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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지역강의 > 부산강의
2019-12-09 16:29:34 조회 : 445         
분란 191209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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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19.♡.174.29) 19-12-11 12:34 
20191209a 부산강의 : [시편]24(16편)-분란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16편 하겠습니다. [다윗의 믹담]이라고 돼있지요. 다윗의 시로 돼있습니다. 시편을 여러분 읽어보셨겠지만 성경에 나와 있는 시편 16편 같은 내용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내용이 있단 말이죠. 시편 16편이니까 우리는 보통 생각하기를 신앙 생활하는 나에다가 시편 16편을 참조로 해서 더 보태면 된다고 보통 이렇게 생각해요. 좋은 아이디어기 때문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게 잘못입니다.

신앙의 콘셉트는 이걸 없애버리고 시편 16편에서 정리하고 배치돼있는 개념들로 채워야 돼요. 이 개념 뒤에는 누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일하심이 여기 있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평소에 시편 16편 말고 누가 일한단 말입니까? 내가 그냥 일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위해서 일을 하는 게 돼요. 내가 만든 내 콘셉트에 맞춰놓고 시편을 집어넣으려고 한다면 콘셉트 자체가 안 맞는 거예요.

확 밀어버리고 이 구조를 그대로 가져와야 되는데 사실은 가져오질 못하고 이게 이중성을 갖게 돼요. 아래층은 우리 일이 위층에 새로운 시편 16편이 들어온단 말이죠. 중첩되겠지요. 중첩됐으니까 주님은 양보를 안 할 거고 우리도 양보를 안 할 거니까 여기서 신앙적인 투쟁이 있을 것이고 긴장관계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긴장관계라는 것은 신앙의 구조가 이미 하나님이 알아서 다 정해놨는데 우리가 너무 오지랖을 떨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에게 잘 보이려고.

이렇게 하면 하나님 기뻐하시겠지요, 이렇게 하면 나에게 점수를 더 주겠지요, 라고 자기 적절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정리한 거예요. 예를 들면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때 애들과 같이 놀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 헨델의 <메시아>를 공연하면 기뻐하시겠지. 하는데 그런 것은 주님께서 확 밀어버리고 싶어. 다 지워버리고 여기서 들어오시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것이 침노가 되는 겁니다. 점령군이 와서 그 지역을 점령하는 데서 비로소 구원이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점령하는 분이 계시고 점령당할 자가 있지요. 침노하실 분이 계시고 침노당할 자가 있지요. 이걸 오늘 제목으로 해도 괜찮은데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분란. 여기 시편 16편 2절에 보면,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분란을 일으킨 이게 복입니다. 주님 쪽에서 가만있는 나를 더 쑤시는 게 복이에요.

그러면 이게 분란이라면 저주는 뭡니까? 분란이 없는 게 저주겠지요. 이걸 로마서 1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어버려둠이라 합니다. 아, 이거 정말 무서운 거예요. 그냥 내어버려두는 거예요. 왜냐하면 사생자기 때문에. 친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무슨 짓을 해도 그냥 내어버려둬요.

생중계를 하는데 생중계를 담당하는 제 아내에 의하면 제가 설교하게 되면 거기에 카톡방인가 뭔가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있데요. 그런데 실시간으로 생중계를 하니까 스트리밍이라 합니까? 뭐라고 불만이 있느냐 하면, 제가 어제 갈라디아서 4장 8절에서 악마의 종은 악마를 모른다는 게 악마의 종이에요. 인간에게 무슨 악마가 있습니까?

악마가 없으니까 인간은 그대로 창세기 3장의 꼴로, 3장의 인간형으로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시작이 나부터 해서 나로 시작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인간의 자율적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자존적 존재가 되는 거예요. 천상천하유아독존, 이게 악마의 죄의 종의 모습이거든요.

이걸 설교하는 대목이었던 모양이지요. 그래서 여기서 뭐라고 토를 다느냐 하면, 자유의지를 발휘하면 악마의 종이란 말인가, 불만하고 쑥 나가버리는 거예요. 그럴 때 그 사람은 결국 뭐냐 하면, 내어버려두는 거예요. 그럼 어떤 사람이 여기 대해서 달기를, 끝까지 들어봐라. 그렇게 자기들끼리 나는 설교하기 바쁜데 끝까지 들어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어버려둔다는 것은 시작을 출발하는 거예요. 이런 예는 세상도 찾아볼 수 있지만 오늘날 교회 내에서 아주 허다하게 발견될 수 있는 거예요. 모든 콘셉트를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악마로부터 출발하는 게 아니고 이미 악마로부터 맛이 갔다, 악마의 사주를 받고 있다. 그것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정상이라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나는 뭔가 남보다 더 성실하고 제대로 해보려고 지금 마음 다 잡고 교회 왔다. 술, 담배 끊고 마음잡았으니까 이것만큼은 주께서 괜찮은 콘셉트로 인정해주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누구의 종이라는 의식이 전혀 없는 거예요. 자존적이고 자립적인. 교회 갈까, 절에 갈까? 본인이 선택한 거죠.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복이란 것은 분란을 일으키는 겁니다. 가만 놔두질 않아요. 왜? 친아들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건드려주는 겁니다. 그런데 저주받은 사람은 이건 어차피 맛이 간 인간들이기 때문에 내어버려두는 거예요. 항상. 로마서 1장에 나오듯이 지가 동성애를 하든지 무지개를 날리든지 마음대로 해라. 그냥 놔두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친 백성은 놔두질 않지요.

그럼 시편에서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은, 이 이론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가만두십니까, 건드리십니까? 가만두지 않고 계속 건드리지요. 건드릴 때 다윗의 시, 다윗의 신앙의 특징은 죄가 보인다는 겁니다. 보통 보인다고 할 때는 죄가 보인다는 말을 잘 안 써요. 세상이 보인다. 그런데 세상이 보이기 때문에 죄는 안 보이게 되거든요. 세상이 보이는 것은 이렇게 돼요.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가 됩니다. 또 다른 세상이 있단 말이죠.

그럼 다른 세상과 현재 눈에 보이는 세상과의 관계는? 그건 모르지요. 보이지 않으면 없는 거니까. 눈에 보이는 게 전부니까.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이 목사 당신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확정할 것인가? 괜히 말을 만들어서 하나의 개념을 당신 마음대로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은혜 주려고 사람들을 혹하려고 뭔가 조작해낸 개념일 수 있지 않느냐고 하겠지요.

그럴 때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요한복음 1장 18절. 안 믿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과 이야기할 때 이야기할 때는 생각 안 났는데 돌아서서 이 말할 건데. 그런데 그렇게 후회하고 애석해 해도 그것조차도 배우는 거니까 그런 식으로 복음으로 달려가는 하나님의 분란이거든요. 복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너무 후회하지는 마세요.

요한복음 1장 18절에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사도 요한은 분명히 하자는 거예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면 하나님은 없는 거예요. 없는데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조작된 겁니다. 전부 다 구라입니다. 거짓말입니다. 모든 신은 다 거짓말이에요.

제가 어제 낮에 그런 이야기했는데요. 전통적 이천 년 동안 신학은 삼위일체 이론 같은 걸 보면 예수님을 뭐라고 표현했느냐 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도 하도 인간이다. 이게 저는 틀렸다고 한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들에게는 보이는 것이 전부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어요. 그리고 인간들이 자기를 인간으로 보는 것, 이건 창세기 2장이고, 창세기 3장에 죄의 종이 된 상태에서 자기를 인간으로 규정한 겁니다. 인간이 뭔지도 몰라요. 그냥 자기를 인간이라 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이라 하면 안 되고 예수님은 하나님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이에요. 만약에 예수님이 하나님이고 인간이고 한다면 이 콘셉트를 인간이 자기 과업으로 내가 천당 가기 위한 과업으로 이 지식을 확보해서 구원받으려고 시도한단 말이죠. 저는 믿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입니다. 그것 믿는다고 구원받은 것 아니거든요. 그건 내가 하는 작업이잖아요.

이거는 외부에서 자기를 분란을 안 일으켰잖아요. 자기를 건드리지 않았단 말이죠. 내가 나를 자극해서 신앙인이 아닌 나를 내가 손질해서 신앙인 만드는 겁니다. 바다에 사는 상어고기 있지요. 상어고기를 손질하면 돔배기 되는 거예요. 전라도 사람들도 돔배기 아십니까? 제사할 때 올리는 것, 손질하면 돔배기잖아요. 교회에서 예수님을 돔배기로 만들은 거예요. 내가 납득되고 내가 이해되는 내가 다룰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겁니다.

