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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3 16:05:45 조회 : 260         
침묵의 소리 시편 19:2 200713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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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19.♡.174.196) 20-07-15 15:59 
20200713a 부산강의 : [시편]30(19편)-침묵의 소리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19편 해봅시다. 1절에서 4절까지 보게 되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이게 상당히 신비로운 이야기를 하면서 유대인이나 이스라엘이나 오늘날 성도한테 뭘 요구하느냐 하면, 언어의 원천, 소리의 원천까지 파악이 돼야 된다는 겁니다. 지금 다윗의 신앙과 동질의 신앙을 갖고 있다면 언어나 소리, 그것이 어디서부터 출발했는지까지 간파하고 팍악하고 있어야 하나님의 영광을 접했다고 할 수 있다고 되는 겁니다.

이 대목만 보면 원어연구나 히브리어, 헬라어 연구해서 주의 나라에 도달할 수 없지요. 왜? 언어 이전까지 들어가야 되니까. 그 언어 이전을 오늘 시편 19편에선 뭐로 보느냐 하면, 언어 이전에 소리라 했고 소리 이전에 들리지 않는 소리, 그러니까 사운드, 소리란 우리 귀에 뭔가 감각적으로 박혀 음파가 임해야 이걸 소리라고 시작이 되거든요.

소리는 말이죠. 말이 있고 그 다음에 언어가 되는데 소리, 언어까지는 인간들이 간파가 되는 세계에요. 간파가 되면 연구하고 분석하겠지요. 그게 아니고 이게 더 나갑니다. 소리는 소린데 들리지 않는 소리, 이것까지 파악하고 있어야 된다. 다윗이 쓴 글이거든요. 그래야 다윗의 신앙에 합치된다, 일치된다, 부합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여러분이 알았으니까 그 다음에 쉬운 게 뭐냐 하면, 들리는 소리와 언어가 있으면 여기서 이게 작용해요. 내가 한다=내가 할 수 있다, 같은 말입니다. 내가 안 할 수 있다. 이 둘(‘내가 할 수 있다’와 ‘내가 안 할 수 있다’)을 합쳐버리면, 내가 하는 것은 내가 하고 내가 안 하는 것은 안 한다고 내가 결정할 수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 믿는 것 내가 한다. 부처를 안 믿는 것 내가 안 할 수 있다. 예수 믿고 안 믿고는 어디서 결정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속해버리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신앙입니까?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하면서 하세요, 하세요, 순종하세요, 행하세요, 행함이거든요. 행함은 어디까지 호소하고 있는 겁니까? 눈에 보이는 언어와 소리로 마감이 되지요.

이게 바리새인들이 한 거예요. 사두개인들, 서기관들이 이것까지 한 거예요.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께서 율법을 줬다. 율법을 준 것을 우리는 모세로부터 전수받았다. 그러면 율법은 뭐냐 하면, 내가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하고, 내가 하지 않겠다는 것 또는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안 하면, 안 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접합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다.

이게 바리새인들의 주장인데 시편 19편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소리로서 시작되는 게 아니고 그전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했다는 거예요. 궁창이 그 하는 일을 드러냈다는 거예요. 온 세상에, 이걸 보통 과학에서는 (대)자연이라고 하는데, 자연이란 말은 옛날 고대철학에서 나온 말이에요. 옛날 철학은 과학과 동일했습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과학이 철학이었어요. 그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은……

적어볼게요. 과학이란 뭐냐 하면, 세상에 있는 변화에서 질서를 뽑아내는 것을 과학이라 합니다. 제가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요. 어떤 사람이 남편에게 교회 가자 하니까 하는 말이, “이 과학시대에 아직도 성경 믿나?” 그렇게 나왔답니다. 남편이 아니고 자기 아버지. 자기 아버지가 이 과학시대에 아직도 성경 믿나. 성경은 비과학적인데, 이렇게 했어요.

그분이 이걸 알아야 돼요. 그분이 앞에 있다면 진짜 설명해드리겠는데요. 과학이란 이게 철학이에요. 옛날 고대철학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과학이 들어온 것이 19세기에 들어왔지요. 1800년대. 그전까지는 드문드문 들어왔지요. 청나라나 유학 갔다 온 사람들이 들여온 것이 성리학과 안 맞는다고 얼마나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까.

과학이란 변화에서 질서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모든 변화를 끄집어낸 질서 속에 다 담아낼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지요. 남겨두는 게 있어요. 남겨두는 게 더 많지요. 남겨두면서 이것은 필요하다해서 질서를 만들자. 그 필요한 것이 누구를 위한 필요함일까요? 인간을 위해서 필요하죠. 그래서 철학과 과학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인간을 위해서, 오직 인간을 위해서. 이걸 좀 자세히 하면, 인간의 생존을 위하여.

모든 세상의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게 인간의 목표가 아니죠.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 나오니까 어떻습니까? 뭘 위해서 연구합니까? 백신이나 치료제 이런 것, 뭘 위해서 연구합니까? 인간을 위해서지요. 인간의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세계, 그 세계가 바로 과학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과학은 종교에요. 과학은 믿음을 요구하는 겁니다. 무슨 믿음? 우리는 인간은 인간이 알아서 살지 않으면 인간은 못 산다. 이게 과학종교의 교리입니다.

그럼 과학종교에서 뭐가 빠지느냐 하면, 인간은 죽고 난 뒤에 어떻게 되고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 우주는 왜 태어났는지에 대해서 과학종교에서는 내용에 포함이 안 되는 겁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이 사람은 지금 지옥 간다는 거예요. 거기 제단에 성경책 없지요. 지옥 간 거예요. 이 세상이 무슨 종교라 했습니까? 과학종교에서는 이걸 차단시키는 거예요.

사람이 죽어서 지옥 가고 천국 간다는 것은 어디서 이야기합니까? 이것은 오직 교회에서만 이야기해요. 천주교는 거의 불교니까. 천주교는 불교라고 보면 돼요. 불교니까 이야기할 것 없고. 죽어서 확실히 천국 가고 확실히 지옥 간다는 것은 교회에서만 이야기하는 겁니다(교회를 좋게 보고 이야기할 때). 그럼 지는 죽지도 않고 지는 뭐 만들지도 않았는데 무슨 근거에 의해서, 인간의 과학종교에서는 죽고 난 뒤에는 몰라요. 모르는 것이 전부 다 마땅하다고 된 거예요.

그러나 교회는 뭘 근거로 해서 안다고 하면서 죽으면 지옥 가고 예수 믿는 사람은 천국 간다고 우기느냐? 이게 바로 시편 19편 들리지 않는 소리가 인물로 등장했다면, 보이는 인간들로만 구성된 이 소리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소리가 여기에 섞여 들어온 바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 예수님 계시고 사람들 있다면 바리새인, 사두개인들 있다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을 열두 제자나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었게요, 못 알아들었게요? 분명히 인간의 소리로, 그 당시 아람어로 분명히 예수님은 발언을 했어요. 발언을 했는데 열두 제자부터해서 그 사람들이 알아먹지를 못하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 다 아시는 내용인데요. 마태복음 5장 29절에 보면,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그 다음에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라고 돼있다고요. 이게 왼쪽이 아니고 오른쪽인지를 이해하려면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하나님 만나고 씨름했다는 것을 아시죠.

그리고 하나님과 무슨 일이 있고 난 뒤에 헤어졌습니다. 천사는 가고 야곱은 야곱대로 갔을 때에 야곱에게 남은 게 뭘까요? 뭔가 남은 데 있는데? 헤어지고 난 뒤에 야곱의 몸에 뭔가 변화가 생겼어요. 야곱이 절었지요. 왜 절었느냐 하면, 분명히 이겼는데 자기는 환도뼈를 다쳤어요. 이건 뭐냐 하면, 남성의 힘, 인간이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 작살난 겁니다. 여기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왜 오른 눈, 오른손이냐 하면, 오른손이란 힘이 나오는 인간이 스스로 설 수 있는 출처가 되는 곳이 오른쪽이에요.

출애굽기 15장에도 있지요. 하나님께서 오른손의 능력으로. 오른손의 능력, 그 점을 설명하겠습니다. 오른손의 능력이란 하나님과 인간, 그러니까 선과 악이 서로가 서로에게 복사판이 돼요. 성경을 보게 되면 이게 참 희한한 이야기에요. 복사판이란 분명히 똑같은데 의미가 다른 것, 선과 악이 복사판이란 것은 선 속에 악이 있고 악에서 선이 나오는 것. 항상 하나님께서 지상에서 일을 할 때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그것은 그대로 자기 것으로 가져오고 그것으로 하나님 자신의 뜻을 설명해나갑니다.

인간은 하늘을 향하여 신을 향하여 올라가지요. 또는 하나님을 향하여. 그런데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반대방향입니다.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야곱도 마찬가지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로 세 명의 천사가 찾아왔지요. 하나님 쪽에서 가만있지 않고 인간세계에 찾아와요. 찾아와서 아브라함에게 떡을 얻어먹고 마실 걸 얻어먹어요.

