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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1 16:13:05 조회 : 227         
주체 창조 시편 18:25 200511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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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4.♡.134.72) 20-05-13 11:04 
20200511a 부산강의 : [시편]28(18편)-주체 창조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18편 25절,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이렇게 돼있지요.

오늘 강의 제목은 주체의 창조입니다. 인간이 있는데 주체는 인정하지 않겠다, 내가 새로 만들겠다는 거죠. 보통 인간은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육체는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주체를 창조하는데 그 계획, 그 방식, 그 환경이 시편 18편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하늘에 계시지 않고 지상의 일에 나섰다는 겁니다. 곱게 계시는 게 아니고. 예를 들어서 cctv에 하나님이 찍혔다고 해봅시다. 상상을 해보는 거예요. 그래서 며칠 후에 cctv를 보니까 거기에 하나님이 잠시 나타났다 이 말이죠. 그런 걸 상상해보세요. 하나님의 실존이 주님의 실존이 확인 되었을 때 이 땅에 하나님이 같이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을 경우와 확인되지 않을 경우 사이에 나의 삶에 어떤 변동이 있겠습니까?

변동이 당연히 있어야 되지요. 창조주가 내 집 바로 옆에 이사 온 것과 하나님이 확인되지 않은 것과의 차이는 확연히 다르죠.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이 확인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확인될 때까지 어떻게 사느냐 하면, 내 위주로 살 수밖에 없어요. 내가 최종 어른이니까. 그런데 만약에 옆집에 하나님이 이사를 왔다. 떡 나누다가, “이사 오신 분은 누구십니까?” “나, 하나님인데요.” 이럴 때 “어이. 농담도 잘하시네요.” “농담 아닙니다. 진짜 하나님입니다.”

이럴 때 내 삶이 어떤 식으로 변화될 수 있느냐를 제가 묻는 겁니다. 옆집에 하나님이 이사를 왔는데 아무리 봐도 사람 아니에요. 그럴 때 내 인생의 삶이 변경되겠지요. 누구 눈치 보겠습니까? 옆에 이사 오신 하나님 눈치 보게 되겠지요. 그러면 내 목적과 의미가 수축될 가능성이 있어요. 마음대로 활개치고 내 뜻대로 살다가 옆에 하나님이 치고 들어왔을 때에 내 삶이 약간 조심스럽게 되는 거예요.

저는 이걸 주체의 수축이라고 보는데, 쪼그라드는 주체가 조심스럽게 되는 걸 말합니다. 그런데 옆집에 하나님이 아니고 보통 이웃 사람이 이사 왔다. 그러면 내 삶이 수축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필요 없지요.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면 되지요.

오늘 제목이 뭐라 했습니까? 주체의 창조. 창조란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게 창조에요. 하나님이 들어쓰실 주체를 창조한다는 말은, 눈 씻고 봐도 하나님 뜻대로 살 사람이 없다 이 말입니다. 없는데 없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필히 있게 하겠다,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주체를 있게 하겠다, 하나님과 연결돼있는 하나님과 서로 통하는 주체, 하나님과 관계가 이어진 주체를 없는데서 만들어내겠다는 거예요. 시편 18편의 주제가.

그러면 그동안 우리가 만들어낸 주체란 것은 하나님과 연결이 됐다는 겁니까, 안 됐다는 겁니까? 연결되지 않았지요. 주체란 말을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주체란 그냥 주인공이라 하면 돼요. 주인공 알지요. 드라마의 주인공, 소설의 주인공, 영화의 주인공. 그동안 주인공이 누구였단 말입니까? 내가 최종 주인공의 마감인물이란 말이죠. 내가 나의 인생에 마지막 인물, 모든 의미와 가치가 나로 완결이 돼요. 모든 것이 거기서 종결이 된다 이 말입니다.

링컨이 이야기했잖아요. 나로 인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의 세계, 이걸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함으로 말미암아 국가는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은 진짜 이건 바른 말이에요. 왜냐하면 세상이 그것 때문에 망하거든요. 망할 때까지 안 사라져야 되지요. 망할 때까지 인간을 위한 세계는 이 세상이 불로 망할 때까지 절대 망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망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에 망하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를 위한 삶이 망하기 때문에.

그걸 저는 주체, 어렵지요. 그럼 주인공으로 바꾸잔 말이죠. 내가 내 인생에 주인공이란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런데 이런 세상을 하나님이 왜 심판하느냐 하면, 심판하는 이유가 그걸 천국으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어렵지 않지요. 굉장히 간단하지요. 그러면 우린 묻고 싶지요. 하나님이 생각하는 천국은 뭡니까? 내가 주인공 돼야 된다는 겁니다. 내가 어른이 돼야 된다는 거예요.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것처럼 내가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그러한 관계가 되는 그런 식으로 시스템이 운영되는 그 나라만이 천국으로 간주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신약에서 말하는 천국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나라, 천국이란 무슨 나라냐 하면, 골로새 1장 13절에 나오는 아들의 나라에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심어놓고 박아 넣은 거예요. 심어놓고 박아 넣을 때 아들은 천국의 주체가 되지요. 주인공이 되지요.

그럼 이 주인공이 곱게 박히겠습니까, 아니면 치열한 싸움이 일어나겠습니까?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아까 우리 옆집에 하나님이 이사 왔다 했지요. 우리가, “하나님, 이사 오셨네요. 같이 지냅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갑자기 위축되는 거예요? 위축되지요. 위축된다는 말은 그동안 우리가 하나님이 없이 사는 것이 습관화돼버린 거예요.

이 주체의 창조를 앞에 뭐 하나 더 붙입시다. 하나 더 붙이면 확실해지는데, (믿음)주체의 창조. 또는 소망, 사랑 주체의 창조. 창조란 없는데서 있는 것으로 제가 말씀드렸지요. 결국 뭡니까? 믿음, 소망, 사랑은 하나님의 연결구조인데 믿음, 소망, 사랑의 주인공이 이 땅에 없다는 말이죠. 없다는 것은 믿음, 소망, 사랑을 가지려고 애쓰지 말라는 뜻이에요. 없다는 말은 없는 거지, 내가 믿음, 소망, 사랑의 주체로 나서겠다고 하지 말란 말이죠. 그렇게 되면 천국이 나의 나라가 되지 아들의 나라가 안 되는 거예요.

지금 시편 18편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굉장히 단순해요. 자기 아들을 박아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에베소서에 보면 때가 되매, 또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때가 되면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다. 그걸 믿는 게 믿음 아닙니까. 믿음이 뭐 어려워요. 내 옆집에 예수님 보내셨다 이 말이에요. 창조자 보내셨다 이 말입니다. 오라 하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요새 진성이란 가수 아십니까? <안동역에서>이란 노래가 있어요. 안동역에 노래비가 있을 거예요. 하도 유명해서. <돌아와요 부산항에> 다음에 제일 히트한 노래로 돼있는데 그 노래 부른 진성의 노래 중에 이런 노래가 있어요. 내 인생에 태클을 걸지 마. 옆집에 하나님이 이사 오면 졸지에 가만있어도 내 인생이 갑자기 위축되면서 축소되면서 내 인생에 태클을 거실 거라는 생각이 들지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옆집에 이사 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뭐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과 연관돼있는 주체가 창조 되지 않았던 겁니다. 내 인생에 태클을 걸어줘야 나는 기존에 나를 포기하고 새로운 내가 되는 거예요.

시편 18편이 많이 길어요. 50절까지 있거든요. 그 전체 흐름을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흐름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때는 아들의 안 나오지요. 자기와 관계, 연결돼있는 주체를 창조하면서 이 땅에 박아 넣은 겁니다. 박아 넣은 이상 곱게 오셨다고 곱게 가실 상황이 아니에요. 인간은 이미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 된 입장이기 때문에 나는 주인공이다, 나는 인간이다. 곧 인간이다 고로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다. 이런 문장형식이 성립되거든요.

그러면 인간이 있다. 있다는 말은 아까 창조의 공식에 의하면, 있는 것은 창조가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창조는 없다가 돼야 돼요. 없다가 돼야 있다가 되거든요. 있음의 없어져야 창조란 사역이 의미 있게 다가오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가 뭐냐? 성도란 내 속에 있음을 가지는 거예요, 없음을 가지는 거예요? 없음을 가져야 되지요. 내 한 가운데에 없음을 지니고 있어야 돼요. 그 없음은 기존에 내 있음이 함부로 그걸 접수하거나 거기에 끼어들거나 할 수 없어요.

이걸 그림으로 그리면, 인간의 신체를 그렸다고 물리적인 신체가 아닙니다. 신체가 아니고 주체를 그린 거예요. 한 가운데 구멍이 나요. 공백이 있어요. 그렇다면 폭탄 터져서 구멍났다는 뜻이 아니고 주체입니다. 주체란 말을 몇 번이나 하는지, 주체를 세 자로 옮겼지요. 뭡니까? 내가 ‘주인공’입니다가 주체입니다. 어렵지 않지요. 그런데 주인공 한 복판에 구멍이 난 거예요. 이게 바로 주님과 통하는 믿음이라는 겁니다.