수요일에 설교하게 됩니다만 간음이란 뭐냐? 타인을 대상화하는 게 간음이에요. 내가 다룰 수 있다고 여기는 게 간음입니다. 그래서 주일에 할 준비한 설교가 뭐냐? 아내들이여, 하는데 모든 부부는 간음자들이에요. 왜? 상대를 대상화시키기 때문에. 본격적인 간음은 결혼을 하고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에. 간음은 사랑이 아닌 거예요.

이런 이야기가 뭐냐 하면, 익히 인간들이 아는 콘셉트에서 나오는 그 개념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새로운 개념으로 침략을 받아야 되고 침노를 받아야 되는데 이걸 그냥 꾹 쥐고 여기다가 하나님, 이 개념을 채워주시옵소서. 그릇은 내가 제공하고 내용은 주님이 채우는 이렇게 자기 일방적으로 하나님과 협력하는 식으로 구원받고자 하기 때문에 부부 사이의 관계는 간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은 간음이다. 이런 논리가 되는 겁니다. 그건 잘하면 참으면 할 수 있거든요. 그러나 인간은 사랑이 아니면 모조리 간음이에요.

계속해봅시다. 요한복음 1장 18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요. 그럼 하나님 없는 겁니다. 인간에게 하나님 없어요. 그런데 구약에서 누구든지 하나님 만나면 죽어요. 하나님을 대면하면 죽는다. 그래서 제발 하나님 안 왔으면 좋겠어. 왜? 하나님 나타났다 하면 죽으니까 하나님께서 안 계시고 하나님, 너거끼리 놀고 우리는 이 동네는 인간끼리 노는 것이 인간에게는 이미 관습화돼있고 습관화돼있는 거예요. 이게 편하지요.

교회에 주님이 오신다든지 사도 바울 오게 되면 교회 개판 돼버립니다. 사도 베드로 오면 안 돼요. 교회는. 교회는 베드로의 무덤이 있어야 되고 사도 바울의 무덤이 있으면 그걸로 관광객해서 수입 괜찮아요. 그러나 직접 산 채로 성령이 오고 이러면 교회 자체가 부정당하는 거예요. 왜? 죽으니까. 인간은 인간끼리 놀아야 되지요.

유치원 애들 보면 요즘은 빨라서 두 살부터 늦으면 일곱 살까지 있잖아요. 유치원에서 미운 일곱 살을 어르신네라고 하거든요. 유치원에서 도사라. 어디에 뭐가 있고 장난감 어디 있고. 완전히 어르신네에요. 원로에요. 유치원의 장로급이에요.

교회에도 장로가 있잖아요. 장로치고 신앙이 있는 사람 혹시 본 적 있습니까? 거의 없는데 혹시 본 적 있어요? 장로 부인을 권사라 하지요. 권사 중에 신앙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권사가 없어서 내가 분명히 하는 이야기지만. 관심사가 주님이 아니고 인간들끼리 역량으로 할 수 있는 단체에 거기에 적절한 콘셉트로 질서 잡는 것, 그게 그만 관심사가 되고 마는 겁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보이는 거니까. 이거는 인간이 다룰 수 있다고 본 거지요.

그런데 본 사람 없잖아요. 여기에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본 사람 없으면 안 봐야 되는데 그 다음에 문제가 돼버렸어요. 하나님 품속에 있던 독생자 되신 분이 나타나버렸다는 거예요. 초라한 암행어사처럼. 이 도령처럼. 와버렸다는 거예요.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실 분이지만 그 영광을 취하지 않으시고 종의 형체를 가졌거든요.

예수님에 대해서 두 가지로 묘사하고 있어요. 빌립보서 2장 7절에선 종의 형체를 가졌고, 그리고 로마서 8장에서는 육신의 죄인의 모습으로 오신 거예요. 이게 처음에 이야기한 하나님이 제공한 콘셉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종의 형체로 오셨고 그 다음에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다면 이 분이 하나님이라면 모든 인간은 자기가 마련한 자기 콘셉트를 포기하고 어디에 합류해야 됩니까? 바로 이 두 개념에 합류돼야 돼요. 합류하는데 자진해서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분란을 일으키는 겁니다.

이제부터 중요합니다. 진짜 중요해요. 너무 어렵기 때문에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도가 있으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선악과를 따먹었지요. 선악과는 선과 악에 대한 나름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선과 악의 지식을 갖고 있다 할 때 이 내용을 풀 필요가 있어요. 과학은 또는 수학은 선입니까, 악입니까, 라고 이야기할 때 과학과 수학 자체를 사람들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하나의 기술적이고 객관적인 것으로 보잖아요.

이 세상에 객관적이고 기술적인 것 없어요. 이 수학과 과학과 의학 모든 것, 이걸 발명한 인간은 온전함을 증명하는 용도로 쓰기 때문에 인간세계에서는 이걸 선으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과학에서 신약을 개발하는데 실패했다. 그걸 뭐로 보느냐? 악으로 간주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선이 있으면 반드시 여기에 그림자처럼 뒤에 악이 있는 거예요.

인간 위주로 출발하면 선을 성공사례가 되고 악은 실패사례가 돼요. 한 집안에 수능을 쳤는데 네 개 틀리고 다 맞았다. 이건 성공사례가 되지요. 그런데 어떤 애는 네 개 맞고 다 틀렸다. 너는 나가 죽으라 하지요. 왜냐하면 선악 지식에 보면 악에 해당되기 때문에. 엄마가 신장 아파서 다 죽게 됐는데 딸이(동백이죠) 신장 떼어줘서 살았다. 이걸 뭐로 봅니까? 선으로 보지요.

그런데 동백이가 오해해서 엄마, 오랜만에 17년 만에 찾아온 것은 내 신장 떼어가려고 했지? 실은 엄마는 보험금 오천 만원 주려고 온 것도 모르고 했지, 라고 한 것은 여기서 그 엄마는 악한 엄마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늘 수시로 선과 악을 한 번도 선택 안 하고 골라잡지 않고 살아가는 법이 없어요. 모든 게 선과 악입니다.

문제는 선택을 내가 하지요. 진짜 문제는 뭐냐? 내가 수시로 환경 따라 달라진다는 겁니다. 어떤 환경에 처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달라져요. 선입견이라는 것이 늘 변동이 일어나는 거예요. 분명히 자기 선악의 판단은 옳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판단으로 다른 환경에 들어가니까 내가 뭔가 오해했구나. 내가 제대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했구나,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일곱 살 때 사탕을 물고 있으니까 엄마가 물고 있던 사탕을 빼앗았어요. 그러면 일곱 살 그 시점에서 선과 악은 뭡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걸 뺏겼으니까 악이고 악한 엄마가 되지요. 나중에 친구들은 다 아토피 걸렸는데 자기는 아토피 안 걸렸단 말이죠. 그러니까 나중에 열두 살 되니까 엄마를 어떤 엄마로 봅니까? 참 선한 엄마가 되는 거예요.

비행 청소년이 나중에 스무 살에 교도소 가면서 엄마를 원망하기를 엄마는 내가 공부 안 하고 딴 짓할 때 왜 나를 나무라지 않았느냐고 엄마 탓으로 돌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지금 환경이 바뀌었으니까. 나이가 바뀌었으니까. 그러니 이건 일곱 살에서 열두 살도 바뀌었지요. 스무 살도 바뀌었지요. 서른 되면 또 바뀌지요. 사십 되면 바뀌죠. 육십 되면 바뀌죠.

나중에 구십 되면 뭐로 바뀔지 몰라요. 이때는 바뀔 것도 없어요. 정신이 없어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데 바뀌고 자시고 물불도 못 가리는데 끝났다마는. 그러니 인간은 자기가 선과 악을 선택했지만 그 선택에 대해서 그 다음에 세월이 지나면 선택한 나 자신도 완전히 확정된 게 아니에요. 종잡을 수가 없지요.

이야기를 계속해봅시다. 성도가 있는데 주변에 많은 선한 인간들이 나의 허점, 나의 죄 짓는 것, 지적할 것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가 선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하냐 하면, 악한 자가 필요했고 악한 자와의 비교를 통해서 자기가 그나마 작아 보이는 선이라도 이걸 키우려고 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부자고 애 공부 잘하고 그런데 그 집이 서울 강남에 56몇 층에 산다. 그것도 70억 되는 아파트에 산다. 같은 동창생인데 잘 산다 할 때 자기는 이 사람은 성공했으니까 선으로 보는 동시에 나는 졸지에 악이 돼버린 거예요. 성공사례 앞에서 나는 실패했으니까 악으로 보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이 사람의 허점을 집어내야 그나마 있는 선을 내가 키울 수 있기 때문에.