인간이 귀하다가 아니라 인간 것으로 하나님 것을 표현하는 겁니다. 표현, 표현.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지만 물어봅시다. 작곡자와 가수 가운데 어느 쪽 표현자입니까? 가수지요. 작곡자는 자기가 작곡해놓고 가수에게 불러보라 해놓고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이 대목에서는 피치를 올려야 돼, 라고 자꾸 독촉하지요. 표현을 제대로 해야 된다고.

이것을 쉽게 예를 들면, 성도는 주님의 마스크가 아니고 장갑이에요. 손가락 다 끼는 거예요. 안에서 움직이면 같이 움직이는 겁니다. 이걸 제대로 안 해주면 주께서는 실망스럽지요. 마스크는 벗으면 그만이지만 장갑은 끼면 벗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도들이 본인이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 인생이 있는데 누가 다룬다? 주님이 내 인생이라는 표현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표현에 나선 거예요. 사도를 통해서.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은 시시해요. 그냥 보통 인간이에요. 어떤 사람은 안질이 생겼다 하는데 사탄이 집어넣어준 병이 있어서 몸도 골골거리고 그래요. 이건 다른 사람 보기에 죽기 살기로 미친 듯이 복음 전합니다. 하지만 그건 껍질이고 껍데기거든요. 장갑 껍데기 벗으면 사도 바울 안에 누가 있습니까?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거예요. 이걸 인간이 아는 소리와 인간이 아는 들리는 언어로 설명할 때 인간들은 자기 위주기 때문에 이걸 제대로 설명 못하지요.

여기서 성령이 임해야 된다는 거예요. 여기서 열두 사도나 주님의 성도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더 이상 나를 위한 종교는 나한테 있어서는 안 된다. 나를 위한 어떤 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 어제 낮 설교처럼 내게 유익되는 것은 다 주님 앞에 해가 된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내가 유익되는 것은 주님에게 큰 증오를 유발하는 거예요. 증오의 집합이 지옥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내게 유익된다는 말은 나를 위해서. 이것을 누가 충족하려 하느냐? 바로 오늘날 과학이 충족케 주겠다는 겁니다.

오른손의 능력이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뜻을 펼칠 때 인간들이 힘 쓴 대목이 왼손보다 오른손에서 주로 한다는 것을 감안하셔서 이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신 거예요. 능력이 있는 것.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오른손을 잘라라, 오른 눈을 빼버리라는 것은 예수님의 요구에 대해서 우리 자신이 스스로 생존하고 스스로 살려고 하는 모든 것은 예수님의 율법을 이룰 수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다시 소리에서 언어가 됐습니다. 소리는 말이죠. 말 그 다음에 언어, 이것까지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겁니다. 인간이 할 수 있다는 것부터 말씀드릴게요.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할 때는 인간이 할 수 있다는 요소가 계속 여기서 스며들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진짜 영광이 아니고 이게 조작된 영광이죠. 인간의 자기 부인이 자기 부정이 담겨있지 않는 조작된 신의 영광이 돼버리면 그 다음부터 자기가 부정되지 않은 상태기 때문에 나를 위한 하나님이라는 우상 공식이 여기서 계속 유지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라 하는 것은, 지금까지 한 걸 요약하면, 내가 한다가 성립되지 않아요. 내가 손자 키운다, 이런 것은 성립되지 않아요. 내가 하는 게 아니에요. 맡겨 준 것이지. 항상 어떤 일을 하던 내가 하는 아니라는 것을 계속해서 주어진 일을, 그 주어진 일의 목적이 뭐냐? 나를 부정하고 부인하는 그러한 기능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거예요. 내가 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내가 한다고 하면 될 것 아니냐. 내가 하게 되면 결국 아까 이야기한 철학이고 과학이 되거든요. 그래서 이 세계는 소리와 언어만 있는 세계, 들리지 않는 소리가 빠져버린 이 세계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문명화된 세계로 인하여 생명이 없다. 생명을 잃었다 또는 생명이 없는 거예요. 이 세상이 너무 문명화됐어요.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고. 문명이란 것이 현대문명도 되겠지만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고 여기 다윗시대도 마찬가지고. 문명화된다는 것이 인간에게는 필요하지만 무엇을 잃어버립니까? 생명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누가복음 19장 40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인간의 말을 사용하면서 주께서 하신 말씀이,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여기 소리 나오지요. 돌이 평소에 소리 지릅니까? 돌은 소리 지를 줄 모른다. 돌은 소리 지를 구강구조가 안 돼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인간들의 과학적 인식이에요.

언어와 소리 이 범주 내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고 우리가 아는 소리 범주 내에서는 문명이 이뤄질 것이고 그 문명이 내린 결론은 돌은 절대로 소리 지를지 않을 것이란 거예요. 그러니까 돌이 아브라함 자손 될 리는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의 상식과 합리적 이치에 어긋난다는 거예요.

그것은 더 나가면 이 세상은 불로써 멸망될 리 없다. 사람은 죽어도 지옥 안 간다. 여러 가지 파생된 결론들의 마구마구 쏟아져 나올 거예요. 그 모든 이야기가 뭐냐 하면,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그러니까 제발 말씀 들고 내 일에 간섭 좀 하지 마라. 난 간섭하면 짜증난다. 그런 거죠.

지금까지 쉬운 거고 이제부터 어려운 것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어려운 것 하겠습니다. 인간세계는 어떻게 구성되느냐 하면, 이원세계에요. 원리가 둘로 갈라졌다. 땅과 하늘, 선과 악, 모두 이원세계에요. 이원세계니까 인간들이 사는 이걸 땅, 지상이라 하고 저 위에 있는 것을 천상이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이원세계를 이용하시는 거예요.

이용하시면서 하나님께선 이원세계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이런 세계로 통합시켜버립니다. (2)을 1로 바꿔버려요. 둘로 갈라진 것을 하나의 세계로 통합시켜버리는 겁니다. 들리는 소리와 보이는 언어로만 구성된 이원세계, 사람들은 들리는 소리+보이는 언어, 이 세계 말고 다른 세계 천국의 세계를 상상하거든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고 그 당시 다윗도 마찬가지고 바리새인도 마찬가지에요.

우리 지상에는 인간이 살고 하늘에는 하나님이 산다. 이게 굉장히 옳아 보이지요. 그런데 이게 벌써 무슨 세계입니까? 이원세계라니까요. 지상은 더럽고 하늘은 깨끗하고, 이런 세계. 인간으로선 들리는 소리 없어도 얼른 착안하고 이렇게 구성할 수 있어요. 죽어서 천국 가고 하늘로 올라간다. 이런 것. 그런데 요한복음 12장 보면 예수님도 인간의 그런 구조를 이용했어요. 내가 하늘로 올라간다. 이런 게 있단 말이죠.

그런데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여기에 들리지 않는 소리를 포함시켜버리면 이원세계가 이 간격이 없어지고 모두가 일원세계로 통합이 돼버려요. 하나의 세계로. 그 방법은 뭐냐? 들리지 않는 소리로 오신 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재편성하면 되니까, 구성하면 되니까.

이원세계를 일원세계로 바꾸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런 것도 있나 하는데 신약에 오면 성령 안에서 성도는 어디 가있느냐 하면, 성도는 이미 일원세계가 되고 말았어요. 내가 주 안에 주가 내 안에. 이런 세계, 아버지 안에 하나가 돼버린 거예요. 하나 밖에 없는 1, 일원세계의 특징은 더 이상 고민할 건더기가 없다는 거예요.

이원세계에 살던 나를 죽여서 주님께서 성령으로 일원세계로 집어넣었기 때문에 하나로 통합된 세계에서는 죽는 것조차도 이미 과거완료가 돼버려요. 이미 죽었고, 가 됐기 때문에 새삼 내가 겪을 일이 아닌 거예요. 숨을 끊어지겠지만 죽음은 아닌 거예요. 생명이니까.

그러나 아까 이야기했지만 문명의 세계에서는 뭐가 없다 했습니까? 생명이 없지요. 생명이 없다는 것은 곧 죽음의 세계에요. 문명의 세계는 그것이 곧 죽음이라는 사실을 일원세계에 계셨던 예수님이 인간세계에 대해서 그렇게 통보를 해주셨던 겁니다. 너희는 이미 죽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죽었어. 죽었다는 소리, 죽었다는 그것을 받아들이면 되는데 기어이 살려고 하거든요.

로마서 10장 18절 누가 읽어보세요.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ㅇ)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보세요. 우리가 봤던 시편 19편과 똑같지요. 시편 19편의 보이지 않는 소리가 결국은 유일한 현실이 된다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소리를 기초로 한 그 결과물이 마지막에 우리에게 덮친다는 겁니다.

