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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1 17:45:07 조회 : 352         
동거 191111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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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19.♡.174.171) 19-11-13 10:06 
20191111a 부산강의 : [시편]23(15편)-동거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15편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이렇게 돼있지요. 하나님이 동거를 요구할 때 우리가 살아가면서 진정한 동거는 우리 체질에 안 맞아요.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항상 자기가 홀로 살아야 되거든요. 우리 인간이 있다면 항상 요구조건이 뭐냐 하면, 혼자 살아라. 이게 내부에서 올라오는 거예요. 주위에 있는 어떤 사람보다 돋보이고 독자적으로 살아라. 이게 악마한테 가르침 받은 거예요. 부추김 받았다고 할까요. 속성 자체가 혼자 사는 속성이 우리한테 어울립니다.

누가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버스를 기다릴 때 과연 그게 공동체일까? 버스 기다릴 때 줄 서있는 걸 공동체라고 할 수 있어요? 아니지요. 동일한 주파수를 맞출 때 공동체일 수 있느냐는 겁니다. 아니죠. 프로야구나 참석한다든지 어떤 게임에 접속할 때 과연 그게 공동체일까? 아니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의도 자체가 공동체를 위하여 헌신하는 게 아니고 자기 취향에 맞기 때문에 임시적으로 자기가 자기를 모시는 자기가 즐기는 방법 중에 하나가 야구를 하고 어떤 공연에 가고 게임을 하고 그런 겁니다.

목적 자체가 혼자 사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아무리 여러 친구들이 있더라도 목적은 항상 어디로 돌아옵니까? 혼자 즐겁고 혼자 즐기고 행복하고, 이쪽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왜냐하면 마귀가 하늘나라 주님의 통치를 반발하고 나왔기 때문에 친구가 있다 할지라도 친구가 있는 목적은 나를 위해서 있는 거란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동거를 요구하거든요. 그럼 나 동거하기 싫어요, 이러면 그만인데 문제는 주의 장막이니까 요즘말로 하게 되면, 신약에 오면 이게 뭡니까? 천국이란 말이죠. 너, 천국 가고 싶은 마음이 있기는 있어? 이런 뜻이란 말이죠. 천국이 어떤 동네인지 알기나 알아? 혼자 살고 싶고 혼자 행복 하고 싶고 혼자 구원받고 싶은,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서 티비 보고 울고불고.

모든 것을 혼자서 하는 경향을 가지고 그냥 천국이라는 곳도 나 잘 되는 곳이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막상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은 너 잘 되는 것이 아니고 동거를 요구하는 겁니다. 어느 강의에서는 이걸 공존이라 했는데 동거,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로 하면 동행이 되죠. 동행하니까 여러분 생각나는 게 있지요. 최성수. 누가 나와 함께 가겠느냐 하는. 한국의 다방마담들이 제일 좋아하는 가수, 최성수. <해후>, <동행> 등 여러 가지 있는데.

이 땅에서 진정한 동행이란 성립이 안 됩니다. 누가 하나 주인이 되든지 내가 종이 되든지 그렇게 돼야 돼요. 그래서 왜 천국에선 동거를 요구하는데 지상에서는 동거가 안 되는지 그 이유를 먼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목사님, 세게 닦아야 됩니다.) 새 칠판을 사용하는데 원래 초반에는 이래요. 잘 안 돼요.

개인이 어느 개인을 만날 때는 딱 둘 중에 하나에요. 첫째는 해방되든지, 아니면 지배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누구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면 지배를 받지 않아야 해방이 돼요. 해방이란 벗어나는 거거든요. 그러면 내 해방이 되려면 상대를 지배해야 돼요. 이게 개인과 개인의 만남에서는 둘 중에 하나에요.

여러분들이 개인과 개인이 만나면서 깊이 생각할 필요 없어요. 그냥 부부사이 같으면 돼요. 남자가 여자를 만나지만 나이 들면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게 아니고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요. 제일 좋은 부부관계는 친구가 되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중에 호르몬체제가 비슷해져서 나이 육십 넘으면 남자가 여자 돼버리고 여자는 애초부터 남자 됐고요. 그냥 여자가 아니었지요. 여자인 척했지요. 결혼 전까지는.

다만 차이점은 아기 낳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아기 낳을 수 없는 사람 그것뿐이었지 사람 대 사람의 만남이었지 여자 대 남자로 만난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여자나 남자나 만나보면 겉모습은 여자 같고 겉모습은 남자 같아도 속성은 둘로 나눠요. 남성 형이 있고 여성 형이 있다는 거예요. 융이 이야기한 거거든요.

남자든 여자든 관계없이 성격상 남성 형, 여성 형이기 때문에 일단 남자, 여자라고 껍데기 보고 했는데 약간만 살면 껍데기는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사람 성격이 남성 형이냐, 여성 형이냐는 게 중요해서 그 다음부터는 해방 되느냐, 아니면 지배하느냐는 이 문제가 될 겁니다. 해방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지배함으로써 해방되는 반면에 내가 지배당함으로 해방되는 게 있어요.

사디즘, 마조히즘이라 하는데. 때리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일단 전두환 형이에요. 그 다음에 얻어맞는 데서 쾌감을 얻는 것. 예를 들어서 얻어맞는 게 나라면 내가 천사 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뭐냐 하면, 술 먹고 패줘야 돼, 나를. 술 먹고 패주고 나는 새벽기도 가서 울어줘야 내가 천사가 돼. 이게 길들여진다니까요.

다시 말해서 인간이라는 것은 단독으로선 내가 모르고 주변에 누굴 만나서 그쪽의 속성에 의해서 관계성에 의해서 인간이 비로소 주체가 되는 겁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다루어지느냐에 따라서 그게 나에요. 주체가 어려우면 그냥 나라고 하면 돼요. 인간이란 그냥 몸이고. 몸에서 나라고 할 때는 그냥 나가 아니고 나와 관련된 그것에 의해서 주체가 되는 겁니다. 이 관계성에서 흘러들어오는 것이 권력이라는 겁니다. 인간의 힘이에요.

너, 지금 이 질서 속에서 네가 점유하고 있는 위치가 어디냐? 그 위치가 나를 말하는 거예요. 어떤 남자가 회사 취직하는 데, 당신은 누구지요? 나는 남자입니다. 뭐 어쩌라고? 여기 남자 세 명 뽑는데 남자 맞고, 그래 뭘 할 줄 아는데요? 나, 남자입니다. 뭘 할 줄 아시고 어떤 것을 이 회사에 제공할 수 있습니까? 남자입니다.

세상이란 몸으로 밀어붙인다고 받아주는 게 아니고 몸이 나가 될 때 받아줘요. 나는 이런 일을 할 수 있고 이런 자격증을 갖고 있고 우리 집안은 이렇게 빵빵하고 부동산을 얼마나 갖고 있고. 이런 것들이 나를 형성하는 겁니다. 결혼정보회사 가보세요. A등급부터 쫙 있거든요. A등급이 주로 어떠냐 하면, 교회 다니면서 집안이 고위층이고, 술 담배 안 하고. 그리고 여자 A등급은 무조건 예쁘고. 첫 번째 그 다음에 어느 대학 나왔는지. 남자는 나는 어느 대학 출신이고.

이것이 나라는 것은 관계성 속에서 관계에 휩싸였다고 보면 돼요. 이러면 시편 15편은 서서히 그 내막이 풀립니다. 하나님의 성산에 오를 자 누가 있느냐고 했잖아요. 그러면 이걸 쉽게 천국 갑시다. 천국 가는데 개인으로 천국 못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뭐냐 하면, 나라는 것이 홀로 나가 아니죠. 홀로 나는 몸이고 나는 남자라 해도 소용없어요. 나는 이 세상의 권력에 휩싸여 있는 나.

그리고 천국도 하나님께서 동거를 요구하니까 새로운 관계, 새로운 권력체제를 요구하니까 하나님께서 천국에 넣어줄 백성에게 말을 하실 때에 나를 고려하겠어요, 이 권력에 휩싸인 나를 고려하겠어요? 권력과 관계된 나를 하겠지요. 그러면 여기서 이 말씀은 무엇을 요구하느냐 하면 해방을 요구하는 겁니다. 출애굽.

이걸 기존 교회에서는 오해를 해서 나를 단독자로 오해하는 거예요.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며 성산에 거할 자 누구냐? 쉽게 말해서 천국에 갈 자는 누구냐?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며” 이렇게 나오니까 사적인 나의 자질을 발휘해서 자질을 발휘한 나만 천국 가고 그렇지 않으면 떨어진다고 생각한 거예요. 사람이 늪에 빠졌으면 아무리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 빠지는 것처럼 뭔가 시도하려면....