뭐냐 하면, 56층에 산다고? 그것 관절에 안 좋아. 기껏 핑계 대는 게 난 1층에 살았어. 계단 없어. 이것으로라도 스스로 자위하려고 자기를 위로하려는 거예요. 우리 애는 공부는 못해도 몸은 하나 튼튼하다. 이런 것 있잖아요. 그나마 있는 선을 자체적으로 방어하고 방비하는 거예요. 그래서 윤복희가 그러듯이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여러분. 가만있는데 무슨 여러분이에요. 호응해달라는 거죠 자꾸. 나를 응원해달라는 겁니다.

성도가 있다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시기, 질투, 모함해서 죄라고 끄집어내요. 끄집어내면 성도도 여기에 반응을 나타내면서, 그래 맞아. 나는 죄인이야. 당신의 지적은 옳습니다. 내가 이렇게 온전치 못했습니다, 라고 온갖 이해하잖아요. 그러면 성도도 선악 지식체계에 말려들었지요. 이것을 과감하고 통과 또는 관통해버려야 돼요.

이걸 관통해서 선악지식이 지적하는 죄의 지대 또는 영역을 벗어나면, 주께서 그렇게 하셔요.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다른 지대에서 선악으로 도저히 파악되지 않는 진짜 죄인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자유에요.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 책임질 필요 없어요. 주님께서는 남들이 끄집어내는 죄에서 이제는 끄집어내니까 나도 같은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알거잖아요.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그 죄의 지대에 옮기는 겁니다.

이 대표적인 예가 요한복음 8장에 간통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이 지대에서 누구나 아는 간통은 나쁘다, 간음한 것은 잘못이다, 라고 하는 그 지대에서 예수님께서 그 간음한 여인을 이 지대로 끌어버려요. 누가 너를 지적하느냐? 누가 있느냐, 둘러봐라. 여자가 참 멋진 말을 해요. 노바디, 노바디, 아무도 없나이다. 교회 가도 아무도 없나이다.

그리고 본인도 나를 지적할 내 죄를 내가 지적할 것에서 손을 뗐습니다. 이게 자유 아닙니까. 내 양심이 나를 지적하다가 이제는 내 양심마저 절대적인 죄 앞에서는 나를 손을 떼야 돼요. 왜? 어차피 주님만 아시는 죄기 때문에. 주님만 아시는 죄의 지대, 바로 이 지대로 끌기 위해서 주께선 뭘 하느냐 하면, 끊임없이 우리에게 분란을 일으킵니다. 분란을 일으켜서 주님만 아시는 죄로 가는 겁니다.

갈 때 여기서 뭐가 기다리느냐? 바로 죄의 형체 또는 육신의 죄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과 같이 있는 거예요. 위에서 받아내는 게 아니고 인간인 밑에서 기다리는 거예요. 밑에서 기다렸다가 자기 백성을 이쪽에 시달리는 인간을 이쪽으로 가는 거예요. 이쪽에 와버리면 이쪽에 먼저 온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세리와 창기와 강도, 이들이 천국 가는 거예요. 막달라 마리아.

그러면 여기의 죄란 예수님의 콘셉트기 때문에 이 죄를 줄 때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죄인 되어야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먼저 죄인 돼야 하기에 예수님을 반영하는 입장에서 죄인 되어야 하는 거예요. 이 죄가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준비된 의가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죄인이기에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가 비로소 발현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콘셉트를 하나의 공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에선 이스라엘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율법이 있고 그 다음에 왕이 있죠. 오늘 시편 16편에 다윗이 왕이잖아요. 쫓겨 다니는 왕이지만 왕이잖아요. 그러면 신약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게 거꾸로 입니다. 왕이 있고 그 다음에 율법 대신에 마지막 왕이 나타나니까 복음이 있고 복음에서 새 이스라엘 또는 백성이 만들어져요.

이쪽에선 율법이기 때문에 율법의 기능은 죄를 더욱 죄 되게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다수입니다. 숫자가 많아요. 그러나 왕은 한 분이에요. 하나님은 어디서 기다리는가? 이스라엘을 기다리는 게 아니고 율법을 줌으로써 모든 인간이 율법에 죄인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누구와 연락을 취하느냐? 왕을 내세우는 거예요. 그 왕의 준비된 콘셉트가 시편 16편입니다.

여기서 16편 볼까요.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나는 누구지요? 다윗이죠. 일단 다윗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여 왕을 보호하소서, 하는 것은 그전에 이스라엘 율법을 다 경유해서 나타난 왕입니다. 그 왕이 고백 또는 예언된 시편 16편을 누가 인수받아서 완성시켰느냐 하면, 바로 마지막 왕 되신 예수님께서 그걸 인수받아서 완성을 시키지요.

그러면 이 예수님 왕은 아까 제가 이야기했듯이 하나는 종의 모습, 또 하나는 육신의 죄의 모습으로 오시지요. 완성을 했으니까 그분이 의인되지요. 내용은 의인인데 바깥은 종과 죄인의 모습으로 오신 거죠. 이 둘이 합쳐서 복음이 되는 겁니다. 복음이 되어서 자기 백성한테 가는데 백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백성은 없어요.

복음 자체가 새 언약이기 때문에 새 언약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가 새 언약이고 이룬 것을 택배로 전달받을 때까지 사인 받고 인간 내부까지 확실하게 택배 마감까지 마치는 그 능력까지 새 언약에 포함돼있어요. 그러니까 없는 백성이 새로 생겨버린 거예요. 택배 역할은 성령이 하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없던 백성이 새로 생기죠. 이게 하나님의 창조지요, 뭐. 없는데 새로 생겼으니까 창조가 돼요. 하나님의 콘셉트에 맞는 창조가 되는 겁니다.

창조가 되면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이 하나님의 창조가 들어오게 되죠. 들어오게 되면 기존에 우리 육신에 속한, 이건 구약적이죠. 육신에 속한 우리의 모습이 그대로 버티고 있습니다. 이건 선악체계지요. 선악적인 선입감이죠. 여기다가 무엇이 덮칩니까? 주님의 이미 완료가 덮친 거죠. 어제 낮 설교처럼 최종점을 찍어버린 거예요. 최종점을 찍어버린 것이 와버려서 여기서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는 겁니다.

밑에는 내 식으로 구원받겠습니다. 위에는 그럴 필요 없다. 끝났다. 모든 작업은 끝났어. 그럼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이 둘 사이가 갈등이 생기니까 틈이 생기겠죠. 틈이 생길 때마다 복음이 나타나고 복음이 여기서 새롭게 전달되는 거예요. 지식으로 예수님 십자가 전한다고 복음 아니에요. 나를 경유해서 내가 박살나는 것을 경유해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말은 뭐냐 하면, 나의 자리가 복음을 위하여 할당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이 땅에 오심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뭐가 됩니까? 보는 하나님으로 바뀌었지요. 하나님이 오심으로써 세상 자체가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확장된 거예요. 보이지 않는 세상이 분명히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계셨던 그 세계가 있고 그 세계를 반영하면서 주께서 오셨거든요.

그럼 그 세계가 이 땅에 왔잖아요. 이 땅에 왔는데 이 땅을 주님의 구원의 콘셉트에 적용시키면 땅이 무슨 땅이냐 하면, 바로 나의 자리가 되는 거예요. 지금 내 안이 예수님이 기거하시는 독생자가 기거하시는 땅으로 제공된다, 또는 반대로 할당받는 거예요. 하나의 대지를. 주께서 여기서 일하시옵소서. 그게 뭐냐 하면, 성전이잖아요. 성령이 임해서 여기서 독생자로 일하게 하옵소서.

그러면 여기서 싸움이 있을 것이고 우리 본성의 죄가 있을 것이고 주께서 완성과 미완성의 다툼이 있고 거기서 틈이 있고 그 틈 속에서 창조된 복음이 발생되는 겁니다. 틈이란 이야기를 했는데 여러분이 수준이 있으니까 이렇게 갑니다. 틈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인간은 틈이 없습니다. 왜 틈이 없느냐 하면, 자아는 의식의 통합의 결과기 때문에.

인간은 흩어져있는 자기의 체험과 기억들을 주워서 거기서 하나의 나다움을 만들어내요. 다섯 살 때 사탕 빼앗긴 것, 이때는 엄마가 심했어. 열두 살 때는 좋은 엄마고. 그러니까 과거의 기억들 가운데서 계속 주워 모으는 겁니다. 마치 터미네이터 영화에 보면 쪼가리 하나만 있어도 그것도 다시 본체로 원형이 되지요. 그렇지 않으면 <겨울왕국>에 나오는 눈사람처럼 가지 팔 다 빠져도 한 번 구르면 다시 하나가 되듯이

그 모습이 우리 의식 가운데서 몸은 안 쪼개져요. 몸이 나가 아니거든요. 몸은 따로 놀고 나는 몸에서 기억의 통합체가 바로 나에요. 몸이 있고 몸과 나는 따로 논다니까요. 꿈속에서 나는 항상 28살이에요. 30살 됐다가 15살 됐다가 40됐다가. 나라는 것은 기억에서 나온 것이지 몸에서 나온 게 아닙니다. 따로 논다니까요.