이원세계 속에 일원세계가 복음이란 이름으로 온 땅에 퍼져버리면 이원세계는 일원세계로 통합이 돼버리는 겁니다. 그 복음 안의 내용은 주인공이 있어요. 어떤 인물이죠. 누굽니까? 예수님이 죽었다고 부활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고 곧 새로운 현실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 요건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입장에서 해야 될 것은 주님이 주신 그 십자가 부활의 요건으로 현재 내가 갖고 있는 문명화된 이 세계에서 나의 속 내용을 바꿔치기, 교체를 해야 되지요. 이것보다 중요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이원세계에 살고 있는, 2 이원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로 하여금 1이 되려면 우리 안에 있는 내용을, 2의 세계에 살던 방식을 1의 세계의 삶의 방식으로 바꿔줘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강의한 걸 정리하게 되면, 이원세계에서 인간은 뭘 사용하느냐 하면, 들리는 소리 그리고 보이는 언어를 통해서 질서잡기에 나섰고, 이 질서잡기 오늘날 문명화됐다 했지요. 질서를 잡을 때 여기에 개입되는 작용, 동기부여는 뭐냐 하면, ‘나를 위하여’에요. 나의 목숨을 위하여, 나의 자존심을 위하여, 나의 명예를 위하여. 나를 위해서 변화 속에서 질서를 잡았지요.

그러면 예를 들어서 예수님께서 천국 있고 지옥이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 졌다 할 때에 이게 들리는 소리와 보이는 성경문자니까 언어로 왔을 때 내가 여기에 마중을 나가요. 천국이 있으니까 예수 믿어야 되겠고 예수의 피로 용서받아야 되겠고 그러면 나는 천국 간다, 라고 했을 때 이게 일원세계일까요, 이원세계일까요? 1일까요, 2일까요? 여전히 2가 되는 겁니다.

도중에 뭐가 바뀌어야 되느냐 하면, 나를 위해서가 바뀌어야 되거든요. 그럼 내가 살아 있는 한 절대로 나를 위해서가 포기를 못하게 되죠. 내가 살아 있는 한. 내가 살아 있는 게 맞잖아. 거울을 보자. 내가 살아 있잖아. 그러면 거울 안 보고 내가 살아 있는지 아는 방법은 뭡니까? 그거는 꼬집어보면 알지. 이것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철학자들이었어요.

내가 꼬집어서 아픈 것이 실제로 아픈 것인지 꿈속에서 아픈 것인지 그걸 분간할 수 있는 기준이 없다는 거예요. 장자가 그랬지요.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을 때 꿈속의 나비인가, 실제로 나비인가, 아니면 꿈의 꿈속에서 실은 내가 나비가 아니고 인간이라고 그렇게 우긴 건지 그걸 판정할 수 있는 기준이 없다는 거예요. 어떤 누구도 결정적 판정이 없다. 왜냐하면 어떤 누구도 영원한 꿈속에서 벗어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나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낮에 내가 내 팔뚝 꼬집으니까, 아야, 아픈 걸 보니까 내가 살아 있구나, 라고 했는데 팔뚝을 꼬집은 경험으로 인하여 밤에 똑같은 꿈을 꿨다면 그 꿈은 실제일까요, 꿈일까요? 그러니까 꿈이냐 아니냐는 것은 영원한 꿈에서 벗어나는 경우에만 국한돼요. 지난 꿈은 마지막 꿈이다. 지난 꿈은 종강이다. 끝났어, 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꿈속에서도 마지막 꿈이라는 소리를 천 번이나 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철학이, 철학이나 과학이나 같은 겁니다. 자연 속에서 나를 위해서 질서 잡는 것. 계속해서 이원세계니까 천국이 있는 거예요. 천국이 있으니까 지상에서 천국까지 사다리나 계단을 놓는 거예요. 조금씩 접근해가면 손에 닿지 않겠는가. 이게 바벨탑의식입니다. 제가 이 글을 적어볼게요.

조금 먼 것과 크게 먼 것과 다릅니까, 안 다릅니까? 이게 다를 바가 없어요. 왜? 그 대상이 지금은 여기 없다는 점은 마찬가지니까. 거의 손에 잡힌다. 마찬가지에요. 여전히 내 영역에 없기는 마찬가지인 거예요. 그래서 주일에 이야기했지만 어떤 사람이 노래 부르기를, 계단 말고 엘리베이터. 엘리베이터가 내려와서 예수 안에서 타고 올라갈 때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조금 먼 것도 아니고 크게 먼 것도 아니고 아주 먼 것도 아니고 지금 어떻게 돼요? 지금 더불어 함께가 되지요.

사도 바울에서 이 둘을 구분하는 게 중요해요. 주와 함께 있음과 믿음을 구분해야 돼요. 믿음은 혼자 나오는 게 아닙니다. 반드시 행함과 대비해요. 믿음이라 할 때는 행함을 전제로 해서 하는 겁니다. 하늘과 땅이 둘로 나눠졌다는 이원세계에서 하늘나라 가려면 그 당시 사람들은 행함으로 그것도 하나님 주신 율법을 행함으로 간다, 라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래서 행함은 뭐냐? 조금씩, 조금씩 행해서 접근해 간다. 물론 천사처럼은 못하겠지만 최선의 노력을 하면 거의 손에 닿을 만큼 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 그 당시 유대인들이 인간들 본성이란 말이죠. 그런데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는 말이 행함이 아니고 뭡니까? 믿음이다. ‘믿음+행함’이 아니고 믿음에서 어디로? 믿음에서 계속 믿음으로. 믿음에서 행함으로 마감되는 게 아니고 믿음에서 믿음으로, 에요.

이 경우는 뭐냐 하면, 지상에서 이원세계에서 천국 가려면 어떻게 하느냐, 그 논의에선 믿음이 나오지만 사도 바울이 정작 싶은 것은, 일원세계에서는 주님과 어떻게 함께 있는가? 나 믿습니다, 란 말 하지 말라는 거예요. 뭘 하느냐? 함께 있는 거예요. 함께 있으면 믿습니다가 오히려 어색해.

여러분, 갑자가 집사님 부인에게, “나는 널 믿습니다.” 하면 “생뚱맞기는. 안 하던 짓을 하네.” 이렇게 되지요. “무슨 나쁜 짓했나.” “나는 널 믿습니다. 당신을 믿어요.” “좀 수상한데? 뭔 일 있었어? 갑자기 안 하던 짓을 과도하게 하냐.” 이렇게 되지요.

함께 있을 때는 믿는다는 말이 필요 없다기보다는 그게 수상해요. 믿는다는 말은 또 다시 계단 밟는 거예요. 믿어야 되는데 간접적 우회적 표현이에요. 안 믿어지는데 믿어야 천당 간다하나 믿어지진 않고 용을 써볼까, 이럴 때 믿씁니다, 하는 거예요. 이게 본인이 스스로 자기 언어로 자신이 믿음 없음을 티를 내버린 거예요.

함께 있어서 코로나 걸리나, 함께 있어서 죽거나, 함께 있어서 어떤 일이 나거나 그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죠. 벌써 강의 초반에 한 걸 또 하려하니 뭐 하다 만은, 강의 초반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절대로 인간이 행한다는 것은 어디서 행한다? 인간에게 들리는 소리와 보이는 언어가 있을 때 뭐가 작용한다? 내가 행한다가 되지요. 그런데 시편 19편에서 보이지 않는 소리 세계에서는 내가 행했습니다가 부정당하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한 마디로 총 정리하면 뭐냐? 이렇게 돼요. 이제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어요. 나의 자연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꽃들과 나무들과 이미 인간에게는 들리지 않는 자기들끼리의 소리를 계속 외치고 있었던 거예요. 인간만 따로 놀고 있었던 겁니다. 잘난 척하면서. 인간은 거기에 끼어들지 못했어요. 그래놓고 욕할 때는 개를 보고 욕한다고. 오죽했으면 시편에서는 인간이 벌레보다 못하다고 합니까.

인간이 벌레보다 못하고 구더기 같은 인간이라고 하는 이유는, 인간이 여전히 꿈속에 갇혀있기 때문에. 이 꿈은 악마 집어넣은 세상의 한계를 꿈으로 꿈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같은 꿈을 꿔도 요셉의 꿈은 어떻습니까? 바로 꿈속에서 벗어난 꿈이잖아요. 요셉이 꿈을 꾸므로 요셉의 꿈은 현실이 되었지요.

이 말은 뭐냐? 꿈꾸지 않은 열한 형제와 꿈꾸지 않은 아버지, 어머니와 바로 왕은 나름대로의 꿈속에 있는 거예요. 꿈과 꿈이에요. 하나는 실현되는 꿈과 하나는 실현되지 않는 개꿈의 차이를 요셉의 꿈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 박원순은 평생을 꿈속에 살았어요. 이제 죽었으니 알겠지요. 이게 지옥이라는 것.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을 훑을 때 꿈속의 인간들 예수님 말을 알아먹지를 못했어요. 그게 꿈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든 것을 요셉의 꿈이라 봐요. 그러면 요셉 빼놓고 예수님 빼놓고 나머진 뭐냐? 현실이라 우겼지만 예수님 보기에는 가짜 꿈속에 있는 겁니다.

사도행전 2장 다른 분이 읽어보세요. 17절부터 몇 절 길게 읽어보세요.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보세요. 이 세상 용어로 주님께서 설명한다 했지요.