내가 스스로 해방한다는 것은, 권력에서 단독으로 해방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지금까지 강의를 다시 해보면, 내가 행방된다는 것은 권력에서 홀로 되고 싶다는 거예요. 이거는 뭐냐? 악마적이에요. 너무나 악마적 속성이기 때문에 어딜 못 갑니까? 천국에 넣어주질 않지요. 단독으로 해방하기 위해서 여기다 뭘 하느냐 하면, 선행과 경건과 거룩을 집어넣는다고요. 그러니 이것은 실컷 경건하고 거룩하고 착해서 지옥 가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권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해방되기 위해서는 아까 뭘 짝을 이뤘습니까? 타인을 지배해야 되겠지요. 나 하나 천당 가기 위해서 남을 괴롭힐 수밖에 없는 그런 관계 속에 인간이 있는 거예요. 내가 단독자일 때는. 그래서 나를 천사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남편이 필요하냐 하면 술 먹고 패는 남편이 필요한 거예요. 나는 가면 갈수록 주여, 지금 주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저 어때요? 맨날 이런 식이에요. 때로는 환란 가운데 참으리라. 죽으면 죽으리라. 아예 쑈를 하고 있어.

집에서 얻어맞고 교회에서 새벽기도하다 엉엉 울고, 또 가서 얻어터지고 울고. 그런 여자 집사들 교회에서 청소나 뭐 할 때 만나면 왜 그렇게 싸움은 잘하는지. 자기 남편한테는 못 이기면서 같은 여전도회에서는 그렇게 싸움을 잘하고 고집이 세고 삐지기도 잘하고. 왜냐하면 열등의식, 남편한테 얻어맞던 그 위로를 교회에서 받아야 되는데 위로를 안 해주니까 화나는 거예요. 왜 위로해야 되지요, 왜?

주님의 방식은 이겁니다. 이 세상에서 벗어나려면 네가 악인이 되어라. 죄인이 돼야 돼요. 참 쉽지요. 우리 이런 것 잘하잖아요. 못되고 독한 건 우리 역할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이 악마한테 세상을 맡겨놓은 것은 천국은 네 힘으로 단독으로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고, 싱크대 밑에 배수구 있지요. 네가 쓰레기가 되어 배수구로 빠져나와야 천국 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천국 가는 코스가 그 코스기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의 죽으심이에요.

주님이 의인의 대우를 받아 죽었습니까, 죄인의 대우 받아 죽었습니까? 의인이면 누가 죽입니까? 죄인이기 때문에 죽어 없어져도 상관없다고 보지요. 주님은 그 당시 사회에서 예수님은 없어도 그만인 존재로 각인 되었어요. 그것을 베드로전서나 성경 여러 군데 보게 되면 그걸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라 그래요. 예수님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에요. 오늘날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진짜 예수님은 교회부흥에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교회부흥에 방해물일 뿐이에요.

이 세상에 교회가 있다. 교회를 키우려면 권력이 있어야 돼요. 목사가 권력을 추구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피지배자는 누굽니까? 바로 교인들이죠. 이 세상에 권력은 두 가지가 있거든요. 어렵지 않으니까 권력에는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정치적 권력이 있고, 하나는 경제적 권력이 있습니다. 경제적 권력이야 여러분이 아는 자본주의 아닙니까.

정치적 권력이란 정치 엘리트의 문자적인, 법적 지식에 의한 정신적 권세지요. 이게 전부 다 어디 출신이냐 하면, 서울법대 출신이거든요. 판검사 출신 아닙니까. 그들이 쓰는 문자를 일반인들이 몰라요. 국회에서 법 만들고 모든 것을 법으로 만들거든요. 법치주의 국가니까. 법을 만들기 위해서 단어 하나하나가 함축이 돼있단 말이죠. 함축된 것을 어느 세월에 다 설명해줘요. 멋지게 용어 하나 만들면 뭔지도 모르고 오케이 해서 다 통과돼버린단 말이에요.

소위 무식한 사람은 국회의원 돼도 소용없어요. 왕따 당해요. 요새 국회의원 하는 사람들 전부 다 법률가들입니다. 법률가들이 자기들끼리만 아는 그런 지식이 상대적으로 무식한 국민들을 정신적으로 통치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말발이거든요. 교회에서 하여튼 공부보다도 다른 데 있던 사람이 장로 돼보세요. 목사는 완전히 무시할 수밖에.

다시 합시다. 시편 15편에서 여호와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냐고 할 때 주님께서 동거를 원했고 천국에서 동거가 되려면 이 지상에서 우리가 동거란 생활을 받아줘야 되는데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단독이고 개인적이에요. 개인적이기 때문에 천국이 있다고 해서 가는 게 아닙니다. 이게 바뀌어져야 되거든요. 개인주의가 탈피해야 되고 그 개인주의가 부정당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개인주의가 부정당할 때 이 세상에서는 개개인 권력자체가 마귀가 지배하기 때문에 이걸 이 세상 신이라 합니다. 이 세상에 오야봉 되는 악마가 천국에서 나올 때 독단적으로 나왔거든요. 대장하겠다고 나왔단 말이죠. 그래서 선악과를 아담과 하와를 시켜서 훼손했고 그 아담과 하와가 한 패 먹었단 말이죠. 악마와. 아담과 하와의 속성 자체가 뭡니까? 최고가 되고 아무도 나를 간섭함이 없기를 바라는 그런 이상, 그런 속성이 지배하는 거예요.

따라서 권력이란 지배하는 쪽이 계속 나타나고 상대적으로 지배받는 쪽이 나타나겠지요. 그 권력 양상이 두 가지지요. 정치적으로 문자에 대한 지식이 확보된 자가 상대적으로 무식한 사람을 지배하는 거예요.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걸 정치적 권세라면, 경제적 권력은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알지요. 돈 있는 자가 갑질하는 것. 이것 예시가 이 두 가지밖에 없어요.

그럼 이 땅에서 우리가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강요받은 게 뭐냐 하면, 출세거든요. 출세란 반드시 목표가 있게 마련이잖아요. 목표는 이 둘 중에 하나밖에 없어요. 돌 잔치할 때 판사 봉 쥘래, 아니면 돈 쥘래? 이거지, 성경책은 갖다 놓지도 않아. 여자 아기면 마이크 쥘래? 아나운서 하라는 말 아닙니까. 요새는 실도 없어. 실 잡으면 요양병원에 호스 꼽고 있어야 되기 때문에 그것도 치워버리고

정치할래, 법을 알래. 안 그러면 돈 알래. 부자 될래. 이게 이미 목표가 된 거예요. 이게 누구의 목표냐 하면, 우리의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는 없어요. 나뿐이에요. 그런데 천국은 뭐냐 하면, 나가 없어요. 우리밖에 없어요. 그래서 천국에서 오신 주님께서 이 지상에서 하실 일이 있는데 우선 요한복음 12장 잠깐 봅시다. 12장 31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그러니까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목표가 있었지요. 뭘 노립니까? 이 세상 임금만 조지면, 내가 쫄지 않을 인간들에게 쫄았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걸 주님은 자유라 하는데 그 자유가 해방인데 해방이란 말이 되려면 그전에 우리가 철저하게 자력으로 독자적으론 해방될 수 없는 지경에 완전히 놓여있어야 돼요. 본인이 스스로 구원받을 것이라면 뭐 때문에 하늘에 계신 분이 일부러 땅까지 내려올 이유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인생관이 내가 뭘 하겠다는 걸 세우지 마세요. 주님께서 하늘에서 땅에까지 내려온 그 취지가 유일한 인생관이 돼야 돼요. 내가 뭘 할 것이냐가 아니라 주께서 나한테 무슨 짓을 하셨습니까? 저한테 뭘 하셨습니까? 이게 인생관 돼야 돼요. 주께서 뭘 하시기는 우리가 평생 벌벌 떨며 살았다는 모든 구조를 완전히 부수시려 왔지요. 다 깨버리는 거죠.

그걸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나라는 것은 주위에서 나에게 관계, 너 뭐 할 줄 알아, 관계할 때 비로소 나가 된다는 것. 우리는 아기처럼 태어났잖아요. 아기가 뭐로 변합니까? 자아로 변하는 거예요. 6~18개월 사이에 자아가 되는 거예요. 점점 더 몸 하나밖에 없는데 아기 하나 태어나면 처음에 아기는 아무 생각도 없어요. 2개월쯤에 되면 까르르 까꿍, 반응을 나타내요. 특정인에게 반응을 나타내는 거예요.

엄마와 독점적인 관계에 놓여있는 거예요. 엄마의 권력 안에 들어온 거예요. 그 아기가 다른 아줌마가 젖 준다고 반응 보이는 것 아니거든요. 엄마가 웃게 할 때 그때 까르르 한다 이 말이죠. 이미 그것이 인간의 몸의 한계성을 드러내요. 엄마가 까꿍 할 때 이름 부를 때 몸에서 서서히 자아가 돼가는 거예요. 자아라 하는 것은 나를 웃게 하는 사람은 특별히 정해져 있다. 나에게 젖 주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그럼 나는 정해진 사람의 관계 속에 예속돼있는 거예요.

책상 위에 대표이사 아무개라는 명패가 있는데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오셔서 닦다가 이게 있더란 말이죠. 이걸 샌드페이퍼로 문댄 거예요. 그럼 어떻게 돼요? 지워지겠지요. 이때 사장이 왔을 때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내가 잘리란 뜻이야, 이러겠지요.

어제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며느리 하는 일 누가 정해준 거예요? 너는 우리 집안의 며느리야, 할 때 이 며느리를 지워버리는 이것을 누가 할 일이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하실 일입니다. 지워버리는 거예요. 이게 가능할까요, 과연. 가능하냔 말이죠. 내가 짐처럼 운명처럼 짊어지워진 모든 수천 가지의 권력들이 또는 질서들, 체제들이 거기에 꼼짝 마라.