어제 오후 설교에 언급했는데 쉬는 시간에 이야기하다가 어떤 사람이 공사하는 감독 이야기를 했어요. 제가 오후 설교시간에 물었지요. 그럼 그 공사를 감독하는 본인은 누가 감독하지요? 사람이 내게 감독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인간은 태어나면서 안 갖고 있어요. 남을 이용할 생각하지 제게 지시해주셔야지요. 이런 생각을 안 갖고 있다니까요.

만약에 목사님이 제가 뭘 해야 되지요, 라고 하면 지나가던 사람이, 당신 지금 어디 보느냐, 라고 의아해 할 거예요. 그러면 지시도 안 받고 살아요? 감독자 없습니까? 인생 감독자 있어요? 지시자 있어요? 여기에 구멍이 안 나니까 몸과 내 정신세계가 딱 합치되는 거예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예요. 놀고 싶으면 놀고 일하고 싶으면 일하고. 오늘 점심에 뭐 먹을까. 이건 “주여, 오늘 떡볶이 먹을까요, 칼국수 먹을까요?” 이걸 왜 지시받느냐? 그걸 왜 지시받아요.

그래서 에베소서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남자는 지시할 사람이 없는 게 불행이고, 여자의 불행은 남편 눈치 보고 사는 게 불행이다. 남자의 불행은 여자에 지시해서 갑질하는 게 대단해 보이지만 진짜 자신을 지시해줬으면 좋겠어. 그런데 그 지시를 받을 수 있는 연결, 접속 고리가 전혀 형성돼있지 않아요. 특히 남자들은. 타고나서도 그렇고 환경적으로도 남자는 어른이 돼야 된다고 주변에서 자꾸 세뇌시켜놓으니까. 남자는 평생에 딱 세 번만 울어야 된데요. 태어날 때 울고 부모 돌아가셧을 때 울고 조국을 잃었을 때 울어야 된답니다. 요새 남자들은 드라마 보며 울게 됐지만. 강한 척하기 때문에 점점 위선자로 돌변해버리는 거예요.

결국 해답은 뭐냐 하면, 아무도 나를 지시할 수 없다는 것이 난감한 상태가 되는 겁니다. 아파트 경비원이 유서 남기고 자살했어요. 유서에 하소연할 데 없어서 죽는다는 겁니다. 자기가 너무 억울한데 하소연할 데 없어 죽는다는 거예요. 이 유서를 분석해봅시다. 여러분, 어제 뉴스 아시지요. 아파트 경비원이 아파트 주민과 서로 싸웠잖아요. 서로 주차관리를 왜 제대로 하느냐, 안 하느냐 하고. 밀었느니 때렸느니 코뼈 부러졌느니 하는데. 결국 그 경비원이 자살했어요. 그것도 유서 남기고 자살했다고요.

하소연할 데 없어 자살한다. 경비원이 여자가 아니고 남자 경비원입니다. 그러면 그동안 자살 안 할 조건은 뭡니까?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을 조건이 어떤 조건이냐 하면, 하소연할 자를 부지런히 끌어모은 거예요. 친구들 있고 가족들 있겠지요. 그럼 여기서 우리가 두 가지를 나눠봐야 돼요. 고독과 외로움의 차이. 야, 어렵다.

외로움이 고독이고 고독이 외로움 아니냐고 생각하는데 이게 차이가 나요. 고독은 뭐냐 하면, 스스로 홀로 살 능력을 갖출 때는 고독이 되는 겁니다. 취미가 뭡니까? 나는 고독. 이건 고독을 즐기는 거예요. 그런데 외로움은 못 견디는 겁니다. 외로움은 막연하게 기다려야 돼요. 뭘 기다리느냐? 하소연할 자를 끌어모으는 거예요. 가족이 있어야 되고 친구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또는 배우자를 찾는 거예요. 남편, 아내 결혼할 상대자를 찾는 거예요.

그러면 하소연할 자를 끌어모을 때 자꾸 찾아다니고 지가 알아서 오고. 교인들의 일요일에 교회 가지요. 교회 가는 이유 중에 하나가 하소연할 사람 찾는 거예요. 그러면 하소연하는 것은 사랑입니까, 아닙니까? 사랑 아니지요. 믿음 아니에요. 소망 아닙니다. 이건 자기의 정신구조 안에 공백을 남겨두지 않으려고 자꾸 채우려고 하는 거예요. 하소연으로 외로워서. 외로워 외로워서 못 살겠어요, 라는 노래가 있듯이 외로워서 못 견뎌서 하소연할 사람을 계속 찾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은 그동안 친구가 있었는데 하소연할 사람이 없다 할 경우에는 뭘 한다? 내가 살아서 뭐하나 하고 죽어버린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차라리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못하다는 뜻이에요. 이 세상에 왜 내 편이 하나도 없어. 왜 내 사연과 내 아픔과 내 속마음에 대해서 보통 들어줄 사람 없다 하는데 들어줄 사람을 원하는 게 아니고 이걸 위로해줄 사람을 찾지요. mbc라디오프로그램 <여성시대>에서 사연 다 들어줍니다. 그것 말고 내 편 되 줄 사람, 내 편으로 이 공백에다 박아 넣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이런 사람이 주인공이 누굽니까? 본인이 주인공이죠. 본인이 목숨을 끊었다는 것은 자기 주인공 됨을 포기 못하겠다는 거예요.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교회 나가서 예수 찾고 하나님 찾고 삼위일체 찾고 성부 찾고 성령 찾고 성경 찾고 다 찾는다. 이것 믿음입니까? 믿음 아니지요. 자기가 자기에게 지시내리는 거예요. 나 이것 모자라고 결핍됐기 때문에 만약 이것 안 되면 죽을 거야.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현상 하나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살을 유예하고 있는 중이다. 그럼 왜 지금은 자살 안 하느냐? 지금은 일가친척 가족 교우들이 있기 때문에 지금 자살을 미루고 있는 거예요. 만약에 내가 친정엄마인데 자식이 냉대한다면 나는 이 땅에 살 이유 없다.

살 이유가 없다는 그것도 헛말이고요.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힘들어서 못 살겠다는 거예요. 이유니 뭐니 고상하게 찾을 것 없니 내가 사는 게 힘들어서 못 살겠다. 돈이 없느냐, 밥을 못 먹어서? 아니에요. 먹을 것 있어요. 최저생계비 얻잖아요. 긴급재난지원금 받았습니까? 그것 있잖아요. 그러나 인생은 그렇게 사는 게 아니에요. 돈이 이 공백을 메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돈이 먹힐 수 있는 것은 개나 돼지 사료 먹이면 사는 것과 똑같지요.

개, 소, 돼지는 주체가 없어요. 뼈, 근육, 신체구조는 있는데 뭐가 없다고? 주체가 없다고. 주체는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돼있기 때문에 인간에게만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것을 죽었다고 한 거예요. 우리가 죽었기 때문에 자꾸 죽음을 유예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 없으면 나 죽어버린다. 주식투자했는데 떨어지면 나는 자살할 거야. 이 말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리 유예하고 몇 년 더 흘러가도 넌 죽은 거다.

외로워서 결혼했습니다. 그러면 이혼하게 되면 죽어버려요. 결국 인생이란 죽는 이유를 만들어내는 업무를 수행하는 게 인생입니다. 인생은 내가 왜 꼭 죽어야 되는지 그 이유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떻고 인생은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인생은 다른 게 아니고 내가 꼭 죽어야 될 이유를 내가 알아채는 기간, 그게 우리의 삶입니다. 어찌 기쁘지 아니하리오. 왜 기쁘냐 하면, 해답을 알았으니까 기쁘지요. 사람이 오늘 죽더라도 해답을 알고 죽어야지요. 진리를 알고 죽어야 되지 않습니까.

시편18편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육체가 진리가 아니라 주님의 육체가 진리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는 게 진리입니다. 그것은 인간은 그동안 악마에 속아서 본인의 신체, 본인이 사는 것을 진리라고 그동안 줄곧 우겨왔습니다. 이 내부가 없음으로 있어줘야 돼요. 왜냐하면 없음으로 내부가 장착되어서 주님의 지속적인 창조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없는데서 있게 하고, 없는데서 있게 하고, 계속해서 없는데서 있게 하고 있는 것은 다 없애버리고 다시 없음으로 바꾸고. 하나님이 없는 것을 있게 하고 있는 것을 없음으로 바꾸고. 이런 겁니다.

