 이 세상에 살다가 가만 앉아 있다가 그냥 지옥 가는 거예요. 그래서 천국 가는 것은 기이한 현상이에요.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복음을 알게 되면 어떤 자부심이 있어야 되냐 하면, 어떤 도저히 갈 수 없는 곳에 간다는 자부심이 있어야 돼요. 이 자부심 앞에서 내 몸이 어떠니 내 생활이 어떠니 짜증부릴 그걸 걸칠 자격도 없고 그걸 걸쳐봐야 소용도 없어요. 왜? 천국 가는 게 너무 크기 때문에 너무 좋기 때문에 이런 사사로운 내 일은 그야말로 시시한 일이에요.

어제 낮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세월호 자기 아이 죽은 게 시시한 일이라고요. 도대체 자기 자식 죽은 게 시시한 일이 될 정도면 어느 정도로 천국이 크게 덮쳤겠어요? 주님의 일이 크게 덮쳐버리면 자기 짝이 죽는 것도 대수롭지 않는 일이에요. 이 말은 무슨 말이냐? 천국 가지 싫거든 교회 오지 말라는 말과 똑같은 거예요. ‘가’ 교회.

오후예배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동백꽃 필 무렵>에 나오는 공효진이 하는 대사 가운데서, 이정은이라는 탤런트가 엄마로 나오는데, 딸 버렸다가 수십 년 만에 갈 데 없으니까 온 거예요. 치매 걸린 엄마는 딸한테 다 잘해줘요. 혹시 자길 내칠까 싶어서. 그런데 공효진이 아주 냉정하게 이야기해요. “엄마, 요양원에 가. 나 당신과 있기 싫어.”

이게 로마서 1장에 보면, 버려줌, 주님이 버린 거예요. 우린 주님과 있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어줘야 돼요. 그래야 눈앞의 인생의 삶에서 모든 굴곡이 지극히 사소한 일로 작아 보이지요. 만약에 관심사가, 우리가 신경 쓰는 것이 천국이 아니면 그 대신 세상 작은 일도 우리한테 큰 바위처럼 나를 때려버립니다. 나는 못 살겠다. 하루에도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자살하고 싶어. 이런 식으로 꼭 살아야 되나 싶은.

남편이 천식 걸려서 켁켁거리면, 이런 식으로 꼭 살아야 되나. 내가 먼저 죽을게, 내가 먼저 죽을게. 저 소리 듣기 싫어. 이럴 것 같으면 차라리 헤어져. 누가 아프라고 했나. 술 그만 먹으라 했지. 담배 그만 피우라고 했지. 내 말 안 듣다가 이 꼴 나잖아. 천국의 기쁨이 없으니까 누구 하나 나를 건드릴까봐 미리 앞당겨서 공포에 질려 살아갑니다. 그게 자기 지킴, 자기 사수하기에요. 진짜 꼬챙이로 확 쑤시고 싶어요.

성경은 이런 광경을 새 술에 새 부대라 해요. 복음은 좋은데 복음을 담을 수 있는 관심과 신경을 쓸 수 없는 세상 걸 갖고 있다면 복음은 이걸 찢어집니다. 이게 오늘날 교회 아닙니까. 교회는 교회부흥 요구하면서 복음 이야기, 십자가 이야기하고 있다고. 이게 앞뒤가 안 맞아요. 교회가 뭐 중요해요? 교회가 우릴 구원하는 게 아니잖아요. 주님의 십자가지요. 십자가지 교회가 구원하는 게 아닌데 자꾸만 교회부흥에 신경 써서 목사가 그쪽 방향으로 복음도 아닌 걸 자꾸 전해서 착한 아버지 되기, 어머니 교실, 이런 것 만들어서 복음도 아닌데 교인 끌어모으기에 열중하는 거예요.

어제 낮 설교하면서 아주 어려운 이야기했는데 시간 관계상 설명을 못했어요. 앙상블이라고 연합이란 뜻이에요. 앙상블은 대표적으로 여러분들이 관현악단 생각하면 돼요. 앙상블에서 요소를 끄집어내고 그 다음에 개체가 된다고 했어요. 개체는 또 앙상블이 된다고 했거든요. 이걸 자세히 설명해야 되는데 설교시간 때문에 못했어요.

앙상블이란 연합, 우린 어디에 소속됨으로 소속이 안정감을 줘요. 시간이 지나면 내가 이런 소속에 있으면 나의 이익은 뭘까, 라고 이익을 챙기게 돼있어요. 예수 믿고 우리 집안 이렇게 잘 됐고, 예수 믿게 되면 우리 자식 잘 되고, 예수 믿게 되면 나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주고, 어떤 이익을 챙기게 돼있어요. 이익을 감싸버리면 개인이 됩니다. 개체가 돼요.