이 세상에서는 주님의 복음의 세계가 그들에게는 뭐로 이해될 것이다? 꿈으로 이해되는 거예요. 환상으로. 그러니까 성령 받은 사람을 정상으로 보지 않고 비정상으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이 말은 성령 받은 입장에서는 뭡니까? 그들이 비정상인 것을 모르고 있는 거예요. 마치 꿈처럼. 어느 쪽이 환상이고 어느 쪽이 꿈이고, 꿈, 환상, 예언이란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면서 그 단어를 바라보는 것이 서로 다른 자기 입장에서 볼 수 있는 그러한 시대가 오는 겁니다.

이러한 인간세계의 다툼에 대해서 대자연은 뭐라고 하겠어요? 싱긋이 웃겠지요. 우리는 일찍부터 이미 시편 19편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었어요. 인간에겐 들리지 않지만, 다윗에겐 들리지 않지만 그들 나름대로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했지요. 그러니까 자연은 무엇의 전달자에요. 보이지 않는 소리, 하나님의 뜻 전달자가 자연이었던 겁니다. 전달자에요.

그러면 인간이 자연화 된다는 말은 우리가 자연의 일부로 섞여 들어간다는 말은, 우리는 무엇의 전달자? 주님의 복음의 전달자. 그걸 사도행전 2장에서는 환상, 예언, 꿈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마치 우리를 요셉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요셉도 꿈꿔놓고 딴 게 아니에요. 요셉도 난감했어요. 왜 갈수록 일이 꼬이냐 말이죠.

그걸 시편 105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요셉을 팬다, 또는 연단시킨다, 단단하게 한다. 요셉아 울어라. 울어야지. 그래야 나를 위해서가 깨어지겠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내 인생이 있다는 것을 깨기 위해서는 요셉으로 하여금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지요. 내 팔자 왜 이러냐, 그렇게 되겠지요.

사도행전 4장 19절도 마찬가지인데 이건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속한 처지가 이렇습니다.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18절) 요즘 상황과 어찌 똑같은지. 예수 이름으로. 다시 말해서 세상은 교회가 필요하다, 안 필요하다? 세상은 전혀 교회가 필요하지 않아요. 이 점을 이번 일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해줘야 돼요.

세상은 교회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문명화된 세계를 원해요. 인간의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세계만 그들에게 필요하다고 이구동성으로 이미 합의가 끝난 상태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있더라도 친목단체로 끝내라. 낚시회, 등산모임, 댄스클럽 그리고 맛 집으로 끝내란 말이죠. 전혀 필요 없다는 게 아니고 필요하지요. 댄스 해야 되지 않습니까, 살 빼려면. 하지만 교회는 고 정도에요.

과학이란 종교 안에서 교회는 이미 미신화 했지만 미신도 때로는 마음 약할 때 필요하다고 봐줄게. 봐주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교인과 교회가 그걸 동조하고 있다는 문제가 돼요. 동조한 거예요. 예수님과 하나님은 누굴 위해서 있다? 나를 위해서 있다. 나를 위해서 있음을 포기 못하니까 나를 위해서 모든 게 있다는 그 생각이나 교회 문 닫으라는 그 생각이나 다를 바가 없네. 똑같아요. 사고방식이. 교회고 절이고 나를 위해서 있다. 이걸 유지하고 있는 한 그들의 조치에 대해서 반박할 수 없지요.

그러면 남자가 남자, 여자가 여자를 사랑한다. 이것 누굴 위해서예요? 본인을 위해서 하는 거죠. 죽은 서울시장 입장은 이렇습니다. 너 인형 갖고 놀래, 축구하고 놀래? 넌 남자인데 인형 갖고 노느냐? 이것은 옛날 세대에 있었던 하나의 이념이라면 지금은 남자애라도 인형 갖고 놀 수 있고 여자애라도 축구공 갖고 놀 수 있다. 여자가 축구로 축제하고 남자가 인형 갖고 축제하는데 퀴어축제, 동성애축제 아닙니까. 그걸 왜 같은 인간인데 같은 인간이 만들었다는 국가가 본인 취미가 그렇다는데 그 축제를 막을 명분이 없다. 축제 열어라.

그 뜻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교회는 입 다물라는 뜻이에요. 왜 필요 없는 것들이 말을 하느냐. 다시 말해서 박원순 입장에서는 내가 교회를 아는데 교회는 놀러가는 거고 너희들 마음 위로 달래는 것인데 교회 다니나마나 마찬가지로 나를 위해서 천당 가겠다는데, 그거나 교회 안 가서 나를 위해서 하겠다는 것과 차이점이 없잖아. 없는 이상은 그냥 친목단체 아니냐.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면 이렇게 돼있어요. 19절에,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베드로가 참 겁도 없어.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 말 듣는 것과 사람 말 듣는 것과 어느 것이 옳은지 물은 거예요. 어느 것이 옳아요?

이 말을 잘 들어야 돼요. 나를 위해서 살 것이냐, 나를 포기하며 살 것이냐, 어느 것이 옳으냐? 똑같은 거예요. 왜냐하면 베드로와 요한의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누구기 때문에?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 이야기합니까? 그 당시 여호와 믿는 유대인에게 유대인 지도자에게 이야기하거든요.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에게 죽임을 당했어요. 불신자에게 죽임을 당하고 박원순한테 죽임을 당한 것과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주님께서 죽임을 당했는데 성령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만 부활한 게 아니에요. 성령 있는 사람은 세상이 그를 입 다물라고 죽였는데 성령은 무슨 영입니까? 부활의 영이죠. 부활의 영이 어떤 사람에게 임해버리면 밟아도 하는 말이 하는 사람 말 안 듣고 하나님 말 들을래, 라는 말을 계속해서 쏟아내고 있다는 그걸 보여주는 거예요.

이게 안 밟히면 몰라요. 그런데 밟았는데 이게 안 죽네. 왜? 속에 성령이 있어서. 대표적인 사람이 스데반 집사 아닙니까. 스데반 집사 이야기,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 집사에게 돌 던질 때 유대인들이 이를 갈았다고 했어요. 스데반 집사가 분노유발자에요. 예수님의 상황이 예수님으로 종결된 게 아니고 성령을 통해서 그 불똥이 계속 번지는 거예요. 정월대보름에 들판에서 불놀이하다가 잘못하게 되면 불똥이 잔디밭에 여기 퍼지다가 저기 퍼지죠.

성령께서 우리가 아니고 우리는 그렇게 행할 줄 모르고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임해버려요. 그러면 사도 생각과 똑같은 동일한 고백을 계속 반복시키는데 뭐냐 하면, 우리가 사람 말 듣는 것보다 하나님 말씀 듣는 게 옳다는 말을 계속 내뱉게 돼있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첫째 시간은 이것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듣는 것이 옳다. 이것만 있는 게 아니에요. 이것만 있으면 아무 이의 없지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인하여 필연적인 결과가 뭐냐? 누구의 말을 안 듣는다? 시체의 말, 죽어 지옥 가는 인간의 말을 나는 듣지 않음을 겸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람 말 안 듣는 것 떼고 이야기하면 아무 핍박 없지요. 공손하게 조용하게 살 수 있어요. 그러나 여기에 무슨 이야기가 반드시 들어갑니까? 나는 사람의 말, 나를 위해서 예수 믿고, 나를 위해서 하나님 믿는다는 그 말을 일체 듣지 않는다. 사도가 이렇게 하니까 사도가 그 시대에서 분란의 중심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또다시 사도를 통해서 불이 자꾸 퍼지듯이 계속 퍼져나가고 오늘날 이 세대도 마찬가지입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19.♡.174.196) 20-07-15 16:00 
20200713b 부산강의 : [시편]30(19편)-침묵의 소리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19편을 1절부터 본 사람은 그 다음 구절에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죠. 율법이 나온다는 사실을 유념하는 게 좋아요. 들리지 않는 소리, 자연들은 알고 있고 인간들은 몰랐던 그 보이지 않는 소리가 구체화되는 거예요. 자연세계에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물질화 돌 판이란 걸 통해서, 율법을 통해서 구체화될 때 여기에 이런 세계로 관여한 사람이 구약에서 선지자라고 하는 겁니다.

선지자가 이 세상에 어떤 위치에 있느냐는 것은 구약보다도 신약을 찾아보면 최종성을 볼 수 있어요. 누가복음 20장 6절에 보면, 세례요한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여러분 아시는 이야기지만 읽어보겠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고 있으니까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우르르 몰려왔지요. 뭐라고 하느냐? 당신은 누구 권위로 이렇게 했느냐, 라고 했어요. 지금은 선지자가 뭐냐를 설명하는 거예요.