나는 며느리라고 호명이 되면 그 다음에 나올 역할은 하나밖에 없어요. 며느리다움, 이것밖에 없지요. 며느리다운 게 어떤 게 있어요? 어떻게 해야 돼요? 한도 끝도 없어요. 며느리다운 게. 시가집에 전화를 몇 번 해야 되고 봉투에 얼마 넣어야 되고. 이걸 소극적으로 할 거냐, 적극적으로 매진할 거냐. 자기 아이 셋을 나도 시가집에 올인하는 분도 있어요. 울 엄마^^

그래서 어머니, 왜 그렇게 했습니까? 여자가 시집갔으면 시집의 귀신이 돼야 돼. 시집에서 예쁨 받아서 여자로서 사는 행복이 있지, 시집에서 뭐 이렇게 하면 그건 여자로선 끝난 팔자라는 거예요. 시집에서 예쁨 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분위기 파악을 잘한 건 좋은데 자식 셋은 관심도 없고 할머니가 늦게 낳은 시누이와 시동생 받들기 바빴어요. 왜? 그 시누이와 시동생 배후에는 시어머니가 연결되니까. 자기 새끼 놔두고 남의 새끼라 하면 안 되지만, 엎어지는 거예요. 그래야 예쁨 받으니까.

얼마나 독자적이에요. 주변에 있는 모든 관계에서 나름대로의 해방감은 제한된 질서 안에서의 해방감, 그 안에서 나름대로 숨 좀 쉬어보자는 것, 이게 바로 이미자가 불렀던 <여자의 일생> 아닙니까. 그 자체 내에서 나도 숨 좀 쉬어보자. 온 눈치 봐가면서 빨리빨리 행동하고, 시아버지 눈짓하면 가야 되고 모든 게 철저하게 시집에 길들여진 며느리가 되는 겁니다.

바로 주님이 오신 것은 자식이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그런 말씀 좀 외워놓으세요. 마태복음 10장. 천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생각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못 들어간다. 하늘나라의 모든 질서와 관계가 세상 것을 완전히 거부하는 합니다. 그야말로 산 채로 갈 수 없는 나라에요. 왜냐하면 며느리란 살아 있을 때는 계속해서 붙어있는 운명 같은 거거든요. 족쇄 같은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께서 누구 이름 부르는 게 아니고 누구 며느리를 죽여 버리죠. 죽을 때 그냥 죽으면 안 되고 같이. 같이 죽었다는 이유 때문에 같이 천국에 가는 겁니다. 해병대 훈련 그렇게 힘들어도 그들이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같이 견뎠다는 것. 같이 고생하고 같이 울고 같이 땀 흘렸다는 이유 때문에 동지애가 생기는 거예요.

그게 뭐냐? 바로 주님과의 동거고 동행입니다. 이게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나와요. 하나님이 천국 백성을 이야기할 때 너는 내 이름으로 고생 많이 했잖아. 네 이름 말고 네 독자적인 출세고 구원이 아니라 나름대로 예수님으로 인하여 수난과 핍박이 오니까 그걸 본인이 원했던 아니에요. 아까 이야기한 정치적으로 출세하려고 시도한 게 아니고 그냥 난데없이 쳐들어온 거예요.

기존의 권력이 있는데 새로운 권력이 와서 새로운 천국이 온 거예요. 그래서 천국은 죽어서 가는 데가 아니라 미리 시작된 나라에요. 두 나라가 중첩된 현실이에요. 현실이 위로 중첩된 거예요.

쉬운 예로 여러분 금은방에 가게 되면 유리로 만든 진열장 있지요. 진열장 앞에 서있다면 잠시 착각할 때가 있어요. 유리 안에 보석들이 들어있는데 유리가 너무 맑다보니까 손이 가도 유리에 닿지요. 유리 위와 유리 밑이 유리는 투명하니까 같이 내 손과 밑에 있는 시계가 같은 공간에 있다 하지만 유리로 나눠져 있잖아요.

주님께서 이 유리를 뭐로 보자? 요한계시록에선 이 유리를 성령으로 보는 거예요. 성령 안에 있는 사람과 성령 밖의 사람은 완전히 관계가 없어요. 도저히 연결이 안 돼요. 안 되지만 성령 자체가 보이질 않아요. 보이질 않으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유령 같은 존재로 살아가면서도 다른 사람 보기에는 같은 육체를 가진 보통 사람으로 보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3장에서 요단강에서 성령 받았지요. 성령 받았으면 이 세상사람 아니에요. 중첩된 나라에서 이 세상 권력에 속하지 않은 거죠.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 보면서 목수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심지어 자기 아버지도 예수님을 못 알아봤어요. 유월절 명절 행사에 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잃어버렸어요. 나중에 수소문해서 찾으니까 아버지 요셉이 나무랐습니다.

우리가 널 얼마나 찾았다고, 이러니까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영재발굴단 같아. 영적인 것엔 천재 같아.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 몰랐습니까? 찾으려면 내비게이션 해도 성령 나오면 바로 내가 있는데 우리 하나님 집이 내 아버지 집인데 거기서 찾아야지, 하고 오히려 반격을 하고 있어요. 중첩된 현실에서 소속이 다른 것을 아버지, 엄마도 못 알아보는 거예요.

나중에 엄마도 마찬가지지요. 가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 떨어졌다고 하니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있습니까? 내가 이 땅에 포도주 만들려고 온 게 아니잖아요. 정말 포도주를 만들 때 이 지상에 있는 포도주 안에다가 천국의 요소를 집어넣으니까 뭐가 포도주냐 하면 예수님의 피가 포도주 됐어요.

이렇게 중첩된 의미를 갖고 있는 걸 표적이라고 합니다. 표적은 기적이 아니에요. 기적은 일으키면 이쪽 권력으로 도로 회수가 가능하지만 표적은 나로 하여금 이 권력 세계에서 떠오는 존재인 것을 자각하게 만드는 이게 표적이에요. 암에 걸렸다. 기도했다. 어, 병이 나았네. 이러면 기적이 되지요. 그건 도로 나 건강했다가 되기 때문에 이 세계에 있어요.

그런데 암 나을 것을 기도했는데 암 나은 게 아니고 내가 죄인인 것을 알았어요. 그럼 이 사람은 암 낫고 안 낫고는 시시한 문제 되지요. 내가 암 4기라는 문제가 나한테는 너무 시시한 거예요. 감기 걸려서 콧물 난다고 자살할까요? 그럴 수 없잖아요. 그야말로 암 4기의 극심한 고통이 감기 걸려서 콧물 질질 나는 정도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께서 콧물 나게 하셨네. 주께서 암 4기 걸리게 하셨네. 그것뿐이에요.

자기 암에 대해서 더 이상 이야기할 게 없어요. 나는 암에 걸리든 3기든 2기든 관계없이 나는 이미 시작된 천국의 백성이다. 왜? 중첩됐으니까. 나는 죽었고 내 생명은 하늘에 간직된 바이다. 골로새서 3장 4절 말씀.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는, 제가 일단 정리해야 되겠지요.

시편 15편에서 천국은 이미 마련돼 있고 이스라엘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의 성산에(천국입니다) 유할 자 누구며 성막에 거할 자 누구냐, 라고 물을 때 이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바로 동거의식이 동행의식이 밑에 바친 채 들어오는 거예요. 동행을 해야 이 관계에 끌린 사람이 천국에서 동행이 되기 때문에 되겠지요.

천국은 나 혼자 사는 동네가 아니잖아요. 나 혼자 살면서 입 튀어나오고 삐지면 안 된다 말이죠. 동행해준 것에 대해서 너무나 감격해야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가 있어요. 여기서 훌적훌적 울고 그러면, 그런 인간 들어오지도 못하지만. 엄마가 보고 싶어, 이러면 안 된단 말이죠. 엄마가 보고 싶은 것은 이쪽 세계에서 엄마와 동행해서 그런데 엄마가 자리가 누가 들어온단 말이죠.

그러면 오늘 시편 15편의 해석은 간편해요. 말씀을 주시는 그분이 문제 출제자가 말씀을 성취하는 용도로써 밑에 깔고 들어오시는 거예요. 말씀만 들어오는 게 아니고 말씀을 제시하신 분이 같이 들어오는 거예요. 같이 들어오게 되면 여기 있는 사람은 그 말씀을 성취하신 분, 말씀을 주신 분=성취하신 분이에요.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하기 때문에. 자신이 자기 성취, 자기 숙제를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 말씀이 들어왔잖아요. 유대인들. 이 사람들 아까 개인주의라 했지요. 개인의 출세, 악마의 속성이 있으니까 나만 잘되면 하겠지요. 그러면 여기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자기가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자기 실력으로 지켜보려고 하겠지요. 시편 15편 봅시다. 주의 성산에 유할 자 누구냐, 하니까 이게 미끼상품이 되는 거예요. 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셨구나.