개체의 특징은 뭐냐? 나만을 위한 하나님이 돼버려요. 왜?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니까. 내 이익을 빼내서 그 이익을 담는 겁니다. 통에서다 담으신 이 통은 나라는 귀한 존재가 되는 거예요. 교회 나오라고 전도할 때 이걸 집어넣거든요. 교회 나오시면, 교회는 앙상블이죠. 하나님이 함께 있고 인간과 하나님이 함께 있는 앙상블입니다. 연합체입니다. 여기 나오시면 당신이 지금 굉장히 어려워하고 여러 가지 가정 고민거리 있지만 좋으신 하나님이 주십니다. 요소 끄집어내죠. 그 이익을 담으면 당신은 성도가 됩니다. 개체, 당신은 천국 갑니다, 라고 이렇게 이야기하죠.

그런데 여기 성령이 임하면 다시 개체가 깨어지고 주님이 주도권 쥐는 새로운 앙상블에 들어갑니다. 이게 2014년도고 이게 2015년도라면 또다시 반복해서 나는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이런 이익받았다고 또 시작하고 또 개체 되고 또 깨지고 또 앙상블에 속하고. 이게 되풀이 돼요. 반복됩니다. 우리 성도라면 계속해.

어느 순간 은혜 받았다면 은혜 받은 걸 부정할 필욘 없어요. 그걸 거부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지켜보게 되면 이 육신이란 게 얼마나 강력한지 악마의 술책, 악막의 힘이라는 것은 주님과 함께 있는 복음마저 기어이 네가 신이 돼야지, 너는 독보적이어야지, 너는 위대한 존재가 돼야지, 한평생 살면서 네가 대단한 사람 안 되면 섭섭하잖아, 이런 식이 돼버려요. 그런 식이 되면 이게 가짜 이스라엘입니다.

가짜 이스라엘인데 시편 14편에서 이게 바로 유대교지요. 시편 14편대로 믿고 신앙 생활했던 그 나라가 가짜 이스라엘이 돼버려요.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느냐 하면, 진짜 이스라엘에 대해서 설명하려면 가짜 이스라엘부터 설명해야 돼요. 진짜 이스라엘은 어디 있느냐? 가짜 이스라엘이 구성되고 난 뒤에 진짜 이스라엘이 나오는 겁니다.

진짜 이스라엘은 남은 자로 나오는데 이때 이들은 포로 된 자의 처지에 있는 겁니다. 로마가 이스라엘을 포로 잡았고 그 이스라엘 안에 진짜 이스라엘이 포로 됐고. 포로란 뜻은 자기 힘으론 못 빠져나오죠. 빠져나오게 할 때 진짜 이스라엘 나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도 마찬가지로 반드시 육신부터 출발해줘야 돼요.

주님이 말씀이 육신이 됐기 때문에 육신부터 출발해서 육신 속에 있는 악마를 수사해야 되니까 육신이 요구하는 게 뭐냐? 요구하는 게 여러 가지 경우가 있지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교회 다닌다. 교회 다니니까 하나님이 함께 있다고 하겠지요. 제가 지금 그냥 쉽게 던지는 말이 오늘날 교회에서 다 납득하고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교회 다닌다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바깥은 뭐가 시끄럽습니까? 조국 때문에 시끄럽잖아요. 그럼 조국 때문에 시끄럽다면 한국기독교연합회에서 광화문에 나가야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함께 있다면 공산주의를 없애야 되지 않습니까. 그 사람은 공산주의 출신이니까. 문재인부터 해서 전부 다. 공산주의는 있는 돈 털어먹어서 그것으로 표 얻어서 다음 선거, 차기에 정권잡자는 그 주의에요. 베네수엘라, 그리스, 전부 다 좌파들이거든요. 우파가 잘했다는 뜻은 아니에요, 지금.

기독교 내에 하나님의 복음을 아는 교회는 복음적인 정치도 가르쳐야 된다는 그게 유행됐어요. 조국 때문에 유행이 됐다고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교회는 복음을 전할 때 뭐가 있어야 되겠어요? 먹는 게 있어야 되고 자유가 있어야 되죠. 북한 같은 경우에는 복음을 못 전하잖아요. 교회가 교회로서 복음을 전하려면 정치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돼야 된다. 종교의 자유를 누가 반대합니까? 공산주의가 반대한단 말이죠. 이거는 복음을 위해서라도 해운대에 있는 여러분들도 태극기 들고 광화문 가자, 이 말입니다. 공산당 되면 안 된단 말이죠.