몸은 죽어가도 나는 생생하게 살아 있잖아요. 주님께서는 몸 보고 죽었다고 하는데 우리는 나 보고 살았다고 우기고 있잖아요. 나 살아 있잖아. 너? 살아 있는 기억의 쪼가리야. 몸은 죽어가고 있는데 나는 살았다고 우기는 거예요. 불멸의 요소, 죽어서 천당 갈 거야. 뭘 천당에 가. 그건 하나의 파편들인데.

그런데 이 나라는 것이 몸에서 발생되지만 여기 기억들이 있지요. 그 기억들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타인들의 시선을 의식한 것만 기억이 돼요. 나를 아프게 했다. 난 의인인데 선한 인간인데 나 보고 누가 욕하더라. 그러면 그게 상처가 오래 가서 항상 꿈에도 막 나타난다고요. 그걸 몸이 있지만 나는 따로 있고. 그걸 주체라 합니다.

주체는 항상 미완성이라 그어버립니다. 항상 주체는 있는데 이게 분열돼있다고 하는 거예요. 왜 분열돼있느냐 하면, 내가 되고 싶은 것과 남의 말도 들어야 되니까 항상 주체는 분열되는 겁니다. 가정주부가 남편 말도 들어야 되고 내 말도 들어야 되고. 매순간 이 주체는 분열되지요. 아이고, 모든 걸 잊고 산에 기도하러 갈까? 아니면 해외여행 갈까? 그러면 가정이고 자식이고 다 잊어버리고 나를 찾아서 오십에 바다를 보았다 해서 다시 나를 찾는 거예요.

나에서 몸으로 가는 방법은 없어요. 나가 있다는 것은 죄의 종이기 때문에. 주님은 어딜 공략하느냐 하면, 몸에다 주께서 작용해버려요. 그러니까 하나의 몸을 두고 주도권 다툼이 일어나는 겁니다. 나냐, 아니면 주님이냐? 사도 바울은 아예 이미 목표를 정해버렸어요.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몸에 계시다. 나는 뭐냐?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이게 바로 나는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 산다. 결과물로서의 나란 말입니다. 타인의 시선이 나가 아니고.

이것이 성령 안에서 뭐냐 하면, 나는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 안에는 주님의 콘셉트가 주님이 정해놓은 조건들, 구원받는 요건들이 채워져 있으니까. 내 게 아니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진행하는 과제가 아주 매끄럽게 차질 없이 다 진행됩니다. 이 몸은 내 몸이 죽어가고 있는 일에 대해서 아주 지장이 없어요. 제대로 가고 있어요.

몸은 죽도록 돼있거든요. 흙으로 돌아가게 돼있다고요. 흙으로 돌아가는 게 주님의 스케줄에 포함이 돼있단 말이죠. 태어나서 학교에 가서 너 소원이 뭐냐? 나중에 뭘 될래? 흙 될래요. 이런 아이 없어요. 그건 주님의 소원이지 내 소원이 아니거든.

나는 부모가 우리 가문을 생각해서 아버지, 어머니의 명예를 생각해서 너는 밖에서 똑바로 행동해야 돼, 라는 외부의 시선과 요구와 욕망, 그것이 내 안에 새로운 의미를 창출할 때 그것이 주체가 되고 그 주체는 나에 대해서 자꾸 다툼이 일어나니까 여기서 주체가 분열되는 거죠. 내가 열 살 때까지는 말 들어준다. 이런 식으로. 주체가 분열되는 겁니다.

남녀가 서른 돼서 서로 연애할 때 각자의 음흉한 의도가 있는 거예요. 결혼하면 보자. 지금은 참아준다. 다 음흉한 게 있지 않습니까. 일방적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자기는 실연당했다고 우기는 거예요. 친구가 있다가 너는 썸도 안 타고 무슨 실연을 당하냐. 일방적으로 좋아해놓고 실연당했다고 하는 것은 전부 다 분열되기 시작한 나의 고집이죠. 나, 주님한테 버림받았어요. 주님과 썸 탄 적이 없는데.

주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성령을 주시면 그 성령 때문에 버리지 않아요. 그런데 히브리서 6장에 보면, 하나님의 은사를 맛보고 버려버리죠. 그것은 뭐냐 하면, 성령의 은사가 십자가의 능력으로 오게 되면 뭐가 성립 안 되느냐? 버려진다는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분란을 일으킨 자체가 이미 자기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버려졌다는 그 생각 자체가 성립 안 되거든요.

애초부터 이 사람은 버려진 거지 처음부터 십자가를 모르면서 아는 체하는 사람들은 버림받았는데 성령께서 은사를 줌으로써 너는 버린 자야, 라고 확인 차해서 삐져서 예수 안 믿는다고 나오는 거예요. 애초부터 그 사람은 버려진 사람이에요. 그 점에 대해서는 두 번째 시간에 집중적으로 하겠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잠수함이 물 밑에 있는데 잠수함이 뭔가 발견했다. 그러면 잠수함 승무원이 밖에 나가서 확인하거든요. 확인할 때 어떻게 확인하느냐 하면, 일단 승무원이 스쿠버 장비를 갖춥니다. 빈 공간에 들어가 있어요. 거긴 물이 없어요. 해치를 여는 동시에 밑의 해치를 열어버리면 갑자기 물이 들어오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항상 아무리 나쁜 짓해도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이것을 선과 악 중에서 나는 선하다. 아무리 악하지만 요만큼은 선한 게 있다 하다가 갑자가 주님이 주시는 환경 속에 물이 들어와 버리면 이거는 어떤 것 속에도 나는 뭐가 된다? 죄인이 된다가 되는 거죠. 이처럼 주님께서 허락하신 주님께서 이끌어주신 죄의 지대가 인간이 따라올 수 없는 죄의 지대지요. 여기에 누가 이걸 만드셨는가? 주님이 먼저 이걸 만드신 거예요.

이걸 신약에선 뭐라고 하느냐? 이것이 바로 십자가 안이라 하는 거죠. 부활 안으로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야 여기서 의가 기다리는 거예요. 주님의 의가.


10분 쉽시다.
 한윤범(IP:119.♡.174.29) 19-12-11 12:35 
20191209b 부산강의 : [시편]24(16편)-분란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쌔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4절에 보면,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그렇게 돼있지요. 다른 신에 왜 예물을 드리면 괴로움이 더하는 그 이유가 뭐냐? 근거가 있어야 되거든요. 출애굽기 15장을 잠시 보게 되면 거기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낯선 단어가 있어요. 출애굽기 15장 6절에 보면 찬양, 찬송하리니, 찬송은 일종에 예언이니까 예언하는 가운데서, 6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의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나이다” 주의 오른손의 권능으로.

여기 오른손이라는 게 등장합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도 오른손이 갖고 있는 의미가 뭐냐?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이 마련한 콘셉트거든요. 오른손의 자리가 뭐냐 하면, 오른편의 자리는 통합의 자리에요. 이 통합하는 자리를 점유하시는 분, 차지하시는 분을 주 또는 주님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독생자는 주님이 아니에요. 이 땅에서 모든 걸 통합해야 주님이 돼요. 세상의 모든 만물과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주를 위해서 통합되는 과정을 경유해야 주가 되는 겁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이 땅에 계신 예수님께서 어느 자리에 앉느냐 하면, 주의 자리에 앉지요. 뭔가 일을 하셨다는 거지요. 어떤 일을 하셨다? 모든 걸 통일시키고 통합시키는 일을 하셨다는 거예요. 통일이라는 것은 에베소서 1장 10일에 보면 나와요.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 통일시켰다는 거예요. 통일시키는 것과 오른손의 자리가 무슨 관계있느냐? 오른손의 자리는 앞에 뭐가 붙어요. 그냥 오른손이 아니고 하나님의 오른편이에요.