그러면 우린 그 다음에 궁금한 건 어떻게 하면 내가 천국 갈 수 있어요, 라고 하겠지요. “정직하게 행하며” 그러니까 보통 통지표에 보면 국어, 영어, 수학, 사회, 자연이라고 칸막이 있잖아요. “정직하게 행하며”는 국어 란에 집어넣어요. 그 다음에 산수 란에, “공의를 일삼으며” 그 다음에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이건 사회, 그 다음에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이건 자연, 그 다음에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이건 도덕,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이건 체육, 그 다음에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이건 음악, 그 다음에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을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이건 기술,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이거는 생활기록부 기록 란.

그래서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위한 내신 성적 또는 생활 관리부를 본인이 만들어요. 국어 80점, 수학 몇 점, 이렇게 점수를 매겨요. 본인이. 점수를 매겨서 수학에 치중했다 싶으면 여력이 있으니까 사회가 50점 밑으로 내려가면 관심사를 정력을 수학은 잠시 미루고, 혀로 참소치 아니하는 묵언수행에 들어가요. 앞으로 한 달간 말 안 하기. 그렇게 해서 조정에 나서는 거예요. 각자의 개별 통지표를 가지고.

이걸 가지고 교회에 갑니다. 교회 가면 지배자가 있잖아요. 목사. 성경전문가라고 자처하는 목사가 있지요. 목사한테 가서 질문을 이렇게 해요. 천국은 어떻게 갑니까, 그건 안 중요해요. 그건 시편 15편에 나오는 거니까. 질문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혀로 참소치 않는 방법이 뭡니까, 이렇게 물어요. 이게 오늘날 교회만 하는 게 아니고 이걸 오랫동안 천년 동안 한 단체가 있습니다. 유대교입니다. 선배들이에요.

선배들이 뭘 만들었느냐 하면, 하나님 말씀에다 해설서를 붙여요. 말씀을 잘 지키는 해설서. 그러니까 성문종합영어 또는 수학정석을 붙여놓는 거예요. 수학정석1, 수학정석2를 붙여서 교과서 말고 보충수업을 하는 겁니다. 안식일이 나오잖아요. 안식일에 어떻게 잘 지키는지 보충해설서를 갖다 붙여놓은 거예요. 이걸 넓게 이야기해서 탈무드라 하는 거예요.

이 탈무드에 정통하고 거기에 달인들, 그런 것을 자기가 지은 게 아니고 전통적으로 내려온 거니까 이럴 때 가장 안식일답다고 삼백 몇 가지인가 엄청난 그걸 관리하고 가르쳐 교육하고 거기에 전문 강사로 나선 게 누구냐 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입니다. 로마서 2장 봅시다. 누가 21절부터 23절까지 읽어보세요.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이렇게 돼있지요. 야고보서 2장에 가면 더 심하게 이야기합니다. 율법을 하나라도 어기면 모든 것을 어긴다. 성경이 잘 안 될 때는 독서모임에 가서 이렇게 하면 읽어져요. 광산 김 씨에 보면 독서모임에.

율법은 체인이 연결돼있거든요. 마치 옥수수 밭에 멧돼지 들어오면 경고음 날릴 때 딸랑이처럼 남쪽에서 건드리면 북쪽 딸랑이까지 건드려요. 이 말은 율법은 하나의 목적으로 뭉쳐져 있기 때문에 너는 조항들마다 끊어졌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율법 전체가 한 덩어리로 돼있어요. 이게 주님의 사랑인데 이걸 건드리면 사랑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우리가 저주를 받게 돼있어요.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자가 간음한 자가 돼요. 여자를 보고 마음으로 음욕을 품은 자가 간음한 자가 된다고. 그러면 간음한 자인 동시에 뭐도 딸랑대겠습니까? 살인죄도 딸랑딸랑, 안식일도 딸랑딸랑, 이 바보 같은 유대인들은 도대체 율법에 대해서 하나님이 율법을 준 것으로 하나님의 손을 떼게 만들어요. 하나님은 더 이상 할 것 없고 이제 나머지는 우리 역량에 따라서 천국 가고, 합격, 불합격은 우리 역량에 달렸다고 보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와 똑같아요. 유대인 사회나. 성적표, 내신 성적이 있으니까.

제가 어떤 한국기독교단체의 교리를 말할 테니까 뭐가 잘못됐는지 봐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십자가 지셨다. 모든 인간을 용서하기 위해서 십자가 지셨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 따라서 구원받는 문제는 십자가 지기까지는 하나님이 하시고 그 다음부터 십자가 믿고 안 믿고는 하나님이 자유의지를 주셔서 자율권에 달려서 십자가를 외면하면 지옥 가고 십자가 믿으면 천국 간다.

이 교리를 내세운 단체가 있어요. 침례교입니다.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이 이론이 맞아요, 안 맞아요? 이게 우리는 뭔지 모르지만 무조건 아니어야 한다고 우기는 데 왜 제가 이 교리를 소개하느냐 하면, 이게 우리 기본 심성에 딱 들어맞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여호와증인도 이 파고요, 모든 구원파가 바로 여기서 나온 거예요. 구원파의 목적은 뭐냐? 구원에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나는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구원파나 침례교나 이쪽은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 안 해요. 구원받기 위한 대기상태에 있을 뿐이지 죄인은 아니라는 거예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고요. 구원받을 수 있다는 거예요. 천국에 못 들어가는 존재라는 걸 생각 못하고 천국에는 들어갈 권한이 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생각 자체가 성령을 안 받았으니까 자기가 죄인인 걸 모르는 거예요.

천국 갈 때 성령이 오시는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가 구원할 때 말씀을 주시고 말씀 성취는 누가 합니까? 예수님만 다 이루고 예수님만 다 하셨다는 걸 누가 알려줍니까? 성령이 알려주지요. 성령이 왔다는 말은 우리는 말씀을 줘도 아무리 지켜도 천국 갈 만큼 의가 되지 못함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성령이 오잖아요.

그러면 구원받으려면 오신 성령께서 성령 자체가 하나님이 성령을 소환하게 되면 그 성령이 있는 사람이 같이 딸려서 구원받는 거예요. 주께서는 성령을 요구한다고요. 나의 자질을 요구하는 게 아니고요. 나의 솜씨를 요구하는 게 아니고 한평생 네가 어디서 뭘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옥경이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고요. 희미한 등불 아래서 울든지 말든지 관계없어요.

이걸 더 심하게 말해서 주께선 자기 편지를 던져놓고 우리가 쥐고 있는 자기 편지를 회수하다보면 딸려가는 거예요. 말씀이 편지 아닙니까. 말씀이 와서 말씀을 회수하면서 우리는 거기 딸려서 콩고물 묻히듯이 그냥 구원받는 거예요. 거기에 내 솜씨를 왜 갖다 묻혀요. 콩고물 다 떼어내야 돼. 그냥 와서 그냥 구원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내 구원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지키려고 하지요. 아까 수학, 영어 하지요. 그러면 성령께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의 솜씨를 이미 중복된 현실 속에서 성령이 와서 강제로 우리의 잘남과 성경 말씀을 떼어내겠지요.


10분 쉽시다.
 한윤범(IP:119.♡.174.171) 19-11-13 10:06 
20191111b 부산강의 : [시편]23(15편)-동거
(강의:이근호 목사)


구원파나 기독교에서 아까 그런 교리처럼 천국은 가고 싶고, 구원에 대한 욕망이죠. 내가 절대적인 영생을 누리겠다는 탐욕, 그 탐욕은 나에게 나오고, 그 방법을 성령이 어느 세월에 오겠어요. 나부터 먼저 나서면 성령이 마중 나오겠지, 하는 식으로 성령 달라고 하면 주시겠지, 충만케 해달라고 하면 주시겠지, 하고 성급하게 나올 때 그렇게 나오는 주어, 그런데 주어라 하지 않고 아까 이걸 주체, 주체 자체에 문제가 있어요. 문제 있음, 주체 자체에 문제가 있거든요.

그래서 아무리 말씀을 줘도 못 지키는 이유가 뭐냐? 율법이 비-자연적이기 때문에. 율법이 비-자연적이에요. 이 사실을 몰라요. 그러면 우리 인간은 자연에 포함돼있거든요. 인간이 나쁜 짓을 해서 힘든 게 아니고 같이 썩어가고 있습니다. 자연과 더불어서. 자연이 피곤해요.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마지막 때란 모든 언약이 이뤄질 때를 마지막 때라 하거든요. 오후설교에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드라마 마지막 회에는 세월이 팍팍 뛴다 했지요. 마지막 때가 되면 모든 것이 철수합니다. 철수할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예수님에 의해서 마련됐어요.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려면 새로운 주인공이 등장해야 돼요.

이제 아담은 은퇴하고 그 아담 자리에 마지막 아담, 두 번째 아담인 예수님이 들어서면 예수님의 휘광, 예수님의 아우라, 예수님을 주라고 높이기 위한 용도로써 새 하늘과 새 땅이 배치가 되고 성도는 거기에 합류가 되는 겁니다. 성경에선 예수님을 맏아들이라 하고 맏아들 하나 잘 만나면 동생들은 그냥 덤으로 가는 거예요. 만유의 장자가 되게 하심이라. 로마서 8장에 나오거든요.