첫째 시간에 선지자는 이원구조에서, 이원구조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구조지요. 이원구조에서 일원구조로 바꾸는데 등장한 것이 선지자다. 그렇다면 누가복음 20장에서 뭐냐 하면, 누구 권위, 누구 권세로 이 말을 전하느냐, 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느냐 하면, 세례요한을 언급했어요. 그러면 너희한테 묻는다. 세례요한은 누구 권세로 선지자 노릇을 했느냐고 물었어요. 이제 질문한 사람이 답변할 처지가 됐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서로 의논했어요. 5절에 보면,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 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 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고 돼있어요. 그러니까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도 군중들은 무서운 모양이죠.

군중들은 그동안 뭘 믿고 있었느냐 하면, 이원구조에서 하늘에 어떤 권세가 있을 것이고 그 권세에 의해서 확실하게 우리 눈앞에 들리지 않는 소리가 들리는 소리로 등장했다고 믿고 싶은 사람이 등장했으니 세례요한이란 말이죠.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바리새인과 대제사장이 세례요한은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냥 사이비다. 우리와 같은 보통 인간이라고 했다면 민중들이 들고일어나서 그런 소리하는 바리새인이나 대제사장을 돌로 쳐서 제거해버리죠.

제거대상이 돼버리는 겁니다. 왜 제거대상이냐? 그래야 세례요한은 하늘의 권세와 우리 사이에 눈에 보이는 인물로 등장했다는 것을 믿는 안도감, 안정감을 유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딴 건 욕해도 우리교회 목사 욕은 하지 말라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 목사 욕해버리면 자기는 눈에 보이는 사람을 믿고 싶은데 그게 안 보이면, 안 보이는데 어떻게 예수를 믿어? 그들로서는 자기 믿음이 중간에 끊어졌다고 생각하는 거죠.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세례요한을 끄집어낸 이유가, 세례요한에 두 가지 기능이 있어요. 하나는 눈에 보이는 식이다. 이건 구약식이에요. 구약의 선지자 식이에요. 눈에 보이는 식. 구약사람들은 시간성을 믿거든요. 언젠가 선지자는 온다. 언젠가는 엘리야가 올 것이다. 왔다면 그들은 세상의 모든 근심걱정은 잊을 것이다. 왜? 실제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의 증거를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반가운 거죠. 사실은 그들이 다 자기를 위해서 그런 일 하지만.

두 번째는 세례요한이 도중에 끊어졌다는 것, 나중에 죽게 된다는 거예요. 이게 난감하지요. 왜냐하면 마지막 선지자 같으면 끊어지면 안 돼요. 끊어질 경우는 있어요. 언제냐? 선지자가 바턴을 누구한테 넘기느냐 하면, 진짜 선지자 시대를 끝내고 마지막 최종 식이 뭐냐? 선지자가 아니고 메시아 시대가 오게 되면 더 이상 선지자가 필요가 없지요. 그냥 소개만하다가 마지막 진짜 본래의 분이 등장한다면 하나님이 오신다면 더 이상 선지자는 불필요하다 이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선 눈에 보이는 구약의 시대다. 두 번째는 예수님 본인이 바로 메시아란 사실을 세례요한이 끊어짐으로써 자기는 바턴을 예수님에게 이어졌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알려봤자 그들이 믿습니까? 안 믿지요. 그래서 누가복음 20장 9절부터 비유를 할 때 어떤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한테 세를 줬다는 비유가 나오는 거예요. 선지자를 보내고 죽이고 선지자를 보내고 죽이고. 마지막엔 선지자를 더 이상 안 보내고 아들을 보내니까 사람들의 아들마저 죽여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너희들이 선지자를 죽였다는 거예요. 선지자를 죽여도 하나님께선 꾸준하게 죽여도 또 보내고 죽여도 또 보냈다. 그건 무슨 의미냐 하면, 인간의 세계에서 눈에 보이는 대로 믿는 인간들 또는 자기를 위해서 사는 인간들은 결단코 메시아를 알아 볼 수 없기에 오는 선지자를 전부 다 죽여 버린 거예요. 내가 내 식대로 해서 천국 간다는 것이 성립되지 않다는 것, 나를 위해서가 유지되는 한 하나님 나라에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분명히 언급해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아시고 다시 시편 19편 돌아가 봅시다. 첫째 시간에 한 것을 잠간 언급해보면, 언어가 있다. 언어 이전에 소리가 있지요. 들리는 소리. 소리와 언어는 창세기 11장에 의하면 이것이 결집을 낳습니다. 정신 통일이죠. 군에서 조교나 지휘관들이 이야기할 때 소리 없이 언어 없이 하면 군대로 하나로 돌아갑니까? 아니죠. 자꾸 고함지르죠. 명령하잖아요. “똑바로 해!” 이런 식으로 하지요.

소릴 외치고 소리가 안 되면 또 문자를 보내서 상병, 이병 작대기, 그게 다 언어거든요. 언어를 붙이고 계급장에 유니폼 입히고 정신 통일하는 거예요. 정신 통일하면서 인간을 위해서 모은 걸 법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법의 그물망으로 짜여있습니다. 좀 더 이야기해볼까요.

나는 무엇이냐? 법으로만 설명이 돼요. 나는 본이 어디고, 출신이 어디고. 그게 전부 다 법이에요. 족보, 법. 나는 어느 학교 출신이고, 전부 다 나라는 것은 법으로만 설명이 돼있어요. 나는 천사 출신이고. 이러면 안 돼요. 법은 인간의 소리와 언어로 설명이 돼야 돼요. 모든 게. 법은 쪼개면 언어가 되고 언어는 다른 언어로 끊임없이 교환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게 뭔 뜻인데?” “좋아한다는 뜻이야.” “좋아하는 게 뭔데?” “나, 너 없이는 못 산다는 뜻이야.” “그게 무슨 뜻인데?” 나중에 말 재료 끝나면, “그냥 사랑한다는 말이야.” “그게 뭔데, 그래?” 계속 설화하고 반복하고 평생을 이렇게 사는 거예요. 계속 자기 자신을 표현할 때는 언어와 법으로만 표현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인간세계는 법으로만 하기 때문에 국가의 엘리트들은 뭘 전공한 사람들입니까? 법 전공자지요. 사법고시 출신. 뭘 알아야지요. 조훈현이 같은 바둑 두던 사람은 국회의원 못하지요. 그리고 이주일, 국회의원 못합니다. 국회에서 하는 일은 법을 입안하는 거예요. 국민들의 뜻을 법으로 만들어서 입안해서 다음 세대도 계속 법으로 유지하는 그 일을 하는 게 국회의 일이란 말이죠.

행정부는 법을 만들 자격이 없고 만들어진 법을 시행하는 그 권한이 행정부고, 국회는 없는 법을 새로 만드는 거예요. 민식이 법인가 그런 것 있잖아요. 있는데 기존의 법을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인간세계가 이런 세계란 말이죠. 정신을 통일, 이게 중요하죠. 이렇게 법으로 하게 되면 정신이 통일되고 정신을 통일하는데 이바지하기 위한 바로 이 땅에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겁니다.

인간의 생각은 기존의 조직체에 이바지하는 것. 저는 오늘 제목을 이렇게 하겠습니다. ‘규모체’ 이런 단어가 없는데 제가 만들었어요. 인간은 규모를 전제로 해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겁니다. 규모로 만들어낸 어떤 체, 눈에 보이는 형식. 이게 말이 안 되면 제목 안 할게요. 자꾸 규모를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은 어디로 도망가느냐 하면, 규모 있는 자기만의 아지트 쪽으로 신속하게 도망을 쳐버려요. 이것만큼은 내가 무너지면 안 된다, 훼손되면 안 된다. 그래서 규모체 안에서는 철저하게 나를 위해서만 통용되는 거예요.

어제 낮 설교에 방주이야기 들었습니까? 제가 뭐라 했느냐 하면, 방주에서는 이렇게 사시는 겁니다. 방주에서는 어떻게 산다고요. 흠 없는 제물의 죽음에 동참됐다는 그 자세로 사시는 것이 바로 방주 안의 세계, 신약에 보면 예수 안의 세계입니다. 홀로가 아니죠. 내 규모체가 아니죠. 나를 위함이 아니고 나를 위해서 죽었다가 사신 자를 위해서 살 게 함이라. 고린도후서 5장 15절.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그 규모란 말이죠.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은 자기 규모로 세상을 살면서 이 세상에 있으면서 나를 나답게 만드는 그걸 꼭 쥐고 있어요. 마치 재래시장에 할머니들이 잔돈 바꾸려면 옛날 바지에 보면 안 주머니 있잖아요. 속주머니에서 온갖 지폐들 다 끄집어내듯이 자기 안 쪽에 깊숙이 감춘 뭐가 있어요. 예수고 하나님이고 이것만큼은 빼앗기면 진짜 자실한다는 정도로 뭐가 있어요. 그게 나의 규모체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시편 19편에서 어떤 소리입니까? 소리가 아니고 들리지 않는 소리지요. 소리와 언어에서 이 세계로 들어오려면 정신통일, 결집이 풀어 해체돼야 돼요. 그러나 이것은 애굽 같아서 해체될 여지를 보이질 않습니다. 오히려 핍박을 하게 되면 바로 왕은 더 강력하게 자기 노예들, 히브리인들은 더 압박을 하게 돼있어요.