참새가 한 끼 먹었다고 그것은 인생 끝나려고 합니까? 아니지요. 참새를 누가 키웁니까? 매일같이 키우듯이 인간도 매일같이, 참새도 들풀도 기르시나니 너희일까 보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참새와 들풀처럼 키우시는 거예요. 그 키우신다는 증거가 마음에 있어야지요. 내가 알아서 단도리하면 누가 키우는 거예요? 도대체 누가 누굴 키우는 겁니까? 내가 나를 키우는 거예요. 아닙니까? 그건 옆집에 하나님이 이사를 안 온 거예요. cctv에 하나님 존재가 확인 안 된 상태에서는 이 세상에 나를 키울 것은 나밖에 없다가 이게 완전히 정설처럼 단정적으로 진리처럼 내 몸이 그걸 받아들인다니까요. 아시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주체가 되느냐? 그 문제를 생각해봅시다. 아직까지 시편 18편 본문은 안 들어가고 있어요. 이것 정리돼야 들어갈 수 있어요. 예를 들어서 여러분 자체가 인공지능을 장착한 하나의 움직이는 로봇이라고 생각합시다. 그런 영화 있었지요. I will be back. 다시 돌아온다는 영화, <터미네이터> 마지막에 보면, 폭탄으로 쏴버려요. 그럼 터미네이터가 산산조각 다 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이 있어요. 터미네이터의 사지가 완전히 박살나서 사방에 흩어져있어요. 머리를 또 따로 있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터미네이터가 슬그머니 흩어진 자기 육신을 긁어모아요. 왜 긁어모읍니까? 긁어모아서 통일적인 신체모습을 갖추었을 때 제대로 활동하거든요. 이걸 보고 제가 느낀 것은 어떻게 인간이 사는 평소 행동과 똑같으냐 말이죠. 인간은 자기 두뇌가 생각하기를 괜찮아 보이는 것들을 긁어모으는 식으로 평생을 살아갑니다.

손이 심심하다 했는데 보니까 보석상 지나가다 내 손가락에 저 보석이 어울린다 싶으면 카드 긁어버리죠. 그래서 손가락에 끼웁니다. 바지를 스키니로 입을까? 옷가게에서 옷 하나 구입하지요. 봄에는 어떤 모자가 좋을까? 봄바람 휘날리며~ 벚꽃 날릴 때 어떤 모자가 폼나지? 인생이란 게 뭘 자꾸 긁어모으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 아들 또래의 아이가 똑똑하고 4개 국어를 하게 되면 갑자기 그 애를 아들 삼고 싶어. 또 긁어모으고 싶고. 그리고 총각이 연예인들 나오면 나는 저런 타입의 아가씨와 결혼하면 소원이 없겠다, 라고 또 긁어모아요.

그러니까 인공지능을 갖춘 흩어진 사지를 본인이 통일성 있는 신체를 상상해서 계속 주변을 긁어모으는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함이 좀 모자란다 싶으면 교회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이런 조건에 맞는 여자와 결혼하게 하옵소서. 이런 직장을 갖게 하옵소서. 하소연 다시 해봅시다. 멋진 예다. 사람은 죽었지만.

이 하소연한 이 경비원은 나름대로 통일성 있는 신체를 원했다? 물었습니다. 아니죠. 통일성 있는 신체를 원한 게 아니고 통일성 있는 주체를 원한 겁니다. 자화상. 통일성 있는 주체는 뭐냐 하면, 경비원 몇 푼 되지 않지만 나름대로 그 나이에 따박따박 월급 받아서 자기 인생의 미래와 목적을 설계하고 희망을 갖는 거예요. 내가 소망을 갖는 거예요. 가족들도 아버지가 안 노는구나. 역시 존경스러운 아버지, 주변의 가족들로부터 존경받는 아버지, 존재감 있는 아버지로서 살아갈 수 있었는데 그게 주민과 싸워서 얻어터져서 얼굴이 엉망 되었다. 그럴 때 자살했잖아요. 왜? 하소연할 데 없다. 자존심 상해서 더 이상 못 살겠다.

여기서 물어봅시다. 자존심 상하면 왜 못 살지요? 자존심 상하면 왜 마음이 심란하고 괴로워하죠? 자존심 상했는데 손에 뭐 났습니까, 찢어져서 피 나는 겁니까? 자존심 상했는데 엉덩이 쪽에 상처 입었어요? 뭡니까? 보니까 자존심만 상했지 다리에 종기 나고 그런 것 없지요. 그런데 왜 죽지요? 멀쩡한데. 자존심 상했는데 갑자가 앞에 접시에 반찬이 다 날아갑니까? 앞에 반찬 있어요, 국 있어요, 밥 있어요. 이 사람 자살할 때 아침에 밥 먹고 죽었어요. 낮에 죽었다니까요. 낮인지 밤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낮에 죽었다 치고.

왜 먹을 것 있고 신체 멀쩡한데 왜 죽지요? 그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지금 우리가 어떤 식으로 어떤 바탕, 어떤 정신으로 살아가는지 논리를 형성할 수 있어요. 도대체 이 자존심이 진리입니까? 자존심은 누구한테 진리냐 하면, 자존심은 주체적 통일성, 정신적 통일성을 자존심이라 해요. 이 통일성을 이 세상 환경이 도와줍니까, 방행합니까? 해운대 앞에 파도치는 것이 내 자존심을 도와줍니까, 방해할 수 있어요? 이 세상에 해가 뜨고 달이 지는 모든 것이 내 자존심을 위한 활동입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왜 우리는 억지를 부립니까? 세상은 내 자존심을 키워준다고 그렇게 고집을 부리고 억지를 부리는 이유가 뭐예요? 그 이유를 아십니까? 모르죠. 그래서 인간은 도대체 나를 이렇게 망가뜨리고 죽게 하는 그 이유에 대해서 모르는 거예요. 모르기 때문에 시편 18편 성경이 있는 겁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자존심 세우면서 살아가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또 자존심 있게 되면 긴장상태에 들어가요. 바짝 자존심 지키기 위해서 조심하게 됩니다. 여기 마스크 있는데 차에서 남들 다 마스크 쓰는데 혼자 답답하다고 벗어버렸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이 가만있어요. 그럼 아직 내 자존심 유지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오지랖 넓은 한 사람이 와서 당신 때문에 우리 다 죽이려고 하느냐, 우리 또 경찰 조사받아야 돼, 이렇게 했을 때는 옳고 그름이 아니에요.

자존심의 특징은 진리가 아니고, 네가 뭔데 내 것 건드리느냐? 이 문제에요. 모든 사람의 보편적 진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인간은 보편적 진리 아는 맛에 사는 것 아니에요. 자존심 하나 지키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을 누가 그렇게 시키던가요?

시편 18편 17절 봅시다.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이게 하나님의 자존심을 지키는 환경, 하나님이 주체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든 주체자를 이 땅에 보낸 거예요. 장차오실 예수님이고 여기서는 선지자 또는 다윗이 되겠지요. 보냈을 때에 거기에 무슨 단어가 나오느냐? 원수가 나오지요. 하나님께서 다윗에 성신을 보내서 장차 하나님이 하실 계획을 미리 알려줬습니다. 그러자 다윗을 건드리는 사람들의 많이 나타났어요.

시편 18편 1절 앞에 어떤 말이 나와 있지요.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그 다음에 뭡니까? “모든 원수”지요. 하나님께서 원수를 창조하는 거예요. 인간은 지금 내 원수가 누군지 무지한 상태, 모르고 있는 상태라니까. 내가 왜 내 자존심을 위해 사는지 그걸 모르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모르지, 모르지, 알려줘, 해서 하나님의 성신을 다윗한테 보냅니다.

그러면 다윗이라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된 주체를 품고 있는 자가 등장해요. 다윗이. 그것이 언약 사람, 그러니까 다윗은 노아, 아브라함, 이삭, 그런 계통이에요. 그 사람들은 전부 다 옆집에 하나님이 이사 온 사람들이에요. 옆집이 아니라 아예 자기 속에. 그러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자기 마음대로 아담대로 못 살고 악마가 사주한 대로 못 살고 옆에 있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사는 특이한 사람, 언약 맨인데 그 사람이 시편 18편에서 다윗이죠.

다윗 앞에 누가 등장합니까? 다윗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원수가 곧 누구의 원수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를 알리기 위해서 다윗의 원수를 만들었는데 그 원수의 이름이 나와 있지요. 원수 이름이 사울로 돼있지요. 짝을 맞추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대전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사울 없는 다윗 없고, 다윗 없는 사울 없다고요. 이게 장갑의 짝처럼 붙어있어야 돼요.