하나님의 오른편이니까 하나님은 그냥 하늘에 계시니 오른편에는 스케줄, 이게 언약인데요. 창세전의 하나님의 계획, 스케줄이 있거든요. 하나님의 계획이 다 있어요. 이 계획대로 실행하기 위해서 여기서 권능이 나오고 이 권능은 오른쪽에서 나와서 어디로 돌아가느냐 하면, 오른쪽으로 되돌아갑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뭐가 이뤄지느냐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통합이 이뤄지겠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오른편, 하나님의 계획대로 시행하기 전에는 여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이 있는 겁니다. 마귀가 있죠. 하나님의 대적이 여기에 있죠. 주님께서는 자기 독생자를 오른편의 자리에다 넘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악마로 하여금 세상을 지배하도록 허락하신 거예요. 하늘에 있는 악마가 전쟁을 일으켜서 못 이겨서 땅에 내려와 주인이 된 겁니다.

이 세상의 신이 누굽니까? 악마지요. 원래 악마는 천사로서 하나님의 천상회의 때 시비 거는 존재가 그거지요. 스가랴 4장인가에 나오고, 또 욥기 1장에도 나오고, 그리고 미가야 선지자 나오는 그 대목도 악한 영이 있어서 한 거예요. 그러니까 악마가 자기 나름대로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한 거예요. 악이 없으면 주님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은 악마와 싸우지 않습니다. 악마와는 주님이 싸우는 겁니다.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시편 110편 1절에 나와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내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모든 걸 마무리하고 그 다음에 어디 있으라? 내 우편에 앉아있으란 말이죠. 그러면 마무리 안 하면 우편 자리를 하나님의 권능이 나올 자리지 앉을 주인공은 없는 자리에요. 주인공이 통합해서 모든 걸 말씀대로 언약대로 하나님의 계획대로 마무리한 분이 이 자리에 앉는 겁니다. 앉을 때 이 자리가 바로 하나님 나라에요. 오른편의 자리에 주인이 차지할 때 비로소 생기는 것이 오른편의 자리입니다.

요한복음 12장 잠시 보겠습니다. 32절에 보면, “내가 땅에서 들리면” 하나님의 오른편의 권능으로 들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은 들리게 돼요. 들리면, 그 다음에 뭡니까?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예수님이 아는 각종 여러 민족 가운데 택한 백성 전부를 자기 있는 자리까지 이끌어 올리겠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천국이죠. 이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16편 봅시다. 8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그 다음에 11절에 보면,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다윗은 천상천하유아독존 홀로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계십니까? 주님이 함께 계시지요. 오른편의 자리는 뭐냐 하면, 권능의 자리입니다.

아까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그 권능의 자리가 홍해를 가르시고 자기 백성을 이끌어내실 때에 바로의 군대와 병거를 바다에 던지는데, 6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의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나이다” 오른손의 권능이 나타난 거예요. 12절에 보면,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그래서 만든 것이, 17절에, 주의 영원한 성소라고 돼있어요.

지금까지 성경을 여러 군데 읽어보면서 이렇게 정리하시면 제일 정리가 깔끔합니다. 뭐냐 하면, 내가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아니고 죄 사함 때문에 내가 이용당한다고 생각하시면 정리돼요. 내가 죄 사함을 소유하거나 용서받는 것이 아니고 죄 사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죄 사함에 이용당하는 거예요. 그래야 내 용서라는 게 성립이 안 되잖아요. 내 용서가 돼버리면 뭐가 안 됩니까? 통합이 안 되잖아요. 통합이라는 것은 다수가 아니고 하나를 두고 이야기했지요.

제가 어느 강의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뷔페에 가면 접시는 동일한 접시를 사용하지요. 음식이야 개성대로 담든 간에 동일한 접시, 그걸 만약에 피 묻는 접시라고 봅시다. 어떤 직업이나 키나 또는 성격이나 관계없이 하늘나라 가는 것은 오직 통합된 죄 용서만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그 죄 용서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철저하게 이용당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용서받았다는 그것도 갑자기 내가 들어가면, 이 나는 자아지요. 홀로 있던 자아고 남한테는 나가 주체가 되는 거죠. 나, 이런 인간이야, 라고 나올 때는 주체 행세하다가 혼자 있을 때는 자아가 되고. 나는 없잖아요. 통합이미지, 통합의 자리, 이분이 난데 나가 두 개 있으면 안 되잖아요. 이 나는 이분에 의해서 죽임을 당해야 되지요.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살아 있어야 통합된 나가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분한테 이용당해야 되니까. 통합된 나를 바로 주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게 주의 이름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철저하게 주의 이름에 이용당한 거죠. 너는 누구한테 시집가거라. 이것도 주님께 이용당한 거예요. 내가 선택했다? 너 자체가 없어. 결혼할 때 선 몇 번 봤습니까? 인물 되니까 한 스무 번? 인물 되면 선 안 보고 데려감을 당하던지, 안 그러면 고른다고 뻗대서 오십 번 보던지 하는데 어쨌든 간에 천이백 번은 아니지요. 내가 맞췄지요. 이만육천사백 번은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우리는 간택당한 거죠.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남자를 줄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고르지 않았기 때문에. 눈에 띄는 것 가운데서 그 중 나의 보디가드 될 만한 사람을 내가 찍어서 했다. 그러나 그건 진정한 선택이 아니지요. 객관식 문제거든요. 다음 중 고르세요, 밖에 안 되니까. 오늘 점심에 붕어빵 먹을래, 국화빵 먹을래? 이걸 선택이라 하지 않지요. 회 먹고 싶어. 회는 안 돼. 국화빵과 붕어빵, 둘 중에 하나야.

우리의 모든 인생이라는 것이 우리 자신이 내 용서가 없잖아요. 내가 없으면, 없는 걸 무無라 합니다. 없는데 주님의 통합된 자체에서 무에서 뭔가 꼼지락꼼지락하고 생겨난 것이 우리에요. 이걸 우린 그때는 모르고 성령이 주의 영이 오게 되면 이걸 뒤늦게 알아요. 그걸 after event라 하는데 사후적이다. 일 끝나고 난 뒤에 소급해서 의미를 부여하는 거예요.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의 안목으로 나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겁니다. 물론 이걸 매일같이 느끼지 않아요. 왜? 중첩되고 싸우기 때문에. 우리의 관습, 몸이 갖고 있는 육신이 갖고 있던 이것도 만만치 않게 버티고 있지만 결국은 누가 이깁니까? 주님이 분란을 계속 일으키죠. 분란을 일으킨다는 것은 한꺼번에 완전하면 분란을 안 일으키죠. 계속 쑤시는 거예요.

분란을 일으킬 때 분란을 일으키는 주변의 환경과 재료가 있어요. 그 재료가 오늘 본문에 시편 16편에 보면 나와요. 4절에,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라고 돼있지요. 이것과 3절에,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라 하지요. 존귀하다는 것은 뭔가 비교거리가 있을 때 존귀한 건데 뭐가 존귀하냐 하면, 집에 떼거리가 없어도 존귀해요.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콘셉트니까.

가난하면 패배고 악이고 부자 되면 성공이 아니고 선한 게 아니고 주님이 다루시고 활용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주님의 통합기준에 의해서 우리가 이용당하는 입장에 있거든요. 아까 했잖아요. 우리 자리를 주님이 사용하시는 주님을 주 되게 하는 할당된 자라, 성육신 자리로 만들어달라고요.

죄가 보인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버려둠을 당하는 그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단 말이죠. 죄가 보인다 해서 시커먼 사람이 돌아다녀서 죄가 보이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관여하지 않고 분란 일으키지 않고 내버려둔 자의 그러한 행태와 모습들이 거리에 나가든 가정에 있든 눈에 다 들어오게 돼있다 이 말이에요. 그게 다 보이는 거예요. 사람이 보이지만 그 사람 속에는 뭐가 없다? 성령이 없는 거예요. 주님의 용서하심이 없는 거예요. 천상천하유아독존 자기밖에 몰라요. 자기 자율성밖에 몰라요. 전혀 존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괴로움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데 그걸 뭐냐 하면, 그들은 다른 신을 섬긴다고 돼있어요. 이제는 다른 신이 어떤 신인지 설명해야 되죠. 다른 신을 보기 전에 다시 한 번 정리합시다. 하나님의 오른편에는 어떤 일을 다 완수하는 자의 몫이 되는 겁니다. 처음부터 주님은 없어요. 주께서 원수를 이기면 그 주의 자리에 등극하니까 주님이 되고, 그 주님의 자리는 옛날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성령을 주시고 예수님에게 권능을 행했던 그 자리기 때문에 이제는 주님의 이름으로 자기 백성은 고를 수 있는 권한이 예수님에게 주어진 겁니다. 요한복음 5장에.