앙상블에서 뭘 끄집어내는 거예요? 요소를 끄집어냈죠. 요소를 끄집어내서 여기서 하나의 집단의식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갑자기 적이 등장하게 되면 사소한 말다툼이 없어지고 한 패로 먹는 거예요. 마음과 뜻이 하나로 되는 거예요. 왜? 공동의 적이 나타났으니까. 정치란 것은 적폐를 만들어야 이쪽이 하나가 돼요. 적폐가 없으면 정치는 분열되게 돼있습니다. 단결하는 방법은 의도적인 적이 없으면 만들어내서라도 공동의 적이 있어야 돼요.

이게 바로 좌파들이 하는 이론이거든요. 김일성은 가만있는데도 불구하고 박정희가 김일성 이용해서 독재했다고 주장합니다. 집에 살림만 하니 압니까. 근데 바깥의 남자들은 이런 것 이야기한다 이 말이에요. 요새는 안쪽 여자들도 이야기하지만. 공동의 요소가 발견됐습니다. 갑자기 힘이 생기고 사는 보람이 있어요. 야, 예수 믿고 이런 일도 다 해보는구나.

<기생충>이란 영화>에서 “네가 계획이란 게 다 있구나.” 교회도 힘을 합칠 때가 있구나. 목사 나가나, 안 나가나 하다가 갑자기 조국 등장하니까 목사 나가란 소리 쑥 들어가 버렸어요. 목사 중심으로 태극기 흔들면 교회는 아름다운 단체, 앙상블을 이뤄요. 공동의 적이 등장했으니까.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보는 거예요.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복음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이 나라를 공산주의에서 막기 위해서 데모를 할 때 공동의 명분 앞에서 자신의 고통이 없어져요. 찌질 한 못난 살림, 이게 없어진다니까요.

이거는 뭐 몸이 아파도 나와요. 태극기 흔들기 위해서. 특히 노인네들 같으면 사회주의가 되면 연금이 반쯤 날아간다고. 연금 반은 어디 가느냐? 북한 주고. 반을 북한에 철도 한다고 주기 때문에 연금 반이 작살나버려요. 연금 삼백만 원 받는 사람이 백오십만 원 된다 이 말이죠. 문재인이 손잡아서. 오늘 숨어있는 정치 명분이 다 튀어나오네. 정치 명분 아닙니다. 그런 설이 있는 거예요. 분명히 합시다. 십자가마을에도 이걸 반대하는 사람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워요. 이게 육신이거든요.

그러니까 누구냐 하면, 나이 많은 사람, 군인출신들 특히 연금이 말도 안 되게 많았잖아요. 그래서 그리스가 반 토막 났거든요. 베네수엘라는 말도 못하고 이건 다 날아갔고. 이걸 지키기 위해서 하나가 되니까 이 집단이 개체가 돼버려요. 어떤 개체냐? 거룩한 의로운 개체가 돼버린 겁니다. 하나님이 함께 있으니까. 야, 하나님 믿는 재미, 예수 믿는 보람이 여기서 주께서 역사적으로 작용하는구나. 주께서 살아 계시다. 주님 부활하시다. 그걸 마귀가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가짜 이스라엘이에요. 지금 우파 자랑하려고 하는 게 아니죠. 들어보니까.

광신은 어디 있는가? 육신에 있었던 거예요. 육신의 본색을 드러내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성경 여러 말씀이 다 무시돼버려요. 천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 그 말씀 날아가 버리고. 우리가 이 땅에 나그네라는 것도 날아가 버리고.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것도 날아가 버리고.

그야말로 대부분의 말씀들이 전부 다 왜곡되어서 목사가 강단에서 설교할 게 없어요. 장경동이처럼 그렇게 설교해야 돼요. 여러분, 이때가 그때입니다. 에스더를 보세요. 죽으면 죽으리라고 갑자기 에스더가 조국 데모에 동원돼요. 전반부는 헌금하라고 30배, 60배 튀어나오고. 이게 가짜에요. 가짠데 그걸 분간할 수 있는 복음에 관심 있는 사람이 평소에 그만큼 없었다는 겁니다.