나 예수 믿습니다. 그런데 악마는 안 믿습니다. 이건 말이 안 되지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악마를 믿는 게 되는 거예요. “목사님, 제가 예수도 믿고 악마도 믿습니다.” 그럼 제가 질문하지요. “악마가 누굽니까?” 악마가 누구냐고 할 때 악마를 단독적으로 설명하면 안 되고요. 반드시 예수님이 하신 일과 결부시켜야 돼요. 예수님의 십자가 효과를 모독한 게 악마입니다. 악마는 예수님과 결부돼있어요. 악마는 우리의 친구니까 악마는 인간 편에서 일하거든요.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 힘에 종속돼있어요,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누구 지배 아래 있습니까? 이 세상 신 아래 있다고 돼있거든요. 에베소서 2장 초반에 보면 나와요. 우리는 이 세상 신에 지배받고 있다. 사울이 사도 되기 전에도 마찬가지고요. 악마에 의해서 지배받고 있는 인간들이 자기가 주체니까, 정신적 주인공이니까 안에 없음이 아니고 있음으로 꽉 차있는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악마의 모습은 가장 악마 아닌 모습이 되겠지요. 왜냐하면 악마의 사주를 받고 만들어낸 악마의 이미지니까 악마와 가장 안 닮은 악마가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요한복음 7장(마태복음 12장)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율법을 위반한 너는 마귀다. 너는 귀신의 오야봉이다. 예수님 보고 바리새인이 그렇게 한 거예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그렇게 평했다는 말은, 평소에 예수님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들을 날렸다는 것이 드러나죠. 예수님의 평소에 모든 말씀과 행위는 인간모독입니다. 인간의 자존심을 공격하는 거예요.

공격하니까 인간은 이유도 모른 체 뭘 위해 살아간다? 자존심, 자존감으로 살지요. 공격 이유도 몰라요. 내가 왜 내 자존심 지키기 위해서 자살까지 하는지 내가 왜 그런 인간이 됐는지 몰라요. 남들 다 그러니까 물어볼 수도 없어요. 다들 그렇게 사니까. 예수님이 모든 말씀이 내 자존심을 건드리니까 여기서 방어체제가 가동되어서 공격하겠지요. 그러면 그 순간 예수님의 원수임이 발각되는 겁니다.

시편 18편 17절에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원수 앞에 ‘강한’이란 말을 했지요. 아주 강렬해요. 강렬하다는 말은 평소에 하나님의 신이 오지 아니하면 우린 이길 수 없다는. 악을 이길 수가 없어요. 우리한테는 일종에 원수라는 게 없어요. 원수 없는 세계, 인간세계는 원수가 없어요. 일시적인 원수는 있지만 영원한 원수는 없어요. 지금의 원수도 나중에 동지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원래 정치판이 그렇잖아요.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단독으로 달렸습니까? 그때 십자가가 총 3개였지요. 예수님은 가운데 있었지요. 가운데 있으면서 둘 중 누가 구원받았는지는 성경에 안 나오니까 모르겠고요, 구원받은 강도에게 적이 누굽니까? 구원 안 받은 강도에요. 십자가에 의미는 그거거든요. 원수를 만드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 원수가 평소에 같은 강도라면 동지가 되지 원수가 아닌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한쪽에만 주님이 사랑을 베푸니까 저쪽은 자동적으로, 자동적입니다. 자동적으로 저쪽은 예수님한테 사람을 못 받은 자가 되지요. 사랑을 못 받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에 미운 자가 돼버려요. 예수님이라는 주체에 의해서 새롭게 형성된 의미의 시스템입니다. 의미의 구조에요. 그 의미는 예수님을 박아 넣어야 의미가 해석이 되지 예수님 빼놓고 우리가 알아서 해석하면 전혀 해석이 안 되는 것이 성경 전체에요. 성경 모든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박아 넣지 않으면 해석이 전혀 안 돼요. 십자가 빠져버리면 뭐로 활용되느냐? 내 자존심 키우는 용도로 성경이 활용되게 돼요. “주여, 저도 십사만 사천에 넣어주세요.” 이런 식으로 말이죠. 십자가를 박아 넣어야 해요. 이게 하나님의 계획이니까. 지금까지 여러분들의 너무 잘 아는 표정들이기 때문에 그 다음 진도 나가겠습니다.

그린다고 육체로 생각하지 마시고 주체를 정신적인 통일체, 이 주체에 하나님이 관여하게 되면 이 주체의 주인공이 뭐가 되느냐 하면, 말씀이 돼요. 계시가 돼버립니다. 그러면 나의 신체+주체는 하나님 말씀을 둘러싼 껍질, 껍데기가 되지요. 껍데기가 자살할 권한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이 안에서 주님께서 주신 말씀만 활성화되면 그만이지 내가 왜 껍데기 됩니까? 이것은 공백, 빈자리에 말씀이 와서 채워지는 거예요. 시편 18편이 이 안에 채워져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내가 어떤 행동할까, 뭘 할까 하는 것은 말씀으로 오신 주님의 지시가 있어야 돼요. 내가 진라면 끓일까요, 신라면 끓일까요, 안성탕면 할까요? 지시받고 하세요. 왼발부터 나갈까요, 오른발부터 나갈까요? 지시받고 하세요, 그냥. 그럼 지시가 없으면 어떻게 되느냐? 지시가 없으면 이건 꽉 차있기 때문에 이상하게 자존심으로 꽉 차있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신라면, 진라면 중에서 어느 것이 내 자존심에 도움이 될까? 결국 자존심에 도움 되는 쪽으로 행동하게 돼있단 말이죠.

마스크 써라, 마라가 아닙니다. 지시에 의해서 쓸 때 있고 뺄 때 있고. 낄끼빠빠라 합니까?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고. 이걸 남들 그대로 해도 성도는 누구 지시받고 하는 거예요? 주님의 지시받고 그대로 하란 말이죠. 교회 오든 말든 그건 주님 지시받고 하란 말이죠. 본인이 알아서 할 때 본인이 뭡니까? 지 자존심 문제에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자존심은 뭐와 관련돼있다? 지연된 자살이죠. 나 이것 안 되면 죽어버린다. 맨날 죽어버린데. 그리고 살아있을 때에는 자존심 키우기 위해서 허겁지겁 인공지능 장착된 그 로봇이 다 깨진 로봇이 본인의 자존심에 합치되는 통일적인 주인공, 주체를 만들기 위해서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고. 돈 좀 있으니까 골프 취미 들이고. 남들 하는 해운대 앞바다에 요트 사서 다녀봐? 그런 식으로. 이 나이에 트로트 연습해서 미스터트롯에 나가 봐?

이런 식으로 계속 파편화된 욕망의 대상들을 긁어모아서 그 욕망으로 괜찮게 하나로 구성된 그래서 내 자존심을 키우는 방향으로 인간은 행동하게 돼있단 말이죠. 뭐가 없으면? 주님의 지시가 없으면. 그 사람에게 왜 지시 안 받고 혼자 합니까, 하면 하나님이 cctv로 확인 안 됐으니까 없다고 보니까 내 마음대로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건 인정하는데 하나님이 실제로 이 땅에서 일한다는 것은 cctv에 안 찍히니까 실존성이 없으니까 하나님은 알아서 하시고 실존적으론 나밖에 없으니까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죽고 싶을 때 죽는 거예요. 입주민한테 나이 젊은 놈한테 욕 얻어먹었다고 자존심 상했다고 죽어버린 거예요. 그 모습이나 아직 안 죽고 있는 우리 모습이나 둘 다 똑같아요. 자존심 하나에 목숨 걸고 살아가는 모양새는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4.♡.134.72) 20-05-13 11:05 
20200511b 부산강의 : [시편]28(18편)-주체 창조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진리가 아니고 주님의 육체가 진리가 되겠지요. 여기서 신체라 하지 않고 육체라고 제가 표현했거든요. 방금 주체라 해놓고는 첫째 시간에는, 이제 신체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신체에서 그 다음에 주체로 나가는 거예요. 그럼 여기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계시와 말씀, 같은 말이에요. 계시와 말씀과 예언이 들어가는 겁니다.

다윗의 움직임은 본인도 의아해. 자기가 골리앗을 이기고, 자기가 골리앗과 한 판 붙자고 약속했습니까? 없었지요. 주어진 상황 자체가 본인 뜻이 아니고 자꾸 뭔가 주께서 몰아서 형성시키는 느낌이 강해요. 다윗의 신체는, 소년 다윗이죠. 소년 다윗인데 주체는 뭡니까? 이번 전쟁은, 사무엘상 17장에 나의 전쟁 아니고 무슨 전쟁? 하나님의 전쟁으로 돼있어요.

그러면 전쟁은 골리앗으로 끝났느냐? 아니에요. 골리앗 쪽에서 새로운 적이 연쇄고리처럼 따라 나옵니다. 골리앗이 적이었다가 골리앗 이겼다고 끝난 게 아니고 여기에 누가 등장하느냐? 사울, 그것도 왕이에요. 사울 왕이 등장합니다. 왕이 적이에요. 사울+왕이죠. 왕은 권세를 갖고 있어요. 권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소규모 국가를 무대로 만들어서 그걸 나중에 전체 인류사로 확장시켜버립니다.