그래서 현재 우리가 이 세계, 국가라는 규모의 일원으로 사는 삶에서 들리지 않는 소리까지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한데 아까 믿음, 행함 말고 반대편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함께 있음이죠. 정말 중요한 건데 믿음 생각하지 말고 함께 있음을 생각하면 되는 거예요. 믿음을 생각하다 나중에 치매 걸리면 본인이 본인 발등 찍어요. “그래 나 지옥 가. 이게 믿음도 없어.”

믿음이라 하는 것은 행함이냐, 믿음이냐 할 때 믿음이고 진짜 본질은 뭐냐? 함께 있는 거예요. 죽어도 주께서 죽이시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굽을 나올 때 믿음으로 나온 게 아닙니다.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함께 있음을 언급하는 거예요.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을 뭐라 했습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했잖아요. 거의 미친 거죠.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

여기서 길게 하면 논리가 복잡하니까 간단하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이 은 나팔 어디서 부는지 아실 거예요. 여리고 성 무너질 때 빰빠밤빠 불었지요. 그리고 기드온이 전쟁할 나팔 불었지요. 자, 나팔은 뭐냐 하면, 이미 빠져나왔다는 상황, 이원구조에서 함께 있으니까 이 안에서 일원구조가 돼요. 이 나팔을 승리의 나팔이라 해요. 승리할 것을 기대한 나팔이 아니고 승리했음을 모든 것이 끝났음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땅땅땅, 합격 종이에요.

가둬놓고 지들끼리 격투기하는 것 있잖아요. 격투기하다 얻어맞고 케이오 되고도 씩씩거리면서 달려드는 사람 있어요. 그때는 심판 쪽에서 빨리 땡땡땡 쳐요. 끝났어, 끝났어. 달려들지 마. 그렇게 은 나팔은 이미 끝난 거예요. 여리고 성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은 나팔을 불어버린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은 나팔 부는 의미대로 실행될 수밖에 없어요. 다 이루었다. 끝났다. 게임오버. 이 은 나팔이 바로 들리지 않는 소리에요. 들리는 소리 보이는 언어에서는 감히 들리지 않는 소리가 은 나팔 승리의 소리에요. 이게 최종성입니다. 그것을 바로 구약 때부터 누가 보여주는가? 바로 선지자들이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 본문을 다윗의 시라 했는데 다윗은 왕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왕은 표현이고 뒤에는 선지자 노릇을 하고 있는 겁니다. 다윗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요. 다윗이 승리의 소리를 어디서 끄집어내느냐? 대자연에서 끄집어내는 겁니다. 왜 끄집어내느냐 하면, 대자연은 이원구조가 아니고 일원구조기 때문에. 코스모스나 사슴이나 이 대자연은, 마태복음 6장에 나오듯이 참새나 들풀이나 있는 그대로에요.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참새나 들풀은 하나님의 장갑이라고 볼 수 있어요. 아까 장갑이라고 했잖아요. 있는 그대로, 살려주면 살려주는 그대로 먹이시면 먹이시는 그대로에요. 그 이야기를 하면서 너희들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내일까지 어떻게 살까, 그것도 염려할 것 없다. 마치 뭐와 같아라? 내일 베이는 들풀과 같아야 되고 그 다음에 창고도 없이 아무 대책도 없이(같은 말이에요) 하루치 양식 먹는 참새와도 같아라. 주님 말씀입니다. 이것은 물론 예수님도 그 식대로 살아가게 되지요.

은 나팔 나왔으니까 계속 이어보겠습니다. 은 나팔은 승리의 나팔이라 했어요. 이미 승리했다는 거예요. (오늘 제목을 ‘은 나팔’로 할까) 승리의 나팔이란 어떤 상황이냐 하면, 이게 전쟁할 때에요. 사도 바울이 말하는 대로 이미 성도는 영적 전쟁 속에 있다. 아까 베드로도 이야기했지요. 내가 하나님 말씀 듣는 것과 사람의 말을 듣는 것과 어느 것이 옳은가를 분간하라.

그러면 그냥 하나님 말씀 듣는다고 하면 아무 문제없는데 갑자기 여기서 승리의 하나님 되려면 반드시 패배하는 쪽이 짝을 이뤄야 되지요. 사람의 생각=패배자로 보는 겁니다. 그럼 사람의 세계에서 가만있겠습니까? 베드로 죽이려고 잡아넣었잖아요. 그랬는데 천사가 또 열어주네. 그런다고 베드로가 이 땅에 오래 사는 건 아니고요. 살려줄 때까지만 사는 거예요.

성경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은 어떤 인간도 자력으로 주의 나라에 간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인간에겐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인간도 구원받을 없다, 라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 다음 구절이 나와요. 율법의 기능 때문에. 7절에, 여호와 율법은 (   )다. 여기서 인간이 지킬 만하다. 인간이 지키면 천국 갈 수 있다. 이런 내용이 나오는 게 아니고 율법이 갖고 있는 양보가 안 되는 속성을 언급해요.

7절에 양보가 안 되는 속성이 뭐라고 돼있습니까?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소성한다는 것은 이미 죽어있다는 것이고, 눈을 밝게 한다는 것은 눈이 어둡다는 이야기고, 지혜롭다는 것은 어리석다는 이야기거든요. 시편에 나오는 대로 전부다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전쟁이 성사돼야 되고 전쟁에서는 승리가 돼야 되고 승리의 나팔을 불어야 되는 그 내용이 어디 안에 있다는 말입니까? 율법 안에 있다는 거예요. 율법이 최종성이라 한다면, 최종성에서 거꾸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최종성에서 과정성이 나오지요. 최종성에 이를 때까지 어떤 과정을 밟느냐 하는 겁니다.

그럼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서 자연은 뭘 알고 있다? 자연이 뭘 아는 것보다도 율법이 그 완성을 향하여 가는데 보조역할 아주 자연은 아무 고민거리 없이 완벽하게 지금 참여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자연세계가 갖고 있는 여유로움, 편안함, 고민 없음, 염려 없음,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할 정도로 아무 걱정 없음이에요. 왜? 주께서 말씀대로 이루는 그 일에 그들은 말려 들어가면 되니까요. 코로나가 오든 뭐가 오든 그냥 말려 들어가면 돼요.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율법의 완성은 어디서 어디까지 과정이냐 하면, 죽어야 되는데, 지옥이죠. 죽음에서 생명을 얻는 거죠. 아까 문명화된 세계에서는 문명화 때문에 생명이 없지요. 이 땅에서는 생명이 없는 거예요. 살다가 구십 넘어 죽는 것은 그건 목숨이에요. 그건 목숨이지 생명이 아니에요. 인간 목숨이지 주님의 목숨이 아니란 말이죠.

인간 목숨과 무슨 목숨을 바꾸려고 주님께서 시도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과 인간 목숨을 바꾸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내 피와 내 살을 언급하신 거예요. 네 살, 네 피는 더러워서 안 받는 거예요. 천국에서 안 받아요. 안 받는 걸 굳이 이어본들 인생 참, 진짜 아무리 살아도 소용없는 헛짓하고 살은 거예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꿈속에 살은 겁니다.

들리지 않는 소리가 기존에 있는 인간세계, 언어와 법으로 된 세계로부터 주께서는 끊어내서 탈출을 시키겠다는 거예요. 가정에서의 탈출, 국가에서의 탈출, 어떠한 형편에서의 탈출, 어떤 교회 형편에서의 탈출. 이것이 바로 다 이루었다는 율법의 완성으로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승리했음을 좋아하지 말고 그 과정에 참여되고 있음을 감사히 여겨야지요.

그러면 이제부터는 쉬운 겁니다.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율법에서 사랑으로 그 과정이 어떤 과정이냐? 요한일서에 나오는 사도 요한이 이야기한 걸 적습니다. 사랑에는 정죄함이 없나니, 또는 로마서에 있잖아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뭐가 없나니? 정죄함이 없나니. 이건 무엇을 주목하라는 거예요? 정죄함이 어디서부터 주어지는가, 누가 정죄함으로 누가 함부로 최종적으로 우리를 지적할 수 있는가? 우리는 정죄함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러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거예요.