아버지가 선택한 것처럼 내가 내 사람을 선택한다. 옛날에는 하나님이 심판했지만 이제는 모든 심판을 누구한테 맡겼는가? 주님한테 맡겼거든요. 주님한테 심판을 맡겼다는 말은, 갈라낼 자와, 내 사람인지 그런 권한이 주님한테 있는 거예요. 그리고 주님에게 버림받는 자들은 오른편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전혀 감이 없는 사람들, 왜? 분란을 일으킴을 받지 못하고 내어버려뒀으니까. 인생에 주님이 개입한다는 사실을 전혀 까마득히 모르고 있어요. 한평생 다 내가 고생해서 살았다 하잖아요.

집안의 어른들 모일 때 하는 이야기가 뭡니까? 어제 낮에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누가 고생 더 했는지 시합하는 것 같아. 술 한 잔 먹고, 아재요, 그것도 고생입니까? 난 고생 더 했어요. 아이 넷 낳고 고생했고, 애 아빠는 독일에 광부 갔다 죽어 왔고, 애 하나 발목에 고무줄 채우고 부평시장에서 시래기 국 식당하면서 애들 키웠습니다. 노래 부르지요. <하얀나비> 음 어디로 갔을까~ 화장해서 재 뿌리면서. <수상한 그녀>에서. 자기 인생은 하얀 나비 같은 인생.

그게 자기연민이잖아요. 자기로부터 와서 자기의 의로움을 챙기는 거예요. 가룟 유다가 죽을 때 기어이 남아있는 자기 의로움으로 장렬하게 자멸해버려요. 과감하게 자멸, 그것도 장렬하게. 그게 바로 눈에 보이는 죄란 말이죠, 죄.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원수, 다른 신은 뭐냐? 오른편이 없어요. 오른편 없는 신이 되는 거예요.

오른편 있는 걸 어떻게 아느냐? 지상에 있는 오른편의 여파, 오른편의 결과물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게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바로 홍해가 갈라진 거예요. 앞에 죽음이 버텼는데 죽음마저 뭘 못 이기더라? 오른편의 권능을 죽음마저 버티질 못하는 거예요. 악마는 맨날 하는 소리가 맨날 죽음이야, 맨날 죽음이야. 걸핏하면 소주 한 잔. 맨날 이러면 너 죽는다. 다시 말해서 실패한다. 너 성공하고 싶지. 성공해야 되거든. 너 성공하고 싶잖아. 이러면 실패하는 거야.

고린도전서 10장 봅시다. 죽음으로 얼마나 협박들 해댑니다. 아이고, 예수 믿으니 무슨 소용 있나. 영감 암 걸려서 병 나을 줄 알고 기도했는데 기도하자마다 돌아가셨는데. 기도 시작, 전화 와서, 돌아가셨습니다. 아이고, 하나님도 다 소용없다. 이거는 반대로 살았어요. 마치 하나님이 지 보디가드인 줄 알고.

여기 고린도전서 10장 18절에 보면,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예하는 자들이 아니냐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우상이 뭐냐? 20절에 나오죠. 이방인들의 제사가 우상이다. 이방인들은 우상이란 말을 하지 않지요. 그들의 유일한 절대 신이기 때문에.

그래서 뭐가 우상이냐 하면, 이게 우상이에요. 신의 주권사상, 이게 바로 우상입니다. 이게 우상의 정신이에요. 우상의 정신=개혁주의 정신. 신의 주권이에요. 신의 주권을 말해버리면 여기에 뭐가 빠져요? 나는 죄인이다가 빠져버려요. 신의 주권이라는 이론, 그 지식을 내가 획득하게 되면 추가적인 정보를 더 얻기 때문에 지금 잘난 내가 더 잘나게 되기 때문에 나한테 유익한 선이 되고 성공사례를 가져다주는 그런 유익한 획득이 나의 구원에 뭔가 보탬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겁니다.

나의 부인, 나의 파괴가 이 신학적인 명제가 전혀 보태지질 않아요. 파괴는 뭐, 오히려 더 강화시키죠. 어제 오후 설교 때 이걸 구분했습니다. 억압과 부인과 구분한 거예요. 성령이 없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라 하니까 억압을 해버려요. 스프링을 꽉 밟아버리는 거예요. 이빨 깨물고 참는 거예요. 억압된 이걸 주체라 합니다. 나는 얼마나 용감한지 죽음마저 나는 극복할 거야. 이게 운명을 떠나서 주체가 되는 거예요.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부처와 부처 따르는 중들 보세요. 동안거 들어가서 밥도 조금밖에 안 먹고 버티는 거예요. 자기의 욕망을 본인의 방식으로 끊어내겠다고. 그 모습이 무슨 모습이냐? 죄의 종의 모습입니다. 욕망을 끊어내면 선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이 사람들의 주님한테 이끌림을 받지 못해서 뭘 해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예요. 그 불교와 동일한 게 개혁주의신학이에요. 오늘날 한국교회신학이 불교와 똑같은 거예요. 우상입니다. 그들은 신의 주권사상을 이야기해요.

신의 주권사상의 극대화가 이슬람교에요. 그 사람들 인사가 맨날 그거에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겁니다.” 이게 인사에요. ‘인샬라’(신의 뜻대로)라 하지요. 주께서 해놓고는 전부 다 여자 강간하고 돌아다니고. 주께서 하셨습니다.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불교의 나무아미타불이나 인샬라 하는 거나 교회에서 은혜로 합시다, 라고 하는 거나 차이점이 뭐예요?

주님의 침노와 주님의 공격 요소가 들어있지 않는 그 명제라 하는 것은 전부 다 거짓된 거예요. 왜냐하면 나를 주께서 불러내기 전에 알아서 기어 올라가는 모습이거든요. 그걸 존재의 사슬구조라 합니다. 존재의 체인. 대표적인 존재의 체인 작품이 [천로역정] 또는 단테의 [신곡]. 고딕체로 지은 대성당시대 때 대성당을 보세요. 전부 다 주님은 천정에 붙어서 목 아픈 사람은 보지도 못해.

억압을 하게 되면 욕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욕망도 같이 억압돼있어요. 압축이 돼있어요. 그래서 이 욕망은 다른 어떤 상황, 계기가 되면 이 욕망을 다른 식으로 풀어내버립니다. 금식 기도했잖아요. 금식 기도한 만큼 본인이 손해라고 여기고 그 다음에 노래방에 가서 다른 기쁨으로 여기서 있던 서러움을 노래방에서 실컷 부르면서 속이 다 시원하다. 고난주일에 참았던 것 속이 다 시원한 거예요. 월요일부터 금요일 아침까지 금식하고 금요일 오후에 뷔페 가서 실컷 먹는 거예요.

전에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돌아가신 장인어른은 목사님이신데 주일 되면 말씀을 경건하게 대한다고 아침을 꼭 굶어요. 점심때는 3내지 4인분을 잡사요. 고추장 넣고 참기름 해서 식욕, 탐심, 식탐이 대단합니다. 이만한 대접으로 아침에 굶은 것 한풀이하듯이 다 잡사요. 그러니 살이 쪘지요. 살이 쪄서 돌아가셨어요.

억압을 해버리면 자기가 계속 선한 자가 돼버려요. 죄를 억압했으니까. 그런데 자기 부인은 자기에게 어떤 상황이 나와 무관한 거예요. 왜? 자기가 빠지는 걸 자기 부인이라 하거든요. 어떤 상황에서 자기가 빠지는 거예요. 관여하지 않고 간섭하지 않고. 자기를 빠지려하면 그냥 안 빠지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손댈 수 없는 상황으로 지경으로 몰아버려요. 앞에는 홍해, 뒤에는 애굽군사.

이게 다 계획된 하나님의 무대에서 세팅된 거예요.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세팅시켜서 오른손의 권능 없이는 주의 일이 되지 않음을 늘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세팅을 본인이 세팅하면 안 돼요. 이건 일종의 억압이에요. 요새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아. 심심한데 스스로 고난 받아볼까. 이건 자기가 소꿉놀이하는 거예요. 아빠, 엄마와 하는 것처럼.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고생하는 것을 말하지 않고 자기에 대해서 아무 생각 없는 것이 십자가 생각하는 거예요. 그냥 평소 살다가 만약에 외부에서 공격하게 되면 자기 생각이 없다가 갑자가 방어체계가 동원되거든요. 사드요. 방어체계가 동원되면서 내가 어때서? 갑자기 내가 등장하지요. 부부가 싸우지 않을 때는 갑자기 나가 등장하면 이쪽에서 그럼 나는 뭐냐? 갑자기 두 개의 나가 되지요. 그걸 아까 대상화한다. 상대가 갑자기 대상화되는 거예요. 여기서 거리가 생겨버려요. 거리 생기면 거기서 네 영역, 내 영역 따로 돼버리는 겁니다.