어느 누구도 교회가 데모하는 걸 말릴 사람이 없어요. 왜? 자기 돈과 관련돼있기 때문에. 없는 사람은 이참에 나라 뒤집어서 있는 놈 돈 다 빼앗아 없는 놈 주자고 나오겠지만 그 숫자보다 있는 사람들이 더 많으니까 연금, 세금 한 푼 떼어가기만 해봐라. 이런 사람이 더 많으니까. 결국 이건 아까 누구 지키기? 나 기쁘게 하기, 나 지키기 그 본색이 그대로 여과 없이 나온 겁니다.

진짜 천국 가기 싫거든 오지 마라. 가 교회. 진짜 복음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려는 사람은 천국에 관심 없는 사람이에요. 아까 새 술은 어디에 담는다고 했습니까? 새 부대에 담지요. 그러면 술이 먼저 있고 부대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5절에 봅시다.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라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아이고, 저 지질이도 못난 것, 저것도 사나 나 같으면 죽는다, 라고 오히려 내가 그렇게 되지 않음을 다행스럽게 여기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바로 가짜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이 본문 자체가 이스라엘이 고대하는 메시아의 모습으로 메시아는 올 턱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본성대로 가는 거죠.

앙상블에서 요소, 그리고 그게 하나의 개체가 되고, 개체는 새로운 집단화되지요. 여기서 깨어지게 되면 영적인 앙상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육신의 세계에 없는 부활의 세계, 이스라엘이 벌써 우리에게 임했구나. 그러니까 이게 바로 죄구나, 하는 걸 아는 겁니다. 이게 악마의 술책인 것을 아는 거죠. 이제부터 약간 어려운 것 들어갑니다.

7절에 봅시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어디서 나옵니까? 시온에서 나오지요. 없는 거예요. 없는 야곱, 없는 이스라엘이 나옵니다. 시온 자체가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다윗의 혈통적 자손이 만든 나라는 가짜 이스라엘입니다. 이 나라는 로마에 포로 잡혔어요. 제가 로마로 했지만 다니엘적으로 하면 네 번째 짐승이에요. 전에 설명했는데 다시 설명할게요.

짐승이라고 등장하는 것은, 이번에 수련회에서 한 거예요. 이스라엘이 앗수르한테 파괴될 때는 짐승이 아니에요. 그냥 앗수르에요. 그러나 바벨론한테 갈 때는 그때부터는 짐승이란 용어를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앗수르한테는 그냥 당하기만 했지만 바벨론한테는 바벨론 목구멍 안에 알약처럼 들어가 있어요. 삼켰다고 여겼는데 짐승이 폭파해버립니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린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의 공동체를 건드린 겁니다.

언약을 건드릴 때는 역사에서 역사란 활주로에서 비행기가 날아버리면 어디로 날겠어요? 초 역사, 영적 세계로 날지요. 영적 세계로 나는 그 입장에서 바벨론이 등장한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는 끝내고 끝나는 순간 뭐가 등장하느냐? 영적 이스라엘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시점에 다니엘이 있는 거예요. 그게 다니엘의 70이레라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다니엘 7장 13절, 제가 읽겠습니다.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다니엘이 계시를 받았는데 하늘에 보좌가 나타났어요. 그 보좌에 인자 같은 분이 지상으로 내려옵니다. 그러면 이건 역사가 아니고 묵시라 하거든요.

역사를 초월한 묵시의 존재가 역사 속에 들어오게 돼요. 이 말은 이스라엘 역사가 곧 인자 덕분에, 예수님을 뭐라고 하지요? 인자라 하지요. 인자 덕분에 역사 속에 있는 나라가 영적 나라로 비상하는 거예요. 활주로를 떠나는 겁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거예요. 그것 하려고 인자의 모습으로 온 거예요. 인자 안에는 원래부터 하늘에 계신 분이라는 내용이 자기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우리를 인도하는 가이드가 하늘에 계신 분이지 땅에 계신 분이지 똑바로 보란 말이죠. 요한복음 8장에도 나오지요. 나는 하늘에 속하고 너희는 땅에 속하니까 땅에 속한 너희들이 알아듣는다, 못 알아듣는다? 못 알아들어요. 예수님의 말씀을 성령이 아니면 못 알아들어요. 알아듣지를 못한다니까요. 그냥 태극기 데모하는 그게 전부에요.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이 교회 지켜달라는 거예요. 교회는 가짜 교회에요. 영적 교회가 교회지 인간들이 돈 모아서 대한예수교장로회 간판 걸어봐야 가짜입니다.