어제 낮 설교처럼 우리가 태어난 목숨은 어디 가는 목숨이다? 지옥 가기 위한 목숨이죠. 먹고 마시고 뭘 하든 방향성이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목숨이에요. 이 목숨을 우리 힘으로 목숨 자체로 방향을 돌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오느냐 하면, 사랑이 오거든요. 이 사랑에 대해서 로마서 13장의 말씀처럼, 사랑은 모든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율법을 이룰 때 하나님의 의가 주어지는 겁니다. 의롭지 않은 우리를 주께서, 말 잘해야 돼요. 의롭지 않은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롭지 않은 우리를 예수님의 의를 드러내가 위해서 주의 일에 참여시킨 겁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하나님의 의 되게 하는 거예요. 안 되고 싶어도 우리가 고사하고 사양해도 안 돼요.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오는 자기 목적을 우리가 거부한다고 해서 중간에 실망해서 그냥 가는 법이 없어요. 주님은 자기 목적을 기어이 우리 평생을 통해서 이뤄지게 합니다. 방법은 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죄 짓게 하는 방법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는 방법이에요. 이런 말도 참 가려서 해야 되니 어려워요. 예수 믿으니까 죄 짓자는 게 아니라 죄 아닌 것도 죄로 드러나게 하신다니까요. 우리로 하여금.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간음 안 해도 마음속으로 간음하면 이미 무슨 죄다? 간음할 뻔한 죄가 아니고 간음자에요. 그냥 간음자라고요. 살인 안 해도, 박원순이 죽어 버려라, 이미 이것은, 분명히 합시다. 박원순이 죽어 버려라. 여러분, 자살한 겁니까, 자살 당한 겁니까? 이게 중요한 거예요. ➀자살했다. ➁자살 당했다. 이 ➁번이 모순된다고. 자살에서 스스로 자(自)에요. 스스로 죽는데 당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누가 떠밀 때 당한다는 거예요.

자살 당했다는 말은 고소한 여자, 나와. 죽여 버린다고 할 때 이렇게 되는 거예요. 박원순을 고소한 사람을 내 손으로 조지겠다고 할 때는 ➁번이 되는 거예요. 박원순이 자살하고 싶은 게 아니고 고소당해서 자살했기 때문에 사실은 자살한 것이 아니고 자살 당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죄를 당한 거예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자꾸 나를 위해서라는 최종성을 가져가는 그러한 품성을 지니고 태어났어요. 이 땅에. 예수를 믿던 하나님을 믿던 결국은 뭐냐? 나를 위해서, 에요. 그래서 내가 나를 포기를 못해요. 나를 위해서 하나님 믿는 것을 구약에서 두 자로 ‘우상’이라 하거든요. 예수도 우상 되고 여호와도 우상 돼버리고 뭘 시작해도 전부 우상 돼버렸어요.

이게 그냥 사상적으로만 꿍하고 있는 게 아니고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나의 규모체, 내 아지트는 부서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나를 위해서가 모든 행동과 몸짓과 생각과 발걸음과 모든 자리에서 대화 가운데서 그게 여지없이 다 노출돼요. 속 시원하게 말씀드릴까요? 이겁니다. 이리저리 따져보면 이거에요.

사는 게 죄에요. 아이고, 인간아. 왜 태어났나. 그냥 사는 게 죄에요. 살아 있는 아버지가 죄고, 살아 있는 어머니가 죄고, 나도 마찬가지고, 살아 있는 자식이 죄고, 그냥 살아 있는 게 죄가 돼요. 그런데 이것 알 때까지 주께서 얼마나 우리를 위해서 애썼습니까. 우리가 이 고백을 할 때까지 누가 이걸 알리요. 사는 게 죄고 내가 죄인입니다. 이걸 누가 알겠습니까? 아무도 몰라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주님과 함께 있는 거예요. (오늘 제목이다. 이게 제일 낫다. 벌써 세 번째^^) 주님과 함께 있는 이런 세계, 하나의 세계, 둘의 세계가 아니고 죽어서 천당 가는 게 아니고 이미 천국이에요. 우리는 이미 천국의 맛을 보여줘야 된다고요.

우리 집에 손님 왔는데 둘 다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만약에 갈치가 갈치를 요리해서 갈치를 낸다면 이게 말이 안 되죠. 사람이 갈치를 요리해서 사람이 먹어야 되지 않습니까. 레위기에 보면 성도는 하나님의 양식입니다. 맞지요. 내가 흠향한다고 했으니까. 양식을 갈치 요리로 바꿉시다. 갈치가 갈치를 요리해서 갈치를 내오면 되겠습니까? 아니죠.

갈치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가야 되지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요리해서 스스로 만족스럽게 먹을 수 있는 양식을 본인 손에서 만드시는 거예요. 이 이야기가 되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에요. 레위기에서 제사에 나오는 양식들이 누가 잡수시려는 거예요? 먼저 하나님부터 잡숫고 만족하다는 한도 내에서 떡과 포도주를 나눠주는 거예요. 이걸 화목제물이라 하는 거예요. 내 기분 좋음에 같이 나눠먹어라. 그래서 유월절 어린양 때 주께서 떡을 나눠주고 살을 나눠주고 이게 새 언약, 마지막 계약이에요.

주님과 함께 있을 때 우리가 죄인 되었다 하는데 여러분, 그것에 대해서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주님은 우리보다 더 큰 죄인 되었어요. 물론 주님의 죄인 된 그 재료는 어디서 가져왔습니까? 우리가 죄인인 걸 미처 몰랐을 때 내 죄를 미리 가져가서 우리와 동행을 하시는 거예요. 이게 과정인데요.

십자가가 사랑이죠. 율법에서 다 이루었다가 되잖아요. 온전하고. 그럼 율법에서 뭐가 나온다? 과정이 나오지요. 그러면 신약 때는 십자가에서 뭐가 나와요? 십자가만이 영생이 될 수밖에 없는 과정이 나오겠지요. 이 과정이 하나님이 성령 주셔서 우릴 구원하려 온 게 아니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란 걸 알려주기 위해서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과정 속에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참여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구약적으로 보면 왕이잖아요. 우리는 뭐가 되느냐? 그 왕의 백성이 되지요. 그러면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 원리가 딱 맞는 거예요. 왕이 왕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왕의 백성으로 기꺼이 감수하면 되는 거예요. 이 논리에 따르면 우리가 죄인 된 것은 기꺼이 감수 정도가 아니고 감사해야 될 찬양해야 될 일이 되는 겁니다. 죄인으로 드러난 것을.

그러면 죄 지어야 죄인으로 드러나지 않습니까, 하는데 가만있어 보세요. 코로나 옵니다. 가만있어 보면 호텔에서 하겠다, 못하겠다, 오고 하여튼 간에 가만있으면 교회 물새고요. 왜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되느냐, 라고 광야에서 백성들이 한 역할이 뭐였습니까? 하나님께서 광야를 지나가도록 한 역할이 뭡니까? 원망하라는 거예요.

왜 원망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이용해서 애굽에서 살던 식대로 짜장면도 먹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광야에는 중국집이 없어요. 애굽에 살던 그 본성 그대로 광야를 통과케 하는 겁니다. 그게 하나의 과정이에요. 통과하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그러니까 너는 네 힘으로 함께 있음이 아니고 네 힘으로 뚜벅뚜벅 계단 밟아서 천국 못 간다. 약속의 땅에 못 간다. 갈 수 없다는 겁니다.

계단 말로 엘리베이터, 계단 말고 함께 이 광야를 지날 때 이 세상이 힘들고 지옥 같지만 주님이 함께 의도적으로 하게 하신 삶의 환경입니다. 여기서 함께함이 아니고 단독으로 내가 한다는 일체 성립되지 않습니다. 좀 더 나가보겠습니다.

율법 나왔으니까 이제부터 별로 어려운 것 없어요. 율법이 나왔다. 율법을 지키는 방법, 하나는 인간이 지킨다. 이거는 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서기관들, 그 당시 유대인들이 다 보여준 거죠. 두 번째는 반대지요. 인간이 못 지킨다. 그러면 율법을 다른 말로 바꾸겠습니다. 율법이 언약이지요. 모세언약. 언약을 인간이 지킨다가 되면 반대, 공격하는 반(反)-언약이 되죠. 두 번째는 우리가 못한다. 이것은 언약 그대로지요. 친-언약, 언약 친화적이죠. 이 둘이 있어줘야 과정이 성립돼요.

그럼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저쪽은 자기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고 교회 안 다녀도 마찬가지고. 시장도 마찬가지고 해운대 아파트도 마찬가지로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겠지요. 그런데 친-언약을 내가 못하지요. 왜 못하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합니까? 율법에 의하면 죄인이기 때문에. 나 죄인이라서 아무리 해도 율법 못 지켜. 율법은 완전해, 온전해, 완벽해. 그러나 이건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어.

함께 있음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나는 못합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못합니다, 플러스 다 누가 하셨습니다? 주께서 하셨습니다. 나는 못합니다. 주께서 하셨습니다. 자기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고. 자기 부인하게 되면 우리는 주저앉아야 돼요. 천당 못 간다고 주저앉아야 되는데 주께서 주의 과정에 참여된 사람은 주저앉지 말고 자기 십자가 지고 그 다음에 누굴 따라오라? 나를 주님을 따라오란 말이죠.

그전까지는 주님이 함께 없으면 우리는 못하나 잘하나 누구만 쳐다보고 살아야 돼요? 나만 쳐다보고 잘 되면 기고만장해서 헌금도 하고 그러다 좀 못 되면 주저앉아서 교회 안 나가고 그래요. 자기기분에 죽고 자기기분에 사는 겁니다. 특히 이 죄인 됨을 아는 사람들에 있어서 이 세상의 이원구조는 몽땅 다 뭐냐? 시시하기 짝이 없는 고민거리 대상도 안 되는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아무것도.