억압은 자기가 더 의로워지는 거죠. 그러나 자기 부인은 의롭다, 선하다, 선이다, 악이다, 라는 자체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벗어난다는 말은 선도 악도 아니다. 주님께서 알고 계시는 주 되게 하시는 주님의 죄인의 모습이 된 그 지경으로 초대받았기 때문에 주님이 죄인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죄인 되는 것이 즐거워야 되지요. 그래서 시편 16편에 보게 되면 즐겁다 이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계속 해봅시다. 20절에 보면,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여기 귀신이 등장해요. 성경이라는 것이 정말 일상 언어로써 성경 속의 세계관을 구성하려고 할 때 우리가 아는 우리가 경험한 체험된 단어로 구성하면 그게 우리 일상의 보통 모습이거든요. 그런데 귀신을 뽑아 꽂아버리면 인간과 귀신과 같이 사는 게 돼버려요. 그럼 그 다음부터 복잡한 문제 생겼어요. 인간이 귀신을 다루는 방법은, 만약에 귀신이 왔을 때 내쫓는 방법은? 그 다음부터는 생각 안 해도 될 생각들이 계속해서 드디어 파급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했지요. 귀신이 나가고 난 뒤에 귀신이 또 갈 데가 없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귀신은 이 세상의 신이기 때문에 어디에 정착돼야 돼요. 몸이라든지 안 그러면 돼지나. 정착하는 이유는, 귀신의 속성이 남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버릇이 있어요. 이 세상의 신이니까. 자기 것처럼 지 마음대로 다루고 싶은 거예요. 다루려면 대상자가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래야 자기가 최고가 되니까.

아담과 하와에게 왔을 때 왜 뱀이 가만있지 못하느냐? 자기 밥으로 여기기 위해서 끈질기게 한 번해서 안 되면 두 번, 세 번, 따먹을 때까지 계속 이야기해요. 안 따먹으면 못 배기게 마든 거예요. 귀신이 나가고 난 뒤에 갈 데 없는데 와 보니까 소제가 돼있거든요. 자기만 들어가는 게 아니고 귀신 일곱으로 들어가더란 말이죠. 여기서 수리적으로 복잡한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의 몸의 몇 명의 귀신까지 포함이 되느냐? 군대 귀신이라 했거든요. 군대는 오천에서 육천 명입니다. 보통 이천 명이라 하는데. 정확하게 로마군대는 오천에서 육천 명이거든요. 육천 명이 한 곳에 몰려 들어갔을 때 너무 비좁지 아니하겠는가? 답답해서 저거들끼리 싸우지 않겠느냐? 그런데 만약에 이천이라 합시다. 이천이 이 사람에게서 나왔을 때 돼지 떼가 있었잖아요. 한 마리씩 올라탄 거예요. 올라타게 되니까 귀신이 인간을 찾아온 이유가 돼지를 통해서 미리 보여줬어요.

귀신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거예요. 살아 있는 걸 죽음으로 몰아넣는 게 아니고 죽었기 때문에 죽음으로 몰아넣는 거예요. 죽음의 이유가 뭐냐 하면, 선악체계를 못 버리게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종교고 오늘날 교회가 그렇게 돼있어요. 교회가 귀신의 전당이 됐어요. 선악체계를 못 버리게. 왜? 그게 먹어주니까. 설득이 되니까. 너도 귀신, 나도 귀신. 말만 떼면 아멘하고 엎어지고 자빠지고 난리라.

잘 될 줄 믿습니까? 아~멘. 십일조하면 복 받을 줄 믿습니까? 아멘. 복이 뭔지도 모르고. 복을 뭐라고 했습니까, 아까? 분란을 일으키죠. 후시고 파내는 거예요. 가만두질 않는 거예요. 왜? 자기 친 아들이기 때문에. 그런데 후비지 않고 파내지 않고 가만 놔두면 인간은 점점 더 자기가 잘난 존재로 알고. 그게 뭐냐? 귀신+알파, 얼마나 들어갔는지 모르겠어요. 귀신이 들어있기 때문에 잘난 맛에 살아가는 이 모습이 바로 창세기 3장에 귀신의 지배받는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말해요. 목사님, 복음은 알겠는데 있는 교회 계속 다녀야 됩니까? 귀신을 연구하려면 다니세요. 아, 저게 귀신이구나. 내가 저렇게 살았었지. 귀신의 교회에선 자기가 잘났기 때문에 그냥 맹숭맹숭 잘나면 잘난 게 아니잖아요. 뭐가 있어야 돼요? 돈이 증가해야 되겠지요. 소위 세상적인 복을 받아야 내가 하나님 잘 믿는 티가 나니까 귀신들이 계속 여러분 복 받으면 부자 되고 오래 삽니다, 라고 계속 이야기하는 거예요. 요새 오래 사는 게 얼마나 저주인 줄 모르고. 아예 욕을 해라.

다시 고린도전서 10장 봅시다.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이 말은 이방인 자체가 어느 관점입니까? 이게 성도의 관점, 이스라엘 관점이었어요. 이스라엘은 뭐라 했어요? 이스라엘이 살아가는 모든 콘셉트를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거죠. 오른쪽에서 주어진 것이지 내가 콘셉트 마련해놓고 하나님께서 복을 타내고 힘을 달래는 게 아니에요.

그 콘셉트를 싹 밀어붙이고 시편 16편이라는 콘셉트, 오른편이라든지 그런 콘셉트로 재배치해놓고, 배치만 해놓은 게 아니고 거기에 합당한 내용까지 오른편에서 능력이 오는 것, 권능이 오는 것 이게 바로 말씀이 우리 안에서 독생자가 일하듯이 우리 안에서 성취가 되는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귀신한테 하는 것이요, 그 다음에 뭡니까?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라 했지요.

자, 그러면 귀신한테 하는 게 아닌 것이 곧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제사는, 우리가 제사하는 것이 아니고,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용서는 우리가 죄 용서받는 게 아니고 죄 용서에 활용당한다고 했잖아요. 주님의 오른편의 권능이 우리를 가지고 합당한 제사를 하게 될 때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가 되고 예배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와중에서 우리란 자체가 우리가 죄인의 모습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를 분란 일으키고 들쑤셔야 되겠지요.

들쑤시는 데 누가 도와주느냐 하면, 고맙게도 고마운 건 아니지만 악마와 귀신이 도와주는 거예요. 주님의 은혜 받고 돌아서면 우리는 귀신과 한패가 돼있어요. 계속해서 분란이 일어나요. 맨날 은혜 받았다 해놓고 돌아서면, 오늘 가계부 쓰다보니까 빵꾸났네. 이 걱정하고 있단 말이죠. 이번 달엔 마이너스 이십 만원됐다. 이래서 앞으로 어떻게, 그 다음에 뭡니까? 어떻게 사나? 누가? (내가) 내가 없는데요? 몸은 죽는데요?

그러면 제대로 하려하면 내가 돈이 없는데 주님은 어떻게 살아요, 하잖아요. 주님은 이미 살았는데. 뭘 해도 ‘사나’와 ‘걱정’은 연결이 될 수 없어요. 사나라고 하지 말고 주께서 어디까지 살려내실까?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거든요. 어디까지 살려내시는지 보잔 말이죠. 주께서 또 옆집 아줌마, 귀신 이용해서 파출부 좀 하시렵니까? 아, 파출부하라고 이용당하는구나. 그럼 또 열심히 해서 이틀 치 연장되는 거예요. 연장되면서 내가 광야 같은 세상 살아오면서 바로 광야니까 하루하루 사는 것이 만나 제공에 의해서 살아간다. 만나는 주님의 권능이 만나 안에 들어있잖아요. 말씀 안에. 그래서 범사에 매일같이 우리는 감사하는 거예요.

방금 이 말은 통합 입장에서 보게 되면, 모든 걸 통합시켰다. 그 다음에 뭐냐?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여기서 나오는 건 뭐냐? 분란을 일으키니까 그동안 우리는 어떻게 살았어요? 이방인처럼 살았지요. 이방인처럼 산다는 건 뭐냐?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마라 그날 염려는 그날 족하고 내일 염려는 내일 할 거고. 내일 염려할 게 있을 거예요. 염려 안 한단 말이 아니고 미리 당겨서는 할 필요 없단 말이죠.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데 뭘 미리 당겨서 해요.