여기는 봐줄까요? 진리로 자유하는 교회. 이것도 가짜, 우리교회도 가짜. 가짜 교회라니까요. 이거는 그냥 헤어지면 그만이에요. 가짜 교회라서 저나 여러분은 부담이 없지요. 이게 아멘 해야 되는데. 교회가 부담이 없어야 되고, 경상도 말로 히이지면 히이지면 되고, 헤어지면 갈라지면 그만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걸 붙들라하는 것은 목사밖에 없어요. 저게 얼마짜린데, 저 사람은 얼마 내는데. 자꾸 돈 때문에 붙드는데 그럴 필요 없어요.

영적 세계에서는 관심사가 교회에 있으면 안 되고 관심사가 복음에 있어야 돼요. 신경 쓰는 것이 복음에 있어야지 교회에 신경 쓰면, 어떤 사람 하나 교회 오게 되면 또 신경 써서 우유 하나 먹이고. 먹이면 뭐합니까? 다음 주일에 안 나오는데. 아이고, 괜히 먹였어. 점심도 안 해줄 건데. 또 하나 오면 고마워서 넙죽하고. 가게에 손님 오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우리 교회 부흥됐다고.

그 다음 주 서너 명 나가버리면 낙심하고 절망해서 우리 교회 주께서 함께 안 해주시나 보다고 걱정하고. 전부 다 눈에 보이는 것에 헤매면 안 됩니다. 눈에 보이는 내 인생에 관심 두면 안 돼요. 예수 믿고 앙상블이죠. 예수 믿고 잘 됐냐 꼴아 박았냐, 관심 두면 안 돼요. 이익이냐 손해냐, 이게 개체가 돼버리니까. 영적으로 비상해야 돼요. 날아버려야 되거든요.

바벨론 나라가 자기들은 짐승의 나라인 줄 몰랐지요. 자기는 인간이라 여겼지요. 다니엘을 통해서 삼켰던 알약을 통해서 주도권이 알약으로 넘어갑니다. 느부갓네살이 꿈을 꿨는데 잊어버렸어요. 잊어버렸으면 그냥 잊으면 될 텐데 막 부하를 닦달내면서 어제 내 꿈 꾼 것 내놔라. 세상에 아무리 독재자지만 너무 심한.

그래서 너무 심하지 않느냐고 하니까 너희들이 구라 쳤잖아. 신의 뜻을 푼다고 나한테 월급 받아먹었지. 그런데 내가 실제로 궁금해 하는 것 하나도 모르잖아. 너희들 가짜니까 내 모든 분노를 퍼붓고 다 죽여 버린다고 했거든요. 그들도 할 말 없지요. 신의 뜻도 모르면서 구라로 신의 뜻이라고 그동안 얼마나 속여 왔습니까? 이제 들통 나니까 죽어도 할 말 없지요.

다니엘이 가서 죽이지 말라고 말리고, 다니엘이 압니까? 다니엘도 몰라요. 성도가 이런 거예요. 육신이에요. 성도는 육신일 뿐이에요. 주께서 사용하면 그때 알지 그 다음은 몰라요. 다니엘이, 당신은 짐승입니다. 당신은 당신을 인간으로 봤지, 아니에요. 짐승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인자밖에 없어요. 장차올 예수님 이야기를 다니엘을 통해서 미리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면 이스라엘 속에 가짜지만 가짜 속에 뭐가 흐른다? 진짜 하나님의 약속이, 스스로 약속을 주신 분에 의해서 약속은 언약이고 약속주신 분은 예수님이고 언약이 예수님에 의해서 스스로 완성이 되는 시점까지 그 이스라엘을 이용하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 육신을 이용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의 뻥 뚫린 관이에요. 주께서 우리 안에 들어가서 철저하게 우리를 이용하는 겁니다. 미리 구원시켜놓고 안에 무엇이 예수의 피가 흘러가는지 아니면 네 자존심이 흘러가는지 보는 거예요. 자존심은 언제 생기는가? 안이 관이 아니고 막혀버리면 자존심 돼요. 막혀버리면 통이 되거든요. 통이 되면 좋은 건 다 담아요. 뭐 복음이고 십자가고 어디 들은 구석은 있어서 다 담아서 이게 바로 이 요소가 천당 가는 요소가 개체다. 나는 구원받았다고 우기는 이게 구원파입니다.

구원파는 구원받기 위해서 온갖 짓을 다해요. 모든 성경공부 다 쫓아다니고 온갖 좋다는 유명한 목사는 다 듣고 자기 구원되는데 보탬이 되면 구원된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게 침몰하는 줄 모르고. 그 자체가 육신적이고 악마적인 것을 생각도 못하고. 그게 악마 일이거든요. 악마 일은 마감이 뭐냐 하면, 내가 마감이에요. 내 구원이 최종적인 도착지점이에요. 구원받았다, 이 도착지점이 악마가 하는 짓이에요. 나는 곧 신이다, 이 말과 똑같은 거예요.