이미 권세자가 상주하고 있어요. 사울 왕. 사울이 아니고 사울+왕. 왕이 있다는 것은 통치체제 도는 통치구조가 형성돼있는 거예요. 권력을 한 자로 하면 power힘이 있는 거예요. 그럼 힘에 대해서 다윗 말고, 일반인들은 전부 다 신체를 갖고 있지요. 강의하면서 이해됐는지 자꾸 물어봅니다. 각자 신체를 갖고 있는데 이 신체를 누구의 지시받고 움직입니까? 누가 이 신체를 움직입니까? 선풍기 옮겨볼까, 한 번 써볼까? 이것 누구 지시받고 움직이죠? 본인이죠.

본인인데 여러분들이 화이트보드 하지 말고 뒤에 흑판 합시다, 라고 나왔을 때 그렇게 할까요, 흑판 바꿀까요? 나왔을 때 이게 힘이에요. 힘이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신체는 보이지요. 신체는 보이는데 보이지 않는 힘이 오지요. 정신적 힘이거든요. 정신적 힘은 뭐로 짜여있냐 하면, 이게 언어로 짜여있어요.

언어란 가갸거겨 그것만 언어가 아니고 흠, 때찌, 아무 소리 안 하고 손짓, 발짓도 언어라니까요. 군에서 유격훈련 받는데 조교들이, “죽어도 좋습니까?” 언어에요, 명령이에요. 그 명령을 확장시켜보면 표정이 되고, 표정이 나오는 인간의 의사를 한 곳에 집결하는 곳이 신체 중에 얼굴입니다. 얼굴에서 표정이 나오지만 표정과 얼굴은 계속 붙어있는 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었는데 그 사람을 못 만났다. 그 사람의 사진은 있다. 그러면 사진 보면 만났을 때의 희열과 기쁨이 백프로 그대로 다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그게 신기합니다. 해운대 앞 백사장에 어떤 여자가 보고 싶어서 얼굴을 그리는 거예요. 눈 그리고 코 그리고 입 그리고 심지어 점 하나까지 그렸는데 그 사람 살아납니까? 그건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인간은 하질 못해요. 인간의 표정은 왜 그렇게 안 살아나는가?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이런 게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 내가 주인공이니까 내가 주체가 될 때는 내가 생각한 그 사람이 현장에 나타나면 그때 참 좋았던 시절 그대로 여기서 재현, 다시 표현해줄 줄 알았는데 모든 주어진 감정이나 기쁨은 내가 여기에 존재가 등장함으로서 교류하면서 만들어져요.

우리는 생각하기를 내가 없어도 그 사람은 그 미소, 모나리자 같은 웃음, 예쁨을 유지할지 알지만 내가 그 기억 속에서 아름답게 느껴졌던 것은 그 현장에 누가 있었기 때문에? 그걸 바라보는 내가 현장에 있기 때문에 그런 표정이 나왔거든요. 내가 만약에 현장에 없거나 그때 그 시절 얼굴이 아니고 70 가까이 된 늙어빠진 얼굴로 40년 전에 헤어진 첫사랑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이 경악스러울 수도 있어요.

그때 그 모습 그대로 곱게 늙었구나, 이런 멘트 준비하고 갔는데 현장에선 당황해서 커피 쏟고 커피 값은 내가 낼 게, 하고 갈 수 있단 말이죠. 왜냐하면 나만 상대방을 보는 게 아니고 상대방도 나를 보면서 같이 형성된 거예요. 이걸 변수라 합니다. 그 변수가 한둘이 아니에요. 그때 그것이 그대로 재현 안 돼요. 변수가 무한변수에요. 똑같이 동일하게 재현불가입니다.

방금 길게 이야기한 이걸 한 마디로 하면, 주체는 환경이 만들어내고 환경이 조성한 거예요. 이미 인간은 환경 속에 있습니다. 내가 있고 환경이 있는 게 아니고 내가 환경을 조작해내는 게 아니고 이미 우리는 원치 않는 환경 속에 태어났어요. 환경, 변수, 무한변수, 내가 다룰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화투를 칠 때는 내가 임의로 그 환경을 조장해내요. 돈 딸 때 나는 단풍 두 개 쥐고 돈 땄다. 그러면 그 다음 순번에서 화투 나눠 줄 때 뭐만 찾으면 돼요? 단풍 두 개만 있으면 또 딸 수 있는 거예요. 괜찮았던 기억이 다시 현실로 내가 만들어낼 수 있어요. 그럼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창조주가 되지요. 그때 좋았던 창조되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도박판에서 발을 못 빼는 거예요. 돈 딸 때 만유의 주가 되었던 그 기쁨을 내가 발을 뺄 수가 없는 겁니다.

젊은 목사가 목회 자리를 받았는데 교인 수가 오백 명 교회 갔다. 교회에선 호주 유학파라고 기대하지요. 그런데 온지 한 달도 안 되어서 사백오십 명 빠졌으면 설교할 마음 들겠습니까? 안 들지요. 내가 학원을 하는데 200명 됐다. 그런데 신종코로나 때문에 세 명 남았다. 학원 할 마음 안 들지요. 서너 살 때 아이를 내 마음대로 했다. 치마 입히고 바지 입히고. 그런데 그 애가 열두 살 되니 천하에 말썽꾸러기다. 방문 닫고 노크해도 열어주지도 않는다.

그럴 때 갑자기 속상하지요. 변수가 달라졌어요. 자꾸 아이한테 전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왜 안 그러냐고 닦달내지요. 보통 시간을 T라 하지요. 시간변수가 내가 기대하는 기대치를 벗어나서 완전히 혼란에 빠뜨리는 겁니다. 그건 내 입장에서 혼란하지 이런 상황이 좋은 다른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는 거예요.

세상이 내 뜻대로 고집부리면 안 되는 이유가 많은 변수, 무한의 변수 중에서 내가 관리하는 게 25개라면, 25개 빼고 나머지 무한이 25개를 침노하고 완전히 폭파시키면 우리는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거죠. 그럼 무엇을 오히려 고맙고 감사해야 되느냐 하면, 내 뜻대로 되는 이게 신기해야 됩니다.

제가 어떤 사람 글에 이런 댓글을 달았어요. 신앙의 느낌은 뭐냐? 모든 매사에 대해서 의아해하는 것이다. 당연한 게 아니고 의아해하는 거예요. 의아해하면 감사가 나오지요. 당연하면 감사, 고마움이 안 나오는 거예요. 내가 팔이 움직여서 밥을 먹다니 이상하다. 팔이 왜 움직이지? 이걸 의아해할 때 그 폭만큼 감사가 나오게 돼있어요. 주여, 팔을 움직여줘서 감사합니다. 이게 신앙이에요.

신앙은 항상 뺄셈이에요. 자기 자신의 기대치와 예상을 그 현장에서 삭제, 빼버리는 겁니다. 나 이것 되기를 원해요. 나에게 이런 소망이 있어요. 주여, 꼭 해주세요. 이걸 다 빼는 거예요. 지워버리는 겁니다. 그럼 감사할 거리만 남아있지요. 주님 저한테 이런 은혜를 왜 주십니까. 그래서 의아해함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의아함은 계속 의아함을 낳는다고 돼있어요. 계속해서 감사의 생활이 이어지는 겁니다. 신앙의 모습이죠.

의아해야 되는데 여기서 당연함이 등장하면 의아함이 다 깨지고 원망과 불평이 나오겠지요. 주여, 왜 내 뜻대로 안 해줍니까, 이렇게 되지요. 그럼 주님은, 이 변수가 무한 변수다. 네가 25개의 변수를 생각해서 이쯤 되면 내가 만족하는 기뻐할 상황이 올 것이라고 내가 숫자 25개밖에 생각 안 났는데 변수가 몇 개라 했습니까? 무한이죠. 어떤 상황이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여기서 무한변수를 누가 주관합니까? 주체가 따로 있는 거예요. 우린 뭘 고집했느냐? 내가 나의 주인공, 주체자라고 돼있던 겁니다. 이 안에서 뭐가 벌어졌는가? 전쟁이 벌어졌어요. 감사가 없이 전쟁이 벌어진 거예요.