그리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우리는 양자가 돼요. 성경에 나오는 이 모든 용어들이 뭐예요? 예수님 하나 주가 됨으로써 그냥 공짜로 덕 본다 이 말 아닙니까. 중심이 있어요. 예수님이 중심이란 게 있어요. 이 말은 누가 중심이 아니다? 나는 중심이 아닌 거예요. 이게 메인과 서브의 관계란 말이죠. 오늘 제목은 메인과 서브. 보조와 주인공의 차이가 나요.

보조의 역할은 보조를 위한 그런 상황은 아니에요. 보조라는 어떤 주체의 호명, 너는 보조라고 할 때 누가 나를 보조라고 하느냐? 우리 주인 되시는 분이 보조라 하면 우리는 큰 영광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엄마, 그리고 아내, 남편 이 신분도 에베소서 5장에서는 메인 주를 위한 서브에 해당되는 신분들이 남편, 아내, 아버지, 아들 관계에요. 그리고 노동자와 주인 관계지요.

에베소서 5장에 보면 나와 있어요. 아내 된 자들이여, 남편 된 자들이여, 아버지 된 자들이여 자식을 노하게 하지 말고. 전부 다 조건이 있어요. 주 안에서. 효도하란 말이 아니고 주님 안에서.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 그냥 만나지 말고 주님을 경유해서 주님의 보조라는 입장에서 만나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들 젊은 때 놀이동산 가봤잖아요. 놀이동산에서 제일 여러 가지 기구들이 있지만 안 빠지고 있는 기구 중에 이거에요. 회전그네. 속도 높이면 이게 붕붕 날라. 끼악하면서 둘이 좋아하면서 데이트하면서 날아가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돌리는 게 메인이고 돌아가는 게 서브라니까요. 주님이 시키는 대로 날아갈 수밖에 없어요.

왜 저런 남자를 만났는가? 메인이 그런 남자를 만나게 했지요. 나 좋다는 남자 그렇게 많아도 다 제치고 그 남자 한 이유가 나중에 소급해서 보니까 메인이 그렇게 했어. 남편 의지하는 게 아니고 주님 의지하라고 남편 만나고 주님 의지하라고 아내 만나게 하신 거예요.

다시 아까 첫 번째 강의에 의하면 나 자체가 어디에 포함된다? 기적을 원하면 안 되고 표적에 소속돼야 되고 표적의 주인공은 주님이 주인공이고 그래야 표적이 돼요.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지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내가 서브가 된 것은 메인의 덕분이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백부장이 뭐라고 합니까?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까라면 까겠습니다.

그걸 가지고 연결성, 메인과 서브의 연결을 믿음이라 합니다. 믿음은 어디서 만들어냅니까? 주님의 나라기 때문에 누구 압력 받거나 하지 않아요. 주님 일방적으로 자기 백성을 고를 수 있는 자격, 선택권이 있어요. 요한복음 5장에 아버지가 자기 아들 선택한 것처럼 나도 너희를 선택한다. 얼마나 중요한 구절입니까. 예수님이 나를 골랐데요.

그러니까 나는 선 자리에 갔는데 내가 주님을 고른 게 아니고 주님께서 찍었단 말이죠. 너, 나를 메인으로 이제부터 모셔, 라고 찍은 거예요. 그 관계 믿음이에요. 그러면 믿음을 훼손하는 게 뭘까요? 믿음을 훼손하는 게 바로 내 믿음이죠. 앞에 나가 붙는.

내 믿음은 내가 독자적인 악마적 속성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남한테 은혜 주지 말고 누구한테 은혜 줘라? 무조건 기도한 나에게 응답해야 되고 나에게 은혜 줘야 돼. 이게 바로 내 믿음이고, 내 믿음이 진짜 믿음을 핍박하고 박해하지요. 그래서 내 믿음이 없어지게 성령께서 하셔요.

그래서 제가 만든 유명한 말, 우리가 불신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이 말이에요. 우리가 믿지 않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나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내가 주님을 믿지 않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아까 놀이동산의 기구. 내가 인간으로 살면서 메인의 자리에 들어가 있지요. 왜냐하면 내가 나빠서가 아니라 나를 둘러싼 이 사회가 권력사회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서 다 배운 거예요.

어느 엄마가 갓난아기한테 너는 커서 서브가 되라. 너는 절대로 영화해도 조연출하고 감독 되면 안 돼. 이렇게 가르치는 엄마가 누가 있어요. 너는 주인공이 돼야 돼. 국가와 인류, 교회를 위해서 큰 일꾼이 돼야 돼. 맨날 이렇게 가르치잖아요. 인간은 어릴 때부터 메인 된다고 생각한단 말이죠.

메인 될 때 저 친구는 내가 필요해서 잡겠어. 이걸 믿음이라 하지요. 저 운전사는 믿을만해서 저 버스를 타겠어. 저 비행기는 회사가 믿을만해서 타겠어. 이 과목은 내가 성적 오를 것 같아서 하겠어. 전부 다 세상에 있는 모든 관계가 내가 메인이라면 내게 필요해서 맺었던 이 관계는 결국 무슨 관계입니까? 믿음이잖아요. 그 믿음 안에 걸려든 게 바로 예수고 교회란 말이죠. 진자교회는 내가 천당 보내겠어. 이런 것.

우리가 믿음이 없는 게 아니라니까요. 지금 믿음이 있어서 문제에요. 특히 이 믿음 가운데서 내가 기도하면 응답받는다. 내 경험이다. 이게 뭐예요? 내 믿음을 확고히 하는 하나의 근거로써 계속 제공되는 거예요.

교도소에 있는 내 아들을 유괴해서 죽인 저 남자는 반드시 내가 복음 전해서 구원한다, 라고 전도연이 교인 돼서 굳게 믿고 교도소에 가서 자기 아들 유괴해서 죽인 남자를 전도하려고 하니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저 벌써 교도소에서 예수 믿었네요.” 그 소리 듣고 완전히 이제부터는 거짓말이야 노래 부르는. 이게 전도연이 <밀양>으로 2007년 60회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받은 그 영화에요. 재미있지 않습니까. 전도하러 갔는데 먼저 전도하니까 뭐가 깨진 거예요? 자기가 메인이란 게 깨졌지요.

그러니까 전도란 결국 뭐냐 하면, 남을 전도하는 게 아니고 너는 나한테 서브가 되라는 사람들 꼬시는 그것이 전도가 돼버린 거예요. 너는 나 때문에 이 자리에 앉았어. 나 아니면 이 교회 오지도 못했어. 전부 다 전도하는 본인이 주님의 전도를 방해하는 방해물이 되는 겁니다. 세상에는 그래야 권력이 되니까.

교회가 시끄러우면 나쁘다. 이유가 뭐냐? ①교회가 시끄러우니까. ②교회가 부흥 안 되니까. 어느 쪽입니까? ②번이죠. 교회가 시끄러우면 안 되는 이유가, 교회가 부흥 안 된다는 거예요. 교회가 우상이에요. 교회가 완전히 우상 돼버렸어요. 교회는 시끄러워야 되잖아요. 시끄러워야 돼서 시끄러운데 뭐가 나빠요. 한우가 맛있어서 맛있다고 하는데 뭐가 문제가 되느냐 말이죠.

우리 집구석이 시끄러워. 시끄러워야 되죠. 서로가 주인공이고 메인 되려고 하니까. 식구가 다섯인데 전부 다 메인만 있어. 방이 다섯 개거든. 서브가 한 명도 없어요. 서브가 많이 있으면 조용해져요. 메인이 되면 시끄러워요. <응답하라1988>에 나오는 것처럼 애들까지 전부 다 시끄러워.

다시 정리해봅시다. 말씀을 주실 때 우리가 마중 나가는 것은 안 됩니다. 이것은 기적을 원하기 때문에. 기적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메인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이건 지옥 가는 것과 관련돼있어요. 그런데 그 기적 가운데 사람들은 뭘 원하느냐 하면, 구원받는 기적을 원하지요. 더불어요? 아니요. 나만. 나만 구원받는 기적을 원합니다.

그러면 표적은 뭐라 했습니까? 표적은 내가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님이 구원주인 것을 아는 게 표적이 되는 겁니다. 왜? 구원에서도 메인이 있고 서브가 있는데 나의 구원은 구원받기 위한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준 게 아니고 구원이 주님을 위한 구원임을 알기 위해서 내가 구원받은 거예요. 내가 몸이 아프든 종이 되던 살인강도가 되던 창기가 되던 상관없어요. 그것조차도 주님의 구원에 하나의 서브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십자가 옆의 강도 되던 세리가 되던 창기가 되던 상관없이 죄인이 되던 문둥병자가 되던 절뚝발이가 되던 관계없이 나는 오직 주님께 감사하는 거죠. 이 관계가 바로 구원의 관계잖아요. 교회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교회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 교회는 아니지만 다른 데서 많이 들었던 공식이에요. 믿음으로 구원받고 기도해서 복 받자. 누구 좋으라고? 나 좋으라고.