내일 염려는 내일 할 것이고 오늘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할 때 이러한 모든 명령, 지시는 누구 권능입니까? 우리가 못해요. 주님이 이걸 분란 일으켜서 이게 바로 내 육신의 모습이고 죄의 모습이고 죄를 육신을 이기신 주님의 오른편의 권능이 그 나라와 그 의, 그러니까 하늘나라 천국을 주님을 바라보게 하셨구나, 하는 것을 하루치의 숙제를 하도록 주께서 권면을 하시는 거예요. 매일같이 살면서 오늘 이대로 죽어도 좋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수면제 먹지 마세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귀신이 악마가 필요하다 이 말입니다. 꼭 필요하고 그들의 말이 더 마음에 와 닿고 친숙해져버렸어요. 이미 우리 마음은. 이 말은 우리 힘으로 절대로 구원될 수 없다. 왜냐? 내가 설치는 것은 일이 성사 안 돼요. 죄 사함은 주께서 시작해야 되지 내가 죄 사함 받으려고 여러 가지 일을 해봐야 그건 말짱 소용없는 겁니다.

시편 다시 돌아와 봅시다. 시편 16편 6절에 보면,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이게 참 어려워요. 이걸 울산강의에서 시간이 없어서 제대로 설명을 못했어요. 이게 너무 어려운 말인데 적어보겠습니다. 약속이란 체험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또는 인정하는 것. 이게 약속이거든요.

여기 뭐가 있느냐? 체험되지 않는 것이에요. 체험돼버리면 이건 나의 기억이 되기 때문에 약속이 아닙니다. 체험되지 않는 것이에요. 인간은 체험되지 않는 것을 절대로 믿지를 않아요. 받아들이질 않습니다. 인간이 기적이라는 것도 지가 체험돼야 받아들이거든요. 진정한 기적은 뭐냐? 체험되지 않는 데 받아들여진다는 이것이 자기도 깜짝 놀랄 정도에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도다. 이 말이 뭡니까? 본다는 것은 체험이란 말이죠.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구나. 이건 인간이 감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거예요. 참 어렵지요.

그 점이 바로 아름다움 곳에 있음이여. 지금 다윗을 좇기고 있어요. 뭐 아름다운 게 있어요. 하지만 있다는 것이 믿어지는 거예요. 왜? 주의 권능이 주어지기 때문에. 예수님도 이 땅에 오실 때 아버지 오른편의 권능 때문에 자기가 죽어서 사흘 만에 마태복음 16장에 분명히 언급을 했어요. 내가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한다 했잖아요. 그래놓고 십자가에서는 이 잔을 넘어가게 하옵소서, 이야기하지요.

체험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어요. 이거는 내 스케줄이 아니고 아버지와 주님이 창세전에 만든 스케줄대로 진행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오른편의 자리에 앉아야 되니까. 그래야 하늘나라도 생기고 주의 자리에 등극하기 때문에. 세상 모든 만물은 예수님을 독생자가 주가 되는 그 목적으로 확정됐거든요. 다수가 아니고 통합됐어요. 통합이란 것은 나의 것이 없어요. 하나로 주의 이름으로 통합된 거예요.

그래서 빌립보서 2장에 보면, 주께서 십자가 지고 그분을 살리사 모든 만물로 하여금 주의 이름에게 영광을 돌림으로써 아버지께 영광이 되게 하심이라. 아버지의 영광은 오직 주의 이름으로 통합을 주의 이름을 인정할 때 그게 영광이에요.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 지진이 일어났지요. 죄수들의 도망갔는데 바울과 실라는 옥에 앉아 있었단 말이죠. 간수가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왜? 도망한 죄수의 값을 자기가 치러야 되니까 자기 팔자가 더러우니까 죽으려했거든요. 그때 어떻게 할꼬? 할 때 예수가 아닙니다. 앞에 뭐가 붙어있어요. ‘주’ 예수를 믿어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주 예수입니다. 네게 지진이 일어나고 죄수들의 도망한 것이 어디서 일어났다?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간 그러한 연쇄사슬의 일환으로 네가 존재한단 말이죠. 네가 구원받는 게 아니고 구원된 자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주께서 간수로 취직하게 했고 지진 나는 일이 벌어진 거예요. 이게 바로 애프터이벤트, 사후적이에요. 사후적 의미를 계속 깨닫게 하는 거예요. 위에서 보는 시선이 그렇게 되는 겁니다.

시편 16편 8절을 보면,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건 아까 했고요. “내 마음이 기쁘고” 그 능력이 있으니까 기쁠 수밖에 없지요. 왜? 흔들림이 없으니까. 나를 제거해주니까 나의 능력을. 그러니까 기쁘지요. 그 다음에 10절 봅시다.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체험되지 않았어요. 아직 죽지도 않았어요. 체험되지 않았지만 마치 자기 예언처럼 미리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령을 받았으니까요. 다윗에게 성령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니까.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는 말은 후대의 우리에게 나는 이렇게 믿었다. 그리고 주님은 이걸 예언대로 완성했다. 그러면 너희들이 과연 주님에게 이용당한 사람이라면 주께서 나한테 주어진 오른편의 권능이 동일하게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이게 기적이고 권능이잖아요.

체험하지도 않은 성경말씀이 왠지 믿어진다는 게 그리고 이 사실을 근거로 해서 믿지도 않는 나를 늘 분란을 일으켜서 믿어지도록 심지어 마귀까지 귀신까지 동원해 가면서 분란 일으켜서 우리를 후비고 쪼개고 흔들게 하고 살피는 겁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 하고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 봅시다. 25절. 13장 전체가 비유로 돼있지요.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이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나가 없다는 거예요. 구원받을 나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빠져야 돼요. 왜냐하면 주님이 던져놓고 밟아가는 것처럼 주님이 먼저 자기 자신의 일하심을 위하여 던져놓은 비유에요. 그러면 비유의 모든 내용은 주님이 친히 그것도 홀로 오직 혼자서만 해야 돼요. 그래야 이게 통합이 되니까.

그런데 여기에 가라지들이 나도 알곡 될래, 이렇게 덤벼들겠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이것들을 차단시킬 필요가 있어요. 예수님의 비유에 의해서 주님 말씀 지켜서 천당 갈래요, 인간들을 차단시켜버리죠. 그래서 제자들도 다 결국 십자가에서 일단은 떠나게 만들어요. 홀로 남게 만들어요. 다시 말해서 가라지가 뭐냐, 알곡이 뭐냐에 대해서 너희들은 그걸 판단할 능력이 전혀 없다.

판단할 필요도 없고 판단할 능력이 없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남한테 이용당하기보다는 본인이 주인공이 되고 싶고 주체가 되고 싶어 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되고 싶은 거예요. 이것 주님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내가 나 돼버리면 주의 나라에 못 들어가요. 이런 인간 안 넣어줍니다. 내가 나가 아니라 주님이 나라는 것을 만들어낼 때 주님 중심의 나라에 합류가 가능합니다.

그래서 너나 나나 전부 다 주님한테 통합이 돼야 돼요. 그게 주님의 일이거든요. 통합되어야 네가 천국까지 오는 모든 능력은 어디서 나왔다? 너에게 나오고 나에게 나온 게 아니고 하나밖에 없는 주님께 나왔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 나왔다는 주님의 존재에서 나왔다는 것을 모든 것을 주의 이름으로 나왔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의 이름에서 나왔기 때문에 주의 이름이 하시는 일을 계속 내 안에서 활성화시키시고 마음껏 할당된 지역으로 여기시고 주께서 주의 이름으로 활동하소서.

이게 뭐냐, 기도의 마지막이 뭡니까? 누구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저는 제쳐주시고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주께서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활용해주시옵소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그러면 인간에게 어떤 소망은 없는가? 소망이 왜 없어요. 주께서 소망 주면 있어야지요. 있는 소망을 왜 마다해요. 그것도 일종에 억압이고 겸손인가요? 그건 말도 안 되거든요. 그냥 주시면 주신 대로 하면 되지요.

나 같은 죄인은 빵도 안 먹는다. 윌도 안 먹는다. 윌을 왜 안 먹어요. 맛있는데. 주께서 살리려고 주신 것은 마음껏 먹되 너무 많이 먹지는 마시고요. 내가 사는 게 아니고 주께서 필요해서 살려준다면 돈을 마다하지 마세요. 돈이 없어서 탈이지 마다하긴. 되도 않은 겸손 떨고 자기 부인한다고 낮추고. 난 낮아지기를 원합니다. 낮아지지 마세요. 그리고 우리가 낮아지지 않는 게 낮아짐이에요. 왜? 자기 생각을 안 하니까. 그걸 쉽게 말해서 멍청이, 등신, 바보라고 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똑똑하지 말고 주 앞에서 잘난 척하지 말고 정말 바보처럼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주님의 활동 장소가 제공된 주님의 이름만 드러나는 그러한 주의 증인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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