25절 봅시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이게 참 이상한 말이에요. 왜냐하면 자비한 자는 이미 자비를 알고 있기 때문에 자비하다는 칭호를 받지요. 자비를 모르고 있는 게 아니고 이미 자비를 품고 있기 때문에 자비한 자가 된단 말이죠. 그런데 이미 자비를 갖고 있는데 새삼스럽게 주의 자비를 드러낸다는 거예요. 이게 말이 돼요? 자비를 모르면 몰라도 알고 있는데 새삼스럽게 알 필요 없는데, “자비하심을 나타내시고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이게 바로 오늘 제목, 주체의 창조와 관련돼있는 말씀입니다.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차원을 둘로 나누자. 인간들의 볼 수 있는 차원. 인간들의 볼 수 있는 차원이니까 주체가 아니고 여기 신체가 있겠지요. 신체니까 얼굴에 눈이 박혀있겠지요. 눈이 하는 일이 뭡니까? 저기 누가 존재함을 보겠지요. 그들이 보는 앞에 어떤 신체가 보이는 거예요. 그냥 신체에요. 자기들이 사람이라면 저 사람도 사람 같아. 사람 눈에 사람이 나타난 겁니다. 이게 신체지요.

주체는 뭐냐 하면, 신체 안에 담긴 내용물이 되겠습니다. 이 내용물을 주님은 다른 차원이니까 위에는 차원에서 하나님이 예언과 말씀과 하나님의 계시를 여기다 다윗에게 줘버린 거예요. 줘버리면 일반인 보기에 저 사람은 보통 사람이 돼버려요. 그런데 주님께서 일반인처럼 보이느냐? 네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아니야. 그 사람 속에서 완전과 온전함과 자비하심이 현재 방출하고 있고 표출하고 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럼 이 사람은 뭐가 되느냐? 하나님 마음에 드는 주체의 창조가 되는 겁니다. 지상이란 환경과 하늘이란 환경을 분리시켜 보면 이 말씀이 이해되죠. 그럼 그 뒤에 있는 말씀, 26절 봅시다.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이제 이해되시죠. 어떤 자도 깨끗한 자가 없는데, 다윗도 깨끗한 게 아니에요. 하지만 깨끗하지 않는 다윗 속에서 깨끗함이 나오는 거예요.

그건 뭐냐 하면, 주님께서 다윗에게 무엇을 계속 공급해주고 있는 겁니까? 주님의 말씀과 예언과 계시를 공급해주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깨끗함은 다윗과 하나님의 일방적 깨끗함이지 세상사람 보기에는 뭡니까? 특이하지요. 왜냐하면 인간들은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깨끗하다고 자부하고 싶은 자기가 주체가 주인공 되고 싶은 조건을 따로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딸기밭에 가본 적 있어요? 딸기밭에서 해야 할 일이 뭡니까? 딸기 따먹는 거죠. 그게 에덴동산이에요. 에덴동산의 특징은 따먹어라. 따먹는 동산이죠. 딸기밭에서 딸기를 따먹는다. 그러면 말 바꾸겠습니다. 신종코로나 있는 킹클럽에서 해야 될 일은 뭡니까? 신종콜로나 따먹는 일이죠. 마스크 벗고 춤추고 있단 말이죠. 이태원에 신종코로나 범람한, 동성애자들이 많이 간다는 소문이 있는 그 클럽.

창세기 2장에서 낙원에서는 딸기밭처럼 따먹으면 되지요. 그러나 창세기 2장에서 3장으로 넘어가게 되면 에덴동산은 무슨 동산이 됩니까? 완전히 저주가 작렬하기 때문에 주께서 쫓아내버리죠. 죽어도 그냥 죽지 말고 저 밑에 내려가서 땅을 갈고 죽으라고 하잖아요. 그럼 이 세상, 에덴동산이 아닌 입장에서 우리가 신종코로나 바이러스가 오게 되면 그냥 받아야 될 입장이에요. 그러니까 무한변수, 환경이에요.

신종코로나 바이러스는 뭐냐 하면, 나노(십억 분의 일) 크기의 공격용 드론입니다. 공격용이란 말은 누가 공격했다는 뜻이겠어요? 하나님이 공격했지요. 하나님이 나노 크기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공격용 드론을 띄워서 이건 너무 작기 때문에 우리 몸의 세포를 공격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걸 뭐로 막습니까? 마스크로 막지요.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스크로 하면 우리가 살았다고 돼있지요. 하지만 우리는 뭘 모르느냐 하면, 누가 왜 저를 향하여 공격하십니까? 공격의 주체와 공격의 의도와 공격의 목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공격하는 이유는 인간구조가 허술하다, 또는 허망하다, 허황되다는 것을 말씀에 입각해서 폭로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입각해서 신종코로나를 집어넣은 거예요.

우리가 마스크로 되는 게 아니고 마스크 쓰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합니까? 주님께서 다른 변종 바이러스로 또 공격하겠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의 신체는 하나님 보시기에 그 신체로는 천국에 들어간다, 못 들어간다? 들어갈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가 주님의 뜻을 알고 있으면 그게 온전함이 돼요. 같이 신종코로나, 사실 우리는 신종코로나 이전에 죽음의 확진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가 안 죽는다고 여긴 것은 이걸 무증상 확진자기 때문에 안 죽는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신종코로나가 옴으로써 이게 서서히 무증상이 아니고 뭐로 바뀌느냐 하면, 증상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똑같이 죽을 신체로 태어났다면, 성도를 왜 이 땅에 살게 하느냐? 그건 뭘 보여주기 위해서입니까? 죽어가면서도 온전함을 보이면 되잖아요. 그렇지요. 다윗이 의인이 아니에요. 다윗도 죄인이에요. 죄인이지만 뭐가 나온다? 주님의 온전함이 나오고 놀라운 사실은 주님의 자비하심이 나온다는 것. 다윗이 간음했지요, 다윗이 살인했지요, 거기다가 다윗이 또 자기 죄를 감추려고 했지요. 그리고 자기 아들 하나 교육 못했잖아요. 압살롬이 반란할 빌미를 줬잖아요.

다윗은 자기가 다룰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제대로 못해요. 못하는데 다윗에게 자비하심이 나오지요. 그러면 그게 언약 사람이란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성도라면 뭐가 나와야 됩니까? 주님의 자비하심이 나오면 되고, 그 자비하심이 온전함이에요. 우리 속에서 다 이루었다함 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 주위에 하나님의 원수들로 가득 차 있음이 드디어 우리 신체의 눈은 모르지만 우리의 주체 마음으로서는 발견할 수 있는 겁니다. 저 사람이 바로 성경 시편에서 말하는 원수고 악인이라는 게 나온다니까요. 악인이라고 나쁜 마음만 먹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복음에 대해서 아무 감각이 없는 사람, 복음에 대해서 죽을 사람을 말합니다.

제가 어제 오후에서 그런 이야기했지만 쿡 쑤시면 말이 나오는 인형 있지요. 알라브유, 알라브유. 그러면 성도라면 쿡 쑤시면 뭐가 나와야 돼요? 십자가, 십자가. 왜냐하면 그게 온전함이기 때문에, 그게 자비하심이기 때문에. 놀라운 사실은 강도도, 강도에요. 기생 라합도 기생이에요.

강도나 기생이나 공통점이 뭐냐? 전부 다 주님의 자비하심의 신호가 되는 삶을 살았다는, 증표가 된다는 겁니다. 어떠한 변수가 있더라도 그 인형이 화장실이나 식당이나 목욕탕이나 그건 문제되지 않아요. 누르기만 하면 뭐가 나와요? 알라브유. 다윗은 누르기만 하면 주의 자비하심과 용서하심이 나와요.

아까 이야기한 것 해봅시다. 감사가 어디서 나온다고 했지요? 의아함. 내가 왜 예수를 믿지? 이상해. 이건 내 의도가 아니고 내가 원하는 바도 아니야. 내가 원하는 것은 훌륭한 남들에게 칭찬받는 신앙이라고 그게 내 주체의 욕망이었어. 하지만 남이 욕하든 욕해도 괜찮습니다. 본인이 알아요. 내가 보기에 내가 의아해요. 이건 어떻게 남한테 설명할 수가 없네.

본인이 하루하루 사는 게 기적 같아요. 안 믿어도 되는데 예수를 왜 믿느냐? 내가 믿고 싶은 것은 이용할만한 예수를 믿는 것이 나의 타고난 죄의 본성에 맞아요. 나한테 도움 되는 하나님, 나한테 유리한 하나님, 날 천당 보내는 하나님이 내가 골라잡을 수 있는 내가 선호하는 예수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가 아니고 의아한 예수, 의아함으로 다가오는 예수, 이거는 내 의도가 아니고 성령의 임재함이에요. 다윗이 성령 받은 것처럼 똑같은 현상을 우리가 보이는 겁니다. 주여, 제가 왜 이렇게 주님의 사람이 되었습니까? 이건 제가 예상 못한 겁니다. 의아합니다. 주님께서 니 구원받으려고? 아니에요. 내가 너를 말씀의 사람으로 쓰시려고 하는 겁니다.