그거는 천국에서는 안 받아줍니다. 천국에선 동거가 돼야 되는데 동거가 아니고 이건 자기주장밖에 안 되는 거예요. 만약에 천국에서 자기 구원받는다고 그렇게 핍박하고 미워하던 사람이 천국에 와있다고 해보세요. 천국에서 멱살 쥐고 싸울 일 있어요? 니가 왜 여기 왔지? 서로가. 오늘 너, 죽어봐라. 그게 무슨 천국입니까, 지옥이죠.

지옥의 모습은 거지 나사로 앞집에 살던 부자가 보여줬습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목이 마르다. 어쩌라고? 자기가 메인이었고 이 세상의 돈의 관계, 돈의 권력에 의하면 부자가 갑이 되잖아요. 그래서 누구에 시키느냐 하면, 거지한테 시켜서 자기 물심부름하라는 거예요. 다방에 커피 배달하는 것처럼. 배달 잘못하면 죽어요. 자기가 뭔데?

이렇게 내가 단단히 고정돼있어 버리면 내가 부인이 안 되고 부정돼있으면 주님을 자기 심부름꾼으로 사용해요. 조건이 뭐냐 하면, 믿어주겠다는 거예요. 사랑해줄게. 날 구원해주면 그까짓 다이아몬드가 문제이겠느냐고 나오는 거예요. 복 주면 복의 십분의 일을 떼어서 당신한테 줄게. 주님이 어떻게, 이건 주님이 배달원도 아니고, 주님이 야식합니까? 주님이 보이에요? 호텔 보이입니까? 아이고, 참. 얼마나 자기를 위대하게 여기가 얼마나 자기를 멋있게 포장했으면 주님을 자기 운명의 심부름꾼으로 사용하겠어요.

아까 유대인 이야기를 다시 해보겠습니다. 중요하기 때문에. 시편 15편이 여기 있습니다. 여기는 신약입니다. 제가 아까 얼른 언급했지요. 신약에서는 모든 것이 종말입니다. 더 쉽게 할까요? 파장입니다. 오일장 오후 6시. 우리 불로동에서 5, 10단위로 오일장 걸리거든요. 오후 다섯 시에 가면 다 파장이에요. 철거하고 다 가버렸어요. 바람만 휙 불어요. 쓰레기만 날리죠. 파장이란 말이죠.

파장이란 말은 파장 올 때까지 여기 무엇을 채웠을까, 하는 거예요. 이걸 놓쳐버리면 성경해석 곤란합니다. 인간들이 빡세게 뭘 지키려합니까? 시편 15편 사이니까 시편 15편을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왜 지키려고 하지요, 지키려는 의도가 뭡니까, 지키려는 목적이 뭡니까? 바로 우리 이스라엘이 주의 장막에 가려고. 그들은 이걸 약속을 이해한 거예요.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했다는 것, 그게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고 자부하거든요. 언약 백성인데 하나님이 언약을 줬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십자가 지는 것까지는 누가 하고? 하나님이 하시고 그 다음부터는 우리에게는 자율권, 자유의지가 있어서 이걸 지키면 합격이고 안 지키면 불합격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십자가와 나 사이의 빈 갭은 누가 채운다? 나의 성의와 열심과 각오와 단호한 의지로 채운다고 본 거예요.

이게 침례교라 했지요. 침례교 선배가 천주교입니다. 천주교가 딱 이 종교에요. 안 되니까 여자 하나 개입하지요. 아베마리아. 아베마리아가 왜 개입하느냐? 아베마리아가 빽이 있다는 거예요. 누구 빽이냐 하면, 예수님의 어머니니까. 아무리 나쁜 자식이라도 엄마 말은 듣지 않겠느냐. 아이고, 참. 교회가 기가 막혀요. 기가 막힌다는 것은 한심스럽다 이 말이죠.

두 번째 시간 시작할 때 율법은 뭐라고 했습니까? 비-자연적이다. 인간의 육은 자연에 속해요. 율법은 비-자연적이라서 누구만 이룰 수 있습니까? 주님만 이룰 수 있어요. 인간은 하나 어기면 다 어기니까. 율법은 너희들이 이미 선악과 따먹고 추방된 입장에서는 몸만 추방된 게 아니에요. 추방된 곳에서 독립운동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없이 우리가 돛대처럼 우리끼리 지혜 모아 살아가자는 그 정신의 지배를 받고 있는 거예요.

지배받고 있는 그 사실을 이스라엘 사람들도 애굽 출신이기 때문에 모르죠. 걸핏하면 자꾸 애굽으로 돌아가자, 애굽으로 돌아가자. 자기의 속성을 자기의 본질을 그대로 노골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이러려고 예수 믿었나, 이런 거요. 이러려면 예수 안 믿는다. 맨날 마치 예수 믿어주는 것이 무슨 큰 배려해주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창조주 믿어주는 것이 필수가 아니고 선택으로. 바쁘면 못 나가고 편할 때 갈게. 이런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이 어떻게 지켰느냐는 것을 살펴봐야 돼요. 선배니까. 우리의 선배들이에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먼저 말씀을 주신 것은 뭘 증거 하느냐 하면, 인간의 한계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이 한계성이 있다는 것은 인간들도 잘 알지 않습니까, 라고 생각하는데 인간들은 자기 한계를 몰라요. 우리는 천사도 아니고 죽으면 헛되고 세상 종교나 철학에서 하잖아. 헛되고 헛되며. 이러잖아요.

그게 한계가 아니에요. 인간은 어디에 매여 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마지막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짐승 계열이 나옵니다. 짐승의 족보가 나와요. 첫 번째 짐승, 두 번째 짐승, 세 번째 짐승, 네 번째 짐승이 나오는데 중요한 것은 첫 번째 짐승이 중요해요. 첫 번째 짐승들이 분파되어서 갈라져서 이 모든 세상이 다 된 겁니다.

제가 아까 요한복음 12장 읽을 때 봤지요. 주께서 어디를 공격한다 했습니까? 세상 임금을 공격하지요. 세상 임금이라는 것은 인간의 정신이 추상화 될 때 그 추상화가 어떤 구체적인 제도와 형식으로 정치적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게 바로 국가라는 것, 그리고 지도자, 영웅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죠. 인간의 모든 정신이. 그게 짐승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보이지 않는 짐승의 권력에 촘촘히 권력 망에 이미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들의 배후에 짐승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말씀에 담겨있는 뒤에 깔려있는 메시아란 것을 모르고 내가 지키면 나는 구원되지 않겠느냐는 종교적인 의도를 유감없이 발휘하게 돼있고 그래서 만들어진 게 교회라는 거예요.

신약의 마지막 책이 무슨 책이죠? 요한계시록이죠. 요한계시록에 교회 나오는데 그 교회의 특징은 교회가 보여줄 기능이 있어요, 역할이 있어요. 뭐냐 하면, 없어져야 됩니다. 일곱 교회 다 없어져야 됩니다. 사라져야 돼요. 안 사라지고 싶어도 사라져야 돼요. 일곱 교회가 다 사라져야 되는데 그게 사라질 때 하나, 1이죠. 한분에 의해서 사라지죠. 교회 일곱이라는 것은 세상을 지칭하는 숫자라면 중첩된 현실에서 보이지 않는 다른 완성된 하늘나라 이야기하겠지요.

그럼 일곱 교회 역할은 뭐냐 하면, 7을 통해서 7이 사라지면서 1에게 모인다는 것, 주님께서 모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7이란 숫자를 한 거예요. 7 교회는 교회가 계속 있어줘야 돼요. 있어주면서 사라져야 되지요. 나타나고 없어지고, 나타나고 없어지고. 그럼 교회는 뭐냐? 교회는 유령. 유령은 누구냐? 오늘날 저와 여러분 같은 성도입니다. 있다가 없고 없다가 나타나는 성도는 이 땅에 유령 같은 존재에요. 유령의 특징은 자유롭다는 거예요. 어떤 권세나 질서에 대해서 매이지 않는다는 것, 매일 필요가 없지요.

제가 이런 이야기하니까 머리 좋은 사람 생각나지 않습니까? 이분 생각나지 않습니까? 빌립보서 생각나지 않습니까? 내가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다. 나는 어떤 능력에 매이는데 이 능력은 나를 어떤 때는 가난에도 집어넣고 어떤 때는 부한 데도 집어넣는데 어디에 집어넣든지 관계없이 능력은 능력대로 나 할 도리를 다하게 만들었다. 이 말입니다.

실제로 봅시다. 고린도후서 4장, 어떤 분은 말하기를 목사님 설교 듣고 성경 안 본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강의 시간에 성경구절 많이 거론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고린도후서 4장 7절 제가 읽어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보배의 질그릇은 얼마 전에 설교할 때 서랍장에 있는 공이라고 표현했지요. “질그릇을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린 독단적으로 살지 못하지요.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이렇게 돼있어요. 이것 남자라면 뭘 생각하느냐 하면, 남자 축구선수 있잖아요. 메시 같아.

남자들이 메시 나오는 경기를 돈 많이 주고 가는 이유가, 메시가 덩치도 작은데 얼마나 잘하는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해요. 수비가 달려들어도 헤쳐 나갑니다. 기어이 한 골 넣어요. 그리고 답답한 일 당하여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태클 걸어도 다시 일어서요.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고. 누가 욕해도 꼿꼿이 공 몰고 나갑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왜냐하면 메시한테 공 자체가 능력이 되기 때문에.