여러분들이 안 믿는 식구들이나 안 믿는 세상 친구들 만날 때 그 사람의 수를 읽어야 돼요. 그 사람이 말이 많고 마지막 도달점은 뭐냐 하면, 그래서 나는 대단한 존재다. 이걸로 끝나는 겁니다. 부부싸움을 안 하고 있으니까 알 수가 있겠습니까만 부부싸움의 마지막은 나는 정당하다. 어느 한쪽이 잘못했다고 하면 끝나는 문제를 둘 다 정당해요.

나는 복음 아니까 정당하다고 하면 안 돼요. 왜? 나는 복음 아니까 죄인이다, 이래 나와야 될 텐데 주님의 존재를 안다고 해서 성도가 아니고 죄의식이 있어야 돼요. 그런 복음 모르는 남편을 통해서 내가 죄인임을 알아야 돼요. 그 남편의 육신이 바로 나의 과거의 육신이기 때문에. 지금의 육신, 지 자존심 하나로 버티는 인간, 그게 내 모습이었잖아요.

그래서 어제 낮에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내 모습 보고 놀라야 된다고. 내가 달라진 모습을 흥분할 정도로 감이 안 잡혀요. 내가 이 정도로 달라졌나, 내가 언제 달라졌지? 이게 새 술에 새 부대입니다. 육신에 포로 잡힌 빠져나온 거예요. 나라는 육신에서 빠져나온 거예요. 내가 나를 수사하고 있습니다. 의인 된 내가 죄인 된 나를 수사하는 거예요. 왜? 그 안에 마귀 들어있기 때문에.

우리 힘으로 못 빠져나왔는데 주님께서 십자가로써 승리했다고 돼 있잖아요. 십자가로 승리하면서 뭘 찢어버렸지요? 율법을 찢어버렸지요. 문서와 율법을 찢어버리고 그동안 너를 정죄하던 모든 것은 어디 있나? 없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더 이상 우리 사이는 정죄할 사이가 아니고 사랑의 부부에요. 나는 주님의 아내가 나는 주님이 예쁘다고 하는 내 신랑이 되고, 그게 혼인잔치 되고. 그게 성경의 내용입니다.

호세아 설교할 때 그 이야기했거든요. 음녀가 되지 아니하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다. 그동안 음녀 안 되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음녀가 되지 않으면 구원될 수 없어요. 왜? 음녀 안 되면 값을 치를 대상체가 안 되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 잘하는 걸 보는 게 아니고 보자, 내 피 값을 누구한테 줄까? 지금 그것 고르는 거예요.

음녀일 때 죄인일 때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인식과 동반해서 피 값이 들어오면 죄인인 걸 아는 거예요. 죄인이기 때문에 피를 흘렸지 죄인 아니면 피를 흘릴 이유가 없잖아요. 피의 이유를 나타내는 존재가 되시기 바랍니다. 피가 있어야 될 이유를 마음껏 폭발하는 사람이 돼야 돼요. 주의 피,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게 없는 사람이 돼야 된다고요. 자꾸 주님 피 앞에 얼쩡거리지 마세요. 최선을 다했는데 왜 힘들게 하시냐고 그러지 마세요. 되지도 않은 골키퍼 안 되거든요.

자, 그러면 이스라엘 된다 했지요. 여기서 마지막 남은 어려운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인자는 몇 사람입니까? 한 분이죠. 어떻게 한 분인데 단체가 됐어요? 무슨 일이 있기에 갑자기 단체가 됐느냐는 겁니다. 예수님을 편의상 쉽게 멀쩡하다고 봅시다. 그러면 예수님 빼놓고 모든 아담에 속한 인간은 멀쩡하지 않지요. 이걸 마태복음 9장에서 환자라고 합니다. 병든 자라야 무엇의 가치, 무엇의 가오가 산다? 의사의 가오가 사는 거예요. 병원에 가서 나 멀쩡한데 의사 만납시다, 하면 멀쩡한데 왜 왔느냐고 오히려 되묻지요.

주님 앞에 되물으면 안 돼요. 멀쩡하지 않기에 주님 오신 거예요. 우리는 멀쩡한데 주님 오시니까 졸지에 환자된 겁니다. 이스라엘은 환자에요. 어디 환자냐 하면, 어디 환자냐고 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주님 앞에 많이 꼬여드는 게 있어요. 이런 논리가 어려운데.