온전함과 자비로움과 그 뒤에 26절에 뭡니까? 누가 사특한지 누가 악한지 그 다음에 교만 나오지요. 누가 교만한지 그것을 알려주는 말씀이 주체자 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는 의아함 다른 말로 생소함 또는 낯섦, 이러한 현상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예를 들어봅시다. 이런 의아함으로 연속되는 어떤 성도가 취직을 하려고 합니다. 면접 보면서 인사 관계자가 지난 회사에서 월 이백 받았는데 우리 회사는 형편이 안 좋아서 반 토막 난 월 백 줍니다. 그래도 우리 회사 취직할 마음 있습니까, 라고 물을 때 에이, 나도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백 받고 갑니까? 전처럼 이백 받아야 되겠습니다, 라는 말을 할까요, 아니면 그냥 일 시켜주시는 것만 해도 고맙다고 들어가야 될까요? 재수 없네. 잘못 걸렸네. 이런 생각하면서 어떻게 해야 될까요?

기본은 주님의 지시고요. 두 번째, 그 지시에 따라서 왜 이런 환경을 주셨느냐? 다시 말해서 나 같은 죄인에게 네 노동력을 사고 싶다는 회사가 등장한 자체가 본인은 뭐로 봐야 합니까? 의아함으로 받아들여야 돼요. 내 자존심이 있지. 이게 아니고, 계산하는 게 아니고 그 환경 자체가 주께서 무한변수 중 일부가 되는 거예요. 왜 그래야 됩니까? 그래야 감사가 상실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백만 원이라도 저한텐 고맙지요. 저 같은 걸 누가 받아준다고. 하고 있는데 문자 떴어. 다른 데서 삼백 준대. 어떻게 할까요? 백만 원 주는데 갈까요, 삼백 주는데 갈까요? 삼백 주는데 가야지요. 왜? 그것도 의아함이거든요. 나한테 삼백 주는 데가 다 있다니. 그러니까 이건 적어도 내 수준에 이백 정도는 돼야지. 이게 아니라 나라는 것을 내가 규정한다, 안 한다? 내가 규정하는 게 아니고 의아함으로 살아 계신 주님의 활동으로 자기를 규정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이게 어렵습니까, 자연스럽습니까? 자연스럽지요, 자연스럽지요. 자연스런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죽어야 되거든요. 죽었는데 살아 있다는 자체가 의아함의 시작이 되니까 살아있으면 이 구경, 저 구경할 수 있잖아요. 백만 원짜리 회사 구경도 할 수 있고 삼백만 원 주는 그 회사도 구경할 수 있단 말이죠. 어차피 죽은 귀신이기 때문에. 이미 죽었다가 살아난 귀신이 무슨 구경인들 못할까.

괜찮은 자식만 있을 필요 없어요. 애 먹이는 자식도 괜찮은 구경거리에요. 괜찮은 구경거리는 아니구나. 속상할 구경거리는 아니구나. 하여튼 그것도 의아함으로 초월해야 돼요. 그래야 감사가 나타나야 되니까. 세상 탓하지 마세요. 세상 지옥인 것은 기정사실이죠. 지옥에서도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게 시편 18편에 나옵니다.

18편 19절에 구원이란 말이 나오고요. 여기서 23절에,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 지금 다윗의 주변 환경이 지옥이에요. 죄악입니다. 모든 힘센 악들, 사울 왕이 통치권을 발휘하고 있는 환경이에요. 그 속에서 내가 주님의 자비하심과 온전함을 보여준다는 것은 기적에 속하는 일이에요. 하나님이 내 속에서 작용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다윗 자체가 말씀이 주체고요. 다윗이 하는 행동 자체가 오늘날 시편 18편이라는 계시로 이렇게 정리된 겁니다.

여기서 세상의 원수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봅시다. 여기 26절에,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인간의 윤리도덕이 신종코로나 바이러스를 이기게 했습니까, 못 이겼습니까? 간단하지요. 답변은 둘 중에 하나니까. 신종코로나가 이겼습니까, 못 이겼습니까? 인간의 윤리도덕이. 착하게 살면 바이러스가 겁나서 물러갑니까? 안 물러가지요. 그래서 인간의 윤리도덕은 아무 의미 없어요. 신종코로나 앞에 아무 의미 없다고요.

같은 말로 화산 터졌는데 믿음으로 불을 이길 수 있습니까? 아무 소용없어요. 다니엘 세 친구가 불 속에 들어간 것은 세 친구가 사전에 연습한 게 아니에요. 우리가 왜 자꾸 연습하느냐 하면, 미리 예상해서 예방적 차원에서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꾸 예방해요. 백신 없나, 면역체계 없나. 예방하는 이유가 뭡니까? 내 것이니까 내가 지키겠다는 거예요. 우리 마을은 누가 지킵니까? 향토예비군이 지키잖아요. 꼭 내가 향토예비군 된 것 같아.

그 향토예비군 되는 방법이 뭐냐? 착하게 살면 방어가 잘 되고, 악하게 살면 내 인생 조져논다. 그러니까 바르게 살 이유가 예방적 차원에서 수세, 수비적 차원에서 내가 바르게 살고 믿음대로 살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윤리도덕이고 자기 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무한변수의 환경은 우리의 윤리도덕이 아무짝에도 소용없다고 까발리는 식으로 우리에게 와버리는 겁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만약에 나의 행실과 선함과 윤리도덕으로 방어가 가능하다면 인간이 자기 존재하고 살아있다는 공로를 누구한테 돌리겠습니까? 나의 성실함과 나의 노력함과 나의 지혜 있음과 나의 착함과 나의 부지런함과 세상을 보는 아주 빠짐이 없는 촘촘하게 보는 혜안, 또는 지혜, 진리를 꿰뚫어보는 나의 통찰력, 여기에다 자기 공로를 돌리죠.

성경공부 오고 교회 예배하면서 사람들의 얻고자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천국 가고 세상 읽을 수 있는 아이디어나 정보 확보, 지식확보 차원에서 오게 되지요. 모임이란 게 중요해요. 사람은 모임을 생각할 때 여기 몇 사람이 있는가? 점심 먹으러 가는데 어느 식당갈까? 사람들 줄 서 있다. 그런데 갈까요. 맛 집 몇 사람이 있다 할 때 이걸 헤아림이라 하거든요.

이건 어디서 했느냐 하면, [역사검열]이란 제목 하에 수련회에서 했잖아요. 지난겨울에 대전에서 에스더 했지요. 거기 나와요. 헤아린다. 또는 셈한다. 하나둘 셈한다. 이건 누굴 빠트린 거예요? 그렇지요. 본인의 존재를 빠트리고 본인이 다른 사람을 대상화시키는 겁니다. 대상화시키면 본인이 객관이라는 것은 사실은 객관이 아니고 본인의 주관이 돼버려요. 이게 바로 교만입니다.

옆집에 하나님이 이사 왔다 했지요. 그럴 때 뭐가 위축됩니까? 나의 주관이 바람 빠진 테니스공처럼 쭈그러드는 거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님 오고 난 뒤에 내 인생이 위축된다는 거예요. 인생 앞에 뭘 붙입니까? ‘나’를 붙여요. 내 인생이다. 내 신체고, 내 몸이다. 자꾸 나를 갖다 붙이는 거예요. 그러면 이건 사특한 것이 되고 교만이 돼버려요.

신종코로나가 누굴 공격하느냐? 나를 공격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켁켁거리고 내가 아프지요. 그러면 신종코로나가 나에게는 악마가 돼버린다고요. 신종코로나로 공격하는 분이 누구라 했습니까, 신종코로나 보낸 분이 누구라 했습니까? 주님이 나의 원수가 돼버리는 거예요. 내 휴대폰에 동영상 하나 저장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세 살 먹은 딸아이가 기도하는데 이런 내용이 나와요. 말도 잘 못해요. “하나님, 지금 악마가 돌아다녀요. 세균이 돌아다녀요. 악마를 물리쳐주세요.” 이건 말로 해선 잘 안 되는데……

악마를 물리쳐주세요. 누가 가르쳐준 게 아니에요. 교회도 못 갔어요. 빨리 교회 가게 해주세요. 신종코로나를 악마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거는 헤아림입니다. 자기가 주체가 되는 거예요. 주관이 되는 겁니다. 남들은 대상이 되고 객체가 돼버려요. 이것은 바로 모든 것이 자기 중심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대결구조를 형성해요.

마지막 어려운 건데 잘 들으셔야 돼요. 대결구조라 했지요. 나 중심의 구조와 주님 중심의 구조가 있습니다. 제가 구조, 시스템을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세계가 신체는 누가 봐도 멀쩡하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신세계는 구조화된 거예요. 어떻게 구조화되느냐 하면, 여기다가 가치 중심으로 또는 가치에 의한 구분으로 구조화돼있어요. 선과 악으로 구분돼있습니다. 인간의 구조화가.