공이 있기 때문에 딴 데 관심이나 신경 쓸 여유가 없어요, 지금. 어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주님의 지시만 있다면 우리 자리는 비어있어야 된다고. 옛날 지우개 알지요. 짜증나잖아요. 지우개로 지우려고 하면 종이까지 다 찢어지잖아요. 지우고 싶은 글자만 지워지는 게 아니고 밑에 있는 종이까지 다 찢어진다고요.

주께서 성령께서 우리를 매일같이 찢어서 존재를 없애고 우리를 유령으로 만들어요. 너는 내 지시에 따라라.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거야. 쓸데없이 네 운명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말고. 너는 메인이 있는데 서브가 왜 운명에 대해서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느냐 말이죠. 성령께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백날 봐야 5초도 안 가거든요. 백날 봐도 5초도 안 가는 이유가, 성령께서 평생 함께 동거해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정신 차려서 가버리면 동거가 아니고 혼자, 무소의 뿔로 혼자 가요. 무소의 뿔은 불교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무소의 뿔이라 해서 돌싱이고 그런 이야기 나오거든요. 혼자 박으려고....

무소의 뿔로 혼자 가는 게 아니고 어느 순간도 성령이 없이 존재하지 않아요, 성도는. 성령을 부른다고 오는 게 아니고요. 성령이 커피 배달하는 게 아니고 성령께서 우릴 배달시키죠. 참 우리는 아담의 본성 때문에 혼자서 자기 자신을 살피려는 의가 있어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다 한다는 말은, 착하게 산다는 말을 한 게 아니라 나는 이만큼 훌륭하다는 말을 한 게 아니고 제발 나 보고 논하지 말고 나와 함께 있는 분을 봐라. 그런 뜻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를 낫게 하니까 거기 있는 사람들이 또 동일하게 이야기해요. 당신 능력 많네. 당신이 얼마나 경건하게 살았으면 저런 능력이 나올까 하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우리의 경건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 사람을 낫게 했고 우리는 다만 주께서 그 사람을 구원했다는 것을 그냥 목격하고 증언하는 그런 역할 이외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라고 이야기하죠. 백날 해봐야 주위 사람들 듣지도 않아요. 그들은 보여야 알지요.

이게 아까 유리진열장 있지요. 유리가 있는데 그들은 유리가 빠져버린 거예요. 같이 사니까 같은 인간인 줄 아는데 주님 보시기에는 자기 백성 따로 있고 지옥 가는 백성 이미 분류시켜놨어요. 왜냐하면 이미 시작된 천국이기 때문에.

다시 합니다. 시편 15편과 예수님 십자가 질 때 이게 종말이에요. 파장 분위기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게 하고, 인간의 한계가 확정되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시편 15편에 있는 시편의 완성자가 이 땅에서 인간들이 제일 가기 싫은 주님의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는 자리를 예수님 마음대로 임의로 만들어버렸어요. 그 만든 자리가 뭐냐? 십자가에요. 십자가가 말씀이 완성된 자리입니다.

군소리하지 말고 네가 구원받는 길은 네가 착해서 키가 170으로 문 열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170을 죽여 버리면 하나의 점이라면 그 점으로써 주와 함께 십자가라는 개구멍을 통해서만 갈 수 있는 거예요. 이게 빌립보서 3장에 나옵니다. 나는 어찌 해서든지 십자가로 죽어야 그게 내가 사는 길이라는 거예요. 십자가 외에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십자가는 나를 죽이는 길이기 때문에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그 방법을 우리가 못하고 성령께서 그렇게 하지요.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죽었는데 왜 멀쩡하게 배고프고 그러냐? 실제로 살아 있는 모습과 똑같은데 왜 그렇습니까, 라고 질문할 수 있겠지요. 이게 마지막 때에 십자가 안에 뭐가 들어있다? 시편 15편이 들어있지요. 우리가 살아 있으니까 성령께서 시편 15편으로 치는 거예요. 어떻게 치느냐 하면,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이렇게 돼있지요.

시편 15편에 나오는 이것을 드러내려면 나만 있으면 안 되고 누가 있어야 되느냐? 바로 타인이 존재해야 돼요. 타인을 누가복음 10장에선 이웃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정직과 공의를 티내려면 상대역이 있어야 돼요. 상대역에서 그 관계로 정직과 공의가 나온다고요.

그럼 우리는 정직하기 위해서 누굴 상대하느냐 하면 만만한 게 누구냐? 내 자식인데 나이가 두 살 아래. “엄마 봐. 젖 주잖아. 엄마 고생해서 우유 사주지. 봐. 엄마가 이렇게 너한테 정직하다.” 만만한 게 아이거든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엄마.” “옳지, 옳지.” 다시 아기를 통해서 자기의 정직함이 증명이 되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정직, 공의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이웃을 내가 서브로 찾느냐 하면, 같은 전도회 회원들, 같은 교인들 나를 욕하지 않는 사람만 골라서 정직과 공의를 찾게 되는 겁니다. 사람 좋더라. 그 사람은 뭘 해도 거짓말하지 못해. 늘 정직해, 라고 할 수 있는 후보감이 될 수 있는 사람, 후보감이 안 되면 일부러 돈 한 오만 원 빌려주고 정직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면, 오늘부터 정직2다. 정직3. 이렇게 하는 겁니다.

문제는 이 이웃에 누가 쳐들어오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쳐들어옵니다. 우리의 모든 꼼수는 다 깨져버려요. 주께서 이웃사랑을 언급하면서 우리의 상대역으로 타인이 아니고 주님이 들어와 버린 거예요.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 하나 끌고 옵니다.

일단 시편 15편에서 예수님 올 때까지 유대사회지요. 유대사회에서는 간음하면 벌 받는다, 우리나라 망한다는 그게 있어서 상대역을 자기보다 죄를 지었다고 여기는 자를 골라요. 그래야 상대적으로 공의를 일삼으며 정직한 자로 증명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만만한 게 죄인이고 만만한 게 고유정이고 그래요. 나쁜 놈들이고. 골랐단 말이죠. 그래서 말씀에 의해서 돌로 치라 했으니까 예수님한테 와요.

자, 율법에 보면 이 자를 돌로 치라고 하던데요, 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저처럼 씩 웃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건 모르겠는데 네가 율법을 알아? 율법 출제자가 누굽니까? 문제 출제자가 본인이죠. 그럼 정답은 누가 알고 있어요? 출제자가 알고 있지요. 그런데 출제자도 아닌 게 학원 강사 쯤 되는 사람이 지가 돌로 치라는 정답을 내는 거예요.

율법 뒤의 천국은 동행하는 겁니다. 천국은 말씀의 완성되고 말씀의 완성에 동행하는 자가 이야기합니다. 글자를 써요. 땅에 글자를 쓴다고요. 너희들이 주목하는 그것 말고 다른 율법들이 있음을 글자로 씁니다. 여자에게 어떻게 하고 예수님에게 어떻게 하고 우리가 옳았잖아, 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글자를 쓰는 새로운 행동에 주목하죠. 거기에 율법의 위반사항이 적혀있는 거예요.

돌을 함부로 놓겠습니까, 돌이 무거워서 놓겠습니까? 돌을 쥘 때의 본심과 반대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에 돌을 놓는 거예요. 이 상황에서 돌을 쥐고 있다는 것이 돌에 맞겠다 싶어서 돌을 놓는 거예요. 돌이 있으면 안 되잖아요. 돌로 아무나 치면 안 되니까 빨리 피해야 되지 않습니까.

하나둘씩 놓는데 누구부터 놓는가? 재미있어요. 젊은 사람들부터 놓는 게 아니고 늙은이부터 놔요. 그만큼 오래 살았다는 것은 축적된 죄가 크다는 뜻이에요. 양심 거리끼는 것이 한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과거가 그만큼 길었다는 뜻이에요. 다 놓지요. 주님께서 계속 이래도 안 갈래, 안 가? 쓸까, 안 가? 써볼까?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다 안다. 다 알지요.

정직할 때 누가 나서게 되면 반대파에서 뒷조사하지요. 신상조회하지요. 나경원이 니 아들, 뭐 어떻고. 이렇게 나오지요. 주님께서 다 씁니다. 남은 사람 딱 둘. 묻습니다. 너를 정죄하던 사람들 어디 갔지? 다시 말해서 정직과 공의, 시편 15편을 달성할 사람은, 이 말씀을 완성될 두 사람의 관계는 누구와 누가 있느냐? 주님과 나밖에 없습니다.

무엇이 정직이냐? 이게 정직입니다. 용서가 정직이고, 용서가 공의고, 용서가 참소하지 않는 것이고, 용서가 망령되지 않는 거예요. 남편이 아내 사랑한다고 뭐 사주고 안 때리는 게 아니라 남편이 아내 사랑하는, 남편이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알면 그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나니. 나 너와 사는 자체가 나한테는 과분한 일이다, 라는 그러한 마음. 괜히 이야기했다. 비현실적인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

어떻게 나 같은 인간에게 너 같은 사람이 나와 살아주느냐. 어떻게 내 월급을 꼬박꼬박 다 가져가서 예쁘게 백화점에서 이백만 원, 삼백만 원 쓰는 모습이 왜 그렇게 아름다워. 이렇게 나올 수 있는 남자. (없습니다^^) 이웃이 없으면 정직과 관계없는데 용서라 하는 것은 자신의 공로를 저쪽에 전가하는 거예요. 자기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내 공로인데 너도 포대기 담아서 같이 하자. 포대기 담아서 같이 뭉치자. 이게 동거에요.