제가 백두산에 갔을 때 밑에 오성급 호텔이 있어요. 크라운프라자호텔에 온천이 있어요. 거기에 닥터피시라는 게 있습니다. 발을 물에 담그면 닥터피시가 와서 각질을 뜯어먹는데 간질간질한 게 재미있어요. 10~15분 동안 내 더러운 것 다 뜯어먹으라고 있었는데. 무슨 이야기하다 이렇게 됐나? 멀쩡한 자, 맞다, 맞다. 닥터피시처럼 달려드는 거예요.

예수님이 오실 때 정체를 유일하게 안 존재가 있었어요? 누구겠습니까? 악마입니다. 악마만이 알고 나머지는 저분 좀 괜찮은 분이네, 이상한 분이네. 병 고쳐주고 고마운 분이네, 라고 본인들이 멀쩡하다고 여기고 예수님도 같이 멀쩡한 분이라고 여긴 겁니다. 직업은 목수의 아들이네. 목수 일 좀 배웠겠네. 이런 식으로 그냥 이해한 거예요.

그걸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전에는 나도 육신으로 알았다는 뜻이 그거에요. 내가 전에는 예수님을 육신으로 알았다는 겁니다. 같은 인간으로 알았다는 거예요. 이 말은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서 내가 죄인이라는 느낌이 듭니까, 안 듭니까? 안 들지요. 같은 동류니까, 둘 다 멀쩡하니까. 멀쩡한 분을 알아봤으니까 당신도 멀쩡하고 멀쩡하다고 알아보는 나도 멀쩡하고. 주체와 개체가 주고받는 시선싸움을 통해서 둘 다 멀쩡한 것으로 만족하는 그런 게임으로 종결시키자, 이런 거죠.

그런데 악마는 그렇지 않거든요. 악마는 예수님을 공경한 겁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왜 일찍 우리를 멸망하려 왔습니까. 때가 안 됐는데 멸망시키려고 왔습니까. 벌써 악마는 자기가 멸망할 걸 알고, 그런데 가만 보니까 시간이 안 됐는데 왜 일찍 왔느냐고 하는 거예요. 악마가 주님의 선취를 잘 이해 못해서 미리 온다는 것을 몰랐던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실 때 의도적으로 세리, 창기, 그리고 절뚝발이, 38년 된 병자, 귀머거리, 소경, 다 요한복음, 마태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들을 구원하는 이유가 뭡니까? 강도, 문둥병자. 지금 이 사람들의 특징은 그 시대 멀쩡하다고 여기는 사회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대표 표준 인물이에요.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멀쩡하지 않지요. 저주받은 자를, 아까 이야기한 적폐, 나의 적을 적이라고 함으로서 우리는 상대적으로 멀쩡한 자 되고 복 받은 자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성경대로 믿기 때문에 복을 받아야 멀쩡하고 복을 안 받으면 문둥병 걸리고 가난하게 된다고 그들은 교리로서 확립된 상태에요. 심지어 교회 와서도 가난하게 되면 당신은 원래 부모의 죄 때문에 가난합니까, 당신 때문에 그렇습니까, 라고 차마 말은 못하지만 속으론 할 수 있거든요.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세리는 누가복음 18장, 창기, 막달라 마리아부터 해서 많이 나오지요. 병자 이런 사람들에게 낫게 함으로서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하늘나라 간다고 언급을 했습니다. 이것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복음 9장에서 이렇게 해요. 이게 아까 바로 새 술은 새 부대가 필요한데 그 부대가 뭐냐? 예수님의 술이 담길만한, 술을 피로 바꿉시다.

예수님의 피가 담기려면 예수님의 의가 담기려면, 누가 봐도 이 사람은 죄인이어야 해요. 그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죄인 구원하려 오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너희들이 모르는 초월적인 존재라는 걸 알리기 위한 방법 중에 하나가 이 땅에서 버림받고 가난한 자를 구원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 땅에서 돈 없고 가난한 사람이 진짜 주님 보시기에 버림받고 가난한 자일까요, 아닐까요? 아닙니다. 왜냐? 그들의 관심사는 부자 되고 싶은 거니까. 아무리 가난해도 목표는 하늘나라가 아니에요. 나도 같은 인간인데 돈맛 좀 보자. 그래서 화투판에 들어가고. 항상 자기에 만족하는 게 아니고 주의 복음에 하늘나라 천국 보내서 감사하는 게 아니고 나는 멀쩡한데 언제 부자 돼보느냐 언제 넓은 아파트 사느냐?