선은 필히 누가 반드시 속한 거예요? 내 주관이 여기 속하고, 악은 내가 대상화할 때 악하다고 한 사람들, 그리고 선한 사람은 내가 헤아려서 뽑으면 되니까, 선택해서 하면 되니까. 인간의 정신구조는 선과 악으로 돼있어요. 선과 악으로 구조화됐기 때문에 이 말 잘 들어야 돼요. 선으로 따로 뽑을 수 없어요. 그럼 구조가 안 돼요.

구조란 반드시 틀이 형성돼있단 말이죠. 선이 있고 악이 있는 거예요. 선이 있는 곳에 악이 반드시 있고 악이 있는 곳에 반드시 나를 선으로 규정하기 위한 악이 되는 겁니다. 저놈 악해, 라는 말은 그걸 같은 말로, 나는 역시 선하게 살기 잘했어. 이렇게 된다 말이죠. 저놈은 지옥 가. 나는 천국 가. 이게 구조화돼있어요. 이 구조와 구조의 대결구조에요.

다윗의 특징은 지금 하나님이 함께 있는 겁니다. 다윗의 구조는 수평적 구조가 아니고 주님과 함께 연결돼있어요. 그런데 이쪽 세상구조는 이렇게 돼있거든요. 수평적으로 내가 선하면 저게 악이 되고, 내가 잘될 경우에 선하다는 조건이 되는 겁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굳이 해야 되느냐 하면, 나와 네가 싸우는 게 아니에요. 너의 구조와 나의 구조가 싸우는 거예요. 그렇게 돼야 선악체제와 관련성 있는 해명이 되는 겁니다.

잘 이해가 안 되시는 것 같은데 그럼 제가 하나 물어볼게요. 가난한 것과 누추한 것의 차이점이 뭐지요? 오늘 차이점을 많이 묻는데 답 들어보면 의외로 간단해요. 가난은 못 살아도 깨끗하게 사는 것, 청소하며 사는 게 가난이고, 누추함은 가난하기도 하지만 지저분하게 사는 것. 가난은 돈이 없을 뿐이지 때가 안 묻은 것, 정신 바짝 차리고 사는 것. 누추함은 때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것.

그래서 가난해도 이게 선이 될 수 있지만 누추한 것은 어떻게 해도 악이 되는 겁니다. 환경이 지금 돈이 얼마냐가 아니라 선이냐, 악이냐 둘 중에 하나의 구조에다 전부 다 모든 것을 집어넣어서 서랍정리를 하는 거예요. 여기는 선, 이건 악. 그런데 이게 수시로 바뀌어요. 자기가 선이기 때문에. 선악, 선악, 인간구조가 이 구조 밖에 없는 겁니다.

왜 이야길 하느냐? 이 구조에 다윗이 들어옵니다. 다윗에게 이런 구조를 하늘에 계신 주님이 말씀이 허용 안 해요. 왜냐하면 선악과 말고 다른 나무가 있지요. 무슨 나무입니까? 생명나무지요. 생명나무 구조를 가져오기 때문에 선악구조와 안 맞아요. 오게 되면 타인들이 다윗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 선악 구조적으로 해석해버려요.

다윗이나 사울 왕에 있어서 또는 바리새인에게 예수님이나 다윗은 어디에 속했느냐 하면, 선에 속하지 않고 악에 속하는 겁니다. 이럴 때 제가 다윗 이야기하고 사울 이야기하고 예수님 이야기했지요. 그러면 우리 이야기해봅시다. 우리는 뭐가 있다? 선악구조가 있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예수님은 착한 분이니까 선에다 집어넣고 싶지요. 이게 바로 교만한 겁니다.

이래선 안 된다는 거예요. 나와 함께 계시면 안 돼요. 왜냐하면 구조 없이 몸으로 달랑 몸과 부딪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가치체제와 우리의 가치체제가 달라요.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일단 어디로 가야 하냐 하면, 주님께서 우리 속에 계시기 위해서 선악구조를 부수겠지요. 부술 때 우리는 반항이 일어나는 겁니다. 순서를 정해볼게요. 말로 하면 복잡하니까.

①나는 주인공이다. 주체다. 두 번째, 주님이 우리한테 들어온 거예요. ②주님을 내 안에 모신다. 그런데 모심으로써 내 구조가 십자가로 인하여 부정되지요. 나는 나 혼자 주님 말씀대로 잘하면 되는데 뭐가 문제냐 하면, 나는 혼자 있는 게 아니고 구조로 돼있기 때문에 나의 선함을 주께서 용서를 안 하지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거죠. 그래서 여기서 주체변동이 일어나는 거죠. 세 번째를 말씀드립니다. ③변동된 주체의 확장이에요. 아까 이야기한 의아함이 계속해서 이어져가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뭐라 생각하느냐 하면 어디서 멈추느냐 하면, 내가 주인공이었는데 주님 오셔서 주님이 주인공 되고 나는 주님 앞에 죄인이다. 여기서 멈춰버려요. 이것은 결국 그렇게 한국교회는 자기 구원만 이야기하고 구원론만 주장한다고 욕하지만 막상 본인도 무엇에 멈추었습니까? 나는 복음으로 구원받았다. -끝-

지 얻을 것 다 얻었다 이 말이거든요. 예수님께 은근히 노린 것 다 얻어 챙겼으니까 이제는 아쉬운 게 없다는 거예요. 주님께 감사하겠습니다. 이렇게 끝나버려요. 나를 구원했으니까 감사하다는 거예요. 참석 안 한 사람보고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이 말 자체가 또 은근히 압력이 된다.

뭐냐 하면, 이게 주체가 확장하는 거예요. 중요한 게 또 마지막에 등장하네. 내가 움직이면 내 상황은 안 움직입니다. 내가 안 움직이면 주변 상황이 움직여요. 집에서 자가 격리하고 있으니까 세상 사람들 많이 움직이죠. 내가 집에 있을 때는 신종코로나가 신경 쓰이죠. 뉴스에서 계속 이야기하니까. 나이트클럽 가지 말라고 하니까. 나는 가만있는데 저쪽에서 움직이죠.

그런데 만약에 내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뭘 해야 돼요? 장례 치러야 되겠지요. 그럼 누가 움직여요? 지가 가만있으면 장례됩니까? 장례식장 알아봐야 되고 알려줘야 되지요. 부조금은 그냥 계좌로 받겠습니다. 연락해줘야 되지요. 와봐야 점심 10분 이내로 먹고 가야 됩니다. 본인이 움직이니까 뭐가 안 움직여요? 신종코로나라는 게 머리 들어옵니까? 안 들어오지요. 지금 우리 엄마 장례 치르는 판인데 신종코로나 뉴스가 머리에 안 들어온다니까요.

태극기 부대 참석한 사람들의 누군데요, 젊은 사람들이에요, 노인네들이에요? 노인네들이잖아요. 할 짓 없으니까 정치 게임하는 겁니다. 사람이 내가 구원받았어요. 구원받고 움직여버리면 그동안 주님이 주신 무한의 변수가 갑자기 스톱이 돼버리고 죽어버린 거예요. 구원 다 받았는데 하나님 왜 찾는데? 나 하고 싶은 대로 살지, 뭐. 십자가 피 믿었으니까 용서받았고. 놀러 갈 것 다 놀고 할 거야. 자기 마음대로 사는 거예요.

그럼 뭐가 안 되냐 하면, 구원론 중심이 아니라고 백날 본인 입으로 그렇게 해놓고 결국 속마음은 뭡니까? “목사님, 저는 십자가로 구원받았어요.” 이게 일번에서 이번으로 끝나버렸어요. 삼번은 뭡니까? 삼번은 새로운 주체의 움직임, 확장의 의미가 없어져버려요. 주께 쓰이질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주님 앞에 뭘 할까를 본인이 결정해버리면, “하나 안 하나 삼백만 원짜리 가나 백만 원짜리 가나 구원받았는데 이 땅에 살면서 일하고 월급이나 받지.” 이렇게 돼버려요. 그런데 주님의 구원 작업은 계속해서 주님의 지시에 따르는 거예요. 왜냐하면 새로운 주님의 말씀이 주체를 주께서는 움직여 나가는 겁니다.

움직여 나간다고 해서 밖에서 활동하는 것만 말하는 게 아니고 집에 있어도 날마다 주님의 지시를 받고 내가 움직인다, 주님이 움직인다? 주님이 움직여서 오늘은 내가 쉬어야겠다. 오늘은 하루 종일 누워 자야겠다. 이것도 주님의 지시받고 숙제 받고 움직이세요. 그게 뭐냐? 지금 주께서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온전함과 그리고 자비하심을 확장시키는 주님의 전도방법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구원받았다고 그걸로 족하다고 주저앉을 것이 아니라 아예 애초부터 내 일은 없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그러한 도구에 불과한 것을 감사하게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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