남편 된 자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서 목숨 바친 듯하라. 참, 그러니까 우리가 남편을 고른다는 것은 얼마나 주의 뜻과 관계없고 내 개인적인 야심을 달성하기 위해서 골랐느냐 이 말이죠. 그걸 누가 고르게 하셨겠습니까?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 자신을 유령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자연적인 한계를 폭로하기 위해서. 네가 이것밖에 안 된다. 돌 들고 남 탓을 하면서 돌 던질 수밖에 없는 그 한계를 우리의 선배 되시는 바리새인들이 유대인들이 그걸 해준 거예요.

따라서 성경 하나 놓치지 맙시다. 그들의 나쁜 짓했다고 안 봐, 안 봐. 그들이 예수님 죽인 짓이 누구 짓입니까? 우리가 그 현장에 있으면 우리도 죽여 버려요. 왜? 나 사는 게 급하지 예수 그 사람이 누구라고? 예수님이 우리 이웃이 아니잖아요.

강의 다시 하겠습니다. 이건 또 해야 돼. 우리는 무엇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웃을 모집합니까? 나의 정직함, 나의 의로움, 나 잘남, 그래서 나는 벌 안 받아야 돼. 반드시 지옥 안 가고 천당 가야 돼. 이걸 증명하려고 뽑는단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뭐가 되었느냐 하면, 싫어버린 바 되었어요. 이사야 53장 4절에 의해서.

누가 알아서 예수를 골라요? 가짜 예수 있잖아요. 교회에서 만든 가짜 예수, 복 주는 예수, 믿으면 천당 가고 기도하면 복 받는 그런 가짜 예수, 우상이거든요. 마귀잖아요. 마귀 예수를 우리는 믿어 줄게, 해서 교회 다닌 거예요. 그런데 실제 예수님은 이 자체를 뭉개버리죠. 무너지게 하죠.

문제는 네가 살아 있다는 게 문제라는 거예요. 살아 있다는 것은 숨을 쉬고 이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냥 살려주는 게 아니고 죄인으로 계속 살게 해요. 그래야 죄가 나오니까. 죄가 나와 줘야 죄인을 용서하신 용서가 더 값어치 있게 우리에게 더 커지잖아요. 잘난 척을 하세요. 강의 마지막이 이상하게 끝나는데. 잘난 척을 하시고 자기 증명하세요. 나는 너보다 낫다고 하세요. 그게 죄인 중에 괴수 아닙니까. 그걸 아닌 척하고 꾹 누르지 마시고.

제가 심방 가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부부가 있는데 하여튼 심방 간 가정도 부부가 원활치 않아요. 젊으니까 철이 없어서 그랬겠지요. 아까 강의한 것처럼 이 여자 분은 천사 다 됐어. 남편은 악마 다 됐고. 이런 남편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본인이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불신자인 걸 알아요. 십자가로 완전히 깨져야지요.

나는 잘났다는 게 깨져서 나는 나쁜 여자라고 알 때 다시 말해서 주님한테 내가 개 무시당할 때 비로소 남편을 개 무시할 수 있습니다. 남편을 개 무시하는 것만큼 훌륭한 부부생활이 없습니다. 그동안 길들여졌어. 남편은 화 푸는데 새벽제단에다 화풀이하고. 주여, 남편이 저러니 이 어려움을 이기게. 그 자리에서 개 무시하면 되는데 무시할 줄 모르니까.

왜 무시 안 하느냐 하면, 내가 무시 안 해야 천사가 되기 때문에. 이놈의 천사표, 박살나야 돼. 성령께서 십자가를 앞장세우서 나를 박살냄으로 말미암아 주위에 있는 어떤 인간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아요. 그들의 협박+겁박, 공포, 두려움, 그들이 언어를 통해서 나타나는 권력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시달릴 필요 없어요.

성도, 유령으로서의 줏대를 세우세요. 유령에 줏대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비-자연적 요소입니다. 이걸 생각해보세요. 우리 힘으로 말씀을 지켰다고 주장할 수 있고 뭐도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우리에게 오는 성령 자체가 비-자연적 요소에요. 그래서 우리가 설명할 길이 없어요.

언어라 하는 것은 대응체가 있어요. 자연에 있는 것, 송아지 하면, 음메. 언어는 반드시 거기에 일 대 일로 대응할 수 있는 대응체가 있는데 성령이나 십자가는 대응체가 없어요. 우리 성도됨 자체가 대응체가 없다고요. 내가 성도됨을 남한테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때는 뭐냐 하면, 남을 개 무시함으로 증명되는 거예요. 나는 너희들 꼼수와 권력체에 마냥 휘둘리지 않는다.

그러면 목사님, 산에 가서 살까요? 아니요. 더 깊숙이 들어가야 돼요. 왜? 이용하라고 주신 거예요. 그들이 하는 철딱서니 없음을 충분하게 이용해서 살 때까지 밥 먹고 살아야지. 어떻게 이용하는가? 예예, 하는 거예요. 속으로는 개 무시하고 겉으로는 순한 양처럼 양의 탈을 쓴 이중이 돼야 돼요. 어차피 성도는 이중 자아니까. 예예, 하면 가정 분위기 좋아지지요. 돈은 싹싹 들어오지요. 비자금 다 내놓지요.

그런데 한 마디로 말해서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에게 기대하지 말라.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을 믿지 말라. 이용은 하되 기대는 하지 마세요. 이용할 때 나쁘게 생각하지 마시고 주께서 복음 전하라고 나를 밥 먹여준다고 생각하면 돼요. 문제는 기대 때문에 그래요. 아까 우리 어머니 이야기했지요. 왜 자식 셋 놔두고 시동생들 거기에 충성을 다하느냐? 기대하는 게 있어요. 이 집에서 얼마나 나를 예쁘게 볼까, 얼마나 사랑해줄까? 그걸 기대하니.

목사도 마찬가지에요. 교인을 믿지 말고 기대하지 마세요. 목사는 아예 교회에 기대하지 마시고. 뭐 하냐? 말을 좋게 해야지. 감사하세요. 주께서 떠밀어서 교회까지 오게 하시니 세상에 우리 관계가 복음의 관계로 맞으니 감사합니다. 항상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모든 범사에 대해서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어야 돼요.

그래서 구약에 나오는 여기 공의를 일삼으며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며, 이 반문에 대한 정답은 뭐냐 하면, 이 말씀은 누구로부터 쏟아진다? 오신 예수님한테 모든 말씀이 다 쏟아지는 거예요. 예수님이 갖고 있던 정직과 공의에 대해서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걸 정직으로 공의로 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고,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으로 다 보여줬는데 그게 절뚝발이를 걷게 하고 눈을 뜨게 했는데 이게 전부 다 용서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모르고 예수님을 내쳤어요.

이제 성령이 오게 됩니다. 성령이 오면 예수님과 같이 주님에 의해서 자유롭게 사는 그 자체가 남들에게 기대를 안 하고 은근히 노리지 않으니까 그게 뭐냐? 참소치 않은 거예요. 자기를 칠 이유가 없어요. 그 사람에게 돈을 빼먹겠다는 어떤 목적이 있으면 사기를 치겠는데 주면 주고 말면 말고, 이러는데 그게 무슨 사기가 되겠어요. 이 세상에서 발 디밀고 널 이용해서 나는 내 이익을 챙기겠다는 생각이 그런 기대를 안 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자유롭고 마음에 여유가 있지요.

십자가마을에 어떤 분이 자기가 젊을 때 이야기하면서 남편이 자기 보고 이혼하자고 했어요. 그래서 그래 이혼하자 하니까 쑥 들어가 버렸어. 젊은 때는 무슨 소린 못합니까. 그래서 쫄아서 들어갔답니다. 물론 천사표인 여러분들은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거지만. 물론 그게 믿음이 있어서 한 건지 안 그러면 객기로 한 건지 그건 내가 모르겠지만.

물론 여러분한테 그런 일이 있다면 안 돼요. 웃으면서 당신 없이 못 살겠어. 이렇게 하라니까요. 아이고, 나는 당신이 얼마나 좋은데. 비자금이나 내. 어차피 유령이니까. 다시 말해서 내가 저 사람을 변화시키게 된다든지 내가 저 사람을 천국 보내는 그러한 부담을 갖지 마세요.

나도 구원받는데 아무것도 한 게 없음을 내가 안다면, 구원받는 문제는 누굴 통해서라도 내가 미워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어떤 경우라도 구원시키니까 내가 숙제 같은 짐 지지 말고 그 자유로운 모습이 그게 전도입니다. 내 자유로운 모습과 이중적 생활, 그게 전도니까 주님의 용서에 감사하면서 편하게 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할 자격도 안 되고 재주도 없는 저희들을 주의 용서로써 서브로써 이끌어 주셨사오니 이 괜찮은 취직자리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여기고 주께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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