계속해서 자기의 목표점을 외부에 두는 이유가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육신으로부터 교육받기를 내 말 들으면 부자 되고 내 말 안 들으면 빌어먹는다, 라는 교육을 계속해서 법적으로 만든 거예요. 개체로부터 주체가 개체의 욕망이 주체를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포로 될 수밖에 없어요. 이 땅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믿고 교회 다니고 좋아해도 아까 요소 끄집어내지요. 갑자가 개체 되지요. 마찬가지에요. 거기서 스톱이 되면서 이왕 예수도 믿는데 주여 이제는 부자 되게 하옵소서. 또 이런 이야기한다고요. 참 도저히 갈 수 없는 나라에요. 도저히 우리는 천국을 못 갑니다. 창세기 3장에서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막아놨어요. 그리고 저주받아라. 그게 원칙이에요. 이 땅에서 힘들다. 당연한 겁니다. 힘들어야 돼요.

그런데 이미 그것이 과거 이야기가 됐다는 사실, 미래와 과거가 한 몸 속에 같이 있어요. 같이 놓여있습니다. 분명히 이 몸은 현재인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하루치, 하루치 대패삼겹살 같이 밀어서 한 꺼풀, 한 꺼풀 밀어줍니다. 또 하루 살면, 아까 올 때 이야기하면서 같이 왔거든요. 벌써 가을이죠. 한 해가 지났습니다. 선선한 건 좋은데 벌써 한 해가 지났어. 낙엽이 지고. 낙엽은 떨어지고 또 겨울 되면 한 해가 지나니까요.

그러면 대패삼겹살 하나 밀었어요. 우리는 그 차이가 너무 미미해서 마치 안 늙은 것처럼 마음만큼은 28세 청춘 같아요. 그러다 꼬마가, 할머니, 이러면 할머니 아니야. 집에 가면 손자가 둘인데 그걸 감투면서 할머니 아니야. 내가 어딜 봐서 할머니야. 특히 30대 노처녀한테 아주머니, 하면 환장하지요. 아무것도 아닌 건데 하루 종일이 뭡니까, 며칠씩 기분 나쁘지요.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가만있는데 세월은 고장 난 벽시계도 아니에요. 계속해서 흘러 가. 나는 가만있는데 흐름 속의 탁류처럼. 얼마 전에 일본에 태풍 왔지요. 탁류에 쓸려가듯이 그냥 집 자체가 이 육신 자체가 떠내려가요. 둥실둥실 자꾸 떠내려가요. 멈출 수가 없어요. 어디 닻을 내려서 그만 청춘아, 무대를 치고 청춘을 돌려다오 해도 청춘은 오지도 않고 그냥 떠내려가요.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그걸 기뻐하시고. 미래의 나가 오늘 나를 죽인다 했거든요. 이미 구원받은 나가 이 가짜야, 라고 하면서 계속 수사대상으로 삼는 거예요. 이 말의 근거가 뭐냐?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신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를 꾀더냐? 악마가 너를 꾀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이란 악마의 광장에 이미 들어온 거예요. 피하지 마세요. 악마야 저리 가. 뭘 저리 가.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악마를 피하는 방법은 강남에 사는 수밖에 없다고. 강남에 살면 편하게 살지요. 세상의 모든 죄는 다 두렵고 무섭고 공포스럽기 마련이거든요. 피하지 마시고 아예 그 속에 당의정처럼 녹아떨어지게 한 거예요. 안 믿는 세계 속에. 푹 잠기게 해서 그들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보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성도끼리 대화는, 복음으로 멀쩡하거든 대화하세요. 복음으로 멀쩡 안 하면 대화하지 마세요. 교회에서 복음이 안 나오거든 대화할 필요 없어요. 성경구절 외우란 말이 아니고 평소에 하는 자기 생활이야기하다가도 나중에 항상 마치 남의 이야기하듯이 옛날에 과거 흘러간 이래서 죄인이라는 그 이야기하듯이 편하게 자기의 고민거리라든지 애들 이야기하시란 말이죠. 맨날 성경구절만 여호와증인처럼 외우란 말이 아니고.

나 이렇게 사는데 진즉에 망해야 되는 인간입니다, 라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우린 다 같이 피난열차에 탄 거거든요. 이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6절에 나옵니다. 오직 여호와는 뭐가 된다? 피난처다. 우린 피난열차 탔어요. 탔기 때문에 주께서 죽으심과 부활의 엔진으로 가동시켜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구성해서 달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소속의 어디며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깨닫게 하옵소서. 죽음이 끝인 줄 알았더니만 필히 치러야 될 하나의 통과 사건인 것을 편하게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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