내가 교도소 갔다. 이게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심지어 바울과 실라는 교도소 가서 그동안 못 잔 잠을 다 잔다고 쿨쿨 자버렸어요. 얼마나 잠을 잤으면 그만 자라고 깨웠어요. 진짜 바울과 실라인지 베드로인지 구분 안 되는데 대충 사도행전 16장인데 이제는 나도 죄인 되어 하나도 모르겠어요. 사도행전 12장 6절에 베드로가 안 깨웠으면 그냥 잘 뻔했어요. 옆구리를 쳐서 베드로여 일어나라고 했어요.

이 말은 베드로는 집에 자나 교도소 가나 자기는 집에서 자는 것도 시시하지만 차이가 없다는 뜻이에요. 얼마나 자기를 생각 안 했으면 내가 지금 어느 공간에 어느 시간에 수명은 몇 년 남았는지 그런 것조차 생각 안 한다니까요. 지금 이 순간 주께서 하신 일에 과정으로 참여한 거예요. 나는 옥에 갇혔으면 옥에 갇힐만해서 갇힌 거예요. 왜? 그동안 집에 있는 것도 잘나서 집에 있는 게 아니고 주께서 봐줘서 집에 있었던 거니까.

교도소에 있으나 사도 바울처럼 폭풍 속에 있으나 거기서 풀려나나 그것마저도 폭풍 속에서도 주께서 구원을 하시니까 사용하시니까 하나의 들풀, 하나의 참새로 그렇게 자기 자신을 간주하시면 전혀 어려울 게 없지요. 다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대해서 휘둘리지 말라는 거예요. 이 세상의 변화에 대해서. 우리는 예상 못한 거예요. 코로나 오라고 기도한 적도 없어요. 세상은 이미 다 이룬 거예요.

예수님의 피가 왜 생명인지, 예수님께서 왜 이 땅을 다녀갔는지 그거는 과학적인 세상 사람들은 모르는 일이에요. 하지만 우리는 이미 성령 받았기 때문에 꿈속에서 깨어났기 때문에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성령 받아서 꿈속에서 깨어난 사람이 할 수 있는 걸 바로 예언이라 합니다.

꿈속에서 깨어났다. 율법의 완성, 사랑이죠. 사랑을 이렇게 봅시다. 최종성. 이미 최종적으로 다 이루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우리가 죽어도 되지만 살려둔 이유는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 십자가 증인하라고 계속해서 우리 뜻이 아니고 주의 뜻대로 하루하루 살려내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내일 불쏘시개로 넘어가는 들풀도 오늘은 들풀을 살려내시는 것처럼.

참새가 수명이 천년만년이 아니잖아요. 굶어죽더라도 굶어죽을 때까지 주께서 친히 입히시고 먹이시거늘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다시 말해서 우리 속에 뭐가 있다? 주의 언약 완성이 들어있다, 라는 자들만 이 소리를 이 성경말씀을 들으라, 이 말입니다. 주께서. 왜냐? 보통 사람은 안 들리니까. 보통 사람은 시편 19편은 들리지 않는 소리니까.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들리지 않는 소리가 인물화 됐다 했지요. 예수님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상상한 거예요. 자기가 생각한 것, 들리는 소리와 들리는 언어에서 파악된 그 메시아인 줄 알고 오해를 한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가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렇게 가시면 우리는 섭섭하지요, 이렇게 나온 거예요. 주께서 하는 말이, 사탄아 물러가라, 했잖아요.

그러니 이 세상은 미련 둘 이유 없어요. 끝으로 미련 둘 이유 없는데 왜 미련 두느냐? 반-언약과 언약을 나누어서 제가 설명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미련 두는 이유는, 지금 참 언약 말고 가짜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인간은 자아를 어떻게 구성하느냐 하면, 남과의 대조와 비교를 통해서 자아를 형성합니다. 비교와 대조를 통해서 자아를 구성하거든요.

내가 행복을 느낀다, 내가 불행을 느낀다 할 때는 그냥 행복과 불행을 느끼는 게 아니에요. 티비에 나오거나 주변의 친구를 만날 때 그쪽이 이혼하고 망하고 빌어먹을 때 우리는 잠시 행복감이 밀려옵니다. 술 먹는 남편이지만 같이 사는 것도 저쪽을 보니까 괜찮네. 그냥 봐주자. 갑자기 위로가 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부도나서 집 한 채 없고 집도 물새는 기생충에 나오는 지하실에 산다 하면 그래도 우리는 2층 빌라에 살잖아. 왜 이렇게 행복해. 갑자기 행복해지는 거예요. 어떤 목사는 목회한지 15년 넘었는데 목사가 바람났다는 소리 듣고 교인들 한 명도 없다. 우리교회 부흥됐네. 갑자기 기분이 확 좋지요. 이 땅에 사는 것은 전부 대조와 비교가 되는 거예요. 이걸 좀 더 설명하게 되면, 어제 오후 설교에서 설명했습니다.

두 개의 ktx가 서로 스쳐지나갈 때 내가 보는 저쪽의 창가에 앉은 그 사람 눈 속에 내가 그 사람을 보고 있는 눈동자를 내가 다시 볼 때 우리는 섬뜩함을 느껴요. 그게 뭔 뜻이냐 하면, 인간은 내 모습이 절대로 외부에 안 비추는 것으로 우리는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한 거예요. 나는 너를 봐도 너는 나에 대해서 봐도 나에 대해서 모를 거야. 신난다. 이게 우리의 본심이거든요. 니가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알아.

그런데 그 사람 속에 내 모습이 박혀있다면 이건 이야기가 다릅니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그 사람 속에 있는 내 모습이 박혀있을 때 그 사람을 포기를 못합니다. 내가 준 정성, 내가 그 사람을 위해서 했던 모든 귀한 금목걸이부터 해서 그 사람 하나 건지는 것보다 내가 그 사람에 대해서 애달아하고 그리워하고 그 사람 때문에 잠 못 잤던 모든 보상이 그 사람이 나를 떠나지 않고 곁에 있음으로서 내가 위로받고 보상받는다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아니라는 눈을 하지 마세요. 진짜입니다.

자식의 육체와 내 육체가 다르지요. 그런데 왜 나 아픈 것은 참아도 내 자식 아픈 것은 못 참습니까? 나 아프면 기도 안 해요. 그런데 갑자기 누가 아프면? 자식 아프면 하지 말라는 기도를, 말리지 마. 차라리 내가 쟤 대신 죽을게. 왜 그런 짓합니까? 나의 진짜 내 모습은 내가 좋아하는 그 모습이 내 모습이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나를 버려도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은 버릴 수 없어요.

왜? 자식은 나보다 더 아끼고 싶은 대상이니까. 이게 인간입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러운 걸 따먹었잖아요. 그때부터 인간은 자기가 탐스럽기 짝이 없고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거예요. 마귀가 떨어져있는 선악과를 한데 엎어버린 거예요. 너는 때려죽어도 그 사람한테 못 벗어난다. 이게 마귀가 그렇게 만든 겁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십자가로 왔지요. 비참하지요. 십자가라 너무 추상적입니까? 그럼 세리와 창기, 강도를 보세요. 마찬가지에요. 내가 절대로 되기 싫은 그런 모습으로 왔단 말이죠. 허무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내 요소가 없단 말이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는 주님 자신의 것이 내 안에 있어요. 나를 버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무슨 시선의 싸움이냐? 내가 나를 지키는 시선과 주님이 나를 포기 못하겠다는 그 시선과 늘 우리 안에 싸우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반-언약, 나는 내 식대로 살렵니다. 아니야. 너는 이미 다 이루었어. 너는 내가 내 사랑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 네 마음대로 죽을 수 없어. 내가 살라고 할 때까지 살아.

설마 네가 비참하게 되더라도 네가 그걸 시시하게 봐라. 왜? 내가 널 사랑한다는 게 중요한 문제지 네가 가진 재산 다 날이고 몸 아프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 몸 아파도 괜찮아. 재산 없어도 괜찮아. 천당 합격이야. 거지 나사로 봐. 내가 왜 그 이야기했겠는가, 탕자이야기 왜 했겠는가, 불의한 청지기 왜 했겠는가. 그들도 넉넉하게 구원받는다면 네가 네 처지에 대해서 비관하지 마. 그건 네가 보는 네 시선이고 가짜 우상을 인형을 그동안 너라고 착각한 거야.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나를 보는 시선, 이것 늙어가면서 미련두지 마시고 남과 대조하지 마세요. 세상은 다 시시한 일이에요. 다 시시합니다. 마음 둘 가치도 없는 거예요. 진지한 것은 뭐냐? 시시한 걸 발라내고 그 안에 십자가 피 주신 예수님과 함께 있음, 이게 중요한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말씀 전할 수 있도록 시편을 통해서 모일 수 있도록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 주께서 하신 이야기가 얼마나 우리와 차이 나는지를 깨닫는 가운데 도리어 없던 기쁨과 감사가 계속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오늘뿐만 아니고 매일같이 새로운 것에 대한 감사가 이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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